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3권
대법거다라니경 제13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30. 공양법사품(供養法師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수야마(須夜摩)라는 천자(天子) 보살마하살이 방광여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숲 속에 있으면서 사유하고 기억했던 것을 처음 부처님ㆍ세존께로 와서 귀경(歸敬)할 때에 이미 모든 것을 물었사옵니다.’
그때에 방광부처님은 천자보살로부터 이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곧 신력(神力)으로 큰 음성을 내어 말씀하시되 ‘여래는 이제 다시 이 세 가지 언교의 업장 법문[言敎業藏法門]을 연설하려 하느니라’고 하시자, 그 음성이 이 삼천대천의 온갖 국토와 그 밖의 한량없고 가없는 세계에 두루하였으므로 거기에 있는 모든 중생 가운데 듣지 못한 이가 없었느니라.
그때에 저 억수의 모든 보살들이 이 소리를 듣고 모두가 한 곳에 모였으니, 그 대중은 모든 하늘과 악마와 범천 그리고 그 밖의 가없는 모든 세계 속 사람ㆍ하늘ㆍ악마ㆍ범천의 온갖 대중이었느니라. 그들은 불력(佛力)으로 인하여 하던 일을 다 함께 잠시 멈추고서 모두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길 ‘나무불(南無佛)’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이렇게 하면서 동시에 머리 조아려 모든 부처님께 예배 하였느니라.
그 때에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 음성으로 인하여 바로 허공 등과 같은 원력(願力)과 가지(加持)를 획득하였으며, 당시 저 세존께서는 모든 대중들이 다 함께 모여서 이와 같이 부르는 것을 아시고 그 소리를 염(念)하여 다른 일을 반연하지 않게 하시고 이 말로 인하여 기억하고 사유하면서 곧 온갖 부처님 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느니라.
그 때에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다시 방광여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이옵니다. 원하옵건대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언교를 열어 보이소서. 지금의 이 대중은 모두가 한마음이옵니다.’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는 이 세 가지 언교를 듣고자 하느냐?’
모든 보살들이 말하였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다라니경 중에는 세 가지 언교의 방편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 구(初句)의 방편은 존중(尊重)이라 이름하나니, 능히 듣는 이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받아 지니게 하느니라.’
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을 존중으로 기뻐하면서 받아 지니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을 능히 끊는 것으로 저 존자(尊者)를 섬기면서도 단번에 말하지 않고, 다만 저 행(行)의 인상(印相)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점차로 수용하면서 나타내 보이느니라. 어떻게 저 행을 보여서 인상을 나타내 보이는가? 아직 듣지 못한 법을 모두 관찰케 하는데, 저 행하는 사람[行人]이 석 달 동안 존자를 받들어 섬긴 뒤에야 비로소 이 세 가지의 언교를 얻게 되느니라.’
그때에 저 수야마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행하는 사람이 법을 구할 때 저 존자이신 설법하는 대사(大師)께 어떤 자리를 펴야 세 가지 언교를 언제나 현전(現前)하게 되나이까?
세존이시여, 저 업장(業藏)에는 어떠한 모습이 있사오며 왜 업장이라 이 름하나이까? 또 이 장(藏) 속에서 어떠한 일들을 갈무리해야 감소(減少)하지 않게 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세 가지 방편으로 설법하는 법사는 언제나 현전하여 행하는 것이니, 만일 하나의 방편을 행하면 곧 하나의 장(藏)을 얻느니라. 어떠한 것이 세 가지 방편인가? 행하는 이가 아자문(阿字門)에서 제일의 방편 업장에 들어가는 것이 곧 제일의 인(因)으로 처음의 언교[初言敎]에 들어가는 것이고, 가자문(迦字門)에서 제이의 방편 업장에 들어가는 것이 곧 제이의 인(因)으로 그 다음의 언교[次言敎]에 들어가는 것이며, 나자문(那字門)에서 제삼의 방편의 업장에 들어가는 것이 곧 마지막 언교[終言敎]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가운데서 교화하는 업장의 세 구(句)의 화합으로 인하여 저 아ㆍ가ㆍ나 자(字)로 하여금 사람의 말[人言]ㆍ하늘의 말[天言]ㆍ사람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말과 상응하게 하느니라.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저 다라니 가운데에 들어가느니라. 제일의 언교의 일[言敎事]은 첫 방편[初方便]을 이루어야 해서 마땅히 이와 같이 지녀야 하고, 제이의 언교의 일은 서로의 업이 방편[相業方便]의 일을 이루어야 해서 마땅히 이와 같이 받아 지녀야 하며, 제삼의 언교의 일은 파괴되지 않고 남김없이 이르는 방편[不壞盡至方便]을 이루어야 해서 마땅히 이와 같이 지녀야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남김없이 이르는 방편이라 함은 바로 저 법사가 성취할 업(業)이니, 그 때에는 마땅히 땅의 부분[地分]을 선택해야 하되 세로와 너비가 똑같은 일백 유순(由旬)이거나 2백 유순 또는 더 넓고 넓은 데이니, 과거에 일찍이 일억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그 가운데서 열반에 드신 곳으로서 마땅히 이 가운데에 설법하는 처소를 건립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저 억수의 모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처소가 바로 설법한 처소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뒷날에 장차 있을 법사는 여기서 세간에 출현하는데, 저 설법사가 세간에 출현할 적에는 어떠한 모습인가? 비구와 우바새들로서 일찍이 억수의 모든 부처님께 일찍이 공양한 이라면, 이와 같은 세 가지 언교 업장이 곧 현전하게 되며, 이미 현전한 뒤에는 세 가지 언교의 업장을 구족하고 분명하게 통달하느니라.
