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50권
대보적경 제50권
대당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2. 보살장회
10) 정려바라밀다품 ②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정려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이와 같이 물러남이 없는 신통을 획득하여 지혜로 짓는 업을 잘 건립하느니라.
사리자야,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신통과 지혜를 획득함은 깨끗한 마음과 신선한 마음과 밝고 정결한 마음과 흐림이 없는 마음과 수번뇌(隨煩惱)를 여읜 마음과 잘 길들인 마음과 아주 고요한 마음과 잘 닦은 마음을 말미암아서이니, 이와 같은 마음의 모양이 나게 된 곳은 정려(靜慮)와 해탈(解脫)과 삼마지(三摩地)와 삼마발저(三摩鉢底)에서 일어나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세간에 있을 때에도 일부러 뜻을 지어서 나는 것이요 속박에 의하여 나는 것이 아니며 속박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치거나 받아 나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허망한 분별을 해탈했기 때문이요, 모든 진실하지 못한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이며, 모든 뒤바뀜과 허망한 집착이 의지하는 것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세계에 나타날 때에 해탈한 그대로 태어나고 해탈한 채로 목숨을 마치고 해탈한 채로 받아 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생(生)을 받아 나타나서는 대승(大乘)을 이루어 마치고 모든 부처님의 바른 교법을 원만히 하며 시방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널리 불법을 구하느니라. 비록 뜻하여 구하는 것이 있더라도 취함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모든 불법을 따라 들어감은 곧 모든 법을 위해서요, 모든 법을 따라 들어감은 곧 모든 불법을 위해서이니, 이와 같이 보살은
불법과 모든 법을 따라 들어가되 그 법(法)과 법 아닌[非法] 행을 따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모든 법을 사실대로 구할 때에 취함도 없고 얻음도 없음에 편히 머무르는 것은 이는 곧 한 법도 산수(算數)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산수의 길을 초월했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의 평등한 성품을 분명히 통달하면 이는 곧 법과 법 아님을 고집하지 아니 하리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고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그 가운데서 이치[義]가 있다고 헤아리면 이는 곧 광대한 이치가 있음을 획득하게 되지만, 만일 이치에 대하여 잘 헤아리지 못한다면 이는 곧 이치와 이치 아닌 것이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치가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처소에서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걸림이 없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이 걸림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으면 곧 장애 없는 깨달음을 획득하게 되고, 장애 없는 깨달음이 있으면 곧 모든 것에 집착함이 없으며, 집착함이 없으면 곧 머무를 곳이 없고, 머무를 곳이 없으면 곧 모자랄 것이 없으며, 모자랄 것이 없으면 곧 어리석음도 없고 구함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구함도 없으면 곧 미혹됨도 없고, 미혹이 없으면 곧 내 것[我所]이 없으며, 내 것이 없으면 곧 받아들임이 없으며, 받아들임이 없으면 곧 고집함이 없으며, 고집함이 없으면 곧 다투어 논란함도 없느니라.
만일 다투어 논란함이 없으면 이는 곧 다툼이 없는 사문의 법이요, 다툼이 없는 사문의 법이 있으면 이는 곧 모든 것이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어서 허공과 같이 구하게 되며, 저 허공과 같이 구할 수 있으면 곧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처소에 얽매임이 없으면 곧 색상(色相)과 형량(形量)이 없으며, 그 색상과 형량이 없으면 곧 이와 같이 따라 깨달을[隨覺] 수 있으며,
만일 이와 같이 따라 깨달을 수 있으면 곧 이와 같이 통달(通達)할 수 있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따라 깨닫고 통달한다고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따라 깨닫고 통달할 수 있으면 이곳에서는 조그마한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따라 깨닫고 통달한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따라 깨닫고 통달함에 평등하게 증득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이 보살마하살은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매우 드물고 기특한 전에 없었던 법을 성취한다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드물고 기특한 전에 없었던 법을 성취한다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정려바라다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비록 대자(大慈)를 행한다 하더라도 항상 나 없음[無我]을 관찰하고 비록 대비(大悲)를 행한다 하더라도 중생이 없음을 알며, 비록 대희(大喜)를 행한다 하더라도 목숨[命者]이 없음을 알고 비록 대사(大捨)를 행한다 하더라도 삭취취(數取趣)가 없음을 아느니라.
비록 널리 큰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순조롭고, 비록 대경을 반연하여 계율을 깨끗이 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고요하며, 비록 모욕을 받아들이며 인욕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다함이 없고 비록 부지런히 정진을 다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가려서 쌓고, 비록 모든 선정에 든다 하더라도 바른 마음으로 자세히 살피며, 비록 두루 지혜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행하는 것이 없느니라.
