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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972 불교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7권

by Kay/케이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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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7

 

 

대장일람집 제7권


[제6문]

삼계三界의 윤회를 초월하려고 하면 3승乘을 빌려서 닦아 증명하라.[6품 153칙]

42) 사중품四衆品 43) 입도품入道品
44) 성문품聲聞品 45) 연각품緣覺品
46) 보살품菩薩品 47) 등각품等覺品


42) 사중품四衆品
[재가在家의 두 대중은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이고, 출가出家의 두 대중은 비구승과 비구니이다. 부록으로 8부部와 외도外道의 58칙을 붙인다.]

번뇌[塵勞]가 핍박함이 마치 감옥과 같고
법문法門의 넉넉함이 마치 허공과 같다.

『요집要集』에서 『열반경涅槃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재가의 급박하고 좁음[迫迮]은 마치 감옥과 같아서 모든 번뇌가 이로 인해 생긴다. 출가의 여유롭고 넓음[寬廓]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훌륭한 법은 이로 인해서 증장한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법원法苑』에서 『바사론』을 들어서 말하였다.
“이 집은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과 수레나 마차 등의 물건이 오직 늘어나기만을 탐내서 추구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집은 가득 채우기 어려우니 마치 바다가 물을 삼키는 것과 같다. 집은 만족함이 없으니, 마치 불이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다. 집은 쉼이 없으니, 각覺과 관觀이 상속하기 때문이다. 집은 고뇌이니, 마치 원수가 친족을 속이는 것과 같다. 집은 장애이니, 능히 성도聖道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집은 혼란이니, 서로 어긋나서 다투기 때문이다. 집은 성냄이 많으니, 아름답고 추함을 질책하기 때문이다. 집은 무상無常하니, 비록 오래되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집은 온갖 고통이니, 말달리듯 구하고 수호하기 때문이다. 집은 전도顚倒이니, 거짓 이름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집은 기인伎人이니, 갖가지 망령된 장식 때문이다. 집은 변이變異이니, 반드시 흩어지기 때문이다. 집은 임시로 빌리는 것이니, 진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집은 꿈을 보는 것과 같으니, 부귀가 곧 없어지기 때문이다. 집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잠깐 사이에 변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집은 한 방울의 꿀과 같으니, 그 맛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집은 가시덤불과 같으니, 욕망의 가시로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걱정들은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재가의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관觀해야 한다.
‘집의 허물을 알라. 처자와 권속과 모든 재물도 능히 구원하질 못하고 귀의처로 삼을 수 없으니, 나의 좋은 벗이 아니다. 마땅히 그걸 버려야 한다.’ ”[서자함書字函 제2권]


하루아침 동안 잠시 복전福田의 옷을 걸쳐보았더니
많은 겁 동안 온갖 고취苦趣를 거치지 않았다.

『요집要集』에서 『대연경大緣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하루 낮밤 동안이나마 출가했기 때문에 20겁劫 동안 3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았다.
출가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삼계 가운데 유전流轉하면서
은혜와 애착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은애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들어간다면
진실로 은혜를 갚은 것이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서 도법道法을 받아들인 뒤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구걸로써 만족할 줄 아니, 하루에 한 번 먹고 나무 아래서 하룻밤을 지낸다.’ ”[사자함辭字函 제7권]

『요람要覽』에서 『오덕복전경五德福田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첫째는 발심發心해서 출가하는 것이니 아름다운 도道를 품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외형의 아름다운 모습을 망가뜨리니 법복法服에 순응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명身命을 맡겨 버리니, 숭고한 도를 준수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영원히 친족에 대한 애착을 끊으니 싫어하고 좋아함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대승大乘을 추구하니 남을 제도하기 때문이다.”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이 있으니, 첫째는 좌선坐禪이고, 둘째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대중을 권유해서 교화하는 일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일을 구족한다면 마땅히 출가한 사람의 법이겠지만, 만약 행하지 못한다면 덧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으니 오직 죄를 받는 원인일 뿐이다.”[영자함楹字函제17권]


만약 승려가 되어서 계율까지 받았다면
귀신과 하늘[神天]을 섬기지 않고 친족에게 예배하지 않는다.

『요람要覽』에서 『범망경梵網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의 법으로는 국왕과 부모와 육친六親에게 예배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귀신을 공경하고 섬겨서도 안 된다.”

또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천신의 무리들은 다섯 가지 계를 받은 사람에게 감히 예배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라의 군주인 지존至尊도 비구가 예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복덕과 수명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장자함帳字函 제2권]

『요람要覽』에서 말하였다.
“부모가 도리어 예를 갖추는 것은 세속을 떠난 것으로 예를 삼은 것이며, 또한 그 법복法服과 계체戒體에 절하는 까닭이니, 『본기경本起經』에서는 부왕父王인 정반왕淨飯이 부처님 발에 예배드렸다고 했고, 또 『마야경摩耶經』[마야는 부처님의 어머니이다.]에서는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게송을 설했다.

위없는 대법왕大法王에게
머리 숙여서 예배드립니다.”


출가를 능히 받아들이고 아울러 남에게 권한다면
그 공덕은 탑을 조성하는 등 그 밖의 공덕보다 뛰어나다.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출가하고 다른 사람의 출가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출가를 권유함으로써 얻는 공덕은 보시 등 일체의 공덕보다 뛰어나니, 모든 공덕 가운데 이 공덕이 최상이다.’
또 말씀하셨다.
‘만약 남녀와 노비와 사람들을 놓아 주어 출가시키면 그 공덕이 한량없을 것이다. 또 칠보탑을 세워 그 높이가 삼십삼천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출가의 공덕만은 못하다.’[심자함甚字函]


애도愛道의 출가를 처음에는 들어 주지 않다가
아난阿難이 재차 청하자 비로소 허락했다.
대애도大愛道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여인도 정진하면 사문의 네 가지 도道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부처님의 법과 계율을 받게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시오. 좋지 않습니다[거성去聲]. 모인(母人:여인)으로서 내 법에 들어와서 내 법의法衣를 입는 자는 반드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청정해야 하며, 정결히 한 후에 범행梵行을 창달해야 하고, 삿된 생각이 없어야 하고, 마음의 공적空寂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때 대애도가 즉시 다시 애원하였다.
‘부처님께 바라노니 득도得度하도록 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세 번을 청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대애도는 문 밖으로 물러나서 눈물을 비처럼 흘리며 자신의 악한 태도를 참회하였다. 즉, 여든네 가지로 장부를 미혹하고 혼란시켜 도덕을 잃게 해서 천하의 남자로 하여금 여인에게 유혹되지 않은 자가 없도록 한 것을 참회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깊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득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아난이 즉시 그녀를 위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부처님을 따르면서 여인도 정진하면 사문의 네 가지 도道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대애도는 재가에 있으면서도 믿음이 있고 무상無常을 깨우쳐 알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욕망의 모습을 살펴서 그 진실을 이미 깊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출가하려고 하니, 부디 부처님께서는 허락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왜냐하면 반드시 맑고 고상한 자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정성旌姓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 가운데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라. 그 집안은 미약해져 흥성하지 못할 것이니라.
이제 모인母人으로 하여금 나의 법과 계율에 들어오게 하면, 반드시 불법佛法의 청정과 범행梵行이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대애도에게는 착한 마음이 많으며, 나도 그녀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내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부터 나를 길러 주었다. 내가 이제 성불하고 보니 그녀의 은혜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모인母人이 사문이 되면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八敬法]을 반드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 한다.
첫째, 비구는 대계(大戒:具足戒)를 지키고, 모인母人 비구니는 반드시 정법正法을 따르면서 받아들여야 하니, 가볍게 여기거나 희롱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비구가 대계를 지킨 지 보름 이상이 되면 비구니는 반드시 예로써 비구를 섬기면서 새로 배우는 뜻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와 비구니는 함께 거처해서도 안 되고 함께 머물러서도 안 된다. 넷째,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 검토해서 만약 삿된 말이 있다면 받아들이고서 퍼뜨리지 말아야 하니, 듣고서도 못 들은 듯이 하고 보고도 못 본 듯이 해야 한다. 다섯째, 스스로 허물과 나쁜 점을 살펴야 하니, 큰 소리로 크게 말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섯째, 비구에게 경과 율에 관한 일을 물을 때는 세간의 긴급하지 않은 일을 함께 말해선 안 된다. 일곱째, 만약 법과 계율을 범하게 된다면, 반드시 보름에 대중에게 나아가 참회해야 한다. 여덟째, 비구니가 비록 백 년간 대계를 지켰더라도 반드시 새롭게 대계를 받은 비구의 아랫자리에 처해서 겸손하게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행하겠다면 사문이 됨을 허락하노라.’
우리 부처님의 정법은 천 년이나 오래 갈 것이지만
여인[尼母]이 문도 되니 절반으로 줄어들리라.

또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 년 동안 흥성하면서 전파되어 일체를 널리 제도할 것이지만, 지금 여인이 사문이 되기 때문에 5백 년이 줄어들어 법이 점점 쇠미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인은 다섯 가지의 사문이 되질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 하는가?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전륜왕轉輪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범천왕梵天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천제석天帝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마천왕魔天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는 장부라야 될 수가 있다.
다시 다음에 여인은 비유하면 독사와 같으니, 사람이 비록 그 뱀을 살해하여 이미 죽었더라도 어떤 사람은 보고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한다. 이처럼 여인이 비록 사문이 되었더라도, 더러운 진액[惡露]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모든 남자가 그로써 여러 가지로 움직이게 되므로 도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봉자함奉字函 제1권]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여인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 년 동안 머물겠지만 지금은 줄어서 5백 년이다.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해탈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정定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지계持戒를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다문多聞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보시布施를 얻으리라.[처음 백 년 동안에 해탈의 견고한 법이 있다.]”[유자함猶字函 제3권]

여인에게 비록 다섯 가지 장애가 있더라도 본래 공함을 안다면
여러 생生 지나 정각正覺을 성취하리라고 부처님이 수기하시다.

『초일명경超日明經』 하권에서 말하였다.
“혜시慧施 등 5백 명의 여인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는 지금 여자 몸입니다만, 부디 위없는 도의 뜻을 일으켜 여자 몸을 바꿔 속히 정각을 성취하여 시방의 중생을 제도 해탈시키기를 원합니다.’
그 때 상도上度 비구가 혜시에게 말했다.
‘여자 몸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여자에겐 세 가지 장애와 다섯 가지 일의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어려서는 부모님께 통제를 받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통제를 받아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자식이 크면 자식에게 어려움을 받으니, 이것이 세 가지입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가? 첫째는 여인은 천제석天帝釋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맹스럽고 욕심이 적어야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는데, 잡다한 악과 많은 교태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는 천제석이 되지 못합니다. 둘째는 범천梵天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청정한 행을 받들고, 더러움이 없으며, 네 가지 평등한 마음[四等心]을 닦아서 4선禪을 준수한다면 곧 범천에 오르지만, 음욕에 절도가 없는 까닭에 여인의 몸으로는 범천이 되지 못합니다. 셋째는 마천魔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 가지 선善을 구족하고, 삼보三寶를 존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봉양해야 비로소 마천을 얻게 되는데, 경솔하고 오만해서 순종하지 않고 올바른 가르침을 훼손하기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는 마천이 되지 못합니다. 넷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도를 행하고, 온갖 중생에게 자애롭고 불쌍히 여겨야 비로소 전륜왕이 되는데, 청정한 행이 없기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는 성제聖帝가 되지 못합니다. 다섯째는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마음을 행하고, 모든 것을 불쌍히 여기고 무아無我를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성불하는데 색色의 욕망에 집착한 몸ㆍ입ㆍ뜻의 업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는 부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 때 혜시를 비롯한 여인들이 상도에게 물었다.
‘저마다 온갖 뿌리를 심어서 과실을 얻는데, 본래 남녀가 있어서 보응報應에 이르는 것입니까? 본래 다섯 곳인 제석천ㆍ범천ㆍ전륜왕ㆍ소도小道ㆍ대도大道가 있는 것입니까?’
상도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오히려 짓는 자가 없으니, 무엇이 성립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내가 부처를 취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취해도 취하는 바가 없고, 성취해도 성취하는 바가 없고, 깨쳐도 깨친 바가 없어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어야 비로소 부처라는 명호를 붙이는 것이며, 또한 명호가 없이 임시로 이름 자[名字]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진실로 말한 대로이다. 모든 것은 처소가 없어서 행을 따라 이루어지니,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흥기하지도 않고 쇠퇴하지도 않으며,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염念도 없고 앎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어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성취하노라.’
이 때 혜시와 5백 명의 여인들은 마땅히 서원한 대로 남자 몸으로 바뀌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수기를 내리시기를, ‘10겁劫 후에 부처가 되리니, 그 명호는 혜견慧見 여래이고, 세계는 제명除冥이며, 겁은 광명光明이라 하리라’고 하셨다.”[망자함罔字函]
본래 여자의 모습이 없는데 어찌 바꿀 것이며
어찌 여류女流이겠는가라고 반드시 이렇게 관해야 한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말하였다.
“방 안에 있던 한 천녀天女가 법을 설하자, 사리불이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나는 12년 이래로 여인의 모습을 구했지만, 끝내 얻을 수 없었는데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비유하면 마치 환술사가 변화로 환녀幻女를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올바른 질문을 한 것입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환영[幻]은 고정된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천녀가 말했다.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고정된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여자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죽자함竹字函]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아사세왕阿闍世王에게 딸이 있었는데 무외덕無畏德이라고 이름하였다. 모든 대성문들과 변론을 하면 그들이 그녀에게 미치질 못했다.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여인은 기이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이미 과거 90억 부처님들께 보리심을 발했노라.’
사리불이 말했다.
‘능히 여자 몸을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 여인을 어찌 여인이라고 보는가? 그대는 이제 마땅히 그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보살이 원력願力을 일으켜 여자 몸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무외덕은 이렇게 서원했다.
‘만약 모든 법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면, 지금의 나로 하여금 장부의 몸을 나타내게 하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자 즉시 여자 몸이 소멸되면서 장부의 몸을 나타내었다.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수기하셨다.
‘7천 아승기가 지나면 정각을 이룰 것이니, 그 명호를 이구여구離垢如垢 여래라 하고, 세계의 명칭은 광명光明이라 하리라.’ ”[제자함制字函 제9권]


불성佛性을 알지 못하면 남자와 여자를 이루지만
집안의 보배를 알고 나면 여자가 곧 남자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대열반경』을 들으면 항상 여인의 모습을 탓하고서 남자의 모습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대승 경전에는 장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불성佛性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불성을 알지 못한다면 남자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로서 불성이 있는 것을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이런 무리는 여인이라 이름한다고 설하고, 만약 여인이 자신에게 결정코 불성이 있다는 걸 능히 안다면, 나는 이런 무리는 곧 남자라고 설한다.”[이자함邇字函 제9권]


사문沙門은 본디 도로써 명호를 삼고
장로長老는 진실로 덕을 말미암아서 칭한다.

『요람』에서 『보적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사문이라는 것은 적멸이고, 조복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몸이 청정하고, 여실한 뜻이고, 해탈을 얻고,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여의고, 견고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대지와 같고, 상대와 나의 뜻을 거두어 지키고, 모든 형상에 대해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 속에서 손을 움직여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많은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사문이라고 이름한다.
또 바기婆耆 존자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능히 본원本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를 사문이라고 한다.

범어梵語의 비구는 진秦나라 말로는 걸사乞士이니, 이른바 위로는 모든 부처님께 법을 구걸해서 혜명慧命에 유익하게 하고, 아래로는 시주에게 음식을 빌어서 색신色身에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능히 번뇌를 깨부수기 때문에 비구라 이름한다. 범어 필추苾芻는 바로 서천축의 풀이름인데, 능히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체성體性이 유연한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몸과 말의 거칠음을 능히 조복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줄기를 끌어다 옆으로 퍼뜨리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법을 전해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이어져서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향기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으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계율과 덕의 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넷째는 능히 통증을 치료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번뇌의 독을 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햇빛을 등지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항상 불일佛日을 향하기 때문이다.
범어에서 갖추어 말하는 승가僧伽는 당唐나라 말로 중衆이다. 지금은 간략히 승僧이라고 칭하는데, 화합하기 때문이다. 그 뜻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율[戒]의 화합으로 똑같이 닦는 것이며, 둘째는 견해[見]의 화합으로 똑같이 이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몸[身]의 화합으로 똑같이 머무는 것이며, 넷째는 이익[利]의 화합으로 똑같이 균등한 것이며, 다섯째는 말[口]의 화합으로 다툼이 없는 것이며, 여섯째는 뜻[意]의 화합으로 똑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 화합[和]을 제일[上]로 삼기 때문에 또한 화상和上이라고도 말한다.
범어의 사리闍梨는 당唐나라 말로 궤범軌範이다.”

『대장엄경』에서 말하였다.
“장로는 머리털이 하얗거나 얼굴 피부가 주름진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복과 덕을 닦아서 온갖 악을 소멸하고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이를 장로라고 한다.”[군자함君字函 제1권]


남의 음식을 쉽게 생각지 말 것이니
자신의 공덕 없음을 생각한다면 어찌 감당하리요.
『요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음식을 받을 때는 먼저 5관觀[거성去聲]을 외우면서 단정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경책한 뒤에 비로소 음식을 받는다.
첫째는 공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그 음식이 온 곳을 생각한다.[『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이 음식은 땅을 일구고 심어서 수확하였다. 찧고 갈며 일고 씻고 밥을 지어 먹게 만든 공이 매우 크다. 한 발우의 음식도 농부가 흘린 땀으로 이루어졌다. 음식은 적더라도 흘린 땀은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하승기율』에서 말하기를, “시주가 그 아내와 자식의 몫을 줄여서 복을 구하는 까닭에 보시라 한다”고 하였다.]
둘째는 자기의 덕행을 헤아려서 공양 받을 만한지를 생각한다.[『비니모경毗尼母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좌선도 하지 않고 경을 읽지도 않고 삼보三寶의 일을 운영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보시를 받으면 시소타施所墮11 비구가 타인에게 보시를 받을 경우, 법답지 않은 것을 시소타施所墮라고 한다. 보시로 인해 3악취惡趣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가 된다. 위의 하나라도 부족한데 보시를 받으면 옳지 못하고, 전부를 행한다면 받아도 된다”고 하였다.]
셋째는 마음을 방비하고 과오를 여의는 데는 탐욕 등을 핵심으로 삼는다.[『명료론소明了論疏』에서 말하기를, “출가하려면 먼저 마음을 방비해야 한다. 세 가지 과오란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탐심貪心을 일으키는 것이고, 제일 맛없는 음식을 먹을 때 진심瞋心을 일으키는 것이요, 중간 음식을 먹을 때 치심痴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3악도惡道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넷째는 음식을 양약으로 여겨서 몸의 야윔을 치료한다.[몸이 마르는 것은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주병主病이고 404가지 병은 객병客病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음식을 의약으로 삼아 몸을 지탱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만약 죽을 먹는다면 바른 양약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 음식을 받아야 한다.[먹지 않아 병이 나면 도업道業이 어떻게 따르겠느냐? 『증일아함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너무 많이 먹으면 고통과 병환이 따르고 너무 적게 먹으면 기력이 쇠퇴해진다. 적당히 먹는 사람은 높낮음이 없이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음식은 때나 때 아닐 때 청請하거나 청하지 않거나 거두어야 한다.]”[제2권 십선품十善品 참조]


덕이 있다면 만 냥인들 어찌 말하기에 족할 것인가?
4사事를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따른다.

『영가집永嘉集』에서 말하였다.

부사의한 해탈의 힘이여,
묘용妙用이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끝이 없구나.
4사事의 공양인들 감히 사양하겠는가.
만 냥의 황금도 역시 소화하리라.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져도 아직 부족하지만
1구句는 요연了然히 백억을 뛰어넘는다.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만약 대승의 불법을 배우는 자라면, 시주에게 음식을 수미산같이 받을 수 있고, 옷을 대지에 깔 만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을 배우지 못한 자는 만약 승수僧數에 떨어지지 않으면 시방에 침 뱉을 곳이 없을 것이다.”[가자함駕字函 제4권]

만약 남을 제도하려 하면서도 자신을 제도하지 못하면
남을 침몰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도 침몰한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수행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제도한 후에 남을 제도해야 한다. 만약 스스로를 제도하지 못하고서 남을 제도하려는 자는 마치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함께 침몰하는 것과 같다.”