이렇게 현전하여 세 가지 업장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그는 반드시 세 가지 언교의 문을 능히 연설할 것이며, 언교가 뛰어나기 때문에 곧 업장의 법을 얻고, 이미 업장의 법을 얻은지라 역시 아(阿) 등의 세 글자의 구법(句法)을 얻어서 드디어 방편의 법문을 성취하게 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은 비구나 우바새가 있어서 설법사의 선전(宣傳)하는 곳을 위한다면, 그 때에는 마땅히 열여섯 시자(侍者)로써 필요한 것을 대드리고 호위하여야 하며, 그 열여섯 사람은 분담하여 네 가지의 일을 맡느니라.
처음의 네 사람은 주로 법사를 위하여 평상과 자리를 깔아 드리는 것이니, 자리를 펼 적에는 지나치게 높게 하지도 너무 낮게 하지도 말며, 양쪽이 배에 오게 하지도 다리에 닿게 하지도 말며, 그 높은 자리[高座]에는 또한 열여섯 겹의 옷[衣]으로 장엄하고 꾸며야 하느니라.
다음의 네 사람은 언제나 법사를 위하여 음식을 장만해 드리는 것이니, 이른바 국ㆍ밥ㆍ떡ㆍ죽의 갖가지 으뜸가는 음식으로 다섯 가지의 맛[五味]이 알맞게 조화되어서 날 것과 익은 것이 적절하고, 차가와도 지나치게 차갑지 않고 따뜻해도 너무 뜨겁지 않으며, 바짝 마르지도 않고 지나치게 기름이 있지도 않으며, 청정하면서 더럽지 않고 법답게 장만하는 것이니라.
그 다음의 네 사람은 주로 법사를 위하여 성읍(城邑)을 오가면서 밖으로 필요한 옷과 깔개와 음료수와 밥과 약과 탕(湯) 등을 빌려 오며 무릇 이 필요한 것을, 때에 의거하여 바쳐 올리면서 법사로 하여금 일을 하는 데에 모자라는 바가 업게 하느니라.
그 다음의 네 사람은 주로 법사를 위하여 모욕(侮辱)적인 일을 막고 그릇된 일을 방지하면서 좌우에서 모시고 수호하게 되는데, 법사가 일을 명하면 모두 잘 수행하되 공경하고 애쓰면서 게으르지 않고, 추위나 더위를 꺼리지 않으며, 가고 오는 데에 따라다니되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는 일에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말을 할 때 속이거나 잘못이 없는 것이니, 언제나 이와 같이 법사를 공손히 모셔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법사로서 행(行)을 구족해서 이와 같은 갖가지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이면, 이때에는 응당 만물을 위하여 크게 사자처럼 외쳐야 하며, 너희들도 역시 그 법사에게 크게 희유한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억수의 모든 부처님께 능히 공양한 이면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이라서 비록 범부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세 가지 언교의 업장 범문을 연설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만일 저 억수의 모든 부처님들이 하시는 일이면 지금의 이 법사도 역시 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에 또한 어떠한 희유(希有)함이 있는가? 만일 모든 여래께서 미묘한 법을 널리 펴시면 이것이 가장 희유한 것이며, 혹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부처님의 보리의 법을 성취하면 또한 희유한 것이며, 혹은 한 중생이라도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으면서 이와 같은 법을 연설하면 이것도 역시 희유하느니라.
마나바야, 혹 어떤 사람이 다만 이와 같은 법사를 공양하기만 하여도 곧 억수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되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중생은 심히 얻기 어려워서 아직 도량(道場)에 앉기도 전에 벌써 모든 부처님의 큰 일[大事]을 구족히 지었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의 말씀을 믿어야 하나니, 모든 여래께서는 허망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 여래께는 모자라는 바가 없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혹 한 벌의 옷과 한 끼의 밥으로도 얼마 동안 머무르시고자 하면 곧 머무실 수 있느니라. 다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저 장차 오는 세상의 한량없는 겁 동안 한량없는 중생을 보시기 때문에 이 언교의 법을 말씀하게 될 뿐이니라.
마나바야, 세간에는 행(行)이 정직한 중생은 적고 나쁜 세상의 중생들은 아첨과 그릇된 일을 많이 행하면서 뭇 나쁜 일을 짓느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으로 나는 오늘 너희들을 가르치고 경계하노니, 미래 세상에는 이러한 행을 짓지 말며 언제나 이와 같은 일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이 때문에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부촉(付囑)하는 것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저 법사가 이 법을 연설할 적에는 저절로 변재를 얻어서 끊어짐이 없으리라.
마나바야, 마치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이 네 가지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큰 신통을 얻고서는 네 개의 큰 강물[河]을 내어 사해(四海)에 흘러 보낼 적에 그 밖의 필요에 따라 모두 수용(受用)하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또 아나바달다용왕이 네 가지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큰 물줄기를 놓아 내보내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마나바야, 저 모든 법사가 네 가지 뜻을 교란하는[亂意] 일에서 해탈하고 바른 선정의 뜻[定意]을 얻어서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대중들에게 깊은 법의 이치를 연설할 때 법을 좋아하는 모든 중생들은 다 충족되며, 다른 부처님 세계의 법을 좋아하는 중생도 이 법을 듣고 난 뒤에는 역시 모두 통달하면서 법답게 수행하느니라.
그 법사가 설법할 때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애욕(愛欲)이라고 하는 나찰녀(羅刹女)가 있는데, 그 법사를 음욕으로 유혹하고 어지럽히기 위하여 짐짓 허공에 처하여 갖가지 기이한 말로 법사를 미혹시키느니라. 만일 그 법사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어지러우면 마땅히 한마음으로 저 주문[呪]을 오로지 생각해야 하느니라.
