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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88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51권

by Kay/케이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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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51

 

대보적경 제51권


대당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2. 보살장회

11) 반야바라밀다품 ②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이와 같이 매우 훌륭하고 깨끗한 깨달음의 지혜[覺慧]를 구하기 위하여 묘하고 착하고 깨끗한 법의 밝은 문으로써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이치대로 증득하여 들어가고[如理證入] 이치대로 구절[如理句]을 관찰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치에 맞게 증득하여 들어간다고 하며, 또 어떤 것들을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치에 맞게 증득하여 들어간다 함은 사마타(奢摩他)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고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며, 몸이 멀리 여읜[遠離] 데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고
마음이 조순(調順)함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며, 단견(斷見)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고 상견(常見)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며, 인연(因緣)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고 연기(緣起)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며, 유정(有情)이 없고 목숨[命者]이 없고 보특가라[數取]가 없는 것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고 아직 오지 않았거나[未來] 이미 온[已來] 것이 있고 없음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며, 옮겨감이 없는 인과(因果)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의거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느니라.
비록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닦고 쌓아서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공․무상․무원을 취하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요, 비록 삼마지와 삼마발저에서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힘으로써 받아 나지[受生]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며, 비록 신통의 지혜를 취하며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를 다하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요, 비록 남[生]이 없음을 관찰하며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바른 갈래[正趣]가 결정되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니라.
비록 중생이 나가 없다고 관찰하며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대비(大悲)를 버리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요, 비록 모든 중생이 두려워할 만하다고 관찰하며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有]를 취하며 증득하기 때문이며,
비록 고요히 사라져서 욕심을 여읜 데서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러나 욕심을 여의는 법을 짓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요, 비록 즐겁고 묘한 욕심을 버리고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법을 버리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며, 비록 모든 쓸데없는 다른 논리와 사각(思覺)을 버리고 증득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교묘한 방편을 버리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이치대로 증득하여 들어간다고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이치대로 증득하여 들어가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배워야 하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떻게 이 바른 법의 이치에 맞는 구절[如理句]을 배우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리니,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함은 곧 출생하는 구절[出生句]이요 진리에 나아가는 구절[趣理句]이며, 곧 법문의 구절[法門句]이요 면문의 구절[面門句]이며, 곧 원인의 구절[因句]이요 쌓아 모으는 구절[積集句]이며, 곧 서로 어기지 않는 구절[不相違句]이요 다투어 따짐이 없는 구절[無諍論句]이며,
곧 버리는 구절[捨句]이요 잡아 가짐이 없는 구절[無執取句]이며, 곧 버림이 없는 구절[無棄捨句]이요 쓸데없는 다른 논리가 없는 구절[無戱論句]이며, 곧 버림이 없는 구절[無捨句]이요 비방함이 없는 구절[無誹謗句]이며, 곧 경멸함이 없는 구절[無輕蔑句]이요. 따라 족함이 없는 구절[無隨足句]이며, 곧 다툼이 없는 구절[無諍句]이요 물러남이 없는 구절[無退轉句]이며, 곧 다스림이 없는 구절[無對治句]이니라.
또 사리자야,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함은 진실한 성품[實性] 구절이며, 진실한 성품에 계합되지 않음이 없는[非不如性] 구절이요 진여(眞如)의 구절이며, 진지에 계합하는[如理] 구절이요 3세가 평등한[三世平等] 구절이며, 분별을 여읜[離分別] 구절이니라.
또 사리자야,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함은 물질[色]에 대한 인식[識]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無依住句]이요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의 앎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며, 눈․빛깔․안식(眼識)의 성품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요 귀․소리․이식(耳識)의 성품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며, 코․냄새․비식(鼻識)의 성품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요 혀․맛․설식(舌識)의 성품에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며, 몸․접촉․신식(身識)의 성품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요 뜻․법․의식(意識)의 성품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는 구절이니라.
