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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471 법원주림(法苑珠林) 28권

by Kay/케이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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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8

 

법원주림 제28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20. 신이편(神異篇)[여기에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각통부(角通部) 항사부(降邪部)
태잉부(胎孕部) 잡이부(雜異部)

(1) 술의부(述意部)
신도(神道)의 교화는 과장과 강함을 억누르고 업신여김과 교만을 꺾으며 흉폭한 날카로움을 꺾고 티끌의 어지러움을 푸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바퀴를 날리고 보배를 어거하면 선신(善信)이 돌아와 항복하고 돌을 옹그리고 연기를 섞으면 역사(力士)가 자취를 감춘다. 지극한 다스림은 마음이 없음이요 억세고 부드러움은 교화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혹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며 자신을 굽혀 헤매는 세속과 함께 하고, 혹은 신기(神奇)함을 나타내어 방조(方兆)를 멀리 기록하며, 혹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고, 혹은 정(定)에 든 뒤 공(空)하게 되니, 신령스런 자취의 괴상함은 그 까닭을 헤아릴 수 없다.
대개 이치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에 합하는 것이요, 일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편을 쓰는 사람은 상정을 돌이켜 도에 합하고 이익을 주는 것으로써 의무를 삼아야 한다. 그러나 전(傳)에 기록된 것들은 그 자세한 내용을 다 알기는 어렵다. 혹은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감응하기도 하고, 혹은 이 도선(道仙)으로서 높이 뛰어나기도 한다. 다만 그 일부분이나마 사람이 겸하게 된다면 곧 넉넉하고 높아질 것이다.
그 방기(方伎)를 자랑하며 좌도(左道)가 어지럽힐 때에는 약석(藥石)으로 인해 높이 날고 방지(芳芝)를 빌어 오래 산다. 또 하늘 위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으며 사학(蛇鶴)이 죽지 않고 귀채(龜蔡)가 천 년을 살면 이것을 신이(神異)라고들 하지만 이는 성인의 신변에는 비교할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모은 것은 우선 성문(聲聞)들의 열다섯 가지 신이를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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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거룩한 덕의 자재함을 논한다면 말로 다할 수 없고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 편(篇)에 다 실려 있고, 또 이 장(章)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다.

(2) 각통부(角通部)
『대방등대집염불삼매경(大方等大集念佛三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대목련(大目連)이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옛날 나는 어느 때에 이 삼천대천세계를 쥐어 다 내 입 안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중생들은 나아가 한 생각에도 놀라거나 갔다 왔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기억합니다. 나는 옛날에 세존 앞에서 사자처럼 외치고는 수미산을 내 입 안에 넣고 한 겁(劫)이나 혹은 한 겁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일을 예사로 했습니다. 또 기억합니다. 나는 옛날 동방으로 가서 제3천 세계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는 보문(寶門)이라는 큰 성(城)이 있었고 그 안에는 6만억천의 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낱낱 내 몸을 나타내고 설법하여 그들을 다 바른 법에 편히 머물게 했습니다.’
그 때 또 사리불이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나는 옛날에 가사 하나를 땅에 던져 두었습니다. 그 때 제 1상좌(上座)인 대목련은 그런 위신(威神)을 가지고도 그것을 집거나 나아가 땅에서 들어 올리지도 못했거늘 어떻게 손으로 받들 수 있었겠습니까? 또 기억합니다. 아난이여, 나는 옛날 세존 앞에서 사자처럼 외쳤습니다. 그 때 여러 외도(外道)들이 나와 겨루고자 하여, 나는 몸을 숨기고 설법하였습니다.
부처님을 제외한 지견과 힘이 센 모든 보살과 이외의 모든 성문 제자와 나아가 외도들은 내가 몸을 숨길 때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끝내 내가 있는 곳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또 대가섭이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어느 때 나는 세존 앞에서 사자처럼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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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수미산을 입으로 한 번 불어 부수어 흩어지게 하여 나아가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산에 살던 중생들을 다치거나 알게 하지 않고도 그 모든 산을 다 없어지게 했습니다. 나는 또 어느 때에는 이 대천세계의 모든 큰 바다와 강과 못물과, 나아가 무량 억천 나유타 백천 물들을 입으로 한 번 불어 모두 말렸지만 그 중생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또 어느 때에는 대중 앞에서 사자처럼 외치고는, 이 삼천대천세계 안을 입으로 한 번 불어 마치 겁화(劫火)가 타오르듯 온통 불바다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중생도 다치지 않았고 그들은 끝내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미륵과 문수와 모든 보살들은 대가섭의 사자처럼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곧 변화로 수미산만한 꽃무더기를 만들어 두 번 세 번 대가섭 위에 뿌리고, 다시 변화로 7보의 일산을 만들어 공중에서 대가섭의 정수리를 덮고 또 일체 성문 대중을 덮었다.
그 때 부루나(富樓那)가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나는 옛날에 신통으로 교화할 중생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해 삼천대천세계를 쥐어 손으로 만지며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한 중생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고 또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교화할 그 중생만 내가 손으로 이 세계를 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나는 손으로 삼천세계를 잡아 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또 나는 세존 앞에서 한 손가락 마디로 이 삼천세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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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물들을 집어 내 손가락 마디 사이에 넣었지만 어떤 중생도 물이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는 어느 때 초저녁에 깨끗한 천안(天眼)으로 이 대천세계의 무량한 중생들의 의혹을 관찰하고는, 이 선정에서 나오지 않은 채 그들의 의혹을 제거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각 이렇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나는 존자(尊者)께서 혼자 내 앞에서 나만을 위해 설법하시는 가피를 입었다.≻
그리하여 그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게하는 데 걸림이 없었습니다.’
그 때 라후라가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나는 옛날 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산들을 다 내 한 털구멍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본래와 같았고 중생들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어느 때에는 이 대천세계의 모든 큰 바다와 강과 못 등의 물들을 모두 내 몸의 털구멍에 넣었으나 내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 중생들도 다치지 않았으며 모든 물도 다 본래와 같았습니다. 나는 또 어느 때에는 여기서 선정에 든 채 곧 동북방의 난승(難勝)이라는 부처 세계로 가서는, 몸을 나타내어 경례하고 곧 이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전단향을 구해 가지고 다시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니, 그 향기는 두루 가득 차면서 무량한 갖가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 수보리가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기억합니다. 어느 때 나는 삼매에 들어, 이 크고 넓은 대천세계를 한 털끝에 두고 옹기장이의 수레바퀴처럼 왔다 갔다 빙빙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한 중생도 놀라는 마음이 없었고 또 제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또 나는 옛날에 부처님 앞에서 사자처럼 외치고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삼천대천세계를 나는 입으로 살짝 한 번 불어 다 흩어지게 하지만, 그 안의 중생들은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왕래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다시 부처님 앞에서 대천세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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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생을 다 한 손가락 마디 끝에 두고, 위로 유정천(有頂天)에 올라갔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저 중생들에게는 갔다 왔다는 생각이 없게 했습니다. 또 기억합니다. 나는 어느 때 삼매에 들어 시방의 무량한 부처님을 뵈었는데, 무량 무변 백천 세계에 각각 6만 부처님께서 계셨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지금 보고 알았습니다. 이 선정의 마음으로 다시 신통력을 발휘하여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천 곁에 가서는 전단향 가루 한 줌을 집어 가지고 저 무량한 세계로 가서 그 부처님들께 공양했습니다. 그 세계의 중생들은 내가 이 염부제에서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었습니다.’ ”

