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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974 불교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9권

by Kay/케이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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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9

 

 

대장일람집 제9권


[제8문] ①

49년 동안 간절하게 설법하셨지만[苦口], 마지막엔 한 번 웃음으로 공로를 거두다.[무릇 9품의 인연으로 359칙이다.]

52) 교상품敎相品 53) 지송품持誦品
54) 당범품唐梵品


52) 교상품敎相品

세존께서는 7일간 사유思惟하셨으며
대범천은 세 번이나 간절히 설법을 청하였다.

『석가보』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하고는 7일 동안 이렇게 사유하셨다.
‘내가 얻은 법은 너무나 깊고 미묘해서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곧 알 수가 있다. 모든 중생은 어리석음과 삿된 소견으로 지혜가 없으니, 어찌 내가 얻은 법을 능히 이해할 수 있으리오. 내가 이제 법륜法輪을 굴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미혹해서 능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방하게 됨으로써 반드시 악도惡道에 떨어질 테니, 나는 차라리 침묵한 채 반열반般涅槃에 들어야겠다.’
이때 대범천주大梵天主가 부처님의 발에 예를 드리고 부처님 주위를 돌고나서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오랫동안 생사에 머물면서 나라와 성과 처자와 머리ㆍ눈ㆍ뇌수를 버리고서 법을 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에야 법의 바다가 이제 충만해졌고, 법의 깃발이 이제 세워졌으니, 바로 이 때가 중생을 인도할 때인데 어찌하여 열반에 드시려 하십니까?’
이렇게 세 번 설법을 청하였다.”[채자함彩字函]


총체적으로는 12부部의 수다라修多羅이고
개별적으로는 경經ㆍ율律ㆍ논論 3장藏으로 나눈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12부 경전을 설하셨으니, 이른바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수기受記ㆍ가타伽陀ㆍ우타나優陀那ㆍ니타나尼陀那ㆍ아파타나阿波陀那ㆍ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ㆍ사타가闍陀伽ㆍ비불략毘佛略ㆍ아부타달마阿浮陀達磨ㆍ우파제사優波提舍이다.
무엇을 수다라경이라 하는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에서부터 ‘환희하면서 받들어 행했다’까지이다.
무엇을 기야경이라고 하는가? 가령 부처님께서 대중을 위해 계경契經을 설하신 후에 다시 나중에 온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본경本經에 의거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을 수기경이라 하는가? 여래께서 설하시면서 모든 천인들에게 부처가 되리라는 기별記莂을 준 것이다.
무엇을 가타경이라 하는가? 수다라와 모든 계율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4구句의 게송을 설하신 것이니, 이른바 ‘모든 악惡은 짓지 말고, 온갖 선善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우타나경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선정[定]에서 일어나셔서 여쭙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설하신 것이다.
무엇을 니타나경이라 하는가? 그 본말의 인연을 아시고서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무엇을 아파타나경이라 하는가? 가령 계율 가운데 설하신 비유 같은 것이다.
무엇을 이제목다가경이라 하는가? 가령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이름하여 계경戒經이라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타가경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께서 인지因地에서 온갖 고행을 닦으신 것을 설하신 것이다.
무엇을 비불략경이라고 하는가? 대승大乘과 방등方等이 그 뜻이 광대한 것이다.
무엇을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처음 태어나 능히 일곱 걸음을 걸으신 것에서부터 천묘天廟에 들어가 상像이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를 드리게 한 데까지 설한 것이다.
무엇을 우파제사경이라 하는가? 분별하고 자세히 설하시어 그 모습을 변별하신 것이다.”[일자함一字函 제3권]

『아비담론阿毘曇論』에서 말하였다.


수다라修多羅ㆍ비니毘尼ㆍ아비담阿毘曇의 3장藏에는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어떤 자는 차별이 없다고 설명하니,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의 지혜의 바다[智海]로부터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자는 차별이 있다고 설하니, 마음을 분별함[分別心]을 수다라라고 이름하고, 계율을 분별함[分別戒]을 비니라 이름하며, 지혜를 분별함[分別慧]을 아비담이라 한다.
또 다음에 처음으로 법에 들어가는 것을 수다라라고 하며, 이미 법 가운데 들어가서 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을 비니라 하고, 이미 계율을 받은 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을 아비담이라 한다.


가전연迦旃延 존자는 어떤 인연으로 이 경전을 만들었습니까?


남을 요익케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받아 지녀서 막힘없이 이해하고[通利], 억념憶念한다면, 모든 번뇌와 모든 악행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부지런히 닦으면 능히 법상法相에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남을 이롭게 하고 싶어서 어둠 속에서 커다란 등불을 밝히면, 눈 있는 자가 갖가지 빛깔을 보는 것과 같다. 존자도 마찬가지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니,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12부경을 설하신 것이다. 왜 그런가? 만약 중생이 비록 내인內因은 있으나 외연外緣이 없다면 끝내 수승한 진보[勝進]의 행을 닦을 수 없지만, 만약 외연을 만난다면 능히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두운 방에 갖가지 물건이 있는데, 등불을 비추지 않으면 끝내 볼 수 없지만 등불이 있으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중생도 역시 이와 같으니 비록 내인內因이 있더라도 외연이 없다면 끝내 수승한 진보의 행을 닦을 수 없고, 만약 외연을 만난다면 능히 닦아서 익힐 수 있다.
부처님께서 곧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어두운 방 안에는
비록 갖가지 물건이 있지만
만약 등불로 밝게 비추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남에게서 법을 듣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끝내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없으리라.’ ”[경자함京字函 제1권]


장藏 법사는 처음 교판敎判을 해서 오승五乘을 짓고
장자長者는 다시 나누어서 십교十敎를 만들었다.

『합론』에서 말하였다.
“당나라의 법장法藏 법사는 5승교乘敎를 세웠다. 첫째는 소승교小乘敎이니, 성문과 연각의 배움이다. 둘째는 대승시교大乘始敎이고 셋째는 종교終敎이니, 시교와 종교의 두 가지는 지위에 따라 점차로 닦아 이루는 것이라서 모두 점교漸敎가 된다. 넷째는 돈교頓敎이니, 단지 한생각[一念]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즉 부처라 이름하므로 지위를 따라 점차로 설한 것이 아니다.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니, 진眞과 속俗이 서로 융화하고 원만히 갖추어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 없는 법문이다.
이통현 장자長者는 10교敎를 세웠다.
첫 번째 시기에는 소승의 유有를 설한 가르침이다. 모든 범부들은 세간의 법에 얽매이고 집착해서 이를 실유實有로 여기고, 색진色塵에 따라서 온갖 착하지 않은 짓을 하고, 착하지 않기 때문에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다시 유법有法을 가지고 그 마음에 고삐를 매고 재갈을 물리지만, 계율로 막고 수호해서 온갖 착하지 않은 짓을 다스리기 때문에 유교有敎라고 이름한다.
두 번째 시기는 반야般若를 설해서 유有를 타파하고 공空을 밝히는 가르침이다. 이미 소승의 실유를 설해서 그 몸[身]ㆍ입[口]ㆍ뜻[意]의 업을 경계하여 좋은 법에 머물게 한 뒤에는 법의 공함을 설하여 그 속박과 집착을 타파함으로써 점차로 법신法身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설해서 공空과 유有를 융화하고 회통하는 가르침이니, 저 공과 유로 하여금 한 쪽 변邊에 걸리지 않게 함으로써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가르침으로 삼는 것이다. 이승二乘의 사람은 식識을 멸해서 적멸을 증득하고 적멸에 머물러서 앎이 없으니, 이를 돌이키기 위해 의탁해서 설하기를, 아타나식阿陀那識이 제9 순정식純淨識이 된다고 했다. 가령 5ㆍ6ㆍ7ㆍ8 등의 식은 항상 9식에 의거해서 의지처로 삼지만, 범부가 어리석어 요달하지 못하고 망령되게 집착해서 아我로 여기니, 마치 물이 급하게 흘러도 물의 체體를 여의지 않고 온갖 물결도 물을 의지처로 삼는 것과 같다. 5ㆍ6ㆍ7ㆍ8 식이 항상 정식淨識을 의지처로 삼는다. 어째서 9식을 안립해서 정식淨識으로 삼았는가? 이승인二乘人이 오래도록 생사의 업종業種인 6ㆍ7ㆍ8 식에 머무르면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믿기 어려울까 걱정해서 방편으로 생사의 종자 외에 따로 정식淨識을 세움으로써 자비와 지혜가 점점 생기도록 한 것이니, 식識을 요달해 지智를 이루는 것이다.
네 번째 시기는 『능가경楞伽經』을 설해서 가假가 곧 진眞임을 밝힌 가르침이다. 곧바로 대승大乘의 근기를 감당할 자를 위해서 제8 업종의 식識을 이름하여 여래장식如來藏識이라고 단박에 설한 것이니,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닌 것이다. 이 가르침은 비록 무명無明의 업종이 지혜를 이룬다고 설했지만, 오히려 세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희구하기 때문에 저자[鄽]와 함께 함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다섯 번째 시기는 『유마경維摩經』을 설해서, 즉 세속에 항상 진眞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전의 네 가지 가르침 속에서 성문과 보살이 오염과 청정을 융화하지 못하고 항상 세속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것을 타파하는 것이다. 즉, 정명淨名이라는 세속의 거사는 곧 세속이 항상 진眞임을 밝힌 것이니, 삼승三乘의 대중으로 하여금 청정한 모습이란 마음을 없애서 출속(出俗:世俗)을 벗어남과 입전(入鄽:저자)에 들어감이 평등하여 걸림이 없게 함으로써 바야흐로 진실한 덕을 밝힌 것이다.
여섯 번째 시기는 『법화경』을 설해서, 권(權:권도)을 이끌어서 실(實:실다움)에 돌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다. 나한羅漢이 공空을 따르고 적멸을 회통하는 것과 연각緣覺이 12연생법緣生法을 회통하는 것이 모두 체성體性이 없으니, 이 같은 두 사람은 다 심식心識이 멸하고 삼계三界의 업이 멸해서 지혜와 자비가 생기지 않는다. 또 법을 꺾어 공을 밝히고 공으로 미혹을 타파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즐기는 보살과 미혹을 남겨서 중생을 윤택케 하는 보살은 모두 일체 중생의 무명無明과 온갖 미혹이 다 일체 여래근본지성如來根本智性의 소생임을 요달하지 못하고, 정토와 예토, 자불自佛과 타불他佛의 견해로써 기뻐하거나 싫어하면서 진리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 세 근기를 인도해서 본지本智에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열반경』을 설해서 모든 삼승三乘으로 하여금 권權을 버리고 실實을 향하도록 한 가르침이다. 이전의 삼승은 오만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성불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모든 유정有情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는 것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밝혀서 권權을 버리고 실상實相에 나아감으로써 다 성품을 보는 문이다.
여덟 번째는 『화엄경』을 설할 때 찰나 사이에 삼세三世의 원융을 통째로 섭수하는 가르침이니, 성품의 지혜는 본래 때[時]가 없기 때문이고 법계法界의 체體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둥근 구슬이 모나지 않는 것과 같고, 밝은 거울이 단박에 비추는 것과 같다. 처음과 끝을 통괄하여 일제一際로서 원만하니, 생성도 없고 파괴도 없고 출현도 없고 소멸도 없이 항상 법륜法輪을 굴린다.
아홉 번째는 함께 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대승大乘의 경전을 설할 때 인천人天과 삼승은 비록 함께 듣긴 하지만, 얻는 이익은 제각기 다르다. 가령 성문이 화엄의 회상에 있으면서도 장님 같고 귀머거리 같다고 했으니, 이를 함께 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이라 한다.
열 번째는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하는 가르침이다. 『화엄경』 가운데 시방에서 운집한 모든 보살들은 오는 방향은 비록 다르지만 회상의 설법은 함께 하니, 이를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하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이처럼 교상敎相의 차이를 변별해서 밝힌 것은, 처음 배우는 무리로 하여금 그 권權과 실實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제3권]


단지 원래는 색色의 한 법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세우는 것은 여러 갈래이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가르침을 세우는 것은 모두 상대편 근기를 위한 것이나, 근기가 마땅히 같지 않은지라 가르침도 여러 종류로 나뉜다.
가령 색의 한 법을 관찰하는데도 5교敎가 증득해 들어가는 것이 같지 않다.
처음 소승에서는 실재하는 색으로 보면서 성품의 공함을 설하지 않는다.
초교初敎에서는 이 색법色法을 연緣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서 반드시 자성이 없으며, 곧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으니 마치 물결이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종교終敎에서는 색이 공하여 걸림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진공眞空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에 따라 색을 이루니, 곧 환색幻色이어서 허망한 모습이며 체體가 없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으로서 항상 멸[泯]하고, 공이 곧 색으로서 항상 존재한다. 요컨대 스스로 다하는 색이 바야흐로 공의 색이요, 색을 이루는 공이 바로 진공眞空이니, 전체[擧體]가 서로 융화해서 걸림이 없음은 마치 물이 물결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돈교頓敎는 하나의 색법色法이 참된 이치가 거둔 바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 색은 곧 진리와 한 맛일 뿐 다시 별다른 법으로 나타내 설할 수 없으니, 마치 물과 물결이 모두 끊어진 것과 같다.
원교圓敎는 일어나면 곧 완전히 거두어서 하나[一]와 많음[多]이 서로 섭수하면서 동시에 성립하여 한 덩어리가 원만하게 밝으며, 드는 데 따라 곧 색이고, 드는 데 따라 곧 공이니, 뜻의 맛[義味]이 자재로워서 지혜에 따라 용用을 취한다. 왜냐하면 한 문門을 드는 데 따라서 현현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고덕古德은 ‘모두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법을 꿰뚫는다’고 하였다.”[거자함車字函 제7권]

의왕醫王이 약을 쓰는 것을 3품으로 나누는데
여래께서 가르침을 펴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최상급의 의사는 약 아닌 것도 약으로 쓰며, 중간급 의사는 약을 약으로 쓰며, 하급의 의사는 약을 약 아닌 것으로 쓰는 것과 같다.
약 아닌 것도 약으로 쓰는 자는 가령 ‘한 물건도 약 아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풀을 쥐면 모두 약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그릇된 도[非道]를 행해도 불도佛道에 통하는 것이니, 번뇌가 곧 보리菩提를 이룬다. 약을 약으로 쓰는 자는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다. 손쓰는 데 따라서 치유하는 것은 부자附子가 풍風을 다스리고 귤껍질이 기운을 소멸하는 종류이다. 이는 마치 근기를 살펴서 법을 주는 것과 같으니, 생각[思覺]이 많은 자는 수식관數息觀을 닦고 음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을 닦는 종류이다. 약을 약 아닌 것으로 쓰는 자는 병의 근원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병을 키우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법을 설하는 자가 상대의 근기에 맞지 않으면, 제호醍醐는 맛이 뛰어나고 세상의 진귀한 보배이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부자함富字函 제3권]


길을 가다가 멀어서 물러나려 하므로
화성化城을 만들어서 잠시 쉬게 했다.