저 설법하는 처소에서는 언제나 여래의 형상(形像)을 안치하면서 폐하거나 없애지 말아야 하며, 또한 갖가지 향과 꽃을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나니, 그녀가 그것을 본 뒤에는 즉각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 이 언교까지 연설하여 마치면 저 법사와 듣고 외우는 이들 모두가 명료해져서 장애가 없게 되리라.’
그 때에 수야마 보살이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장(藏)의 뜻을 저는 이제 묻고자 하나이다. 어떤 것을 장이라 하고 장에는 어떤 모양이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장이라 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여래의 장은 이름하여 무의(無意)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이 장의 명칭을 무의라 하는가? 마나바야, 어떤 사람이 세간에 출현해서 큰 힘을 두루 갖추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의 힘은 이와 같은 대지(大地)에서 모든 산과 돌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아가 또한 먼지와 흙까지도 없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곧 도끼와 괭이를 가지고 공을 들여 북돋우고 팠지만, 그러나 그의 몸이 다하도록 대지의 형세는 손상됨이 없었으니, 이와 같은 차례로 설령 온갖 중생들 모두가 몸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이 대지를 공략한다 하여도 끝내 대지의 세계를 손상할 수 없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이 여래의 장(藏)의 이치도 역시 그러해서 가령 온갖 중생과 아라한ㆍ벽지불 등이라 하여도 끝내 다할 수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른바 장의 이치도 그와 같아서 구족하고 원만하여 줄어듦이 없으니, 가령 온갖 중생과 성문ㆍ벽지불 등이 다 함께 이 장을 취하면서 분산시키고 열어 보인다 하여도 역시 줄어들거나 손상됨이 없기 때문에 장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장은 본래 줄어듦이 없거늘 어찌 하늘과 사람의 세간이 다하거나 소멸시킬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가령 인연이 있어서 온갖 수계(水界)를 말라붙게 할 수 있고, 세간의 풍륜(風輪)을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고, 온갖 해와 달에 광명을 소멸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온갖 별을 캄캄하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여래의 장은 끝내 변함이 없어서 줄어들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기 때문에 장이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 언교의 장[言敎藏]은 한량없는 종류의 방편과 업문(業門)이 구족하게 성취된 것으로서 나는 조그마한 부분만을 해설하노니, 너희는 마땅히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그 때에 수야마 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 가지 언교(言敎)의 방편에서 당연히 얻어야 할 것을 저희들은 듣고 싶사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와 같은 사람ㆍ하늘ㆍ사람도 하늘도 아닌 세 가지 언교의 법장문[言敎法藏門] 가운데서 처음 첫째의 언교를 공문(空門)이라 하고, 두 번째의 언교를 곧 무상문(無相門)이라 하며, 세 번째의 언교를 바로 무원문(無願門)이라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사람ㆍ하늘ㆍ사람도 하늘도 아닌 세 가지의 언교가 곧 공ㆍ무상ㆍ무원의 세 가지 법문이라 하면, 이 가운데서 어떻게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상응할 수 있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는 이제 나에게 묻기를 ‘어떻게 화합하여 상응할 수 있느냐?’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를테면 아(阿)ㆍ가(迦)ㆍ나(那) 등의 세 가지 자구문(字句門)이 지금 화합해야 하는 것이니라.
이 가운데서 아 자는 바로 다라니(陀羅尼)의 방편이요, 가 자는 바로 화합(和合)의 방편이며, 나 자는 바로 진지(盡至)의 방편이니라.
어떻게 아 자의 방편을 받들어 지녀야 하고, 나아가 어떻게 나 자의 진지 방편을 증득해 알아야 하는가? 마나바야,이 가운데서 사람의 언교라 함은 아 자가 근본이 되고, 하늘의 언교라 함은 가 자가 근본이 되며, 사람도 하늘도 아닌 언교라 함은 나 자가 근본이 되느니라.’
그때에 수야마가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아’ 구의 처소[阿句處]가 곧 사람의 언교 방편이라 하면 어떻게 이 다라니와 화합되는 것이며, 이와 같이 화합하여 어떻게 다시 무상(無相)과 상응하나이까?
세존이시여, 저 ‘가’ 구의 처소[迦句處]가 곧 하늘 언교의 방편이라 하면 어떻게 화합하고 화합되는 것이며, 이와 같이 화합하여 어떻게 다시 무상(無相)과 상응하나이까?
세존이시여, 저 ‘나’ 구의 처소[那句處]가 사람도 하늘도 아닌 언교의 방편이라 하면 어찌하여 진제(盡諦)와 화합할 수 있고, 이와 같은 진제가 어떻게 다시 무원(無願)과 화합하여 상응하나이까?
어떻게 아 자의 사람 언교 속에서 화합하고, 어떻게 지혜[智]로써 아나이까? 어떻게 가 자의 하늘 언교 속에서 화합하며, 이 무상을 어떻게 지혜로써 아나이까? 어떻게 나 자의 사람도 하늘도 아닌 언교 속에서 화합하며, 진지(盡至)를 지혜로써 아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아 자 화합의 방편이란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큰 다라니의 방편이고, 주문의 힘[呪力]으로 화합하여 음식을 알맞게 줄이면서 여타의 사유 없이 저 공상(空想)과 합하면서 공삼매(空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그 때에는 또한 소리나 숨[息]도 없이 아 자를 헤아리며 다라니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다라니에 들어가게 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열네 구(句)로부터 다라니에 들어가니, 이것들을 받아들이고[受] 버리는[捨] 구(句)로 삼느니라. 아 자와 더불어 슬(瑟)ㆍ타(吒)자 가운데에는 두 가지 다른 구의 사(奢) 자와 바(婆) 자가 있어서 이것이 언어(言語)를 짓고 부동구(不動句)를 말하느니라.