또 사리자야,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함은 곧 이치[義]에 의지하는 구절이요 법(法)에 의지하는 구절이며, 곧 지혜[智]에 의지하는 구절이요 분명한 이치[了義]에 의지하는 구절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한량없는 법문을 곧 이치에 맞는 구절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게 증득하여 들어가서 바른 방편에 힘써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을 할 때에도 능히 관찰하는 이[能觀者]가 없다 함을 이치대로 관찰해야 하나니, 관찰함이 아니요 관찰하지 않음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면 이치대로의 관찰이라 하지만, 이와 다르게 관찰하면 이치대로의 관찰이 아니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치에 맞는 방편을 쓴 보살은 조그마한 법에서도 어리석거나 미혹됨이 없고 조그마한 법에도 장애가 생기지 않으며, 조그마한 법도 해탈의 문이 아님이 없고 조그마한 법을 끊기 위하여 힘써 정진하지 않으며, 조그마한 법을 증득하기 위하여 용감하고 바르게 노력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이치에 맞게 바른 견해를 갖추어서 그 보는 바와 같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들을 바르게 관찰한다 하느냐 하면, 볼 것이 없는 것[無所見]을 말하나니, 볼 것이 없다 함은 곧 나는 것도 없고 나는 것이 없다 함은 곧 일어남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다 함은 곧 비추는 것이 없음을 이름한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차례로 법을 굴리면서 앞에서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나니, 나아가 보살마하살이 수행하는 반야바라밀다까지를 이름하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떻게 이치대로 바른 관찰[如理正觀]을 해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바르게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하나니, 말하자면 나는 이치에 맞게 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이
이치에 맞다고 관찰하고 나는 나가 없기 때문에 곧 모든 법도 나가 없다고 관찰하며, 중생은 나가 없기 때문에 곧 모든 법도 역시 나가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이치대로 관찰한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이치대로 방편[如理方便]을 수행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이치에 맞는 생사의 성품[生死性]과 이치에 맞는 열반의 성품[涅槃性]은 서로 함께 뒤섞여졌다고 관찰하지 않나니,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이치에 맞는 방편이라 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이 보살은 번뇌의 성품과 열반의 성품은 동일하게 합쳐진 모양이어서 차이가 없다고 관찰하고 또한 상응하다거나 위배되는 것이라고 분별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방편이라 하며 또한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이치에 맞는 방편은 모두가 한량없는 중생의 처소에서 일어나므로 만일 중생의 처소를 버리지도 않고 모든 법을 파괴하지도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이치에 맞는 방편이라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와 같은 모양[相]과 이와 같은 들음[聞]과 이와 같은 이치를 증득하여 들어감[如理證入]과 이와 같은 이치대로의 관찰[如理觀察]과 이와 같은 이치대로의 바른 견해[如理正見] 등의 종류를 알아야 하리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이치에 맞는 바른 지혜[如理正慧]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바른 행[正行]을 수행해야 하나니, 모두가 반야바라밀다를 원만하게 이루기 위해서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반야의 자성이 깨끗하므로 모든 유위행(有爲行)의 법과 함께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떻게 모든 법이 함께 머무르지 않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반야는 무명(無明)을 더불어 함께 머무르지 않고 모든 지어감[行]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아가 늙어 죽음[老死]까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반야는 몸에 대한 견해[身見]와는 함께 머물지 않으며, 나아가 몸에 대한 견해가 근본이 되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 갈래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뽐내거나 거만한 것[高慢]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하열(下劣)한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세간의 여덟 가지 법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반야는 온법(蘊法)․계법(界法)․처법(處法)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반연할 대상[所緣]의 작의(作意)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만(慢)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하만(下慢)․사만(邪慢)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수번뇌(隨煩惱)에 이르기까지 스물한 가지의 법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미세하고 하열한 중품․상품 등의 탐욕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번뇌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어리석고 어둡고 가리우고 막히고 덮인 모든 번뇌와는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물러나는 갈래[退分]에 순하게 따르는 모든 법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욕심내고 다투고 더럽고 흐린 번뇌마(煩惱魔)와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온마(蘊魔)․사마(死魔)․천마(天魔)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악마의 일[魔業]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나[我]를 집착하는 것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유정(有情)으로 목숨이 있는 것[命者]과 보특가라[數取]를 양육(養育)하는 이와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意生]과 마납바(摩納婆) 등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나라는 견해[我見]에 머무르는 따위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업장(業障)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번뇌장(煩惱障)․법장(法障)․견장(見障)․보장(報障) 및 지장(智障)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세속을 따르는 습기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모양으로 반연하는 것을 듣고 보고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번뇌[結縛]를 더욱더 자라나게 하는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아끼거나 버리거나 하는 것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지니고 범하고 참고 성내고 부지런하고 게으르고 고요하고 어지럽고 어리석고 지혜로운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바라밀다를 잘 다스리고[能治] 다스려야 할[所治] 모든 법의 