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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7권
법원주림 제27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19. 지성편(至誠篇)[여기에 8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구보부(求寶部) 구계부(求戒部)
구인부(求忍部) 구진부(求進部) 구정부(求定部)
구과부(求果部) 제난부(濟難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지극한 정성에 감동이 되면 응하지 않는 신(神)이 없고, 대사(大士)가 마음을 움직이면 달려오지 않는 상대가 없는 것이니, 몸을 가다듬고 뜻을 굳게 정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낱낱의 큰 서원은 모두 인지(忍智)와 서로 응하고, 마음과 마음의 넓음은 모두 아유월치(阿惟越致:不退轉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송죽(松竹)보다 굳은 행을 세우고, 금석(金石)보다 굳은 원을 일으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목숨을 바쳐 그것을 호지(護持)하고 깊은 마음으로 구제해야 할 일이다. 도를 펴서 4은(恩)을 갚고 덕을 길러 3유(有)를 돕는다면 그 공은 3아승기에 가득하고, 그 과(果)는 10지(地)에 두루할 것이다.
(2) 구보부(求寶部)
『대지경(大志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환락(歡樂)이라는 나라에 마하단(摩訶檀)이라는 거사(居士)가 있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전타(旃陀)였다. 그들이 낳은 아들은 얼굴이 단정하여 세상에 짝할 자가 드물었다. 그 아이는 나자마자 곧 말할 줄 알았고 ‘나는 보시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대의(大意)라 하였다. 아이는 나이 17세가 되자 중생을 위해 바다에 들어가 명월주 보배구슬을 구해 그것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처음 바다에 들어가 백은성(白銀城)에 이르자 용왕이 명월주(明月珠)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2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더 나아가 금성(金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4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나아가 수정성(水精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6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더 나아가 유리성(瑠璃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8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용왕은 말하였다.)
‘이 뒤에 도를 얻을 때에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시길 바랍니다. 깨끗한 뜻으로 오늘보다 더 많이 공양하여 언제나 지혜를 얻게 하여 주십시오.’
대의는 구슬을 받아 가지고 떠나,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여러 바다를 항해하였다. 그 때 여러 바다신[海神]의 왕들은 그 때문에 의논했다.
‘우리 바다에 다른 여러 가지 보배는 많지만 이 구슬은 없다.’
그들은 곧 바다신들에게 명령하여 요긴한 곳에서 탈취하라 했다. 바다신은 사람으로 화하여 대의를 만나 물었다.
‘당신은 진기한 보물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잠깐 빌려 볼 수 없습니까?’
대의가 손을 펴 그 네 구슬을 보여 주자 바다신은 그 손을 잡아 흔들어 그 구슬을 물에 떨어뜨렸다. 대의는 생각하였다.
‘용왕은 그것을 내게 주면서, 이 구슬은 보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그것을 얻었는데 지금 이들에게 빼앗겼으니 이것은 본 뜻이 아니다.’
곧 바다신에게 말했다.
‘나는 온갖 괴로움을 겪으며 여러 험한 곳을 지나 그 구슬을 얻었다. 네가 내게서 그것을 빼앗고 돌려 주지 않으니 나는 이 바닷물을 다 퍼내리라.’
바다신은 그 마음을 알고 물었다.
‘당신의 뜻은 매우 높고 기특합니다. 그러나 바다는 깊이가 336만 유순이요, 그 넓이1)는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말리겠습니까? 해는 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큰 바람은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해는 떨어뜨릴 수 있고 바람은 잡을 수 있어도 큰 바닷물은 퍼내어 말릴 수 없습니다.’
대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과거와 미래에 몸을 받아 태어났다가 죽어서 쌓인 해골이 수미산보다 높고, 그 흐른 피가 5하(河)보다 많더라도, 생사의 뿌리를 끊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찌 이 조그만 바닷물을 퍼내지 못하겠는가? 나는 옛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나의 뜻으로 하여금 도를 이루는 데에 용맹스러워 어려움이 없게 하소서≻라고 서원하였다.
그러므로 수미산을 옮기고 큰 바닷물을 바닥내는 일이라도 끝내 내 결심은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곧 일심으로 그릇을 가지고 바닷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 정성스런 마음에 사천왕도 찾아와 대의를 도왔고 바닷물의 3분의 2를 퍼내게 되었다. 그러자 바다의 여러 신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서로 의논하였다.
‘지금 구슬을 돌려 주지 않으면 큰 일이 생기겠다. 물이 마르면 진흙이 나와 우리 궁전을 다 무너뜨릴 것이다.’
바다신들은 이에 온갖 보배를 가져다 대의에게 주었다. 그러나 대의는 받지 않고 ‘다만 내 구슬을 얻고자 한다’ 하고, 끝내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바다신들은 그의 결심을 알고 곧 구슬을 꺼내 돌려주었다. 대의는 구슬을 받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마음대로 크게 보시하였고, 그 뒤로는 그 경계 안에 굶주리고 떠는 궁핍한 자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의 그 대의(大意)는 바로 나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슨 공덕으로 그 네 구슬에 여러 보배가 따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유위불(維衛佛) 때에 대의는 4보(寶)로 부처님을 위해 탑을 세우고 세 존자께 공양하고 7일 동안 재(齋)를 지냈다. 이때 5백 사람이 동시에 절을 세웠는데, 어떤 이는 비단을 달고 등불을 켰으며, 어떤 이는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렸으며, 어떤 이는 비구승에게 공양하고, 어떤 이는 경을 읽고 강설하였다. 그들은 지금 다 부처님을 만나 구제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바다신은 곧 이렇게 생각했다.
‘설사 백년 동안 이 바닷물을 퍼내더라도 마침내 털끝만큼도 줄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진에 감동하여 그 보배를 돌려주리라.’
이때 바다신은 바라문을 위해 다음 게송을 읊었다.
정근하는 방편의 힘과
그 의지는 멈추지 않았나니
그 정진으로 감동을 주어
잃은 구슬을 도로 얻었네.”
(3) 구계부(求戒部)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옛날 살박(薩薄)이라는 사람은 외국에 진기한 보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장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두 나라 사이에는 나찰(羅刹)이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다. 살박은 시장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서문에서 어떤 도인이 빈 평상에 앉아 ‘5계(戒)를 팝니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살박은 가서 물었다.
‘5계란 어떤 것입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형상이 없는 것이니 곧 입으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이것을 마음에 지니면 후생에는 천상에 날 것이요, 현세에서는 나찰 귀신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살박은 그것을 사려고 물었다.
‘값이 얼마입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1천 금(金)입니다.’
곧 거래를 끝내고 그가 말하였다.
‘당신이 외국의 경계에 갔을 때 만일 나찰이 나타나거든 당신은 그저 ≺나는 석가의 5계를 받은 제자다≻라고만 하시오.’
잠깐 사이에 살박은 두 나라 나찰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키가 1장 3척에 머리는 꽃술처럼 누렇고 눈은 빨간 고무래 같으며 온몸은 비늘 껍질이었다. 그리고 서로 입을 벌리면 물고기가 아가미를 치는 것 같고, 뛰어오르면 나는 제비에 닿고 땅을 밟으면 무릎까지 빠지며, 입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렀다. 그런 무리 수천 명이 곧장 살박을 붙잡았다. 살박은 말하였다.
‘나는 석가의 5계를 받은 제자다.’
나찰은 이 말을 듣고도 영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살박은 할 수 없이 두 주먹으로 때렸는데, 주먹은 비늘 껍질 속에 박혀 빼낼 수 없었다. 또 발로 차고 머리로 들이받았으나 빼낼 수가 없어 결국 온몸이 다 비늘 껍질 속에 빠져 오직 등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찰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의 몸과 손과 발
모두 다 묶였다.
그저 마땅히 죽음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날뛴들 무슨 소용 있으랴.
살박의 뜻은 그래도 견고하여 게송으로 나찰에게 대답하였다.
내 몸과 손과 발
한꺼번에 다 묶였으나
마음가짐은 금석 같나니
끝내 나는 죽지 않으리.
나찰은 또 살박에게 말하였다.
나는 귀신의 왕으로서
사람들보다 그 힘이 세어
지금까지 너희들을 잡아먹은 것
그 수를 다 셀 수 없나니
너는 그저 죽음으로 나아가라.
무엇하러 그리 태평스럽게 말하는가.
살박은 다시 성내어 꾸짖으려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는 삼계(三界)를 윤회하면서 아직 남에게 이 몸을 준 일이 없다. 나를 지금 이 나찰에게 주어 이들을 배불리 먹게 하리라.’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이 몸
버리려 한 지 오래였는데
나찰이 이제 그 기회 얻었나니
나는 모두를 보시하리라.
내 목적은 마하승(摩訶乘:大乘)을 구하여
일체지(一切智)를 이룸에 있다.
나찰은 총명하여 살박의 말을 이해하였다. 나찰들은 곧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겨 살박을 풀어주고 꿇어앉아 합장하며 게송으로 사과했다.
당신은 사람을 제도하는 스승
삼계에 희유한 분일세.
그 구함이 마하승에 있거니
오래지 않아 부처 이루리.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귀의하고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옵니다.
나찰들은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살박을 외국으로 보내어 보배를 많이 얻게 하고, 또 전송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살박은 집에 돌아와 크게 공덕을 닦고 마침내 도를 이루었다.”
이처럼 계의 힘은 불가사의함을 알 수 있으니, 모든 행자들에게 이 사람이 뜻을 세워 용감했던 것처럼 계를 굳게 지키도록 권해야 할 것이다.
(4) 구인부(求忍部)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약한 자는 곧 죽고, 독기를 품으면 강한 자도 죽는 힘이 센 독룡(毒龍)이 있었다.
그 때 용은
하루의 계(戒)를 받고 집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 오래 앉아 명상하다가 그만 피곤해 잠이 들었다. 용은 잘 때에는 그 형상이 뱀과 같고 7보(寶)의 여러 가지 색을 띠는 법이다. 사냥꾼은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껍질이다. 이것을 국왕에게 바쳐 배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곧 막대기로 그 머리를 누르고 칼로 그 껍질을 벗기려 했다. 그러자 용은 혼자 생각하였다.
‘내 힘은 국토도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 계를 지키기 때문에 내 몸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리라.’
용은 스스로 참으면서 눈을 감고 보지도 않으며 독기를 막아 내뿜지도 않았다. 이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계를 지키기 위하여, 껍질이 벗겨지면서도 일심으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껍질을 잃게 되자 붉은 살덩이만 땅바닥에 던져졌다.
그 때 해가 너무도 뜨거워 땅에 뒹굴면서 물을 찾아가다가, 달려들어 그 살을 파먹는 작은 벌레떼를 만나게 되었다. 용은 계를 지키기 위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이 몸을 저 모든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도를 위해서다. 지금은 살을 보시하여 저들의 몸을 채워 주고 뒤에는 법을 보시하여 저들의 마음을 이롭게 하리라.’
용은 몸이 마르고 목숨을 마치고는 곧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
축생도 계를 굳게 지켜 죽음에 이르러도 범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일부러 범함을 용납하겠는가?”
또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어떤 검은 뱀이 송아지를 물고는 구멍으로 도로 들어갔다. 어떤 주술사[呪師]가 고양주(羖羊呪)를 외워 뱀을 구멍에서 나오게 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주술사는 곧 송아지 앞에서 불을 피우고 주문을 외워 불덩어리 벌[火蜂]이 되어서는, 뱀구멍으로 들어가 뱀을 태웠다. 뱀은 그제서야 고통을 못 이겨 구멍에서 나왔다. 고양(羖羊)은 뿔로 뱀을 찍어 주술사 앞에 놓았다. 주술사는 뱀에게 말했다.
≺너는 네가 깨문 독을 도로 거두어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불 속에 던지리라.≻
검은 뱀은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 독을 토했으니
끝내 거두어들일 수 없다.
비록 죽음이 닥쳐
목숨이 끝나더라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 독을 거두지 않고 스스로 불 속에 몸을 던졌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검은 뱀은 바로 지금의 저 사리불이다. 사리불은 그 때 그런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독을 거두지 않았거늘, 하물며 지금 다시 버린 그 약을 도로 취하겠는가?’”
(5) 구진부(求進部)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가시국(迦尸國)과 비제혜국(毘提醯國) 사이에 큰 광야가 있었다. 그곳에는 사타로(沙吒盧)라는 사나운 귀신이 있어서, 길을 끊었으므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다.
그 때 사자(師子)라는 어떤 상주(商主)가 5백 명 상인을 데리고 이 길을 지나가려 했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지나가지 못하였다. 상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내 뒤만 따라오라.’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가 귀신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 귀신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이름을 듣지 못했는가?’
귀신은 대답하였다.
‘나는 네 이름을 듣고는 싸우러 왔다.’
상주는 ‘너는 무슨 능력이 있느냐’고 묻고는 곧 활을 잡아 이 귀신을 쏘았다. 5백 발을 쏘았으나 화살은 모두 이 귀신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또 활과 칼, 몽둥이 등 모든 무기도 다 그 뱃속으로 들어갔다. 곧장 달려들어 주먹으로 치면 주먹도 들어가고, 오른손으로 치면 오른손이 붙고 오른 다리로 차면 오른 다리도 붙으며, 왼 다리로 차면 왼 다리도 붙고 또 머리로 받으면 머리도 붙었다. 귀신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는 손과 다리와 또 머리를 썼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 붙었으니
다른 어떤 물건이 붙지 않으리.
상주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지금 내 손발과 또 머리와
일체의 재물과 또 칼과 몽둥이
이 모든 것들이 다 빠져들지만
오직 내 정진만은 네게 붙지 않으리.
만일 이 정진을 쉬지 않으면
너와의 싸움도 결국 끝나지 않으리.
나는 지금 이 정진을 끝까지 쉬지 않고
끝내 너를 겁내지 않으리라.
그 때 귀신은 답하였다.
‘지금 너를 위해 5백 명의 상인들을 모두 놓아 주리라.’”
(6) 구정부(求定部)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왕은 보살이 보리수 밑에서 꼼짝도 않고 단정히 앉아 맹세코 보리를 취하려는 것을 보고는 급히 궁전에서 나와 보살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찰제리의 아들아, 이 자리에서 일어나라. 지금은 탁악(濁惡)한 세상이라 중생들이 억세어서 결코 위없는 보리를 증득할 수 없으니, 우선 전륜왕의 자리를 받아라. 내가 7보로 항상 받드리라.’
보살은 말하였다.
‘너의 말은 어린애를 꾀는 말과 같구나. 해와 달과 별을 떨어뜨릴 수 있고 산과 숲과 대지를 허공에 올릴 수는 있어도, 내가 지금 대각(大覺)을 취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뒤에 마왕은 36구지(俱胝)의 마군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갖가지 무서운 형상을 나타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빛을 발하는 갖가지 무기를 들고 36유선나(踰繕那:유순)를 가득 채웠다. 그들이 동시에 보리수 밑으로 달려가서 보살을 어지럽히려 하였으나 모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보살의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수미산보다 더하였다.”
