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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973 불교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8권

by Kay/케이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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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8

 

 

대장일람집 제8권


[제7문]

공功으로써 과果를 이루어서 정각正覺에 오르고 상호相好는 묘용妙用과 신통이로다.

48) 법신품法身品 49) 상호품相好品
50) 신족품神足品 51) 십호품十號品


48) 법신품法身品[30칙]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가 명백하게 분명하고
다섯 가지 눈과 여섯 가지 신통을 갖추지 않음이 없다.

(1) 삼신三身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에서 말하였다.
“일체 여래에게는 세 가지 지혜가 있으니, 화신化身ㆍ응신應身ㆍ법신法身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몸은 아뇩보리阿耨菩提를 다 갖추어서 중생을 교화한다.
무엇을 화신化身이라 하는가? 여래께서 옛날에 수행할 때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법을 닦아서 자재로운 능력을 얻었는데, 중생의 뜻과 중생계에 따라서 갖가지 몸을 나타냈으니, 이를 화신이라 한다.
무엇을 응신應身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에게 참된 진리[眞諦]를 설하시니 생사와 열반은 한맛임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몸을 나라고 보는 견해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가없는 불법으로 근본을 삼기 위해서다. 여실하게 여여如如ㆍ여여지如如智와 본원력本願力에 상응하기 때문에 32상相 80종호種好와 목[項]과 등[背]에 원만한 광명을 갖추는 것이니, 이를 응신이라 한다.
무엇을 법신이라 하는가? 번뇌 등의 장애를 없애고 온갖 훌륭한 법을 갖추기 때문에 오직 여여如如ㆍ여여지如如智가 있을 뿐이니, 이를 법신이라 한다. 앞의 두 가지 몸[化身, 應身]은 가짜로 이름만 있는 것이며, 뒤의 세 번째 몸[法身]은 진실로 있는 것인데, 앞의 두 가지 몸의 근본이 된다. 왜냐하면 법은 여여如如를 여의고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여의어서 모든 부처님은 다른 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모든 부처님은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니,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은 법의 여여如如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여여지如如智이다.
또 다음에 법신의 삼매와 지혜는 일체의 모습을 넘어서서 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니, 분별할 수도 없고 단멸도 아니고 항상도 아니라서 이를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비록 분별이 있더라도 체體는 분별이 없고, 비록 3수數가 있더라도 3체體가 없으니,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마치 꿈이나 허깨비 같다.
또한 집착할 것도 없고 능히 집착함도 없어서 법체法體가 여여하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금을 얻기를 원해서 광석을 제련하여 금을 이루고는 뜻대로 돌려 온갖 반지나 팔찌를 만들어 쓰는 것과 같다. 비록 온갖 쓰임이 있더라도 금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장자함場字函 제2권]

또 『영락경瓔珞經』에서 말하였다.
“5분分의 법신은 식의 성품[識性]으로 구별한다. 계향戒香은 몸을 섭수하는 것이고, 정향定香은 뜻을 섭수하는 것이고, 혜향慧香은 산란해짐을 섭수하는 것이고, 해혜解慧는 뒤바뀐 견해를 섭수하는 것이고, 도지度知는 무명無明을 섭수하는 것이다. 이 5분의 향香이 그 몸을 장식[瓔珞]하는 것이다.”[망자함忘字函 제2권]

(2) 사지四智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이 온갖 색상色像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며, 둘째,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모든 법이 다 평등함을 관하는 것이며, 셋째,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모든 법을 잘 관해서 걸림없이 굴리는 것이며, 넷째,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본원력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을 이루는 것이니, 8식識의 전변으로 4지智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즉자함則字函 제10권]

『비장전秘藏詮』 주석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8식識을 전변해서 4지智를 이룬다고 한 것은 8식으로 대원조지大圓照智가 되고, 7식으로 평등성지가 되고, 6식으로 묘관찰지가 되고, 전5식으로 성소작지가 되는 것인데, 식識은 오직 분별일 뿐이며, 지智는 능히 결단하는 것이다.”[좌자함佐字函 제9권]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의 서문에서 말하였다.
“8식識이 전변해서 4지智를 이루고, 4지智를 묶어서 3신身을 갖춘다.”[사자함事字函 제3권]

(3) 오안五眼
『도세품경度世品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때에 따라 교화를 하여 5도道에 들어가 5안眼을 청정케 한다. 첫째, 육안肉眼은 세간에서 4대大의 몸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로 인해 교화를 하여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는 것이다. 둘째, 천안天眼은 모든 천天이 천상과 세간에 있으면서도 아직 극한 도를 알지 못하므로 3승乘으로써 보여준 것이다. 셋째, 혜안慧眼은 지혜바라밀[智度]이 다함이 없음[無極]을 능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다 교화하여 대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넷째, 법안法眼은 좁고 부분적인 것에 있으면서 능히 넓히고 크게 하지 못하는 것을 교화하여 법신은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이 3세世가 평등한 하나임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불안佛眼은 미혹한 자가 바른 진리[正眞]를 알지 못하고 예컨대 수면睡眠과 같은 음개陰蓋에 덮여 있으면, 네 가지 평등함[四等:慈悲喜捨]과 네 가지 은혜[四恩]11 네 가지 은혜란 부모의 은혜[父母恩]ㆍ중생의 은혜[衆生恩]ㆍ국토의 은혜[國土恩]ㆍ삼보의 은혜[三寶恩]이다.
의 행,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ㆍ지혜의 훌륭한 권도 방편을 제시하여 나아감과 물러섬이 마땅함에 따르면서 모든 것을 잃지 않고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하자함遐字函 제6권]

『금강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천안天眼은 통하여 막히지 않는 것이고, 육안肉眼은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이며, 법안法眼은 오직 세속을 관하는 것이며, 혜안慧眼은 다만 공空을 반연하는 것이며, 불안佛眼은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다른 몸[異體]을 비추면서도 또한 동일한 것과 같으니, 원만하고 밝은 법계 안을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아나율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열매처럼 보고, 보살菩薩들은 백 천의 세계를 보며, 시방여래는 티끌처럼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다 볼 수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볼지라도 한치[分寸]에 지나지 않는다.”[염자함染字函 제2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초발심 때 육안肉眼으로 고통스런 중생을 보고서는 마음에 자비와 연민을 일으켜서 온갖 선정을 배워 다섯 가지 신통을 닦아 얻는다. 천안天眼으로 6도道에서 갖가지 몸을 받는 것을 보아서 연민이 더욱더 가중되기 때문이다. 혜안慧眼을 구함으로써 그들을 구제하는데, 중생의 심상心相이 갖가지여서 같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로 하여금 실다운 법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법안法眼을 구해서 이끌어 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고, 나중엔 불안佛眼을 구함으로써 일체 지一切智를 얻어 불법佛法을 성취한다.”[명자함名字函 제10권]

(4) 육통六通
『반야경般若經』에서 말하였다.
“첫째, 신경통神境通은 능히 갖가지 신변神變을 일으켜서 시방을 진동한다. 하나가 변화해서 많음이 되고 많음이 변화해서 하나가 되며, 혹은 숨었다가 혹은 나타나면서 신속하고 걸림이 없으니, 산과 절벽과 담을 마치 허공처럼 지나가고, 허공을 밟아서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땅 속에 출몰하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 출몰하는 것과 같으며, 몸에서 연기와 불꽃을 내는 것이 마치 고원이 불타는 것 같으며, 몸에 온갖 흐름을 주입하는 것이 마치 눈 덮인 봉우리가 녹는 것 같다. 해와 달이 신령스런 덕과 위세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손으로 닦고 만짐으로써 광명이 은폐되고 전신轉身이 자재롭다.
둘째, 천이통天耳通은 인천人天의 귀를 능가해서 능히 시방의 각각을 여실하게 들을 수 있다. 마치 긍가사계殑伽沙界의 유정[情]과 비정非情 종류의 갖가지 크고 작은 음성을 다 들으면서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 타심통他心通은 시방 사계沙界의 다른 유정有情의 종류와 심心ㆍ심소心所의 법을 능히 여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마음을 두루 알아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마음을 여의고, 나아가 취심聚心ㆍ산심散心, 소심小心ㆍ대심大心, 적정寂靜ㆍ부적정심不寂靜心, 해탈ㆍ불해탈심不解脫心까지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넷째, 숙주수념통宿住隨念通은 시방 사계沙界의 모든 유정과 1심心ㆍ10심 나아가 수많은 백천심百千心, 하루나 이틀 나아가 수많은 백천 년 겁에 이르기까지를 능히 여실하게 염念하는 것이다. 이 같은 때와 장소, 이 같은 이름과 성姓, 이곳에서 죽었다가 저곳에서 태어나는 것, 자세한 것이나 간략한 것, 자신이든 남이든 모든 지난 세상의 일이 다 능히 염念에 따른다.
다섯째, 천안통天眼通은 시방 사계沙界의 유정有情과 비정非情22 풀, 나무, 흙 따위를 말한다.
의 갖가지 색상色像, 죽을 때와 태어날 때, 미묘한 색과 조잡한 색, 선취善趣와 악취惡趣, 수승하거나 열등한 것을 능히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다시 업에 따라 생을 받는 차별을 아는 것이니, 혹은 몸ㆍ말ㆍ뜻의 악행惡行과 성현을 비방하는 삿된 견해의 인연을 성취하는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마땅히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혹은 몸ㆍ말ㆍ뜻의 묘행妙行과 성현을 찬미하는 올바른 견해의 인연을 성취하는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마땅히 선취善趣에 태어난다.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은 시방 유정의 자自이든 타他이든 누진漏盡과 부진不盡을 능히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 신통은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의지해 온갖 장애의 습기를 끊음으로써 바야흐로 원만함을 얻고 바야흐로 불퇴전不退轉 보살의 경지를 얻는다. 그 때 모든 누漏를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진盡이라 이름하고, 보살은 누진통을 얻음으로 성문ㆍ독각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오직 무상보리無上菩提로 나아갈 뿐이다.”[금자함金字函 제4권]


18불공不共과 3지명智明이 있으며
10력力과 4변辯과 4무외無畏가 있다.