스승의 장점과 단점을 구하는 걸 그만두어라.
다만 진흙으로 빚은 용을 취해도 거짓 위에 진실이 있다.

또 말하였다.
“그대는 법사法師에 대해 그 단점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외경심을 내어라. 법사의 좋고 나쁨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오직 법을 들어서 스스로를 이익되게 하려는 것뿐이니, 마치 진흙으로 빚은 불상과 나무로 만든 불상이 실다운 공덕은 없지만 그로 인해 부처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것과 같다.”[입자함立字函 제9권]

고덕古德이 말하였다.
“진흙으로 빚은 용에게 공양해도 반드시 진짜 용이 비를 내리며, 평범한 승려에게 공양을 해도 반드시 참 승려가 복을 내리게 된다.”


비구가 양친 부모를 공양하는 것을 허락한다.
걸식[分衛]은 마땅히 다섯 곳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능가바차陵伽婆蹉 비구가 빈궁한 부모에게 옷과 물건을 공양하고 싶었으나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일을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사람이 백 년 동안 오른쪽 어깨에다 아버지를 얹고 왼쪽 어깨에다 어머니를 얹고서 그 위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세상에서 가장 진기한 옷으로 극진히 공양하더라도 오히려 잠깐 동안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지금부터 모든 비구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목숨이 다하기까지 부모님께 공양하는 것을 허락하느니라. 만약 공양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죄를 얻으리라.”[상자함上字函 제10권]


『요람』에서 『선견율善見律』을 들어서 말하였다.
“분위分衛는 이곳 말로는 걸식이라고 한다. 『승기僧祇』에서 말하기를 ‘걸식이란, 비구와 비구니에게 나누어 베풀고 도업道業을 닦도록 호위하므로 분위라고 한다’고 하였다.”

『근본비나야根本毘奈耶』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비구는 오직 다섯 곳에서는 걸식할 수 없다. 첫째는 노래하는 집이요, 둘째는 음녀의 집이요, 셋째는 술을 파는 집이요, 넷째는 전다라旃茶羅의 집이요, 다섯째는 왕의 집이다.’ ”

많은 일로 고통스러우면 만족할 만한 일들을 구하나니
모든 새들도 그로 인해서 떠나간다.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일을 경영[營事]하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다시 방사房舍를 가지고 세상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 돈과 재물은 얻기도 어렵고 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과거 세상에 발처跋處22 『마하승기율』 제6권에는 발거跋懅로 되어 있다.
비구가 숲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석군다釋軍多라는 새도 이 숲으로 모여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울어서 그 비구를 산란하게 해서 선정에 들지 못하게 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 새를 오지 않게 하고 싶은가?≻
비구가 대답했다.
≺그러길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해가 저물어 새들이 돌아올 때 각각에게 깃털 하나씩을 달라하고, 아침에 나갈 때도 이와 같이 달라고 하라.≻
비구는 가르침대로 아침저녁으로 각각에게 깃털 하나씩을 구걸했다. 이 때 새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사문은 항상 달라고 하는데, 오래지 않아 우리들의 털이 다 없어져서 다시는 날지 못할까 걱정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새들은 즉시 따로 살 곳을 찾아갔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들도 많이 요구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겠는가? 그대들 비구는 일을 경영하는 데 있어 지나친 욕심으로 많이 구하여 저 신심이 있는 거사로 하여금 재물을 괴롭게 희사하게 하지 말라.’ ”[우자함優字函 제6권]


승려는 어리석고 속인은 인색하여 모두 알지 못한 나머지
고뇌를 일으켜 원수를 이루어서 스스로 재앙을 가져 왔다.

『법원法苑』에서 『대집경大集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어떤 장님 용녀龍女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인지因地에서 일찍이 농부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비구가 와서 저에게 50전錢을 구걸했는데, 저는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시오. 그 때 반드시 당신에게 음식을 주겠습니다.≻
비구가 다시 말했습니다.
≺부디 10문文만 주십시오.≻
저는 그 때 그 비구에게 화를 냈고 10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비구의 마음에는 오뇌懊惱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중에 절로 가다가 숲에서 암라과菴羅果 열 개를 훔쳐 먹었습니다. 그 업의 인연으로 지옥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악업惡業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굶주린 용의 몸을 받아 온갖 벌레에게 뜯어 먹혀서 고름과 피가 나오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또 그 비구는 분노의 마음으로 지은 악업의 인연 때문에 작은 독룡毒龍이 되어서 저의 겨드랑이 밑에 살며 제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부처님께 나아가니,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자, 작은 용이 즉시 나오면서 똑같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오랜만에 여길 벗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용에게 말씀하셨다.
‘이 업은 너무나 무거워서 다섯 가지 무간죄無間罪에 버금간다. 왜 그러한가? 만약 사방에 항상 머무는 승려의 물건이나 현전現前의 승려의 물건이나 독실한 믿음으로 시주한 물건이나 혹은 꽃ㆍ열매ㆍ숲ㆍ동산ㆍ음식ㆍ탕약ㆍ침상[牀]ㆍ이부자리ㆍ깔개 등 모든 필요한 것을 사사로이 사용하고 친지에게 구걸한다면, 이 죄는 아비阿鼻지옥의 과보보다 무겁다.’ ”[칠자함漆字函 제6권]


무욕無欲의 분수 위에서 성냄의 바람이 불고
맑고 차가운 구름 속에서 벽력의 불이 일어난다.

『유교경遺敎經』에서 말하였다.
“욕망을 받는 재가인[白衣]은 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법답게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해서 성을 내더라도 오히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출가인은 도를 행하여 욕망이 없는 사람인데 성냄을 품는다면, 이는 아주 옳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맑고 차가운 구름 속에서 벽력이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응할 것이 아니다.”[당자함堂字函]


계율을 지킨다면 매운 채소를 더욱 싫어하게 되고
도를 닦는다면 사음과 도둑질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 ‘모든 중생이 삼마제三摩提를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다섯 가지 매운 음식[五辛][부추ㆍ파ㆍ달래ㆍ마늘ㆍ흥거]을 끊어야 한다. 익혀 먹으면 음욕을 일으키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냄이 늘어난다. 이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은 설사 능히 12부部 경전을 널리 설하더라도, 시방의 천선天仙이 그 냄새의 더러움을 싫어해서 모두 다 멀리 여의기 때문에 복과 덕이 나날이 줄어들어 마귀[魔]의 권속이 된다.’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삼매를 닦는 것은 본래 번뇌[塵勞]를 여의기 위한 것인데, 음심婬心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를 여읠 수 없다. 설사 선지禪智가 있더라도 반드시 마도魔道에 떨어지리니, 상품은 마왕이 되고 중품은 마왕의 백성이 되고 하품은 마녀가 된다. 이것은 예전의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음욕을 끊지 않고서 선정禪定을 닦는 이는 비유하면 마치 모래와 돌을 끓여서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백천 겁을 지내더라도 끝내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살생의 마음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를 여읠 수 없다. 설사 선정의 지혜가 있더라도 반드시 신도神道에 떨어지니, 상품은 대력귀大力鬼가 되고 중품은 비행야차飛行夜叉가 되고 하품은 지행나찰地行羅刹이 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살생을 끊지 않고서 선정을 닦는 이는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귀를 막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다시 다음에 도둑질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를 여읠 수 없다. 설사 선정의 지혜가 있더라도 반드시 사도邪道에 떨어지니, 상품은 정령精靈이 되고 중품은 요매妖魅가 되고 하품은 삿된 사람이 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도둑질을 끊지 않고서 선정을 닦는 자는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새는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려고 해도 끝내 채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와 같이 중생이 비록 몸과 마음에 살생과 도둑질과 음란함이 없어져 세 가지 행동[三行]이 이미 원만하게 되었더라도, 만약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하고, 나는 이미 성문과 보살을 얻었다며 대망어大妄語를 하면서 저들이 예참禮懺하기를 구하고 공양을 탐할 것이다. 부처님께선 이런 사람은 영원히 선근이 망가져서 삼계의 고통스런 바다에 빠진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멸도한 후에는 보살 등에게 칙령을 내려서 응신應身이 말세에 모든 윤전輪轉하는 자들을 제도하도록 하리니, 혹은 사문ㆍ재가자ㆍ거사ㆍ왕ㆍ재상ㆍ음녀ㆍ과부ㆍ간사한 자ㆍ도둑질하는 자ㆍ백정ㆍ장사치가 되어서 그 일을 함께 하며 불승佛乘을 칭찬함으로써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게 하되, 끝내 스스로 내가 진실한 보살이고 진실한 아라한이라고 하면서 부처의 밀인密因을 누설하지 않는다. 오직 목숨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은밀히 부촉해 남기는 것이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네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대망어를 끊지 못한 사람은 마치 사람의 똥을 깎아 전단나무 형태를 만들려는 것과 같아서 향기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다.”[염자함染字函 제6권]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실답게 말하는 자이고, 여여하게 말하는 자이고,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이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능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비구는 살아 있는 풀은 밟지도 않는데, 하물며 손으로 뽑겠는가? 어째서 대비大悲의 불자가 모든 중생들의 피와 살을 취해서 배를 채운단 말이냐.”

『정법염경正法念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길가에 버려진 물건을 본다면, 이것이 누구 것이냐고 외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인지 묻고서 돌려준다. 만약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7일 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외친다. 그런데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높은 곳에다 걸어 두고서 사람들이 보게 한다. 만약 자신의 물건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묻고서 맞는 자에게 준다. 끝내 아는 자가 없으면 3개월 동안 그냥 둔 뒤에 가령 탑원塔園에서 얻은 것이면 즉시 탑을 만드는 데 쓰고, 승원僧園에서 얻은 것이면 사방승가四方僧伽를 위해 쓴다.”[영자함楹字函 제14권]

『계품경戒品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마땅히 청정한 법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의 음욕을 일으키겠는가?”[나중의 네 가지는 앞서의 망어ㆍ살생ㆍ도둑질ㆍ음란함을 다스리는 것이다.]


잠자거나 마음이 미쳤거나 선정 든 상태에서 음행을 당한 경우
처음이건 중간이건 나중이건 쾌락 느꼈다면 어찌 죄를 피하리.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니가 사람ㆍ비인非人ㆍ축생의 세 종류와 함께 음행을 하거나, 다시 깨어 있거나 잠들거나 죽었을 때의 세 종류와 음행을 하면, 모두 바라이죄波羅夷罪다. 비구니가 만약 잠들거나 마음이 미쳐 있거나 선정[定]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이 위로 가서 음란한 짓을 할 경우, 비구니가 깨어나서 만약 처음이든 중간이든 나중이든 쾌락을 누렸다면 바라이죄다. 만약 잠들거나 마음이 미쳐 있거나 선정[定]에 들어갔는데 음란한 짓을 당할 경우, 깨어난 후에 처음엔 쾌락을 누리지 않다가도 중간이나 나중에 쾌락을 누렸거나, 혹은 처음과 중간엔 쾌락을 누리지 않다가 나중에 쾌락을 누렸다면 모두 바라이죄다. 만약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모두 쾌락을 누리지 않았다면 죄가 없다.
무엇을 쾌락을 누린다 하고 쾌락을 누리지 않는다 하는가? 비유하면 마치 굶주린 사람이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자 그가 음식으로 쾌락을 삼는 것과 같으니, 욕락欲樂을 누리는 자도 이와 마찬가지다. 욕락을 받지 않는 자는 비유하면 마치 청정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갖가지 신주를 그 목에 매다는 것과 같으니, 욕락을 누리지 않는 자도 이와 마찬가지다.”[섭자함攝字函 제6권]


미친병으로 인해 욕망을 행했다면 어찌 범한 것이겠는가?
산란하거나 무심無心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어떤 한 비구가 미친병에 걸려서 음행을 했다. 미친병이 낫자 의심이 생겨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친 자는 범한 것이 아니다. 가령 산란한 마음이나 병들어 마음이 무너진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함和字函 제8권]

승가의 물건은 눈처럼 호지護持해야 하거늘,
사사롭게 문득 가지면 사람 몸을 잃는다.

『요집要集』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승가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사용하면 그 죄가 더 무거운가?


시주가 본래 터럭 하나나 낱알 하나라도 희사함은 시방에 공양하려는 뜻이니, 북과 종의 한 메아리가 멀리까지 미치면서 똑같이 듣는다. 성인과 범부가 받아 써서 모두 도업道業을 이루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주를 도와서 끝없는 이익을 얻게 한다. 선함을 초래하는 것이 이미 많거늘 죄를 얻는 것이 어찌 적겠는가?
이제 보건대 어리석은 중생은 구차하게 복물福物을 탐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쓴다. 혹은 승가의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혹은 꽃과 과일을 받아쓰기도 하고, 혹은 승가의 가축을 타고 다니고, 혹은 승가의 노비를 거느려서 따라다니게 하고, 혹은 사사로이 승가의 물건을 빌려서 돌려주지 아니하고, 혹은 관청의 세력으로 승가의 허물을 들추어내니, 이와 같은 손실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허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지금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은 간탐하거나 인색해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들을 불쌍히 여겨 미래에 받을 고통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장차 준다면 속인에게 손실을 끼칠 뿐만 아니라 또한 일을 아는 자에게까지 미쳐서 미래의 태어나는 곳에서 그 재앙을 똑같이 받는다.”

또 『보인경寶印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과 법의 두 가지 물건은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없다. 부처님과 법의 물건은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것은 항상 초제(招提:사찰)에 두고서 서로 물어보고 쓸 수 있는 승려의 물건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승가의 물건을 써서 불탑을 수리하려면 법에 의해 취해야만 하니, 승가가 화합하면 쓸 수 있으며, 화합하지 않는다면 세속 사람에게 수리할 것을 권한다. 만약 불탑에 어떤 물건 내지는 1전錢 이상이 있으면, 시주가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천天과 사람은 이 물건에 대해선 마땅히 불상佛想과 탑상塔想을 내야 하며, 나아가 바람이 불어서 무너졌더라도 3보에 공양한 물건은 팔아서는 안 되니, 여래의 탑물塔物은 사람이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죄복결의경罪福決疑經』에서 말하였다.
“혹은 시주가 본래 석가불상[釋迦]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미타불상[彌陀]으로 고쳐서 만들고, 본래 『대품大品』을 만들려고 했는데 『열반涅槃』으로 고쳐서 만들고, 본래 승가의 방을 지으려고 했는데 승가의 음식으로 고쳐서 공양하고, 본래 이중二衆에게 보시하려 했는데 일중一衆으로 고쳐서 들여보내고, 본래 시방을 향하려 했는데 현전現前에 돌려서 들여보내는 것은 모두 시주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니, 돈의 많고 적음을 따져 5전錢을 채우면 중죄[重]를 이루고 5전이 못 되면 경죄[蘭]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분율四分律』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에 허락했다가 저곳에 준다면, 모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경문에 준거하면, 불상을 검교檢校33 자세히 조사하고 살펴본다는 뜻이다.
하다가 남은 채색彩色이 있어도 보살이나 성승聖僧 등의 형상을 짓지 못하니, 스승과 제자의 지위가 구별되기 때문에 서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다른 장엄구莊嚴具를 만들려고 하다가 도로 부처님께 공양하면 범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시주의 뜻[情]이 통해 한 줄로 늘어선 불상을 임의로 장엄하면 통틀어 지어도 전혀 죄가 없다.”

『오백문사율五百問事律』에서 말하였다.
“불상에 사용할 채색으로 새나 짐승의 모습을 그린다면 죄를 얻지만, 부처님 앞에 있는 걸 제외하면 공양해도 범하지 않는다.
‘요즈음 재齋를 올릴 때 불전佛錢이 있는데, 이 돈은 어떤 용도로 써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시주의 뜻이 상像을 짓는 것이라면 단지 상을 조성해야만 하고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된다.’ ”[영자함楹字函 제14권]

『장춘록』에서 말하였다.
“상주(常住)44 절에 거주하는 대중을 말한다.
의 돈을 한 문[一文錢]을 훔치면, 하루 낮 하루 밤에 3푼分 7리釐의 이자가 늘어나고, 이튿날 낮ㆍ밤이면 위의 이자에 또 이자가 늘어난다.[앞의 3푼 7리를 계산해야 한다.] 내세에 소나 말이 되어서 그것을 갚는다.[소는 날마다 8문文을 돌려주고, 말은 날마다 7문을 돌려준다.] 이 때문에 ‘일생의 편안함을 짓는 것이 만 겁劫의 어려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1문의 돈을 희사하여 상주常住에 들여놓으면, 하루 낮 하루 밤의 긴 복도 역시 마찬가지다.”[제9편]


승가의 재물을 속여 취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염라대왕이 반드시 알고 용서하지 않는다.
『법원法苑』에서 『십송률十誦律』을 들어서 말하였다.
“관리ㆍ공장工匠ㆍ악한 도적으로 승가에 대해 손해를 끼쳤거나 이익을 준 자는 부처님의 지사知事를 열고 승가의 물건을 내서 간대看待하여도 모두 범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세속인이 소멸에 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사知事를 여는 것일 뿐이다. 간대看待하지 않는 자는 부처와 승가에 대해 손해가 있다.”[벽자함壁字函 제2권]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라면 승가의 물건에서 마땅히 주어야 할 것과 마땅히 주지 않을 것이 있음을 안다. 무엇이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인가? 가령 손해 보는 것이 있거나 이익을 보는 것이 있다. 무엇을 손해 보는 것이라 하는가? 어떤 도적이 절에 와서 갖가지 음식을 찾는데, 만약 주지 않는다면 방화재난[燒劫]을 일으키고, 비록 마땅히 주지 않더라도 손해되는 일을 지을까 두려우니 많고 적음에 따라서 준다. 무엇을 이익 되는 것이라 하는가? 만약 승려들의 방 등을 고친다면, 목공이나 화공에게 전식前食과 후식後食 또는 때가 아니라도 음료수 등을 마땅히 주어야 하며, 가령 세력이 있는 자라도 마땅히 음식을 주어야 하니, 이를 이익 되는 자에게 마땅히 주는 것이라 한다.”[우자함優字函 제3권]
[이상 두 단락은 간략히 간추린 것이니, 본래의 경전에 상세히 갖추어져 있다.]


승려가 갈라섰다가 능히 화합하면 하늘에 태어나 즐길 것이며
승려가 화합하다가 갈라서면 지옥에 떨어져 근심하리라.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조달調達이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미 부처님을 해칠 수 없었으니, 기필코 마땅히 화합승和合僧을 파괴하리라.’
부처님께서 조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미 파계했다가 화합하는 승려라면, 그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 1겁 동안 즐거움을 누리지만 만약 화합했다가 파계하는 승려라면, 지옥 가운데 떨어져 1겁 동안 고통을 받으리라.’ ”[필자함畢字函 제3권]


계율을 지키는 스님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나니
다스리는 자는 이로써 죄앙罪殃을 얻는다.

『요집』에서 『십륜경十輪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비구들이 불법佛法에 의거해서 출가했으면, 모든 천인과 아수라阿修羅 등은 모두 마땅히 비구에게 공양해야 한다. 만약 비구가 계율을 보호하고 지키면 마땅히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가두거나 묶어두거나 혹은 그 손발이나 나아가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만약 파계한 비구가 온갖 번뇌 결사結使에 파괴되었더라도, 오히려 능히 하늘ㆍ용ㆍ인비인人非人 등에게 한량없는 공덕과 보배의 복장伏藏을 열어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를 의지해 출가한 사람은 계율을 지키든 계율을 깨뜨리든, 나는 전륜성왕이나 대신들이 이들을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가두고 묶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나아가 목숨을 끊는 일을 허락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가볍게 범하는 작은 위의威儀이겠는가? 파계한 비구가 비록 금계禁戒를 범할지라도, 그 계율의 힘은 오히려 능히 한량없이 천인天人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비유하면 향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향체香體가 비록 파괴되었더라도 냄새는 다른 것을 향기롭게 한다. 파계한 비구도 이와 같아서 스스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더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시키게 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 모든 재가자들은 모두 마땅히 출가자를 수호하고 존중하고 공양해야 하며, 경멸하거나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첨복화薝蔔華가 비록 시들었더라도
다른 모든 꽃들보다 뛰어나듯이
파계한 비구들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모든 외도들보다는 뛰어나다.”

