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 상권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 상권
문수사리신통력경(文殊師利神通力經) 또는 승금색광명덕녀경(勝金色光明德女經)이라고도 한다.
수(隋)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 한역
김달진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의 무리 5백 명과 큰 보살의 무리 8천 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왕사성에 한 음녀(婬女)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은 승금색광명덕(勝金色光明德)이었다. 그 여자는 숙세(宿世) 선근(善根)의 인연으로 형모(形貌)가 단정하고 여러 가지 상(相)을 구족하였으며, 몸은 진금색(眞金色)으로서 광명이 빛나고 용모와 위풍이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 세상에 드문 모습이었다. 정신과 지혜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변재(辯才)는 걸림이 없었으며, 음성과 말이 맑고 오묘하며 심원(深遠)하고 유연(柔軟)하였다. 말할 땐 항상 웃음을 머금고 거칠고 추악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이리 저리 살피고 나아가고 멈추는 모습이 편안하고 세심하였으며, 그녀가 있는 곳은 가건 머물건 앉건 눕건 땅이 모두 금빛으로 광명이 빛났으며, 입는 옷마다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 역시 모두 금빛으로 변했다.
당시 왕사성의 모든 사람들은 왕자건 대신의 아들이건 장자의 아들이건 부호의 아들이건 보는 자마다 탐욕에 물들어 마음을 두고 애착(愛着)하였으며 연모의 정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 금색녀가 마을에 있거나 거리에 있거나 시장에 있거나 강가 언덕에 있거나 동산과 숲의 노는 곳에 있으면 남자건 여자건 어린 사내아이건 어린 계집아이건 모두들 그녀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면서 싫증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위덕(上威德)이라는 장자의 아들이 그녀와 즐기고 싶어서 많은 재보(財寶)를 주고는 서로 합의하고 함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랐다. 그 수레는 전체가 금ㆍ은ㆍ유리ㆍ마니(摩尼)ㆍ진주 등 매우 오묘한 온갖 보물로 엄숙하고 장엄하게 장식되었고, 보당(寶幢)과 미묘한 번개(幡蓋)를 세웠으며,
보좌(寶座)와 화만(華鬘)에 바르는 향과 가루 향과 같은 온갖 것을 배합한 뛰어난 향을 발랐다. 첨복화(瞻蔔華)로 영락(瓔珞)을 만들어 그 몸을 장식하고는 함께 보배 수레에 올랐다.
보배 수레 앞에서는 온갖 기녀와 악사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그 수레 뒤에서는 또 온갖 맛있는 음식과 의복과 침구(寢具)를 가지고 차례대로 따르며 동산의 숲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중들은 남자건 여자건 어린 사내아이건 어린 계집아이건 모두들 쫓아가며 좌우에서 구경하였다.
그때 문수사리(文殊師利) 동자는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일체 중생에게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떤 중생이 대승(大乘) 가운데서 교화를 감수(堪受)할 수 있을까? 어떤 중생이 마땅히 신통으로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중생이 마땅히 과거의 업연(業緣)으로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중생이 마땅히 정법(正法)을 듣고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 다음, 금색녀와 장자의 아들이 함께 보배 수레를 타고 동산의 숲으로 가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는 곧 근성(根性)의 차별을 관(觀)하고, 차별을 관한 뒤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여자는 과거 선업(善業)의 인연으로 교화를 감수할 수 있다. 나의 법을 들으면 곧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문수사리가 신통력으로 몸에서 광명을 놓자 그 빛이 햇빛마저 가려 모두 사라지게 하였으니, 하물며 다른 빛이겠는가. 이때 문수사리는 입고 있던 옷과 얼굴에서 각각 빛을 비춰 1유순(由旬)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그 많은 무리들이 모두 보게 하였다. 또 온갖 여러 가지 보배와 영락과 천관(天冠)과 비인(臂印)으로 그 몸을 장엄하여 보는 자들이 탐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한 뒤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길에 서 있었다.
빛으로 여자의 몸과 장자의 아들을 비추자
말과 보배 수레에 있던 광명은 모조리 어둠속에 묻혀버렸으니, 마치 먹 덩어리가 진금(眞金)과 나란히 있는 것처럼 전혀 빛나지 않았다. 그 금색녀는 문수사리가 온갖 보배로 장엄하고 옷이 청결하며 광명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하늘의 동자라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몸과 장자의 아들에 대해 비루하고 추악하다는 생각을 일으켜 다시는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는 문수의 몸과 옷에 대해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켜 남모르게 혼자서 생각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 가서 함께 즐겁게 놀며 마음 내키는 대로 욕망을 따라주고 그의 옷을 얻으리라.’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문수사리의 위신력으로 비사문왕(毘沙門王)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여자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지금 저분에게 탐욕의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분은 청정하여 탐욕이 없기 때문이다.”