(3) 항사부(降邪部)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아서가왕(阿恕伽王)은 삼보를 깊이 믿어 항상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공양하였다. 그러자 모든 바라문과 외도들은 질투가 나 서로 한데 모여 노인 5백 명을 뽑았다. 그들은 다 4위타(韋陀)의 경전을 외우고 천문과 지리에도 모두 통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여 의논했다.
‘아서가왕은 머리 깎은 사문에게만 일체를 다 공양하고 나이 많은 우리들에게는 아직 그런 일이 없다. 어떤 방편을 써야 저 마음을 돌리게 할까?’
주문을 잘 외우는 어떤 바라문이 말하였다.
‘여러분, 그저 내 뒤를 따르기만 하십시오. 지금부터 이레 뒤에 나는 주문의 힘으로 마혜수라(魔醯首羅)의 몸이 되어 왕궁으로 날아갈 것이니, 여러분은 걸어서 내 뒤를 따라오십시오. 나는 그에게 크게 공양을 베풀게 하여 당신들이 다 먹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바라문들도 다 좋다고 했다. 이레가 되는 날 주문을 잘 외우는 바라문은 곧 주문으로 그 몸을 마혜수라로 만들어 허공을 날아 왕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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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바라문들도 다 따라갔다. 왕궁 문 앞에 이르러 그는 사람을 시켜 왕에게 아뢰게 하였다.
‘지금 공중에서 어떤 마혜수라가 499명의 바라문들을 데리고 공중에서 내려와 지금 문 밖에 있고, 다른 바라문들은 땅에 서서 왕을 뵙고자 합니다.’
아서가왕은 사자를 시켜 곧 그들을 불러들여 양쪽 곁채의 평상 위에 앉게 하고 말하였다.
‘자리가 변변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문안하고 왕은 곧 말하였다.
‘마혜수라께서 무슨 일로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혜수라는 대답하였다.
‘음식이 필요합니다.’
왕은 곧 찬간에 명령하여 5백 개의 음식상을 그들 앞에 갖다 놓았다. 마혜수라 등은 다 손으로 상을 밀치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음식은 먹은 일이 없습니다.’
왕은 대답하였다.
‘먼저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을지 몰랐습니다.’
마혜수라 등은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가 먹을 음식은 저 머리 깎은 사문들입니다.’
왕은 곧 한 신하에게 명령했다.
‘너는 저 계두말사(雞頭末寺)로 가서 존자 야사(耶奢)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왕궁에 5백 바라문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마혜수라라 자칭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인지 사나운 나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묻는 것이니, 부디 아사리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저들을 쫓아 주십시오.>’
그러나 그 심부름꾼은 사견(邪見) 바라문의 제자였다. 그는 그곳으로 가서 왕이 말한 그대로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서가왕을 찾아 온 5백 바라문은 그 형상은 사람 같으나 말은 나찰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문을 잡아먹고 싶다는 말만 합니다.’
상좌(上座)인 야사(耶奢)는 곧 유나(維那)에게 말하였다.
‘건추(犍椎)를 쳐서 스님들을 모으시오.’
그리고 일어나 여러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으므로 여러 스님들 대신 내가 이 일을 감당하겠소. 스님들은 편히 계시면서 불법을 잘 호지(護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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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게 해주시오.’
둘째 상좌(上座)가 말하였다.
‘상좌께서 가셔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떤 일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가야 합니다.’
셋째 상좌가 말하였다.
‘둘째 상좌께서 가셔서는 안 됩니다. 제가 가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투어 사미에게까지 이르렀다. 16만 8천 스님 가운데 제일 끝인 7세의 사미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서 꿇어앉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큰 스님들 께서는 동요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려 불법 호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중 스님들께서는 제가 가는 것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상좌 야사는 매우 기뻐하며 사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가는 것이 좋겠다. 사자[使人]를 기다리게 하지 말고 곧바로 가라.’
아서가왕은 사자에게 물었다.
‘오신다는 분이 있더냐?’
사자는 대답했다.
‘서로 다투어 가려 하다가 지금 제일 어린 사미가 왔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어른들은 수치스럽기 때문에 이런 자를 보내어 대접하게 했구나.’
왕은 사미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문 밖에 나가 맞아들여 임금이 앉는 자리에 앉혔다. 바라문들은 모두 크게 화를 내었다.
‘아서가왕은 참으로 무식하다. 우리는 늙었는데도 일어나 맞이하지 않더니 저 어린 사미를 위해서는 직접 나가 맞이하는구나.’
사미는 왕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왕은 대답하였다.
‘이 마혜수라는 아사리를 잡아먹고자 합니다. 아사리께서는 잡아먹히시겠습니까, 먹히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미는 말하였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아침을 못 먹고 왔습니다. 대왕께서는 먼저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 다음에 저는 저들에게 잡아먹히겠습니다.’
왕은 주방장을 시켜 음식을 가져 오게 했다. 사미는 한 상의 음식을 전부 먹었다. 이렇게 5백 상의 음식을 다 먹고도 오히려 부족해 했다. 왕은 주방장에게 명령했다.
‘남은 음식을 다 갖다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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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는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왕은 물었다.
‘충분합니까?’
사미는 대답하였다.
‘아직 부족합니다. 배고픔은 여전합니다.’
주방장이 왕에게 아뢰었다.
‘음식이 다 바닥났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창고 안의 미싯가루와 마른 포를 다 가져 오너라.’
그것도 먹어 치우자 왕이 물었다.
‘충분합니까?’
대답하였다.
‘아직도 부족합니다.’
왕은 말하였다.
‘모든 음식이 다 바닥나 이제 남은 음식이 없습니다.’
사미는 말하였다.
‘저 제일 아랫자리의 바라문을 붙잡아 오십시오. 저는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곧 다 먹어 버렸다. 이렇게 499명의 바라문을 모조리 다 먹어 버렸다. 오직 혼자 남아 있던 마혜수라는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곧 공중으로 날아 도망치려 했다. 사미는 자리에 앉은 채 손을 들어 공중에 있는 마혜수라의 머리를 붙잡아 그것도 다 먹어버렸다. 왕은 곧 놀라고 두려워하며 ‘저 모든 바라문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것을 보니 또 나까지 잡아먹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사미는 왕의 마음을 알고 곧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부처님 법의 단월이십니다. 조금도 해치지 않을 것이니, 부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시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저와 함께 저 계두말사(雞頭末寺)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왕은 말하였다.
‘아사리께서 저를 데리고 가신다면 하늘에 오르거나 땅에 들어간다 해도 저는 다 따르겠습니다.’
사미는 곧 왕과 함께 계두말사로 갔다. 그곳에서 왕은 사미가 아침에 먹었던 음식을 여러 스님들이 다 함께 나누어 먹고 있고, 그가 먹었던 5백 바라문은 모두 머리와 수염을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대중 스님들의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제일 처음에 먹었던 자는 그 중 제일 윗자리에 앉았고 마혜수라는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5백 명은 왕과 사미를 보고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였다.
‘저희는 이 사미와도 싸울 수 없는데 하물며 저 대중 스님들과 힘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학의 꼬리가 화로의 숯불로 가고 모기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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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金翅鳥)와 빨리 날기를 겨루며, 토끼 새끼가 사자와 그 위력을 겨루는 것들과 같아서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5백 명의 바라문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모두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4) 태잉부(胎孕部)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무량한 옛날에 바라내국(波羅柰國)에 선산(仙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 어떤 범지(梵志)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돌 위에서 대소변을 보았다. 그러다 뒤에 있던 정기(精氣)가 소변을 본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떤 암사슴이 와서 그것을 핥아 먹고 곧 임신했다. 달이 차자 그 사슴은 선인(仙人)에게로 가서 계집애를 낳았다. 아이는 단정하고 너무도 예뻤는데 다리만은 사슴과 같았다. 범지가 데려와 길러 아이는 성장했다. 범지는 불을 섬기면서 아이에게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시켰다. 소녀는 재에 묻어 둔 불을 조금 주의하지 않아 그만 불을 꺼뜨렸다. 그녀는 범지가 성낼 것이 너무도 두려워 거기서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범지에게 불을 빌러 갔다. 그 범지는 그녀의 발자국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불러 말했다.
≺내 집을 일곱 번 돌면 불을 빌려 주리라. 그리고 떠날 때에도 일곱 번 돌고 또 왔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해서 돌아가라.≻
그녀는 그의 말대로 하고 불을 빌어 돌아갔다.
그 때 범예국왕(梵豫國王)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그 범지의 집에 둘러져 있는 열네 겹의 연꽃과 또 두 길에 난 두 줄의 연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그 범지에게 물었다.
≺여기는 못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이런 묘한 꽃이 있는가?≻
범지는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왕은 꽃이 난 발자국을 따라 먼저 범지에게로 가서 그녀를 청해 보았다. 그녀의 단정한 얼굴을 보고 왕은 매우 기뻐하며 곧 범지에게 그녀를 달라고 청했다. 범지는 그녀를 왕에게 주었고, 왕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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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뒤에 그녀가 임신하자, 관상쟁이는 점을 쳐보고 말했다.
≺아들 천 명을 낳을 것입니다.≻
왕의 대부인(大夫人)은 이 말을 듣고 질투가 나 차근차근 계교를 꾸몄다. 그래서 은혜로 그녀를 대하고 또 녹녀(鹿女)의 측근들에게도 많은 재물을 주었다. 달이 차자 그녀는 천 잎의 연꽃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낳으려 할 때 대부인은 무언가로 그녀의 눈을 싸매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는, 악취가 나는 썩은 말 허파를 가져다 그녀의 아래에 붙였다. 그리고 천 잎의 연꽃은 바구니에 담아 그대로 강물에 던져 버렸다. 다시 눈을 풀어 주고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네가 낳은 것을 보라. 오직 썩은 말 허파 한 덩이뿐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무엇을 낳았느냐?≻
≺썩은 냄새 나는 허파입니다.≻
대부인은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님께서 그렇게도 기뻐 날뛰며 혹해 빠졌던 축생이 낳은 선인(仙人)이 이런 상서롭지 못한 더러운 것을 낳았습니다.≻
왕은 곧 그 부인의 지위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그 때 오기연왕(烏耆延王)은 여러 무리를 데리고 그 부인과 미녀들과 함께 그 강의 하류에서 놀이하고 있다가, 누런 구름 일산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왕은 생각했다.
≺저 구름 일산 아래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그 누런 구름 밑에는 바구니 하나가 있었고, 곧 주워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천 잎의 연꽃이 있고 잎마다에는 어린애가 있었다. 왕은 곧 거두어 가지고 가서 길렀다. 아이들은 모두 힘이 센 장사로 장성하였다.
그 때 오기연왕은 해마다 늘 범예왕(梵豫王)에게 공물(貢物)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그 해에도 온갖 공물을 모아 사자를 시켜 보내려 했다. 그 여러 아들들이 오기연왕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왕은 대답하였다.
≺저 범예왕에게 공물을 보내려 한다.≻
여러 아들은 모두 말하였다.
≺한 아들로도 천하를 항복받아 다 찾아와 공물을 바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천 명의 아들이 있는데 어찌 남에게 공물을 바치겠습니까?≻
천 명의 아들은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여러 나라를 항복받고,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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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예국으로 갔다. 범예국의 왕은 적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의 군사를 모집하면서 물었다.
≺누가 저 적군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적군을 물리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째 부인이 찾아와 그 모집에 응하며 말하였다.
≺제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왕은 물었다.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부인은 대답하였다.
≺다만 저를 위해 1백 장(丈) 되는 돈대[臺]만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그 위에 앉아 반드시 물리치겠습니다.≻
돈대를 다 만들자 부인은 그 위에 나가 앉았다. 그 때 천 명의 아들이 활을 들고 쏘려 했다. 그러나 손을 들 수가 없었다. 부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부디 부모를 향해 활을 들지 말라.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다.≻
천 명의 아들은 물었다.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내가 젖을 눌러 한 쪽의 젖마다 5백 갈래가 생겨 각각 너희들의 입에 들어가면 내가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어머니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는 곧 두 손으로 두 젖을 눌렀다. 그러자 한 젖마다 5백 갈래가 생겨 천 명의 아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다른 군사는 아무도 얻지 못했다. 천 명의 아들은 곧 항복하고 부모님께 참회했다. 그리고 그 모든 아들들은 화합하였고, 두 나라는 원한을 풀고 서로 권하며 따르게 되었다. 또 5백 아들은 친부모에게로 가고 5백 아들은 양부모에게로 갔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염부제를 나누어 각각 5백 명의 아들을 길렀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천 명의 아들이 누군인지 알고 싶은가? 그들은 바로 현겁(賢劫)의 천불이시다. 그 때 질투하여 남의 눈을 싸맨 부인은 눈먼 용 문린(文鱗)이요, 그 때의 그 아버지는 바로 백정왕(白淨王)이며, 그 때의 그 어머니는 바로 마야 부인이시다.’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 여자는 무슨 인연으로 사슴 배에서 태어났고 발자국에서 연꽃이 피어 났으며, 또 무슨 인연으로 왕의 부인이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먼 전생에 어떤 빈천한 집에 태어났었다. 모녀 두 사람은 들에 나가 밭을 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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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벽지불이 발우를 들고 걸식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딸에게 말하였다.
