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9권
법원주림 제29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21. 감통편(感通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성적부(聖迹部)
(1) 술의부(述意部)
삼가 석교(釋敎)를 상고해 보면, 처음 한(漢)나라 명제(明帝)로부터 황당(皇唐)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代)를 흘러 내려 6백 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유헌(輶軒)이 끊이지 않아 관방(觀方)을 두루 갖추었었다. 천여 나라가 모두 이 풍화(風化)에 귀의하여, 산을 넘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해를 바라보며 와서 귀순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전후에 전해온 기록이 서로 어긋나 같지 않으며 사적(事迹)이 드물고 희미해져서 의혹이 많다고 한다. 비록 남은 은택에 젖는다 해도 그윽한 뜻이 원만하지 못하다. 이하(夷夏)의 말이 서로 다르고 그 글 뜻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성인의 자취를 찾아보았으나 다 이루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여러 스님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마침 이때 대당(大唐)의 사문 현장(玄奘) 법사는 대도가 유통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석교(釋敎)의 억눌림을 가엾이 여겼다. 그러므로 정관(貞觀) 3년(629) 3월에 쓸쓸히 혼자 몸으로 서역(西域)으로 가서 성인의 자취를 찾기로 했다. 처음 경읍(京邑)에서 차츰 사주(沙州)로 갈 때는 험난하고 막힌 곳을 지나 이오(伊吾)ㆍ고창(高昌) 등 갖은 위난을 다 겪었다. 그 때 마침 고창왕(高昌王) 국씨(麴氏)를 만났는데 그는 재물을 공급해 주고 돌궐(突厥)과 엽호(葉護)의 아소(衙所)로 전송하였다. 또 그는 설산(雪山) 이북의 여러 번호국(蕃胡國)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두루 보게 되었다.
또 동남에서 큰 설산(雪山)을 나왔다. 옛 사람이 이른바 “총령(葱嶺)에는 항상 눈[雪]이 쌓여 있다”고 한 말이 바로 이 설산(雪山)이다. 현장은 직접 이것을 보고 이 설산을 지나 곧 인도(印度)로 가서 10년을 지냈다. 뒤에 총령의 남쪽과 설산의 북쪽에서 돌아와 여러 나라를 다 지나서,통합뷰어
동쪽으로 우전(于闐) 루란(婁蘭) 등에 돌아오니, 무릇 150여 나라를 지나왔다. 그가 겪은 어려움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정관 19년(645) 겨울에 처음으로 경사(京師)에 이르러서는 왕명을 받들어 불경을 번역하고, 겸하여 『서역행전(西域行傳)』 12권을 지었다. 지금 용삭(龍朔) 3년(663)까지 번역한 경론(經論)은 현장이 여러 나라를 다니며 널리 듣고 번역한 많은 경전만은 못하다. 현장 법사의 행전(行傳)에 의하면 왕현책전(王玄策傳) 및 서역(西域)의 도속(道俗)들이 그 나라의 적절하게 지켜온 것으로서 어느 것 하나 영이(靈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문학사(文學士) 등을 시켜, 모두 모으고 자세히 찬술하게 하여 60권으로 만들고는 서국지(西國志)라고 하고, 그림 40권과 합해 모두 100권으로 만들었다.
우전국(于闐國)에서 파사국(波斯國)에 이르는 동안 대당총치도독부(大唐摠置都督府)와 주현(州縣)과 절충부(折衝府) 등 모두 378소(所)의 기록으로서, 9곳은 도독부요 80곳은 주(州)이며 133곳은 현(縣)이고 147곳은 절충부이다. 42주(州)의 마땅한 인물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모두 여러 편(篇)에 배열했으니 여기서 밝힐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기록하는 것은 다만 불법의 성적(聖迹)이 있는 곳과 머무셨던 곳만을 취해 따로 한 권을 만든 것이다. 나머지 다하지 못한 것은 대본(大本)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거울삼아 광략(廣略)이 있음을 알기 바란다.
(2) 성적부(聖迹部)
『서역전(西域傳)』에서 말하였다.
“현장(玄奘)은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점점 길을 재촉하여 고창(高昌)에 이르러서 왕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고창에서 수레를 공급받고 융숭한 전송을 받고서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의 동쪽 국경으로 가니, 그곳은 한사(漢史)에서 말하는 우전국인데, 그 나라에서는 스스로 우둔국(于遁國)이라 말했다. 동쪽 2백여 리쯤에통합뷰어
비마성(媲摩城)이 있고 그곳에는 전단나무로 만든 입상(立像:如來立像)이 있었다. 높이는 2장(丈) 남짓하며 영이(靈異)한 광명이 매우 많았다. 병자가 아픈 곳을 따라 금박(金薄)으로 그 입상 위에 붙이면 병이 곧 낫는다고 했다. 그 입상은 본래 교상미국(憍賞彌國)에 있던 것으로서 오타연나왕(鄔陀衍那王)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높은 산을 넘어 이 나라 북쪽에 있는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에 이르렀을 때 어떤 이상한 아라한이 늘 거기 가서 예배하곤 하였다. 왕은 처음에 불법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토(沙土)를 높이 쌓아 놓았는데, 이에 아라한은 신자들에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7일 뒤에는 사토가 성(城) 안에 가득 차게 되리라.’
이틀 뒤에는 보배가 내려 거리에 가득하더니 7일째 되는 날 밤에는 과연 사토가 내려 성을 메워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다. 먼저 예고를 한 사람은 미리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있다가 그 땅굴에서 나왔다.
그 때 왕의 도성(都城) 서쪽 160리 길의 큰 모래밭에는 오직 쥐만이 살 수 있는 흙이 있었다. 그 쥐의 형상은 큰 고슴도치만 하고 털은 금은빛이었다. 옛날 흉노(凶奴)가 쳐들어왔을 때 왕은 이 쥐의 신령에게 기도했다. 그래서 쥐는 밤에 적들의 말을 물고 활의 줄을 물어 끊었다. 그리하여 적들은 저절로 물러갔다. 도성 서쪽 5리쯤에 있는 절에 부도가 있어 그 높이는 1백여 척이나 되는데 대부분 광명을 발현하고 있었다. 왕은 사리 수백 과를 얻었다. 아라한은 오른손으로 부도를 들어 사리함 안에 그 사리를 넣고 내려놓았으나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도성 서남쪽 10여 리에 구실릉가산(瞿室綾伽山)이 있으니 이것을 우각산(牛角山)이라고 하였다. 그곳에 절과 불상이 있었는데 광명을 발현하였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 머무시면서 사람과 하늘을 위해 설법하셨다고 한다. 그 산의 석실(石室)에는 어떤 아라한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 미륵불(彌勒佛)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나라 남쪽 경계는 동녀국(東女國)과 접해 있다.
또 도성 서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8백여 리를 더 가니 작구가국(斫句迦國)이 있었다. 여기는 곧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이라고 한다. 이 나라 남쪽에 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아라한의 탑이 세워져 있었고 소나무가 무성했고 샘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석실도 깊고 깨끗했다. 어떤 아라한통합뷰어
세 사람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었는데 그 수염과 머리가 조금 자라 있었으므로, 다른 스님이 항상 그것을 깎아 주었다. 5인도(印度)의 스님으로서 과(果)를 증득한 이가 이 석실에 많이 있었다.
또 이 나라의 서북쪽에서 대사령(大沙嶺)에 오르고 사다하(徙多河)[옛 이름은 신두하(辛頭河)이다.]를 건너 5백 리를 가면 가사국(佉沙國)[옛날에 소륵국(疏勒國)이라 했다.]에 이른다. 여기 풍속은 아들을 낳으면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여기서 남쪽으로 5백 리를 가면 오살국(烏鎩國)에 이른다. 그 도성에서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대산령(大山嶺)에 이르며 그 산꼭대기에 탑이 있다. 수백 년 전에 산벼랑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여기에 어떤 비구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형상은 매우 위대하고 수염과 머리는 밑으로 드리워졌는데 어깨와 얼굴을 덮었다. 국왕이 그에게 소유(蘇油)를 뿌리고 건추(揵椎)를 쳤다. 이 비구는 위를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우리 스승님 가섭파불(迦葉波佛)은 지금 계신가?’
답하였다.
‘없다. 지금 처음으로 들었는데 열반에 드셨다고 하였다.’
또 물었다.
‘석가불은 세상에 나오셨는가?’
대답하였다.
‘이미 멸도(滅度)하셨다.’
그러자 그는 곧 허공에 올라 불로 변화하더니 그 몸을 태웠다.
또 서남으로 큰 총령(蔥嶺)을 넘어 8백여 리를 가면 갈반타국(朅盤陀國)에 이른다. 그 나라 동남쪽에는 두 개의 큰 석실(石室)이 있는데 각각 한 아라한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이미 7백 년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들의 수염과 머리가 자라면 해마다 따로 깎는다. 또 세 나라를 지나 4천여 리를 가면 달마철실제국(達摩鐵悉帝國)에 이른다. 그 도성의 절에 석상(石像)이 있는데, 위에는 금동(金銅)으로 된 둥근 일산을 달아 놓았고 온갖 보배로 장식하였다. 사람이 그 일산 같은 석상을 돌면 일산도 따라 돌고 사람이 그치면 그것도 그친다. 사방의 석벽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은 성인의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창(高昌)에서 철문(鐵門)에 이르기까지는 무릇 열여섯 나라를 거쳐야 한다. 그 인물의 우열(優劣)과 믿음이 순수하고 등한함은 여러 도전(圖傳)에 실려 있다. 그 철문은 곧 한(漢)나라 서쪽 변방 철문의 관(關)이다. 한나라의 사립문을 보면 하나는 서 있고 하나는 누워 있다.통합뷰어
바깥 철문은 나무를 둘러싸고 있고 거기에 여러 방울을 달아 놓았다. 반드시 이 관문을 닫아야 실로 천연적으로 견고한[天固] 것이 된다.
남쪽으로 이 문을 나가 천여 리쯤 가면 동으로는 총령을 의지하고 있고 서로는 파사국(波斯國)에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큰 설산이요 북으로는 철문을 의지하고 있다. 큰 박추하(縛芻河)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흐르니, 곧 경에서 말한 박차하(博叉河)가 이것이다. 그 경계가 저절로 나뉘어져 20국이 되었으니 그 이름은 다 갖추어 열거할 수 없다. 거기에는 각각 군장(君長)이 있어 불교를 믿고 존중한다. 스님들은 12월 16일에 안거(安居)하여 춘분(春分)까지 앉아 있으니, 그것은 기후가 덥고 비가 많기 때문이다.
또 북쪽을 따라 내려가 달밀국(呾蜜國)을 좇아 13국을 지나면 갈박국(喝縛國)에 이른다. 그 나라의 국토는 빛나고 넓어 그 때 사람들은 작은 왕사성(王舍城)이라 불렀으며 그 나라는 엽호남아(葉護南衙)에 가깝다. 도성 밖 서남쪽 절에는 부처님께서 손을 씻으시던 대야가 있다. 그 대야는 물 한 되쯤 들어갈 만하였으며 여러 가지 빛깔이 찬란하게 빛나, 금인지 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부처님의 어금니가 있는데 길이는 한 치 남짓하고 너비는 89푼(分)이며 빛깔은 황백(黃白)색이며 빛나고 깨끗하였다. 또 부처님께서 쓰시던 비가 있는데 가사(迦奢) 풀로 만들었고 길이는 2척 남짓하며 둘레는 7촌이요 여러 가지 보배로 그 자루를 장식했다. 3물(物)의 재일(齋日)에는 법속(法俗)이 큰 광명을 놓는 감응이 있었다고 한다.
왕성 서북쪽 50여 리에 제위성(提謂城)이 있고 왕성 정북 40여 리에는 파리성(波利城)이 있다. 거기에는 각각 부도가 있어 높이는 3장(丈)쯤 되며 각각 영적(靈迹)을 나타내고 있다. 즉 석가세존이 처음 성도하셨을 때 먼저 석가세존께 밀초(蜜麨)를 바친 장자(長者)의 본읍(本邑)에서 그 머리털과 손톱을 모아 세운 탑이 있다. 또 부처님의 승가지(僧伽胝)와 울다라승(鬱多羅僧)과 승각기(僧脚崎)와 또 엎어 놓은 발우와 세워 놓은 석장(錫杖)을 차례로 탑을 세웠다.
또 두 나라의 동남을 지나 큰 설산에 들어갔다가 범연나국(梵衍那國)에 이르러 큰 설산 동쪽을 지났다. 거기 절에는 부처님의 이빨과 겁초(劫初)의 독각(獨覺)의통합뷰어
이빨이 있었는데, 길이는 5촌이요 너비는 4촌이나 되었다. 또 금륜왕(金輪王)의 이빨이 있었는데 길이는 3촌이요 너비는 2촌이었다. 또 상낙가박파(商諾迦縛婆)[옛 번역에는 상나화수(商那和修)라 하였는데, 법을 전한 세 번째 스님이다.]라는 큰 아라한의 쇠발우가 있었는데 아홉 되들이는 될 만하다. 그리고 9조(條)의 승가지가 있었는데 빛은 붉고 설낙초(設諾草) 껍질로 짜서 만든 것이었다. 그 선세(先世)에 여름 안거(安居)를 마칠 때에 날마다 이 풀을 스님들에게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이 복의 힘을 입어 5백 세(世) 이래로 중음신(中陰身)에서 태어나면 항상 이것을 입었다고 한다. 그것은 태에서 함께 나와 몸을 따라 자꾸 커지기 때문이다. 아난(阿難)이 스님이 될 때에는 이것이 변해 법복(法服)이 되었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는 9조(條)로 변하였다. 그 이빨과 발우 등은 다 금으로 봉해 두었다. 아라한은 멸진정(滅盡定)을 증득한 뒤에 변제지(邊際智)에 들어간다. 이 원력 때문에 가사를 두고, 끼친 법이 다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이것이 변괴(變壞)되는데, 지금 이미 조금 상한 데가 있으니 참으로 징험이 있다 하겠다.