(7) 구과부(求果部)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불법은 넓고 너그러워 그 제도는 끝이 없으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면 반드시 그 과(果)를 얻는다. 심지어 희소(戱笑)해도 그 복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늙은 비구가 있었다. 그는 이미 늙어
정신은 혼미했으나, 젊은 비구들이 갖가지로 설법할 때 그 4과(果)의 설명을 듣고는 찬탄하는 마음이 생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총명하고 슬기롭다. 그 4과를 내게 주길 원한다.’
젊은 비구들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4과가 있습니다만 맛난 음식을 얻어 먹고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곧 갖가지 맛난 음식을 차리고 젊은 비구들을 청하여 4과를 요구했다. 젊은 비구들은 그 음식을 다 먹고 서로 가리키면서 늙은 비구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대덕(大德)이여, 당신은 이 방 한쪽 구석에 앉으십시오. 우리가 그 과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 말대로 앉았다. 그들은 곧 가죽공으로 그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수다원과(須陁洹果)입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생각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고 곧 초과(初果:수다원과)를 얻었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희롱하여 말하였다.
‘당신에게 수다원과를 주었지만 여전히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다른 구석으로 옮겨 앉으십시오. 다음에는 당신에게 사다함과(斯陁含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초과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증강하여 곧 다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가죽공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당신에게 2과를 드립니다.’
늙은 비구는 더욱 생각을 오로지해 곧 2과를 증득하였다. 그들은 다시 놀리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사다함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생사에 왕래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옮겨 앉으십시오. 우리가 당신에게 아나함과(阿那含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시키는 대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공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당신에게 제3과를 드렸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지극한 마음을 배나 더해 곧 아나함과를 증득하였다.
(젊은 비구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유루(有漏)의 몸을 받아 무상하게 유전(流轉)하므로 생각생각이 고통입니다. 당신은 다시 옮겨 앉으십시오. 다음에는 당신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의 말대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가죽공으로 그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당신에게 제4과를 드립니다.’
늙은 비구는 일심으로 생각하여 곧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는 제4과를 얻고는 매우 기뻐하며 온갖 맛난 음식과 갖가지 향과 꽃을 마련하여 젊은 비구들을 청해 그 은덕을 갚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도품(道品)과 무루(無漏)의 공덕을 논하였는데 젊은 비구들의 말이 막혔다. 그 때 늙은 비구는 비로소 말하였다.
‘나는 이미 아라한과를 깨달았다.’
젊은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지금까지 희롱한 죄를 사과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선(善)을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희롱도 오히려 진실한 과보를 얻거늘 하물며 지극한 마음이겠는가.”
또 『잡보장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도를 구한다면 모름지기 지극한 마음으로 서로 감응하여야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다.
옛날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삼보를 깊이 믿어 항상 승차(僧次)에 따라 두 비구를 집으로 청하여 공양하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때 한 늙은 비구가 차례가 되어 그 집으로 갔다. 그러나 나이 늙고 우둔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때 그 여자는 재식(齋食)이 끝난 뒤에 늙은 비구에게 ‘저를 위해 설법해 주십시오’ 하고는, 혼자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늙은 비구는 자기가 우둔하여 설법하지 못함을 알고는, 그 여자가 잠든 줄 알고 그녀를 버려 두고 절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여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空)이어서 자재하지 못함을 생각했다. 이렇게 깊은 마음으로 관찰한 끝에 곧 초과(初果)를 얻었다. 이 초과를 얻고는
그 늙은 비구를 찾아 그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러나 이 늙은 비구는 자기가 무지하여 그녀를 버리고 도망쳐 온 것을 돌이켜보고는 더욱 부끄러워 다시 피해 숨었다. 그래도 이 여자가 간절히 찾기를 그만두지 않자 부득이 나타났다.
그 때 여자는 ‘상인께서 오셔서 초과를 얻게 되었으므로 재식(齋食)의 공양으로 그 큰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때 이 늙은 비구는 부끄러워 깊이 스스로를 꾸짖음으로써 초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지극해야 하는 것이니, 마음이 지극하면 구하는 바를 반드시 얻는 것이다.”
(8) 제난부(濟難部)
『승가나찰경(僧伽羅刹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보살이 앵무새가 되어 항상 나무에서 살았는데, 바람이 불어 그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쳐 갑자기 불이 일어나더니 그 불은 점점 번져 온 산을 모두 태우게 되었다. 앵무새는 생각했다.
‘어떤 새는 나무에 의지해 몸을 쉬었다고 해서 그 은혜 갚을 마음을 되풀이해 일으켰거늘, 하물며 내가 여기에 오랫동안 살고 있으면서도 이 불을 끄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곧 바다로 나가 두 날개에 바닷물을 적셔 돌아와 그 불 위에 뿌리고, 혹은 입으로 뿌리면서 이리 저리 바삐 날아다녔다. 그 때 어떤 선신(善神)이 그 노고에 감동하여 곧 그를 위해 불을 꺼주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들불이 일어나 숲을 태우자 그 숲에 살던 꿩 한 마리가 부지런히 제 힘으로 날아 물에 들어갔다가 그 물을 숲에 뿌렸다. 꿩은 갔다 왔다 하면서 몹시 피곤했지만 그것을 괴로움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제석천이 와서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하느냐?’
꿩은 대답했다.
‘저는 지금 이 숲을 구하려 합니다. 그것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숲 그늘 속에서 산 지가 오래되었는데 시원하고 쾌적해 저희 무리와 저희 종족들은 다 이곳을 의지해 살았습니다. 저에게 힘이 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겠습니까?’
제석천은 또 물었다.
‘너의 그 정근이 얼
마나 오래 가겠는가?’
꿩은 대답하였다.
‘죽을 때까지 하겠습니다.’
제석천은 물었다.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꿩은 곧 스스로 맹세하였다.
‘제 마음의 지극한 정성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면 이 불이 곧 저절로 꺼지게 하소서.’
이때 정거천(淨居天)은 꿩의 큰 서원을 알고 곧 그를 위해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그 숲은 항상 무성하고 불이 나지 않았다.[그러므로 경전에 “사람에게 선한 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들어준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그 증험이다.]
게송을 읊는다.
지극한 정성으로 얼음과 눈을 안아라.
나이 들면 죽음이 닥쳐오고
흐르는 물 빠름을 크게 한탄하나니
슬프다, 사람은 항상 거기 얽매이네.
한 해가 저물면 모두들 거두어들이고
겨울이 깊어가면 혹독한 굶주림 두렵나니
보시ㆍ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과
지혜의 눈을 지성으로 구하라.
벗이 되어 함께 멀리 나아가니
뛰어난 땅은 마음과 맞네.
상인들이 죽음을 돌아보지 않자
나찰도 그것을 막지 못했고
보배를 구해 큰 바다를 말리자
신(神)이 두려워 명주(明珠) 바쳤네.
부탁하노니, 도를 구하는 자여
뜻을 세워라, 그 과보는 헛되지 않으리라.”
감응연(感應緣)[예나 지금이나 도인과 속인을 물을 것 없이, 지극한 정성만 있으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것이다. 우선 외전(外典)에 있는 세 가지와 내전(內典)에 있는 열한 가지, 즉 내전과 외전을 합해 모두 열네 가지 증험을 간략히 적는다.]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 함현(含玄)을 죽임
초(楚)나라 웅거(熊渠)가 밤길을 가다가 돌을 쏨
초(楚)나라 간장(干將) 막야(莫耶)가 검(劒)을 감춤
송(宋)나라 한빙(韓憑)의 아내를 강왕(康王)이 빼앗음
송(宋)나라 복만수(伏萬壽)가 관음(觀音)을 생각함
송(宋)나라 고매(顧邁)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한휘(韓徽)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팽자교(彭子喬)가 관음을 생각함
조(趙)나라 사문 단복송(單服松)이 돌을 삼킴
당(唐)나라 동웅(董雄)이 관음(觀音)을 생각함
당(唐)나라 사문 도적(道積)이 뜻을 간(諫)함
당(唐)나라 사문 법성(法誠)이 경을 외운 증험
당(唐)나라 비구니 법신(法信)이 가졌던 경의 증험
①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 함현(含玄)을 죽임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力士)인 함현(含玄)을 죽이려 하자 함현이 칼을 든 자를 보고 말했다.
“내 목에는 힘줄이 많아 칼로 치면 반드시 칼이 부러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그러나 칼을 든 자가 그 말에 개의치 않고 몇 번 내려치자 칼이 부러졌다. 그리고 조금 뒤에 보니 함현이 비단 관(冠)과 붉은 옷에,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들고 그를 쏘았다. 칼을 든 자는 “함현, 나를 용서하시오” 하고 외치고는 조금 있다가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원혼지(冤魂志)』에 나온다.]
② 초(楚)나라 웅거(熊渠)가 밤길을 가다가 돌을 쏨
초(楚)나라 웅거(熊渠)는 밤길을 가다가 누워 있는 돌을 보고 엎드린 호랑이라 생각하고는 곧 활을 당겨 쏘자 쇠화살촉이 깊이 박혔다. 그러나 내려가 살펴보니 그것은 돌이었다. 다시 쏘았을 때는 화살만 꺾이고 돌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또 한(漢)나라 때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이 우북평(右北平) 태수(太守)로 있을 때 ‘호랑이를 쏘아 돌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유향(劉向)은 말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쇠나 돌도 뚫리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대개 외쳐도 호응하지 않고 움직여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음 속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도 천하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구한다는 것이다.”
③ 초(楚)나라 간장(干將) 막야(莫耶)가 검을 감춤
초(楚)나라의 간장(干將) 막야(莫耶)는 초왕을 위해 검(劒)을 만들었는데 3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완성하자 왕은 성을 내며 그를 죽이려 했다.
그 검에는 암컷과 수컷이 있었다. 당시 그의 아내는 몸이 무거워 아기를 낳을 무렵이었다. 간장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을 위해 검을 만드는 데 3년이나 걸렸소. 내가 가면 왕은 성을 내며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오. 당신이 아이를 낳아 사내아이거든 그 아이가 컸을 때 그에게
‘문을 나가 남산을 바라보면 돌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검은 그 뒤에 있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나서 간장은 암칼을 가지고 가 왕을 뵈었다. 왕은 크게 화를 내며 (상장이를 시켜) 그 검을 감별하게 했다. (상장이는 말했다.)
“이 검에는 암컷과 수컷이 있는데, 지금 암컷만 가져 오고 수컷은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더욱 화가 나 그를 베어 죽였다.
막야의 아들 이름은 적(赤)이었다. 뒤에 그는 장성해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어머니는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초왕을 위해 검을 만들었는데, 3년이 걸려서야 완성하자 왕은 화를 내며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 네 아버지는 떠날 때 너에게 ‘문을 나가 남산을 바라보면 돌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뒤에 검이 있다’고 일러주라고 내게 부탁했었다.
그러자 아들은 문을 나가 남쪽을 바라보았으나 산은 보이지 않고, 다만 마루 앞의 소나무 기둥 밑과 주춧돌 윗부분만 보였다. 그는 곧 도끼로 그 뒤를 찍고 검을 얻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초왕에게 원수 갚을 생각만 하였다. 초왕은 눈썹 사이가 한 자나 되는 한 아이가 왕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꿈을 꾸었다. 왕은 곧 천금(千金)의 상을 걸고 아이를 찾으려 했다.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곧 도망쳐 산으로 들어가 슬피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를 보고 물었다.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웬 울음이 그리도 비통하냐?”
아들은 대답하였다.
“저는 간장 막야의 아들입니다. 초왕이 제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저는 그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나그네가 말했다.
“나는 왕이 그대 머리에 천금의 상을 걸었다고 들었다. 지금 그대 머리와 검을 가지고 오너라. 네 원수를 갚아 주리라.”
아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고는 곧 스스로 목을 찔러 그 머리와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에게 주었다. 그러고도 아이는 선 채로 쓰러지지 않았다. 나그네가 “그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하자, 그제서야 송장은 쓰러졌다. 나그네가 그 머리를 가지고 초왕을 찾아가자 초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나그네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용사(勇士)의 머리입니다. 끓는 가마솥에 넣어 삶으십시오.”
왕은 그의 말대로 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삶아도 그 머리는 익지 않았다. 도리어 머리는 탕에서 튀어나와 눈을 부릅뜨고 크게 화를 내었다. 나그네는 왕에게 말하였다.
“그 아이의 머리가 삶아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직접 나가 보시면 그것은 반드시 삶아질 것입니다.”
왕은 곧 그곳으로 갔고, 나그네가 왕의 목에 칼을 대자 왕의 목은 탕 안으로 떨어졌다.
나그네가 제 목에도 칼을 대자 그의 목도 탕으로 떨어졌다. 세 머리는 함께 삶아 문드러져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그 탕의 살을 나누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통틀어 3왕묘(王墓)라 하며, 지금 여남북(汝南北)의 의춘현(宜春縣) 경계에 있다.
④ 송(宋)나라 한빙(韓★)의 아내를 강왕(康王)이 빼앗음
송(宋)나라 때의 대부(大夫) 한빙이 아내를 맞았는데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워 강왕(康王)이 그녀를 빼앗았고, 한빙이 왕을 원망하자 왕은 그를 논위성(論爲城)에 가두었다. 그의 아내도 은밀히 한빙에게 글을 보냈다.
“큰 비가 마구 쏟아져 강은 넓고 물은 깊지만 해는 중천에 떴다.”
얼마 뒤 왕이 그 글을 얻게 되어 좌우(左右)에 보였으나 아무도 그 뜻을 해석하지 못했는데, 신하 하(賀)가 그것을 해석해 말하였다.
“‘큰 비가 마구 쏟아진다’는 것은 가을 아침의 생각을 말함이요, ‘강이 넓고 물이 깊다’는 것은 오갈 수 없음을 말함이며, ‘해가 중천에 떴다’는 것은 분명 죽을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는 몰래 그 옷을 해지게 했다. 왕이 그녀를 데리고 대(臺)에 올랐을 때 아내는 결국 대 밑으로 몸을 던졌는데, 좌우에서 그녀를 붙잡았으나 옷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녀는 죽었다. 그리고 띠 속에 유서를 남겼다.
“왕께서는 삶을 이롭다 하지만 첩은 죽음을 이롭다 합니다. 원컨대 시체의 뼈만이라도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오.”
왕은 화를 내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고 마을 사람을 시켜 두 무덤을 서로 바라보게 만들고는 말하였다.
“너희 부부는 서로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만일 두 무덤을 합칠 수 있다면 나도 금하지 않으리라.”