≺나는 집에 가서 내가 먹을 밥을 가져다 저 쾌사(快士)에게 드려야겠다.≻
딸도 말했다.
≺제 것도 가져다 드리십시오.≻
그래서 어머니는 곧 집으로 가서 모녀 두 사람의 몫을 가지고 와서 그 벽지불에게 주기로 했다. 그 동안에 딸은 풀을 모으고 꽃을 따다가 풀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꽃을 뿌려 벽지불이 앉기를 기다렸다. 딸은 어머니가 더디 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았다. 그 어머니가 보이자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왜 그리 늦습니까, 사슴처럼 뛰어오세요.≻
어머니가 도착하자 딸은 어머니가 더딘 것이 미워 원망하며 말하였다.
≺저는 어머니에게서 났지만 저 사슴한테서 난 것만 못합니다.≻
어머니는 곧 두 몫의 밥을 벽지불에게 드리고 나머지는 모녀가 같이 먹었다. 벽지불은 밥을 다 먹고 나서 발우를 공중에 던져 열여덟 가지 신통 변화를 부렸다. 그 때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면서 서원하였다.2)
≺제가 장래에 이 성인(聖人)과 같은 성자(聖子)를 낳게 하여지이다.≻
이 인연으로 뒤에 5백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다 벽지불이 되었다. 그리고 한 번은 양모(養母)가 되고 한 번은 생모(生母)가 되었다. 어머니에게 사슴처럼 빨리 뛰어오라고 했기 때문에 사슴 배에서 출생(出生)하고 다리가 사슴 다리와 같게 되었다. 꽃을 따서 벽지불에게 뿌렸기 때문에 발자국에서 1백 송이 연꽃이 피어났으며, 풀 자리를 깔아 주었기 때문에 항상 왕의 부인이 되었다. 그 어머니는 후생에 범예왕이 되고 그 딸은 후생에 연화(蓮華) 부인이 되었다. 이 업연으로 뒤에 현겁의 1천 성인을 낳았으며 그 서원으로 항상 성현을 낳았던 것이니라.’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하였다.”
또 『분별공덕경(分別公德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선시(善施)라는 장자(長者)가 있었다. 그 집에는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은 딸이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불을 쬐다가 따뜻한 기운이 몸에 들어가 곧 임신하게 되었다. 부모는 놀라고 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따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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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부모가 몽둥이로 때리며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사실은 왕에게까지 알려졌고, 왕이 다시 힐책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여전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라고 하자 그녀가 원망하면서 말했다.
‘천하에 무도한 왕은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불량(不良)했다면 처녀막을 검사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다니요.’
왕은 곧 처녀막을 검사해 보았으나 여자의 말대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 부모에게 말했다.
‘저 딸을 내가 가지겠다.’
어머니는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죽은 것이나 진배 없는 이런 여자를 무엇에 쓰겠습니까?’
왕은 곧 궁중에 데려다 두고 때때로 돌보았고 달이 차서 그녀는 얼굴이 단정하고 묘한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차츰 장성해서는 드디어 출가하여 도를 얻었다. 즉 총명하고 널리 통달하여 정진한 지 오래지 않아 아라한의 도를 얻어, 도로 그 부모를 제도하였다.”
또 『비유경(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부부가 아들이 없어, 천신(天神)에 제사 드려 아들을 빌었다. 천신이 이를 허락하여 드디어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 대신 네 가지 물건을 낳았다. 즉 첫째는 쌀을 담은 전단나무의 말[斗]이요, 둘째는 감로(甘露)를 담은 병이며, 셋째는 보물이 든 주머니요, 넷째는 일곱 마디의 신령스런 지팡이였다. 그 사람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아들을 바랐는데 별 것을 다 낳았구나.’
다시 신에게 찾아가 거듭 소원을 청했다. 신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아들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과 어느 것이 더 유익한가?’
그는 대답하였다.
‘아들은 우리가 봉양할 것입니다.’
신은 말하였다.
‘이 말에 든 쌀은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고, 이 병에 든 감로는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으면서 갖은 병을 다 없애며, 이 주머니의 보물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고, 이 일곱 마디의 신령스런 지팡이로는 사나운 자들을 막을 수 있다. 아들이 어찌 이런 구실을 다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크게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와 시험해 보았다. 그 말은 헛되지 않아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부자가 되었다. 국왕은 이 소문을 듣고 곧 군사를 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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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물을 뺏으려 했다. 그 사람은 지팡이를 들고 날아다니면서 군사를 무찔렀고 그 강한 군사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다. 그 사람은 기뻐하며 다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5) 잡이부(雜異部)
『비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부자가 천 섬의 쌀을 땅 속에 묻어 두었었다. 봄이 와서 그가 종자를 내려고 움을 열어 보니 곡식은 간 곳이 없고 우거(牛莒)만한 큰 벌레 한 마리만 있었다. 그 벌레는 손이나 발이 없고 또 머리도 눈도 없어, 마치 하나의 살덩이 같았다. 주인과 그 집 사람들은 모두 괴상히 여겨 끄집어 내어 땅바닥에 놓고 물었다.
‘너는 무엇이냐?’
그러나 끝내 아무 답이 없어, 송곳으로 한 군데를 찔러 보았더니 벌레는 말하였다.
‘알고 싶으면 나를 저 큰 길가에 내다 놓으시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큰 길가에 내다 놓았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수백 대의 누런 마차를 탄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옷과 그 시종들도 다 황금빛이었다. 그들은 마차를 세우고 벌레를 불렀다.
‘곡식 도적아, 너는 왜 여기 있느냐?’
벌레는 대답하였다.
‘내가 사람의 곡식을 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잡아다 여기 내어 놓았다.’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그들은 떠났다. 주인은 곡식 도적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구냐?’
벌레는 대답하였다.
‘그들은 금보(金寶)의 정기입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3백 걸음 남짓 가면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밑에 1백 개의 돌독이 있는데, 거기 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주인은 곧 수십 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그 자리를 파고 금독을 얻었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수레에 싣고 돌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곡식 도적에게 말하였다.
‘오늘 우리가 금을 얻은 것은 다 큰 신(神)의 은혜입니다. 어찌 여기 이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같이 갑시다. 다시 공양을 차리겠습니다.’
곡식 도적은 말하였다.
‘전에 당신 곡식을 먹고 내 성명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이 이 금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천하에 복을 베푸십시오. 나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이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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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유경』에서 말하였다.
“왕사성(王舍城) 동남쪽에 큰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성 안의 온갖 더러운 것과 분뇨들은 다 거기로 모였으므로 더러운 냄새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는데, 큰 벌레 한 마리가 웅덩이에 살고 있었다. 몸 길이는 수 장(丈)이고, 손도 발도 없는 것이 물 속을 돌고 떴다 잠겼다 하면서 놀고 있었으므로 구경꾼이 수천 명이나 몰렸다.
그 때 아난이 행걸(行乞)하다가 그 광경을 보고 가서 살펴보니, 벌레가 뛸 때면 물결이 솟아올랐다. 아난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데리고 그 웅덩이로 가셨다.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 제각기 생각했다.
‘오늘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모인 대중을 위해 이 벌레의 내력을 말씀하시어 모두의 의심을 풀어주신다면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유위불(維衛佛)께서 열반하신 뒤의 일이다. 그 때 5백 비구가 어떤 절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절 주지는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비구들을 거기 묵게 하고 3개월 동안 공양하고자 했다. 비구들은 그 청을 받아 주었다. 주지는 마음을 다해 공양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에 5백 명의 상인(商人)이 바다에 들어가 보물을 캐어 돌아오는 길에 그 절을 지나다가 5백 비구가 부지런히 수도하는 것을 보고 모두 발심(發心)하여 공양을 베풀기로 했다. 5백 상인은 각각 마니주(摩尼珠) 하나씩을 내어 5백 개를 모아 주지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으로 저 비구 스님들에게 공양하십시오.’
주지는 승낙하고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뒤에 주지는 나쁜 마음이 생겨 그것을 자기 혼자 가지려고 공양을 베풀지 않았다. 스님들이 물었다.
‘지난번 그 상인들이 마니주를 주었으니, 그것으로 공양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지는 말하였다.
‘그것은 내게 준 것이오. 만일 내 똥을 빼앗겠다면 얼마든지 스님들에게 보시하겠소. 여기서 당장 떠나지 않으면 당신들의 팔과 다리를 뽑고 똥구덩이에 던져 버리겠소.’
대중은 그의 어리석음을 가엾이 여기면서 잠자코 거기서 떠났다. (그 때 그 주지가 지금의 벌레이다.) 그러므로 나쁜 축원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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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빈 집에서 혼자 자게 되었다. 밤중에 한 귀신이 시체 하나를 메고 오더니 그의 앞에 놓았다. 또 한 귀신이 그를 쫓아와 먼저 온 귀신을 꾸짖으면서 말했다.
‘이 시체는 내 물건인데 네가 왜 갑자기 메고 왔느냐?’
먼저 온 귀신이 대답했다.
‘이것은 내 물건이다. 내가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뒤에 온 귀신이 말하였다.
‘이 시체는 사실 내가 메고 왔다.’
두 귀신은 각각 그 시체의 한 발과 한 손씩을 잡고 다투다가, 먼저 온 귀신이 말하였다.
‘여기 사람이 있으니 물어 보자.’
뒤에 온 귀신이 이 사람에게 물었다.
‘이 시체를 누가 메고 왔는가?’
이 사람은 ≺이 두 귀신은 힘이 매우 세다. 참말을 하건 거짓말을 하건 둘 다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고 생각하고는 말하였다.
‘먼저 온 귀신이 메고 온 것이 맞소.’
뒤에 온 귀신은 크게 성을 내며 이 사람의 팔을 잡아 뽑아 땅에 던졌다. 먼저 온 귀신은 이 사람을 가엾이 여겨 얼른 시체의 한 팔을 뽑아 이 사람에게 붙여 주었다. 이렇게 두 팔과 두 다리와 머리와 옆구리와 온몸이 다 바뀌게 되었다. 이에 두 귀신은 바뀐 이 사람의 몸을 함께 나눠 먹고는 입을 닦고 떠나 버렸다. 이 사람은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께서 낳아 주신 몸을 두 귀신이 다 먹어 버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지금의 이 내 몸은 다 남의 살덩이다. 그러면 지금 나는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그리하여 절에 가서 여러 비구들에게 물어보면서, 위의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비구들은 말하였다.
‘원래 나[我]란 없는 것입니다. 4대(大)가 모였기 때문에 나[我]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본래 몸은 본래와 다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비구들이 그를 제도해 그는 도를 닦아 아라한의 과(果)를 얻었다.”
또 『선신경(善信經)』에서 말하였다.
“마라타기(摩羅陀祇)라는 신령스런 약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주로 천하의 모든 독을 눌러서 독이 퍼지지 못하게 하였다. 큰 신사(神蛇)가 있었는데, 그 몸길이는 120척이었다. 뱀은 먹이를 찾아다녔다. 또 몸 길이가 5장(丈)인 머리 검은 벌레가 있었다. 벌레는 길을 가다가 뱀과 만났다. 뱀은 머리를 들고 그 벌레를 물려 했다. 뱀은 약냄새를 맡고는 머리를 숙이고 달아나려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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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이 약나무에 걸려 몸이 두 동강이가 났다. 머리쪽 반은 살아 달아날 수 있었으나 꼬리쪽은 썩어 문드러졌다. 이 뱀의 썩은 냄새 때문에 모든 독한 기운이 다 사라졌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명월마니주(明月摩尼珠)는 용뇌(龍腦) 속에 많이 있는데, 복이 있는 중생은 저절로 얻는다. 이것을 또 여의주(如意珠)라고도 하니, 항상 일체의 보물과 의복ㆍ음식 등을 내므로 마음대로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구슬을 가지면 독도 그를 해치지 못하고 불도 그를 태우지 못한다. 어떤 이는 ‘제석이 아수라와 싸울 때, 그가 가진 금강이 부서져 염부주에 떨어지면 구슬로 변한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오랜 과거의 부처님 사리가 불법이 멸한 뒤에 이 구슬로 변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한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큰 바다 가운데 네 개의 보배 구슬이 있어 일체의 여러 보배가 다 그것에서 나온다. 따라서 만일 이 네 구슬이 없어지면 다른 모든 보배도 차츰 다 없어질 것이다. 작은 용신(龍神)들은 다 이것을 볼 수 없고 오직 사가라(娑伽羅)용왕만이 이것을 깊은 보배창고에 간직해 두고 있다. 이 깊은 보배창고에는 네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 이름은 중보적취(衆寶積聚)요, 둘째 이름은 무진보장(無盡寶藏)이며, 셋째 이름은 원치연(遠熾然)이요, 넷째 이름은 일체장엄취(一切莊嚴聚)다.
또 큰 바다 속에는 불길이 치솟는 듯한 광명을 비추는 보배가 네 개 있다. 첫째는 이름이 일장광명대보(日藏光明大寶)요 둘째는 이름은 이윤(離潤)광명대보요, 셋째는 이름이 화주(火珠)광명대보요, 넷째는 이름이 구경무여(究竟無餘)광명대보이다. 만일 큰 바다 속에 이 네 보배가 없었더라면 사천하와 금강위산(金剛圍山),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도 다 바다에 잠겨 떴다 가라앉았다 했을 것이다.
일장광명은 바닷물을 낙(酪)으로 만들 수 있고, 이윤광명은 낙의 바다를 소(酥)로 만들 수 있으며, 화주광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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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바다를 태울 수 있고, 구경무여광명은 소의 바다를 남김없이 다 태울 수 있다.
게송을 읊는다.