또 동쪽으로 설산에 들어가 흑령(黑嶺)을 넘으면 가비시국(迦卑試國)에 이른다. 이 나라는 불법을 신봉함이 더욱 우세하다. 왕은 해마다 1장(丈) 8척의 은상(銀像)을 만들어 스스로 공양한다. 왕성의 동쪽 3리의 북산 밑에 큰 절이 있다. 불원(佛院)의 동문 남쪽에 있는 큰 신왕상(神王像)의 오른발 밑에 큰 보배가 묻혀 있다. 근래에 어떤 외국 왕이 스님을 쫓아 버리고 그 신관(神冠)을 파내어 취하려고 했다. 거기 있는 앵무새의 상(像)이 날개를 치며 크게 울고 땅이 진동했다. 그 왕의 군사는 모두 쓰러졌다가 일어나 사죄하고 돌아갔다.
그 절 북쪽 산마루에 있는 여러 석실(石室)에도 많은 보배가 묻혀 있다. 가만히 그것을 파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곧 약차(藥叉)[구역에는 야차(夜叉)라 하였다.]가 사자나 뱀이나 벌레로 변해 와서 몹시 화를 낸다. 그 석실의 서쪽 3리의 큰 고개 위에 관자재(觀自在)의 상(像)이 있다. 정성으로 소원을 비는 자가 있으면 그 상은 자기의 묘한 몸을 그 행자에게 나타내 보인다.
도성의 동남 40여 리에 있는 갈라호라사(曷羅怙羅寺)는 대신이 지은 것으로서 그 대신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통합뷰어
부도의 높이는 1백여 척이나 된다. 옛날 그 대신이 어느 날 밤 꿈에, 거기 부도를 세우고 사리(舍利)는 왕에게 청하라 했다. 아침이 되자 왕궁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사리가 들어 있는 병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은 사리를 받아 두고 그 사람을 시켜 먼저 들어가게 했다. 대신은 병을 가지고 탑(塔:부도)에 올랐다. 엎어 놓은 발우가 저절로 열려 대신은 사리를 거기 넣었다. 왕의 사자가 쫓아가자 돌 뚜껑은 이미 닫히고 말았다. 재일(齋日)에는 거기에서 광명이 뿜어나며 검은 기름이 흘러나오고 밤이면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도성의 서북 2백여 리의 큰 설산 꼭대기에는 용지(龍池)가 있는데 그 용을 위해 산 밑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탑 속에는 불골(佛骨)과 육사리(肉舍利)가 한 되 남직하게 있다. 때로는 연기가 일어 혹은 맹렬한 불꽃과 같다가 그 불이 차츰 꺼질 때에 비로소 사리가 보인다고 한다. 형상은 마치 흰 구슬 같은데 기둥을 둘러싸고 구름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탑 속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도성의 서북 큰 강 남쪽 언덕에는 고왕사(古王寺)가 있다. 그 절에는 부처님 어릴 때의 치아가 있는데 길이는 1촌 남짓하다. 또 여기서 동남으로 고왕사로 가면 부처님의 정수리 뼈 한 조각이 있다. 너비는 2촌 남짓하며 빛깔은 황백색이고 털 구멍이 분명하다고 한다. 대당(大唐) 용삭(龍朔) 원년(661) 초봄에 사인(使人) 왕현책(王玄策)이 이것을 서역에서 가지고 왔는데 지금에도 궁중에서 공양하고 있다. 또 이 절에는 부처님의 머리털이 있는데, 푸른 색이고 소라같이 오른쪽으로 감기어져 있다. 당기면 길이가 한 자 남짓하고 감기면 한 치쯤 된다. 또 서남쪽 고왕비사(古王妃寺)에는 금동으로 된 부도가 있다. 높이는 1백여 척이고 사리는 한 되 남짓하게 봉안되어 있다. 보름날 밤마다 광명이 서려 돌다가 새벽에는 탑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도성 서남북 라바로산(羅婆路山) 꼭대기 반석 위에 탑이 있는데, 그 높이는 1백여 척이요 사리가 한 되 남짓하게 봉안되어 있다. 산 북쪽의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은 바로 부처님께서 산신(山神)에게서 밥을 받아 드신 뒤에 양치질하고 양지(楊枝)를 씹으시던 곳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양지가 생겨 나서 무성한 숲이 되었으며 절 이름을 양지사라 했다. 또 용지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서 설산을 넘고 흑령(黑嶺)을 지나면통합뷰어
북인도 경계에 이른다. 거기서부터는 다 호국(胡國)이니 제복(制服)과 위의(威儀)가 대하(大夏)와 같지 않다. 여기를 변방 나라 멸려차(蔑戾車)[당나라 말로는 더러운 종족이란 뜻이다.]라 한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중도(中道)에 합한다.
또 동쪽으로 람파국(濫波國)에 이르면 여기는 인도의 북방 경계이다. 인도라는 말은 곧 천축의 바른 이름이다. 또 신독(申毒)ㆍ현두(賢豆)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다 잘못된 이름이다. 북쪽은 설산을 등지고 3면은 큰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남쪽이 좁아 상현(上弦)달 같고 냇물은 편편하고 넓으며 주위는 1만 9천 리이다. 70여 국이 한 국왕의 명령을 따른다. 또 동으로 1백여 리를 가서 큰 산을 넘고 큰 강을 건너면 나가라갈국(那伽羅曷國)에 이른다. 북인도에 속한 것으로서 화씨성(華氏城)이라 부른다. 성 동쪽 2리에 석탑이 있는데, 높이는 3백 척이고 편석(編石)이 우뚝 솟아 있고 조루(雕鏤)가 범상치 않다. 여기는 곧 옛날 연등불(然燈佛)을 만나 기별(記別)을 받을 때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과 머리털로 진흙땅을 덮어 깔았던 곳인데 겁(劫)이 지나도록 아직 남아 있다. 여기에 무우왕(無憂王)이 이 석탑을 세웠다. 재일(齋日)마다 하늘에서 꽃을 내린다고 한다.
또 성내의 큰 탑의 옛 터에는 옛날에 부처님의 이빨이 있었다. 별탑(別塔)의 높이는 3장(丈) 남짓한데, 이것은 허공에서 내려온 것이라 한다. 인공(人工)이 아니니 참으로 신령스러움이 많다 하겠다. 성 서남쪽 10여 리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중인도에서 허공을 타고 내려와 자취를 내리신 곳이다. 또 동쪽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연등불을 만나 꽃을 사셨던 곳이다.
또 성 동쪽 20여 리의 조그만 돌고개 위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다. 동쪽 언덕의 석벽에 있는 큰 동굴은 곧 용왕이 살던 곳이다. 옛날 부처님께서 여기서 용으로 변해 그림자를 머물러 둔 곳으로서 환하기가 마치 진영(眞影)과 같다. 지성으로 비는 자에게는 잠깐 밝게 나타난다고 한다. 굴 밖의 방석(方石)에는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어 그 윤상(輪相)은 광명을 낸다. 굴 서북쪽통합뷰어
모퉁이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경행(經行)하시던 곳이다. 또 그 곁에는 머리털과 손톱을 봉안한 탑이 있다. 굴 서쪽의 돌 위에는 가사를 빨던 무늬가 있다.
또 성 동쪽 30여 리에는 혜라성(醯羅城)이 있고 그 안에는 중각(重閣)이 있다. 그 위에는 부처님의 정수리 뼈를 봉안하였는데 둘레는 1척 2촌이요 빛깔은 황백색이며 털 구멍이 분명하다. 선악을 알고자 하면 그것으로 향니(香泥)에 인(印)치고 다시 향니를 관찰하면 그 마음을 따라 나타난다고 한다. 또 부처님의 해골이 있는데 그 모양은 연잎 같고 빛깔은 정수리뼈와 같다. 부처님의 눈동자가 있는데 크기는 사과알만하며 청백하여 투명하였다. 모두 7보의 병에 넣었는데, 앞의 셋은 보배함에 담아 봉해 두었다. 부처님의 대의(大衣)가 있는데 부드러운 털로 되어 있고 빛깔은 황색이다. 보배함에 넣어 두었는데 조금 해어졌다. 또 부처님의 석장(錫杖)이 있는데 흰 쇠로 고리를 만들고 전단나무로 몸뚱이를 만들었는데 구리함에 넣어두었다.
이상 다섯 개의 성적(聖迹)에 대하여 왕이 다섯 가지 깨끗한 행을 행하는 사람을 시켜 잘 보관하게 하고 그것을 꼭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1금(金)의 돈을 세(稅)로 내게 하고 그 인세(人稅)로 5과(科)를 받았으므로 보배는 더욱 존중되고 예배하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또 중각의 서북에 작은 탑이 있는데 이것은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사람의 손이 탑기(塔基)에 닿으면 탑 위에 올려 놓은 방울이 곧 크게 진동한다. 또 동남의 산골짜기로 5백 리를 가면 건타라국(健陀邏國)에 이른다. 이것은 북인도에 속해 있다. 여기에 큰 논사(論師)가 있으니 저 협존자(脇尊者) 같은 이가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지은 곳이다. 또 보살이 천 개의 눈을 버린 곳이요 또 부처님께서 귀자모(鬼子母)를 교화한 곳이며 또 상막가(商莫迦)보살[구역에서 섬자(睒子)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이 왕의 화살에 맞은 곳이다. 또 탄다락가산(彈多落迦山)[구역에는 단특산(檀特山)이라고 하였다.]의 꼭대기에는 소달나(蘇達拏)가 숨어 살던 곳이요, 바라문이 남녀를 때린 곳으로서 흘린 피가 땅을 적셔 지금 그 초목이 모두 진홍색과 같으며, 바위 틈의 석실은 왕비가 선정을 익히던 곳이다. 또 독각 대선(獨角大仙)이 여자에게 난행(亂行)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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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도성 북쪽으로 산을 넘어 6백여 리를 가던 오장나국(烏仗那國)에 이른다. 이곳은 북인도의 정국(正國)이다.[구역에 오장(烏長)이라고 하였다.]도성 동쪽 5리에 큰 탑이 있는데 많은 상서로운 일이 있다. 즉 부처님께서 옛날 인욕 선인(忍辱仙人)이 되어 갈리(羯利)[이곳 말로는 싸움이란 뜻이다.] 왕에게 사지를 찢겼던 곳이다. 또 방석(方石) 위에는 부처님의 발자국 모양이 있는데 그곳에서 광명이 나와 절을 비춘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하늘을 위해 본생(本生)을 이야기하시던 곳이다. 또 부처님께서 옛날에 법을 듣고 뼈를 꺾어 경을 베끼시던 곳이기도 하다. 또 옛날 시비가왕(尸毘迦王)이 몸을 베어 비둘기를 대신 살려준 곳도 있다. 또 부처님께서 자력왕(慈力王)이 되어 피를 내어 다섯 약차(藥叉)들에게 마시게 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또 큰 절에는 나무로 조각한 매달려야(梅呾麗耶)[구역에서는 미륵(彌勒)이라 하였다.] 보살상이 있는데 금색이 찬란하며, 그 높이는 1백여 척이나 된다. 이것은 말전저가(末田底迦)[구역에서는 말전지(末田地)라 하였다.] 아라한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아라한은 신통의 힘으로 장인(匠人)을 데리고 도사다천(覩史多天)에 올라가 세 번 그 상을 관찰하고 비로소 좋은 상호를 만들었으니 그 신령스러운 상은 이루 다 기술할 수 없다.
또 한 나라를 걸러 강을 건너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에 이르는데 이것은 북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의 서북 70리의 두 산 사이에 탑이 있는데, 그 높이는 1백여 척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자씨(慈氏)가 세상에 나올 것을 예언하셨고, 4대장(大藏) 중의 하나가 여기서 나왔다. 또 도성 북쪽 12리에 월광왕(月光王)의 탑이 있다. 재일에는 항상 신령스런 광명이 방출되고 신선의 꽃이 흩날리며 천상의 음악이 들린다. 근자에 어떤 나병환자가 이 탑에 예참하여 더러움을 제거하고 향을 바름으로써, 오래지 않아 병이 곧 나았고 또 몸이 향기롭고 깨끗했다. 여기는 곧 옛날 부처님께서 전달라발자바왕(戰達羅鉢刺婆王)[구역에는 월광(月光)이라고 했다.]을 위해 그 머리를 보시한 곳이다. 무릇 천 번을 보시하셨다.
