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31권
법원주림 제31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23. 잠둔편(潛遁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들으니 성현은 세상에 호응해 줌에 있어서, 그 자취는 방향이 없으나 그가 머무르는 나라는 이익을 얻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속된 선비는 그 길흉(吉凶)에 막히지만 훌륭한 지혜를 가진 이는 그 선악에 편안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기다리면 그 도량은 하늘과 같아질 것이다.
옛날 진(晋)나라 무제(武帝)의 세상에는 천축(天竺)에 기역(耆域)이 있었고, 송(宋)나라 무제 초년에는 팽성(彭城)에 배도(杯度)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 백성들을 깨우친 이들이다. 제량(齊梁)의 사문 보지(保誌)는 영명(永明) 초년에 처음 나타났다. 지혜를 숨기고 미치광이처럼 거친 속세에 어울려 살면서, 과거의 일을 간직하고 미래의 일을 아니, 언제나 그 영험이 맞았다. 얼굴을 움직이고 말을 내면 실수가 별로 없었으므로 사서(士庶)들은 메아리처럼 달려가,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구름 같았다. 그래서 자취는 세속에 매어 있었으나 정신만은 명적(冥寂)에 노닐었다. 물과 불도 태우거나 적시지 못하고 뱀과 호랑이도 침노하거나 독을 주지 못하였다. 비록 9관(關)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몸은 마침내 걸림이 없었다.
부처님의 이치를 이야기하면 성문(聲聞) 이상이요 숨어 삶을 말하면 둔선(遁仙)이나 고사(高士)였다. 세상에 선(善)이 있기 때문에 선을 내어 그것에 호응하고, 세상에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을 내어 그것에 호응하였으니, 이른바 높이 달려 있는 해와 달 같고 깊이 묻혀 있는 금과 돌 같은 존재라 할 만하다. 그 무궁한 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2) 인증부(引證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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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生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무수한 겁 이전에 누이와 동생 두 사람이 있었다. 누이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아들은 외삼촌과 함께 베를 짜서 나라에 납품했다. 그들은 궁중 창고 안에 있는 기이하고 좋은 보물을 보고 서로 의논했다.
≺우리는 이렇게 부지런히 힘들게 베를 짜지만 창고에는 물건이 얼마나 되는가. 차라리 우리 둘이 저 보물을 훔쳐 이 가난을 면해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려 땅을 파서 굴을 만들고 가만히 들어가 훔치니, 훔친 물건이 셀 수 없었다. 이튿날 창고지기가 물건이 많이 줄어든 것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조서를 내렸다.
≺이 사실을 퍼뜨려 사람들이 알거나 듣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외삼촌[舅]과 생질[甥]은 왕이 모른다고 생각했다. 왕이 창고지기에게 말하였다.
≺이 뒷날 그들이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니, 우선 엄격하게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오거든 붙잡아 놓치지 않게 하라.≻
창고지기는 이 명령을 받고 더욱 엄하게 지켰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은 다시 훔치러 왔다. 생질이 외삼촌에게 말하였다.
≺외삼촌은 지금 나이도 많고 체력도 약하므로 만일 창고지기에 붙잡히면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힘이 세므로 마땅히 외삼촌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외삼촌은 마침 굴로 들어갔다가 그만 창고지기에게 붙들렸다. 그를 붙든 자는 큰 소리로 여러 사람을 불렀다. 생질은 붙들린 외삼촌을 구출하지 않으면 밝은 날에 사람들이 보고 알 것을 두려워해 곧 외삼촌의 머리를 끊어 가지고 굴을 빠져 나와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 창고지기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그 시체를 끌어내어 네거리에 두어라. 누구나 와서 곡(哭)하고 그 시체를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그 놈이 바로 그 도적이다.≻
그리하여 시체를 네거리에 버려 두고 여러 날 동안 지켰다. 사람과 말이 길을 메울 정도로 오가는데, 이 도적은 시끄러움을 틈타 두 수레의 섶나무 위에 그 시체를 올려 놓았다. 창고지기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이 조칙을 내렸다.
≺가만히 엿보다가 누가 와서 그것을 태우는 사람이 있거든 곧 잡아 묶어 가지고 오라.≻
이에 생질은 아이들을 시켜 횃불을 잡고 춤을 추게 하고,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모여 떠들어댈 때, 가만히 불을 섶나무에 던져 불꽃이 치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자들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 모르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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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화장이 다 되었거든, 더욱 엄하게 지키다가 누가 와서 뼈를 챙기는 자가 있으면 그가 바로 그 괴수일 것이다.≻
생질은 그것을 알고는 술을 아주 독하게 빚어, 그것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에게 가서 가만히 팔았다. 지키는 자들은 며칠 술을 굶은 참이라 술을 보자 마구 마셔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술에 취해 모두 잠에 떨어졌다. 그 때 생질은 그 술병에 뼈를 넣어 가지고 갔으나, 지키는 자들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다시 왕에게 알리자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지금까지 경비하고 지켰으나 끝내 잡지 못했으니, 그 도적은 아주 교활하고 영리한 놈이다. 다시 계획을 세우리라.≻
그리하여 왕은 곧 그 딸을 불러 내어, 온갖 보배로 장식하고 화장시키고는 큰 물가에 있는 별당에 두고 말하였다.
≺너희들은 엄하게 살피고 함부로 하지 말라. 반드시 색(色)을 탐해 저 여자들에게 가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를 붙잡거든 큰 소리로 외쳐 모두 가서 잡게 하라.≻
다른 날 밤에 이 생질은 가만히 와서 그 물을 이용해 나무 등걸을 물을 따라 흘려 보내고는 큰 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가만히 숨어 지키던 자는 놀라서 그리고 갔다가,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람은 없고 다만 나무 등걸만을 보았다. 이렇게 며칠 동안을 변함없이 계속했다. 지키는 자가 조는 틈을 타서 생질은 곧 등걸을 타고 가만히 그 여자 방으로 갔다. 여자는 곧 그의 옷을 잡았다. 생질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내 옷을 끌어당겨 무엇하겠느냐. 내 팔을 잡아라≻라고 하였다. 생질은 본래 음흉하면서 영리하여, 미리 가지고 갔던 죽은 사람의 팔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곧 옷을 놓고 그 팔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이 잠을 늦게 깨는 틈을 타서 생질은 곧 도망쳐 왔다. 이튿날 다시 왕에게 알리자 왕은 말했다.
≺이 사람의 수단은 변화 무쌍하다. 아무리 해도 잡을 수 없으니 장차 어쩌면 좋겠느냐.≻
그녀는 곧 임신하여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자랄수록 단정했다. 그리하여 왕은 유모를 시켜 아이를 안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누구든 이 아이를 보고 한숨을 쉬는 자가 있거든 곧 잡아 묶어 보내라고 했다. 유모는 아이를 안고 종일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질은 떡장수로 가장하여 떡솥 곁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배고파 울므로 유모는 아이를 안고 솥 곁으로 가서 떡을 사서 아이에게 먹였다. 생질은 아이를 보고 한숨지었다. 유모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고 왕은 또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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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잡아 보내지 않았느냐?≻
유모가 대답하였다.
≺아이가 배가 고파 울고 떡장수는 떡을 주고 한숨지었으나, 그가 도적인 줄 몰랐는데 어떻게 아뢰겠습니까?≻
왕은 또 유모를 시켜 아이를 안고 나가, 누구든 아이를 보고 가까이 오는 자가 있거든 곧 잡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생질은 맛 좋은 술을 팔면서 그 유모와 아이를 지키는 사람들을 불러 술을 권해 취해서 잠들게 하고는 그 틈을 타서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은 술에서 깨어나 아이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너희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술을 탐해 마시다가 도적도 잡지 못하고 아이마저 잃었구나.≻
그리하여 생질은 아이를 안고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국왕을 뵙고 점을 쳤다. 그리고 불경을 인용해 그 뜻을 설명했다. 그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녹(祿)과 벼슬을 주고 대신으로 삼고는 말했다.
≺그대의 지혜와 방편은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그대를 내 딸과 짝을 지어 주고 싶다. 그대 마음대로 하게.≻
생질은 대답했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면 실은 우리 나라 국왕의 딸을 말해 보려 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좋다. 그대 말을 따르겠다.≻
그리고는 왕은 곧 자기 아들로 삼고 사신을 보내 저 왕의 딸을 청했다. 왕(본국의 왕)은 곧 승낙했다. 그래서 이 왕은 곧 사신을 보내어 저 왕의 딸을 맞이하려고 조칙을 내리고 그 태자를 시켜 5백 마리의 말을 다 장엄했다. 생질은 적의 신하가 되었으므로 몹시 두려워하며 ≺만일 저 나라에 가면 저 나라의 왕은 반드시 나를 알아보고 잡을 것이 틀림없다≻고 하고는 곧 그 왕에게 아뢰었다.
‘만일 대왕께서 나를 보내시려면 마땅히 사람과 말과 의복과 안장ㆍ굴레 등을 한결같이 차이가 없게 해서 구별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며느리를 맞이하십시오.’
왕은 그 말이 옳다 하고 곧 250기(騎)는 앞에 있게 하고, 250기는 뒤에 있게 한 다음, 사위는 그 가운데서 말을 탄 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저 딸의 아버지(왕)는 몸소 앞에 나와 여러 번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말 탄 사람들 속에 들어가 직접 생질을 붙들고 나와 말하였다.
≺네가 바로 그 놈이지. 백방으로 방편을 다 썼지만 어찌 그리 붙들기 어려우냐?≻
생질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예,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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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총명은 천하에 짝할 이가 없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 딸을 주어 부부가 되게 하리라.>’
부처님께서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생질이 누군지 알고 싶으냐? 그는 바로 나요, 그 외국의 왕은 바로 사리불이다. 그 외삼촌은 지금의 저 조달이요, 그 신부의 아버지는 바로 수두단왕(輸頭檀王)이며, 그 신부의 어머니는 바로 마야(摩耶) 부인이요, 그 신부는 바로 구이(拘夷)이며, 그 아들은 바로 라운(羅雲)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두 기뻐하였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깊이 생각하여 공(空)과 무상(無常)의 모습[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비록 미묘하고 좋은 5욕(欲)이 있다 하더라도 온갖 번뇌를 내지 않는다.
비유하면, 어떤 국왕의 한 대신이 자기의 죄를 숨겨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살찌면서도 기름기가 없는 양을 데리고 오너라. 만일 네가 그 양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너에게 죄를 주리라.’
그 대신은 지혜가 있어서, 큰 양 한 마리를 매어 두고 풀과 곡식만을 먹여 잘 기르면서도 하루 세 번씩 이리를 시켜 겁을 주었다. 양은 비록 살은 쪘으나 지방은 없었다. 그래서 양을 몰고 가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사람을 보내 양을 죽여 보았으나 살은 쪘지만 지방은 하나도 없었다. 왕이 대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는가?’
대신은 이상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의 이리를 보고는 온갖 번뇌의 지방은 녹고 공덕의 살은 찌게 하느니라.”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어떤 장자가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그 얼굴모습이 구족(具足)하고 매우 사랑스럽고 공경스러웠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에 그 집 창고에서 금코끼리 한 마리가 저절로 나왔다. 부모는 기뻐하면서 그 상서로 인해 이름을 상호(象護)라고 했다. 아이가 차츰 자라나자 코끼리도 자랐고,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자 코끼리도 걸어다녔으며, 드나들거나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안에 있었다.통합뷰어
코끼리의 대소변에는 오직 좋은 금만 나왔다. 이 인연으로 그 집 창고에는 보배가 가득했었다.
상호는 장대하여 항상 그 코끼리를 타고 동서로 돌아다녔는데 느리고 빠름이 뜻을 따랐으므로 사람의 마음에 꼭 들었다.
아사세왕(阿闍世王)은 이 소문을 듣고 그것을 보고자 했다. 상호 부자는 그 코끼리를 타고 왕궁 문 앞에 있었다. 왕은 코끼리를 탄 그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에서 내려 들어가 왕에게 예배했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그들에게 앉으라 명하고 음식을 내린 뒤에 간단히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그는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가려고 했다. 왕이 상호에게 말하였다.
‘그 코끼리는 여기 두고 데려가지 말라.’
상호는 슬퍼하며 분부를 받들어 코끼리를 그대로 두고 빈 걸음으로 궁문을 나왔다. 오래지 않아 코끼리는 그 자리에서 땅 속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솟아나 문 밖에 있었다. 상호는 다시 그것을 타고 왕의 해침을 염려하여, 바로 출가하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리고 항상 비구들과 함께 숲 속에서 참선하였는데 그 금빛 코끼리는 항상 그의 눈앞에 있었다.
사위국 사람들은 금코끼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투어 이것을 보러 모여왔으므로, 못내 시끄럽고 조용하지 않아 수도하기에 방해가 되었다. 그 때 비구들은 이 사정을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 상호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시끄러우니 그것을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러나 코끼리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상호야, 너는 ≺나와의 금생(今生)의 인연이 다 되어 이제는 네가 다시 필요 없다≻고 말하여라. 이렇게 두세 번 타이르면 코끼리는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상호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들어 그대로 말하였다. 이때 그 금코끼리는 곧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처님께서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과보가 있었는가? 과거 가섭불 때 사람의 수명은 2만 년이었다.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탑을 세웠는데 거기 보살이 있었다. 그는 본래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코끼리 태 안에 들어갔다. 그 때 그 코끼리 몸에 조그만 상처가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치료해 주고는 서원을 세웠다.
≺나로 하여금 장래에 늘 귀한 집에 태어나서 재물의 쓰임새에 모자람이 없게 하여지이다.≻
그는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났고, 그 천상의 목숨이 다해통합뷰어
세간에 내려와 태어났다. 그리하여 항상 존귀한 집에 있을 때는 금코끼리가 늘 따라다니며 호위하였다.
그 때에 그 코끼리를 치료해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저 상호이니, 그 코끼리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저절로 부자가 되었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보(三寶)를 받들었기 때문에 지금 나를 만나 도를 얻었느니라.’”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난타왕(難陀王)은 총명하고 두루 통하여 능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아는 것으로써 ‘나를 당할 것 없다’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나가사나(那伽斯那)라는 비구가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여 뛰어난데 지금 산중에 있습니다. 대왕께서 시험해 보시렵니까?’
왕은 곧 사람을 시켜 소유(蘇油)를 한 병에 가득히 채워 그것을 그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왕은 생각하였다.
‘내 지혜는 가득 찼다. 누가 나보다 낫겠는가.’
사나는 그 소유를 받자 곧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제자들에게서 바늘 5백 개를 거두어 그것으로 소유 속을 찔렀으나 소유는 넘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사나가 곧 그것을 왕에게 돌려보냈다. 왕은 그것을 받고 나서 그 뜻을 알고 조금 있다가 사자를 보내어 사나를 청했다. 사나는 곧 달려갔다. 왕은 그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그에게 거친 밥을 주었다. 그는 서너 숟가락 먹고는 곧 만족하다고 했다. 왕은 다음에 부드럽고 맛난 밥을 주었다. 그는 곧 마구 먹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아까 만족하다 했는데 왜 지금 또 여전히 먹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제가 아까는 거친 밥에 만족한 것이지, 부드러운 밥에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지금 전상(殿上)에 사람들을 다 모아 가득 차게 하십시오.’
왕은 곧 사람들을 불러 전상에 가득히 채우니,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다. 왕이 뒤에서 와서 전상으로 올라가려 하자, 모든 사람들은 두려웠기 때문에 모두 한 편으로 비켜서 그 사이가 넓어져 많은 사람들이 설 수 있었다. 그 때 사나가 곧 왕에게 말했다.
‘거친 밥은 백성과 같고 부드러운 밥은 왕과 같습니다. 백성이 왕을 보았는데 누가 길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다시 물었다.
‘출가자와 재가자 중에 누가 도를 얻겠는가?’
사나가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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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도를 얻을 것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둘 다 도를 얻는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하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비유하면 여기서 3천여 리의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즉 젊고 건강한 사람을 보내어 양식을 가지고 말을 타고 또 무기를 지니고 가면 빨리 그곳까지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답하였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사나가 다시 물었다.
‘만일 노인을 보내어 약한 말을 타고 또 양식도 없이 간다면 그곳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비록 양식을 가지고 가더라도 그곳까지 가지 못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양식 없이 가는 것이겠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출가하여 도를 얻는 것은 비유하면 젊은이와 같고, 재가(在家)하여 도를 얻는 것은 마치 노인과 같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해가 하늘에 있을 때 그 실체는 하나인데, 무엇 때문에 여름에는 지독히 덥고 겨울에는 지독히 추운가? 또 여름에는 해가 길고 겨울에는 해가 짧은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저 수미산 아래 위에 길이 있습니다. 해가 여름에는 위의 길을 다니는데 길은 멀고 걸음은 더디면서 금산(金山)을 비추기 때문에 해가 길고 덥습니다. 또 해가 겨울에는 아래 길로 다니는데, 길은 가깝고 걸음은 빠르면서 큰 바닷물을 비추기 때문에 해가 짧고 추운 것입니다.’