지극한 성인은 은밀히 움직여
생각할 수도 알 수도 없고
신령스런 공덕은 빛을 감추어
현인(賢人)인지 우자(愚者)인지 헤아리기 어렵네.
선과 악이 함께 있고
오름과 잠김에 같은 모습 보이니
일을 당하여 깨닫고서야
신령의 숨김을 비로소 아네.

더러움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티끌을 버리고 유유히 쉬니
저 현묘(玄妙)한 관찰이 아니라면
누가 그 지극함을 선양할 수 있으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반성하고
덕에 오르기를 우러러 사모하라.
그 이름은 만대에 드날리고
그 복의 힘은 천년에 뻗으리.”

감응연(感應緣)[대략 열여덟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나라 사문 석담수(釋曇邃)
진(晋)나라 사문 석법상(釋法相)
진(晋)나라 사문 석사행(釋仕行)
진(晋)나라 사문 석기역(釋耆域)
진(晋)나라 사문 석불조(釋佛調)
진(晋)나라 사문 석건타(釋揵陀)
진(晋)나라 거사(居士) 저세상(抵世常)
송(宋)나라 참군(參軍) 정덕도(程德度)
제(齊)나라 사문 석홍명(釋弘明)
제(齊)나라 사문 석법헌(釋法獻)
수(隋)나라 사문 석보안(釋普安)
수(隋)나라 사문 석법안(釋法安)
수(隋)나라 사문 석혜간(釋慧侃)
당(唐)나라 사문 석전명(釋轉明)
당(唐)나라 사문 석가일(釋賈逸)
당(唐)나라 사문 석법순(釋法順)
당(唐)나라 연주(兗州) 추현(鄒縣) 사람 장(張)씨 이름은 모름[忘字]
제전잡명신이기(諸傳雜明神異記)

ⓛ 진(晋)나라 사문 석담수(釋曇邃)
진(晋)나라 때 하음(河陰) 백마사(白馬寺)의 석담수(釋曇邃)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젊어서 출가하여 하음의 백마사에 있으면서, 나물밥에 베옷으로 『법화경』을 외웠다. 항상 하루에 한 번씩 외우면서 경의 뜻도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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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남을 위해 해설도 해주었다.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면서 ‘법사님을 청해 90일 동안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담수는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굳이 청하므로 부득이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이것은 꿈 속이었다. 꿈에서 깨어 보니, 자기의 몸은 백마촌(白馬村)의 신사(神祠) 안에 있었고, 제자도 한 명 함께 있었다. 그 뒤로는 날마다 몰래 그곳으로 갔으므로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그 절의 스님이 신사 앞을 지나다가 두 개의 높은 자리를 보았다. 담수는 북쪽에 앉아 있고 제자는 남쪽에 앉았는데, 무슨 강설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또 기이한 향내가 풍겼다. 그래서 승려와 속인들은 서로 전하면서 모두 신이(神異)하다 했다.
한 여름 안거(安居)가 끝나자 신(神)은 흰 말 한 마리와 흰 양 다섯 마리와 비단 90필을 보시하였다. 그리고 축원이 다 끝나자 그들은 각기 헤어졌고 담수는 끝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② 진(晋)나라 사문 석법상(釋法相)
진(晋)나라 때 월성사(越城寺)의 석법상(釋法相)은 성이 양(梁)이고,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항상 산에서 정진하며 10여만 언(言)의 경을 외울 때는 새와 짐승들이 그 좌우에 모여들었는데, 잘 길들여진 것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 같았다.
태산사(太山祠)에 있는 큰 돌함에는 보물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법상은 때때로 산에 갈 때면 그 사당 곁에서 자곤 했다.
한 번은 검은 옷에 무관(武冠)을 쓴 어떤 사람이 나타나 법상에게 그 돌함을 열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이내 사라졌다. 그 돌함 뚜껑의 무게는 천 균(鈞)이 넘었는데 법상이 시험삼아 들어 보았더니 가볍게 들렸다. 법상은 그 보물을 가져다 빈민들에게 보시했다. 진나라 원흥(元興) 말년(404)에 죽으니 나이는 80세이었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③ 진(晋)나라 사문 석사행(釋仕行)
진(晋)나라 때 사문 사행(仕行)은 영천(潁川) 사람으로 성은 주(朱)씨이다. 기운과 뜻은 방정하고 원대했으며 학식과 성품은 침착하고 반듯했다. 그는 마음을 닦아 바르게 나아갔으므로 어떤 영욕(榮辱)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당시는 경전이 구비되지 못해 오직 소품(小品)만이 있었고, 장구(章句)가 빠지고 간략하여 이치가 드러나지 못하던 시기였다.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60)에 그는 옹주(廱州)를 출발하여 서역(西域)의 우전(于闐)으로 가서 경장(經藏)을 구하면서 여러 나라로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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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스님들은 거의 소승(小乘)을 배우고 있었으므로, 사행이 방등(方等)의 여러 경전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괴상히 여기면서 주지 않고 말하였다.
“변방 사람이 정법(正法)을 알지 못해 장차 많은 사람들을 의혹시키고 어지럽힐 것이다.”
사행은 말했다.
“경에서는 천년 후 말법 시대에는 불법이 동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의심하신다면 지성으로 시험해 보기를 청합니다.”
곧 섶에 불을 붙이고 기름을 쏟으니, 연기와 불꽃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행은 경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마를 조아리고 서원하였다.
“만일 과연 금구(金口)에서 나와 한지(漢地)에 유포(流布)될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께서는 증명하여지이다.”
그리고는 그 경을 불 속에 던지자 치솟는 불꽃에 그림자가 흔들렸다. 조금 뒤에 한 줌의 재만 남았는데, 경의 글자는 조금도 상하지 않고 겉장도 그대로 있었다. 이에 온 나라가 기뻐하고 공경하면서 그를 머물게 하고 공양했다. 제자 법요(法饒)를 보내 범본(梵本)을 가지고 진류(陳留)로 돌아가게 해 준의(浚儀)와 창원(倉垣) 등 여러 절에서 책을 내니, 무릇 90편에 20만 언(言)이었다. 하남(河南)의 거사(居士) 축숙란(竺叔蘭)이 방속(方俗)을 잘알고 법의 맛을 깊이 알았으므로 그와 함께 번역해 전하니, 지금의 「방광수품(放光首品)」이 그것이다.
사행은 나이 80세에 죽었다. 화장에 붙여 불이 꺼진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시체 형상은 그대로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만일 참으로 도를 얻었다면 무너져야 마땅하다”고 하자, 이 소리를 따라 곧 부서져 흩어졌다. 그리하여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혜지(慧志) 도인(道人)이 선사(先師)로부터 이 사실을 들어 전하였고, 석공(釋公)도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④ 진(晋)나라 사문 석기역(釋耆域)
진(晋)나라 때 사문 기역(耆域)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서역(西域)에서 바다를 건너와 관락(關雒)을 둘러보기 위해 옛날의 양양(襄陽)으로 가 배를 타고 북으로 가려 했다. 사공은 이 천축 사문의 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 업신여겨 태우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뒤에 배가 북쪽 언덕에 닿자, 기역도 언덕에 올랐다. 온 배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또 기역이 앞서 걸어가는데 두 마리 호랑이가 나타나 기역을 맞이하며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역이 손으로 그 머리를 어루만지자 호랑이는 곧 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남북 언덕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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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지만 기역은 “답할 것이 없다”고만 하였다.
기역이 떠나자 수백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기역이 천천히 걷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쫓아갔으나 그래도 따라잡지 못했다.
혜제(惠帝) 말년(306)에 기역은 낙양(雒陽)에 도착했다. 낙양의 도사(道士)들이 모두 가서 예배했으나 기역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통역하는 이를 통해 그들의 장식한 복장을 꾸짖었다.
“당신네는 불법을 선포할 때 진실한 정성으로 하지 않고, 그저 겉치레를 위해 공양을 구할 뿐이다.”
그리고 낙양의 궁전들을 보고는 말했다.
“도리천의 궁전이 이와 방불할 것이다. 도의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을 죽을 힘을 다해 지었으니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사문 지법연(支法淵)과 축법흥(竺法興)은 모두 젊은 이들로서 후배였지만 기역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맞이했다. 법연이 예배를 마치자 기역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좋은 보살이 양(羊)들 속에서 왔구나.”
또 법흥이 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매우 기쁘게 웃으면서 나가 맞이하며 예배하였다. 그리고 법흥의 손을 잡아 머리에 얹고 말하였다.
“훌륭한 보살께서 하늘사람 속에서 오셨군요.”
이전에 그 지방의 어떤 사람이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일이다. 기역은 가서 보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타락해 여기 나서 이처럼 고생하는가?”
병자를 땅바닥에 내려 홑자리 위에 눕혀 놓고는, 응기(應器: 발우)를 그 배 위에 놓고 모시베로 덮었다. 그리고 범패(梵唄)로 세 개의 게송을 외우고 주문을 수천 마디 외웠다. 그러자 더러운 냄새가 온 집에 가득 차더니 병자가 “이제 살겠다”고 했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모시베를 걷게 하니 응기 안에 더러운 진흙 같은 것이 가득 찬 것이 보였고, 병자는 드디어 나았다.
장사(長沙) 태수(太守) 등영문(滕永文)은 이전에는 열심히 정진하던 사람이었다. 그 때 그는 낙양(雒陽)에 있으면서 두 다리가 풍(風)병으로 오그라들어 여러 해를 고생했다. 그러나 기역이 그를 위해 주문을 외자 그는 곧 다리를 펴게 되었고, 며칠 뒤에는 일어나 다녔다.
또 우수사(雨水寺)는 사유(思惟)나무가 예전부터 말라 죽은 채 있었다. 그러나 기역이 그것을 향해 주문을 외자 열흘 만에 나무는 다시 살아나 무성해졌다.
그 때 그 절에 있던 축법행(竺法行)은 담론(談論)을 잘하여 때때로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있었다. 그는 기역을 보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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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뵈오니 도를 증득한 분이십니다. 설법해 주십시오.”
기역은 말했다.
“입을 단속하고 뜻을 거두며 몸은 범하지 말라. 이렇게 행하는 사람, 세상을 뛰어나리.”
법행은 말하였다.
“도를 얻은 사람은 처음 듣는 말을 일러 주어야 합니다. 지금 그 말은 여덟 살 난 사미도 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얻은 분께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말과 같이 8세의 사미도 외울 수 있소. 그러나 1백 세의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오. 사람들은 다 도를 얻은 사람을 공경할 줄은 알지만 그것을 실천해 스스로 얻을 줄은 모르오. 내가 보기로는 그것은 뒤바뀐 것이요, 묘함은 당신에게 있는데 왜 듣지 못함을 원망하는 것이오.”
또 서울[京師] 사람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옷이나 물건을 수천만억 가지를 보내면 기역은 그것을 다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다 봉해 두었다가 떠날 때는 그대로 두고 갔다. 기역은 번기[幡] 8백 개만을 만들어 낙타에 싣고, 상인들에게 부탁해서 먼저 천축으로 보냈다. 또 법흥(法興)이 한 벌 가사를 가지고 그를 따랐다. 기역은 법흥을 보고 말했다.
“이 지방은 커지기는 하되 새로운 죄를 짓고 있으니 얼마나 가여우냐.”
기역이 떠날 때는 전송하는 사람이 수천이었다. 그는 낙양(洛陽)에 있던 절에서 점심을 마쳤다. (그리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날 장안(長安)을 출발해 낙양으로 온 취(取) 도인은 장안에서 기역을 보았다고 했다. 또 기역이 보낸 상인과 낙타와 종들이 돈황(燉煌)의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그 상인의 아우를 만났는데, 그는 천축서 온다 하면서 근래에 돈황사에서 기역을 보았다고 했다. 또 그 제자 습등(濕登)이란 자는 유사(流沙)의 북쪽에서 기역을 만났는데 그 말이 간곡하더라고 했다.
그 날짜를 계산해 보면 10일 전이요 또 기역이 낙양을 출발하던 때이니, 그는 그 때 이미 만여 리를 걸었던 것이다.

⑤ 진(晋)나라 사문 석불조(釋佛調)
진(晋)나라 사문 불조(佛調)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나, 상산(常山)을 왕래하기 여러 해이었다. 그는 늘 순박함을 숭상하고 말의 꾸밈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다 그를 존중했다.
상산에 불법을 받드는 형제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집은 절에서 1백 리 거리였다. 아우는 형수의 병이 위독하자 절 곁으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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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을 가까이 하게 하였다. 그 형은 불조를 받들어 스승으로 삼고 조석으로 항상 절에 머물면서 도를 묻고 수행했다. 어느 날 불조는 갑자기 그 집으로 갔다. 아우는 형수의 병세를 묻고 또 형의 안부도 물었다. 그러자 불조가 말했다.
“병자는 조금 낫고 그대 형도 여전하다.”
불조가 떠난 뒤에 그 아우도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리고 형에게 아침에 불조 스님께서 오셨었다고 그 형에게 말했다. 형은 놀라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에 스님은 절을 떠난 일이 전혀 없는데 네가 어떻게 볼 수 있었겠느냐?”
형제는 둘이서 다투다가 불조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나 불조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고,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불조는 가끔 마른 밥 몇 말을 가지고 혼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한 1년 반 동안 지내다가 돌아왔는데, 항상 식량을 남겨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불조를 따라 산으로 갔는데, 수십 리를 가자 날이 저물고 큰 눈이 내렸다. 불조가 바위 구멍의 호랑이 굴에 들어가 자는데 호랑이가 돌아와 그 굴 앞에 가로 누워 있었다. 불조는 호랑이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거처를 빼앗아 매우 염치가 없구나.”
그러자 호랑이는 귀를 숙이고 산을 내려갔다. 따라갔던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했다. 불조가 죽을 때를 스스로 밝혀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불조는 요결(要訣)을 그들에게 주었다.
“천지가 장구하다 해도 무너질 때가 있거늘 하물며 사람이 영구히 살려고 하겠는가? 만일 3독(毒)을 모조리 없애고 진정(眞淨)에 전심하면, 몸은 비록 갈라지더라도 신령스런 모임은 반드시 같을 것이다.”
대중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불조는 방으로 돌아가 단정히 앉아서는 가사로 머리를 덮고 갑자기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 뒤에 불조의 속인 제자 여덟 사람이 서산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다가,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불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의복이 선명하고 위의가 화열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었다.
“화상(和尙)께서는 아직 여기 계십니까?”
불조는 답하였다.
“나는 항상 자재할 뿐이다.”
그리고 자세히 물어 옛날 소식을 알고는 한참 있다가 떠났다. 여덟 사람은 곧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동법자(同法者)들에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증험할 길이 없어 그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았더니 그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⑥ 진(晋)나라 사문 석건타(釋揵陀)
진(晋)나라 때 건타륵(揵陀勒)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일찍이 수년 동안 낙읍(雒邑)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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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의 모습과 절조는 공경하면서도 그를 헤아릴 수 없었다. 뒤에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반치산(般鴟山)에 옛 탑사가 있는데 그것을 수리해 세우면 그 복이 무량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겠다 하고 그와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풀만 무성할 뿐 그 터를 알 수 없었다. 건타륵이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가 그 절터다.”
사람들이 시험삼아 파보았더니 과연 탑 밑의 주춧돌이 나왔다. 다시 강당과 승방과 부엌까지 가리키므로 모두 파보니 다 그의 말과 같았다. 그래서 비로소 그의 신령스러움을 알았다. 절을 다 수리하고 건타륵이 주지가 되었다. 그 절은 낙읍에서 1백 리인데 아침마다 낙읍의 법회에 가서 강론을 듣고는 기름 한 발우를 얻어 손에 들고 절로 돌아왔다. 아무리 아침 저녁으로 갔다 왔다 해도 점심만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하루에 수백 리를 다니는 사람이 그를 따라가서 시험해 보려고 같이 출발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리 달려도 따라갈 수 없었다. 건타륵은 돌아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 가사 자락을 붙들면 피곤하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그는 가사 뒷자락을 잡았고, 해도 지기 전에 절에 도착했다. 이 사람은 여러 날 쉬고 돌아와서는 비로소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모른다.