또 이라발(伊羅鉢)용왕이 지나간 못이 있고 월광(月光)이 눈을 긁어낸 곳이며 아육왕(阿育王)이 10장(丈)이나 되는 높은 탑을 만든 곳이다. 또 살타(薩埵) 왕자가통합뷰어
몸을 버려 호랑이에게 먹인 곳이요 대나무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내어 짐승에게 먹인 곳으로서, 그 땅과 초목이 지금도 진홍색이다. 또 부처님께서 야차를 교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게 하신 곳이다.
또 두 나라를 거쳐 동남으로 산을 오르는데 쇠다리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북인도에 소속된 것이다.[구역에는 계빈(罽賓)이라 하였다.] 이 나라 안에 네 개의 부도가 있어 거기에는 각각 한 되 남짓한 사리가 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 4백 년 되던 해에 협(脇)존자는 나이 80세에 비로소 출가하여 무학과(無學果)를 증득했다. 그리고 5백 아라한을 데리고 여기에 와서 오파제삭석소달람장(鄔波弟鑠釋素呾纜藏)[구역에는 우바제사론(優婆提舍論)이라 하였다.]을 짓고 다음에는 비나야비바사론(毘奈耶毘婆沙論)을 지었으며 다음에는 아비달마론(阿毘達磨論)을 지었다. 이 3논은 각각 10만 송(頌) 무릇 660만 언(言)이며, 3장(藏)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어금니가 있으니 길이는 한 치 반이요 빛깔은 황백색이며 재일에는 광명을 놓는다. 또 관자재보살의 입상(立像)이 있어서, 보기를 원하는 자가 음식을 끊으면 곧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세 나라를 거쳐 동으로 가면 나복저국(那僕底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북인도에 소속된 것이다. 도성의 동남 5백여 리에 암림사(暗林寺)가 있는데 주위는 20여 리이며 부처님의 사리탑이 수백천 개가 있고 또 석실(石室) 등이 있다. 현겁(賢劫)의 천 불(千佛)이 여기에 서서 설법하셨다고 한다. 석가세존께서 멸도하신 지 3백 년 만에 가다연나(迦多衍那)[구역에는 가전연(迦旃延)이라 하였다.]가 여기에서 『대지론(大智論)』을 지었다. 절 탑의 높이는 20여 장(丈)이요 4불(佛)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는 곳이다.
또 네 나라를 걸러, 동으로 가면 말누라국(秣菟羅國)에 이르는데 이것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구역에는 마투라국(摩偸羅國)이라 하였다.] 그리고통합뷰어
사리자(舍利子)ㆍ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구역에서는 목련(目連)이라 하였다.]ㆍ만자자(滿慈子)[구역에서는 부루나(富婁那)라고 하였다.]ㆍ우파리(優波釐)[구역에서는 우파리(優波離)라고 하였다.]ㆍ아난타(阿難陁)ㆍ라호라(羅怙羅)ㆍ만수실리(曼殊室利) 등의 여러 탑이 있다. 매년 3장월(長月)과 6재일(齋日)에는 여러 승니(僧尼)들이 모여 이 모든 탑에 공양한다. 즉 아비달마의 대중들은 사리자의 유탑에 공양하고, 참선하는 대중은 목건련의 탑에 공양하며, 경을 외우는 대중은 만자(滿慈)의 탑에 공양하고, 비나야(毘奈耶)의 대중은 우파리의 탑에 공양하며, 비구니 대중은 아난의 탑에 공양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한 대중은 라호라의 탑에 공양하며, 그 외의 대중은 모든 보살의 탑에 공양한다.[이런 모든 탑은 반드시 유신(遺身)이 아니요 다만 그 입상(立像)에 대해 공양을 베풀고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 라호라ㆍ문수실리 등은 경에 의하면 멸도(滅度)하지 않았다는 것이니, 이런 예(例)로 준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도성 동쪽 6리쯤에 산애사(山崖寺)가 있는데 이 절은 오파국다(烏波★多) 존자가 지은 절로서 거기에는 부처님의 손가락과 손톱을 봉안한 탑이 있다. 절 북쪽에 석실(石室)이 있고 석실 동남 20여 리에 마른 못이 있으며 못 옆에는 탑이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여기에 계실 때 원숭이가 꿀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바쳤던 곳인데 부처님께서 그 꿀을 물에 타서 대중과 함께 마셨다. 원숭이는 기뻐하면서 구덩이에 떨어져 죽었다가 곧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못 북쪽 숲 속에 네 분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던 곳이 있고 또 그 유적이 많이 있다.
또 한 나라를 걸러, 동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솔록륵나국(窣祿勒那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동쪽 경계는 긍가강[殑伽河][구역에서는 항하(恒河)라고 하였다.]에 다달았고 북쪽은 큰 산과 접해 있다. 도성의 동남에 있는 염모나하(閻牟那河)는 이 나라 서북의 산에서 나와 경계를 가운데를 가르고 흐른다. 도성의 동쪽은 염모강에 다다랐고 강 서쪽에는 큰 절이 있으며 절 동문 밖에는 탑이 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서 설법하여 사람들을 제도하셨다고 한다. 그 곁에는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다.
염모강 동쪽 8백여 리를 가면 긍가의 근원에 이른다. 너비는 3,4리요 동남은통합뷰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너비는 10여 리이다. 물빛은 푸르고 물맛은 달며 가는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른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복물이라 하여, 여기서 목욕하면 죄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혹은 목숨을 가벼이 여겨 스스로 여기 빠져 죽어 천상에 나서 즐거움 받기를 기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매우 영감이 있다고 한다.
또 여섯 나라를 걸러, 여기서 동남으로 가면 겁비타국(劫比他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여기엔 열 개의 천사(天祠)가 있어 모두 대자대천(大自在天)을 섬긴다. 다 천상(天像)을 만들어 모시고 있는데 그 상(像)은 인근(人根)과 같고 모양은 매우 길고 크다. 그러나 속인들은 그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이른바 모든 중생은 천근(天根)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성 동쪽 20여 리에 큰 절이 있고 그 곁에 있는 큰 담 안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부처님을 위해 세 길의 보배 계단[寶階]을 만들었는데 가운데는 황금으로 만들고 왼쪽은 수정으로 만들며 오른쪽은 백은으로 만들었다. 남북으로 벌려 있고 동쪽으로 해서 땅으로 내려간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서다림(逝多林)[구역에서는 기타림(祇陀林)이라 하였다.]으로부터 하늘에 올라 선법당(善法堂)에 이르러 그 어머님을 위해 석 달 동안 설법하시고 내려오신 곳이다. 1백 년 전에만 해도 그 보배 계단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
뒤의 왕이 그것을 본떠 만들었는데 높이가 70여 척이고 위에는 정사(精舍)를 세웠다. 돌 옆에 기둥이 있어 윤기가 나고 빛이 나는데, 그 사람의 지은 죄와 복이 그 기둥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은 아육왕이 만든 것이다. 섬돌 곁에 부도가 있으니 4불이 다니고 앉고 하던 곳이다. 또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던 곳에도 탑을 세웠고 부처님께서 입실(入室)하셨던 정사가 있다. 또 그 곁에는 부처님께서 거니시던 돌터가 있는데 길이는 50보(步)이고 높이는 7척이며 발로 밟을 수 있는 곳으로서 다 연꽃 무늬가 있다. 또 그 터의 좌우에 있는 작은 탑은 범왕(梵王)이 만든 것이다. 그 다음의 앞은 바로 연화니(蓮華尼)가 윤왕(輪王)으로 화하여 먼저 부처님을 뵈옵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연화니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가 아니다. 소부저(蘇部底)[구역에서는 수보리(須菩提)라고 하였다.]는 석실(石室)에 편안히 앉아 모든 법이 공(空)함을 알았다. 그가 먼저 내 법신(法身)을 보았느니라.’
통합뷰어
또 여기서 북으로 2백 리를 가면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이 있는데 이 나라는 곧 중인도의 곡녀성(曲女城)이다. 이 도성의 서쪽은 긍가강과 가까운데 길이는 20여 리요 너비는 4, 5리이니, 즉 5인도를 통솔하는 왕도이다. 왕의 처음 성(姓)은 시라일다(尸羅逸多)[당나라 말로는 계일(戒日)이라고 함] 폐사(吠奢)이다. 왕이 처음 왕위에 오르려 할 때 긍가강 언덕에 있는 관자재(觀自在)의 상(像)이 왕에게 말하였다.
‘너는 본래 이 숲 속에 있는 난야(蘭若)의 비구였다. 금이월왕(金耳月王)이 불법을 멸하였으니, 왕이 다시 불법을 일으키고 마음으로 세상을 가엾이 여기면 비로소 5경(境)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사자좌(師子座)에 올라 대왕이란 호(號)를 일컫지 말라.’
왕은 이에 동자왕(童子王)과 함께 외도들을 평정하고 월왕(月王)의 무리들도 또 엄령(嚴令)을 약속하게 했다. 즉 ‘고기를 먹는 자는 그 혀를 끊을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자는 그 손을 벨 것이다.’
이리하여 그 과부인 누이동생과 함께 나라 일을 맡아 다스렸다. 긍가강 옆에 천여 개의 부도를 세우니 높이는 각각 1백여 척이었다. 25년 동안 내리 5년마다 한 번씩 보시회(布施會)를 열고 고을 창고를 기울여 중생들을 구제하면서도 오직 병기만은 쌓아 뜻밖의 일에 대비했다. 처음 법회를 여는 날에는 모든 나라의 스님들을 모아 37일 동안 4사(事)로 공양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만일 계행이 견고하고 도덕이 우수한 자이면 사자좌에 오르라. 왕은 곧 계를 받을 것이다. 청정한 무학(無學)이면 숭앙(崇仰)을 보일 것이요 더러운 행이 드러나는 자는 나라 밖으로 쫓아내리라.’
도성 서북쪽에 있는 탑은 아육왕이 만든 것으로서 옛날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7일 동안 설법하셨다. 그 곁에는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고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다. 또 남으로 긍가강에 다달으면 부처님의 어금니가 있는데 길이는 한 치 반이요, 빛깔은 변했는데 보배함에 넣어 두었다. 사방에서 참배하러 오는 자가 하루에도 백천이나 되었으므로,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번거롭고 시끄럽다 하여 금보배의 세(稅)를 비싸게 받았다. 그래도 즐겨 예배하는 사람은 그 비싼 돈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일에는 그것을통합뷰어
높은 자리 위에 두어, 흩는 꽃이 쌓였으나 그 이빨은 묻혀지지 않았다.
또 도성 동남쪽 1백여 리에 탑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일찍이 7일 동안 설법하셨던 곳이다. 그 안에 사리가 있어 때때로 광명을 놓으며, 그 곁에는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시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절 북쪽 4리쯤 지나 긍가강에 이르면 탑이 있다. 부처님께서 일찍 여기서 7일 동안 설법하시어 5백 아귀가 그 설법을 듣고 깨달아 천상에 났다고 한다. 그 곁에는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봉안한 탑이 있고 다음의 곁에는 또 4불이 다니고 앉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아수타국(阿輸陀國)으로 갔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 북쪽 5리쯤에 있는 긍가강 언덕에 큰 절이 있고 거기 탑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늘 사람을 위해 석달 동안 설법하신 곳이요 또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다. 다음에는 서쪽 5리에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다. 도성의 서남쪽 5리에 있는 큰 암몰라(菴沒羅)숲 속에 있는 오래된 절은 아승가(阿僧伽)보살이 밤에 천궁(天宮)에 올라가 미륵에게서 유가장엄(瑜伽莊嚴)의 대승 경론과 중변론(中邊論) 등을 받아 가지고 낮에 내려와 대승에게 그것을 설명한 곳이다. 그 숲 서북 백여 보에는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다. 도성의 동남 긍가강에 다달아 탑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석달 동안 설법하신 곳이다. 거기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푸른 돌탑이 있고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다.
또 두 나라를 걸러, 동남으로 가면 발라가야국(鉢羅伽耶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속한다. 도성의 서남은 염모(閻牟)강에 다달았고 그 굽이에 탑이 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서 외도를 항복받은 곳으로서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고 부처님께서 경행하시던 곳이다. 또 제바(提婆)보살이 『광백론(廣百論)』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성내에 천사(天祠)가 있는데 사당 앞의 큰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식인귀(食人鬼)가 그것을 의지해 있어서, 그 좌우에 죽은 사람의 뼈가 쌓여 있다. 그 사당에 가는 사람은통합뷰어
모두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귀신의 꾀임에 빠져 나무에 올라가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도성 동남쪽 두 강 사이는 너비가 10여 리요 토지는 편편하고 풍부하며 가는 모래가 많이 깔려 있다. 고금의 왕족과 귀족들이 모든 것을 끊이지 않고 보시하였으므로 그곳을 대시장(大施場)이라고 했다. 계일(戒日) 대왕도 여기서 이 업을 닦았다. 대시장 동쪽의 두 강이 합해지는 어귀에는 하루 몇 사람씩 스스로 물에 빠져 죽으므로 그 나라 풍속에는 이 자리를 생천소(生天所:하늘에 나는 곳)라 했다. 이 법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7일 동안 음식을 끊은 뒤에, 스스로 물 속에 빠져 죽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든다. 심지어 산의 원숭이나 들의 짐승과 사슴떼까지도 물가에서 놀다가 먹이를 끊고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한다. 계일왕이 보시를 행할 때, 어떤 두 마리 원숭이가 있었는데 암컷이 개한테 죽었을 때 수컷은 그 시체를 지고 가서 물 속에 던지고, 자신도 여러 날을 굶다가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또 여기서 서남쪽으로 큰 숲 속을 5백 리쯤 가면 교상미국(憍賞彌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 안 고궁(故宮)의 큰 정사(精舍)의 높이는 60척이다. 전단나무로 새긴 불상이 있고 그 위에는 돌 일산이 매달려 있다. 이것은 오타연나왕(隖陀衍那王)[구역에서는 우타연왕(憂陀延王)이라 하고, 당나라 말로는 출애(出愛)라고 함]이 지은 것으로서, 신령스런 광명이 가끔 일어난다고 한다. 여러 왕들이 힘으로 그것을 들어 보려고 했으나 끝내 옮길 수 없었다. 옛날 부처님께서 그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올라가 설법하실 때, 왕은 목건련을 청해 신력(神力)으로 하늘에 올라가 그 상(相)을 본떴는데, 부처님께서 내려오시자 그 불상은 곧 일어나 부처님을 맞이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위로하시며 말씀하셨다.