『법화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여래는 방편으로 중생의 성품에 깊이 들어가서 그 뜻이 소승의 법을 즐기고 5욕欲에 깊이 집착함을 알고 이들을 위해서 열반을 설하나니, 이런 사람이 들으면 문득 믿고서 받아들인다. 비유하면 5백 유순이나 되는 험악한 곳에 도사導師가 한 명 있는데, 험난한 길의 뚫리고 막힌 모습까지 알고 있어서 장차 여러 사람들을 인도하여 이 험난한 곳을 지나 보배가 있는 곳까지 이르게 하고 하는데, 따라가는 사람들이 중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도사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지극히 피곤하고 앞길이 아직 머니, 이제는 물러나서 돌아가고 싶습니다.’
도사는 그들이 큰 보배를 버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방편의 힘으로 험난한 길 가운데 성을 하나 변화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물러나서 되돌아가지 말라. 이제 이 큰 성에서 쉴 수 있다.’
이때 극도로 피곤한 무리들은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앞에 있는 변화된 성으로 들어가서는 안온의 상념을 일으켰다. 이때 도사는 이 사람들이 이미 휴식을 해서 다시는 피곤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는 변화된 성을 소멸시키면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보배가 있는 곳이 가깝소. 아까의 큰 성은 내가 변화로 만든 것으로서 휴식을 위한 것일 뿐이오.’
여래인 도사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생사의 악도惡道가 아주 멀다고 아는 중생들이 만일 일승一乘을 듣는다면 문득 ‘불도佛道는 아주 멀어서 오래도록 괴로움을 받아야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약하고 어리석음을 알고서 방편의 힘으로 중도에 휴식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열반을 설한 것이다. 만약 중생이 두 지위[二地]에 머문다면, 여래는 즉시 그들을 위해 설한다.
‘그대들이 할 바를 아직 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머물러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우니 마땅히 관찰하고 사량해야 한다. 얻어진 열반은 아직 진실이 아니니, 다만 여래가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一佛乘에서 방편으로 세 가지로 설한 것이다.’ ”[부자함附字函 제3권]

『요집』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한 취락이 있었는데, 왕의 성과는 거리가 5유순由旬 떨어져 있었다. 그 마을에는 좋은 물이 있었는데, 왕은 칙령을 내려서 날마다 물을 나르게 했다. 마을 사람들이 피로에 지쳐서 다 이사 가려고 하자, 촌장이 말했다.
‘여러분들, 떠나지 마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반드시 왕에게 5유순을 3유순으로 고쳐 달라고 하겠소.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가까운 데서 왕래하게 하여 피로하지 않도록 하겠소.’
촌장이 즉시 왕을 찾아가 여쭈자, 왕은 3유순으로 고쳐 주었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나서는 크게 기뻐하였다.
세간 사람이 정법正法을 수행해서 5도道를 건너 열반성涅槃城을 향하는 것도 마음이 피로하고 지쳐서 문득 포기하려고 하므로 여래 법왕法王은 대방편으로 일승법一乘法을 분별해서 삼승三乘을 설한 것이다. 소승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행하기 쉽다고 여기고, 덕행에 나아가 제도를 구하는 것이 마치 마을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같다.”[장자함帳字函 제2권]


모든 법상法相을 설해서 세 종류로 나누니
의타기상[依他]과 변계소집상[遍計]과 원성상[圓成]이다.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법상法相에는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이름으로 임시로 자성自性의 차별을 안립하며 나아가 그 차별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연緣이 자성을 낳으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므로 저것이 생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음으로부터 순수하고 큰 고온苦蘊을 불러 모으는 데까지 이른다. 셋째는 제법원성상諸法圓成相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평등진여平等眞如가 점점 닦아 모으는 데서부터 나아가 보리菩提가 바야흐로 원만을 증명하는 데까지 이른다.
가령 현기증이 있는 사람은 눈에 어질어질한 병이 있는데, 변계소집상도 이와 같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가령 현기증이 있는 사람은 푸른 색, 누런 색 등의 차별적인 모습이 현전하는데, 의타기상도 이와 같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가령 청정한 눈을 가진 사람은 현기증을 여의어서 본성本性의 행하는 바가 경계를 어지럽히지 않으니, 원성실상도 이와 같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연자함緣字函 제6권]


말하고 침묵하고 보고 눈 깜박임이 모두 설하는 것이며
보고 듣고 알고 지각함이 어찌 듣는 것이 아니랴.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불사佛事 아님이 없다. 가령 운대雲臺와 보배 그물이 다 묘음妙音을 연설하고, 털구멍과 광명이 모두 능히 법을 설하는 것이다. 향적香積세계에서는 향반香飯을 먹는데도 삼매三昧가 드러나고, 극락極樂국토에서는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데도 정념正念이 이루어진다. 현악기[絲]와 관악기[竹]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고, 보는 것으로도 도道를 간직하니, 이미 말하고 침묵하고 보고 깜박이는 것이 모두 설하는 것이라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도 다 듣는 것이다. 진실로 법을 얻어 신묘함[神]에 계합할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언설을 말미암을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거문고 속에서 진왕秦王에게 뜻을 전하여 형가荊軻의 손에서 벗어나고, 상여相如는 가락으로 문군文君의 딸에게서 마침 수행하는 수레를 얻었고, 제석에게는 법락法樂의 신하가 있고, 마명馬鳴에게는 화라和羅의 기예가 있으니, 모두가 현악기와 관악기로 마음을 전하였다.
보는 것으로도 도를 간직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장자莊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선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려고 했으나 오래 동안 보지 못하다가 만나게 되었는데도 말 한마디 없이 고요히 있다가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자로子路가 괴이하게 여겨서 ‘선생님께서는 온백설자를 오래 동안 만나려 했는데, 어째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도가 있으니, 소리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운대나 보배 그물이나 털구멍이나 광명이 모두 법을 능히 설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 볼 수 있다.”[부자함富字函 제4권]


훌륭하도다, 법을 듣는 사람이여,
이로 말미암아 하나라도 성불하지 못함이 없도다.

『종경록』에서 『법화경』의 게송을 들어 말하였다.
“만약 법을 듣는 자가 있다면, 단 하나라도 성불하지 못함이 없다. 옛날에 진흙 속의 조개가 법을 듣고서는 하늘에 태어났고[이 고사는 「십선품十善品」에 보인다], 우리에 있던 코끼리가 경문을 듣고 악을 고쳤으며[이 고사는 「잡연품雜緣品」에 보인다], 비구가 믿고 받아 들여서 과果를 얻었으며, 여인이 사유하여 공空함을 깨달았다.[이 고사는 「선정품禪定品」에 보인다.]”[부자함富字函 제6권]


어떤 경우엔 악한 경계로 중생을 제접하니
비유하면 연꽃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피는 것과 같다.

『대승론大乘論』에서 말하였다.
“어떤 때 보살은 왕의 지위로 바르게 살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에 시달리는 중생을 나타내기도 하니, 따라서 계율 속에서 안립하는 것이다.


중생에 두 종류가 있다. 혹은 기쁘게 교화하는 것에 맞는 자가 있으니, 비유하면 마치 구물두화拘物頭花가 서늘한 달 아래서 피는 것과 같다. 혹은 핍박하고 괴롭하며 교화하는 것에 알맞는 자가 있으니, 비유하면 마치 연꽃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피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마찬가지니, 가령 나라왕那羅王과 선재善財동자는 혹은 사랑할 만한 일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두려운 일을 나타내기도 함으로써 중생을 좋은 곳에 편안히 데려다 준다.”[여자함與字函 제4권]


부처는 종래로부터 평등한 법이니
사람을 제접함에 어찌 귀천을 나누리오.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출가자의 귀천을 분별하는 것을 힐난하셨다.
‘나는 왕이나 어진 이 등만을 귀하게 여겨 골라서 제도하지 않으며, 하천한 우바리優波離 등도 제도한다. 나는 수달다須達多 같은 대부호인 장자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수뢰다須賴多 등과 같은 가난한 자도 역시 제도한다. 나는 사리불舍利弗 같은 대지혜를 가진 사람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리반특周離槃特 등과 같은 둔한 근기도 제도한다. 나는 마하가섭摩訶迦葉 같은 욕심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바난타婆難陀 등과 같은 욕심 많은 자도 제도한다. 나는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 같은 유덕한 장로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수다야須陀耶 등과 같은 유치한 자도 제도한다. 나는 바가뢰婆迦賴 등과 같은 교만한 자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앙굴마라鴦掘摩羅 같은 극악한 자도 제도한다. 나는 지혜가 많은 남자만을 위해서 법을 설하여 제도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낮은 여인을 위해서도 법을 설한다.’
부처님께서 바사닉왕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며느리를 맞아들이고 딸을 시집보낸다면 마땅히 종성種姓을 가려야겠지만, 이 불법佛法 속에선 오직 숙세의 선과 악의 인연만 관할 뿐 종성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믿음과 보시만을 관할 뿐 진귀한 보배는 관하지 않으며, 계율의 청정함을 찾을 뿐 가문의 청정함은 찾지 않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처님 법은 치우침이 없어서
평등하게 정도正道를 보이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안온한 바른 길을 짓는다.

비유하면 큰 시장 안에서
모든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과 같으니
나의 법 시장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 종성에 대해선 가리지 않는다.”[군자함君字函 제7권]


어찌 문수가 알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중생을 위하여 자신을 낮춰 물은 것이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대답하셨다.
‘비유하면 윤보輪寶가 위아래로 회전하듯이, 여래의 설법도 이와 같아서 하취下趣의 모든 악한 중생으로 하여금 인천人天에 상생上生하게 하고 나아가 불도佛道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여래가 여기서 다시 법륜法輪을 굴린다고 찬탄해서는 안 된다.’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이 뜻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여쭙는 까닭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자 함입니다.’ ”[일자함一字函 제3권]


만약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받는다면
기꺼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더라도 듣고 싶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구하면, 갖고 있는 진귀한 재물을 모두 아끼지 않으며, 얻기 어려운 어떤 물건일지라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불법을 능히 설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킬 뿐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안팎의 재물을 모두 희사하고 보시할 수 있으며, 능히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능히 교만을 버리지 않음이 없으며, 능히 받들어 섬기지 않음이 없고, 근고勤苦를 능히 받지 않음이 없다.
만약 한 구절이라도, 들은 적이 없는 법을 듣는다면 대환희심이 나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얻음보다 낫고, 한 게송이라도 들은 적이 없는 법을 얻는다면 능히 보살행을 청정히 하여서 제석과 범왕梵王의 지위를 얻어 한량없는 겁劫 동안 머묾보다 낫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한 구절의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있어 능히 보살행을 청정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가 지금 커다란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지극히 큰 고통을 받을 수 있다면 마땅히 그대에게 주겠다’고 말한다면, 보살은 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한 구절의 법이 보살행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설사 삼천대천세계의 대화재 속이라도 오히려 들어가고 싶고 범천梵天 위에서라도 몸을 던져 뛰어 내리겠거늘, 하물며 작은 불구덩이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지금 불법을 구하기 위해 모든 지옥의 온갖 고통을 응당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 가운데서의 자그마한 고뇌이랴?’
이와 같이 보살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그가 들은 바대로 관찰하고 수행하니, 단지 입과 말로만 청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애자함愛字函 제5권]
법을 들은 사람이 높이고 공경하지 않으면
이 같은 무리들과는 함께 얘기하지 말라.

『보살계경菩薩戒經』에서 말하였다.
“상대가 높은 곳에 있고 자신이 낮은 곳에 있다면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 다만 병환 때문일 경우는 제외한다. 마음으로 믿지 않는 자에겐 법을 설해선 안 되며, 생사를 싫어하지 않는 자에게도 법을 설해선 안 된다. 상대가 자기 앞에 있으면서도 상대가 얼굴을 가렸거나 잘못을 감추려는 자에게는 법을 설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법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만약 법을 설하는 자가 법을 존중하고 법을 듣는 사람도 높이고 공경심을 내어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이고 오만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를 청정설淸淨說이라 한다.”[현자함賢字函 제3권]


교리를 살펴서 마음을 밝힘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킴과 같고
경문을 말미암아서 뜻을 봄은 등불로 물질[色]을 봄과 같다.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하였다.
“수다라修多羅의 가르침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만약 다시 달을 본다면, 가리키는 손가락[所標]은 마침내 달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 여래의 갖가지 말씀과 개시開示도 그러하듯이 보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말과 뜻을 잘 알아야 한다. 말과 뜻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뜻과 말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뜻이 말과 다르다면, 응당 말로 인해 뜻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말로 인해 뜻을 나타내니, 마치 등불이 색色을 비추는 것과 같다.
대혜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물체를 비춤으로써 물체가 ≺이렇게 있고≻, ≺이런 곳에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보살도 마찬가지라서 말의 등불로 인해서 말을 여읜 자증自證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자함四字函 제4권]


등불이 비록 색을 드러내더라도 눈을 말미암아 보는 것이며
보는 성품은 마음을 말미암은 것이지 눈이 아니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맹인들이 눈이 멀어서 눈앞이 어두운 것과 눈을 가진 사람이 어두운 방에 처해 있을 때의 그 두 가지 어둠이 다르겠는가, 다르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어둠 속에 있는 사람과 저 맹인들의 두 가지 어둠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아난아, 만약 장님이 온통 앞의 어둠만 보다가 홀연히 눈의 광명을 얻으면, 도리어 앞의 대상에 대해서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되니 이를 눈이 보는 것이라고 하고, 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온통 앞의 어둠을 보다가 홀연히 등불의 광명을 얻으면, 역시 앞의 대상에 대해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되니 이는 마땅히 등불이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등불이 보는 것이라면 등불에 능히 봄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등불이 보는 것이니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등불은 능히 색色을 드러내지만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눈이지 등불이 아니며, 눈은 능히 색을 드러내지만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은 마음이지 눈이 아니다.’ ”[염자함染字函 제1권]


뜻에 의거해 들어가고 글에 의거하지 말 것이며
지혜에 의거해 들어갈 것이지 식識에 의거하지 말라.

『보적경寶積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때문에 네 가지 의취依趣를 잘 갖출 수 있다. 이른바 뜻[義]에 의거하고 글[文]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며, 지혜[智]에 의거하고 식識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며, 요의경了義經에 의거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며, 법法에 의거하고 사람[數取趣]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뜻에 의거하고 글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말한 바 글이라는 것은 세간법世間法에서 전수하고 익히는 문사文詞이며, 말한 바 뜻이라는 것은 출세간법出世間法과 나아가 여래께서 연설하신 8만 4천 법장法藏을 통달하는 것이다. 성교聲敎는 모두 문사文詞라 하고, 일체의 언어[言音]와 문자를 모두 여의어서 이理를 설할 수 없는 것을 뜻이라 한다.
무엇을 지혜에 의거하고 식識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모든 언교言敎가 있는 삭취취(數取趣)11 pudgala의 번역으로 흔히 보특가라輔特伽羅라고 쓴다. 중생을 가리키는 말. 번뇌에 미혹하여 미계迷界를 윤회하며 생사를 거듭한다는 의미로 쓴다.
의 이치를 교묘하고 분명히 알면 이것을 식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언교가 있되 법다운 성품의 이치는 곧 지혜이므로 여기에 의지해야 하느니라.
무엇을 불료의경에 의거하지 않고 요의경에 의거한다고 하는가? 가령 모든 경전 가운데 세속제世俗諦를 설하는 것을 불료의不了義라 하고, 승의제勝義諦를 설하는 것을 요의了義라 한다. 나아가 경전 가운데서 설한 생사를 싫어해서 등지고 열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불료의라 하고, 만약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가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설한다면 이를 요의라고 한다.
무엇을 법에 의거하고 삭취취(보특가라)에 의거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만약 삭취취의 견해에 의거한다면, 모든 소연법所緣法의 이와 같은 것을 중생의 모습이라고 한다. 여래는 세속제에 의거해서 중생에게 설하니, 만약 어떤 중생이 이 언교에 대해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 같은 부류는 마땅히 의거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래는 그로 하여금 바르게 의거하도록 하고자 했으므로 이와 같은 법[如是法]을 설한 것이니, 그대들은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에 의거해야지 저 사람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이라 하는가? 이른바 변함[變異]도 없고 늘어남[增益]도 없으며, 지음도 없고 짓지 않음도 없으며, 머물지도 않고 근본도 없는 이와 같은[如是] 모습을 법의 성품이라 한다.”[관자함官字函 제2권]


마음을 거두어 하나로 돌아가면 마魔가 기회를 잡지 못하니
마치 거북이 머리ㆍ꼬리ㆍ사지를 숨기면 물개가 해치기 어려움과 같네.

『종경록』에서 『선문禪門』을 들어서 말하였다.
“염念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딘 것만 생각하라.”

또 말하였다.
“별안간 일어나는 것이 병이요, 지속되지 않는 것이 약이다. 따라서 첫 마음으로 염念을 거두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계단이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한 도인이 강가 나무 아래에서 도를 배우고 있었다. 12년 동안 도를 배웠으나, 탐욕의 상념을 제거하지 못했다. 눈은 빛깔을, 귀는 소리를, 몸은 고요하면서도 마음[意]은 노닐어서 일찍이 편안히 쉰 적이 없어서 12년 동안 도를 얻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제도할 수 있음을 아시고 사문으로 화현하여 그의 처소로 가서 나무 아래에서 함께 기숙했다. 잠시 후 달이 밝자 어떤 거북이 강 속에서 나와 나무 아래로 왔다. 다시 어떤 물개가 굶주린 나머지 먹이를 구하러 왔다가 거북과 만나게 되었으므로 문득 거북을 잡아먹으려고 하자, 거북은 머리와 꼬리와 네 다리를 움츠려 껍데기 속에 숨겨서 잡아먹을 수 없었다. 물개가 좀더 멀리 가자, 다시 머리와 다리를 내밀어서 예전처럼 걸어가니, 물개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도인이 화현한 사문에게 물었다.
‘이 거북에게는 목숨을 수호하는 갑옷이 있어서 물개도 기회를 잡지 못했소.’
화현한 사문이 대답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은 이 거북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상無常을 알지 못하고 6정情을 함부로 놀리니, 외마外魔가 기회를 잡는 것이오.’
즉시 게송으로 설했다.

여섯 감관 감추기를 거북같이 하고
마음을 수호함을 성城과 같이 하라.
지혜와 마魔가 싸워서
승리를 하면 걱정이 없네.”[거자함車字函 제8권]


사상四相은 인人ㆍ아我ㆍ수자壽者ㆍ중생衆生이고
사병四病은 작作ㆍ지止ㆍ임任ㆍ멸滅이다.[이장理障과 사장事障이 덧붙여 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조심기助深記』 주석에서 말하였다.
“아상은 이른바 자신이 아我가 됨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상은 나의 전취轉趣와 나머지 취趣가 인人이 됨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상은 나의 번성과 쇠퇴, 고통과 즐거움이 중생이 됨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자상은 나의 일보一報인 명근命根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수자가 됨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보살이 이미 사상四相을 없앤 후에 몸의 공함을 요달했다면, 곧 아집我執을 없앤 것이다.”

또 주注에서 말하였다.
“아我가 없다는 것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견해가 없는 것이다. 인人이 없다는 것은 사대四大가 실답지 않아서 끝내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돌아감을 요달하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는 것은 생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수자상이 없다는 것은 나의 몸이 본래 공하니 어찌 수자壽者가 있겠는가? 사상四相이 이미 공하다면 법안法眼이 밝은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하였다.
“저 선지식이 증득한 오묘한 법은 반드시 네 가지 병을 여읜다.
첫째는 작병作病이니,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본심本心에서 갖가지 행을 지어 원각圓覺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저 원각의 성품은 지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이라고 설한다.’
둘째는 임병任病이니,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들은 지금 생사를 끊지도 않고 열반을 구하지도 않는다. 열반과 생사는 일어나고 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서 저 일체에 맡겨 온갖 법의 성품을 따름으로써 원각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 원각의 성품은 맡겨서 있는 것[任有]이 아니기 때문에 병이라고 설한다.’
셋째는 지병止病이니,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이제 스스로의 마음이 모든 염念을 영원히 쉬고 일체 성품의 적연寂然하고 평등함을 얻음으로써 원각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 원각의 성품은 그쳐서 합쳐지는 것[止合]이 아니기 때문에 병이라고 설한다.’
넷째는 멸병滅病이니,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이제 일체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몸과 마음이 필경 공하여 있는 바가 없으니, 하물며 근진根塵의 허망한 경계이겠는가? 일체를 영원히 적멸하게 함으로써 원각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저 원각의 성품이 적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병이라고 설한다.’
따라서 반드시 이 네 가지 병을 여의어야 한다.”