또 『살차니건경薩遮尼犍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만약 탑과 절을 파괴하였거나 부처님의 물건을 취하였거나, 어떤 사문이 계율을 지키다가 계율을 파괴한 경우, 혹은 결박하여 가두고 때리거나, 혹은 세속에 돌려보내거나 그 목숨을 끊는다면, 이것은 근본적인 무거운 죄를 범한 것이니,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서 쉼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왕이 나라에서 이 같은 착하지 않은 짓을 행한다면, 모든 선인仙人과 성인들이 나라를 떠날 것이며, 큰 힘이 있는 모든 신들도 그 나라를 수호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들은 말다툼을 하고, 물은 가물어서 조화롭지 못하고, 겁탈하는 도적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질병에 걸려서 무수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은 것인 줄 알지 못하고 하늘만 원망하리라.”[장자함帳字函 제2권]
승려가 되려면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어머니가 아들의 출가를 말렸기에 여러 세상 동안 가난했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정반왕淨飯王은 부처님께서 이미 득도得度하셨음을 들었는데, 라후라까지 출가하자 문득 크게 고뇌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예전에 출가하셨을 때는 위로 난타難陁가 있어서 지금처럼 고뇌하지는 않았습니다. 난타가 또 출가했을 때는 나머지 정을 오직 이 자식에게만 쌓았는데, 이제 또 출가한다면 집안과 나라의 대계大計가 영원히 끊어지니,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왕은 또 자신을 미루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자손에 대한 애정은 골수까지 사무치는 것인데, 어찌 모든 비구들을 유혹해서 도를 닦도록 하는 것입니까? 부디 부처님께선 이제 모든 비구들에게 칙령을 내려서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부처님께서 왕을 위해 갖가지 미묘한 법을 설하시어 기쁨과 이익을 보이시고는 비구에게 계율을 내려서 ‘지금부터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득도할 수 없다’고 하셨다.”[상자함上字函 제7권]

『노여인경老女人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어떤 빈궁한 늙은 여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연을 듣고서 이해하였습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늙은 여인은 어떤 까닭으로 지혜가 이 정도나 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은 내가 전생에 뜻을 일으켜서 도道를 배울 때 내 어머니였다.’
아난이 여쭈었다.
‘그 어머니가 어째서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류진불拘留秦佛 당시에 나는 사문이 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자애慈愛로 인해 내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는 고민하면서 하루 종일 먹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5백 세 동안 가난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수명이 다하면 반드시 아미타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날 것이며, 나중에 68억 겁이 지나서는 반드시 부처가 되리니, 그 명호를 바건波揵이라 하고 불국토의 이름은 화화化華라고 하리라.’ ”[훼자함毁字函]


왕비 자리를 버리고 비구니 되니 그로 인해 과위를 증득했고
아버지를 가로막아 세속에 있게 하니 그 벌로 새가 되었다.

『잡보장경雜寶藏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옛날 우타선왕優陀羨王에게 부인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유상有相이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당시 나라의 법에 왕은 손수 거문고를 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부인은 왕의 총애를 믿고서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자신은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왕은 평소에 관상을 잘 보았는데, 부인에게 이미 죽을 상相이 나타나서 7일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왕은 곧 거문고를 쓰다듬으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부인이 그 이유를 물어도 왕은 대답하기를 꺼렸다. 그러자 간절히 계속해서 물었고, 왕은 사실대로 말했다. 부인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왕에게 아뢰었다.
‘석실石室 비구니가 하는 말을 들으니, 만약 믿는 마음으로 단 하루라도 출가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왕께서는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사랑의 정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6일째가 되는 날에 그대가 떠나는 걸 허락하리라.’
6일째가 되자 왕은 부인에게 말했다.
‘만약 천상에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나를 보러 오시오. 그래야 떠나는 걸 허락하겠소.’
이같이 맹세한 후 문득 출가하여 8계재戒齋를 받았다. 그 날로 목숨을 마치고서 좋은 인연을 타고 천상에 태어났기에 왕을 보러 왔다.
왕이 물었다.
‘누구인가?’
천녀가 대답했다.
‘당신의 부인입니다.’
왕이 앉으라고 명하자 천녀가 대답했다.
‘당신을 살펴보니 냄새나고 더러워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맹세 때문에 한 번 보러 온 것입니다.’
왕은 곧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녀는 본래 나의 부인이었는데, 하루 동안 출가하여 곧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지神志가 높고 원대해서 나를 비천하게 보는구나. 지금 내가 어찌 출가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듣기에 천상의 손톱 한 개가 염부제의 땅과 맞먹는다고 하였는데, 내가 어찌 한 나라를 탐내겠는가?’
그리고는 왕의 지위를 버려 자식에게 물려주고 출가해서 도를 닦아 나한과羅漢果를 얻었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부법장경付法藏經』에서 말하였다.
“사야다闍夜多 존자가 제자들과 덕차시라성德叉尸羅城에 갔는데 슬퍼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 한 마리를 보고서야 흔연히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존자가 대답했다.
내가 처음 성에 왔을 때 한 명의 귀자鬼子를 보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음식을 구하려고 성으로 들어간 지 5백 세 이상이 지났는데도 아직 스스로 벗어나질 못해서 제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 어머니를 본다면, 부디 일찍 돌아오라고 말해 주십시오.’
과연 그의 어머니를 보게 되어서 곧바로 자식의 뜻을 말해 주었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성에 들어와서 생성과 파괴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아직까지 사람의 침[唾]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연히 약간의 침을 얻었기에 성을 나가서 자식과 함께 나눠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문에 힘이 센 귀신鬼神들이 많아서 두려워 감히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즉시 그녀와 함께 나와서 자식과 함께 먹도록 했다. 나는 귀신이 ‘고통을 받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로 인해 슬퍼한 것이다.
그 때의 새는 과거겁 중의 나였다. 출가를 하려고 하였는데,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고 억지로 장가를 보내서 자식을 얻었다. 아이의 나이 여섯 살 때 나는 다시 떠나려고 하였으나 나의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내 다리를 부여잡고 울면서 말하게 했다.
‘아버님께서 저를 버린다면 누구를 의지해 살란 말입니까? 먼저 저를 죽이고 난 다음에 떠나십시오.’
이 아이 때문에 결국 출가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91겁 동안 5도道를 유전流轉하면서 일찍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도안道眼으로 살펴보니 그 새가 전생의 내 자식이었다. 그 어리석음으로 오랫동안 생사에 처한 걸 불쌍히 여겨서 미소를 지은 것이다.
만약 사람의 출가를 가로막는다면, 그 죄로 악도惡道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으며, 나중에 사람 가운데 태어나도 장님으로 태어나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사람이 출가하는 것을 보면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어야지 만류해서는 안 된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자손이 도리어 우리 집안의 법을 비방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부끄러움이 없으니 진실로 일천제一闡提로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순타純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천제一闡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거칠고 나쁜 말을 하고 정법正法을 비방하면서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이 같은 사람들을 일천제의 길을 향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자함邇字函 제10권]


출가가 비록 재가보다 뛰어나지만
재가인이 수행한다면 출가인보다 뛰어나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재가인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면 모든 벽지불의 과보보다 낫지만, 출가인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재가인은 나쁜 인연에 얽히는 바가 많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면 모든 천天이 다 크게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이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을 얻었다.’ ”[극자함剋字函 제1권]


몸은 먹물 옷을 입었어도 마음은 오히려 세속에 있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둘렀지만 생각은 승려나 다름없다.

『법온족론法蘊足論』에서 말하였다.
“첫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補特伽羅:사람)가 있다. 올바른 믿음으로 출가해서 몸소 승가[法侶]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오히려 애착하여 온갖 욕망을 돌아보면서 연모하고 있으니, 이를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비록 아내와 자식을 두고 상품上品의 미묘한 옷과 음식과 진귀한 보배를 받아쓰더라도, 온갖 욕망에 대해 탐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이를 몸은 재가에 있어도 마음은 출가하였다고 한다.
셋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올바른 믿음으로 출가해서 몸소 승가에 들어갔으며, 온갖 욕망의 경계에 대해서도 마음이 돌아보지 않으니, 이를 몸과 마음이 모두 능히 출가했다고 한다.
넷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아내와 자식을 두고서 상품의 미묘한 것을 받아쓰면서도 깊이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이를 몸과 마음이 모두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다.”[백자함白字函 제6권]

부처님께 아뢰고 출가한들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결박을 끊으면 스스로 공功을 이루리.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석마남釋摩男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우바새의 뜻은 재가자가 장부의 뜻을 갖추고서 3보에 귀명歸命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나는 우바새다≻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와 나아가 아나함과阿那含果까지 얻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신견(身見:有身見)과 계도(戒盜:戒禁取見)와 의망(疑綱:疑) 등의 3결結55 3결은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의 셋이다. 유신견은 오온으로 가화합된 것을 나라고 집착하여 몸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고, 계금취견은 계율이나 금기 사항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를 말하며, 의망은 말 그대로 의심의 그물로서, 의심의 대상은 부처님과 그 말씀이다.
을 끊어 없애고 나면 이미 수다원과를 성취한 것이라서 다시는 3도塗의 몸을 받지 않고, 위없는 도[無上道]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일으켜서 인간과 천상을 일곱 번 왕래하면서 모든 고제苦際를 다하고 열반에 들것이다.’
또 여쭈었다.
‘어떻게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결結을 끊으면 이미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엷어지는데, 이를 사다함이라 한다.’
또 여쭈었다.
‘어떻게 아나함과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3결과 5하분(下分:煩惱)을 끊는다면 아나함을 이룬다.’
그 때 석마남 등의 5백 명은 이 법을 들은 후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재가인들이 이 뛰어난 이익을 얻어서 모두 다 우바새가 되었습니다.’ ”[연자함淵字函 제6권]


다만 정각正覺을 수행할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출가한 필추의 성품이다.

『무구칭경無垢稱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동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를 할 수 없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구칭이 말했다.
‘그대들 동자들이 다만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일으켜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출가이고 이것이 바로 받아 갖추는 것이라서 필추의 성품을 이룬다.’ ”[백자함白字函 제2권]


세속[紅塵]에서 보리菩提를 증득하기 쉽다면
여래께서는 설산雪山에서 수행하지 않았으리라.

장경長慶의 『능엄경楞嚴經』 주석에서 말하였다.
“재가 보살은 또한 경전의 취지를 잘못 이해해서, 모든 부처의 계법戒法에 힘쓰지 않고 다만 공용功用66 몸, 입, 뜻으로 짓는 것을 말한다.
이 없는 도를 깨닫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래께서 태자였을 때를 살펴보면, 반드시 설산에 들어가서 수행하여 몸과 마음이 적정해지고서야 바야흐로 도를 깨달았다. 만약 재가에 있으면서 부처가 될 수 있었다면, 여래께서는 결코 설산에 가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그대들 중생을 위해 그런 모습을 일으키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만약 모두 무구칭無垢稱과 방거사龐居士와 비슷하다면, 수고롭게 출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신분을 바꾸어야[轉身] 비로소 얻는다.”[제4권]


착하고 착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인因을 짓기 때문에
천룡팔부[八部]ㆍ인비인人非人이 된다.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에서 말하였다.
“ ‘8부部의 귀신은 무슨 인연으로 악도惡道에 태어나는데도 항상 정법正法을 듣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업이 있으니, 첫째는 악하기 때문에 악도에 태어나는 것이며, 둘째는 착하기 때문에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또 물었다.
‘선과 악은 다른 것인데, 함께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수 있다. 천신天神은 수레ㆍ집ㆍ음식으로 3보寶ㆍ부모ㆍ어진 사람에게 먼저 공양하면서도 여전히 간탐심과 질투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허공용신虛空龍神은 덕행과 보시[檀]를 닦지만, 정념正念에 의하지 않고 성품이 급하고 성내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야차신夜叉神은 큰 보시를 좋아하지만, 먼저 손해를 입히고 나중에 이익을 주는데, 공功의 뛰어나고 그렇지 못함을 따르기 때문에 천상ㆍ공중ㆍ지하에 있는 것이다. 건달바乾闥婆는 보시를 좋아하지만, 성내면서 기악伎樂을 바치기 때문이다. 아수라신阿修羅神은 의지가 강하고 기쁘게 보시하지만 착한 벗을 따르지 않고, 청정한 복을 짓기를 좋아하지만 환상과 거짓을 좇아서 온갖 그릇된 복을 짓기 때문이다. 가루라신迦婁羅神은 먼저 크게 열 가지를 닦지만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남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긴나라신緊那羅神은 과거에 사람에게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권유하길 좋아했지만, 그 뜻이 올바르지 않아서 온갖 삿된 행동을 좇았기 때문이다. 마후라가신摩睺羅伽神은 보시하고 법을 수호하지만, 성품이 성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두가 삿된 스승에 의지하기 때문에 삿됨으로 올바름을 어지럽히면서도, 모두 이 도는 스스로 세운 것이라고 말한다.’ ”[수자함受字函 제8권]


외도의 망령된 건립이 이로부터 시작되고
조달調達이 원수를 갚는 것도 이로부터 단서가 되었다.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 외도外道가 이루어진 인연이다. 지나간 겁劫에 부처님께서 계셨는데, 그 명호가 구손타발타라拘孫陀跋陀羅였다. 그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을 때는 외도의 이름이 없었고 오직 하나의 대승법大乘法만이 있었다. 그 부처님이 멸도하려고 할 때에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불혜佛慧였다. 당시 어떤 착한 사람이 그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옷을 보시했는데, 사냥꾼이 그 옷을 보고는 훔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밤에 비구를 깊은 산 속에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 벌거숭이로 만들고서 손을 나무에 묶었다. 꽃을 따던 어떤 바라문이 그 비구를 보고는 ≺먼저는 가사를 입었다가 지금은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반드시 가사를 입는 것이 해탈의 인因이 아님을 알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스스로 고행苦行에 매달리는 것을 진실로 도를 배우는 것이라 여긴 나머지 그 사람은 즉시 옷을 벗고 머리를 뽑으니, 나형裸形 사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 때 비구는 스스로 묶인 것을 풀고서 즉시 나무껍질을 벗겨 붉은 돌로 물들여서 스스로를 가렸고, 풀을 엮어서 털이개를 만들어 모기 같은 벌레를 쫓았다. 그러자 어떤 바라문이 그 모습을 본 후에 ≺이 비구는 예전의 좋은 옷을 버리고 이 같은 옷을 입고 이 같은 털이개를 가졌으니, 반드시 이것이 해탈의 길이리라≻고 여겼다. 그리고는 즉시 그 법을 배우니, 출가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그 때 그 비구는 날이 저물자 물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다. 머리에 난 종기를 씻고는 곧 물에 젖은 옷을 가져다 종기 위를 덮었으며, 소를 치는 사람이 버린 옷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가렸다. 그 때 어떤 나무꾼이 그 모습을 본 후에 ≺이 비구는 먼저는 가사를 입었는데 지금은 다 버렸으니, 반드시 가사를 입는 것이 해탈의 인因이 아님을 알겠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해진 옷을 입으며, 매일 밤 세 번 씩 목욕하면서 고행을 익히고 닦는 것이 마땅히 해탈의 길임을 알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 법을 배우니, 고행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비구가 목욕한 후에 몸에 종기가 많아서 파리와 벌이 빨아대니, 곧 곳곳에 난 종기에다 하얀 재를 바르고는 물에 젖은 옷으로 몸을 가렸다. 이 때 이 모습을 본 자가 이것이 도道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 법을 배우니, 재를 바르는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 때 그 비구는 불로 종기에 뜸을 뜨니, 종기가 더욱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위 위에 몸을 던지면서 스스로 자해하니, 이 때 그 모습을 본 자가 ≺이 비구는 먼젓번엔 좋은 옷을 입다가 지금은 이와 같으니, 마땅히 불로 뜸을 뜨고 바위에 몸을 던지는 것이 해탈의 길임을 알겠다≻고 생각했다. 바위에 몸을 던지고 불을 섬기는 것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와 같이 아흔여섯 가지가 모두 이 비구의 갖가지 유형으로 인해 갖가지 망상을 일으킴으로써 각기 스스로 견해를 일으킨 것이니, 마치 사슴이 더위에 목말라 하면서 신기루를 쫓아다니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다. 정법正法이 멸할 때 저 비구의 비법非法으로 인한 법의 상념도 이와 마찬가지다.’ ”[양자함量字函 제4권]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외도의 분파가 흘러나오다가 부처님께서 출현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6대 스승이 있었다. 이른바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은 성姓인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생각했으며, 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賖梨子는 중생의 고통과 즐거움은 인연이 아니라 자연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야비라지자刪闍夜毗羅胝子는 중생이 때가 성숙해서 도를 얻어도 8만 겁劫의 고통을 다해야 스스로 해탈한다고 하였다. 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는 거친 옷인데, 죄의 과보인 고통을 바위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를 뽑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가라구타가전연迦羅鳩馱迦旃延은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으며, 건타보리자犍陀菩提子는 업으로 정해진 것은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독자犢子는 ‘색色이 나[我]이다. 색을 여의어서 내가 있다. 색 가운데 내가 있다. 내 속에 색이 있다’고 하면서 합하여 스무 가지 신견身見을 생각했다.”[가자함駕字函 제6권]

“화엄회상華嚴會上의 제21위位 선지식인 변행遍行 외도가 선재善財에게 말하였다.
‘염부제閻浮提 안의 96개의 무리들이 각기 이견異見을 일으켜서 집착을 낳으면, 나는 그에 맞는 방편으로 조복해서 지니고 있는 모든 소견을 버리도록 하고, 나아가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마쳐 모두 이와 같이 하리라.’ ”[수자함首字函 제7권]

『경률이상經律異相』에서 말하였다.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조달調達은 어떤 깊은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응어리를 품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단지 금생今生만이 아니라 세세생생 그러했다. 지나간 세상에 범지梵志의 딸이 있었는데,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든 범지의 법에는 무릇 딸을 경문에 밝은 자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모든 동학同學 5백 명을 초청해서 3개월 동안 공양하며 그 알고 있는 바를 살폈다.
당시 5백 명 가운데 한 사람만이 널리 통달했지만, 나이가 많고 얼굴이 추하고 눈이 파란 색이어서 부모가 근심을 했고 딸도 역시 고민을 했다. 그 때 먼 곳에서 범지 한 사람이 왔는데 젊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그는 범지가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 5백 명의 범지들이 모두 궁지에 빠져 대답하질 못했다. 부모와 딸은 기뻐하면서 그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나이 많은 범지가 말했다.
≺나이 많은 걸 불쌍히 여겨서 아내 될 사람을 빼앗지 마시오. 그러면 내가 보시로 얻은 물건들을 모두 그대에게 주겠소.≻
젊은 범지가 대답했다.
≺법도를 어기고 인정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연로한 범지는 독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서 즉시 비난하고 욕했다.
≺세세생생 있는 곳마다 그대와는 원수가 되겠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나이 많은 범지가 지금의 조달이고, 젊은 범지가 바로 나이고, 딸이 바로 구이瞿夷다.’ ”

또 말하였다.
“옛날에 비구 조달은 총명하고 널리 배웠다. 그런데 12년 동안 좌선을 하면서 선정[定]에 들었지만, 뜻이 도리어 퇴보해서 점차로 악한 생각을 일으키고 세간의 이익[利養]에 탐착하였다. 그가 세존의 처소로 가서 발에 예를 드리고는 여쭈었다.
‘부디 신족도神足道를 말씀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족은 차치하고, 어째서 네 가지 비상非常의 뜻을 배우지 않는가?’
조달은 다음으로 사리불舍利弗과 목련目連의 처소를 찾아가서 신족도를 구했으나, 역시 둘 다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네 가지 비상非常의 뜻을 배우고 나서 다시 4선禪을 닦아야만 비로소 신족도를 얻는 것이오.’
조달은 화를 내면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동생 아난阿難에게 물으니, 아난은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조달은 아난의 설명을 들은 후 한 가지 뜻에 마음을 전력하였다. 거친 데서 미세한 데로 들어갔다가 다시 미세한 데로부터 일어나 거친 데에 이르고, 마음으로 몸을 들고 몸으로 마음을 들어서 몸과 마음을 한데 합치면서 점점 땅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참깨만 하였으나 자꾸 호두만 해지면서 점점 땅의 경계[地際]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땅으로부터 상床에 이르고, 상으로부터 지붕에 이르고, 지붕으로부터 허공에 이르고, 허공 가운데 있으면서 열여덟 가지 변화를 지으며 솟았다 꺼졌다 자유로웠다. 어린아이로 화현하여 아사세阿闍世 태자의 무릎 위에 있으면서 온갖 변화를 지으니, 매일 솥 5백 개분의 식량을 공급받았다.
이 때 모든 비구들이 이 일을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대들은 조달의 공양을 탐내지 말라. 조달은 스스로도 빠질 뿐만 아니라 남도 빠지게 함으로써 둘 다 죄에 떨어지게 한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파초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려고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자함舍字函 제1권]


조달은 부처님을 해치려다 도리어 다쳤고
폭지暴志는 부처님께 해를 가하려다 자신이 꺾였다.

