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53권
대보적경 제53권
대당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2. 보살장회
11) 반야바라밀다품 ④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바르고 훌륭한 도의 선교[正勝道善巧]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도(道)에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과 착하지 못한 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즉시 욕락(欲樂)을 내어 용맹스럽게 책려(策勵)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르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영원히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즉시 욕락을 내어 용맹스럽게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르는 것이며,
셋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즉시 욕락을 내어 용맹스럽게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르는 것이요,
넷째는 이미 생긴 착한 법을 머무르게 하고 잊지 않고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즉시 욕락을 내어 용맹스럽게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사리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바르고 훌륭한 것[正勝]이라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아직 생기지 않은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른다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말한 바의 ‘아직 생기지 않은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즉시 욕락을 내어 용맹스럽게 책려한다’ 함은 곧 이치대로의 뜻 지음[如理作意]을 말하기 때문이요,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킨다’ 함은 곧
이치대로의 뜻 지음을 버리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며,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른다’ 함은 곧 이치대로 관찰[如理觀察]한다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치에 맞는 방편[如理方便]으로 말미암아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악이요 착하지 않은 법이라 하며, 또 어떤 이치로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는 것이냐 하면, 사리자야,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란 이른바 시라인 계[尸羅戒]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고 선정[定]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며 지혜[慧]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계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냐 하면, 사리자야, 다스려야 할 것이란 이른바 계율을 범하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일으켜 시라의 법을 훼범했을 때에는 여러 가지 계율로 다스리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을 계율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선정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라 하느냐 하면, 규칙을 위반하고 그리고 모든 것으로 마음이 산란한 법을 이끌었을 때에는 모든 묘한 선정 덩어리로 다스리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을 선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지혜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 하느냐 하면, 견해를 훼범하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으로 모든 견해의 번뇌[纏障蓋]를 이끌었을 때에 모든 묘한 지혜 덩어리로 다스리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을 지혜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들은 다 같이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라 하나니, 만일 모두가 이치에 맞게 생각하므로써 이와 같은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생기지 않게 하면 이것을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 다시는 현행하지 않는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첫 번째 바르고 훌륭한 것[正勝]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미 생긴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영원히 끊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르게 한다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만일 모든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 마음에 쌓이면
방향도 없고 처소도 없이 그리고 모든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이 깨달음의 마음에 현행하므로 인(因)에 의지하여 반연할 바 경계를 반연해 생기게 되느니라.
어떤 것을 경계에 반연해서 생기게 된다고 하느냐 하면, 인(因)이 깨끗하고 절묘한 모양이면 탐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손상하거나 무너뜨리는 모양이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며, 무명(無明)의 모양이면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때에 보살은 곧 이러한 이치대로의 생각에 머무르게 되면 깨끗하지 않은 모양이기 때문에 탐냄이 고요해지며,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모양이기 때문에 성냄이 고요해지며, 인연으로 생기는 모양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고요해지느니라.
이 모든 번뇌가 비록 뜻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영영 쉬고 사라지기 때문에 가정으로 언설을 세워 고요해진다[寂靜]고 일컫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고요해져서 따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나니, 다만 아주 없어져서 평등한 성품이 되기 때문에 모든 법을 실제로 관찰하면 곧 이 법을 바르고 훌륭한 것[正勝]이라 할 뿐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두 번째 바르고 훌륭한 것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른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러한 이치가 되는 문구는 한량없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착한 법을 모두 쌓고 모아야 하기 때문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 문구는 한량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그러므로 보살의 온갖 선근은 기꺼이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정진하기 때문에 곧 온갖 선근을 쌓고 모으는 줄 알지니,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법으로 가다듬어 지니고 편히 머무름으로 말미암아 온갖 선근은 모두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세 번째 바르고 훌륭한 것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미 생긴 착한 법에 머무르며 잊지 않고 닦아 익혀서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곧 욕락을 내고 나아가
마음을 가다듬어 지니며 평등하게 편히 머무른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이치는 곧 그것이 보리에 회향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보리에 회향함으로써 모든 선근은 다시는 상실하거나 파괴됨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저 보살은 3계(界)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내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3계에 의지하지 않고 선근을 닦거나 또는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한다면 모든 착한 법은 마지막이 되어서 다함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할 지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네 번째 바르고 훌륭한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도분의 선교[道分善巧]를 부지런히 힘써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다섯 갈래의 도의 선교[五分道善巧]인가 하면, 사리자야, 다섯 갈래라 함은 신근(信根)과 정진근(精進根)과 염근(念根)과 정근(定根) 및 혜근(慧根)이니, 이것을 다섯 갈래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신근(信根)이라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믿음[信]에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이와 같이 나고 죽는 가운데에 처해서 세간의 바른 견해를 믿고 받는 것이니, 이 믿음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업보(業報)에 의지하게 되고 생명을 잃는 인연에 이르기까지도 끝내 모든 악업을 지으려는 뜻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둘째는 이와 같은 모든 보살행(菩薩行)을 믿고 받는 것이니,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른 행을 수행하며 끝내 다른 법[乘]을 증득하려는 뜻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셋째는 이와 같이 으뜸가는 이치[勝義]요 분명한 이치[了義]요 심히 깊은 연기(緣起)인 모든 법에는 나도 없고 유정도 없으며, 다만 이것은 언설로써 임시 세운 것일 뿐이요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는 모양일 뿐임을 믿고 받는 것이니, 이 믿음 때문에 유정이라는 견해의 갈래와 모든 수면(隨眠)들이 다시는 더 자라지 않느니라.