또 말하였다.
“이理와 사事의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 이장理障은 올바른 지견知見을 장애하는 것이며, 둘째, 사장事障은 모든 생사를 상속하는 것이다.
만약 탐욕을 버린다면, 우선 사장事障을 제거한 것이지 이장理障은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단지 성문과 연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갈 수는 있어도 보살의 경계에는 능히 뚜렷이 머물지 못한다. 여래의 대원각의 바다를 항해하려면, 먼저 반드시 서원[願]을 일으켜서 두 가지 장애를 부지런히 끊어야 한다. 두 가지 장애를 이미 조복한 보살의 경계에 능히 깨달아 들어갈 수 있고, 만약 두 가지 장애를 이미 영원히 끊어서 소멸시켰다면 곧 여래의 미묘한 원각에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有爲나 무위無爲나 훌륭한 방편[善巧]을 닦으며
유여有餘ㆍ무여無餘 열반계涅槃界가 있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일체법을 두루 섭수해서 유위든 무위든 반드시 훌륭한 방편[善巧]을 닦아야 한다.
무엇을 유위라고 하는가? 이른바 몸ㆍ말ㆍ뜻의 행을 미묘하고 착하게 하는 것을 유위라 한다. 무엇을 무위라고 하는가? 이처럼 몸ㆍ말ㆍ뜻의 행을 묘하고 착하게 함으로써 살벌야薩伐若[이곳 말로는 일체지一切智라고 한다.]에 회향하는 것을 무위라고 한다.
또 다시 유위는 곧 다섯 가지 바라밀[到彼岸]을 쌓는 것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정려靜慮를 유위라 한다. 만약 반야바라밀다를 말미암는다면 무위의 지혜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到彼岸]과 다르다. 이 같은 묘한 지혜[妙智]와 일체지지一切智智에 회향하는 것을 무위의 선교善巧라고 한다.”[관자함官字函 제3권]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열반이 있으니, 유여열반계와 무여열반계이다. 여기서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소멸해서 이 세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른바 유여열반계이며, 유루有漏를 다하여 무루無漏를 이루고 뜻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로 스스로 유희함으로써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서고 지은 바를 이미 갖추고 다시는 존재[有]를 받지 않고 여실하게 그것을 안다면, 이를 무여열반계라고 한다.’ ”[난자함闌字函 제7권]

『종경록』에서 『사익경思益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제도하실 뿐이다.”[만자함萬字函 제6권]


선재가 능히 보리심을 일으키니
미륵이 부처의 종자라고 칭찬한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미륵彌勒 보살이 선재善財 동자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 장자長者의 아들은 저번에 복성福城에서 문수文殊의 가르침을 받았고, 온갖 선지식들을 두루두루 거치고 난 뒤에 내 처소로 와서 모든 중생들을 구호하겠다고 발심하였다.
네 가지 흐름[四流:欲流ㆍ有流ㆍ見流ㆍ無明流]에 표류하는 자를 위해서 대법선大法船을 만들고, 소견의 진흙탕에 빠져 있는 자를 위해서 대법大法의 다리를 세우고, 어리석음의 어둠과 혼미에 빠져 있는 자를 위해서 대지혜의 등불을 켜고, 생사의 광야를 다니는 자를 위해서 성스러운 길[聖道]을 열어 보이고, 번뇌의 무거운 병에 걸린 자를 위해서 법약法藥을 조화롭게 하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 고통을 만난 자를 위해서 감로甘露를 마시게 하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불에 들어간 자를 위해서 선정의 물로써 서늘하게 하며, 나쁜 벗을 가까이 하는 자에겐 착한 벗을 보여주며, 범속한 법을 즐기는 자에겐 성스러운 법으로 가르치며, 생사에 집착하는 자에겐 지혜의 성에 나아가게 한다.
이 장자의 아들은 항상 이러한 행行으로 중생을 구호하고 보리심을 일으켜 일찍이 쉰 적이 없었다. 선남자야, 다른 모든 보살들은 한량없는 겁을 거쳐야 비로소 보살의 원행願行을 만족시킬 수 있고 모든 부처의 보리菩提에 다가갈 수 있지만, 이 장자의 아들은 한 생生 안에 구족하고 성취할 것이다.
선남자야, 보리심은 마치 종자와 같으니 모든 불법佛法을 능히 낳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좋은 밭과 같으니 중생의 백정법(白淨法:착한 행위)을 능히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대지와 같으니 모든 세간을 능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청정한 물과 같으니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능히 씻어내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태풍과 같으니 세간에 두루하면서도 걸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모든 소견의 장작을 능히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제왕과 같으니 일체의 서원 속에서 자재로움을 얻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허공과 같으니 온갖 미묘한 공덕이 광대하고 가없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연꽃과 같으니 일체 세간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여의주如意珠와 같으니 모든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두루 공급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공덕의 두레박[󰜃]과 같으니 모든 중생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나라연那羅延과 같으니 일체의 아견我見이라는 적을 능히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용맹한 장수의 깃발과 같으니 일체의 마군魔軍을 능히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솟구치는 샘과 같으니 지혜의 물을 무궁무진하게 내기 때문이다. 보리심이란 곧 귀의하는 바이니 일체의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심이란 의롭고 이로움이 되니 일체의 쇠퇴하고 괴로운 일을 능히 없애기 때문이다. 보리심이란 미묘한 보배가 되니 일체의 마음을 능히 환희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커다란 보시의 모임과 같으니 모든 중생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마치 불지제佛支提와 같으니 일체 세간의 마땅한 공양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보리심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요약해서 말한다면, 삼세三世의 여래는 보리심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려면 먼저 발을 안정시킨 뒤에 그 방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먼저 반드시 보리심에 안주한 후에야 일체의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몸을 보호하려면 먼저 명근命根을 보호해야 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불법을 수호해 지니는 것도 응당 먼저 보리심을 수호해야 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만약 어떤 사람의 명근命根이 끊어지면 부모와 종친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듯이, 보살마하살도 보리심을 버리면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고 모든 부처님의 공덕도 성취할 수 없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왕자가 비록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서 자재롭지 못하더라도 이미 왕의 모습을 갖춰서 모든 신하들의 보좌 등과는 함께하지 않으니, 태어난 것이 존귀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도 비록 일체 업一切業의 번뇌 속에서 자재롭지 못하더라도 이미 보리의 상相을 갖춰서 일체의 이승二乘과는 같지 않나니, 종성種姓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금강이 비록 깨져서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온갖 보배가 미칠 수 없는 것처럼, 보리심의 금강도 비록 의지가 약해 조금은 이지러짐이 있더라도 오히려 일체 이승二乘의 공덕보다는 뛰어나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금강을 범속한 사람은 얻을 수 없듯이, 보리심의 금강도 열등한 의지를 가진 중생이 능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금강은 보인寶人이 아니면 그 성능[能]을 알지 못하고 그 작용[用]을 얻지 못하듯이, 보리심의 금강도 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능함을 요달하지 못하고 그 용用을 얻지 못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금강은 다른 것이 능히 지니지 못하지만, 오직 금강만이 지닐 수 있다. 보리심은 성문과 연각이 다 능히 지니지 못하고 오직 살바야薩婆若에 나아갈 뿐이다. 선남자야, 만약 어떤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킨다면, 이와 같이 수승한 공덕의 법을 획득한다.”[신자함臣字函 제8권]

“또 선재가 미가 대사彌伽大士를 참례하고서 여쭈었다.
‘저는 이미 먼저 보리심을 일으켰는데, 어째서 보살행을 배워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미가 대사가 갑자기 법좌에서 내려와서 선재 앞에 꽃을 뿌리고 예를 표하면서 찬탄했다.
‘훌륭하구나, 보리심을 능히 일으킨 사람은 모든 부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며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며, 나아가 모든 천룡天龍의 예배와 공경을 받는다.’
이와 같이 찬탄한 후 다시 법좌에 올라가서 선재를 위해 법을 설했다.”[수자함首字函 제3권]


법계관法界觀은 대천세계를 통달하는 책[卷]이며
육상六相의 뜻은 원만하고 한량없는 문門이다.

『법계관法界觀』에서 말하였다.
“화엄의 큰 가르침은 넓고 넓어서 밝히기 힘들다. 두순杜順 화상께서는 문수 보살의 응신應身인데, 스스로의 지혜로써 화엄의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보고서 만유萬有가 곧 일심一心이라고 총괄했다. 그 가운데 모든 부처와 중생, 국토나 장엄의 뜻과 경계가 한량없는데, 한량없는 경계에서 그 의류義類를 모아, 총체적으로 색色과 공空, 이理와 사事를 들어 사례로 삼아서 3중重의 관문觀門으로 묶었다. 첫째는 진공법계眞空法界라 하고, 둘째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이며, 셋째는 주변함용周遍含容이다. 이 세 문을 요달하면 법계의 중중重重을 가로ㆍ세로로 요달한다.
첫째, 진공관眞空觀[이법계理法界이다. 원래 그 실체는 단지 본심本心일 뿐이다. 지금의 간추림은 허망한 생각이 아니므로 진眞이라 말하고, 간추림이 형태나 색상이 아니므로 공空이라 말한 것이다]은 다시 4구句를 열어 보인다.
첫 번째는 회색귀공會色歸空[색 등은 본래 진여眞如의 일심一心과 생멸이 융화 회통한 것이니,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이 근根ㆍ신身ㆍ기계器界로 변하여 일어난 것이라 한다. 이제 이를 추궁하면 도무지 그 체體가 없어서 진심의 공空에 돌아가는 것이지 단멸斷滅의 공이 아니다]이다.
두 번째는 명공즉색明空卽色[대체로 진공은 반드시 색과 다르지 않으며, 진공이 이미 다르지 않다면 색도 일체 법을 바꾸지 않는다. 이상의 두 가지의 관觀은 다시 8문門을 열어 보이지만, 필경에는 이 이理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본문을 보라]이다.
세 번째는 공색무애空色無碍[색이 그대로 온전한 것이 색을 다한 공이라면 색이 다하면서 공이 나타난 것이고, 공이 그대로 온전한 것이 공을 다한 색과 다르지 않다면 공은 색에 즉해서 공한 것이다. 만약 색이 실다운 색이라면 곧 공을 장애하는 것이고, 공이 단공斷空이라면 곧 색을 장애하는 것이다. 이제 색은 이미 환색幻色이기 때문에 공을 장애하지 못하고, 공은 진공이기 때문에 색을 장애하지 못한다]이다.
네 번째는 민절무기泯絶無寄[관찰되는 진공은 색에 즉함과 색에 즉하지 않음을 말할 수 없고, 또한 공에 즉함과 공에 즉하지 않음도 말할 수 없다. 일체 법이 다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말할 수 없어서 몽땅 끊어 의탁할 바가 없으니, 말로 미칠 바가 아니다]이다.
둘째,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앞에서 비록 색을 설했더라도, 이는 정情의 계교로써 진공과 공과 색의 걸림 없음과 민절무기를 이룬 것이다. 오직 진공관문眞空觀門일 뿐이니, 바야흐로 진여의 이理가 되며, 이사무애관문은 진여의 용用을 비로소 나타낸다]이다.
첫 번째는 이理가 사事에 두루하는 문이다[理遍於事門]. [이른바 능변能遍의 이理는 성품으로 분수나 한계가 없지만, 소변所遍의 사事는 지위의 차별이 나누어지는 것이니, 하나하나의 사事 가운데 이理가 완전히 두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事가 이理에 두루하는 문이다[事遍於理門]. [이른바 능변의 사事는 분한分限이 있지만, 소변의 이理는 분한이 없는 것이다. 이 분한이 있는 사事는 분한이 없는 이理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지 부분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마치 완전하고 하나인 큰 바다가 하나의 물결 속에 있으면서도 바다가 작은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작은 물결이 큰 바다를 돌지만 물결은 크지 않은 것과 같다. 동시에 모든 물결을 완전히 두루하면서도 바다는 다르지 않고, 동시[俱時]에 각각 큰 바다를 돌면서도 물결은 동일하지 않다.]
세 번째는 이에 의거해서 사를 이루는 문이다[依理成事門]. [사事는 따로 체體가 없으니, 요컨대 참된 이理를 말미암아서 성립하게 된다. 마치 물결이 물로 인해서 성립되는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사가 능히 이를 드러내는 문이다[事能顯理門]. [사事를 말미암아서 이理를 살피면, 사事는 허망하지만 이理는 실답다. 사事가 허망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사事 가운데 이理가 빼어나게 드러나는 것이니, 마치 물결의 모습이 허망하나 물의 체體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다섯 번째는 이로써 사를 빼앗는 문이다[以理奪事門]. [사事가 이미 이理를 살핀다면, 마침내 사事의 모습을 모두 다하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참된 이理만이 평등하게 현현한다. 마치 물이 물결을 빼앗으면 물결이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여섯 번째는 사가 능히 이를 은폐하는 문이다[事能隱理門]. [참된 이理가 연緣에 따라서 모든 사법事法을 이루니, 마침내 사事는 드러내도 이理는 드러내지 않게 한다. 마치 물이 물결을 이루면 움직임은 드러내도 고요함은 은폐하는 것과 같다.]
일곱 번째는 참된 이가 사에 즉하는 문이다[眞理卽事門]. [이른바 이 참된 이理가 그대로 모두 사事이니, 마치 물이 곧 물결인 것과 같으니, 고요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여덟 번째는 사의 법이 이에 즉하는 문이다[事法卽理門]. [연기의 사법事法은 반드시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그대로 곧 참이다. 마치 물결이 곧 물인 것과 같으니,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않다.]
아홉 번째는 참된 이가 사가 아닌 문이다[眞理非事門]. [사事에 즉한 이理로서는 사事가 아니니, 참과 거짓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물결에 즉한 물이 물결이 아닌 것과 같으니, 움직임으로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사의 법이 이가 아닌 문이다[事法非理門]. [온전한 이理의 사사事事가 항상 이理가 아닌 것은 모습과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온전한 물의 물결이 물이 아닌 것과 같으니, 움직임의 뜻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사事가 이理를 그대로 융화해서 두루 섭수함이 걸림 없고 서로 참여함이 자재롭다]이다.
첫 번째는 이여사문理如事門[사법事法이 이미 허망하니 모습이 다하지 않음이 없고, 이理의 성품이 진실하니 체體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이다.
두 번째는 사여리문事如理門[이른바 모든 사법事法은 이理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마치 1미진이 법계에 두루하는 것과 같으니, 1미진에 견주어도 이理와 같은 성품이 온전히 일체 법 가운데 존재한다]이다.
세 번째는 사함리문事含理門[이른바 모든 사법事法은 이理와 더불어 동일하지 않으니, 근본의 한 가지 사事가 있어서 능히 광대하게 수용한다. 마치 1미진이 그 모습이 크지 않아도 능히 가없는 법계를 포함해 섭수하는 것과 같다]이다.
네 번째는 통국무애문通局無碍門[이른바 모든 사법事法은 이理와 더불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이 사법으로 하여금 하나의 처소를 여의지 않는 것이 곧 시방을 전체적으로 두루하는 것이며, 일체의 진塵 안에서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시방을 두루하면서도 하나의 지위를 여의지 않고서 먼 곳에도 즉하고 가까운 곳에도 즉하고 두루함에도 즉하고 가는 것에도 즉해서 걸림이 없고 변함도 없다.]이다.
다섯 번째는 광협무애문廣陿無碍門[이른바 사事와 이理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1진塵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능히 시방의 찰해刹海를 널리 수용할 수 있다]이다.
여섯 번째는 변용무애문遍容無碍門[이른바 이 1진塵으로 일체를 조망하면, 두루하는 뜻을 말미암는 것이 곧 광대하게 수용하는 것이니, 거울과 등불로써 비유한 것이다. 가령 사방四方ㆍ사유四維ㆍ상하에다 거울을 세우고 중앙에 등불 하나를 놓으면, 열 개의 거울이 서로 비추고 또 한 개의 거울이 아홉 개의 거울을 두루할 때는 곧 아홉이 하나에 들어감을 용납하는 것이다]이다.
일곱 번째는 섭입무애문攝入無碍門[이른바 저 일체로 1법을 조망하니, 다른 것에 들어가기 때문에 곧 다른 것을 섭수하는 것이다. 일체가 전체적으로 하나에 들어갈 때는 곧 저 하나로 하여금 다시 스스로 일체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니, 동시同時로서 걸림이 없다. 가령 아홉 개의 거울이 저 하나의 거울 속에 들어갈 때는 곧 저 하나의 거울을 섭수함이 또한 능히 여덟, 아홉의 거울 안에 있는 것이니, 동시에 교호交互하기 때문에 걸림 없다고 말한다]이다.
여덟 번째는 교섭무애문交涉無碍門[이른바 1법으로 일체를 조망하면, 섭수함도 있고 들어감도 있어서 통틀어 4구句가 있다]이다. 하나가 일체를 섭수하고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는 것이며[하나가 가령 동쪽 거울이라면 능히 섭수함이 되며, 일체가 만약 아홉 개의 거울이라면 섭수되는 것이 된다], 일체가 하나를 섭수하고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며[경문의 내용 하나하나를 반대로 해석한다], 하나가 하나를 섭수하고 하나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며[가령 동쪽 거울이 저 서쪽 거울을 섭수해서 나의 동쪽 거울 속에 들어오면, 곧 나의 동쪽 거울이 문득 저 서쪽 거울 속으로 들어가 가버린다], 일체가 일체를 섭수하고 일체가 일체에 들어가는 것이다.[말로써는 단박에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앞서의 3구句를 빌림으로써 이 구가 원만한 것이다.]
아홉 번째는 상재무애문相在無碍門[이른바 일체로 하나를 조망하면 역시 들어감도 있고 섭수함도 있지만, 이것은 앞서의 구句와는 같지가 않다. 앞에서는 단지 피차가 동시에 섭수하고 들어가는 것이지만, 여기선 상대에 들어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따로 나머지 법을 섭수해서 대동해야만 장차 상대 안에 들어가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기세를 발하여 일으키는 것이다. 역시 4구句가 있다]이다. 하나를 섭수해서 하나에 들어가며[가령 동쪽 거울이 능히 남쪽 거울을 섭수하고 이를 대동하여 장차 서쪽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면, 동쪽 거울은 능섭能攝과 능입能入이 되고, 남쪽 거울은 소섭所攝이 되고, 서쪽 거울은 소입所入이 된다. 이는 곧 석가釋迦가 문수文殊를 섭수해서 보현普賢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체를 섭수해서 하나에 들어가며[가령 동쪽 거울이 나머지 들어가는 거울을 섭수하고 이를 대동해서 장차 서쪽 거울 속에 들어갈 때는 동쪽 거울은 능섭과 능입이 되고, 여덟 거울은 소섭이 되고, 서쪽 거울은 소입이 된다. 그렇다면 한 부처가 일체의 부처를 섭수하는 것이고, 일체 중생이 이를 대동해서 하나의 중생 속에 똑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를 섭수해서 일체에 들어가며[가령 동쪽 거울이 남쪽 거울을 섭수해서 장차 여덟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체를 섭수해서 일체에 들어가는 것이다.[이것은 모든 법이 서로 섭입攝入하고, 일시에 원만하고, 중중무진함을 밝힌 것이다. 다만 하나의 등불에 들어가면, 중심에 해당하는 때가 곧 거울과 사람 가운데 한 때라서 각기 많은 사람의 등불이 있으면서도 앞뒤가 없다. 즉, 모든 불보살과 6도道 중생은 유有가 아니니, 이미 유有라면 1찰나 속에 문득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시방 일체의 범성凡聖을 나타낸다.]
열 번째는 부융무애문溥融無碍門[이른바 일체와 1부溥가 모두 동시에 서로 조망하면서 하나하나를 갖추고 있으니, 앞서의 양중兩重 4구가 원명圓明하게 현현하고 행과 칭합하는 경계가 장애도 없고 걸림도 없다. 깊이 생각하라]이다.