‘비로소 불사(佛事)를 했구나.’
정사 동쪽 1백여 보쯤에는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던 우물은 지금도 길어 쓴다.
도성 안 동남 모퉁이에는 구사라(具史羅) 장자(長者)의 집이 있고 부처님의 정사(精舍)와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으며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다. 도성의 서쪽 9리의 석실은 부처님께서 독룡(毒龍)을 항복받은 곳이요 그 곁에는 큰 탑이 있는데통합뷰어
높이는 30여 장(丈)이다. 부처님의 경행하시던 자취와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어서 병자들이 기도하면 낫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이 다 멸하였으므로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이 나라 국경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연히 슬픈 감정이 일어난다. 굴 동북으로 7백 리를 지나 긍가강 북쪽 언덕을 넘으면 가사포라성(迦奢布羅城)에 이른다. 이곳은 호법(護法)보살이 외도를 항복받은 곳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서 6개월 동안 설법하셨다. 부처님께서 경행하시던 자취와 또 머리털과 손톱을 안치한 탑이 있다.
또 여기서 북으로 180리를 가면 비삭가국(鞞索迦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 남쪽에 절 탑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丈)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서 6년 동안 설법하신 곳이기도 하다. 그 옆에 기이한 나무가 있는데 높이는 70척이요 봄과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다. 이 나무는 부처님께서 이를 닦고 버린 나무가 다시 살아나 우거진 것으로서, 모든 사특한 외도들이 다투어 베어 버리려 하지만 곧 그대로 살아 있으며, 베는 자는 재앙을 받는다고 한다. 그 옆에는 4불이 다니고 앉던 자취가 있고 또 머리털과 손톱의 탑이 있는데 탑의 밑부분과 모서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숲과 못의 그림자가 서로 어울려 있다.
또 여기서 동북으로 5백 리를 가면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중인도에 소속된 나라이다.[구역에는 사위국(舍衛國)이라 하였다.] 도성은 다 황폐해 있다. 옛 궁전의 동쪽 터에 작은 탑이 있으니 이것은 발라서나시다왕(鉢羅犀那恃多王)[구역에서는 바사닉(波斯匿)이라 하고, 당나라말로는 승군(僧軍)이라 함]의 비구니가 정사를 지은 곳이다. 다음 동쪽 탑은 소달다(蘇達多)[당나라 말로는 선시(善施)라고 함]의 옛 집이다. 그 옆에 큰 탑이 있으니 이것은 앙루리마라(鴦窶利摩羅)[당나라 말로는 지만(指鬘)이라 함]가 그릇된 소견을 버린 곳이다.
또 도성의 남쪽 6리쯤에 서다림(逝多林)이 있으니 이것은 급고독원(給孤獨園) 태자가 지은 절이다. 지금은 다 황폐해져 있지만 그래도 돌기둥만은 그대로 있으며 높이는 70여 척이다. 아육왕이 지은 벽돌방 하나만 남아 있고 다른 것은 다 없어졌다. 방 안에는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던 금상(金像)이 있다. 동북에는 부처님께서 앓는 승려를 씻어 주신 탑이 있고,통합뷰어
서북쪽에는 목건련이 신자(身子:사리불)의 옷을 들어 준 탑이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우물 탑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물을 길어 쓰시던 곳이다. 또 사리불이 부처님과 길을 거닐 때 설법하던 곳이 있고 또 그것을 표시한 탑이 있는데, 신령스런 음악과 이상한 향기가 항상 그 자리에 내린다고 한다. 또 어떤 외도가 그 딸이 가만히 부처님을 비방했다 하여 죽인 곳이 있는데 거기 탑을 세워 그 자리를 표하였다.
절 동쪽 백여 보에 깊은 구덩이가 있으니 이것은 조달(調達)이 독약으로 부처님을 해치려다가 산 채로 빠져 들어간 곳이다. 또 남쪽에 큰 구덩이가 있으니 이것은 구가리(瞿伽離) 비구가 부처님을 헐뜯다가 산 채로 빠져 들어간 곳이다. 또 남쪽 8백 보에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으니 그곳은 전차(戰遮) 바라문의 딸이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빠져 들어간 곳이다. 이상의 큰 구덩이 세 개는 모두 깊이 통해져 있어 밑바닥이 없는데 아무리 큰 비가 쏟아져도 끝내 막히거나 무너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절 동쪽 70보에 영복(影覆)이라는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60척이요, 거기 동남으로 향한 좌상(坐像)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외도들과 논하시던 곳이다. 다른 동쪽에 천사(天祠)가 있으니 크기는 정사와 같다. 처음 해가 떠올라 서쪽을 비추어도 그 그림자는 정사를 덮지 않으나 지는 해가 동쪽을 비추면 그 그림자는 천사를 덮는다. 또 동쪽 4리에 큰 마른 못이 있으니 이곳은 비로석가왕(毘盧釋迦王)[구역에서는 유리왕(琉璃王)이라고 하였다.]이 땅 속으로 빠져 들어간 곳으로서 뒷사람이 이것을 표기해 두었다. 또 신자(身子)가 처음 절을 지을 때 외도와 힘을 겨루었던 곳이 있는데 이곳도 탑을 세워 표시했다.
절 서북쪽 4리에 득안림(得眼林)이 있고 그 안에 부처님께서 경행하시던 자취의 탑이 있다. 그 승군왕(勝軍王)이 5백 명 적의 눈을 후벼 뽑았을 때 저들은 부처님의 자비의 힘이란 말을 듣고 일시에 눈이 다 나았고, 무기를 버리고 드디어 다 살아났다고 한다. 도성 서북 60리에 있는 옛 성은 사람의 수명이 2만 년이던 때에 가섭파(迦葉波)부처님께서 나신 곳이다. 그 북쪽은 곧 이 부처님의 온몸 사리가 있는 곳인데 아육왕이 탑을 만들어 그것을 표하였다.
또 동남쪽으로 5백 리를 가면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國)에 이르는데통합뷰어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한 곳이다.[구역에서는 가비라국(迦毘羅國)이라고 하였다.] 옛 성에는 사는 사람이 없다. 성내의 정전(正殿) 터에는 정사가 있고 그 안에는 왕의 상(像)이 있다. 그 옆에는 마하마야(摩詞摩耶)[당나라 말로는 대술(大術)이라고 함] 부인의 침전(寢殿)이요, 터 위의 정사에는 부인의 상(像)이 있다. 그 옆의 정사에는 보살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신(神)이 내리는 모양에 대하여는 주장이 여러 가지가 있다. 상좌부(上座部)에서는 ‘당나라의 5월 15에 해당한다’고 하였고, 또 다른 여러 부(部)에서는 ‘이 나라의 5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그 보고 들음이 다르기 때문일 뿐이다.
도성 남쪽에는 탑이 있는데 그곳은 태자(太子)가 힘을 겨룰 때 코끼리를 던져 성을 넘기고 코끼리가 땅에 떨어져 큰 구덩이가 파인 곳이다. 그 옆에 있는 정사에는 태자의 상이 있고 또 태자가 공부하던 곳이다. 그 옆에 있는 정사는 태자비(太子妃)의 침전으로서 야수타라(耶輸陀羅)와 라후라의 상이 있다. 별본(別本)에 이르기를 ‘태자는 초저녁에 성 북문을 열고 나갔다’고 했다. 또 성 동남쪽 정사에는 태자가 흰 말을 타고 공중을 날아 성을 넘었던 곳을 만들어 놓았고, 네 개의 성문에 각각 정사가 있고, 노(老)ㆍ병(病)ㆍ사(死)ㆍ사문(沙門) 등의 상을 만들었다.
성 남쪽 4리 되는 곳에 니구로(尼拘盧)숲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도를 얻은 뒤에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신 곳이다. 성 남쪽 50리에 있는 옛 성내의 탑은 사람의 수명이 6만 세이던 때에 가라가촌태(迦羅迦村駄)부처님께서 본래 나신 성이요, 이 성 동남에 있는 탑은 이 부처님의 유골(遺骨)이 있는 곳이다. 무우왕(無憂王)이 그 앞에 돌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그 높이는 3장(丈)이다. 또 동북쪽 30리에 있는 옛 성 안의 탑은 곧 사람의 수명이 4만 세이던 때에 가낙가모니(迦諾迦牟尼)부처님께서 본래 나신 성(城)이요, 이 성 동북쪽에 있는 탑은 이 부처님의 유골이 있는 곳이다. 무우왕이 그 앞에 돌기둥을 세우고 명(銘)을 기록하였는데 높이는 2장 남짓하다.
성 동북 40여 리에는 태자가 태어난 나무가 있는데 그 밑에 탑이 있다.통합뷰어
성 서북에 있는 여러 백천 개의 탑은 죽은 석자(釋子)를 기념하는 탑이다. 즉 네 사람의 석자가 왕의 군사에 항거하자 유리왕(瑠璃王)은 성에서 퇴각하여, 사람들은 화를 입지 않게 되었으며 성을 나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성 남쪽의 니구율(尼拘律)나무 밑에 세운 탑은 부처님께서 처음 와서 그 아버지를 뵙던 곳이다. 성 남문 밖의 탑은 곧 태자 형제가 활 쏘기를 겨루던 곳이다. 그 동남 30여 리에는 태자가 쏜 화살이 땅에 박혀 샘물이 솟아나왔으므로, 세상에서는 그것을 화살샘이라 전해오는데 병든 사람이 마시면 대부분 병이 낫고, 혹은 그 진흙을 이마에 바르면 고통이 다 낫는다고 한다.
또 동북쪽 90리의 랍벌니(臘伐尼)숲에는 석종(釋種)들이 목욕하던 못이 있는데 꽃과 물이 서로 비친다. 그 북쪽으로 25보쯤에는 무의화(無意華)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다 말라 죽었으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고, 상좌부(上座部)에서는 ‘이 나라의 3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다음 동쪽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두 마리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곳이다. 부처님께서 처음 탄생하시자마자 부축하는 이도 없이 사방으로 각각 7보를 걸으셨는데, 그 밟으신 두 자리에서는 큰 연꽃이 났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실 때 제석천이 옷으로 받고 사천왕은 그를 받들어 금궤 위에 올려 놓았다. 이상 네 탑 앞에는 다 돌기둥을 세워 그것을 표했다. 그 곁에 작은 강이 동남으로 흐르는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기름강[油河]’이라 한다. 이것은 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하늘이 못을 변화시켜 광택이 나게 하고 태자를 목욕시킴으로써 풍허(風虛)를 제거한 곳이다. 지금은 강으로 변했으나 아직도 기름기가 있어 마치 기름[油]과 같다.
또 여기서 동으로 2백 리에 있는 황폐한 숲 속으로 들어가면 람마국(藍摩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은 비어 있고 그 동남쪽에 불탑이 있는데 1백 척이 못 된다. 옛날 8분의 1의 사리가 있어 때때로 신령스런 광명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옆에 맑은 못이 있고 용이 변해 뱀이 되어 밖으로 나와 그 탑을 돌며, 들코끼리가 꽃을 꺾어 거기 흩었다고 하며, 무우왕(無憂王)이 그 탑을통합뷰어
열어 보려 했으나 용이 지키고 있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동쪽으로 큰 숲 1백여 리에 큰 탑이 있는데 이것은 태자가 여기 와서 보배옷을 벗고 가지고 있던 천탁가(闡鐸迦)에게 주어 부왕(父王)에게로 돌려보낸 곳이다. 또 동으로 가면 섬부(贍部)나무의 마른 그루터기가 있고 거기 작은 탑이 있는데 이것은 태자가 입고 있던 옷을 추한 베옷과 바꿔 입은 곳이며, 그 옆의 탑은 머리를 깎은 곳이다. 그 때의 나이에 대해서는 일정하지 않은데, 혹은 19세라 하기도 하고 혹은 29세라 하기도 한다. 또 동남으로 190리를 가면 니구타(尼拘陀)숲이 있는데 그 숲 속에 탑이 있다. 이 탑의 높이는 3장(丈)이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부처님을 화장한 자리로서 남은 재를 모아 거기에 세운 탑으로서, 병자가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또 4불이 다니고 앉고 했던 자리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1백여 척이고, 그 좌우에 수백 개의 작은 탑이 있다.
