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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89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52권

by Kay/케이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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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52

 

 

대보적경 제52권


대당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2. 보살장회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의취의 선교[依趣善巧]이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네 가지의 의취(依趣)를 구족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의취인가 하면, 뜻[義]에 의지하고 문자[文]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요 지혜[智]에 의지하고 의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요 법(法)에 의지하고 보특가라[數取趣]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뜻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며, 또 어떤 것이 문자가 되고 뜻이 되느냐 하면, 사리자야, 문자[文]라고 함은 모든 세간의 여러 가지 법으로써 작용하고 전하고 익히는 문사(文詞)요, 뜻[義]이라 함은 통달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법[出世間法]이니라. 문자라 함은 좋아할 만한 보시와 조순(調順)과 고요함을 펴 보이는 말[言詞]이요, 뜻이라 함은 보시하고 조순하고 고요할 것을 필연코 환히 알게 되는 썩거나 무너짐이 없는 지혜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나고 죽음[生死]을 꾸짖고 헐뜯으면서 분별하는 말이요, 뜻이라 함은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법 성품[法性]을 꿰뚫어 보는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열반의 공덕을 칭양하고 찬탄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모든 법 성품과 열반에 분별이 없는 성품이니라. 문자라 함은 모든 법을 따라서 건립하는 말이요, 뜻이라 함은 한 이치의 법을 잘 통달하는 지혜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온갖 법을 버리고 여읠 것을 널리 말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이 3륜(輪)이 마지막에 깨끗해지는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율의(律儀)와 몸․말․뜻의 업[身語意業]과 받아 지니는 학처(學處)와 두타[杜多]의 공덕을 널리 말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몸․말․뜻의 업은 모두가 얻을 수 없고 가행(加行)으로 말미암아 시라(尸羅)가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성냄과 분한을 나게 하고 교만하고 방자한 일 등을 참아낼 때에 이 인욕을 능히 행하면 훌륭한 장부[善丈夫]라 한다고 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잘 증득하는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모든 선근(善根)을 연설하여 정진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정진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정려(靜慮)․해탈(解脫)․등지(等持)․등지(等至)를 널리 연설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멸진정(滅盡定)의 지혜이니라. 문자라 함은 모든 지혜의 근본을 지니게 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이니라. 문자라 함은 37의 각분(覺分)과 성도(聖道)의 바른 법을 열어 보이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보리의 분법[菩提分法]과 바른 행의 과위를 증득하는 것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괴로움[苦]․쌓임[集]․도의 진리[道諦]를 열어 보이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사라짐[滅]을 증득하는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무명(無明)으로부터 늙어 죽음[老死]에 이르기까지를 열어 보이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無明滅故] 것에서부터 늙어 죽음도 사라진다[老死亦滅]는 데까지의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지관(止觀)과 자량(資糧)의 바른 법을 말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해탈하는 지혜를 밝히는 것이니라.
또 문자라 함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과 이 세 가지가 함께 행해지는 법을 널리 말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해탈하는 지혜이니라. 문자라 함은 모든 장애가 있는 법을 열어 보이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장애가 없는 해탈의 지혜이니라. 문자라 함은 3보(寶)를 열어 보이고 그 공덕을 칭찬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욕심을 여읜 법 성품으로
공덕과 바른 행을 행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는 것이니라. 문자라 함은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道場)에 이르기까지 닦고 배우는 공덕과 일으키는 바른 행을 널리 말하는 것이요, 뜻이라 함은 찰나(刹那)의 마음과 상응하여 일체지지(一切智智)를 깨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요점을 들어서 말하건대, 여래께서 연설하신 8만 4천의 법장(法藏)인 성교(聲敎)는 모두 문(文)으로, 온갖 언어와 문자를 여의고 그 진리를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곧 뜻[義]이라 하나니,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뜻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지혜[智]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모든 언교(言敎)가 있는 보특가라의 이치를 교묘하고 분명히 알면 이것을 식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언교가 있되 법다운 성품의 이치는 곧 지혜이므로 여기에 의지해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법의 선교(善巧)로 말미암아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게 되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식(識)과 지혜[智]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식이 되고 어떤 것이 지혜가 되는가 하면, 사리자야, 말한 식이란 4식주(識住)가 그것이니라. 어떤 것이 4식주냐 하면, 첫째는 물질의 세계[色趣]에 식이 의지하는 것이요, 둘째는 느낌의 세계[受趣]에 식이 의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생각의 세계[想趣]에 식이 의지하는 바요, 넷째는 지어감의 세계[行趣]에 식이 의지하는 바이니, 이와 같이 식이 머무는 곳을 곧 식이라 하므로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말한 바 지혜란 5취온(取蘊)에서는 식이 머무르지 않고 모든 온(蘊)에 두루한 지혜를 곧 지혜라 하나니, 여기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또 식이라 함은 지계(地界)와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식이라 하나니,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만일 네 가지의 식주(識住)를 말하면서도 식이 머물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식의 법 성품이라 하고 만일 이 법 성품에 뒤섞여 어지럽지 않은 것을 곧 지혜라 하나니, 이것에 의지해야 하느니라.
또 식이라 함은 눈으로 보는 빛깔과 귀로 듣는 소리와 코로 맡는 냄새와 혀로 맛보는 맛과 몸으로 느끼는 접촉과 뜻으로 인식하는 법을 요별(了別)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요별함을 곧 식이라 하며, 지혜란 안에서는 마음과 생각이 고요하고 바깥에서는 거친 생각[尋]과 세밀한 생각[伺]이 행해지지 않고 지혜에 의지한다면 하나의 법에서도 분별이 생기지 않나니, 이와 같은 모양을 지혜라 하느니라.
또 식은 반연할 대상의 경계로부터 의식을 일으키고 모든 뜻을 지음[作意]으로부터 의식을 일으키고 두루 분별함에서부터 의식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은 모양을 식이라 하며, 지혜는 취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반연함도 없고 요별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므로 이것을 곧 지혜라 하느니라.