게송을 읊는다.
잠둔(潛遁)의 교묘한 변화는
잘 희롱하고 몰래 달리는 데 있다.
위대하여라, 인자함과 지혜여
관리가 붙잡아도 잘 빠져 나가는구나.
양은 살찌나 지방이 없고
상호는 하늘이 따라다니며 호위하나니
복에 응함을 느끼어 얻음이라
비밀한 가피가 근기에 부합했다.
고요하면 깊고 또 잠잠하며
움직이면 신비롭게 빛난다.
끊임없이 의거하나니
아름답게 언제나 문채가 빛난다.
그 종(宗)이 원상(元象)을 돌이키매
빛이 잠기고 그림자가 떠나나니
숨고 나타남을 헤아리기 어렵고
그 진실과 거짓을 알기 어렵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열세 가지 증험을 인용하였다.]
서진(西晋)의 사문 유살하(劉薩何)
서진의 사문 배도(杯度)
서진의 사문 축불도징(竺佛圖澄)
서진의 사문 석도진(釋道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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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사문 석담시(釋曇始)
송나라 사문 석법랑(釋法朗)
송나라 사문 석소석(釋邵碩)
송나라 사문 석혜안(釋慧安)
제(齊)나라 임금 고양(高洋)
제나라 사문 석승혜(釋僧慧)
양(梁)나라 사문 석보지(釋保誌)
오(吳)나라 거사(居士) 서광(徐光)
수신잡전(搜神雜傳) 지선(地仙) 등의 기록
① 서진(西晋)의 사문 유살하(劉薩何)
서진(西晋) 자주(慈州) 성곽 밑에 있는 안인사(安仁寺)의 서쪽에 유살하(劉薩何) 스님의 사당이 있다.
옛날 서진 말엽에 이 고을의 본래 이름은 문성군(文成郡)이었으니 즉 진문공(晋文公)이 피난했던 곳이다. 자주의 동남에서 멀지 않은 높고 편편한 언덕 위에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살하(薩何)이고, 성은 유(劉)씨이다. 그의 사당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온갖 장식을 다 갖추고 있다.
살하는 처음에 속가에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나, 항상 무엇을 살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불법을 전혀 받들지 않았었다. 살하가 병환으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말하였다.
“저승에서 관세음을 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네 죄는 중하다.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너의 무지함을 가엾이 여겨 우선 살려 놓아 보낸다. 낙하(洛下)의 제성(齊城)ㆍ단양(丹陽)ㆍ회계(會稽) 등에는 모두 아육왕(阿育王)의 탑이 있으니, 거기 가서 예배하면 과거에 지은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하가 다시 살아나게 된 뒤로는 과거의 습관을 고쳤으나 그 지방에는 부처님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성곽 아래에 어떤 사람에게 성곽 아래에 형편을 자세히 물었다. 그는 방편으로 깨우치고 인자한 가르침을 설명했다. 계호(稽胡) 사람은 정직한지라 그의 말을 신임했다. 그래서 해마다 4월 8일이면 평원(平原)에서 크게 모여, 각각 술과 떡 및 깨끗한 공양으로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즐기고, 곧 깨끗한 공양을 행하다가 한낮이 되면 마치곤 했다. 점심 때가 지난 뒤에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삼보(三寶)를 노래하면서 새벽까지 계속했다.
살하는 드디어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혜달(慧達)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우러러 공경하여 부처님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기적을 나타내므로 그에 대한 믿음은 더욱 드높았다. 그는 낮에는 높은 탑에 올라가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밤이면 누에고치 속에 들어가통합뷰어
숨어 있다가 아침이 되면 누에고치 사이에서 나오는데 집에서 조금도 편히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소하성(蘇何聖)’이라고 하였으니 소하란 계호 지방에서 누에고치라는 뜻이다. 고치 속에서 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저 풍속에는 마을마다 불당(佛堂)에 모두 그의 상(像)을 세우고 그것을 호사불(胡師佛)이라고 부른다.
지금 안인사(安仁寺) 사당의 입상(立像)은 매우 장엄하여 지방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데 향과 꽃이 매우 많다. 해마다 정월에는 그 상을 가마에 싣고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가고 머무름이 자재한 것은 사람의 힘만이 아니어서 저 마을에 가고자 하면 두 사람이면 들고 갈 수 있었다. 액문(額文)이 열리면 그 안색이 화열(和悅)하고 그 마을에는 1년 동안 죽거나 병 드는 사람이 적으며, 가고자 하지 않으면 열 사람이 들어도 옮길 수 없고 액문이 닫히면 슬퍼하는 안색이고 참담해지며 마을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랐다. 그러므로 그 지방 사람은 지금도 항상 그것으로 징후를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도 관세음이 얼굴을 빌어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이름을 혜달이라 했다고 한다.
경전 한 권이 그 지방에 유행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호어(胡語:범어)로 되어 있으나 그는 그것을 읽고 스스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황하(黃河) 좌우에 있는 자(磁)ㆍ습(隰), 남(嵐)ㆍ석(石), 단(丹)ㆍ연(延), 수(綏)ㆍ은(銀) 등 8주(州)에서 모두 공경하여 받들며 무슨 행사가 있을 적에는 저기서 말한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언덕에 다 흙탑을 세우고 그 위에 백찰(柏刹)을 세워 거기에 누에고치를 달아 놓았으니 그것은 혜달이 살던 곳이라는 표시를 한 것이다.
그런데 살하가 고향[本鄕]에서 불법을 펴고는 동쪽으로 단양(丹陽)에 가서 여러 탑을 만들고 예식을 다 행했는데, 서쪽으로 양주(凉州)ㆍ번화(番禾)ㆍ어곡(御谷)ㆍ예산(禮山) 등으로 가서 상을 모셔 내어, 숙주(肅州) 주천(酒泉) 곽서(郭西)를 출행했다가 모래밭에서 죽었다. 그 해골은 잔잔하여 모양이 아욱씨 같고 가운데에 모두 구멍이 있어 노끈으로 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 지방에서 재앙이 있는 사람은 그 모래밭에 가서 그것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을 얻더라도 흉망(凶亡)하게 되고 길상(吉祥)은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찾다가 결국 얻지 못하였는데 그 왼쪽에 있는 관음상(觀音像) 위에서 그것을 얻었으나 밤이 되자 잃어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찾아 보았더니 그것은 도로 관음상 손에 있었다.통합뷰어
그러므로 이 지방 사람은 이것을 매우 높이 받들었다.
② 서진의 사문 배도(杯度)
서진(西晋)의 사문 배도(杯度)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기주(冀州)에서 나서 70년쯤 살았다. 그는 성명을 숨기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그 때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지 못했었다.
일찍이 어느 집에서 잠을 자는데 그 집에 금상(金像)이 있었다. 배도는 새벽에 일어나 그것을 가지고 떠나 버렸다. 주인은 말을 채찍질해 쫓아갔으나 배도가 천천히 걸어갔는데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강에 이르자 그는 조그만 술잔을 타고 맹진(孟津)을 지나갔다. 그 때문에 그 뒤에 이름을 배도라 했다. 그 뒤에 팽성(彭城)에 살았는데 뒤에 사람들이 늘 그를 보면 그는 항상 길에 있었고 그 거처를 알 수 없었다. 항상 갈대 도시락을 가거나 오거나 간에 늘 짊어지고 다녔다. 혹은 눈이 어는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 목욕하였는데, 살빛은 빛나고 조금도 추운 기색이 없었다.
의희(義熙) 때에 잠깐 광릉(廣陵)에 있었는데, 자사(刺史) 패국유번(沛國劉蕃)이 본래부터 그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그가 오기를 청하였다. 그는 여전히 도시락을 메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들어보았으나 무거워서 들리지 않았다. 유번은 몸소 일어나 그를 바로 보았더니 다 해어진 누더기뿐이었다. 배도는 하직하고 떠날 때 손에 들고 있는 그 도시락은 마치 기러기의 털처럼 가벼웠다. 영가(永嘉) 초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집(羅什)은 그가 팽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그 사람과 장난치면서 이별한 지가 벌써 수백 년이 되었구나’ 하였으니, 여기서 라집도 신인(神人)임을 알 수 있다.
③ 서진의 사문 축불도징(竺佛圖澄)
서진(西晋) 말년의 축불도징(竺佛圖澄)은 서역(西域) 사람이다. 형모(形貌)는 1백 살 먹은 사람과 같고 왼쪽 옆구리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 둘레는 4, 5촌이며 비단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 재일(齋日)에는 물가에 나가 위장(胃腸)을 끄집어내어 물에 씻어 구멍으로 넣고 밤이 되어 비단을 빼면 빛이 온 방을 비추어 글을 읽곤 했다. 비록 많은 책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여러 학자들과 변론할 때는 그 해석이 막힘이 없어서 굴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가(永嘉) 때에는 낙하(雒下)에 있었다. 그 때 석륵(石勒)이 하북(河北)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통합뷰어
사람들을 죽이며 위세를 부렸으므로, 그 해를 입은 도인과 속인들이 적지 않았다. 도징은 그 군문에 가서 길흉을 미리 점쳤으므로 석륵은 늘 그를 보고 예배했다. 도징이 그를 교화시켜 불법을 받들게 하여 죽임과 형벌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그 고을에서 해를 면한 사람이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석륵은 유요(劉曜)와 틈이 생겨 서로 버티고 있을 때 도징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도징은 “그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그리고 손바닥에 참기름을 발라 그에게 보였는데, 유요는 붙잡혀 뒷짐을 지어 붉은 밧줄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과연 그를 잡았으니 마치 손바닥에 본 것과 같았다.
건평(建平) 4년(402) 4월 8일에 석륵은 절에 가서 부처님을 목욕시켰다. 실바람에 방울이 울렸다. 도징은 대중을 돌아보고 “저 방울 소리의 뜻을 아는가?” 하였더니, 방울이 말하기를 “금년 안에 이 나라에 큰 초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7월이 되어 과연 석륵이 죽고 석호(石虎)가 왕위에 올랐다. 석호는 석륵보다 스님을 더 받들어 가마를 주고 말을 탄 채 출입하게 하였다. 그의 상서로운 징험은 수없이 많이 나타났으나, 생략하고 다 기술하지 않는다.
석호 말년에 도징은 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나라에 장차 화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무신년(戊申年, 408)에 태자가 그 이모를 죽였다. 석호는 화를 내어 그 처자까지 죽였는데 이듬해에 석호는 죽었다. 드디어 염민(冉閔)의 난리가 일어나 그를 업서(鄴西)에 장사 지냈다.
어떤 이가 말했다.
“도징이 죽던 날, 상인들이 그가 유사(流沙)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석호가 그 관을 열어 보았더니 가사와 발우만이 있었다.”
도징이 중원(中原)에 있을 때 큰 난리를 만났으나, 인자한 교화를 빛내어 그 덕이 가장 높았으니, 그 지극한 성인이 아니면 어찌 그런 도탄(塗炭)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무릇 980여 곳에 절을 짓고 도인과 속인을 두루 구제하여 천하를 둘로 갈라놓았었다.
④ 서진의 사문 석도진(釋道進)
서진(西晋) 업중(鄴中)에 살고 있던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도진(道進)은 그 학문이 내외(內外)를 다 통하여 석호(石虎)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은사(隱士)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석호는 도진에게 말하였다.
“양가(楊軻)라는 사람은 짐(朕)의 백성이다.통합뷰어
그런데 10여 년 동안 불러도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가 보았더니 거만스레 누워 있었다. 짐이 비록 덕이 없으나 모든 나라에 군림(君臨)한다. 내 수레가 가는 곳에는 하늘이 끓고 땅이 솟구친다. 비록 시키지 않더라도 나무와 돌이 다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어찌 하나의 필부(匹夫)로서 항상 거만하게 구는가. 옛날 태공(太公)은 제(齊)나라에 가서 먼저 화사(華士)를 죽였으니 태공 같은 현철(賢哲)이 어찌 잘못했겠는가.”
도진은 말하였다.
“옛날 순(舜)임금은 포의(蒲衣)를 우대했고, 우(禹)임금은 백성(伯成)에게 갔으며, 위(魏)나라는 간목(干木)에게 절하였고, 한(漢)나라는 주당(周黨)을 아름답게 여겼으며, 관녕(管寧)은 조씨(曹氏)에 응하지 않았고, 황보(皇甫)는 진세(晋世)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 2성(聖) 4군(君)은 다 그 절조를 아름답게 여기고 탐내어 장차 다툼을 격려(激厲)함으로써 맑은 풍속을 높이었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순임금과 우임금의 덕을 좇고 태공의 형벌 쓴 것을 본받지 마십시오. 임금의 거동은 반드시 책에 기록되는 것이니 어찌 조사(趙史)에 은둔(隱遁)의 전기(傳記)가 없도록 하겠습니까?”
석호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곧 양가를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10가(家)를 공급해 주었다.
도진은 다시 도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도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 말은 매우 훌륭하다. 다만 양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뒤에 진주(秦州)에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양가의 제자가 양가를 소에 태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둘 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석호는 일찍이 낮잠을 자다가, 양떼들이 생선을 지고 동북쪽에서 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 도징을 찾아가 물었다.
도징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하다. 선비(鮮卑)가 저 중원(中原)을 점유하리라.”
그 뒤에 과연 모용(慕容)씨가 거기에 도읍했다.
⑤ 송(宋)나라 사문 석담시(釋曇始)
송(宋)나라 위위(僞魏)의 수도 장안(長安)에 석담시(釋曇始)가 있었으니 그는 관중(關中)사람이다. 그는 출가한 뒤로 이적(異迹)이 많이 있었다. 진(晋)나라 효무(孝武) 태원(太元) 말년에 경율(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선화(宣化)하면서 3승(乘)을 가르치고 계율에 귀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고구려가 도를 듣기 시작한 때이다.
의희(義熙)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3보(輔)를 깨우쳐 인도했다.통합뷰어
담시는 그 발이 얼굴보다 희고 맨발로 진흙물을 건너도 발에 진흙이 묻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백족(白足) 화상이라 일컬었다.
그 때 장안 사람 왕호(王胡)는 그 숙부가 죽은 지 여러 해 만에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왕호를 데리고 지옥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갖 과보(果報)를 다 보여주었다. 왕호가 돌아오려고 하직 인사를 하자 그는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과보를 다 알았으니 다만 백족 아련(阿練)만을 받들어 섬길 뿐이니라.”
왕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여러 스님을 찾다가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흰 것을 보고 곧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년에 북방의 흉노(凶奴) 혁련발발차지(赫連勃勃嗟之)가 사문을 모두 내쫓았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담시는 그 때 산과 늪에 숨어 두타(頭陀)의 행을 닦았다. 뒤에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빼앗아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 위세를 떨쳤다. 그 때 박릉(博陵)의 최호(崔皓)는 젊어서부터 좌도(左道)를 익혀 석교(釋敎)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가 보상 자리에 오르자 척발도에게 신망을 받고 곧 천사(天師) 구씨(寇氏)와 더불어 척발도에게 부처님의 교화는 이익은 없고 백성을 해치는 해만 있다고 하여, 그를 권해 불법을 폐하게 했다.
척발도는 그 말에 감동하여 위위(僞魏)의 태평(太平) 7년에 드디어 불법을 훼멸(毁滅)하기로 했다. 그래서 군사를 사방에 보내어 절들을 불사르고 노략질하였으며 승니(僧尼)들에게는 모두 도를 닦지 못하게 했다. 누구나 달아나 숨는 자가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고 잡힌 자는 반드시 목을 베어 나무 같은 데에 매달았으므로 온 나라 안에 다시는 사문이라고는 없었다. 담시는 깊숙한 곳에 고요히 있었으므로 군사들이 미치지 못했었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척발도를 교화할 때가 왔음을 알고 원회(元會)의 날에 갑자기 석장(錫杖)을 이끌고 궁문으로 갔다. 유사(有司)가 왕(척발도)에게 아뢰었다.
“발이 얼굴보다 더 하얀 어떤 도인이 궁문으로 들어옵니다.”