넷째는 이와 같은 힘[力]과 두려움이 없는[無畏] 모든 불법을 믿고 받는 것이니, 이미 믿고 받은 뒤에는 의심을 여의고 미혹을 여의며 모든 불법을 닦고 쌓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양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신근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정진근(精進根)이라 하는가 하면, 법을 믿는 것은 정진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나니, 곧 이 법을 정진근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염근(念根)이라 하는가 하면, 모든 법은 정진으로 말미암아 쌓여 모이고 기억[念]의 힘으로써 상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나니, 곧 이 법을 염근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정근(定根)이라 하는가 하면, 모든 법은 염근의 힘으로 상실되거나 파괴되지 않지만 곧 그 모든 법은 선정[定]으로써 하나의 연[一緣]에 섭수되어 머무르기 때문에 정근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혜근(慧根)이라 하는가 하면, 모든 법은 정근으로써 말미암아 하나의 연에 섭수되어 머물지만 곧 그 모든 법은 지혜[慧]의 힘으로써 관찰하고 통달하고 명료하게 되기 때문에 혜근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뛰어난 근본[增上根]을 갖추어 끊임없이 상속한다면, 바른 행을 수행하여 속히 모든 불법을 원만하게 하며 또한 속히 수기(授記)하는 자리에 나아가 들어가느니라.
사리자야, 비유하면 마치 외도가 5통(通)의 신선이 되었어도 만일 모든 태(胎)에 남녀의 두 모양이 아직 생기기 전이면
마침내 그들을 위해 망령되이 수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여래도 그러하여 만일 모든 보살이 아직 이와 같은 5근(根)을 갖추어 성취하여 끊임없이 상속하기 전이면 끝내 그들을 위해 수기하시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양을 이름하여 보살의 다섯 갈래의 도법(道法)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곧 이와 같은 다섯 갈래의 도의 선교를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 도의 선교[道善巧]에는 다시 다섯 갈래가 있느니라. 어떤 것들이 다섯 갈래냐 하면, 신력(信力)과 정진력(精進力)과 염력(念力)과 정력(定力)과 혜력(慧力)이 그것이니, 사리자야, 이것을 다섯 갈래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신력(信力)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은 깨끗하고 뛰어난 견해와 믿고 받음이 결정된지라 견고하여 파괴하기 어렵고 눌러 조복시킬 수 없나니, 가령 어떤 악마가 부처의 형상으로 화현하여 그 보살에게 와서 훼방하며 이 보살이 지닌 바른 법의 지혜와 뛰어난 해탈에 대하여 멀리 여의게 하고 마음이 기쁘지 않게 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법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할 때에,
사리자야, 가령 4대(大)의 성품이 서로서로 바뀌어 변한다 해도 끝내 믿음의 힘과 훌륭한 견해를 성취한 이 보살로 하여금 악마에게 미혹되어 그 믿음의 힘이 기울어지거나 동요되게 할 수는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신력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정진력(精進力)이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은 부지런히 정진하고 방편으로 모든 착한 법을 닦아 익힐 때에 그 모든 곳에서 견고하게 머물러 지니는[住持] 힘을 얻게 되나니, 이 힘 때문에 그곳에서 하는 일이
아직 끝나기 전이라도 그 동안에는 모든 하늘과 세간이 이 보살이 머물러 지니는 힘을 이동하게 하거나 본래의 자리에서 머무르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정진력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염력(念力)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들은 저 여러 법에서 기억[念]에 편히 머무르는 까닭에 마음을 편히 머무르게 하므로 이동하게 하거나 산란하게 할 수가 없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기억하여 지니는[念持] 힘으로써 모든 번뇌를 잘 꺾어 없애고 이 기억을 눌러 조복시킬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염력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삼마지력(三摩地力)이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들이 모든 정려 갈래[靜慮支]에 편히 머무르거나 멀리 여읠 적에 비록 모든 음성과 모든 말로 지은 업의 길[語業道]과 음성의 가시[刺]를 관찰한다 하더라도 맨 처음의 정려[最初靜慮]를 장애하지 못하고,
이 모든 보살들이 비록 이와 같은 모든 착한 법으로써 한량없는 모든 법을 거칠게 생각[尋]하고 세밀하게 생각[伺]하며 추구한다 하더라도 두 번째 정려를 장애하지 못하며, 이 모든 보살들이 비록 또 생겨나는 기쁨에 편히 머무른다 하더라도 세 번째 정려를 장애하지 못하고, 이 모든 보살들이 비록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고 바른 법을 섭수하여 버림[捨]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 번째 정려를 장애하지 못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 정려에 편히 머무르면 모든 정려로 다스릴 법으로는 그를 눌러 조복시킬 수 없고, 또 이 보살이 비록 삼마지에서 편히 머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선정의 힘에 따라 받아 나지[受生]도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삼마지력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혜력(慧力)이냐 하면, 사리자야, 이 지혜의 힘은 견고해서 조복시키기 어렵나니, 모든 세간과 세간 밖의 법으로써는 이와 같은 지혜의 힘을 조복시킬 수 없느니라. 또 이 보살은 태어날 때 세간에서 이미 행하였고 지금 행해지는 교묘한 기술의 업과 짓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데에 처하여 모든 보살들은 저 모든 것에 대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환히 다 아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은 또 온갖 출세간(出世間)의 법으로써 모든 세간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면 보살마하살은 지혜의 힘으로써 모두 잘 섭수하며, 모든 세간의 하늘과 인간들에게 조복되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혜력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모양을 곧 보살마하살의 다섯 가지의 도의 선교[道善巧]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쓰며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도의 선교를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의 각분의 선교[覺分善巧]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일곱 가지 각분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일곱 가지 각분이냐 하면, 염각분(念覺分)과 택법각분(擇法覺分)과 정진각분(精進覺分)과 희각분(喜覺分)과 안각분(安覺分)과 등지각분(等持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이 그것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일곱 가지 각분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염각분(念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바른 기억[正念]의 힘으로써 모든 법을 따라 깨닫고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고