(5)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첫째는 과오나 잘못이 없으며, 둘째는 갑작스럽거나 사나운 소리가 없으며, 셋째는 염念을 잃어버림이 없으며, 넷째는 정심定心 아님이 없으며, 다섯째는 갖가지 상념이 없으며, 여섯째는 택사擇捨 아님이 없으며, 일곱째는 지욕志欲이 물러섬이 없으며, 여덟째는 정진에 물러섬이 없으며, 아홉째는 억념憶念이 물러섬이 없으며, 열째는 반야般若에 물러섬이 없으며, 열한째는 해탈에 물러섬이 없으며, 열두째는 지견智見에 물러섬이 없으며, 열셋째는 지혜, 지견이 과거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장애를 받지도 않으며, 열넷째는 지혜, 지견이 현재 세상에 대해 집착하거나 장애를 받지 않으며, 열다섯째는 지혜, 지견이 미래 세상에 대해 집착하거나 장애를 받지 않으며, 열여섯째는 모든 신업身業이 지혜를 앞잡이로 삼아 지혜를 따라 행해지는[轉] 것이며, 열일곱째는 모든 어업語業이 지혜를 앞잡이로 삼아 지혜를 따라 행해지는 것이며, 열여덟째는 모든 의업意業이 지혜를 앞잡이로 삼아 지혜를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이 열여덟 가지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홀로 지녔지 2승乘과 더불어 공유하지 않는다.]”[위자함爲字函 제1권]

(6) 삼명三明
『법집경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첫째, 천안지명天眼智明은 이른바 성문ㆍ벽지불ㆍ보살ㆍ모든 부처님께서 천상의 뛰어나고 묘함에 대해 그 천안을 얻는 것이니, 이를 천안지명이라 한다.
둘째, 숙명지명宿命智明은 부처님께서 3세世에 걸친 지위에 대해 알지 못함이 없으면서도 2승乘과 같지 않으니, 이를 숙명지명이라 한다.
셋째, 누진지명漏盡智明은 도를 증득하였을 때 네 가지 누漏와 번뇌의 습기習氣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른바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견루見漏ㆍ무명루無明漏는 2승乘이 증득한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이를 이름하여 누진지명이라 한다.”[욕자함欲字函 제2권]

(7) 십력十力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여래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은 옳은 것[是處]이든 그른 것[非處]이든 모두 여실하게 아는데 이것이 제1력이며, 모든 유정有情의 3세世에 걸친 이숙異熟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2력이며, 모든 세계의 갖가지 차별을 전부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3력이며, 세간의 갖가지 수승한 이해와 차별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4력이며, 모든 유정의 갖가지 근기가 뛰어난지 열등한지 여실하게 다 아는 것이 제5력이며, 변취행遍趣行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6력이며, 온갖 정려靜慮와 나아가 염정染靜에 이르기까지 벌려놓은 차별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7력이며, 모든 유정의 생사와 선악을 보면서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8력이며, 모든 유정의 한량없는 겁 가운데 있는 온갖 숙주宿住의 일을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 제9력이며, 모든 누漏가 다하여 진眞을 증득하고 해탈함으로써 지을 바를 이미 갖추어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것이 제10력이다.”[곤자함崑字函 제9권]

(8) 사무애변四無碍辯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첫째, 의무애義無碍는 온갖 색色의 뜻에 대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색의 뜻이라 하는가? 이른바 제1의義이다. 무엇을 제1의라 하는가? 이를테면 색은 얻을 수 없으므로 이 같은 제1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의무애라 한다.
둘째, 법무애法無碍는 온갖 색법色法에 대해 여실하게 관찰하고 여실하게 요달해 아는 것이다.
셋째, 사무애詞無碍는 이른바 온갖 색色에 대해 걸림 없는 지혜의 선교언사善巧言詞로써 갖가지 분별을 하는 것이다.
넷째, 설무애說無碍는 이른바 온갖 색色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열어 보이고 연설하는 것이며, 법계에 대해 두 가지 상相을 짓지 않는 것이니, 냄새ㆍ맛ㆍ접촉ㆍ법도 이와 마찬가지다.”[시자함始字函 제4권]

(9)사무소외四無所畏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첫째는 일체지무외一切智無畏이며, 둘째는 누진무외漏盡無畏이며, 셋째는 설장도무외說障道無畏이며, 넷째는 설고진도무외說苦盡道無畏이다. 이 같은 네 가지를 천인과 외도外道는 그 과실過失을 능히 힐난할 수 없다.”[위자함爲字函 제1권]


징조를 회복해서 성불을 이루는 것은 무슨 마음 때문인가.
아난阿難과 비슷함을 들어서 방양牓樣으로 삼았네.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마음으로 종지宗旨를 삼으면 이치는 모름지기 구경究竟이어야 할 터인데 유정계有情界에서는 참됨[眞]과 망령됨[妄]이 나뉜 듯합니다. 이를 혼동해서 함부로 원각圓覺이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마음을 종지로 삼아야 합니까?


3승乘이 도를 사모하는 데는 견해에 차별이 있고 망령된 마음을 잘못 가리켜서 진실로 삼는다. 2조祖가 이 망령된 마음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자, 초조初祖가 옷을 전수한 것이고, 아난이 이 망령된 마음에 집착하자 여래께서 꾸짖으신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금색 팔을 들어서 아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이것이 보이는가?’
아난이 말했다.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본 것은 무엇인가?’
아난이 말했다.
‘저는 여래께서 광명의 주먹을 들어서 저의 마음과 눈[心目]에 비춘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엇으로 보았는가?’
아난이 말했다.
‘저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나에게 내 광명의 주먹이 그대의 마음과 눈에 비추었다고 대답했다. 그대의 마음과 눈이 볼 수 있는데, 무엇을 마음으로 삼았기에 내 주먹이 비추게 되었는가?’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는 지금 마음의 소재를 물으셨기에 제가 마음으로 추궁하고 찾아보았습니다. 즉, 능히 추궁하는 것을 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을 꾸짖으셨다.
‘그건 네 마음이 아니다.’
아난은 깜짝 놀라서 자리를 피하여 일어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것이 제 마음이 아니라면 마땅히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진前塵의 허망한 상념의 모습이 너의 참성품을 미혹한 것이다. 무시이래로 도적을 오인하여 아들인 줄 여기고 너의 원상元常을 잃었기 때문에 윤회[輪轉]를 받게 된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출가해서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온갖 어려운 일을 행한 것이 모두 이 마음을 쓴 것이며, 혹은 선근에서 물러난 것도 역시 이 마음을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약 이 발명發明한 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저는 곧 마음이 없는 온갖 흙이나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각과 앎을 여의고는 또 있는 것이 없으니, 저는 실로 놀랍고 두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모든 법의 생겨남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이며, 모든 인과因果와 세계의 미진微塵도 마음으로 인하여 체體를 이룬다고 항상 설했다. 나아가 풀잎까지도 모두 체성體性이 있는데, 하물며 미묘하게 밝은 마음의 성품이 스스로 체體가 없겠는가? 만약 네가 분별하여 아는 성품에 집착해서 반드시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 마음은 마땅히 모든 빛깔ㆍ냄새ㆍ맛의 티끌과 온갖 티끌의 사업事業을 여의고도 따로 온전한 성품이 있어야 한다. 마치 네가 지금 나의 법을 듣고서 소리로 인하여 분별이 있는 것과 같으니, 설사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소멸해서 안으로 유한幽閑을 지키더라도 오히려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영사影事이다.
내가 너에게 마음이 아닌 것에 집착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가 마음에 대해 자세히 헤아려 보아라. 만약 전진前塵을 여의고서 분별의 성품이 있다면 곧 참된 너의 마음이겠지만, 만약 분별하는 성품이 전진을 여의고서 체성이 없다면 이는 전진을 분별한 영사影事이다. 전진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니, 만약 변하여 소멸할 때에는 이 마음은 거북의 털이나 토끼뿔과 같으리니, 그렇다면 그대의 법신은 단멸斷滅함과 같은 것이다. 그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하겠는가?’
고석古釋에서 말하였다.
‘능히 추궁하는 것은 곧 망령된 마음이니, 모두가 연려緣慮의 작용이라서 또한 분명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마음이 아니며 또한 망령된 마음은 이 참마음 위의 영상影像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몸과 그대의 마음이 모두 미묘하게 밝은 마음 가운데 나타난 사물이니, 만약 이 영상을 참되다고 집착하면 영상이 소멸할 때는 이 마음도 끊어진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티끌의 연緣에 집착하면 곧 단멸과 같다≻고 한 것이다.
망령된 마음으로 티끌을 잡아서 체體를 이루는 것은 마치 거울 속의 영상과 같고 물 위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물을 미혹해서 파도에 집착하면 파도가 잠잠해질 땐 마음도 소멸하고, 거울을 미혹해서 영상에 집착하면 영상이 소멸할 땐 마음도 없어지니, 마음이 만약 소멸할 때는 즉각 단견斷見을 이루게 된다. 만약 젖는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고 거울의 체體가 항상 밝다는 걸 안다면, 파도는 본래 공空하고 영상은 원래 적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경계와 지혜는 계界에 두루하고 공空에 두루하며, 범부의 몸과 마음은 그림자와 같고 상像과 같은 줄 아는 것이다. 만약 지말枝末을 집착해서 근본으로 삼고 망령된 것을 참된 것으로 여긴다면, 생사가 나타날 때 바야흐로 진실하지 않음을 체험하리라. 옛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광석을 보고도 금인 줄 알아보지 못하다가, 용광로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잘못이었음을 안다.≻’


참마음과 망령된 마음의 두 마음을 각기 무슨 뜻에서 마음이라 이름붙이고, 무엇을 체體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는가?


참마음은 영지靈知와 고요하게 비추는 것[寂照]을 마음으로 삼고, 공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을 체體로 삼으며, 실상實相을 상相이라 한다. 망령된 마음은 6진塵의 연영緣影을 마음으로 삼고, 성품이 없는 것을 체體로 삼고, 반연하는 사려思慮를 상相으로 삼는다. 이 연려하고 지각해 이해하고 능히 아는 망령된 마음은 자체가 없는 것이니, 다만 앞의 티끌의 경계가 있고 없음에 따를 뿐이라서 경계가 오면 일어나고 경계가 가면 곧 사라진다. 경계로 인하여 일어나므로 온전한 경계가 곧 마음이며, 또 마음을 인해서 경계를 비추므로 온전한 마음이 경계이니, 각기 자성自性이 없고 오직 인연일 뿐이다.

그러므로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염광焰光에는 물이 없고 단지 양기陽氣가 있을 뿐이며, 음陰 가운데는 색色이 없고 단지 연기緣氣가 있을 뿐이다. 탈 때의 뜨거운 기운은 멀리서 보면 물과 같지만, 단지 상념에서 생긴 양기일 뿐이다. 이 허망한 색심色心도 이와 같아서 스스로의 업業을 인因으로 삼고 부모의 외진外塵을 연緣으로 삼아서 화합하는 것이 색심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오직 반연된 그림자를 스스로의 심상心相이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능히 추궁하는 마음은 만약 인연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으며 다만 연緣에서 생길 뿐이다. 연생緣生의 법은 모두 무상無常하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체體가 없어서 전적으로 외부 경계를 인하는 것과 같고, 물 속의 달이 실답지 않아서 허망하게 허공의 달바퀴[空輪]를 나타낸 것과 같다. 이것을 진실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어리석음이 아주 심한 것이다.
아난은 여래의 추궁으로 인해서 망령된 마음을 타파하였고, 나아가 5음陰ㆍ6입入ㆍ12처處ㆍ18계界까지 하나하나를 미세하게 철저히 추궁하자 오직 공空일 뿐 모두 자성自性이 없었다. 이미 인연과 자타自他의 화합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자연히 인因 없이 생긴 것도 아니니, 모두 다 뜻[意]ㆍ말[語]ㆍ식識과 상想으로 분별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묘하게 밝은 참마음이 광대하게 포용하고 모든 처소에 두루함을 활연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시방이 공함을 보는 것이 마치 손 안에 지닌 잎사귀를 보는 듯했으며, 모든 세간에 있는 온갖 사물이 다 보리菩提의 미묘하게 밝은 근본 마음[妙明元心]이니, 심정心精이 두루하고 원만해서 시방을 포함하였다. 부모가 낳아준 몸을 돌이켜 보매 저 시방의 허공 가운데 1미진이 날리는 것과 같으니, 있는 듯 없는 듯한 것이 마치 잠잠한 큰 바다에 한 방울의 거품이 일어났다 사그라지는 것과 같았다.
이 사실을 스스로 완전히 알고, 근본 묘심妙心이 항상 머물면서 멸하지 않음을 얻고서는 게송을 설했다.

