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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491 법원주림(法苑珠林) 48권

by Kay/케이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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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48

 

법원주림 제48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48.계욱편(誡勗篇)[여기에는 6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계마부(誡馬部) 계학부(誡學部)
계도부(誡盜部) 계죄부(誡罪部) 잡계부(雜誡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형상을 세워 진체(眞體)를 나타내는 것은 세속을 교화하는 떳떳한 가르침이요, 손가락에 의탁해 달을 보이는 것은 도(道)로 나오는 떳떳한 법이다. 다만 허망한 생각과 전도된 감정을, 흐름을 따르고 습관을 굳혔으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이 업을 따라 떠돌아다닐 뿐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선을 행하여 위로 오르는 것은 마치 손톱의 흙과 같고 악을 행하여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마치 대지의 티끌과 같다”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6적(賊)이 함께 닥치고 10사(使)가 번갈아 묶기 때문이다. 혹은 측간에 가서 병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견주고, 혹은 위태로운 성(城)에서 질그릇을 때우는 것에 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쓰러질 썩은 집에 3화(火)가 항상 탈 때에 빈 마을로 도망가 숨으면 5도(刀)는 항상 쫓아온다. 우물을 인용하는 비유는 몸이 찰나에 있음이요 푸줏간의 소와 염소는 그 목숨이 누각(漏刻)에 절박함이다. 또 기름진 뿔 속에 들어간 쥐와 같거니 마지막에 이르러 어디로 갈까? 하물며 5탁(濁)이 번갈아 날뛰고 4산(山)이 언제나 핍박하는데도 그저 태연하여 걱정할 줄 모름이겠는가?
그러므로 대성(大聖)이 교훈을 전할 때 법과 비유가 돌아가는 곳은 오직 경계하고 단속함에 있는 것이다.
심신을 끝없이 달리는 욕심을 거울삼아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허물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죽음에 다다라 눈빛이 떨어질 때 권속들이 모두 모여 얼굴을 마주 대하나 구원할 길이 없구나. 아아, 이런 고통에 속해 있거늘 어찌 스스로 경계하지 않겠는가. 내게서 생긴 허물이라 남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조그만 선이 있어서 집의 과보는 사람에 있는 것이다.
또 끼치신 법을 만나고 3보(寶)를 친히 뵈어 악도에 나는 것을 면하였으나, 마주 보아도 알 수 없나니, 이런 비통함을 본다면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2) 계마부(誡馬部)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지시(只尸)라는 조마사(調馬師)가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보니 세간 사람은 매우 경박하여 마치 염소 떼와 같습니다. 세간에서 오직 저만이 저 미쳐 날뛰는 사나운 말을 잘 길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방편으로써 잠깐 동안에 저 말들의 사나운 병을 다 나타나게 할 수도 있고 그 사나운 병을 방편으로 조복(調伏)시킬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조마사에게 말씀하셨다.
‘취락주(聚落主:조마사)야, 너는 몇 가지 방편으로 말을 조복시키느냐?’
‘세 가지 법으로 사나운 말을 조복시킵니다. 그 3법이란, 첫째는 부드러움이요, 둘째는 거칢이여, 셋째는 부드러움과 거칢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3법으로 말을 다룬다는데, 그래도 다뤄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조마사는 말하였다.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곧 죽여 버립니다. 왜냐 하면 저를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마사는 이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조어장부(調御丈夫)이십니다. 몇 가지 방편으로 장부(丈夫)를 조어(調御)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취락주(조마사)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3종의 방편으로 장부를 조어한다. 그 3종의 방편이란, 첫째는 한결같은 부드러움이요, 둘째는 한결같은 거칢이며, 셋째는 부드러움과 거칢이다.’
부처님께서 이어 취락주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첫째의 한결같은 부드러움이란, 너의 말과 같이 이것은 몸의 선행이요, 이것은 몸의 선행의 과보이며, 이것은 입과 뜻의 선행이요, 이것은 입과 뜻의 선행의 과보이다. 이것을 하늘이라 하고, 이것을 선취(善趣)의 화생(化生)이라 하며
이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이것을 부드러움이라 하느니라.
둘째의 한결같은 거칢이란, 너의 말과 같이 이것은 몸의 악행이요 이것은 몸의 악행의 과보이며 이것은 입과 뜻의 악행이요, 이것은 입과 뜻의 악행의 과보이다. 이것을 지옥이라 하고 이것을 축생이라 하며 이것을 아귀라 하고, 이것을 악취(惡趣)라 하며 이것을 악취에 떨어짐이라 하나니, 이것을 여래의 거칢의 가르침이라 하느니라.
셋째의 부드러움과 거칢을 함께 함이란, 이른바 여래는 어떤 때는 몸의 선행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몸의 선행의 과보를 설명하며 어떤 때는 입과 뜻의 선행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입과 뜻의 선행의 과보를 설명한다. 또 어떤 때는 몸의 악행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몸의 악행의 과보를 설명하며 어떤 때는 입과 뜻의 악행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입과 뜻의 악행의 과보를 설명한다. 이런 것을 하늘이라 하고 이런 것을 사람이라 하며 이런 것을 지옥이라 하고 이런 것을 축생ㆍ아귀라 하며 이런 것을 악취라 하고 이런 것을 악취에 떨어짐이라 하나니, 이것을 여래의 부드러움과 거칢의 가르침이라 하느니라.’
조마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3종의 방편으로 중생을 조복할 때, 만일 조복되지 않는 중생이 있으면 그 중생은 어찌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취락주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그것을 죽여 버린다. 왜냐 하면 나를 욕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마사가 말하였다.
‘생물을 죽이면 세존의 법에서는 청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존의 법에는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살생하신다 하오니, 그 뜻은 어떠하옵니까?’
부처님께서 취락주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법은 살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래의 법에서는 3종으로 가르친다. 즉 조복되지 않는 자는,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고 그를 가르치지 않으며 훈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그의 죽음이 아니겠는가?’
조마사는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훈계하지 않으면 그는 참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모든 악업을 버리겠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거기서 떠났다.”
또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상사(象師)에게 물으셨다.
‘코끼리를 다루는 법에 몇 가지가 있느냐?’
상사는 답하였다.
‘3종이 있습니다. 그 3종이란, 첫째는 견고한 갈고리로 그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며, 둘째는 먹이를 줄여 항상 주리게 하며, 셋째는 채찍으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쇠갈기로 입에 재갈을 물리므로써 그 강한 입을 제어하고 먹이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 몸의 거칢을 제어하려 채찍과 침으로써 그 마음을 항복받습니다.”
부처님께서 거사(居士:像師)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세 가지로 모든 중생을 다루고 또 자신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른다. 첫째는 지극한 진실로써 입의 근심을 제어하고, 둘째는 인자함으로써 그 몸의 억셈을 제어하며, 셋째는 지혜로써 뜻의 어리석은 덮개를 없애는 것이니, 3법으로 일체를 제도하여 3악도를 떠나게 하느니라.”