척발도는 군법에 의해 처결하라 했다. 유사가 칼로 여러 번 쳤으나 담시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유사가 황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화를 내어 스스로 차고 있던 칼로 쳤으나, 담시의 몸에는 다른 이상은 없고, 오직 칼에 맞은 흔적으로 삼베 올과 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북쪽 동산에 호랑이를 기르는 우리가 있었다. 척발도는 호랑이가 담시를 잡아먹게 했다.통합뷰어
그러나 호랑이들은 다 그 앞에 엎드린 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척발도는 시험삼아 천사(天師)를 우리에 가까이 가게 했더니 호랑이는 곧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는 뛰어나 황로(黃老)가 미칠 바가 못됨을 깨닫고, 곧 담시를 전상(殿上)으로 맞이하여 그 발 아래 정례(頂禮)하고 믿음이 없었음을 참회했다. 담시는 그를 위해 설법하여 인과(因果)에 대하여 밝게 설명했다. 척발도는 크게 부끄러워하였는데 그 때문에 역병(疫病)에 걸렸고, 다음에는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나쁜 병에 걸렸다. 그러나 척발도는 이 허물이 모두 저들 때문이라 하여 저 두 가문을 모두 멸망시켜 그 일족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려 불교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나 얼마 후에 척발도는 죽었다. 그 손자 준(濬)이 왕위에 올라 비로소 크게 불법을 펴 지금까지 성행하였다. 담시는 그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⑥ 송나라 사문 석법랑(釋法朗)
송(宋)나라 고창(高昌)의 석법랑(釋法朗)은 고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고행을 행하여 온갖 징조가 많았다. 그러나 빛을 숨기고 덕을 쌓아, 그의 이력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 법랑의 스승인 석법진(釋法進)도 그 행이 높은 사문이었다. 법진은 일찍이 문을 닫고 혼자 앉았다가 갑자기 법랑이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법랑이 대답하였다.
“문 자물쇠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시 말하였다.
“혜원(慧遠)과 함께 왔습니다. 해가 벌써 한낮이 되었습니다. 점심 공양이나 주십시오.”
법진은 점심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오직 숟가락과 발우 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옛날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일찍이 가사 한 벌을 법진에게 보냈을 때 법진은 그것을 법랑에게 선물로 주었다. 법랑이 말하였다.
“많은 스님들이 다 떠나간 뒤에 다른 날 따로 받겠습니다.”
그 뒤에 공양주(供養主)가 법진에게 가서 그 가사를 청하자 법진이 그에게 주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공양주들은 모두 그것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비로소 이것은 옛날 성인의 화신(化身)이 가진 것임을 알았다.
위나라가 불법을 멸할 때에 이르러 법랑은 서방의 구자국(龜玆國)으로 갔다. 구자국 왕은 일찍이 그 나라의 큰 선사들과 약속하였다.
“만일 도를 얻은 이가 오면 그는 나에게 설법해야 하고 나는 그에게 공양하리라.”
그러자 법랑이 왔다는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통합뷰어
왕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성인으로 그를 예우했다. 법랑은 뒤에 구자국에서 죽었다. 시체를 불사르는 날에 두 어깨에서 샘물이 솟아 바로 하늘에까지 솟아 올라갔다. 대중은 모두 희한한 일이라 감탄하고 그 유골을 거두어 탑을 세웠다.
뒤에 서역 사람이 여기 와서 이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⑦ 송나라 사문 석소석(釋邵碩)
송(宋)나라 민산(岷山) 통령사(通靈寺)의 사문 소석(邵碩)의 성은 소(邵)이고 이름은 석(碩)이며 시강(始康)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미친 사람 같았는데 불법을 매우 공경하였다. 송나라가 절박하게 되자 그는 출가하여 도에 들어가 석공(碩公)이라고 자칭했다. 드나들고 가고 머무름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가서 땅바닥에 자면 그 집에 죽는 사람이 있었고, 남에게 가서 부드러운 자리를 청하면 반드시 그 집의 어린애가 죽었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예언이라 했다.
4월 8일이 되어 성도(成都)에서 행상(行像)할 때 소석은 사자 모양이 되어 대중 가운데서 기어 다녔다. 그 날 다른 고을 사람들도 소석이 사자 모양이 된 것을 보고, 비로소 그의 분신(分身)임을 깨달았다. 그 고을 자사(刺史) 소혜개(蕭慧開)와 유맹명(劉孟明) 등이 모두 소석에게 예배하고 섬겼다. 그 뒤 어느 날 아침에 그는 갑자기 삼베모자를 쓰고 맹명에게 가자 조금 있다가 맹명이 죽었다. 전에 맹명의 장사(長史) 심중옥(沈仲玉)이 채찍과 곤장의 법을 고쳐서 더욱 엄중하게 했다. 그래서 소석이 중옥에게 말하였다.
“천지의 시끄러움이 다 여기서 일어난다. 만일 그 매질하는 법을 버리면 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옥은 이 말을 믿고 매질을 버렸다. 맹명이 죽게 되자 중옥은 과연 그 주(州)의 일을 맡았다.
송나라 원휘(元徽) 원년(473) 9월 1일에 소석은 아미산(峨嵋山) 통령사(通靈寺)에서 죽었다. 임종 때 도인 법진(法進)에게 말하였다.
“내 해골을 한데다 두고 빨리 다리에 신을 신겨다오.”
법진은 그 말대로 해주고 시체를 절 밖에 내두었는데, 이틀이 지난 뒤에 시체는 간 곳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비현(郫縣)에서 와서 법진을 만나 말하였다.
“어제 보니 석공이 장터에 있었는데 한쪽 다리에만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담(漫談)처럼 말하기를 ‘나의 어린 아이들이 철이 없어, 내 신 한 짝을 잃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법진은 놀라 사미들에게 따져 물었다. 사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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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시체를 보낼 때 너무 당황하여 오른발의 신 한 짝을 잘 신기지 못한 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자취의 괴이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는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⑧ 송나라 사문 석혜안(釋慧安)
송(宋)나라 강릉(江陵) 비파사(琵琶寺)의 석혜안(釋慧安)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강릉 비파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 풍모는 초라하여 모두가 업신여겼다. 그가 사미였을 때, 여러 스님들이 쭉 둘러 앉아 그에게 물을 돌리게 했다. 그가 빈 병을 들고 윗사람에서 아랫사람에까지 물을 돌릴 때 그 물은 언제나 다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는 차츰 영적(靈迹)을 나타내었다. 달마다 그믐날 저녁에는 동학(同學)인 혜제(慧濟)와 함께 법당에 올라가 포살(布薩)을 시행했다. 마침 법당 문이 열리지 않자 혜안은 곧 혜제를 끼고 벽틈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혜제는 놀랍고 두려워 감히 그 말을 퍼뜨리지 못했다. 뒤에 혜제와 함께 탑 밑에 가서 혜안은 혜제에게 말했다.
“나는 멀리 떠나려 한다.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겠다.”
조금 후에 혜제는 천인(天人)들이 음악을 울리고 향과 꽃이 공중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혜제는 오직 놀라고 두려워할 뿐, 아무 말도 못했다. 혜안은 혜제에게 말했다.
“내 전후의 사적을 부디 함부로 말하지 말라. 말하면 반드시 허물이 있으리라. 오직 서남쪽에 어떤 속인이 있으니 그는 처음 발심(發心)한 보살이다. 그에게만은 다 말해 주어라.”
그리고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 장사꾼들과 함께 상천(湘川)에 들어갔다. 도중에 이질에 걸려 매우 위독할 때 그는 선주(船主)에게 말하였다.
“빈도(貧道)의 목숨은 반드시 다할 것이오. 다만 나를 저 언덕에 내려 두고 기목(器木)을 쓰지 마시오. 그리고 죽은 뒤에는 내 시체를 벌레나 새에게 보시하시오.”
상인은 그의 말에 따라 언덕 옆에 내다 눕혔다. 밤에 보니 불꽃이 그 몸에서 나왔다. 상인은 괴상히 여기고 놀라서 가 보았더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나 상인이 소상강 동쪽[湘東]에 갔을 때 혜안은 먼저 와 있었다. 이윽고 또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혜제는통합뷰어
뒤에 척기사(陟屺寺)에 갔다가 은사(隱士)인 남양 유규(南陽 劉虯)에게 가서 이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유규는 곧 일어나 멀리서 절하고 혜제에게 말하였다.
“도를 얻은 이 사람은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다.”
⑨ 제(齊)나라 임금 고양(高洋)
제나라 황제의 휘(諱)는 양(洋)이니, 원위(元魏)의 승상(丞相)인 고환(高歡)의 둘째 아들이다. 맏형인 징(澄)은 성질이 조급하고 거만하여 그의 종에게 살해당했다. 양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대대로 상국(相國)이 되었다. 위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고양은 남쪽 들에 단(壇)을 쌓고 점을 쳐서 크게 흉하고 크게 길(吉)한 한문괘(漢文卦)를 얻었다. 이에 금상(金像)을 만들 때는 한 번 부어 다 완성하였다. 위목(魏牧)이 왕위를 전하는 글을 만들고 위제(魏帝)가 서명하였으므로 곧 그 선위(禪位)를 받아 제나라를 크게 이룩하였다.
무릇 그의 행리(行履)는 어리석었는지 지혜로웠는지는 모른다. 제나라 황제인 고양은 그 정사를 복야(僕射) 양준언(楊遵彦)에게 맡기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니, 승니(僧尼)는 여러 주(州)에 가득 넘치고 겨울과 여름으로 공양을 베풀고 도를 행함이 끊이지 않았다. 그 때 주선사(稠禪師)가 황제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단월은 나찰을 다스리십시오. 물에 나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십시오.”
황제는 이 말을 따라 물에 나가 보니, 나찰이 자기 뒤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고기를 먹지 않고 매사냥을 금지하였으며 관청의 생선잡이와 짐승잡이를 없애고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시장에 팔지 못하게 했다. 황제는 항상 참선하면서 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부처님께 예배하는데 부처님의 주위를 돌 때는 그 빠르기가 마치 바람 같았다. 소현(昭玄) 대통 법사(大統法師)에게 계를 받을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자기의 머리를 밟아 계단에 오르게 하여 계를 받았다.
황제는 일찍이 진양(晋陽)에 있을 때 사람을 시켜 낙타를 타고 절에 가서 경함(經函)을 가져오라 칙명을 내렸다. 사신이 물었다.
“그 절이 어디 있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낙타에 몸을 맡긴 채 성을 나가거라.”
성을 나가자 마치 꿈 속인 듯 어느새 어떤 산에 이르렀다. 산 중턱에 절이 있고 사미들이 멀리서 말하였다.
“고양(高洋)이 낙타를 타고 온다.”
한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는 예배하고 말하였다.
“고양이 천자가 되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신이 말하였다.
“성명(聖明)하신 분입니다.”
노승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무엇하러 왔습니까?”
사신이 답하였다.
“경함을 가지러 왔습니다.”
노승이 말하였다.
“고양은 절에 있으면서 경 읽기를 게을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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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서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고는 그것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복명(復命)했다.
처음에 황제가 골짜기 어귀에 있는 목정불사(木井佛寺)에 이르렀을 때, 몸을 버리려는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할 줄을 몰랐는데 갑자기 황제에게 말하였다.
“나는 가니 당신은 뒤에 오십시오.”
그날 밤에 그 어리석은 사람은 죽고, 황제도 곧 진양에서 죽었다.
⑩ 제나라 사문 석승혜(釋僧慧)
제(齊)나라 형주(荊州)의 석승혜(釋僧慧)는 성은 유(劉)씨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형주에서 수십 년 살았다. 남양(南陽)의 유규(劉虯)는 척기사(陟屺寺)에 있으면서 그를 청해 오라고 했다. 그 때 사람들이 볼 때 그는 이미 50, 60세가 되었는데 늙지 않아 보였다. 그의 행동은 경솔하여 그다지 위의가 없어 보였다. 병자의 집에 가서 성을 내면 병자는 반드시 죽고 기뻐하면 반드시 나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예언이라 했다. 무릇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서로 친해 그 죽고 삶을 다 말했다.
승혜는 일찍이 강가에 가서 나루 주인에게 말해 건네 주기를 청했다. 나루 주인은 배가 작다는 핑계로 건네 주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보니, 승혜는 저쪽 언덕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신이(神異)하다고 감탄했다.
중산의 견염(甄恬)에 남평(南平)의 차담(車曇)은 같은 날 승혜를 청했다. 승혜는 두 군데에 동시에 갔다. 뒤에 두 집에서 몇 번이나 조사해 보고 비로소 그가 몸을 나눈 것을 알았다.
제(齊)나라 영명(永明) 때에 문혜(文慧)는 승혜를 서울로 내려오라고 청했다. 그는 가는 길에 보지(保誌)에게 들렀다. 보지는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적룡자(赤龍子)야.”
그리고는 다른 말은 없었다. 그 뒤에 승혜는 형주로 돌아와 진서(鎭西)의 장사(長史) 유경유(劉景蕤)를 만나 보자 갑자기 통곡하며 그에게 쓰러졌는데, 며칠 뒤에 과연 경유는 자사(刺史)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에 승혜는 상주(湘州)의 성 남쪽으로 가서 갑자기 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속에 비(碑)가 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시험삼아 파 보았는데, 과연 두 개의 비석이 있었다. 승혜는 그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혹은 “영원(永元) 때에 강릉(江陵)의 장사사(長沙寺)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⑪ 양(梁)나라 사문 석보지(釋保誌)
양(梁)나라 경사(京師)의 석보지(釋保誌)는 본성이 주(朱)씨이고 금성(金城)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경사의 도림사(道林寺)에 머물렀다. 사승 승검(僧儉)을통합뷰어
화상으로 삼아 섬기면서 선업(禪業)을 닦아 익혔다.
송(宋)나라 태시(太始) 초년이었다. 갑자기 방자하고 거만하여 행동에 일정함이 없고 음식 먹음에 때가 없었다. 머리는 길어 두어 치나 되었고 항상 맨발로 거리를 다니며 하나의 석장(錫杖)을 짚고 다녔다. 석장 꼭대기에는 전도(剪刀) 및 거울을 달거나 혹은 한두 필의 비단을 걸었었다.
제(齊)나라 건원(建元) 때에는 차츰 기이한 자취[異迹]를 보여, 며칠을 먹지 않고도 배고픈 기색이 없고 남과 말할 때에는 처음에는 알아 듣기 어려운 듯 했으나 뒤에는 다 징험이 있곤 하였다.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그 말은 참기(讖記)와 같았으므로 서울의 사서(士庶)들은 다 그를 섬겼다. 제나라 무제(武帝)는 대중을 미혹시킨다 하여 그를 건강(建康)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시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감옥을 조사해 보았더니 보지는 그대로 감옥에 있었다. 보지가 옥리(獄吏)에게 말하였다.
“지금 감옥 밖에 두 수레에 밥을 가지고 왔는데 금발우에 담았다. 너는 가서 받아라.”
그런데 제나라 문혜(文慧) 태자와 경릉(竟陵)의 왕자 양(良)이 다 보지에게 음식을 보냈던 것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건강령(建康令) 여문현(呂文顯)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었다. 무제는 곧 보지를 맞아들여 후당(後堂)에 있게 하고 궁내의 잔치를 한꺼번에 피하였다. 보지도 대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경양산(景陽山) 위에 보지가 일곱 스님과 함께 있었다. 무제는 성을 내어 사람을 보내 그를 잃어버린 곳을 조사해 보게 했다. 합리(閤吏)가 아뢰었다.
“보지는 오래전에 궁중에서 나가 성(省)에 있으면서 지금 그 몸에 먹을 칠한 채 있습니다.”
그 때 승정(僧正) 법헌(法獻)은 옷 한 벌을 보지에게 주려고 용광(龍光)ㆍ계빈(罽賓) 두 절에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는데 모두 말하였다.
“어젯밤에 여기서 자고 아침에 떠났다.”
또 그가 늘 가는 광후백(廣候伯)의 집에 가서 물어 보았다. 백도 또 말하였다.
“보지가 어제 이 길을 가는데 아침이 되었어도 잠이 아직 깨지 않았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었으니 비로소 그의 분신(分身)이 세 곳에서 잔 것을 알았다.
보지는 일찍이 한겨울에 웃통을 벗고 다녔다. 사문 보량(寶亮)이 누더기를 한 벌 주려 했으나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보지가 갑자기 와서 그 누더기를 가지고 갔다. 또 어느 때 사람에게 가서 생선회를 청하니,통합뷰어
그 사람은 생선회를 가져다 주었다. 보지는 그것을 배불리 먹고 다시 토해 내었다. 동이 안을 보니 고기들이 살아서 놀았다.
그 뒤에 보지는 무제(武帝)에게 신력(神力)을 빌려 주어, 땅 속에 있는 고제(高帝)가 늘 송곳과 칼에 찔리고 베이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했다. 그 뒤로 무제는 송곳과 칼을 아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제나라 위위(衛尉) 호해(胡諧)가 병이 들어 보지를 청했다. 보지의 주소(注疏)에는 ‘호굴(胡屈)’이라 하였다.
이튿날도 그는 떠나지 않았다. 이 날 호해는 죽어 시체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지가 말하였다.