마나바야, 언교방편은 아 자와 다라니 나아가 공(空)에 초입(初入)하는 것이니, 이 사람의 언교[人言敎]를 너희들은 배워야 하며, 이와 같이 배우고 나면 이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언교를 얻되 반 달[半月]을 한마음으로 정성껏 사유해서 마땅히 제 몸의 살이 빠지고 줄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은 등의 구(句)를 잘 사유한 뒤에는 또한 하늘의 언교(言敎)를 증득하고 알아야 하리니, 중생들을 위하여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수야마가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등의 구(句)는 어떻게 얻어야 좋은 사유[善思惟]가 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아 자 등의 열네 음(音)과 나아가 슬ㆍ타의 두 글자를 다하기까지 모두가 함께 온갖 언교를 화합하여 받아 지니고 증득해야 하며, 이것에서 모든 부처님의 장(藏)에 있는 모든 일을 보아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아(阿) 등의 열네 음은 분별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그때에 슬ㆍ타는 장애가 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아 자를 말미암아 따로 여타의 일에 들어가나니, 이 때문에 슬ㆍ타와 아는 장애가 되느니라. 너희들은 아와 공문(空門)과 사람 언교의 업(業)을 알아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느 것이 사람의 업[人業]이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사람의 언교는 알 수도 있고 지닐 수도 있는 것이냐?’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알 수도 있고 지닐 수도 있나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알 수 있다면 저 다라니문의 머무르지 않는 법의 이치[不住法義]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의 지혜[不住心智]를 어떻게 관하는 것이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이때 바로 업장(業藏)을 버려야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마(摩) 등의 모든 글자는 오오(五五)로 나뉘어서 공(空)과 방편에 잘 머물러 지닐 수 있고 그것을 판(板) 위에 쓸 수 있느니라. 법사로서 그 아 자를 받아 지니는 이는 사람의 언교를 그 판 위에서 설명하고 온갖 방편을 모두 다라니라고 할 수 있나니, 모든 언교로서 볼 수 없는 것을 판 위에서 보기 때문이니라.
그 가운데서 따로 다섯 글자[五字]가 나뉘게 되는데, 제일 구(句)의 것을 이름하여 사(娑) 자라 하느니라. 만일 법사가 이와 같은 이치를 얻으면, 그 이치가 곧 구경(究竟)이라서 마치 저 가(迦) 자가 제사(祭祀)와 화합하는 것과 같으니라.
모든 하늘의 언교는 이 이치에 들어가지 못하나니, 어찌하여 들어가지 못하는가? 가령 가(迦)가 첫째가 되어 스물한 자(字)가 있는데, 글자가 한 구(句)가 되는 것은 마치 나(那)가 첫머리가 되어 일곱 자 구를 삼는 것과 같으니라.
세 가지 언교 방편은 이와 같이 받아 지니며, 이 세 가지 언교의 아ㆍ가ㆍ나 등은 그 이치가 끊이지 않고 화합을 능히 지으니, 만일 능히 화합하면 곧 능히 방편이 되느니라.
아(阿) 자라고 말하면 바로 이것은 아(我)를 설명하는 것이며, 나(那) 자라고 말하면 바로 비아(非我)를 설명하는 것이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이 가운데서 아(阿)와 아(我)의 이치는 또한 어떠한 것이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 자와 아는 모름지기 들어가야 비로소 아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이와 같은 아 자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앞에서 비유한 설명처럼 저 요술쟁이가 갖가지 기관(機關)으로써 모든 요술을 나타내는 것과 같나니, 너희들은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아자문(阿字門)에는 다시 어떠한 이치가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저 아(阿)는 바로 최초의 교문(敎門)이므로 잘 받아 지녀서 흩어지거나 잃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한 아(阿)는 모양도 없고 광명도 없고 진실한 해탈도 아니며 모든 구(句)와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상응하는 것이니, 마치 새를 잡는 그물이 여러 개의 올로 화합하여 서로 응하면서 얽혀진 것과 같으므로 마땅히 이와 같이 지녀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제삼 구의 나자문(那字門)에서 이 이치는 어떠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마치 저 강물의 언덕[河岸]은 움직이지도 않고 흐르지도 않는 것처럼 나(那) 자도 그와 같나니, 잘 받아 지녀야 하고 주문의 법[呪法]으로써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만일 법을 받는 사람이 주문의 법을 행하면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 하면, 저 모든 법사는 설법하려 할 적에 용모를 단정히 하고 앉아서 먼저 주문을 외우느니라.
다냐타 아가나 아가계 가나 가나가 나나가 가가나가 아가가나가
怛姪他 阿迦那 阿迦界 迦那 迦那迦 那那迦 迦迦那迦 阿迦迦那迦
가나아가나 가가나 바비살뎨 야타바비살뎨 야타가가나 다타바비
迦那阿迦那 迦迦那 婆鼻殺帝 夜他婆鼻殺帝 夜他伽伽那 多他婆鼻
살뎨 다타 마가샤 나가샤 나가나 가가샤
殺帝 多他 摩迦舍 那迦舍 那迦那 迦迦舍
법사가 이때 권속에 둘러싸인 채 이런 가호(加護)의 방편을 이루게 되면, 가호의 방편 때문에 저 법사의 마음을 동요하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면서 그의 설법이 끊이지 않고 욕망의 집착이 없게 하느니라.’
수야마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욕망의 집착이옵니까?’