얼마 후 두 그루 가래나무가 두 무덤 끝에서 나더니 열흘 사이에 아름드리로 자랐다. 그 두 나무는 몸을 굽혀 서로 뻗어나가 뿌리는 땅 속에서 얽히고 가지는 위에서 얽혔다. 또 원앙새 암수 한 쌍이 항상 그 나무에 깃들어 밤낮으로 떠나지 않으면서 목을 맞대고 슬피 울었는데,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송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드디어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 부르니, 상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
지금 낙양(洛陽)에는 한빙성(韓★城)이 있고 그 노래도 지금까지 전해진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⑤ 송(宋)나라 복만수(伏萬壽)가 관음(觀音)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복만수(伏萬壽)는 평창(平昌) 사람이다. 그는 원가(元嘉) 19년(442)에 광릉(廣陵)에서 위부행참군(衛府行參軍)으로 있다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4경(更)이 조금 지나 강을 건너기 시작할 무렵에는 온 강의 흐름이 잠잠했는데 중류에 이르자 바람이 화살같이 일었다. 더구나 칠흑같이 어두운 때라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수는 일찍부터 불법을 지극히 받들었으므로, 그저 일심으로 관세음(觀世音)보살께 귀의하며 쉬지 않고 생각했다. 조금 후 배 안의 여러 사람들과함께 북쪽 언덕에 있는 어떤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의 불빛 같았다. 모두들 기뻐하면서 “저것은 분명 구양(歐陽)의 불빛이다” 하고는 배를 돌려 그리로 나아갔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모두들 “어젯밤에 불 켠 일이 없다”고 하였다. 비로소 그것이 신(神)의 힘이었음을 깨닫고 복만수는 정성스럽게 재(齋)를 베풀었다.
⑥ 송(宋)나라 고매(顧邁)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고매(顧邁)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그는 불법을 지극히 받드는 자였는데, 위부행참군(衛府行參軍)으로 있다가 원가(元嘉) 19년(442)에 서울서 광릉(廣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석두성(石頭城)을 출발하여 호수를 거슬러 갈 무렵 북풍이 가로지르며 그 세력을 늦추지 않았다.
사공이 힘써 저어 강으로 들어서자 파도가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고매는 외딴 배에 외로이 가면서 위험이 걱정되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에 『관세음경』을 외우기 시작하여 열 번에 이르자, 바람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파도도 차츰 약해졌다. 중류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향기가 짙게 풍기고 꽃향기가 끊임없이 풍겼다. 고매는 마음 속으로 혼자 기뻐하면서 귀의하고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무사히 건너갔다.
⑦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는 경사(京師) 중조사(衆造寺)의 스님이다. 송나라 의가(義嘉)의 난리 때 그는 아직 속인으로서 유호(劉胡)의 부하로 있었다. 유호는 일찍이 장사 수십 명을 보내 첩자들과 만나 동쪽으로 내려가게 한 적이 있었는데 혜화도 거기 같이 갔었다. 일행이 작저(鵲渚)에 이르렀을 때 서쪽으로 올라오는 대군(臺軍)을 만나 첩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각 늪 속으로 도망쳤다. 혜화는 숨어 내려와 신림(新林) 밖에 이르러,
의복이 남루한 시골 노인을 만났다. 혜화는 곧 자기 옷을 주고 노인 옷으로 바꿔 입고는, 바구니를 들고 짐을 지니 꼭 농부와 같았다.
그 때 여러 유군(游軍)들은 그 흩어진 첩자들을 잡아 들이다가 혜화의 형색을 보고는 의심스러워 물었다. 혜화는 잘못 대답해서 이내 매를 맞고 곧 베여 죽을 처지가 되었다. 혜화는 일행이 흩어져 도망다니면서부터 항상 『관세음경(觀世音經)』을 외웠었는데 베여 죽을 처지가 되자 그 기원은 더욱 간절해졌다. 조금 후에 군사는 칼을 휘둘렀으나 여러 번 넘어지고 또 세 번이나 내려쳤으나 세 번 다 칼이 부러졌다. 그러자 모두 놀라 곧 풀어 주었다. 이에 혜화는 출가하여 드디어 정진의 업을 이루었다.
⑧ 송(宋)나라 한휘(韓徽)가 관음을 생각함
송나라 때 한휘(韓徽)란 자는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나 지강(枝江)에 살았다. 그의 숙부 유종(幼宗)은 송나라 말년에 상주부(湘州府)의 중병(中兵)으로 있었다. 승명(昇明) 원년(477)에 형주(荊州) 자사(刺史) 심유지(沈攸之)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내려왔다. 상주부의 장사(長史) 유패옥(庾佩玉)이 적군을 저지시키고 스스로 지키다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유종이 자신을 의심한다 하여 그와 그의 처자까지 죽였다.
한휘는 형의 아들이기 때문에 옥에 가두고 온몸에 쇠와 나무를 씌우고 칼과 수갑을 단단히 채웠다. 고문을 마치면 한 무리가 모두 죽을 처지가 되었으므로 한휘는 몹시 황급해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저 때만 기다릴 뿐이었다.
한휘는 본래부터 부처를 섬겨 『관세음경』을 많이 외웠었다. 이에 『관세음경』을 밤낮으로 외워 수백 번에 이르자 한낮에 갑자기 쇠사슬이 스스로 울었는데, 마치 돌이나 기왓장이 불 속에서 터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 쇠사슬을 살펴보니 주루륵 흘러내리며 저절로 풀렸다. 한휘는 자기가 그것을 끊었다고 간수가 생각할까 두려워 급히 간수를 불러 사실을 알렸다. 간수는 이상히 여겼으나 원래대로 쇠사슬을 다시 채웠다. 한휘는 여전히 경을 외웠다.
또 하루가 지나자 쇠사슬이 다시 울면서 풀렸다. 사정은 먼저와 같았다. 간수는 이에 패옥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고, 패옥은 쇠사슬을 가져다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감응에 감복하여 곧 한휘를 풀어 주었다. 한휘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그 일에 특히 부지런하다.
⑨ 송(宋)나라 팽자교(彭子喬)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팽자교(彭子喬)는 익양현(益陽縣) 사람이다. 그 군(郡)의 주부(主簿)를 맡고 있으면서 태자(太子) 심문룡(沈文龍)을 섬겼다. 건원(建元) 원년(479)에 그는 죄를 짓고 구속을 당했다.
자교는 젊어서 출가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비록 환속(還俗)은 했으나 여전히 늘 『관세음경』을 외웠다. 이때 문룡은 크게 화를 내며 형틀을 더욱 단단히 죄고 반드시 죽이려 하였다. 자교는 걱정되고 두려웠으나 다른 도리가 없어, 오직 지성으로 『관세음경』만 외웠다. 1백여 번을 외웠을 무렵 피곤하여 낮잠이 들었는데, 그 때 같이 구속된 십여 명도 같이 잠이 들었다. 그 때 상서(湘西)의 현리(縣吏)인 두도영(杜道榮)도 또한 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쌍의 흰 학이 자교의 병풍 위에 내려앉더니 한 마리가 자교 곁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또 아름다운 사람의 형상 같았다. 도영은 일어나 자교를 보았다. 두 형틀은 벗겨져 자교의 다리 밖에 있었는데, 그 형틀의 자국만은 그대로 있었다. 도영이 놀라며 그것을 다 살펴보았을 때, 자교도 깨어 일어나 그 형틀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도영은 물었다.
“자교,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자교는 대답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도영은 조금 전에 본 것을 다 이야기했다. 자교는 그것이 영험임을 알았으나, 모반하려고 형틀을 벗겼다고 간수의 의심을 받을까 염려하여 곧 형틀을 다시 매어 두었다. 그러다가 4, 5일 뒤에 풀려났다.
염(琰)의 족형(族兄) 연(璉)은 자교와 도영과 다 친했는데 그 두 사람의 말이 다 이와 같다고 했다.
⑩ 조(趙)나라 사문 단복송(單服松)이 돌을 삼킴
조(趙)나라 때 사문 단(單), 혹은 선(善)은 자(字)가 도개(道開)이고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별전(別傳)에서는 돈황(燉煌) 사람으로서 본성은 맹(孟)씨라고 하였다. 젊어서 출가하여 바위굴 골짜기에서 평생 살기 위해 먼저 곡식을 끊었다. 처음에는 국수만 3년 동안 먹고 다음에는 30년 동안 송지(松脂)만을 먹고 뒤에는 때때로
작은 돌만을 먹었는데 돌은 그대로 소화되었다. 다시 술과 포(脯)와 온갖 과일을 끊었으나 바람과 추위를 두려워하여 산초와 생강만은 먹었다. 기력은 미약했으나 피부색은 윤기가 나고 걸음은 날으는 것과 같았다. 산신(山神)이 여러 번 시험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선인(仙人)들이 찾아오자 그것도 못마땅히 여겨 늘 마늘을 씹어 물리쳤다. 그리고 단정히 앉아 고요히 생각하면서 밤이고 낮이고 자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 있곤 하였다.
석호(石虎)의 건무(建武) 2년(336)에 서평(西平)에서 맞이해 와서 업하(鄴下)로 갈 때는, 배나 수레도 타지 않고 하루에 7백여 리를 갔다. 남안(南安)을 지나다가 한 동자를 제도해 사미로 만들었는데, 나이는 13, 14세로서 철이 든 아이였다. 업하에 도착해서는 조덕 불도(照德佛圖)에서 살았다. 의복은 남루하여 등과 허벅지가 항상 드러나 있었고, 집안에 높이가 8, 9척 되는 붕각(棚閣)을 지어 위에 거적을 엮어 덮고는 그 안에서 참선했다. 7년 동안 곡식을 끊고 항상 온갖 약을 만들었는데, 약에는 송지(松脂)와 복령(茯苓)의 기운이 있어서 눈병을 잘 고쳤다. 항상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치료하였고, 왕공(王公)과 사람들이 보내 온 물품들이 겹겹이 쌓이자 그것을 받아서는 모두 골고루 주고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았다.
석호 말년에는 일어날 난리를 미리 알고 그 제자들과 함께 남쪽의 허창(許昌)으로 갔다. 승평(升平) 3년(359)에는 건업(建業)으로 왔고, 다시 번우(番禺)로 가서 라부산(羅浮山)에 머물렀다. 그 성긴 숲 그늘에 누워 유연히 스스로 기뻐하다가, 그 해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체를 숲 속에 버리라고 유언을 남겼으므로 제자들이 그 유언대로 했다.
진군(陳郡)의 원언백(袁彦伯)은 흥녕(興寧) 원년(363)에 남해(南海)의 태수(太守)가 되어, 그 아우 영승(穎升)과 함께 이 산을 유람하다가 그 유해에 정성을 드리고 향을 사르어 예배했다.[이상 여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⑪ 당(唐)나라 동웅(董雄)이 관음을 생각함
당(唐)나라 정관(貞觀) 때에 하동(河東)의 동웅(董雄)은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10년을 나물밥만 먹었다. 14년(640)에 이선동(李仙童) 사건에 연루되었고, 왕은 크게 화를 내며 시어 위종(侍御韋琮)을 시켜
매우 심하게 국문하였다. 그 일로 인해 수십 명이 갇혔으니, 대리승(大理丞) 이경현(李敬玄)과 사직(司直) 왕흔(王欣)도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되어 동웅과 한 방에 갇혔다.
동웅은 오로지 「보문품(普門品)」을 하루 3천 번 외웠다. 밤에 앉아 경을 외울 때 갑자기 쇠사슬이 풀려 땅에 떨어지자 동웅은 놀라 왕흔과 경현에게 알렸다. 왕흔과 경현이 함께 보니, 쇠사슬은 완전히 땅에 있고 갈고리의 쇠사슬이 서로 여러 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곧 간수에게 알렸다.
그날 밤 숙직이던 감찰어사(監察御史) 장수일(張守一)은 간수를 시켜 사슬을 풀게 하고 불에 비춰 보았다. 그는 사슬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괴상히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잠궈 종이로 봉하고 거기 글을 써 두고 돌아갔다.
동웅은 평소처럼 경을 외웠고 5경(更)에 다시 사슬이 저절로 풀려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었다. 동웅은 또 왕흔과 경현 등에게 알렸다. 새벽이 되어 경현에게 살펴보게 하니 봉한 것과 글씨는 그대로 있는데 사슬이 저절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경현은 원래 불법을 믿지 않아 그 아내가 경을 읽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왜 오랑캐 귀신에게 홀려 그런 글을 읽느냐?”고 했었다. 그러나 동웅의 이 일을 보게 되자, 곧 그 믿지 않던 허물을 깊이 깨우치고 비로소 부처님이 큰 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왕흔도 8보살의 이름을 3만 번을 외우자 낮에 사슬이 풀려 떨어졌는데, 살펴보니 동웅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은 조정 안팎의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들은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다 풀려 나왔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⑫ 당(唐)나라 사문 도적(道積)이 뜻을 간(諫)함
당(唐)나라 때 포주(蒲州) 보구사(普救寺)의 석도적(釋道積)은 하동(河東) 안읍현(安邑縣)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상리(相里)요 이름은 자재(子才)인데 현문(玄門)에 들어와서는 다시 이름을 도적이라 했다. 그의 선조는 정대부(鄭大夫) 자산(子産)의 후예이다.
옛날에 자산이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나왔는데, 그 주먹을 펴 살펴보니 상리(相里)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뒤 이로 인해 그것이 성이 되었다.
도적의 아버지 선(宣)은 도량이 넓고 뜻이 컸으며 학문을 좋아해 널리 알았으며, 그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상했다.
도적은 일찍이
구분(丘墳)을 익혔고 신기(神氣)는 밝고 굳건했으며, 경론(經論)을 두루 통하고 대소(大小)에 환히 밝아 도속(道俗)의 스승이 되었다. 또 주람(朱藍)을 윤택하게 하고 종지를 엮은 인자한 가르침은 멀고 가까운 사람을 두루 적시었다. 그러나 항상 번뇌를 단속하고 비방과 의심을 매우 조심해 비구니 무리들의 귀의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대중에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여자는 계율의 때[垢]가 되니, 성전(聖典)에서도 항상 부처님께서 여자를 출가시킴으로써 정법(正法)을 손멸(損滅)시켰다고 하였다.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을 더럽히거늘, 하물며 얼굴을 마주 대하는 데 물듦이 없겠는가? 또한 도는 맑고 드러남을 귀히 여기나니 잘못에 참여하지 말며, 세속은 혐의를 멀리함을 중히 여기나니 이는 군자가 받들 바이다. 내 비록 변변치 못하나 그 법도를 따르고자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계를 받고 가르침을 듣고자 했으나 한 평생 계단(戒壇)에 오르지 않았고, 찾아뵙고 도를 물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강직하고 조촐하며 맑고 고답(高踏)하였으니, 하동(河東)의 영특하고 준수한 어떤 사람도 그와 견줄 수가 없었다.