『법구경法句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조달과 아사세왕은 함께 부처님을 해치기로 의논하고서 즉시 나라의 백성들에게 부처님을 받들지 못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조달이 왕에게 아뢰었다.
‘내일 부처님을 성에 들어오시도록 청하십시오. 그리고 5백 마리의 코끼리들을 술 취하게 하여 밟아 죽이도록 하십시오. 그럼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어 세간을 교화하겠습니다.’
왕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그 모략을 알고서 대답하셨다.
‘아주 아주 좋습니다.’
다음날 식사시간 때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거느리시고 성으로 들어오셨다. 이 때 술 취한 코끼리들이 벽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꺾자, 온 성이 두려움에 떨었다. 코끼리들은 일제히 부처님께 달려들었다. 부처님께서 다섯 손가락을 들자, 다섯 마리 사자가 되어서 똑같은 소리로 함께 포효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술 취한 코끼리가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참회하니, 왕과 신하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놀라고 숙연해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성품이 밝지 못해서 조달의 참언을 믿고서 악한 역죄逆罪를 지었습니다. 부디 대자비를 내려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왕과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여덟 가지 일이 있어서 비방을 조장하니, 모두 명예로 말미암아 커다란 죄를 짓는다. 무엇을 여덟 가지라 하는가? 이익ㆍ쇠망ㆍ훼손ㆍ명예ㆍ꾸지람ㆍ칭찬ㆍ고통ㆍ즐거움이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미혹되지 않는 이가 적다.’ ”[위의 권과 같음]

『출생경出生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유행하시자, 바사닉왕波斯匿王이 부처님과 승려들을 청하였다. 당시 폭지暴志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나무토막을 배에 매달아서 마치 임신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서 부처님의 옷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 남편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다가 임신하게 되었는데,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지도 않는군요.’
천인天人과 사부대중은 놀라서 당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삼계三界의 존귀하신 이는 모든 삿됨을 항복받으시고 밝음이 일월을 초월하여 오염시킬 수 없었다.
그 때 제석천이 한 마리 쥐로 화현해서 그 나무토막을 묶은 줄을 갉아 땅에 떨어뜨렸다. 모인 대중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는 분노와 기쁨이 교차하면서도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겼다. 왕은 이 비구니가 대성인을 비방한 것에 분노해서 땅을 파서 매장하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훈계하여 제지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숙세의 죄이다. 과거 세상에서 어떤 손님이 구슬을 팔았는데, 차명且明이라는 한 여인이 막 사려고 했다. 그 때 한 남자가 값을 배로 주면서 그 여인과 구슬을 두고 다투었다. 여인은 다시 사려고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마음에 분노와 한을 품고서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태어나는 곳마다 반드시 너에게 원수를 갚겠다.≻
그 때의 남자가 바로 나이고, 그 여인은 폭지이니, 이런 일은 예전부터 있어 왔으며 비단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함函. 제3권]


조달은 비록 역죄로 니리(泥犁:地獄)에 빠졌지만
여래께서 다시 선지식이라 찬양했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제바달다提婆達多[조달의 다른 이름]는 갖가지 변화된 모습으로 왕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대정사大精舍를 세우고 큰 공양을 받았으나 대중들이 적었다. 제바달다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게 30상相이 있는데도 아직도 부처님께 뒤처지는 것은 진실로 제자가 아직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들이 나를 둘러싼다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는 악한 마음을 내서 승가를 파괴하여 5백 명의 제자들을 얻었다. 나중에 사리불舍利弗이 법을 설해서 교화를 하자, 승가는 다시 화합하였다. 제바달다는 문득 악한 마음으로 산을 밀어서 부처님을 압사시키려고 했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금강저로 멀리 던져 버렸다. 다시 부서진 돌이 쏟아져 부처님 발가락에 상처를 냈는데, 화색華色 비구니가 이를 꾸짖자 다시 비구니를 주먹으로 때리니, 비구니는 즉시 눈알이 튀어나오면서 죽었다. 이처럼 세 가지 역죄逆罪를 짓고는 다시 삿된 스승인 부란나富蘭那 외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온갖 선근善根을 끊었다. 다시 나쁜 독을 손톱 밑에 숨겨 두었다가 예배를 하는 척하면서 부처님을 해치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왕사성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땅이 자연스럽게 갈라지면서 불 수레가 그를 맞이하니, 산 채로 지옥으로 들어갔다.”[덕자함德字函 제4권]

『대승십법경大乘十法經』에서 말하였다.
“정무구묘정보월왕광淨無垢妙淨寶月王光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제바달다를 취해서 선지식善知識이라 할 수 있으며, 다시 여래께서 오래도록 친근한 이를 원수라 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약 제바달다라는 선지식이 없었다면, 여래인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복자함服字函]

파순波旬은 여러 곳에서 위엄을 짓지만
기량伎倆이 다할 때는 돌아간다.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도道를 이루려고 할 때 마왕은 모든 중생들이 다 보살에게 귀의하여 자신의 경계가 텅 빌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화살을 갖고 와서 쏘았으나, 보살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화살이 꽃으로 변했다. 다시 세 여인으로 하여금 확고한 의지[定意]를 흐트러뜨리려고 했으나 보살은 용납하지 않았으며, 세 여인은 홀연히 누추한 모습으로 변화해서 스스로 회복하질 못했다.
마왕이 앞에 나아가서 보살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인간이 누리는 쾌락을 즐기지 않는다면, 나는 천상의 지위를 버리고 나아가 5욕欲을 다 갖추어서 모두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보살이 대답했다.
‘그대는 전생에 약간의 보시를 닦았기 때문에 지금 자재천왕自在天王이 된 것이다. 이 복은 기한이 정해진 것이니, 요컨대 다시 하계에 태어나서 3도塗에 빠지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옛날에 머리ㆍ눈ㆍ뇌수ㆍ나라ㆍ성ㆍ아내ㆍ자식으로 보시한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이는 위없는 도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대는 이제 마땅히 나를 혼란시키려 하지 말라.’
마왕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궁으로 돌아갔다.”[사자함辭字函 제3권]

『월장경月藏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집大集의 회상에서 법을 설하셨다. 마왕인 파순도 역시 신변神變을 지었지만, 다시 어찌 할 수가 없자 곧, 게송을 설했다.
저는 이제 불ㆍ세존께 귀의하오니
이제부터는 결코 악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구담瞿曇의 마음은 결정코 저를 용서하리니
저는 반드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겠습니다.”[도자함陶字函 제2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마魔라고 이름하는가?


혜명慧命을 끊기 때문에 마魔라고 이름하고, 또 항상 게을러서 자신을 해치기 때문에 마魔라고 한다.[마는 진秦나라 말로 살殺이다.]


어째서 파순이라고 이름하는가?


항상 나쁜 의도가 있어서 악법惡法을 성취하기 때문에 파순이라고 이름한다.[파순은 진秦나라 말로 악惡이다.]”[규자함規字函 제2권]


43) 입도품入道品[10칙]

선근善根을 분별하면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니
진실로 종자種子를 말미암아서 이렇게 차이가 났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선근善根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복분福分의 선근이고, 둘째는 해탈분解脫分의 선근이고, 셋째는 달분達分의 선근이다.
복분이란 능히 인천人天의 종자를 짓는 것이니, 만약 사람 가운데 있다면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서 윤왕輪王 등이 되고, 만약 천상 가운데 있다면 제석천ㆍ마왕魔王ㆍ범왕梵王 등이 된다.
해탈분이란 능히 해탈의 종자를 지을 수 있어서 결정코 퇴전하지 않고 반드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달분이란 이른바 난법煖法으로부터 세제일법世第一法까지이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애초에 해탈의 씨앗[因]을 한 번 심을 수 있다면
지극히 빨리 세 번의 생生 만에 바야흐로 도에 들어간다.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존재[有]가 애초에 해탈분解脫分에 수순하는 것을 심는다면, 지극히 빨리 세 번의 생生 만에 바야흐로 해탈을 얻는다. 말하자면 처음의 생生에선 해탈분에 수순하는 것을 심고, 다음 생에선 성숙하고, 세 번째 생에선 결택분決擇分에 수순함을 일으키는 것이니, 곧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것이다.”[아자함雅字函 제1권]


믿음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은 들음으로부터 들어가고
법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은 바로 지혜를 닦는 것이다.

『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남의 말을 믿어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신(堅信:견고한 믿음)이라 하고, 만약 스스로 사유해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법(堅法:견고한 법)이라 하고, 선정[定]으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신이라 하고, 지혜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법이라 한다.”[규자함規字函 제2권]
『비담심론毗曇心論』에서 말하였다.
“믿음을 따라서 행하면 예리한 근기가 아니니, 이는 다른 이의 법을 믿어서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예리한 근기이니, 이는 지혜가 다른 이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직 욕계欲界를 여의지 않고서 초과初果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수다원과須陀洹果를 향한다고 한다.”[도자함都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믿음을 따르거나[隨信] 법을 따르는[隨法] 수행인은 이생지異生地를 초월해야 하니, 아직 예류과預流果를 얻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이생지라고 이름하는가?


모든 성자는 모두 동생同生이라 일컫지만, 이승[此]과 저승[彼]이 다르기 때문에 이생異生이라고 한다.”[이자함離字函 제5권]


사소한 선행으로 어찌 해탈할 수 있겠는가?
일심으로 회향해야 보리菩提를 증득한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 그릇의 음식을 보시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解脫分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반차우슬般遮于瑟[이것은 5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모임이다.]을 능히 베풀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사람은 하루 동안의 재계齋戒를 지니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종신토록 계율을 지니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경우엔 한 구절의 게송을 외우고 지니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삼장三藏의 뜻을 훌륭히 통달했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일들을 해탈과 열반으로 회향하면 영원히 생사를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용맹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능히 해탈의 선근을 심을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회향하지 못한다면, 비록 보시를 많이 하고 종신토록 계율을 지니고 널리 배우고 많이 듣더라도 해탈의 선근을 심지 못한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이 있는데 가까운 것은 전생의 몸에 심어서 지금의 몸에서 성숙하고 미래의 몸에서 해탈하는 것이며, 먼 것은 일찍이 나유타那由他 동안 심어서 세상의 몸을 받아도 달분達分의 선근을 낳지 못하는 것이다. 성문이 얻은 해탈분의 선근은 벽지불로 회향해 나아갈 수 있고, 벽지불이 얻은 해탈분의 선근도 부처로 회향해 나아갈 수 있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계율ㆍ선정[定]ㆍ지혜는 처음의 결박을 여의는 것이며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은 나중의 관문觀門을 여는 것이다.

『해탈도론解脫道論』에서 말하였다.
“계율ㆍ선정ㆍ지혜는 이른바 해탈의 길이다. 계율이란 것은 위의威儀의 뜻이며, 선정이라는 것은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혜라는 것은 지각知覺의 뜻이며, 해탈이라는 것은 속박을 여읜다는 뜻이다.
다시 계율이란 악업惡業의 때를 없애는 것이며, 선정이란 얽힘[纏]의 때를 없애는 것이며, 지혜란 사使의 때를 없애는 것이다.
또 세 종류의 잘 조복하는 도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것이다. 계율이 처음이 되고, 선정이 중간이 되고, 지혜가 나중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계율이 처음의 착함이 되는 것인가? 정진하는 사람은 퇴전하지 않음을 성취하고,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쁘고, 기쁘기 때문에 뛸듯하고, 뛸듯하기 때문에 몸이 유연하고, 몸이 유연하기 때문에 즐겁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선정[定]에 드니, 이것을 이른바 처음의 착함이라고 한다.
선정이 중간의 착함이 된다는 것은 선정으로 여실하게 알고 보기[知見] 때문이다.
지혜가 나중의 착함이 된다는 것은 이미 여실하게 알고 보기 때문에 싫어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욕망을 여의고,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하기 때문이다.
또 계율로써 악취惡趣를 없애고, 선정으로 욕계欲界를 없애고, 지혜로 모든 존재[有]를 없앤다.”[배자함背字函 제1권]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에서 말하였다.
“선관禪觀을 닦아 익히는 것은 세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서 생기니, 이른바 지혜를 들음과 지혜를 생각함과 지혜를 닦음이다.
무엇을 지혜를 들음[聞慧]이라 하는가? 가령 들은 법을 마음으로 항상 사랑하고 즐기면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지혜를 생각함[思慧]이라 하는가? 사념思念으로 모든 유위법有爲法의 여실한 상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하고 무아無我이고 부정不淨이기 때문에 찰나찰나마다 생하고 멸하면서 오래지 않아 무너지는 것이 곧 염리厭離를 낳아서 부처의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지혜를 닦음[修慧]이라 하는가? 이른바 욕망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서 점차로 닦아 들어가는 것이다.”[명자함命字函]


『현종론顯宗論』의 전장全章을 일관하고
수행 과정에 순서가 있음을 갖추어 본다.[수修에 들어가는 데에는 부정不淨ㆍ식념息念의 두 가지 관觀이 있고 점차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는 네 종류의 가행加行의 공功이 일어난다.]

『현종론』에서 말하였다.
“이미 청정한 시라尸羅에 먼저 안주하고, 곧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으로 나아가서 진리諦를 본다. 어떤 문門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곧 게송을 설해서 말하였다.

수행에 들어가는 요체에 두 문이 있으니
부정관不淨觀과 식념息念이다.
탐욕과 심尋이 증상增上하는 자는
반드시 차례대로 닦아야 한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수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두 가지 문으로 들어가야 하니, 첫째는 부정관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이다. 또 부정관은 탐욕을 다스리고, 식념은 심尋을 다스린다. 먼저 부정관의 모습을 변별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네 가지 탐욕을 통틀어 대치하기 위해서는
골쇄骨鎖를 변별해서 관한다.
널리 바다에 이르렀다가 다시 간략해지니
이를 초습업初習業의 지위라 이름한다.

발을 제외하고 머리의 반쪽에 이르는 것은
이숙수已熟修라 이름하고
마음을 묶어서 미간에 두는 것은
초작의超作意의 지위라 이름한다.”

논에서 말하였다.
“부정관을 닦는 것은 탐욕을 올바로 대치하기 위한 것인데, 대략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현색顯色의 탐욕이고, 둘째는 형색形色의 탐욕이고, 셋째는 묘촉妙觸의 탐욕이고,77 고려대장경에는 셋째의 묘촉의 탐욕[妙觸貪]이 없으나 신수대장경을 참조하여 보입하였다.
넷째는 공봉供奉의 탐욕이다.
네 가지 탐욕을 대치하는 데는 두 가지 사택思擇에 의거하니, 첫째는 시체의 안[內尸]을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체의 밖[外尸]을 관하는 것이다. 근기가 예리한 자는 먼저 몸의 안에 대해 피부를 경계로 삼아서 발에서 위로 정수리에서 아래로 두루 관찰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환란을 싫어하게 한다. 만약 근기가 둔한 자라면 번뇌가 맹렬하고 날카로워 굴복시키기 어려우며 외부 인연의 힘을 빌려야만 바야흐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시체의 밖을 명료하게 관찰하여 점차로 자기 마음의 번뇌를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처음으로 시체의 밖을 관찰할 때는 먼저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시체가 버려진 곳을 찾아가 시체의 밖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안의 모습이겠는가? 저쪽의 모습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이쪽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므로 마땅히 여덟 가지 상념을 닦아서 네 가지 탐욕을 다스려야 한다.
현색顯色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푸른 어혈의 상념[靑想]과 검붉은 상념[黑赤想]을 닦아야 한다. 형색形色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먹혀지는 상념[被食想]과 분리되는 상념[分離想]을 닦아야 한다. 묘촉妙觸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파괴의 상념[破壞想]과 해골의 상념[骸骨想]을 닦아야 한다. 공봉供奉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배가 부풀어 오르는 상념[脹想]과 살이 문드러지는 상념[膿爛想]을 닦아야 한다. 오직 골쇄(骨鎖:白骨)를 반연해서 부정관을 닦아야만 이 같은 네 가지 탐욕을 통틀어 다스릴 수 있다.
수행하는 것에 따라 세 가지 지위가 있다고 설한다. 첫째는 초습업初習業이고, 둘째는 이숙수已熟修이고, 셋째는 초작의超作意이다.
또 부정관을 닦을 때는 마땅히 먼저 자기 몸의 한 부분에 마음을 먼저 묶어 두어야 한다. 혹은 발가락에다, 혹은 미간에다, 혹은 콧등과 같이 좋아하는 곳에다 한결같이 집중해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최초로 마음을 묶어 자기 몸의 발가락 등 구석구석 가정하여 생각[仮想]하다가 아래로 능히 동전 크기만한 백골을 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면, 뛰어난 이해력을 말미암아서 점차 넓히고 점차 증대시켜 온몸의 골쇄를 갖추어 보는 데까지 이른다.
관행觀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단지 상념의 힘[想力]만 따르고, 관행이 이루어졌다면 문득 지혜의 힘을 따른다. 이 지위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념으로 말미암아서 전변하는 것이다. 온몸을 이미 보았다면 다시 바야흐로 방편으로 외부의 백골을 연緣으로 하는 부정관문不淨觀門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점차적으로 뛰어난 이해가 증대하기 때문에 외부의 골쇄가 자기의 신변에 존재한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점차적으로 하나의 평상, 하나의 방, 하나의 절, 하나의 동산, 하나의 지역, 하나의 마을, 하나의 나라에 두루하고, 나아가 대지에 두루하고 바다에서 해변까지 그 사이에 골쇄가 가득 찼다고 여긴다. 광활한 범위를 점차 간략하게 관찰하여 안으로 오직 자신의 골쇄만을 관하는 데 이른다. 이렇게 점차로 간략하게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초습업위初習業位라 한다. 또 약관略觀으로 하여금 뛰어난 이해로 점차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골쇄 가운데 다시 발의 뼈를 제외하고 점차로 머리의 반쪽 뼈를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고, 나머지 반쪽의 뼈를 사유하여 마음을 묶어서 머물게 한다. 이렇게 전략轉略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이숙수위已熟修位라고 한다. 또 약관으로 하여금 뛰어난 이해를 자재롭게 하기 위해 절반의 머리뼈마저 제외하고 마음을 미간에 묶어 오로지 하나의 연緣에 집중하여 담연하게 머물게 한다. 이렇게 극략極略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초작의위超作意位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야 부정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탐욕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음으로써 모든 감응하는 바가 다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식념息念을 지니는 것을 변별하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식념息念은 혜慧로 5지地이고
바람을 연으로 하고 욕망의 몸에 의지한다.
두 가지로 얻음은 실로 외도에게는 없으며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數 등이다.”