금색녀가 말하였다.
“이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비사문(毘沙門)이 말하였다.
“이분은 바로 문수사리(文殊師利) 동자보살이시다.”
금색녀가 말하였다.
“무엇을 보살이라 합니까? 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늘을 말합니까, 그것은 야차(夜叉)입니까, 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입니까, 그것은 제석(帝釋)입니까, 그것은 범천(梵天)입니까, 그것은 사천왕천(四天王天)입니까?”
비사문이 말하였다.
“하늘이 아니며, 야차가 아니며, 건달바가 아니며, 아수라가 아니며, 가루라가 아니며, 긴나라가 아니며, 마후라가가 아니며, 제석도 아니며, 범천도 아니며, 사천왕천도 아니다. 그와 같은 무리는 모두 보살이 아니다. 보살이란 일체의 중생이 바라고 구하는 대로 그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런 이를 보살이라 한다.”
이때 승금색녀(勝金色女)는 곧 이렇게 생각하였다.
‘말한 것과 같다면 내가 지금 옷을 구하면
반드시 얻겠구나.’
곧 수레에서 내려 문수사리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이르러서는 말하였다.
“문수사리님, 입고 계신 옷을 저에게 베풀어 주시길 원합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누이여, 그대가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대에게 옷을 주겠습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문수사리님, 무엇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대의 몸이 곧 보리(菩提)입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왜 제 몸이 곧 보리입니까? 제가 이해하도록 거듭 자세히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여인이 게송을 설하여 옷을 구하였다.
문수께선 보리의 원 일으키신 지 오래 되셨으니
몸에 입으신 옷을 지금 저에게 주실 수 있으리다.
만약 베풀지 못한다면 보살이 아니니
말라버린 강(江)에 물이 없음과 같으리라.
이때 문수사리가 게송으로 답하였다.
그대가 만약 보리심을 낼 수 있다면
내 마땅히 소원에 따라 그대에게 옷을 주리다.
만약 보리가 견고한 사람이 있다면
일체 천인(天人)이 모두 공양하리라.
이때 승금색녀(勝金色女)가 다시 게송으로 물었다.
보리에는 어떤 뜻이 있고
보리는 누구에게서 얻으며
보리는 누가 줄 수 있으며
보리는 어떤 행(行)으로 이룹니까?
이때 문수사리가 금색녀에게 말하였다.
“지금 현재 부처님께서 계시니 그 명호는 석가모니 다타아가도(多他阿伽度:如來)ㆍ아라하(阿羅訶:應供)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正等覺)이십니다. 그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몸과 보리(菩提)는 모두 평등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 몸에 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가 있습니까?”
이 여인은 과거의 선근인연(善根因緣)으로 이 말을 듣고는 곧 법의 광명[法光]을 얻었다. 법의 광명을 얻은 다음 문수에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의 이 몸에는 5음과 12입과 18계가 있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대의 뜻에는 어떻습니까? 색이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보리 또한 그와 같아서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색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 또한 평등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대의 뜻에는 어떻습니까?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 깨닫거나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 또한 평등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그대의 뜻에는 어떻습니까? 이 색을 두고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안에 있다, 밖에 있다, 중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파리(頗梨)ㆍ잡색(雜色)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보리도 역시 그와 같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색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 또한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수ㆍ상ㆍ행ㆍ식을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안에 있다, 밖에 있다, 중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청ㆍ황ㆍ적ㆍ백ㆍ파리ㆍ잡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색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수ㆍ상ㆍ행ㆍ식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또 5음(陰)은 허깨비[幻]처럼 체성(體性)이 실답지 않으니, 전도(顚倒)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보리도 역시 허깨비와 같아서 체성이 실답지 않으며, 전도된 까닭으로 세속에서 생을 설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허깨비가 평등한 까닭에 5음이 평등하고, 허깨비가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은 꿈과 같아 체성이 불생(不生)입니다. 보리 역시 그와 같아 체성이 불생입니다. 이와 같이 꿈이 평등한 까닭에 5음도 평등하며 꿈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은 아지랑이와 같아 업연(業緣)으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보리 역시 아지랑이와 같아 업(業)도 없고 과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지랑이가 평등한 까닭에 5음이 평등하며, 아지랑이가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은 거울 속 형상과 같아 체성이 공(空)하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습니다. 보리 역시 이와 같아 가는 일이 없고 오는 일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거울 속 형상이 평등한 까닭에 5음이 평등하며, 거울 속 형상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은 다만 거짓 이름일 뿐이며, 보리 역시 이와 같아 다만 거짓 이름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5음이 평등한 까닭에 보리도 평등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은 짓는 사람이 없으니, 짓는 사람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체성(體性)이 없으니, 체성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불생(不生)이니, 생(生)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무상(無常)하니, 상(常)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즐거움이 없으니, 즐거움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청정하지 않으니, 청정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취(取)함이 없으니, 취함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집이 없으니, 집을 벗어났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가고 오는 일이 없으니, 가고 오는 일이 없다는 뜻이 곧 보리입니다.