⑦ 진(晋)나라 거사(居士) 저세상(抵世常)
진(晋)나라 저세상(抵世常)은 중산(中山) 사람인데 집 안이 매우 부자였다. 대강(大康) 때에는 진나라 사람이 사문 되는 것을 금했었다. 세상은 불법을 받들어 정진하면서 몰래 자기 집 안에 절을 세우고 사문들에게 공양했는데 우법란(于法蘭)도 거기 있었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더라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 번은 어떤 비구가 형색이 누추하고 의복이 남루한 채로, 험한 길을 걸어 세상을 찾아왔다. 세상은 나가 예배하고 종을 시켜 물을 가지고 와서 그 발을 씻어 주라고 했다. 비구는 말하였다.
“세상이여, 그대가 내 발을 씻어 주시오.”
세상은 말했다.
“나는 나이가 많고 피로하니 종으로 저를 대신하겠습니다.”
그래도 그 비구가 허락하지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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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가만히 꾸짖으며 떠났다. 비구는 곧 신통을 나타내어 키는 8척이요 얼굴이 크고 빛나는 몸으로 변화해 공중을 날아갔다. 세상은 가슴을 만지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며 진흙 속에 주저 앉았다. 그 때 저세상의 집에 비구와 비구니 및 길을 가던 이들 5, 60명은 모두 수십 장(丈) 높이의 공중에 있는 그 비구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었고, 기이한 향내가 달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우법란은 이름난 법사(法師)로서 숭앙을 받았던 사람인데 그에 대한 기록은 후권(後卷)에 적혀 있다. 법란에게 전해진 것을 법란은 그 제자 법계(法階)에게 말하였고, 법계가 늘 이 사실을 이야기하여 승려와 속인들이 많이 들었다.

⑧ 송(宋)나라 참군(參軍) 정덕도(程德度)
송(宋)나라 때 정덕도(程德度)는 무창(武昌) 사람이고, 그 아버지 도혜(道慧)는 광주 자사(廣州刺史)였다. 덕도가 위군임천왕행참군(衛軍臨川王行參軍)이 되어 심양(尋陽)에 있을 때였다. 그 집에 제비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집안이 환히 밝아지더니 어떤 아이가 제비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키가 한 자 남짓하며 얼굴은 깨끗하고 분명했다. 아이는 덕도가 앉은 평상 앞으로 와서 “지금부터 2년 뒤에 당신은 길이 사는 도를 얻을 것입니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덕도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원가(元嘉) 17년(440)에 왕을 따라가 광릉(廣陵)에 있다가, 선사(禪師) 석도공(釋道恭)을 만나 그에게서 공부하여 선(禪)에 깊은 조예를 얻게 되었다.
19년(442) 봄에 이르러 그 집이 있는 무창(武昌)의 빈 서재에 이상한 향내가 나더니 길거리에까지 풍겨 나왔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다 가서 보았다. 그 향내는 사흘 뒤에야 사라졌다.[이상 여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⑨ 제(齊)나라 사문 석홍명(釋弘明)
제(齊)나라 때 영흥(永興) 백림사(栢林寺)의 석홍명(釋弘明)은 본성이 리(羸)씨요, 회계 산음(會稽山陰)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고행하며 계행을 지키는 절개가 있었다. 그는 산음의 운문사(雲門寺)에 있으면서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을 익히고 예참(禮懺)에 정근하며 여섯 때를 쉬지 않았다. 아침이면 물병에 물이 저절로 가득 찼는데, 그것은 실로 모든 하늘이 감응하여 그 동자들이 시중드는 것이었다.
홍명이 일찍이 운문사에서 참선하고 있을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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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홍명의 방에 들어와 평상 앞에 엎드려 그가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래 있다가 떠나가곤 했다. 또 어떤 때는 어떤 아이가 와서 홍명이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 홍명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아이는 대답했다.
“저는 옛날 이 절의 사미였는데, 휘장 밑의 밥을 훔쳐먹고 지금은 뒷간에 떨어져 있습니다. 상인(上人)의 도업(道業)을 듣고 일부러 와서 경을 듣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인께서 방편으로 저를 도와 이 과보를 벗어나게 해주소서.”
홍명은 곧 설법하고 교화시켰다. 그는 법을 듣고 깨닫고서 이내 사라졌다.
그 뒤에 영흥 석로암(釋姥巖)에서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또 어떤 산정(山精)이 찾아와 홍명을 괴롭혔다. 홍명은 그것을 붙들어 허리띠로 잡아 묶었다. 귀신(산정)은 공손히 사과하며, 다시는 감히 찾아오지 않겠다 하면서 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곧 놓아주었더니 이에 발길을 끊었다.
제나라 영명(永明) 4년(486)에 백림사에서 죽으니 나이는 84세였다.

⑩ 제(齊)나라 사문 석법헌(釋法獻)
제(齊)나라 때 남해(南海) 형산(荊山)의 석법헌(釋法獻)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북사(北寺)에 살았었는데 절이 오래되어 퇴락하자 법헌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교화해 데리고 와서 그것을 수리하고, 절 이름을 연상(延祥)이라 고쳤다.
그 뒤에는 장미산(藏薇山)에 들어가 절을 지었다. 절이 지어졌을 때 어떤 두 아이가 손을 마주 잡고 와서 노래하였다.

이 장미산에 도덕 있으니
그 기쁨이 다함이 없네.

노래를 마치자 갑자기 사라졌다. 온 절 사람들이 다 놀라며 모두들 신이(神異)하다고 감탄했다.
그 뒤에 법헌이 선정에 들어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경쇠 줄이 곧 끊어지려는데 왜 빨리 고치지 않는가?”
법헌은 놀라 일어나 곧 가보았다. 경쇠의 줄이 늘어져 곧 땅에 닿을 무렵 법헌이 손으로 잡아 경쇠는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 법헌이 어디서 죽었는지는 모른다.