“호굴이란 ‘내일 시체가 나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제나라 태위사마(太尉司馬) 은제지(殷齊之)는 진현달(陳顯達)을 따라 진강주(鎭江州)로 가면서 보지에게 하직을 고했다. 보지는 종이에 나무 하나를 그리고 나무 위에는 까마귀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 제지에게 말했다.
“급할 때에는 이 나무에 올라가라.”
뒤에 현달이 반역(叛逆)하여 제지를 진주에 두었다. 일이 실패되어 제지는 여산(廬山)으로 달아날 때, 쫓아오는 군사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제지가 마침 숲 속에 어떤 나무가 있는 곳을 보았는데,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어 꼭 보지가 준 그림과 같았다. 제지는 깨닫고 그 나무 위로 올라갔으나 까마귀는 끝내 날아가지 않았다. 쫓아오던 자는 까마귀를 보고 사람이 없다 생각하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그래서 제지는 그 화를 면했다.
제나라 둔기(屯騎) 상언(桑偃)이 장차 모반(謀反)하고자 하여 보지에게로 갔다. 보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 달아나면서 크게 외쳤다.
“대성(臺城)을 포위하고 반역하려 하면 머리가 찍히고 배가 갈라질 것이다.”
그 뒤 하순(下旬)에 일이 발각되어 상언은 주방(朱方)으로 갔다가 사람에게 붙잡혀 과연 머리가 찍히고 배가 갈라졌다.
양(梁)나라 파양(鄱陽)의 충렬왕(忠烈王)은 항상 보지를 자기 집으로 청했다. 보지가 오자, 갑자기 형자(荊子)를 몹시 급하게 찾아 문 위에 얹어 두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 얼마 후에 왕은 형주(荊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그는 이처럼 밝게 미리 알았으니, 이러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지는 흥황(興皇)과 정명(淨名)의 두 절을 많이 왕래하였다. 지금의 임금님이 왕위에 오르자 보지는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다. 전에 제나라 때에 보지의 출입을 많이 금했었다. 지금 임금은 왕위에 오르자 곧 조서(詔書)를 내렸다.
“지공(誌公)은, 몸은 비록 티끌 속에 있으나 정신은 명적(冥寂)에 노닐고 있다. 물과 불도 그를 태우거나 적시지 못하고통합뷰어
뱀과 호랑이도 침노하거나 두렵게 하지 못한다. 그는 부처님의 이치를 말하면 성문(聲聞) 이상이요, 숨어 삶을 이야기하면 숨은 신선이고 고상한 선비다. 이러하거늘 속된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공연히 구금하니, 어찌 이처럼 그 마음이 야비하고 편협한가. 지금부터는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고 다시는 금지하지 말라.”
이로부터 보지는 궁중으로 자주 출입했다.
천감(天監) 5년의 겨울은 몹시 가물어, 희생을 올려 제사를 지극히 지냈으나 비를 내리게 하지는 못했다. 보지가 갑자기 왕에게 글을 올렸다.
“보지는 병이 낫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치료하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뢰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마땅할 일이 있습니다. 원컨대 화광전(華光殿)에서 『승만경(勝鬘經)』을 강설하여 비를 청하소서.”
왕은 곧 사문 법운(法雲)을 시켜 『승만경』을 강설하게 하였다. 강설을 마치는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다. 보지는 또 말하였다.
“물을 한 동이 떠다 놓고 그 위에 칼을 얹으시오.”
사람들이 그렇게 하자, 조금 있다가 비가 크게 내려 상하가 다 만족했다. 왕은 항상 보지에게 물었다.
“제자는 번혹(煩惑)을 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답하였다.
“12를 아는 자는 12인연이 번혹을 다스리는 약이라 생각합니다.”
또 물었다.
“12의 뜻은 무엇입니까?”
“글자를 쓸 때는 각루(刻漏) 안에 있으니 아는 자는 그것을 쓰는 것이 12시(時)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물었다.
“제자는 언제나 고요한 마음으로 닦아 익힐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안락금(安樂禁)입니다. 아는 자는 금(禁)을 지(止)라고 생각하나니 안락하게 된 때는 곧 그칠 뿐입니다.”
뒤에 법운이 화림사(華林寺)에서 『법화경』을 강설할 때 ‘가사흑풍(假使黑風)’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보지는 갑자기 물었다.
“바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법운이 대답하였다.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있지만 제1의제(義諦)이면 없습니다.”
보지는 서너 번 되풀이해 묻다가 곧 웃으면서 말하였다.
“만일 체(體)가 거짓으로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알 수도 없고 알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의 말 뜻이 은밀하였는데 대개가 이와 같았다.
진정로(陳征虜)란 사람은 온 집이 다 보지를 독실히 섬겼으므로, 보지는 그들을 위해 참 형상을 나타내어 보여주었는데 그 빛나는 모양이 마치 보살의 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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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는 그 이름이 알려지고 기적을 나타내기 40여 년이나 되었는지라, 그를 공경하고 섬기는 남녀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천감(天監) 13년(514) 겨울에 보지는 대(臺)의 뒷방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살은 장차 떠나려 하노라.”
열흘이 못 되어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시체는 향기롭고 부드러웠으며 얼굴에는 화기가 넘쳤다. 임종 때 촛불 한 자루를 켜 후합문(後閤門) 사인(舍人) 오경(吳慶)에게 주었다. 오경은 이 일을 곧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한탄하면서 말하였다.
“대사를 더 이상 붙들 수 없구나. 촛불이란 장차 뒷일을 내게 부탁한 것인가?”
그리고는 장례를 후하게 차리고, 종산(鍾山) 독룡(獨龍)의 언덕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옆에 개선정사(開善精舍)를 세우고 육수(陸倕)에게 명하여 명(銘)을 지어 무덤 안에 두게 하였다. 또 왕균(王筠)은 비문(碑文)을 절 문에 새기고 그 유상(遺像)을 만들어 곳곳에 두어 전했다.
보지가 처음으로 이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나이 5, 60세쯤이었는데 죽을 때까지도 늙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서첩도(徐捷道)라는 사람은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9일에는 대북(臺北)에서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보지 외삼촌의 아우이다. 나이는 보지보다 네 살이 적다.”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보지의 죽었을 때를 계산하면 97세는 되었을 것이다.[이 한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⑫ 오(吳)나라 거사(居士) 서광(徐光)
서광(徐光)은 오세(吳世)에 있으면서 항상 요술을 부려, 시장에다 오이ㆍ대추ㆍ귤ㆍ밤 등을 심어 놓고, 그 자리에서 즉시 따먹곤 하였으므로 시장의 장수들은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 무릇 장마와 가뭄에 대해서는 매우 영험이 있곤 하였다. 항상 대장군 손림(孫琳)의 문 앞을 지날 때는 옷을 걷어 올리고 달리면서 좌우에다 침을 뱉었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흐르는 피가 길을 덮어 비린내가 나는데 그 냄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손림은 그 말을 듣고 그를 죽이려고 그의 목을 베었으나 피가 없었다.
손림은 어린 임금을 폐하고 다시 경제(景帝)를 세운 뒤에 장릉(蔣陵)으로 참배하러 떠났다. 서릿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방 안에서 일어나, 손림이 수레 위에서 떨어지자, 그 때문에 수레는 전부 엎어졌다. 손림은 돌아보았다. 서광이 소나무 위에서 손을 어루만지고 손가락으로 손림을 가리키면서 비웃고 있었다. 손림은 측근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통합뷰어
서광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손림은 그를 미워했다. 얼마 안 되어 경제가 손림을 죽이니, 그 형제 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다 죽임을 당했다.[이것은 『원혼지(冤魂志)』에 나온다.]
⑬ 수신잡전(搜神雜傳) 지선(地仙) 등의 기록
주(周)나라 때에 노자(老子)란 사람은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담(聃)이며 자(字)는 백양(伯陽)이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뇌향(瀨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그 어머니가 큰 유성(流星)의 꿈을 꾸고 임신했다. 비록 하늘의 기운을 받았으나 이가(李家)에서 났기 때문에 그대로 이(李)를 성으로 했다.
혹은 말하기를 “노자는 천지보다 먼저 났다” 하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그는 하늘의 혼이요 정령(精靈)의 족속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말하기를 “그 어머니가 임신한 지 70년 만에 낳았는데 그가 태어날 때에 그 어머니 왼쪽 옆구리를 가르고 나왔으며, 나오자마자 머리가 희었기 때문에 노자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또 말하기를 “그 어머니가 늙었기 때문에 아들이 늙은 어머니의 늙을 로(老)자를 땄다”고 하기도 한다. 또 혹은 말하기를 “노자의 어머니가 마침 오얏나무 밑에 갔다가 거기에서 노자를 낳았고, 노자는 태어나자마자 곧 오얏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로 내 성을 삼아라’고 했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또 말하기를 “노자가 서쪽으로 관문[關]을 나가려 할 때 관영(關令)인 윤희(尹喜)가 그의 비상함을 알고 그에게 도술(道術)을 물었다. 노자는 놀라고 괴상히 여겨 혀를 빼어 귀바퀴를 덮었으므로[聃然:귀바퀴가 없음] 노담이라고 이름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 지금 9변(變) 및 선생(先生)의 『십이화경(十二化經)』을 상고해 보면, 노자는 관문을 나가기 전에 본래 이미 ‘담(聃)’이라고 이름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노자가 자주 이름을 바꾼 것은 다만 ‘담’만이 아니다. 왜 그런가. 『구궁삼오경(九宮三五經)』 및 『원신경(元辰經)』을 상고해 보면 인생은 각각 액(厄)이 있는 것이니 액이 닥쳤을 때 그 이름을 바꾸어 생기(生氣)의 음(音)을 따르면, 나이를 늘리고 액을 면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세상에도 도가 있는 이는 다 그렇게 한다. 노자는 주(周)나라에 2백여 년 동안 있었다. 2백여 년 동안 액을 만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니 그러므로 이름이 점점 많아진 것일 뿐이다.
은(殷)나라 팽조(彭祖)의 휘(諱)는 갱(鏗)이니 전욱(顓頊)의 현손(玄孫)이다. 은나라 말년에 이르러통합뷰어
그의 나이는 이미 767세였으나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젊어서부터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꾀하지 않고 수레나 옷을 꾸미지 않았으며, 오직 양생(養生)과 몸을 다스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왕은 그의 나이가 많다는 말을 듣고 대부(大夫)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병들었다 핑계대고 한가하게 있으면서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보도(輔導)의 술(術)에 능숙하여 수계(水桂)ㆍ운모(雲母)ㆍ양분(糧粉)ㆍ미각(麋角) 등을 아울러 먹었다. 항상 젊은 얼굴로 기운을 닫고 안으로 숨을 쉬며, 새벽부터 한낮까지 구부리고 앉아 눈을 닦고 몸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핥아 침을 삼키고 수십 번 기운을 마신 뒤에야 일어나 다니며 말하고 웃었다. 그 몸 속에 혹 피로나 불안이 있으면 곧 도인(導引)법을 시행하고 기운을 닫아 그 병을 다스렸다.
그 마음은 몸을 보존하는 데에 있어서 머리와 얼굴의 아홉 구멍과 5장(藏)과 4지(支)에서 모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기에 있게 했다. 그리하여 그 기운이 몸 속에 돌아다니되, 코와 입에서 열 손가락에 이르기까지 돌아 다니는 것을 깨닫는다. 왕이 직접 나아가 안부를 물으면, 온갖 보물을 다 버리라고 대답하여 그렇게 한 것이 모두 수만 개다. 팽조는 그것을 다 받아 빈천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자기가 가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또 어떤 궁녀[婇女]가 있었다. 그녀도 조금 도를 얻고 몸을 기르는 법을 알아, 나이가 20세였으나 열대여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왕은 그녀를 섬기면서 그녀를 위해 선정(旋庭)에 화옥(華屋)과 자각(紫閣)을 세우고 금과 옥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 궁녀를 시켜 유헌(輶軒)을 타고 가서 팽조에게 도를 묻게 했다. 궁녀는 팽조에게서 온갖 요긴한 법을 받아 가지고 와서 왕에게 가르쳐 주었다. 왕은 시험해 보았는데 매우 징험이 있었다. 왕은 팽조를 죽이려 했다. 그것을 안 팽조는 곧 거기서 떠났으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뒤 70여 년 만에 그의 문인들이 유사(流沙)의 서쪽에서 그를 보았다고 했다.
왕은 팽조의 도를 항상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103세 수명을 얻었고 기력도 건장하여 50살 때와 같았다. 뒤에 요망하고 음탕한 무녀(鄮女)를 만나 왕은 도를 잃고 죽었다.통합뷰어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팽조가 그 도를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은 왕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은(殷)나라를 떠날 때 팽조의 나이는 7백 세였으나 목숨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신선전(神仙傳)』에 나온다.]
한(漢)나라 때 낙하(洛下)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어떤 부인이 그 남편을 죽이려고 남편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직 그 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가서 굴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아내가 남편을 굴 속으로 떠밀었다. 그는 한참 동안을 내려가서야 밑바닥에 이르렀다. 뒤에 아내가 그 굴 속에 밥을 던져 제사를 지내는 체하려고 했다. 그 때 남편은 떠밀려 굴 속으로 떨어지느라 정신을 잃었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 그 밥을 먹고는 기운을 조금 차렸다. 황급하게 길을 찾다가 이내 한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으로 기어서 빠져 나왔다. 꼬부랑길을 이리저리 돌아 수십 리를 가자 구멍이 넓어지고 희미한 빛도 있어 마침내 바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백여 리쯤 갔을 때는 티끌을 밟는 것처럼 느껴졌고 쌀 냄새도 나고 해서 먹어 보았더니 향기롭고 매우 맛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싸가지고 양식으로 삼아 다시 걸어갔는데 얼마나 걸었는지 그 거리는 알 수 없었다.
그 안은 더욱 밝아지고 또 넓어졌으나 양식이 다 떨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도시로 들어갔다. 성곽은 잘 정돈되었고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망루(望樓)와 집들은 다 금으로 장식되어, 해와 달이 없어도 3광(光)보다 더 밝았다. 사람들의 키는 다 3장(丈)이나 되었고 우의(羽衣)를 입었으며 기이한 음악을 연주하는데 세간에서는 들어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어떤 어른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앞으로 더 가라 했다. 이렇게 무릇 아홉 곳을 지나자 가장 마지막에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 어른은 뜰에 있는 큰 잣나무를 가리켰다. 그 나무의 둘레는 백 아름에 가깝고 그 밑에 염소 한 마리가 있었다. 어른은 그에게 꿇어앉아 염소 수염을 뽑으라고 했다. 처음에 그 수염에서 구슬 한 개를 얻었는데 그 구슬은 그 어른이 가지고, 다음에 또 구슬을 얻었는데 뒤에 얻은 구슬은 먹으라고 하여 먹었더니 곧 배가 불렀다. 그는 그 아홉 곳의 이름을 묻고 거기 있기를 간청하여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 어른이 말하였다.
“그대의 운명은 여기 있을 수 없다. 돌아가서 장화(張華)라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그 사람이야말로 바로 이곳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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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굴을 따라 교주(交州)로 나와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장화에게 물어보며 그가 얻은 물건을 다 보였다. 장화가 말하였다.
“그 먼지와 같은 것은 황하(黃河) 밑의 용의 침이요, 그 진흙은 곤륜산(昆崙山) 밑의 진흙이며, 그 아홉 곳의 신선 이름은 구관대부(九舘大夫)라 하고, 그 염소는 어리석은 용이다. 그 처음 얻은 한 개의 구슬을 먹으면 천지와 수명이 같아지고 다음 것은 수명을 늘리며 뒤의 것은 배를 채울 뿐이다.”
이 사람은 7, 8년 동안 그곳을 오갔다.
한(漢)나라 영평(永平) 5년에 염현(炎縣)의 유신(劉晨)과 원조(元肇)가 함께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했다. 13일 동안을 지내자 양식은 떨어지고 배가 고파 거의 죽게 되었다. 멀리서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복숭아나무가 하나 있는데 큰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러자 올라가는 길이 없어 등나무와 칡을 부여잡고서야 겨우 오르게 되었다. 각각 몇 개씩 따 먹고 배를 채우고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잔을 가지고 물을 떠서 양치질을 하려고 했다. 무잎이 산 허리에서 흘러 내려오는데 매우 싱싱하였고, 또 쌀밥과 깨가 담긴 잔 하나가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둘이 함께 물에 들어갔다가 물에 빠져 거슬러 흘러 2, 3리쯤 갔다. 겨우 산을 지나 어떤 시냇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어떤 두 여자가 있었다.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녀들은 이들이 잔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유신과 원조 두 서방님이 아까 우리가 떠내려 보냈던 잔을 가지고 오신다.”