이보다 먼저 사문 보증만(普澄滿)이 처음에 보제사(普濟寺)에서 1백 장(丈)이나 되는 대상(大像)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겨우 만분의 일쯤의 공을 들였을 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자, 그 고을의 노인들이 도적에게 이 일을 계승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 대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7보를 모아 높이 세우고 10년 동안 조각과 장엄을 마치니, 도속(道俗)들이 모두 기뻐하고 경하했다. 도적은 처음 그 청을 받던 날 저녁에 자다가, 벼랑 옆에 두 마리 사자가 나타나더니 그 대상 곁에서 잇따라 명주(明珠)를 쉬지 않고 토해내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짐승의 왕인 사자는 자재(自在)한 것이니 이것은 법의 흐름이 막힘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요, 보배 구슬이 스스로 솟아난 것은 재물의 보시가 무궁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비밀한 운수가 가만히 열렸으니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곧 공장(工匠)에게 명령하여 꿈에 본 것을 미륵의 대상 앞에 그리게 하였는데, 그것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절은 포판(蒲阪)의 남쪽에 있는데 높고 시원하며 화려하고 넓다. 동쪽으로는 고을과 마을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강과 산을 바라본다. (미륵) 대상은 3층으로 되었고 바위의 월랑이 사면에 둘러쌌다. 위의 방(坊)과 밑의 원(院)이 빛나면서 마주 보며, 동산의 맷돌과 밭의 채소가
사방에 둘러 있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 것은 다 도적의 공이요, 공(空)을 휘둘러 유(有)를 세운 것도 다 도적의 힘이다.
그러나 그는 해어진 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면서,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생명을 소중히 여겨, 널리 구제하고 친절히 돌보았다. 물러나서는 조용히 한적한 곳으로 돌아가 그가 한 일을 뽐내지 않고 곧 깊숙이 숨어 살았다. 본래 높은 뜻을 품고 사람 세상과 관계를 끊었지만 시키지 않아도 대중은 스스로 엄숙하고, 나가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따랐다. 즉 복야(僕射) 배현적(裵玄寂)과 총거(寵居) 상재(上宰)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흠모하여 향과 옷을 자주 선사했고, 자사(刺史) 두초용(杜楚容)은 그 분의 진중함을 알고 자주 찾아가 법을 구했으니, 그 감동하고 순종함이 다 이와 같았다.
과거 수(隋)나라의 계옹폐(季擁閉)와 하동(河東)의 통수(通守) 요군소(堯君素)가 황폐한 성(城)을 지킬 때, 그 치우친 군사들의 횡포에 사람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 때 그들은 사문들과 의논해 성(城)으로 올라가 굳게 지키려 했다. 그러나 감히 간(諫)하는 자는 죽였으므로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걱정만 하고 항거하는 이가 없었다. 도적은 그 울분이 안에서 폭발하여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여러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때에는 성쇠(成衰)가 있으나 법에는 융체(隆替)가 없다. 하늘이 멸망시키지 못하니 그 문헌이 여기에 있다. 또 사문이란 세상 밖의 나그네로서 그 자취는 세상에서 뛰어났거니, 어떻게 창을 잡고 갑옷을 입고 모욕을 방어하는 군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드디어 사문 도손(道愻)과 신소(神素) 등을 이끌고 계단을 지나 성난 얼굴로 간(諫)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으로써 협박할 수 없다고 빈도(貧道)는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 보기를 삶과 같이 여기며 다만 죽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죽어서 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성(城)의 존망(存亡)은 공(公)의 계략에 달렸고, 세상의 비태(否泰)는 공의 운에 달렸습니다. 어찌 서너 사람이 헛되이 겁낸다 하여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는 4호(皓)를 공경하여 천하가 태평하였고, 위(魏)나라는 간목(干木)을 중히 여겨 온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지금 저희를 구속해 군역에 종사하게 하여 천상(天常)을 배반함으로써 영기(靈祇)에 맞고자 하시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 받아들여질까 두려울 뿐입니다. 감히 충정을 아뢰는 것이오니
원컨대 깊이 생각하시어 헛되이 버리지 마십시오. 하루 아침에 스스로 망한다면 이 뒤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빈도 등이 다만 성인의 진실한 말씀에 의지하여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독송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 가만히 백성을 이롭게 하며 신과 귀신이 보호하고 돕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머리를 위함이겠습니까? 머리를 주는 것은 오히려 본래의 소원입니다. 꼭 남은 생(生)을 핍박해 군사로 충당하시겠다면 저는 살아도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며 죽어도 무엇을 위해 죽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적의 이 호소하는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섬뜩하였다. 요군소(堯君素)는 그렇게 진중한 간언은 처음 듣는데다가 도적의 말이 기운이 넘치는 것을 보고 그저 눈만 크게 뜨고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말하였다.
“기이하도다.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어쩌면 저렇게 기상이 씩씩하고 웅장한가.”
그리하여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풀어주어 본사로 돌려보냈다. 뒤에 그는 스스로 굴복하고 도적을 찾아가 사과하고 참회했다.
요군소(堯君素)는 법도 없이 사람을 마구 죽임으로써 그 독한 마음을 풀고 더구나 또 마음대로 남을 능욕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비록 무사했으나 재앙이 그 징조가 되어 결국은 그 성(城) 사람 설종(薛宗)에게 피살되었다.
도적은 본래 그 성질이 억세고 사나워 한 번 먹은 마음은 돌이키지를 않았고, 어쩌다 성이 나면 사람을 물고기나 고깃덩어리쯤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출가한 뒤로는 본래 성질을 스스로 꾸짖고 본래의 감정을 꺾고 억눌러 차츰 부드럽고 참음이 더해 갔다. 나이 60세가 되어서는 이 행이 더욱 굳어졌으니, ‘습관이 배어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정관(貞觀) 10년(636) 9월 17일에 본사(本寺)에서 죽으니, 춘추는 69세였다. 도적은 그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장차 죽을 것을 안다.”
그리고 문인(門人)들에게 말하였다.
“내 나이 이제 75세이니 금년에 죽을 것이다.”
그 문도가 말했다.
“스님께서는 지금 69세이십니다. 왜 빨리 가신다 하십니까?”
도적은 다시 말하였다.
“생사의 법이 그런 것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내 나이 곧 70세가 되는데, 자사(刺史)가 내 상을 보고 6세를 보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목숨은 조석에 있다. 부디 너희들은 더욱 힘쓰면서 내 행을 보라.”
또 말하였다.
“너희들은 ‘세상은 실로 취약하여 견고함이 없다’고 한 경전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죽은 지 사흘 동안 종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죽은 뒤에도 얼굴은 예전과 같았다. 모두들 비통해 하면서 사모하고 애석해 함이 끝이 없었다.
⑬ 당(唐)나라 사문 법성(法誠)이 경을 외운 증험
당(唐)나라 때 종남산(終南山) 오진사(悟眞寺)의 석법성(釋法誠)은 속성이 번(樊)씨이고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藍田)의 왕효사(王孝寺)에 있으면서 사문 승화(僧和)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승화도 그 고을 사람들로부터 성인처럼 받들어져 추앙받던 분이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승화를 해치려고 밤에 그 방에 갔다가, 문 안에 사나운 불길이 일어 휘장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고 곧 참회했다. 승화는 성품이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몰래 양뼈를 씻은 물을 주어 마시게 했다. 승화는 그런 줄을 전연 모르고 마시다가 곧 구역질을 하면서 토해 버렸으니, 그 은밀한 감응과 남모르는 알음알이가 이러하였다.
법성(法誠)은 불경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법화경』 외우는 것을 일상의 법도로 삼았다.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지성껏 봉행할 때는 심신을 깨끗이 하고 조석으로 공경하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보현보살이 대교(大敎)를 사경하라고 권하는 꿈을 꾸었다. 법성은 “이것은 대승(大乘)이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지혜인 반야의 큰 지혜이다” 하고 곧 정행(淨行)의 길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많은 보시를 주고 장공(匠工)을 시켜 팔부반야(八部般若)를 쓰게 하고는 향대(香臺)와 보축(寶軸)의 장엄을 성취했다.
또 그 절 남쪽 횡령(橫嶺)에 화엄당(華嚴堂)을 지었는데, 막힌 산 고요한 골짜기에 벌려 선 집채마다 기와를 덮었다. 앞으로는 겹겹이 있는 산을 마주하고 오른쪽으로는 비스듬한 골짜기에 다달았으며, 구름과 안개를 토하고 마시며 밑으로는 천둥을 굽어보는 것이 실로 기이한 경관이었다. 또 그 정성스런 뜻을 다해 경을 베껴 써서는 받들어 지녔다.
홍문학사(弘文學士) 장효정(張孝靜)은 바로 장찬(張瓚)의 아버지로, 그 때 사람들은 그를 은구(銀鉤)라 불렀는데 그는 드물게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에 그를 산으로 청해 계를 받고 조촐하게 재계(齋戒)하며 몸과 입을 깨끗이 씻게 했다. 그는 입에 향수를 머금고 몸에는 새옷을 입고 사경하였다. 그런데 효정이 오랫동안 경을 베끼면서 매 장마다 다섯 자씩을 채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법성은 갑절이나 보시를 주며 정성스럽게 잘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효정은 그 돈이 탐나 온 힘을 다해 사경하였다.
한 부(部)가 끝나고 나면 법성은 늘 향을 피워 공양하였고 그 책상 앞에 두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사이를 온 마음을 다해 직접 보며 빠진 곳이 없는지 살폈다. 따라서 온 정성을 쏟는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여 때로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새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와 배회하면서 춤을 추었고 경상(經床)으로 내려 앉았다 다시 향로로 올라갔다 하였다. 그 새는 발소리를 낮추고 가만히 바라보면 저절로 친해져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날아갔다.
다음 해에 일을 마치고 경하할 때 그 새는 다시 날아와 먼저와 같이 따르며 구슬프고 처량하게 울었다.
정관(貞觀) 초년에 다시 천불(千佛)을 그릴 때, 그 새가 또 날아와 장인(匠人)의 등에 앉았다. 재를 올리며 공양하고 경하할 때는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이상하게도 그 새가 날아오지 않았다. 법성은 산봉우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새가 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정성을 드리지 않은 까닭이다. 온갖 더러운 행을 꺼리지 않고 보시가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그 징험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마치자 그 새는 날아와서 빙빙 돌면서 지저귀다가, 향수에 들어가 날개를 퍼덕이며 목욕하고, 목욕한 뒤에는 곧 날아갔다. 이렇게 여러 번 상서를 보인 것을 되풀이해 다 말하기 어렵다.
법성이 본래 글씨를 잘 쓰는 것은 그 고을에서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산의 바위와 험한 길에 경전의 게송과 묘한 말들을 손수 베껴 모두 외우게 한 것도 다 법성의 글씨였다. 또 『법화경』을 한데서 손수 베끼다가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면서 그것을 거두어 치워 놓기를 잊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개울이 넘쳤는데, 곧 돌아와 달려가 보았더니 책상만 마른 그대로 있었고 다른 것은 다 물에 떠내려갔었다. 또 일찍이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를 흔들어 거기 달린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것이 밑의 시내에 떨어지기 전에, 어느새 높은 언덕에 올랐으나 털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참으로 경의 힘임을 알았다.
또 청니방(靑泥坊) 곁에 오래된 불감(佛龕)이 있었는데 이는 주(周)씨가 깊이 감추어 둔 것으로서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 법성은 밤에 그곳에 큰 불상이 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 가서 장을 열고 꼭 꿈에서 본 불상을 얻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모두 벗겨지고 허물어져 다시 수리하였다. 도속(道俗)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니 이것은 다 부처가 호위한 공이요 정성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정관(貞觀) 14년(640) 여름 말에 갑자기 병세를 느껴 곧 세상을 떠날 줄 스스로 알고 도솔천에 나기를 원하면서 물을 청해 목욕을 마쳤다. 또 가마를 만들게 하고는 곁에서 스스로 검사해 보고 호화로움은 허락하지 않았다. 동짓달 말일에 환한 현상이 나타나자 느닷없이 “오고 싶거든 그저 들어오너라. 음악을 울릴 여가는 없다” 하고, 시자(侍者)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모든 행은 무상하여 생멸하며 머물지 않나니 9품(品)에 왕생하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과연 진실이구나. 지금 어떤 동자가 맞이하러 와서 오랫동안 문 밖에서 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난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부처님의 바른 계율이 있으니 부디 헐지 말라. 뒤에 후회하게 되리라.”
이 말을 마치자 입에서 광명을 내어 온 집안을 두루 비추었고, 또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 단정히 앉아 엄연히 생각하는 듯이 보일 뿐, 그 정신이 이미 떠난 것 같지 않았다. 그 때의 나이는 78세였다.
법성은 경을 외우는 업을 한 하안거에 『법화경』을 5백 번 독송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다른 날도 읽고 외우기를 겸행했는데 그래도 두 번은 행했다. 혹 손님이 있어서 꼭 이야기할 일이 있어도 경 외우기를 다 마치기 전에는 남과 이야기하지 않았다. 10년의 공을 대강 세더라도 만여 번은 될 것이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⑭ 당(唐)나라 비구니 법신(法信)이 가졌던 경의 증험
당나라 무덕(武德) 때 하동(河東)에 법신(法信)이라는 수행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법화경』을 외웠다. 그녀는 글씨 잘 쓰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몇 배의 보수를 주고는 특히 깨끗한 방을 만들고 거기서 이 경을 베끼게 했다. 그는 한 번 일어나면 한 번 목욕하고 향을 피워 옷에 쐬었다. 그리고 경을 베끼는 그 방에는 벽을 뚫어 밖에 통하게 하고 거기 대통을 박았다. 그리고 경을 베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숨을 내쉬고자 하면 가볍게 대통을 물고 벽 밖으로 숨을 토하게 했다. 그리하여 7권의 경을 베끼는 데 8년을 걸려 끝내고는 공양하고 존중하며 그 공경함을 극진하게 했다.
용문사(龍門寺)의 스님 법단(法端)은 항상 대중을 모아 놓고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는 이 비구니의 경책이 정묘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 청하였다.
그러나 비구니는 굳이 사절하고 주지 않았다. 법단이 못내 꾸짖으므로 비구니는 부득이 부쳐 보내었다. 법단 등이 책을 펴 읽으려 하자 누런 종이만 보일 뿐 글자는 전혀 없었다. 다시 다른 권을 펴 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법단 등은 부끄럽고 두려워 곧 비구니에게로 돌려보냈다. 비구니는 슬피 울면서 그것을 받아 향수로 경함을 씻었다. 그리고 목욕하고는 정수리에 이고 부처님을 돌며 도를 행하면서 이레 동안 잠깐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펴 보았더니 문자는 전과 같았다. 비로소 경을 베낄 때 더욱 정결을 가한 것임을 알았다. 근래에 그것이 영험이 없는 것은 다만 정성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19. 지성편(至誠篇)[여기에 8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구보부(求寶部) 구계부(求戒部)
구인부(求忍部) 구진부(求進部) 구정부(求定部)
구과부(求果部) 제난부(濟難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지극한 정성에 감동이 되면 응하지 않는 신(神)이 없고, 대사(大士)가 마음을 움직이면 달려오지 않는 상대가 없는 것이니, 몸을 가다듬고 뜻을 굳게 정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낱낱의 큰 서원은 모두 인지(忍智)와 서로 응하고, 마음과 마음의 넓음은 모두 아유월치(阿惟越致:不退轉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송죽(松竹)보다 굳은 행을 세우고, 금석(金石)보다 굳은 원을 일으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목숨을 바쳐 그것을 호지(護持)하고 깊은 마음으로 구제해야 할 일이다. 도를 펴서 4은(恩)을 갚고 덕을 길러 3유(有)를 돕는다면 그 공은 3아승기에 가득하고, 그 과(果)는 10지(地)에 두루할 것이다.