5음은 성인(聖人)의 법론(法論)이고, 보리 역시 성인의 법론입니다. 이와 같이 논(論)과 비론(非論)의 법과 5음의 체성을 여래께서 일체를 다 깨달으셨기에 이를 보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5음의 체성(體性)이 곧 보리의 체성이고, 보리(菩提)의 체성은 곧 일체 모든 부처님의 체성입니다. 그대 몸속 5음의 체성이 곧 일체 모든 부처님의 체성인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체성이 곧 일체 중생 5음의 체성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설한 것입니다.
또 5음을 깨닫는 것을 보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5음을 떠나 부처님이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고, 보리를 떠나 부처님이 5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방편의 지혜이니, 일체 중생은 모두 보리와 같고 보리도 또한 일체 중생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설한 것입니다.
또 소위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라는 4대(大)의 법(法)이 생기지만 그 지계(地界)는 나[我]가 아니며, 중생(衆生)이 아니며, 수명(壽命)이 아니며, 포사(哺沙:丈夫)도 아니며 부가라(富伽羅:補特伽羅)도 아닙니다. 지계(地界)의 평등함이 곧 보리니, 과거에는 취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계(水界)의 평등함이 곧 보리니, 체성이 불생(不生)이기 때문입니다. 화계(火界)의 평등함이 곧 보리니, 체성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계(風界)의 평등함이 곧 보리니, 체성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계의 체성을 여래께선 깨달으셨기 때문에 보리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계ㆍ화계ㆍ풍계를 여래께선 깨달으셨기 때문에 보리를 얻으신 것입니다. 지의 성품을 깨닫는 것, 이것을 곧 보리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지계는 물을 모르고, 수계는 불을 모르며, 화계는 바람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여러 요소들은 이름이 없고 설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그대의 몸에서 눈이라는 법이 생겼습니까?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생겼습니까? 누이여, 이 가운데 눈은 공(空)한 것이니 눈의 공한 체성이 곧 보리입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은 공한 것이니, 뜻의 공한 체성이 곧 보리입니다.
또 만약 눈의 체성이 공하다면 색은 설할 수 없으니, 색의 공한 체성이 곧 보리입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체성이 공하면 일체의 법은 설할 수 없으니, 법의 공한 체성이 곧 보리입니다.
또 눈은 색을 취하지 않고 보리 역시 눈처럼 색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은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법을 취하지 않으며, 보리 역시 그와 같아 일체의 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안식계(眼識界)는 색계(色界)에 머물지 않고, 안식계(眼識界)와 색계(色界)는 보리에 또한 머물지 않습니다. 이식계(耳識界)와 비식계(鼻識界)와 설식계(舌識界)와 신식계(身識界)도 마찬가지며 의식계(意識界)는 법계(法界)에 머물지 않고, 이와 같이 의식계와 법계는 보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안식계(眼識界)와 보리계(菩提界)는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나아가 의식계와 보리계도 둘이 없고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설한 것입니다.
또 눈을 깨닫는 것, 이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을 깨닫는 것, 이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눈의 체성은 공하니, 이와 같이 체성(體性)이 공(空)함을 깨달을 수 있으면 곧 이것이 보리입니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체성은 공하니, 이것을 깨달을 수 있으면 이것이 곧 보리입니다.
또 눈의 체성은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 이것이 곧 보리입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체성은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 이것이 곧 보리입니다.