유신과 원조는 그녀들을 알지 못하는데 그녀들은 이들의 성을 부르면서 구면인 듯 서로 안부를 묻고는 이렇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그리하여 다 함께 그녀들의 집으로 갔는데, 그 집은 다 구리기와로 되어 있고, 남쪽 벽과 동쪽 벽 밑에는 각각 큰 침대 하나씩 있었다. 모두 비단 장막으로 둘러쳐 있고 장막 끝에는 방울을 달아 놓았으며 금과 은을 섞어 장식하고, 침대 머리에는 각각 10명의 종[侍婢]이 있었다. 그녀들은 종에게 명하였다.
“이 두 서방님은 험한 산을 넘어 오셨다. 아까 그 복숭아를 드셨지만 그래도 시장하실 터이니 빨리 밥을 지어라.”
그래서 이들은 깨밥과 매우 맛있는 산양포와 쇠고기를 먹었다.통합뷰어
다 먹고 나서 술을 들 때 한 무리의 여자들이 복숭아 열다섯 개를 가지고 와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의 서방님이 오신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 술에 취하자 음악을 연주했다. 저녁이 되어 각각 침대에 가서 잘 때 그녀들도 왔다. 말소리는 맑고 고와 사람의 근심을 잊게 하였다.
반년이 지나 기후와 초목들이 다 봄을 맞아 온갖 새들이 울어댔다. 이들이 다시 슬픈 생각이 생겨 돌아가기를 간절히 청하자 그녀들이 말하였다.
“당신들을 끌고 온 죄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먼저 왔던 여자를 불러 3, 40명이 모이자 음악을 연주했다. 그리고 유신과 원조에게 돌아갈 길을 가르쳐 주면서 전송했다.
이들이 돌아오자 친구들은 다 죽었고 살던 집도 모두 허물어져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고 물어서 겨우 7대[世] 손자를 찾았는데, 그들은 옛날 조상들이 산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8년(383)에 다시 가 보았으나 그녀들은 간 곳이 없었다.
한(漢)나라 때 태산(太山)의 황원(黃原)은 아침에 문을 열자 갑자기 푸른 개 한 마리가 문 밖에 엎드려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와 같았다. 황원은 이 개를 끌고 이웃을 따라 사냥하러 나갔다. 해가 지려 할 무렵에 사슴 한 마리를 보고 곧 개를 놓았다. 개의 걸음은 매우 느리고 황원도 힘이 빠져 아무리 쫓아가도 미치지 못했다.
몇 리를 걸어 한 굴에 이르러 백여 걸음 들어가자 갑자기 네거리가 나왔다. 홰나무와 버드나무가 줄을 지어 늘어서 집 담을 둘러쌌다. 황원은 개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개의 방과 문이 수십 칸이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 여자들이 있었다. 얼굴이 아름답고 옷도 화려한데, 혹은 거문고와 비파를 만지고 있기도 했고 혹은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있기도 하였다. 북각(北閣)에 이르자 3칸 집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살피는 듯하다가 황원을 보자 서로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푸른 개가 묘음(妙音) 서방님을 모시고 왔구나.”
그러더니 한 사람은 거기 있고 한 사람은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네 사람의 여종이 나와 태진(太眞) 부인 백황랑(白黃郞)이라 자칭했다. 그녀들에게 한 딸이 있었는데 나이 20세로서 남의 아내가 될 만했다.통합뷰어
날이 저물자 그녀는 황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남향의 집이 있고 집 앞에는 못이 있으며 못 가운데에는 누대가 있고 누대의 네 모퉁이에는 직경 한 자쯤 되는 굴이 있으며 굴 속에는 빛이 있어 휘장을 비추었다.
묘음은 얼굴이 곱고 그 여종도 아름다웠다. 서로 예를 마친 뒤에 마치 일찍부터 친한 것처럼 함께 잠을 잤다. 여러 날을 지나 황원은 잠깐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 묘음이 말하였다.
“사람과 귀신은 길이 다르므로 원래 오래 있을 형편이 아닙니다.”
이튿날 그녀는 패물을 끌러 주고, 헤어질 때는 뜰에 내려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다시 만날 기약이 없었으므로 더욱 사랑하고 공경했다. 묘음은 “만일 생각이 나거든 3월 아침에 재결(齋潔)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네 사람의 여종은 문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 그는 반나절 만에 집에 돌아왔으나 마음은 황홀하였다.
늘 기일(期日)이 될 때마다 황원은 항상 공중에서 날 듯하는 병거(輧車)를 보았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유명록(幽冥錄)』에 나온다.]
『술이기(述異記)』에서 말하였다.
“여산(廬山)에 세 개의 돌다리가 있으니 높이는 수십 장이고 너비는 한 자도 되지 않으며 내려다 보면 아득하여 밑이 없었다.
함강(咸康) 때에 강주(江州) 자사(刺史) 유량(庾亮)이 오맹(吳猛)을 초청하였다. 오맹은 제자를 데리고 여산에 올라가 구경하다가 이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어떤 노인이 계수나무 밑에 앉아 옥잔에 감로(甘露)를 받아 오맹에게 주고, 오맹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두루 돌려 주었다.
또 한 곳으로 갔다. 높은 누대와 넓은 집과 옥으로 된 지붕과 금으로 된 방이 번쩍거려 눈을 부시게 하고, 온갖 많은 보배 그릇은 다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은 옛날부터 친한 듯 오맹과 이야기하면서 맛있는 술과 안주로 하루를 보냈다.
또 『술이기(述異記)』에서 말하였다.
“독각(獨角)이란 사람은 읍군(邑郡)의 강가에 사니, 나이는 수백 세가 되는 듯하고 세상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나, 정수리에 뿔 하나가 나 있기 때문에 이름을 독각이라 하였다. 혹은 훌쩍 떠나면 해를 넘겼고, 혹은 수십 일 동안 말하지 않다가 말하면 그 뜻이 정미(精微)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통합뷰어
혼자 살고 있으면서도 덕으로 교화했기 때문에 또한 훈도(訓導)함이 많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집을 하직하고 집 앞의 강 속에 들어가 잉어로 변했으나 뿔은 그대로 머리 위에 있었다. 때때로 잠시 집에 돌아오면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그 자손들과 술을 마시면서 며칠을 지내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곡성(穀城) 고을의 졸상생(卒常生)은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자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나 그 때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뒤에 홍수가 나서 그 피해가 많았을 때 죽은 것이 한 번뿐이 아니었다. 졸상생은 갑자기 결문산(缺門山) 위에서 크게 외쳤다.
“졸상생이 여기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였다.
“이 비는 닷새 뒤에는 반드시 그칠 것이니, 비가 그치거든 이 산에 올라와 기도를 드려라.”
그러나 거기에는 다만 상생의 옷과 지팡이와 가죽띠만이 있었다. 수십 년 뒤에는 다시 화엄시문(華嚴市門)의 하인이 되었다.
금고(琴高)는 조(趙)나라 사람이다. 거문고를 잘 타서 강왕(康王)의 사인(舍人)이 되어, 연팽(涓彭)의 술수를 행해 기주(冀州)와 탕군(碭郡)의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2백 년 뒤에는 다시 탕수(碭水)에 들어가 용의 새끼를 잡아 가지고 나와 제자들과 더불어 기일을 정하고, 기일이 되거든 다 깨끗이 재계하고 물가에서 사당을 짓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 날에 그는 과연 붉은 잉어를 타고 나와 사당 안에 앉았다. 탕군의 수만 사람이 다 그것을 보았다. 그는 한 달 동안 거기 있다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관선(冠先)은 송(宋)나라 사람이다. 낚시질을 업을 삼아 백여 년 동안 최수(睢水)가에 살았다. 고기를 잡으면 혹은 놓아 주고 혹은 팔며 혹은 제가 먹었다. 관선은 늘 관을 쓰고 띠를 두르고 여지(荔枝)를 심어 그 꽃과 열매를 따 먹었다.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그에게 도를 물었으나, 그는 가르쳐 주지 않았으므로 경공이 그를 죽여 버렸다.
수십 년 뒤에 그는 송나라 성문 위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수십 일이 지난 뒤에 곧 떠나갔다. 송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 [이상 세 가지 증험은 『수신이기(搜神異記)』에 나온다.]
24. 요괴편(妖怪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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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의부(述意部)
『간보기(干寶記)』에서 말하였다.
“요괴란 대개 정기(精氣)가 물건에 붙은 것을 말한다. 기운은 안에서 어지럽고 사물은 밖에서 변하는 것이니 몸과 정신, 기운과 바탕의 표리(表裏)에 의한 작용이다. 5행(行)에 근본하고 5사(事)에 통하여 비록 그 소식(消息)과 승강(昇降)은 만 가지로 변화하나 그 좋고 나쁜[休咎] 징조는 다 그 정성을 얻어야 논(論)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속정(俗情)의 비근한 소견으로서 큰 성인의 인과(因果)를 모르는 것이다. 이 징변(徵變)을 상고하면, 이것은 곧 중생들의 온갖 숙업(宿業)의 잡된 것이 감응[感]을 인해 과보를 나타내는 인연의 발로로서, 인연이 서로 만나는 것은 물리(物理)의 필연(必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징조가 있는 것은 괴이하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불본행경(佛本行經)』의 말과 같다.
“그 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한다. 과거에 계시(雞尸)라는 말의 왕[馬王]이 있었다. 그 말왕의 얼굴은 단정하고 몸은 희고 깨끗하여 마치 백옥[珂] 같고 눈과 같고 또 백은(白銀)과 같으며 밝고 둥근 보름달과 같고 또 거타(居陀) 꽃과 같았다. 그 머리는 감색이고 달리면 바람처럼 빠르며 소리는 묘한 북소리와 같았다.
그 때 염부제에 5백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들은 바다에 들어가려고 양식을 준비하고, 큰 바다로 가서 해신(海神)에 제사하고 많은 배를 준비했다. 또 다섯 사공을 고용하여 보배를 캐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다 가운데 들어갔는데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만났다. 배는 바람에 떠밀려 나찰의 나라에 이르렀다. 그 나라에는 나찰녀가 많이 있었다. 그 나라에 이를 무렵 큰 바람을 만나 배들이 다 파괴되었다. 상인들은 각기 손과 발을 놀려 허우적거리며 물 위에 떠서 저쪽 언덕까지 가려고 했다.
그 때 나찰녀들은통합뷰어
큰 바다에 어떤 배가 다 부서졌다는 말을 듣고 구원하러 가서 5백 상인을 한꺼번에 다 붙잡고는 그 상인들과 5욕(欲)을 즐기면서 모두들 기뻐 날뛰었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아들 딸을 낳았고, 저 상인들을 데리고 가서 철성(鐵城) 안에 가두었다. 거기에 가둔 다음에 저마다 본래 형상을 변화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꾸미니 사람보다 훨씬 아름다웠으나 그 재능은 하늘에 미치지 못했다. 하늘 향탕(香湯)으로 목욕하고 향을 몸에 바른 뒤에, 갖가지 옷을 입고 영락(瓔珞)으로 장엄하고 묘한 꽃으로 만든 천관(天冠)에는 보배방울을 달아 놓았다. 빠른 걸음으로 상인들에게 가서 말했다.
≺여러 성자(聖子)님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당신들의 손을 내시오. 팔목을 내시오.≻
그 때 그 상인들은 목숨은 보호받고 있으나 죽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그녀들에 대해 참으로 여자라는 생각을 내어 그 손과 팔을 내주었다. 그러자 나찰녀들은 바다에서 이 상인들을 다 구제하고 인자한 말로 가엾이 여겨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의 남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아무도 사랑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를 생각하여 우리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어 우리의 걱정과 번뇌를 덜어 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가장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는 받들어 섬기되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그 때 상인들은 다 함께 슬퍼하여 소리를 내어 울면서 각각 뜨거운 기운을 토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위로하고 서로 안심시키며 나찰의 성(城)으로 갔다. 그 성에 미처 이르기 전에 중도에서 어떤 곳을 보니 그 땅이 넓고 평평하였으며 나무에는 꽃과 열매와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온갖 새들이 모여 노는 것도 한량없이 많았다. 다시 온갖 꽃이 핀 못이 있는데 꽃과 새들이 그 가운데 가득하여 보는 이들 모두를 기쁘게 하고 걱정과 번뇌를 없애 주었다.
그 나찰성은 네 벽이 희고 깨끗하여 그 형상이 흰 백옥이나 눈 같고 또 빙산처럼 생겨 땅 위에 있는데,통합뷰어
멀리서 바라보면 저 성은 마치 흰 구름 떼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았다. 그 성의 장식은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때 나찰녀들은 모든 상인들을 데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 그 전에 입었던 옷을 다 벗기고 온갖 향탕(香湯)에 그 몸을 씻기고 갖가지 아름답고 묘한 자리에 앉히고 5욕을 갖추어 즐기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5음(音)으로 온갖 음악을 연주하면서 오랫동안 크게 쾌락을 누렸다.
그 뒤에 모든 나찰녀들이 상인들에게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성자여, 이 성의 남쪽으로 나가서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한 상주(商主:상인의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지혜가 깊고 총명하며 예리한 관찰력이 있었다. 그는 곧 의심을 내어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남쪽으로 나가지 말라 하는가. 나는 저 여인들이 잠든 틈을 엿보아 그녀들이 금하는 곳으로 나아가 그 좋고 나쁜 일을 차례로 살펴 보리라.≻
그 상주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저 나찰녀들이 잠든 틈을 엿보다가 마침내 소리 없이 가만히 침상에서 일어나 곧 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마음가는 대로 차츰 앞으로 나아갔다. 조그만 땅에 이르러, 한 오솔길의 두려운 곳을 보았다. 풀도 나무도 없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는데 문득 어떤 사람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교환(噭喚:규환)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소리와 같았다. 이 소리를 듣고는 겁에 질려 온몸의 털이 곤두서 잠자코 서 있다가 한참 만에야 두근거리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자꾸 그 길로 가다가 한 철성(鐵城)을 보았는데, 그 성은 높고 험준하였으며 소리가 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성을 돌아다녔으나 문이 보이지 않았다. 북쪽에 이르러 합환(合歡)이라는 한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성에 가까이 있었는데 높고 커서 성 위에까지 높이 솟아 있었다.
그 상주는 이 나무를 보고는 곧 그 나무 위에 올라가 성 안을 두루 살펴 보았다.통합뷰어
그 성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었는데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혹은 죽어서 이미 반쯤 뜯어 먹힌 이도 있었고, 혹은 숨은 붙어 있으나 몸이 찢겨져 있기도 하였으며, 혹은 기갈에 시달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앉아 있기도 했고, 혹은 몹시 수척하여 힘줄과 뼈만 남아 있는데 그 눈이 움푹 패어 우물 속에 비치는 별과 같았다. 땅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머리털이 쑥대처럼 어지럽고 온몸이 흙투성이인데 매우 여윌 대로 여위어 각각 서로 살을 베어 먹고 있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이 마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있는 곳에서 중생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 상주는 이 일을 다 보고는 다시 손으로 합환나무 가지를 잡자 한 가지가 흔들리며 온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그 때 고통을 받던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성 위를 우러러보다가 합환나무에 있는 이 상인을 보았다. 그 상인을 보고는 슬피 부르짖으며 울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늘입니까, 용입니까, 야차입니까, 제석(帝釋)입니까, 대범왕(大梵王)입니까? 액난에 있는 우리를 가엾이 여겨 일부러 여기 오셨습니까?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출하려고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열 손가락을 모아 합장하고 머리를 땅에 대어 멀리 예배하고 소리내어 슬피 울면서 얼굴을 들어 위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인자(仁者)님, 당신은 지금 우리를 구제하시어 친애하고 있는 곳에 가게 하여 주소서.≻
그 때 상주는 저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런 말을 듣고는 답답하여 몸과 마음이 다 슬퍼지고 괴로웠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 하늘도 용도 아니요, 나아가 대범천왕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저 염부제에서 생업을 일으켜 보려다가 여기에 이르게 되었소. 재물을 구하기 위해 큰 바다로 들어왔는데 우리가 저 육지로 가려다가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다 부서졌습니다.통합뷰어
그 때 마침 저 여자들이 와서 우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는 항상 이렇게 저 여자들과 쾌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어떻게 여러분의 고통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상주는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어째서 여기서 이런 고통을 받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착한 사람이여, 지금 우리도 당신들처럼 여기에 올 적에, 동행한 사람 5백 명과 함께 왔습니다. 배가 부서져 언덕에 이르렀으나 또 저 나찰녀들을 만나 함께 5욕을 누렸답니다. 그녀들은 우리를 데려다 철성 안에 두었습니다. 이 성으로 들어온 뒤로 우리는 그녀들에게 250명이나 잡아 먹히고 지금은 250명만 남았습니다. 우리도 저 나찰녀들과 화합하여 다 아들 딸을 낳았습니다. 저 나찰녀들은 말이 미묘하고 말소리는 곱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고기만 탐해 먹기 때문에 함께 낳은 아들 딸들을 다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도 부디 그녀들과 향락을 즐기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저들은 매우 무섭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주는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무슨 방법을 써야 저 나찰의 액난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상주는 다시 물었다.
