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2권
대법거다라니경 제12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28. 문등각품(問等覺品)
“아난아, 그 때에 미간백호범천이 방광여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가령 저 억수의 모든 보살들이 이 법언(法言)을 일으켜 ‘불타(佛陀) 불타’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서 어떠한 이치를 보았기에 모든 보살들이 세 번씩이나 부처님의 명호를 일컬었나이까?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이 부처님이란 이름과 뜻을 저희들이 듣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은 오직 부처님이라는 말만 알 뿐이요, 끝내 부처님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나이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오며, 부처님이란 어떠한 글귀이옵니까? 이와 같은 등의 뜻을 원컨대 해석해 주시어 모든 듣는 이로 하여금 그 공덕을 얻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모든 부처님ㆍ세존께는 사자분신(師子奮迅)이라는 삼매(三昧)가 있으니, 모든 삼매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것이니라. 만일 사람이 이 삼매에 능히 들어가면 이행(離行)이라는 하나의 법문을 얻어서 모든 부처님의 이름[名字]을 두루 연설할 수 있고, 나아가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畏]을 완전하게 구족하는데, 이들 모두가 사자왕(師子王)의 법이라 항복시킬 수 없나니, 나는 이제 설명하겠느니라.
범천아, 이른바 부처님[佛]이란 저 모든 보살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생사(生死)에서 깨달음[覺悟]을 능히 얻으신 이’라는 것이니, 그 분을 깨달았다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말하느니라.’
범천이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하며, 그 분을 부처님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온갖 중생이 긴 밤 내내 크게 잠을 잘 때 그 중 한 사람이라도 깨어 있으면, 곧 중생들 일체가 잠을 자고 크게 잠을 자고 깊이 잠을 잔다는 것을 알게 되나니, 나는 이제 이미 이와 같이 깨어난지라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잠을 끊어 없애고 이렇게 똑같이 깨어날 수 있게 할까?’라고 하느니라.
범천아, 이것이 바로 제일의 깨달음[覺]의 뜻이기 때문에 불타라고 칭하느니라.’
그 때에 그 범천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다시 어떠한 뜻이 있어서 부처님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모든 부처님ㆍ세존께는 관삼세륜(觀三世輪)이라는 하나의 법문이 있나니, 그것은 응당 먼저 깨달아야 하고 이미 깨달아 알고 나서야 그 뒤에 해설하느니라. 어떻게 해설하는가? 이른바 과거의 세상[過去世]에 집착하지 않는[不著] 것이니라. 어떻게 집착하지 않는가? 삼세의 온갖 장애를 능히 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모든 중생들은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장애가 되고, 그들 중생은 애욕[欲]과 화합하는지라 이 때문에 집착이 있느니라.
또 애착(愛著)으로 희망하고 분별하면서 곧 기억[憶念]을 내는데, 저 기억하는 때에는 청정하지 못하느니라. 어떤 것을 청정하지 않다[不淸淨]고 하는가? 이 법을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곧 아득히 잠이 들게[昏睡]되고, 만일 아득히 잠이 들면 깨닫지 못한다[不覺]고 하느니라.
그가 잠을 잘 적에는 다시 꿈속의 생각[夢想]을 일으키게 되고, 꿈에서 보다가 깨어났을 적에는 지었던 갖가지 일들이 과거에 겪었던 곳으로서 똑똑히 분별되지만, 이와 같은 꿈의 마음에서는 꿈인 줄 모르며 다만 깨어있어서 지은 바가 모두 진실이라고 말할 뿐이니라. 이로 인하여 다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는 생각[未曾有想]이 생기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는 생각은 바로 산란한 마음[亂心]인 것이니, 산란한 마음 때문에 문득 손해를 부르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이 번뇌의 깊고 무거운 잠 속에 빠져 있으면서 영영 아득히 가려져 깨어날 기약이 없는 것을 보고는 곧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일으켜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중생으로 하여금 이런 손해를 면할 수 있게 할까? 내가 이제 오직 깨달은 한 법만으로 저 중생을 깨닫게 하면 손해는 저절로 제거될 뿐이리라’라고 한 뒤에 차례로 그들을 위하여 가르쳐 줄 법을 연설하느니라.
