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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468 법원주림(法苑珠林) 25권

by Kay/케이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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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5

 
법원주림 제25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17. 견해편(見解篇)[여기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마음과 의식이 움직여 변화한 것은 그 이치가 무상(無常)하다. 따라서 앎과 미혹이 서로 뒤집히면 성인인들 어찌 그 자취를 좇을 수 있겠는가. 정신을 맑혀 마음을 비우고 관조하면 상대에 응함이 메아리와 같다. 이른바 “적멸(寂滅)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이 부딪쳐 오면 곧바로 통한다”라고 한 것이니, 도의 기연(機緣)을 깨친 뒤에라야 신령스런 교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를 응용하여 우주를 두루 다스리고, 성인의 변화가 방위를 따르면서 법계(法界)를 두루 포괄하는 것이니, 6통(通)의 지극한 성인이 아니면 누가 능히 5도(道)에 교화를 펼 수 있겠는가.

(2) 인증부(引證部)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4중(衆)을 위해 각각 제일이라고 말한 것은, 장래에 남겨 놓은 법 안에서 4성(姓)이 출가하여 그 견해가 같지 않게 되어, 서로 시비하여 자기는 높다 하고 남은 낮다 하니 이런 무리들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예방하고 그 스스로 만족해 할 길을 열기 위해서이다.
마치 광명 중에는 해가 제일이요, 별 중에는 달이 제일이며, 흐르는 물 중에는 바다가 제일이요, 6천(天) 중에는 파순(波旬)이 제일이며, 색계 18천(天) 중에는 정거천(淨居天)이 제일이요, 제96부(部) 중에는 석승(釋僧)이 제일이며, 96도(道) 중에는 불도가 제일이라 하는 것과 같고, 5백 성문(聲聞) 제자 중에서 신기한 견해가 각기 다른 것과 같나니,통합뷰어
이것은 다 나열할 수 없다.[대략 1,20인만 열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 적지 못한다. 자세한 것은 광본(廣本)에 있다.]
첫 번째 저 구린(拘隣) 비구의 경우를 말해 보자. 그는 처음 교화의 법을 받아 선래(善來:比丘)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제일이라 일컬은 것이다. 또 저 교범발제(憍梵鉢提) 비구의 경우, 그는 모든 비방에서 잘 보호해 그 몸을 천상에 감추었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덕론』에서 말하였다.
“우각(牛脚) 비구는 두 가지 일로 세간에 살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이 비구는 그 다리가 우갑(牛甲)과 같고, 배불리 먹으면 새김질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로 세상에 살 수 없었다. 만일 외도들이 그를 보면 사문들은 음식에 때가 없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천상에 보내 선법(善法) 강당에서 좌선하게 하고, 선각(善覺) 비구는 항상 여러 스님들의 심부름으로 천상에 갔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가섭이 목탁을 쳐 대중을 모으고 아나율을 시켜 누가 오지 않았는가 세간을 둘러보라 하였다. 아나율은 곧 둘러보았다. 다 모였는데 오직 교범발제 비구만이 천상에 있었다. 가섭은 곧 선각을 보내어 데려오라 했다. 선각은 33천에 가서 선법강당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우각 비구를 보고 깨우면서 말했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지 14일입니다. 가섭이 대중을 모으면서 대중이 모인 곳으로 당신을 데리고 오도록 나를 보냈습니다.’
교범이 답하였다.
‘세간이 다 비었는데 내가 어찌 차마 돌아가겠습니까? 나는 열반에 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곧 가사와 발우를 선각에게 주어 대중에게로 돌아가게 하고는 곧 열반에 들었다. 이 인연으로 그 몸을 잘 보호하여 천상에 편히 있었기 때문에 제일이라 일컬은 것이다.”
제2론(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루빈라 가섭을 제일이라 일컫는 까닭은, 그가 전생 이래로 형제 3인이 항상 천 명의 제자를 데리고 있다가 지금 부처님을 만나 제도되어, 모두가 아라한의 도를 얻고 4사(事)로 공양하였다.통합뷰어
이로 말미암아 여러 스님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공양 중의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제3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리불을 지혜 제일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세존께서 신자(身子:사리불)의 지혜의 많고 적음을 알기 위하여, 수미산으로 벼루를 만들고 4대해(大海)의 물로 먹을 만들고 4천하의 대나무로 붓을 만들며, 4천하에 가득한 사람을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신자의 지혜를 쓰려 하여도 다할 수 없었다. 하물며 범부나 5통(通)으로서야 어찌 그것을 다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를 지혜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제4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목건련을 신족(神足) 제일이라 일컫는 것은 부처님께서 바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3재(災)가 유행하여 인민들이 크게 굶주렸다. 그래서 목건련이 대지를 뒤집고 지하의 비(肥)를 취해 인민들에게 공급하려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중생들을 해칠까 두려워해서였다. 목건련은 또 한 손으로 중생들을 붙잡고 한 손으로 대지를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또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신족의 제일임을 알 수 있다.”
『밀적금강역사경(密迹金剛力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건련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었다. 서방에 광명당(光明幢)이라는 세계가 있으니, 그 세계의 부처님의 명호는 광명왕(光明王)이며 현재 설법하고 계신다. 목건련은 그곳에 가서 그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그 몸을 보니 키는 40리요, 모든 보살의 키는 20리였으며, 보살들의 발우의 높이는 1리였다. 목건련이 그 발우 가장자리 위를 걸어서 다녔다.
그 때 보살들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성인이시여, 이 벌레는 어디서 왔기에 사문의 옷을 입고 발우 가장자리를 걸어다닙니까?’
그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 족성자(族姓子)들아, 부디 이 현인(賢人)에 대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말라. 왜냐 하면 지금의 이 소년의 이름은 대목건련이다. 이는 석가모니불의 성문 제자들 중에서 신족이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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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광명왕불이 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세계의 보살과 모든 성문 제자들이 그대의 몸이 작은 것을 보고 모두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고 있소. 그대는 신족의 힘을 나타내되 석가모니불의 위덕을 받드시오.’
목건련은 그 부처님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을 일곱 번 돌고는 몸을 공중에 솟구쳐 신족을 두루 나타낸 뒤에 다시 그 부처님 앞에 섰다. 모든 보살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했다.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석가모니불의 음향(音響)의 멀고 가까움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 국토에 왔소. 그러나 그대가 여래의 음향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소. 여래의 음향은 무한하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며, 넓고 멀어 무량하여 비유할 수 없는 것이오.’
그 세존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대의 신력만으로 여기 왔겠소. 이것은 세존 석가모니불의 위덕이 만든 것이오. 석가모니불께 멀리 예배하고 거기로 가시오. 만약 그대의 신족만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1겁 동안에도 그곳으로 가지 못할 것이오.’
목건련은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동방을 향해 석가모니불께 예배하고 합장하여 귀의하고서야 팔을 굽혔다 펴는 사이에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목건련이 신족 중의 제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제5론에서 말하였다.
“아나율을 천안(天眼) 제일이라 일컬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어느 때 부처님께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실 때 아나율이 앉아 졸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여래가 설법을 하고 있는데 너는 왜 졸고 있는가. 대개 잠이란 마음과 의식이 막히는 것이니 죽음과 무엇이 다르랴.’
아나율은 매우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자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그래서 오래 자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장님이 되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무릇 6식(食)이 있는데, 눈에 2식이 있다. 첫째는 빛깔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잠이다. 5정(情)에도 각각 2식이 있어서 식을 얻으면 6근(根)이 완전한 것인데, 눈이 식을 잃었기 때문에 안근(眼根)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통합뷰어
기바를 시켜 치료해 주라 하시면서 ‘자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는 이미 육안(肉眼)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5백 제자들이 다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그는 사람을 고용해서 바늘에 실을 꿰고 더듬거리며 옷을 깁고 있었는데, 다시 꿸 실도 떨어지고 고용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사방에 대고 외쳤다.
‘누구든 복을 구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줄 수 없는가?’
세존께서 갑자기 그 앞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꿰어 주리라.’
그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이다.’
그는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복이 만족하신데 또 복을 구하려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복덕을 만족할 수 있겠는가.’
아나율은 ‘부처님도 복을 구하거늘 하물며 범인이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마음 속에 감동이 맺혀, 부처님과 같은 시력을 구하는 마음이 지극했으므로 그는 갑자기 천안(天眼)을 얻었다. 그는 또 생각하다가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된 사람에게는 3안(眼)이 있다. 첫째는 육안(肉眼)이요, 둘째는 천안(天眼)이며, 셋째는 혜안(慧眼)이다. 3안으로 보는 사람은 육안이 천안을 어지럽혀 공(功)의 정추(精麁)를 다툴까 두려워하나니, 이것은 잡스럽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안을 사용하여 대천세계를 관찰하여 고요함을 즐기고 정추를 다 보는 것이니, 그 때문에 그를 천안이 제일이라 하는 것이다.”