눈에는 주인이 없고 취(取)하는 자도 없으며, 보리 또한 주인이 없고 취하는 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역시 주인이 없고 취하는 자가 없으며, 보리도 역시 주인이 없고 취하는 자도 없습니다.
눈에는 남자라는 법과 여자라는 법이 없으며 또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보리에는 남자라는 법과 여자라는 법이 없으며 또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는 남자라는 법과 여자라는 법이 없으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은 또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보리에는 남자라는 법과 여자라는 법이 없으며, 보리 역시 남자가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또 눈[眼]과 색(色)은 여여(如如)로부터 온 것이니, 이와 같음을 깨닫는 까닭에 보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뜻[意]과 법(法)은 여여(如如)로부터 온 것이고, 이와 같음을 깨닫는 까닭에 보리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그대의 몸에는 나[我]가 없고, 중생이 없고, 수명(壽命)이 없고, 포사(脯沙)가 없고, 부가라(富伽羅)가 없고, 사람[人]이 없고, 마나마(摩那摩)1)가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받는 자[受者]가 없고, 보는 자가 없고, 듣는 자가 없고, 냄새 맡는 자가 없고, 맛보는 자가 없고, 느끼는 자가 없고, 아는 자도 없습니다. 그 보리 역시 나가 없고, 중생이 없고,
수명이 없고, 포사가 없고, 부가라가 없고, 사람이 없고, 마나마가 없고, 짓는 자가 없고, 받는 자가 없고, 보는 자가 없고, 듣는 자가 없고, 냄새 맡는 자가 없고, 맛보는 자가 없고, 느끼는 자가 없고, 아는 자도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법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리(菩提)라고 설한 것입니다.
또 이 몸은 앎[知]이 없고, 깨달음[覺]이 없고, 지음[作]이 없는 것이 마치 풀이나 나무, 돌이나 벽과 같습니다. 안의 지계(地界)나 밖의 지계를 땅의 체성이라고 하는데, 이 지계의 성품을 여래께서는 반야지(般若智)의 힘으로 이미 깨달으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의 몸이 곧 보리라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또 누이여, 그대는 마음ㆍ뜻과 화합하여 헤아리고 분별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과 뜻의 헤아림과 분별은 깨달음이 없고 앎도 없습니다. 피부에 있지 않고, 근육에 있지 않고, 골수(骨髓)에 있지 않고, 모발(毛髮)에 있지 않고, 손톱에 있지 않고, 안과 밖에도 있지 않고,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지 않습니다.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며, 확고하게 머무르지도 않고 확고하게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며, 여기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색(色)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장애하는 것도 없고, 분별도 없고, 쥘 수 없고, 화합하지 않고, 집에 머물거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며, 청정하고 가장 청정하며, 광명이 밝게 빛납니다. 그 마음과 뜻은 헤아리고 분별하지만 번뇌와 화합하지 않고 또한 청정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체성이 깨끗한 까닭에 번뇌와 화합하지 않으며, 화합하지 않는 까닭에 청정한 광명인 것입니다.
또 그 광명은 몸이 없습니다. 몸이 없기 때문에 번뇌와 화합하지 않으며 역시 청정한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체성이 곧 보리이며, 보리의 체성이 곧 음ㆍ계ㆍ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대 몸의 음ㆍ계ㆍ입의 성품이 곧 보리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보리라 하기 때문입니다. 음ㆍ계ㆍ입을 떠나
일 가운데서 보리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음ㆍ계ㆍ입을 깨달으면 곧 이것이 보리입니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법이 평등함을 깨달으면 이를 보리라 한다고 제가 설한 것입니다.”
이때 문수사리 동자가 이 법을 설하고 나자 때마침 허공에 5백의 여러 하늘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다. 또 승금색광명덕녀(勝金色光明德女)를 따르던 남자와 여자와 어린 사내아이 어린 계집아이 등 200여 명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으며, 하늘 사람 60명이 모든 법에서 법안(法眼)2)이 청정해졌다.
이때 승금색녀(勝金色女)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였고, 마음이 청정해졌다. 그녀는 5체(體)를 땅에 던져 문수사리의 발에 예배하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法]에 귀의합니다. 승가(僧伽)에 귀의합니다.”