장자의 『합론合論』 「환희지歡喜地」에 나오는 6상相의 뜻이다
“이 한 글자 가운데 6상이 있으며, 모든 글자와 모든 법에도 다 이 6상이 있다. 만약 훌륭하게 보는 자라면, 지혜가 걸림 없는 총지문總持門을 얻어서 모든 법에 대해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 등의 장애에 막히지 않고, 식정[情]을 여읠 수 있다. 이에 비춰보면 이 여섯 글자의 뜻은 하나라도 빠지면 곧 이지理智가 원만하지 않게 됨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처음의 환희지 가운데서 세간의 일체 법문을 관해서 통달하기 때문이다.
이 여섯 글자에는 세 가지 대법對法이 있으니, 첫째는 총總과 별別의 일대一對이고, 둘째는 동同과 이異의 일대이고, 셋째는 성成과 괴壞의 일대이다. 총체적으로 서로 여의지를 않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고 하나라도 남겨둘 수 없고 또한 쌍으로 세울 수도 없고 쌍으로 버릴 수도 없으니, 총체적으로는 단斷ㆍ상常과 생生ㆍ멸滅이다. 이제 사람을 예로 들어 유추해 보면 그 나머지는 따라서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중생을 총상總相이라 하고, 어리석음과 지혜의 구분을 별상別相이라 하고, 모두 부처 지혜와 동일함을 동상同相이라 하고, 과보에 따라서 업이 다른 것을 이상異相이라 하고, 업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것을 성상成相이라 하고,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을 괴상壞相이라 한다.
또 가령 사람의 몸이 두루 갖춰진 것을 총상이라 하고, 손과 발과 눈과 귀를 별상이라 하고, 둘 다 공하여 체體가 없는 것을 동상이라 하고, 감응하여 작용하는 것이 다른 것을 이상이라 하고,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을 성상이라 하고, 체體도 없고 상相도 없는 것을 괴상이라 한다.”[57권]

또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한 채의 집은 총상이고, 서까래 등은 별상이고, 서까래 등의 모든 연緣과 화합해서 집을 짓기 때문에 동상이고, 서까래 등의 모습을 바라보면 하나하나가 동일하지 않으므로 이상이라 하고, 서까래 등이 서로 이루기 때문에 성상이라 하고, 서까래 등의 자법自法이 본래 연고를 짓지 않기 때문에 괴상이라 한다.”[가자함駕字函 제6권]


다만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요달하면
문득 차안此岸이 피안彼岸임을 요달한다.

『금강경』에서 송하였다.

인人과 법法은 둘 다 이름자[名字]의 집착일 뿐이니,
요달하면 곧 두 가지가 무위無爲이다.
보살은 능히 가지런히 증득할 수 있지만,
성문은 하나를 여의니 그르친다.

소지장[所知]의 번뇌가 다하니
공空 가운데서는 의탁할 바가 없다.
항상 이 관觀을 능히 지으면
성정聖定을 얻어 의심이 없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조사와 부처님의 대의大意는 오직 두 가지 공만을 설하셔서 일심一心을 증득하여 알게 했을 뿐이니, 가령 세존께서 일체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일체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심법心法이다. 무엇을 두 가지 무아라고 하는가? 이른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이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다만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함을 얻는다면 일체 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 것이니, 다시 어떤 다른 법이 있어서 펼쳐 보이겠는가?”[가자함駕字函 제5권]

『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차안此岸이라 하고, 무엇을 피안彼岸이라 하는가? 이른바 차안이란 몸이 삿된 것이며, 이른바 피안이란 몸의 삿됨이 멸한 것이다.”[사자함斯字函 제6권]
또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삿되게 보는 것은 피안이 아니고, 바르게 보는 것이 피안이다.’ ”[천자함川字函 제8권]


진실한 성품은 공空이나 유有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경문을 만나지 못했다면 단상斷常에 떨어진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진실한 성품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 이 종경宗鏡의 오묘한 뜻은 자재롭고 원융하다. 이를테면 동일하게 하려 하면 동일하고, 다르게 하려 하면 다르며, 존재하게 하려 하면 존재하고, 민절하게 하려 하면 민절한다. 다름은 동일함을 가로막지 않고 민절함은 존재함을 가로막지 않아야 비로소 자재로움이 되며,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다르고 항상 존재하면서도 항상 민절하는 것을 원융圓融이라 한다. 마치 구슬방울을 가지고 노는 자와 같으니, 그 구슬은 공중에도 머무르지 않고 땅 위에도 떨어지지 않고 손 안에도 있지 않다. 이미 세 곳에 있지 않으므로 또한 한 곳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공중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곧 공관空觀에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며, 땅 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곧 가仮에도 머물지 않는 관이며, 손 안에도 있지 않는 것은 곧 중관中觀에도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미 셋에도 머물지 않고 또한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동시에 셋이면서 하나이니, 이것이 묘함이다. 아직도 이 뜻을 만나지 못하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단멸과 항상에 떨어진다.”[거자함車字函 제8권]
만약 진심眞心이라면 막히거나 장애가 없으니
완연히 물의 성품과 같아서 뜨겁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니 이른바 성품이 없다고 말한다. 진실로 마음과 경계가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에 진심眞心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서 그대로 연緣에 따라 모든 만법萬法을 이루니, 성품이 곧 체體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이어서 각기 스스로의 체體가 없고 허망한 가짜의 모습이 의지하는 것이라서 결정된 성품이 없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능히 다른 연緣을 따라 일체를 성립시킨다. 만약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마치 쇠나 돌이 각각의 견고한 성품이 있어서 바뀔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이것에는 성품이 없는데 마치 물이 찬 것을 만나면 얼음이 되고 불을 만나면 문득 따뜻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쌓임[集]에 만약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이전부터 끊어지지 않은 것인데
이제 어떻게 끊는다는 것인가?
도道에 만약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이전부터 닦아지지 않은 것인데
이제 어떻게 닦는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만약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모든 법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약 정해진 성품이 없다면 일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중생이 각각 성품이 있어서 그 자체自體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중생을 지어서 성불할 인因이 없는 것이다.”[치자함侈字函 제4권]


성품의 공함은 무無이면서도 또한 무가 아니고
연이 모임[緣會]은 유有이면서도 끝내 유가 아니다.

또 말하였다.
“만법은 연緣을 따를 뿐 스스로의 체體가 없다. 체體이면서도 자성[自]이 없기 때문에 성품이 공하다고 한다. 성품이 이미 공하므로 비록 연緣이 모이더라도 유有가 아니며, 연緣이 이미 모였으므로 비록 성품이 공하더라도 무無가 아니다. 따라서 연緣이 모인 유有는 유有이면서도 유有가 아니고, 성품이 공한 무無는 무無이면서도 무無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이면 성품이 공하기에 유有가 아니라고 말하고, 공하면 연緣이 모이기에 무無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유有를 여의고서 따로 하나의 무無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무無를 여의고서 따로 하나의 유有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법이 유무有無가 아님을 밝혔기 때문에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라면, 이미 유와 무도 아니고 또한 유 아닌 것도 아니고 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말길이 끊어진 것[言語道斷]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 갈 곳이 소멸한 것[心行處滅]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명체名體가 이미 공하고 말과 생각이 저절로 끊어지니, 만유[萬機]가 자취를 끊고 진심眞心이 홀로 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제眞諦는 성품이 공한 이理로서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속제俗諦는 환유幻有의 사事로서 유有이면서도 유有가 아니다. 유有가 아닌 유有라서 유는 공을 장애하지 않고, 공 아닌 공이라서 공은 유有를 끊지 않으니, 피차간에 의탁함이 없으면서도 번갈아 서로를 성취한다. 만약 마음 안에 한 법이라도 정하면 이 유有는 즉시 항상[常]에 떨어지며, 만약 마음 밖에 한 법이라도 집착하면 이 무無는 즉시 단멸[斷]에 떨어지니, 모두가 견해의 그물을 이루어서 원종圓宗에는 들어가지 못한다.”[치자함侈字函 제2권]


마음이 멸하니 모든 법이 다 멸하고
마음이 생기니 만 가지 경계가 따라서 생긴다.

또 말하였다.


만약 마음이 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상속되며 만약 상속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멸한다고 말하는가?


실제로 그렇다. 지금 멸한다고 말한 것은 단지 마음의 모습이 멸하는 것뿐이지 마음의 체體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은 바람으로 인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있고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지만 물의 체體가 멸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미 물의 체가 멸하지 않았으므로 움직이는 모습이 상속하는 것이다.
해석하여 말하면 갖가지 마음과 경계는 모두 무명無明이 훈습한 힘으로 말미암아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니 인因은 불각不覺이고 연緣은 망령된 경계라고 함은 다만 불각의 자심自心만이 망령되게 외부 경계를 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계는 자성自性이 없어서 마음으로부터 생기고 화합하면서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기면 곧 법이 생기고, 인因이 멸하면 연緣이 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의 체가 멸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상속된다는 것은 진심眞心의 자체는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친 것도 아니다. 무명의 바람으로 인해서 생사의 동요가 일어나되 만약 망령된 바람이 쉬는 때에는 마음의 움직이는 모습도 곧 멸하거니와 마음의 체는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체는 소의所依이고 만법은 능의能依이니, 만약 소의가 없다면 능의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심一心의 체는 온갖 존재[群有]의 의지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마치 태허太虛가 만상萬像의 체가 되는 것과 같다.”[거자함車字函 제3권]

또 예를 들었다.
“옛날 해동국에 원효元曉와 의상義相 두 법사가 함께 당나라로 스승을 찾아오다가 밤이 되어 황량한 곳의 무덤 안에서 묵게 되었다. 원효 법사는 갈증으로 마실 것을 찾다가 한 줄기 물을 발견하고는 두 손으로 움켜 떠서 마시니 매우 맛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죽은 시체의 즙인 걸 발견하고는 마음이 불쾌하고 구역질이 나서 토하다가 활연히 크게 깨닫고서 말했다.
‘내가 듣건대, 부처님께서 삼계三界는 유심唯心이고 만법은 유식唯識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추악한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 실로 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치자함侈字函 제1권]


무릇 일체법은 모두 불법佛法이고
총체적인 만행萬行의 문은 일심一心의 문이다



어째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입니까?


일체법은 오직 마음뿐이니,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이 곧 법이다. 마치 어떤 학인學人이 충忠 국사國師에게 물은 것과 같다.
‘경전에서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는데, 살해하는 것도 불법입니까?’
대답하였다.
‘일체의 베풀어 행하는 것[施爲]은 다 부처님 지혜의 작용이다. 마치 사람이 불을 태울 때 불이 향기와 악취를 싫어하지 않는 것과 같고, 또 그 물은 깨끗함과 더러움을 싫어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로써 부처의 지혜를 표현한 것이다. 이것으로도 불은 분별이 없어서 난초든 쑥이든 모두 태우고, 물은 상덕上德과 같아서 네모나든 둥글든 그릇에 맡기는 줄 알 것이다. 이 때문에 문수는 구담瞿曇에게 칼을 들이댔고 앙굴鴦掘은 석씨釋氏에게 칼을 잡은 것이니 어찌 불사佛事가 아니겠는가?
만약 마음 밖에 법을 보고서 분별심을 낸다면, 설사 뛰어나고 묘한 일을 매우 널리 짓더라도 또한 구경究竟이 아니다.’ ”[치자함侈字函 제3권]

“무릇 일심一心이란 만사萬事의 총체이다. 나누면 계율ㆍ선정ㆍ지혜가 되고, 열면 6도度가 되고, 분산하면 만행萬行이 되니, 만행은 일심 아닌 적이 없고 일심은 만행을 어긴 적이 없다.”[거자함車字函 제7권]



법문은 한량없는데, 어째서 일심一心만을 치우치게 칭찬합니까?


이것이 미혹을 일으키는 시초이고 참[眞]을 일으키는 시초이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마음이 천상을 짓고 마음이 지옥을 짓는다’고 했으니, 다만 일심一心을 요달하면 만법萬法이 모두 적정하다. 마치 해탈解脫 장자가 선재에게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내가 만약 안락安樂세계의 아미타阿彌陀 여래를 보려고 한다면 뜻대로 즉각 보고, 내가 만약 전단栴檀세계의 금강광명金剛光明 여래와 나아가 시방 여래를 보려고 한다면 모두 다 즉각 본다. 그렇지만 저 여래가 이쪽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내 몸이 저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모든 부처님과 내 마음이 다 꿈과 같음을 알고, 모든 부처님이 그림자와 같고 자기 마음은 물과 같음을 알고, 모든 부처님의 모든 색상色相과 자기 마음이 다 환영[幻]과 같음을 알고, 모든 부처님과 자기 마음이 다 메아리 같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이같이 알고 이같이 억념憶念한다면, 이는 모든 부처님이 다 자기 마음을 말미암는 것이다.
선남자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보살이 모든 불법佛法을 닦고 나아가 성불까지 하는 것은 다 자기 마음을 말미암는 것이다.’ ”[가자함駕字函 제2권]


법마다 모두 평등함을 분명히 알면
자연히 사물마다 길거나 짧지가 않다.

또 말하였다.
“가지런한 것으로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아직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다. 가지런한 것으로 가지런한 것을 가지런히 하는 것도 아직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듣건대, 천하를 잘 가지런히 하는 자는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 천하를 가지런히 하는 자이다. 어찌 반드시 산악을 평평히 하고 연못을 메운 뒤에야 바야흐로 평등하고, 오리 다리를 잇고 학 다리를 자른 뒤에야 비로소 같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법마다 여여함[如]을 요달하면 자연히 평등할 뿐이니 푸른 소나무와 녹색 풀에서 길고 짧음을 보지 않고, 붕새가 나는 것과 벌레가 나는 것에서도 저절로 크고 작음을 잊는다. 마치 『조론肇論』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어찌 오리 다리를 잇고 학 다리를 자르며 산악을 평평히 하고 골짜기를 메운 뒤에야 비로소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다름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록 다르더라도 다르지 않을 뿐이다.’
나아가 경전에서는 이렇게도 말했다.
‘반야般若와 모든 법은 동일한 모습도 아니고 다른 모습도 아니니, 신실하도다.’ ”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 ‘긴 것이라 하여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짧은 것이라 하여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더라도 그것을 이으면 근심이 생기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더라도 이것을 자르면 슬퍼할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것[性]이 길다 하여 자를 바가 아니고 타고난 것이 짧다 하여 이을 바가 아니다. 이는 경계와 지혜가 비록 다르면서 같더라도 같음을 기다린 뒤에 같은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만약 능히 앞서와 같이 같음[同]과 다름[異]의 두 문을 요달한다면, 모든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중생을 제도할 수 있거나 제도할 수 없거나, 나아가 유有와 무無, 높고 낮은 것이거나 모두 의심이 끊어진다.’ ”[부자함富字函 제3권]


한량없는 겁劫의 시간도 손가락 튕기는 사이이고
시방세계도 한 터럭 속에 있다.