또 식은 모든 유위(有爲)가 행하는 법에 식이 의지하여 나아가게 되므로 이것을 식이라 하며, 지혜라 함은 무위(無爲)의 법에서는 식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 무위의 지혜를 곧 지혜라 하느니라.
또 식이라 함은 생김이 있고 소멸함이 있고 머무름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식이라 하나니,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생김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것을 지혜라 하나니, 여기에 의지하여 나아가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고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한다고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들이 잘 통달할 수 있는 것으로 곧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넓고 큰 모든 문자[文]를 곧 불요의경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넓고 큰 문자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곧 앞에서 설명한 것 같은 넓고 큰 뜻[義]을 곧 요의경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넓고 큰 뜻을 의지해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경전을 요의(了義)로 삼고 어떤 경전을 불요의(不了義)로 삼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 잘 분별할 수 있되, 만일 모든 경전에서 도(道)를 널리 연설하면 그와 같은 말로의 가르침[言敎]은 불요의라 하고 만일 모든 경전에서 과위[果]를 널리 연설하면 그와 같은 언교를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세속의 진리를 말씀한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를 말씀한 경이면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업(業)을 짓고 번뇌와 혹(惑)에 물드는 것에 대해 널리 말씀한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만일 번뇌와 업이 다하는 이치에 대해 널리 말씀한 경이면 곧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더러움에 물드는 법을 널리 연설하시면서 꾸짖은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만일 닦고 다스리면서 깨끗함을 널리 말씀한 경이면 곧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생사를 저버리고 열반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널리 말씀한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만일 생사와 열반이 두 가지에 대하여 차별이 없음을 널리 말씀한 경이면 곧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갖가지 문구로 차별을 널리 말씀한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만일 그 의미가 매우 깊어서 보기도 어렵고 깨치기도 어려움을 말씀한 경이면 곧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문구가 자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과 뜻이 기뻐 날뛰게 하는 경이면 불요의라 하고, 만일 널리 말씀하신 문구와 마음이 모두가 다 재와 같이 되는 경이면 곧 요의라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에서 나와 유정과 목숨과
양육하는 대로 생기는 몸과 마납바와 짓는 이와 받는 이가 있다고 널리 말씀한 경과, 또 여러 가지 수온(受蘊)과 주재(主宰)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와 같은 언교는 불요의이므로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만일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고 생김이 없고 일어남이 없음을 널리 말씀한 경과 또한 출현함도 없고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목숨도 없고 양육하는 이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으며, 그리고 3해탈문(解脫門)에 대한 이와 같은 말로의 가르침[言敎]이 곧 요의이므로 이것에 의지해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법(法)에 의지하고 보특가라[數取趣]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에서 잘 분별할 수 있고 널리 연설함이 있는 모든 불요의경(不了義經)은 곧 보특가라라는 뜻이 되므로 이와 같은 말로 가르친 것에[言敎]는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요의경(了義經)이면 곧 같은[如] 성품의 법이라는 뜻이므로 이와 같은 말로 가르친 것을 의지해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법에 의지한다고 하며, 어떤 것을 보특가라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만일 보특가라의 견해가 의지하는 것으로써 반연할 만한[所緣] 법이면 이와 같은 모양을 보특가라라 하며, 이 보특가라의 견해로 반연할 만한 법이 성품에 머무르는 법[法性]이면 이와 같은 모양을 곧 법이라 하느니라.
보특가라라 함은, 범부의 보특가라요 착한 범부의 보특가라요 수신행(隨信行)의 보특가라요 수법행(隨法行)의 보특가라요 제8의 보특가라요 예류(預流)의 보특가라요 일래(一來)의 보특가라요 불환(不還)의 보특가라요 아라한(阿羅漢)의 보특가라요
독각(獨覺)의 보특가라요 보살(菩薩)의 보특가라니라.
사리자야, 또 어떤 보특가라는 세간에 출현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며 세간을 가엾이 여겨 모든 하늘과 인간 세계를 이롭고 안락하게 하나니,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곧 여래․응공․정등각이시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든 보특가라의 이름을 말함은 여래가 세속의 진리에 의거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말씀한 것이니, 만일 어떤 중생이라도 이런 말로 가르침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러한 무리에게는 의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여래께서는 그들을 바르게 의지하게 하려고 하므로 부처님과 박가범이 이런 법을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모든 법의 참 성품[實性]에 의지할 것이요 저 보특가라를 의지해서는 안 되느니라’라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참 성품인가 하면, 사리자야, 변하거나 달라짐도 없고 더 늘어남도 없고 작용도 없고 작용하지 않는 것도 없고 머무르지도 않고 근본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양을 곧 법 성품[法性]이라 하느니라.
또 모든 곳을 막힘 없이 평등하게 비추고 평등한 가운데서 평등하게 잘 머무르며 평등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평등하게 잘 머무르고 모든 평등한 것과 평등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도 묘하고 훌륭하고 평등하게 하나니, 이와 같은 모양을 곧 법 성품이라 하느니라.
또 법 성품이라 함은 분별함이 없고 반연할 것도 없으며, 모든 법에 대하여 결정코 최후의 체상(體相)을 증득하나니, 이와 같은 것을 모든 법의 참 성품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법 성품에 의지한 이가 있으면 모든 법 성품을 의지하지 않음이 없나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문에 증득하여 들어가기 때문이요, 모든 법에 있어서 모든 법 성품에 의지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의 의취(依趣)라 하나니,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 법 가운데에서
잘 통달하면 이것을 의취의 선교[依趣善巧]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의취의 선교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의취의 선교를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자량의 선교[資糧善巧]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두 가지의 자량을 잘 통달할 줄 알아야 하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의 자량인가 하면 복(福)과 지혜[智]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복덕의 자량[福德資糧]이라 하는가 하면, 보시(布施)의 체성(體性)으로 복을 짓는 일이요 시라(尸羅)의 체성으로 복을 짓는 일이며, 모든 수행하는 체성으로 복을 짓는 일이요 그리고 대자의 선정[大慈定]과 대비의 방편[大悲方便]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복을 짓는 모든 일에 머무르기 때문에 모든 선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의 뜻을 격려하면서 받들어 닦고 3세(世) 동안 쌓았던 모든 악(惡)을 다 들추어내느니라.