(2) 구보부(求寶部)
『대지경(大志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환락(歡樂)이라는 나라에 마하단(摩訶檀)이라는 거사(居士)가 있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전타(旃陀)였다. 그들이 낳은 아들은 얼굴이 단정하여 세상에 짝할 자가 드물었다. 그 아이는 나자마자 곧 말할 줄 알았고 ‘나는 보시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대의(大意)라 하였다. 아이는 나이 17세가 되자 중생을 위해 바다에 들어가 명월주 보배구슬을 구해 그것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처음 바다에 들어가 백은성(白銀城)에 이르자 용왕이 명월주(明月珠)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2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더 나아가 금성(金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4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나아가 수정성(水精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6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다시 더 나아가 유리성(瑠璃城)에 이르자 그곳의 용왕도 그에게 명월주를 주었는데, 이 구슬은 80리 안의 보배를 다 소유했다.
(용왕은 말하였다.)
‘이 뒤에 도를 얻을 때에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시길 바랍니다. 깨끗한 뜻으로 오늘보다 더 많이 공양하여 언제나 지혜를 얻게 하여 주십시오.’
대의는 구슬을 받아 가지고 떠나,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여러 바다를 항해하였다. 그 때 여러 바다신[海神]의 왕들은 그 때문에 의논했다.
‘우리 바다에 다른 여러 가지 보배는 많지만 이 구슬은 없다.’
그들은 곧 바다신들에게 명령하여 요긴한 곳에서 탈취하라 했다. 바다신은 사람으로 화하여 대의를 만나 물었다.
‘당신은 진기한 보물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잠깐 빌려 볼 수 없습니까?’
대의가 손을 펴 그 네 구슬을 보여 주자 바다신은 그 손을 잡아 흔들어 그 구슬을 물에 떨어뜨렸다. 대의는 생각하였다.
‘용왕은 그것을 내게 주면서, 이 구슬은 보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그것을 얻었는데 지금 이들에게 빼앗겼으니 이것은 본 뜻이 아니다.’
곧 바다신에게 말했다.
‘나는 온갖 괴로움을 겪으며 여러 험한 곳을 지나 그 구슬을 얻었다. 네가 내게서 그것을 빼앗고 돌려 주지 않으니 나는 이 바닷물을 다 퍼내리라.’
바다신은 그 마음을 알고 물었다.
‘당신의 뜻은 매우 높고 기특합니다. 그러나 바다는 깊이가 336만 유순이요, 그 넓이1)는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말리겠습니까? 해는 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큰 바람은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해는 떨어뜨릴 수 있고 바람은 잡을 수 있어도 큰 바닷물은 퍼내어 말릴 수 없습니다.’
대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과거와 미래에 몸을 받아 태어났다가 죽어서 쌓인 해골이 수미산보다 높고, 그 흐른 피가 5하(河)보다 많더라도, 생사의 뿌리를 끊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찌 이 조그만 바닷물을 퍼내지 못하겠는가? 나는 옛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나의 뜻으로 하여금 도를 이루는 데에 용맹스러워 어려움이 없게 하소서≻라고 서원하였다.
그러므로 수미산을 옮기고 큰 바닷물을 바닥내는 일이라도 끝내 내 결심은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곧 일심으로 그릇을 가지고 바닷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 정성스런 마음에 사천왕도 찾아와 대의를 도왔고 바닷물의 3분의 2를 퍼내게 되었다. 그러자 바다의 여러 신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서로 의논하였다.
‘지금 구슬을 돌려 주지 않으면 큰 일이 생기겠다. 물이 마르면 진흙이 나와 우리 궁전을 다 무너뜨릴 것이다.’
바다신들은 이에 온갖 보배를 가져다 대의에게 주었다. 그러나 대의는 받지 않고 ‘다만 내 구슬을 얻고자 한다’ 하고, 끝내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바다신들은 그의 결심을 알고 곧 구슬을 꺼내 돌려주었다. 대의는 구슬을 받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마음대로 크게 보시하였고, 그 뒤로는 그 경계 안에 굶주리고 떠는 궁핍한 자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의 그 대의(大意)는 바로 나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슨 공덕으로 그 네 구슬에 여러 보배가 따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유위불(維衛佛) 때에 대의는 4보(寶)로 부처님을 위해 탑을 세우고 세 존자께 공양하고 7일 동안 재(齋)를 지냈다. 이때 5백 사람이 동시에 절을 세웠는데, 어떤 이는 비단을 달고 등불을 켰으며, 어떤 이는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렸으며, 어떤 이는 비구승에게 공양하고, 어떤 이는 경을 읽고 강설하였다. 그들은 지금 다 부처님을 만나 구제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바다신은 곧 이렇게 생각했다.
‘설사 백년 동안 이 바닷물을 퍼내더라도 마침내 털끝만큼도 줄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진에 감동하여 그 보배를 돌려주리라.’
이때 바다신은 바라문을 위해 다음 게송을 읊었다.
정근하는 방편의 힘과
그 의지는 멈추지 않았나니
그 정진으로 감동을 주어
잃은 구슬을 도로 얻었네.”
(3) 구계부(求戒部)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옛날 살박(薩薄)이라는 사람은 외국에 진기한 보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장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두 나라 사이에는 나찰(羅刹)이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다. 살박은 시장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서문에서 어떤 도인이 빈 평상에 앉아 ‘5계(戒)를 팝니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살박은 가서 물었다.
‘5계란 어떤 것입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형상이 없는 것이니 곧 입으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이것을 마음에 지니면 후생에는 천상에 날 것이요, 현세에서는 나찰 귀신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살박은 그것을 사려고 물었다.
‘값이 얼마입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1천 금(金)입니다.’
곧 거래를 끝내고 그가 말하였다.
‘당신이 외국의 경계에 갔을 때 만일 나찰이 나타나거든 당신은 그저 ≺나는 석가의 5계를 받은 제자다≻라고만 하시오.’
잠깐 사이에 살박은 두 나라 나찰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키가 1장 3척에 머리는 꽃술처럼 누렇고 눈은 빨간 고무래 같으며 온몸은 비늘 껍질이었다. 그리고 서로 입을 벌리면 물고기가 아가미를 치는 것 같고, 뛰어오르면 나는 제비에 닿고 땅을 밟으면 무릎까지 빠지며, 입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렀다. 그런 무리 수천 명이 곧장 살박을 붙잡았다. 살박은 말하였다.
‘나는 석가의 5계를 받은 제자다.’
나찰은 이 말을 듣고도 영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살박은 할 수 없이 두 주먹으로 때렸는데, 주먹은 비늘 껍질 속에 박혀 빼낼 수 없었다. 또 발로 차고 머리로 들이받았으나 빼낼 수가 없어 결국 온몸이 다 비늘 껍질 속에 빠져 오직 등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찰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의 몸과 손과 발
모두 다 묶였다.
그저 마땅히 죽음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날뛴들 무슨 소용 있으랴.
살박의 뜻은 그래도 견고하여 게송으로 나찰에게 대답하였다.
내 몸과 손과 발
한꺼번에 다 묶였으나
마음가짐은 금석 같나니
끝내 나는 죽지 않으리.
나찰은 또 살박에게 말하였다.
나는 귀신의 왕으로서
사람들보다 그 힘이 세어
지금까지 너희들을 잡아먹은 것
그 수를 다 셀 수 없나니
너는 그저 죽음으로 나아가라.
무엇하러 그리 태평스럽게 말하는가.
살박은 다시 성내어 꾸짖으려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는 삼계(三界)를 윤회하면서 아직 남에게 이 몸을 준 일이 없다. 나를 지금 이 나찰에게 주어 이들을 배불리 먹게 하리라.’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이 몸
버리려 한 지 오래였는데
나찰이 이제 그 기회 얻었나니
나는 모두를 보시하리라.
내 목적은 마하승(摩訶乘:大乘)을 구하여
일체지(一切智)를 이룸에 있다.
나찰은 총명하여 살박의 말을 이해하였다. 나찰들은 곧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겨 살박을 풀어주고 꿇어앉아 합장하며 게송으로 사과했다.
당신은 사람을 제도하는 스승
삼계에 희유한 분일세.
그 구함이 마하승에 있거니
오래지 않아 부처 이루리.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귀의하고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옵니다.
나찰들은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살박을 외국으로 보내어 보배를 많이 얻게 하고, 또 전송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살박은 집에 돌아와 크게 공덕을 닦고 마침내 도를 이루었다.”
이처럼 계의 힘은 불가사의함을 알 수 있으니, 모든 행자들에게 이 사람이 뜻을 세워 용감했던 것처럼 계를 굳게 지키도록 권해야 할 것이다.
(4) 구인부(求忍部)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약한 자는 곧 죽고, 독기를 품으면 강한 자도 죽는 힘이 센 독룡(毒龍)이 있었다.
그 때 용은
하루의 계(戒)를 받고 집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 오래 앉아 명상하다가 그만 피곤해 잠이 들었다. 용은 잘 때에는 그 형상이 뱀과 같고 7보(寶)의 여러 가지 색을 띠는 법이다. 사냥꾼은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껍질이다. 이것을 국왕에게 바쳐 배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곧 막대기로 그 머리를 누르고 칼로 그 껍질을 벗기려 했다. 그러자 용은 혼자 생각하였다.
‘내 힘은 국토도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 계를 지키기 때문에 내 몸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리라.’
용은 스스로 참으면서 눈을 감고 보지도 않으며 독기를 막아 내뿜지도 않았다. 이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계를 지키기 위하여, 껍질이 벗겨지면서도 일심으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껍질을 잃게 되자 붉은 살덩이만 땅바닥에 던져졌다.
그 때 해가 너무도 뜨거워 땅에 뒹굴면서 물을 찾아가다가, 달려들어 그 살을 파먹는 작은 벌레떼를 만나게 되었다. 용은 계를 지키기 위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이 몸을 저 모든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도를 위해서다. 지금은 살을 보시하여 저들의 몸을 채워 주고 뒤에는 법을 보시하여 저들의 마음을 이롭게 하리라.’
용은 몸이 마르고 목숨을 마치고는 곧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
축생도 계를 굳게 지켜 죽음에 이르러도 범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일부러 범함을 용납하겠는가?”
또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어떤 검은 뱀이 송아지를 물고는 구멍으로 도로 들어갔다. 어떤 주술사[呪師]가 고양주(羖羊呪)를 외워 뱀을 구멍에서 나오게 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주술사는 곧 송아지 앞에서 불을 피우고 주문을 외워 불덩어리 벌[火蜂]이 되어서는, 뱀구멍으로 들어가 뱀을 태웠다. 뱀은 그제서야 고통을 못 이겨 구멍에서 나왔다. 고양(羖羊)은 뿔로 뱀을 찍어 주술사 앞에 놓았다. 주술사는 뱀에게 말했다.
≺너는 네가 깨문 독을 도로 거두어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불 속에 던지리라.≻
검은 뱀은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 독을 토했으니
끝내 거두어들일 수 없다.
비록 죽음이 닥쳐
목숨이 끝나더라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 독을 거두지 않고 스스로 불 속에 몸을 던졌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검은 뱀은 바로 지금의 저 사리불이다. 사리불은 그 때 그런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독을 거두지 않았거늘, 하물며 지금 다시 버린 그 약을 도로 취하겠는가?’”
(5) 구진부(求進部)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가시국(迦尸國)과 비제혜국(毘提醯國) 사이에 큰 광야가 있었다. 그곳에는 사타로(沙吒盧)라는 사나운 귀신이 있어서, 길을 끊었으므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다.
그 때 사자(師子)라는 어떤 상주(商主)가 5백 명 상인을 데리고 이 길을 지나가려 했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지나가지 못하였다. 상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내 뒤만 따라오라.’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가 귀신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 귀신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이름을 듣지 못했는가?’
귀신은 대답하였다.
‘나는 네 이름을 듣고는 싸우러 왔다.’
상주는 ‘너는 무슨 능력이 있느냐’고 묻고는 곧 활을 잡아 이 귀신을 쏘았다. 5백 발을 쏘았으나 화살은 모두 이 귀신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또 활과 칼, 몽둥이 등 모든 무기도 다 그 뱃속으로 들어갔다. 곧장 달려들어 주먹으로 치면 주먹도 들어가고, 오른손으로 치면 오른손이 붙고 오른 다리로 차면 오른 다리도 붙으며, 왼 다리로 차면 왼 다리도 붙고 또 머리로 받으면 머리도 붙었다. 귀신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는 손과 다리와 또 머리를 썼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 붙었으니
다른 어떤 물건이 붙지 않으리.
상주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지금 내 손발과 또 머리와
일체의 재물과 또 칼과 몽둥이
이 모든 것들이 다 빠져들지만
오직 내 정진만은 네게 붙지 않으리.
만일 이 정진을 쉬지 않으면
너와의 싸움도 결국 끝나지 않으리.
나는 지금 이 정진을 끝까지 쉬지 않고
끝내 너를 겁내지 않으리라.
그 때 귀신은 답하였다.
‘지금 너를 위해 5백 명의 상인들을 모두 놓아 주리라.’”
(6) 구정부(求定部)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왕은 보살이 보리수 밑에서 꼼짝도 않고 단정히 앉아 맹세코 보리를 취하려는 것을 보고는 급히 궁전에서 나와 보살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찰제리의 아들아, 이 자리에서 일어나라. 지금은 탁악(濁惡)한 세상이라 중생들이 억세어서 결코 위없는 보리를 증득할 수 없으니, 우선 전륜왕의 자리를 받아라. 내가 7보로 항상 받드리라.’
보살은 말하였다.
‘너의 말은 어린애를 꾀는 말과 같구나. 해와 달과 별을 떨어뜨릴 수 있고 산과 숲과 대지를 허공에 올릴 수는 있어도, 내가 지금 대각(大覺)을 취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뒤에 마왕은 36구지(俱胝)의 마군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갖가지 무서운 형상을 나타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빛을 발하는 갖가지 무기를 들고 36유선나(踰繕那:유순)를 가득 채웠다. 그들이 동시에 보리수 밑으로 달려가서 보살을 어지럽히려 하였으나 모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보살의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수미산보다 더하였다.”