모든 법을 거칠게 생각하고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고 모든 법을 간택(簡擇)하고 모든 법을 비추어 보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기억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의 체상(體相)을 따라 깨닫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모든 법의 체상을 분명하게 통달하는 지혜라 하느냐 하면, 기억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의 자체의 모양이 공임을 깨닫는 것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통달하면 그것을 곧 염각분의 법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택법각분(擇法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보살은 8만 4천의 모든 법장(法藏)을 간택하는 지혜를 구족하게 되나니, 저 모든 법을 따라 마땅히 간택해야 하되 이와 같은 간택이란 또렷한 이치[了義]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또렷한 이치는 또렷하지 않은 이치[不了義]를 말미암고 또렷하지 않은 이치는 세속의 이치[世俗義]를 말미암으며, 세속의 이치는 으뜸가는 이치[勝義義]를 말미암고 으뜸가는 이치는 임시로 설치한 것[仮施設]을 말미암으며 임시로 설치한 것은 탁월한 결택(決擇)을 말미암나니, 이 탁월한 결택을 곧 간택(簡擇)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것을 택법각분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의 정진각분(精進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보살은 곧 이러한 염(念)․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안(安)․정(定)․사(捨) 각분의 지혜를 섭수하여 즐거워하고 용맹스런 세력으로 물러나거나 줄어짐이 없게 하려 하며, 바른 노력으로 책려(策勵)하며 착한 멍에를 버리지 않고 도(道)를 위하여 앞에서 관찰하면서 일으키게 되는 바른 노력[正勤]이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것을 정진각분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희각분(喜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보살은 법에 대하여 기쁨을 냄으로 말미암아 곧 법에 대한 희열(喜悅)을 느끼고
법에 대한 희열 때문에 마음이 침몰(沈沒)하지 않고 마음이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깨끗한 희열이 생기고 희열이 깨끗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며 모든 번뇌를 여의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것을 희각분의 법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안각분(安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보살은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게 되고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쉬고 모든 허물과 장애[障]를 멀리 여의며 반연의 대상이 되는 경계에서 그 마음이 편히 머무르게 되나니, 이와 같이 되면 곧 삼마지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것을 곧 안각분의 법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삼마지각분(三摩地覺分)이라 하느냐 하면, 보살은 이 선정의 마음으로써 법을 깨달아 알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이 없나니, 왜냐 하면 만일 마음으로 선정을 얻어서 모든 법을 깨달아 알면 마침내 모든 애욕의 소견 등의 번뇌와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니라. 다만 법에서의 평등한 참성품[實性]만은 제외되나니, 마음이 선정에 들어 온갖 법의 평등한 성품을 깨닫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것을 삼마지각분의 법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사각분(捨覺分)의 법이라 하느냐 하면, 보살이 근심과 기쁨을 따르는 법에 대하여는 마음에 집착이 없으며 모든 세간의 법을 마음에서 섭수하지도 않으며 뽐내지도 않고 기죽지도 않으며, 편히 머물러 동요하지도 않으며 기뻐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으며 사랑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오직 거룩한 도를 순하게 따라 닦아 익힐 뿐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것을 사각분의 법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들의 7각분의 법에 대하여 선교를 통달하기 위해서는 곧 즐거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각분의 선교[覺分善巧]를 통달할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도분의 선교[道分善巧]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8성도분(聖道分)을 완전히 갖추느니라. 어떤 것들이 8성도분이냐 하면,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말[正語]과 바른 업[正業]과 바른 생활[正命]과 바른 정진[正精進]과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삼마지[正三摩地]가 그것이니, 이것을 모든 보살들의 8성도분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견해[正見]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뭇 성현들이 세간을 벗어나는[出世間] 견해이니라. 이러한 견해에는 나[我]라는 견해가 일어나지도 않고 유정(有情)이라는 견해가 일어나지도 않으며, 목숨[命者]이라는 견해가 일어나지도 않고 보특가라[數取趣]라는 견해가 일어나지도 않으며, 아주 없다[斷]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고 항상하다[常]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으며, 있다[有]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고 없다[無有]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으며, 착하다[善]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고 착하지 않다[不善]는 견해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아가 열반(涅槃)이라는 견해까지도 일어나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런 견해를 멀리 여의면 이것을 곧 보살의 바른 견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생각[正思惟]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런 생각을 함으로써 곧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의 온갖 번뇌를 일으키게 된다면 이와 같은 생각은 끝내 일으키지 않는 것이요, 만일 모든 보살이 이런 생각을 함으로써 곧 계율[戒]의 무더기와 선정[定]의 무더기와 지혜[慧]의 무더기와 해탈(解脫)의 무더기와 해탈지견(解脫智見)의 무더기 등의 모든 공덕이 자라나게 된다면 이와 같은 생각은 모든 보살들이 항상 일으키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런 법을 성취하면