⑪ 수(隋)나라 사문 석보안(釋普安)
수(隋)나라 때 종남산(終南山) 경재곡(梗梓谷)의 석보안(釋普安)은 성이 곽(郭)씨요, 옹주(癰州) 북경양(北涇陽) 사람이다. 법다운 위의로 법을 행하고 홀로 임야(林野)에 살면서 속세와 친하지 않고 오로지 선정[禪思]을 숭상했다. 늙을 때까지 험한 곳에 살면서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고, 항상 『화엄경』을 읽으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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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을 그대로 닦으며 세상을 위해 몸을 잊었다. 항상 산이나 들에서 노닐며 새나 짐승에게 보시하였는데 호랑이나 표범도 와서는 냄새만 맡아보고 해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원을 펴지 못했다.
주(周)나라가 불법을 폐할 때를 만나서는 덕이 높은 30여 명의 스님과 함께 종남산으로 피해 들어가 깊은 골짜기에 안전하게 머물게 하고는, 자신은 나가 다니면서 구걸하여 그들에게 풍족하게 공급하였다. 비록 소문은 났으나 모두 난리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때 애법사(藹法師)도 난리를 피해 의곡(義谷)의 두영세(杜暎世)의 집에서 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다가 화를 면하고 풀려났다. 그는 지나는 길에 보안을 찾아왔다.
“안공(安公)은 불법을 많이 아나 자못 너그럽지 못하오. 그러나 신령스런 뜻은 뛰어나 억센 일도 피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소.”
보안은 말했다.
“지금 난리를 벗어나게 된 것은 『화엄경』을 생각한 힘입니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때에 비로소 불법이 크게 일어나 흩어진 스님들을 널리 모아 옛날과 같이 편히 살게 했다. 그 때 경재골에 있던 30여 명의 스님들은 부름에 따라 출가하여 모두 관사(官寺)에 머물렀다. 그러나 오직 보안만은 산에 살기를 좋아해 본래의 골짜기를 지키면서, 때로는 마을로 내려가 중생을 이롭게 하며 끝까지 자연 속에 누워지내면서 들뜬 속세와 접촉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어떤 사람이 자오(子午)와 호림(虎林)의 두 골짜기가 합하는 시내 곁에, 감실(龕室)을 파고 암자를 지어 보안 법사를 살게 했다. 처음 감실에 있던 날, 그 위에 큰돌이 있어서 그것이 파이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보안은 가만히 생각했다.
‘저 돌이 다른 데로 옮겨가서 이 감실을 부수지 않게 하소서.’
이 말을 따라 돌은 다른 데로 모두 피해갔다. 대중이 모두 크게 괴상히 여기자 보안이 말했다.
“이것은 『화엄경』의 힘이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감실 동쪽 석벽의 시내 왼쪽에 삭타(索陀)라는 자가 살았는데, 그는 온 고을을 돌아다니며 해를 입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보안의 덕을 질투하여 항상 보안을 죽이려고 생각했다. 그는 무리 세 사람과 함께 활을 가지고 칼을 차고, 팔을 걷어올리고 세게 당겨 활을 쏘려 했다. 그러나 화살은 시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팔만 쉬지 않고 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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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눈으로 말을 못하고 선 채로 하룻밤을 지냈다. 이 소문이 퍼져 원근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고을 사람들은 보안에게 머리를 조아려 귀의하며 그를 구해 주기를 청했다. 보안은 말했다.
“나는 본래 모르는 일이니, 어찌 『화엄경』의 힘이 아니겠는가? 만일 저 재앙을 면하려 하거든 그 자를 참회시키시오.”
이 말대로 하여 그는 비로소 그 재앙을 벗어났다.
또 감실 서쪽 위촌(魏村)에 장휘(張暉)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나쁜 생각을 일으켜 도둑질로 업을 삼는 자였다. 그는 밤에 보안이 사는 곳으로 가서 불유(佛油)를 훔쳐, 다섯 되를 독에 넣어 그것을 지고 나왔다. 그러나 절 문에 이르자 정신이 아득하여 길을 잃고 무엇에 묶인 것같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권속과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하자 보안은 말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아마 『화엄경』의 힘일 것이오.”
그리고는 그를 참회시키라고 했다. 그 기름독을 반환하게 하니 과연 그 말대로 벗어났다.
또 감실 남쪽에 사는 장경(張卿)이란 자는 보안의 돈을 훔쳐 소매에 넣어 가지고 갔다. 그러나 집에 가서 소매를 쏟았으니 돈이 나오지 않았으며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경은 곧 보안을 찾아가 그 허물을 참회하고 돌아갔다.
또 정곽촌(程郭村)의 정휘화(程暉和)란 사람은 불법을 믿어 항상 보안에게 가서 설법을 듣던 자였다. 그러나 병으로 죽어 두 밤을 지내자, 시체를 싸서 땅에 두고 염하려 했다. 그 때 보안은 먼저 호현(鄠縣)에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서남쪽의 덕행사(德行寺)로 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5리에 있는 휘화가 사는 마을로 가서 멀리서 불렀다.
“휘화야, 왜 나와서 맞이하지 않느냐?”
이렇게 계속 소리치자 어떤 농부가 말하였다.
“휘화는 벌써 죽었습니다. 맞이할 턱이 없습니다.”
보안은 말하였다.
“그것은 맹랑한 말이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곧 그 마을에 이르러서는 소리를 높여 크게 불렀다. 그 때 휘화가 몸을 조금 움직였고, 곁에 있던 친척들이 시체를 묶은 줄을 끊었다. 보안은 그 집뜰로 들어가 더욱 크게 불렀다. 그러자 휘화가 갑자기 일어나 보안에게로 기어왔다. 보안은 사람들을 시켜 관 등 여러 기구를 치우게 하고, 하나의 대통발을 엎어 부처님의 자리로 대신하고는 휘화를 시켜 그 주위를 돌게 했다. 그러자 휘화는 곧 전과 다름없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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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더 살다가 휘화는 또 중병에 걸려 보안에게 와서 구해 주기를 청했다. 보안은 “네가 마음대로 논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고 하였고, 휘화는 곧 죽었다.
그 때 보안의 명성은 멀리까지 떨쳐 승려와 속인들이 높이 받들었고 그 곁의 무리들도 다 와서 만나기를 청했다. 보안이 법회를 열면 많은 감응이 있었으므로 곤명지(昆明池) 동북의 백촌(白村)에 사는 늙은 어머니도 말을 못하고 앓아 누운 지 1백여 일이 지나자 자녀들을 시켜 보안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였다. 그 어머니가 마음으로 오기를 청함을 알고 보안은 집으로 갔다. 앓던 어머니는 보안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내려가 맞이했다. 그리고 안부를 물음이 갑자기 평상시와 같았으며, 드디어 병의 고통도 없어졌다. 그 때 보안의 명성은 더욱 크게 떨쳐지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큰 재(齋)를 베풀려 했다.
대만촌(大萬村)에 전유생(田遺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에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고 딸 넷이 있었다. 아내는 그 입은 베옷이 겨우 무릎에 이를 뿐이며, 네 딸도 몸을 가릴 것이 없을 정도로 헐벗었다. 그의 큰딸은 이름이 화엄(華嚴)이고 나이가 이미 20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전부인 굵은 베 두 자[尺]를 보시에 충당하려고 생각했다. 보안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차례로 탁발하다가 그 집에 이르자 그 가난의 고생을 가엾이 여겨,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큰딸은 생각했다.
‘나는 너무도 가난해 복회(福會)도 열지 못하는구나. 지금 또 복을 짓지 않으면 장래에 어찌 구제를 받겠는가?’
그리하여 두루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하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슬피 울다가 지붕의 기왓장을 보았다. 거기 한 웅큼의 볏짚으로 뚫린 구멍을 막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떨어 여남은 낟알의 벼를 얻자 그것을 비벼 쌀을 만들어 먼저 있던 베와 함께 보시하려 했다. 그러나 옷이 없었다. 그녀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재공소(齋供所)로 기어가서, 보시할 물건을 멀리서 대중 속에 던졌다. 그리고 10여 개 쌀은 밥 짓는 데에 따로 바치면서 곧 발원했다.
“이 여인은 곤궁합니다. 전생에 아끼는 업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빈곤한 과보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가진 모두를 다 보시하여 미래의 과보를 바랍니다.”
이렇게 발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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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 개의 누런 쌀을 밥솥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지극한 이 정성으로 가난의 업이 다할 수 있다면 원컨대 짓는 이 밥이 다 누런빛으로 변하여지이다. 그러나 감응이 없다면 그것은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이렇게 서원하고 눈물을 닦으며 돌아왔다. 이에 밥솥의 닷 섬의 밥은 모두 누런빛으로 변하였다. 대중은 놀라고 감탄하였으나 그 까닭을 몰라하다가, 그 연유를 자세히 알아보고는 “이것은 전유생의 딸의 원력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재에 모인 대중들은 열 섬의 곡식을 거두어 곧 그녀를 구제했다. 그리고 보안은 법의(法衣)를 장만하여 화엄을 제도하고 서울의 절로 보내었다. 그 뒤로 보안은 그 명성이 더욱 떨쳤으니, 크게 깨우친 것은 다 적기 어려웠다.
보안은 숨어살면서도 항상 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구제했다. 그런데 두 사당에서는 해마다 피로 제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보안은 돌아다니면서 그 짐승을 사서 놓아주고, 그들에게 불법 닦기를 권했으므로, 생물을 죽이지 않는 고을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감실 곁 마을 사당에서 돼지 세 마리를 묶어 놓고 막 잡으려던 참에 있었던 일이다. 보안은 이 말을 듣고 가서 그 돼지를 사려 했다. 사당 사람들은 돼지를 죽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값을 올려 만 냥을 달라고 했다. 보안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보기에 3천 냥이면 이미 본 값의 10배는 됩니다. 그것이면 지금 그 돼지를 주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각기 의견이 같지 않아 서로 다투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아이가 나타나 사당으로 오더니 보안이 돼지 사려는 것을 돕다가 그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곧 술을 청해 돌려 마시고 춤추며 빙빙 돌았다. 그러자 온 사당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보안은 곧 칼을 빼어 자기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들고 말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고기일 뿐이다. 돼지는 사람의 똥을 먹는데도 그 고기를 먹거늘, 하물며 사람은 쌀을 먹는 것이니 이 고기가 더 귀하지 않는가?”
사당에 모였던 자들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한꺼번에 돼지를 다 놓아 주었다. 풀려난 돼지들은 보안을 세 번 돌고 코를 대어 보면서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모두 이것을 본받아 거기서 서남쪽 50리 안에는 닭과 돼지의 대가 끊어져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그 자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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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함이 다 이와 같았다.
보안은 지성과 믿음으로 『화엄경』 믿고 읽기를 좋아하면서 발우 하나와 옷 세 벌로 해가 갈수록 더욱 독실히 하였다. 개황(開皇) 8년(588)에는 여러 차례 왕의 명령으로 서울로 가서 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장공주(長公主)는 정법사(靜法寺)를 세워 그 절에 머물게 하였다. 이름은 비록 황제의 집이라 하나 그는 항상 바위 언덕에서 잠을 잤다. 대업(大業) 5년 11월 5일에 정법선원에서 세상을 마치니, 춘추는 80세였다.

⑫ 수(隋)나라 사문 석법안(釋法安)
수(隋)나라 때 동도(東都)에 있는 보양도량(寶楊道場)의 석법안(釋法安)은 성이 팽(彭)씨요, 안정(安定)의 순고(鶉孤)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태백산(太白山) 구롱정사(九隴精舍)에서 살면서 참선으로 업을 삼고 누추한 음식에 남루한 옷으로 일생을 마쳤다.
개황(開皇) 때에 강도(江都)로 가서 진왕(晋王)을 만나려 했는데, 궁문지기가 그를 몸이 작고 추하며 말이 경솔하다 하여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마다 궁문 앞으로 가서 아무리 타일러도 떠나지 않자 문지기는 시험삼아 통과시켰다. 왕은 불러들여 만나 보고는 오랜 친구처럼 대하며 곧 혜일사(慧日寺)에 머물게 하고 왕이 거동할 때에는 법안도 반드시 따르게 하였다. 왕이 태산(泰山)으로 행차했을 때, 가뭄이 든 때라 사방을 돌아보아도 바위뿐이요 물을 구할 길이 없었다. 법안은 칼로 돌을 찔러 물을 끌어 내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매우 감탄하면서 물었다.
“어떤 힘이 이렇게 하게 했습니까?”
법안은 대답했다.
“대왕의 힘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을 따라 사막으로 들어가 니해(泥海)에 이르렀을 때에는, 법안이 일어날 변괴를 모두 예견하고 미리 피하게 하여 다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태산의 신통사(神通寺)로 갔을 때 스님이 찾아와 단월되기를 청하므로 법안은 왕에게 말하자 왕은 손수 절의 담장에 글을 써서 큰 외호(外護)가 되었다.
처음으로 왕과 함께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때 어떤 스님이 해어진 옷을 입고 흰 나귀를 타고 왔다. 왕은 물었다.
“누구입니까?”
법안은 대답했다.
“저 사람은 낭공(朗公)입니다. 신통사를 창건하였기 때문에 일부러 맞이하러 온 것입니다.”
절에 이르러 또 한 신(神)을 보았는데, 커다란 몸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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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위에서 손으로 치문(鴟吻)을 집고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왕은 또 물었다. 법안은 대답했다.
“저것은 태백산의 신입니다. 왕을 시중드는 것입니다.”
그 뒤의 온갖 기행(奇行)은 다 자세히 적을 수 없다.
대업(大業) 초년(605)에 이르러 왕은 법안을 더욱 존중했다. 법안은 위엄이 있었으므로 왕공(王公)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항상 3위(衛)로 모시고 신(神)처럼 받들었다. 또 명산(名山)으로 다니면서 숨어 사는 뛰어난 이들을 부르니 곽지변(郭智辯)ㆍ석지공(釋志公)ㆍ등공(鐙公)ㆍ배도(杯度) 등이 한꺼번에 다 모였다. 혜일도량(慧日道場)에서는 2천여 명의 도예(道藝)가 있어 4사(事)의 공양을 받았는데, 법안이 그 우두머리였다.
또 동도(東都)에는 보양도량(寶楊道場)을 세워 오직 법안의 한 무리만이 거기서 수업했다.
11년(615) 봄이 되어 사방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나니, 춘추는 98세였다. 법안은 처음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임금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법안이 죽은 뒤 백 일에 궁중에서 불이 일어날 것이니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한식(寒食)날이 되어 기름이 끓으면서 위로 불이 붙었는데, 밤중이라 문이 닫혀 있어 3원(院)의 궁인(宮人)들이 한꺼번에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것을 괴상히 여기지 않고 관(官)을 태백산으로 보내고 관에서 치상하는 비용을 대었다. 그리고 법안은 자기의 덕을 숨겨 안팎의 생활이 여러 승려들과 같았다. 잘 때는 베개를 베지 않고 머리를 굽히지 않았으며, 목을 평상 앞에 늘이고 입에서 침을 흘려 늘 한 되 남짓했다. 그가 나타내는 것은 다 영험이 있는 것이었다.

⑬ 수(隋)나라 사문 석혜간(釋慧侃)
수(隋)나라 때 장주(蔣州) 대귀선사(大歸善寺)의 석혜간(釋慧侃)은 성이 양(楊)씨요, 진릉(晋陵)의 곡아(曲阿) 사람이다. 그 신령이 이승 저승에 다 통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존상(尊像)을 마치 참 부처처럼 공경했다. 그래서 입상(立像)을 볼 때마다 감히 그 앞에 꼿꼿이 앉지 않았고, 사람을 권해 불상을 만들되 오직 좌상(坐像)만 만들었다. 또 길을 가다가 위급한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걸고 구제해 주었다.
뒤에 영남(嶺南)으로 가서는 마음을 진제(眞諦)에 돌리고 오로지 선법(禪法)을 연구하여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말년에는 서하(栖霞)에 머물면서 뜻을 허정(虛靜)에 두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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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옴이 자재하여 산과 속세에 구애 받지 않았다.
어느 때 그는 양도(楊都)의 시(偲) 법사를 찾아갔다. 시는 평소 그의 도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예로 그를 맞이하고는 그를 데리고 절로 돌아와 신력(神力)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혜간은 “허락한다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고 곧 창 밖으로 팔을 내미니 그 길이가 수십 장(丈)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제희사(齊熙寺) 법당 위의 액자를 떼어 가지고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 법사에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깊은 지식이 없어, 그것을 보면 매우 놀라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대업 원년(605)에 장주의 대귀선사에서 목숨을 마치니, 춘추는 82세였다. 처음에 그가 죽던 날, 그는 3의(衣)를 절 안에 멀리 던지면서 “3의를 여러 스님들에게 돌려 드리고 나는 지금 죽습니다. 대중은 잘 계시오” 하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대중이 놀라 일어나 그를 쫓아가 보니, 방 안에는 백골 한 구(具)가 평상 위에 가부좌로 앉아 있었다. 대중이 가서 흔들어도 흩어지지 않았다.