또 여기서 동북으로 거칠고 험한 큰 임야가 있는데 그 숲을 5백 리쯤 가면 구시나갈라국(拘尸那揭羅國)에 이른다.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성은 황폐하고 사람은 적으며 성안 동북쪽 모퉁이에는 탑이 있는데 이곳은 순타(純陀)의 옛 집터이다. 그 우물은 아직 맛이 있는데 공양을 위해 판 것이라고 한다. 성 서북 4리에 있는 아시다벌저하(阿恃多伐底河)[당나라 말로는 유금(有金)이라 함]를 건너면 서쪽 언덕의 사라숲에 가깝다. 이 두 숲 중간의 거리는 40보요, 그 가운데 있는 네 그루의 나무는 특히 높다. 거기 큰 벽돌로 지은 정사가 있고 그 안에 부처님의 열반상(涅槃像)이 있다. 북으로 머리하여 누워 있고 곁의 높이는 2백여 척이다. 그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부처님께서 멸도한 상(相)을 기록해 두었다. 어떤 이는 그 때를 ‘이 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고, 설유부(說有部)에서는 ‘우리 나라의 9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 여러 부(部)의 이의(異議)에는 ‘지금이 용삭(龍朔) 3년(663)이니 1,200년을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보리사(菩提寺) 돌기둥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혹은 1,300년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1,500년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비로소 9백 년을 지냈으니 1천 년이 못 된다’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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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사 옆에는 부처님께서 옛날 꿩의 왕을 위해 불 속에서 구하였고, 또 사슴을 구해 살린 곳이라고 하는데 각각 탑 하나씩을 세웠다. 다음의 서쪽 탑은 곧 소발타라(蘇跋陀羅)[당나라 말로는 선현(善賢)이라고 함]가 멸증(滅證)한 곳이요, 다음의 한 탑은 곧 집금강신(執金剛神)이 땅에 앉아 있던 곳이며, 다음의 한 탑은 곧 7일 동안 널[棺]을 놓아 두었던 곳이요, 다음의 한 탑은 아니루타(阿泥樓陀)가 하늘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알리고 다시 내려와서 부처님을 곡(哭)한 곳이다.
성 북으로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를 건너 3백 보에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으로서 지금도 누렇고 검은흙에 재와 숯이 섞여 있다. 여기에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사리를 얻는다고 한다. 또 다음 그 옆에 한 탑이 있으니 이곳은 부처님께서 대가섭에게 두 발을 보이셨던 곳이다. 다음에 또한 탑이 있고 그 앞에 세운 돌기둥에는 8국(國)에 사리를 나눈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 여기서 서남쪽은 큰 숲이 있다. 5백 리를 가면 바라닐시국(婆羅★女詰反廝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된 나라이다.[구역에서는 파라나(波羅奈)라고 하였다.] 도성의 서쪽은 긍가강에 다달았고 성 안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성 동북쪽에 바라닐사강[婆羅★斯河]이 있고 동북 10여 리에는 녹야사(鹿野寺)가 있다. 또 서남쪽에 탑이 있는데 그 탑의 높이는 백여 척이요 그 앞에는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가 70여 척이다. 이것은 환히 트이고 청정하여 여기서 정성을 들이면 그 선악을 따라 상(像)이 거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는 곧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뒤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신 곳이다. 그 곁에 세 개의 탑이 있는데 옛날 3불이 다니고 앉고 하던 곳이요, 그 옆의 여러 탑은 5백 독각(獨覺)이 멸도에 든 곳이다. 또 옆의 한 탑은 자씨(慈氏)보살이 기별(記別)을 받았던 곳이다.
또 서쪽에 한 탑이 있는데 이 탑은 부처님께서 과거에 호명(護明)보살이 되어 가섭파부처님께 기별을 받고 현세에 도를 이룬 곳이다. 다음 남쪽에 4불이 경행하던 곳이 있는데 그 길이는 50보이고 높이는 7척이며 푸른 돌로 쌓아 이루어졌다. 그 위에는 석가세존께서 경행하시는 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형상이 특이하여 살상투와 수염과통합뷰어
머리털과 머리가 불쑥 튀어 나와 있다. 그리고 신령스럽고 징험이 있다. 이런 절의 자취가 매우 많으며 정사와 부도도 수백이나 있으니 이런 일은 다 기술하기 어렵다.
절 서쪽에 맑은 못이 있는데 둘레는 2백 보이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손 씻고 목욕하시던 곳이다. 다음의 서쪽 못은 부처님께서 옛날 일찍이 그릇 씻던 곳이고 다음 북쪽의 작은 못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옷을 빨던 곳이다. 다음의 세 못은 용이 그 못 속에 살고 있으며 물은 맛나고 맑다. 누구나 함부로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금비라(金毘羅)라는 짐승이 곧 그를 해친다고 한다. 그 옆에 네모진 돌[方石]이 있고 그 위에는 부처님께서 입던 가사의 무늬가 있다. 외도나 흉한 사람이 함부로 그것을 밟으면 못 속의 용이 곧 바람과 비를 일으켜 그를 해친다. 또 그 옆에 부도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가진 코끼리의 왕이 되었을 때, 사냥꾼이 법의(法衣)를 입은 것을 보고 일부러 그 어금니를 빼어 그에게 준 곳이다. 또 한 탑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옛날 코끼리가 되어 원숭이와 서로 크고 작은 일을 물으셨던 곳이다. 또 큰 숲 속에 탑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옛날 조달과 함께 사슴의 왕이 되었을 때, 부처님께서 대신 사슴의 목숨을 잉태한 곳이다. 그로 인해 녹야(鹿野)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다.
절 서남쪽 3리에 한 탑이 있으니 이곳은 다섯 사람이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이다. 또 숲 동쪽 3리에 한 탑이 있는데 이 탑은 부처님께서 옛날 토끼가 되었을 때, 다른 여러 짐승들보다 자신의 몸이 작은 것을 알고, 몸을 불살라 다른 짐승들을 먹임으로써, 그로 인해 감동한 제석천이 내려와 찬탄한 곳이다. 그러므로 달 속에 토끼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 동으로 긍가강을 따라 3백 리를 가면 전왕국(戰王國)에 이른다. 도성 안에는 사람이 가득 살고 있고 성은 긍가강에 임해 있다. 성 서북쪽에 탑이 있는데 거기에는 부처님의 사리 한 되가 들어 있다. 부처님께서 옛날 여기서 7일 동안 설법하셨고 아울러 4불이 다니던 곳이기도 하다. 강 북쪽에는 부처님께서 귀신을 항복받은 탑이 있는데, 반은 이미 땅에 묻혀 있다. 또 부처님께서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위해 설법하신 곳이 있다. 또 동남쪽으로 강을 건너 1백여 리쯤에 탑이 있는데 여기는 사리를 나누어 담았던 병과통합뷰어
또 남은 사리가 있어 재일에는 광명을 놓는다고 한다.
또 동북으로 긍가강을 건너 150여 리를 가면 폐사리국(吠舍釐國)[범어는 비사리(毘舍離)라고 함]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은 다 허물어졌고 옛 터의 둘레는 70리이다. 그 성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적고 궁성 둘레는 5리이다. 궁성 서북 6리에 탑이 있는데 이 탑은 부처님께서 『유마경』을 말씀하신 곳이며, 또 동쪽 탑은 사리자가 증과(證果)한 곳이다. 또 동쪽의 큰 탑은 곧 왕이 한 몫으로 받은 사리 한 섬을 얻고 무우왕(無憂王)은 아홉 되를 가지고 똑같이 나누어 다른 탑을 지었다. 그 뒤에 어떤 왕이 그 탑을 열려 할 때 땅이 진동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남쪽에는 원숭이가 부처님을 위해 판 못이 있고, 못 서쪽은 원숭이들이 부처님의 발우를 가지고 나무에 올라가 꿀을 취하던 곳이며 못 남쪽은 원숭이들이 부처님께 꿀을 바치던 곳으로서 각각 탑의 기록이 있다.
절 동쪽 4리쯤에 탑이 있는데 이 탑은 유마힐의 옛 집터로서 지금도 신령스러움이 많다. 그 집은 벽돌을 포개 지은 것이었는데 돌로 쌓았다고 전하며 이곳은 곧 설법을 한 곳이며 병을 나타낸 곳이기도 하다.
당나라 현경(顯慶) 때에 칙사(勅使) 위장사(衛長史) 왕현책(王玄策)은 곧 인도에 가서 정명(淨名)의 집을 지나다가, 홀(笏)로 그 집터를 재보았더니 10홀(笏)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집을 방장실(方長室)이라 했다. 또 보적(寶積) 장자(長者)의 집이요 암라녀(菴羅女)의 집이며 부처님의 이모(姨母)가 멸도(滅度)한 집이다. 다 탑을 세워 표기했다. 절 북쪽 4리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로 가실 때 하늘 사람들이 전송한 곳이다. 또 그 뒤에 한 탑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최후에 성읍(城邑)을 바라보시던 곳이고, 그 다음 것은 암라녀가 부처님께 동산을 보시한 곳이다. 그 옆의 한 탑은 곧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열반을 세 번 알리신 곳이며 또 그 옆의 한 탑은 곧 천 명의 아들이 부모를 뵈옵던 곳이니 곧 현겁(賢劫)의 천 불(佛)이다.
또 그 동쪽으로 옛날 중각강당(重閣講堂) 터에 있는 탑은 때때로 광명을 놓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통합뷰어
보문주(普門住)를 말씀하시던 곳이다. 성 동남쪽 15리에 큰 탑이 있는데 이것은 7백 성현이 거듭 결집(結集)한 곳이며, 긍가강 남북 언덕에 각각 탑이 있으니 이것은 아난타가 몸을 나누어 두 나라에 준 곳이다.
또 한 나라를 걸러, 서북으로 1,500리를 가서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니파라국(尼波羅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북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 동남으로 멀지 않은 곳에 수화림(水火林)이 있다. 그 동쪽 1리쯤에 아기파미(阿耆波濔)못이 있는데 둘레는 20보이다. 가물거나 장마가 나도 물이 가득 차서 흐르지 않고 항상 끓어오른다. 불을 던지면 온 못에 불이 일어나 연기와 불꽃이 여러 자를 치솟고, 그 불에 물을 뿌리면 불은 더욱 치성해지며 흙을 던져도 다 타버리고 그것을 던지는 자도 함께 타버린다. 거기에 솥을 걸고 음식을 익히면 곧 익는다. 『현덕전(賢德傳)』에서 말하였다.
‘이 물 속에는 전에 금궤가 있었다. 옛날 어떤 국왕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집어 올렸다. 금궤가 진흙에서 나왔을 때에 사람과 코끼리가 아무리 당겨도 가득하지 않았다. 밤에 신(神)이 말하기를, 이 속에는 자씨불(慈氏佛)의 관(冠)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뒤에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그것을 써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화룡(火龍)이 보호하는 것이다.’
성 남쪽 10여 리에 높은 산은 우뚝하고 절은 첩첩해서, 그 형상이 마치 구름과 노을 같고 또 소나무와 대나무 같았다. 어룡(魚龍)은 사람을 따르고 잘 길들여져 사람에게 와서 먹이를 취해 먹었으므로 그것을 죽이는 자는 그 한 가문을 다 멸망시켰다.
근래에 나라의 명령으로 이 나라를 왕래하였으니, 그곳은 동녀국(東女國)과 토번(土蕃)의 접경으로서 당(唐)과 범(梵:인도)과의 거리는 만여 리이다.
또 남으로 150리를 가서 긍가강을 건너면 마갈타국에 이르는데 이곳은 중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성에 사는 사람은 적고 도시와 촌락은 매우 많다. 옛 성은 왕사성(王舍城)의 산 북동 240리에 있어 긍가강에 다달았다. 옛 궁전 북쪽의 돌기둥은 높이가 수 장(丈)이며통합뷰어
옛날 무우왕(無憂王)이 지옥을 만든 곳이다. 이 왕은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증손이요 또 계일왕(戒日王)의 사위이다. 그가 다스린 성의 이름을 화씨성(華氏城)이라 하는데 왕궁에 꽃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했다.
돌기둥 남쪽에 큰 탑이 있으니 이것은 8만 4천 탑의 하나로서, 부처님의 사리 한 되를 넣어 두어 때때로 광명을 발하는 상서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우왕이 만든 것이고 근호(近護) 아라한이 귀신을 부려 지은 것이다. 그 옆의 정사 안에 큰돌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려고 북으로 구시(拘尸)로 가서 남으로 마갈타를 돌아보신 곳이다. 그러므로 이 돌을 밟은 두 발자국이 있는데, 길이는 1척 8촌이고 너비는 6촌이며 열 발가락의 윤상(輪相) 무늬가 각각 특이하다. 근래에 나쁜 왕 금이(金耳)가 이 부처님의 발자국을 파괴하려 했으나 파면 곧 편편해져 무늬가 여전했다. 그래서 긍가강에 던져 버렸으나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정관(貞觀) 23년(649)에 어떤 사신이 이 발자국을 그려 가지고 왔었다.
다음에 이 옆에 4불이 다니고 앉고 했던 자취가 있고 옛 성 동남에는 용맹(龍猛)보살이 외도를 항복받은 곳이며, 다음 북쪽에는 귀신이 만든 탑이 있으니 마명(馬鳴)의 일이다.