제6론에서 말하였다.
“가전연을 뜻을 잘 분별함이 제일이라 한 것에 대해 말해 보자. 그는 법장(法藏)을 편집하려고 할 때 마음 속으로 ‘남의 시끄러운 질문을 받으면 내 생각이 정밀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땅 속에 숨어 7일 만에 큰 법을 모두 편집하여 부처님께 드렸다. 부처님은 ‘잘되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아 한 법장이 되었다. 이 뜻은 미묘하여 외도를 잘 항복시켰다. 그러므로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변재와 이치의 해석에 있어서 제일이다’고 하셨다.
제7론에서 말하였다.
“바구라(婆拘羅)를 수명이 가장 길다고 일컫는 것은 그가 과거에 6만 부처님께 공양하고 그 부처님 처소에서 항상 인자한 마음을 행하며 날짐승과 길벌레 등 일체 형상 있는 중생들에게 항상통합뷰어
자비를 행하여 추호도 해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내 정당한 수명이 80인 것은 내가 세상을 따라 중생들에게 나아가되 다름이 없게 하려 하기 때문에 수명이 80인 것이다. 바구라는 전생에 행한 자비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수명이 나보다 곱이 되어 160인 것이다. 옛날 비바시여래가 세상에 나오셨을 때 어떤 장자가 있었다. 그는 밝음을 쌓고 곧음을 닦으며 성품이 어질고 겸손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해 90일 동안 4사(事)로 공양하였다. 어떤 비구가 와서 약을 청했다.
장자가 물었다.
‘어디가 아픕니까?’
비구가 답하였다.
‘머리가 아픕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격(膈:횡격막)에 물이 있어서 그것이 위로 머리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리륵 열매 하나를 주었다. 그것을 먹자 병은 곧 나았다. 이 복의 과보로 91겁 동안 병이 없었다.
아난이 바구라에게 물었다.
‘왜 남에게 설법하지 않습니까? 4변(辯)의 지혜가 없어서 설법하지 않습니까?’
바구라가 답하였다.
‘나는 4변과 재빠른 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을 즐기고 시끄러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설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수명을 늘리고 일을 덜기에 제일이라 하는 것이다.”
제8론에서 말하였다.
“우바리를 계율의 제일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이 5백 석자(釋子)들은 머리를 깎아 준 스승에 대해 업신여기거나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모두 없어졌다. 부처님께서 ‘잘 왔도다[善來]’라고 하시자 그들은 곧 모두 사문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곧 계를 주시어 그들은 다 아라한이 되었다.
다음에 5백 석자들에게 계를 주실 때 우바리를 상좌에 앉히셨다. 모든 석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사람은 우리집 종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예로 대접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불법에는 귀천이 없고 선달(先達)을 형으로 삼는 것이니, 노력하여 쉬지 않고 마음을 제어하기 때문에 예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 때 천지가 크게 진동하고 모든 하늘이 천상에서 찬탄하였다.
‘장하고 착하다. 오늘 모든 석자들은통합뷰어
다 그 교만을 항복받았다. 이 뜻은 이기기 어렵기 때문에 대지가 진동하는 것이다.’
5백 석자들이 도인이 되었을 때 9만 9천 사람들도 다 출가하여 도인이 되었다. 우바리는 부처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뒤로는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율(持律)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또 기원정사 북쪽에 있는 어떤 비구가 병이 나서 6년 동안 낫지 않았다. 우바리가 물었다.
‘어디가 아픈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
비구가 답하였다.
‘나는 필요한 것이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바리가 말하였다.
‘괴로워할 것 없이 말해 보라.’
그가 말하였다.
‘나는 술 다섯 되만 마시면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
우바리가 말하였다.
‘우선 기다리시오. 내가 부처님께 가서 물어 보리다.’
그리고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다.
‘어떤 비구가 병이 나서 술이 약이라 하옵는데 먹어도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제정한 것은 병으로 고생하는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니라.’
우바리는 곧 돌아와 술을 구해 비구에게 주어 그 병이 곧 나았다. 그리고 설법하여 그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는 우바리를 찬탄하셨다.
‘네가 그 일을 물어 그 비구의 병을 낫게 하고 또 도를 얻게 하였다. 만일 그가 구제되지 못했다면 이 뒤에 3도(道)에 떨어져 거기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곧 장래의 비구들을 위해 금하는 법을 만들고, 그 경중(輕重)을 알아 재액을 구제하게 하라. 너는 참으로 계율을 지켰다. 그러므로 계율을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실수가 없도록 하라. 그리고 사미와 속인에게는 이것을 말하지 말라.’
그리고 다시 그를 제일이라 하셨다.”
제9론에서 말하였다.
“난타(難陁) 비구를 단정하기 제일이라 함에 대해 말해 보자.
다른 모든 비구들에게 각각 상(相)이 있으니, 사리불은 7상이 있고 목건련이 5상이 있으며 아난은 20상이 있는데, 오직 난타만은 30상이 있었다. 난타는 금색이요 아난은 은색이어서 옷이 빛났다. 금실 신을 신고 유리 발우를 들고 성 안에 들어가통합뷰어
걸식할 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기뻐하였다. 여래 이외의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따르지 못했으므로 그를 단정하기 제일이라 했다.
나녀(奈女)는 부처님을 청했다가 밖에서 난타를 보고 사랑하는 정이 깊어, 그 발에 머리를 대고 예배한 뒤에 손으로 그 발을 어루만졌다. 그는 비록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았으나 조금도 애정이 없었다. 그러나 몸과 그림자가 서로 감응해 난타는 그 부정(不淨)을 쏟았다. 그녀는 그런 줄을 모르고 욕정이 있는가 의심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나녀에게 말씀하셨다.
‘의심을 내지 말라. 난타는 이 후 7일 만에 아라한이 될 것이다.’
이 말씀으로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제일이라 일컬는 것이다.”
제10론에서 말하였다.
“바타(婆陀) 비구를 남의 의심을 푸는 데 있어서 제일이라 함에 대해 말해 보자.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은 8만 4천 법문을 행법(行法)으로 삼지만 중생들이 도를 얻음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행을 두루 행하지 않고 그 깨치는 바를 따라 종취(宗趣)를 삼는다. 왜냐 하면 중생들은 번뇌가 같지 않아 병에 많고 적음이 있고, 더러움에 두텁고 얇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여러 가지로 가르친 것이다. 혹은 한 가지 약으로 여러 병을 다스리고 혹은 여러 가지 약으로 하나의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마치 6도(度)가 서로 거느리는 것과 같아, 한 행(行)이 주인이 되면 여러 행이 다 따르므로 한 행이 전일하지 못하면 온갖 병이 따라 일어나고, 병이 일어남을 따라 대응하는 약을 쓰는 것이다. 즉 항상하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항상함이 없음으로 다스리고,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다스리는 것이니, 그 항상함이 없음으로 행을 거느리면 모든 행이 다 항상함이 없을 것이다.
마치 보시로 8만 행을 지으면 8만 행이 다 보시로 지어지는 것과 같을 것이요, 또 여래의 8음(音) 가운데서 1음이 8향(響)을 거느리고, 1향이 1백 교(敎)를 거느리며, 1교가 1백 의(義)를 거느리는 것과 같아서, 낱낱이 서로 거느려 천만억에 이르며, 1음(音)이 만억을 갚는 등 그 변화가 이와 같은 것이다. 간략히 행을 거느림을 말하면 그 비유도 이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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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구는 오로지 간략히 말하는 것을 주장으로 삼나니, 그러므로 그를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제11론에서 말하였다.
“천수보리(天須菩提)를 좋은 옷 입음의 제일이라 함에 대하여 말해 보자.
5백 제자 중에 두 수보리가 있다. 첫 번째는 왕의 종족이요, 둘째는 장자의 종족이다. 이 천수보리는 왕의 종족이다. 이른바 천(天)이란 5백 세상 동안에 항상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는 성문(聲聞)으로 화해 왕가에 태어나 식복(食福)이 저절로 생겨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부처님께서 본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명령하였다.
‘그대는 출가하였으니 몸을 단속하고 절제를 지켜, 거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으며, 풀 깔개로 평상을 삼고 대소변을 약으로 삼아라.’
이 비구는 부처님의 이 절실한 가르침을 듣고 곧 속가로 돌아가려 하였다. 부처님께서 바사닉왕의 청을 받았을 때 곧 부처님께 나아가 하직하고 돌아가려 했다. 아난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우선 여기서 하룻밤만 지내시오.’
천수보리가 말하였다.