논에서 말하였다.
“아나阿那란 이른바 숨을 지녀 들이쉰다는 말로서 외부의 바람을 끌어들여서 몸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뜻이다. 아파나阿波那란 이른바 지닌 숨을 내쉰다는 말로서 내부의 바람을 끌어내서 몸 밖으로 내보낸다는 뜻이다. 또 설하기를, 아나라는 것은 능히 지니고 온다는 것[持來]이며, 아파나라는 것은 능히 지니고 나간다는 것[持去]이니, 들고 나가는 식념이 능히 신풍身風을 지니는 것이다.
이른바 태란위胎卵位에서는 먼저 배꼽에서 업에 의해 생긴 바람이 일어나 몸을 뚫어 구멍을 이루니, 마치 연뿌리의 줄기와 같다. 최초에 어떤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이 입과 코를 타고서 나머지 바람이 계속 들어오는데, 이 처음과 나중을 입식入息의 바람이라 한다. 또 안에서 바람이 계속 나가는 것을 출식出息의 바람이라 한다. 마치 연금술사가 풍로의 공기 자루를 열면 저절로 바람이 들어오고, 들어온 뒤에 그것을 주무르면 바람이 다시 나가는 것과 같다. 이는 바람의 성질이 법대로인 것이지 실제로는 들고 나감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람의 뜻을 드러냄으로써 두 가지 식息을 올바로 밝혔다. 식념을 지녔으므로 선정과 지혜가 이루어진다. 이 염念의 소의所依는 오직 5지地에 통할 뿐으로 이른바 욕계와 정려靜慮 중간과 초선ㆍ2선ㆍ3선의 정려에 의거해서 가깝게 나눈다. 이것은 다만 사근捨根과 상응할 뿐이니 심尋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이 염念을 닦아야 하고 여섯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수數이고, 둘째는 수隨이고, 셋째는 지止이고, 넷째는 관觀이고, 다섯째는 전轉이고, 여섯째는 정淨이다.
수數는 이를테면 마음을 묶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하나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계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기 때문에 그 가운데 세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는 수를 덜 헤아리는 것이며, 둘째는 수를 더 헤아리는 것이며, 셋째는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첫째는 너무 느슨한 것이며, 둘째는 너무 급한 것이며, 셋째는 산란한 것이다. 만약 열을 세는 중간에 마음이 산란해진다면 다시 하나부터 순서대로 헤아리고 마친 뒤에 다시 시작해야 선정[定]을 얻게 된다. 무릇 숨을 헤아릴 때는 반드시 들숨을 먼저 세어야 하니 처음 태어나는 지위[初生位]에선 들숨이 앞서 있고, 죽을 때 이르러서는 날숨이 가장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어나고 죽는 지위를 각찰覺察하기 때문에 비상非常의 상념으로 점차 닦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수隨는 이를테면 마음을 묶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쫓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짧은지 긴지 멀리 이르는지를 염念하고, 다시 반대로 되돌아와 어디에 미치는지를 염하는 것이다. 그 숨이 들어가는 것을 따라가 목구멍ㆍ심장ㆍ배꼽ㆍ넓적다리ㆍ무릎ㆍ발목ㆍ발꿈치ㆍ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염念이 항상 쫓는 것이다.
지止는 이를테면 염念을 묶어 오로지 코끝에 두거나 혹은 미간에 두거나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곳에 두고 그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 채 숨이 몸에 머무는 것이 마치 구슬 속의 실과 같음을 관하는 것이다.
관觀은 이를테면 이 숨의 바람을 관찰하고서 숨과 함께 작용하는 대종(大種:四大)으로 이루어진 색色과 색에 의거해서 머무는 마음과 심소心所를 아울러 관찰하는 것으로 다 같이 5온을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다.
전轉은 이를테면 이전移轉하는 것이다. 숨의 바람을 소연으로 한 감각을 나중의 나중인 뛰어난 선근 속에 안치하는 것이니, 즉 염주念住로부터 시작하여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는 것이다.
정淨은 이를테면 8견도見道 등으로 단계를 높여 나아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전轉과 진지盡智 등을 바야흐로 정식상淨息相이라 하였다.”[자자함自字函 제9권]
두 문을 닦아 들어감으로써 마음이 정定을 얻으니, 다시 무엇을 닦겠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미 닦은 걸 의거해서 지止를 이루었고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 염주念住를 닦아야 하니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의 감각[受]과 심법心法을 관찰하는 것이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이미 닦아 성취한 지止를 소의所依로 삼아 관觀을 조속히 성취하기 위해 네 가지 염주念住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을 관하는 것이니, 이른바 관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1취趣에만 쓰는 것이다. 이 법과 나머지 다른 법의 차별을 분별하여 차별된 뜻이 있는 것을 자상을 관하는 것이라 하고, 이 법과 나머지 다른 법을 분별하여 차별된 뜻이 없는 것을 공상을 관하는 것이라 한다. 다시 자상을 관하는 것은 이른바 몸의 모든 곳의 차별상을 관찰하는 것이며, 공상을 관하는 것은 이른바 모든 곳이 똑같이 몸의 모습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을 청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관하면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린다. 느낌[受]이 고통임을 관하면 능히 고통스러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마음이 항상하지 않음을 관하면 능히 항상하지 않음을 항상한 것[常]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법이 나[我]가 아님을 관하면 능히 나 아닌 것[非我]을 나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이미 똥 자체가 청정하지 않음을 관찰하고 나면 그 똥에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미 신체가 청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관하였으면 5취온取蘊에 대해서도 모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니, 나중의 세 가지 염주念住도 능히 총체적으로 조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히 결택決擇에 수순하며 사소성思所成에 섭수되는 선근을 이미 설하였다. 곧 수소성修所成에서는 어떤 선근을 낳는가? 게송을 설해서 말하였다.

이로부터 난법煖法이 생겨
4성제聖諦를 모두 관찰하고
16행상行相을 닦으니
제일의 정법頂法도 역시 그러하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닦아서 이루어진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처음 선근善根이 일어나니, 이름하여 난법煖法이라고 한다. 이는 총연공상總緣共相의 법념주法念住의 차별로, 번뇌를 능히 태울 수 있는 성도聖道의 불이 있기 전의 모습[前相]이다. 불을 일으킬 때 처음에는 따뜻함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히 4성제聖諦의 경계[境]를 모두 관찰하며, 이로 인하여 16행상行相을 모두 닦게 된다.
즉, 고성제苦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四行相]을 닦으니, 첫째는 비상非常[유有가 다시 무無가 되기 때문에 비상이라고 한다.]이요, 둘째는 고苦[수축[隨逐:煩惱]이 서로 괴롭히므로 고라고 한다.]이며, 셋째는 공空[본래 없음을 관찰하므로 공이라 한다.]이며, 넷째는 비아非我[자재自在하지 않으므로 비아라 한다.]이다.
그리고 집성제集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인因[상사과相似果를 낳으므로 인이라 한다.]이요, 둘째는 집集[능히 유전流轉하게 하므로 집이라 한다.]이요, 셋째는 생生[능히 생사生死를 이끄므로 생이라 한다.]이요, 넷째는 연緣[능히 서로 화합하게 하므로 연이라고 한다.]이다.
그리고 멸성제滅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멸滅[생사가 서로 어긋나게 되므로 멸이라고 한다.]이요, 둘째는 정靜[번뇌의 불에서 벗어나므로 정이라 한다.]이며, 셋째는 묘妙[모든 법에서 뛰어나므로 묘라고 한다.]이며, 넷째는 리離[능히 생사를 버릴 수 있으므로 리라고 한다.]이다.
그리고 도성제道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도道[능히 비품非品에 이르므로 도라고 한다.]이고, 둘째는 여如[뒤바뀌지 않으므로 여라고 한다.]이며, 셋째는 행行[성스럽게 실천된 것이므로 행이라고 한다.]이며, 넷째는 출出[생사를 뛰어넘어 구하므로 출이라고 한다.]이다.[이 주注의 내용은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참고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이 난법煖法을 닦고 나면 그 다음으로 정법頂法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산 정상의 사람이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여러 어려움이 없다면 반드시 이 산에서 저 산에 다다를 수 있지만, 만약 여러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면 물러나 돌아와야 한다. 만약 여러 어려움이 없으면 필히 인忍에 다다를 수 있지만, 이미 인의 위치[忍位]에 들어가면 4제諦의 경계의 극極에서 견디고 참아야 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세제일법世第一法이 일어나는데, 세계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4제의 경계를 관찰하여 16행상을 모두 닦게 되면, 점차 견제見諦에 접근하게 되어 욕계欲界의 고제苦諦를 연緣으로 하여 하나의 행상을 한 찰나에 닦는 것이다. 즉, 무간無間의 이생위離生位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지위에서는 결코 더 이상 상속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어떻게 다시 도道가 생기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제일법世第一法과 무간無間에
욕계欲界의 고제苦諦를 연緣으로 하여
무루無漏의 법인法忍을 낳으며,
법인 다음에 법지法智를 낳는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界의 고제를 연으로 하여
유인類忍과 유지類智를 낳으며,
집제集諦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연으로 하여
제각기 넷을 낳는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16찰나의 마음을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 이름하였다.”

논에서 말하였다.
“세제일世第一의 선근善根으로부터 무간無間에 욕계의 고성제를 소연所緣의 경계를 삼아 무루無漏의 법인法忍이 생기니, 이러한 인忍을 이름하여 법지인法智忍이라고 한다.[즉, 고법苦法에 무시無始 이래로 신견身見으로써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미혹하게 집착함을 이른 것이다. 지금 처음으로 저것을 보고 인가忍可하고 현전現前한 것이므로 고법인苦法忍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능히 후에 고법지苦法智의 생生을 이끈다.]
욕계의 고성제苦聖諦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고법인과 고법지가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법지와 무간에 그 밖의 다른 모든 계界와 고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유지인類智忍이 생기는데, 이를 유지類智라고 이름한다.[즉, 최초로 모든 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법지法智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후의 경계의 지혜는 앞의 것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類智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이 뒤의 것은 앞의 것을 따라 경계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욕계와 다른 계의 고제苦諦를 연으로 하여 법인法忍ㆍ유인類忍ㆍ법지法智ㆍ유지類智의 네 가지가 생기듯이 그 밖의 다른 3제諦를 연으로 하여 제각기 네 가지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는 하나하나의 제諦를 연으로 하여 네 찰나의 마음[四心]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16찰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 모두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삼계의 4성제의 경계를 차례로 현전시켜 참되게 관찰하기 때문에 이를 현관現觀이라고 이름한다.”[동자함同字函 제10권]


44) 성문품聲聞品[42칙]

자기 이익을 위한 수행은 마음가짐이 협소하고 열등하며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달음을 여는 자는 성문승聲聞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上品의 열 가지 선善은 지혜로 닦아 익히는 것이다. 마음이 협소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삼계三界가 두렵기 때문에, 대자비를 빠뜨렸기 때문에,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고서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성문승聲聞乘이다.”


4향向ㆍ4과果는 해탈승이고
유학有學ㆍ무학無學은 현성賢聖의 무리이다.

『달마론達磨論』 하권에서 말하였다.
“4과果의 중간에 있는 모든 도道와 이전의 견도見道를 4향向이라 하고, 저 과果 이전을 수순함을 저 과향果向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보특가라는 이곳 말로는 삭취취數取趣라고 하니, 이른바 자주자주 생사를 왕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4향을 행하는 것과 4와에 머무는 것이다.”[동자함東字函]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3결結을 끊는 것을 예류과預流果[3결은 첫째는 신견身見이니 이른바 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니 이른바 구우狗牛 등의 계율에 집착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인因으로 삼는 것이며, 셋째는 의심이니, 이른바 진리[諦]를 요달하지 못한 것이다.]라 하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엷어지는 것을 일래과一來果[보시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을 탐욕의 엷어짐이라 하고, 구걸하는 자에게 자비를 일으키는 것을 성냄의 엷어짐이라 하고, 보시를 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어리석음의 엷어짐이라 한다]라 하고, 하분下分의 5결結을 끊어 수순함으로 영원히 다하는 것을 불환과不還果[5결이란 첫째는 신견이고, 둘째는 계금취이고,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탐욕이고, 다섯째는 성냄이다]라 하고, 상분上分의 5결을 끊어 수순함으로 영원히 다하는 것을 아라한과阿羅漢果[상上의 5결이란 첫 번째는 색애色愛로 이른바 색계色界의 애착이고, 두 번째는 무색애無色愛로 이른바 무색계의 애착이고, 세 번째는 무명無明으로 이른바 마음을 요달하지 못한 것이고, 네 번째는 도거[掉]로 이른바 마음이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만慢으로 이른바 마음이 스스로 오만한 것이다]라 한다.88 고려대장경 영인본 제45권 551쪽 하下와 552쪽 상上이 서로 뒤바뀌어야 맞다.

모든 집법集法으로 하여금 모두 멸법滅法을 이루게 하는 것을 독각獨覺의 보리菩提라 하고, 일체 습기習氣의 상속을 영원히 끊는 것을 위없는 보리라 한다.”[위자함爲字函 제3권]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자는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이고, 배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자는 아라한ㆍ벽지불이다.”[인자함仁字函 제8권]

『현종론顯宗論』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하여 유학有學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뜻을 배움이 아직 원만하지 않으므로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무학無學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아라한은 온갖 자리행自利行을 닦고 배워서 이미 이루었어도 오로지 반드시 남에게 이익 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
다시 진지盡智가 아직 생기지 않은 이전의 일곱 성인을 모두 유학이라고 하고, 진지盡智가 이미 생겨서 무학을 이룬 이가 아라한이다.”[미자함縻字函 제2권]


처음의 2결結ㆍ3결은 비록 풀기가 어렵지만
98사使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순하분결順下分結에서 하下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계하界下와 유정하有情下이다. 처음의 2결은 허물이 무겁기 때문에 욕계欲界를 초월하지 못하고, 나중의 3결은 허물이 무겁기 때문에 이생異生을 넘어서지 못한다. 나아가 이 다섯 가지를 세워서 하분결下分結로 삼는다. 처음의 2결은 마치 옥졸과 같고, 나중의 3결은 마치 순라꾼과 같다. 가령 어떤 죄인이 감옥에 갇혔는데, 두 명의 옥졸이 항상 그를 지키면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세 사람이 항상 순찰하는 것과 같다. 그 죄인이 설사 친한 벗의 재력財力으로 옥졸을 해치고 도주하더라도 세 명의 순라꾼이 다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곧 욕계를 비유한 것이고, 죄인은 곧 이생異生을 비유한 것이고, 두 명의 옥졸은 처음의 2결을 비유한 것이고, 세 명의 순라꾼은 나중의 3결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어떤 이생異生이 부정관不淨觀으로써 탐욕을 무찌르고 다시 자비관慈悲觀으로 성냄을 무찌른다면, 욕망을 여의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까지 이르러 최초의 정려靜慮가 생기고 나아가 유정천有頂天까지 이르지만, 그에게 있는 신견身見ㆍ계금취戒禁取ㆍ의심[疑]이 다시 잡아다가 욕계에 둔다.
다시 예류預流와 일래一來가 일으킨 온갖 결結은 생하生下를 수순하므로 오히려 다시 현기現起하는 것이 마치 이생異生의 업과 같다. 이를테면 갖가지 비단을 두르고 향기로운 꽃으로 장식하고 금은과 진귀한 완구와 보물을 모으고 또한 남녀가 함께 한 침상에 거처하고 범행梵行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 이생異生의 업과 흡사하다고 한다.
다시 다섯 가지 상분上分을 수순하는 결結은 이른바 색탐色貪ㆍ무색탐無色貪ㆍ도거掉擧ㆍ오만ㆍ무명無明이니, 불환자不還者가 일으킨 온갖 결結은 상분上分을 수순하기 때문이다.”[이자함離字函 제9권]

『법수法數』에서 말하였다.
“10사使란 첫째는 탐욕이고, 둘째는 성냄이고,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오만이고, 다섯째는 의심이고, 여섯째는 신견身見이고, 일곱째는 변견邊見이고, 여덟째는 견취見取고, 아홉째는 금계취禁戒取이고, 열째는 사견邪見이다. 이와 같은 10사使는 능히 삼계三界에 두루 하는데, 4제諦 이하에서 나누면 98사使가 되어서 견제見諦와 사유思惟의 두 문에 섭수해 들어간다.
견제의 미혹은 88사使[욕계의 고제苦諦 이하는 10사使를 갖추고 있고, 집제集諦 이하와 멸제滅諦 이하는 각각 7사使인데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계취戒取가 빠져 있고, 도제道諦 이하는 8사使인데 신견과 변견이 빠져서 합하면 32사使이다. 색계의 고제 이하는 9사使가 있는데 성냄이 빠져 있고, 집제와 멸제 이하는 각각 8사使가 있는데 성냄과 신견ㆍ변견ㆍ계취가 빠져 있고, 도제 이하는 7사使가 있는데 성냄과 신견과 변견이 빠져서 합하면 28사使이다. 무색계의 4제 이하도 모두 색계와 같아서 28사使이니, 전체를 합치면 88사使이다]이다.
사유의 미혹은 10사使[욕계의 4사使는 이른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오만이다. 이 사使는 사다함과 아나함으로부터 도를 닦아서 끊는데, 아나함과의 9품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다한다. 색계의 3사使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다. 이 3사使는 역시 아라한향阿羅漢向이 도지道智를 닦아 끊는다. 무색계의 3사使는 탐욕ㆍ어리석음ㆍ오만이다. 이 사유의 삼계는 합하면 10사使가 되며, 견제와 합치면 도합 98사使가 된다. 다만 이 98사使는 아라한향이 과果를 끊어야 바야흐로 다한다]이다.”


6욕천欲天은 또한 정해진 수행의 땅이 아니고
여덟 가지 지혜라야 번뇌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욕계欲界는 부정계不定界로서 수지修地가 아니고 이욕지離欲地가 아니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는 정지定地이고 수지이고 이욕지다. 부정계를 반연하는 지智로는 정계定界의 결結을 끊지 못한다.”
또 물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지혜[八智]라고 하는가? 이른바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타심지他心智ㆍ등지等智ㆍ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이다.
다시 법지란 맹렬하고 예리해서 공용은 많지 않지만, 능히 좋지 않은 번뇌와 무기無記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예리한 칼이 쇠를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풀이나 나무이겠는가? 법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비지란 예리하지는 않지만 공용의 힘이 많아서 능히 무기無記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어째서 좋지 않은 번뇌는 끊을 수 없는가? 비유하면 마치 무딘 칼이 비록 공용이 많아서 풀과 나무는 끊을 수 있을지언정 어찌 쇠를 끊을 수 있겠는가?”[은자함隱字函 제10권]

『대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지혜[智]라 하는가?


5식識이 상응하는 슬기[慧]이니,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착함이고, 둘째는 오염이고, 셋째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착함이란 이를테면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것이며, 오염이란 이를테면 수행으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모습을 끊는 것이며, 무부무기란 이를테면 이숙異熟으로 의식의 상응을 낳는 것이다.
착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유루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加行으로 얻는 것이고, 둘째는 오염을 여의어서 얻는 것이고, 셋째는 태어나면서 얻는 것이다. 가행으로 얻는 것이란 이른바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는 것[修]이다. 들음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문장의 뜻을 이치대로 결택決擇하는 것이며, 생각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부정관不淨觀ㆍ지식념持息念 및 염주念住 등이며, 닦음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니, 변사[邊]를 관하는 세속지世俗智를 나타내는[세속지로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무량해탈無量解脫의 승처勝處 등이다.
오염을 여의어서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정려淨慮이니, 무량무색無量無色의 해탈의 승처 등이다. 태어나면서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저 땅에 태어나는 것이니, 법이 그러해서 얻어지는 착함이다.
무루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배움이고, 둘째는 배움이 없는 것이다. 배움은 이를테면 여덟 가지 지혜를 배우는 것이고, 배움 없음은 이를테면 진지盡智[모든 번뇌를 다하기 때문에 진지라고 한다]ㆍ무생지無生智[나는 이미 고통을 알았기에 다시 알 필요가 없고, 나아가 나는 이미 도를 닦았기에 다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이를 무생지라고 한다]이다.”[전자함顚字函 제5권]


초과初果는 일곱 번 태어나야 나한羅漢이고
다시 8만 겁을 지나야 보리에 들어간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수다원須陀洹은 처음으로 성인의 흐름에 들어가므로 예류預流[오로지 일곱 번 몸[有]을 받고, 일곱 번 천상에 태어나 인간 가운데서 고제苦祭를 다한다.]이고, 수다함須陀含99 수다함須陀含은 수다원須陀洹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사다함斯陀含으로 써야 맞다.
은 일래一來[비록 욕계에서 6품品을 닦아 끊었으나, 나머지 3품品을 아직 끓지 못해서 다시 한 번 욕계 가운데 와서 태어난다.]이고, 아나함阿那含은 불환不還[비록 욕계를 끊어서 9품의 감응을 다했더라도, 이로부터 위로 색계에 태어나서 다시는 돌아와서 욕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이고, 아라한[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응공應供이고, 둘째는 번뇌의 도적을 죽이는 것이고, 셋째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고, 넷째는 불생不生이니 이른바 삼계의 미혹이 다해야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이다.”[정문正文은 잠자함箴字函 제6권, 주문注文은 변자함弁字函 3권]

『비담심론毘曇心論』에서 말하였다.
“2승乘의 성인이 끊는 번뇌는 아홉 종류로 분별한다. 하품下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하하下下, 하중下中, 하상下上이고, 중품中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중하中下, 중중中中, 중상中上이며, 상품上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상하上下, 상중上中, 상상上上이다.”[도자함都字函 제3권]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수다원과는 8만 겁을 지나야 아뇩보리阿耨菩提의 마음을 얻으며, 수다함과는 6만 겁을 지나고 아나함과는 4만 겁을 지나고 아라한과는 2만 겁을 지나고 벽지불의 도道는 10천 겁을 지나야 아뇩보리의 마음을 얻는다.”[체자함體字函 제2권]


진실로 중생의 근기가 다르니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자세하게도 간략하게도 설하신다.