묘하게 담연하고 총지總持하고 부동不動인 세존께서는
수릉엄首楞嚴의 왕으로서 세간에 희유하십니다.
나의 억 겁劫 동안 뒤바뀐 상념을 소멸하시니
아승기를 거치지 않고서도 법신法身을 얻습니다.”[녹자함祿字函 제3권]


참됨과 망령됨을 회통해 융화하니 본래 동일하였고
깨달음과 미혹됨을 연구하니 어찌 얻고 잃겠는가?



만약 참마음이 부처를 이루고 망령된 지각이 범부에 떨어진다면, 망령은 종지를 어기고 참마음은 지각을 따르는 것이니, 이는 바로 참됨과 망령됨에 두 가지가 있어서 체體와 용用으로 분리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의 종지로 회통해서 원만하게 융화하는가?


참됨과 망령됨은 성품이 없어서 항상 하나의 근원에 계합되니, 어찌 두 가지 마음이 있어서 서로 상즉相卽하겠는가? 그리하여 성품이 청정해서 오염이 없다면 망령됨을 얻을 수 없으니, 마치 환도幻刀로는 능히 돌을 쪼갤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맑은 안개가 허공을 오염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일심一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니, 이런 까닭에 즉卽을 설한 것이다.


무명無明이 곧 법성法性이면 다시 무명이 없는 것인데, 누구와 더불어 상즉하는가?


가령 얼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물을 가리켜서 얼음이라 하고, 얼음을 가리켜서 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이름[名字]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시 두 가지 사물이 상즉하겠는가? 이는 시절에는 차이가 있고 녹고 어는 것[融結]은 연緣에 따르지만, 습한 성품은 항상 있으면서 일찍이 변동한 적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나아가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범부와 성인은 다만 이름일 뿐 동일한 체體로서 차이가 없다.
만약 범부가 이 마음에 집착해서 윤회의 업을 짓는다면, 장차 보리菩提의 지혜가 도리어 번뇌를 이룬다. 마치 대부호인 장님 아이가 보배 창고 속에 앉아서 거동하는 데 장애를 겪다가 보배에 상처를 입는 것과 같다. 또 2승인乘人은 이 마음을 싫어해 버리고[厭棄] 회단과灰斷果를 구함으로써 여래의 네 가지 덕의 비장秘藏을 무상한 5음陰으로 삼는데, 말하자면 도적과 호랑이가 두려움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속박과 해탈이 비록 다르더라도 취하는 것이나 버리는 것이나 모두 잃는 것이다.
만약 자세히 요달한 자라면, 생기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얻는 것도 없고 낳는 것도 없다. 이 망령된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체體가 없음을 요달한다면 무엇으로부터 집착을 일으킬 것인가? 생각생각마다 스스로 여의어서 끊어 없애기를 구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하나도 얻지 않는데 하물며 둘이겠는가?”[치자함侈字函 제6권] [이후 권은 이 함函과 같다.]



깨달음이 이미 현전했다면 미혹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삼계엔 별다른 법이 없으니 단지 한마음[一心]으로 지었을 뿐이다. 모든 경계는 다 생각을 움직임으로 인한 것이니, 생각[念]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경계도 본래 체體가 없는 것이며, 생각의 움직임을 돌이켜서 추궁하면 생각[念]도 역시 공적空寂하다. 즉, 미혹할 때도 잃은 것이 없고 깨달을 때도 얻은 것이 없으니, 머무름이 없는 참마음은 늘거나 줄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거울 속의 머리를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성을 내며 책망하니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두려워하며 미쳐서 도망을 쳤다가 홀연히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니, 설사 광기를 그치지 않은들 어찌 잃겠는가?”[제7권]


업은 아교나 옻과 같으니 어찌 도道를 이루리요만
내가 진공眞空을 요달한다면 단박에 소멸할 수 있다.



중생의 업과業果는 종자種子가 현행現行하여 겁劫을 쌓으면서 훈습[熏]된 것으로서 마치 아교나 옻과 같은데, 어째서 단지 일심一心을 요달하기만 하면 단박에 끊고서 부처를 이루는가?


만약 마음과 경계를 진실하다고 여기고 사람과 법이 공하지 않다고 집착하면, 만 겁의 수행을 거치더라도 끝내 도과道果를 증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단박에 무아無我를 요달해서 사물의 허망함을 깊이 통달한다면, 능能과 소所가 모두 소멸하는데 어찌 증득하지 못하겠는가? 마치 가는 티끌이 사나운 바람에 날리는 것과 같고, 가벼운 배가 급류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단지 일심一心을 믿지 못하고서 스스로 장애를 일으킬까 걱정이다. 가령 용시勇施 보살이 음욕을 범한 것으로 인해 오히려 무생無生을 깨닫고, 성性 비구니가 무심無心의 수행으로 역시 도과道果를 증득하였거늘 어찌 불법佛法을 믿고 이해하여 자기의 마음을 자세히 요달하는데 증득할 수 없겠는가?
혹 어떤 이는 의심하여 말하였다.
‘어찌 번뇌를 끊지 않는가?’

해석하여 말하였다.
‘다만 살생ㆍ도둑질ㆍ음욕ㆍ망령된 말이 일심一心 위에서 일어나니, 바로 그 곳[當處]이 문득 적정하다는 걸 자세히 관찰한다면, 어찌 다시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단지 일심만을 요달하면 자연히 만 가지 경계는 허깨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니, 마음은 이미 형태가 없거늘 법에 어찌 모습이 있겠는가?

고성高城 화상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본래 무상無相의 이치를 궁구함인데
널리 읽어봐도 원래 마음을 모르네.
마음을 알고 경계를 알라.
마음을 알고 경계를 알면 선하禪河가 고요하리.
만약 능히 경계를 알면 마음을 아나니
만법은 모두 건달바의 그림자와 같네.’ ”[제8권]

모두 법신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숨었다 나타났다 하리요.
그 사이에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중생의 마음에 두루 있어서 이미 동일한 일심인데, 어째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인가?


항상 나타나 있으며 나타나지 않을 때가 없다. 혹은 한 티끌에 단박에 나타나서 구족하지 않음이 없고, 혹은 온갖 티끌에 널리 나타나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한 곳에서 단박에 나타나는 것은 여래의 눈 속[眼睫]이며, 문수文殊의 보관寶冠이며, 미륵의 누각 속이며, 보현普賢의 모공毛孔 속이며, 정명(淨名:유마)의 방 안이며, 마야摩耶의 뱃속이며, 겨자씨이며 바늘 끝이며, 가까운 티끌로부터 먼 세계[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히 널리 나타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비로청정법신毘盧淸淨法身의 응용일 뿐이다.
이 법신이 바로 마음이다. 이런 까닭에 말하기를, 만약 능히 마음이 둘 아님을 자세히 관찰하면 비로소 비로청정신을 볼 수 있다 하는 것이다. 일념에 악한 마음을 일으킬 때는 법신도 따라서 나타나고, 일념에 착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법신도 따라서 나타나며, 나아가 색처色處에서도 나타나고 공처空處에서도 나타나니 자재로워 걸림이 없다. 따라서 다시는 멀리 모든 부처에게 미루지 말 것이니, 오직 스스로의 일념의 공심空心일 뿐이다.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의 법신은 평등하고 자연히 온갖 처소에 두루하지만,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서 나타난다.’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더러움이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못하듯이 중생의 마음에 더러움이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못한다. 마치 해와 달이 하늘을 비추는데 장님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벼락이 땅을 진동하는데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도道와 계합하면 곁에 있는 것이지 몸 가까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복인福人이 세간에 출현하면 임랑(琳琅:보배)도 나타나는 것이며, 박복한 자가 세간에 출현하면 형극荊棘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을 말미암아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의 성품을 요달한 사람이라면 모두 다 평등하게 나타난다.”[제8권]


보리菩提를 조속히 증득하는 것은 오직 일념一念뿐이며
멀리 불도佛道를 구한다면 3아승기에 있다.



부처를 이루는 이치를 혹은 일념이라 말하고 혹은 3아승기라고 말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결정코 어떤 경문을 취해서 후학을 인가[印]해야 합니까?


성불의 요지는 시겁時劫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늦고 빠름의 가르침은 방편[權宜]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용맹한 중생의 성불은 일념에 있다고 하고, 게으른 자가 과위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3아승기를 채워야 하는데, 다만 교적敎迹을 드러내는 말은 다 방편을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가령 『능엄경』에서는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는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무학無學을 초월한다’고 하였고, 『원각경』에서는 ‘환영幻影임을 알면 곧 여의어서 방편을 짓지 않으며, 환영을 여의면 곧 깨달아서 점차漸次가 없다’고 했다.

또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백정 광액廣額이 날마다 천 마리의 양을 죽였지만, 나중에 발심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현겁賢劫 가운데 성불한다.≻
모든 대보살과 아라한은 의심하며 말하였다.
≺우리들은 원겁遠劫에 부처를 이룬다고 하셨는데, 광액은 어째서 먼저 성불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찍 이루려고 하는 자는 곧 일찍 이르고, 멀리 이루려고 하는 자는 곧 멀어진다. 만약 단박에 성품을 본다면, 곧 한생각에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예리하고 둔함이 같지 않고 늦고 빠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제7권]



즉심卽心이 부처라면 모든 부처는 어째서 3아승기를 빌려서 덕을 쌓고서야 바야흐로 성불하였는가?


다시 1승乘의 진실한 법을 배우고, 다시 5성性의 권기權機를 배우기 위해서다. 이는 자증自證 법문을 논하는 것이지 화의化儀의 방편을 서술한 것이 아니다.