비록 4념주(念住)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반연하는 생각도 없고 또한 뜻을 일으킴[作意]도 없으며, 비록 4정단(正斷)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나거나 없어짐이 없으며, 비록 여의족(如意足)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쓸데없는 다른 논란이 없고, 비록 깨끗한 믿음[淨信]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매이거나 집착함이 없으며, 비록 바른 노력[正勤]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항상 멀리 여의고, 비록 기억[念]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자유로우며, 비록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평등함을 증득하고, 비록 반라야(般羅若)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본래 근본이 없느니라.
비록 모든 힘[力]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꺾거나 조복함이 없고,
비록 각분(覺分)을 행한다 하더라도 보리(菩提)를 상세히 풀어서 밝히며, 비록 도분(道分)을 닦는다 하더라도 마음에서는 닦는 것이 없고, 비록 사마타(奢摩他)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고요히 사라지며,
비록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정해진 관(觀)이 없고, 비록 거룩한 진리[聖諦]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두루 알며, 비록 중생을 성숙시킨다 하더라도 마음은 본래부터 깨끗하고, 비록 바른 법을 포섭하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법 성품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비록 불국토를 깨끗하게 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허공과 같이 하고, 비록 생멸없는 법을 증득한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얻는 것이 없으며, 비록 물러나지 않는 경지[不退轉地]를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의 성품에는 물러남이 없고, 비록 모든 묘한 몸매[相]를 얻는다 하더라도 성품에는 몸매가 없음을 알며, 비록 도량(道場)을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3계(界)에서 놀되 항상 주륜(周輪)에 있고, 비록 마군을 항복한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들을 꺾거나 조복함이 없느니라.
비록 모든 법이 곧 보리의 성품임을 안다 하더라도 마음은 따라 깨닫고 알며, 비록 법륜(法輪)을 굴린다 하더라도 마음은 법 성품에 머물러 돌아가거나 옮겨감이 없으며, 비록 또 큰 열반을 나타내 보인다 하더라도 나고 죽는 성품에 대하여 마음은 항상 평등 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따라 깨닫고 통달함에 평등하게 증득하여 들어간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희귀하고 전에 없었던 법은 정려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데서 성취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닦고 배우는 보살의 정려의 모양[靜慮之相]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의 정려는 제 성품[自性]에 머무르지 않나니 이러한 삼마지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보살의 정려는 애욕의 재미[愛味]가 없나니 자신의 안락에 탐착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대비(大悲)를 반연하나니 온갖 번뇌를 끊기 위해서이니라.
보살의 정려는 기필코 물러남이 없나니 탐욕의 성품에서 주장하는 성품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신통을 꾸며서 일으키나니 중생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환히 통달했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마음에 기뻐하고 좋아함이니 마음을 자유로이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모든 삼마발저(三摩鉢底)를 분명히 아나니 온갖 색계와 무색계를 압도하기 때문이니라.
보살의 정려는 바로 고요하고 가장 뛰어나며 고요함을 가까이 하나니 성문이나 독각의 선정을 압도하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분별함이 없나니 극히 마지막까지 원만하고 묘하면서 깨끗하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행품(行品)이 가장 뛰어나나니 습기(習氣)의 상속함이 영영 제거되고 없어졌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지혜로써 초월하고 건너나니 모든 세간을 초월하고 건넜기 때문이니라.
보살의 정려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알려고 하는 길잡이이니 모든 중생들을 잘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3보(寶)의 종자를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나니 부처님의 정려는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가장 높게 드러나나니 삼마희다(三摩呬多)가 항상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자유자재하게 옮겨다니나니 모든 하는 일이 잘 되고 원만해지기 때문이며, 보살의 정려는 바로 큰 나[大我]가 되나니 묘한 지혜로써 큰 나를 삼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보살의 정려가 한량없나니 이 모두는 보살마하살의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쌓아 일어나게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정려바라밀다는 어떠한 법으로 길잡이를 삼는가 하면, 사리자야, 정려바라밀다란 마음으로 고요히 관하는 지혜[靜觀智]로써 길잡이를 삼고 마음이 한 연[一緣]에 머무르는 것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마음이 흩어지거나 동요함이 없는 것으로써 길잡이를 삼고 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는 것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마음의 사마타로써
길잡이를 삼고 마음의 삼마지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삼마지의 뿌리[根]로써 길잡이를 삼고 삼마지의 힘[力]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삼마지의 각분(覺分)으로써 길잡이를 삼고 바른 삼마지로써 길잡이를 삼느니라.