지혜로운 성품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멀리 여의는 것[遠離]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멀리 여의지 않는 데에 머무르는 것과 삿된 성품[邪性]과 바른 성품[正性]과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과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것과 나고 죽는 것과 열반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모양으로 다스리는 법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갖가지 차별된 성품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국토의 차별이 있는 성품과 모든 부처님의 차별이 있는 성품과 유정의 차별이 있는 성품과 모든 법의 차별이 있는 성품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온갖 차별이 있는 성품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지혜 없는 것과는 함께 머무르지 않고 지식(智識)과 세속의 이치[世俗義]와 으뜸가는 이치[勝義]와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유정으로서 모양을 가지고 뜻을 일으키는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반야는 지혜[慧]가 현행(現行)하지 않는 것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몸이 없고 형용이 없고 모양이 없고 함[爲]이 없는 것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생각하는 마음과 의식이 편안히 머무르는 등의 법과도 함께 머무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생기는 반야는 미묘하고 청정하므로 이와 같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유위행의 법과는 함께 머물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다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반야의 모양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승의 큰 보살장에 편히 머무르며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반야로 분별하는 선교(善巧)를 얻게 되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곧 이 법으로써 모든 법 가운데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통달하여 선교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름하여 이와 같이 반야로 분별하는 선교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선교는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이로되 나는 이제 간략하게 열 가지의 선교를 설명하겠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온법선교(蘊法善巧)와 계법선교(界法善巧)와 처법선교(處法善巧)와 제법선교(諦法善巧)와 무애해선교(無礙解善巧)와 의취선교(依趣善巧)와 자량선교(資糧善巧)와 도법선교(道法善巧)와 연기선교(緣起善巧)와 일체법선교(一切法善巧)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열 가지 미묘한 선교가 지닌 분별을 만일 통달하게 되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로 분별한다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이 선교를 마땅히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였기에 온법의 선교를 통달할 수 있느냐 하면, 사리자야, 온법의 선교란 5온(蘊)의 법에 의거하여 언설(言說)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어떤 것들이 언설이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언설은 마치 환술로 만들어 낸 것과 아지랑이와 꿈속에서의 일과 전해지는 메아리와 빛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才]로써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법을 설명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나는 ‘이 물질[色]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마치 거품덩어리와 같다’고 말하리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곧 이 거품덩어리는 본래 나가 없고
유정도 없고 태어남[生者]도 없고 목숨도 없고 보특가라[數取]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도 없고 마납바도 없어서 거품덩어리의 성품은 곧 물질의 자성이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의 선교(善巧)를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곧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이 느낌[受]을 비유로 설명하면 마치 물거품[水泡]과 같다’고 말하리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이 물거품에는 본래 나가 없고 유정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목숨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도 없고 마납바도 없어서 물거품의 성품은 곧 느낌의 자성이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법의 선교를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곧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이 생각[想]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마치 아지랑이와 같다’고 말하리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곧 이 아지랑이는 본래 나가 없고 유정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목숨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도 없고 마납바도 없어서 아지랑이의 성품은 곧 생각의 자성이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의 선교를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곧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이 지어감[行]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마치 파초와 같다’고 말하리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곧 저 파초는 본래 나가 없고 유정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목숨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도 없고 마납바도 없고 짓는 것[作者]도 없고 받는 것[受者]도 없어서 파초의 성품은 곧 지어감의 자성이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의 선교를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나는 ‘이 의식[識]을 비유하여 설명하면 마치 요술과 같다’고 말하리라. 