가령 『능가경』에서는 4불佛[첫째는 화불化佛이니 근기에 따라서 감응하는 것이며, 둘째는 보생불報生佛이니 그 성품의 인因을 갚는 것이며, 셋째는 지혜불智慧佛이니 본각本覺이 드러나 비추는 것이며, 넷째는 여여불如如佛이니 이체理體에 둘이 없는 것이다.]을 설하였고, 『화엄경』에서는 10불佛[첫째는 정각불正覺佛이니 집착된 견해가 없는 것이며,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해서 보는 것이며,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깊이 믿고 보는 것이며, 넷째는 주지불住持佛이니 수순해서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니 깊이 들어가서 보는 것이며,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널리 이르러서 보는 것이며,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안주해서 보는 것이며,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헤아림도 없고 의지함도 없이 보는 것이며, 아홉째는 본성불本性佛이니 명료하게 보는 것이며, 열째는 수락불隨樂佛이니 널리 가르쳐서 보는 것이다.]을 설하였다.
만약 5교敎에 의거하면 가르침에 따라서 정해지지 않았다. 첫째 소승교小乘敎에는 두 가지 몸의 부처[첫째는 생신生身이고, 둘째는 법신法身이다.]가 있으며, 둘째 대승초교大乘初敎에는 세 가지 몸의 부처[첫째는 법신法身이고, 둘째는 응신應身이고, 셋째는 화신化身이다.]가 있으며, 셋째 종교終敎에는 네 가지 몸의 부처[첫째는 이성신理性身이며, 둘째는 법신法身이며, 셋째는 보신報身이며, 넷째는 응화신應化身이다.]가 있고, 넷째 돈교頓敎에는 유일한 몸의 부처[실성불實性佛이다.]가 있으며, 원교圓敎에는 열 가지 몸의 부처[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며, 둘째는 국토신國土身이며,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며,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며, 다섯째는 연각신緣覺身이며,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며,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며, 여덟째는 지신智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며,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가 있다.
또 마음의 입장에서 성불을 보면, 소승[착한 마음을 닦아서 얻음으로 부처가 된다.]ㆍ초교[마음의 성품을 부처로 삼는다.]ㆍ종교[마음의 성품과 모습이 다해 없어지는 것으로 부처를 삼는다.]ㆍ돈교[마음이 본래 생기하지 않음을 부처로 삼는다.]ㆍ원교[마음이 걸림 없고 다함없는 것을 부처로 삼는다.]가 있다.
만약 여여불如如佛과 심불心佛과 본성불本性佛이라면 누군들 갖추지 않았겠으며, 만약 국토신과 법신과 허공신이라면 어느 법인들 원만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곳곳이 모두 절의 언덕이니, 누가 세웠든 찰나찰나마다 다 정각正覺을 성취하므로 망령된 상념이 어찌 나뉘겠는가? 마치 장님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침 해나 저녁달의 잘못이 아닌 것과 같다. 마치 소과小果가 원돈圓頓을 듣지 못한 것이 어찌 불심묘지佛心妙旨의 친하고 성김이겠는가? 단지 법의 약함은 근기의 미약함을 말미암은 것이며, 도道의 광대함은 양量의 광대함에 있는 것이다. 원교인 화엄의 가르침처럼 성불成佛이 일념을 여의지 않으므로 비목선인毘目仙人이 선재동자의 손을 잡자 선재는 자신이 시방 찰토의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 가면서 미진의 겁劫을 거치는 걸 보았으며, 손을 놓자 선재는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것을 본 것이다. 어찌 본위本位는 움직이지 않고서도 멀고 가까운 찰토가 역력한 것이 아니겠으며, 어찌 일념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늦고 빠름의 시기가 완연함이 아니겠는가?”[제6권]


3승乘이 부처를 보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다른 업業이 그대를 만나니 이름[名字]이 같지 않을 뿐이다.



무성無性의 이치가 동일하면 일시에 부처를 이루는데, 어째서 3승乘이 부처를 보는 것에 차별이 있는가?


마음에 따라서 감응해 나타나는 영상이 같지 않아서 스스로의 업이 차이가 나는 것이지, 부처에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 하나를 관찰하는데도 네 가지로 나뉘는 것은 모두 스스로의 견해 차이이며, 보배 그릇을 공유하면서도 밥의 색깔이 같지 않은 것은 남의 업이 변한 것이 아니다.

가령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2인연은 하지下智가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菩提를 얻고, 중지中智가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고, 상지上智가 관하기 때문에 보살의 보리를 얻고, 상상지上上智가 관하기 때문에 부처의 보리를 얻는다.’

또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바닷물이 땅 속에 깊이 흐를 때 구멍을 뚫는 자가 물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저 큰 바다는 자신이 물을 나게 한다는 분별을 짓지 않는다. 부처 지혜라는 바닷물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간다. 가령 모든 중생들이 법문을 닦아 익히면 지혜를 얻으며 여래의 지혜와 평등하여 둘이 없고 분별도 없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서 행이 다르기 때문에 얻는 지혜도 각각 같지 않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물은 하나의 맛이지만
그릇[器]으로 인해서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네.
부처님의 복전福田도 마찬가지지만
중생의 마음 때문에 다른 것이다.”[제8권]


발명發明으로 인해서 견도見道를 칭하고
무無가 아니라 오직 증득해야만 바야흐로 안다.



3보寶는 허공의 모습과 같아서 견문見聞이 미칠 바가 아닌데, 가르침 속에서는 어째서 견도見道를 설하고 또 견불見佛을 칭하는가?


본지本智의 발명의 입장에서 보면, 임시로 칭하여 본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증득해야만 아는 것이다. 만약 단멸과 항상의 두 변邊을 여읜다면 즉시 자신의 청정함을 보게 되며, 자신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 곧 부처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고 나아가 모든 법이 다 청정함을 보는 것이다. 부처 아님이 없고 법 아님이 없으니, 자기의 심성心性이 생기함이 없이 사물에 따라서 모든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의 가는 티끌이라도 부처가 아니라면, 그림자의 장애를 이루어서 보안普眼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또 능소能所의 견見과 가명仮名에 떨어질 뿐이다.
논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여래의 법이 몸[身]이 되니
단지 마땅히 법성法性을 관해야 한다.
법성은 보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능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법성이라는 것은 이른바 공성空性이며 무생성無生性이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제1의第一義의 몸이다. 만약 이것을 본다면 부처를 보았다고 이름하리라.”[제7권]


곧바로 일심一心을 요달하면 도道를 성취하니
어찌 8상相을 구해서 닦음을 보이겠는가?



곧바로 이 마음을 요달하면 부처인데, 어째서 8상相으로써 성불하는가?


만약 이 마음을 요달하면 바로 천진불天眞佛이라서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을 설하지 않는다. 만약 성불을 설한다면 이는 조어助語이고 또한 증어增語이다.

『원각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여래의 오묘한 원각심圓覺心은 본래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이 없으며, 또한 성불도 없고 성불 아님도 없으며, 허망한 윤회도 없고 윤회 아님도 없다.’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본래 보리와 열반이 없다는 것은 바로 명호를 전변한 말이다. 번뇌를 전변하기 때문에 보리의 명호를 세우고, 생사를 전변하기 때문에 열반의 명호를 얻는다. 그러나 번뇌의 성품이 공하고 생사가 본래 적멸하여 이미 전변하는 바의 모습이 없고 또한 능히 전변하는 명칭도 없는 것이다.
성불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은 허망한 윤회가 없는 것이며, 또한 성불도 없다는 것은 윤회 아님이 없는 것이니, 오로지 오묘한 원각심일 뿐 다시 있는 것이 없다.’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시방으로부터 한 회상에 와서
저마다 무위無爲를 배우니
이것이 바로 부처를 뽑는 마당인지라
마음이 공해야 급제해서 돌아간다.

이와 같다면 자연히 등과登科를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급제해야 하거늘 어찌 수기受記를 받아서 이름 날리길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또 고덕古德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좌선하지도 않고 계율도 안 지닌다.
묘각妙覺의 심주心珠는 희기가 태양과 같으나
당체當體가 허현虛玄해서 한 물건도 없으니
누가 연등불燃燈佛의 수기를 받으리오.”[제8권]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석가釋迦가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어머니 태胎에 식신[神]을 내리고 나아가 8상相으로 도를 이루었다면, 이는 성문의 왜곡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하열하게 이해하는 중생을 위해서 모태에서 출현하신 것이다.”[제6권]


원각의 묘심妙心은 비록 체體가 없더라도
사물에 감응해서 몸을 성취함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묘한 원각심은 이미 무소유(無所有:空)의 다른 이름인데 어째서 가르침 가운데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세간에 출현하는 등의 일을 설했는가?


첫째는 근기가 성숙한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감응해서 나타난 것이며, 둘째는 보살의 인지因地의 본원本願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의 경계는 광대무변해서 정식情識으로 알 바가 아니고 오직 성품을 보아야만 능히 요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이 구분[際]이 없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의 근원임을 아는 것이다. 진眞은 성품이 없어서 상相에 즉해서 발명發明하고, 상相은 체體가 없어서 진眞으로 인해서 건립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상像이 없어서 감응을 만나 형상을 이루고, 미묘한 감응은 방소가 없어서 염念에 따라 자취를 드리우고, 체體에는 생하고 멸함이 없어서 생멸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령 색色이 아니라 함은 체體의 입장에서 본 것이요, 색 아님도 아니라 함은 용用의 입장에서 본 것으로, 법신과 보신은 차별이 없고[一際] 체體와 용用은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색깔과 소리로써 취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고, 만약 색깔과 소리를 여의고서 구한다면 아직 단멸斷滅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엄』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색신色身은 부처가 아니니
음성도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색깔과 소리를 여의지 않고서도
부처의 신통력을 본다.

만약 색깔과 소리를 논한다면 역시 스스로의 마음일 뿐이니, 가로ㆍ세로 일체가 마음의 성품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제8권]


보리는 비록 몸과 마음으로 얻는 것이 아닐지라도
몸과 마음이 만약 단멸되면 보리도 여읜다.
“ 【문】 보리가 곧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가르침 가운데 보리는 몸과 마음으로써 얻을 수 없다고 설했는가?


보리의 도道가 곧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담연湛然해서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대체로 이 정각무상正覺無相의 참지혜는 그 도道가 허현虛玄하고 묘해서 평상의 경계를 끊으니, 귀 밝은 자라도 들을 수 없고, 지혜로운 자라도 그 앎을 쓸 수 없고, 변재가 뛰어난 자라도 그 말을 베풀 수 없고, 본뜨는[像] 자라도 그 모양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요달하지 못해서 색음色陰을 자신의 몸이라 집착하고 능지能知를 자기 마음이라 인식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몸은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지각하는 바가 없고, 마음은 환화幻化와 같아서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그 집착하고 취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보리는 몸과 마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보리는 촉진觸塵이 아니라서 몸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보리는 법진法塵이 아니라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요달한 사람에 나아가면 즉각 음신陰身은 본래 공하고 허망한 마음은 상相이 없음을 요달하니, 본래 공하기 때문에 법신이 항상 나타나고, 상相이 없기 때문에 진심眞心이 이지러지지 않는다. 이처럼 5음陰을 발명하는 것이 곧 보리라서 이를 여의고선 보리가 없으니, 보리로써 보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보리로써 보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수文殊는 ‘나는 보리를 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리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보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유마경』에서는 ‘보리가 소관所觀의 경계가 아니라면 능히 반연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소관의 경계가 공한 것이 곧 실상實相의 보리이고, 능히 반연하는 마음이 적멸한 것이 곧 자성自性의 보리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법을 배우는 자는 오직 증득함으로써 안다고 하셨는데, 이제 보리는 몸과 마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서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고 말한다면, 처음으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사람은 어떻게 나아갑니까?