≺그 방법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녀들은 4월 보름달에 모두 모여 크게 즐깁니다. 그 때는 해와 달이 묘수(昴宿)와 합하는 때입니다. 계시(雞尸)[수(隋)나라 말로는 털이 많다는 뜻이다.]라는 말왕[馬王]이 있는데 그는 얼굴이 단정하여 그를 보면 모두 기뻐합니다. 그 말왕의 얼굴은 희기는 가패(珂貝) 같고 머리는 감청색이며 빠른 걸음은 마치 바람과 같고 소리는 묘한 북소리 같습니다. 그 말왕이 사는 곳에는 쌀이 있는데 껍질은 본래 없고, 매우 굵고 새하얀 것이 향기와 맛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 말이 이 쌀을 먹는데 쌀을 다 먹고 나서는 바닷가에 나가 반 몸을 드러낸 채 사람의 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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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 짜고 쓴 바닷물을 건너려고 하는가.]
이렇게 세 번 말하고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지금 그들을 편안히 저쪽 언덕에 건네 주려고 한다.]
만일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곧 재난을 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일만이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그 재난을 벗어나고자 하거든 이 말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상주는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일찍이 그 말왕을 본 일이 있습니까? 보았다면 왜 그와 친해져서 구제를 받지 못했습니까? 당신들은 처음에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처음에 허공에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은 사람은 허공의 소리를 찾아 북도(北道)의 말왕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비록 그곳에 가기는 했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으니 우리들이 다 저 나찰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와 같이 이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상주는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거기 갔다 왔으니 지금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 갑시다.≻
그들이 답하였다.
≺우리가 성에 올라가려 하면 성은 곧 더 높아지고 땅을 파고 나가려고 하면 그 구멍은 도로 합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나찰녀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니, 어찌 우리가 우리의 친족과 권속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부디 방탕하지 마시고 마음대로 떠나십시오. 빨리 가서 부모와 권속들이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오직 바라건대 당신들은 마음과 뜻을 화합하시오. 우리들은 본래 아무 곳 아무 성(城) 아무 고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훌륭합니다. 당신들은 거기 가시거든 우리 부모와 친족과 벗들에게 문안이나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주시오.
[당신들은 이 다음부터는 다시는 저 바다로 갈 마음을 내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저 큰 바다에는 다만 온갖 두려움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고향에서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십시오. 다시는 부모ㆍ처자ㆍ권속들과 헤어지지 마십시오.통합뷰어
그리하여 보시를 잘 행해 복업을 많이 짓고 재계를 엄하게 지니는 것 등, 이것이 제일입니다.]≻
그 때 상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해 곧 나무에서 내려왔다. 저들은 일시에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아아, 너무도 괴롭다. 어떻게 하면 저 염부제의 미묘한 땅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우리들이 만일 본래 이런 재난의 곳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고향에서 쇠똥을 먹으면서 살아갈지언정 재물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 상주는 본래 왔던 길을 찾아 본래의 곳으로 돌아왔다. 저 나찰녀들이 여전히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상주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본래의 자리에 누워 잠을 잤다. 새벽이 되어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 상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을까? 만일 말을 내면 그것은 곧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될 것이요, 만일 누설하면 나찰녀들은 아마 우리를 데리고 저 액난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나는 잠자코 이 일을 비밀로 해야겠다. 그래서 4월이 되어 절회(節會)를 맞아, 말왕이 오는 날에 그들에게 알리자.≻
왜냐 하면 옛날에 이런 게송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내가 아는 비밀한 일들
함부로 그 사실 그대로 말하면
그 비밀한 일은 으레 새어나가
듣는 이들이 제각기 전하리라.
이 때문에 원한을 얻음으로써
곧 큰 고뇌를 받으리니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함부로 그 비밀 말하지 않네.
그 때 상주는 잠자코 있다가, 4월의 즐거운 모임이 있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 모든 상인들에게 알렸다.
≺그대들은 지금 부디 방탕하여 애욕에 집착하지 마시오. 혹은 부녀자를 탐하거나 혹은 음식이나 다른 재물을 탐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들을 매우 사랑하오. 나는 지금 비밀히 말하겠소.≻
그 때 모든 상인들은 이 상주의 말을 듣자,통합뷰어
마치 사자가 숲 속에서 갑자기 크게 외칠 때, 다른 보통 짐승들은 산 곁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두들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저희들끼리 수근거렸다.
≺우리들은 지금 큰 바다의 매우 나쁜 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저 모든 나찰녀들이 잠에 빠져 편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약속한 그곳으로 갔다. 거기 가서 상주에게 아뢰었다.
≺훌륭합니다. 상주여, 상주님이 보신 것을 저희들을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 때 상주는 곧 이들에게 앞에서 본 일을 다 이야기했다. 상인들은 이 말을 듣고는 모두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상주에게 아뢰었다.
≺상주여, 우리는 지금 빨리 저 말왕에게로 가서, 우리가 무사히 저 염부제 안에 있는 우리 고향으로 가기를 기원해야겠습니다.≻
그 때 상인들은 다 말왕에게로 갔다. 그 때 말왕은 바닷가에 이르러 반 몸을 드러낸 채 사람의 소리로 세 번 외쳤다.
≺누가 이 짠 물의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고자 하는가? 나는 내 등에 그들을 태워 저 언덕에 무사히 이르게 하리라.≻
상인들은 말왕의 이 말을 듣고 모두 기뻐 날뛰며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섰다. 곧 합장하고 말왕에게 정례한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말왕이여, 우리는 무사히 저쪽 언덕으로 가고자 합니다. 우리를 구제하여 물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말왕은 상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저 나찰녀들은 오래지 않아 여기 와서 혹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에게 보이면서 슬피 울고 몹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때 집착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내지 마십시오. 그대들이 만일 그런 마음을 내면 설령 당신들이 내 등 위에 올라탔더라도통합뷰어
반드시 땅에 떨어져 저 나찰녀들에게 잡아 먹힐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저들은 내 소유가 아니다. 내 아들과 딸이 아니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면 설사 손으로 내 털 하나를 잡고 매달린다 해도 나는 그 때 당신들을 빠르고 편안히 데려다가 저 언덕으로 보내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시 말하였다.
≺당신들은 지금 내 등에 타시오. 혹은 내 몸의 다리나 발 등 사지를 붙드십시오.≻
그 때 상인들은 그 말대로 말왕을 탔다. 그러자 말왕은 이 상인들을 태우고 가엾이 여기는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을 날아 올라 바람처럼 빨리 갔다.
그 때 나찰녀들은 이 말왕의 구슬픈 소리와 또 사나운 바람처럼 빨리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잠에서 깨어 상인들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여러 곳을 다 뒤지다가, 상인들이 말왕을 타고 허공을 날아가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이것을 보고 나서 빨리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달려가, 가엾은 소리로 슬피 부르짖고 울며 매우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 여러 성자(聖子)여,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 우리는 주인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당신들이 전에 바다에서 재난에 떨어져 매우 두려워할 때 우리는 당신들을 구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들 남편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배반해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은혜도 모르고 의리도 없습니다. 왜 버리시려 합니까? 만약 우리에게 잘못이 있으면 우리는 지금 다 참회하고 지금부터는 어떤 악도 짓지 않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필요 없으면 이 아이들이나 거두어 데리고 가십시오.≻
그 때 나찰녀들의 말은 비록 자비가 흘렀으나, 말왕은 곧 5백 상인을 데리고 큰 바다 저쪽 언덕으로 편히 건너 염부제로 갔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통합뷰어
그 때의 그 계시 말왕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는 바로 나였느니라. 5백 상인 중에 그 상주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는 바로 사리불(舍利佛)이다. 그 5백 상인들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들은 바로 저 산사야파리바사가(刪闍耶波離婆闍迦)의 제사들 5백 인이다. 나는 이 5백 상인들이 액난을 만났을 때 그들을 액난에서 구제하여 저쪽 언덕에 가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사견(邪見)을 가진 그 산사야가 있던 곳에 온 것이다. 사리불이 그를 교화해 내게 데리고 왔으므로, 나는 사견의 광야에서 그들을 교화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부처님 처소에서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또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다섯 도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눈을 만나, 어떤 신사(神祠) 안에서 잠을 잤다. 그 신사 안에는 귀신의 상(像)이 있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었다. 그 도인 중 네 사람이 말하였다.
‘오늘 밤은 매우 춥다. 저 목상(木像:귀신의 상)을 패어 불을 때자.’
그러나 한 사람이 말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섬기는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 사당의 귀신들은 항상 사람을 잡아먹었었다. 그들은 저희끼리 이야기했다.
‘저 한 사람은 우리를 두려워한다. 잡아먹지 말자. 그러나 저 네 사람은 악하다. 그냥 둘 수 없다.’
밤이 되어 그 한 사람은 이 귀신들의 말을 듣고 일어나 다른 동행을 부르러 갔다. 나머지 네 사람이 말하였다.
‘왜 저 목상을 패어 불을 때지 않느냐?’
그리고는 곧 그것을 꺼내다가 불을 때 버렸다. 귀신들은 혼이 나서 달아나 버렸다.
대개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모름지기 뜻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며, 나약한 마음을 가져서 귀신으로 하여금 그 약점을 틈타 사람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사람이 두려워할 때에는 사람 아닌 것들이 그 틈을 노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통합뷰어
지정(智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생보처보살(生補處菩薩)은 권방편(權方便)으로 비천한 집에 태어나 무명의 번뇌[無明結]를 제거함을 보이려고 열 달 동안 태 안에 있다가 태어나는 날에 임박하여 손과 발이 없는 것을 보였다. 부모는 그것을 보고 귀신이라 생각하고 광야(曠野)에 버려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뒤에 어머니는 또 임신했다. 열 달이 찬 뒤에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이 단정하고 특별하게 미묘해서 세상에 드물었다. 그러나 낮에 태어난 아이가 밤에 죽고 말았다. 부모는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하늘을 향해 ‘산신(山神)ㆍ수신(樹神)은 왜 우리를 가엾이 보지 않는가. 먼저는 손발이 없는 아이를 낳아 광야에 버렸는데, 지금은 단정하기 견줄 데 없고 얼굴도 천신(天神)과 같은 아들을 낳았건만 낮에 태어난 아이가 밤에 죽고 말았으니, 이 애끓는 간장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몇 달이 지난 뒤에 어머니는 또 아이를 배었다. 열 달이 차서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다. 머리는 셋이요 다리는 여덟이며 눈은 넷이요 팔이 여덟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털이 곤두섰다. 부모와 권속들은 그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자 보살이 권방편으로 나타나 그들을 가지 못하게 했다. 부모가 물었다.
‘당신은 하늘입니까? 용이나 귀신입니까?’
그 때 갓난 아이는 게송으로 부모에게 답하였다.
하늘도 아니요 또 야차 귀신도 아니며
아수라도 아니요 가루라도 아니다.
부모의 어리석음을 고치기 위해
방편으로 부모 집에 태어났다네.
먼저는 손발 없는 아이였으나
그것도 바로 내 몸이었고
아침에 났다 저녁에 죽은 아이도
또한 8주(住)의 무상존(無上尊)이었네.
내가 지금 받은 이 몸은
세 머리에 여덟 팔ㆍ다리이지만
무엇 때문에 나를 버리고
저 지옥문으로 향해 가는가.
선의 근본을 태우는 불길
끄려고 해도 또한 어렵네.
나는 지금 옛 몸으로 돌아가
단정한 그 얼굴 나타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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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지키고 서원도 잃지 않으며
부모의 집에 의탁하여 태어났나니
지금까지 내 목숨 버린 것
그 수는 저 티끌 같아라.
중생들 병이 하도 많기에
감로(甘露)의 약으로 다 치료하여
저 도의 끝으로 나아가게 하고
삿된 길에는 들지 않게 하네.
모든 하늘은 복락을 받는 곳
감로는 병을 고치는 약이라네.
성교(聖敎)의 약을 어기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 열반(涅槃)의 낙이라네.
게송을 읊는다.
보배 구하다 배를 다 잃고
떠돌아다니다 구원을 생각하네.
아리따움에 빠져 아무 데로나 가고
요사스런 귀신은 사람 속이네.
거짓으로 바라 재난 구한다 하고
사랑하고 친한 체 말 꾸미는데
저 말왕[馬王]의 등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위험에서 피했을 것인가.”
감응연(感應緣)[대략 스물여섯 가지 증험을 인용하였다.]
동양(東陽)의 유총(留寵)이 피의 괴변을 만남
노(魯)나라의 소공(昭公)이 용의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의 헤제(惠帝)가 용의 괴변을 만남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뱀의 괴변을 만남
한나라의 환제(桓帝)가 뱀의 괴변을 만남
진(晋)나라의 태강(太康) 때에 물고기의 괴변
한(漢)나라의 성제(成帝)가 쥐의 괴변을 만남
한나라의 경제(景帝)가 개의 괴변을 만남
한나라의 장제(章帝)가 도깨비 괴변을 만남
가의(賈誼)가 붕새의 괴변을 만남
안양성(安陽城)에 정묘(亭廟)의 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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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월(東越)의 민중(閩中)에 뱀의 괴변
중산왕(中山王) 주남(周南)이 쥐의 괴변을 만남
계양(桂陽)의 장유(張遺)가 나무의 괴변을 만남
남양(南陽)의 송대현(宋大賢)이 정자의 괴변을 만남
오(吳)나라 여릉군(廬陵郡) 정자에 귀신의 괴변
건안(建安) 때 동군(東郡) 경계에 노공(老公)의 괴변
진(晋)나라 때 늙은 삵이 사람의 아버지가 된 괴변
진나라 남경(南京)에 오소전옥(烏巢殿屋)의 괴변
진나라 때 삵이 사람의 부인이 된 괴변
진나라 때 삵이 사람의 딸이 되어 아이를 낳은 괴변
진나라 때 장춘(張春)의 딸이 도깨비의 괴변을 만남
송(宋)나라 때 양도수(梁道修)의 집에 도깨비의 괴변
서방(西方)의 산중에 사람이 새우와 게를 먹은 괴변
송나라 때 왕(王)씨 집에서 만든 게집을 나무가 무너뜨린 괴변
당(唐)나라 때 역적 장량(長亮)이 벼락의 괴변을 만남
① 동양(東陽)의 유총(留寵)이 피의 괴변을 만남
동양(東陽) 유총(留寵)은 자(字)는 도홍(道弘)이며 고숙(姑熟)에 살았다. 밤마다 문 밖에 몇 말의 피가 있었는데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렇게 3, 4번 계속 되었다. 뒤에 유총은 절충(折衝) 장군이 되어 북정(北征)하러 출발하려 하면서 밥을 지었는데 모두 벌레로 변했다. 그 집 사람이 삶고 볶아도 벌레로 변하였는데 불길이 더욱 거세질수록 벌레는 더욱 사나워졌다. 유총은 드디어 북정에 나아갔다가 단상(壇上)에서 패하여 서룡(徐龍)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② 노(魯)나라의 소공(昭公)이 용의 괴변을 만남
노(魯)나라 소공(昭公) 19년에 정씨(鄭氏)의 문 밖 못에서 용들이 싸웠다. 『경방역전(京房易傳)』에서 말하였다.
“대중의 마음이 불안하면 그 요망한 용이통합뷰어
읍 안에서 싸운다.”
③ 한(漢)나라 혜제(惠帝)가 용의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 혜제(惠帝) 2년(195) 정월 1일 아침에 난릉정(蘭陵庭) 동쪽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 온릉(溫陵) 우물 속에 앉아 있었다.
『경방역전(京房易傳)』에서 말하였다.
“덕이 있는 이가 해침을 당하면 요망스런 용이 우물 안에 보이고, 형벌을 시행함이 너무 사나우면 검은 용이 우물에서 나온다.”
④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 무제(武帝) 태시(太始) 4년(B.C.93) 10월에 조(趙)나라의 뱀이 성 밖에서 들어와 성 안의 뱀과 싸우다가, 효문제(孝文帝)의 사당 밑에서 성 안의 뱀이 죽었다. 그 뒤 2년이 지난 가을날 위태자(衛太子)의 일이 조(趙)나라 사람 강충(江充)에 의해 일어났다.