왜냐 하면 사리자야, 곧 이 요술에는 본래 나가 없고 유정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목숨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도 없고 마납바도 없고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어서 요술의 성품은 곧 의식의 자성이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법의 선교를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곧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위에서 말한 5온이란 세간(世間)을 말하는 것이니, 세간의 법은 곧 부패되고 파괴되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간의 성품은 곧 5온의 자성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들을 세간의 성품이라 하느냐 하면, 덧없는 성품이요 괴로움의 성품이요 나가 없는 성품이니, 이와 같은 등의 성품을 5온의 성품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5온의 성품이 곧 세간의 성품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속에서 선교(善巧)를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온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려고 하면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서 온법의 선교를 닦고 익힐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계법의 선교[界法善巧]를 통달했느냐 하면, 사리자야, 계법의 선교라 함은 법계(法界)란 곧 땅의 요소[地界]가 되나니, 왜냐 하면 저 법계란 견고하고 단단한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물의 요소[水界]가 되나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축축하고 윤택한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불의 요소[火界]가 되나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성숙한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바람의 요소[風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요동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속에서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법계(法界)란 곧 안식계(眼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비추어 밝게 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이식계(耳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소리를 듣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비식계(鼻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냄새를 맡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설식계(舌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맛을 보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신식계(身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접촉을 깨닫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법계란 곧 의식계(意識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분별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속에서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와 같이 나의 계[我界]와 법계는 평등하고 유정의 계[有情界]와 법계는 평등하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와 법계는 평등하고 생사의 계[生死界]․열반의 계[涅槃界]와 법계는 평등하나니, 이와 같아서 나아가 허공의 계[虛空界]와 법계의 일체 법계가 모두 다 평등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이치 때문에 평등할 수 있느냐 하면, 공으로 인하여 평등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평등하고 변함이 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평등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유위의 계[有爲界]로 증득하여 들어가고 무위의 계[無爲界]로 증득하여 들어감을 설명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곧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를 간택하여 법계에 증득하여 들어가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마땅히 부지런히 계법의
선교를 닦고 익혀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처법의 선교[處法善巧]를 통달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처법의 선교라 함은 눈[眼]은 곧 공하고 나와 내 것[我所]이 없는 것이므로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눈의 성품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며, 나아가 뜻[意]은 곧 공하고 나와 내 것이 없는 것이므로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뜻의 성품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아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비록 모든 곳[處]에서 착하지 않은 일은 쌓아 모으지 않고 착한 일은 쌓아 모으며, 그리고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 두 가지 모양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눈과 빛깔의 처소에서 선교를 잘 통달하여 분명히 아는가 하면, 사리자야, 눈의 빛깔을 관찰하여 욕심을 여의지만 그러나 욕심 여의는 것을 증득하려 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곧 보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귀의 소리와 코의 냄새와 혀의 맛과 몸의 접촉과 뜻의 법도 그러하며 곧 이 뜻의 법을 관찰하여 욕심을 여의지만 그러나 욕심 여의는 것을 증득하려 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보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여래는 미묘한 법을 말씀하시되 혹은 거룩한 곳[聖處]을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거룩하지 않은 곳을 말씀하기도 하느니라. 거룩한 곳이라 함은 도법(道法)을 받을 수 있는 곳이요 거룩하지 않은 곳이라 함은 도법을 멀리 여의는 곳이니, 보살마하살은 도에 편히 머물러서 도를 여의고 머무르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大悲)를 획득하여 도의 처소를 버리지 않게 하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분명히 알아 잘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려고 하면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처법의 선교를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제법의 선교[諦法善巧]를 통달했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행이 있어서 제법(諦法)의 선교에 드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하면, 괴로움의 지혜[苦智]와 쌓임의 지혜[集智]와 사라짐의 지혜[滅智]와 도의 지혜[道智]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지혜라 하고 나아가 도의 지혜라 하는가 하면, 모든 온(蘊)에 대하여 본래 생김이 없는 지혜인 이와 같은 지혜를 괴로움의 지혜라 하고, 모든 염애(染愛)에 대하여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인 이와 같은 지혜를 쌓임의 지혜라 하며, 온갖 것에 대하여 생김도 없고 무너뜨림도 없는 이와 같은 지혜를 사라짐의 지혜라 하고, 어느 때에나 반연의 대상인[所緣] 모든 법에 대하여 손해나 이익이 없는 이와 같은 지혜를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하여 이와 같은 등의 지혜로써 분명하게 알면 비록 또 분명히 통달했다 하더라도 증득하려 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니, 이와 같이 두루 갖춤을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제법선교에도 또 세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세속의 진리[世俗諦]요, 둘째는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勝義諦]며, 셋째는 모양의 진리[相諦]이니라.