또 모든 중생들이 지닌 공덕과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가 지닌 공덕과 독각이 지닌 모든 공덕과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행을 널리 닦아서 물러나지 않음[不退轉]을 얻고 한 동안에 속한[繫屬一生]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보살마하살들이 지닌 모든 공덕에 대하여 보살은 두루 마음속으로 따라 기뻐하며, 또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박가범께서 지닌 모든 선근에 대하여 보살도 모두 마음속으로 따라 기뻐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또 모든 복을 짓는 일들을 잘 따라 기뻐하며, 또 모든 부처님께
묘한 법륜(法輪)을 굴려 주실 것을 청하고, 모든 성현들에게도 훌륭한 법을 연설하게 하여 함께 복을 짓는 일을 권하며, 또 모든 선근을 보리에 회향(廻向)하고 함께 복을 짓는 일에 회향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아직 큰 보리의 마음을 내지 않은 보살들을 보면 방편으로 가르쳐 보리의 마음을 내게 하고, 만일 이미 보리의 마음을 낸 이면 법을 설하면서 보여 주고 인도하며 가르쳐 주어서 성숙되게 하느니라.
또 빈궁한 이는 재물로써 두루 거두고, 병든 이는 약을 주어 은근히 보살펴 주고 공경하여 받들어 섬기며, 포악한 이에게는 마음으로 꾹 참고 받으며, 계율을 범하게 되면 감춤이 없이 모든 허물을 들추어내어 죄를 없애주고, 이미 열반하신 모든 부처님 세존께는 언제 어느 때나 공양을 닦으며 오파타야(鄔波柁耶)와 아차리야(阿遮利耶)에 대해서는 공경하기를 큰 스승[大師]을 대하듯 하느니라.
또 바른 법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추구하여 찾고 청하여 물으며, 설법하는 법사를 공경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받들어 모시기를 마치 세존 섬기듯 하고 설법하는 법회가 있으면 비록 멀리 여러 백 유선나(踰繕那)가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그곳으로 가서 바른 법을 듣되 싫어함이 없으며, 혹 어떤 중생이 와서 의심난 것을 청해 물으면 물듦이 없는 마음으로써 깨끗한 법을 널리 연설하느니라.
또 부모를 받들어 모시며 공양을 닦고 은혜를 알고 은혜를 깨달아서 변심하거나 뉘우침이 없으며, 모든 깨끗한 복을 쌓아 모으며 수행하고 건립하되 싫증냄이 없으며, 모든 계율을 점검하여 몸을 방호하고 몸에 거짓이 없고 말을 조심하여 말을 하되 온화하게 하며, 마음을 방호하여 마음에 아첨이나 속임이 없나니, 깨끗한 복[梵福]을 포섭하려 하기 때문이니라.
또 모든 여래의 제다(制多)를 만들고 장부의 몸매[相]를 원만하게 갖추기 위하여 무차(無遮)의 대법회를 쌓아 모으고 따라 나타내는 몸매[隨顯相]를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
선근과 자량을 쌓아 모으며, 몸을 장엄하기 위하여 교만심을 버리고 말을 장엄하기 위하여 모든 말의 허물을 멀리하며 마음을 장엄하기 위하여 온갖 증오와 질투하는 생각을 멀리 여의느니라.
또 불국토를 장엄하기 위하여 신통으로 변화하여 나타내되 바뀌어 달라짐이 자유자재하고 모든 법의 모양을 장엄하기 위하여 최상의 절묘한 지혜로 아주 깨끗하게 하며, 큰 법회의 대중을 장엄하기 위하여 모든 이간하는 말과 추악한 말과 파괴하는 말들을 멀리 여의고 갖가지 법에 취착하지 않기 위하여 부질없는 분별을 여의며, 설법하는 이로 하여금 근심과 걱정이 없게 하기 위하여 기뻐하면서 ‘하시는 말씀 정말로 훌륭하십니다’라는 말을 하여 주느니라.
또 설법하는 이로 하여금 헛되이 버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모든 허물[蓋]을 멀리 여의고 공경하면서 법을 들으며, 보리수(菩提樹)를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께 깨끗한 동산 숲을 받들어 보시하고 부처님의 도량을 장엄하기 위하여 선근을 갖추어 닦고 물러남이 없으며, 나고 죽는 법을 깨끗이 없애기 위하여 온갖 모든 업과 번뇌에 물들지 않고 값진 보배의 손을 얻기 위하여 모든 값진 보배를 보시하며, 그지없는 재물과 광[藏]을 얻기 위하여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먼저 보시하느니라.
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보면 곧 깨끗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얼굴을 펴고 먼저 문안하고 찡그리는 빛을 띠지 않으며, 평평한 손바닥 모양[平掌相]을 얻기 위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이 대하고 끝없는 모든 광명 그물을 놓기 위하여 학식이 없는 중생들을 업신여기거나 버려두는 일이 없으며, 태어날 때에 깨끗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끗한 계율을 쌓은 복을 모으며, 태(胎) 안에서 깨끗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헐고 범한 일에 대하여 아주 깨끗하게 하느니라.
또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기 위하여
깨끗하게 10선업도(善業道)를 닦고 다스리며, 아는 데도 없이 갔다왔다 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하여 모든 가르침과 훈계에 대하여 부질없이 분별함이 없고 법의 재물[法財]에 부유하고 넉넉하게 하기 위하여 깊고 오묘한 법의 성품에 대하여 인색하거나 감춤이 없으며, 모든 세간에서 숭앙함을 받기 위하여 깨끗하고 뛰어나게 알고자 함[欲解]을 닦고 다스리느니라.