이 심종心宗을 깨달아서 수행하는 사람은 원만한 보현행普賢行을 얻습니까?


일체의 이지理智와 가없는 행원行願은 모두 보현의 한 털구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실제로 화엄의 경계에 들어간다면, 범부와 성인의 몸 하나하나의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현의 행이 원만해질 수 있다. 마치 해당海幢 비구가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그 몸으로부터 10법계法界의 신운身雲을 나누어 내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선견善見 비구가 한생각 속에 일체 세계를 다 현전하는 것과 같고, 또 마치 희목관찰중생야신喜目觀察衆生夜神의 하나하나의 털구멍에서 한량없는 갖가지 변화의 신운身雲을 내는 것과 같고, 또 마치 보현普賢의 하나하나의 신분身分과 하나하나의 털구멍에 삼천대천세계의 풍륜ㆍ지륜ㆍ수륜ㆍ화륜ㆍ강ㆍ바다ㆍ산ㆍ숲ㆍ마을ㆍ성읍ㆍ지옥ㆍ아귀ㆍ축생ㆍ색계ㆍ욕계色欲 등의 계界, 밤과 낮ㆍ해와 겁[年劫]ㆍ모든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는 것ㆍ보살의 모든 회상이 다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들을 다 분명하게 보였으니 이 세계를 보는 것처럼 시방 세계를 모두 이와 같이 보였고, 현재 시방 세계를 보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시방세계도 이와 같이 보였으되, 각각이 차이가 있으면서도 서로 섞여 어지럽지 않은 것과 같다. 해당 비구의 몸을 나누는 것, 선견 비구의 일념 속, 보현의 털구멍 안을 말했듯이, 온 시방 법계와 허공계에 있는 일체 범부와 성인의 경계 및 청정하거나 더러운 국토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며, 어떤 법도 포함하지 않음이 없음은, 마치 대해의 파도를 말아서 한 방울에 거두어들이고, 시방의 찰토刹土를 모아서 한 티끌에다 가리키는 것과 같다.”[거자함車字函 제10권]

또 말하였다.
“수미산이 겨자에 들어가면서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 또한 억지로 함이 아니니, 이 뜻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떤 스님은 ‘신력神力으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어떤 스님은 ‘작음은 작은 모습이 없고 큼은 큰 모습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작음은 작음이고 큼은 큼이니, 자성自性의 크고 작음은 서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화엄경』에서는 ‘1미진 가운데 대천大千의 경권이 있다’고 했으니, 이제 중생의 일념一念을 관하면 무명無明의 마음이 곧 여래의 마음이다. 만약 이 마음을 본다면, 수미산이 능히 겨자에 들어가면서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현주玄珠는 정해진 뜻으로는 구하기 어려운데
망상罔象이 무심無心으로써 얻었다.

“법은 생각을 움직임이 없어서 생각이 있는 것으로써 구할 수도 없고 또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이 없는 것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땅히 현묘하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적수赤水에서 현주玄珠를 구하다가 망상罔象으로 인해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몸에 감춰져 있지 강에 감춰져 있지 않으며, 마음에 있지 물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莊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黃帝가 적수 북쪽으로 유행을 나가서 곤륜崑崙의 언덕에 올랐으며, 남쪽을 향해 돌아오다가 그의 현주玄珠를 빠뜨렸다. 지혜[智]로 하여금 찾게 했으나 찾지 못했고, 이루离婁로 하여금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망상罔象으로 인해서 현주를 찾았다. 무릇 참[眞]은 정해진 뜻으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심無心으로 그것을 얻은 것이다.’
마치 『농주음弄珠吟』에서 이와 같이 말함과 같다.
망상은 무심으로 문득 구슬을 얻었으니
능히 보고 능히 듣는 것은 바로 허위라네.
그러나 비록 보고 듣는 것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또한 지각과 앎이 없는 것도 아니라네.”[거자함車字函 제7권]



무심無心이라는 것은 반드시 마음을 여의어야 무심인가, 마음 그대로에서 무심을 얻는 것인가?


마음 그대로에서[卽] 무심을 얻는 것이다.


마음 그대로는 유심有心인데, 어째서 무심을 얻는다고 하는가?


마음의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분별이 없는 것이다.


어찌 변별해서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변별하여 아는 그대로이면서도[卽] 능소能所가 없으니, 이것이 무심이다. 어찌 온통 작용함이 없어야 비로소 무심이겠는가? 비유하면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어찌 유심이겠는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은 항상 스스로 무심이고 심체心體는 본래로 항상 적멸하니, 적멸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도 항상 적멸하다. 경계를 따라 비추어 변별하는 것이 모두 진실한 성품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유심이 바야흐로 처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가자함駕字函 제5권]

또 『보장론寶藏論』을 들어서 말하였다.
“여의었다 함[離]은 몸이 없음이요, 없다 함[微]은 마음이 없음이니, 몸이 없으므로 큰 몸이고 마음이 없으므로 큰마음이며, 큰마음이기 때문에 지혜가 만물을 두루하고 큰 몸이기 때문에 감응하여 무궁無窮을 갖춘다.
따라서 몸을 붙잡아서 몸으로 삼는 자는 그 커다란 감응을 잃을 것이고, 마음을 붙잡아서 마음으로 삼는 자는 그 커다란 지혜를 잃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몸과 마음을 여의고 집착을 타파하고서야 비로소 진실에 들어간다고 설하지 않음이 없다. 비유하면 마치 연금술사가 광석을 녹여서 금을 취해야 바야흐로 그릇에 쓰이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몸이 있는 데[有身] 집착하는 자라면 몸이 있는 장애가 있고, 몸이 있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형체의 껍질 가운데 은폐된다. 만약 마음이 있는[有心] 자라면 마음이 있는 장애가 있고, 마음이 있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참 지혜가 사념[念慮] 가운데 은폐된다. 그러므로 대도大道가 통하지 않고, 묘리妙理가 은폐되고, 6신神이 안에서 교란되고, 6경境이 밖으로 연外緣이 되어 밤낮으로 불안해서 휴식이 없는 것이다.”[위의 권과 같다.]


부처를 구함은 옳지 않으니, 무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도를 증득함이 어찌 공功으로 얻어 질 수 있으리오.

또 『영가집』을 들어서 말하였다.
“누군들 염念이 없을 것이며, 누군들 생生함이 없을 것인가?
만약 진실로 생이 없다면 생하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부처를 구하려고 공功을 베푼들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만약 생각[念]을 쉬어서 무념無念에 돌아간다면, 마치 앙상한 나무나 죽은 재와 같으니, 목인木人과 어찌 다르겠으며, 어찌 성불의 기약이 있겠는가? 그러나 무념이라는 것은 염念에 즉해서 무념이니, 자성自性 없는 연기가 곧 공空임을 염하는 것이다. 또 연기란 모두 진실한 성품 가운데의 연기이니, 어찌 유有와 무無에 속하겠는가? 나아가 생에 즉해서 생이 없는 것과 멸에 즉해서 멸이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보장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생生을 말한다면 모양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만약 그 멸滅을 말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항상 신령하다.’ ”

또 말하였다.
“따라서 머리를 베고 몸을 불태우는 것이 중생을 해칠 것도 아니거니와 금단金丹과 옥액玉液이라도 중생을 기르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참다운 생은 멸하지 않고 참다운 멸은 생하지 않으니, 상멸常滅이라 할 수도 있고 상생常生이라 할 수도 있다. 생함을 사랑하고 멸함을 싫어하는 자는 상멸을 깨닫지 못한 자이고, 멸함을 사랑하고 생함을 싫어하는 자는 상생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화엄소』에서 말하였다.
“생하면서 생이 없음은 참 성품은 담연하고, 생이 없으면서 생함은 업과業果가 완연하다.
이것으로 만약 염念에 즉해서 염을 간직하면 이것이 바로 상견常見이고, 생을 여의고서 무생無生을 구하면 이것이 바로 단견斷見인 줄 알 것이니, 모두가 실상實相인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이치를 요달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생 없음을 바르게 요달하면, 생도 없고 생 아님도 없는 것이니, 어찌 생이 있고 생이 없다는 두 가지 견해에 결정코 집착하겠는가?”

또 말하였다.
“현도玄道는 공功을 베풀어서 얻을 수 없고, 성지聖智는 유심有心으로 알 수 없으며, 진제眞諦는 아我를 간직하면 회득[會]할 수 없으며, 지공至功은 일을 경영함으로 될 수 없다. 망언忘言은 도道에 합할 수 있으며, 허회虛懷는 이치에 통할 수 있으며, 명심冥心은 진眞에 합일할 수 있는 것이며, 유지遺智는 성聖과 같아질 수 있다.
비록 도에 합한다고 말하나 합함에 무심해야 합함이 합함인 것이다. 비록 성인과 같아진다고 말할지라도, 같음을 구하지 말아야 같음이 같음인 것이다. 합함에서 무심하면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는 것이며, 같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다름도 없고 같음도 없는 것이다.
백비百非의 밖에서 그름[非]을 초월하니 그름[非]은 그름이 될 수 없고, 만시萬是의 이전에서 옳음[是]을 잊으니 옳음[是]은 옳음이 될 수 없다. 옳음이 옳음이 될 수 없다면 옳음[是]이 없는 것이며, 그름이 그름이 될 수 없다면 그름[非]이 없는 것이다. 다름도 없고 같음도 없다면 원수와 친한 이가 둘이 아니고, 옳음[是]도 없고 그름[非]도 없다면 칭찬과 비방이 항상 하나이다.
따라서 망언忘言은 통발과 올가미를 버린 것이고, 허회虛懷는 취함이나 집착을 여읜 것이고, 명심冥心은 이미 보지 않는 것이고, 유지遺智는 능증能證을 없앤 것이다. 만약 마음을 운용해서 도에 합한다면 도를 등지는 것이고, 만약 염念을 일으켜서 같음을 구한다면 같음을 잃는 것이며, 만약 옳음이 옳은 바가 되면 옳음이 없어지는 것이고, 만약 그름이 그른 바가 되면 그름에 빠지는 것이다. 다만 곧바로 무심하게 되면, 같음과 다름이 함께 공하고, 옳음[是]과 그름[非]이 모두 멸하고, 이 멸함 또한 멸함이고, 이 공함 또한 공한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말을 붙이고 자취로 인한 대대對待이거니와 만약 대대를 끊어서 단박에 일심一心을 깨닫게 된다면, 오직 계합해서 상응할 뿐 다시 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거자함車字函 제7권]

비록 미혹과 깨달음은 본래 같은 것이지만
시절에 다름이 있음을 어찌하랴.

또 말하였다.
“마음에서 그것을 궁구하면 진로塵勞도 보리菩提의 묘용妙用이지만, 그 지취[旨]를 잃으면 상락常樂이 생멸의 고륜苦輪이 된다. 그러므로 오염과 청정함이 다르지 않고 얻고 잃음이 나에게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마치 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것과 같고, 마치 사람이 취하거나 깨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뒤집는 것도 손이고 엎는 것도 손이기 때문이니, 요컨대 뒤집을 때는 엎는 때가 아니고 엎을 때는 뒤집는 때가 아니지만 둘 다 손을 여의지 않는다. 취하는 것도 사람이고 깨어나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나 취한 때는 깨어나는 때가 아니고 깨어난 때는 취한 때가 아니지만, 취함을 여의고서 깨어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취함에 즉해서 깨어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혹한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이다. 그러나 미혹할 때는 깨닫는 때가 아니고 깨닫는 때는 미혹한 때가 아니지만, 미혹과 깨달음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시절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 오직 반야般若의 전변轉變으로 때[時]에 임해서 일체인 것이지 스스로 천차만별하는 것은 아니다. 미혹하면 왜곡에 빠져서 찰나찰나마다 범부를 이루고, 깨달으면 본래 스스로 밝은 것이라서 마음 마음마다 성인을 증득한다.”[비자함肥字函 제5권]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달으면 공功이 생멸하지만
이미 깨닫고 나서 바야흐로 닦으면 그 쓰임이 헛되지 않다.
또 말하였다.
“학인學人이 본정本淨 화상에게 여쭈었다.
‘스승님께서도 수행하십니까?’
대답하였다.
‘나의 수행은 그대와는 다르다. 그대는 먼저 닦고서 나중에 깨닫지만, 나는 먼저 깨닫고서 나중에 닦는다. 만약 먼저 닦고서 나중에 깨닫는다면, 이는 공功이 있는 공이라서 그 공은 생멸로 돌아가지만, 만약 먼저 깨닫고서 나중에 닦는다면, 이는 곧 공 없는 공이라서 그 공은 헛되이 버려지지 않는다. 만약 지혜의 눈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찌 망령되게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하겠는가? 마치 눈이 밝은 자라면 끝내 구덩이 속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한 생에 판별할 수 있다 했는데,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치자함侈字函 제3권]


53) 지송품持誦品[28칙]

어찌 언교言敎를 보지 말라고 경계하겠는가.
단지 소가죽을 뚫을 듯이 볼까 걱정된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만약 종지[宗]를 밝히려 한다면 단지 순수하게 조사의 뜻만을 잡는 것이 합당할 텐데, 어째서 모든 불보살의 언교言敎를 아울러 인용해서 지남指南으로 삼는가? 이 때문에 종문宗門에서는 ‘새우를 빌려서 눈을 삼는 것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니, 다만 문자성인文字聖人은 이루어도 조사의 지위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한결같이 경전[敎]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 말씀을 상세히 궁구하지 않고 문자를 따라 해석을 하다가 부처님의 뜻을 잃고 초심初心을 저버릴까 염려하였다. 어떤 이가 언전言詮으로 인해 뜻[旨]을 얻어서 심경心境의 대치對治를 짓지 않으면서 곧바로 부처님 마음을 깨닫는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마치 약산藥山 화상이 평생 『열반경』을 보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과 같다. 당시 어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평소에 학인들에게 경전[敎]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화상 자신은 보십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단지 눈을 가리기 위해서다.’
학인이 물었다.
‘학인이 보아도 됩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그대가 본다면 소가죽도 뚫어야 하리라.’
또한 서천西天의 첫 번째 조사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처음 전하여서 초조初祖가 되었고, 차례로 전하여서 마침내 이 땅의 6조祖에까지 이르렀으니,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다. 이제 본사本師의 말씀을 인용해서 제자들을 훈시해서, 말씀으로 인해 도道에 나아가고 법法을 보아 종지를 알아 바깥을 향해 달리면서 구하지 않게 한다. 직접 부처의 뜻을 밝혀 종지를 얻고 곧바로 조사의 지위에 든다면, 누가 돈頓과 점漸의 문을 논하겠으며, 견성見性하여 원통圓通을 현세에 증득하면 어찌 전후의 지위를 표시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서로 어긋남이 있겠는가?
또한 서천의 28조祖와 이 땅의 여섯 조사, 나아가 마조 대사나 혜충 국사 등도 모두 이와 같아서 경론을 널리 통달하고 자기 마음을 원만히 깨달아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보일 경우는 모두 진실하게 인용해서 증명하였으며, 끝내 자신의 소견[胸臆]을 내서 망령되게 진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월이 면면히 흘렀어도 참다운 종풍은 타락하지 않았으니, 성인의 말씀으로 표준[定量]을 삼았으므로 삿됨이나 거짓으로 옮겨가기 어려웠고, 지극한 가르침을 지남指南으로 삼았으므로 의거함에 근거가 있었다. 그래서 규봉圭峯 화상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종宗의 시조는 바로 석가이시다. 경전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 뜻이니, 모든 부처의 마음과 말씀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달마達磨 대사가 강을 건너와서는 『능가경』으로 중생의 마음을 인증[印]하였다. 『능가경』에서는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종지로 삼고, 무문無門을 법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마음을 종지로 삼는 것은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고, 무문을 법문으로 삼는 것은 본성本性의 공함을 요달하는 것이니, 성품에는 모습도 없고 또한 문도 없다.
당시 어떤 선객禪客이 물었다.
‘어느 것이 부처님 마음입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담벽ㆍ기와ㆍ자갈 같은 무정無情의 사물도 모두 부처님 마음이다.’
선객이 말했다.
‘경전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경전에서는 담벽ㆍ기와ㆍ자갈 같은 무정의 사물을 여읜 것을 불성이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째서 모든 무정의 사물이 다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십니까? 마음과 성품은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미혹한 사람에겐 다르지만, 깨달은 사람에겐 다르지 않다.’
선객이 말했다.
‘또 경전과는 서로 어긋납니다. 경전에서는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佛性이 아니니, 불성은 항상하지만[常]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시니, 모르겠습니다만 이 뜻은 무엇입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말에 의거하고 뜻에 의거하지 않았다. 비유하면 추운 달에는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따뜻할 때에 이르러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는 성품이 엉겨서 마음을 이루고, 깨달을 때는 마음이 풀려서 성품을 이룬다.
그대가 정녕 무정無情의 사물은 마음이 아니라고 집착한다면, 경전에서도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응당 법계法界의 성품을 관찰하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었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제 그대에게 묻겠다. 무정의 사물은 삼계 안에 있는 것인가, 삼계 밖에 있는 것인가? 또 이것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만약 마음이 아니라면 경전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어야 하며, 만약 마음이라면 ≺무정은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대 스스로 경전을 어긴 것이지, 나는 어기지 않았다.’
만약 불승佛乘을 연구하고 보장寶藏을 헤쳐 찾으려면, 하나하나를 반드시 소화해서[消] 자기에게 돌아가게 하고 말마다 진심眞心에 깊게 부합하게[冥合] 해야 한다. 다만 뜻 위의 문자에 집착해서 말에 따라 견해를 내지 말고, 곧바로 말끝의 지취旨趣를 탐구해서 본래의 종지에 계합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스승 없는 지혜가 눈앞에 드러나고 천진天眞의 도가 어둡지 않으리라.
가령 『화엄경』에서는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임을 알면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데, 남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경전[敎]에는 도를 돕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초심初心이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상세하게 탐구하면 법의 이익이 가없으니, 이 때문에 자료를 모으고 선별하여서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녹자함祿字函 제1권]

상서롭도다. 경전을 보고서 감응한 영험靈驗은 너무나 많아서 산과 같은 붓과 바다 같은 먹으로써도 다할 수 없다. 이제 『금강경』과 『화엄경』의 두 경전의 몇 가지를 간략히 인용해서 아직 듣지 못한 자로 하여금 듣도록 한다.