‘어떻게 도인의 집에 잘 수 있겠습니까? 우선 어느 속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집으로 가겠습니다.’
아난이 말하였다.
‘그저 여기서 머무르시오. 지금 모든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왕에게로 가서 갖가지의 좌구와 번기ㆍ꽃ㆍ향ㆍ기름 등으로 장식을 다 준비했다. 이 비구는 거기에서 자면서 모두가 마음에 맞았으므로 선정을 얻어 4제(諦)를 사유하고 새벽에 아라한이 되었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수보리가 아라한이 되어 허공에 날아 올라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대개 옷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친할 만한 것이요 둘째는 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일 좋은 옷을 입어 도심(道心)을 더하게 되면 이것은 친할 만한 것이요, 도심을 손상시키면 이것은 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혹은 좋은 옷에 의해 도를 얻고 혹은 나쁜 5납(納)에 의해 도를 얻나니, 깨침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입는 옷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천수보리를 좋은 옷 입음의 제일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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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론에서 말하였다.
“라운(羅雲)은 계를 지켜 훼손하지 않음이 제일이라 함에 대하여 말해 보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라운은 거짓말과 성내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전륜왕(轉輪王)의 자리를 버리고 사문이 되어 사방으로 다니면서 걸식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하면서 부처님을 싫어하여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여래가 있는 곳을 물으면 실제로는 기원정사에 있는데 주암원(晝闇園)에 있다 하고, 실제로는 주암원에 있는데도 기원에 있다 하면서 거짓말을 되풀이해 그 사람을 속였다. 그래서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라운이 거짓말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라운을 불러와서 물었다.
‘너는 참으로 거짓말을 했느냐?’
라운이 대답했다.
‘예,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전륜왕의 자리를 버린 것은 모든 것은 믿을 수가 없어 다 허무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설령 제석이나 범왕이라 해도 다 보전할 수 없거늘 하물며 전륜성왕을 믿을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그런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버렸다. 그런데 너는 지금 나를 한탄하느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는 물을 가져오너라.’
라운이 곧 발우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드렸다. 부처님께서 발우를 들고 라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물을 보았느냐?’
라운이 대답하였다.
‘예,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이 발우에 꽉 차서 모자람이 없는 것은 계를 완전히 지켜 결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리고 물을 반쯤 쏟아 버리고 나서 라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물을 보았느냐?’
라운이 답하였다.
‘예, 보았습니다.’
‘이 물이 반쯤 준 것은 계가 완전하지 못한 것과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또 물을 모두 쏟아 버리고 나서 라운에게 물었다.
‘너는 이 빈 발우를 보았느냐?’
라운이 답하였다.
‘예,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범해 모두 없는 것은 이 빈 발우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발우를 땅에 엎고 또 물으셨다.
‘너는 이 발우를 보았느냐?’
라운이 답하였다.
“예,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모두 범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발우 입이 땅으로 향하는 것과 같으니라.’
라운은 이 말씀을 들은 뒤로는 털끝만큼도 계를 범하지 않았다.통합뷰어
그러므로 계율 가짐이 제일이라 하는 것이다.
또 라운은 인행(忍行)에도 제일이라 한다. 사리불이 라운을 데리고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 걸식할 때에, 어떤 바라문이 라운이 뒤에 따라오는 것을 보고 곧 악한 마음을 내어 라운의 머리를 때리자 머리가 깨져서 피가 얼굴에 흘러 내렸다. 라운이 곧 악한 생각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원한을 갚겠다고 했다. 사리불이 그 마음을 알고 그 피를 닦아 주면서 라운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과거의 당신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옛날 왕으로 있을 때 누가 와서 눈을 달라 하면 곧 눈을 빼어 주었고, 손을 끊고 발을 끊어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또 코끼리가 되어서는 그 어금니를 사람에 주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은 왜 지금 그런 나쁜 생각을 내오.’
라운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를 매우 꾸짖으면서 ‘나는 지금 왜 저 사람에게 나쁜 마음을 내는가’ 하고, 곧 땅처럼 참고 털끝만큼도 해칠 마음을 내지 않았다. 그 때 라운을 때린 사람은 무택(無擇)지옥에 떨어졌다. 이런 인연으로 그를 지계와 인행에서 제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제13론에서 말하였다.
“반타(般陁) 비구는 우둔하면서 변형(變形)에는 제일이라 함에 대하여 말해 보자.
부처님께서는 그를 시켜 소(掃:쓺)자와 추(箒:비)자를 외우게 했다. 그런데 그는 ‘추’자를 외우면, ‘소’자를 잊어버리고 ‘소’자를 외우면, ‘추’자를 잊어버렸다. 6년 동안 전일한 마음으로 이것을 외우다가 깨친 바 있어 가만히 생각했다.
‘추는 비요 소는 없애는 것이다. 비는 8정도(正道)와 같고 똥은 3독(毒)과 같은 것이다. 8정도의 비로 3독의 똥을 없앤다는 것이니, 이른바 소와 추의 뜻이란 이것을 말한 것뿐이다.’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이 곧 열려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또 어떤 바라문이 있었다. 그 이름을 범천(梵天) 또는 세전(世典)이라 했다. 그는 비결 등 모든 책을 널리 보았고 천문과 지리에도 다 능통했으므로 이름을 세전이라 했다.통합뷰어
그는 덕이 높다 자칭하면서 남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반타를 보고 말했다.
‘나와 토론하겠는가?’
반타가 답하였다.
‘나는 네 조부 범천과 논전했는데, 하물며 장님이요 눈이 없는 사람인 너이겠는가.’
범지(梵志:바라문)가 곧 물었다.
‘장님과 눈 없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반타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면서 할 말이 없어, 곧 신족(神足)으로 답하리라 하고, 땅에서 4장 9척쯤 허공에 날아 올라가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범지는 우러러보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사리불은 그 때 반타가 할 말이 없어 형상을 변해 답함을 알고 ‘내가 가서 항복받지 않으면 범지를 구제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곧 신족으로 반타의 형상으로 변하고 반타의 본 형상은 나타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변화된 형상으로 범지에게 가서 물었다.
‘너는 하늘이냐, 사람이냐?’
범지가 답하였다.
‘나는 사람이다.’
또 물었다.
‘사람이라면 곧 남자인가?’
범지가 답하였다.
‘남자이다.’
또 물었다.
‘남자와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답하였다.
‘다르지 않다.’
또 물었다.
‘사람이란 전체를 합친 이름이요 남자란 형상에 의거한 것인데, 어찌하여 다르지 않다고 하느냐. 아까 말한 장님이란, 이른바 금생과 후생의 선악의 과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요, 눈이 없음이란 이른바 번뇌를 끊는 지혜의 눈이 없다는 것이다.’
범지는 마음이 열려 곧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이런 인연으로 반타를 변형 제일이라 하는 것이다.”[이 아라한은 우선 치우치게 하나의 장점에만 의거해 제일이라 하지만 만일 논한다면 실덕(實德)과 신해(信解)가 다 제일인 것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께서 15일에 설계(說戒)하실 때 모든 비구승과 5백 비구들은 기원정사에서 사라져 아뇩달지(阿耨達池)로 갔다. 그 때 용왕이 세존 앞에 나아가,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대중이 아무도 없음을 보고 ‘사리불이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빨리 사리불에게 가서 내가 부른다고 하라.’
목건련이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사위성으로 가서통합뷰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아뇩달지의 용왕이 당신을 만나고자 합니다.’
사리불은 기지대(祇支帶)를 풀어 목건련 앞에 놓고 말했다.
‘당신은 신족이 있으니 이 띠를 들어 매시오.’
목건련은 띠를 잡았으나 움직일 수가 없어, 힘을 다해 들려고 하자 땅이 다 크게 움직였다. 사리불이 목건련을 들어 동방의 불우체(弗于逮)에 갖다 두고, 또 띠로 수미산을 싸자 목건련은 수미산을 들어 움직였다. 사리불이 다시 이 띠를 버리고 용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목건련은 멀리서 사리불이 먼저 와서 가부하고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목건련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신족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왜냐 하면 사리불은 뒤에 떠났는데 먼저 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잃지 않았다. 사리불은 큰 지혜가 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비구들은 사리불의 신족을 너보다 낫다고 한 너의 말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너는 이 대중 가운데서 그 위력을 나타내 보여라.’
목건련은 말하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수미산 꼭대기로 가서, 한 발로 수미산 꼭대기를 밟고 한 발을 들어 범천 위에 두었다. 그리고 수미산을 차서 대지를 여섯 가지로 진동하게 했다. 그러자 비구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했다. 목건련은 게송을 외웠다. 그 때 60명의 비구들은 이로 인해 번뇌가 없어지고 뜻이 다 풀렸다.”