또 넓고 큰 법과 훌륭한 견해를 섭취하기 위하여 작고 보잘 것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닦아 증득하지 않고 모든 복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에서 항상 일체지(一切智)를 생각하며, 일곱 가지 거룩한 재물[七聖財]을 원만히 얻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신심을 길잡이로 삼고 모든 깨끗한 법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기의 몸과 목숨을 돌아보지 않으며 모든 세간의 위임(委任)을 받게 되기 위하여 먼저 허락했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고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을 원만하게 닦고 익히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모양을 구족히 성취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복덕자량선교(福德資糧善巧)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지덕자량선교(智德資糧善巧)인가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이러이러한 인연의 법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혜를 섭취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지덕자량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섭취한 지혜는 어떠한 법으로써 인(因)을 삼고 연(緣)을 삼는가 하면, 사리자야,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싫증을 느끼거나 게으름이 없는 정진으로 지혜를 찾고 구해서 행을 따르는 성품으로 착한 벗을 친하고자 할 때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나아가고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에는 나아가지 않으며, 저 착한 벗에 대하여 교만하게 굴지도 않고 공경하며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기를 마치 큰 스승을 애모 하듯 하며,

그리고 이 보살은 저 착한 벗이 알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도 지혜에 관한 언설이 없이 저 착한 벗에게 묻고 받아들이지 않을 줄도 아느니라.
또 보살은 그가 법 그릇[法器]임을 알고 나면 곧 그를 위해 널리 연설하되 잠시도 중단하지 않으며, 이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바른 법의 자량과 상응한 행동에 대해 설법을 들으면 정진하고 찾고 생각하며, 방편을 써서 닦고 익히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든 모양을 곧 지덕의 자량과 상응하는 바른 행동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법의 자량[正法資糧]과 상응하는 옳은 행동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바른 법의 자량이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올바른 행동을 갖추어 닦기 때문에 좋아하는 재물과 음식에 대해서도 도둑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잘 조절하고 해야 할 일에 있어서도 되도록 줄이고 절약하며, 말이나 이야기는 멀리 여의고 모든 음성에 대해서도 잘 버리며 초저녁이나 새벽녘에 잠도 없고 부지런히 힘써 닦고 익히며 바른 행동에 상응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치를 헤아려 정중하게 찾고 생각하기 때문이요 마음이 혼탁하거나 더러움이 없고 모든 번뇌[蓋]를 억눌러 제외하기 때문이며, 훼범(毁犯)한 일은 잘 벗어날 줄도 알고 아첨과 거짓이 없으며 그 자리에서 제거하고 참회하기 때문이요 추구한 바가 없어서 견고하게 바른 행을 닦기 때문이며, 바른 법을 순히 따르고 바른 법을 향해 나아가며 바른 법에 임해서는 그 법에 대하여 용맹심을 내어 항상 머리나 옷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 부지런히 오묘한 지혜를 구하며 잠시도 휴식함이 없고 어리석거나 어두운 곳에 처하지 않기 때문이요 해이해지거나 착한 멍에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시끄러운 곳을 멀리하고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요 잠자코 편안히 생각하며 성인의 종자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이며, 두타[杜多]의 모든 공덕을 버리지 않고 법락(法樂)을 좋아하기 때문이요 언제나 즐거이
세간 밖의 법을 찾고 구해서 세간에서 순하게 따르는 문장이나 주술(呪術)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또 바른 생각[正念]을 성취하여 잊어버림이 없기 때문이요 매우 깊은 이치를 갖추어 잘 따르고 행하기 때문이며, 미묘한 지혜의 도(道)를 완전히 갖추어서 순하게 따르기 때문이요 견고하고 용맹스럽게 외부의 인연을 막아 끊기 때문이며, 안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괴(慚愧)로 장엄하기 때문이요 부처님의 세계를 따라 행하며 지혜가 아닌 것은 여의기 때문이며, 어리석음의 막을 버리고 지혜의 눈이 깨끗하여 잘 깨달아 알기 때문이요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넓고 넓어서 이와 같은 깨달음에 협소하거나 하열함이 없기 때문이며, 오묘한 깨달음이 밝게 드러나서 나타나는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지닌 모든 공덕은 다른 이를 따르지도 않고 자기의 공덕에 뛰어난 체[增上慢]하지도 않으며, 다른 이의 공덕에 대하여 질투하거나 헐뜯지도 않으며 지은 업을 잘 닦고 업보(業報)를 가벼이 여기지도 않나니, 이렇게 하기 때문에 업의 깨끗한 지혜를 구족히 성취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양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원만해지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지덕의 자량으로써 선교한 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다시 지덕의 자량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베푸는 법을 완전히 갖추면 곧 지덕의 자량을 성취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은 경전을 베끼는 것을 보게 되면 종이와 붓과 먹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해 주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마하살이 설법하는 이에게 깊고 묘한 이치를 연설해 주기를 청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마하살이 모든 이익과 공경과 명문(名聞)과 찬송과 칭양으로써 설법하는 이를 받드는 것이요, 넷째는 보살마하살은 설법하는 법사에게서 바른 법을 받아들이고 아첨하거나 왜곡된 마음이 없이 그의 뜻을 찬양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잘 하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 네 가지 깨끗한 보시를 행하면 지덕의 자량선교를 잘 쌓아 모으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다시 네 가지로 쌓아 모은 한량없는 지덕의 자량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보살마하살은 설법하는 이의 몸을 잘 보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많은 선(善)을 잘 수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가 머무는 곳을 잘 수호하는 것이요, 넷째는 저 설법하는 이가 거느린 모든 도중(徒衆)들을 잘 수호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쌓고 모은 지덕의 자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네 가지로 맡아 지니는[任持] 지덕의 자량 선교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이 설법하는 이에게서 법(法)을 맡아 지니고 지혜[智]를 맡아 지니고 재물[財]을 맡아 지니고 보리의 공덕[菩提功德]을 맡아 지니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로 맡아 지니는 지덕의 자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다섯 가지 뛰어난 힘으로써 능히 행하는 지덕의 자량선교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이냐 하면, 보살마하살이 믿는 힘[信力]을 완전히 갖추어서 믿고 이해하는 마음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이요, 정진하는 힘[進力]을 완전히 갖추어서 선지식을 구하여 많은 견문(見聞)을 이루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힘[念力]을 완전히 갖추어서 보리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선정의 힘[定力]을 완전히 갖추어서 평등한 깨달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며, 지혜의 힘[慧力]을 완전히 갖추어서 오래도록 견문이 많은 힘을 닦아 익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다섯 가지 힘의 지덕의 자량선교의