허공에다 필사한 곳은 비를 피할 수 있었고
가옥이 모두 탔지만 경전은 훼손되지 않았네.

“익주益州 신번현新繁縣 왕계촌王季村에는 수隋나라 때 서생 순씨荀氏가 있었는데, 왕희지의 글씨를 잘 썼지만 자취를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마을 동쪽의 공중에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쓰고서 말했다.
‘이 경전을 모든 천天이 독송讀誦하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우레와 비를 만났는데, 경전을 쓴 땅은 한 방울도 젖지 않았다. 길이가 한 장(丈:10尺) 정도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매번 비가 올 때마다 나무꾼이나 목동이 모두 그 속으로 피했다.
무덕武德 연간에 이승異僧이 마을 사람에게 말했다.
‘이 땅의 공중에는 『금강경』이 있는데, 모든 천天이 위에서 보배 일산[蓋]으로 덮고 있으니 경솔하게 범해서는 안 된다.’
이때부터 그 둘레에다 울타리를 치고서 사람이나 가축이 밟고 다니는 것을 막았다. 매번 재일齋日이 오면 사방에서 모두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는데, 항상 하늘의 음악이 들렸다.”

“당나라 오군吳郡의 육회소陸懷素는 정관貞觀 20년에 실수로 불을 내서 가옥을 모두 태웠다. 경전함과 책표지축[標軸]에 이르기까지 모두 탔지만, 오직 『금강경』의 글자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를 보고 들은 이들 가운데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 신기함이 이와 같았다.”


무상無常의 대귀大鬼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고
금강역사는 은밀히 보호하고 지킨다.

“당나라 때 왕타王陀는 병으로 인해 매운 채소와 고기[血]를 끊고서 발심하여 『금강경』을 날마다 다섯 번씩 염송했다. 나중에 장질(瘴疾:풍토병)에 걸리자 뭇 귀신들이 오는 걸 보았는데, 왕타가 즉시 빠르게 염송을 하자 귀신이 듣고서는 모두 물러나 멀리서 말했다.
‘염라대왕의 명령으로 너를 쫓는 것이니, 경전을 염송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왕타가 즉시 염송을 쉬자, 귀신이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왕타는 곧 혼미해져서 기절을 했는데, 한 귀신이 와서 경전을 염송한 사람이라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염라대왕의 명령으로 임시 방면되었다.
왕타가 깨어나서 밤낮으로 염송하기를 쉬지 않자 마침내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경전을 지닌 공덕으로 수명이 90세이다.’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양종산梁鍾山 개선사開善寺 사문 지장智藏은 관상을 보는 사람에게 길흉을 점쳤는데, 그의 점은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가 지장에게 말했다.
‘수명이 31세까지입니다.’
당시 지장의 나이는 29세였는데, 이 짧은 과보를 듣고는 정성을 다해 수행하고 탐구하면서 『금강반야경』을 생을 마칠 때까지 수지受持하였다. 죽을 해가 다가오자, 그는 향기로운 물에 목욕을 하고 청정한 방에서 경전을 외우면서 죽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때 공중에서 말하였다.
‘그대의 지나간 세월 31년은 과보가 이르는 기간인데, 반야般若의 힘을 말미암아서 두 배로 연장되었다.’
지장은 나중에 산을 나섰다가 앞서 관상을 본 사람을 만났다. 그가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사문의 관상은 정말로 볼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수명이 65세가 되었다. 그러자 강 왼쪽22 강 왼쪽이라 함은 양자강 하류의 남쪽 지방을 말한다.
의 수행자든 속인이든 모두가 다투어서 이 경전을 염송하였다.”
“당나라의 위순魏恂은 감문위監門衛의 대장군이 되고서도 정성껏 『금강경』을 수지하였다. 당시 경사京師에는 채책蔡策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말했다.
‘처음에 저승 관청[冥司]에 이르렀는데, 사람을 잡아오지 못한다고 탓하면서 사자使者를 채찍질하려 하더군요. 그러자 사자가 말했습니다.
≺장군 위순은 『금강경』을 수지했기 때문에 선신善神이 옹호하고 있어서 잡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다른 사자를 보내서 다시 잡아 오려 했는데, 잠시 후에 돌아와서 보고하는데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명부의 관리가 ≺추적을 그만 두어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순은 이 말을 듣고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였다.”


남편을 구하려고 거대한 파도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토번으로부터 탈출시켜서 자식을 구할 수도 있었다.

“송연宋衍은 강회江淮 사람인데, 염철원鹽鐵院의 서수書手가 되어서 매달 2천을 받았다. 어떤 압강押綱하는 자가 글을 알지 못해서 송연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는데, 통관부서通管簿書의 월급은 8천이었다. 송연이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수개월이 걸려도 8천을 벌지 못하는데, 1개월 안에 이룰 수 있으니 얼마나 이익이오.’
아내 양씨楊氏는 매우 현명해서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뱃길이 험악해서 신변에 갑작스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연은 받아들이지 않고 떠났다. 그 곳에 이르자 과연 폭풍을 만나서 모든 배가 다 침몰했는데, 오직 송연만이 물로 들어가 볏짚 한 묶음을 잡고서 떠내려가다가 해안에 도달했다. 송연은 볏짚을 안고서 감사하며 말했다.
‘나의 미천한 목숨은 네가 준 것이다.’
살아나서도 볏짚을 버리지 않고 짊어지고 돌아오는데, 몇 리쯤 가다가 한 외로운 노파가 차를 파는 가게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볏짚을 풀어서 대강 햇볕에 말리다가 그 속에서 대나무통 하나를 얻었는데, 열어보니 『금강경』이었다.
노파가 말했다.
‘그대의 아내가 그대에게 온 뒤로 성실하게 이 경전을 필사해서 쑥대머리가 되도록 예념禮念했기 때문에 능히 그대를 구할 수 있었다오.’
송연은 감읍하였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를 보자 부끄러워하면서 사과를 했다.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송연이 자초지종을 상세히 말하자, 양씨가 이상하게 여겼다. 송연이 말했다.
‘경전을 어떻게 기록한 것이오?’
‘필사할 때 붓을 잡은 자가 나한의 몇 글자를 잘못 써서 선禪 화상에게 청하여 첨가하여 넣었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운지 점과 획이 지나치게 짙었는데, 요 10여 일 전에 잃어 버렸는데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경을 펼쳐 살펴보니 말한 대로였다. 송연은 오열하면서 아내에게 절을 하고는 더욱더 정진하고 예송禮誦하였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서 강가의 노파에게 사례를 하려고 그 곳을 물었더니 사람과 가게가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하였다. 바로 신이 화현한 것이었다.
몇 해가 지나서 상국相國인 정공鄭公이 동도유수東都留守가 되어서 송연과 그의 아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직武職의 일과 월급 5천을 주고는 그 경전을 구했는데, 지금까지 정씨가 존숭하고 받든다.”
“당나라 영태永泰 초에 풍주豊州의 봉화대를 지키는 군대가 서쪽 토번에게 함락되었다. 스스로 이에 공을 세우고 더욱 토번의 본영과 친근해진 이가 있었다. 토번의 대장[贊普]이 아들처럼 사랑했는데, 그가 일을 마치자 마침내 본영의 깃발을 잡게 하고는 낙(酪:요쿠르트)나 치즈류와 고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먹지 않았다. 토번의 대장이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자주 꿈에 보입니다.’
토번의 대장은 어진 사람이라서 이 말을 듣자 연민의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그를 장막 속으로 불러 말했다.
‘토번의 법은 엄해서 놓아 돌려보낸 일이 없었다. 내가 너에게 힘센 말 두 필을 어느 길에다 풀어 줄 테니, 돌아가서도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봉화대를 지키던 군인이 말을 얻어서 너무 힘껏 달린 나머지 두 마리가 다 지쳐서 죽고 말았다. 결국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힘껏 뛰었지만 발을 찔려서 자갈밭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어떤 물건이 천천히 그의 앞을 지나가기에, 문득 집어서 발을 싸맸더니, 발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시험 삼아 달려보니 전처럼 달릴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셨다. 어머니는 슬픔과 기쁨에서 말했다.
‘너를 한 번 잃은 이래로 나는 오로지 『금강경』을 염송하였다. 너를 보기를 기도했는데, 오늘에야 그 서원이 이루어졌구나.’
그리고는 경전을 가져와 보니 몇 폭이 잘려 나갔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들이 자갈밭에서 발을 다쳤다고 하자 어머니가 풀어 보라 했다. 상처는 이미 나아있었고 상처를 싸맨 종이는 바로 어머니께서 잃어버린 경전이었다. 특별히 성스러운 것이 이와 같았다.”

불법을 멸하니 그 죄가 깊고 무거우며
공덕을 간직하니 그 복이 가볍지 않다.

“수나라 개황開皇 중 태부시승太府寺丞 조문창趙文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염라대왕의 처소로 이끌고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평생 동안 지내면서 어떤 복업福業을 지었는가?≻
≺집이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데, 어찌 공덕을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금강반야경』을 수지했을 뿐입니다.≻
염라대왕이 이 말을 듣고 합장하면서 찬탄해 말했습니다.
≺착하다, 공덕이 아주 크구나. 즉시 놓아 보내서 다시 살려 보내라.≻
사자는 나를 데리고 남문에 갔는데 맨 처음 주나라의 무제武帝가 보였습니다. 문 옆의 방 속에서 세 겹으로 칼을 쓰고 사슬에 묶인 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이미 집에 돌아가게 됐으니, 나를 위해 수나라 황제에게 말해 주시오. 나의 모든 죄를 다 갚고 싶어도 오직 불법을 멸한 죄는 무거워서 아직 다 갚을 수 없으니, 공덕을 지어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해 주시오.≻
그리고 문 밖을 나서니 커다란 똥구덩이가 보였는데,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이 위로 나왔다. 누구냐고 묻자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이다. 죄를 아직 다 갚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문창은 지상으로 돌아와서 살아나게 되었다. 마침내 그 일을 아뢰니, 황제는 천하에 칙령을 내려서 주나라 무제를 위해 『금강경』을 돌리고 대공양을 마련했다. 이 이야기가 『수사隋史』에 편입되었다.”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천하에 칙령을 내려 불당 중에서 작은 것은 없애서 공덕을 큰 절로 옮기라 했다. 믿지 않는 무리들은 소문을 듣고 없애거나 훼손하였다. 예주豫州 신식령新息令인 이허李虛는 술을 많이 마시고 살생을 좋아해서 행하는 일이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당시 불옥佛屋을 아껴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히 취중에 엄한 법에 분노하여 계界 안에 보존하게 했는데, 비록 보존하도록 했더라도 마음으로 위하지는 않았다. 일 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가 다시 소생해서 말했다.
‘염라대왕[閻王]이 아직 앉기도 전에 먼저 계단 앞의 판관을 보았는데, 신식의 관리였습니다. 그 관리가 말했습니다.
≺장관長官께선 평생 동안 오로지 살생하는 마음으로 살아서 죄와 복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응당 과보를 받을 텐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허가 크게 두려워하면서 구원을 청하자 관리가 말했습니다.
≺작년에 불당을 철거할 때 장관께선 불당을 계界 안에 홀로 두게 했으니, 이 공이 하늘에 가득할 것입니다.≻
잠시 후 관리에 이끌려서 이허가 염라대왕을 뵈었는데, 염라대왕은 이명부李明府의 선악부善惡簿를 찾아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읽으면서 말하였다.
≺이허는 일찍이 양을 죽여서 살을 벤 적이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했습니다.
≺어째서 남의 살을 베었는가?≻
이허가 답했습니다.
≺불당을 부수고 불상을 훼손하라는 칙령이 있었지만, 홀로 제 계界 안에 두었으니 죄를 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덮어 버릴 수 없다. 복의 장부가 천당에 있다.≻
검사관이 와서 읽어보고서 말했습니다.
≺과연 일생 중의 죄를 감할 만하구나. 30년을 연장시켜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하라.≻
말을 마치자, 죄의 장부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송환하니 마침내 다시 소생했습니다.’ ”[이상 9칙은 『금강감응전金剛感應傳』에 나온다.]


이미 화엄을 염송하니 무릇 으뜸의 성聖이요,
손 씻다 떨어진 물방울 때문에 개미가 천상에 태어났다.

“영휘永徽 연간에 태백산에 두 승려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도상道祥과 혜오慧悟라고 하였다. 도상은 『열반경』을 수지했고, 혜오는 『화엄경』을 수지했는데, 갑자기 어떤 거사가 예를 드리면서 한 승려에게 재齋를 청하였다. 승려가 말했다.
‘두 사람 중 누구를 청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거사가 말했다.
‘화엄의 스님을 청하겠습니다.’
혜오는 즉시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거사가 혜오를 옷 위에 앉힌 뒤 눈을 감게 하니, 단지 귀로 솔솔 부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땅에 내려놓아 눈을 떠보니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였다. 오직 화려하게 장엄된 집만이 보일 뿐이었다. 혜오를 법당으로 안내하여 예불을 하게 하였는데, 혜오가 예불을 마치자 홀연히 5백 명의 승려가 허공을 날아왔다. 혜오는 마침내 아래 자리에 앉았다.
거사가 말했다.
‘오늘의 재齋의 의도는 스님 한 분에게 있습니다. 비록 5백 명의 나한이 있지만 임시로 청했을 뿐입니다. 스님께선 화엄을 수지하고 계신데, 이는 부처님 경계이니, 어찌 소성小聖의 아래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혜오를 이끌어 성스러운 무리들 위에 앉게 했다.
재齋가 파하자, 거사는 한 동자를 시켜서 돌려보내라고 했다. 동자가 혜오에게 입을 열라고 청한 뒤 입 속으로 날아 들어가니, 혜오의 몸이 즉시 공중으로 떠올랐는데, 공중에서 도상에게 말했다.
‘신선이 재齋를 청해서 마침내 신통을 얻었다네. 이제 잠시 금궐(金闕:天帝의 궁전)에 가고 싶네.’
그리고는 공중으로 올라서 떠나갔다.”

“옛날에 삼장三藏을 익힌 천축의 승려가 경사京師에 왔다. 그 때 장공藏公은 아직 동자였는데, 삼장에게 머리 숙여 절하면서 보살계 받기를 청하였다. 대중이 삼장에게 말했다.
‘이 동자는 화엄을 독송할 뿐만 아니라, 그 뜻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삼장이 경탄하며 말했다.
‘화엄 일승一乘은 모든 비장秘藏 중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그 뜻까지 통했음에랴. 만약 어떤 사람이 「정행품淨行品」 하나만이라도 염송한다면, 이미 보살의 정계淨戒를 구족한 것이니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
서역 전기西域傳記에는 어떤 사람이 『화엄경』을 전독하면서 손을 씻다가 물방울이 떨어져 개미 한 마리가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고 뜻까지 통달했음에랴. 이 아이는 나중에 반드시 중생을 크게 요익케 하리라.’ ”
공을 쌓음으로써 눈썹과 수염 떨어진 액난을 구할 수 있었으며
게송 하나로 능히 지옥의 쓴 고통을 멈출 수 있었다.