⑭ 당(唐)나라 사문 석전명(釋轉明)
당(唐)나라 때 서경(西京)에 있는 화도사(化度寺)의 석전명(釋轉明)은 성이 녹(鹿)씨이고,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형색과 복장은 승려의 위의를 갖추었고 용모와 성질은 넓고 컸으며, 기거동작은 담연(淡然)하여 기쁨과 분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수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아무 까닭 없이 낙읍(洛邑)에 와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도적이 일어날 것이다.”
다시 조사해 보려 했으나 종서(宗緖)가 따르지 않았다. 그 때 임금은 그를 의심하였으나 죄를 주지는 못하고 억지로 그를 구속했다. 그러나 그 까닭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 이듬해 6월에 과연 호감(梟感)의 반역이 일어났으므로 그들을 동도(東都)로 쫓아내고 살육이 극심했다. 비로소 그 말과 같자 왕명으로 그를 놓아 주었다. 전명은 구금되어 있을 때에도 그 마음은 평상시와 같았으며, 의논할 때에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마침 임금이 강도(江都)로 갈 때 따라가서 언(偃) 스님에게로 갔다. 그 때 옥중에는 50명의 사형수가 있어 곧 베어 죽이게 되어 있었다. 전명은 “나는 내일 이 사형수들을 다 놓아 주리라” 하고는 곧 감옥으로 가서, 거짓으로 음식을 넣는 체하며 죄수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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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임금님의 행차가 이리로 지나갈 것이니, 너희들은 한꺼번에 ‘도적이 온다’ 하고 크게 외쳐라. 그래서 만일 그 까닭을 물으시거든 내게 들었다고 하면 사형을 면할 것이다.”
과연 그 기회가 와서 그렇게 말하여 왕명으로 죄수들은 다 풀려났다. 그리고 전명을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전명은 크게 웃으면서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때 사방의 좀도적들도 구차히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전명처럼 말했다.
대업 말년까지도 그는 구금되어 있다가 월왕(越王)이 왕위에 올라 비로소 풀려났다. 비록 왕래는 자유로웠으나 항상 건양문(乾陽門) 안의 별원(別院)에 있으면서 공양을 받았다. 그리고 몰래 달아날까 두려워해 항상 3위(衛)를 보내 가만히 지켰다.
황당(皇唐)이 태건(泰建) 때, 나라의 계획을 의논할 때에는 항상 그 유악(帷幄)에 참여하여 이해(利害)를 따졌으며, 정세충(鄭世充)은 더욱 그를 신봉(信奉)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를 더욱 엄하게 지키며 또 상도(常度)를 겸하였다.
개명(開明) 2년, 즉 당나라 무덕(武德) 3년(620)에 전명은 낙양의 궁궐을 살며시 빠져 나갔다. 당시 다섯 겹으로 성문 주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낙양[僞都]이 장차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쪽의 경사(京師)로 간 것이다. 태무황제(太武皇帝)는 일찍부터 그의 소문을 듣고 그 신이함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특히 융숭하게 대우하고 왕명으로 화도사(化度寺)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자주 궁내로 불러들여 물으면 그 징응(徵應)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뒤에 가서 보면 그 말이 다 맞았다.
그 해 8월에 갑자기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집물(什物) 등은 다 그대로 방 안에 있었다. 곧 찾으라는 명령을 내려 온 나라를 두루 뒤져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누구든 묻는 이가 있으면 그는 항상 평등한 한 법이라는 뜻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승려나 속인들의 과거와 미래의 고락(苦樂) 등에 대한 것을 말하면 다 들어맞았다. 그는 총지사(摠持寺)에 갔을 때 여러 스님을 보고 말했다.
“이 절에서 오래지 않아 피를 흘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모두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흡도사(恰都師)ㆍ법해(法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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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몰래 정세충의 자손을 승려로 만들었다가, 이윽고 체포되어 장터에서 죽었다. 그 때서야 그들은 비로소 과거의 실수를 뉘우쳤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⑮ 당(唐)나라 사문 석가일(釋賈逸)
당나라 때 안주(安州)의 사문 가일(賈逸)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수나라 인수(仁壽) 때 안륙(安陸)에서 노닐었는데, 그 말과 장난과 나타남과 사라짐이 부참(符讖)보다 더했고, 옷을 바꿔 입고 떠돌아 다님이 일정하지 않았다. 혹은 승려로 혹은 속인으로 여러 고을에 동시에 나타났으며, 그 징험이 드러나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덕을 존경했다. 그리고 그 행적이 가볍지 않아 무식한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방등사(方等寺)의 사문 혜고(慧暠)는 학행(學行)이 통달하고 넓었다. 가일은 지나는 길에 혜고에게 들러 종이 50장을 주면서 말했다.
“법사는 이것 때문에 풀려 날 것이오.”
처음에는 그 까닭 몰랐으나 뒤에 싸움이 일어나 혜고는 구금을 당했다. 사관(司官)이 혜고를 문책할 때 혜고는 종이에 변명을 써서 답하였는데, 종이가 다하자 그 사건도 끝났다. 그의 말이 꼭 맞았으니 그 징험의 들어맞음이 다 이와 같았다.
그 뒤에 그는 어떤 집에 가서 말했다.
“당신의 딸을 주신다면 저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 집에서 처음에는 허락했다. 그는 그 길로 시장으로 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구걸하였다.
“아무 집에서 내게 딸을 주었습니다. 나는 혼수를 장만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쌀과 돈을 많이 얻고, 날을 정해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뒤에도 자주 그 집 앞에 가서, 결혼했다고 높은 소리로 외쳐댔다. 그 여자 집에서는 창피스러워 그만 몰래 그를 죽여 뒷간 밑에 묻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난 뒤에 그는 장터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피살된 것을 이야기했다.
대업 5년(609)에는 천하가 태평했다. 가일은 여러 아이들과 물가에서 놀았는데, 혹은 다리를 타고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양의 대가리를 눌러라. 양의 대가리를 비틀어라”고 했다. 사람들은 멀찍이서 보며 그 하는 짓을 비웃었다. 그러나 뒤에 강도(江都) 양가(楊家)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그의 말이 들어맞았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⑯ 당(唐)나라 사문 석법순(釋法順)
당(唐)나라 때 옹주(癰州) 의선사(義善寺)의 석법순(釋法順)은 성이 두(杜)씨요, 옹주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뜻이 검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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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京室)의 동쪽 언덕을 마두(馬頭)라 하는데 빈 벼랑이 겹치고 깊어 영굴(靈窟)이 될 만했다.
인성사(因聖寺)의 스님 진(珍) 선사는 본래 법순이 수업(受業)한 스님이다. 진 선사는 처음에 거기다 절터를 잡아 속인들을 권해 닦게 하고, 단정히 앉아 지휘하면서 그 위의를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흰 발에 몸은 누렇고 저절로 길들여졌다. 그 개는 바로 굴 안으로 들어가 입에 흙을 물고 나왔다. 이렇게 손살같이 들락거리며 수고스럽게 애쓰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밥도 스님들처럼 점심 때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이런 기이한 일이 있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귀의하였다. 이에 임금님이 이 소문을 듣고 특히 소중히 여겨 하루에 쌀 세 되씩을 내려 항상 공급하였다. 그렇게 감실(龕室)이 완성되자 개는 아무 까닭 없이 죽었다. 지금의 인성사(因聖寺)가 바로 그곳이다.
그 때 법순은 이 일을 직접 보고 더욱 귀의하여, 힘껏 도와 절을 짓고는 백성들을 권해 법회를 열게 했다. 공양할 사람을 5백 명으로 잡았는데 그 때가 되어 배가 왔다. 공주(供主)가 공양이 적을 것을 걱정하자 법순은 “그렇다고 막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 사람에게 다 공양했으나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일찍이 장하강(張河江)ㆍ장홍창(張弘暢)은 집에 소와 말을 길렀는데, 그것들은 본래 성질이 폐악하여 사람들이 모두 걱정했다. 그래서 팔려 해도 살 사람이 없었다. 법순이 이것들에게 자비와 선(善)을 말하자 마치 알아듣고 순종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잘 길들여져 다시는 들이받거나 무는 일이 없었다.
법순은 매년 여름이면 대중을 데리고 여산(驪山)의 서정사(栖靜寺)로 갔다. 그 땅에는 개미가 많아 채소를 심을 수가 없었다. 법순은 걱정이 되어 밭에 가서 개미들에게 옮겨가라고 지시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가 보았더니 과연 개미들이 없어졌다.
또 법순이 종기를 앓아 고름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조심스레 빨기도 하고 혹은 비단으로 닦자 곧 병이 나았다. 또 남은 고름에서는 비할 데 없는 향기가 풍겼고 고름을 닦은 비단에도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삼원현(三原縣)의 전살타(田薩埵)라는 사람은 나자마자 귀머거리였고, 또 장소(張蘇) 등은 벙어리였다. 법순이 그들을 오라 하여 함께 앉아 이야기하자, 그들은 보통 사람처럼 병이 깨끗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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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공현(武功縣)의 어떤 스님이 독룡(毒龍)에게 홀리자, 대중은 법순을 청했다. 법순이 그와 마주해 단정히 앉자 독룡은 의탁했던 병승에게 가만히 말하였다.
“선사(禪師)께서 오셨으니 나는 오래 있을 수 없소. 너무 많이 괴롭혔으니 이제 놓아주겠소.”
돌림병이나 삿된 마귀에 걸려 괴로워하는 사람은 법순에게 귀순만 하면 다 나았다. 그러나 주술(呪術)을 부리는 것이 아니요, 복의 힘이 이렇게 했던 것이다. 그 신통을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은 이른바 음덕(陰德)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 감응한 영가들이 특히 공경했던 말로 가르칠 경우에는 부화(浮華)한 말을 되도록이면 삼가하고 바른 이치를 나타냈으며 돈독하고 진실함을 마음으로 삼았다. 나무신의 사당을 세우는 것을 보면 그는 곧 그것을 다 태워 버렸다. 승려와 속인을 두루 사랑하였으므로 귀한 이나 천한 이가 다 귀의하였으며, 칭찬과 비방의 두 길에서 마음이 평등한 것이 마치 다른 말로 되받아 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남야(南野)로 가서 황거(黃渠)를 건너려 할 때 그 물이 넘쳐흘러 아무도 감히 건너지 못하고, 또 언덕이 미끄러워 오르면 도로 물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물길을 끊고 마치 육지처럼 걸어갔다. 법순이 언덕에 오르자 물은 다시 넘쳐흘렀다. 그 제자들은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 까닭을 몰랐다. 그가 얻은 신통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재물을 아끼지 않아 누가 주인이랄 것 없이 누구나 사용했으며, 다만 추한 옷을 입을 뿐, 끝내 두 벌을 가지지 않았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알아 소문이 널리 퍼졌다.
황제는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공경하고 예배하였으며, 온 궁중이 모두 귀의하여 계 받기를 청하였다.
정관(貞觀) 14년(640)에 그는 아무 병도 없으면서 문도(門徒)들에게 “내 평생에 행한 법을 후인들이 이어받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친 뒤에 평상시와 같이 가부좌로 앉아, 남쪽 교외의 의선사(義善寺)에서 목숨을 마치니 춘추는 84세였다.
임종 때에 갑자기 두 마리 새가 방에 들어와 몹시 슬피 울었다. 곧 번천(樊川)의 북쪽 언덕에 앉은 시체를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서울과 지방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슬퍼하고 감탄하였으며 사람과 말들도 들에 가득히 늘어서서 슬피 부르짖고 통곡했다. 그 살빛은 변하지 않아 달을 지낼수록 더욱 선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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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나도록 편히 앉아 마른 뼈가 흩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기이한 향기가 시체 있는 곳에서 항상 흘러, 거기 가서 보는 사람들은 다 맡는다. 같이 공부한 친구와 그 문도들은 혹 외침(外侵)이 있을까 하여 그 시체를 감실(龕室)에 간직하였고 그 뒤에는 바깥 도둑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철이 되면 사부대중이 모두 달려가서 가득히 공양을 올린다.[이상 여덟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⑰ 당(唐)나라 연주 추현(兗州鄒縣) 사람 장(張)씨 이름은 모름[忘字]