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의 자량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깨끗한 시라(尸羅)를 갖춤으로써 지덕의 자량을 잘 쌓아 모으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이 법을 좋아하는[樂法] 시라요, 법을 구하는[求法] 시라요, 법을 관찰하는[觀法] 시라요, 보리에 회향하는[廻向菩提] 시라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은 네 가지 깨끗한 시라를 갖추면 지덕의 자량을 잘 쌓아 모으는 선교의 행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의 자량선교의 행이 있나니, 네 가지 참는 법을 완전히 갖춤으로써 지덕의 자량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보살마하살이 부지런히 법을 구할 때에 모든 추악하고 법답지 않은 말을 잘 참아 받아들이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마하살이 부지런히 법을 구할 때에 모든 바람과 해와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을 잘 참고 견디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마하살이 부지런히 법을 구할 때에 아차리야(阿遮利耶)와 오파타야(塢波陀耶)의 두 훌륭한 스승께서 가르침이 있을 때마다 머리에 이고 받아들이는 것이요, 넷째는 보살마하살이 부지런히 법을 구할 때에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는 법을 잘 믿고 이해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참고 받아들이는 법으로써 지덕자량의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정진(精進)을 완전하게 갖춤으로써 지덕자량의 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이냐 하면, 보살마하살이
견고하게 정진하며 바른 법을 듣는 것이요, 견고하게 정진하며 바른 법을 맡아 지니는 것이며, 견고하게 정진하며 바른 법을 연설하는 것이요, 견고하게 정진하며 바른 법을 수행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견고한 정진으로써 지덕자량의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정려(靜慮)를 완전히 갖춤으로써 법을 닦아 익혀서 지덕자량의 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보살은 언제나 멀리 여의는 법[遠離法]을 행하기 좋아하는 것이요, 둘째는 혼자 전일하게 고요한 산과 숲을 지키기 좋아하는 것이며, 셋째는 언제나 신통한 정려를 찾고 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요, 넷째는 언제나 부지런히 넓고 큰 부처님의 지혜를 수행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바른 법의 정려로써 지덕자량의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바른 법의 지혜 광명을 완전히 갖춤으로써 지덕자량의 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지혜의 광명을 수행하여 단견(斷見)에 머무르지 않고, 상견(常見)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연기(緣起)를 어기지도 않고, 나 없음[無我]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모든 지혜의 광명으로써 지덕자량의 바른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바른법의 최상의 방편을 성취함으로써 지덕자량의 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세간(世間)을 순하게 따르고[隨順] 경전(經典)을 순하게 따르며, 묘한 법[妙法]을 순하게 따르고 깨끗한 지혜[淨智]를 순하게 따르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바른 법의 방편으로써 지덕자량의 바른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법의 도(道)에 나아감으로써 지덕자량의 선교를 능히 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 저 언덕에 이르는[到彼岸] 도와 7각분(覺分)의 도와 8성지(聖支)의 도와 일체지자(一切智者)를 행해 나아가는 지혜의 도를 구족히 수행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바른 법의 도로써 지덕자량의 바른 행을 능히 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지덕자량의 선교가 있나니, 네 가지 싫증냄이 없는 법[無厭足法]을 갖추면 곧 지덕자량을 잘 쌓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바른 법을 받들어 지니고 한량없이 들어도 싫증냄이 없는 것이요,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해도 싫증냄이 없는 것이며, 이치를 관찰하되 싫증을 내지 않는 것이요, 지혜의 방편을 쓰되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싫증을 냄이 없는 법으로써 지덕자량의 바른 행을 잘 쌓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지덕자량의 선교로써 행하는 모든 곳을 따라 두루 들어가나니, 왜냐 하면 사리자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시는 지덕자량을 말미암아 성취되기 때문이요, 이와 같이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바른 지혜도 지덕자량을 말미암아 성취되며, 나아가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모든 착한 법도 지덕자량으로 인하여 성취되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견고한 바른 행을 일으키는 것도 모두가 바른 지혜에 의지하고 저 모든 행도 지혜가 앞잡이가 되기 때문이니, 이 보살마하살이 큰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모든 지혜 없는 이들이 귀의하게 되고 모든 악마들이 틈[便]을 얻지 못하며, 모든 부처님․여래께서 함께 가호(加護)하시고 장차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나아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이 보살이 지닌 지덕자량의 선교의 행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복덕과 지덕의 두 가지 자량선교를 성취한다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이 자량선교의 힘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염주의 선교[念住善巧]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네 가지 염주를 구족히 닦아 익혀서 방편선교를 능히 성취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네 가지 염주냐 하면, 첫째는 몸[身]에 대하여 몸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느낌[受]에 대하여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心]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는 것이요, 넷째는 법(法)에 대하여 법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어떻게 몸[身]에 대하여 몸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은 몸에 대하여 몸을 따르는 생각[隨身念]에 머물러서 이 몸이 과거 세상에서 지은 허물들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몸은 뒤바뀐 업(業)이 일으킨 인연으로 생긴 것이라 본래 주재(主宰)가 없고 섭수(攝受)하는 것도 없다. 마치 저 풀과 나무와 우거진 숲이며 모든 약초(藥草) 등과 같아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라서 본래 주재가 없고
섭수하는 것도 없다.