부처님은 마나바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욕망의 집착이란 마치 앞서 말했던 나찰녀(羅刹女)의 이름과 같으니라. 그녀는 믿는 마음이 없는지라 설법할 때 헛기침[謦欬]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곧 한량없는 나찰녀들과 함께 에워싸 오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이 사람으로 하여금 설법하여 교화하게 하면, 장차 반드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재물들은 끊어질 것이요, 영영 다시는 꽃과 향과 제사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며, 또한 저 음식거리들도 얻지 못하고 나아가 놀라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거나 동요하게 할 수도 없거늘, 어떻게 다시 다른 이의 혼백(魂魄)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등 아첨과 질투[媚妬]의 마음을 품고서 설법할 때에 갖가지 장애를 부리면서 갖가지 방편으로 법사를 미혹하느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이 법사가 아직 주문을 외우기 이전이면 혹 요란(擾亂)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미 주문을 외운 뒤에는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음을 알지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이 법사는 주문의 힘으로 인한 가호하는 방편 때문에 곧 이 제일의 언교를 얻는 것이니, 모든 나찰녀들은 다시는 더 훼방을 놓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그 청중(聽衆)들도 역시 법사에게 ‘어찌하여 이 미혹이 초래되었는가?’를 물어야 하며, 법사가 그 때에 만일 깨닫고 살피면 대중은 또한 법사께 물어서 모든 필요한 바를 공양하고 바쳐야 하며, 만일 깨닫지 못하면 당연히 이와 같이 법사를 인도해야 하느니라. 지금은 속히 일심으로 이 다라니의 심히 깊은 법구(法句)를 관찰해야 하며, 이미 관찰하고 나면 곧 환히 깨닫게 될 것이니라. 열여섯의 시자(侍者)는 언제나 이와 같이 법사를 여섯 달이 다 차도록 받들어 섬기면서 주문을 외우는데 필요한 바를 모조리 갖추어 모자람이 없게 해서 주문의 업[呪業]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중생으로 하여금 지근(智根)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게으름으로써 법사를 요란(撓亂)시키지 말며, 만일 법사에게 필요한 바가 있을 때 혹 장애가 있고 공양과 시봉함에 모자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곧 온갖 중생들에게 법의 장애를 끼치는 것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지금 나의 대중 안의 여러 비구 중에는 용맹스레 정진하는 성문(聲聞)으로서 번뇌가 다하여 아라한이 되고 또한 할 일을 다 마쳐 큰 신통을 갖춘 이들이 있나니,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로 두 상인(上人)이 있느니라. 첫째는 정(頂)이요, 둘째는 용덕(龍德)인데, 이들 비구가 신통을 지을 적에는 곧 저 사대해(四大海)의 물을 가져다 손바닥 안에 안전하게 둘 수 있으며, 또한 이 삼천대천세계의 대지(大地)에 있는 모든 풀과 나무와 우거진 숲이며 모든 산과 또는 수미산과 철위산과 대철위산 등의 안에 있는 사람과 하늘이나 또는 축생에 속한 코끼리ㆍ말ㆍ낙타ㆍ노새ㆍ나귀ㆍ소ㆍ개 등이나 또는 모든 응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 등의 모두를 다 입 속에다 넣고서 가고 싶은데 따라 마음대로 다니며, 해야 할 일을 다한 뒤에는 도로 입 속에서 내놓는데도 그 동안에 중생들은 자기가 처한 바를 도무지 깨닫거나 알지 못하나니, 나오고 들어가고 가고 옴도 없고 나아가 희롱하고 해롭고 놀라고 두려워함도 없었느니라.
또한 이 삼천대천세계의 온갖 마왕과 모든 악마 군사들을 모조리 뱃속에 넣고 가고 오면서도 본래와 같으니라. 이 용덕비구가 얻게 된 희유한 신통력과 무외(無畏) 등은 가령 한량없고 가없는 겁(劫) 동안 저 조그마한 부분을 연설하려 하여도 끝내 다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여래가 열반한 뒤에 이와 같이 세간에 위덕과 큰 세력이 없을 때는 온갖 악마와 모든 외도로도 항복시킬 수 없느니라.
법사는 그 때에 저 모든 단월(檀越)과 법을 전수받는 사람[受法人]에게 분명히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제 이 법과 나의 분신으로서 온갖 법을 듣고 받아 지니는 이를 수호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대답하기를 ‘저희는 이제 반드시 이 법과 법사와 아울러 받아 지니는 이를 수호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저 열여섯의 시봉하는 사람[侍人]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법사를 위하여 모든 공양과 알맞은 것을 마련하되 앞에서 허락한 바와 같이 해서 어기거나 다르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일 법을 보호함이 없으면, 이때에는 법사가 설령 모든 이로는 일을 베풀려 하여도 모두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들이 법사를 수호하면서 또한 필요로 하는 바를 모자람이 없게 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공덕과 선근을 이제 너희를 위하여 그 조그마한 부분을 해설하겠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아뇩달지(阿耨達池)와 사대해(四大海)에 있는 모든 물을 한 군데에다 모아 둔 후 다시 어떤 사람이 손으로 이 물을 한 번 떠서 동방(東方)의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 밖으로 가서야 물을 내려놓고, 이와 같이 차례로 모든 아뇩달지와 사대해의 모든 물을 낱낱이 모두 다 떠서 손바닥에 담은 후에 계속 동방으로 가서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에 던지면서 모두 다하게 하고, 남방ㆍ서방ㆍ북방도 역시 그와 같이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저 모든 세계의 소위 이름과 그 낱낱의 이름을 모두 분별하여서 그런 많은 세계를 알고, 그 모든 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우되 위로 유정천(有頂天)까지 이르도록 하고, 이와 같은 뭇 보배를 모두 가져다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겁 동안 바치되 모두가 세 가지의 청정한 마음을 갖추어 베풀 때 이와 같은 보시로 얻게 되는 공덕을 앞의 이 법과 법사를 수호하는 공덕의 많고 적음과 비교하면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이와 같이 나아가 수를 세는 비유(譬喩)로도 역시 미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그 법사는 부처님의 일[佛事]을 능히 이루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법을 수호하고 법사를 보호하면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나는 이제 이 사람의 언교를 위하여 아자문(阿字門)을 설명하였으니, 이와 같은 차례로 법의 이치[法義]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수야바가 다시 말하였다.