또 서남으로 니련선하(尼連禪河)를 건너면 가야성(伽耶城)이 있다. 사람은 적어 천여 호 정도이다. 이 성 서남쪽 6리쯤에 가야산이 있는데 계곡이 깊고 멀어 세상에서 영악(靈岳)이라고 하며 옛날부터 왕들이 봉선(封禪)하던 곳이다. 이 산꼭대기에 석탑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이요 때때로 기이한 광명을 뿜어낸다. 부처님께서 여기서 『보운경(寶雲經)』 등을 설하셨다. 산 동남으로 2리쯤 못 가서 발라급보리산(鉢羅笈菩提山)에 이른다. 당나라 말로 정각(正覺)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 도를 증득하시고 가장 먼저 이 산에 오르셨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동북쪽 언덕 위로부터 금강정(金剛定)에 들고자 하시자 땅이 진동하고 산이 흔들렸으므로 산신이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고하였다. 또 서남으로 가시어 벼랑 사이의 돌에 앉으시자 땅과 산이 또 흔들렸다.통합뷰어
정거천(淨居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15리를 가면 고행처(苦行處)에 가깝습니다. 필발라(畢鉢羅)나무 밑의 금강좌(金剛座)는 바로 보리좌(菩提座)이니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여기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비로소 거기 가서 인하여 석실(石室)을 만드니 용의 그림자가 머물고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명지(名地)라고 일컬었다. 그 보리나무의 둘레에 벽돌로 담을 쌓아 견고히 하고 동서는 넓으며 둘레는 540보이다. 기이한 나무와 이름난 꽃을 벌려 심어 그늘이 서로 이어진다. 정문을 동으로 열면 니련선하를 마주하고 남문은 대화지(大華池)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험하고 견고한 곳을 끼고 북문은 큰 절과 통하고 있다. 그 원내(院內)에는 성적(聖迹)과 온갖 탑이 많이 벌려 있다.
나무담의 한복판에 있는 금강좌는 현겁(賢劫)에 처음 된 것으로서 대지(大地)와 함께 있고 대천계(大千界)의 맨 밑의 금륜(金輪)은 위로 땅 끝에 이르렀는데 금강으로 되었으며 주위는 1백여 보라 천 불이 같이 앉아 금강정(金剛定)에 들었기 때문에 금강좌라 한 것이다. 곧 도를 증득한 곳이요 또 도량(道場)이라고도 한다. 대지가 진동할 때에도 이것만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래께서 도를 얻으신 날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같지 않다. 혹은 3월 8일이라 하고 또 15일이라고도 한다.
담 북문 밖 대보리사(大菩提寺)의 6원(院)은 3층이고 담장 높이는 4장(丈)이며 벽돌로 되어 있다. 사자국(師子國)의 왕이 이곳을 사들여 이 절을 지었으나 스님은 겨우 천 명 정도로서 대승 상좌부(上座部)가 주지하는 곳이다. 여기 있는 뼈사리는 그 형상이 사람의 손가락 마디 같고 사리의 크기는 진주와 같다. 저 국토의 12월 30일은 이 국토의 1월 15일에 해당하는데, 세상에서는 이 달을 큰 신변(神變)이 있는 달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이 되면 이 사리는 반드시 광명을 뿜어내고 하늘은 기이한 꽃을 내려 나무에 가득 찬다고 한다. 저 국토의 항상한 법으로서 이 때가 되면 천만의 도인과 속인들이 이레 동안 다투어 공양을 베푼다.통합뷰어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그 광명을 보고 나뭇잎을 가지는 것이다.
그 나무의 푸른빛은 겨울과 여름에도 변하지 않는다. 열반에 드는 날과 늦여름에는 한꺼번에 말라 떨어졌다가 하룻밤만 지내면 새로 나서 옛날과 같이 된다. 뒤에 아육왕의 비(妃)가 이 나무를 베어 서쪽으로 수십 보 밖에 모아 두고 하늘에 제사하기 위해 불을 질러 태웠다. 연기와 불꽃이 끊이지 않고 오를 때 갑자기 두 나무가 나면서 사나운 불길 속에서 잎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그래서 그것을 재보리[灰菩提]나무라 했다. 왕은 그것을 보고 신심이 생겨 향유(香乳)를 거기에 쏟아 부었다. 다른 뿌리에서도 아침이 되자 나무가 나서 전과 같이 되었다. 왕비는 화를 내어 그 날 밤에 또 그것을 베었다. 왕은 다시 기도하고 향유를 쏟아 부었다. 며칠이 안 되어 나무는 다시 났다. 돌로 담을 둘러쌓았는데 둘레는 1장(丈) 남짓했다.
근래에 금이국월왕(金耳國月王)이 또 이 나무를 베려고 샘물 밑까지 파내려갔으나 그 뿌리 밑에까지 갈 수 없어 결국은 불을 놓아 태우고 또 감자(甘蔗)로 씻어 그것이 썩어 뿌리가 끊어지게 했다. 몇 달 뒤에 보랄나벌마왕(補剌拏伐摩王)[여기 말로 만주(滿冑)라 하며, 즉 무우왕의 현손(玄孫)이다.]은 나무가 베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온몸을 땅에 던지고 스님을 청해 이레 동안 경행하고, 나무 주위에 큰 구덩이를 파고 수천 마리 소의 젖을 거기에 쏟아 부었다. 엿새째 되던 날 밤에 나무는 다시 나서 1장(丈)이 넘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베일까 두려워해 그 주위에 높이 2장 4척의 돌담을 쌌다. 나무는 지금 돌담보다 2장 넘게 더 높고 그 둘레는 3척이 넘는다.
나무 동쪽은 푸른 벽돌로 지은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160여 척이요, 터의 너비는 20여 보이다. 위에서 돌로 갈고리 모양의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그 높이는 1장이요, 층층으로 되어 있는 감실(龕室)에는 모두 금상(金像)이 있으며 네 벽에는 여러 천선(天仙)을 새겨 놓았고 꼭대기는 금동의 아마륵가(阿摩勒迦) 열매 모양으로 되어 있다.[이것을 보병(寶甁) 또는 보대(寶臺)라 한다.] 동쪽은 중각(重閣)의 3층집이 접해 있는데, 그 처마가 특이하다. 모두 금은으로 장식하였으며 3겹통합뷰어
문 밖의 감실에는 왼쪽에 관자재의 상(像)이 있고 오른쪽에 자씨의 상이 있는데 모두 은을 부어 만들었다. 높이가 1장쯤 되는데 이것은 아육왕이 지은 정사로서 처음에 작았던 것을 뒤에 확장시킨 것이다.”
『왕현책행전(王玄策行傳)』에서 말하였다.
“서국(西國)에는 서상(瑞像)이 무궁하다. 우선 마하보리수상(摩訶菩提樹像)에 대한 기록에 말하였다. 즉 옛날 사자국왕(師子國王)의 이름은 시미가발마(尸迷佉拔摩)[당나라 말로는 공덕운(功德雲)이라 함]이다. 범왕(梵王)이 두 비구를 보내 이 절에 왔는데 큰 사람의 이름은 마하남(摩訶諵)[여기 말로는 대명(大名)이라 함]이요, 작은 사람은 우파(優波)[여기 말로는 수기(授記)라 함]이다. 그 두 비구는 보리나무 밑의 금강좌에 예배하여 마쳤으나 이 절에서는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내 본국으로 돌아갔다. 왕이 비구에게 물었다.
‘저기 가서 성소(聖所)에 예배했는가? 그 영서(靈瑞)는 어떻던가?’
비구들이 대답했다.
‘염부제의 대지에는 우리 몸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많은 진주를 주어 이 나라 왕에게 보냈다. 삼모타라굴다(三謨陀羅崛多)는 이로 인해 여기 왔으니 이는 곧 사자국의 비구였다.
또 금강좌 위의 존상(尊像)을 맨 처음 만들 때 어떤 나그네가 와서 대중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좋은 공장(工匠)을 모집해 상을 만든다는데 내가 이 상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대중이 그에게 말하였다.
‘무슨 물건이 필요한가?’
그가 말하였다.
‘향과 물과 기름과 쑥이면 만족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절 스님에게 말하였다.
‘나는 꼭 문을 닫아야 만들 수 있으니 여섯 달 동안은 부디 문을 열지 마십시오. 또 음식을 들여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한 번 들어간 뒤로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여섯 달에서 나흘이 모자랐을 때 대중들은 공론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각각 말하였다.
‘이 탑 안은 비좁고 또 대소변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 달 동안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없는가?’
그가 하는 짓이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드디어 그 탑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 공장은 보이지 않고 그 상만이 벌써 다 이루어져 있었으며통합뷰어
오직 그 오른쪽 유방 위가 아직 다 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떤 허공의 신(神)이 대중에게 경계해 말하였다.
‘나는 미륵보살이다.’
상의 몸은 동서로 앉아 있는데 몸의 높이는 1장 1척 5촌이요, 어깨의 너비는 6척 2촌이며, 두 무릎의 거리는 8척 8촌이다. 금강좌의 높이는 4척 3촌이고, 너비는 1장 2척 5촌이다. 그 탑은 본래 아육왕이 만든 돌 갈고리 모양의 난간으로 된 것이었다. 탑 뒤에 두 사람의 바라문 형제가 있는데 그 형의 이름은 왕주(王主)요, 아우의 이름은 범주(梵主)이다. 형이 그 탑을 만드니 높이는 백 주(肘)였고 아우는 그 절을 지었으니 미륵의 상을 만든 뒤로는 모든 도인과 속인들이 그것을 본떠 그렸으나, 그 상이 자꾸 변해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릴 수가 없었다.
왕의 사신이 거기 와서 여러 스님들과 또 여러 사신을 청해 여러 날 동안 지성으로 도를 행하고 참회하면서 또 거기 온 뜻을 아뢰어 비로소 그것을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 상과 두루 비슷하였으므로 곧 이 상을 경본(經本)에 그대로 실었다. 그래서 그 10권의 책을 가지고 이 나라에 와서 전하였다. 그 장인 송법지(宋法智) 등은 그 성인(미륵)의 얼굴을 잘 그렸으므로 서울에 돌아오자 도인과 속인들이 다투어 그것을 모사했다.”
『장사전(奘師傳)』에서 말하였다.
“미륵상(彌勒像) 오른쪽 유방 위의 조각이 완전하지 못했으므로 여러 가지 보배로 다시 메우고 멀리서 그 상을 보았으나 끝내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 상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오른발을 왼쪽 다리 위에 포개고 왼손은 거두고 오른손은 드리웠다. 오른손을 드리운 이유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도를 이루셨을 때 부처님께서 마왕(魔王)에게 말하면서 땅을 가리켜 증명한 것을 본뜬 것이다.
근래에 월왕(月王)이 보리나무를 베고 신하를 시켜 그 상을 헐어 버렸다. 그러나 왕이 동쪽으로 돌아간 뒤, 신하는 본래 신심이 있었으므로 그 상의 앞을 벽돌을 쌓아 가로막았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 어둠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그 안에 등불을 켜 두고 밖에는 자재천(自在天)의 상을 그려 놓았다. 이 일을 마치고 이것을 왕에게 알렸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고 피부가 다 찢어져통합뷰어
이내 죽었다. 대신이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곧 그 벽막이를 없애 버렸다. 이렇게 가고 오는 동안에 여러 날이 지났으나 그 등불은 오히려 꺼지지 않았다. 지금도 깊은 방에 그대로 있어, 새벽에 거울을 가지고 비춰 보면 그 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슬퍼하고 공경하면서 돌아가기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또 『왕현책전(王玄策傳)』에서 말하였다.
“이 한(漢)나라 사신은 왕명을 받들고 마가타국의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로 가서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정관(貞觀) 19년(645) 2월 11일에 보리나무 밑 서쪽에 탑을 세우고 전사문령(典司門令) 사위재(史魏才)를 시켜 글씨를 쓰게 했다.
옛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군림할 적에는 군사와 병기를 모두 사용하여 10만 군사를 일으켜 하루 천금을 허비했다. 그러면서도 북으로 전안(闐顔)을 억누르고 동으로는 불내(不耐)를 봉(封)했지만 대당(大唐)은 6합(合)을 통합하고 도(道)가 백왕(百王)보다 높아서 문덕(文德)으로 다스리니 온 천하가 다 따르고 의지했다. 그러므로 신독(身毒:인도)의 모든 나라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정성을 다 바쳤다.
황제(皇帝)는 그 충성과 정성을 가엾이 여겨 거룩한 심려를 멀리 뻗치셨다. 그리하여 사인(使人)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위위시승(行衛尉寺丞) 상호군(上護軍) 이의표(李義表) 부사(副使)와 전 융주(融州) 황수현령(黃水縣令) 왕현책(王玄策) 등 22인에게 명하여 그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위무(尉撫)하게 했다. 드디어 그들은 마하보리사의 보리나무 밑 금강좌에 이르렀다. 그 자리는 현겁(賢劫)의 천 불이 다 도를 이룬 곳으로서 상호(相好)를 장엄하여 마치 참 모습과 같고, 신령스런 탑과 깨끗한 땅은 그 정교함이 하늘 밖에까지 뻗쳤다. 이것은 곧 오랜 세상에 보지 못했던 것이요 역사책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황제는 큰 교화를 멀리 떨치고 도의 나무를 더욱 빛내었다. 그리하여 사인(使人)을 시켜 여기 와서 우러러보게 했으니, 이것은 세상에 없는 성대한 일이요 없어지지 않을 신령스런 공적이다. 그러하거늘 어찌 침묵하고 노래로써 금석에 전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명(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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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大唐)은 그 운수를 따라
수창(壽昌)을 받고 도모했나니
그 교화는 6합(合)에 행하고
그 위엄은 8황(荒)에 떨쳤다.