3보(寶)에 귀의한 다음 범행(梵行)인 5계(戒)를 받고, 계법(戒法)을 받은 다음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 마음을 낸 다음에 문수(文殊)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게 되었으니 일체 중생이 안온(安穩)함을 얻게 하기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킵니다. 문수사리께서 저를 위해 이 보리의 법을 설하심과 같이 저도 마땅히 따라 행하며 또한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해 이와 같은 법을 설하겠습니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불법은 적멸(寂滅)하고 대적멸(大寂滅)합니다. 저는 알지 못한 까닭에 나쁜 각관(覺觀)3)에 따라 전도(顚倒)된 마음을 일으켜 신견(身見)4)을 집착하고, 스스로 육신을 탐착하며 또 남들로 하여금 탐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지극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일체의 죄업(罪業)을 참회합니다.
문수사리의 말씀처럼 탐욕은 적멸의 법이며, 일체의 화합한 법들도 또한
이와 같이 적멸합니다. 만약 이 법을 알지 못해 탐착(貪著)을 일으키는 중생이 있다면 제가 그를 탐착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편안히 머물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번뇌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으며, 단지 전도된 망상(妄想)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도된 온갖 망상이 없다면 번뇌는 곧 사라집니다.
저는 이제 문수사리께서 말씀하신 법요(法要)를 듣고 일체의 번뇌가 구름이나 안개처럼 그 체성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번뇌는 번개와 같아 한 생각도 머물지 않고, 번뇌는 바람과 같아 체성이 불생(不生)입니다. 번뇌는 허공에 그린 그림과 같으니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번뇌는 물에 그린 그림과 같으니 그리자마자 곧 없어지기 때문이며, 번뇌는 야차귀(夜叉鬼)와 같으니 나쁜 각관(覺觀)을 낳기 때문이며, 번뇌는 열병(熱病)과 같으니 헛소리를 지껄이기 때문이며, 번뇌는 체성이 없는 것이니 나쁜 각관이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버리기 어려우니 ‘나다.’, ‘나의 것이다.’ 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물(物)이 없는데 망령되게 객진(客塵)5)을 취하는 것이니, 번뇌가 망령되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생각[想]을 따라 나타나니 나쁜 각관(覺觀)으로 취하기 때문이며, 번뇌는 눈[眼]과 같으니 온갖 경계가 일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그 체(體)가 다함이 없으니 마음이 탁함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체성이 없으니 화합의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둥근 덩어리와 같으니 음ㆍ입ㆍ계가 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알 수 없는 것이니 명색(名色)이 없기 때문이며, 번뇌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좋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씨앗과 같으니 보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번뇌를 원인으로 해야만 보리를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님, 보리는 금강궐(金剛橛)6)과 같으니 중생의 번뇌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리는 금강적(金剛跡)7)과 같으니 일체의 번뇌가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법계(法界)는 방편으로 깨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님, 번뇌를 보는 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경계는 보리를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리는 머무는 곳이 없고, 일체의 번뇌도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生)은 곧 멸(滅)이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님. 이처럼 마음의 체성은 설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또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설할 수도 없습니다.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체성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번뇌를 알기 때문에 탐욕이 많은 중생과 성냄이 많은 중생과 어리석음이 많은 중생을 잘 교화하며, 그렇다고 그 중생들을 괴롭히거나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평등한 부류의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역시 괴롭히거나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님, 저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처럼 일체 중생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의 번뇌처럼 일체 중생의 번뇌도 또 이와 같습니다.
또 문수사리님, 비유컨대 사나운 불길은 어떤 풀과 나무에도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번뇌에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태양이 어둠과 함께 머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미혹(迷惑)과 함께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큰 바람은 어떤 산과 나무도 막을 수 없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 세간의 번뇌와 경계가 막을 수 없습니다.
비유컨대 허공은 겁화(劫火)8)에도 타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번뇌의 불길이 또한 태우지 못합니다. 비유컨대 철애(鐵愛)9)라는 보살은 더러운 것에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마다 일체가 청정해지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에 또한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허공은 땅과 합하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번뇌의 온갖 결박과 화합하지 않습니다. 철위산(鐵圍山)은
바람이 움직일 수 없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가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물과 젖이 섞여 있어도 창곡(倉鵠)은 젖만 빨아먹고 물은 취하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와 화합할지라도 지혜만 취하고 번뇌는 취하지 않습니다. 울단월국(欝單越國:北俱盧洲)에서는 남녀가 화합할 때 모두 나무 아래로 가는데, 만약 친족(親族)이 아니면 나무 가지가 아래로 쳐져 그 몸을 가려 준다고 합니다.10) 보살도 이와 같아 근기(根機)가 미숙한 중생에게는 지혜를 드리워 교화하지 않습니다.