‘말씀하신 이치[義]란 어떤 것이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언교의 이치의 장[言敎義藏]에 대하여 얼마나 얻든 분수에 따라 받아 지녀라. 만일 너희가 이 다라니 방편문을 받아 지닌다면 오래지 않아 성취하게 될 것이니라. 어떤 곳을 성취하는가? 이를테면 허공이 행하는 곳[虛空行處]이니라. 무엇 때문에 성취하는가? 이처럼 한량없음이 허공 등의 언교와 같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세존께서 만일 중생에게 신근(信根)의 그릇이 있어서 법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있다 하여도 버리고서 말해 주지 않거나 혹은 때로 와서 묻는데도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이 하시는 여래는 불선(不善)이 되느니라.
마나바야, 어떤 중생들이 이와 같은 세 가지 방편 언교의 연설을 들을 적에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 끝내 여래의 연설한 바를 분별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부처님ㆍ세존께서는 큰 자비에 머물러 한량없는 겁을 관하면서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시느니라.
마나바야, 이 모든 중생이 법을 듣고도 받지 않으면, 비록 사람의 몸을 얻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통을 만나게 되며, 목숨이 다할 때 만일 후생(後生)을 받는다면 다시 무거운 고뇌를 더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너희는 언제나 설법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소경 앞에 등촉을 많이 시설한다 해도 소경은 이용할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정신을 잃은 이가 알몸이 되어서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어서 비록 의복을 베푼다 하더라도 받을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저 모든 의혹이 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설법을 들어도 받지 않는 것이 역시 그와 같으니라.’
그때에 저 세존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치 미치광이가 일산을 가졌고
또는 소경에게 등불이나 촛불을 마련하며
벌거숭이가 옷상자를 짊어진 것과 같나니
저 어리석은 범부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언제나 이와 같은 법문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이 부처님의 보리[菩提]는 심히 깊고 미묘하여 끝내 천박한 지혜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런 까닭에 내가 지금 이와 같은 법을 연설하는데도 저 모든 중생들은 오히려 받지 못하거늘,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는 어떻게 들어가기 어려운 법 안에 능히 들어갈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 때문에 너희들은 저 지혜 가운데서 언제나 부지런히 힘쓰면서 무거운 책임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이미 이 법장(法藏)을 안 뒤에는 마땅히 한 마음이 되어 피와 살을 마르게 해야 하느니라.
이 들어가기 어려운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을 지니면서 이 세 가지 구(句)인 아ㆍ가ㆍ나 등의 말뜻에 대하여 끊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몸과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서 모든 근(根)은 언제나 용맹스럽게 큰 정진의 힘을 일으켜 여래의 장(藏)을 보호해 지니고 열어 보인 뒤에는 언제나 이와 같이 일을 기억하고 지어야 하느니라.’
그 때에 그 모든 보살들은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일찍이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무릇 연설하신 바에 덮거나 감추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나이다. 그러나 여래의 수명은 반 겁이고 법은 일 겁 동안 머무르옵니다.
세존이시여, 겁이 다하여 불에 탈 때에 이와 같은 법은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하나이까?
세존이시여, 모든 수다라(修多羅)가 나타나지 않을 때 정법(正法)은 당연히 소멸되어야 하나이다. 여래의 정법은 어떻게 소멸하게 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는 이제 그와 같은 일은 묻지 말고 다만 이와 같은 언교만을 받아 지닐 것을 기억하여라.’
아난아, 그때에 수야마보살은 그 부처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세 가지 언교의 근본은 열두 구(句)를 끊지 않은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미 한 구문(句門)을 위하여 조그마한 부분은 열어 보이셨나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나는 이제 홀로 이와 같은 몸의 힘과 다리의 힘이 있는지라 빠르게 다닐 수 있다. 먼저 수미산 꼭대기에 걸터앉아 있다가 그 뒤에 이 대지(大地)의 끝을 걸어가야겠다’고 말한 것과 같사옵니다. 그 사람은 이때 자기 집에서 출발하려 하면서 다시 ‘이제 나는 오래지 않아 동방의 끝까지 이르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마치 도달하여 제 마음대로 끝까지 다 구경한 것처럼 하는데, 이와 같이 생각한 뒤에 앞으로 나아가도 그 가는 길을 헤아려 보면 두 구로사(拘盧舍)17)도 가지 못한 채 ‘나아가고 싶지만 더 갈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는 먼저 스스로 말하기를 ‘뼈마디가 건장한지라 빨리 갈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와 같은 힘들은 단박에 소진할 뿐만 아니라 또한 파괴되고 상한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저 어리석은 사람은 비록 일찍이 귀로는 동ㆍ서ㆍ남ㆍ북의 모든 지방의 이름은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 대지의 가없는 끝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이러한 뜻을 내어 땅을 걸어가고 산을 올랐기 때문이오니, 이 때문에 두 구로사를 가기 시작했을 적에 그의 몸과 발은 이미 상하고 부르텄거늘 어찌 한 주[洲]의 끝까지 두루 도달할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저도 역시 그와 같나이다. 지금 이 한량없고 가없으며 제한 없는 수다라 가운데서 한 구(句)의 뜻조차도 오히려 받아 낼 수 없거늘, 하물며 다시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응공ㆍ정변각의 큰 지혜 경계를 다할 수 있사오리까?