또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槃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발타라(跋陁羅)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수사리는 큰 자비가 있어서 이 나라 다라(多羅) 마을의 범덕(梵德) 바라문의 집에 태어났다. 그가 날 때에는 온 집안이 변화해서 연꽃처럼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는데 몸은 자금색이요, 나자마자 말을 잘하고 하늘 동자와 같았으며, 7보가통합뷰어
그 위를 덮고 따라다녔다. 95종의 모든 논사(論師)들도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서 수릉엄(首楞嚴)삼매에 머물렀다.
내가 열반한 뒤 450년에 그는 설산(雪山)에 가서 5백 선인(仙人)들을 위해 12부경을 선양하고 그들을 교화하여 불퇴지(不退地)와 내지 본생지(本生地)에 머무르게 할 것이다. 광야의 니구율타(尼拘律陁)나무 밑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수릉엄삼매에 들 때는 온몸의 털구멍에서 금색 광명을 내어 시방세계를 비추어 인연 있는 자를 구제할 것이다. 그 몸은 자금산(紫金山)과 같고 키는 1장 6척이며, 원광(圓光)이 나타나 각각 1심(尋)인데, 그 원광 속에 5백 화불(化佛)이 있고 낱낱 화불에는 다섯 화(化)보살이 있어서 그 시자(侍者)가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발타바라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수사리의 신통 변화는 무량하여 다 말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중생이 문수사리의 이름을 들으면 12억 겁의 생사의 죄가 없어질 것이며, 만일 예배하고 공양하면 날 때마다 항상 부처의 집에 날 것이며, 직접 보지는 못하더라도 수릉엄주(首楞嚴呪)를 외우거나 문수사리의 이름을 부르면 하루나 이레 만에 문수사리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올 것이나, 꿈 속에서 본 사람은 현재의 몸으로 성문(聲聞)을 구하면 문수사리를 보았기 때문에 수다원이나, 내지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이 그를 보면, 그를 보았기 때문에 하룻밤 하루 낮 동안에 아라한이 될 것이다.
만일 방등경전(方等經典)을 깊이 믿는 사람이 있으면 이 법왕자(法王子)는 선정 속에서 그를 위해 깊은 법을 설명할 것이요, 산란한 마음이 많은 사람은 꿈 속에서 그를 위해 진실한 이치를 설명해 그로 하여금통합뷰어
위없는 도에 견고하게 되어 불퇴(不退)의 자리를 얻게 할 것이다.
내가 열반한 뒤에 누구나 문수사리의 이름을 듣거나 그 형상을 본 사람은 백천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요, 문수사리라는 이름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사람은 비록 중한 업장이 있더라도 저 아비지옥의 지독한 사나운 불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다른 곳의 청정한 국토에 나서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고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것이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취두산(鷲頭山)에 계셨다. 그 때 바라나시의 왕 바라마달왕(波羅摩達王)에게 대신이 있었는데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상호(相好)를 모두 갖추었고 몸은 자금색이며 얼굴과 자태가 뛰어났다. 대신은 아이를 볼 때마다 더욱 기뻐했다. 그 어머니는 본래 성질이 좋지 못했으나 아이를 밴 뒤로는 괴로워하는 이를 불쌍히 여겨 돌보고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평등한 마음으로 구호하였다. 아버지는 관상 보는 이를 불러 아기의 상을 보게 했다. 관상 보는 이가 아이를 보고 기뻐하여 이에 이름을 지어 미륵(彌勒)이라 했다. 그 아이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다. 국왕은 소문을 듣고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아이가 자라기 전에 없애 버리려 했다. 그리하여 곧 대신을 불러 ‘내 들으니, 그대 아들의 얼굴이 비범하다 하니 데리고 오라. 내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였다. 궁내 사람들과 그 아버지는 왕의 속셈을 알고, 모두 마음 속이 끓는 물과 같고 뜨거운 물과 같았다.[다른 경에는, 임시방편으로 왕에게 그 아이를 남천국(南天國)의 외삼촌 집으로 보냈는데, 아이가 자라나면 데리고 와서 왕에게 보여 드리겠다고 왕에게 답하였다고 했다.]
그 아이의 외삼촌인 바바리(波波梨)는 바바부라국(波婆富羅國)의 국사(國師)로서 총명이 높고 넓으며 지혜가 통달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그의 5백 제자들은 항상 그에게 묻고 배웠다.
그 때 대신은 예쁘고 사랑스런 그 아들이 왕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가만히 사람을 시켜 그 아이를 코끼리에 태워 외삼촌에게로 보냈다. 외삼촌은 이 아이의 색상(色相)이 훌륭함을 보고 더욱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품에 두고 길렀다. 아이의 나이 차츰 들어 글을 가르칠 때통합뷰어
하루 배우는 것이 일생 배우는 것보다 많았으므로 1년을 지내자 모든 경전에 두루 통했다. 그 때에 바바리는 생질의 학문이 오래지 않아 모든 글을 다 통달할 것임을 알고 모임을 열어 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한 제자를 바라나시로 보내면서 ‘너는 대신에게 가서 아이의 공부를 다 이야기하고, 그 때문에 모임을 가지고자 하니 그 비용을 달라고 하라’고 말하였다. 그 제자는 가는 도중에서, 사람들로부터 부처님의 덕행이 무량하다는 말을 듣고는, 사모하고 뵙고 싶어 곧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가다가, 중간에도 이르기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그 선심을 힘입어 첫째 사천(四天)에 태어났다.
바바리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털어 큰 모임을 베풀자 모두가 모였다. 대회를 마치고 크게 보시를 행하여 사람들은 5백 금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재산을 탕진했다. 최후에 온 로도차(勞度叉)라는 바라문은 음식은 얻어 먹지 못하고 5백 금의 보시만 받았다. 로도차는 바바리에게 말했다.
‘들으니 큰 모임이라는데 왜 아무것도 없는가. 만일 거절하고 아무것도 안 주면 너는 7일 뒤에는 머리가 깨어져 일곱 조각이 될 것이다.’
그 때 바바리는 이 나쁜 주문(呪文)과 다른 방자를 두려워하면서 예삿일이 아니라고 매우 걱정했다. 전에 심부름 가다가 죽어 하늘에 난 그 제자가, 그 스승이 매우 걱정하면서도 힘입을 데 없음을 멀리서 보고는,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 앞에 서서 스승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스승은 자세한 사정을 다 이야기했다. 제자는 스승에게 아뢰었다.
‘로도차란 자는 정법(頂法)을 모릅니다. 그는 어리석고 미혹하고 악하고 간사한 사람인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지금 오직 부처님만 이 정법(頂法)을 가장 잘 아는 무극(無極)의 법왕(法王)이시니, 그 분이야말로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바리는 이 제자(하늘)의 말을 듣고 곧 다시 물었다.
‘그 부처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늘(제자)은 말하였다.
‘그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지금 왕사성의통합뷰어
취두산에 계십니다.’
바바리는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제자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 분은 반드시 우리 책에 ≺불성(沸星)이 내려와 나타나고 천지가 크게 진동하면 마땅히 성인이 나시리라≻고 적혀 있는 그러한 분일 것이다.’
그리하여 곧 미륵 등 16인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들은 가서 그 상호(相好)를 보고 그 마음을 시험해 보라. ≺우리 스승 바바리는 몇 가지 상이 있는가. 우리 스승은 나이가 얼마인가. 우리 스승은 무슨 종성(種姓)인가. 우리 스승의 제자는 몇인가 하고 물으라. 그래서 만일 그가 이 수를 다 알고 답하면 그는 반드시 부처이니 너희들은 그 제자가 되라. 그리고 내게 한 사람을 보내어 그 사정을 알려라.’
그리하여 미륵 등은 왕사성의 취두산 가까이 가서, 부처님의 광명과 갖가지 신기함과 모든 빛나는 형상을 보고는 더욱 기뻐하면서, 곧 스승의 분부대로 멀리서 질문했다.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답하시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들은 깊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였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자 그들 15인은 다 법안(法眼)이 청정해졌다. 그리하여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잘 왔도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의(法衣)가 몸에 입혀졌다.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거듭 설법하시니, 그들은 다 아라한이 되었다.
그들 16인 중에 빈기기(賓祈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바리의 누이의 아들이었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면서 ‘너는 이 사실을 저기 가서 자세히 알리고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는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다 자세히 이야기했다. 바바리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아 합장하고 왕사성을 향해 지성껏 부처님을 청했다.