이것을 곧 바른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말[正語]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이 하는 말들은 자기 자신을 해치거나 괴롭히지도 않고 다른 이들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으며 중생들과 함께 서로 다투지도 않나니, 이 보살이 이런 말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성인의 도에 잘 들어가기 때문에 보살의 바른 말이라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업[正業]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은 끝내 검고 검은 보의 업[黑黑報業]을 짓지 않나니, 만일 그 업이 희고 깨끗한 과보[白淨果報]를 느낄 수 있거나 또는 그 업이 모든 업을 다할 수 있으면 이와 같은 업은 방편을 써서라도 일으키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보살은 곧 이 업으로 흰 업[白業]을 삼고 그 업이 의지가 되어 부지런히 방편에 힘쓰며 평등한 업을 닦나니,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바른 업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생활[正命]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이 가져야 할 거룩한 종자인 두타[杜多]의 공덕에는 아첨하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고 성실하지 못한 생각을 품지도 않으며, 모든 걸인이나 구하는 이에게는 야박하지 않고 만족시키기 쉬우며 기르기 쉽게 하며,
저 궤칙에 대해서는 받들어 수행하되 게으르거나 교만[緩慢]하지 않으며 다른 이의 이익에 질투를 내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는 만족할 줄을 알며, 성인께서 허락한 것이라 하여 깊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고 항상 깨끗하게 스스로 생활을 지키며 행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것이 곧 보살의 바른 생활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정진[正精進]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이 만일 성인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수면(隨眠)이며 모든 삿된 행동을 이 법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라면 보살은 으레 정진하지 않아야 할 것이나, 만일 모든 바른 노력으로써 거룩한 진리[聖諦]에 속한 것으로서 거룩한 도에 나아가 들어가고 열반에 이르기 위해 바른 행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진은 모든 보살이 즐거이 닦고 배워야 할 것이므로 곧 이러한 법을 바른 정진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기억[正念]이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어떤 이가 모든 기억이 지극히 잘 머무르고 성품이 하열하지 않으며 마음이 착하고 정직하여 삿되지 않으며, 나고 죽는 모든 허물을 잘 관찰하면서 큰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 줄 때에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항상 바르게 기억하고 지니면 거룩한 도를 잊지 않게 되기 때문에 곧 이 법을 바른 기억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바른 삼마지(三摩地)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삼마지라 함은 만일 바른 성품[正性]이 평등하다면 온갖 법에서도 평등하나니, 모든 보살들이 이러한 삼마지에 편히 머무른 뒤에는 모든 중생들을 해탈하게 하기 위하여 바른 성품에 나아가 들어가느니라. 이와 같이 바른 선정은 곧 그지없는 도[無盡道]이므로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에게 현관(現觀)을 증득하게 하기 위하여 널리 연설하여 열어 보이시나니, 이것을 보살의 바른 선정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8성도분(聖道分)이라 하나니,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이 8성도분의 선교를 부지런히 닦아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도의 선교[道善巧]를 닦나니, 도의 선교에는 또 두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이니, 이것을 두 가지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사마타의 도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의 마음이 고요하고 깊고도 지극히 고요하고 가장 뛰어나게 고요하며, 산란함이 없고 모든 감관이 담박하여 들뜸이 없으며, 모든 조급함과 혼침을 여의고 편안하고 고요하여 은밀하게 보호하고 모든 아첨을 여의며,
조복하고 따르면서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저 시끄러움을 여의고 멀리 여의는 행[遠離行]을 좋아하며, 몸은 티끌에 물듦이 없고 마음은 미혹되어 요란함이 없으며, 고요한 문[寂靜門]에서 생각하고 뜻을 지으며, 모든 나쁜 욕심을 여의고 희망하는 것이 없고 모든 큰 욕심[大欲]을 멀리하며 기뻐하고 만족할 줄 아느니라.
그리고 바른 생활[正命]이 깨끗하고 바른 행이 원만하며 위의(威儀)를 은밀히 보호하여 때를 알고 분수를 알며, 기르기 쉽고 만족하기 쉽도록 그의 분량을 잘 알며 항상 즐거이 생각하여 간택하고 뽐냄도 없고 기죽음도 없으며, 비루한 말이나 추악한 말을 해도 참고 견디며 상응하는 문[相應門]에서 마음을 내어 편히 머무르고 조용한 방에 있기를 좋아하며, 정려(靜慮) 갈래에 대하여 뜻을 품고 생각을 반연하며 큰사랑[大慈]을 일으키고 대비(大悲)를 끌어내며, 대희(大喜)에 편히 머무르고 대사(大捨)를 닦아 익히며, 첫째 정려[初靜慮]로부터 여덟 가지 선정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와 같은 것을 사마타의 도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 또 한량없는 모든 사마타의 자량(資糧)이 되는 바른 행이 있는데 모든 보살들이 이런 자량의 방편에 나아가 들어가는 이와 같은 것을 사마타의 도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비발사나(毘鉢舍那)의 도라 하느냐 하면,
모든 보살이 묘한 지혜의 갈림에서 거룩한 도를 닦아 익히고 모든 법 가운데 이와 같은 작용이 없음[無作]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고 또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목숨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며, 모든 온(蘊) 가운데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고 모든 계(界) 가운데 법계(法界)임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며, 모든 처(處)에서는 공의 마을[空聚落]임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니라.