사리자야, 세속의 진리라 함은 세간의 모든 언어 문자와 음성을 빌려서 설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 이와 같은 모양을 세속의 진리라 하느니라.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만일 이곳에서는 오히려 마음조차도 작용하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다시 문자로써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 이와 같은 법을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하느니라. 모양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모든 모양이 곧 하나의 모양[一相]이요 이와 같은
하나의 모양은 곧 모양이 없는[無相]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을 모양의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세속의 진리에 대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명하되 게으름이 없고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에서는 그 안의 것을 증득하려 하면서 물러남이 없으며, 저 모양의 진리에서는 본래의 성품을 깊이 통달하여 모양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운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로서 부지런히 힘써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우는 이는 또 하나의 진리[一諦]가 있을 뿐, 그 밖의 진리[二諦]가 없음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리니, 어떤 것이 하나의 진리인가 하면 사라짐의 진리[滅諦]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하나의 진리에서 더할 것이 없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통달하시며, 이미 통달하신 뒤에는 더함이 있는 데에 처한 모든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법을 자세히 설명하시어 그들이 닦고 배워서 더함이 없는 까닭을 깨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알게 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다시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제법의 선교란 모든 거룩한 진리[聖諦]를 잘 통달하기 때문이니, 어떤 것들을 거룩한 진리를 통달한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란 5수온(受蘊)의 그 성품은 진실로 괴로운 것이므로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고,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에서 5온은 모두가 괴로움의 모양이니, 저 괴로움의 모양이란 곧 공한 모양임을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쌓임의 거룩한 진리[集聖諦]란 5수온의 원인은 수면(隨眠)인 애착[愛]과 견해[見]이니, 이것을 쌓임의 진리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원인의 법인 애착과 견해에 대하여 더함도 없고 취함도 없고 미혹됨도 없음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쌓임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滅聖諦]란 만일 5수온이 마지막까지 없어졌다하면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의 법을 관찰하여 과거에도 나지 않았고 미래에도 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물지 않음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도의 거룩한 진리[道聖諦]란 만일 저 도(道)에 의거하여 괴로움의 지혜와 쌓임의 지혜와 사라짐의 지혜를 증득하여 그 밖의 지혜가 없으면 이것을 도의 진리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하게 통달하여 분별함이 없으면 이것을 곧 괴로움이 사라지는 행에 나아가는 거룩한 진리[趣苦滅行聖諦]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진리에 대하여 지혜로써 관찰하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관찰하여 분명히 알게 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진리의 법에 대하여 또 마땅히 관찰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진리냐 하면, 모든 것에 대하여 느끼는 주체[能受]와 느낌을 주는 대상[所受]이 모두 괴로움의 진리이니, 이와 같은 것 속에서 잘 간택해야 하며 곧 이 지혜의 성품으로 잘 간택하여 깨달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쌓임의 진리인가 하면, 만일 이 원인으로부터 모든 온(蘊)이 쌓여 일어나면 이것은 모두 쌓임의 진리이고 이와 같은 원인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쌓이는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사라짐의 진리인가 하면, 모든 느낌이 영영 쉬어져서 느낌을 깨달음이 없으면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한다. 비록 느낌의 사라짐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증득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도의 진리인가 하면, 만일
느낌을 여의는 거룩한 방법을 잘 닦아 익히면 이것을 도의 진리라 하나니, 마치 배나 뗏목과 같아서 느낌을 구하지도 않고 도(道)도 구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행에 나아가는 거룩한 진리[趣苦滅行聖諦]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실제로 관찰하면 고요한 선정에 의거하여 네 가지의 견해를 일으키려니와 그러나 이 네 가지의 견해는 최종의 깨끗함이 아니니, 만일 이와 같은 법을 잘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제법의 선교를 통달함에 있어서 만일 사라짐에서 증득하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나니,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관찰하는 지혜를 곧 괴로움의 지혜[苦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유위(有爲)로 생기는 연(緣)에 대하여 이것은 있다․없다․없지도 않다고 관찰하면 이와 같은 지혜를 쌓음의 지혜[集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나는 것은 곧 남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도무지 사라질 것도 없나니, 이 사라짐이 없는 지혜를 이름하여 다하여 사라짐의 지혜[盡滅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이와 같은 도(道)를 헤아릴 것도 없고 따라 찾을 것도 없으며 관찰할 것도 없으면 이것을 넓고 큰 지혜라 하나니, 이와 같은 지혜를 도의 지혜[道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의 법을 잘 정립하여 진리와 지혜에 대하여 머물러 집착[住著]함이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 제법의 선교를 부지런히 힘써 닦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무애해의 선교[無礙解善巧]를 획득했다고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갖추어 닦고 배운 까닭에 네 가지 장애 없는 지혜[無障礙解]를 두루 갖추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의무애해(義無礙解)와 법무애해(法無礙解)와 사무애해(詞無礙解)와 변무애해(辯無礙解)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의무애해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 이 의무애해를 얻게 되나니, 곧 모든 법의 으뜸가는 요의(要義)를 통달하는 지혜이니라. 이 지혜를 관찰하는 것이 곧 의무애해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모든 깨달음[覺]의 지혜요, 인(因)의 지혜요, 연(緣)의 지혜요, 화합하는[和合] 지혜요, 두루 따라 행하는[遍隨行] 지혜요, 넓고 큰 연이 생기는[廣大緣生] 지혜요, 법 성품이 뒤섞이지 않는[法性無雜] 지혜요, 여래가 따라 들어가는[如來隨入] 지혜요, 실제에 편히 머무르는[安住實際] 지혜요, 공한 법 가운데서 따라 깨닫고 관찰하는[隨覺觀] 지혜요, 모양이 없는 법에서 그대로를 관찰하는[如觀] 지혜요, 소원이 없는 법에서 원과 행을 일으키는[起願行] 지혜이니라.