(7) 구과부(求果部)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불법은 넓고 너그러워 그 제도는 끝이 없으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면 반드시 그 과(果)를 얻는다. 심지어 희소(戱笑)해도 그 복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늙은 비구가 있었다. 그는 이미 늙어
정신은 혼미했으나, 젊은 비구들이 갖가지로 설법할 때 그 4과(果)의 설명을 듣고는 찬탄하는 마음이 생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총명하고 슬기롭다. 그 4과를 내게 주길 원한다.’
젊은 비구들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4과가 있습니다만 맛난 음식을 얻어 먹고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곧 갖가지 맛난 음식을 차리고 젊은 비구들을 청하여 4과를 요구했다. 젊은 비구들은 그 음식을 다 먹고 서로 가리키면서 늙은 비구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대덕(大德)이여, 당신은 이 방 한쪽 구석에 앉으십시오. 우리가 그 과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 말대로 앉았다. 그들은 곧 가죽공으로 그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수다원과(須陁洹果)입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생각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고 곧 초과(初果:수다원과)를 얻었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희롱하여 말하였다.
‘당신에게 수다원과를 주었지만 여전히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다른 구석으로 옮겨 앉으십시오. 다음에는 당신에게 사다함과(斯陁含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초과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증강하여 곧 다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가죽공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당신에게 2과를 드립니다.’
늙은 비구는 더욱 생각을 오로지해 곧 2과를 증득하였다. 그들은 다시 놀리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사다함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생사에 왕래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옮겨 앉으십시오. 우리가 당신에게 아나함과(阿那含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시키는 대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공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당신에게 제3과를 드렸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지극한 마음을 배나 더해 곧 아나함과를 증득하였다.
(젊은 비구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유루(有漏)의 몸을 받아 무상하게 유전(流轉)하므로 생각생각이 고통입니다. 당신은 다시 옮겨 앉으십시오. 다음에는 당신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의 말대로 옮겨 앉았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가죽공으로 그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당신에게 제4과를 드립니다.’
늙은 비구는 일심으로 생각하여 곧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는 제4과를 얻고는 매우 기뻐하며 온갖 맛난 음식과 갖가지 향과 꽃을 마련하여 젊은 비구들을 청해 그 은덕을 갚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도품(道品)과 무루(無漏)의 공덕을 논하였는데 젊은 비구들의 말이 막혔다. 그 때 늙은 비구는 비로소 말하였다.
‘나는 이미 아라한과를 깨달았다.’
젊은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지금까지 희롱한 죄를 사과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선(善)을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희롱도 오히려 진실한 과보를 얻거늘 하물며 지극한 마음이겠는가.”
또 『잡보장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도를 구한다면 모름지기 지극한 마음으로 서로 감응하여야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다.
옛날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삼보를 깊이 믿어 항상 승차(僧次)에 따라 두 비구를 집으로 청하여 공양하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때 한 늙은 비구가 차례가 되어 그 집으로 갔다. 그러나 나이 늙고 우둔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때 그 여자는 재식(齋食)이 끝난 뒤에 늙은 비구에게 ‘저를 위해 설법해 주십시오’ 하고는, 혼자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늙은 비구는 자기가 우둔하여 설법하지 못함을 알고는, 그 여자가 잠든 줄 알고 그녀를 버려 두고 절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여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空)이어서 자재하지 못함을 생각했다. 이렇게 깊은 마음으로 관찰한 끝에 곧 초과(初果)를 얻었다. 이 초과를 얻고는
그 늙은 비구를 찾아 그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러나 이 늙은 비구는 자기가 무지하여 그녀를 버리고 도망쳐 온 것을 돌이켜보고는 더욱 부끄러워 다시 피해 숨었다. 그래도 이 여자가 간절히 찾기를 그만두지 않자 부득이 나타났다.
그 때 여자는 ‘상인께서 오셔서 초과를 얻게 되었으므로 재식(齋食)의 공양으로 그 큰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때 이 늙은 비구는 부끄러워 깊이 스스로를 꾸짖음으로써 초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지극해야 하는 것이니, 마음이 지극하면 구하는 바를 반드시 얻는 것이다.”
(8) 제난부(濟難部)
『승가나찰경(僧伽羅刹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보살이 앵무새가 되어 항상 나무에서 살았는데, 바람이 불어 그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쳐 갑자기 불이 일어나더니 그 불은 점점 번져 온 산을 모두 태우게 되었다. 앵무새는 생각했다.
‘어떤 새는 나무에 의지해 몸을 쉬었다고 해서 그 은혜 갚을 마음을 되풀이해 일으켰거늘, 하물며 내가 여기에 오랫동안 살고 있으면서도 이 불을 끄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곧 바다로 나가 두 날개에 바닷물을 적셔 돌아와 그 불 위에 뿌리고, 혹은 입으로 뿌리면서 이리 저리 바삐 날아다녔다. 그 때 어떤 선신(善神)이 그 노고에 감동하여 곧 그를 위해 불을 꺼주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들불이 일어나 숲을 태우자 그 숲에 살던 꿩 한 마리가 부지런히 제 힘으로 날아 물에 들어갔다가 그 물을 숲에 뿌렸다. 꿩은 갔다 왔다 하면서 몹시 피곤했지만 그것을 괴로움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제석천이 와서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하느냐?’
꿩은 대답했다.
‘저는 지금 이 숲을 구하려 합니다. 그것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숲 그늘 속에서 산 지가 오래되었는데 시원하고 쾌적해 저희 무리와 저희 종족들은 다 이곳을 의지해 살았습니다. 저에게 힘이 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겠습니까?’
제석천은 또 물었다.
‘너의 그 정근이 얼
마나 오래 가겠는가?’
꿩은 대답하였다.
‘죽을 때까지 하겠습니다.’
제석천은 물었다.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꿩은 곧 스스로 맹세하였다.
‘제 마음의 지극한 정성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면 이 불이 곧 저절로 꺼지게 하소서.’
이때 정거천(淨居天)은 꿩의 큰 서원을 알고 곧 그를 위해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그 숲은 항상 무성하고 불이 나지 않았다.[그러므로 경전에 “사람에게 선한 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들어준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그 증험이다.]
게송을 읊는다.
지극한 정성으로 얼음과 눈을 안아라.
나이 들면 죽음이 닥쳐오고
흐르는 물 빠름을 크게 한탄하나니
슬프다, 사람은 항상 거기 얽매이네.
한 해가 저물면 모두들 거두어들이고
겨울이 깊어가면 혹독한 굶주림 두렵나니
보시ㆍ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과
지혜의 눈을 지성으로 구하라.
벗이 되어 함께 멀리 나아가니
뛰어난 땅은 마음과 맞네.
상인들이 죽음을 돌아보지 않자
나찰도 그것을 막지 못했고
보배를 구해 큰 바다를 말리자
신(神)이 두려워 명주(明珠) 바쳤네.
부탁하노니, 도를 구하는 자여
뜻을 세워라, 그 과보는 헛되지 않으리라.”
감응연(感應緣)[예나 지금이나 도인과 속인을 물을 것 없이, 지극한 정성만 있으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것이다. 우선 외전(外典)에 있는 세 가지와 내전(內典)에 있는 열한 가지, 즉 내전과 외전을 합해 모두 열네 가지 증험을 간략히 적는다.]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 함현(含玄)을 죽임
초(楚)나라 웅거(熊渠)가 밤길을 가다가 돌을 쏨
초(楚)나라 간장(干將) 막야(莫耶)가 검(劒)을 감춤
송(宋)나라 한빙(韓憑)의 아내를 강왕(康王)이 빼앗음
송(宋)나라 복만수(伏萬壽)가 관음(觀音)을 생각함
송(宋)나라 고매(顧邁)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한휘(韓徽)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팽자교(彭子喬)가 관음을 생각함
조(趙)나라 사문 단복송(單服松)이 돌을 삼킴
당(唐)나라 동웅(董雄)이 관음(觀音)을 생각함
당(唐)나라 사문 도적(道積)이 뜻을 간(諫)함
당(唐)나라 사문 법성(法誠)이 경을 외운 증험
당(唐)나라 비구니 법신(法信)이 가졌던 경의 증험
①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 함현(含玄)을 죽임
진(晋)나라 명제(明帝)가 역사(力士)인 함현(含玄)을 죽이려 하자 함현이 칼을 든 자를 보고 말했다.
“내 목에는 힘줄이 많아 칼로 치면 반드시 칼이 부러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그러나 칼을 든 자가 그 말에 개의치 않고 몇 번 내려치자 칼이 부러졌다. 그리고 조금 뒤에 보니 함현이 비단 관(冠)과 붉은 옷에,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들고 그를 쏘았다. 칼을 든 자는 “함현, 나를 용서하시오” 하고 외치고는 조금 있다가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원혼지(冤魂志)』에 나온다.]
② 초(楚)나라 웅거(熊渠)가 밤길을 가다가 돌을 쏨
초(楚)나라 웅거(熊渠)는 밤길을 가다가 누워 있는 돌을 보고 엎드린 호랑이라 생각하고는 곧 활을 당겨 쏘자 쇠화살촉이 깊이 박혔다. 그러나 내려가 살펴보니 그것은 돌이었다. 다시 쏘았을 때는 화살만 꺾이고 돌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또 한(漢)나라 때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이 우북평(右北平) 태수(太守)로 있을 때 ‘호랑이를 쏘아 돌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유향(劉向)은 말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쇠나 돌도 뚫리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대개 외쳐도 호응하지 않고 움직여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음 속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도 천하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구한다는 것이다.”
③ 초(楚)나라 간장(干將) 막야(莫耶)가 검을 감춤
초(楚)나라의 간장(干將) 막야(莫耶)는 초왕을 위해 검(劒)을 만들었는데 3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완성하자 왕은 성을 내며 그를 죽이려 했다.
그 검에는 암컷과 수컷이 있었다. 당시 그의 아내는 몸이 무거워 아기를 낳을 무렵이었다. 간장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을 위해 검을 만드는 데 3년이나 걸렸소. 내가 가면 왕은 성을 내며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오. 당신이 아이를 낳아 사내아이거든 그 아이가 컸을 때 그에게
‘문을 나가 남산을 바라보면 돌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검은 그 뒤에 있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나서 간장은 암칼을 가지고 가 왕을 뵈었다. 왕은 크게 화를 내며 (상장이를 시켜) 그 검을 감별하게 했다. (상장이는 말했다.)
“이 검에는 암컷과 수컷이 있는데, 지금 암컷만 가져 오고 수컷은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더욱 화가 나 그를 베어 죽였다.
막야의 아들 이름은 적(赤)이었다. 뒤에 그는 장성해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어머니는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초왕을 위해 검을 만들었는데, 3년이 걸려서야 완성하자 왕은 화를 내며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 네 아버지는 떠날 때 너에게 ‘문을 나가 남산을 바라보면 돌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뒤에 검이 있다’고 일러주라고 내게 부탁했었다.
그러자 아들은 문을 나가 남쪽을 바라보았으나 산은 보이지 않고, 다만 마루 앞의 소나무 기둥 밑과 주춧돌 윗부분만 보였다. 그는 곧 도끼로 그 뒤를 찍고 검을 얻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초왕에게 원수 갚을 생각만 하였다. 초왕은 눈썹 사이가 한 자나 되는 한 아이가 왕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꿈을 꾸었다. 왕은 곧 천금(千金)의 상을 걸고 아이를 찾으려 했다.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곧 도망쳐 산으로 들어가 슬피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를 보고 물었다.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웬 울음이 그리도 비통하냐?”
아들은 대답하였다.
“저는 간장 막야의 아들입니다. 초왕이 제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저는 그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나그네가 말했다.
“나는 왕이 그대 머리에 천금의 상을 걸었다고 들었다. 지금 그대 머리와 검을 가지고 오너라. 네 원수를 갚아 주리라.”
아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고는 곧 스스로 목을 찔러 그 머리와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에게 주었다. 그러고도 아이는 선 채로 쓰러지지 않았다. 나그네가 “그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하자, 그제서야 송장은 쓰러졌다. 나그네가 그 머리를 가지고 초왕을 찾아가자 초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나그네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용사(勇士)의 머리입니다. 끓는 가마솥에 넣어 삶으십시오.”
왕은 그의 말대로 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삶아도 그 머리는 익지 않았다. 도리어 머리는 탕에서 튀어나와 눈을 부릅뜨고 크게 화를 내었다. 나그네는 왕에게 말하였다.
“그 아이의 머리가 삶아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직접 나가 보시면 그것은 반드시 삶아질 것입니다.”
왕은 곧 그곳으로 갔고, 나그네가 왕의 목에 칼을 대자 왕의 목은 탕 안으로 떨어졌다.
나그네가 제 목에도 칼을 대자 그의 목도 탕으로 떨어졌다. 세 머리는 함께 삶아 문드러져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그 탕의 살을 나누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통틀어 3왕묘(王墓)라 하며, 지금 여남북(汝南北)의 의춘현(宜春縣) 경계에 있다.
④ 송(宋)나라 한빙(韓★)의 아내를 강왕(康王)이 빼앗음
송(宋)나라 때의 대부(大夫) 한빙이 아내를 맞았는데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워 강왕(康王)이 그녀를 빼앗았고, 한빙이 왕을 원망하자 왕은 그를 논위성(論爲城)에 가두었다. 그의 아내도 은밀히 한빙에게 글을 보냈다.
“큰 비가 마구 쏟아져 강은 넓고 물은 깊지만 해는 중천에 떴다.”
얼마 뒤 왕이 그 글을 얻게 되어 좌우(左右)에 보였으나 아무도 그 뜻을 해석하지 못했는데, 신하 하(賀)가 그것을 해석해 말하였다.
“‘큰 비가 마구 쏟아진다’는 것은 가을 아침의 생각을 말함이요, ‘강이 넓고 물이 깊다’는 것은 오갈 수 없음을 말함이며, ‘해가 중천에 떴다’는 것은 분명 죽을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는 몰래 그 옷을 해지게 했다. 왕이 그녀를 데리고 대(臺)에 올랐을 때 아내는 결국 대 밑으로 몸을 던졌는데, 좌우에서 그녀를 붙잡았으나 옷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녀는 죽었다. 그리고 띠 속에 유서를 남겼다.
“왕께서는 삶을 이롭다 하지만 첩은 죽음을 이롭다 합니다. 원컨대 시체의 뼈만이라도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오.”
왕은 화를 내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고 마을 사람을 시켜 두 무덤을 서로 바라보게 만들고는 말하였다.
“너희 부부는 서로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만일 두 무덤을 합칠 수 있다면 나도 금하지 않으리라.”