(3) 계학부(誡學部)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한 게송 가운데서 37품(品) 및 모든 법의 이치가 나오느니라.’
가섭이 물었다.
‘그것은 어떤 게송입니까?’
그 때 존자 아난은 곧 다음 게송을 읊었다.

‘어떤 악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여라.
그 뜻을 깨끗이함,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네.

왜냐 하면 ≺어떤 악도 짓지 말라≻는 것은 계를 갖춘 청정한 행이요, ≺모든 선을 행하라≻ 한 것은 마음과 뜻이 청정함이며, ≺그 뜻을 깨끗이 함≻이란, 모든 그릇된 착각을 제거함이요,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가섭이여, 계가 청정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뜻이 청정하지 않겠습니까? 청정함이란
곧 착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착각이 없음으로써 어리석고 미혹하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37도품(道品)의 과(果)를 이루는 것이니, 그 도과를 이루는 것이 어찌 ≺모든 법≻이 아니겠습니까?’”

(4) 계도부(誡盜部)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어떤 다른 비구는 구살라국(拘薩羅國)의 어떤 숲 속에 있었다. 그 비구는 눈을 앓고 있었다. 그 스승은 ‘발담마꽃[鉢曇摩華] 향기를 맡으라’고 했다. 그 비구는 스승의 분부대로 발담마꽃이 피어 있는 못으로 가서, 그 못가의 바람받이에 앉아 바람에 불려 오는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 때 이 못을 맡아 있는 천신(天神)이 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왜 꽃을 훔치느냐? 너는 지금 향기를 훔치는 도적이다.’
그 때 비구는 다음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는 꽃을 부수거나 빼앗지 않고
멀리 앉아서 오는 향기 맡고 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찌하여 나를
향기 훔치는 도적이라 하는가?

그러자 천신은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달라거나 주지 않는 것, 갖는 것을
이 세간에서 도적이라 한다.
그런데 너는 지금 주지 않는 것
그저 마음대로 가지기만 하나니
그러므로 너를 지금 이 세상에서
향기 훔치는 진짜 도적이라 한다.

마침 그 때 어떤 사내가 그 연꽃 뿌리를 잔뜩 캐어 지고 갔다. 그래서 이 비구는 천신에게 다음 게송으로 말했다.

지금 저 사내는
이 분타리(分陀利)꽃을 꺾고
뿌리를 캐어 무겁게 지고 간다.
저이야말로 간교한 사람이다.
너는 왜 저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나를 보고 향기를 훔친다 하는가?


천신은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저 미쳐 날뛰는 간교한 사람
그는 마치 유모(乳母)의 옷과 같다.
그렇거늘 어떻게 그와 말하겠는가?
우선 참고 그대와 말하는 것이다.

가사에는 더러움 안 나타나고
검은 옷은 검어서 더럽지 않고
저 사람은 간교하고 또 흉악하여
세상 사람, 그 이와 말하지 않는다.

파리 다리가 흰 비단을 더럽히는 것처럼
밝은 것에는 조그만 허물도 잘 나타난다.
흰 마노에 먹으로 점찍은 것처럼
아무리 작은 것도 다 나타난다.

그러자 비구는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그 말이여,
그런 이치로 나를 위안시키네.
너는 언제나 이 나를 위하여
자주자주 그런 게송 말하여다오.

그 때 천신은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너에게 팔린 종이 아니요
또한 누가 나를 너에게 주지 않았나니
어찌하여 항상 너를 따라 다니면서
자주자주 그런 말을 해 달라는가?
너는 지금 스스로 알아야 하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로운 일을.