⑤ 한(漢)나라의 환제(桓帝)가 뱀의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 환제(桓帝)가 왕위에 오르자, 큰 뱀이 덕양전(德陽殿) 위에 나타났다. 낙양시령(洛陽市令) 순우익(淳于翼)이 말하였다.
“뱀에는 비늘 갑옷이 있으니 이것은 전쟁의 상(象)이다.”
⑥ 진(晋)나라의 태강(太康) 때에 물고기의 괴변
진(晋)나라 태강(太康) 때에 잉어 두 마리가 무고(武庫)의 옥상(屋上)에 나타났다. 무고 병부(兵府)에는 인갑(鱗甲)이 있으니, 이 또한 무기와 같은 류(類)이다. 또 물고기는 극음(極陰)이요 옥상은 태양이다. 고기가 옥상에 나타났으니, 극음이 전쟁의 화를 일으켜서 태양을 침범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혜제(惠帝) 초년에 태후(太后)의 아버지 양준(楊駿)이 형벌을 당하고[誅], 궁궐에서 싸움이 벌어져 태후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든 뒤에 깊숙한 궁전에서 죽게 했다. 원강(元康) 말년에는 가후(賈后)가 국정을 전제(專制)하여 태자를 죽이고 이내 폐했다. 그러므로 10년 동안에 모후(母后)의 재난이 다시 일어났으니, 그 때부터 환란이 얽혔다.
『경방역(京房易)』에서 말하였다.
“요사스런 물고기가 물을 버리고 도로에 날아들면 그것은 전쟁의 징조이다.”
⑦ 한(漢)나라의 성제(成帝)가 쥐의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4년(B.C.29) 9월에 장안성(長安城)의 남쪽에서 한 마리 쥐가 누런 짚과 잣나무 잎을 물고, 어떤 백성의 무덤 곁에 있는 잣나무와 느티나무 위에 올라가 둥지를 틀었는데, 오동나무와 잣나무에는 더 많이 지었다. 그러나 둥지 속에는 새끼는 하나도 없고 모두 마른 똥만 여러 되 있었다.통합뷰어
그 때 의정부 신하들은 모두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쥐는 조그만 짐승을 훔치려고 밤에는 나왔다가 낮에는 숨는 동물이다. 지금은 바로 한낮인데 구멍을 버리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천한 사람이 장차 귀하게 될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동나무와 잣나무는 위사후(衛思后)의 동산에 있는 것이다. 그 뒤에 조후(趙后)는 미천한 데서 지존(至尊)에 올라 위사후와 같이 되었으나 조태후는 끝내 아들이 없어 결국 해침을 당하였다. 이듬해에 어떤 소리개가 그 둥지를 사르고 새끼를 죽였다 한다.
『경방역전』에서 말하였다.
“신하가 국록(國祿)을 사사로이 쓰는 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것은 요사스런 쥐구멍이나 다름없다.”
⑧ 한(漢)나라의 경제(景帝)가 개의 괴변을 만남
한(漢)나라 경제(景帝) 3년(158)에 한단(邯鄲)의 어떤 개가 돼지와 교미(交尾)를 했다. 그 때 조왕(趙王)은 드디어 6국(國)과 함께 배반하고 밖으로 흉노(匈奴)와 결탁하여 후원군을 만들었다.
『오행지(五行志)』에서 말하였다.
“조왕은 어리석고 문란하여 돼지와 같이 밖으로 다른 흉노와 사귀었다. 흉노는 개와 돼지 따위와 비슷한 부류이다.”
⑨ 한(漢)나라의 장제(章帝)가 도깨비 괴변을 만남
수광후(壽光候)는 한(漢)나라 장제(章帝) 때 사람이다. 그는 모든 귀신과 도깨비들을 탄핵(彈劾)하여 스스로 묶어 그 형상을 보게 했다.
그 고을의 어떤 여자가 귀신에게 붙들려 병을 앓았다. 광후가 그 귀신을 탄핵할 때 여러 길이 되는 뱀이 죽어 그 집 문 밖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정령(精靈)이 있어서, 그 밑에 머무르는 사람은 죽고 그 위를 지내가는 새는 땅에 떨어지곤 하였다. 광후가 그것을 탄핵하니, 나무는 한여름인데도 잎이 다 말라 떨어졌고 또 길이가 7, 8장 되는 큰 뱀이 그 사이에 매달려 죽어 있었다.
장제가 그 사실을 듣고 물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사람들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장제는 광후에게 말하였다.
“궁전 밑에 괴변이 있다. 밤중만 되면 항상 몇 사람이 붉은 옷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불을 들고 어울려 간다. 탄핵할 수 있겠는가?”
광후가 대답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그만 괴변입니다.”
장제는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그렇게 하게 했다. 광후는 그 세 사람을 탄핵했다. 세 사람은 기운 없이 당장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장제가 놀라 말하였다.
“그것은 귀신이 아니다. 내가 시험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곧 풀어 주게 했다.
⑩ 가의(賈誼)가 붕새의 괴변을 만남
가의(賈誼)는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4월 경자일(庚子日)에통합뷰어
붕새가 그 집에 날아 들어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날아갔다. 가의는 책을 꺼내어 점을 쳐 보았다. 그 점은 이러했다.
“들새가 그 집에 들어오면 주인이 장차 죽을 것이다.”
가의는 그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붕조부(鵬鳥賦)」를 지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생사를 같게 하고 화복을 같게 하는 것은 목숨을 다해 뜻을 정하는 것뿐이다.”
⑪ 안양성(安陽城)에 정묘(亭廟)의 괴변
안양성(安陽城)에 한 사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잘 수 없었는데 만약 자는 사람이 있으면 다 죽곤 하였다. 어떤 서생(書生)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거기에서 자려 하자, 사당지기가 말하였다.
“여기에서는 잘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서 잔 사람치고 살아 간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서생이 말하였다.
“상관 없습니다. 나는 잘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 사당으로 가서 단정히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다가 누웠다. 밤중이 지나 어떤 사람이 검은 홑옷을 입고 문 밖에 와서 사당 주인을 불렀다.
“예” 하고 대답했다.
“그 사당에 사람이 있는가?”
대답하였다.
“아까 어떤 서생이 여기 와서 오랫동안 책을 읽다가 누웠는데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가만히 한숨을 짓더니만 떠나가 버렸다. 조금 있다가 또 어떤 사람이 관(冠)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와서 사당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대답하자 그도 또한 “사당에 누가 있는냐?” 하고 물었다. 주인의 답은 먼저와 같았다. 그도 또 가만히 한숨을 짓더니만 떠나가 버렸다. 이에 서생은 할 수 없이 일어나 아까 그들이 주인을 부르던 그곳으로 가서 가만히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대답했다. 다시 “사당에 누가 있느냐?” 하고 물었다. 주인은 먼저와 같이 대답했다. 그래서 물었다.
“아까 그 검은 옷을 입고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인이 대답하였다.
“북쪽 집의 어미 돼지입니다.”
또 물었다.
“붉은 관을 쓰고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답하였다.
“서쪽 집의 늙은 수탉 애비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늙은 전갈입니다.”
이에 서생은 책을 읽으면서 새벽이 될 때까지 감히 잠들지 못하였다. 날이 밝자 사당지기가 와서 그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까?”
서생이 말하였다.
“너는 어서 상자를 가져오너라. 내가 너와 함께 도깨비를 잡으리라.”
그리고는 곧 어젯밤에 대답했던 곳을 파게 하였다.통합뷰어
그는 그 땅 속에서 과연 늙은 전갈을 찾아냈다. 그 크기는 비파만하고 독침의 길이는 여러 자나 되었다. 그리고 서쪽 집에서는 늙은 수탉의 애비를 잡고, 북쪽 집에서는 어미 돼지를 잡았다. 이렇게 셋을 죽이니, 사당의 독물사건은 마침내 조용해져서 오래도록 아무 재앙이 없었다.
⑫ 동월(東越)의 민중(閩中)에 뱀의 괴변
동월(東越) 민중(閩中)에 있는 용령(庸嶺)은 그 높이가 수십 리나 된다. 그 밑의 진펄에 큰 뱀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7, 8장이고 몸의 둘레는 1장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뱀으로 죽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동쪽 감영의 도위(都尉)와 그 속성(屬城)의 장리(長吏)는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곤 했지만 여전히 복을 얻지 못했다. 뱀은 혹은 사람의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무당과 박수를 달래어 12, 3세의 처녀를 잡아먹고자 했다. 도위와 영장(令長)은 모두 그것을 근심했으나 그 독한 기운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태어난 계집종을 구하거나 또 죄를 지은 집의 딸을 길러서, 8월의 아침 제사에 이 계집애들을 뱀 구멍에 보내면, 뱀은 곧 밤에 나와 애들을 잡아먹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에 모두 아홉 처녀를 뱀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래서 한 번은 다시 그런 여자를 모집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장락현(將樂縣)에 살고 있는 이탄(李誕)의 집에는 딸만 여섯이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기(寄)라는 막내 딸이 그 모집에 응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기가 말하였다.
“부모님은 복이 없어 오직 딸 여섯만 두고 아들이 없습니다. 딸은 있으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딸은 부모님을 영화롭게 하는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부모님을 공양할 수도 없고 한갓 옷과 밥만 축낼 뿐입니다. 살아서도 아무 이익이 없으니 차라리 일찍 죽는 것만 못합니다. 이 몸을 팔아 조그만 돈이나마 얻어 부모님을 공양하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는 가엾이 여겨 끝내 승낙하지 않았다. 기는 말리지 못하게 스스로 몰래 집을 떠나, 도위와 장리에게 가서 좋은 칼과 뱀을 잡아 먹는 개를 청해 얻었다. 8월 아침에 사당으로 갈 때, 칼을 품고 개를 데리고 갔다. 먼저 몇 섬의 쌀로 떡을 만들고 또 초밀(麨蜜)을 만들어 뱀 구멍 앞에 놓아 두었다. 밤이 되자 뱀이 구멍에서 나왔다. 머리는 곳집만큼 크고 눈은 두 자 되는통합뷰어
거울과 같았다. 그 뱀은 떡 냄새를 맡고 나와 먼저 떡부터 먹었다. 기는 곧 개를 풀어 놓았다. 개는 뱀을 물고 기는 뒤에서 칼로 그 뱀을 찍어댔다. 뱀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게 되자 다급해져서 구멍에서 튀어나와 길길이 뛰더니만 뜰에서 죽고 말았다. 기는 구멍 속에 들어가 아홉 여자의 해골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 들고 나와 꾸짖었다.
“너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 뱀에게 잡아먹혔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이리하여 기는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월왕(越王)은 그 사실을 듣고 곧 기를 맞이하여 왕후로 삼고 그 아버지에게는 장락령(將樂令)의 벼슬을 주고 그 어머니와 언니들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그 뒤로는 그 지방에 다시는 요사스런 괴변이 없었고, 그에 대한 노래는 지금도 남아 있다.
⑬ 중산왕(中山王) 주남(周南)이 쥐의 괴변을 만남
중산왕(中山王) 주남(周南)은 정시(正始) 때에 양읍(襄邑)의 장(長)이 되었다. 어떤 쥐 한 마리가 구멍에서 나와 청사(廳事) 위에서 말하였다.
“주남아, 너는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다.”
주남은 급히 달아나면서 이 말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쥐는 제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그 날이 되어 쥐가 다시 나왔는데, 검은 옷에 관을 쓰고 말하였다.
“주남아, 너는 오늘 낮에 분명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주남은 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쥐는 또 제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한낮이 지나자 쥐가 다시 나와 말했다.
“주남아, 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데 난들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말을 마치자 곧 거꾸러져 죽었고 옷과 관도 다 없어졌다. 주남은 곧 그것을 집어 보니, 모두가 보통 쥐와 같았다.
⑭ 계양(桂陽)의 장유(張遺)가 나무의 괴변을 만남
계양(桂陽) 태수(太守)인 강하(江夏)의 장유수(張遺水) 승고(昇高)는 언릉(鄢陵)에 살았다. 그의 밭 가운데 큰 나무가 있었다. 십여 아름에 그 그늘은 6묘(畝)를 덮고 있었는데,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 그늘에는 곡식이 나지 않았다. 승고는 사람을 시켜 그것을 베게 했다. 도끼로 몇 번 찍자 피가 많이 흘러 나왔다. 그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돌아가 승고에게 알렸다. 승고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오래된 나무 즙이 붉다니, 이것은 무슨 괴변인가.”
그리고는 손수 도끼로 나무를 찍었더니, 여전히 피가 많이 흘러 나왔다. 승고는 다시 가지를 찍었다. 그 빈 구멍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왔다.통합뷰어
키는 4, 5척이나 되었는데 승고에게로 달려왔다. 승고는 칼로 마구 찍어 죽였더니 4, 5척의 노인이 바로 죽었다. 좌우의 사람들은 다 놀라고 두려워해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승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태연했다. 사람들이 그 죽은 것을 자세히 보았더니 그것은 사람 같았으나 사람은 아니었고 짐승 같으면서 짐승도 아니었으니, 이른바 나무나 돌의 괴상한 도깨비라는 것인가. 그 나무를 벤 해에 승고는 사공어사(司空御史)와 연주(兗州)의 자사(刺史)가 되었다.
⑮ 남양(南陽)의 송대현(宋大賢)이 정자의 괴변을 만남
남양(南陽)의 송대현(宋大賢)은 서악(西鄂)에 정자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잘 수 없었으며 거기에서 자는 사람은 꼭 해를 입곤 했다. 대현은 “바른 도는 침범할 수 없다” 하고, 우선 누각 위에 올라가 거문고를 탈 뿐이요 무기는 지니지 않았다. 밤중에 귀신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와 대현과 이야기하려 했다. 그 귀신은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면서 그 형상이 매우 사나웠으나 대현은 여전히 거문고만 타고 있었다. 귀신은 곧 돌아가 시중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와서 대현에게 말하였다.
“과연 이것을 가지고 가서 구워 먹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대현의 앞에 내던졌다. 대현이 말하였다.
“매우 좋다. 내가 밤에 잘 때 베개가 없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귀신은 곧 떠나갔다. 한참 있다가 귀신은 다시 돌아와 말하였다.
“과연 내 손을 잡을 수 있겠는가?”
대현이 대답하였다.
“좋다.”
말을 미처 마치기 전에 달려들어 곧 그 옆구리를 마주 잡았다. 귀신이 다만 황급히 말하였다.
“나 죽는다. 나 죽는다.”
대현이 마침내 그것을 죽여 버렸다. 이튿날 자세히 살펴 보니 그것은 바로 늙은 여우였다. 그리하여 해독은 없어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오(吳)나라 여릉군(廬陵郡) 정자에 귀신의 괴변
오(吳)나라 때 여릉군(廬陵郡) 도정(都亭)의 중옥(重屋) 안에 항상 귀신이 있었다. 거기에서 자는 사람은 반드시 죽곤 하였다. 그 뒤로 사관(使官)들은 아무도 감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 단양(丹陽)의 탕응(湯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매우 담력이 컸다. 사신으로 여름에 가서 이 정자에 자려고 했다. 정자지기는 말리면서 말하였다.
“여기서는 잘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탕응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데리고 온 사람들은 다 다른 데서 자라고 하고, 자기 혼자 한 자루의통합뷰어
큰 칼을 가지고 누웠다. 3경(更)이 되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탕응은 물었다.
“누구냐?”
그는 대답하였다.
“부군(部郡)이 문안 왔습니다.”
탕응은 들어오라 했다. 그는 문안만 하고 돌아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먼저와 같았다.
“부군(府君)이 문안하러 왔습니다.”
탕응은 또 들어오라 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가는 것이 보였다.
탕응은 생각했다.
“저것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부군(部郡)과 부군(府君)이 왔습니다.”
탕응이 비로소 의심했다.
“지금은 밤중이니 적절한 때가 아니다. 게다가 부군(部郡)과 부군(府君)이 동행할 리가 없다.”
그것이 귀신임을 알고는 칼을 가지고 가까이 가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좋은 옷을 입고 함께 와서 자리에 앉았다. 부군(府君)이란 자가 탕응과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부군(部郡)이 탕응의 등 뒤로 뛰어갔다. 탕응은 돌아보면서 칼로 쳐서 맞혔다. 부군(府君)은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났다. 탕응이 쫓아가 정자 뒤 담 밑에 이르러, 그를 붙잡아 여러 번 칼로 찌르고 그곳을 떠나 돌아왔다. 새벽이 되어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가 보았다. 피가 흐른 흔적이 있어 그것을 따라가 결국 발견했는데, 부군(府君)이란 자는 곧 늙은 여우이고 부군(部郡)이란 자는 늙은 살쾡이였다. 그 뒤로는 그 요괴가 아주 없어졌다.