정려(靜慮)와 해탈(解脫)로써 길잡이를 삼고 9차제정(次第定)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9멸제법(滅除法)으로써 길잡이를 삼고 모든 착한 법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번뇌의 원수를 조복하는 것으로써 길잡이를 삼고 삼마지의 쌓임[蘊]이 구족하고 원만한 것으로써 길잡이를 삼으며, 보살마하살의 모든 삼마지로써 길잡이를 삼고 부처님․박가범의 모든 삼마지로써 길잡이를 삼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정려는 모두가 정려바라밀다의 길잡이가 되는 법이니라.
사리자야, 다시 한량없고 그지없이 고요함[寂靜]을 증득하는 법이 있나니, 이 모두가 정려바라밀다의 앞잡이가 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정려바라밀다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구족히 닦고 배우면서 보살행을 행해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정려와 해탈로써 저 언덕에 이르므로
부지런히 여러 겁에 이 행을 행하여
그 마음이 깨끗하고 흐림이 없으면
연꽃같이 세간법에 물들지 않으리라.
두루 비춤[遍照]이라 하는 크고 고요한 정(定)이 있나니
이 정을 수행하면 저 언덕에 이르며
또 달빛으로 깨끗하게 장엄한 정이라 하고
번갯불로 엄정하게 꾸민 정이라고도 한다.
또 높은 행의 정(定)이 있고 마음이 씩씩해지는 정이 있으며
때[垢] 없는 광명의 정이 있고
계율의 덕이 갖추어진 정이 있으며 근심이 없는 정이 있고
모든 법을 자재하게 굴리는 정이 있다.
또 법의 횃불이라는 정이 있고 법이 씩씩해지는 정이 있으며
산처럼 위엄 있는 법이 자재한 정이 있고
바로 법의 지혜로써 저절로 초월하는 정이 있으며
바른 법을 지니어 묘하고 깨끗한 정이 있다.
또 다른 이의 마음을 관찰하는 정이 있고
바른 법의 보배 광명인 정이 있으며
혹(惑)을 없애고 뛰어난 당기[幢]를 장엄하는 정이 있고
악마의 힘을 꺾는 정이 있다.
또 의심을 끊고 집착이 없는 정이 있고
고요한 등불의 정이 있으며
힘이 높고 뛰어난 정이 있고 열 가지 힘의 정이 있으며
공경하는 손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는 정이 있다.
산을 지니어 잘 머무르는 정이 있고
소미로(蘇迷盧)의 크고 밝은 등불이라는 정이 있으며
뛰어남이 없으면서 저 뛰어남보다 더 뛰어난 정이 있고
지혜의 횃불과 지혜의 행이라는 정이 있다.
또 그지없는 지혜의 정이 있고 자유자재한 정이 있으며
지혜를 일으키는 고요한 정이 있고
달의 깨끗함과 해의 음성이라는 정이 있으며
나라연(那羅延)으로서 교만을 꺾는 정이 있다.
또 용과 사자의 외침을 잘 다루는 정이 있고
갖가지의 생각을 멀리 여의는 정이 있으며
뱅뱅 돌아가는 정이 있고 되돌아오는 정이 있으며
깜빡거리지 않는 눈의 힘이 깨끗한 정이 있다.
또 모든 부처님을 염(念)하는 정이 있고
법을 염하는 정과 승가를 염하는 정이 있으며
지혜로 굴리는 정이 있고 공(空)으로 들어가는 정이 있으며
모양이 없는 정과 소원이 없는 정이 있다.
또 금강과 같은 정이 있고 고요한 땅의 정이 있으며
금강과 같은 땅의 정이 있고 높고 뛰어난 정이 있다.
또 산의 왕이라는 정이 있고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정이 있으며
끝없이 굴리는 정과 청정한 음성의 정이 있다.
번뇌를 여의는 정과 자세히 살피는 정이 있고
또 허공이 묘한 정과 허공과 같은 정이 있고
광대한 모든 공덕을 일으키는 정이 있으며
깨닫는 지혜의 정과 기억하는 지혜에 나아가는 정이 있다.
변재(變才)가 그지없는 정과 상속(相續)하는 정이 있고
또 그지없는 언설과 말씨가 다함이 없는 정이 있고
잘 짓고 지은 바를 파괴함이 없는 정이 있으며
자세히 살펴보는 정과 대중이 기뻐하는 정이 있다.
대자(大慈)가 나타나는 정과 대비(大悲)가 광대한 정이 있고
또 기쁨에 드는 정과 경하하는 정이 있고
버리는 정과 두 가지 장애에서 벗어나는 정이 있으며
법의 광명과 법의 이치라는 정이 있다.