(5) 계죄부(誡罪部)
『염라왕오사경(閻羅王五使經)』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사문을 공경하지 않으며 인의(仁義)를 행하지 않고 경계(經戒)를 배우지 않으며, 다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주인은 제 행(行)을 지니고 염라왕에게 가서 그 죄악을 말하였다.
‘이 사람은 불효(不孝) 등 갖가지 죄악을 지어 복덕이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왕은 이 사람을 처벌하소서.’
염라왕은 먼저 충정(忠正)한 말로 5사(使)로 나타나 그에게 묻는다.
‘너는 보지 못하느냐? 세상 사람이 어린애일 때에는 똥오줌에 누워 있으면서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할 줄 모르며 좋고 나쁜 것도 모른다. 너는 보지 못하는가?’
그 사람이 말하였다.
‘예 보았습니다.’
왕은 또 묻는다.
‘너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사람의 신령은 행을 따르는 것이니, 죽으면 다시 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항상 선을 행하여 스스로 3업(業)을 단정히 해야 하겠거늘, 왜 방심하고 마음대로 죄를 짓는가?’
사람은 답하였다.
‘우매하여 몰랐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네가 우매하여 마음대로 악을 지은 것이요, 그것은 부모나 사장ㆍ임금ㆍ하늘ㆍ사문ㆍ도인 등의 허물이 아니다. 죄는 네가 지은 것이니 어찌 벌을 달게 받지 않겠는가? 지금 받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염라왕이 나타낸 제1의 천사(天使)이니라.
제2의 염라왕은 다시 묻는다.
‘너는 사람으로 있을 때 천사가 차례로 오는 것을 깨달았는가?’
사람은 답하였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너는 세상 사람이 늙어 머리털은 희고 이빨은 빠지며, 쇠약하고 구부러지고, 걸으며 기거할 때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을 보았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보았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너는 혼자 늙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냐? 무릇 사람이란 한번 나면 으레 늙는 법이다. 항상 선을 행하여
3업을 단정히 하며 경과 계를 받들어 행해야 하겠거늘 왜 함부로 방탕했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우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네가 우매하여 죄를 지은 것이요, 부모ㆍ임금ㆍ하늘ㆍ사문ㆍ도인 등의 허물이 아니다. 죄는 네게 있거늘 어찌 달게 받지 않겠느냐? 지금 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염라왕이 나타난 제2의 천사(天使)이니라.
제3의 염라왕이 다시 물었다.
‘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세간의 남녀들이 병을 앓아 고통을 받으면서, 앉아도 누워도 편치 않고 죽을 때가 가까웠으나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보았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너만 병을 앓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냐? 사람이란, 나면 늙고 또 병을 앓는 법이다. 몸이 건강할 때에 마땅히 힘써 선을 행하여 경과 계를 받들어 행하면서 3업을 단정히 해야 하겠거늘 왜 방탕하게 구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우매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네가 스스로 우매하여 악을 지은 것이요, 부모ㆍ임금ㆍ하늘ㆍ사문ㆍ도인 등의 허물이 아니다. 죄는 네게 있거늘 어찌 달게 받지 않겠느냐? 지금 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염라왕이 나타난 제3의 천사이다.
제4의 염라왕은 다시 묻는다.
‘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세상의 죽은 모든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 혹은 집에 간직하고 혹은 내다 버린다. 7일이 지나면 살이 허물어져 여우와 삵과 온갖 새들이 모두 가서 뜯어먹는다. 무릇 사람이란 죽으면 몸이 썩어 허물어지는 것이다. 너는 왜 보지 못했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보았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너만 혼자 죽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냐? 무릇 사람이란 나면 다 죽는 법이다. 세상에는 항상 선행을 행하여 3업을 단속하여 경과 계를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겠거늘, 왜 너는 방탕했느냐?’
사람은 답하였다.
‘우매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네가 스스로 지은 악이요, 부모ㆍ임금ㆍ하늘ㆍ사문ㆍ도인 등의 허물이 아니다. 죄는 네게 있거늘 어찌 기꺼이 받지 않겠는가? 지금 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염라왕이 나타낸 제4의 천사이니라.
제5의 염라왕은 다시 물었다.
‘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보지 않았느냐? 세간의 나쁜 사람과 악한 아들들이 관리에게 잡혀, 안죄소(案罪所)에서 벌을 주되, 혹은 손과 발을 자르고 혹은 귀와 코를 베며 혹은 그 얼굴을 태우고 머리를 달아 햇빛에 구우며 혹은 4지를 베는 등 갖가지 고통을 주지 않던가?’
사람은 답하였다.
‘그렇게 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죄를 짓고도 너만 풀려날 것이라 생각하느냐? 세간의 죄와 복이 분명한 것을 네 눈으로 보면서, 왜 선을 닦아 3업을 단속하고 경과 계를 받들어 행하지 않고 스스로 방종하는가?’
사람은 답하였다.
‘우매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네가 스스로 조심하여 정직하지 않은 것이요, 부모ㆍ임금ㆍ하늘ㆍ사문ㆍ도인 등의 허물이 아니다. 지금 이 재앙은 네가 꼭 받아야 한다.’
이것이 염라왕이 나타낸 제5의 천사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다 그 교훈을 받고는 각각 앞으로 나가 부처님께 예배하고 기뻐하며 봉행하였다.

(6) 잡계부(雜誡部)
『대법구경(大法句經)』의 게송[모두 11게(偈)이다.]

󰊱 계신(誡信)
믿음과 행이 있는 사람은
저 성인의 칭찬을 받고
무위(無爲)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일체의 결박을 잘 풀어 버린다.

이 세상의 이익에 견주면
슬기와 믿음이 등불이 된다.
이것은 최상의 재보(財寶)가 되지만
한 집의 재산이란 덧없는 것이다.

저 진실을 보려 하거든
강설하는 법을 즐겨 듣고
간탐과 질투를 버리면
이것을 일러 믿음이라 한다.

믿음이 있어 익히지 않고
바른 말 공격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물길을 줄 모르는 사람이
우물의 진흙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지혜를 배우는 현명한 사람
맑은 흐름을 즐기는 것은
우물물을 길을 줄 아는 사람이
물만 긷고 휘젓지 않음과 같다.

믿음은 남을 더럽히지 않나니
이 수레보다 더 좋은 것 없다.
큰 코끼리를 다루는 것보다
제 몸을 다루는 것이 최상이니라.

믿음의 재물과 계율의 재물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의 재물과
들음의 재물과 보시의 재물과
슬기의 재물 이것이 7재(財)이니라.
삶에 있어서 이런 7재 있으면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그는 마침내 탐욕을 부리지 않고
현명한 사람은 진리를 알리라.

󰊲 계사(誡死)
생명을 왜 덧없다 하는가.
이른바 흥쇠(興衰)의 법이기 때문이네.
대개 나서는 으레 죽는 것이라
그러므로 적멸(寂滅)이 즐거움이네.

마치 빨리 흐르는 저 강물이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도 그와 같아서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를 않네.

산다는 것은 밤이나 낮이나

제 칼로 제 목숨 깎는 것이라
그 수명이 스스로 다하는 것은
구덩이의 물을 퍼내는 것 같네.

항상하다는 것도 다 없어지고
높은 데 있는 자도 또 떨어지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네.

저 중생들은 서로 침범해
그 목숨을 스스로 죽이나니
그 행을 따라 떨어지는 곳에서
스스로 온갖 재앙을 받네.

사람이 비록 1백 세를 산다 해도
한번 죽고 나면 과거인 것을
늙었다 하여 천대받는데
거기 또 갑자기 병까지 덮치네.

오늘도 이미 저물었거니
그 따라 이 목숨 줄어드는 것
마치 쟁반물의 고기 같거니
거기에 무슨 즐거움 있으랴.

늙으면 이 몸이 쇠약해지고
또 병으로 스스로 무너지네.
몸이 무너져 썩어 버리는 것처럼
이 목숨 끝나는 것 또한 그러하네.

이 몸뚱이 어디에 쓰랴.
항상 더러운 것 흐르는 곳인 것을
거기에 또 병으로 고생하고
늙고 또 죽는 근심이 있네.

자식이 있다고 그것 믿으랴.
부모 형제도 의지할 것 아니네.
죽음의 핍박을 받을 때에는
의지할 만한 친한 것 없네.

밤이나 낮이나 늘 게으르고
늙어도 음욕을 그치지 않고
재물 두고도 보시하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지 않고
이 네 가지의 가림[蔽] 있어
스스로 속이고 침노하네.

󰊳 계살(誡殺)
인자한 이가 살생하지 않고
그 몸을 언제나 잘 단속하면
여기는 죽지 않는 곳이라
어디를 가나 근심이 없네.

살생하지 않는 인자한 사람
말을 삼가고 마음을 지키면
여기는 죽지 않는 곳이라
어디를 가나 근심이 없네.

남은 난잡해도 나는 잘 정숙하여
인자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고
성냄을 보아도 잘 참으면
이것을 일러 범행(梵行)이라 하네.