범천아, 이것이 바로 제이의 깨달음의 뜻이기 때문에 ‘불타’라고 칭하느니라.
범천아, 어떤 것을 제삼의 깨달음의 법[覺法]이라 하는가? 이것은 미래의 아직 짓지 않은 모양[未作相]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라. 마치 과거의 일이 이와 같이 일찍이 있었고, 이와 같은 처소와 이와 같은 부모와 나아가 이와 같은 이름과 성씨 등이 이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무엇을 이름하여 미래가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다만 언설(言說)의 모양만 있기 때문이니라. 만일 언설이 있다면 곧 유위(有爲)의 모든 행[諸行]이 두루 갖추어진 것인데, 여래는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미래의 유위를 두루 갖추면 문득 장애를 이룬다’고 말한 것이니,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이와 같은 십이인연의 갈래[緣分]를 짓지 말라. 그 인연의 갈래는 바로 분별하는 법이니, 여래는 깨달은 뒤에는 다른 이를 위하여 설하느니라.
범천아, 이것이 바로 제삼의 깨달음의 법이기 때문에 ‘불타’라고 칭하느니라.
어떤 것을 현재 세상의 일[現在世事]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현재의 색(色)을 말하는데 과거와 미래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현재의 세상을 말하게 되는가? 이 현재의 세상은 얻어 볼 수가 없는데, 어찌하여 볼 수 없는가? 이른바 이곳에는 다만 이름[名]만이 있을 뿐인데, 이것을 색(色)이라 말하느니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이름하여 본다[見]고 하나니, 어째서 본다고 하는가? 봄[見]이 곧 보지 못함[不見]이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이 현재 세상은 변제(邊際)여서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없느니라. 이른바 이름이라는 것도 역시 볼 수 없으며, 고통당하는 중생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없느니라. 어찌하여 없는가? 이 가운데는 다만 수(數)만이 있기 때문이니라.
저 가라라(迦羅邏) 등의 모든 대(大)는 있는 바가 없으니, 어찌하여 있는 바가 없는가? 찰나 동안에 유위(有爲)의 모든 행은 머물 곳[住處]이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만일 저 가라라의 머무는 곳이 칠 일을 경과하면 곧 알부타(頞浮陀)라고 하며, 이와 같은 차례로 칠 일을 하나의 수[一數]로 해서 아홉 달 동안 태(胎)의 머무르는 곳에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이 일을 간략하게 말씀하셨지만 온갖 성문과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세간이 온갖 범부이겠느냐? 이 모든 중생이 본래 알지 못한 바는 아직 일찍이 행했던 곳[行處]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이 가운데 가라라의 머무는 곳과 일 등을 이제 다시 설명하겠느니라.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적에는 생각생각 머무르지 않으며,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곧 저 태어나는 곳[生處]에서 생을 받는데, 마치 저 짓는 바 유위의 모든 행과 같아서 세간의 중생들이 미혹되고 가려지기 때문이니라.
본래 가라라가 없는 곳에서 가라라가 있다고 말하고 본래 알부타가 없는 곳에서 알부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가 조작한 유위의 모든 행은 이미 없거늘 어떻게 이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나아가 모든 부처님 세존의 모든 보리의 법[菩提法]에 이르기까지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느니라.
범천아, 모든 부처님ㆍ세존ㆍ응공ㆍ정변각의 과거의 마음과 서원과 힘도 역시 머무르는 곳이 없고 미래의 교법(敎法) 그것도 머무르는 곳이 없으며, 나아가 지금 나와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변각 모두가 한량없고 가없는 세계 가운데서 현재 머무르면서 법을 설하느니라.
범천아, 이처럼 현재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모든 교법도 역시 머무르는 곳을 얻을 수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이 사대(四大)로 된 몸의 머무르는 곳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은 법은 생기는 곳[生處]과 나오는 곳[出處] 모두를 알 수 없느니라.