금강의 당기와 지혜의 바다라는 정이 있고
또 해탈이 견고한 정이 있고 대중이 기뻐하는 정이 있으며
지혜의 횃불로써 동요함이 없는 정이 있고
깨끗한 연꽃이라는 정이 있다.
또 가려서 쌓는 법이라는 정이 있고 동요함이 없는 정이 있으며
지혜가 으뜸가고 고요한 정이 있고
그지없는 광명과 부처의 바다라는 정이 있으며
또 해탈하는 정이 있고 지혜로써 전수하는 정이 있다.
여래의 묘한 장엄이라는 정이 있고
끝없이 뛰어나게 빛나는 불길의 정이 있으며
또 기뻐하면서 국토를 장엄하는 정이 있고
중생의 뜻을 즐겁게 하는 정이 있다.
온갖 때[時]의 정이 있고
보리의 도를 따르는 삼마지의 정이 있으며
또 저 언덕에 이르는 정이 있고
각분(覺分)의 꽃으로 보배 상투를 장엄하게 시설하는 정이 있다.
감로(甘露)를 베풀고 해탈을 견고하게 하는 정이 있고
바람에 움직임이 없는 왕성한 광명이라는 정이 있으며
또 바닷물이 흐르는 보배 광이라는 정이 있고
나라연(那羅延)과 같은 산봉우리의 힘이라는 정이 있다.
신령하게 통한 광대한 이치의 정이 있어서
삼마지를 묘하게 잘 섭수한다.
또 크게 통달하여 비추는 정이 있어서
모든 부처님․여래의 경계이다.
이러한 고요한 정과
그 밖의 구지(拘胝)의 끝없는 정을 증득하고
정려를 수행하여 저 언덕에 이르면
보살의 공덕 광대하여 한량이 없다.
가고 멈출 때에 늘 정려의 경계에 놀면
그 마음 동요 없고 항상 담박하며
앉고 누울 때에 정 가운데 머무르면
그 위의는 정에 있지 않음이 없다.
정에 들어 큰 음성 일으키고
모든 법성(法性)으로써 항상 고요하면
다른 분별이 없고 자재함도 없으며
나[我]도 없고 목숨도 없고 분별도 없다.
이러함과 그 밖의 끝없는 정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바다로써
총명한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겨
정려를 수행하여 저 언덕에 이른다.
11) 반야바라밀다품(般若波羅蜜多品) ①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인가 하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이것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닦고 보살행을 행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까닭에 보살장(菩薩藏)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이치를 생각하며, 이미 통달한 뒤에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펴 연설하고 그 법의 요점을 열어 보이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나의 설법을 들은 뒤에 법답게 받들어 행하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연구하며, 그 이치를 통달한 뒤에 다른 이에게 연설하고 널리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이야말로 이와 같은 그지없는 지혜의 모양[相]을 증득한다는 것을 알지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지혜란 어떠한 모양이며 어떻게 들어가고 증득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미 말한 지혜란 들음[聞]으로써 모양을 삼아 보살이 이치대로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말하여 그지없는 지혜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양을 나는 자세히 말하리라. 이 모양[相]이라 함은, 보살마하살이 바른 법을 구하기 위하여 즐기고자 하는[欲樂] 것을 모양으로 삼고 이해하고자 하는[欲解]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방편을 모양으로 삼고 착한 벗을 모양으로 삼으며, 교만이 없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견문이 많은[多聞] 이에게 공경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존중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주위를 빙빙 도는[旋繞]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겸손하고 공경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친히 뵙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받들어 섬기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생각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산란하지 않은 것을 모양으로 삼느니라.
또 값진 보배라는 생각을 모양으로 삼고 좋은 약이라는 생각을 모양으로 삼으며, 모든 병이 나았다는 생각을 모양으로 삼고 그릇[器]이라는 생각을 모양으로 삼으며, 나아가 깨닫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큰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깨달음에 증득하여 든다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들으면서 만족해함이 없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버리기를 더욱 더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고르게 따르면서 섭을 여의는[調順離攝]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견문이 많은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모든 한 일들에 대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몸이 고르고 쾌적한 것을 모양으로 삼고 마음이 날렵하고 용감한 것을 모양으로 삼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법을 듣는 대중들이 게으름이 없이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바른 이치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바른 법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바른 수행 방법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증득할 지혜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바라밀다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보살장의 법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모두 거두어 주는[攝法] 법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방편 선교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깨끗하게 머무름[梵住]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신통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느니라.