마음은 지성스럽고 행동은 조용하며
입에는 거친 말이 없으며
어디에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을 일러 범행이라 하네.

항상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깨끗하기 부처님의 가르침 같고
만족함 알고 그칠 줄 알면
이것이 곧 생사를 건너는 것이네.

어질고 착한 이를 다 사랑하고
중생들을 두루 가엾이 여기며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을 쓰면

어디를 가나 언제나 편안하네.

밤이나 낮이나 자비를 생각하고
마음에 남을 강제할 뜻이 없고
어떤 중생이고 해치지 않으면
이런 행위에는 원수가 없네.

누워도 편안하고 깨어도 편안하며
사나운 꿈을 꾸지 않으며
하늘이 보호하고 사람이 사랑하며
독을 받지 않고 흉기도 받지 않네.

물에도 또 불에도 상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이익 얻으며
죽어서 저 범천(梵天)에 올라
저절로 그 즐거움을 누리리라.

인자하여 어지러운 생각 없어라.
인자함이 최상의 행위이네.
중생들을 두루 가엾이 생각하면
그 받는 복은 한량이 없으리라.

󰊴 계의(誡意)
사나운 말로 남을 나무라며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것
이런 행동을 마구 행하면
미움과 원망이 여기서 생겨나네.

겸손하고도 또 순한 말씨로
언제나 남을 존경하면서
원한을 버리고 악을 참으면
미움과 원망이 스스로 사라지네.

대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예리한 도끼가 입 안에 생겨
그로써 도리어 제 몸을 해치나니
그것은 그 사나운 말 때문이네.

조그만 이익 위해 서로 다투면
잃은 재물을 숨기는 것 같아
거기서 다툼이 계속 일어나
그 뜻을 악으로 향하게 하네.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된다.
마음은 존귀하기도 하고 또 미천하다.
마음속에 언제나 그 악을 생각하면
죄의 괴로움 스스로 따라오네.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된다.
마음은 존귀하기도 하고 또 미천하다.
마음속에 언제나 그 선을 생각하면
복의 즐거움 스스로 따라오네.

그 어지러운 뜻을 따라 행하면
어리석음에 잡혀 어둠속에 들어가
교만하여 아무런 법이 없으리니
어찌 그 선한 말을 알 수 있으리.

그 올바른 뜻을 따라 행하면
깨우쳐 알아 맑고 또 밝아
남의 질투를 받지 않을 것이니
그 선한 말을 빨리 깨치리.

원망하는 사람에게 성을 잘 내면
언제나 원망은 없어지지 않으나
성내지 않으면 원망 절로 없어진다.
이 도는 참으로 받들 만하네.

남을 꾸짖기 좋아하지 않고
제 몸을 반성하기 힘써 행하여
그 잘못이 저에게 있음을 알면
원망은 사라지고 근심 없으리.

󰊵 계사(誡邪)
진실을 거짓이라 하거나
거짓을 진실이라 하면
이것을 사견(邪見)이라 하나니

참된 이익을 얻지 못한다.
진실을 알고 진실이라 하고
거짓을 보고 거짓임을 알면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나니
반드시 참다운 이익 얻는다.

벽이나 집이 치밀하지 않으면
비가 내리면 곧 물이 새고
뜻이 올바름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특한 법에 뚫리게 된다.

벽이나 집이 모두 아주 치밀하면
비가 내리더라도 새지 않으며
뜻을 거두어 올바름을 생각하면
사특한 법이 생겨나지 않는다.

비천한 사람에 물든 사람을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 하듯 하면
차츰 그 잘못을 모두 익히어
모르는 결에 그 악을 이룬다.

현명한 사람에 물든 사람을
향기 나는 향을 가까이 하듯 하면
지혜를 힘쓰고 또 선을 익히어
그 행은 어느새 깨끗해진다.

바른 생각을 언제나 일으키면
사특한 법은 저절로 사라지고
바른 법으로 스스로 제어하면
좋은 이름이 날로 더 늘어난다.
부디 바른 도를 언제나 생각하여
굳게 지키고 올바로 행하여라.
건실한 사람이 구제를 얻어
누리는 그 길상(吉祥)은 최상이리라.

사욕을 다 이기고 그 마음을 고루고
그 행동이 방탕하지 않으면
보시와 계율 인욕과 정진
선정과 지혜가 언제나 밝으리라.

살아서는 그로써 괴로워하지 않고
죽어서도 또한 슬퍼하지 않으리니
이와 같이 화(禍)와 복의 길은 갈리고
오르고 가라앉음, 그곳이 다르니라.

󰊶 계우(誡愚)
어리석어서 생사에 집착하면
올바른 법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지혜 없으면
어두운 집에 사는 것과 같다.

부딪치는 일마다 함부로 달려가
추위 더위를 분별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닦아 익혀도
오히려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한다.

또 아무리 하는 일이 있어도
몸을 위하면 근심 부르고
제 마음대로 악을 행하면
스스로 무거운 재앙 이룬다.

어리석어서 바라는 그곳
고통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다가
재액의 땅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곧 좋지 않음을 안다.

어리석어 악을 행하면서도
그런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재앙이 쫓아와 스스로 타다가
죄를 이루어 불꽃이 왕성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잠자기를 즐기어
근심과 슬픔이 늘 일어난다.
깜깜한 방에 갇히어 있는 것
마치 고치 속의 누에와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악을 즐기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아무리 착한 말을 일러 주어도

도리어 그를 원수로 생각한다.

그 죄가 아직 익기 전에는
어리석어서, 두고 보자 하다가
그것이 익을 때 이르러서야
스스로 큰 재앙 받는다.

어리석어 재물과 여자를 좋아하여
밤이고 낮이고 싫어하지 않는 것
마치 산과 골짜기가 불에 탈 때에
아무리 물을 대어도 차지 않는 것 같다.

어리석어 갖가지 많은 죄를 지어
가는 곳마다 남의 꾸중들으며
아무리 매를 치고 또 때려도
그래도 그 버릇을 그치지 않는다.

󰊷 계악(誡惡)
그 선과 악을 깊이 관찰해
두려워하고 꺼릴 것을 잘 알고는
두려워하여 그것을 범하지 않으면
끝내 길상(吉祥)하여 근심 없으리.

지난 세상에 있었던 복을
이어받아 행하리라 늘 생각하고
생각하는 그 소원을 잘 이루면
복과 녹(祿)이 갈수록 늘어나리라.