범천아,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법의 이치를 분별하시면서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시는데도 이 중의 온갖 세간의 중생은 그 언설(言說)을 보고서 곧 집착을 내느니라. 어떻게 보면서 집착하는가? 모든 범부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오직 여래만이 깨달음의 법[覺法]을 능히 얻으셨을 뿐이다’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은 ‘이 가운데서 여래가 깨달은 바는 무엇인가? 그 서른일곱 가지의 보리를 돕는 법[三十七助菩提法]이 있어서 여래는 이와 같이 깨달으신 것인가? 마치 범부의 소견처럼 나[我]가 있다고 보고, 사람[人]이 있다고 보며, 중생(衆生)이 있다고 보고, 수명(壽命)이 있고, 장부(丈夫)가 있고, 짓는 이가 있고, 받는 이[受者]가 있다고 보며, 나아가 음(陰)ㆍ계(界)와 모든 입(入)이 있다고 보면서 이와 같이 깨달으신 것인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느니라.
또 범천아, 저 남이 없는 법[無生法] 가운데서 누가 능히 깨닫는 이이며 누가 깨달음을 받는 이[受覺者]이겠느냐?
범천아, 만일 부처님ㆍ여래께서 생각하시기를 ‘나는 모든 법을 깨달았다. 나는 모든 법을 얻었다’고 하신다면, 이야말로 여래도 아견(我見)을 버리지 못한 것이니라.
범천아, 그러므로 여래는 하나의 법도 깨닫지 않았고 또한 하나의 법도 얻지 않았느니라.
범천아, 여래는 오직 큰 자비만을 완전히 갖추어서 모든 중생들이 저 무명(無明)의 몹시 캄캄한 어둠속에 떨어져 있음을 보고는 중생의 마음과 지혜의 때[垢]를 정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비유의 방편을 인용하여 설법하고 이름[名字]과 글귀들[句衆]을 나타내고 보인 것이며, 세간을 구제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모든 비유의 방편으로 해설해서 끝내 그들을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의 일에 집착하게 하지 않느니라.
범천아, 만일 저 중생이 삼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미 집착하지 않고 나서는 즉시 이와 같은 진실한 법 가운데 무아(無我)의 행(行)을 세울 것이요, 이미 무아를 증득하면 다시는 물러서지[退還] 않을 것이니라. 대저 물러난다고 함은 이른바 저 삼세 가운데 왔다 갔다 하면서 바퀴 돌 듯 하는 것[輪轉]이니라.
범천아, 저 모든 중생들이 허망하게 분별할 때는 ‘이것은 과거이다, 이것은 미래이다, 이것은 현재이다’라고 생각하나니, 그가 만일 이와 같이 허망한 분별을 하고 나면 아집(我執)을 버리지 않으며, 만일 아집이 있으면 삼세 가운데서 허망한 소견을 많이 일으키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결정코 온갖 처소에서 나라는 생각[我想]을 버려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집착이 있으면 어리석다[愚癡]고 하기 때문이니, 어리석기 때문에 다른 것의 속박을 당하느니라.
범천아, 비유하면 마치 그물로 새를 잡는 사람이 모이를 땅에다 뿌려 놓으면 모든 새들이 모이 때문에 내려오는 것과 같으니라. 이 뭇 새들은 모이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처럼 범천아, 만일 사람이 삼세를 증득하여 벗어날 줄 모르면 이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재앙의 고통을 받을 뿐더러 또한 다른 이까지 손상하느니라. 왜냐하면 저 새들이 조그마한 먹이 때문에 큰 재앙을 만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라.
정녕 그와 같으니라. 어떤 중생들이 몸소 내 앞에서 섬기고 공양하면서도 내가 어떤 법을 연설하고, 누구를 위하여 설법하며, 어느 곳에서 설법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니라. 그래서 그는 이 법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어찌 저 듣거나 말로 할 수 없는 궁극의 열반[究竟涅槃]을 알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반드시 큰 정진을 일으켜 불이 훨훨 타듯 원하고 구해야 하며, 그러한 뒤에야 여래가 연설하는 방편의 비밀한 법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29. 삼매인연품(三昧因緣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하늘 제석[天帝釋]이 저 방광여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무슨 인(因)과 어떤 연(緣)으로 먼저 이 억수의 모든 보살들이 법문을 청하여 물었는데도 여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해석하지 않으셨으며, 또 이로 인하여 그들이 제화왕의 동산[祭火王園]에 나아갈 때 여래ㆍ세존께서는 그들이 가는 대로 놓아두셨는데도 또한 이런 큰 이익을 얻게 되었나이까?’