또 가행(加行)이 없는 데서 가행을 일으키는 지혜요, 하나의 이취[一理趣]에 들어가 증득함[入證]을 관찰하는 지혜요, 유정(有情)이 없는 데에 들어가 증득함을 관찰하는 지혜요, 나[我]가 없는 법에 들어가 증득함을 관찰하는 지혜요, 목숨[命者]이 없는 데서 한결같이 들어가는[一向入] 지혜요, 보특가라[數取]가 없는 데서 으뜸가는 이치[勝義]를 관찰하는 지혜이니라.
또 과거 세상에 대하여 장애가 없음[無礙]을 관찰하는 지혜요, 미래 세상에 대하여 끝이 없음[無盡]을 관찰하는 지혜요, 현재 세상에 대하여 모든 곳[一切處]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온(蘊)의 법에 대하여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계(界)의 법에 대하여 독사와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처(處)에 대하여 허공처럼 다 타버린 것과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안[內]의 법에 대하여 고요함[寂靜]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바깥[外]의 법에 대하여 행할 것이 없음[無所行]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경계(境界)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음[無有]을 관찰하는 지혜이니라.
또 모든 염주(念住)에 대하여 편안히 머무름[安住]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세계[趣]에 대하여 따라 행함[隨行]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연기(緣起)에 대하여 실제로 봄[現見]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진리의 법[諦法]에 대하여 통달함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괴로움[苦]에 대하여 남이 없음[無生]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쌓임[集]에 대하여 가행이 없음[無加行]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사라짐[滅]에 대하여 모양을 여읨[離相]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도(道)에 대하여 구제함[救濟]을 관찰하는 지혜이니라.

또 모든 법 안에서 구절로 분석함[句分析]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근(根)의 법에 대하여 증득하여 들어감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힘[力]의 법에 대하여 굴복함이 없음[無屈伏]을 관찰하는 지혜요, 사마타(奢摩他)에 대하여 의지할 처소를 관찰하는 지혜요, 비발사나(毘鉢舍那)에 대하여 밝게 비춤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요술로 된 일[幻事]에 대하여 허망하게 모였음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아지랑이에 대하여 홀리어 어지러움을 관찰하는 지혜요, 꿈속의 일에 대하여 허망하게 본 것임을 관찰하는 지혜요, 저 전해지는 메아리에 대하여 연이 합한 것[緣合]임을 관찰하는 지혜요, 저 빛의 그림자에 대하여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관찰하는 지혜이니라.
또 차별된 모양에 대하여 하나의 모양[一相]임을 관찰하는 지혜요, 저 얽매임에 대하여 속박을 여읨[離縛]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상속(相續)함에 대하여 상속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요, 성문(聲聞)의 지혜에 대하여 음성을 따라 들어감[隨聲入]을 관찰하는 지혜요, 독각의 지혜[獨覺智]에 대하여 넓고 큰 인연으로 생긴 것이 하나의 경계에 들어감을 관찰하는 지혜요, 부처님의 대승(大乘)에 대하여 모든 선근(善根)과 자량(資糧)을 알아 잘 쌓음을 관찰하는 지혜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모든 관찰하는 지혜를 곧 보살마하살의 의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의무애해가 있나니, 이른바 의지하여 나아갈 데[依趣]의 이치요 모든 법 성품이 의지하여 나아갈 길이 그것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은 공이므로 공한 성품의 이치를 요의[義]라 말하는 것이요,
모든 법은 두루 모양이 없으므로 모양이 없는 이치를 요의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은 두루 소원이 없으므로 소원이 없는 이치를 요의라 말하는 것이요, 모든 법은 두루 멀리 여의므로 멀리 여의는 이치를 요의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은 두루 유정이 없고 목숨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으므로 보특가라가 없는 이치를 요의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은 모양의 이치에 따라 들어갈 수 있으면 그것을 곧 의무애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로서 이런 이치를 말하는 이는
곧 머무름이 없는 법[無住法]을 말하는 것이요, 그지없는 법[無盡法]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곧 온갖 밝혀야 할 설명을 말하는 것이요, 곧 온갖 지혜로운 이가 모든 장애가 없이 알아 간택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 사람은 곧 모든 부처님 세존의 인가(印可)를 받게 되고 따라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이 지혜는 곧 참된 지혜[眞慧]요, 진실한 지혜[無異慧]요, 모든 곳에서 간택되고 장애가 없는 지혜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곧 의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법무애해(法無礙解)이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이 법무애해를 얻게 되나니, 모든 법 속의 이치를 따라 증득하여 들어가는 지혜니라. 어떤 것을 따라 증득하여 들어가는 지혜[隨證入智]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모든 법의 이치를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니라. 어떤 것들이 모든 법인가 하면,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과,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과, 샘[漏]이 있는 법과 샘이 없는 법과, 세간의 법과 세간 밖의 법과, 함[爲]이 있는 법과 함이 없는 법과, 더러운 법과 청정한 법과, 생사(生死)를 따르는 법과 열반의 법 등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을 따라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니라. 법의 성품은 평등하고 보리(菩提)도 평등하나니, 이와 같은 지혜의 성품을 곧 법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법무애해라 함은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아는 마음의 지혜로써 이와 같이 탐내는 행[貪行]을 증득하여 들어가니, 이와 같이 임시로 세운[仮立]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고, 혹은 또 방편인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며, 혹은 또 견고하게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고, 혹은 또 작고 엷게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며,