선을 믿어서 그 복을 짓고
선을 쌓기를 싫어하지 않으면서
그의 음덕(陰德)을 확실히 믿고 알면
오랜 뒤엔 반드시 나타나리라.

법을 좋아하면 누워도 편안하고
마음이 화열(和悅)하면 뜻이 늘 깨끗하며
성인이 그 법을 연설하시면
슬기는 언제나 행하기를 좋아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재계(齋戒) 지키며 이 도를 잘 받들면
마치 뭇 별들 속의 달과 같아서
그 광명 온 세간을 비춰 밝히라.

활 만드는 사람은 뿔을 다루고
뱃사공들은 배를 다루며
저 목수들은 나무 다루고
지혜로운 사람은 제 몸 다룬다.

비유하면 저 무거운 돌은
바람에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뜻이 견고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헐뜯음과 명예에 움직이지 않는다.

비유하면 저 깊은 샘물이
맑고 고요하며 또 밝은 것처럼
슬기로운 사람이 도를 들으면
그 마음 깨끗하고 기뻐진다네.

5음(陰)을 모두 끊어 없애고
지혜를 고요히 잘 생각하면
능히 스스로를 잘 구제하고
이치의 맑고 참됨 나타내리라.

탐내어 집착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무위(無爲)에 뜻을 두어 즐거워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거두어 받아
그 법이 영원하기 기원하여라.

󰊸 계박(誡縛)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리고
일체 번뇌를 모두 벗어나
결박의 매듭이 다 풀어지면
자유로이 노닐며 편안하리라.

마음이 깨끗하면 바른 생각을 얻어
아무 것도 탐내어 즐길 것이 없으면

이미 모든 초조와 불안을 넘었나니
마치 못을 버리는 기러기 같다.

배의 한계를 헤아려 음식 먹고
따로이 간직하여 쌓아 두지 않으며
마음 비우고 잡생각이 없으면
어디로 가나 아무 걸림 없으리.

몸의 분수 따라 옷을 지어 입으면서
부질없는 여벌의 옷 구하지 않고
일을 생략하여 함이 없으면
그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으리.

잡생각 억제하고 바른 도를 따르되
마치 저 말[馬]을 다루듯 하고
교만과 거만을 모두 버리면
저 하늘의 존경을 받으리라.

저 대지처럼 성내지 않고
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진인(眞人)은 번뇌가 없어
나고 죽는 세상을 벗어났구나.

이 마음이 고요히 쉼으로써
말과 행동 또한 쉬나니
저 올바른 해탈로부터
고요히 적멸(寂滅)로 돌아가도다.

악을 버리고 집착 없으며
저 3계(界)를 모두 부수고
욕정과 색(色)을 아주 끊으면
이것을 최상의 지혜라 한다.

마을에 있거나 들에 있거나
더러움에 살면서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은 응진(應眞)이 찬탄하는 바이라
그들 모두 복(福)을 입는다.

언제나 한적함을 즐기는 그 마음
다른 사람 아무도 못 따르나니
시원하여라 뛰어난 사람이여,
하늘과 사람들, 우러러 공경한다.

󰊹 계송(誡誦)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무슨 이익 있으리.
단 한번 듣고도 부지런히 닦아
그 이익 얻음만 못하느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그 글귀의 뜻이 바르지 않으면
하나의 요긴한 이치를 듣고
내 뜻(意)을 멸(滅)함만 못하느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이치 아니면 무슨 이익 있으리.
하나의 이치 듣고
행하여 구제됨만 못하느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공경하지 않으면 무슨 이익 있으리.
하나의 행을 기꺼이
받들어 닦음만 못하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내 마음이 멸하지 않으면
단 한 글귀를 듣고도
교만과 방일을 버림만 못하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이름을 구해 더욱 더 집착하면
한 번의 말을 듣고도
그 집착을 버림만 못하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죄를 버리려 하지 않으면
하나의 문구 듣고도
생사를 떠남만 못하느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색정(色情)이 더욱 견고해지면

단 하나를 알고도
마음의 경계를 버림만 못하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세상을 벗어나기 구하지 않으면
단 한번 깨달아
3계(界)를 떠남만 못하니라.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자비와 지혜를 가지지 않으면
단 한번 듣고도
자타(自他) 모두 이로움만 못하니라.

계행(誡行)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아낌과 탐욕이 더욱 성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재색(財色)을 버림만은 못하느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계율을 즐겨 가지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깨끗한 마음으로
계를 지님만 못하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성냄이 많고 참지 못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기뻐하면서
성내지 않음만 못하느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게으르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심신을 격려함만 못하느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쾌락을 탐하여 방탕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을 공적(空寂)에 돌림만 못하느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알음알이의 마음이 어두우면
단 하루를 살아도
무명(無明)을 쳐부숨만 못하느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심신을 잘 제어해서 다스리지 못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묘한 방편을 성취함만 못하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항상 나약한 마음 가지면
단 하루를 살아도
슬기의 힘이 씩씩함만 못하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좋은 서원을 일으키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킴만 못하니라.

사람이 1백 년을 산다 하여도
하나의 지혜를 내지 못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슬기의 성품이 예리함만 못하니라.

계구(誡口)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하늘들이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사람은 이 세상에 나자 벌써
그 입 안에 도끼가 생겨
도리어 그 자신을 해치는 것
그것은 그 나쁜 말 때문이네.


비방할 것을 도리어 칭찬하고
칭찬할 것을 도리어 비방하면
그 죄는 입 안에서 생긴 것이니
죽어서는 악도(惡道)에 빠지느니라.”

게송을 읊는다.

뜻을 세워 마음의 어리석음 경계하고
현명한 벗을 즐겨 우러러 사모하여
그와 더불어 큰 서원을 세우고는
속세를 저버리고 한적한 산을 사모한다.

쓸쓸하고 고요한 인간 세상 밖에서
밝고 빛나면서 뒤얽힘을 벗어나
진실한 참 이치를 고요히 구하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에 안간힘을 다 쓴다.

경계하고 채찍질하면서 3업(業)을 닦고
못내 간절히 4류(流)를 밝히며
마음에 큰 서원 일으키고
빠진 이를 건지려 자비의 배를 저어 간다.

아름다운 철을 맞아 묘각(妙覺)으로 돌아가고
좋은 모임에서 열반 닦으며
8정도(正道)에 마음을 두고
3기(祇)라야 그만두는 뜻을 세운다.