그 때에 방광여래께서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네가 묻기를 ‘무슨 인연 때문에 저 모든 보살이 법을 청하여 묻고 난 뒤에도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해석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는데,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그 보살들에게는 법에 원하는 바가 있어서 그와 같은 걸림없는 행의 처소[無礙行處]에서 믿지 않은 마음을 내었던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나는 먼저 그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왕의 동산 숲에 나아가 큰 선정[大禪定]에 들어가서 스스로 법문을 사유하게 하였느니라.
왜냐하면, 교시가야, 그 모든 보살은 이미 과거에 십사억의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의 처소에서 그들이 할 일을 공양하고 수행하였으며 삼매(三昧)의 힘으로 명료하게 보고 알았기 때문이니라.
이미 기억하여 안 뒤에는 모든 세간을 관찰했는데, 오직 이와 같이 나고 늙고 죽고 떨어지면서 처소를 옮겨 전생(轉生)하면서 그 모든 보살들은 십사억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행법을 청할 때에도 믿음이 무너져 있었으며, 모든 보살들은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삼아 원행(願行)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지옥에 처해서 무거운 재앙을 받고 있었느니라.
모든 보살들은 이런 일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큰 두려움을 내었고, 이미 두려워 한 뒤에는 유위의 법[有爲法]을 싫어해 여의려는 마음을 내면서 다 함께 말하기를 ‘아아, 세간은 크게 괴로운 것이로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리 쾌락에 빠져서 게을렀으며, 여래를 믿지 않고 법(法)과 승(僧)을 비방하였으며, 나쁜 업을 많이 일으키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런 악업 때문에 저 옛날의 보살이 십사억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믿지 않은 마음을 낸 나쁜 행으로 지옥에 떨어진 것과 똑같아질까 두려워서 ‘원컨대 저로 하여금 이와 같은 법을 받게 하지 마소서. 또한 저로 하여금 믿지 않는 지위[不信地]에 떨어지게 하지 마소서’라고 한 것이니, 그 모든 보살들은 이런 서원을 세우고 나서 곧 물러서지 않는 지위의 인[不退地忍]에 머물렀느니라.’
그 때에 하늘 제석이 다시 그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은 어떤 곳에서 이런 지혜를 능히 내어서 옛날 십사억 수효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수행한 일을 알고 보았나이까?’
부처님께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이 큰 지혜 더미[大智聚]는 오히려 여래가 나타내어 보인 것이니라. 어떻게 나타내어 보였는가? 저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 사자분신정(師子奮迅定)에 들었을 적에 부처님의 신력(神力)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다 적정(寂定)을 얻고 지견(知見)을 발생해서 모두가 과거에 겪었던 모든 일을 보게 하였느니라.
그들은 이 삼매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로 무명의 창고[無明穀藏]를 깨뜨려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니, 마치 사자왕(師子王)이 크게 울며 외칠 적에 온갖 날짐승ㆍ길짐승들이 강하든 약하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가거나 서 있거나 간에 저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저마다 바위굴로 숨는 것과 같으니라.
비유하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허공에 가득히 찼을 적에 큰 바람이 한 번 일어나면 잠깐 만에 없어져 버리고, 그때 공중에는 모든 별과 나아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다 나타나서 달의 밝고 환하면서 위엄 있는 광명이 널리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
이처럼 교시가야, 여래는 이 사자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온갖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의 창고 더미와 그 밖의 모든 번뇌에 대하여 다 깨뜨려 없애는 인연을 짓지 않음이 없나니, 예로부터 지었던 온갖 선근(善根)이 저절로 청정해지면서 다시는 번뇌가 없는 것이 다 함께 이 삼매를 반연하기 때문이니라.’
그 때에 하늘 제석이 다시 그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그 모든 보살이 숲 아래서 들었던 삼매의 이름을 듣고 싶사오니, 원하옵건대 해설하여 주소서. 저희도 받아 지녀야겠나이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이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모든 보살 등의 삼매의 이름과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畏] 등을 해설하겠느니라.