혹은 또 이치가 아닌[非處]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고, 혹은 또 구하려고 하며[營求]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며, 혹은 또 과거 세상을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고, 혹은
또 끝없이 기이한 모양을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며, 혹은 또 현재의 많은 인연을 탐내는 행을 증득하여 들어가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유정들이 이와 같이 탐내는 모양을 환히 아나니, 혹 어떤 중생은 안으로는 탐(貪)하되 밖으로는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밖으로는 탐하되 안으로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안팎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빛깔[色]은 탐하되 소리[聲]는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소리는 탐하되 빛깔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를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은 탐하되 냄새[香]는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냄새는 탐하되 빛깔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냄새를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은 탐하되 맛[味]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빛깔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은 탐하되 접촉[觸]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빛깔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소리는 탐하되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냄새는 탐하되 소리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를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소리는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소리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소리는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소리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냄새는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을 탐하되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냄새와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냄새는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냄새와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맛과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는 탐하되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냄새는 탐하되 빛깔과 소리는 탐내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를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는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빛깔과 소리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는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빛깔과 소리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는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소리와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와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는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소리와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와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냄새와 맛은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냄새와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냄새와 맛과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는 탐하되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맛은 탐하되 빛깔과 소리와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는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빛깔과 소리와 냄새는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와 맛은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소리와 냄새와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소리와 냄새와 맛과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은 탐하되 접촉은 탐하지 않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접촉은 탐하되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은 탐하지 않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접촉을 모두 다 탐하기도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한량없는 중생들은 모두 저마다 이 한량없는 탐내는 모양을 일으키어 탐내는 행에 들어가나니, 보살마하살은 이 문(門)에 증득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2만 1천 가지 탐내는 행의 문[貪行門]과 2만 1천 가지 성내는 행의 문[瞋行門]과 2만 1천 가지 어리석은 행의 문[癡行門]과 2만 1천 가지 탐냄․성냄․어리석음을 함께 하는 행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8만 4천 번뇌 행의 문에 증득하여 들어가면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넓고 큰 지혜와 행을 따라 말해주는 지혜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말해 주는 지혜와, 때[時]를 지나지 않게 말해 주는 지혜와, 근기(根器)에 차별이 있게 하는 지혜와, 말을 하되 거짓말이 되지 않는 지혜를 온전히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모든 뛰어난 지혜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법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사무애해(詞無礙解)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이와 같은 사무애해를 구족하였나니, 모든 말[言詞]에 대하여 증득하여 들어가는 지혜이니라.