또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지혜[正智]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염주(念住)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정승(正勝)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신족(神足)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연기(緣起)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무상함[無常]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괴로움의 법[苦法]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나 없음[無我]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고요함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공함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모양 없음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소원 없음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가행이 없음[無加行]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선근으로 가행하는 것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와 같이 자재한 것을 모양으로 삼고 법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잡염(雜染)을 다스리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온갖 번뇌를 억제하고 조복시킨다는 생각을 모양으로 삼으며, 지혜로운 이를 찬미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성인을 친히 뵙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성인 아닌 이를 멀리하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성인에게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모든 근(根)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닦아 익혀서 따라 기억[隨念]함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각분(覺分)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고 거룩한 8지도(支道)를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으며, 여래의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所畏]과 대자(大慈)․대비(大悲)․대희(大喜)․대사(大捨)와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才]와 18불공불법(不共佛法)을 듣는 것을 모양으로 삼느니라.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것을 들으면 곧 그것을 분명하게 알며 만일 이것을 분명하게 알면 곧 이것을 바르게 행하리니, 왜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에 들음의 모양[聞相]으로 나아가 들어가는 그 방편이 한량없기 때문이니, 내가 이제 간략하게 마흔 한 가지를 설명하겠노라.
사리자야, 어떤 것들이 그 모양이냐 하면, 첫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문에 대하여 즐기고자 하는 생각을 내면 이 보살마하살은 곧 듣게 되고 들으면 곧 분명하게 알게 되며, 분명하게 안 뒤에는 곧 바른 행[正行]을 행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둘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문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셋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문에 대하여 방편을 써서 나아가 들어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넷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착한 벗을 친근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아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다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 대하여 마음에 교만함이 없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여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를 공경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일곱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여덟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의 주위를 돌면서 받들어 공경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아홉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 겸손한 마음을 쓰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열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를 친근히 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열한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 귀를 기울이며 많은 이에게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열두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를 받들어 섬기고 맞이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열셋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서 이치를 생각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산란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열넷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 대하여 값진 보배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열다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 대하여 좋은 약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열여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 대하여 탐냄․성냄․어리석음을 없앨 수 있는 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열일곱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서 들은 뒤에 능히 지니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열여덟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법에 나아가서 깨달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열아홉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 대하여 그의 지혜를 좋아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스무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서 들은 뒤에 깨달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스물한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들으면서도 만족해함이 없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스물두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타나(柁那)에 관한 설명을 듣고 보시를 더욱 더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스물셋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시라(尸羅)에 관한 설명을 듣고 계율을 수호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스물넷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찬제[羼底:羼提]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인욕을 잘 닦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스물다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비리야(毘利耶)에 관한 설명을 듣고 바르게 노력하면서 게으름이 없이 정진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스물여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정려(靜慮)에 관한 설명을 듣고 정려에 들어가서 그 마음에 산란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스물일곱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반라야(般羅若)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마음이 결정되어 지혜를 닦으면서 모든 번뇌를 다 끊고자 하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스물여덟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견문이 많은 이에게 크게 기쁨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스물아홉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법을 들은 뒤에 몸이 고르고 쾌적해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서른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법을 들은 뒤에 그 마음이 날렵하고 용감해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요, 서른하나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대승경(大乘經)을 듣고 신심과 의욕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서른두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거두어 주는 법[攝法]을 듣고 나서 그 마음이 나아가 들어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서른셋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염주(念住)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내 신(身)․수(受)․심(心)․법(法)에 나아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서른넷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정승(正勝)에 관한 설명을 듣고 나쁜 법이 이미 생겼거나 아직 생기지 않을 것은 등지거나 버리고 저 착한 법이 이미 생겼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버리지 않고 깨달아 굴리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서른다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신족(神足)에 관한 설명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면서 몸이 가볍다는 생각을 내고 마음도 가볍다는 생각을 내고 의욕도 가볍다는 생각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서른여섯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정려(靜慮)에 관한 설명을 듣고 고요히 생각하며 그 마음이 나아가 들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서른일곱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법 가운데서 업신여기지 않는 행을 듣고 중생들에게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고 고통에 빠진 이에 대해서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며, 바른 법에 대해서는 크게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크게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서른여덟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근(根)에 관한 설명을 들은 뒤에 그 마음이 신근(信根)과 정진근(精進根)과 염근(念根)과 혜근(慧根)과 삼마지근(三摩地根)에 나아가 들어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서른아홉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각분(覺分)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마음이 깨치는 법의 성품에 나아가 들어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마흔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도지(道支)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마음이 열반의 바른 길에 나아가 들어가면 이 사람은 곧 듣게 되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며, 마흔하나째는 만일 어떤 보살이 여래의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所畏]과 대자(大慈)․대비(大悲)․대희(大喜)․대사(大捨)와 걸림없는 변재[無礙辯才]와 18불공불법(不共佛法)과 그 밖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에 관한 설명을 듣고 모두 들은 뒤에는 그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나아가 들면 이 사람은 이와 같이 법답게 듣게 되고 들은 뒤에는 곧 분명히 알게 되며, 분명히 알고 나서는
바른 행을 행하게 될 것이니라.