이 몸은 또 마치 관사(館舍)가 모든 풀․나무․담장 및 벽 등의 여러 가지 연(緣)과 함께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몸도 역시 그러하여서 다만 온(蘊)․처(處)․계(界) 등에 포섭되어 유지될 뿐이므로 그 본래 성품은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항상함도 없고 견고하게 머무름도 없으며 변하지 않는 법도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몸에 대하여 허망하게 헤아리는 것이 없어야 하리니, 그러므로 나는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견고하지 않은 몸을 견고한 몸으로 바꾸어야 한다.
어떤 몸을 견고하고 알찬 몸[堅實身]이라 하느냐 하면, 여래의 몸이 곧 견고하고 알찬 몸이다. 나는 이 몸은 지극히 거짓이라고 관찰하므로 반드시 여래의 몸을 이룩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여래의 몸은 곧 법의 몸[法身]이요, 금강 같은 몸이요, 파괴할 수 없는 몸이요, 견고한 몸이요, 3계(界)를 초월한 가장 뛰어난 몸이기 때문이다’고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나의 이 몸은 한량없는 허물에 뒤섞여 있으므로 나는 마땅히 모든 허물을 여읜 여래의 몸을 증득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깨닫는 지혜의 간택(簡擇)하는 힘으로써 ‘이 몸은 네 가지 요소[四大種]에 속한 것이고 모든 수면(隨眠)이 의지하고 있는 굴택(屈宅)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몸으로써 모든 중생을 위하여 몰아서 부리고 심부름을 해야 된다. 왜냐 하면 마치 세간 바깥의 네 가지 요소인 지계(地界)․수계(水界)․화계(火界)․풍계(風界)가 갖가지 문의 한량없는 뭇 도구와 자재(資財)로써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 양육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 역시 이 네 가지 요소로 합해져서 이루어진 몸이므로 갖가지 문의 한량없는 차별된 경계와 자재로써 마땅히 중생들이 수용(受用)할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이 몸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대의(大義)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비록 이 몸의 체성(體性)이 괴로운 것임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괴로운 몸을 싫어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비록 이 몸이 마지막에는 다하는 성품임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유전(流轉)하며 받아 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비록 이 몸의 그 성품에는 나가 없음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중생을 성숙시키는 일에 게으름이 없고, 비록 이 몸의 나는 고요히 사라지는 성품임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저 영영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버리는 데에 떨어지지 않으며, 비록 몸이 공하고 모양이 없고 멀리 떠났음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멀리 여읨의 맨 끝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 몸이라는 법에 대하여 몸을 따르는 관[隨身觀]에 머물러서 이 몸은 실제도 없고 견고함도 없음을 관찰하느니라. 또 안[內]의 몸에 대하여 몸을 따르는 관에 머물러 안을 따라 수행하여 모든 번뇌를 다시는 받아들임이 없고, 또 바깥[外]의 몸에 대하여 몸을 따르는 관에 머물러 바깥을 따라 수행하며 모든 번뇌와는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신염주(身念住)를 성취하고 나면 그 몸이 청정하여져서 물듦이 없고 온갖 깨끗한 몸의 업[身業]을 완전히 갖추어서 깨끗한 모양[相]의 장엄한 몸을 얻으며, 이미 이와 같은 장엄한 몸을 갖춘 까닭에 모든 하늘과 인간이 귀의하여 숭배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이 몸이라는 법에 대하여 몸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힌다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떤 것이 느낌[受]에 대하여 느낌을 따라 관찰하고 염주를 닦아 익히는 것이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모든 있는 느낌은 모두가 다 괴로운 것이다. 나는 이제
깨닫는 지혜의 힘을 갖추어 이와 같은 느낌을 마땅히 잘 결택(決擇)하고 지(智)로써 결택하고 혜(慧)로써 결택하고 방편으로 결택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이와 같이 훌륭한 결택의 힘을 갖춘지라 비록 즐거움[樂]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즐거움을 접촉할 당시에 곧 온갖 착한 길[善道]의 중생에 대하여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 탐심을 내는 수면(隨眠)에 시달림을 받지 않고, 비록 괴로움[苦]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괴로움을 접촉할 당시에 곧 모든 악한 세계[惡道]의 중생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성을 내는 수면에 시달림을 받지 않으며, 비록 또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느낌을 접촉할 당시에 무명(無明)의 수면에 시달림을 받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여 아는 힘[觀解力]을 완전히 갖춘 까닭에 느낌을 따라 행하면서 염주에 있는 바 느낌인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닦고 익혀서 모든 느낌에서 벗어나는 일을 잘 관찰하며, 또 저 모든 중생들이 느낌이 두루한 지혜로써 고요히 사라지는 법을 잘 증득하게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은 번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혜가 없어서 모든 느낌에서 벗어남을 분명하게 모르나니, 왜냐 하면 즐거움을 느낄 때에는 문득 탐애를 내게 되고,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곧 성을 내게 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문득 어리석음을 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들의 모든 보살은 지혜의 행을 따라 느끼는 모든 허물의 법들을 이미 쉬고 없앴거늘 어찌 다시금 번뇌를 일으키겠느냐? 나는 이제 마땅히 방편선교를 구족히 일으키고 크게 가엾이 여기어 모든 중생을 섭수하여 모든 느낌에서 모두 쉬고 없앨 수 있게 해야겠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모든 느낌에 대하여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모든 느낌에 대하여 지혜로써
간택하여 즐거움은 이끌어 내지만, 괴로움은 이끌어 내지는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또 어떤 지혜로써 간택하는가 하면, 이 보살은 ‘이 가운데에서 능히 느끼는 이와 나와 유정과 목숨과 보특가라가 없다’고 관찰하나니, 이렇게 관찰하여 마치면 능히 느끼는 이는 없고 오직 느끼는 것이 있을 뿐이니라.