만약 보리에는 모습이 없어서 취할 수가 없고 성품이 없어서 닦을 수 없다는 걸 능히 믿고 깨닫는다면, 이와 같이 분명히 요달하는 것이 곧 참다운 증득이다.”[부자함富字函 제2권]


타신他身은 자신自身을 여의지 않고
저 화化함은 완연히 나로부터 화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즉해서 성불한다는 것은 도리어 타불他佛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만약 결정적으로 세우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의 위신력과 호념護念이 없다는 것이어서 문득 단견斷見을 이룬다.


자기 마음의 성품이 일체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에 만약 타불他佛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자불自佛이니, 자타自他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오직 일심一心일 뿐이다. 가령 천제석天帝釋이 천업天業을 닦지 않으면 궁전宮殿이 어찌 몸에 따를 것이며, 윤왕輪王이 왕의 인因을 짓지 않으면 칠보가 모일 이유가 없으니, 오직 자기의 선행에 의지해서 밖으로 수승한 연緣이 감응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이 부처를 염念하면 부처가 나타나는데, 다만 그 부처는 부처도 아니고 부처 아님도 아닌 것으로 부처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저 허망한 마음으로 나타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부처는 모습도 아니고[본래 정해진 모습이 없다.] 모습 아님도 아니고[연기緣起의 온갖 모습이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헤아릴 수 없으니, 다만 저 범부가 마음을 따라서 있으면 곧 부처가 나타났다는 상념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은 한결같이 저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의 화합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한결같이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고 하면서 즉시 정법正法을 비방하기도 한다.

주석에서 말하였다.
‘모습 아님, 본래 정해진 모습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마음으로 인해서 나타난 겉의 모습은 체體가 없으니, 연緣이 다하면 곧 사라지는데 무슨 모습이 있겠는가? 모습이 아님도 아님은 연기緣起의 온갖 모습이라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이미 정해진 모습이 없다고 하였다면 단지 연緣에 따라 나타난 것이니, 환영[幻]의 모습은 없지 않은 것이다. 만약 능히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나와 남에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는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온蘊을 취하지 않으며 밖으로는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정법을 비방하지 않는다면, 눈을 뜨든 눈을 감든 발을 올리든 발을 내리든,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님이 진정으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치자함侈字函 제7권]


영화影化는 마음으로부터 감응해 나타난 것이니
원래 어찌 저[彼]가 와서 맞이한 것이겠는가?



이미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를 보는 것이 마음이라면, 어째서 가르침 가운데 화현한 부처[化佛]가 와서 맞이하여 온갖 청정한 찰토[淨刹]에 나는 것인가?


법신여래法身如來는 본래 생하고 멸함이 없다. 진眞으로부터 화化를 일으켜서 미혹된 근기를 이끌어 제접하고, 화化로써 진眞에 즉하여 일제一際에 진실로 상응하는 것이 곧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면서 사물과 마음에 따라서 감응하는 것이다.
또 화현의 체體가 진眞에 즉함은 오고 감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참된 흐름으로부터 화현해서 갔다가 돌아옴이 있음은 곧 오는 모습 없이 오고 보는 모습 없이 보는 것이다. 오지 않으면서 오는 것은 흡사 물 속의 달이 단박에 드러남과 같고, 보지 않고서 보는 것은 마치 흐르는 구름이 홀연히 나타남과 같다.


앞에서 설했듯이 진체眞體라면 담연해서 움직임이 없고, 화현한 모습이라면 오지 않으면서도 온다. 이는 바로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와서 맞이하는 것인데, 어째서 자기 마음을 증득하는 것을 부처라고 하는가?


이는 바로 여래의 본원공덕력本願功德力 때문이다. 저 연緣이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공덕을 닦아서 쌓도록 한다면, 자기 마음이 감응하여 부처의 몸이 와서 맞이함이 나타나는 것이지, 모든 부처가 실제로 화신化身을 보내서 제접해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연緣 있는 중생이 때[時]와 근기[機]가 올바로 합해져서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능히 부처가 와서 맞이함을 보게 할 수 있다면, 부처의 몸은 담연하고 항상 적멸해서 가고 옴이 없다. 그러나 중생의 식심識心이 부처의 본원공덕의 수승한 힘에 의탁해서 자기 마음이 변화하므로 가고 옴이 있는 것이니, 마치 거울의 상像과 같고 흡사 꿈속의 행위 같다. 거울 속의 형상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꿈속의 물질[質]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니, 다만 스스로의 마음일 뿐 불화佛化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청정한 업이 순수하게 성숙하면 부처의 몸을 보는 것이고, 악한 과果가 장차 이루어지면 마음이 지옥을 나타냄을 아는 것이다.
가령 복덕福德이 있는 자라면 자갈을 잡았더라도 금이 되겠지만, 업이 빈곤한 사람이면 금이 변화되어 자갈로 될 것이니, 자갈은 금이 아닌 데도 금으로 나타나고 금은 자갈이 아닌 데도 자갈이 된다. 금이 생기는 것도 다만 이 마음의 일어남일 뿐이며, 자갈의 나타남도 오직 마음을 따라서 나타난 것이다. 전변轉變이 나의 금과 자갈이니, 의심을 품은 무리들이 어찌 이 의미를 깨우칠 수 있겠는가?”[치자함侈字函 제7권]


미혹의 명위名位에서 분별을 일으킴을 그만두고
다만 범부와 성인의 체體가 서로 교차함을 밝힐 뿐이다.



성불成佛의 근본 이치는 단지 일심一心일 뿐인데, 어째서 다시 문수文殊ㆍ보현普賢의 행위行位의 인因과 석가釋迦ㆍ미륵의 명호名號의 과果와 나아가 시방 모든 불국토의 신통변화와 갖가지 법문을 세웠는가?


이것이 바로 명위名位 없는 명위이고 인과 없는 인과이다. 이 마음이 인因을 짓고 이 마음이 과果를 이루고 이 마음이 명名을 드러내고 이 마음이 위位를 세우는 것이니, 처음과 나중이 모두 마음으로서 인因과 과果도 똑같이 증득하는데, 다만 근기가 동등하지 않고 소견이 같지 않을 뿐이다.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근기에 맞지 않는다면 끝내 다 함께 해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저마다 시현示現해서 사물을 인도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갖가지 명자名字를 열더라도 모두 일심의 뜻일 뿐이다.
만약 스스로의 마음을 어기고 외적으로 부처 모습의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를 취한다면, 이는 전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위덕威德과 모습[色]과 종족으로서
사람 가운데 조어사調御師를 본다면
이는 병든 눈으로 거꾸로 보는 것이라서
다시는 최상의 수승한 법을 능히 알 수 없으리라.

어째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인가? 첫째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숨겨지고 나타나는 것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인因은 본각本覺에 숨겨지고, 모든 부처의 과果는 법신法身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因이 숨겨진 본각이 곧 과가 드러난 법신이라서 과가 능히 인을 이룬다면 부처인 중생이고, 과가 드러난 법신이 곧 인이 숨겨진 본각이라서 인이 능히 과를 갖춘다면 중생인 부처이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이 서로 사무치고, 이理와 사事가 서로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석가모니釋迦牟尼에서 석가는 이곳 말로는 능인能仁이고 모니는 이곳 말로는 적묵寂黙이다. 능인이란 곧 마음과 성품이 가없어서 일체를 함용含容하는 것이며, 적묵이란 심체心體가 본래 고요하여서[本寂] 동정動靜에 상관없기 때문이다. 미륵이란 이곳 말로는 자씨慈氏이다. 즉, 일심진실一心眞實의 자애이니, 마음이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사물에 맡겨 말고 폄으로써 감응해 나타나는 것이 방소가 없기 때문이다. 미타彌란 이곳 말로는 무량수無量壽이다. 즉, 여리如理를 목숨으로 삼으니, 일심진여一心眞如의 성품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촉阿閦이란 이곳 말로는 부동不動이다. 즉, 일심의 오묘한 성품이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고 묘각위妙覺位에서도 능히 늘어나지 않고 무명지無明地에서도 능히 줄지 않기 때문에 부동이라 칭하는 것이다. 가령 삼장 늑나勒那는 이렇게 말했다.
‘법계法界에 두루 들어가 예배하는 것은 진실로 수행하는 이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몸과 마음의 평등한 법을 관하는 것이다.
본래부터 법계 모든 부처의 몸 밖에 있지도 않았고, 또한 모든 부처의 몸 안에 있지도 않았으며 또한 나[我]의 밖에 있지도 않고, 또한 내 안에 있지도 않으니, 자성自性이 평등하여 본래로 늘거나 줄지 않는다. 이제 한 부처님께 예배함은 모든 부처님께 두루 통하는 것이니, 마치 하나의 방 속에 백천 개의 거울을 걸고서 어떤 사람이 거울을 보면 거울에 다 상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부처 몸은 청정하여 저 거울보다 밝으니, 번갈아 서로 서로 머금어 이어지면서[遞相涉入] 거울은 비추지 않음이 없고 영상은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이렇다면 타자他者를 섭수해서 총總이 되고 타자에 들어가서 별別이 되는 것이다. 한 몸이 이미 그렇다면 나아가 모든 법계의 범부와 성인의 몸까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마치 한 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를 일컬으면 모든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부르는 것과 같아서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다.’

『화엄』에서 말하였다.
‘일체 처소가 문수라는 것은 문수가 비록 동쪽에서 오더라도 일체 처소에 즉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계의 몸과 부동不動의 지혜가 경계와 접촉해서 이를 요달한다면, 6근根과 3업業이 다 문수이다. 실상實相의 체體가 두루해서 삼라만상이 반야般若 아님이 없으니, 어찌 한 곳인들 문수가 아니겠는가?’ ”[부자함富字函 제4권]

49) 상호품相好品[10칙]

당당하도다, 32가지 미묘한 상相이여,
혁혁하도다, 80가지 수형隨形이여.