사리자야, 나는 이미 이 마흔 한 가지의 법으로 들음의 모양[聞相]에 나아가 들어감을 설명했나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 가운데서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면서 듣는 지혜[聞慧]의 본래 모양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 보살행을 행하는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그 뜻을 생각하고 미묘한 법을 통달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분별하여 설명해야 하나니, 이것은 자량(資糧)을 수행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에서 바른 행을 일으키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이 법에 있어서 바른 행을 일으킨 이는 이미 말씀한 대로 수행하고 건립하면서 머무르는 것이니, 이것을 법에 있어서 바른 행을 일으킨다 하느니라. 또 모든 것에서 취하지 않을 수 있으면 이것을 법에 있어서 바른 행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 하면 사리자야, 만일 법에서 취하면 곧 삿된 행[邪行]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법(法)이나 사람[人]에게서 잡아 취할 처소도 없고 자리도 없나니, 이러한 법을 연유하여 벗어날 수 있다 한다면 반드시 옳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행(行)을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 법에서 행이 없는 것조차도 오히려 의심을 내어야 함은 작용(作用)이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법의 행을 취하며 삿된 행을 함이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법을 취하지 않고 바른 행을 행해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모든 법에 장애가 없으면 그것을 바른 행이라 하며, 또 모든 법에 대하여 경멸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른 행이라 하며, 단 모든 법에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을 바른 행이라 하며, 나아가 모든 법에서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면 그것을 바른 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내가 말한 것들이 만일
옳다고 한다면 조그마한 법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나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은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잡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다 하나의 모양[一相]인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법의 성품은 본래 모양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모양이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한다면 이것은 곧 모양이 없기는 하나 도리어 말은 할 수 있어야 하나니, 왜냐 하면 모양이 없거나 모양이 있거나 간에 모두가 모양이 없는 까닭에 이것은 모양이 있다, 이것은 모양이 없다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모든 법의 모양이 곧 모양도 없고 얻어 볼 수도 없고 잡아 취할 수도 없다 함을 잘 깨치고 법답게 분명히 안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행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바른 법의 행을 부지런히 닦은 뒤에는 마땅히 모든 법에서 장애 없이 밝게 비추는 지혜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의 바른 행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바른 행에 머무르는 총명한 이면
보살장에 있어서 잘 결정하며
이 사람은 법에서 집취(執取)하지 않나니
집취함이 없는 행과 모양은 이와 같다.
모든 법을 증득하되 공이 되지 않고
모든 법의 공에서도 평등한 것 아니며
또 공한 법에서 집취할 바 없나니
집취 없는 바른 행과 모양은 이렇다.
법에서는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고
또한 집취하지 않는 법으로써 법을 삼으며
취할 것이 없는 이것을 법 모양이라 하나니
취함 없는 바른 행과 모양은 이렇다.
모든 법에서 지혜가 걸림 없으면
이 지혜는 불에 타지 않음이 없으며
불에 타는 지혜에선 집취할 바 없나니
모든 법의 바른 행과 모양은 이렇다.
지자(智者)는 멀리 여의는 덕(德)에 머무르고
법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리니
이에 의지하여 법칙대로 행하면
그 때에는 청정한 문에 들어가리라.
이 청정한 문은 모든 법을 통달하고
유정의 모든 욕해(欲解)도 환히 아나니
지자는 관(觀)할 것이 없음을 알더라도
이와 같은 법을 널리 연설한다.
아주 깊은 법에서 으뜸가는 이치[勝義] 알고
항상 깊은 이치에서 훌륭하게 결택(決擇)하면
그지없는 공덕의 행이 솟아나서
지혜가 밝고 견문이 많아져서 큰 바다 같으리라.
저 말한 모든 글과 뜻에서
마지막까지 증득할 수 있는 이 없으며
저 글과 뜻은 다 함께 끝이 없고
진실한 바른 행은 항상 동요가 없다.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다른 이에게 법답게 연설까지 하고 나면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에서 광명을 획득하여 능히 모든 무명(無明)의 어두움과 가려진 꺼풀을 깨뜨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광명이 곧 지혜이니, 왜냐 하면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모두 똑똑히 사실대로 알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법을 닦아서 밝은 지혜를 얻게 된 뒤에는 생명에 대한 재난과 많은 고통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기필코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을 짓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착하지 않은 법을 영원히 소멸시키기 위하여 들은 법을 따라 지극히 잘 통달하며 이미 통달하고 나면 이를 곧 모니(牟尼)의 고요함[寂靜]이라고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바른 행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면
빛이 가려져 광명이 단절되므로
비록 많은 색상이 있다 하더라도
밝은 눈으로 볼 수가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비록 어떤 사람이
안으로는 밝은 견해 갖추었다 하더라도
바른 법을 듣지 못했다면
선과 악을 어찌 환히 알 수 있으랴.