당(唐)나라 때 연주 추현(兗州鄒縣) 사람의 성은 장(張)씨인데 그 이름은 모른다. 그는 일찍이 현위(縣尉)로 있으면서, 정관(貞觀) 16년(642)에 관리 채용시험에 응시하려고 서울로 갔다. 그 길에 태산(泰山)을 지나가다 사당을 보고 복을 빌려고 했다. 그 사당에서 부군(府君) 및 그 부인과 여러 아들들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 때 장씨는 두루 예배를 마치고 넷째 아들을 보았다. 그 위의와 얼굴은 아름답고 뛰어났다. 동행한 다섯 사람 중에서 장씨 홀로 축원하였다.
“그저 이 넷째 아들과 교류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 벼슬은 해서 무엇하리.”
몇 리를 가자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이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왔다. 그 종자(從者)가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넷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이 말했다.
“아까 형이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셨기에 일부러 뵈러 왔습니다.”
“형이 응시하러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관리가 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또 앞으로 재난이 있을까 두려우니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장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이별하고 떠났다. 백여 리를 갔을 때 장씨와 그 동행은 밤에 도적의 습격을 당해 행장을 모두 빼앗겼다. 그래서 장씨는 축원했다.
“넷째 아들은 왜 와서 도와주지 않는가?”
이윽고 넷째 아들이 수레를 타고 와서, 한참 동안 놀라고 탄식하다가, 곧 부하를 시켜 도적을 쫓아가 잡아 엎치락 뒤치락 끌고 왔다. 넷째 아들이 사람을 시켜 수십 대의 매를 때리니, 그 도적들의 살덩이는 모두 터졌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떠나면서 한 큰 나무를 가리키며 장씨에게 말했다.
“형은 돌아오는 날 여기서 나를 부르십시오.”
장씨는 이 해에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본래 약속한 곳에 이르러 넷째 아들을 크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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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넷째 아들이 와서 장씨를 끌며 말했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가십시오.”
나는 듯한 누각과 비단 대관(臺觀)은 멀리 하늘을 찌르고 성가퀴와 담장은 높고 낮아[參差] 여느 것 같지 않게 웅장하고 화려하며, 시위(侍衛)가 엄준한 것이 마치 왕궁과 같았다. 장씨가 들어서자마자 넷째 아들이 말하였다.
“부군(府君)을 뵈어야 비로소 편히 앉을 수 있습니다.”
곧 장씨를 인도해 10여 겹의 문을 지나 달려 나아갔다. 큰 마루 밑에 이르러 부군을 뵈옵고 예배했다. 그의 위의는 너무도 장대하고 뛰어났으므로 장씨는 떨리고 두려워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판관(判官)의 판사(判事)는 무슨 붉은 글을 쓰는데 글자가 매우 큰 것 같았다. 부군이 시자(侍者)를 시켜 말하였다.
“그대라면 내 아이와 교류하며 잘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쯤 여기 머물면서 즐겁게 놀다가 잘 가라.”
곧 사람을 시켜 인도해 한 별관에 이르렀다. 그곳엔 맛있는 음식을 성대히 차려 산해진미가 모두 구비되어 있고, 갖가지 음악과 노랫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리고 넷째 아들과 한 방에 잤다.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장씨는 뜰을 거닐며 배회하다가, 한 집에서 그의 부인이 대중 앞에서 큰 칼(형틀)을 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장씨는 매우 불쾌히 여기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넷째 아들이 괴이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물으므로 장씨는 다 이야기했다. 넷째 아들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형수님이 여기 오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곧 사법소(司法所)로 직접 갔다. 그런 부류 수십 명은 넷째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뜰 밑으로 달려가 발을 나란히 하고 섰다. 넷째 아들은 손짓으로 한 사법을 불러 앞에 세우고 이 일을 이야기했다. 사법은 대답했다.
“감히 명령을 어기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녹사(錄事)에게 알려야 합니다.”
넷째 아들은 녹사를 불렀다. 녹사는 허락하며 말했다.
“이 책상을 대중들 책상 가운데 두고 방편으로 같이 판결하면 면할 수 있습니다.”
사법은 곧 단안을 내렸다.
“이 여자는 따로 안내하여라. 이 여자는 일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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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베끼고 재(齋)를 지킨 공덕이 있으니 죽음이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곧 석방하여 돌아가게 했다.
장씨가 넷째 아들과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고 떠날 때, 넷째 아들이 당부하였다.
“오직 공덕만 지으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장씨는 본래의 말을 타고 그 처는 넷째 아들에게서 빌린 말에 태워 처와 함께 돌아왔다. 그 처는 비록 혼이지만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한 백보쯤 집 가까이 갔을 때 처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장씨는 크게 황급하여 집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우는 것을 보고 또 처가 이미 죽은 줄을 알았다. 장씨는 아이들을 불러 곧 관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그 처가 갑자기 일어나 앉아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들 생각에 그랬던 것이니 먼저 간 것을 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죽은 지 6,7일이 지나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연주 사람들이 말한 것이다.[이것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⑱ 제전잡명신이기(諸傳雜明神異記)
『술정기(述征記)』에서 말하였다.
“환충(桓沖)은 강주 자사(江州刺史)가 되어 사람을 보내 여산(廬山)을 두루 다니면서 그 영이(靈異)함을 직접 살펴보게 했다. 그는 높은 산에 올랐다. 한 호수가에 뽕나무가 둘러 있고 흰 고니떼가 있으며, 호수 가운데에는 부서진 배와 비늘이 붉은 고기가 있었다. 사자(使者)는 목이 몹시 말라 거기 가서 물을 마시려 했으나, 비늘 붉은 고기가 지느러미를 벌리고 달려들어 사자는 감히 물을 마시지 못했다.”
『신이경(神異經)』에서 말하였다.
“북쪽 변방 밖에 호수가 있는데 사방은 천 리요 잔잔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거기 물고기가 있으니, 길이는 56척이요 형상은 가물치와 같은데 눈이 붉다. 낮에는 호수에 있고 밤에는 사람으로 변하며,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지져도 죽지 않는다. 다만 오매(烏梅) 열네 개로 지지면 곧 익으며, 그것을 먹으면 삿된 병을 고칠 수 있다.”
『임해기(臨海記)』에서 말하였다.
“군(郡)의 동북쪽 25리쯤에 있는 임증일(任曾逸)의 집에 한 돌우물이 있다. 그것은 천연으로 된 것이지, 인공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물 깊이는 4장(丈)인데 항상 물이 솟구쳤다. 이 우물은 홍수가 져도 넘치지 않고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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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름에는 향기와 시원함이 뛰어나고 겨울에는 맛이 달고 따뜻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나무 치는 사람이 개울가에서 그릇을 씻다가 술잔을 떠내려보냈는데, 그 뒤에 그것이 그 우물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경도(地鏡圖)』에서 말하였다.
“보물이 성(城)이나 언덕이나 담 속에 있으면 그런 데서 자라는 나무는 변한다. 그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마르면 이것이 그 징후다. 그 부러지거나 마른 나뭇가지가 향하는 방위에 보물이 있다. 무릇 금은 항상 적사(積蛇)로 변화한다. 그 적사를 보거든 한짝 신을 벗어 그것을 때리거나 혹은 거기에 오줌을 누면 곧 그 금을 얻는다. 대개 묻혀 있는 보물은 그 자리를 잘 모른다. 큰 구리쇠반에 물을 담아 의심스러운 자리에 붓고, 거기에 비추어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면 보물은 그 밑에 있다.”
『지경도(地鏡圖)』에서 말하였다.
“지붕의 기와를 볼 때 거기만 서리가 없으면 그 밑에 보물이 있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서 말하였다.
“화씨(和氏)의 옥도 시골 마을[井里]의 박옥일 분이지만, 훌륭한 공인(工人)이 그것을 다듬으면 나라를 보존하는 보배가 된다.”[공향자(孔鄕子)는 “정리(井里)의 그것이다” 하고, 또 “옥인(玉人)이 다듬으면 천하의 보배가 된다”고 하였다.]
『술이기(述異記)』에서 말하였다.
“남강(南康) 우도현(雩都縣)에서 강을 끼고 서쪽으로 나가면, 우도현의 3리 밖에 몽구(夢口)라는 곳이 있고 거기 석실(石室)과 같은 구멍이 있다. 옛날부터 전하기를, 거기에 신이한 닭[神鷄]이 있다고 한다. 빛깔은 순금과 같고, 그것이 그 구멍에서 나와 날개를 치고 돌아다니며 길게 울면 그 소리는 사방에 사무친다. 누가 보면 곧 구멍으로 날아 들어가므로 그 돌을 금계석(金鷄石)이라 한다.
옛날 어떤 사람이 이 산 옆에서 밭을 갈다가, 이 닭이 나와 노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어떤 사람이 활로 탄알을 쏘았더니, 닭이 멀리서 바라보고 곧 구멍으로 날아 들어갔다. 탄알은 그 구멍 위에 떨어졌다. 탄알 지름은 6척쯤 되며, 그것이 밑으로 드리워 구멍을 덮었으나 그래도 틈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하류(下流)에서 우도현으로 돌아올 때, 이 언덕에 이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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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리 밖에서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온몸에 누런 옷을 입고 두 바구니에 누런 오이를 담아 메고 배에 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밥을 청하므로 사공은 밥을 주었다. 그가 밥을 다 먹었을 때 배는 언덕 밑에 닿았다. 사공은 오이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오이를 주지 않고 반상(盤上)에 침을 뱉고는 바로 언덕으로 올라가 돌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사공은 처음에는 매우 분했으나 그가 돌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그가 신인(神人)임을 알았다. 그때서야 밥그릇을 집어 보고 또 상의 침을 보았더니, 그것은 다 황금이었다.”
『오록(吳錄)』에서 말하였다.
“일남(日南) 북경현(北景縣)에는 화서(火鼠)가 있다. 그 털로 베를 짜고 그것을 불살라 정갈하게 하면 이름을 화완포(火浣布)라 한다.”
『진양춘추(晋陽春秋)』에서 말하였다.
“유사(有司)가 임금님께 아뢰어, 옛날대로 흰 베를 짜려고 했으나 무제(武帝)는 허락하지 않았다.”
『수신기(搜神記)』에서 말하였다.
“곤륜(崑崙)의 터에 불붙는 산이 있다. 이 산 위에는 초목과 금수들이 다 불꽃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거기 화완포(火浣布)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산의 초목의 껍질이 아니요 짐승들의 털이다.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이것을 ‘불 성질이 몹시 뜨거워 무엇을 기르는 기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논(論)을 지어 사당문 밖에 새겨 두었었다. 이 때에 서역(西域)의 사자가 화완포로 만든 가사를 문제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문제는 그 논을 긁어 없앴다.”
『지경도(地鏡圖)』에서 말하였다.
“산 위에 향초가 있고 그 밑에 금이 있다.”
『박물지(博物志)』에서 말하였다.
“임신한 여자는 생강을 먹지 말라. 아이 손가락을 서로 붙게 한다.”
『포박자(抱朴子)』에서 말하였다.
“산의 나무가 말하는 것은 나무의 말이 아니다. 그 정(精)을 운양(雲陽)이라 한다. 밤에 산중에서 보는 불빛은 다 마른 고목(古木)이 만드는 것이니 괴상히 여기지 말라.
한낮에 산중에서 선인(仙人)이라 일컫는 것은 다 늙은 나무다.”
『손작자(孫綽子)』에서 말하였다.
“바다사람이 산사람과 그 방물(方物)을 이야기했다.
바다사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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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해(衡海)의 어떤 고기는 이마가 화산(華山) 꼭대기 같고 한 입에 만경(萬頃)의 파도를 마신다.’
그러자 산사람이 말하였다.
‘등림(鄧林)의 어떤 나무는 그 둘레가 3만 심(尋)이요, 천 리를 곧게 위로 뻗었으며 그 가지는 여러 나라를 덮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동방의 끝에 대인(大人)이 있다. 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면 짧아서 짚을 수 없고, 물고기를 낚아 생선으로 하면 포(脯)를 다 댈 수 없다.’”
또 『현중기(玄中記)』에서 말하였다.
“1백 년 된 나무는 그 즙(汁)이 피와 같고 1천 년 된 나무의 정(精)은 푸른 양이 되며 만년 된 나무의 정(精)은 소가 된다.”
『법원주림』 28권(ABC, K1406 v39, p.538a01-552a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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