‘부디 왕림하시어 구제해 주소서.’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이것을 아시고 팔을 굽히고 펴는 사이에 그 앞에 오셨다. 그는 예배한 뒤에 머리를 들어 부처님을 보고 놀라면서 기뻐했다.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시니, 그는 아나함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취두산으로 돌아오셨다.[오직 미륵 한 사람만은 작은 과(果)를 취하지 않고 큰 서원을 내어 ‘보리’로 향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는 세상에 이 염부제의 땅은 방정하고 평탄하며 넓어 산천이 없으며, 땅에서는 부드러운 풀이 나서 마치 천상 사람의 옷과 같을 것이다. 그 때의 사람의통합뷰어
수명은 8만 4천 년이요 키는 8장이며, 그 얼굴은 단정하고 묘할 것이다. 사람들의 성질은 어질고 화하여 10선(善)을 다 갖출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승가[진(晋)나라 말로 구(具:갖춤)라고 함]라는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 때 어떤 바라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미륵이라 하리니, 몸은 자금색이요 32상(相)과 온갖 종호(種好)를 갖추어 광명이 빛날 것이다. 그는 출가하여 도를 배워 정각(正覺)을 이룬 뒤에는 널리 중생들을 위해 최상의 법륜(法輪)을 굴릴 것이다. 그 첫 법회에서 93억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2회에서 91억을 구제하며, 제3회에서는 90억의 중생들을 주제할 것이다. 이와 같이 3회의 설법에서 구제된 자는 다 내가 남긴 법에서 복을 심은 중생들로서 모두 그 3회에 있게 될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인연을 따라 이름을 미륵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 과거로부터 자삼매(慈三昧)를 익혔으므로 정의(定意)가 유연하여 조금도 해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미륵이라 하는 것이다.[범어(梵語)의 미륵은 한문으로 자씨(慈氏)이다. 미륵이란 또한 성(姓)이기도 하다. 다른 경전에는 “과거에 미륵이라는 부처가 있었는데, 부처님을 만나 원을 세워 다 같은 이름으로 미륵이라 했다”고 했다. 그 자(字)인 아일다(阿逸多)는 한문으로 무승(無勝)이니,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무승이라 한다.]’
게송을 읊는다.

현인(賢人)은 종(宗)을 따라 제도하고
떠돌이[弱喪]는 헛되이 떠돌아다니며
스승은 통하면 제자는 저절로 발심하나니
신기로운 광명이 인연 있는 이를 비춘다.

응하여 변함은 제각기 다르나
성인의 기록은 영편(靈篇)과 같다.
하늘에 오름은 구오(九五)의 지위에 인(因)하고
뛰어난 메아리는 삼천세계에 밝다.

법의 북은 심오한 가르침을 울리고
용은 날아 사람과 하늘에 응한다.
고요한 지혜는 가만히 묘함을 떨치면서
아득히 겹친 심오한 뜻을 읊는다.

반우(盤紆)는 칠칠기(七七紀)인데
아름다운 운수는 중번(中幡)에 내린다.
이 빼어난 32상의 자태는
우거진 화림원(華林園)을 비춘다.”

감응연(感應緣)[도생(生)과 승조(肇)의 부류와 불도징과 도안의 무리에 석덕(碩德)들이 많은데, 그것은 딴 책에 붙어 있으므로 번거롭게 거듭 적지 않고, 우선 두 가지 증험만 인용한다.]

진(晋)나라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
송(宋)나라 사문 석법현(釋法顯)

통합뷰어
①진(晋)나라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
진(晋)나라 장안(長安)의 구마라집은 한어(漢語)로 동수(童壽)이니 천축(天竺) 사람이다. 그 집은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그 조부 달다(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그 이름이 드날렸다. 라집의 아버지 구마라염(鳩摩羅琰)은 총명하고 법도가 있었다. 그는 정승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으나 그것을 사양하고 출가하여 동으로 총령(葱嶺)을 넘어갔다. 구자국의 왕은 그가 영화를 다 버렸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공경하고 사모하여, 친히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여 국사로 삼았다.
그 왕에게 여동생이 있어 나이 막 20이었는데, 재주 있고 명민하여 한 번 보면 반드시 그대로 하고 한 번 들으면 다 외웠다. 또 그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어서, 으레 지혜 있는 아들을 낳게 되어 있었으므로, 여러 나라에서 그녀를 맞이하려 했으나 다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마라염을 보자 마음에들어 이에 재촉하여 아내로 삼았다.
라집을 배자 아이가 배 안에 있는 동안 그 어머니는 슬기와 앎이 보통 때보다 곱절이었다. 작리사(鵲梨寺)에 명성과 덕이 있는 스님이 많고 또 도를 얻은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왕족과 귀한 여자와 덕행을 갖춘 비구니와 함께 날마다 공양을 베풀고 재(齋)를 청하여 법을 들었다.
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천축 말을 알아서,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그 깊은 이치를 다 알아냈으므로 모두들 감탄했다.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이 여자는 반드시 지혜로운 아들을 배었을 것이다’라 생각하고, 그녀를 위해 사리불이 태에 있을 때의 일을 설명하였는데, 라집이 태어난 뒤에는 전에 할 줄 알던 말을 잊어버렸다. 얼마 있다가 라집의 어머니는 출가하려 했으나 그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드디어 다시 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불사제바(弗沙提婆)라 했다. 뒤에 그녀는 성을 나가 유람하다가 무덤 사이에 많은 해골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생각하고 기어코 속세를 떠나려 했다. 머리 깎기를 맹세하고 음식을 먹지 않아, 엿새 째 밤에는 기력이 다 떨어져,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았으므로 이에 남편이 허락했다.
그러나 아직 머리를 깎지 못했으므로 음식을 먹지 않다가 사람을 시켜 머리를 깎고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계를 받았다. 계속해서 선법(禪法)을 업으로 삼아 정진하면서통합뷰어
게으르지 않아 초과(初果)를 얻었다. 라집의 나이 7세 때에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경을 배울 때 하루 천 게송을 외웠다. 한 게송이 32자이니 모두 3만 2천 자이다. 『비담론』을 다 외웠을 때 스승이 그 뜻을 가르치자 곧 스스로 다 통달하여 어떤 깊은 뜻이라도 다 통했다. 그 때 구자국 사람들이 그 어머니와 왕녀가 이양(利養)이 매우 많다 하였으므로 라집을 데리고 곧 피했다.
라집은 9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강을 건너 계빈국으로 가서, 명성과 덕이 있는 반두달다(盤頭達多) 법사를 만나니, 그는 바로 계빈국 왕의 종제(從弟)였다. 그는 깊고 순수하고 큰 도량이 있으며 재주가 밝고 널리 알아 당대의 독보(獨步)로서 3장(藏) 9부(部)를 모두 통달했다. 아침에서 낮까지 손으로 천 게(偈)를 쓰고 낮부터 저녁까지 천 게를 외웠으므로, 그 이름이 모든 나라에 퍼져 멀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 스승으로 섬겼다.
라집은 거기 가서 곧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예배하고, 그에게서 『잡장(雜藏)』과 중(中)ㆍ장(長)의 두 『아함경(阿含經)』 등 모두 4백만 자를 배우니, 달다는 늘 라집을 신기하고 뛰어난 재주꾼이라 일컬었다. 이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려 왕은 곧 라집을 청해 놓고, 외도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서로 토론하게 하니, 말과 기운이 비로소 통했다. 그러나 외도들은 라집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그를 얕잡아 보고 말씨가 자못 불손했다. 라집은 그 틈을 타서 그들의 기를 꺾으니, 그들은 절복(折伏)을 당하자 무안해 말이 없었다. 왕은 더욱 존경하여 날마다 거위포 한 쌍과 국수 서 되와 연유 여섯 되를 주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최상의 공양이었다. 그 절에서는 큰 스님 다섯 사람과 사미 열 사람을 시켜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것이 마치 제자처럼 하였으니, 그가 받는 존경이 이와 같았다.
나이 12세 때에 그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구자국으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는 다 벼슬로 그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라집은 모두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또 그를 데리고 월지국의 북산(北山)으로 갔다. 어떤 아라한이 그를 보고 신기하게 여겨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항상 잘 보살피십시오. 이 사미가통합뷰어
나이 35세가 되어 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장차 불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사람을 제도하여 저 우바굴다(優波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계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만 뛰어난 재주에 불과할 것이요, 또 하나의 법사(法師) 밖에 안 될 것입니다.’
라집은 더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으로 갔다. 발우를 머리에 이고 가만히 ‘발우의 모양은 매우 큰데 왜 이리 가벼운가’ 하고 생각하자 발우가 곧 무거워져, 그는 이지 못하고 그만 소리를 치면서 내려 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그는 답하기를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에 발우에 경중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사륵국에서 1년을 지냈다. 그 해 겨울에 『아비담론』을 다 외우고, 십문수지(十門修智)의 모든 품(品)에 있어서는 묻지도 않고 그 묘한 뜻을 다 통달하였으며, 또 『육족론(六足論)』의 모든 문(門)에도 아무 막힘이 없었다. 사륵국의 삼장(三藏) 사문(沙門) 희견(喜見)이 그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문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왕은 그를 청해 설법하게 하십시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는 국내의 사문들이 자신들의 모자람을 부끄러워하여 반드시 분발할 것이요, 둘째는 구자국왕은 반드시 ‘그는 우리나라 사람인데 저들이 존경하니 그것은 우리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양국의 화평을 제안할 것입니다.”