(1) 삼십이상三十二相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여래의 발바닥은 평탄하고 원만한 모습이니 마치 경대의 밑과 같다. 땅이 비록 높고 낮더라도 발이 밟는 바에 따라서 평탄하게 균등히 접촉하니, 이것이 첫 번째이다.
여래의 발바닥에는 천 폭輻의 바퀴 문양과 바퀴 테의 온갖 모습이 있어서 원만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이다.
여래의 손과 발은 모두 부드러워서 마치 도라솜[覩羅綿]과 같으니, 이것이 세 번째이다.
여래의 두 발의 발가락 하나하나 사이는 마치 기러기왕雁王의 물갈퀴가 교차한 것 같은데 그 문양이 비단에 그린 듯하니, 이것이 네 번째이다.
여래의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들은 원만하고 섬세하고 길어서 사랑스러우니 이것이 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발뒤꿈치는 넓고 길고 원만해서 발꿈치[趺]의 모습과 일치하니, 이것이 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발꿈치는 길고 높고 빛나고 원만해서 발뒤꿈치의 모습과 일치하니, 이것이 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두 장딴지는 점차로 가늘어져 원만해지는데, 마치 사슴왕의 장딴지와 같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두 팔은 평평하게 서서 무릎을 만지는 것이 마치 코끼리 왕의 코와 같으니, 이것이 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음상陰相은 세봉勢峯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것이 마치 용이나 말과 같으니, 이것이 열 번째이다.
여래의 털구멍에는 각기 하나의 털만이 있으며 감청색을 띠고서 말려 있으니, 이것이 열한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털 끝은 모두 위로 누워 오른쪽으로 말려 있으니, 이것이 열두 번째이다.
여래의 몸의 피부는 미세하고 얇고 매끄러워서 더러운 물이 머물지 못하니, 이것이 열세 번째이다.
여래 몸의 피부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온갖 보배들로 장엄되어 있으니, 이것이 열네 번째이다.
여래는 두 발과 두 손바닥과 목과 두 어깨의 일곱 곳이 충만하니, 이것이 열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목 뒤와 어깨는 원만하고 뛰어나게 미묘하니, 이것이 열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어깻죽지와 겨드랑이는 모두 다 충실하니, 이것이 열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용모와 거동은 듬직하고 원만하고 단정하고 곧으니, 이것이 열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몸의 모습은 길고 넓고 단정하고 위엄이 있으니, 이것이 열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체상體相은 그 양量이 균등하고 원만한 것이 마치 낙구타諾瞿陀 나무와 같으니, 이것이 스무 번째이다.
여래의 턱과 가슴과 몸의 상반신은 위용이 광대하여 마치 사자왕과 같으니, 이것이 스물한 번째이다.
여래의 상광常光은 사방으로 각기 한 길이니, 이것이 스물두 번째이다.
여래의 치아는 40개인데, 가지런하고 반듯하고 깨끗하고 촘촘하고 뿌리가 깊고 하얗기가 옥이나 눈보다 더하니, 이것이 스물세 번째이다.
여래의 네 개의 어금니는 아주 희고 날카로우니, 이것이 스물네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항상 맛 가운데서 최상의 맛을 얻으시니, 이것이 스물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혀의 모습은 얇고 청정하고 넓고 길어서 능히 얼굴 둘레를 덮고 귀와 머리카락에까지 이르니, 이것이 스물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범음梵音은 언사[詞]와 음운[韻]이 온화하고 우아해서 대중의 많고 적음에 따라 평등히 듣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스물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속눈썹은 마치 우왕牛王과 같아서 감청색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니, 이것이 스물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눈동자는 감청색과 선명한 흰 색인데 붉은 고리가 사이를 장식해서 순결하고 분명하니, 이것이 스물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둥근 달과 같고 눈썹의 모습은 맑고 깨끗해서 마치 천제天帝의 활과 같으니, 이것이 서른 번째이다.
여래의 미간에는 백호상白毫相이 있는데, 유연하기가 마치 솜과 같고 희기가 옥이나 눈보다 더하니, 이것이 서른한 번째이다.
여래의 정수리 위엔 오슬니사烏瑟膩沙가 높이 드러나고 두루 원만한 것이 마치 천개天盖와 같으니, 이것이 서른두 번째이다.”[곤자함崑字函 제9권]

(2) 팔십수호八十隨好
또 말하였다.
“여래의 손톱은 얇고 윤택하고 빛나고 맑고 깨끗해서 마치 화적동花赤銅과 같으니, 이것이 첫 번째이다.
여래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둥글고 섬세하고 길지만 마디의 뼈가 나타나지 않으니, 이것이 두 번째이다.
여래의 손발은 각각 차이가 없이 동등해서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이다.
여래의 손발은 원만하여 뜻대로 되며, 빛깔은 맑고 깨끗해서 연꽃과 같으니, 이것이 네 번째이다.
여래의 근육과 맥박은 단단히 맺히고 견고하며 깊이 숨겨져 드러나지 않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두 복사뼈는 모두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으니, 이것이 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걸음걸이는 곧바로 나아가면서도 자세히 살피시는 것이 마치 코끼리나 용왕과 같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걸음걸이는 위용威容이 가지런하고 엄숙해서 마치 사자왕과 같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걸음걸이는 평안하고 질서가 있어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서 마치 우왕牛王과 같으니, 이것이 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걸음걸이는 나아가고 멈출 때 우아한 것이 마치 거위왕과 같으니, 이것이 열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돌아보실 때 반드시 오른쪽으로 돌리시는데, 이는 마치 용이나 코끼리 왕이 온몸을 함께 돌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한 번째이다.
여래의 사지관절은 점차로 통통해져서 미묘하고 좋으면서도 안정되게 퍼져 있으니, 이것이 열두 번째이다.
여래의 골절骨節은 서로 맺혀서 틈이 없는 것이 마치 용이 웅크린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세 번째이다.
여래의 무릎은 미묘하고 좋으면서도 안정되게 퍼져 있으며, 견고하고 원만하고 청정하니, 이것이 열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몸은 윤택하고 매끄럽고 빛나고 부드러워서 티끌과 때가 붙지 않으니, 이것이 열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돈독하고 정숙해서 두려움이 없고 항상 겁내지를 않으니, 이것이 열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몸은 견고하고 조밀해서 서로 잘 붙어 있으니, 이것이 열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몸은 안정되고 중후해서 일찍이 흔들린 적이 없으니, 이것이 열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모습은 마치 선왕仙王처럼 단아하고 엄숙해서 그림자를 여의고 있으니, 이것이 스무 번째이다.
여래의 몸은 둥근 광명이 둘러싸고 있어서 항상 스스로 비추고 있으니, 이것이 스물한 번째이다.
여래의 배는 방정方正하여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온갖 모습으로 장엄하니, 이것이 스물두 번째이다.
여래의 배꼽은 깊고 둥글고 미묘한 광택이 나니, 이것이 스물세 번째이다.
여래의 배꼽은 두텁지만 우묵하지도 않고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스물네 번째이다.
여래의 피부는 가려움이나 종기ㆍ주근깨ㆍ점ㆍ사마귀ㆍ혹을 여의었으니, 이것이 스물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손바닥은 충만하고 유연하고 발바닥은 안정되고 평평하니, 이것이 스물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손금은 깊고 길고 밝고 곧고 윤택하고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스물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입술 빛깔은 마치 빈바과頻婆果처럼 위와 아래가 서로 일치하니, 이것이 스물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입[面門]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서 알맞게 단엄하니, 이것이 스물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혀는 부드럽고 얇고 넓고 길어서 마치 붉은 구리 빛깔과 같으니, 이것이 서른 번째이다.
여래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위엄스런 진동이 깊고 멀리까지 가며, 사무치도록 맑고 밝으시니, 이것이 서른한 번째이다.
여래의 음운音韻은 아름다움과 미묘함을 구족해서 마치 깊은 골짜기의 메아리 같으니, 이것이 서른두 번째이다.
여래의 코는 높고 길고 곧아서 콧구멍이 드러나지 않으니, 이것이 서른세 번째이다.
여래의 모든 치아는 고르고 가지런하고 희니, 이것이 서른네 번째이다.
여래의 모든 어금니는 둥글고 희고 빛나고 청결해서 점차로 날카로우니, 이것이 서른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눈은 맑아서 푸른 색과 흰 색이 분명하시니, 이것이 서른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눈은 길고 넓은 것이 마치 청련화靑蓮華 잎과 같으니, 이것이 서른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속눈썹은 위아래가 가지런하고 조밀하며 희지 않으니, 이것이 서른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두 눈썹은 길면서도 희지 않고 세밀하고 빽빽하면서도 유연하니, 이것이 서른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두 눈썹은 수려해서 차례차례 감유리색紺琉璃色이 되니, 이것이 마흔 번째이다.
여래의 두 눈썹은 높이 드러나고 빛나고 윤택하며, 생김새가 마치 초승달 같으니, 이것이 마흔한 번째이다.
여래의 귀는 두텁고 광대하고 길어서 둥근 둔덕을 이루니, 이것이 마흔두 번째이다.
여래의 두 귀는 수려하고 가지런하고 평평하니, 이것이 마흔세 번째이다.
여래의 용모와 거동은 능히 보는 이로 하여금 손해도 없고 오염도 없게 하여서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낳으시니, 이것이 마흔네 번째이다.
여래의 이마는 넓고 원만하고 평평하고 반듯해서 생김새가 남달리 미묘하니, 이것이 마흔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몸은 위아래로 원만하게 나뉜 것이 마치 사자왕처럼 비할 바 없는 위엄이 있으니, 이것이 마흔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카락은 길고 감청색이며 조밀하고 희지 않으니, 이것이 마흔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카락은 향기롭고 청결하고 가늘고 유연하고 윤택하고 말려 있으니, 이것이 마흔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정리되어서 흐트러짐이 없으니, 이것이 마흔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카락은 견고해서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쉰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카락은 빛나고 매끄럽고 남달리 미묘해서 티끌과 더러움이 붙질 않으니, 이것이 쉰한 번째이다.
여래의 신체[身分]는 견고하고 충실해서 나라연那羅延을 능가하니, 이것이 쉰두 번째이다.
여래의 신체는 장대하고 단아하고 곧으니, 이것이 쉰세 번째이다.
여래의 모든 구멍은 청정하고 둥글고 좋으니, 이것이 쉰네 번째이다.
여래의 신지身支는 세력이 남달리 수승해서 견줄 자가 없으니, 이것이 쉰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신상身相은 대중이 즐겨 보면서도 항상 싫증내지 않으니, 이것이 쉰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길이와 너비가 알맞고 청결하고 빛나는 것이 마치 가을의 보름달과 같으니, 이것이 쉰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편안하고 광채가 드러나며, 말씀하시기 전에 웃음을 머금으시고 오직 마주할 뿐 등지지를 않으시니, 이것이 쉰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광택이 있고 기쁜 표정이라서 찡그림을 멀리 여의었으니, 이것이 쉰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신지身支는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어서 항상 나쁜 냄새가 없으니, 이것이 예순 번째이다.
여래의 털구멍은 항상 뜻대로의 미묘한 향기를 내니, 이것이 예순한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은 항상 최상의 수승한 향기를 내니, 이것이 예순두 번째이다.
여래의 머리 모습은 둥글고 묘하고 좋아서 마치 말달나末達那 같기도 하고 천개天盖 같기도 하니, 이것이 예순세 번째이다.
여래의 몸의 털은 감청색으로 빛나고 청정한 것이 마치 공작의 목과 같으니, 이것이 예순네 번째이다.
여래의 법음法音은 대중이 많든 적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아서 이치에 상응하여 집착이 없으니, 이것이 예순다섯 번째이다.
여래의 정수리의 모습은 능히 볼 수 있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예순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분명한 것이 마치 붉은 구리 빛깔과 같으니, 이것이 예순일곱 번째이다.
여래께서 다니실 때는 그 발이 땅에서 손가락 네 마디 분량만큼 뜨면서도 인문(印文:발자국)마다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나타나니, 이것이 예순여덟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스스로 유지하시고 남의 부축을 기대하지 않으시며, 몸을 기울이지도 않고 또한 웅크리지도 않으시니, 이것이 예순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위덕은 멀리 일체를 진동시키니 악한 마음이 있는 자는 보고서 기뻐하도록 공포에 떠는 자는 보고서 안심하나니, 이것이 일흔 번째이다.
여래의 음성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중생의 뜻에 따라 기뻐하게 말씀하시니, 이것이 일흔한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능히 모든 유정有情의 말과 좋아하는 뜻에 따라서 설법을 하시니, 이것이 일흔두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일음一音으로 정법正法을 연설하시지만 품류에 따라서 이해를 하니, 이것이 일흔세 번째이다.
여래의 설법은 다 차례[次第]에 의거하고, 반드시 인연이 있고, 좋지 않은 말씀은 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일흔네 번째이다.
여래께서는 평등히 모든 유정을 관찰해서 선은 찬양하고 악을 나무라지만 애착하거나 미워함이 없으니, 이것이 일흔다섯 번째이다.
여래께서 하시는 바는 먼저 관찰하고 나중에 실행하여 궤범軌範을 구족하시니, 이것이 일흔여섯 번째이다.
여래의 상호相好는 능히 관찰함에 다함이 없으니, 이것이 일흔일곱 번째이다.
여래의 정수리 뼈는 견실하고 원만하니, 이것이 일흔여덟 번째이다.
여래의 얼굴 모습은 항상 젊고 늙지 않으니, 이것이 일흔아홉 번째이다.
여래의 손발과 가슴 앞에는 길상덕상吉祥德相이 있으니, 이것이 여든 번째이다.”[곤자함崑字函 제10권]