또 모든 눈[眼]에서는 환히 비춤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고 연기(緣起)에서는 서로 어기지 않음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며, 모든 견해의 갈림[見趣]에서는 멀리 여읨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고 모든 인과(因果)에서는 업보(業報)를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며, 얻어야 할 과보에서는 증득함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고 들어가야 할 바른 성품에서는 나아가 들어감을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비발사나라 함은 모든 법 가운데서 이치에 맞는 견해[如理見]를 일으키고 모든 법 가운데서 진실한 소견을 일으키며, 모든 법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모든 법 가운데서 공하다는 견해를 일으키며, 모든 법 가운데서 모양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모든 법 가운데서 소원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비발사나라 함은 인(因)이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것도 아니요 인이 없기 때문에 관찰하는 것도 아니며, 나고 없어지고 머무는 인이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것도 아니요 얻을 인이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이것에 대하여 전혀 관찰할 것이 없는데도 또 관찰하며 보지 않으면서도 보고 보면서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면 사실대로의 관찰이라 하고 진실한 견해라 하며 또한 비발사나를 증득하는 선교방편이라고도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관찰 가운데서 비록 이러한 관찰과 견해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저는 하는 일이 없는 데에 떨어지지도 않고 또한 선근의 가행(加行)을 멀리 여의지도 않나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것을 성취하면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비발사나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도법선교(道法善巧)를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도(道)의 모양은 이렇지만, 내가 만일 보살의 도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오직 하나[一]로 나아가는 도의 선교가 있을 뿐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그것이냐 하면, 유독 한 무리[一衆]의 모습일 뿐이어서 같이 하는 이도 없고 돕는 벗도 빌리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스스로 섭수하고 정진하는 세력으로 깨끗하게 이해하려 하면서 견고한 갑옷을 입는 것이니, 왜냐 하면 이 보살은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지도 않고 다른 것을 반연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건립하고 자기의 힘으로 이와 같은 견고한 갑옷을 갖추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갑옷을 모든 중생들은 입지 못했지만 나만 유독 이와 같은 갑옷을 입게 되었다. 모든 성현으로서 새로 뜻을 일으켜 아직 바른 지위에 머무르지 못한 모든 보살들은 아직도 입지 못했지만 나만 이제 홀로 입게 되었다’고 하느니라.
그때에 보살은 또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이렇게 갖추고 있거늘 어찌 보시가 자재(自在)하여 나를 건지겠느냐? 내가 마땅히 자재하여 저 보시를 건져주리라. 이와 같아서 지계․인욕․정진․선정 및 반야 등이 어찌 자재하여 나를 건지겠느냐? 내가 마땅히 자재하여 먼저 그들을 건져주리라’고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어찌 바라밀다(波羅蜜多)가 나를 일으키게 하겠느냐? 내가 마땅히 바라밀다를 일으키리라. (이렇게 널리 말하면서) 모든 선근이 모두 나로 인하여 일어나게 할 것이요 선근이 나를 일으키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에서 돕는 벗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건립하며 ‘나 하나일 뿐, 같이할 이가 없다’고 하면, 장차 견고하고 뛰어난 금강자리[金剛座]에 앉아 스스로의 힘으로써 악마 군사를 꺾어 누를 것이요 한 찰나와 상응하는 묘한 지혜로써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게 되리라.
사리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등의 알려고 하는 방편을 일으켜 반드시 관찰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하나[一]에 나아가는 도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자 하여 이와 같은 하나에 나아가는 도의 선교를 닦고 익히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이와 같은 등이 도의 선교의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도법의 선교를 닦고 익히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연기의 선교[緣起善巧]냐 하면, 사리자야, 모든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연기를 수행하며 은밀하고 고요한 방에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세간은 순전히 큰 고통 덩어리인데 어디서부터 쌓여 일어나는 것일까?’라고 한 뒤에 곧 ‘이와 같은 고통 덩어리는 이치대로 뜻을 짓지 않는 것[不如理作意]이 쌓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 쌓여 일어나고 무명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지어감[行]이 쌓여 일어나며, 모든 지어감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의식[識]이 쌓여 일어나고, 모든 의식이 쌓이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名色]이 쌓여 일어난다.
이름과 물질이 쌓이기 때문에 여섯 감관[六處]이 쌓여 일어나고, 여섯 감관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접촉[觸]이 쌓여 일어나며, 모든 접촉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느낌[受]이 쌓여 일어나고, 모든 느낌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욕망[愛]이 쌓여 일어나며, 모든 욕망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취함[取]이 쌓여 일어나고, 모든 취함이 쌓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有]가 쌓여 일어나며,