감응연(感應緣)[대략 네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의 사문 석지둔(釋支遁)
주(周)의 사문 석망명(釋亡名)
주(周)의 사문 석도안(釋道安)
제(齊)의 사문 석승범(釋僧範)

진(晋)의 사문 석지둔(釋支遁)
진(晋)나라 염옥주(剡沃洲) 산에 지둔(支遁)이 있었다. 그의 자는 도림(道林)이요 성은 관(關)씨이니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총명이 빼어났다. 진(晋)나라 왕희지(王羲之)는 지둔의 재주를 보고 그 뛰어남에 놀라, 옷깃을 헤치고 띠를 풀고 만류하였으므로, 그는 부득이 청하여 영가사(靈嘉寺)에 머물면서 서로 가까이 지냈다. 또 염산(剡山)으로 들어가 옥주(沃洲)의 조그만 산에 절을 짓고 도를 닦을 때는 스님들 1백여 명이 항상 따르면서 도를 배웠다. 혹 타락하는 자가 있으면 지둔은 곧 좌우명(座右銘)을 지어 주면서
권면하였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지극한 도는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거늘 어찌 중간에 멈추겠는가? 신기(神奇)를 한번 잃어버리면 아득한 3계(界)에 나그네의 길이 멀고도 머니라. 번로(煩勞)는 밖에서 몰려들고 어두운 마음은 안에서 달린다. 목숨을 걸고 달려가 간절히 사모하면 아득한 길이 줄어짐에 고달픔을 잊으리라. 인생 일생이란 풀잎에 맺힌 이슬인 듯 떨어지며 내 몸도 나[我]가 아니거니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누가 나를 돕겠는가? 통달한 사람은 덕을 품고 편안하면 반드시 위태로움을 안다.
고요하고 맑은 거동이라 그 더러움을 선정의 못[禪池]에 씻으며, 밝은 계율을 삼가 지키고 현묘한 법규를 바르게 설명하며, 마음을 신도(神道)에 편안히 하고 무위(無爲)에 뜻을 두어 높여라. 고요히 3폐(蔽)를 밝게 하고 6자(疵)를 녹여 다스리며, 5음(陰)을 텅 비우고 4지(支)를 널리 비워라. 손가락이 아닌데 손가락에 비유하니 끊어졌지만 떠난 것이 아니요, 묘각(妙覺)이 이미 설명되었으니 그 앎을 또 현묘하게 하라. 변화 속에서 평등하게 세상을 따라 그대로 변천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생각하지도 말고 헤아리지도 말라.”

주(周)의 사문 석망명(釋亡名)
주(周)나라 위빈(渭濱)의 사문 망명(亡名) 법사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대개 하늘을 돌이키고 해를 넘어뜨리는 힘도 하루아침에 풀처럼 마르고, 대산(垈山)과 반석의 견고함도 어느새 타서 없어지나니, 실로 세상(世相)의 덧없음과 부생(浮生)의 허망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니 그 머묾이 얼마인고? 대장부로서, 살아서는 악마를 항복 받고 죽을 때는 호랑이를 길러야 하겠거늘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한낱 살기만 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선정을 닦음으로써 넉넉히 그 뜻을 기르고,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넉넉히 스스로 즐거워함만 못한 것이다. 부귀와 명예는 한낱 사람을 괴롭게 할 뿐이다.”
이리하여 지금까지의 그 잠변(簪弁:관리)를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누더기 옷에 석장(錫杖)을 짚으면서, 설법을 듣고 현묘한 이치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싸우는 나라여서 편안치 않아 그 몸을 둘 곳이 없었으며, 스스로 그 몸뚱이가 질곡(桎梏)보다 더 괴로움을 싫어하여 그 고통의 근본을 끊으려 했으나 그 나루터를 알 수 없었다.
『대승경(大乘經)』에 말하였다.
“그 말과 같이 실행하는 자라야 비로소 성인이라 한다. 다만 입의 말만이 아니라.”
또 다음과 같은 소승(小乘)의 게송이 있다.

능히 행해야 그 말이 바르게 되니
행하지 않을 바에야 말해서 무엇하리.

만일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 아니다.

그러므로 안회(顔回)는 학문을 좋아하여 전의 잘못을 고치기를 힘썼고 계 로(季路)는 행을 닦지 못하여 뒷사람의 말을 들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공로(功勞)는 지혜를 어지럽히고 정신을 부리며 목숨을 해치는 것이다. 도를 닦기에 날로 소모되거니 구태여 많이 알려 할 것이 있겠는가? 맹세코 그 몸은 마른 나무처럼 만들고 그 생각을 죽은 재처럼 만들며, 이 얽매인 근심에서 내려와 공적(空寂)을 구하기 위해, 이에 ‘절학잠(絶學箴)’을 지었다. 이것을 또 ‘식심찬(息心贊)’이라고도 하여 저 주묘(周廟)를 본뜬 것이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법계(法界) 안에 여의보(如意寶)의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가슴속에 이렇게 새겼다. 옛날의 마음을 거두어 잡는 사람은 경계하고 경계하여 많은 생각이 없고 많은 앎이 없었다. 앎이 많으면 일이 많은지라 뜻을 쉬는 것만 못하고 생각이 많으면 잃음이 많은지라 하나를 지킴만 못하다. 생각이 많으면 뜻이 흩어지고 앎이 많으면 마음이 어지러우며, 마음이 어지러우면 번뇌가 생기고 뜻이 흩어지면 도를 방해한다.
‘무엇을 슬퍼하랴’고 말하지 말라. 그 고뇌는 길기도 길고, ‘무엇을 두려워하랴’고 말하지 말라. 그 재앙은 솥에 물 끓는 것 같다. 방울 듣는 물도 그치지 않으면 장차 4해(海)를 채우고, 잔잔한 티끌도 털지 않으면 장차는 5악(岳)을 이루리라. 끝을 예방하려면 그 근본에 있는 것이니,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네 7규(竅)를 꼭 잠그고 네 6정(情)을 꼭 닫고는 저 빛깔을 보지 말고 저 소리를 듣지 말라. 소리를 들으면 귀머거리요 빛깔을 보면 장님이다. 1문(文) 1예(藝)는 공중의 조그만 모기요, 1기(技) 1능(能)은 햇빛 앞의 외로운 등불이다. 뛰어나고 현명한 재주와 기예는 이것을 어리석은 고달픔이라 하나니, 순수하고 질박함을 버리고 음란하고 화려함에 빠지면 알음알이의 말은 달리기 쉽고 마음의 원숭이는 제어하기 어렵다. 정신을 이미 괴롭게 부리니 몸은 반드시 지치고 쓰러지며, 사특한 오솔길은 끝까지 미혹시키고 닦은 길은 언제나 진창이리라.
뛰어나고 현명한 재주와 능력은 이것을 어두운 헤맴이라 하니, 옹졸함을 자랑하고 교묘함을 부러워하면 그 덕은 넓어지지 못하고, 이름만 두텁고 실행이 엷으면 그 높음은 빨리 무너진다. 책을 바르고 책을 더럽히면서 그 쓰임이 떳떳하지 못하여, 안에는 자랑과 해칠 생각을 품고 밖으로는 원망과 미움을 부른다. 혹은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면서 남의 칭찬을 바라지만,
그것도 공자(孔子)의 추함이라, 범부는 그것을 길(吉)이라 하나 성인은 그것을 허물이라 한다. 즐거움과 기쁨은 잠깐이지만 슬픔과 근심은 장구하니라.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국을 두려워하면 그것은 더욱 빨라지고 더욱 달려오지만, 나무 그늘에 단정히 앉으면 발자국도 사라지고 그림자도 없어진다. 남[生]을 싫어하고 늙음을 걱정하면 생각을 따라 업을 짓지만, 만일 마음의 생각이 아주 멸하면 나고 죽음이 길이 끊어지리라.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으면, 한 길이 공적(空寂)하여 만물이 평등하거니,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하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벼우며,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하며, 어느 것이 욕되고 어느 것이 영화이랴. 맑은 하늘은 그 깨끗함을 부끄러워하고 흰 해는 그 밝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악(垈岳)처럼 편안하고 저 금성(金城)처럼 견고할 것이다. 삼가 여러 현철(賢哲)에게 주노니, 이 도는 이정(利貞)이니라.”