어떤 느낌이 있느냐 하면, 받아들이는 느낌[執受]과 끌어당기는 느낌[攝受]과 취하는 느낌[取受]과 얻음이 있는 느낌[有得受]과 뒤바뀐 느낌[顚到受]과 분별하는 느낌[分別受]과 견의 수면인 느낌[見隨眠受]과 눈으로 인한 생각에서 생겨나는 느낌[眼想所生受] 나아가 뜻으로 생각하여 생겨나는 느낌[意想所生受]과 빛깔로 생각하여 생겨나는 느낌[色想所生受]과 나아가 법으로 인한 생각에서 생겨난 느낌[法想所生受]과 그리고 갖가지의 눈으로 인한 접촉으로 생겨나는 느낌[眼觸所生受]이니,
이와 같이 널리 말하여 안과 바깥에 있는 모든 법과 모든 접촉의 면으로 생기는 느낌[諸觸緣所生受]에 이르기까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와 같은 모양을 곧 느낌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여래께서는 모든 느낌의 한량없는 여러 문과 차별된 모양을 분별하시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께서 때로 하나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하나의 마음으로 모든 경계를 따로따로 아는 것이니라. 혹은 두 개의 느낌을 말씀하기도 하나니, 안과 바깥이니라. 혹은 세 개의 느낌을 말씀하기도 하나니, 과거를 따로따로 알고 미래를 따로따로 알며 현재를 따로따로 아는 것이니라. 혹은 네 개의 느낌을 말씀하기도 하나니, 지계(地界)․수계(水界)․화계(火界)․풍계(風界)를 구별하는 것이니라.
혹은 다섯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5온(蘊)을 생각하는 것이니라. 혹은 여섯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6처(處)를 분별하는 것이니라. 혹은 일곱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7식주(識住)가 그것이니라. 혹은 여덟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8사(邪) 방편의 모양이 그것이니라. 혹은 아홉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중생들이 살게 되는 아홉 가지의 거처가 그것이니라. 혹은 열 개의 느낌을 말씀하시기도 하나니, 열 가지 착한 업의 길[善業道] 등이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여 한량없는 모든 느낌에 이르기까지 반연의 대상인[所緣] 경계를 따르고 지을 바의 뜻을 따라
한정된 양의 분제(分齊)로서 저러한 많은 느낌이 있으나, 그러나 모든 여래께서는 느낌의 한량없음을 말씀하시느니라. 왜냐 하면 중생은 한량없으므로 중생이 있음에 따라 각각 이러한 한량없는 모든 느낌을 갖추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따르는 관[隨受觀]에 머무르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은 깨끗한 지혜와 방편으로써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느낌의 나고 없어지고 머무르고 달라짐[生滅住異]을 잘 포섭하며, 그리고 모든 중생의 착하고 착하지 못한 것 등 소유하고 있는 느낌의 지혜를 분명하게 잘 아나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따라 관찰하면 이것을 느낌에 대하여 구족히 관찰한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모든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따라 관찰하고 염주를 닦아 익힌다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떻게 마음[心]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 관찰하고 염주를 닦아 익히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고 은밀히 보호하고 막아 지키며, 모든 산란함을 여의고 마음에 대하여 나고 없어지고 흩어지고 무너져서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음을 관찰하여 안에서나 밖에서나 머무르지도 않고 옮겨가지도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마음을 바르게 관찰한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또 생각하기를 ‘내가 기억하건대 맨 처음에 일으켰던 마음이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모든 마음은 나자마자 곧 소멸되어 떠나고 흩어지고 변하고 무너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또 나는 한량없는 모든 마음으로 선근을 쌓고 보았을 터인데 나자마자 곧 소멸되어 떠나고 흩어지고 변하고 무너져서 그 방위가 없다.
또 나에게 있었던 한량없는 마음의 모양은 보리에 회향하였는데도 마음의 체상(體相)을 스스로 알 수 없거늘 어떻게
이 마음으로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왜냐 하면 이 마음의 본체로써는 마음을 환히 알 수가 없고 마음을 관찰할 수도 없으며 자기 마음을 통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또 생각하기를 ‘만일 보리의 마음은 선근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상실됨이 없다면 곧 선근의 마음도 회향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미혹하거나 상실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회향하는 마음이 보리를 말미암아 상실됨이 없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상실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관찰한 뒤에는 미혹하거나 상실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인과(因果)가 파괴되지 않는다. 비록 이 마음의 법 성품에는 제 성품이 없고 작용도 없고 주재(主宰)도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이 모든 법은 인연에 의지하여 생기게 된다. 나는 마땅히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 선근을 쌓고 모아야 하고 이미 쌓고 모은 뒤에는 그와 상응하는 행을 닦아서 끝내 이 마음의 법 성품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그 가운데서 쌓아 모은 모양을 관찰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쌓아 모은 모양을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니 ‘이 마음의 본래 성품[本性]은 오히려 허깨비와 같으므로 하나의 법도 보시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法性]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보시 할 수 있어서 쌓고 모아 장엄한 불국토에 회향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본래 성품은 마치 꿈에서 본 것과 같아서 그 모양은 고요하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잘 쌓고 모아 시라(尸羅)를 수호할 수 있어서 모두 신통이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본래 성품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서 마지막에는 다하여 소멸되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온갖 좋아할 만한 인욕(忍辱)의 힘을 닦아 익힐 수 있어서 쌓아서 장엄한 보리에 회향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본래 성품이란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마지막에는 쌓아 모으는 모양을 멀리 여의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온갖 바른 노력을 일으킬 수 있어서 성숙된 한량없는 불법에 회향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본래 성품이란 취하거나 얻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온갖 정려(靜慮)와 해탈(解脫)과 삼마지(三摩地)와 삼마발저(三摩鉢底)를 닦고 익힐 수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으뜸가는 삼마지에 회향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마음의 성품을 관찰하건대 원래 물질[色]의 모양이 아니므로 볼 수도 없고 대할 수 없고 분명하게 알 수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온갖 지혜의 글 구절로 차별을 두어 말한 지혜를 닦고 익힐 수 있어서 원만한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회향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은 반연할 것이 없고 생김도 없고 일어남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한량없는 착한 법을 건립할 수 있어서 물질의 모양을 섭수하게 된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것을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은 원인(因)으로 하는 것이 없고 또한 생겨나는 것도 없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각분(覺分)의 법의 인(因)을 섭수할 수 있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마음의 성품은 여섯 가지 경계를 멀리 여의고 또한 생기지도 않지만 이 마음의 법 성품에서는 보리의 경계와 인(因)이 되어 생겨나는 마음을 끌어 일으킬 수 있다’고 하나니, 이것을 곧 선근이 쌓여 모인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 까닭에 모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힌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또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따르는 관[隨心觀]에 머물러서 뛰어난 신통을 증득하기 위하여 그 마음을 묶어 놓고 신통의 지혜를 닦고 배우며, 신통을 얻은 뒤에는 다만 한 마음으로써 모든 마음의 모양을 잘 알 수 있고 이미 환히 안 뒤에는 마음의 자체(自體)에 의지하여 모든 법을 널리 연설할 뿐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마음을 따르는 관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은 대비(大悲)의 힘으로써 그 마음을 제어(制御)하면서 중생을 성숙시키되 게으름이 없으며, 이 보살은 마음을 따르는 관에 머무르기 때문에 마음이 다하지도 않고 마음이 소멸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편히 머무르나니, 다만 마음으로 하여금 나고 죽음이 상속하는 결박을 멀리 여의게 하며 마음에 편히 머무를 뿐이니라.