『화엄원교華嚴圓敎』에서 말하였다.
“비로자나여래상해毘盧遮那如來相海는 아흔일곱 가지를 들고, 나아가 십화장세계해十華藏世界海의 미진수微塵數 대인상大人相은 몸의 하나하나를 온갖 보배의 미묘한 상相으로 장엄하고 있다.[문장이 번쇄하여 기록하지 않는다.]”[육자함育字函 제8권]


부처마다 온갖 상호相好를 장엄하시니
하나하나가 모두 일찍 지은 인因에 따라 온 것이다.

『보녀경寶女經』에서 말하였다.
“여쭈었다.
‘여래께서 얻은 32상은 어떤 업으로 성취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여래는 청정한 계율을 지녔기 때문에 발바닥이 평평하고 원만한 모습이며, 보시[施]의 업을 닦았기 때문에 천 폭輻의 바퀴 모습을 얻었고, 모든 중생들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뒤꿈치가 원만한 모습을 얻었고, 정법正法을 수호하였기 때문에 손가락이 섬세하고 긴 모습을 얻었고, 다른 중생을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물처럼 교차된 모습을 얻었고, 미묘한 옷으로 보시를 했기 때문에 손과 발이 부드러운 모습을 얻었고, 청정한 음식을 보시했기 때문에 일곱 곳에서 원만한 모습을 얻었고, 불법佛法을 기쁘게 들었기 때문에 사슴왕의 장딴지 같은 모습을 얻었고,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 버렸기 때문에 음장陰藏의 모습을 얻었고, 좋은 법을 닦았기 때문에 마치 사자왕의 모습과 같은 윗몸을 얻었고, 좋은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원만하고 평평한 골격의 모습을 얻었고, 두려움을 구호救護했기 때문에 원만한 팔꿈치의 모습을 얻었고, 다른 이의 사업事業을 보고서 돕는 걸 즐겼기 때문에 손으로 무릎을 만질 수 있는 모습을 얻었고, 항상 열 가지 선행을 닦았기 때문에 청정한 몸의 모습을 얻었고, 항상 병자에게 약을 베풀었기 때문에 먹은 음식이 목구멍에 이르러서 다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항상 장엄을 일으켜서 좋은 법을 닦았기 때문에 사자 뺨 같은 모습을 얻었고, 모든 중생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했기 때문에 치아가 40개인 모습을 얻었고, 다툼이나 소송을 화합시켰기 때문에 치아가 조밀한 모습을 얻었고, 진귀한 보배를 베풀었기 때문에 치아가 가지런한 모습을 얻었고, 몸ㆍ입ㆍ뜻이 청정했기 때문에 두 개의 어금니가 흰 모습을 얻었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허물을 수호했기 때문에 길고 넓은 혀를 얻었고,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했기 때문에 맛 가운데 최상의 맛을 얻었고, 중생 속에서 항상 부드럽게 말했기 때문에 범음梵音을 얻었고, 자비로운 마음을 닦아 익혔기 때문에 감색 눈을 얻었고,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菩提를 구했기 때문에 우왕牛王의 눈썹 같은 모습을 얻었고, 다른 이의 공덕을 찬양했기 때문에 백호의 모습을 얻었고, 부모와 스승[師長]과 화상和尙을 공경했기 때문에 육계肉髻의 모습을 얻었고, 심오한 법을 즐겨 설했기 때문에 몸의 유연함을 얻었고, 부구(敷具:袈裟)를 베풀었기 때문에 금빛 광명의 모습을 얻었고, 장애[聚]를 멀리 여의고서 세간의 일을 설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구멍에서 하나의 털이 생기는 모습을 얻었고, 착한 벗과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좋아했기 때문에 몸의 털이 아름다운 모습을 얻었고, 나쁜 일을 중생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털 색깔이 순수한 금빛 모습을 얻었고, 항상 중생을 관하면서 삼매를 닦았기 때문에 니구타尼拘陀 모습과 같은 몸의 원만함을 얻었고, 태어나는 곳마다 불상佛像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라연那羅延 같은 힘을 얻었다.’ ”[위자함位字函 제6권]


족륜足輪이 밟는 곳마다 벌레가 모두 교화되고
몸의 그림자로 가려주자 비둘기는 놀람에서 벗어났다.

『요집』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금강신金剛身이 다닐 때는 그 발이 땅에서 4촌寸 떨어지는데, 천 폭輻의 바퀴 모습 문양의 자취가 지면에 나타난다. 그리고 발아래의 모든 벌레들은 7일간 안온하다가 목숨을 마치면 하늘에 태어난다.”[창자함悵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과 사리자가 함께 경행할 때 새 한 마리가 매에게 쫓기면서 두려움과 놀라움에 떨고 있었다. 문득 사리자의 그림자로 나아갔는데, 두려움이 오히려 그치지 않고 온몸이 전율하였다. 다시 부처님의 그림자로 나아가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때 사리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새가 제 그림자에 이르러서는 두려워했는데, 부처님 그림자에 들어가서는 몸과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60겁 동안 수행하면서 해칠 뜻이 없었지만, 나는 3대大 무수겁無數劫 동안 수행하면서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대는 아직 해치는 습기가 있지만, 나는 이미 영원히 끊어 버렸다.’ ”[퇴자함退字函 제3권]


미묘한 음성과 미묘한 모습은 진실로 만나기 어려우니
조금만 보고 조금만 듣더라도 그 이익은 가볍지 않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을 요익케 하신다. 만약 여래의 색신色身을 보게 되면, 눈이 청정함을 얻는다. 만약 여래의 명호를 듣게 되면, 귀가 청정함을 얻는다. 만약 여래의 계향戒香을 맡으면, 코가 청정함을 얻는다. 만약 여래의 법미法味를 맛보면, 혀가 청정함을 얻어서 길고 넓은 혀를 갖추고 언어의 법을 이해한다. 만약 여래의 광명을 접촉하게 되면, 몸이 청정함을 얻어서 마침내 위없는 법신을 획득한다. 만약 여래에 대해 억념憶念을 일으키는 자라면,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청정함을 얻는다. 만약 여래께서 지나신 토지와 탑묘에 공양하는 자라면, 또한 선근善根을 갖추어서 온갖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성현의 즐거움을 얻는다. 설사 어떤 중생이 부처님에 대해 보고 듣는데도 업장業障에 얽히고 덮여서 믿음의 즐거움[信樂]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선근을 심어서 쓸데없는 허물이 없는 자라면 마침내 열반에 들어간다.”[여자함黎字函 제2권]


진제[眞機]는 여실如實해서 무상無相을 얘기하지만
속제俗諦의 권도로써 색신色身을 드는 것이다.

『금강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여래의 온몸의 모습은
세간의 정서에 따르는 것이니
사람들이 단견斷見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권도로써 공허한 이름을 세운 것이다.

32상은 거짓으로 말한 것이며
80종호는 헛된 소리일 뿐이니
몸이 있음[有身]은 깨달음의 체[覺體]가 아니고
무상無相만이 곧 진짜 형상이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는 다 무상無相의 모습인데, 지금은 어째서 32상을 설하는가?


불법佛法에는 두 가지 제諦가 있으니, 첫째는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32상을 설하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기 때문에 모습 없음을 설한 것이다.
또 두 가지 도道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복의 길을 닦도록 하기 때문에 32상을 설하고, 둘째는 지혜의 길이기 때문에 모습 없음을 설한다.
생신生身을 위하기 때문에 32상을 설하고, 법신法身을 위하기 때문에 모습 없음을 설한다. 불신佛身은 32상으로써 장엄하고, 법신은 10력力ㆍ4무외無畏ㆍ4무애無碍ㆍ18불공법不共法의 온갖 공덕으로써 장엄한다.
또 두 종류의 중생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가명仮名임을 아는 중생이니 이들을 위해 32상을 설하고, 둘째는 이름[名字]에 집착하는 중생이니 이들을 위해 모습 없음을 설한다.”[건자함建字函 제9권]


부처는 원래 마음에서 증득하는 것인데
지금 사람은 이를 꺼리고 모습 언저리에서 구하는구나.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석가釋迦는 승가 가운데 계시면서 위없는 도를 연설하셨는데 승가와 더불어 차이가 없었으며, 유마維摩는 속세에 있으면서 해탈과解脫果를 설하였는데 세속과 더불어 다르지 않았으며, 승만勝鬘 여인은 대승법大乘法을 설하면서도 여인의 모습을 바꾸지 않았으며, 선성善星 비구는 천제闡提의 행동을 하면서도 승려의 모습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그 마음속에서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함을 근거로 차이를 삼은 것이지, 어찌 색신의 남녀 모습이나 의복의 좋고 추함과 상관이 있겠는가?
만약 형태가 증득에 따라서 바뀌고 모습이 깨달음을 좇아서 바뀌는 것이 성자라고 말한다면, 구담瞿曇의 모습이 바뀌어서 바야흐로 석가를 이루고 유마의 모습이 변해서 금속金粟이 되는 것이리라. 즉, 증득은 마음의 증득일 뿐 형태의 변천이 아니며, 깨달음은 지혜의 변화일 뿐 모습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가령 세간에서 벼슬한 사람은 그 지위가 비록 바뀌더라도 그 모습에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사가 마음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을 알아야 하니, 단지 스스로의 마음을 증득하면 바로 성인을 이룬다. 만약 도道를 알지 못한다면, 모습을 갖춘들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만약 32상으로 여래를 보는 자라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곧 여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인古人은 ‘만약 이 이치를 요달하지 못한다면, 설사 걸음걸음마다 연꽃을 밟는다 할지라도 역시 마귀의 지음과 똑같다’고 말하였다.”[치자함侈字函 제5권]