모든 존재가 쌓이기 때문에 생겨남[生]이 쌓여 일어나고, 생겨남이 쌓여 일어나기 때문에 늙어 죽고 근심하고 한탄하고 괴로워함 등 모든 것이 다 쌓여 일어난다’고 함을 스스로 분명하게 아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또 생각하기를 ‘마치 저 모든 법이 비록 또 쌓여 일어난다 하더라도 조작이 없고 작용이 없고 주재(主宰)가 없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법은 모두가 선(善)이 인(因)이 되고 움직이지 않음[不動]이 인이 되고 열반이 인이 되므로 저 모든 법은 연(緣)으로부터 생기며 주재가 없는 것도 그와 같다. 또 모든 중생들은 하근(下根)이 인(因)이 되고 중근(中根)이 인이 되고 상근(上根)이 인이 되고 모든 업(業)이 인이 되어 인과(因果)로 유전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모든 취할 것이 있는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쌓여 일어나나니, 보살이 온갖 것을 모두 이렇게 분명히 알면 그것을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또 생각하기를 ‘무엇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일까?’라고 한 뒤에 곧 ‘이치대로 뜻을 짓지 않는 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이 소멸하고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며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기 때문에 나아가서 순수하게 큰 고통 덩어리가 소멸하게 된다’ 함을 스스로 분명하게 아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법의 지혜를 분명히 알면 이것을 곧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은 또 생각하기를 ‘인(因)은 바른 법을 의지하고 모든 연(緣)을 의지하고 화합을 의지하며 모든 선(善)을 닦게 된다. 이 법에서 만일 모든 인(因)이 모든 연(緣)과 화합하고 의지한다면 곧 이 법들은 나를 의지하지도 않고 유정을 의지하지도 않고 목숨을 의지하지도 않고 보특가라를 의지하지도 않을 것이니, 이야말로 저 법은 헤아릴 수가 없구나’라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보살들이 만일 이와 같이 이치대로 관찰한다면 이것을 곧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모든 불법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모든 불법은 모두가
보리(菩提)의 모양이 연(緣)이 되어 생기는 모양임을 고찰하고 모든 연기(緣起)는 모두가 다하여 없어지는 모양이라 함을 관찰하면서도 모든 중생들을 보며 상대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고요히 사라짐[寂滅]에 나아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니, 이것도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연기의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모든 법의 선교[一切法善巧]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모든 법에서 모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두루 포섭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등의 유위와 무위의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선교를 닦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인가 하면, 오묘하고 착한 몸의 행[身行]과 오묘하고 착한 말의 행[語行]과 오묘하고 착한 뜻의 행[意行]이니, 이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는가 하면, 곧 이와 같이 묘하고 착한 몸과 말과 뜻의 행을 마지막 무위의 보리에 회향하고 무위 보리의 묘한 관[妙觀]에 회향하며 또 살벌야[薩伐若]에 회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곧 다섯 가지 도피안(到彼岸)을 쌓고 모으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하면, 보시․지계․인욕․정진 및 선정의 바라밀다이니, 이것을 유위라 하느니라.
만일 반야바라밀다의 무위의 지혜를 말미암아서라면 곧 다섯 가지 도피안을 싫어하거나 헐뜯을 수가 없으며, 이와 같은 묘한 지혜는 또 도피안의 자량(資糧)인 착한 법을 쌓아 모으고 무루(無漏)의 최상의 보리를 믿고 이해하며 그리고 일체지지(一切智智)에 회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장애가 없는 광명으로써 모든 중생을 비추고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攝法]으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나니, 이것을 유위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법에서 나가 없고 유정이 없고 취함도 없고 고집함도 없음을 관찰하며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의 방편선교로써 무위의 평등한 깨달음[等覺]을 좋아하고 믿고 받으며 그리고 일체지지에 회향하면 이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끊지 않고 나고 죽으면서 결박(結縛)이 상속되게 하고 또 영원히 끊고 나고 죽으며 번뇌가 상속하게 하며 보리를 맡아 지니며 결박이 상속하되 일부분의 결박은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나니, 이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만일 또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음을 닦아 익히고 모든 법의 바른 지혜와 현관(現觀)의 선교와 최상의 보리가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으며 무위의 법에서 또다시 증득하려 하면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모든 보살이 비록 3계(界)를 행한다 하더라도 저 3계의 번뇌에 물들지 않나니, 이와 같은 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비록 3계에서 벗어나는 법을 두루 통달한다 하더라도 벗어나는 세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모든 법의 선교[一切法善巧]를 바로 일체지지(一切智智)라 하지만,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지지에 원만하게 증득하여 들어가면 곧 어느 때나 지혜가 선교하나니,
곧 이것을 모든 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사리자야, 만일 보살장(菩薩藏)에 의지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보살마하살이라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지혜에 의지하여 분별하고 교묘하게 통달하여 이와 같은 열 가지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묘한 지혜[妙慧]라 하고 어떤 것이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到彼岸義]인가 하면, 사리자야, 말한 바 지혜란 모든 착한 법을 환히 잘 아는 것이니라. 이렇게 나타나 보이는 지혜[現見慧]는 모든 법을 따르면서 통달하기 때문이요, 진실하게 헤아리는 지혜[眞量慧]는 모든 법을 사실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며, 이 통달하는 지혜[通達慧]는 모든 견해의 갈림에 얽매이는 모든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요, 이 소원을 여의는 지혜[離願慧]는 영원히 모든 욕구와 소원을 여의기 때문이니라.
이 편안하고 기쁜 지혜[安悅慧]는 영원히 모든 뜨거운 번뇌를 쉬게 하기 때문이요, 이 기뻐하는 지혜[歡喜智]는 반연하는 법의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의지하여 나아가는 지혜[依趣智]는 모든 이치에서 지혜가 모두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요, 이 건립하는 지혜[建立慧]는 모든 각품(覺品)의 법을 건립하기 때문이며, 이 모양을 증득하는 지혜[證相慧]는 그 닦는 법[乘]에 따라 과위를 증득하기 때문이요, 이 모양을 환히 아는 지혜[了相慧]는 이 지혜의 성품을 환히 비추어 알기 때문이니라.
이 제도하는 지혜[濟度慧]는 모든 폭류(瀑流)를 구제하기 때문이요, 저 나아가 들어가는 지혜[趣入慧]는 바른 성품의 생멸이 없는 법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저 채찍질하듯 독려하는 지혜[策勵慧]는 모든 착한 법을 떨쳐 일으키기 때문이요, 이 깨끗한 지혜[淸淨慧]는 먼저의 수면(隨眠)과 번뇌의 흐림을 여의기 때문이며, 이 가장 뛰어난 지혜[最勝慧]는 모든 법의 정수리에 오르기 때문이요,
이 미묘한 지혜[微妙慧]는 스스로의 지혜로써 법을 따라 깨닫기 때문이니라.