마치 세존께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동방의 가없는 온갖 세계와 이와 같은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四維]과 상방ㆍ하방이며, 나아가 시방(十方)의 가없는 세계를 여래는 이와 같은 한 생각[一念]으로 모두 아시옵니다.
또한 저 모든 세계 안에 있는 일체 중생들의 온갖 심행(心行)과 온갖 발심(發心)과 온갖 사유(思惟)의 앞뒤가 무궁하고 나아가 거쳤던 겁수(劫數)의 많고 적음에 이르기까지 여래는 이와 같은 것을 이와 같은 한 생각으로 모두 아시옵니다.
또한 저 온갖 오도(五道) 중생들 속에 있는 그와 같은 업연(業緣)과 그와 같은 과보(果報)가 여래의 말씀처럼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는 것을 한 생각 속에서 여래는 모두 아시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저는 이 이치를 묻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들은 모든 공덕의 일[事]치고 모르는 것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존께 묻는 것이옵니다. 저희들은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은 뒤에는 언어를 버리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런 언어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크게 수승한 이론[勝論]을 모아서 법답게 성취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교장 법문(敎藏法門)을 저희들에게 열어 보이시면, 저희들도 또한 마땅히 가르치신 대로 체득하고 알겠나이다.’
그 때에 방광여래는 그 수야마 보살을 칭찬하면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마나바야, 너에게 이와 같은 크고 깊고 깨끗한 마음과 교묘한 방편의 힘이 있어서 오늘날 마음껏 나에게 물을 수 있구나. 그리고 실로 방편과 비유를 능히 지으면서 이런 질문을 잘 일으키는 것이 마치 여래의 마음과도 같도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마나바야, 너희들은 부지런히 힘쓰면서 이른바 여래께 물어야 할 바를 물어 배워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경계는 얻거나 알기 어려워서 모든 하늘이나 세간 사람으로서는 묻지 못할 바이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마나바야, 선근을 심지 않은 세간의 박복(薄福)한 중생은 모든 여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니, 여래ㆍ세존도 역시 이 복 없는 중생을 위하여 법의 이치[法義]를 널리 드날리지 앉으며, 그런 곳에 또한 출현하지도 않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전에 제화왕의 동산[祭火王園]에 있으면서 나무 아래 서서 정(定)에 칠 일 동안이나 들었는데, 그 때 너희들은 그로 인해 발심하여 오로지 정진을 닦아서 이 인(忍)을 낳을 수 있었느니라.
마나바야, 이 구(句)로 인하여 물러서지 않는 인[不退忍]을 얻었고 이 인을 말미암아 ‘너희는 장차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이요, 명호는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라 하리라’고 하는 부처님의 수기[記]를 받게 되었느니라.
마나바야, 어찌 저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으로서 이 깊은 지혜 업[智業]을 알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오직 이 여래ㆍ응공ㆍ정변각만이 알 뿐이니라.
마나바야, 열두 구(句)로 이치를 해석하는 것은 이 역시 한 구로 다 해설할 수 있지만 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나니,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제외되느니라. 이와 같은 일을 누가 믿고 알겠느냐? 역시 모든 부처님일 뿐이니라. 너희들도 이것에 대하여 오히려 경계가 아니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겠느냐? 이 가운데서 여래는 남에 의지하여 설법하면서 여타의 사람으로 하여금 알고 나서 수행하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께서 펴신 법은 말씀대로 행하게 하느니라. 어떻게 말씀대로 행하게 하는가? 이 법 가운데서 읽고 외우고 받아 지니고, 수행해서 업을 짓고, 선정으로 모든 공덕 등을 깨달아 알며, 여타의 법구(法句) 가운데서 본래 알지 못한 바를 이제 다 알게 하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른바 명구(名句)라 함은 이를테면 그 언어를 다른 이로부터 얻어 듣고, 들은 뒤에는 닦아서 증득하여 아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모든 나무에서 뿌리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뿌리처럼 줄기도 얻을 수 없고 잎도 얻을 수 없고 꽃도 얻을 수 없고 열매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저 뿌리와 잎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체 다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이미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곳은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도 어렵느니라. 만일 이 뿌리와 줄기와 꽃과 열매 등을 안다면 곧 말로 설명할 수 있거니와, 만일 뿌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이 잎 등을 구한다면 곧 얻을 수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는 오직 하나의 거짓된 모양[假相]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이 온갖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세간을 취하여 제일의(第一義)의 모양을 지을 수는 없나니, 여래는 반드시 성문의 사람[聲聞人]들을 위하여 계행의 업[戒行業]을 말하며, 여래는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등의 법을 연설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가 듣는 바면 당연히 그와 같이 들어야 하고, 여래가 보는 바면 당연히 그와 같이 보아야 하며, 나아가 얻고 증득하면 당연히 그와 같이 얻어야 하고 또한 증득하여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그 뿌리와 그 줄기며, 나아가 꽃과 열매까지도 모두 얻을 수 있거니와, 만일 그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뿌리와 줄기와 꽃과 열매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
이처럼 마나바야, 만일 저 온갖 법 중의 모든 조도법(助道法)은 이름[名字]이기 때문에 이것을 얻을 수 있다면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다 얻을 수 있거니와, 만일 그 조도법을 얻을 수 없다면 이와 같은 열반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저 열두 구 가운데서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이미 여러 번 널리 연설하여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부분이나마 깨우쳐 알게 하였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주문을 지닌 사람[持呪人]을 어찌하여 주문을 지닌 사람이라고 이름하느냐?’