견문이 많으면 법을 환히 알고
견문이 많으면 악을 짓지 않으며
견문이 많으면 의(義) 없는 것 버리고
견문이 많으면 열반을 얻는다.
잘 들으면 견문이 자라고
견문이 지혜를 자라게 하며
지혜는 청정한 이치를 닦게 하고
이치를 얻으면 즐거움을 부른다.
슬기로운 이면 이치를 얻고 나서
현재의 법에서 열반을 증득하며
청정하게 깨달은 법과 상응하므로
첫째가는 즐거움[第一樂]을 증득하게 된다.
보살장을 듣고 나서는
바른 법에 잘 머무르게 되면
세간의 큰 광명이 되어
보리의 묘한 행을 행하게 된다.
다시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보살장의 경전을 받아 지니고 바른 행을 하는 사람에게 깊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선지식(善知識)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이미 이런 생각을 낸 뒤에는 또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에 대하여 갑절 더 찾고 구하여 이 법문으로 하여금 한층 더 밝고 깨끗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보살장을 구하기 위하여 신심과 의욕을 일으켜 계책하고 장려하면서 바르게 노력하고 그의 마음을 껴잡아 편안히 머무르게 하며, 이 보살마하살은 4정단(正斷)을 방편으로써 닦아 이루어 온갖 법 중에서 장애가 없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서 닦는 바른 행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른바 법을 설하는 이는
곧 선지식이 되나니
공경하면서 법을 들으며
바른 행에 편히 머물러라.
알려고 하면 항상 물러남이 없고
정진하면 아주 용감해지나니
청정한 지혜를 항상 닦고 다스려
지혜에 항상 편히 머물러라.
저절로 모든 법을 통달하며
믿음의 행에 따르지 않고
지혜로써 법을 자세히 살피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다.
지혜로운 이는 글 구절을 분별하고
뜻에 나아가 더욱 잘 배워서
백품(白品)이나 흑품(黑品) 등에 대하여
항상 닦고 또는 멀리 여의어라.
마음에 일찍이 게으름이 없으면
법에 피하여 물러남이 없고
몸과 의욕이 다 함께 가볍고 편안하여
속히 마음의 정진을 얻는다.
법을 들음으로 인해 지혜가 자라나고
지혜가 자라면 물러날 생각이 없나니
지혜를 항상 염주(念住)에 의지하면
깨끗하고 더러운 법 분명히 알게 된다.
위없는 법을 배우고
뛰어난 염혜(念慧)의 힘에 나아가
중생의 알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
스스로 긴 밤 내내 닦고 배우라.
법을 배운 뒤에는 오르고 나아가서
끝까지 나아가면 지혜가 밝아져서
중생의 알고자 함을 분명히 알 것이니
알게 된 그대로 곧 열어 보여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이와 같이 찾고 구하며 깨달음의 지혜[覺慧]를 통찰함은 이 깨끗하고 착한 법의 밝은 문에 의지하여야 하나니, 보살은 항상 이와 같이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법을 닦고 배우려 하면 마땅히 생각하기를 ‘두 가지 인(因)과 두 가지 연(緣)이 바른 소견을 일으킨다. 어떤 것이 두 가지냐 하면, 이른바 다른 이로부터 음성을 듣는 것[從他聞音]과 속으로 자신이 이치대로 뜻을 일으키는 것[如理作意]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다른 이로부터 음성을 듣고 이치대로 뜻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모양이냐 하면, 찾아서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선정[定]을 즐겨 상응하는 행을 닦는 모든 보살들이면 아직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듣지 못했다. 또 성인의 법과 계율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고 다만 삼마지(三摩地) 가운데서 만족할 줄 아는 생각을 낼뿐이니, 이런 사람은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고 있는 것임을 알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뜨거운 번뇌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라고 말하리라.
이미 모든 뜨거운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늘 어찌 다섯 가지 문[五門]의 나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빠져서 헤매며 쉬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중생은 실로 해탈하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나는 이미 해탈했다’고 말하고 실로 아직 고통을 여의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이런 사람 때문에 사실대로 설법하신 것이니, 만일 다른 이를 따르며 법을 들으면 이야말로 모든 늙고 죽음 등에서 해탈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또 말하기를 ‘나는 먼저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신 아래의 게송을 들은 것과 같다’고 하느니라.