주(周)의 사문 석도안(釋道安)
주(周)나라 서울의 대중흥사(大中興寺)의 석도안(釋道安)은 성은 요(姚)씨요 풍익(馮翊)의 고성(故城) 사람이다. 그는 현묘한 이치를 깨치고 일찍이 법문(法門)에 들어갔다. 신기(神氣)는 고상하고 밝으며 지조는 맑고 깊었다.
이에 유계(遺誡) 9장(章)을 지어 그 문인(門人)들을 경계했으니, 그 글은 아래와 같다.
“삼가 제자들에게 감사한다. 대개 출가하여 도를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스스로를 업신여기거나 스스로를 소홀하게 여기지 말지니라.
이른바 중하다는 것은, 도를 짊어지고 덕을 차며 인(仁)을 얽고 의(義)를 지고는, 깨끗한 계를 받들어 지녀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는 것이다. 또 이른바 어려움이란, 세상을 벗어나고 속(俗)을 떠나서 친애(親愛)를 아주 끊어버리고는 정을 돌리고 성을 바꾸며 대중과 같지 않아, 나그네도 갈 수 없고 도적도 빼앗을 수 없으며 고통을 참고 곤욕을 받으면서 몸과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다.
중하고 어려움을 다 이루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나니, 도인이란 인(仁)이다. 그의 행은 행해져야 하고 그의 말은 법이 되어야 한다.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났으니 그 움직임은 법이 되는 것이다. 탐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모함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학문은 높고 깊으며 뜻은 현묘한 침묵에 있다. 이것을 3위(位)의 3존(尊)이라 하나니, 나가면 현인(賢人)에게 들어오며 성인(聖人)에게 그 정혼(精魂)을 씻기 때문이다.
군왕(君王)을 만나도 그 갚음을 바라지 않고 부모에게도
그 힘을 바라지 않으므로 온 천하 사람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아내를 버리고 공양을 줄여 의식을 이바지하며 몸을 굽히고 우러르면서 괴로운 일의 한탄도 사양하지 않는 것은, 그 뜻과 행이 깨끗하여 신명(神明)에 통하며, 그 마음이 담박(淡泊)하고 텅 비어 기이하고 높일 만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방탕하고 도법(道法)이 드디어 쇠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아직 그 법을 체득하지 못하면, 바름을 버리고 사특함에 집착하면서도 그 진실을 바란다. 조그만 재간을 지혜라 하고 조그만 공경에 족하다 하여 배불리 먹고 해를 지우면서 아무 마음 쓰는 일이 없으니,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 관찰하면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출가한지 여러 해인데 아직 경업(經業)을 통하지 못하고 문자도 판단하지 못한 채, 헛되이 한 세상을 보내면서 이름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런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상(無常)의 시한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이요, 3도(途)의 고통은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정의가 깊기 때문에 이것으로 보이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무리는 영원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첫째, 그대들은 출가하여 부모를 길이 여의고는 머리를 깎아 용모를 헐고 법복을 몸에 더했다. 부모를 하직하는 날에는 상하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애정을 끊고 도를 사모했으니, 그 의기(意氣)는 하늘을 찔렀다. 마땅히 이 뜻을 따라 경도(經道)를 닦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무 마음도 없이 빛깔과 소리에 집착하여 유유(悠悠)히 세월을 보내면서 경업을 이루지 못하여 덕행은 날로 줄어들고 더러운 발자국만 가득히 차는구나. 그리하여 스승과 벗들은 부끄러이 여기고 세속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니, 이런 출가는 한갓 제 이름만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가르쳐 격려하는 것이니 부디 정진할지니라.
둘째, 그대들은 이미 뜻을 세워 속세를 버리고 임금을 하직했으니, 부디 스스로 격려하여 청운(淸雲)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재색(財色)을 돌아보지 말고 세상과 무리 짓지 말며 금옥(金玉)을 귀히 여기지 말고 오직 도만을 보배로 삼아라. 몸을 단속하고 절개를 지키며 괴로움을 달게 여기고 가난을 즐거워하면서, 덕을 힘써 자신도 구제하고 또 남도 구제하라. 그런데 어찌하여 지조를 고치고 풍진(風塵)으로 달려가노라고 앉아서 자리를 덥힐 여가도 없이 동서로 달리느냐? 극성을 떨기는 마치 부역에 나가
관리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구나. 경도(經道)를 통달하지 못하고 계덕(戒德)이 완전하지 못하여, 벗들이 비웃고 놀리며 동학(同學)이 그대로 버리니, 이런 출가는 다만 천명(天命)만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가르쳐 격려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를 가엾이 여겨라.
셋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여 종족을 길이 하직했으니, 친함도 없고 성김도 없으며 청정하여 욕심이 없어서 길(吉)한 일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고 흉한 일이 있어도 울지 않으며 초연(超然)히 한가하고 활연(豁然)히 속정을 떠나서, 뜻을 현묘(玄妙)한 도리에 두어 진(眞)으로 달리고 순수함을 지키면서 스스로도 구제하고 남도 널리 구제하여 두루 큰복을 입혀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마음이 없이 그대로 집착하고 물들어 부질없이 길고 짧음과 눈금과 양(兩), 말과 섬을 다투기만 하여 세상과 이익을 다투니 저 노비들과 무엇이 다른가? 경도(經道)에 밝지 않고 덕행이 부족하니 이런 출가는 다만 스스로를 욕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가르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 몸을 씻어라.
넷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여 도인이라 불린다. 부모에게는 공경하지 못하고 임금에게는 신하 노릇 못하지만, 온 천하가 다 같이 그대들을 신(神)처럼 받들면서 머리를 조아려 경례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부귀를 헤아리지 말고 맑은 수도를 숭상하며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라. 세상에서 줄이고 깎는 중량은 1미(米)에 7근(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게을러 은혜를 갚지 않고 함부로 놀아 방탕하면서 몸과 마음을 헛되이 번거롭게만 하는가?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남의 보시를 먹으면 죽어 태산지옥에 들어가 뜨거운 쇠를 먹고 구리쇠 녹인 물을 목구멍에 쏟으리니, 이런 고통은 법구(法句)에 이미 다 설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삼가기를 가르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를 새롭게 하라.
다섯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여 식심(息心)이라 불린다. 그리하여 온갖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도를 공경하며 뜻은 깨끗함에 들어가 옥과 같고 물과 같다. 그러므로 경계(經戒)를 닦아 자신을 제도하며 중생들에게 복(福)을 입히고 또 이를 제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속을 따라 떴다, 잠겼다 하면서 그 4대(大)를 놓아먹이고 5근(根)을 마음대로 부려, 도덕은 드디어 얕아지고 세상일만은 새삼스레 깊어 가니, 이런 출가는 세상과 그 티끌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가기를 경계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 정신 차려라.
여섯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여 세상의 몸뚱이는 벌써 버렸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정(情)을 버리고 열반과 상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시끄러이 움직이면서 고요히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 경도(經道)는 줄어만 들고 세상일은 늘어만 가며, 깨끗한 자리는 밟지 않고 도리어 진흙탕에 들어가는가? 문틈을 지나가는 그림자[隙影]같은 목숨은 잠깐 사이에 있고 지옥의 고통은 다 적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 경계하는 것이니 부디 본받으라.
일곱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했으니, 자신에게는 너그럽지 말아야 한다. 형상은 비록 비루하더라도 그 행동은 볼 만하고 옷은 비록 누추하더라도 앉고 일어남을 단정하게 하며 음식은 비록 거칠더라도 내는 말은 신용할 만해야 한다. 여름이면 더위를 견디고 겨울에는 추위를 참으며 스스로 절조를 잘 지켜 도적의 우물물은 먹지 말고 어질지 못한 사람의 공양은 아무리 풍족해도 거기는 함부로 가지 말며 사사로운 방에 오래 있어도 지존(至尊)님 앞에 있는 듯하고 배움은 비록 많지 않더라도 뛰어난 현인(賢人)과 행은 같아야 한다. 이런 출가는 넉넉히 양친과 친척과 벗들과 일체에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다. 그러므로 경계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 착실히 하라.
여덟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했으니, 성질이 어둡거나 밝거나 배움이 많거나 적거나 요는 최선을 다함에 있다. 최상의 근기는 좌선하고 중간 근기는 경을 읽으며 최하의 근기는 불상과 절을 수리하고 경영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 세월만 보내면서 하나도 이룸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몸을 세우고 들음이 없으니 헛되이 산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훈계하는 것이니, 부디 스스로 마음을 단정히 하라.
아홉째,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여 양친을 길이 여의었다. 도법(道法)은 성질을 고치고, 속세의 옷은 몸을 떠났다. 부모를 하직하던 날에는 일변 슬퍼하고 일변 기뻐하면서 아득히 속세의 인연을 끊고 더러운 티끌을 멀리 뛰어났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경전의 도를 닦아 자신을 제어하고 진(眞)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마음이 없이 다시 속세의 인연에 물들어, 경전의 도는 이미 엷어졌고 좋은 행은 털끝만큼도 없으며 말은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없고 행은 존중할 만한 것이 없어, 스승과 벗들에게 누를 끼치고 분노와 원망이 날로 성하니, 이런 출가는 법을 손상시키고 제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몸을 잘 가져야 하느니라.”