50) 신족품神足品[5칙]

신력神力은 걸림 없는 열 가지 신통이요
묘용妙用은 가로ㆍ세로 열여덟 가지 변화로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열 가지 신력神力의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불가설不可說 세계를 하나의 티끌 속에 두는 걸림 없는 작용, 하나의 티끌 속에 등법계等法界의 모든 불찰佛刹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 일체의 큰 바닷물을 하나의 털구멍에 두고 시방세계를 두루 돌면서 왔다갔다 해도 중생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 불가설不可說 세계 안의 자신 가운데서 온갖 신통을 지어서 나타내 보이는 걸림 없는 작용, 하나의 터럭에다 헤아릴 수 없는 금강위산金剛圍山을 묶고서 이를 가지고 모든 세계를 다니면서도 중생으로 하여금 공포심이 생기지 않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 불가설겁不可說劫을 1겁으로 만들고 1겁을 불가설겁으로 만드는데, 그 가운데서 생성과 파괴의 차별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중생의 마음으로 하여금 공포를 일으키게 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 모든 세계가 물ㆍ불ㆍ바람의 재앙 등 갖가지 변괴를 나타내는데도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 모든 세계가 세 가지 재앙[三災]으로 무너질 때 능히 모든 중생의 생활도구를 지켜주면서도 손해나 결핍을 주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 한 손으로 부사의不思議한 세계를 잡아서 불가설 세계 밖으로 던지면서도 중생으로 하여금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생각을 주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 모든 국토가 허공과 같음을 설하면서도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여자함黎字函 제6권]

『유가瑜伽』에서 말하였다.
“열여덟 가지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진동이니, 이른바 모든 세계를 두루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치연熾然이니, 이른바 몸 위로는 불꽃을 일으키고 몸 아래로는 물을 내뿜는 것이다. 셋째는 유포流布이니, 이른바 빛을 흘려 두루 비추는 것이다. 넷째는 시현示現이니, 이른바 하고 자 하는 바에 따라서 저 불토佛土와 악취惡趣를 보이는 것이다. 다섯째는 전변轉變이니, 이른바 그 땅에서 물에 대한 수승한 견해[勝解]를 일으키자마자 물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불과 바람을 이루게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섯째는 왕래往來이니, 이른바 즐기는 바에 따라서 산과 돌 가운데를 오고감에 걸림 없는 것이다. 일곱째는 마는 것이고, 여덟째는 펴는 것이니, 이른바 설산雪山의 왕 등을 펴고 마는 것이다. 아홉째는 온갖 상像이 몸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눈앞의 대중과 모든 대지를 자기 몸속에 넣는 것이다. 열째는 동류왕취同類往趣이니, 이른바 그 곳으로 가서 그 색류色類와 같아지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숨는 것[隱]이고, 열두 번째는 드러내는 것[顯]이고, 열세 번째는 소작자재所作自在이니, 이른바 가고 오고 머무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이다. 열네 번째는 제타신통制他神通이니, 이른바 다른 이가 나타낸 신통을 다 다스리고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능시변재能施辨才이니, 이른바 모든 유정有情의 변재와 능히 함께 하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능시억념能施憶念이니, 이른바 모든 유정이 법에 대한 생각[念]을 잃어도 마음 속 깊이 생각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열일곱 번째는 능시안락能施安樂이니, 이른바 법을 설하실 때 저 듣는 자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는 방광放光이니, 이른바 몸으로 광명을 놓아서 온갖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다.”[인자함因字函 제7권]


서슬 퍼런 위세는 단지 중근기와 하근기를 교화하지만
실상實相은 마땅히 향상向上하는 자에게 주어야 한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만약 신력으로 변화시키는 능력[神變]을 갖추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중생을 받아들여 교화하는가?


만약 순수하게 사상事相을 취한다면, 신통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니, 가령 『보행기輔行記』에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삼매를 닦는 자가 홀연히 신통을 일으키면 신속히 그것을 버려야 하니, 유루有漏의 법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관止觀』에서는 ‘능히 반야般若를 가로막는다’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종지種智의 반야는 스스로 모든 법을 갖추고서 능히 온갖 상相을 소멸[泯]하기 때문이다. 아직 구족하지 못한 채로는 단지 이理에 안주할 뿐이니, 어찌하여 사事의 신통을 요구하겠는가? 만약 신통에만 전념한다면, 이는 이理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理를 거스를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재앙을 받으니, 가령 울두승의鬱頭勝意의 무리들이 바로 그런 종류이다.
무릇 참된 신변神變은 일승문一乘門을 연설하고 무생無生의 이치를 설하지 않음이 없다. 한마디의 말이 도道에 맞으면 생사에 처해서도 열반을 증득하고, 눈으로 분명한 종지宗旨를 보게 되면 번뇌[塵勞]에 맞닥뜨려서도 정각을 이룬다. 찰나에서도 범부가 새롭게 성인이 되고,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공空으로 돌아가니, 이 같은 작용이 어찌 신통변화가 아니겠는가?
『유마경』에서는 ‘신통의 지혜로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만약 상상上上 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단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도록 할 뿐이니, 부처를 관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팽성왕彭城王이 이렇게 물은 것과 같다.
‘모든 대덕大德이 나로 하여금 왼쪽 겨드랑이에서는 물이 나오고 오른쪽 겨드랑이에서는 불이 나오며,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광명을 놓고 땅을 흔들게 한다면 나는 즉시 예를 드리고 그대를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우두 융牛頭融 대사가 대답했다.
‘이제 나에게 이런 식으로 증득한 과果에 대해 따진다면, 정작 도道와는 동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이와 같이 성불하는 것이라면 환사幻師도 역시 부처를 지을 수 있으며, 환사가 부처를 지을 뿐만 아니라 천마天魔ㆍ외도外道ㆍ요괴ㆍ여우ㆍ정령ㆍ도깨비ㆍ귀신ㆍ용ㆍ이무기도 모두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습니다.’ ”[치자함侈字函 제5권]

단지 변화만을 아는 것을 이른바 신통이라 하고
저 식識이 짓는 것은 모두 묘용妙用이다.



비천한 박지博地 범부도 그 지위가 모든 부처와 같다는데, 어째서 모든 부처의 신통 작용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까?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중생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부처는 중생의 체體를 깨닫고 중생의 용用을 쓴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공가志公歌』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종횡무진하면서도 꺼리고 싫어함[忌諱]를 끊고
오랫동안 인간세계에 있으면서도 세속에 묻히지 않는다.
운용은 성聲ㆍ색色 가운데를 여의지 못하니
겁劫을 지낸들 어찌 잠시라도 버리겠느냐.

또 학인學人이 대안大安 화상에게 여쭈었다.
‘무엇이 모든 부처의 신통입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강서江西에서 왔습니다.’
화상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닌가?’
대답하였다.
‘결코 잘못 말하지 않았습니다.’
학인이 다시 여쭈었다.
‘무엇이 신통입니까?’
화상이 말했다.
‘과연 망령된 말을 하는구먼.’
이것은 모두 시험을 하는 것이다. 눈앞[現前]의 일상적인 작용[日用]을 알지 못하니, 어찌 다시 갖추고 갖추지 못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방龐거사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은 대부분 재물[金]을 중시하지만
나는 찰나刹那의 고요함을 사랑한다네.
재물이 많으면 사람의 마음이 산란해지지만
고요함은 진여眞如의 성품이 보인다네.

마음이 통하면 법 역시 통하니
열여덟 가지 행의 자취를 끊어 버리네.
다만 스스로의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어찌 신神이 통하지 않음을 근심하리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일체 불사佛事를 이루어서 갖춘다네.”[위의 권과 같다.]


51) 십호품十號品[3칙]

홀로 존귀하신 이의 열 가지 명호를 우러러 생각하니
하나의 금金을 천 개의 그릇으로 나눔과 어찌 다르리오.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에서 말하였다.
“여래는 열 가지 명호를 구족하고 있으니, 이른바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다.
허망함이 없으므로 여래라 하고, 진실한 복전福田이므로 이름하여 응공이라 하고, 법계를 알므로 이름하여 정변지라 하고, 3명明을 갖추었으므로 이름하여 명행족이라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선서라 하고, 두 세간을 알므로[첫째는 국토 세간이고, 둘째는 중생 세간이다.] 이름하여 세간해라 하고, 능히 중생의 몸과 마음의 악을 굴복시키므로 이름하여 조어장부라 하고, 능히 중생을 위해서 안목을 지으므로 천인사라 하고, 착한 법취法聚ㆍ착하지 않은 법취ㆍ착하지도 않고 착하지 않지도 않은 법취를 아니,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 하며, 하나의 국토 가운데 두 분의 부처가 없으므로 이름하여 세존이라 한다.”[현자함賢字函 제3권][『열반경』에서도 설하였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마음을 인해서 법을 세우고, 법에 따라서 이름[名字]을 얻고, 성聖에 처해서 진眞이라 칭하고, 범凡에 거처해서 속俗이라 이름 붙인다. 마치 금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에 따라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손가락에 있으면 반지라 말하고 팔을 장식하면 팔찌라 한다. 일심一心은 움직이지 않아도 부르는 이름에 차별이 있어 만법萬法의 차별을 이루고, 진금眞金은 바뀌지 않는데도 다른 이름을 인정하니 천 개의 그릇이 같지 않다. 만약 법 법이 온통 마음이 지은 그릇임을 안다면, 그릇은 다 금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명상名相이 간여할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을 어찌 미혹할 수 있겠는가?”[치자함侈字函 제2권]


부처는 본래 형상이 없으니 어찌 명호를 붙일 수 있겠는가?
토끼에게 어찌 뿔이 있어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체體는 이름[名字]이 아니면 말하지 못하고, 이름은 체體가 아니면 베풀지 못한다. 체體를 말함에는 반드시 그 이름[名語]을 빌려야 하고, 이름을 말함에는 반드시 그 체體를 빌려야 한다. 이제 체體 밖에서 이름을 베푼다면 이는 다만 이름일 뿐 체體가 없는 것이니, 어찌 그 이름에 해당하는 체가 있는 것이겠는가?
비유하면 마치 토끼에겐 뿔이 없는데도 이름을 베푼 것과 같다. 이는 이름일 뿐 뿔은 없는 것이니, 어찌 뿔이 있어서 그 이름에 해당한 것이겠는가?”[치자함侈字函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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