견문이 많으면 법을 환히 알고
견문이 많으면 악을 짓지 않으며
견문이 많으면 의(義) 없는 것 버리고
견문이 많으면 열반을 얻는다.
잘 들으면 견문이 자라고
견문은 지혜를 자라게 하며
지혜는 청정한 이치를 닦게 하고
이치를 얻으면 즐거움을 부른다.
슬기로운 이는 이치를 얻고 나서
현재법에서 열반을 증득하며
법을 듣고 깨끗하며 지혜로워졌으므로
첫째가는 즐거움[第一樂]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생각한 뒤에 마땅히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과 거룩한 법과 비나야(毘那耶)의 가르침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며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열어 보여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모든 중생이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비록 또 듣는다 하더라도 이치에 맞도록 방편으로써 뜻을 짓지 않으면 이 사람은 저 성인의 도에서 바른 행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래는 이런 사람 때문에 바른 법의 요점을 말하되 ‘만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해탈하고자 하면 마땅히 속으로 자신이 이치에 맞추어 생각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치에 맞는 방편[如理方便]이라 하며, 어떻게 보살이 이치에 맞게 뜻을 내어 닦고 배우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이치에 맞는 방편이라는 것은 하나의 법도 합쳐지거나 떨어짐이 없나니, 왜냐 하면 이치에 맞는 방편은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치에 맞는 방편에 뜻을 내어 편히 머무르면 이 모양은 다만 이것은 음성이로되 이 음성의 성품은 생기는 곳이 없고 또한 인연에 의하여 생기지도 않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음성을 낼뿐이니, 왜냐 하면 저 모든 것은 모두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 보살이 이 음성의 과거와 미래의 끝을 관찰하되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이와 같이 관찰한다 해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느니라. 또 이러한 음성을 추구(推求)하되 ‘예전에 있었던 말인가, 지금에 있는 말인가, 앞으로 있을 말인가?’라고 하느니라.
또 거듭 이러한 음성을 추구하되 ‘이미 말했던 것인가, 지금 말하는 것인가. 앞으로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음성은 끊기 위하여 이미 말했는가, 끊기 위하여 지금 말을 하는가, 끊기 위하여 앞으로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음성은 증득하기 위하여 이미 말했었는가 증득하기 위하여 지금 말을 하는가, 증득하기 위하여 앞으로 말할 것인가?’라고 하지만, 이 보살이 이와 같이 음성을 모두 찾고 구하여도 도무지 얻는 것이 없느니라. 또 다시 관찰하되 ‘과거의 모양인가, 미래의 모양인가, 현재의 모양인가?’라고 이렇게 관찰한다 해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는 때를 이름하여 이치에 맞는 방편으로써 뜻을 짓는다 하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는 방편을 쓰는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고 갖추어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이치대로 관찰하며, 모든 보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제 성품[自性]은 사라져 없어진다’고 관찰하나니,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법의 자성이 사라진다’고 관찰하면 이러한 관찰은 이치대로 바르게 관찰하는 것[如理正觀]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공하고 고요하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며, 만일 ‘모든 법은 평등한 성품에 들어 있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남[生]이 없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며,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고요히 사라진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관찰을 할 때에도 역시 능히 관찰하는 이[能觀者]가 있음을 보지 못하나니, 이른바 ‘관찰한 것도 아니고 관찰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라 하지만, 그와 다르게 관찰한다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 아니라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이치에 맞는 방편을 배워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도 어리석게 하거나 미혹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요,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에서도 장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도 해탈의 문이 아님이 없고,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을 끊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정진함이 없으며,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을 증득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격려하고 바르게 노력하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에 맞는 바른 소견으로써 보는 것같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그가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한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볼 것이 없음[無所見]을 말하여 모든 법을 관찰한다 하나니, 어떤 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남[生]이 없다는 것이요
남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일어남이 없는 것이며 일어남이 없다는 것은 비추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이 바른 법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행(行)을 관찰하며 남이 없다[無生]고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나아가 들어간 것이니, 바르게 보는 이면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간 것이니라.
사리자야, 저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어떠한 인연으로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만일 나라는 견해[我見]가 평등한 것이라고 관찰하면 곧 이는 모든 법이 평등한 것이니라.
만일 이렇게 관찰한다면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간 것임을 알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일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고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은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이치를 연구하고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법답게 널리 연설해야 하며, 마땅히 이 법문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방편으로 뜻을 일으켜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여 보살행을 행한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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