수야마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주문을 지닌 사람이 ’어떤 인연 때문에 주문을 지녔다는 이름을 얻었다‘고 말한 것을 아옵니다.
세손이시여, 주문을 능히 지니기 때문에 주문을 지닌 사람이라 이름하나이다. 어떠한 주문을 지녔기에 주문을 지닌다는 이름을 얻었는가? 세존이시여, 이런 세 가지 주문을 지니기 때문에 주문을 지닌다고 하나이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첫째는 구리주(瞿梨呪)[수(隋)나라 말로 엄하고 악하다는 말이다]요, 둘째는 건타리주(揵陀利呪)[수나라 말로 향을 빼앗는다는 말이다]이며, 셋째는 마등기주(摩登祇呪)[수나라 말로 나쁜 업을 짓는다는 말이다] 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 가지 주문을 지니기 때문에 주문을 지닌다고 하나이다.’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주문을 지닌 이[持呪師]가 얼마 동안을 지나면 업(業)을 능히 이루는 것이냐?’
수야마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십이 년을 지나면 업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나이다. 세존이시여, 십이 년이 지나야 업을 이루게 된다는 말은 이를테면 업 가운데 교묘함을 얻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지어서 성취한 뒤에는 어떠한 이로움을 얻느냐?’
수야마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지옥ㆍ축생ㆍ아귀나 염마세계[閻魔界]에 떨어지나이다. 왜냐하면 세간을 위하여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바른 소견[正見]이 없었고, 언제나 살생하고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며 삿된 음행을 멋대로 저지르고 술을 마시며 거짓말을 하고 또한 그 밖의 나쁜 업을 행하면서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을 일부러 지었기 때문이옵니다.’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이와 같은 삿된 법과 나아가 한 구(句)의 주문에 이르기까지 행하기 좋아하면, 이 사람은 나의 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사람이 십이 년 동안 단지 지옥ㆍ축생ㆍ아귀와 모든 마왕 등의 온갖 나쁜 업을 짓는다고 볼 뿐이지만, 마나바야, 너는 마땅히 이 세간의 눈먼 사람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고 오며 바퀴 돌듯 한다고 보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 사람은 마땅히 착한 곳[善處]을 얻어야 하는데도 나의 법에 대해 짓는 곳마다 바른 믿음[正信]을 얻지 못하고 바른 행[正行]을 할 수 없으니, 이 사람이 만일 바르게 믿고 행할 수 있다면 곧 상생(上生)하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이 주문을 지닌 사람은 다만 콧물ㆍ침ㆍ똥ㆍ오줌 등의 더미를 위할 뿐이기 때문에 십이 년 동안 저 엄하고 치성한 이익이 없는 고통만을 받았을 따름이니, 몸을 버리면 곧 큰 지옥 안에 가서 태어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가운데서 모든 여래의 지혜의 성취를 생각해야 하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성취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어떤 두 사람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한 명은 성품이 고결하고 탐욕이 없는[淸廉]이라서 삼 일 동안 먹지 않아 뱃속이 굶주리고 비어 있었으며, 또 한 명은 먹기만을 탐하고 좋아하는[貪嗜]이라서 삼 일 동안을 입과 손이 쉬지 않고 지나치게 먹어서 배가 불러 있다.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와 같은 두 사람이 뒤에 만일 음식을 먹는다면 어떤 이가 가장 맛이 있겠느냐?’
수야마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굶주려 있는 이가 유독 맛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여래ㆍ세존께서는 시의(時宜)를 잘 아시는지라 무릇 펴서 연설하시는 바는 거짓이 없느니라. 반드시 중생의 모든 근성[根]이 조화되고 부드러우며 쉬이 법을 받아낼 수 있는가를 관하고, 그런 뒤에야 수순하면서 그에게 연설하여 성숙되게 하는 것이니, 마치 그가 음식을 먹고 나면 색력(色力)이 증가하고 몸과 마음이 안온하면서 질환이나 괴로운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의심을 많이 일으키면서 미혹되고 마음이 산란하면 그는 큰 우환이 있게 되나니, 이와 같은 중생은 의혹이 생긴 뒤에는 믿는 마음이 없게 되고, 믿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곧 진실한 바른 법을 얻을 수 없느니라. 본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이 법을 의혹하면 이러한 중생이야말로 몹시 불쌍히 여길 만하나니, 바른 법을 버리고 여의면서 삼매(三昧)의 모든 공덕을 받지 않아서이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는 때를 기다리느니라.
마나바야, 이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業藏) 가운데서 열두 구(句)는 변동(變動)이 없다고 말하노니, 마땅히 그 언교의 방편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수야마가 말하였다.
‘어떤 것을 변동이 없다고 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른바 처음에 오는 온갖 문구(文句)의 차제(次第) 방편은 저 마흔두 자(字)를 인하여 음구(音句)를 장엄하는 것이요, 여타의 음(音)과는 함께 서로 뒤섞이거나 합하지 않으며, 그 밖의 다른 글자로 다시 서로 숨기거나 덮지도 않느니라.
마나바야, 아(阿)로부터 가(迦)까지가 초분(初分)이 되고, 이 가운데서 가(迦)자는 자신이 오분(五分)을 받아서 음(陰)의 수(數)로 분별하여 부가라(富伽羅)의 모양을 짓기 때문에 오분으로 설명한 것이요, 나(那) 자 등은 다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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