“천수天授 2년 증주曾州의 목재牧宰가 장공藏公에게 『화엄경』을 강의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바름과 삿됨을 논하게 되었다. 그때 젊은 도사가 곁에 있다가 도관[觀]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강의하는 승려가 도존道尊을 비방합니다.’
관주觀主는 매우 노해서 대중들을 거느리고 장공이 강의하는 곳으로 왔다. 만면에 노기를 띠고 입으로는 거친 말을 하면서 장공에게 말했다.
‘단지 스스로 경전만을 강의할 것이지, 어째서 도문道門의 일을 논합니까?’
장공이 말했다.
‘빈도는 스스로 화엄을 강의했을 뿐 다른 것을 논하거나 훼손하지 않았소.’
관주가 물었다.
‘모든 법은 다 평등합니까?’
장공이 말했다.
‘모든 법은 평등하기도 하고 평등하지 않기도 합니다.’
관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법이 평등하고 어떤 법이 평등하지 않습니까?’
‘모든 법은 두 종류를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진제眞諦이고 둘째는 속제俗諦입니다. 만약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며, 자自도 없고 타他도 없으며, 청정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니, 일체를 모두 여의기 때문에 평등한 것입니다. 만약 속제의 입장에서 보면, 선함도 있고 악함도 있으며, 존귀함도 있고 비천함도 있으며, 삿됨도 있고 바름도 있으니, 어찌 평등을 얻겠습니까?’
도사는 말이 궁해져서 대답할 수 없자, 오히려 성을 내면서 풀려고 하지 않았다. 여래의 처소에서 독설을 해대고는 돌아갔는데, 하루 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얼굴을 씻다가 눈썹과 머리털이 모두 떨어지고 온몸에 종기가 났다. 그 때서야 뉘우치는 마음이 생기면서 삼보에 귀의하고 공경하였으며, 장공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면서 『화엄경』을 1백 번 수지 독송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열 번도 채 되지 않아서 홀연히 감응하여 눈썹과 머리털이 다시 나고 몸의 종기도 단박에 나았다.”
“옛날 경사京師의 곽신량郭神亮은 죽었다가 7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했다.
‘사자가 쫓아서 평등왕의 처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죄와 복을 묻고 나서 지옥으로 보내졌다. 그 때 한 승려를 보았는데, 그는 ≺내가 이제 그대를 지옥의 고통에서 구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음의 게송 하나를 염송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삼세의 일체 부처를
만약 사람이 알고 싶다면
응당 이렇게 관해야 한다.
마음이 모든 여래를 짓는다고.’

곽신량은 지극한 마음으로 이 게송을 여러 번 외웠다. 그러자 곽신양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죄를 받은 자 수십만 명이 모두 고통을 여의고서 지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반드시 알라. 이 게송은 능히 지옥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때 장藏 법사가 말했다.
‘『화엄경』 「십행품」에서 나온 것이다.’
진塵 율사도 찬탄하면서 말했다.
‘겨우 게송 하나를 들었는데도 천만 인의 고통을 해탈시켰는데, 하물며 전부를 수지독송하고 깊은 뜻을 통달했음에랴.’ ”


위령威靈은 아수라[天敵]를 항복시킬 수 있고
속된 눈이 어찌 성인과 범부를 가릴 수 있으랴.

“성력聖曆 연간에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미가彌伽라고 하였다. 비록 구족계는 아직 받지 못했지만, 몸과 뜻이 청정하여 오로지 『화엄경』을 독송했다.
하루는 제석천이 사자를 보내서 미가를 청하자, 미가가 말했다.
‘천제가 어떤 인연으로 명을 내렸습니까?’
사자가 말했다.
‘제석천은 아수라와 수시로 싸웠는데, 법력의 가피加被를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설사 나한羅漢이라도 이 일은 분별하지 못할 것이고, 오직 법사만이 오로지 화엄을 수지해서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될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가 청을 받아들인 뒤 눈을 감자, 잠깐 사이에 문득 천궁天宮에 이르렀다. 곧이어 궁전에 들어가서 『화엄경』을 독송해달라고 청하자, 보대寶臺에 앉아서 공중으로 날아가 적의 처소로 향하였다. 아수라의 군대가 이 위령威靈을 보고는 두려워하면서 연뿌리 구멍 속으로 도망쳤다.
제석천은 기뻐하면서 스님이 궁전에 돌아오자 일곱 가지 진기한 보배로 공양을 베풀어 맞이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스님에게 말하였다.
‘만약 장생長生의 약이 필요하다면 마땅히 바치겠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애착을 끊고 출가한 것은 위없는 도[無上道]를 구하기 위함이지, 세간의 진귀한 보배나 장생의 일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석천이 예배드리면서 말했다.
‘보리菩提를 이루실 때 부디 제도를 해주십시오.’
그리고는 사자를 시켜서 송환토록 했다.”

“상원上元 연간에 낙주洛州 경애사敬愛寺에 율승律僧이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다가 정주鄭州 지방에서 날이 저물자 객점에 투숙했다. 뒤이어 어떤 승려가 왔는데,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둘 다 편안히 방에 묵었는데, 나중에 온 승려가 주인에게 말했다.
‘빈도는 피로하고 배가 고프니, 술 세 홉과 고기 한 근을 파시오.’
그리고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서 지친 몸을 다스렸다. 이를 본 율사律師가 화를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몸에 법복을 걸치고서 방자하게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그러나 그 승려는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물을 달라고 해서 입을 헹구고 몸을 단정히 하고 결가부좌하였다. 그리고는 범음梵音을 발하면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외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에서부터 ≺적멸도량寂滅道場≻에 이르자, 그 승려의 입가 양쪽에서 광명이 일어나면서 방 안을 비추었다. 시간이 3경更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경전을 독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광명이 더욱 치성해졌다. 여섯 번째 책에 이르자, 즉시 그만 두면서 광명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승려가 눕자 곧 날이 밝았다. 율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성현을 경솔하게 비방한 잘못을 참회했고, 죄를 소멸해주길 염원하였다.”[이상 6칙은 『화엄감응전華嚴感應傳』에 나온다.]


수지독송해도 영험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종자를 심어도 이지러짐이 있다면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묘비소문경妙臂所問經』에서 말하였다.
“수행자로서 지니고 외워도 성취를 얻지 못하는 자는 비유하면 마치 종자를 심는 것과 같다. 땅에 맞고 시기에 맞게 심고 비와 바람에 허물이 없고 관개灌漑에도 잘못이 없다면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어서 성숙하게 되지만, 종자를 시기에도 맞지 않고 적당한 땅에도 심지 않는다면 저 싹과 줄기가 제대로 자라날 수 없으니, 하물며 가지와 잎과 열매이겠는가?
지니고 외우는 수행자가 만약 법에 의지하지 않고 또 온갖 공양에 대해서도 청정하지 않고 일찍이 처소가 정결한 적이 없으며, 그 독송하는 진언眞言과 문자에서도 혹 빠지거나 더하고, 호흡에 이르러서도 잘못되어 바르지가 않다. 따라서 어느 땅에서나 현전하지 못하니, 성취를 얻지 못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팔자함八字函 제2권]


너무 많은 언교言敎를 인하면 이익이 이익이 아니고
진실로 중생을 위한다면 정근이 정근이 아니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문수사리文殊師利가 근수勤首 보살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라서 중생이 볼 수 있는데, 어째서 모든 번뇌의 속박을 다 끊고도 출리出離를 얻지 못하여 어떤 경우는 이익이 있고 어떤 경우는 이익이 없는가?’
근수 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했다.

한량없는 온갖 허물과 악을
만약 없애서 소멸시키려 한다면
마땅히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용맹하게 항상 정진해야 한다.

마치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도 자주 쉰다면
불의 기세도 그에 따라 멈추어 없어지듯이
게으르고 나태한 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법수法首 보살에게 물었다.
‘가령 부처님께서도 설하셨듯이, 만약 어떤 중생이 정법正法을 수지한다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는데, 어째서 수지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법수 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했다.

마치 사람이 물에서 표류할 때
익사를 두려워하다가 갈증으로 죽는 것처럼
법에 대해 수행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네.

마치 사람들이 남의 보배는 헤아려도
자기 자신에겐 반푼어치도 없는 것과 같으니
법에 대해 수행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네.”[평자함平字函 제3권]


불법佛法이 어찌 과보의 증득이 없지 않겠는가?
선근善根이 성숙하면 다른 곳에 태어난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불법이 금생에 과보를 얻는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수행자가 능히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하고 차례대로 수행한다면, 과보를 얻지 못함이 없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이 뛰어난 의사의 처방에 따라서 다스리는 법에 화합한다면 낫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차례대로 수행하지도 않고 계율을 파괴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는 것이지, 법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시 또 아직 모든 도를 얻지 못하여 금생엔 비록 열반을 얻지 못하더라도 후생에는 복과 즐거움을 받게 되며, 늦든 이르든 반드시 열반을 얻게 돼서 끝내 헛되지가 않다.”[건자함建字函 제2권]


법은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보를 받지 않으니
업이 소멸하자 빗자루를 외워도 단박에 마음을 밝혔다.

『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에서 말하였다.
“주리반특朱利槃特은 도道를 배운 지 24년이 지나서야 5언言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숙세에 5백 명의 부처님을 뵙고서 온갖 경전을 다 통달했지만 경전의 도道를 닫아 갈무리하고는, 기꺼이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병이 들어서 24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자, 그때서야 후회를 하면서 사람을 불러 가르쳤다. 바로 이 한 가지 복이 있었기 때문에 5언을 안 것인데, 하물며 충분히 사람을 가르치는 것임에랴. 그 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무자함無字函 제4권]

또 『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주리반특이 있었다. 세존께서는 빗자루를 잡아서 쓸게 하고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글자를 외워라.’
이때 주리반특은 쓰는 것을 외우게 되면 문득 빗자루를 잊어버리고, 빗자루를 외우게 되면 다시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며칠 동안 외운 후에 이 ‘빗자루로 쓴다’는 것을 다시 ‘더러움을 없앤다’고 이름 붙였다.
주리반특이 생각했다.
‘없앤다는 것은 무엇이고,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더러움이란 재ㆍ흙ㆍ기와ㆍ돌이며, 없앤다는 것은 깨끗하게 함이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나를 가르쳐서 나로 하여금 이 뜻을 사유하게 하셨다. 내 몸에도 역시 티끌의 더러움이 있으니 나 스스로 비유를 짓겠다. 결박은 더러움이고 지혜는 없애는 것이니, 나는 이제 지혜의 빗자루로 이 결박을 쓸어버릴 수 있다.’
그리하여 해탈지를 얻으니,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서서 아라한阿羅漢을 증득하였다.”[사자함斯字函 제1권]
부끄럽도다, 소라와 고동도 오히려 경전을 알아보는데
불쌍하도다, 가장 신령한 인간이 부처님을 지나치다니.

진헐眞歇 선사가 『금강경』 발문에서 증험하여 말했다.
“옛날에 왕대王待가 배를 만들어서 홀로 한강漢江을 건너다가 세찬 풍랑을 만나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 결국 평소에 독송하던 『금강경』을 물 속에 던지니,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나중에 진강鎭江에 이르러서 배 꼬리를 보니, 백 보 밖에서 어떤 한 물건이 때 없이 들쑥날쑥 하는 듯했다. 어부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여 보니, 무수한 소라와 고동이 둥글게 공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잘라보니 겉은 젖어 있었으나 속은 말라 있었다. 속을 들여다보자 바로 어제 던진 『금강경』이었는데, 터럭만큼도 손상된 곳이 없었다.
왕대가 찬탄하며 말했다.
‘한강은 구강九江에서 만나 남쪽으로 서서히 수천 리를 흐르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들이 왕래하였다. 그러나 이 경전을 지니고서 저쪽에서부터 이쪽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소라와 고동은 한 번 보고도 버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명예를 위한 것이겠는가, 이익을 위한 것이겠는가, 재물을 위한 것이겠는가, 색色을 위한 것이겠는가? 장차 반드시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기 위한 것이리라. 오호라, 만물 가운데 사람만이 가장 신령하지만,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 경전을 듣지 못하고, 들어도 보지 못하고, 보아도 믿지 못하고, 믿어도 명예ㆍ이익ㆍ재물ㆍ색色에 빠져서 능히 수지受持하지 못하는 자라면 오히려 소라와 고동만 못한 것이니, 그 누가 사람을 가장 신령한 자라고 하겠는가?’ ”

『해태경자경懈怠耕者經』에서 말하였다.
“어떤 농부 한 사람이 부처님께서 지나가시는 걸 보았다. 마음 속으로 비록 기뻐했으나, 부처님께 예배하러 가지는 않고 이렇게 말했다.
‘밭가는 걸 아직 끝내지 못했고 씨앗도 아직 뿌리지 못했다.’
만약 부처님을 뵙는 데 한가하기를 기다린다면, 부처님을 만나기가 어렵다. 나태함이 이와 같아서 이미 여섯 분의 부처님을 뵙고도 지나쳐서 제도 받지 못한 자이니, 이는 곧 금생만이 아닌 것이다.[석가에서 미륵까지 바야흐로 두 분의 부처님을 뵙고 과거 여섯 부처님을 지나쳤으니 얼마나 많은 겁劫인지 모른다.]”[심자함甚字函]


반드시 알아야 한다, 경전은 곧 사서(赦書:용서)의 책이니
철위鐵圍와 철봉鐵棒도 벗어날 수 있다.

불일佛日 선사의 보설普說에서 말하였다.
“임任 관찰사가 마음이 석씨(釋氏:부처님)에게 기울어서 선지식을 두루 참배하고는 매번 찬탄하며 말했다.
‘나는 다행히 사람 몸을 얻었지만 그 형체가 온전하지 못하고, 아울러 낳아준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생을 생각해보니 남을 업신여겨서 이러한 보응報應을 초래했다.’
그리고는 휴일이 되면 사가私家로 돌아가서 인사人事를 끊고,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예배드리고는 피를 내어 『화엄경』 한 부를 필사하기를 서원했다. 한 글자마다 세 번씩 절하면서 내생에는 낳아준 부모를 알아보기를 염원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어떤 손님이 임 관찰사를 방문했는데, 그가 늦게 나가자 손님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람이 찾아 왔는데, 어찌 이토록 나태할 수 있단 말이오?’
임 관찰사가 웃으며 말했다.
‘집 안에서 한 권의 사서赦書를 필사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그 까닭을 묻자 곧 진실을 토로하면서 경전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염라대왕[閻老子]의 눈앞에서 쇠구슬을 삼키고 쇠막대기를 먹는 것을 사면 받는 책입니다.’
손님은 그 말을 듣고서는 머리를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임 관찰사처럼 경전을 필사했다.”


미혹하면서 천 개의 글을 외운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한 구句라도 확연히 밝힌다면 곧 공功을 이룬다.

『출요경出曜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뜻을 알지 못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차라리 한 구라도 이해해서 들으면 도道를 이룰 수 있다.”[평자함平字函 제5권]



이와 같이 설하지만, 경전을 보면서도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수고일 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경전을 보는 것이 어찌 이익이 없겠는가? 다만 글줄이나 따르고 글자나 헤아리면서 여러 번 읽는 회수나 탐하는 것을 공으로 삼을 뿐 그 뜻을 궁구하지 않을까 걱정이니, 그 뜻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를 이루겠는가?


우리 부처님께선 현묘함[玄妙]을 이야기하고 설했지만, 중생의 근기에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어서 끝내 그 뜻을 궁구할 수 없다면 어찌하는가?


뜻을 비록 밝히지 못하더라도 성실함이 지극하다면, 충분히 위기를 돕고 이익을 늘릴 수 있어서 도道에 들어가는 시초가 된다. 만약 금생에 근기가 둔해서 이취理趣를 밝히지 못한 자라면, 대개 전전생前前生 중에 경전을 손에 넣지 못하였거나 살펴본 적이 없는 것이니, 지금 어찌 억지로 밝힐 수 있겠는가? 다만 분수에 따라 보아서 최초의 종자를 뿌려놓은 것이, 곧 후세의 싹이 되어서 차례대로 과果를 맺고 부처를 이루는 데 분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선재善財와 용녀龍女 같은 고금의 선지식이 재능이 출중해서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친 것이겠는가? 대개가 이미 여러 생에 걸쳐 힘을 들인 것이니, 어찌 하루아침에 단박에 능히 성취해서 갖춘 것이리오.”


보배인들, 어두워서 등불이 없다면 어찌 알 수 있을 것이며
불법佛法은 비록 슬기롭더라도 능히 요달할 수 없다.

『화엄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어둠 속에 있는 보배를
등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불법佛法이라도 남이 설해주지 않으면
비록 슬기롭더라도 능히 요달할 수 없다.[평자함平字函 제6권]


옛 사람은 법을 위해서 몸을 바쳤으니
지금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가, 공안이 나타나 있으니.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법을 구하셨던 분들을 우러러 생각컨대 석가문釋迦文 등은 몸을 큰 불에 던졌고, 깊은 숲 속에서 발을 들고 계셨으며 뼈를 부수고 몸을 찢었으며, 가죽을 벗기고 피를 흘렸다. 나아가 상제常啼는 동쪽에서 청했고, 선재는 남쪽에서 구했으며, 약왕藥王은 손을 태우고, 보명普明은 머리를 베었다. 이들은 모두 은혜를 알고 덕을 갚은 사람이요, 법을 위해 몸을 버린 대사이다. 이제 후학에게 권하노니, 간절하고 자중하는[殷重] 마음을 낼지언정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면서 헛되이 세월[光景]을 버리지 말라.”[거자함車字函 제4권]

또 말하였다.
“원종圓宗을 만나기 힘든 것은 마치 겨자를 바늘 끝에 던져 꿰는 것 같고, 정법正法을 듣기 어려움은 마치 눈먼 거북이 나무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다. 만약 일찍이 대승의 종자[乘種]를 훈습했거나 오랫동안 선근善根을 쌓거나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글을 만나서 친히 얻고 전하여 받겠는가?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가르침[敎]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면서 금을 저자에서처럼 다 내놓기도 하고 혹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으면서 눈이 쌓인 뜨락에 서 있기도 하였다. 또 금은 몸 밖의 부질없는 재물이거늘 어찌 지극한 가르침[至敎]과 견주겠으며 생명은 한 기간[一期]의 업보이거늘 어찌 진리를 보여주는 글[眞詮]과 동등하겠는가?”[부자함富字函 제6권]

이익이 지극히 위험할지라도 오히려 구할 수 있고
도가 이미 마음에 있으니 어찌 얻기 어려우리오.