인도가 머리를 조아리고
도인과 속인이 다 섬기나니
이에 총명한 사신을 보내어
그 도량(道場)을 우러르게 하다.
그 금강의 자리는
천 불이 대대로 살았나니
거룩한 모습의 상호(相好)는
미륵이 그것을 본떴다.
신령스런 탑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도의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여
영원한 겁(劫)에 썩지 않거니
신령스런 힘이 그 어떠한고.”
또 『장사전(奘師傳)』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당나라 3월 8일에 도를 이루셨다. 그런데 상좌부(上座部)에는 ‘이것은 3월 15일에 해당하며 도를 이루신 때의 나이는 30세이다’라고 하고, 혹은 35세라 하였다. 이렇게 차이가 나서 피차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달력의 사용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또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주(神州)의 달력 계산법이 각각 같지 않기 때문이니, 3대(代)에서 세수를 정할 때 늘리고 줄임이 무엇이 괴상하겠는가. 우선 1상(相)에 의거하면 깨달아 알게 되어 곧 그칠 것이다.
서쪽에 큰 정사를 세우고 그 안에는 유석상(鍮石像)이 있는데 동으로 향하고 있으며 기이한 보배로 장식하였다. 그 앞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기이한 무늬와 특이한 채색이 있다. 처음 성도하시던 날에 범왕(梵王)이 7보당(寶堂)을 세우고 제석천은 7보좌(寶座)를 만들었다. 부처님께서 그 위를 앉아 이레 동안 명상하시면서 광명을 놓아 나무를 비추고 보배를 돌로 만들었다. 남쪽에 부도를 세웠는데 그 높이는 백여 척이다. 처음에 부처님께서 강에서 목욕을 마치고 앉고자 하여 풀을 생각하였더니, 제석천이 사람으로 화해 시시초(始尸草)[이곳 말로는 길상초(吉祥草)라고 함]를 바쳐 부처님께서 거기 앉으셨다고 한다. 아육왕은 거기에 탑을 만들어 그것을 표했다.
또 동북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셨을 때 푸른 참새 떼들이 와서 세존을 둘러쌌고 또 사슴 떼들이 와서 둘러쌌던 곳이다. 또 동쪽 큰 길 좌우에 각각 한 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마왕이 부처님을 돌고 물러간 곳이다. 서북쪽에 있는 정사 안에는 가섭파부처님께서 때때로 광명을 놓는데, 세상에서는통합뷰어
지성으로 일곱 번 이 부처님을 돌면 후생에 나서 숙명지(宿命智)를 얻는다고 한다. 또 담 서북에 울금향(鬱金香) 진흙으로 만든 탑이 있는데, 높이는 1장 4척이다. 담 동남 모퉁이에 니구율(尼拘律)나무가 서 있고 나무 곁에는 탑이 있다. 그 정사 안에 좌상(坐像)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깨쳤을 때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법륜 굴리시기를 청했던 곳이다.
담 안의 네 모퉁이에 각각 탑이 있다. 이 탑들은, 부처님께서 처음에 풀을 받아 가지고 나무 밑으로 가서 서남으로 향할 때 땅이 진동하고 또 서북으로 향하고 또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향할 때 다 땅이 진동하였으며, 서북으로 나무 밑에 가서 동남을 향해 금강좌에 앉으실 때에야 비로소 땅이 안정했으므로 탑을 세워 기록했다. 담 밖의 서남쪽에는 소치던 두 처녀의 집터가 있고 그 곁에는 그녀들이 우유죽을 끓이던 곳이 있다. 또 그 곁에는 부처님께서 그 죽을 받던 곳으로서 다 탑을 세워 표했다.
보리나무 남쪽 문 밖에 큰 못이 있는데 둘레는 7백여 보이다. 그 물은 맑아서 고기와 용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남쪽에 못이 있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옷을 빨기 위해 제석천이 만든 곳이라고 한다. 못 서쪽에 큰 돌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옷을 널어 말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석천이 설산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또 그 옆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헌옷을 두시던 곳이다. 또 남쪽 숲 속에 한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가난한 여자가 주는 헌옷을 받으셨던 곳이다.
변화로 된 못 동쪽 숲 속의 용지(龍池)는 그 물맛이 달고 맛있다. 그 언덕 서쪽의 조그만 정사에 상(像)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고 여기에 앉아 선정에 들었을 때, 용왕이 부처님을 일곱 번 돌고 많은 머리로 변화하여 부처님을 덮어 주었던 곳이다. 용지의 동림(東林) 정사에는 부처님의 여위신 형상을 만들어 두었다. 그 옆에는 경행하시던 자취가 있으니 모두 70여 보요, 남북에 각각 비발라(卑鉢羅:軍發)나무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왕래하실 때 그것을 부여잡고 일어나시던 곳이다. 이곳은 곧 6년 동안 고행하실 때 하루 깨알 하나씩 드시던 곳이기도 하다. 병이 있는 자는 지금도 향유(香油)를 이 상에 바르면 낫는 이가 많다고 한다. 또 다섯 비구가 살던 곳도 있다.
또 동남에 탑이 있으니 이곳은 부처님께서통합뷰어
니련선하에 들어가 목욕하시던 곳이다. 그 강 근처에는 부처님께서 우유죽을 드시던 곳이 있고, 그 옆에 두 탑이 있으니 이것은 장자(長者)가 부처님께 밀초(蜜麨)를 드렸던 곳이다. 나무 동남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사천왕이 부처님께 돌발우를 드렸던 곳이고, 그 옆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에 어머니에게 설법하시던 곳이다. 또 가섭파 형제 천 사람이 살던 곳도 있다.
나무담 북문 밖은 곧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이니 정우(庭宇)는 6원(院)이요 누각은 3중(重)이며 둘러쳐진 담의 높이는 5장이다. 부처님의 사리가 있으니 크기는 손가락 마디만하고 빛나고 윤택하며 선명하고 희어 안팎으로 환히 투명하다. 살의 사리는, 크기는 푸른 구슬과 같고 빛깔은 홍색을 띠었는데, 해마다 부처님의 대신변월(大神變月)에는 이것을 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즉 인도의 12월 30일이니 당나라의 정월 15일에 해당한다. 이 때에는 광명을 놓고 꽃을 내리므로 깊은 믿음을 크게 일으킨다.
그 절에는 항상 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어 대승의 상좌부(上座部)를 익히는데 법의 의식이 청정하고 엄숙하다. 이 절은 남해(南海) 승가라국(僧伽羅國)의 왕이 세운 것으로서 지금까지 4백 년이 지났다. 이 절에는 사자국 사람이 많이 있는데, 해마다 비구들이 안거(安居)를 마치면 사방의 도인과 속인 백천만 명이 7일 7야 동안 향과 꽃과 음악으로 온 숲에 공양한다.
인도의 여러 승려들은 당나라의 5월 16일에 여름 안거에 들어가, 당나라의 8월 15일에 해제(解制)한다. 이것도 그 나라에 따라 쓰는 달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하나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설산 북쪽의 어떤 나라에서는 봄의 안거와 가을의 안거가 있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1년 중 그 때 습기와 열기가 많기 때문에 3월에 안거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 전후 한 달을 늘리거나 당겨서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수도에 의거한다면 어느 때인들 편치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계율에 세 때[時]의 유행(遊行)을 제정한 것이니, 통틀어 죄가 있다고 결론한다면 반드시 좋은 인연이 있을 것으므로 또한 겸해서 구제하는 길을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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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동쪽으로 강을 건너 큰 숲 속에 탑이 있는데 그 탑 북쪽의 못은 옛날 부처님께서 향상(香象)의 아들이 되어 눈먼 코끼리인 어머니를 모시던 곳이고, 그 앞에 세운 돌기둥은 옛날 가섭파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참선하셨던 곳이며 그 옆에는 4불이 다니고 앉고 하던 자취가 있다. 숲 속의 작은 돌기둥은 옛날 울두람이 악한 원을 세웠던 곳이다.
또 동으로 황하(黃河)를 건너 백여 리를 가면 굴굴흘파타산(屈屈吃播陀山)[구역에서는 계족산(鷄足山)이라고 하였다.]에 이른다. 똑바로 오르면 세 봉우리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닭발과 같다. 산꼭대기에 세운 큰 탑은 밤에 신령스런 횃불을 놓아 광명이 두루 비친다. 이것은 대가섭파가 참선하던 곳이다. 처음에 부처님께서 그 이모가 짠 금실로 된 대의(大衣) 가사를 가섭파에게 주면서 미륵에게 전하라 하고 ‘내가 남긴 법으로 사부대중을 제도하라’고 하셨다. 가섭파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20년에 그 가사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 미륵을 기다린다.
그 산길은 매우 험악하고 대숲이 많으며 사자ㆍ호랑이ㆍ코끼리 등이 마구 날뛰었다. 현장 법사가 거기에 도착하여 늘 산에 오르려 생각했으나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왕에게 지원을 청하자 왕은 군사 3백 명을 주었다. 그들은 각각 칼을 가지고 대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하루 10리를 갔다. 그 때 그 나라에서는 현장이 산에 가서 예배한다는 말을 듣고 남녀 노소 10여만 명이 그를 따라 나와 다 함께 계족산으로 갔다. 산언덕에 이르자, 깎아지른 듯 막아 선 절벽에는 길이 없었다. 이에 대나무를 묶어 사닥다리를 만들고 그것을 잇대어 오르니, 산꼭대기까지 이른 사람은 3천여 인이었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고 못내 기뻐 날뛰면서 돌틈을 자세히 보고 꽃을 흩어 공양했다.”
또 『왕현책전(王玄策傳)』에서 말하였다.
“대당 정관 17년(643) 3월에 밝은 조서를 내려, 사인(使人)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위위시(行衛尉寺) 승(丞)통합뷰어
상호군(上護軍) 이의표(李義表) 부사(副使)와 전 융주(融州) 황수현령(黃水縣令) 왕현책(王玄策) 등으로 하여금 나그네로 있는 바라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그 해 12월에 마가타국(摩伽陀國)으로 가서 곧 부처님 고향을 둘러보고 유적을 참배했다. 성인의 자취와 신령스런 교화는 어디서나 징험을 느끼게 했다. 19년(645) 정월 27일에 왕사성에 도착하였고, 마침내는 기사굴산에 올라가 마음대로 바라보고 끝없이 관람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천여 년이 지났으나 거룩한 자취와 남은 터는 엄연히 그대로 있어서, 한 번 가고 한 번 앉았던 곳에는 다 탑의 기록이 있었다. 스스로 지금까지는 좁은 식견으로 상상하고 있다가 갑자기 신령스런 자취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한편으로의 슬픔과 한편으로의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산에 새겨 영원히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한 것으로서 그리하여 대당의 황제는 해와 달과 함께 영원히 밝고, 불법의 널리 퍼짐은 이 산과 함께 공고히 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글은 이러했다.
대당(大唐)이 진(震)에서 나와
용비(龍飛)를 가슴속에 도모했네.
온 천하를 잘 다스리매
그 은혜 4이(夷)에 미쳤네.
그 교화는 3황 5제보다 높고
그 덕은 황제와 복희보다 뛰어나네.
옥경(玉鏡)을 높이 달아 놓으매
팔짱을 끼고 하는 일이 없네.
도법(道法)은 자연이요
유종(儒宗)은 세상을 따르네.
위에서 편안하여 예(禮)를 만들고
풍악(風樂)의 제도를 옮기네.
중토(中土)에서 시발했거니
엽예(葉裔)와는 같지 않네.
석씨(釋氏)의 가르침 여기 내리어
그것이 끝없이 뻗어 가리라.
신기로운 힘은 자재(自在)하고
그 응화(應化)는 끝이 없나니
혹은 땅에서 솟기도 하고
혹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도 하네.
백억의 해와 달이요
삼천대천세계네.
법의 구름은 함께 일어나고
묘한 이치는 함께 퍼지네.
울창하구나, 이 산이여
기이한 형상 더욱 많아라.
위에는 향기의 구름이 날고
아래는 맑은 물에 다달았네.
신령한 성인이 내려 모인 곳이요
훌륭한 선비들 지나간 곳이라
높은 봉우리에 거룩한 자취 남기고
바위 언덕에 끼친 터 우뚝하네.
들쑥날쑥한 험난한 준령
중첩한 바위의 행랑이어라.
쨍그랑 울리는 보배 방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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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오르는 기이한 향내일세.
화산(華山)의 신기한 자취를 보고
높은 산 위에 정비(貞碑)를 새기네.
대당의 맑은 교화를 전하나니
천지와 함께 장구하리라.”
또 『장사전(奘師傳)』에서 말하였다.