왕은 허락하고 곧 큰 법회를 열고 라집을 청했다. 그는 법좌에 올라 『법륜경(法輪經)』을 강설했다. 과연 구자국왕은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자고 했다.
라집은 설법하는 여가에는 외도의 경서를 뒤졌다. 그리하여 『위타사다론(韋陀舍多論:베다)』을 잘 배워 그 문사(文辭)에 밝았고, 문답(問答) 등을 지었다. 4위타와 5명(明) 모든 논문과 음양ㆍ별ㆍ산수 등을 두루 보아 모두 다 통하고 길흉(吉凶)을 잘 알아 말하는 것이 모두 꼭 들어맞았다.
라집은 그 성질이 소탈하고 원만했다. 처음에는 소승(小乘)을 배우다가 뒤에는 오로지 방등(方等)에 힘썼다. 이리하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옛날 소승을 공부한 것은 마치 금을 모르는 사람이 놋쇠나 돌을 묘하다고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해 요의(要義)를 널리 연구하고, 중(中)ㆍ백(百)의 두 논과 『12문론(門論)』 등을 다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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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다가 그 어머니를 따라 온숙국(溫宿國)으로 가니, 곧 구자국의 북방 경계이다. 그 때 온숙국에 어떤 도사가 있었다. 그는 신기한 변재가 뛰어나 모든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손으로 왕고(王鼓)를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 논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머리를 베어 사례하리라’ 하였다. 라집이 거기 가서 두 가지 이치로 서로 겨룰 때 그는 곧 아득해져 어쩔 줄 모르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했다. 이리하여 라집의 명성은 총령(葱嶺)의 동쪽과 하외(河外)에 널리 퍼졌다.
구자국왕은 몸소 온숙국으로 가서 라집을 맞이해 돌아왔다. 라집이 모든 경전을 두루 강설하니, 사방의 학인들로서 아무도 항변하는 이가 없었다.
그 때 왕의 딸이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름을 아갈야말제(阿竭耶末帝)라 했다. 그녀는 여러 경전을 두루 읽었으나 특히 선요(禪要)에 정통하여 2과(果)를 증득했다고 자칭했다. 그러다가 라집의 설법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여 큰 법회를 마련하고 방등경의 깊은 뜻을 물었다. 라집은 그녀를 위해 모든 법은 다 공(空)이요 나[我]가 없음을 분석해 설명하고, 음계(陰界)는 임시의 이름뿐이고 실(實)이 아님을 분별해 주었다. 청중들은 모두 슬픈 감정으로 늦게 깨달음을 한탄했다.
라집은 나이 20세에 왕궁에서 계를 받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얼마 뒤에 라집의 어머니는 천축으로 떠나면서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 나라가 곧 쇠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떠납니다.”
그리고 천축으로 가서 3과(果)에 올랐다. 라집의 어머니는 떠날 때에 라집에게 말하였다.
“방등의 깊은 교리는 진단(眞丹)에 크게 떨칠 수 있으니, 그것을 동토(東土)에 전하여라. 그것은 너의 힘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는 이익이 없는데 그렇게 하겠는가?”
라집이 답하였다.
“대사(大士:보살)의 도는 제 몸을 버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큰 교화를 펴서 몽매한 사람들을 깨치게만 한다면, 내 몸은 확탕(鑊湯)의 고통을 받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래서 구자국의 호신사(乎新寺)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에 절 곁의 옛 궁전에서 처음으로 『방광경(放光經)』을 얻어 비로소 읽기 시작했는데, 악마가 와서 글자를 덮어 빈 책만 보일 뿐이었다. 라집은 그것이 악마의 짓임을 알고 맹세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악마가 떠나고 글자가 나타났으므로통합뷰어
그대로 계속해 익혀 외웠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는 지혜로운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읽는가?”
라집이 말했다.
“너는 조무래기 악마다. 빨리 사라져라. 내 마음은 대지와 같아서 움직일 수 없느니라.”
거기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대승의 경론을 두루 외워 그 깊은 뜻을 다 통달했다. 구자왕은 그를 위해 금사자좌(金師子座)를 만들고 대진(大秦)의 비단요를 깔고, 라집으로 하여금 올라 앉아 설법하게 했다. 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스승은 아직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몸소 가서 맞이해 예배할 것이니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금 있다가 반두달다(盤頭達多) 대사(大師)가 멀다 않고 그곳에 왔다. 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대사께서 어찌 여기까지 멀리 오십니까?”
반두달다가 말하였다.
“첫째는 제자의 깨침이 비상하다 들었고, 둘째는 대왕이 불도를 크게 돕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험난함을 무릅쓰고 신국(神國)까지 멀리 왔습니다.”
라집은 반두달다 대사를 만나게 되자 본래의 원을 풀게 됨을 기뻐했다. 라집이 『덕녀문경(德女問經)』을 강설하니, 이것은 인연과 공(空)과 가(假)를 많이 밝힌 것으로서, 옛날 대사와 함께 믿지 않던 것이기 때문에 먼저 강설한 것이다.
대사가 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대승에서 어떤 다른 상(相)을 보았기에 그것을 숭상하려 하는가?”
라집이 대답했다.
“대승은 깊고 깨끗해 유(有)의 법이 다 공(空)임을 밝혔으나, 소승은 치우치고 좁아 이름과 상(相)이 많이 걸립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일체는 공이라 말하는 것은 매우 두렵다. 왜 유(有)를 버리고 공을 애착하는가. 옛날 미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직사(織師:베 짜는 사람)를 시켜 극히 고운 베를 짜라 했다. 직사는 특히 유의하여 티끌처럼 가늘게 짰다. 그래도 미친 사람은 거칠다고 나무랐다. 직사는 화를 내어 허공을 가리켜 보이면서 ‘이것이 그 가는 실올이다’라고 했다. 미친 사람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자, 직사는 ‘이 실은 극히 가늘어 내가 교묘하게 짜면서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했다. 미친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그것을 직사에게 주고, 직사도 받는 시늉을 내었다. 다 훌륭한 상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그대가 공법이라 하는 것도 이런 것이다.”
라집이 되풀이해 대승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문답하기를통합뷰어
한 달이 지나서야 대사는 비로소 그것을 믿고 따르면서 감탄하기를 “스승이 알지 못하고 도리어 깨우침을 받는다더니, 이제야 그것을 경험하겠구나” 하고 라집을 스승으로 삼아 예를 갖추고는 말하였다.
“화상(和尙)은 나의 대승(大乘)의 스승이요,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입니다.”
서역의 여러 나라는 다 라집의 신준(神俊)함에 감복했다. 그리하여 강설하러 갈 때마다 여러 왕들이 다 법좌 곁에 꿇어앉아 라집으로 하여금 그들을 밟고 법좌에 오르게 하였으니, 그의 존중 받음이 이와 같았다.
라집의 도가 이미 서역에 흐르고 그 이름이 동천(東川)에 퍼졌을 때, 부견(符堅)은 참람하게 관중왕(關中王)이라 일컬었다. 외국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의 아우 등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했다. 부견은 그들을 집견했다. 두 왕이 부견에게 말하였다.
“서역에는 보배가 많이 난다 합니다. 군사를 주시면 가서 정벌하여 우리에게 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부견의 건원(建元) 13년 정축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보입니다. 큰 덕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들어와 중국을 도울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들으니, 서역에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襄陽)에 사문 도안(道安)이 있다는데, 이들이 혹 그들이 아닌가.”
곧 사자를 보내어 그를 청했다. 17년 2월에 선부왕(鄯部王)ㆍ전부왕(前部王) 등이 또 군사를 청해 서역을 치려고 했다. 18년 9월에 부견은 효기(驍騎) 장군 여광(呂光)과 능강(陵江), 장군 강비(姜飛)를 시켜, 전부왕 및 차사왕(車師王) 등을 데리고 군사 7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구자국과 오기국 등 여러 나라를 치게 했다. 출발에 다달아 부견은 건장궁(建章宮)에서 여광을 전송하면서 말하였다.