또 모든 마음이 기억하는 지혜의 힘으로써 모든 법이 생김도 없고 일어남도 없는 바르게 결정된 성품에 편히 머무르고 2승(乘)의 경지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또 이 힘을 지닌 마음이 상속하여 모든 불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까지 한 찰나의 마음과 상응하는 묘한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치게 되느니라.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모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 관찰하면서 염주를 닦아 익힌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떻게 법(法)에 대하여 법을 따라 관찰하며 염주를 닦아 익히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거룩한 지혜의 눈[慧眼]으로써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되 도량(道場)에 앉기까지 그
중간에는 미혹하거나 상실하지 않느니라.
이 보살은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을 따르는 관[隨法觀]에 머물러서 조그마한 법도 공을 멀리 여의거나 모양 없음[無相]을 멀리 여의거나 소원 없음[無願]을 멀리 여의거나 생김이 없음[無生]을 멀리 여의거나 일어남이 없음[無起]을 멀리 여의거나 그리고 가행이 없음[無加行]을 멀리 여의는 것을 깨닫지 않으며, 또 거듭 관찰하여 조그마한 법도 연기(緣起)를 멀리 여의는 것을 알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법을 따르는 관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법과 법이 아님[非法]을 관찰하지 않나니, 여기서 어느 것을 법이라고 규정짓느냐 하면, 나 없음[無我]의 이치를 법의 이치라 하며 유정이 없는 이치와 목숨이 없는 이치와 보특가라가 없는 이치 등 이와 같은 이치를 바로 법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것들을 법이 아닌 이치로 삼는가 하면, 나라는 견해[見]와 유정이라는 견해와 목숨이라는 견해와 보특가라라는 견해와 아주 없다[斷]는 견해와 항상하다[常]는 견해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 등 이와 같은 견해를 바로 법이 아니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요점을 들어서 말하건대 모든 법을 혹은 법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법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나니, 왜냐 하면 만일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다 함을 분명히 알면 곧 모든 법은 다 같이 법이라 하겠지만, 만일 나와 내 것이라는 모든 견해의 수면(隨眠)을 헤아리거나 집착한다면 곧 모든 법은 다 법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까닭에 법을 따르는 관에 머무른 뒤에는 하나의 법도 불법이 아니거나 부처님이 아니거나 도(道)가 아니거나 해탈이 아니거나 벗어남[出離]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며,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을 분명하게 알아서 모두 벗어난 뒤에는 또 장애 없는 대비(大悲)를 획득하여 모든 중생의 번뇌는 거짓되고 허망한 생각에서 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모든 번뇌의 체성(體性)을 스스로 여의는 것인 줄 아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번뇌는 모두 요의(了義)에 나아가면 조그마한 번뇌조차도 쌓을 수 있거나 모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렇게 따라 깨달으면 그것이 곧 보리요, 번뇌의 성품이 곧 보리의 성품이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비록 생각에 편히 머무른다 하더라도 머무르는 곳이 없고 기억한 것도 아니고 잊는 것도 아니며 생각에 편히 머무르는 것을 분명하게 아나니, 왜냐 하면 생각에 편히 머무는 것을 곧 법계(法界)라 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계에 머무른다면 곧 유정계(有情界)에 머무르는 것이요 유정계에 머무르면 곧 허공계(虛空界)에 머무르는 것이니, 이와 같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은 허공과도 같다고 말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법을 따르는 관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은 불법에 의지하여 나아가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곧 불법임을 믿고 이해하나니, 비록 또 이와 같은 진지(盡智)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무위(無爲)에서 다하여 없어지는 법을 증득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록 또 생김이 없는 지혜[無生智]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모든 함식(含識)을 가엾이 여겨 받아 남[受生]을 나타내는 것이요, 또 생김이 없는 실제[無生實際]를 버리거나 여의지도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 가운데서 생각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2승(乘)의 모든 법을 두루 거두어 지닐 수 있고 비록 온갖 거짓으로 세운 모든 법에서 생각을 편히 머무른다 하더라도 이 바른 생각을 흘려버림도 없고 잃어버림도 없으며, 미래의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염주(念住)를 닦아 익혀 한량없는 언설로 말한 평등하지 않은 경계를 온갖 불법에 평등하게 나아가 들 수도 있고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도 있으며, 온갖 견고한 악마 군사를 꺾을 수도 있나니, 이로 인하여 저절로 큰 지혜[自然大智]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염주를 닦아 익힌다 하느니라.
이것을 곧 네 가지 염주로서의 선교한 법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염주의 선교[念住善巧]를 닦고 익혀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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