또 문수사리님, 저는 지금 이 일체의 번뇌에 대해 놀람과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번뇌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며, 보살의 두려움 없는 투구를 잘 썼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용맹한 사람이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음과 같으니, 만약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곧 용맹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살 또한 그와 같습니다. 모든 번뇌에 대해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곧 보살이 아닙니다. 또 사람이 싸움터에 들어가 서로 싸울 때 남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남에게 해침을 당한다면 용맹한 남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보살이 번뇌로부터 해침을 당한다면 보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님, 물을 맑히는 구슬을 흐린 물에 던지면 물이 곧 깨끗해지고 그것은 흐린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보살은 비록 번뇌와 화합한다 하더라도 번뇌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이때 승금색녀는 이 말을 하고나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번뇌의 생(生)을 알고, 번뇌의 멸(滅)을 안다면 그것은 번뇌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밝은 등(燈)이 온갖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만약 어둠과 함께한다면 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이 번뇌의 생을 보고
번뇌의 멸을 본다면 곧 번뇌를 벗어난 보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번뇌를 벗어난 보살은 번뇌를 보지 않고 청정함도 보지 않으며,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심(心)ㆍ의(意)ㆍ식(識)11)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저런 곳에 대해 마음으로 분별하고 나아가 열반을 염(念)한다면 그것을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心]이나 심수(心數:心所)가 생겨 죄와 복을 반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반연을 일체의 행을 지음[作行]이라 하고 행을 짓고 나면 이것을 유전(流轉)이라 하며, 만일 유전하는 법이라면 이를 실다운 유전이라고 하고 일체의 유전을 번뇌라고 합니다.
또 화합하는 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무엇이 화합하는가? 눈과 빛깔이 화합하고, 귀와 소리가 화합하며, 코와 향기가 화합하고, 혀와 맛이 화합하며, 몸과 감촉(感觸)이 화합하고, 뜻과 법(法)이 화합하며, 삼매(三昧)와 번뇌가 화합합니다. 왜냐하면 삼매에 들고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번뇌라고 합니다. 나쁜 각관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마음의 작용[心行]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공용(功用)이 없는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수량(數量)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스스로 번뇌를 벗어나고 또 남도 번뇌를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여래(如來)께서는 이런 사람을 번뇌를 벗어나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때 승금색녀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공법(空法)을 증득하지 않아 신견(身見)을 가진 중생에게 비심(悲心)을 버리지 않으며, 무상(無相)을 증득하지 않아 악견(惡見)을 가진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원(無願)을 증득하지 않아 소원하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작(無作)을 증득하지 않아 지음이 있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생법(無生法)을 증득하지 않아 태어나 늙고 죽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출법(無出法)을 증득하지 않아 생멸하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과(果)를 증득하지 않고 보살의 지위에 머물면서 일체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을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비유컨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우니, 왜냐하면 좋은 방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문과 연각(緣覺)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에 들어가면 방편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은 방편이 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싸움터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인다면 몸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에 들어도 방편이 있는 까닭에 곧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곧 보살의 방편이라 합니다.”
승금색녀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의 방편이란 무엇입니까?”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방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둘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공문(空門)이며 둘은 악견문(惡見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문(無相門)이며 둘은 상(相)을 각관(覺觀)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원문(無願門)이며 둘은 원생문(願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작문(無作門)이며 둘은 선근(善根)의 행을 심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생문(無生門)이며 둘은 시생문(示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출문(無出門)이며 둘은 음입계문(陰入界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적멸문(寂滅門)이며 둘은 출생문(出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정문(定門)이며 둘은 교화문(敎化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계문(法界門)이며 둘은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문(聲聞門)이며 둘은 깊은 마음으로 보리를 행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벽지불문(辟支佛門)이며 둘은 4무애문(無礙門)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두 가지 법문(法門)에서 남들을 위해 시현(示現)하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법문에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면 이를 방편이라 합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탐욕의 문이며 둘은 탐욕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냄의 문이며 둘은 성냄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어리석음의 문이며 둘은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번뇌의 문이며 둘은 번뇌를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일체가 생하는 문이며 둘은 생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방편문(方便門)이라고 합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일체 범부(凡夫)가 행하는 문이며 둘은 일체의 학(學)12)과 무학(無學)13)과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와 보살과 여래(如來)의 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문을 알 수 있다면 이를 보살의 가장 뛰어난 방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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