“대개 제왕(帝王)은 하늘에 응해 다스리는 것이요, 나는 창생(蒼生)을 사랑함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어찌 그 땅을 탐해서 치는 것이겠는가. 그것은 실로 도를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 들으니 서역의 구마라집이라는 사람은 법상(法相)을 깊이 알고 음양에 능숙하여 후학(後學)들의 종(宗)이 된다 하므로 나는 매우 사모한다. 현철(賢哲)은 나라의통합뷰어
큰 보배이니, 만일 구자국을 정벌해 이기거든 라집을 곧 우리에게 보내라.”
여광의 군사가 이르기 전에 라집은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운수가 쇠잔하여 반드시 침공하는 적이 있을 것이며, 동쪽 나라의 사람이 동방에서 올 것이니, 부디 그들을 잘 받들고, 그 칼날에 항거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백순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나가 싸웠다. 여광은 드디어 구자국을 쳐부순 뒤에,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아우 진(震)을 왕으로 세웠다. 여광은 라집을 얻고는 그 지혜와 도량은 알지 못하고,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여 범인으로 희롱했다. 여광이 돌아가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두어 군사들이 다 쉬고 있을 때, 라집이 여광에게 말하였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니, 군사를 저 언덕 위로 옮기시오.”
여광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 비가 쏟아지면서 큰 홍수가 일어, 물 깊이가 여러 길이어서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비로소 가만히 라집을 이인(異人)이라 생각했다. 라집이 여광에게 말했다.
“여기는 흉한 땅이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운수를 헤아리건대, 빨리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중도에 반드시 복된 땅이 있으니, 그곳이 살 만할 곳입니다.”
여광이 이 말을 따라 양주(凉州)로 갔는데, 부견이 이미 요장(姚萇)의 해침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여광의 3군(軍)은 대림성(大臨城) 남쪽에서 상복을 입었다. 이리하여 가만히 관외왕(關外王)이라 일컫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했다. 태안 2년 정월에 고장(姑藏)에 큰 바람이 불었다. 라집이 “이것은 좋지 못한 바람이다. 반드시 간사한 반역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평정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라집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라집은 양주에서 여러 해를 지냈지만 여광의 부자가 도를 펴지 않았기 때문에, 라집은 아는 것을 깊이 간직한 채 교화를 펼 길이 없었다. 부견은 이미 죽었는지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장이 참람하게 관중을 점유하였으면서도 그 높은 이름을 누르고, 마음을 비우고 라집에게 오기를 청했다. 여광은 라집이 지혜와 앎이 많기 때문에, 요장이 동방으로 들어옴을 허락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요장이 죽고 그 아들 흥(興)이 왕위를 물려받자, 다시 사자를 보내어 라집을 간절히 청했다.
홍시(弘始) 3년 3월에 연리지(連理枝)의 나무가 사당의 뜰에 나고, 소요원(逍遙園)의 파가통합뷰어
정구지로 변했다. 그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하니,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5월에 흥(興)이 농서공(隴西公) 석덕(碩德)을 보내어 서방의 여융(呂隆)을 정벌하여 크게 부수니, 9월에 여융이 글을 올려 와서 항복했다. 그래서 비로소 라집을 맞이하여 관중으로 들어왔다. 그 해 10월 20일에 장안(長安)에 이르니, 요흥이 국사(國師)의 예로 대우했다. 그는 라집을 못내 사랑하여 서로 마주해 이야기하면 종일토록 잡아 두고 심오한 이치를 연구할 때는 해가 다하도록 게으름을 잊었었다.
불법이 동방으로 들어오기는 한(漢)나라 명제(明帝)로 시작하여, 위(魏)나라와 진(晋)나라를 거치면서 경론이 차츰 많아졌다. 그러나 지루가참과 축법호가 번역한 것은 문장과 뜻에 많이 막히고 걸렸다. 요흥은 젊어서부터 삼보(三寶)를 숭상하였으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람을 저울질해 보았다. 라집이 거기 가서 머무르게 되자, 이에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으로 라집을 청해 여러 경전을 번역해 내었다. 라집은 이미 대개 다 외우고 있었으므로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더구나 한어(漢語)에도 통달하였으므로 음역(音譯)도 유창했다.
라집이 구역(舊譯)을 보았을 때 경전의 뜻에 잘못이 많았으니, 그것은 다 먼저 번역한 것이 뜻을 잃었기 때문에 범본(梵本)과 맞지 않았다. 요흥은 사문 승략(僧★)과 승천(僧遷)ㆍ법흠(法欽)ㆍ도류(道流)ㆍ도상(道常)ㆍ도표(道標)ㆍ승예(僧叡)ㆍ승조(僧肇) 등 8백여 인을 시켜 라집에게 뜻을 묻게 하고, 다시 대품(大品)을 번역하게 했다. 라집은 범본을 잡고 흥은 구역의 경전을 가지고 서로 대조해 교정할 때, 그 혼잡한 문장과 구역의 잘못된 곳의 뜻이 다 원만히 통하게 되었다. 대중은 모두 마음으로 감복하고 기뻐하며 찬탄했다.
요흥은 불도의 이치가 심오하고 그 행이 선함으로, 믿음은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요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 뜻을 9경(經)에 붙이고 그 마음은 12부(部)에 심취하였다. 이리하여 삼세(三世)를 통하는 논을 지어 인과(因果)를 보이기에 힘쓰니, 왕공(王公) 이하가 모두 그 가르침을 공경하고 찬탄했다. 대장군 상산공(常山公) 현(顯)과 좌장군 안성후(安城侯) 숭(嵩)이 모두 인연과 업을 독실히 믿고, 라집을 여러 번 장안사(長安寺)로 청해, 새 경전을 강설하고통합뷰어
대소승의 경론 390여 권을 계속해 번역하니, 그 이름들은 별전(別傳)에 있다. 그것은 다 신기한 근원을 밝히고 깊은 이치를 드러내니, 그 때 사방의 의사(義士)들이 만리 밖에서도 모두 모여들었다.
그 성대한 사업은 구원하고 웅대하여 지금도 본받고 우러르니, 제방의 도인과 속인으로서 뛰어나고 어진 사람들이었다. 즉 저 석혜원(釋慧遠) 등은 학문은 모든 경전을 꿰고 동량(棟梁)으로서 교화를 남겼다. 그러나 성인이 떠나신 지 오래여서, 의문을 풀 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라집에게 물은 것이다.
무릇 국왕을 뵈올 때는 반드시 그 덕을 찬탄하고 부처님을 뵈옵는 의식은 노래로 찬탄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경전의 게송이 다 그 식이다. 다만 범어를 진어(秦語)로 고침에 문장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비록 대의는 맞다 하더라도 그 문체가 현저히 다르니, 마치 씹던 밥을 남에게 주면 그 맛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구역질나게 하는 것과 같다.
라집은 일찍이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의 게송을 주었다.

심산(心山)에 밝은 덕을 기르나니
그 향기가 만 ‘유수’에 퍼지네.
애달프다, 난새여. 오동나무에서 외롭구나.
맑은 울음 소리는 9천(天)에 사무치네.

모두 10게(偈)로 되었는데, 언사로 비유한 것이 모두 그러하다.
라집은 본래 대승을 좋아하여 그 포교에 뜻을 두었는데, 항상 “내가 만일 붓을 들면 대승 아비담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전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진(秦)나라에는 나를 깊이 아는 사람이 적으니, 여기서 날개가 부러졌거늘 장차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하고 탄식하면서 처연히 말을 끊었다.
다만 요흥을 위해 『실상론(實相論)』 2권을 짓고, 또 『유마경(維摩經)』을 주해할 때는, 말을 꺼내면 문장을 이루어 다시 고칠 것이 없었으며, 말과 비유는 간곡하고 간략하여 모두가 심오하고 미묘하였다.
라집은 사람됨이, 그 정신은 맑게 트이고 의젓하여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상대를 따라 깨우침은 견줄 사람이 적었다. 독실한 성품은 어질고 후하여 널리 사랑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으며, 자기를 비우고 잘 깨우치되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요흥이 일찍이 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는 총명이 뛰어나 천하에 둘이 없습니다.통합뷰어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면 그 법의 종자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리니, 어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에 배도(杯度) 비구는 팽성(彭城)에 있다가 라집이 장안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탄하였다.
“내가 이 사람과 이별한 지 3백여 년인데, 아득히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으니, 이제 내생에나 만나기를 기다릴 뿐이겠구나.”
라집은 죽기 전에 4대(大)가 편치 못함을 깨닫고 말하였다.
“내가 번역한 것이 후세에 전해져서 모두 다 함께 널리 퍼지기를 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진실로 발원하나니, 만일 내가 전역한 것에 틀림이 없으면, 내 몸을 태운 뒤에도 내 혀는 타지 않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위진(僞秦) 홍시(弘始) 11년 8월 20일에 장안에서 생을 마치니, 이 해는 진(晋)나라 의희(義熙) 5년이다. 소요원(逍遙園)에서 외국의 법에 의해 화장하니, 섶이 다하고 몸은 다 타도 그 혀만은 타지 않았다.