이 지혜를 얻고 나면 모든 하늘[天]의 말과 모든 용의 말과 야차의 말과 건달바의 말과 아수라의 말과 가루라의 말과 긴나라의 말과 마후라가의 말과 사람의 말 및 사람이 아닌 것의 말 등을 환히 알게 되며,
나아가 5도(道) 중생으로서
의식[識]이 있는 것의 모든 말과 음성이며 상의(相議)하는 말까지도 보살은 모두 이 지혜로써 증득하여 들어가고, 또 이러한 말과 음성으로써 그 중생들에게 바른 법을 널리 말해주나니,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사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또 다른 사무애해가 있나니,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말을 분명히 알 수 있으므로 오직 나타남에 따라 이와 같은 법과 이와 같은 말을 잘 알며, 응해 옴에 따라 이와 같은 법과 이와 같을 말을 잘 말하며, 그 글자로써 그 법을 숨겨야 할 그러한 언사를 환히 잘 아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사무애해로써 이것은 하나의 명언(名言)이요 이것은 두 개의 명언이며 이것은 여러 개의 명언이라 함을 분명히 알고, 또 이것은 여인의 명언이요 이것은 남자의 명언이요 이것은 남자도 여인도 아닌 이의 명언이라 함을 분명히 알며, 또 이것은 간략한 명언이요 이것은 자세한 명언이요 이것은 좋은 명언이요 이것은 나쁜 명언이라 함을 확실히 알고, 또 과거의 명언이요 미래의 명언이요 현재의 명언임을 확실하게 알며, 또 이와 같은 모양에는 한 글자가 더 늘었고 이와 같은 모양에는 여러 글자가 더 늘어났다 함을 분명히 아나니,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분명하게 잘 알면 이것을 곧 사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또 다른 사무애해가 있느니라. 보살마하살이 하는 말은 한량없는 공덕이 함께 모여서 이루어지나니, 어떤 것이 그것이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이 하는 말은 미약함이 없느니라. 곧 이 말은 교묘하게 시설하여 번거로움도 없고 급속함도 없으며 말이 극히 분명하고 또렷하며, 글의 뜻이 원만하게 구비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며 갖가지로 아름답고 묘하여 깊은 이치를 드러내 보이며, 세속의 이치와 으뜸가는 이치로 장엄하고 스스로 마음의 지혜를 깨닫고 통달하여 장애가 없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시고
중생들을 즐겁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보살마하살의 사무애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변무애해(辯無礙解)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의 언변[辯]이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이 인사에 대하여 장애 없이 기별(記別)하는 구변과 막힘 없이 기별하는 구변과 널리 펴 끊어짐이 없는 구변과 신속한 구변과 재빠른 구변과 움직일 수 없는 구변과 자꾸 막히지 않는 구변과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해 내는 구변과 물러나거나 겁(怯)이 없는 구변과 서로 거스르지 않는 구변과 다툼이 없는 구변과 좋아할 만한 법의 구변과 참는 힘에 머무르는 구변과 묘하고 매우 깊은 구변과 갖가지로 차별된 구변과 갖가지 미묘한 구변과 세속 및 으뜸가는 이치의 구변을 얻게 되느니라.
또 온갖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를 건립하는 구변과 온갖 염주(念住)․정단(正斷)․신족(神足)․근(根)․역(力)․각지(覺支)․도분(道分)․사마타(奢摩他) 및 비발사나(毘鉢舍那)를 건립하는 구변과 온갖 정려(靜慮)․해탈(解脫)․삼마지(三摩地) 및 삼마발저(三摩鉢底)를 건립하는 구변과 넓고 큰 지혜의 구변과 온갖 성인들이 꾀한 구변과 모든 중생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구변을 얻게 되느니라.
또 떠듬거림이 없는 언변(言辯)과 막힘이 없는 언변과 경솔하거나 들뜸이 없는 언변과 거칢이 없는 언변과 사랑스러우면서 부드러운 언변과 깨끗한 언변과 제멋대로 내뱉는 언변과 집착함이 없는 언변과 가르치고 인도하는 언변과 삼마희다(三摩呬多)의 언변과 묘하게 상응하는 언변과 빈틈이 없는 언변과 아름답고 절묘한 음성의 언변과 매끄러운 음성의 언변과 나무라거나 꾸짖을 데가 없는 언변과 많은 성인이 칭찬하는 언변을 얻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모든 언변으로써 끝이 없는 모든 부처님 국토에 두루 알리고
그들이 하는 말소리는 모든 범음(梵音)의 언사를 초월하며, 이러한 말의 음성은 밝고 분명하고 청정하여 모든 여래의 인가(印可)를 받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변재를 완전히 갖추었고 이 말과 음성으로써 모든 유정과 보특가라[數取者]를 가엾이 여기어 널리 그들을 위하여 미묘하고 바른 법을 연설하여 그들이 나고 죽는 데서 벗어나고 영원히 많은 고통이 다 끝나게 하나니,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변무애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무애해의 선교[無礙解善巧]라 하며 이 무애해의 선교로 말미암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나니, 부지런히 힘써 무애해의 선교를 닦고 익혀야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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