『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아비담阿毘曇에서는 88사使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설하고, 무엇 때문에 3결結을 끊어야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했는가?


교화 받는 자의 지혜에 깊음과 얕음이 있어서 대치법對治法을 설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의사가 병을 살피고서 약을 주는데, 적게 투여한다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게 아닌데 많이 투여한다면 그 공이 크게 손상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근기가 예리한 자에겐 3결을 끊으라고 설하시고, 근기가 둔한 자에겐 88사使를 끊어야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신다.
발기자跋耆子가 불법佛法에 출가해서 250계를 지키게 되자, 걱정하는 마음을 내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이제 모든 계율을 수호하는 걸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세 가지 계戒는 잘 배울 수 있겠는가? 이른바 계율[戒]ㆍ마음[心]ㆍ지혜[慧]이다.’
그 사람이 환희하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 세 가지 계를 능히 배울 수 있으며, 차례대로 모든 계율을 능히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여래께서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바를 설하시면서 88사使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면, 교화를 받는 자가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어떻게 이 88번뇌의 나무를 뽑을 수 있고, 어떻게 88번뇌의 큰 강을 건널 수 있으며, 어떻게 88번뇌의 큰 바다를 고갈시킬 것이며, 어떻게 88번뇌의 산을 꺾어서 이 88가지의 대치하는 도를 닦을 수 있겠는가?’ 할 경우, 이 사람에게 만약 3결을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설하신다면, 이 사람이 쉽다고 여기면서 기뻐한다. 만약 3결을 끊는다면, 견도見道의 모든 사使를 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3결은 이른바 신견身見ㆍ계취戒取ㆍ의심이다. 신견은 62견見으로 온갖 번뇌의 근본이고, 계취는 갖가지 삿되고 고통스러운 행동이며, 의심은 주저하면서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잠자함箴字函 제6권]


네 가지 정려靜慮와 네 가지 무량심이 있으며
여덟 가지 해탈과 여덟 가지 승처勝處가 있다.

『대승상론大乘相論』 하권에서 말하였다.
“네 가지 정려는 다음과 같다.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1010 착하지 않은 것들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을 최초의 정려라 하고,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두 번째 정려라 하고, 기쁨을 여읜 묘한 즐거움을 세 번째 정려라 하고, 평정함[捨]과 기억[念]이 청정한 것을 네 번째 정려라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모두 적지寂止의 모습이니, 욕계 등의 탐심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정려라 한다.”[숙자함孰字函]

『선법요해경禪法要解經』에서 말하였다.
“불법佛法은 미묘해서 선정[定]을 닦지 않는다면, 지혜가 어떻게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리겠는가? 그러므로 탐욕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고 5개蓋를 없애고 모든 훌륭한 법을 모아서 깊이 일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각覺과 관觀이 있고,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초선을 얻은 모습은 어떠한가?


먼저 바른 생각[正念]으로 다섯 가지 욕망을 꾸짖어 그치게 하면, 아직 경지[地]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몸과 마음이 쾌락해진다. 초선의 모습을 증득하면 다시 점차 더욱 뛰어나게 되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안정되어 성낼 곳에서 성내지 않고 기뻐할 곳에서도 기뻐하지 않으면, 세간의 여덟 가지 법1111 이익利益・무이익無利益・명성名聲・무명성無名聲・논의論議・무논의無論議・괴로움[苦]・즐거움[樂]이다.
에도 능히 흔들리지 않는다. 의복이나 음식 등에 대해서도 마음이 탐착하지 않고, 다만 모든 좋은 공덕을 귀하게 여겨서 초선을 얻은 후에는 나아가 2선禪을 구한다.
만약 유루도有漏道1212 세간도世間道・세속도世俗道라고도 하며, 무루도無漏道의 반대 개념이다. 인간이나 천상 등 삼계의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행법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유루도라고 한다.
라면 2선의 경지 주변에서 각관覺觀을 싫어하나니, 마치 욕계의 5욕欲과 5개蓋가 마음을 산란하게 하듯이 초선의 각관이 선정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무루도無漏道라면 초선의 욕망을 여의고, 즉시 무루의 초선을 수용하며 각관을 꾸짖어 나무란다.


만약 초선의 결사結使가 마음을 혼란시킬 수 있다면, 어째서 각관만을 설하는가?


각관이 멸하면 결사結使도 또한 멸한다.
다음에 근본과 지말支末에서 일찍이 각관을 얻으면 크게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고, 선정을 파괴하기 때문에 마땅히 없애야 한다.
안으로 청정을 얻어서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선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2선에 들어간다.


2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경전에서는 선이든 무기無記든 온갖 각관을 소멸시키라고 설했다. 각관의 움직임이 없으므로 속마음[內心]이 청정해지니, 마치 물이 맑고 청정하며 풍파가 없으면 별과 달의 온갖 상像이 모두 비치는 것과 같다.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보다 미묘하고 수승하다. 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은 욕망을 여의는 데서부터 생기고, 이 속의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의 선정으로부터 생긴다. 이와 같이 2선의 선정도 번뇌가 마음을 덮으니, 이른바 애착[愛]ㆍ교만[慢]ㆍ삿된 견해[邪見]ㆍ의심[疑] 등이다. 이는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니 반드시 끊고 없애 3선禪에 나아가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기쁨[喜]을 여의고 평정함[捨]을 행하여야 3선에 들어간다고 설하셨는가?


2선의 큰 기쁨을 얻었어도 기쁜 마음이 지나치면, 마음이 변하여 기쁨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結使]를 낳으니, 이 기쁨이 오히려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5욕欲이 청정하지 않으면 마땅히 버려야 하지만, 이 기쁨은 청정하고 미묘하여 중생이 즐기는 것인데 어째서 버리라고 말하는가?


앞에서 이미 대답했듯이 집착을 낳는 인연이라면 이는 죄의 문이어서 기쁨이 거친 즐거움이 된다. 이제 거친 걸 버리고서 미세한 즐거움을 구하려고 하므로 기쁨을 여의고서 다시 깊은 선정에 들어가 미묘한 즐거움을 구하라고 말한 것이다.
무엇을 제3선의 즐거움이라 하는가? 세간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서 이를 능가하는 것이 없다. 이 3선은 세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점차 미세해져 사라지는 것[細沒]이며, 둘째는 마음이 크게 발동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이 미혹과 번민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한마음에 상응해서 이 세 가지 허물을 생각[念]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사라질[沒] 때는 정진과 지혜의 힘으로써 다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고, 만약 크게 발동하면 마땅히 마음을 거둬들여야 하고, 만약 마음이 미혹하고 번민하면 마땅히 불법佛法의 미묘함을 생각해서 다시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한다. 항상 이 세 가지 마음을 수호하여 다스려야 한다. 이것을 교묘한 지혜를 생각하고 기쁨을 행하여[巧念慧行樂]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한다.1313 『선법요해』에는 “(是名)巧念慧行樂(入三禪)” 이 부분이 “일심으로 즐거움을 행하여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한다[(是名)一心行樂者(入三禪)]”로 되어 있다.

거친 것은 기쁨의 뿌리가 되고, 미세한 것은 즐거움의 뿌리가 된다. 비유하면 매우 뜨거울 때 맑고 차가운 물을 얻어서 손과 얼굴을 씻으면 이를 기쁨이라 하고, 청량한 연못에 들어가서 온몸을 씻으면 이를 즐거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3선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일심으로 수호하면서 항상 물러날까 잃어버릴까 걱정하는데, 이것이 번뇌가 된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다시 근심이 되니, 반드시 즐거움을 여의길 바라야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부귀의 즐거움을 구하는데, 구할 때 이미 고통스럽고, 얻고서 싫증나지 않으면 다시 고통이 되고, 얻은 후에 지키는 것도 역시 고통이 되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가 즐거움을 근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초선의 즐거움을 구했을 때는 각관覺觀이 혼란시키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며, 2선은 큰 기쁨이 요동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며, 3선은 즐거움이 무상無常해서 지키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이 즐거움을 버리고서 4선의 안온한 경지를 구해야 한다.


선정의 즐거움에 의거해서 욕망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데, 이제 무엇에 의지해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가?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버린다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열반의 즐거움에 의거해서 능히 선정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 가지 이익을 얻으니, 이른바 나한ㆍ벽지불ㆍ불도佛道이다. 그러므로 3선의 선정을 버리고서 4선의 안온한 쾌락을 행하는 것이니, 3승乘의 도로써 뜻에 수순하여 청정한 열반에 들어간다.


제4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4선의 모습과 같다. 만약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으며,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상태로 기억[念]을 보호한 채 청정하여 제4선에 들어간다. 걱정ㆍ괴로움ㆍ기쁨ㆍ즐거움의 네 가지 일을 소멸했으므로 기억[念]이 청정한 것이다.


앞서의 3선 중에서는 청정을 설하지 않다가, 여기서만 설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초선은 각관覺觀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2선은 기쁨이 크게 발동하고, 3선은 즐기는 마음이 다분히 산란해져서 모두가 기억[念]이 청정하지 않다. 다음에 하지下地에서는 비록 선정의 마음이 있더라도 들어오고 나가는 숨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나 4선은 기억[念]이 청정하기 때문에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없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쉽다.
또 4선을 진선眞禪이라 하고, 나머지 세 가지 선은 방편의 단계이다. 4선의 모습은 비유하면 마치 좋은 말을 잘 다루는 이가 뜻대로 이끄는 것과 같으니,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 등을 행하려고 하면 뜻대로 모두 얻고, 6신통[通]을 얻고자 하면 그것을 구하기가 쉬운 것이다.”[도자함圖字函]

『현종론』에서 말하였다.
“9지地는 4정려淨慮ㆍ미지未至ㆍ중간中間ㆍ3무색無色을 일컫는다.”[미자함縻字函 제2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정려지淨慮地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과 정려의 중간 이 두 가지는 모두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함[未至地]’이라고 한다.


이 경지를 어째서 ‘아직 이르지 못함’이라고 하는가?


아직은 근본에 들어가서 능히 눈앞의 온갖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이르지 못함’이라고 한다.”[절자함節字函 제10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초선初禪에 들어가는 것은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다고 한다. 초선과 2선의 중간은 각은 없으나 관은 있다고 하며, 2선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에 이르기까지는 각도 없고 관도 없다고 한다.”[입자함立字函 제8권]



각覺과 관觀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거친 마음의 모습을 각覺이라 하고, 미세한 마음의 모습을 관觀이라 한다. 처음 인색한 마음 가운데 일으킨 모습을 각이라 하고, 나중에 분별해서 좋고 나쁨을 헤아리는 것을 관이라 한다.”[건자함建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욕계에서 ‘처음의 정려에 아직 이르지 못한 정定’ 가운데 이르면 심尋도 있고 사伺도 있으며, 정려의 중간에는 심尋은 없고 오직 사伺뿐이며, 제2정려에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는 심尋도 없고 사伺도 없다.”[퇴자함退字函 제10권]

『법온족론法蘊足論』에서 말하였다.
“심尋은 이른바 욕망의 악하고 좋지 못한 법을 여의기를 찾아서 구하는 것[尋求]이며, 사伺는 이른바 욕망의 악하고 좋지 못한 법을 여의기를 엿보고 살피는 것[伺察]이다.


심尋과 사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마음의 거칠음이 심이고, 마음의 세밀함이 사이다. 이것은 다시 어떠한가? 가령 종을 칠 때 거칠게 울리는 소리는 심에 비유하고,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는 사에 비유한다.”[제자함弟字函 제7권][심사尋伺와 각관覺觀, 선정과 정려는 모두 명칭은 다르나 뜻은 같다.]

『반야경般若經』에서 말하였다.
“4무량無量은 모든 정려에 의거해서 다시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상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만약 어떤 필추가 자비심을 일으켜 시방 모든 세계의 모든 종류에게 두루하면서 광대하게 자비를 행하는 것이 가없다면, 이를 자무량慈無量이라 하니, 비悲ㆍ희喜ㆍ사捨의 세 가지도 역시 마찬가지다.’ ”[단자함旦字函]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대자大慈는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대비大悲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뿌리 뽑는 것이다.


무엇을 소자小慈와 소비小悲라고 합니까?


4무량심 가운데 자비를 소小라 하고, 18불공법不共法의 순서로 설한 대자비를 대大라 한다. 또 모든 부처님 마음 속의 자비를 대大라 하고, 나머지 사람 마음 속의 자비를 소小라 한다.


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어떠합니까?


보살의 대자大慈는 부처님보다는 작으나 2승乘보다는 크다. 이것을 가명仮名으로 크다고 하는 것이다. 또 소자小慈는 단지 마음에서 중생을 즐겁게 해 주겠다고 생각할 뿐 실제로는 즐겁게 해주는 일이 없고 마음에서는 그 고통을 불쌍히 여기되 해탈시킬 수는 없다. 대자란 즐거움을 생각하고 즐거움을 주며 대비란 고통을 연민하고 고통에서 해탈시킨다.”[건자함建字函 제7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여덟 가지 해탈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색色이 있어서 온갖 색을 관하는 것이 제1해탈이고, 안으로는 색이라는 생각[色想]이 없으나 밖으로는 모든 색을 관하는 것이 제2해탈이고, 청정하고 수승한 이해로 몸소 증명을 짓는 것이 제3해탈이고, 모든 색이라는 생각[色想]을 초월해서 대對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갖가지 생각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무변공처정無邊空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4해탈이고, 모든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초월해서 무변식처정無邊識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5해탈이고, 모든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초월해서 무소소유처정無少所有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6해탈이고, 모든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초월해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7해탈이고, 일체의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해서 멸상수정滅想受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8해탈이다.”[출자함出字函 제9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해탈은 무슨 뜻입니까?


등지고 버린다는 뜻이다.


만약 등지고 버리는 것이 해탈의 뜻이라면 어느 곳에서 해탈하고 어느 곳의 마음을 등집니까?


처음의 해탈과 제2해탈은 색色에 애착하는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제3해탈은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공처空處의 해탈은 하지법下地法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은 하지법을 등지고 버리지 않는 것이며, 멸수상滅受想의 해탈은 모든 반연하는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다.”[자자함慈字函 제6권]

『법집경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여덟 가지 승처勝處는 다음과 같다. 색이 있어서 색을 보는데,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自在見을 얻음을 아는 것을 최초의 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의 좋고 나쁨을 보는데,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2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한량없음을 보는데, 좋든 나쁘든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3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적음을 보는데, 좋든 나쁘든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4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의 푸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우마가화優摩歌華의 푸른색과 푸른빛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5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황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가니가라화伽尼歌羅華가 황색이고 황색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6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붉은 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승두시바화勝頭視婆華가 붉은 색이고 붉은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7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하얀 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우사사다라화優沙私多羅華가 하얀 색이고 하얀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8승처라 한다.”[욕자함欲字函 제2권]


제9의 차제는 비상정非想定이니
멸진정滅盡定과 무상정無想定으로부터 닦는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구차제정九次第定은 이른바 4정려靜慮ㆍ4무색정無色定ㆍ멸상수정滅想受定이다.”[출자함出字函 제9권]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멸정滅定에 머무는 자는 8식識 가운데 어떤 식이 멸하는가?


6식이 멸하고 제8식이 신身을 유지한다. 경전에 설하기를 ‘멸정에 머물면 신어身語와 심행心行이 모두 멸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수壽도 멸하지 않고 또한 따뜻함[煖]도 여의지 않는다. 근根도 변하거나 파괴됨이 없고 식이 신身을 여의지 않는다. 만약 식이 완전히 없다면 마땅히 기와나 자갈과 같은데, 어찌 멸정에 머문다고 설하겠느냐?’ 하였다.”[가자함駕字函 제10권]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무기심無記心은 성품이 미약하고 열등하여 부패하기 쉽고 간헐적이라서 반드시 강하고 견고하고 뛰어난 마음에 머물러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머무는 자에 있어서도 저 무심無心이 반드시 심心이 있어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정을 일으킨 자에 대해 어떤 이는 ‘저 곳[無想天]에 태어난 자는 언제나 선심善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일으키기는 하나 닦음에 의지할 곳이 없다. 왜냐하면 미래법은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동자함動字函 제9권]


왜 하나의 선이 네 종류로 나뉘었는가
일으키는 이견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선禪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계異計를 짓는 것이다. 상계를 기뻐하고 하계를 싫어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외도선外道禪이다. 둘째는 바른 인과를 믿는 것이다. 또한 기뻐하거나 싫어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범부선凡夫禪이다. 셋째는 태어남[生]이 공空한 이치를 요달하되 치우친 도리를 증득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소승선小乘禪이다. 넷째는 사람[人]과 법法이 둘 다 공함을 요달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대승선大乘禪이다.”[부자함富字函 제9권]


좌선할 때 생각이 일어나면 마魔가 틈타나니
기둥을 쪼갰는데 살펴보니 자기 몸에 상처 냈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심령心靈은 만 가지로 변한다. 혹 좌선을 하거나 혹 선정[定]에 들어 있을 때 마魔의 경계는 천차만별인데도 망연히 알지 못한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산간에서 좌선을 하다가 한 효자를 보았는데, 죽은 시체 한 구를 선사 앞에 끌고 와서 통곡하며 말했다.
‘어째서 나의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선사는 마魔의 경계임을 알고서 문득 도끼를 가져다가 기둥 위를 쪼개자 효자가 달아났다. 나중에 허벅지 위가 축축한 걸 깨닫고서 살펴보니 피가 있었다. 자기 자신을 쪼갠 걸 예기치 못한 것이다.
또 어떤 선사가 좌선할 때 돼지 한 마리가 오는 걸 보고는 즉시 돼지 코를 잡아서 한 번 끌어당기고는 불을 가지고 오라 해서 바라보니 자기 콧구멍을 잡고 있었다. 이는 바로 올바로 좌선할 때 마음속에서 견해가 일어나자 외마外魔가 감응해 들어온 것이다. 다만 정정正定을 닦는다면 어찌 마사魔事가 있겠는가?”[부자함富字函 제9권]


나한은 생함이 없는데도 오히려 물러남이 있고
혜가醯迦는 일곱 번 반복하자 스스로를 자해했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아라한에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퇴법退法이고, 둘째는 억법憶法이고, 셋째는 호법護法이고, 넷째는 등주等住고, 다섯째는 능진能進이고, 여섯째는 부동不動이다.
퇴법이란 물러나는 것이고, 억법이란 마음에 싫어하는 기억을 떠올려서 칼을 잡고 자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호법이란 자신의 해탈에 대해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이 생겨서 능히 훌륭히 수호할 수 있는 것이며, 등주란 물러나지도 않고 나아가지도 않는 것이며, 능진이란 나아가 이르러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부동이란 근본의 부동에 머물기 때문이다.”[규자함規字函 제7권]



아라한에 아홉 종류가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함인가?


퇴법 아라한은 두 종류의 근기를 성취하니 하하下下와 하중下中이고, 억법은 하상下上의 근기를 성취하고, 호법은 중하中下의 근기를 성취하고, 등주는 중중中中의 근기를 성취하고, 능진은 중상中上의 근기를 성취하고, 부동은 상하上下의 근기를 성취하고, 벽지불은 상중上中의 근기를 성취하고, 부처는 상상上上의 근기를 성취한다.”

다시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구혜가瞿醯迦 아라한은 여섯 번을 퇴보하고서는 더 이상 퇴보하는 것이 싫었으므로 칼로 자해해서 죽었다.’”[제8권]


범부가 죄를 지으면 형벌이 오히려 무겁고
성인의 부류[聖種]는 똑같은 잘못에도 책임이 가볍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가령 두 사람이 왕법王法을 범했는데, 한 사람은 범부로서 문득 무거운 형벌을 받았고, 또 한 사람은 왕자로서 단지 가벼운 꾸지람만 받았다. 이와 같이 이생異生과 예류預流는 함께 악업惡業을 지었어도, 모든 이생은 성인의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악업이 악취惡趣의 고통을 초래하고, 모든 예류는 성인의 종자이기 때문에 악업이 다만 인천人天의 가벼운 고통을 초래한다.”[역자함易字函 제5권]


지관止觀은 생멸의 모습을 밝히고
삼마지[三摩]는 원래 등지等持의 마음이다.