② 송(宋)나라 사문 석법현(釋法顯)
송(宋)나라 강릉(江陵) 신사(新寺)의 석법현(釋法顯)은 성은 공(龔)씨이며, 평양(平陽)의 무양(武陽) 사람이다. 그는 뜻과 행이 밝고 민첩하며 위의와 법도가 정숙하였다. 항상 경과 율이 잘못되고 빠져 있는 것을 개탄하여 찾고 구하려고 마음먹었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년에 동학(同學)인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유사(流沙)로 건너갔다. 하늘에는 나는 새가 없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이 없었다. 사방을 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하여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해를 보아 동서를 가늠하고 사람의 뼈로 가는 길을 표할 뿐이었다. 여기에는 뜨거운 바람과 사나운 귀신이 자주 있어서 이것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그러나 법현은 모든 것을 인연과 운명에 맡기고 험난한 곳을 자꾸 지나갔다. 얼마 후에 총령(葱嶺)에 이르렀다. 총령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으며, 사나운 용이 독한 바람을 토하고 모래와 자갈을 퍼부었다. 산길에는 험난하고 위태로운 천 길의 절벽이 서 있었다. 옛날에 돌을 파서 통하는 길을 만들고 곁에는 사닥다리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무릇 7백여 군데나 그런 곳을 지나야 했다. 또 달아 놓은 밧줄을 밟고 수십 군데의 강을 건넜으니, 이는 한(漢)나라 때통합뷰어
장건(張騫)의 아버지도 가지 못했다.
다음에는 설산(雪山)을 지나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찬바람을 만났다. 혜경이 벌벌 떨면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법현에게 말했다.
“나는 죽겠네. 자네는 먼저 가게. 나와 같이 죽을 것 없네.”
말을 마치자 이내 죽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했다.
“본래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구나. 운명이니 어찌하랴.”
다시 힘을 내어 외로이 걸어갔다. 끝내 험난한 산을 다 지났으니, 무릇 40여 국을 지났다. 장차 천축에 이르게 되었는데, 왕사성(王舍城)에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 어떤 절이 있어서, 날이 어두워 지나게 되었다. 법현이 기사굴산으로 가려 하자, 그 절의 스님이 충고했다.
“길도 매우 험난하거니와 또 검은 사자가 자주 오가면서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어떻게 가려 하십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걸었으니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으로 가겠습니다. 신명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요, 드나드는 숨길은 보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여러 해 동안 쌓은 정성을 다 와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험난함이 있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말리지 못하고 두 스님을 딸려 보냈다. 법현이 영취사에 도착하자 저녁이 되려 했다. 그래서 머물러 자려 하자 두 스님은 겁이 나서 법현을 버리고 돌아갔다. 법현은 혼자 산중에 머물면서 향을 피우고 예배했다. 옛 자취를 간절히 생각하니, 성인의 위의를 직접 뵈옵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와서 법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 외우기를 그치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했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고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빌었다.
“만일 네가 나를 해치려고 하거든 내가 경을 다 외울 때까지 기다리고,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하거든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한참 있다가 사자는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돌아올 때는, 길이 깊숙이 막혔는데 조그만 오솔길이 트여 있었다. 마을에 이르기 전에 한 도인을 갑자기 만났다. 나이는 90세쯤 되었고 옷과 행색은 허술하지만 정신의 기운은 매서웠다. 법현은 그의 품격이 고상한 줄은 알았으나 그가 신인(神人)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뒤에 또 젊은스님을 만나 법현은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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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늙은이는 누군가?”
그가 답하였다.
“두타행을 닦는 큰 제자 가섭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 다시 그를 쫓아 산으로 갔으나, 가로누운 돌이 집 어귀를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면서 거기서 떠나 가시국으로 갔다. 그 나라에 귀가 흰 용이 있어서, 늘 여러 스님에게 풍년이 들게 해준다고 약속하였는데, 다 그 징험이 있었다. 스님들은 그를 위해 용의 집을 짓고 복된 음식을 차렸다. 여름 안거(安居)를 마칠 때마다 그 용은 조그만 뱀으로 화(化)하였는데, 두 귀가 모두 희었으므로 대중은 다 그것이 용임을 알았다. 그래서 구리 발우에 타락을 담고 거기에 용을 두고는, 윗자리에서 아랫자리까지에 돌리면 그것은 곧 용으로 화해 가버렸다. 이 용은 해마다 한 번씩 나오는데 법현도 그것을 직접 보았다.
법현은 그 뒤에 중천축에 이르러 마갈제읍(摩竭提邑) 파련불(波連弗)에 있는 아육왕탑 남쪽의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고,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ㆍ『잡아비담심선경(雜阿毘曇心線經)』ㆍ『방등경』ㆍ『열반경』 등을 얻었다. 법현은 거기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어와 범서를 배워 비로소 스스로 쓰고 베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경과 불상을 가지고 상인(商人)에게 부치고 사자국으로 갔다. 법현과 함께 여행하던 10여 명 중에 혹은 그대로 뒤처지기도 하였고, 혹은 죽기도 하였으므로 그림자를 돌아봄에 혼자뿐이었는지라 항상 슬픔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옥상(玉像) 앞에서 어떤 상인이 진(晋)나라에서 나는 비단으로 만든 흰 부채 한 자루를 불상 앞에 공양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거기서 2년 동안 머물면서 다시 『미사색률』과 『장아함경』ㆍ『잡아함경』 및 『잡장(雜藏)』을 얻으니, 이것들은 한(漢)나라에는 없는 것이었다.
상인들의 큰 배에 타고, 바다를 돌아올 때에 그 배에는 2백여 인이 있었다. 폭풍을 만나 물이 배에 들어와 모두 당황하여, 곧 모든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바다에 버렸다. 법현은 그 불경과 불상도 버려질까 두려워하여, 일심으로 관세음을 생각하고 또 한나라의 여러 스님들에게 귀명했다. 배는 바람에 맡겨져 아무 탈 없이 갔다.통합뷰어
10여 일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했다. 거기서 5월 동안 머물다가 다시 다른 상인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갔다. 돛을 단지 20여 일 되는 밤에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배를 뒤흔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 의논했다.
“이 사문을 태워서 우리가 다 낭패를 당하고 있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다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밀어 내려 했다. 법현의 단월이 소리를 가다듬어 상인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이 사문을 내려 놓으려면 나도 내려 놓아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한나라 제왕님은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을 존경하신다. 내가 만일 저기 가서 저 제왕님께 이 사실을 아뢰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죄벌을 주실 것이다.”
상인들은 서로 돌아보고 얼굴빛이 변하면서 모두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물도 양식도 다 떨어지고, 오직 바람에 맡기고 흐름을 따를 뿐이었는데, 갑자기 언덕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맹아주와 콩 등 채소를 보고는 그곳이 한나라 땅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곳이 어떤 지방인지는 알 수 없어, 곧 배를 타고 갯벌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만났다. 법현이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무슨 지방입니까?”
그들은 답하였다.
“여기는 청주(淸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 남쪽 기슭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이 일을 그 고을 태수 이의(李嶷)에게 아뢰었다. 이의는 본래부터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터라, 갑자기 멀리서 사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몸소 나가 맞이하고 위로했다. 법현은 경과 불상을 가지고 그를 따라 돌아왔다. 얼마 있다가 남방으로 가려 하자, 청주 자사(刺史)가 만류하면서, 겨울이나 지내고 가라 했다. 법현이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돌아갈 수 없는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입니다. 어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끝내 남쪽 경사(京師)로 가서 외국의 선사(禪師) 불타발타(佛馱跋陁)를 모시고, 도량사(道場寺)에서 경ㆍ율ㆍ논 백여만 자를 번역하고, 이것을 널리 펴고 교화하여 모두 보고 듣게 했다.
성명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주작문(朱雀門) 가까이 살았다. 대대로 불법을 받들면서 불경 한 부를 베껴 독송하고 공양했다. 그러나 경실(經室)이 따로 없어 다른 책과 한 집에 두었다. 뒤에 갑자기 화재가 일어나 그 집에까지 붙어,통합뷰어
모든 세간이 다 탔으나, 『열반경』만은 그대로 있었으며, 불길이 침범하지 않아 책 빛깔도 변하지 않았다. 경사 사람들은 모두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이외의 다른 경(經)과 율(律)까지를 모두 신묘하다고 찬탄했다.
법현은 그 뒤에 형주(荊州)로 가서 신사(新寺)에서 생을 마치니, 춘추는 86세였고 모두 슬퍼하고 아까워했다. 그가 여러 나라로 여행한 것은 대전(大傳)에 따로 있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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