건안(建安) 때 동군(東郡) 경계에 노공(老公)의 괴변
건안(建安) 때에 동군계(東郡界)의 어떤 집에 괴변이 있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동이가 큰 소리를 내어 마치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에 소반을 놓아 두면 곧 그 소리가 사라지고 닭이 알을 까도 곧 모두 없어졌다. 이렇게 몇 해를 계속하므로 동이를 매우 미워했다. 이에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장만해 그 안에 넣고 뚜겅을 덮어 방 안에 놓아 두었다. 숨어 앉아서 문 틈으로 엿보니, 과연 무엇이 다시 와서 여전히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문을 닫고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으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만 지팡이로 땅을 칠 뿐이었는데 한참 있다가 방 한 구석 틈에 무엇이 맞히는 것이 있었으며 외치는 소리가 났다.
“아아, 아무도 모르게 나는 죽는다.”
문을 열고 보았다. 한 노인이 있었는데통합뷰어
나이는 1백여 세쯤 되어 보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그 형상은 마치 짐승 같았다. 그래서 알아 보려고 그를 데리고 몇 리쯤 가다가 그 집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간 곳을 모른 지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다시 간 곳이 없었다. 진류계(陳留界)에서 다시 그런 요괴가 있다 하였는데 그 때 사람들은 그것도 이 늙은이의 짓이라 생각했다.
진(晋)나라 때 늙은 삵이 사람의 아버지가 된 괴변
진(晋)나라 때 오흥(吳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다. 아들들이 들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 아버지가 와서 그들을 꾸짖고 마구 때렸다. 아이들은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르자 어머니는 그 아버지에게 까닭을 물었다. 그 아버지는 매우 놀라면서, 그것이 도깨비의 짓임을 알고는 아이들을 시켜 그것을 죽여 버리라 했다. 도깨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아버지는 아이들이 도깨비에 홀릴까 염려하여 들에 나가 보았다. 아이들은 그 아버지를 도깨비라 생각하고 곧 죽여 땅에 묻었다. 도깨비는 곧 그 아버지의 얼굴로 변해 그 집에 가서 말하였다.
“두 아들이 도깨비를 죽여 버렸다.”
아이들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와 서로 경하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그런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 뒤에 어떤 법사가 그 집을 지나다가 두 아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아버지의 몸에 큰 요사스런 기운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말을 아버지에게 말하니,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었다. 아들은 나가 법사에게 빨리 떠나라 했다. 그러나 법사는 큰 소리로 들어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곧 큰 늙은 살쾡이가 되어 평상 밑으로 들어가다가 결국 잡히고 말았다. 전에 죽인 것은 바로 그들의 진짜 아버지였다. 그래서 장사를 새로 지내고 복(服)을 입은 뒤에 한 아들은 자살하고 한 아들도 고민하다가 죽었다.[이상 열여덟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진(晋)나라 남경(南京)에 오소전옥(烏巢殿屋)의 괴변
『진남경사기(晋南京寺記)』에서 말하였다.
“파제사(波提寺)는 말릉현(秣陵縣)의 신림청릉(新林靑陵)에 있다. 옛날 진(晋)나라 함안(咸安) 2년(372)에 간문황제(簡文皇帝)가 세운 것으로서 본명은 신림사(新林寺)이다.
그 때 역양군(歷陽郡) 오강사(烏江寺)의 비구니 도용(道容)이 고행하여 신령을 통해, 화복(禍福)에 대해 미리 알았으므로 세상에서 성마(聖★)라고 전했다.
함안 초년 궁전에 까마귀 둥지가 있었다. 임금은 점쟁이를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점쟁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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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에 어떤 여자 도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 괴변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임금은 곧 사자를 오강(烏江)으로 보내어 그 성림을 맞이하여 물었다.
‘이것이 길한 일인가, 흉한 일인가?’
성림이 대답하였다.
‘덕을 닦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고 재계(齋戒)를 행해도 장애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임금은 7일 동안 재(齋)를 올리고 부지런히 예참(禮懺)했다. 법석(法席)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까마귀떼가 와서 그 둥지를 한꺼번에 깨끗이 쓸어갔다. 임금은 불법을 더욱 믿고 공경하고, 이로 인해 이 성림을 위해 이 절을 지었다.”
진(晋)나라 때 살쾡이가 사람의 부인이 된 괴변
진(晋)나라 해서공(海西公) 때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나 집이 가난해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깊은 산에 시체를 갖다 두고, 그 곁에서 신을 삼으면서 밤낮 쉬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어떤 부인이 아이를 안고 와서 같이 기숙했다. 밤이 깊었으나 그 효자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 부인은 잠을 청하다가 불 곁에서 졸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한 마리 살쾡이가 검은 닭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효자는 그것을 때려 죽여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렸다. 이튿날 어떤 남자가 와서 물었다.
“어젯밤에 여기 와서 기숙하던 여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효자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한 마리 살쾡이였습니다. 그래서 죽여 버렸습니다.”
남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억울하게 죽은 내 아내를 왜 살쾡이라고 하는가? 그 살쾡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둘이 가서 구덩이를 살펴 보았다. 살쾡이는 어느새 부인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 효자를 결박하고 관청에 가서 죽음을 보상하라 했다. 효자가 사령(使令)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정말 도깨비인지는 사냥개를 내어 놓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다시 와서 효자를 죽이기를 재촉했다.
사령은 그에게 사냥하는 일을 물었다.
“개를 잘 분별할 수 있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성질이 개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곧 개를 풀어놓았다. 그것은 문득 늙은 살쾡이로 변했으므로 곧 활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부인은 이미 다시 살쾡이로 변해 있었다.
진(晋)나라 때 살쾡이가 사람의 딸이 되어 아이를 낳은 괴변
진(晋)나라 태원(太元) 때 와관 불도(瓦官佛圖) 앞에 사는 순우긍(淳于矜)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고 결백한 성품이었다. 손님을 전송하러 석두성(石頭城) 남쪽까지 갔다가 얼굴이 아름다운 어떤 여자를 만났다. 우긍은 기뻐하여 그 여자의 집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정은 이미 어울렸다.통합뷰어
그녀를 데리고 성 북쪽 모퉁이에 이르러 함께 한껏 즐기고 각기 헤어졌다. 기약한 날에 다시 모여 우긍은 결혼하자고 했다. 여자가 말하였다.
“당신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한다면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형제가 많고 또 부모님이 계십니다. 우리 부모님께 여쭈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긍은 곧 여종을 시켜 그 부모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부모도 즉시 허락했다. 여자는 그 여종을 시켜 은 백 근과 비단 백 필을 가지고 와서 우긍에게 주어 결혼비에 보태 쓰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그들이 장성해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이튿날 과연 군사들이 몰려와 불러 내어 수레와 말이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따르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어떤 사냥꾼이 지나가다가 우긍을 찾았다. 그는 수십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왔다. 개들은 달려들어 그 부인과 아이를 물어 죽이니, 그들은 다 살쾡이였고, 그 비단과 금은은 모두 풀과 해골이었다.
진(晋)나라 때 장춘(張春)의 딸이 도깨비의 괴변을 만남
진(晋)나라 영초(永初) 때 장춘(張春)은 무창 태수(武昌太守)가 되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딸을 출가시키게 되었는데, 딸이 수레에 채 오르기도 전에 미쳐버렸다. 밖에 나가 남의 수레를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시집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당이 말하였다.
“이것은 도깨비다.”
그 딸을 데리고 강으로 나갔다.[위의 세 가지 증험은 『유명록(幽冥錄)』에 나온다.]
송(宋)나라 때 양도수(梁道修)의 집에 도깨비의 괴변
송(宋)나라 때 안정(安定)의 양청(梁淸)의 이름은 도수(道修)이다. 양주(楊州)의 우상방(右尙坊)에 살면서 환서주(桓徐州)의 옛 집을 찾았다.
원가(元嘉) 14년(437) 2월에 그 집에 자주 이상한 광명이 있고 울타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집종 송라(松羅)를 시켜 나가 보라 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나의 성은 화(華)이고 이름은 부용(芙蓉)입니다. 6갑(甲) 지존(至尊)의 심부름으로 태미자궁(太微紫宮)에서 내려왔다가, 옛 집을 보고 그대로 살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혹은 새 머리에 사람의 몸으로 눈초리는 치켜 뜨고 있었는데 똥을 양청에서 뿌렸다. 양청이 활로 그것을 쏘자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 물이 화살에 묻었다. 또 살펴 보니 원숭이 같은 어떤 물건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그 넓적다리를 찌르게 했다. 그것은 땅에 떨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 그것은 지붕 위로부터통합뷰어
절뚝거리면서 계집종에게 와서 밥을 청하였으므로 밥을 뭉쳐 주었다. 그것은 다시 두 되의 밥을 청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 귀신떼가 왔는데 추악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평상을 잡아 끌어 먼지를 날리면서 여러 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 계집종이 국화를 꺾다가 길에서 한 귀신을 만났다. 두건을 쓰고 말을 탔는데 수십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귀신이 이 계집종에게 말했다.
“나는 천상의 선인(仙人)이다. 귀신이 그렇게 했다고 하지 말라.”
물었다.
“무엇 때문에 항상 더러운 것을 던지는가?”
귀신이 대답하였다.
“더러운 것은 돈과 재물의 형상[象]이고 던지는 것은 빨리 옮기는 징조이다.”
얼마 뒤에 양청은 과연 무장군(武將軍)으로서 북로군(北魯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양청은 오랫동안 진독(塵毒)을 앓았다. 이에 외국의 도인 파라첩(波羅疊)을 불러 주문을 읽게 했다. 모든 귀신들은 두려워서 혹은 벽 구멍으로 달아나면서 다 새소리를 내었다. 그로부터 병이 완전히 나았다.
양청이 북로군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날 밤에 송라(松羅)는 다시 위의를 갖추고 무기를 가진 수만 명을 보았다. 그 중에 두건을 쓴 어떤 사람이 거친 종이에 70자쯤 되는 글을 써 보냈는데, 그 글씨가 곱고 아름다워 멀리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에게 비길 만했다. 또 그 노래에 말하였다.
나를 공작루(孔雀樓)에 올려 놓나니
멀리 봉황(鳳凰)의 북소리를 듣는다.
나를 추산(雛山) 머리에 내려 놓나니
양로(梁魯)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귀신에게 숙조(叔操)가 있었다. 숙조가 슬피 울어 답하는 조상(弔喪)은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귀신은 송라에게 명령하여 일찍이 한 함의 책을 청하였으니 그 제(題)에 이르기를 “옛날 공수(孔修)가 죽을 죄를 짓고 흰 종이로 그 아재비의 죽음을 조문하되, 그 슬픈 정을 폄에 있어서 매우 법도와 질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근래에 서방(西方)에 가서 한 사문을 보았는데, 그는 자기 이름을 대마찰(大摩刹)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대의 소식을 물으면서 5환향(丸香)을 주더라”고 했다. 양청이 전에 사신으로 돈황(燉煌)에 갔을 때 이 스님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양청의 계집종은 거기서 낳았는데 소식이 끊어졌다.
낭야왕(琅邪王)의 아내 빙지(騁之)는 진군(口東郡)의 사씨(謝氏)로서 아들을 낳아,통합뷰어
어릴 때 이름은 노자(奴子)라 지었다. 몇 해 뒤에 왕은 그 아내의 계집종 초리(招利)를 첩으로 삼았다.
원가(元嘉) 8년(431)에 왕이 병으로 죽었다. 왕의 큰 무덤은 회계(會稽)에 있지만 건강(建康)의 동쪽 언덕에 거짓으로 장사했다. 거짓으로 반우(反虞)할 때 그 영혼을 집에 들이어 책상에 기대 두었다. 갑자기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면서 성내는 소리가 있었다.
“왜 만가(挽歌)도 짓지 않고 나를 쓸쓸하게 길에 오르게 했느냐?”
빙지는 말했다.
“영원한 장사가 아니기 때문에 의식을 갖추지 않은 것입니다.”[이상 두 증험은 『이원(異苑)』에 나온다.]
주(周)나라 중니(仲尼)가 계환자(季桓子)에게 말하였다.
“나는 들었다. 즉 목석(木石)의 괴변은 기(夔)와 망량(蝄蜽)[위소(韋昭)의 주(註)에는 “목석은 산을 이름이요 기(夔)는 한쪽 발만 가진 짐승이니, 월(越)나라 사람은 이것을 산도깨비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혹은 외발이라 했다. 망량은 산정(山精)으로서 사람의 소리 배우기를 좋아해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다.]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국어(國語)』에 나오는 말이다.”
또 『사기(史記)』에서 말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말하기를 ‘산귀신은 1년 동안의 일밖에 모른다’고 했다.”
서방(西方)의 산에서 사람이 새우와 게를 먹은 괴변
서방(西方)의 깊은 산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의 키는 한 자 남짓하였으며 항상 웃통을 벗고 새우와 게를 잡곤 했다. 그 성질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이 자는 것을 보면 불을 피워 새우와 게 구워 먹기를 좋아하였다. 사람이 없는 틈을 엿보아 남의 소금을 훔쳐다가 그것으로 게를 먹곤 했다. 그 이름을 산도깨비라 했다. 그것이 큰 소리로 외칠 때 사람들은 항상 대나무를 불에 넣어 터트려 소리를 내면 그것은 놀라 달아나곤 했다. 그것이 사람을 침노하면 사람은 추위와 더위에 괴로워한다.[이것의 형상은 사람이지만 역시 도깨비일 뿐이며 산중에는 어디나 다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은 『신이경(神異經)』에 나온다.
송(宋)나라 때 왕(王)씨 집에서 만든 게집을 나무가 무너뜨린 괴변
송(宋)나라 원가(元嘉) 초년에 부양(富陽)에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성은 왕(王)씨이다. 그는 깊은 도랑 밑에 게 통발을 만들어 놓고 아침에 가보곤 하였다. 그런데 길이는 두 자쯤 되는 큰 나무 토막이 게 통발 안에 있었고 게 통은 찢어져 열려 게가 다 빠져나가고 한 마리도 없었다. 다시 통발을 고치고 나무 토막을 끄집어내어 언덕 위에 두었다. 이튿날 가보았더니 나무 토막이 통발 안에 있어 게 통발이 찢어진 것이 먼저와 같았다. 그는 또 나무 토막을 끄집어내고 통발을 고쳐 두었다. 새벽에 가 보았더니, 또 먼저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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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왕씨는 이것은 도깨비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통발 안의 게를 그대로 메고 돌아오면서, 집에 가서 구워 먹으리라 생각했다. 집에 이르기 3리 전에 통발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아까 그 나무 토막이 이상한 물건으로 변했는데 사람 얼굴에 원숭이 몸이며 손 하나에 발도 하나였다. 그가 왕씨에게 말했다.
“나는 게를 즐겨 먹는 성질입니다. 근래에 물에 들어가, 당신이 만들어 놓은 통발을 찢고 거기 들어가 게를 먹었으니 그것은 잘못입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하고 통발에서 나를 집어내었습니다. 나는 산신(山神)입니다. 내가 당신을 도울 것이요 또 지금 게를 많이 잡게 하겠습니다.”
왕씨가 말했다.
“너는 사람을 침노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이 괴물은 오로지 놓아 주기를 빌었으나 왕씨는 머리를 저으며 들어주지 않았다. 그 괴물이 말하였다.
“당신의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가 알고 싶습니다.”
자꾸 물었으나 왕씨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집이 더욱 가까워지자 그 괴물이 말하였다.
“이미 나를 놓아 주지도 않았고 또 성명도 알려 주지 않으니,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나 나는 그저 죽을 뿐입니다.”
왕씨는 집에 돌아가 그것을 불에 살라 버렸다. 그랬더니 뒤에는 다시 그런 괴변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산도깨비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성명을 알면 곧 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간절히 왕씨의 성명을 물어 그를 해치려고 했으나 왕씨는 그것을 면한 것이다.[앞의 한 가지 증험은 『술이기(述異記)』에 나온다.]
당(唐)나라 때 역적 장량(張亮)이 벼락의 괴변을 만남
당(唐)나라 역적[逆人] 장량(張亮)은 옛날 유주(幽州) 도독(都督)이 되어, 지천사(智泉寺)에서 예배하다가 그 불상(佛像)의 원만한 상호(相好)를 보았다. 그래서 특별히 공양을 장만할 때, 장량이 벼락을 만나 기둥이 빠지면서 장량의 이마를 때렸다. 그러나 그다지 다치지는 않았다. 절에 이르러 불상에 예배할 때, 그 불상의 이마에서 상처를 보았다.[이것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또 정관(貞觀) 연간에는 그 불상의 목에 실과 같은 흔적이 둘러져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다 그것을 보고 좋지 못한 조짐이라 여겼는데, 얼마 안 있어 과연 장량은 죄를 짓고 죽임을 당했다.통합뷰어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명보습유기(冥報拾遺記)』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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