얼마 후 두 그루 가래나무가 두 무덤 끝에서 나더니 열흘 사이에 아름드리로 자랐다. 그 두 나무는 몸을 굽혀 서로 뻗어나가 뿌리는 땅 속에서 얽히고 가지는 위에서 얽혔다. 또 원앙새 암수 한 쌍이 항상 그 나무에 깃들어 밤낮으로 떠나지 않으면서 목을 맞대고 슬피 울었는데,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송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드디어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 부르니, 상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
지금 낙양(洛陽)에는 한빙성(韓★城)이 있고 그 노래도 지금까지 전해진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⑤ 송(宋)나라 복만수(伏萬壽)가 관음(觀音)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복만수(伏萬壽)는 평창(平昌) 사람이다. 그는 원가(元嘉) 19년(442)에 광릉(廣陵)에서 위부행참군(衛府行參軍)으로 있다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4경(更)이 조금 지나 강을 건너기 시작할 무렵에는 온 강의 흐름이 잠잠했는데 중류에 이르자 바람이 화살같이 일었다. 더구나 칠흑같이 어두운 때라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수는 일찍부터 불법을 지극히 받들었으므로, 그저 일심으로 관세음(觀世音)보살께 귀의하며 쉬지 않고 생각했다. 조금 후 배 안의 여러 사람들과함께 북쪽 언덕에 있는 어떤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의 불빛 같았다. 모두들 기뻐하면서 “저것은 분명 구양(歐陽)의 불빛이다” 하고는 배를 돌려 그리로 나아갔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모두들 “어젯밤에 불 켠 일이 없다”고 하였다. 비로소 그것이 신(神)의 힘이었음을 깨닫고 복만수는 정성스럽게 재(齋)를 베풀었다.
⑥ 송(宋)나라 고매(顧邁)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고매(顧邁)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그는 불법을 지극히 받드는 자였는데, 위부행참군(衛府行參軍)으로 있다가 원가(元嘉) 19년(442)에 서울서 광릉(廣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석두성(石頭城)을 출발하여 호수를 거슬러 갈 무렵 북풍이 가로지르며 그 세력을 늦추지 않았다.
사공이 힘써 저어 강으로 들어서자 파도가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고매는 외딴 배에 외로이 가면서 위험이 걱정되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에 『관세음경』을 외우기 시작하여 열 번에 이르자, 바람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파도도 차츰 약해졌다. 중류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향기가 짙게 풍기고 꽃향기가 끊임없이 풍겼다. 고매는 마음 속으로 혼자 기뻐하면서 귀의하고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무사히 건너갔다.
⑦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사문 혜화(慧和)는 경사(京師) 중조사(衆造寺)의 스님이다. 송나라 의가(義嘉)의 난리 때 그는 아직 속인으로서 유호(劉胡)의 부하로 있었다. 유호는 일찍이 장사 수십 명을 보내 첩자들과 만나 동쪽으로 내려가게 한 적이 있었는데 혜화도 거기 같이 갔었다. 일행이 작저(鵲渚)에 이르렀을 때 서쪽으로 올라오는 대군(臺軍)을 만나 첩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각 늪 속으로 도망쳤다. 혜화는 숨어 내려와 신림(新林) 밖에 이르러,
의복이 남루한 시골 노인을 만났다. 혜화는 곧 자기 옷을 주고 노인 옷으로 바꿔 입고는, 바구니를 들고 짐을 지니 꼭 농부와 같았다.
그 때 여러 유군(游軍)들은 그 흩어진 첩자들을 잡아 들이다가 혜화의 형색을 보고는 의심스러워 물었다. 혜화는 잘못 대답해서 이내 매를 맞고 곧 베여 죽을 처지가 되었다. 혜화는 일행이 흩어져 도망다니면서부터 항상 『관세음경(觀世音經)』을 외웠었는데 베여 죽을 처지가 되자 그 기원은 더욱 간절해졌다. 조금 후에 군사는 칼을 휘둘렀으나 여러 번 넘어지고 또 세 번이나 내려쳤으나 세 번 다 칼이 부러졌다. 그러자 모두 놀라 곧 풀어 주었다. 이에 혜화는 출가하여 드디어 정진의 업을 이루었다.
⑧ 송(宋)나라 한휘(韓徽)가 관음을 생각함
송나라 때 한휘(韓徽)란 자는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나 지강(枝江)에 살았다. 그의 숙부 유종(幼宗)은 송나라 말년에 상주부(湘州府)의 중병(中兵)으로 있었다. 승명(昇明) 원년(477)에 형주(荊州) 자사(刺史) 심유지(沈攸之)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내려왔다. 상주부의 장사(長史) 유패옥(庾佩玉)이 적군을 저지시키고 스스로 지키다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유종이 자신을 의심한다 하여 그와 그의 처자까지 죽였다.
한휘는 형의 아들이기 때문에 옥에 가두고 온몸에 쇠와 나무를 씌우고 칼과 수갑을 단단히 채웠다. 고문을 마치면 한 무리가 모두 죽을 처지가 되었으므로 한휘는 몹시 황급해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저 때만 기다릴 뿐이었다.
한휘는 본래부터 부처를 섬겨 『관세음경』을 많이 외웠었다. 이에 『관세음경』을 밤낮으로 외워 수백 번에 이르자 한낮에 갑자기 쇠사슬이 스스로 울었는데, 마치 돌이나 기왓장이 불 속에서 터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 쇠사슬을 살펴보니 주루륵 흘러내리며 저절로 풀렸다. 한휘는 자기가 그것을 끊었다고 간수가 생각할까 두려워 급히 간수를 불러 사실을 알렸다. 간수는 이상히 여겼으나 원래대로 쇠사슬을 다시 채웠다. 한휘는 여전히 경을 외웠다.
또 하루가 지나자 쇠사슬이 다시 울면서 풀렸다. 사정은 먼저와 같았다. 간수는 이에 패옥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고, 패옥은 쇠사슬을 가져다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감응에 감복하여 곧 한휘를 풀어 주었다. 한휘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그 일에 특히 부지런하다.
⑨ 송(宋)나라 팽자교(彭子喬)가 관음을 생각함
송(宋)나라 때 팽자교(彭子喬)는 익양현(益陽縣) 사람이다. 그 군(郡)의 주부(主簿)를 맡고 있으면서 태자(太子) 심문룡(沈文龍)을 섬겼다. 건원(建元) 원년(479)에 그는 죄를 짓고 구속을 당했다.
자교는 젊어서 출가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비록 환속(還俗)은 했으나 여전히 늘 『관세음경』을 외웠다. 이때 문룡은 크게 화를 내며 형틀을 더욱 단단히 죄고 반드시 죽이려 하였다. 자교는 걱정되고 두려웠으나 다른 도리가 없어, 오직 지성으로 『관세음경』만 외웠다. 1백여 번을 외웠을 무렵 피곤하여 낮잠이 들었는데, 그 때 같이 구속된 십여 명도 같이 잠이 들었다. 그 때 상서(湘西)의 현리(縣吏)인 두도영(杜道榮)도 또한 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쌍의 흰 학이 자교의 병풍 위에 내려앉더니 한 마리가 자교 곁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또 아름다운 사람의 형상 같았다. 도영은 일어나 자교를 보았다. 두 형틀은 벗겨져 자교의 다리 밖에 있었는데, 그 형틀의 자국만은 그대로 있었다. 도영이 놀라며 그것을 다 살펴보았을 때, 자교도 깨어 일어나 그 형틀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도영은 물었다.
“자교,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자교는 대답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도영은 조금 전에 본 것을 다 이야기했다. 자교는 그것이 영험임을 알았으나, 모반하려고 형틀을 벗겼다고 간수의 의심을 받을까 염려하여 곧 형틀을 다시 매어 두었다. 그러다가 4, 5일 뒤에 풀려났다.
염(琰)의 족형(族兄) 연(璉)은 자교와 도영과 다 친했는데 그 두 사람의 말이 다 이와 같다고 했다.
⑩ 조(趙)나라 사문 단복송(單服松)이 돌을 삼킴
조(趙)나라 때 사문 단(單), 혹은 선(善)은 자(字)가 도개(道開)이고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별전(別傳)에서는 돈황(燉煌) 사람으로서 본성은 맹(孟)씨라고 하였다. 젊어서 출가하여 바위굴 골짜기에서 평생 살기 위해 먼저 곡식을 끊었다. 처음에는 국수만 3년 동안 먹고 다음에는 30년 동안 송지(松脂)만을 먹고 뒤에는 때때로
작은 돌만을 먹었는데 돌은 그대로 소화되었다. 다시 술과 포(脯)와 온갖 과일을 끊었으나 바람과 추위를 두려워하여 산초와 생강만은 먹었다. 기력은 미약했으나 피부색은 윤기가 나고 걸음은 날으는 것과 같았다. 산신(山神)이 여러 번 시험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선인(仙人)들이 찾아오자 그것도 못마땅히 여겨 늘 마늘을 씹어 물리쳤다. 그리고 단정히 앉아 고요히 생각하면서 밤이고 낮이고 자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 있곤 하였다.
석호(石虎)의 건무(建武) 2년(336)에 서평(西平)에서 맞이해 와서 업하(鄴下)로 갈 때는, 배나 수레도 타지 않고 하루에 7백여 리를 갔다. 남안(南安)을 지나다가 한 동자를 제도해 사미로 만들었는데, 나이는 13, 14세로서 철이 든 아이였다. 업하에 도착해서는 조덕 불도(照德佛圖)에서 살았다. 의복은 남루하여 등과 허벅지가 항상 드러나 있었고, 집안에 높이가 8, 9척 되는 붕각(棚閣)을 지어 위에 거적을 엮어 덮고는 그 안에서 참선했다. 7년 동안 곡식을 끊고 항상 온갖 약을 만들었는데, 약에는 송지(松脂)와 복령(茯苓)의 기운이 있어서 눈병을 잘 고쳤다. 항상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치료하였고, 왕공(王公)과 사람들이 보내 온 물품들이 겹겹이 쌓이자 그것을 받아서는 모두 골고루 주고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았다.
석호 말년에는 일어날 난리를 미리 알고 그 제자들과 함께 남쪽의 허창(許昌)으로 갔다. 승평(升平) 3년(359)에는 건업(建業)으로 왔고, 다시 번우(番禺)로 가서 라부산(羅浮山)에 머물렀다. 그 성긴 숲 그늘에 누워 유연히 스스로 기뻐하다가, 그 해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체를 숲 속에 버리라고 유언을 남겼으므로 제자들이 그 유언대로 했다.
진군(陳郡)의 원언백(袁彦伯)은 흥녕(興寧) 원년(363)에 남해(南海)의 태수(太守)가 되어, 그 아우 영승(穎升)과 함께 이 산을 유람하다가 그 유해에 정성을 드리고 향을 사르어 예배했다.[이상 여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⑪ 당(唐)나라 동웅(董雄)이 관음을 생각함
당(唐)나라 정관(貞觀) 때에 하동(河東)의 동웅(董雄)은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10년을 나물밥만 먹었다. 14년(640)에 이선동(李仙童) 사건에 연루되었고, 왕은 크게 화를 내며 시어 위종(侍御韋琮)을 시켜
매우 심하게 국문하였다. 그 일로 인해 수십 명이 갇혔으니, 대리승(大理丞) 이경현(李敬玄)과 사직(司直) 왕흔(王欣)도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되어 동웅과 한 방에 갇혔다.
동웅은 오로지 「보문품(普門品)」을 하루 3천 번 외웠다. 밤에 앉아 경을 외울 때 갑자기 쇠사슬이 풀려 땅에 떨어지자 동웅은 놀라 왕흔과 경현에게 알렸다. 왕흔과 경현이 함께 보니, 쇠사슬은 완전히 땅에 있고 갈고리의 쇠사슬이 서로 여러 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곧 간수에게 알렸다.
그날 밤 숙직이던 감찰어사(監察御史) 장수일(張守一)은 간수를 시켜 사슬을 풀게 하고 불에 비춰 보았다. 그는 사슬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괴상히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잠궈 종이로 봉하고 거기 글을 써 두고 돌아갔다.
동웅은 평소처럼 경을 외웠고 5경(更)에 다시 사슬이 저절로 풀려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었다. 동웅은 또 왕흔과 경현 등에게 알렸다. 새벽이 되어 경현에게 살펴보게 하니 봉한 것과 글씨는 그대로 있는데 사슬이 저절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경현은 원래 불법을 믿지 않아 그 아내가 경을 읽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왜 오랑캐 귀신에게 홀려 그런 글을 읽느냐?”고 했었다. 그러나 동웅의 이 일을 보게 되자, 곧 그 믿지 않던 허물을 깊이 깨우치고 비로소 부처님이 큰 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왕흔도 8보살의 이름을 3만 번을 외우자 낮에 사슬이 풀려 떨어졌는데, 살펴보니 동웅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은 조정 안팎의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들은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다 풀려 나왔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⑫ 당(唐)나라 사문 도적(道積)이 뜻을 간(諫)함
당(唐)나라 때 포주(蒲州) 보구사(普救寺)의 석도적(釋道積)은 하동(河東) 안읍현(安邑縣)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상리(相里)요 이름은 자재(子才)인데 현문(玄門)에 들어와서는 다시 이름을 도적이라 했다. 그의 선조는 정대부(鄭大夫) 자산(子産)의 후예이다.
옛날에 자산이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나왔는데, 그 주먹을 펴 살펴보니 상리(相里)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뒤 이로 인해 그것이 성이 되었다.
도적의 아버지 선(宣)은 도량이 넓고 뜻이 컸으며 학문을 좋아해 널리 알았으며, 그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상했다.
도적은 일찍이
구분(丘墳)을 익혔고 신기(神氣)는 밝고 굳건했으며, 경론(經論)을 두루 통하고 대소(大小)에 환히 밝아 도속(道俗)의 스승이 되었다. 또 주람(朱藍)을 윤택하게 하고 종지를 엮은 인자한 가르침은 멀고 가까운 사람을 두루 적시었다. 그러나 항상 번뇌를 단속하고 비방과 의심을 매우 조심해 비구니 무리들의 귀의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대중에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여자는 계율의 때[垢]가 되니, 성전(聖典)에서도 항상 부처님께서 여자를 출가시킴으로써 정법(正法)을 손멸(損滅)시켰다고 하였다.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을 더럽히거늘, 하물며 얼굴을 마주 대하는 데 물듦이 없겠는가? 또한 도는 맑고 드러남을 귀히 여기나니 잘못에 참여하지 말며, 세속은 혐의를 멀리함을 중히 여기나니 이는 군자가 받들 바이다. 내 비록 변변치 못하나 그 법도를 따르고자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계를 받고 가르침을 듣고자 했으나 한 평생 계단(戒壇)에 오르지 않았고, 찾아뵙고 도를 물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강직하고 조촐하며 맑고 고답(高踏)하였으니, 하동(河東)의 영특하고 준수한 어떤 사람도 그와 견줄 수가 없었다.