이 행을 여의는 지혜[離行慧]는 다시는 3계(界)의 법에 물듦이 없기 때문이요, 이 섭수하는 지혜[攝受慧]는 모든 선현이 섭수할 바이기 때문이며, 이 소원을 끊은 지혜[斷願慧]는 모든 모양의 분별을 제거하여 없애기 때문이요, 이 방일함을 버리는 지혜는[捨逸慧] 모든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이 방편의 지혜[方便慧]는 모든 유가사[瑜伽師)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이 성취되기 때문이니라.
이 일으켜 나아가는 지혜[發趣慧]는 장차 온갖 거룩한 지혜의 길에 머무르기 때문이요, 이 광명을 비추는 지혜[照明慧]는 모든 무명의 폭류[無明瀑流]에 가려 어두운 거품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며, 이 광명을 베푸는 지혜[施明慧]는 모든 것을 열어 인도함이 마치 눈과 같기 때문이요, 이 샘이 없는 지혜[無漏慧]는 지혜의 눈이 삿되고 편벽된 길을 뛰어넘기 때문이며, 이 뛰어난 이치의 지혜[勝義慧]는 이와 같이 크고 거룩한 지혜를 환히 비추어 주기 때문이니라.
이 분별이 없는 지혜[無別慧]는 잘 조복하고 따르기 때문이요, 이 광명의 지혜[光明慧]는 모든 지혜의 문이기 때문이며, 저 그지없는 지혜[無盡慧]는 모든 것을 두루 따라다니면서 비추기 때문이요, 이 사라짐이 없는 지혜[無滅慧]는 항상 널리 보기 때문이며, 이 해탈도의 지혜[解脫道慧]는 영원히 취하고 잡는 모든 속박을 끊기 때문이요, 이 처소를 여의지 않는 지혜[不離處慧]는 모든 번뇌장(煩惱障)의 법과는 같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지혜의 모양은 내가 지금 간략하게 설명하였지만, 보살마하살에게는 또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지혜의 업과 행이 있는 줄 알 것이며, 이와 같은 것은 나아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알려고 하는 의욕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슬기롭게 관찰하는 지혜가 있는 줄 알 것이니라.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번뇌의 문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광대한 지혜의 문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은
나아가 모든 성문(聲聞)과 독각(獨覺)과 그리고 정등각(正等覺)께서 지닌 두루한 지혜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지혜로 행해야 할 곳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든 지혜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모두 부지런히 힘써 닦고 배우나니, 이것을 보살의 묘한 지혜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到彼岸義]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은 알아야 할 모든 묘하고 착한 법에 이르기까지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인 줄 알아야 할지니라.
또 사리자야,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은 모든 지혜에 대한 글 구절은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요, 또 모든 보살이 수행하는 차별되고 원만한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원만한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유위(有爲)․무위(無爲)의 법에서 집착함이 없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또 한량없이 나고 죽는 큰 허물을 잘 깨달아 아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법을 깨치지 못한 이에게 잘 깨쳐서 알리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지없는 보배의 광을 잘 열어 보이는 이치는 바로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장애가 없는 해탈의 원만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또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의 평등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가장 탁월하게 결택(決擇)한 선교의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모든 중생 세계를 두루 다니는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원만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또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地]의 마침내 원만한 이치가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불국토를 깨끗하게 닦고 다스리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고, 도량에 나아가 보리좌(菩提座)에 앉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마침내 모든 악마의 군사를 꺾어 조복시키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고, 모든 불법이 모두 원만해지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보살장의 차별된 법문에 바르게 머무르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이와 같은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바르게 닦아 배우고 나면 나는 ‘이들이야말로 모든 바라밀다에서 구경(究竟)을 얻었다’고 말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대승(大乘)에 머무르는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이면 모두가 이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게 청구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이치를 통달하여 널리 다른 이들에게 연설하면서 분별하고 드러내 보이리니, 왜냐 하면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이 보살장의 경전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분별하고 해설하면 이 사람은 반드시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얻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미묘하고 공교로운 업(業)을 마지막까지 통달하는 것이요, 둘째는 태어나 있는 곳이면 항상 높은 종족이 되고 그 당시의 세상에서 영화와 명망을 누리는 것이며, 셋째는 살고 있는 곳에서
큰 위엄이 있고 세력이 자재한 것이요, 넷째는 무릇 말을 하면 모두가 다 복종하고 신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며, 다섯째는 태어났을 적마다 큰 부호가 되는 것이니라.