『기신론』에서 말하였다.
“지止와 관觀의 두 문에서 지止란 모든 경계의 모습을 그쳐서 사마타관奢摩他觀[심일경성心一境性]에 수순하는 것이며, 관觀이란 이른바 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해서 비파사나관毘婆舍那觀[모든 법의 자성自性을 여실하게 관찰한다.]에 수순하는 것이다.”[진자함盡字函 제9권]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어떻게 지관을 행해야 참다운 수행에 계합할 수 있는가?


단지 능관能觀의 마음과 소관所觀의 경계를 요달해서 각각의 성품을 여의면 곧 망령된 마음이 저절로 쉬어지니, 이를 지止라 하고, 항상 이 관을 지어서 그 비춤을 잃지 않기 때문에 관觀이라 한다.
그렇다면 지止에 즉하는 것이 관觀에 즉하는 것이고, 관觀에 즉하는 것이 지止에 즉하는 것이니, 능소能所의 관이 없는 것을 지관이라 한다. 가령 예전의 고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의 성품이 적연寂然한 것을 지止라 하고, 적연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하니, 능관과 소관이라는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치자함侈字函 제10권]

『반야음석般若音釋』에서 말하였다.
“삼마지문三摩地門은 또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한역하면 등지等持이다. 말하자면 평등하고 올바르게 유지하는 마음이니, 또한 정정正定이라고도 한다.”[수자함收字函]


성인에 들어가면 이미 다섯 가지 공포를 여읜 것이고
마음을 닦으면 능히 네 가지 마원魔怨을 굴복시킨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4과果의 성인은 이미 다섯 가지 공포를 여의었다. 첫째는 불활不活의 공포[몸도 애착하지 않는데 하물며 재물이겠는가?]이고, 둘째는 악명惡名의 공포[남에게 공양을 희구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 뿐이다]이고, 셋째는 대중의 공포[일체 세간에서 더불어 동등한 자가 없는데, 하물며 수승한 이가 있겠는가?]이고, 넷째는 죽음의 공포[아견我見을 멀리 여의어서 아상我相이 없다]이고, 다섯째는 악도惡道의 공포[스스로 죽음이 이미 결정된 걸 알고서 모든 불보살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이다.”[정문正文은 인자함仁字函 제8권, 주注는 『화엄경』 제34권에 나옴]

『정인법문경淨印法門經』에서 말하였다.
“하는 바가 없는 마음이 곧 모든 마를 능히 항복시키니,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라. 첫째는 온마蘊魔이고, 둘째는 번뇌마이고, 셋째는 사마死魔이고, 넷째는 천마天魔이다.
만약 무생無生과 무기無起의 법을 살핀다면 능히 사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의법意法을 의지依止하여 멸도滅道에 취향하면 능히 천마를 항복시킬 수 있다.
또 고苦를 알면 능히 온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집集을 끊으면 능히 번뇌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멸滅을 증득하면 사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도道를 닦으면 능히 천마를 항복시킬 수 있다.”[밀자함密字函 제5권]


가령 입류入流임을 알아도 들어가는 바가 없고
문득 일래一來를 옮겨도 오는 바가 없다.

『금강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의 명칭은 흐름에 들어간 것이지만 들어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斯陀含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의 명칭은 한 번 왕래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왕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의 명칭은 오지 않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음도 없기 때문에 아나함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즉시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

45) 연각품緣覺品[5칙]

깊고 깊은 법을 곧바로 능히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서
남을 추종하지 않는 것이 독각승獨覺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의 10선善은 스스로 청정을 닦고 다스리지 남의 가르침을 추종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고, 대비大悲의 방편을 구족하지 않고, 깊고 깊은 인연법을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독각승을 이루는 것이다.”[애자함愛字函 제5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벽지불은 다시 무엇을 말합니까?


벽지불은 홀로 세간에 출현한 자이니, 반드시 부처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갈가수渴伽獸에게 홀로 외뿔이 나는 것과 같으니, 벽지불도 역시 마찬가지다.”[벽지불은 곧 독각의 다른 명칭이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무명無明이 생하므로 모든 연緣이 생하고
무명이 멸하므로 모든 연緣이 멸한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12연기緣起이니,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6입入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다시 얻는 바가 없음으로 방편의 사유를 삼는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처處가 멸하고, 6처가 멸하기 때문에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가 멸한다.”[위자함爲字函 제4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시분時分의 연기는 이른바 12위位로서 12지支를 세운 것이다. 하나하나의 지支 속에 각각 5온蘊을 갖추고 있는데, 애착의 경계가 무지無知를 말미암기 때문에 탐착하는 때가 일어난다.
이 가운데 무지는 곧 무명無明이고, 탐착이 있는 것은 행行이고, 경계를 요별了別하는 것은 식識이고, 식이 함께 하는 모든 온蘊이 명색名色이고, 명색이 의지하는 모든 감관[根]이 6처處이고, 6처가 화합하는 것이 촉觸이고, 능히 촉을 거느리는 것이 수受이고, 받아들임을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이 애愛이고, 애가 늘어나는 것이 취取이고, 후세의 존재의 업業을 이끄는 것이 유有이고, 모든 온蘊이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모든 온이 성숙해서 변하는 것이 노老이고, 모든 온이 파괴되어 소멸하는 것이 사死이고, 내열內熱은 수愁이고, 슬퍼서 우는 것은 비悲이고, 5식의 상응을 불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고苦이고, 의식의 상응을 불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우憂이고, 마음이 달아오르는 것이 뇌惱이다.”[차자함次字函 제3권]
저 풀과 나무가 번성했다가 다시 쇠락하는 것을 관하듯이
자기의 형해形骸를 깨닫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생멸을 관하는 자는 무엇을 방편으로 삼는가?


그 수행자는 봄철에 풀과 나무의 푸른색을 마치 감색의 유리처럼 보고, 강물의 빠른 흐름과 떠 있던 물거품이 언덕에 닿는 걸 보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외부의 법은 이제 이미 다시 생겼다. 만약 마을에 들어가 모든 남녀가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노는 걸 보고서 무엇 하느냐고 묻는데, 이 속에서 남자가 태어나고 여자가 태어난다고 대답한다면, 또 내법內法이 이미 다시 생겼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가을철에 다시 풀과 나무가 바람과 서리에 시들어 떨어지고 강물이 고갈되는 것을 보면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이와 같은 외부의 법은 이제 이미 멸했다. 만약 마을에 들어가서 모든 남녀가 사망하고 통곡하는 걸 보면, 내부의 법 역시 소멸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관한다.
‘기력이 왕성하다 늙는 것은 무상無常하니, 누가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 ”[분자함分字函 제5권]


46) 보살품菩薩品[26칙]

자신과 다른 이를 함께 이익 되게 하니 비심悲心이 무겁고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 바로 보살승菩薩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上品의 10선善1414 고려대장경에는 10품品 상선上善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에 의거하여 고쳤다.
은 청정을 닦고 다스린다. 마음이 넓고 한량없으며, 자비와 연민을 구족하고, 방편을 섭수하며, 대원大願을 일으키고,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대지혜를 희구하고, 보살의 모든 경지를 청정히 다스리며, 모든 바라밀[度]을 청정히 닦기 때문에 보살의 광대한 행을 성취한다.”[애자함愛字函 제5권]


보리菩提1515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보살菩薩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 의거하여 보리菩提로 고쳐 번역하였다.
일체一體는 세 종류를 이루고
보살의 초발심은 2승乘보다 뛰어나다.

『파제마경破諸魔經』 상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보리菩提에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성문聲聞보리ㆍ연각緣覺보리ㆍ무상無上보리이다.
어떤 사람은 비록 보리심을 일으켰더라도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즐기기 위해 해탈을 구한다. 그러한 까닭에 성문보리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비록 보리심을 일으켰더라도 대승법大乘法에 대해 닦고 익히길 즐기지 않고, 다만 심념心念을 일으켜서 모든 반연하는 법을 관하고 그 관찰하는 것에 따라서 행한다. 그러한 까닭에 연각보리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이미 일으켰더라도 다시 남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유하고, 윤회하는 몸에 대해 싫증이나 권태를 일으키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여, 모두 다 해탈시키고자 자기의 좋은 이익을 모두에게 널리 베푼다. 그러한 까닭에 무상보리라 한다.’ ”[미자함微字函]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나한과 벽지불은 욕망을 여읜 사람입니다. 혹 어떤 범부는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는데, 다만 발심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수승함을 얻습니까?


발심한 보살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바라밀을 행하는 자이고, 둘째는 다만 은밀히 발심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자이니, 비록 조그만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어도 2승乘보다 수승하다. 왜 그런가? 비유하면 마치 태자가 비록 아직 즉위하지 않았더라도 모든 대신과 지위가 있는 부귀한 자보다 수승한 것과 같다.
가령 여섯 가지의 신통[通]이 있는 나한이 한 명의 사미를 데리고서 옷과 발우를 짊어지게 하자, 사미가 이렇게 생각했다.
‘반드시 불승佛乘으로 열반에 들어야겠다.’
스승이 그 생각을 알고서 즉시 옷과 발우를 취해서 자기가 짊어지고 그보다 앞서 나갔다. 사미가 뒤에서 다시 생각했다.
‘불도佛道는 너무나 어렵다. 생사에 오래 머물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니, 소승小乘으로써 일찍 열반에 들어야겠다.’
스승이 다시 옷과 발우를 사미에게 돌려줘서 짊어지게 한 후 뒤를 따라오도록 했다. 사미가 스승에게 여쭈었다.
‘스승님께선 나이가 연로하신데도 어린애처럼 장난을 하십니다.’
스승이 즉시 대답했다.
‘너의 초발심初發心이 부처를 지으니, 그 마음이 귀중하고 그 자리[位]가 나의 스승이기 때문에 너를 밀어서 앞서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이 다시 후회하면서 소승小乘을 취해 나를 버리고 멀리 떨어지려 했으므로 뒤에 있도록 한 것이다.’
사미가 깜짝 놀라 깨달으면서 대승법大乘法에 머물렀다.”[표자함表字函 제8권]


대승과 소승은 다섯 종류의 차이가 있고
넓은 길과 좁은 길 속에 늦고 빠름이 있다.

『대승장엄론석大乘莊嚴論釋』에서 말하였다.
“성문승과 대승에 다섯 종류의 차이가 있다. 첫째는 발심發心의 차이이고, 둘째는 교수敎授의 차이이고, 셋째는 방편의 차이이고, 넷째는 주지住持의 차이이고, 다섯째는 시절의 차이이다.
성문승은 발심하는 것이나 가르쳐 주는 것이나 부지런히 방편을 쓰는 것이 모두 스스로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지住持도 적고 복과 지혜가 작게 모이고 시절도 작으니, 3생生에 이르러야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대승은 이와 달리 발심과 가르쳐 주는 것과 부지런히 방편을 쓰는 것이 모두 남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지住持도 많고 복과 지혜가 크게 모이고 시절도 많으니, 3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이가 있어서 마땅히 소승의 행으로써 대승의 과果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사자함事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협소한 도道에 의거해서 해탈을 얻는 것을 시時해탈이라 한다. 가령 매우 빨라서 첫 번째 생에 선근善根을 심고, 두 번째 생에 성숙하게 하고, 세 번째 생에 해탈을 얻는다.
광대한 도道에 의거해서 해탈을 얻는 것을 불시不時해탈이라 한다. 가령 매우 늦어서 성문승은 60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고, 가령 사리자舍利子나 독각승은 백 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고, 불승佛乘은 3아승기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는다.”[패자함沛字函 제1권]


보살이 갖추어 성취하는 것은 태양이 비추는 것과 같고
성문이 짓는 것은 반딧불 빛과 같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만자자滿慈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뜻을 관찰하셨기에 모든 보살들이 가진 공덕을 찬양하고 성문은 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만자자에게 말씀하셨다.
‘태양[日輪]이 섬부주贍部州 사람에게 비추는 광명을 반딧불이 비출 수 있겠는가?’
만자자가 말했다.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했듯이, 보살의 성취는 마치 태양의 광명이 섬부주의 모든 유정有情들을 널리 비추는 것과 같으며, 성문이 지은 바는 마치 반딧불의 광명이 오직 자신만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이에 보살은 자신의 번뇌를 조복할 뿐만 아니라 유정有情을 제도하여 번뇌를 여의게 함으로써 보리菩提를 증득해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성문승은 오직 자신만을 조복할 뿐이니, 모든 유정들을 조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내자함字函 제2권]


불승佛乘은 결국 오직 하나뿐이지만
여래께서는 방편으로 세 가지를 설하신다.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시방의 불국토 속에는
부처님의 방편설을 제외하면
오직 1승법乘法만 있고
2승도 없고 3승도 없다.

다만 거짓 이름 자[名字]로써
중생을 인도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려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신다.
오직 이 하나의 사실만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진실이 아니다.[죽자함竹字函 제1권]


불국토를 장엄하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으니
비유하면 큰 성으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닌 것과 같네.

『원각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큰 성의 외부에 네 개의 문이 있어서 방향에 따라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한 길만이 아니다. 모든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고 보리를 이루는 것도 하나의 방편만은 아니다.”


같은 무리가 되어 같은 일을 함으로써 서로 친해지니
물에도 들어가고 진흙에도 들어가서 깨닫게 한다.

또 말하였다.
“보살이 변화를 세간에 나타내 보이는 것은 애착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단지 자비로써 저들로 하여금 애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온갖 탐욕을 빌려서 생사에 들어간다.
또 보살은 오직 대자비의 방편으로 온갖 세간에 들어가서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개발하고 나아가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 보이니, 역순逆順의 경계에서 그 일을 함께 함으로써 성불하도록 교화한다.”


4념주처念住處와 4정단正斷이 있고
4여의족如意足과 5종근種根이 있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4념처念處를 관하는 것이라 하는가? 몸의 청정하지 못함을 관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 하고, 쾌락이 모두 고통임을 관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 하고, 마음의 생멸을 관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 하고, 화합의 모습을 파괴하고 단지 법상法相만을 얻음을 관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상자함常字函]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4정근正勤[또한 정단正斷이라고도 한다.]은 얻는 바가 없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다. 아직 생기지 않은 온갖 나쁘고 좋지 않은 법을 생기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며, 이미 생긴 나쁘고 좋지 않은 법은 영원히 끊게 하기 때문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좋은 법은 생기도록 하기 때문이며, 이미 생긴 좋은 법에는 안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생자함生字函 제4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4여의족如意足이란 이른바 욕欲삼마지ㆍ근勤삼마지ㆍ심心삼마지ㆍ관觀삼마지이다. 하나하나의 삼마지 가운데서 행을 끊어서 성취하고, 신족神足을 닦아 익히고[욕삼마지란 곧 욕정欲定이다. 행을 끊어서 성취한다는 것은 신견身見 등의 행을 끊고, 색色ㆍ수受 등의 행을 끊어서 성취하기 때문이다.] 지止에 의거해서 싫어하고[대치해서 악법惡法을 취하지 않는다.] 지止에 의거해서 여의고[성품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지止에 의거해서 멸하고[모든 악법惡法을 멸하는 것이다.] 버림으로써 회향하는 것이다.[의지함이 없는 곳에 이른다.]”[정문正文은 강자함崗字函 제6권, 주문注文은 합론合論 59권]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4여의분如意分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로써 근본을 삼는다.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럽기 때문에 초선初禪에 들어가게 되고, 나아가 4선까지 이르면 몸이 가벼워짐을 얻는다. 이와 같이 몸이 가볍고 마음이 부드러워짐을 성취하면 여의분如意分에 들어가고, 여의분에 들어간 후에는 곧 신통을 낳고 마음이 자재로워져 뜻에 따라서 간다. 마치 바람이 허공을 다니는 데 걸리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5근根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왜 신근信根이라 하는가? 세간의 정견正見을 행하고 업보를 믿고 의심의 그물을 없애기 때문이다. 무엇을 진근進根이라 하는가? 이 법을 받아들여서 닦기 때문이다. 왜 염근念根이라 하는가? 닦는 바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왜 정근定根이라 하는가? 닦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혜근慧根이라 하는가? 지혜로써 환히 비추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5력力ㆍ7각覺ㆍ8도지道支가 있으니
모두 합쳐서 37보리분菩提分이다.[4념처念處로부터 여기까지이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5력力은 신력信力ㆍ정진력精進力ㆍ염력念力ㆍ정력定力ㆍ혜력慧力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왜 신력信力이라 하는가? 이와 같이 믿고 향해서 마魔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진력進力은 정진이 견고해서 천인天人이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염력念力은 온갖 좋은 법에 머물러서 번뇌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력定力은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비록 설한 바가 있더라도 온갖 선禪을 장애하지 않으니, 정定을 버리지도 않고 정定을 따르지도 않는데도 능히 자재롭다. 혜력慧力은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아는 것이니, 한 법도 능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지혜[智]이다. 세간 외도의 고행苦行과 난행難行은 보살이 교화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모두 수용함을 나타내서 그 행하는 바를 함께 하니, 이것이 출세법出世法으로서 세간을 능히 넘어서는 것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이 다섯 가지는 무엇을 반연해서 근根이라 이름하고, 역力이라 이름하는가?


능히 좋은 법을 생기게 할 수 있으므로 근根이라 하고, 능히 악법惡法을 타파할 수 있으므로 역力이라 한다. 설함이 있어도 기울거나 흔들릴 수 없는 것을 근이라 하고, 능히 남을 꺾어서 굴복시키는 것을 역이라 한다.”[정자함靜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7각지覺支란 이른바 염각지念覺支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희각지喜覺支ㆍ경안각지輕安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이니, 이離에 의지하고 무염無染에 의지하고 멸滅에 의지하고 사捨로 회향하는 것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염각분念覺分은 모든 법의 자성이 다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다. 택법각분擇法覺分은 능히 요의了義와 불료의不了義를 분별하는 것이다. 진각분進覺分은 부지런히 닦아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희각분喜覺分은 닦는 바의 법이 기쁘기 때문이다. 제각분除覺分은 모든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다. 정각분定覺分은 정定에 들어간 듯이 온갖 법을 각료覺了하는 것이다. 사각분捨覺分은 세간 법에 끄달리지 않아서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8성도지聖道支란 이른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정견正見은 단멸[斷]과 항상함[常]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정사유正思惟는 가령 생각으로 탐욕 등을 일으키면 이를 올바르지 않은 사유라 하고,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생각하면 이를 올바른 사유라 한다. 정어正語는 무릇 말하는 것이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정업正業은 이치에 따르는 업을 닦기 때문이다. 정명正命은 위의威儀가 흔들리지 않아서 온갖 아첨이나 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정진正進은 올바른 진리[諦]의 성스런 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념正念은 열반으로 나아가면서 마음을 묶어 놓음[繫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정정正定은 결정코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이 일곱 가지를 각지覺支라 하는가?


각覺은 구경각究竟覺이어서 곧 진무생지盡無生智이고, 혹은 여실각如實覺이어서 곧 무루혜無漏慧이다. 일곱은 그것을 나눈 것이기 때문에 지支라 이름한다. 택법擇法은 각覺이기도 하고 지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여섯은 지支일 뿐 각覺이 아니다.


어째서 이 여덟 가지를 도지道支라 하는가?