이보다 먼저 사문 보증만(普澄滿)이 처음에 보제사(普濟寺)에서 1백 장(丈)이나 되는 대상(大像)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겨우 만분의 일쯤의 공을 들였을 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자, 그 고을의 노인들이 도적에게 이 일을 계승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 대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7보를 모아 높이 세우고 10년 동안 조각과 장엄을 마치니, 도속(道俗)들이 모두 기뻐하고 경하했다. 도적은 처음 그 청을 받던 날 저녁에 자다가, 벼랑 옆에 두 마리 사자가 나타나더니 그 대상 곁에서 잇따라 명주(明珠)를 쉬지 않고 토해내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짐승의 왕인 사자는 자재(自在)한 것이니 이것은 법의 흐름이 막힘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요, 보배 구슬이 스스로 솟아난 것은 재물의 보시가 무궁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비밀한 운수가 가만히 열렸으니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곧 공장(工匠)에게 명령하여 꿈에 본 것을 미륵의 대상 앞에 그리게 하였는데, 그것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절은 포판(蒲阪)의 남쪽에 있는데 높고 시원하며 화려하고 넓다. 동쪽으로는 고을과 마을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강과 산을 바라본다. (미륵) 대상은 3층으로 되었고 바위의 월랑이 사면에 둘러쌌다. 위의 방(坊)과 밑의 원(院)이 빛나면서 마주 보며, 동산의 맷돌과 밭의 채소가
사방에 둘러 있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 것은 다 도적의 공이요, 공(空)을 휘둘러 유(有)를 세운 것도 다 도적의 힘이다.
그러나 그는 해어진 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면서,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생명을 소중히 여겨, 널리 구제하고 친절히 돌보았다. 물러나서는 조용히 한적한 곳으로 돌아가 그가 한 일을 뽐내지 않고 곧 깊숙이 숨어 살았다. 본래 높은 뜻을 품고 사람 세상과 관계를 끊었지만 시키지 않아도 대중은 스스로 엄숙하고, 나가지 않아도 세상은 스스로 따랐다. 즉 복야(僕射) 배현적(裵玄寂)과 총거(寵居) 상재(上宰)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흠모하여 향과 옷을 자주 선사했고, 자사(刺史) 두초용(杜楚容)은 그 분의 진중함을 알고 자주 찾아가 법을 구했으니, 그 감동하고 순종함이 다 이와 같았다.
과거 수(隋)나라의 계옹폐(季擁閉)와 하동(河東)의 통수(通守) 요군소(堯君素)가 황폐한 성(城)을 지킬 때, 그 치우친 군사들의 횡포에 사람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 때 그들은 사문들과 의논해 성(城)으로 올라가 굳게 지키려 했다. 그러나 감히 간(諫)하는 자는 죽였으므로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걱정만 하고 항거하는 이가 없었다. 도적은 그 울분이 안에서 폭발하여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여러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때에는 성쇠(成衰)가 있으나 법에는 융체(隆替)가 없다. 하늘이 멸망시키지 못하니 그 문헌이 여기에 있다. 또 사문이란 세상 밖의 나그네로서 그 자취는 세상에서 뛰어났거니, 어떻게 창을 잡고 갑옷을 입고 모욕을 방어하는 군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드디어 사문 도손(道愻)과 신소(神素) 등을 이끌고 계단을 지나 성난 얼굴로 간(諫)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으로써 협박할 수 없다고 빈도(貧道)는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 보기를 삶과 같이 여기며 다만 죽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죽어서 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성(城)의 존망(存亡)은 공(公)의 계략에 달렸고, 세상의 비태(否泰)는 공의 운에 달렸습니다. 어찌 서너 사람이 헛되이 겁낸다 하여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는 4호(皓)를 공경하여 천하가 태평하였고, 위(魏)나라는 간목(干木)을 중히 여겨 온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지금 저희를 구속해 군역에 종사하게 하여 천상(天常)을 배반함으로써 영기(靈祇)에 맞고자 하시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 받아들여질까 두려울 뿐입니다. 감히 충정을 아뢰는 것이오니
원컨대 깊이 생각하시어 헛되이 버리지 마십시오. 하루 아침에 스스로 망한다면 이 뒤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빈도 등이 다만 성인의 진실한 말씀에 의지하여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독송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 가만히 백성을 이롭게 하며 신과 귀신이 보호하고 돕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머리를 위함이겠습니까? 머리를 주는 것은 오히려 본래의 소원입니다. 꼭 남은 생(生)을 핍박해 군사로 충당하시겠다면 저는 살아도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며 죽어도 무엇을 위해 죽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적의 이 호소하는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섬뜩하였다. 요군소(堯君素)는 그렇게 진중한 간언은 처음 듣는데다가 도적의 말이 기운이 넘치는 것을 보고 그저 눈만 크게 뜨고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말하였다.
“기이하도다.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어쩌면 저렇게 기상이 씩씩하고 웅장한가.”
그리하여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풀어주어 본사로 돌려보냈다. 뒤에 그는 스스로 굴복하고 도적을 찾아가 사과하고 참회했다.
요군소(堯君素)는 법도 없이 사람을 마구 죽임으로써 그 독한 마음을 풀고 더구나 또 마음대로 남을 능욕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비록 무사했으나 재앙이 그 징조가 되어 결국은 그 성(城) 사람 설종(薛宗)에게 피살되었다.
도적은 본래 그 성질이 억세고 사나워 한 번 먹은 마음은 돌이키지를 않았고, 어쩌다 성이 나면 사람을 물고기나 고깃덩어리쯤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출가한 뒤로는 본래 성질을 스스로 꾸짖고 본래의 감정을 꺾고 억눌러 차츰 부드럽고 참음이 더해 갔다. 나이 60세가 되어서는 이 행이 더욱 굳어졌으니, ‘습관이 배어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정관(貞觀) 10년(636) 9월 17일에 본사(本寺)에서 죽으니, 춘추는 69세였다. 도적은 그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장차 죽을 것을 안다.”
그리고 문인(門人)들에게 말하였다.
“내 나이 이제 75세이니 금년에 죽을 것이다.”
그 문도가 말했다.
“스님께서는 지금 69세이십니다. 왜 빨리 가신다 하십니까?”
도적은 다시 말하였다.
“생사의 법이 그런 것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내 나이 곧 70세가 되는데, 자사(刺史)가 내 상을 보고 6세를 보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목숨은 조석에 있다. 부디 너희들은 더욱 힘쓰면서 내 행을 보라.”
또 말하였다.
“너희들은 ‘세상은 실로 취약하여 견고함이 없다’고 한 경전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죽은 지 사흘 동안 종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죽은 뒤에도 얼굴은 예전과 같았다. 모두들 비통해 하면서 사모하고 애석해 함이 끝이 없었다.
⑬ 당(唐)나라 사문 법성(法誠)이 경을 외운 증험
당(唐)나라 때 종남산(終南山) 오진사(悟眞寺)의 석법성(釋法誠)은 속성이 번(樊)씨이고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藍田)의 왕효사(王孝寺)에 있으면서 사문 승화(僧和)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승화도 그 고을 사람들로부터 성인처럼 받들어져 추앙받던 분이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승화를 해치려고 밤에 그 방에 갔다가, 문 안에 사나운 불길이 일어 휘장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고 곧 참회했다. 승화는 성품이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몰래 양뼈를 씻은 물을 주어 마시게 했다. 승화는 그런 줄을 전연 모르고 마시다가 곧 구역질을 하면서 토해 버렸으니, 그 은밀한 감응과 남모르는 알음알이가 이러하였다.
법성(法誠)은 불경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법화경』 외우는 것을 일상의 법도로 삼았다.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지성껏 봉행할 때는 심신을 깨끗이 하고 조석으로 공경하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보현보살이 대교(大敎)를 사경하라고 권하는 꿈을 꾸었다. 법성은 “이것은 대승(大乘)이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지혜인 반야의 큰 지혜이다” 하고 곧 정행(淨行)의 길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많은 보시를 주고 장공(匠工)을 시켜 팔부반야(八部般若)를 쓰게 하고는 향대(香臺)와 보축(寶軸)의 장엄을 성취했다.
또 그 절 남쪽 횡령(橫嶺)에 화엄당(華嚴堂)을 지었는데, 막힌 산 고요한 골짜기에 벌려 선 집채마다 기와를 덮었다. 앞으로는 겹겹이 있는 산을 마주하고 오른쪽으로는 비스듬한 골짜기에 다달았으며, 구름과 안개를 토하고 마시며 밑으로는 천둥을 굽어보는 것이 실로 기이한 경관이었다. 또 그 정성스런 뜻을 다해 경을 베껴 써서는 받들어 지녔다.
홍문학사(弘文學士) 장효정(張孝靜)은 바로 장찬(張瓚)의 아버지로, 그 때 사람들은 그를 은구(銀鉤)라 불렀는데 그는 드물게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에 그를 산으로 청해 계를 받고 조촐하게 재계(齋戒)하며 몸과 입을 깨끗이 씻게 했다. 그는 입에 향수를 머금고 몸에는 새옷을 입고 사경하였다. 그런데 효정이 오랫동안 경을 베끼면서 매 장마다 다섯 자씩을 채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법성은 갑절이나 보시를 주며 정성스럽게 잘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효정은 그 돈이 탐나 온 힘을 다해 사경하였다.
한 부(部)가 끝나고 나면 법성은 늘 향을 피워 공양하였고 그 책상 앞에 두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사이를 온 마음을 다해 직접 보며 빠진 곳이 없는지 살폈다. 따라서 온 정성을 쏟는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여 때로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새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와 배회하면서 춤을 추었고 경상(經床)으로 내려 앉았다 다시 향로로 올라갔다 하였다. 그 새는 발소리를 낮추고 가만히 바라보면 저절로 친해져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날아갔다.
다음 해에 일을 마치고 경하할 때 그 새는 다시 날아와 먼저와 같이 따르며 구슬프고 처량하게 울었다.
정관(貞觀) 초년에 다시 천불(千佛)을 그릴 때, 그 새가 또 날아와 장인(匠人)의 등에 앉았다. 재를 올리며 공양하고 경하할 때는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이상하게도 그 새가 날아오지 않았다. 법성은 산봉우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새가 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정성을 드리지 않은 까닭이다. 온갖 더러운 행을 꺼리지 않고 보시가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그 징험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마치자 그 새는 날아와서 빙빙 돌면서 지저귀다가, 향수에 들어가 날개를 퍼덕이며 목욕하고, 목욕한 뒤에는 곧 날아갔다. 이렇게 여러 번 상서를 보인 것을 되풀이해 다 말하기 어렵다.
법성이 본래 글씨를 잘 쓰는 것은 그 고을에서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산의 바위와 험한 길에 경전의 게송과 묘한 말들을 손수 베껴 모두 외우게 한 것도 다 법성의 글씨였다. 또 『법화경』을 한데서 손수 베끼다가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면서 그것을 거두어 치워 놓기를 잊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개울이 넘쳤는데, 곧 돌아와 달려가 보았더니 책상만 마른 그대로 있었고 다른 것은 다 물에 떠내려갔었다. 또 일찍이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를 흔들어 거기 달린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것이 밑의 시내에 떨어지기 전에, 어느새 높은 언덕에 올랐으나 털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참으로 경의 힘임을 알았다.
또 청니방(靑泥坊) 곁에 오래된 불감(佛龕)이 있었는데 이는 주(周)씨가 깊이 감추어 둔 것으로서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 법성은 밤에 그곳에 큰 불상이 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 가서 장을 열고 꼭 꿈에서 본 불상을 얻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모두 벗겨지고 허물어져 다시 수리하였다. 도속(道俗)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니 이것은 다 부처가 호위한 공이요 정성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정관(貞觀) 14년(640) 여름 말에 갑자기 병세를 느껴 곧 세상을 떠날 줄 스스로 알고 도솔천에 나기를 원하면서 물을 청해 목욕을 마쳤다. 또 가마를 만들게 하고는 곁에서 스스로 검사해 보고 호화로움은 허락하지 않았다. 동짓달 말일에 환한 현상이 나타나자 느닷없이 “오고 싶거든 그저 들어오너라. 음악을 울릴 여가는 없다” 하고, 시자(侍者)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모든 행은 무상하여 생멸하며 머물지 않나니 9품(品)에 왕생하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과연 진실이구나. 지금 어떤 동자가 맞이하러 와서 오랫동안 문 밖에서 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난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부처님의 바른 계율이 있으니 부디 헐지 말라. 뒤에 후회하게 되리라.”
이 말을 마치자 입에서 광명을 내어 온 집안을 두루 비추었고, 또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 단정히 앉아 엄연히 생각하는 듯이 보일 뿐, 그 정신이 이미 떠난 것 같지 않았다. 그 때의 나이는 78세였다.
법성은 경을 외우는 업을 한 하안거에 『법화경』을 5백 번 독송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다른 날도 읽고 외우기를 겸행했는데 그래도 두 번은 행했다. 혹 손님이 있어서 꼭 이야기할 일이 있어도 경 외우기를 다 마치기 전에는 남과 이야기하지 않았다. 10년의 공을 대강 세더라도 만여 번은 될 것이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⑭ 당(唐)나라 비구니 법신(法信)이 가졌던 경의 증험
당나라 무덕(武德) 때 하동(河東)에 법신(法信)이라는 수행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법화경』을 외웠다. 그녀는 글씨 잘 쓰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몇 배의 보수를 주고는 특히 깨끗한 방을 만들고 거기서 이 경을 베끼게 했다. 그는 한 번 일어나면 한 번 목욕하고 향을 피워 옷에 쐬었다. 그리고 경을 베끼는 그 방에는 벽을 뚫어 밖에 통하게 하고 거기 대통을 박았다. 그리고 경을 베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숨을 내쉬고자 하면 가볍게 대통을 물고 벽 밖으로 숨을 토하게 했다. 그리하여 7권의 경을 베끼는 데 8년을 걸려 끝내고는 공양하고 존중하며 그 공경함을 극진하게 했다.
용문사(龍門寺)의 스님 법단(法端)은 항상 대중을 모아 놓고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는 이 비구니의 경책이 정묘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 청하였다.
그러나 비구니는 굳이 사절하고 주지 않았다. 법단이 못내 꾸짖으므로 비구니는 부득이 부쳐 보내었다. 법단 등이 책을 펴 읽으려 하자 누런 종이만 보일 뿐 글자는 전혀 없었다. 다시 다른 권을 펴 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법단 등은 부끄럽고 두려워 곧 비구니에게로 돌려보냈다. 비구니는 슬피 울면서 그것을 받아 향수로 경함을 씻었다. 그리고 목욕하고는 정수리에 이고 부처님을 돌며 도를 행하면서 이레 동안 잠깐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펴 보았더니 문자는 전과 같았다. 비로소 경을 베낄 때 더욱 정결을 가한 것임을 알았다. 근래에 그것이 영험이 없는 것은 다만 정성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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