여섯째는 태어날 적마다 항상 하늘과 인간들이 더욱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요, 일곱째는 인간 세계에 태어나면 항상 전륜왕(轉輪王)이 되어서 크게 자재함을 얻는 것이며, 여덟째는 하늘에 나게 되면 항상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되는 것이요, 아홉째는 만일 색계(色界)에 나면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되는 것이며, 열째는 태어날 때마다 언제나 큰 보리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 경전을 받아 지니면 곧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획득하게 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거나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읽고 외우고 이치를 알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널리 연설하고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은 또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니가란타(尼伽蘭陀)의 삿된 이론과는 뒤섞이지 않으며, 둘째는 나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며, 셋째는 유정이라는 견해가 없으며, 넷째는 목숨이라는 견해가 없으며, 다섯째는 보특가라라는 견해가 없으며,
여섯째는 단견(斷見)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곱째는 상견(常見)을 일으키지 않으며, 여덟째는 모든 세간 일에 보살피려는 뜻이 없으며, 아홉째는 항상 훌륭한 마음을 일으켜 출가(出家)하기를 좋아하며, 열째는 만일 경전을 들으면 속히 받아 지녀서 그 깊은 이치를 깨쳐 아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면서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읽고 외우고 그 이치를 알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널리 분별하여 연설하면 이 사람은 또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바른 생각[正念]을 성취하고, 둘째는 바른 깨달음[正見]을 성취하며, 셋째는 바른 갈래[正趣]를 성취하고, 넷째는 뜻이 용감해짐을 성취하며, 다섯째는 바른 지혜를 성취하고,
여섯째는 재난이 없음을 갖추게 되며, 일곱째는 전생의 일을 기억하게 되고, 여덟째는 성품에 탐욕이 얇아져서 세차고 날카로운 탐욕의 번뇌에 시달리지 않으며, 아홉째는 성품에 성냄이 얇아져서 세차고 날카로운 성냄이 없으므로 무거운 성냄의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열째는 성품에 어리석음이 얇아져서 세차고 날카로운 어리석음이 없으므로 무거운 어리석음의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면서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읽고 외우고 이치를 알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널리 분별하여 연설하면 이 사람은 또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근기가 빨라지는 지혜를 성취하고, 둘째는 말이 민첩해지는 지혜를 성취하며, 셋째는 맹렬하고 날카로운 지혜를 성취하고, 넷째는 날쌔고 빠른 지혜를 성취하며, 다섯째는 광대하고 넓은 지혜를 성취하고,
여섯째는 심히 깊은 지혜를 성취하며, 일곱째는 환히 통달하는 지혜를 성취하고, 여덟째는 집착함이 없는 지혜를 성취하며, 아홉째는 언제나 눈앞에서 일체 여래를 뵙고 뵈온 뒤에는 맑고 아름다운 게송으로써 칭찬을 받으며, 열째는 여래께 이치대로 잘 청해 묻고 또 이치대로 의심난 곳을 잘 해석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고 이치를 알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널리 분별하여 연설하면
이 사람은 또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항상 모든 착하지 않은 벗을 멀리 여의기 좋아하고, 둘째는 항상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기 좋아하며, 셋째는 모든 악마의 모든 속박을 느슨하게 하고, 넷째는 모든 악마의 모든 군진(軍陣)을 꺾어 없애며, 다섯째는 모든 번뇌를 잘 꾸짖고 싫어하며,
여섯째는 모든 행에 대하여 마음에서는 항상 버리고 없애며, 일곱째는 온갖 나쁜 세계[惡趣]로 향하는 길을 어기고 배반하며, 여덟째는 모든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향하며, 아홉째는 생사(生死)를 뛰어넘는 모든 깨끗한 길을 잘 설명하며, 열째는 모든 보살로서 행할 궤칙을 교묘하게 따라 배우고 또 모든 부처님의 신칙을 잘 받들어 행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열 가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와 같은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이치를 연구하여 명료하게 통달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 널리 연설하고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은 곧 위와 같은 공덕의 칭찬과 이익을 획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총명한 이들은 지혜가 끝이 없어
법과 이치를 묘하게 통달하고
뛰어난 글과 말씨 잘 갖추나니
이와 같은 큰 경전을 지니는 까닭이다.
언제나 풍요한 법보의 광[法寶藏]을 얻어
항상 기뻐하며 법 보시[法施]를 행하고
가장 뛰어난 기쁨을 내나니
이와 같은 큰 경전을 지니는 까닭이다.
많은 중생으로서 설법을 듣는 이면
이 광대하고 뛰어난 공덕을 증득[證]하나니
나는 어떻게 이런 법을 말해야
이 경전 지닌 이의 얻는 바와 같을까?
이렇게 가장 뛰어난 지혜를 획득하면
바른 법을 끝내 파괴함이 없으며
기억으로 미묘한 지혜가 발생하여
최상의 지혜에 의지할 곳을 말한다.
부지런히 좋은 말과 바른 법구(法句) 구하면
가장 훌륭한 많은 성인의 칭찬 받으며
항상 듣고 뛰어난 행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은 큰 경전을 지닌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듣고 깊은 이치 지니면서
모든 문구에 허망한 집착 없고
항상 이치를 따라 관찰하며 비추므로
묘한 지혜 자라나서 그 끝이 한량없다.
끝없는 묘한 지혜 끝없는 이치와
제일의(第一義)와 생각하기 어려운 이치들을 잘 알아
시방을 두루 다니며 널리 칭찬하나니
경전들의 탁월한 이익은 그 끝이 없다.
탐냄․성냄․어리석음이 극히 엷어져서
첫째가는 마음의 깨끗함을 획득함은
이와 같은 큰 경전을 들었기 때문이니
공덕과 탁월한 이익은 그 끝이 없다.
비록 훌륭한 재물 얻어 방일함이 없더라도
재물과 이치 중에 어느 것이 더 견고한가를 헤아리다가
세간 재물의 허망함을 깊이 통달하고
그리워함이 없이 집을 떠나게 된다.
조용한 곳으로 나가 숲 속에 있으면서
저 흐리멍텅함[沈]을 항상 멀리 여의고
청정한 법 들으며 싫증냄이 없으며
선정의 바른 교리[敎]에 인색함이 없다.
의심난 것 세간의 길잡이께 청해 묻고
들은 뒤엔 남에게 널리 해석하며
이 때문에 미묘한 지혜 더 자라나서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에서 끝내 물러남이 없다.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 경전을 부지런히 힘써 닦아 배우고 보살의 행을 행하게 되므로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에서 방편으로 바른 법의 요점[法要]을 닦고 배운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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