또 『관자管子』를 들어서 말하였다.
“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비록 천 길이나 되는 산이라도 오르지 못할 것이 없고, 깊은 샘의 밑바닥에 있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다. 장사꾼이 거래를 하는데 배나 되는 길을 다니면서 밤을 낮 삼아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으면 이익이 앞에 있을 것이요, 어부가 바다에 나아가되 바닷물이 백 길이라도 파도에 부딪치며 들쑥날쑥하면서 밤이 지새도록 나오지 않으니 이익이 물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세간에서 수고롭게 이익을 구하는 뜻일 뿐이다.
만약 지극한 도를 굳건하게 구하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피로를 잊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으며, 가슴을 비우고 생각을 맑히며 밀실에 정좌하여 단정히 손을 마주하고 정신을 편안히 하면 이익은 마음에 있다. 가령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구하여서 얻지 못함이 없는데, 하물며 도가 마음에 있다면 믿음으로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훈계하는 말을 알아서 잠시라도 버리지 말지니, 뼈에 새기고 허리띠에 써놓아 정신에 물들이고 식識에 훈습[熏]해야 한다. 그러기에 초나라의 장왕莊王은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신숙申叔의 한 마디 말을 중시했으며, 범헌范獻은 1만 묘畝의 농토를 천하게 여기고 뱃사공의 짤막한 말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집안을 이루고 나라를 세움에도 오히려 보배를 경시하고 말을 소중히 여긴 것인데, 하물며 종경宗鏡 중에서 언하言下에 무생無生에 계합하고 들으매 대도大道를 이루는 것이 어찌 경솔함과 오만을 용납하겠는가?”[위의 권과 같다.]

비록 대장경의 가르침을 유출했지만
어찌하랴, 원래는 한 글자도 말하지 않은 것을.

『능가경』에서 말하였다.
“대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나는 어느 날 밤에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었고, 나아가 어느 날 밤에 열반涅槃에 들기까지 그 기간 동안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고 또 과거에도 설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설하지 않을 것이니, 설하지 않음이 부처의 설함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비밀의 뜻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두 가지 비밀의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무엇을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자증법自證法과 본주법本住法이다.
무엇을 자증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하신 것을 나도 똑같이 증명해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마음을 깨달은 것으로 언설의 모습을 여의고 분별의 모습을 여의고 이름[名字]의 모습을 여읜 것이다.
무엇을 본주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법의 본성本性은 마치 금이 광석에 있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든 세간에 나오지 않든 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법계法界ㆍ법성法性이 모두 다 언제나 머무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광야를 가다가 옛 성으로 향하는 바르고 평탄한 옛 길을 보고는 즉시 따라 들어가서 쉬며[止息] 노니는 것과 같다.
대혜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행인이 길과 성 안의 갖가지 물건을 만들었는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야, 나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진여가 항상 법성法性에 머무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처음 성불할 때부터 열반에 이를 때까지 그 기간 중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거듭 게송을 설하셨다.

어느 날 밤에 정각正覺을 이루고
어느 날 밤에 반열반般涅槃에 들었지만
이 둘 사이에
나는 도무지 설한 것이 없네.

자증법과 본주법 때문에
이 같은 비밀의 말을 지은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사자함四字函 제4권]


54) 당범품唐梵品[66칙]

불타佛陀와 보살에게 귀의하고
나아가 성문과 팔부천八部天에 귀의합니다.
나무南無[이곳 말로 귀명歸命이니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법에 의거하면 남쪽이 이离가 되어 이중허离中虛이니, 허무虛無는 곧 밝음이다. 마음을 표현하여 허무의 이치를 요달하는 것이 곧 심지心智의 밝음이기 때문이다. 『합론』에 나온다.]
불佛[이곳 말로는 각覺이니 『합론』에 나온다.]
바가바婆伽婆[또는 박가범薄伽梵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곳 말로 온갖 덕을 성취함이다. 모두 부처님의 별칭이다. 계자함階字函의 음에 나온다.]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는 이곳 말로 능能이고, 모니는 이곳 말로 적묵寂黙이다. 곧 마음의 체體가 본래 적정한 것이다. 변자弁字함의 음에 나온다.]
미륵彌勒[이곳 말로는 자씨慈氏이다. 진실한 자비로 중생[物]에 상응한다.]
아미타阿彌陀[이곳 말로 무량수無量壽이니, 즉 진여의 성품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가지는 부자함富字函에 나온다.]
보리살타菩提薩埵[살타는 진나라 말로 중생이다. 보리를 구했으나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보리살타라고 이름한다. 이곳에서는 간략함을 좋아해서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형자함形字函]
마하살摩訶薩[마하는 이곳 말로는 대大이니, 곧 대보살大菩薩이다. 입자함立字函]
수다원須陀洹[이곳 말로는 예류預流이니, 예비 성인의 무리이다. 천상과 인간 가운데 일곱 번 다시 태어나야 괴로움의 끝을 다하는 경계를 얻는다.]
사다함斯陀含[이곳 말로는 일래一來이다. 말하자면 한 번 천상에 가고 한 번 인간에 오고 나서 문득 적멸寂滅을 취하는 것이다.]
아나함阿那含[이곳 말로 불환不還이다. 단지 이에 멸도滅度해서 다시는 환생하지 않는 것이다.]
아라한阿羅漢[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도적을 죽이는 것이고, 둘째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고, 셋째는 응당 공양을 받는 것이며, 넷째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번뇌의 도적을 죽이고, 모든 악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공양을 감당하는 것이며, 다시는 삼계三界의 생生을 받지 않는 것이다.]
건달박健達縛[또는 건달바乾闥婆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는 음악의 신이다.]
아소락阿素洛[또는 아수륜阿須倫이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는 아수라阿修羅이다.]
갈로다揭路茶[또는 가루라迦樓羅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는 금시조金翅鳥이다.]
긴나락緊捺洛[또는 긴나라緊那羅라고도 한다. 노래의 신인데, 머리는 말의 머리를 하고 있다. 또는 인비인人非人이라고도 한다.]
모호락牟呼洛[또는 마후라가摩睺羅伽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는 배로 기어 다니는 이무기 신이다.]
약차藥叉[또는 열차閱叉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는 야차夜叉다. 이상의 열 가지는 변자음弁字音.]
필추苾蒭[향기로운 풀로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은 출가인이다. 일자음日字音]
승가僧伽[이곳 말로 중衆이다. 지금은 간략히 승僧이라 칭하니, 화합하기 때문이다. 『요람』에 나온다.]
우바새優婆塞[또는 오바삭가鄔波索迦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는 근사남近事男이다. 우바이優婆夷는 오바사가烏波斯迦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는 근사녀近事女이다. 이른바 세속에 있으면서 3보寶를 가까이 하는 것이니, 수명이 다하도록 5계를 지닌다. 일자음日字音]
보특가라補特伽羅[이곳 말로는 삭취취數取趣이니, 이른바 자주자주 생사를 왕래하는 것이다. 우자음虞字音]
마납바摩納婆[이곳 말로는 연소정행年少淨行이다. 상자음翔字音]
달서達絮[이곳 말로는 불법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다.]
멸례차蔑隷車[이곳 말로는 완전히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이상의 두 가지는 거자음巨字音]
천제闡提[이곳 말로는 착한 마음이 없는 것이다. 화자음火字音]
전다라旃茶羅[이곳 말로는 악을 집행함이니, 마구 죽이는 자다. 여자음麗字音]
보갈사補羯娑[똥이나 오줌, 죽은 시체 같은 천한 종류를 담당하는 자다. 수자음水字音]
찰리종刹利種[이곳 말로 수전주守田主인데, 이곳 국왕의 칭호다]
바라문종婆羅門種[이곳 말로는 범지梵志이다. 악한 법을 멀리 여의고서 산으로 들어가 도를 구한다.]
거사종居士種[집에 있으면서 업을 닦는다.]
수다라종首陀羅種[기능과 연예 생활을 한다. 이상의 네 종류는 혼돈의 첫 시기에 하나였던 것이 네 가지 성姓으로 나뉜 것이다. 이자함履字函]


경전에 갖춘 인연은 십이분十二分이고
닦아서 증득하는 보리는 여러 가지 문이 있다.

수다라修多羅[또는 소달람素怛纜이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 계경契經다.]
기야祇夜[이곳 말로 중송重頌이다.]
폐가란나弊迦蘭那[이곳 말로 수기受記다.]
가타伽陀[이곳 말로 부중송不重頌이다.]
우타나優陀那[이곳 말로 묻지 않아도 스스로 설하는 것이다.]
니타나尼陀那[이곳 말로 인연이다.]
아파타나阿波陀那[이곳 말로 비유譬喩다.]
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이곳 말로 본사本事다.]
사타가闍陀伽[이곳 말로 본생本生이다.]
비불략毘佛略[이곳 말로 방광대승方廣大乘이다.]
아부타달마阿浮陀達磨[이곳 말로 승법勝法이다.]
우파제사擾波提舍[이곳 말로 분별하여 자세히 설하는 것이다. 이상 열 두 가지는 은殷ㆍ일一의 양함兩函에 있다.]
아비담阿毘曇[이곳 말로 비할 바 없는 법이다. 선자음仙字音]
마하연摩訶衍[마하는 이곳 말로 대大이고, 연은 이곳 말로 승乘이다. 변자함弁字函]
단바라밀다檀波羅蜜多[이곳 말로 시施이다. 믿음과 재물과 복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인색함을 버리고 능히 희사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단檀이라 한다. 바라밀波羅蜜은 이곳 말로 피안彼岸이고, 다多는 이곳 말로 도到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보시로 능히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라尸羅[이곳 말로 청정한 계율이고, 또는 비니毘尼라고 하는데, 이곳 말로 조복調伏이다. 이른바 세 가지 업을 조복 받아 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고 하는데 이곳 말로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다.]
찬제羼提[찬羼은 초初와 안眼의 반절이다. 이곳 말로 안인安忍이다.]
비리야毘梨耶[이곳 말로 정진精進이다.]
선나禪那[이곳 말로 정려靜慮다.]
반야般若[이곳 말로 지혜이다. 이상 여섯 가지는 변자음弁字音]
다라니문陀羅尼門[이곳 말로 총지문總持門이다. 동자음冬字音]
능엄楞嚴[이곳 말로 건행정健行定이다. 효자음孝字音]
삼매三昧[혹은 삼마제三摩提라고 하고 혹은 삼마지三摩地라 하는데, 이곳 말로 정정正定이다. 말하자면 연緣에 맡긴 하나의 경계로서 모든 삿된 혼란을 여의는 것이다. 또는 등지等持라고도 하는데, 등이란 정正이니 마음을 올바로 지니는 것이고, 지란 모든 공덕을 지니는 것이다. 계자함階字函]
사마타奢摩他[또는 적정寂靜이라고 하는데, 이곳 말로 지식止息이다.]
삼마발제三摩跋提[이곳 말로 정定이다.]
비파사나毘婆舍那[이곳 말로 갖가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상 세 가지는 우자음羽字音]
삼마발제三摩鉢提[이곳 말로 환영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원각圓覺에 나온다.]
유가瑜伽[이곳 말로 상응相應이다. 말하자면 일체승(一切乘)33 성문聲問, 연각緣覺, 보살菩薩, 하늘[天], 사람[人]을 말한다.
의 경계와 행이 모두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 이자음李字音]
아란나행阿蘭那行[이곳 말로 다툼이 없는 것[無諍]이다. 상자음翔字音]
두다杜多[이곳 말로 수치修治이다. 말하자면 마음을 닦고 행을 다스려서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야자음夜字音]
나라연那羅延[이곳 말로 견고堅固이다. 변자음弁字音]
아비발치阿鞞跋致[이곳 말로 불퇴전不退轉이다. 우자음羽字音]
살바야薩婆若[세 번째 글자는 여汝와 자者의 반절이다. 이곳 말로는 일체지一切智이다. 야자음夜字音]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뇩耨은 노奴와 옥沃의 반절이고 먁藐은 미彌와 략略의 반절이다. 아는 이곳 말로 무無이고, 뇩다라는 이곳 말로 상上이고, 삼먁은 정正이고, 삼은 변遍이고 등等이며, 보리는 각覺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다. 변자음弁字音]


열반과 탑을 건립하는 것과 잡연雜緣을 곁들였으며,
지리地里와 시분時分과 모든 수량數量이다.

반열반般涅槃[갖추어 말하면 반리열반나般利涅槃那이다. 말하자면 반리는 보普이고 구경究竟이고, 열은 출리出離이고, 반나는 번뇌이다. 합하여 말하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두루 구경에 이른다는 뜻이다. 변자음弁字音. 또 열涅로서 불생不生하고, 반般으로서 불멸不滅한다고 말한다.]
다비茶毘[또한 사유闍維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 분소焚燒이다. 빈자음賓字音]
설리라設利羅[이곳 말로 사리舍利이다. 서자음暑字音]
솔도파窣堵波[첫 번째 글자는 소蘇와 몰沒의 반절이다. 또는 취상聚相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 탑塔이다. 임자음臨字音]
지제支提[이곳 말로 공양할 만한 처소이다. 또는 영묘靈廟ㆍ제저制底ㆍ탑묘塔라고도 하는데 모두 같다. 삭자음朔字音]
제다制多[이곳 말로 공양할 만함이다. 거자음巨字音]
승가람僧伽藍[이곳 말로 중원衆園이다. 납자음納字音]
정사精舍[식심息心이 깃드는 곳이다. 선자음仙字音]
사바沙婆[이곳 말로 감인堪忍이다.]
진단국震旦國[혹은 지나支那라고도 하고 혹은 진단眞丹이라고도 한다. 이곳 말로 번역하면 사유思惟인데, 이 나라 사람이 생각이 많고 꾀가 많기 때문이니, 지금의 한漢 나라를 말한다.]
인타라因陀羅[이곳 말로 제帝이다. 이상 세 가지는 변자음弁字音]
염마琰魔[혹은 염라閻羅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 쌍雙이니 고통과 즐거움을 아울러 받는다. 초자함草字函]
나락가捺洛迦[나락은 이곳 말로 인人이고, 가는 한역하면 악惡이니, 악인이 그곳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는 니리泥犁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모두가 지옥의 다른 명칭이다. 대자함對字函]
설려薛荔[이곳 말로 아귀餓鬼이다. 복자함服字函]
아뢰야阿賴耶[이곳 말로 근본의식根本意識이다. 효자함孝字函]
갈라람羯邏藍[이곳 말로 화합이다. 말하자면 정혈이 화합해서 수태受胎한 지 7일이 된 것이다. 또는 가라라歌羅邏라고도 하고, 또는 알부타頞浮陀라고도 한다. 유有ㆍ초草 두 음音을 참조.]
살가야견薩迦耶見[이곳 말로 신견身見이다. 말하자면 5취온取蘊을 집착해서 나라 하고 내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진자함盡字函]
바라이죄婆羅夷罪[이곳 말로 온갖 착한 법을 버리고서 영원히 참회함이 없는 것이다. 나머지 경중죄輕重罪는 돌길라突吉羅라고 이름한다. 같은 뜻이 본집本集의 「지계품持戒品」에 보인다.]
참회懺悔[참은 이른바 참마懺摩이니, 이곳 말로 청인請忍이다. 이를테면 청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죄를 뉘우치고 참는 것이다. 변자음弁字音]
포살布薩[이곳 말로 아대설我對說이다. 말하자면 서로 마주하고서 죄를 말하는 것이다. 폐자음陛字音]
갈마羯磨[이곳 말로 법을 짓고 일을 변별하는 것이다. 납자음納字音]
만다라화曼陀羅華[이곳 말로 잡색화雜色華이다.]
첨복화瞻蔔花[이곳 말로 황색화黃色花이다.]
우발라화優鉢羅花[이곳 말로 대색화黛色花이다.]
구물두화拘物頭花[이곳 말로 지희화地喜花이다. 이상 일곱 가지는 변자음弁字音]
마니보摩尼寶[이곳 말로 이구보離垢寶이다. 『합론』에 보인다.]
발화라반鉢和羅飯[이곳 말로 자자식自恣食이다. 납자음納字音]
약석藥石[옛사람들은 돌로 바늘을 만들었는데, 지금 사람은 쇠로 만드니, 모두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폐자음陛字音]
훔吽[입을 오므려서 콧소리를 내는 것이다. 만자음萬字音]
가라분歌羅分[이곳 말로 터럭 하나를 쪼개서 백분의 1로 만드는 것이다. 혹은 16분의 1이라고도 한다. 변자음弁字音]
1주肘[2척이다. 과자음果字音]
1인仞[높이 7척을 말한다. 사자음師字音]
유선나踰繕那[또는 유순由旬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말로는 40리이다. 운자음雲字音]
모호률다牟呼栗多[이곳 말로는 수유경須臾頃이니, 30모호률다는 1주야晝夜가 된다.]
낙차洛叉[이곳 말로는 만萬이다.]
구지俱胝[이곳 말로는 억億이다.]
나유다那庾多[이곳 말로는 조兆이다.]
나유타那由他[이곳 말로는 경京이다. 이상 다섯 가지는 변자음弁字音]
해겁垓劫[10억을 조라 하고, 10조를 경이라 한다. 해는 곧 대수大數이다. 계자음階字音]
무앙無殃[무량의 수이다. 하자음河字音]
아승기阿僧祇[아는 이곳 말로는 무無이고, 승기는 이곳 말로는 수數이니, 곧 무수이다. 형자함形字函. 또는 승기야僧企耶라고도 한다. 삭자음朔字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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