제(齊)의 사문 석승범(釋僧範)
제(齊)나라 서울 동쪽 대각사(大覺寺)의 석승범(釋僧範)은 성은 이(李)씨이니 평강(平康) 사람이다.
그는 계율의 덕이 맑고 높으며 계를 지켜 이지러짐이 없었다.
일찍이 어떤 다른 절에서 자면서 설계(設戒)를 들으려 했다. 마침 15일의 설계하는 밤이 되었으니 대중이 의논하여 설계(設戒)는 그만두고 다른 법회를 열었다. 어떤 스님이 법좌(法座)에 올라가 수의(竪義)하려고 하는 말이 “법상(法相)을 견고히 강론하여 성인의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하며, 포살(布薩)은 항상 듣는 것이라, 어려움을 쳐부수는 것이 제일이다”했다. 갑자기 한 신(神)이 나타났다. 키는 10여 척이요 얼굴은 매우 씩씩하고 뛰어나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법좌 앞에 와서 수의(竪義)하는 스님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오늘은 포살하는 날입니다.”
그러자 그는 이 사람을 손으로 잡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 스님은 땅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다. 그는 또 다음 상좌(上座)에게로 가서, 앞에서와 같은 문답을 한 뒤에, 또 손으로 때려 그 다음 상좌도 거의 죽게 되었다. 이렇게 2,3명의 상좌에게 창피를 준 뒤에 신은 팔을 흔들면서 나가 버렸다. 그 때 승려와 신도들은 다 이 광경을 보았다.
승범은 이런 이변(異變)을 본 뒤로는 스스로도 정진하고 또 대중들에게도 채찍질하면서 내지는 일생 동안 말을 삼가 했다. 비록 병이 중하더라도 좋은 가마를 타고 가지 않고 스님을 청해 병을 보게 했다. 그의 설계(設戒)는 사람들의 공경을 받아, 온 절 안의 승니(僧尼)들이 다 그의 훈계를 받들었다. 포살하는 날에도 설법을 빠뜨리지 않았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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