밟는 것을 통달하기 때문에 도道라 한다. 여덟은 그것을 나눈 것이기 때문에 지支라 한다. 정견은 도道이기도 하고 지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일곱은 지支이지 도道가 아니다.”[정자함靜字函 제1권]


차제次第의 5위位로써 원만히 닦으니
이로 말미암아 3아승기의 수數를 거쳤다.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욕망과 애착이 말라 버리고 감관[根]과 경계가 짝하지 않아서 순수하게 지혜만 있는데, 그 지혜가 마른 것을 간혜지乾慧地라고 이름한다. 욕망의 습기가 처음으로 말라서 여래의 법류수法流水와는 접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면 원만하고 오묘해져 망상妄想이 멸진하고 중도中道가 순수하고 참된 것을 신심주信心住라고 한다.
10신信은, 첫째는 신심信心이니 참된 마음이 명료한 것이며, 둘째는 염심念心이니 처음의 염念을 잊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정진심精進心이니 정명精明하게 나아가는 것이며, 넷째는 혜심慧心이니 지혜가 현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정심定心이니 적멸과 오묘함이 항상 엉기어 있는 것이며, 여섯째는 불퇴심不退心이니 밝은 성품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며, 일곱째는 호법심護法心이니 지니고 보호하여 잃지 않는 것이며, 여덟째는 회향심廻向心이니 빛을 돌려서 부처를 향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계심戒心이니 무위無爲에 안주하는 것이며, 열째는 원심願心이니 가는 바가 원願에 따르는 것이다.
10주住는, 첫째는 발심주發心住이니 마음의 정精이 발휘되는 것이며, 둘째는 치지주治地住이니 실천하는 마음이 마치 땅과 같은 것이며, 셋째는 수행주修行住이니 다니고 행함에 걸림 없는 것이며, 넷째는 생귀주生貴住이니 여래의 종자에 들어가는 것이며, 다섯째는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이니 깨달음에 결함이 없는 것이며, 여섯째는 정심주正心住이니 마음의 모습이 마치 부처와 같은 것이며, 일곱째는 불퇴주不退住이니 몸과 마음이 증장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동진주童眞住이니 신령한 모습이 구족한 것이며, 아홉째는 법왕자주法王子住이니 출생해서 불자佛子가 되는 것이며, 열째는 관정주灌頂住이니 관정으로 직위를 받는 것이다.
10행行은, 첫째는 환희행歡喜行이니 부처의 오묘한 덕을 갖추는 것이며, 둘째는 요익행饒益行이니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진한행無瞋恨行이니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것이며, 넷째는 무진행無盡行이니 시방을 통달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이치란행離癡亂行이니 차별이나 과오가 없음을 얻는 것이며, 여섯째는 선현행善現行이니 다름[異] 가운데서 같음[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곱째는 무착행無着行이니 무수한 세계[塵刹]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 여덟째는 존중행尊重行이니 모든 것이 제1의第一義이며, 아홉째는 선법행善法行이니 원만한 부처의 궤칙이며, 열째는 진실행眞實行이니 하나의 진리는 함이 없는 것[一眞無爲]이다.
10회향廻向은, 첫째는 모든 중생을 구호해서 중생의 모습을 여의는 회향이니 제도하는 바 없이 제도하는 것이며, 둘째는 파괴되지 않는 회향이니 파괴할 만한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이니 깨달음이 부처의 깨달음과 나란한 것이며, 넷째는 모든 처소에 이르는 회향이니 밝음을 땅처럼 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다함없는 공덕장功德藏의 회향이니 신身과 토土가 섭입涉入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평등한 선근善根의 회향이니 부처의 인因과 같은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을 동등히 관찰하는 회향이니 성품이 중생과 같은 것이며, 여덟째는 진여상眞如相의 회향이니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속박 없는 해탈의 회향이니 시방에 걸림 없는 것이며, 열째는 동등한 법계의 한량없는 회향이니 성품이 원만한 성취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흔 가지가 하나의 마음이다. 다음은 네 가지 묘행妙行을 덧붙이는데, 이른바 난지煖地ㆍ정지頂地ㆍ인지忍地ㆍ세제일지世第一地이다.
10지地는,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니 부처의 경계를 요달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구지離垢地이니 같고 다른 성품이 멸하는 것이며, 셋째는 발광지發光地이니 청정함이 지극해서 밝음이 생기는 것이며, 넷째는 염혜지燄慧地이니 밝음이 지극해서 각覺이 원만한 것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니 같음[同]과 다름[異]이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니 성품이 청정해서 밝음이 드러나는 것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니 진여제眞如際를 다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니 하나의 진여심眞如心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니 진여의 용用을 발하는 것이며,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니 자음慈陰의 오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어서 여래가 생사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순행順行해서 각제覺際에 이르러 교입交入하는 것을 등각等覺이라 한다. 처음 간혜乾慧의 마음으로부터 등각까지는 각覺으로서 금강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간혜지를 획득한다. 이처럼 단單과 복複을 거듭[重重]하면서 열둘이 바야흐로 다하면, 묘각妙覺이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한다.”[염자함染字函 제8권][장경長慶의 주석에서는, “5위 속에 각기 열을 갖추고, 다시 등각과 묘각이 둘이 된다. 혹은 단편적으로 1위位를 드는 것을 열둘이라 하고, 혹은 큰 수數를 드는 것을 중중重重이라 하는데 이는 다함없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5위位라는 것은 첫째는 자량위資量位이니 이른바 대승의 해탈에 수순하는 분分을 닦는 것이며, 둘째는 가행위加行位이니 이른바 대승의 결택決擇을 수순하는 분分을 닦는 것이며, 셋째는 통달위通達位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머무는 견도見道이며, 넷째는 수습위修習位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머무는 수도修道이며, 다섯째는 구경위究竟位이니 이른바 무상보리無上菩提에 머무는 것이다.”[즉자함則字函 제9권]

『대승석론大乘釋論』에서 말하였다.
“3아승기라는 것은 그 중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최초의 승기僧祇가 원만해지고 나면 정심지淨心地에서 진여를 통달하고, 6지地에서는 이미 돌아와서 유상有相의 행을 증득하고, 7지에서는 무상無相의 공용功用이 있는 행을 얻는다. 제2승기가 원만해져서 8지에 들어가면 무공용無功用의 행을 얻지만, 그러나 아직 무공용행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9지와 10지에서 무공용행이 원만해지니, 이것이 제3승기겁이다.”[경자함敬字函 제7권]


다른 승乘은 부처에 이르는 데 3아승기가 정해졌지만
원교圓敎는 초발심에 정각正覺을 이룬다.

장자長者가 논하였다.
“가령 3승乘 가운데 10주住 보살은 생공관生空觀을 배워서 천제闡提의 믿지 않는 장애를 다스리고, 10행行 보살은 법공관法空觀을 지어 자리이타행을 닦음으로써 성문의 자리自利의 장애를 다스리고, 10회향廻向 보살은 법공관을 지어서 자비의 원력을 일으켜 모습을 6도道에 드리워 중생을 교화함으로써 독각의 자도自度의 장애를 다스린다.
이 서른 가지 마음의 보살을 이른바 3현賢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자량위와 가행위로 지地 이전의 세 가지 장애를 다스린다. 다만 정사正使는 제거했지만, 습기習氣는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 10지地 보살은 그 나머지 습기도 끊는다.
초지初地 보살이 자신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보는 것을 견도위見道位라 하며, 2지부터 7지까지는 수도위修道位로서 공용이 있는데도 그 행을 닦으며, 8지地부터 10지地까지는 구경위究竟位라고 한다.[32권]
11지의 등각주等覺住 안에서는 보현행이 바야흐로 끝나고, 12지는 묘각妙覺의 불과佛果이다.[40권]
이와 같이 권교權敎는 먼저 보살행을 행해서 가진여仮眞如를 배우고 지地 이전의 복인伏忍을 동등히 관하니, 10지부터 오히려 10진여眞如의 장애가 있기 때문에 관해야 한다. 진여위에서 행해야 할 바의 행이 장애를 이루고 아울러 유위有爲로 보살심을 일으키고 생멸을 여의지 않은 채로 능히 분별과 무명無明을 끊어야 하고 이 관을 말미암아 절복해야 한다. 10지의 위位에서 바야흐로 견성할 수 있고 3기겁을 지나야 바야흐로 비로소 성불한다.”[제2권]

『승만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보살의 성불은 결정코 3아승기를 채운다.[35권]
가령 원교圓敎의 10주住는 첫 머리에서 문득 견성見性하여 정등각正等覺을 이루고, 온갖 행상行相을 행해서 중생을 교화하면 곧 각행覺行이 원만한 부처가 된다. 1위位가 곧 일체 위一切位이며, 일체 위가 곧 1위이기 때문에 10신信의 원만한 마음이 곧 6위位를 섭수해서 정등각을 이루고, 보현의 법계에 의거해서 제석천의 그물이 겹쳐 있고 주主와 반伴이 구족하기 때문에 원교라 한다.”[제3권]

『법화경』에서 말하였다.
“용녀龍女가 찰나刹那에 성불한다.”

또 『화엄경』에서는 말하였다.
“선재善財 동자가 일생에 과果를 취하니, 처음 문수文殊로부터 보리심을 일으키고 단계적으로 덕운德雲 등 53선지식을 뵈었는데 한 분 한 분이 모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먼저 아뇩보리심阿耨菩提心을 일으켰는데, 무엇이 나로 하여금 보살도를 배우게 하고 보살행을 행하게 하겠는가?’ ”[제2권]


비록 초발심에 정각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마치 부처와 흡사해서 처음부터 상응한다.

또 논하였다.
“아라한ㆍ벽지불ㆍ정토淨土 보살ㆍ공관空觀 보살은 다만 출세간을 기뻐하고 6바라밀을 행하여 모두 현행現行의 무명無明을 굴복시켜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므로 영원히 번뇌를 끊어서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다. 그러나 1승乘의 불과佛果는 초발심 때에 문득 근본 무명이 근본지根本智임을 요달해서 차별지의 대용법문大用法門을 이루니, 초심初心 위에 모든 불법이 함께 타고 있는 문을 원만케 한다. 만약 지혜와 자비와 서원과 행이 터럭만큼이라도 부처와 비슷하지 않다면 신심信心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할 텐데, 하물며 부처가 머무는 바에 머물러서 부처의 참된 자식이 되겠는가? 만약 지혜가 다르지 않고, 원행願行이 평등하고, 대비大悲가 다르지 않고, 경계가 다르지 않고, 과거ㆍ미래의 겁이 한생각과 더불어 다르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비추어서 볼 수 있다면, 이를 불보살의 올바른 선지식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하며, 근본지의 발심發心에 의거하는 것이라 한다.”[34권]


47) 등각품等覺品[10정위定位, 11지地][12칙]

10정定은 10지地의 자리를 초월하고
등각等覺은 묘각존妙覺尊에 이웃한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보현普賢에게 말씀하셔서 보안普眼 등을 위하여 열 가지 삼매[삼三은 올바름이고, 매昧는 선정定이다.]를 설하도록 해서 원만한 보현행에 잘 들어가도록 했다.
첫째는 보광명普光明 삼매이다. 이 보살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하나의 연화좌로 삼으며, 이 연꽃 위에서 몸 가운데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나타내고, 그 가운데 백억의 사천하四天下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사천하에 백억의 몸을 나타내고, 하나하나의 몸에 백억의 삼천대천세계가 들어가서 보살의 수행과 나아가 근기의 성품[根性]까지 원만해짐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타낸 몸은 하나도 아니고 많지도 않으며 선정[定]에 들어가든 선정에서 나오든 착란錯亂하는 바가 없다.[장자長者는 이것이 신토身土가 겹쳐 있어서 서로 들어감이 두루 작용하고 광대하여 한계가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째는 묘광명妙光明 삼매이다. 이 보살은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들어가는데, 미진수의 삼천대천세계 하나하나 세계 속에 다시 삼천대천세계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고, 나아가 삼천대천세계 미진수 중생들의 갖가지 더러움과 청정함이 같지 않음을 보살이 다 알고 다 들어가는데, 이 모든 세계 역시 보살의 몸에 다 들어오면서도 섞이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또한 소멸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이것은 자기와 남의 경계에서 몸과 마음이 걸림 없는 것이다.]
셋째는 차제변왕제불국토신통次第遍往諸佛國土神通 삼매이다. 이 보살은 동방의 무수無數 세계를 지나고 다시 그러한 세계를 미진수 세계 지나서 그 세계 속에서 이 삼매에 들어가는데, 어떤 경우엔 찰나刹那에 들어가고 어떤 경우엔 하루에 들어가고 나아가 불가설不可說의 겁劫까지 이른다. 삼매로부터 모든 법을 일으키는데, 잊지도 않고 잃지도 않아서 구경究竟에 이른다.[이것은 여환지如幻智로써 사물에 상응하여 움직이거나 고요하고, 근본지根本智에 의거해서 항상 왕래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이것의 늦고 빠름은 이하의 다른 삼매의 경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어서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
넷째는 청정심심행淸淨深心行 삼매이다. 이 보살은 아승기阿僧祇 세계의 모든 여래 처소를 지나면서 한 분 한 분께 갖가지 뛰어나고 오묘한 향기로운 꽃으로 온갖 장엄을 갖추어 공양함으로써 부지런히 묘법을 구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과 열반에 드심에 대해선 끝내 분별하지 못한다.
다섯째는 지과거장엄장知過去莊嚴藏 삼매이다. 이 보살은 과거 모든 부처님의 출현과 겁찰劫刹의 차례를 알고, 나아가 중생 수명의 차례를 조복한다.
여섯째는 지광명장智光明藏 삼매이다. 이 보살은 미래의 일체겁 속에 있는 모든 부처님을 능히 알 수 있어서 이미 설한 법과 아직 설하지 않은 법을 모두 다 알 수 있다.
일곱째는 요지일체세계불장엄了知一切世界佛莊嚴 삼매이다. 이 보살은 시방세계에 능히 두루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교화의 장엄까지 모두 다 남김없이 본다.
여덟째는 일체중생차별신一切衆生差別身 삼매이다. 이 보살은 사람 몸으로 들어가서 야차夜叉의 몸으로 일어나고, 야차의 몸으로 들어가서 용의 몸으로 일어나고, 나아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부처의 몸으로 일어나고, 찰나에 들어가서 3세로 일어난다.
아홉째는 법계자재法界自在 삼매이다. 이 보살은 자기 몸의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에서 이 삼매에 들어감으로써 자연히 모든 세간과 모든 세간법을 능히 알아 불사佛事를 지으니, 법계의 자재로움을 얻기 때문이다.
열째는 무애륜無碍輪 삼매이다. 이 보살은 걸림 없는 몸ㆍ말ㆍ뜻의 업에 머물고, 걸림 없이 불국토에 머문다. 걸림 없는 중생을 성취하는 지혜를 얻고 걸림 없는 청정한 법륜法輪을 굴려서 부처가 지은 것을 지어 모든 부처의 종자를 잇는다.”[애자함愛字函 40권에서 육자함育字函 43권까지]


어째서 보현을 찾으면서도 몸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진실로 보안普眼을 말미암지만 그 지위는 차이가 있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안普眼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현普賢 보살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현은 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 때 보안 보살이 찾아보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현은 지금 이 대중의 회상에 나타나서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니,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 이와 같이 보현을 보게 되거나 이름을 듣게 되거나 사유하거나 억념憶念한다면, 모두 다 이익을 얻으리라.’
이 때 보안과 보살 대중들이 간절히 세 번 청하자 보현이 즉시 응신應身해서 보살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보게 했다. 보현이 여래 근처에 앉자, 대중들이 모두 환희하면서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애자함愛字函 제10권]

장자가 논하였다.
“어째서 보안은 보현을 보지 못했는가? 보안 등 10지 보살은 모두 세간의 지혜와 자비보다 출중하지만 보현은 11지의 행문行門으로서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출세간의 마음이 없다. 적寂의 작용이 자재하여 출세간의 삼매로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현을 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대중의 회상에 나타나서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니,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총總ㆍ별別, 동同ㆍ이異의 보광명지普光明智와 시방 부처의 대용大用과 체동體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니, 이를 대중의 회상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차별지差別智가 근본지根本智의 체體에서 옮기지 않는 것이니, 이를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면서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보안이 간절히 세 번 청하자, 보현이 감응해서 몸을 나타냈다’는 것은 지체智體가 머무는 바가 없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만약 상념이 있으면 즉각 응신을 나타내니,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가 다만 사물에 응한 소리일 뿐 그 처소를 구하고자 한다면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합론合論』 67권]


오히려 미혹된 모습의 수數가 두 가지 어리석음이니
무명無明의 1푼分 장애를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다.

장자가 논하였다.
“1불상佛相의 수호隨好가 다함이 없는 것과 2승기 수량의 광대함은 부처님께서 곧 스스로 보살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시니, 이른바 두 가지 어리석음이다.”[76권]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등각等覺은 아직 1푼分의 무명無明을 다하지 못했으니, 마치 미미한 연기와 같고, 혹은 격라곡隔羅穀과 같다고 말한다.”[22권]


이전에 비록 미미한 장애가 여전히 가로막더라도
이것은 금강으로 타파해서 없앨 수 있다.

『장엄론莊嚴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지위를 닦은 지 2승기이면
최후로 직職을 받게 되니
저 금강정金剛定에 들어가면
모든 분별을 타파해서 다한다.

해석에서 말하였다.
“ ‘지위를 닦은 지 2승기이면, 최후로 직職을 받게 된다’는 것에서 2승기는 이른바 제2, 제3 승기를 말하고, 최후는 이른바 구경究竟이니, 이 지위를 닦는 데서 바야흐로 직職을 얻게 된다.


직職을 받은 후에 다시 무엇을 짓는가?


저 금강정金剛定에 들어가서 모든 분별을 타파하여 다한다.


어떤 뜻으로 인해 금강정이라 이름하는가?


이것이 분별의 수면隨眠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금강으로써 비유한다.”[사자함事字函 제7권]


보현은 어째서 부처라 이름붙이지 못하는가?
노파는 어찌하여 문득 마음을 쉬었는가?[마하살摩訶薩을 붙인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안이 보현에게 여쭈었다.
‘이 마하살摩訶薩은 이 같은 법을 얻어서 모든 여래와 동등할 것인데, 어째서 부처라 이름붙이지 못하며, 10력力이라 이름붙이지 못하며, 일체 지一切智라 이름붙이지 못합니까? 나아가 어째서 보현행을 닦는데도 여전히 쉬지 못합니까?’
보현이 대답했다.
‘이 마하살이 이미 능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보살들의 갖가지 행원行願을 닦아 익혀서 지혜의 경계에 들어갔다면 부처라 이름한다. 그러나 여래의 처소에서 보살행을 닦아 쉼 없이 설한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여래의 모든 능력에 이미 다 들어갔다면 이를 10력力이라 이름하지만, 비록 10력을 성취해서 보현행을 행하더라도 쉼 없이 설한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모든 법을 알아서 능히 연설할 수 있으면 일체지라고 이름하지만, 비록 모든 법을 능히 연설할 수 있더라도 하나하나의 법에서 선교善巧의 사유로 지식止息하지 못했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나아가 이 같은 분별들을 모두 영원히 쉰다면 이를 휴식이라 하지만, 광대하게 닦아 익혀서 퇴보함 없이 원만하기를 바란다면 이를 보현의 원願을 쉬지 못했다고 한다.’ ”[육자함育字函 제3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마하살이라 이름하는가? 필정必定의 대중 가운데서도 상수上首가 되므로 마하살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필정必定의 대중이라고 하는가? 성지性地의 사람으로 여덟이니,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ㆍ초발심 보살, 나아가 아비발치지阿鞞跋致地 보살에 이르기까지를 필정必定의 대중이라 한다. 또 마하살은 진秦나라 말로 대大이다.”[입자함立字函 제5권]

“또 살타薩埵는 진秦나라 말로 중생인데, 이 중생이 위없는 도[無上道]를 위해서 발심하여 수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대심大心이라 하고, 보리를 구하지만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하여 보리살타라 한다.”[형자함形字函 제3권][이곳에서는 간략히 보살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일곱 부처의 스승이신 문수에게 머리 숙여 예배드리오니
우리 중생 위해 도道 취하지 않으셨네.[관음觀音과 세지勢至를 붙인다.]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부처를 이룬 것은 모두 문수文殊의 은혜이다. 본래 나의 스승이었으며, 과거의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들도 모두 그의 제자이며, 미래에 올 자도 역시 은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문수는 바로 불도佛道 가운데의 부모이다.’
이 때 대중들이 생각했다.
‘문수는 이미 부처님 앞까지 갔는데, 어째서 성불하지 못했을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는 훌륭한 방편[權]에 깊이 들어가서 중생을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아직 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유자함惟字函 제4권]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문수는 내가 성불할 때는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부처 세계를 하나의 불찰佛刹로 삼아서 그 이름을 보견普見이라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모든 보살들이 말했다.
‘문수가 얻은 불찰과 미타彌陁의 불찰이 같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터럭 하나를 백분의 1로 쪼개는 것과 같다. 큰 바다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을 취하는 것은 미타 불찰의 장엄을 비유한 것이며, 큰 바다의 물은 보견 불찰의 장엄이 이를 능가함을 비유한 것이다.’ ”[관자함官字函 제10권]

『보살수기경菩薩受記經』에서 말하였다.
“덕장德藏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관세음觀世音과 득대세得大勢 두 분 대사大士는 어느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미타부처님의 정법正法이 멸한 뒤에 관세음이 등정각을 이루었는데, 그 명호를 보광공덕산왕여래普光功德山王如來라고 하고, 그 불국토의 명호를 중보선집장엄衆寶善集莊嚴이라고 한다. 반열반般涅槃 뒤에는 득대세가 곧 그 국토에서 등정각을 이루었는데, 그 명호를 선주공덕보왕여래善住功德寶王如來라고 하였다.’ ”[개자함改字函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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