“이 산에서 동으로 60리를 가면 구사갈라보라성(矩奢揭羅補羅城)에 이른다. 그 북문 밖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손을 펴 다섯 마리 사자를 나타내어, 제바의 취한 코끼리를 항복받던 곳이다. 또 동북쪽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사리자(舍利子)가 마승(馬勝) 비구의 설법을 듣고 도를 깨친 곳이다. 탑의 북쪽 큰 구덩이 옆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실리국다(室利★多)가 불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곳이다. 또 동으로 길률타라구타산(姞栗陀羅矩吒山)[영취(靈鷲) 또는 영대(靈臺)라 하고 구역에서는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였다.]으로 가면 그 옆에 큰 돌이 있는데 그 돌의 높이는 1장 4, 5척이요 너비는 30여 보이다. 이것은 제바달다가 부처님께 돌을 던졌던 곳이다. 그 남쪽 벼랑 밑에 탑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말씀하셨던 곳이다.
남산 벼랑에 큰 석실(石室)이 있다. 옛날 부처님께서 여기서 선정에 들어 계셨는데 아난이 다른 방에서 악마에 붙잡혀 떨고 있자 부처님께서 손으로 돌벽을 통해 그의 정수리를 만져 주심으로써 통하는 구멍이 있음을 보이신 곳이다. 정사의 동북에 큰 돌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햇볕에 옷을 말리시던 곳으로서 옷 무늬가 분명하게 남아 있고 돌 안쪽에는 부처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산성 북문 서쪽에 비포라산(毘布羅山)이 있고 산 서남 벼랑에 옛날엔 5백 개의 온천이 있었는데 지금도 수십 개가 그대로 있다. 이 서쪽의 비발라(卑鉢羅) 석실은 부처님께서 옛날 항상 거주하셨던 곳이고 이 뒷벽의 동국은 아소락(阿素洛:아수라)의 궁전이다.
산문 밖 1리쯤 가면 가란타(迦蘭陀) 죽원(竹園)에 있는 정사(精舍)에 이른다. 이것은 아사다몰토로(阿闍多沒吐路)[당나라 말로는 미생원(未生怨)이라고 함] 즉 아사세왕의 것이다. 이 죽원 서남쪽 6리쯤의 남산 그늘에 있는 큰 죽림 속에 큰 석실이 있으니, 이것은 마하가섭파가 1천 명의 아라한을 데리고 3장(藏)을 결집(結集)하던 곳이다. 그들 승려 중의 상좌(上座)를 상좌부(上座部)라 부른다.통합뷰어
석실 서북쪽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아난이 꾸지람을 듣고 과(果)를 증득한 곳이다. 산성 북쪽으로 5리쯤 가면 갈라사길리온(曷羅闍姞利溫)[당나라 말로는 신왕사성(新王舍城)이라 함]에 이른다. 남문 바깥 길 왼쪽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라호라(羅怙羅:라후라)를 제도한 곳이다.
또 북으로 30여 리쯤 가면 나란타사(那爛陀寺)[당나라 말로는 시무염사(施無厭寺)라고 함]가 있다. 이것은 섬부주(贍部洲:염부주)에 있는 절 중에서 제일가는 것으로서 이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다섯 왕이 함께 이 절을 지었고 공급한 물품이 갑절이나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절은 도합 5원(院)이 있고 대문은 하나뿐이다. 주위의 집은 4중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8장쯤으로서 모두 벽돌로 되어 있다. 제일 밑벽의 두께는 6척쯤이다. 외곽은 세 겹으로 되어 있고 담은 벽돌이며 높이는 5장쯤이다. 중간에 각각 매우 깊은 못이 빙 둘러 있는데 모두 꽃향기가 있고 장엄하고 화려하여 볼 만하다. 이 절을 지은 뒤로는 방위(防衛)가 엄격하여 여자들의 난잡함은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에 늘 살고 있는 승려만도 4천여 인이요 나그네와 도인과 속인들 등 사정(邪正)을 합하면 수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다 의식을 공급하여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또 시무염(施無厭)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 안과 좌우에는 거룩한 자취가 중첩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모든 논사(論師)의 지식은 맑고 고상하므로 왕이 주는 봉호(封戶)는 10성(城)에 이르며 차츰 그 양(量)을 줄인 뒤에도 3성(城)에 밑돌지 않는다. 그 절에서 현재 봉호를 받는 대덕(大德)은 3백여 명이다. 통경(通經) 이상의 승려는 소임을 맡지 않고 학문만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다른 법까지도 다 물어 본다. 그러므로 오기(烏耆)의 서쪽이 다 해내(海內)의 본을 받아 출가한 모든 사람은 학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도 통행을 막지 않으며 왕이 비록 나라를 지킨다 해도 감히 그것을 막지 못한다.
또 동쪽으로 산에 들어가 2백여 리를 가면 이란나국(伊爛拏國)에 이른다.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던 자리를 보면 한 치쯤 돌이 들어갔는데, 그 길이는 5척 2촌이요 너비는 2척 1촌이다.통합뷰어
물병을 두었던 자리는 돌이 한 치쯤 들어갔고 꽃 무늬가 새겨져 마치 금방 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서 계셨던 자리의 길이는 1척 8촌이 넘고 너비는 6촌쯤 된다.
또 일곱 나라를 걸러 서북으로 가면 갈라나국(羯羅拏國)에 이른다. 사정(邪正)을 모두 섬긴다. 3사(寺)가 따로 있는데 유락(乳酪)을 먹지 않으니 이것은 조달부(調達部)의 승려들이다. 또 서남으로 7백 리를 가면 오다국(烏茶國)에 이른다. 동쪽 경계는 바다에 임해 있고 발행성(發行城)이 있어서 많은 상인들이 바닷가에 머물러 있다. 또 남쪽으로 큰 바다 가운데에는 승가라국(僧伽羅國)이 있으니, 이른바 집사자(執師子)가 그것이며, 그 거리는 대략 2만여 리이다. 그런데 밤마다 남쪽을 바라보면 저 나라에 있는 부처님 어금니를 봉안한 탑 위의 보배구슬에서 광명이 번쩍거리면서 멀리 하늘 끝에 나타나는 것이다.
또 서남으로 여러 나라를 지나가면 거기에는 다 기이한 자취가 있다. 5천 리쯤 가면 교살라국(憍薩羅國)에 이르는데 이것은 곧 남인도의 정경(正境)으로서 사람들은 불법을 독실히 믿는다. 왕도의 서남쪽 3백여 리에 흑봉산(黑蜂山)이 있으니, 이것은 옛날 대왕이 용맹(龍猛)보살[구역에서는 용수(龍樹)라고 하였다.]을 위해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위아래는 다섯 겹으로 되어 있는데 돌을 파고 물을 끌어 와 돌아가게 하였는데 많은 변이(變異)가 있다. 그것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지금은 깨끗한 사람을 엄격히 가리므로 여기 오르는 사람이 드물다.
감실 속에 있는 석상(石像)은 그 형상이 극히 위대하다. 이 절이 다 이루어지던 날 용맹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바르자, 곧 자금(紫金)으로 변하였으니 세상에서는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또 경장(經藏)이 있고 협전(夾傳)이 무수한데 옛 노인들이 전해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처음 결집(結集)할 때 모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비록 불법을 멀리하여 여러 번 쳐죽임을 당하였으나 이 절의 주지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근래에 어떤 스님이 와서 여기서 여름 안거(安居)를 지낼 때, 다만 절 안에서 이 경전을 읽게 하고 가지고 나가지는 못하게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 사실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그러나 다만 길이 깊고 험하여 찾아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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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남쪽으로 가면 안달라국(案達羅國)에 이른다. 이 나라는 남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의 서남 20여 리의 외로운 산 위에 탑이 있으니, 이것은 진나(陳那)보살이 『인명론(因明論)』을 지었던 곳이다.
또 남으로 천 리를 가면 타나갈책가국(馱那羯磔迦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는 남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의 동서쪽에 각각 산을 의지해 큰 절이 있으니, 옛날 왕이 부처님을 위해 지은 것이다. 산을 깎고 돌을 새겨 벌려 놓음이 극히 화려하고 넓으며 성현들이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천 년이 되기 전에는 여기 천 명의 스님들이 살았는데, 안거를 마치는 날 모두 무학(無學)을 증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공을 헤치고 다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아무도 없다. 여기 바비폐가(婆毘吠伽)의 논사(論師)가 있었으니[당나라 말로 명변(明辯)이라고 함] 그가 『반야등론(般若燈論)』을 지었다. 그는 관자재보살상 앞에서 곡식은 먹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3년 동안 서서 기도하면서 미륵 보기를 기다렸는데, 관자재보살이 색신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지금 성남(城南)의 큰 산 바위에 있는 집금강신(執金剛神)이 외우는 금강주(金剛呪)를 3년 동안 외웠는데 신이 그 방법을 가르치며 말하였다.
‘이 바위 안에 아소락(아수라) 궁전이 있다. 법답게 기도하면 석벽이 열릴 것이니 거기 들어가 미륵이 나오기를 기다려라. 내가 알려 주리라.’
또 3년을 지나 주문을 외우면서 겨자로 석벽을 치니 석벽이 곧 갈라지며 열리었다. 그 때 백천 사람들은 다 그것을 보고 경탄했다. 논사(論師)는 문에 걸터앉아 재삼 돌아보고 말했으나 오직 여섯 사람만이 따라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다 그것을 독사굴이라고 했다. 그 때 석문은 도로 닫혀 석벽처럼 되었다고 한다.
또 남으로 6천여 리를 가면 말라구타국(秣羅矩吒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섬부주의 최남단으로서 바다와 경계하고 있다. 산에서는 용뇌향(龍腦香)과 백단향나무가 생산되고 또 갈살라(羯薩羅)향나무도 있다. 소나무가 몸통만 있고 잎이 없으며 냄새는 얼음이나 눈과 같은데 이것이 곧 용뇌향(龍腦香)이다.통합뷰어
여기서 남쪽으로 큰 바다 가운데 천궁(天宮)이 있으니 관자재보살[구역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고 하였다.]이 항상 머물던 곳이다. 바다에 다달아 성이 있으니 이곳이 곧 옛날의 사자국이다. 바다 가운데까지 가려면 3천 리는 가야 하는데 큰 동행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서북으로 4천여 리를 가는 동안에 지나는 나라에는 온갖 신이(神異)가 다 있다. 이 나라 동남쪽 모퉁이에 나라계라주(那羅稽羅洲)가 있으니, 그 사람들의 키는 3척이요 까마귀가 쪼듯이 오직 야자 열매만 먹는다.
또 마하랄타국(摩訶刺他國)에 가면 그 나라 왕은 자재하여 계일(戒日)을 지키지 않는다. 1백여 개의 절이 있고 승려는 5천이다. 동쪽 경계의 산사(山寺)는 아라한이 지은 것이다. 큰 정사가 있으니 높이는 1백여 척이요, 석상(石像)이 안치되어 있는데 키는 8장여이다. 위에 돌일산을 두어 무릇 일곱 겹으로 되어 있는데, 공중에 달려 있다. 그 거리는 3척으로서 그것을 참배하는 사람은 모두 그 이상함에 감탄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라한의 힘으로 버틴다고 하고 혹은 약주술(藥呪術)의 힘으로 버틴다고도 한다.
또 두 나라를 걸러 서북으로 마납바국(摩臘婆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남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도성의 서북 20여 리에 큰 바라문의 읍(邑)이 있고 그 옆의 큰 구덩이는 물이 자꾸 흘러 나와 가득 차는 일이 없다. 이것은 옛날 매우 거만한 바라문이 대승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땅 속으로 빠져 들어간 곳이다. 또 서북으로 아타리국(阿吒釐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남인도에 소속되어 있다. 이 나라에는 호초(胡椒)와 훈육향(薰陸香)이 생산되는데 나무 잎은 아가위[棠]와 같다.
또 두루 둘러 서북으로 10여 국을 지나면 파랄사국(波剌斯國)에 이르는데 이곳은 인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나라에는 금ㆍ은ㆍ놋쇠ㆍ석파지(石頗胝)ㆍ수정 등이 많이 생산되고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여기에 시체를 버린다. 부처님의 발우가 왕궁 안에 있다. 서북으로 불름국(拂懍國)에 접하니 거기서는 흰 개가 생산된다. 본래는 머리가 붉은 오리가 굴 속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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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직도(梁貢職圖)』에서 말하였다.
“‘파사국에서 북으로 1만 리의 서남 바다의 섬에 서녀국(西女國)이 있는데 이곳은 인도에 속한 것이 아니다. 불름국에서 해마다 남자를 보내어 짝을 지었다.’
거룩한 자취를 간략히 말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풍속과 행적을 자세히 말한 것은 대본(大本)에 남아 있다.
게송을 읊는다.
희유(希有)한 음성이 멀리 퍼지나니
이에 동쪽을 돌아보았네.
교화를 기뻐하고 도를 사모해
서방(西方)의 법도를 우러러 본뜨네.
그 묘함은 털끝을 다하고
움직임은 가벼운 비단보다 미묘하네.
풍채를 비고 고요함에 의탁하여
하늘의 노을을 비출 듯하네.
그 자취를 모든 상(像)에 흘리고
이치는 그 뜻에 깊었네.
흥취를 보내어 가슴을 여나니
성인의 길로 범부를 인도하네.
1천 부처가 다 함께 교화하매
모든 현인이 다 와서 뵈옵네.
황제의 마음에 느낌이 있고
도인과 속인이 같이 만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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