교시가야, 모든 보살들이 그 때 얻은 삼매는 세 가지가 있어서 결정적으로 의심을 끊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세간의 교묘한 방편에 들어가는 삼매[世間巧方便三昧]이니, 곧 처음 머무는 대승(大乘) 보살의 삼매로서 처음의 기억하는 때[初憶念時]와 나중의 성취하는 때[後成就時]와 한층 더 넓고 큰 때[轉寬大時]이니라.
하늘 제석이 다시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세간의 교묘한 방편에 들어가는 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어떤 보살마하살이 순지(淳至)라는 하나의 삼매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힘 때문에 이와 같은 세 가지 방편의 업장[方便業藏]을 증득하여 알 수 있으며, 세간의 교묘한 방편의 삼매에 들고 난 뒤에는 다시 삼교의 업장[三敎業藏]에 들어가서 온갖 법이 허공과 같음을 보느니라.
세간이라는 말은 이른바 세간의 중생들이 행하고 짓는 곳[所行作處]과 가고 오는 곳[往來處]과 바퀴 돌듯 하는 곳[輪轉處]과 아행(我行)에 집착하는 곳[著我行處]과 아소의 행에 집착하는 곳[著我所行處]과 중생의 행에 집착하는 곳[著衆生行處]과 있고 없는 행에 집착하는 곳[著有無行處]이니라.
옛날에 지은 바가 형체를 발가벗어 드러내는 것이거나, 혹은 뜨거울 때에 거듭 덮는 것이거나, 혹은 하늘의 변화[天變]를 관찰하는 것이거나, 혹은 땅의 움직임[地動]을 살피는 것이거나, 혹은 해와 달을 점치는 것[占]이거나, 혹은 별을 보는 것이거나, 혹은 사람의 형상을 관상[相]하는 것이거나, 혹은 좋은 날을 가려서 가고 오는 것 등이니, 이와 같은 것들로 모든 길흉(吉凶)을 망령되게 말하면서 혹은 세간의 예의(禮儀)ㆍ서수(書數)ㆍ산력(算曆)과 온갖 기예(伎藝)를 익히기도 하고, 혹은 주술(呪術)ㆍ비방(袐方)ㆍ공교(工巧)의 갖가지 사업(事業)을 행하기도 하며, 혹은 장사꾼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이를 부리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와 함께 말하고 의논하면서 다투기를 좋아하기도 하며, 혹은 말하지 않아야 할 곳에서 함부로 말을 내기도 하고, 혹은 바른 생각[正思惟]을 버리고 모든 나쁜 생각[惡覺]을 일으키는 등과 같은 일을 세간이라 하느니라.
처음 법[乘]에 머무는 어떤 보살은 세간을 수순하며 행한 사업에 일심으로 전념하면서 상속이 끊이지 않는 것이 마치 실타래가 끊어짐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我想]에 깊이 빠지며, 나라는 생각 속에서 전심전력으로 잡아 지니면서 이와 같은 세간의 모든 일을 분별하는 것이니, 이미 분별하고 나면 곧 보살이 짊어질 일 가운데서 깊이 두려움을 내는지라,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그를 곧 놓아 버리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니라.
교시가야, 여래는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지 않는가? 모든 범부는 갖가지로 몸을 받는데, 그들이 몸을 받을 때는 애욕의 속박을 받아서 하지 못하는 세간의 일이 없으며, 방일하고 산란한 마음으로 모든 역죄(逆罪)를 짓고, 역죄를 짓기 때문에 나쁜 업이 두루 갖추어지나니, 이 때문에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지 않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이런 사람에게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고 수기(授記)하지 않느니라. 교시가야, 그 어리석은 사람은 무지(無知)하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해치며, 그 밖의 무거운 장애를 지으면서 불ㆍ법ㆍ승에 교만하고 방일하며, 나라는 생각에 탐착하여 어리석기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으니, 그들은 이런 짓을 하므로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지 않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알아야 하리니, 부처님ㆍ세존은 중생들에 대하여 숨기거나 인색한 마음이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라.
또한 교시가야, 이와 같은 삼매는 세 가지 언교(言敎)에서 아자(阿字)가 처음이 되며, 그러한 뒤에야 바야흐로 마흔두 구(句)를 나타내느니라. 아 자의 첫 구[初句]는 오오(五五)로 나뉘며, 그 마흔한 구의 온갖 이름은 전전(展轉)하면서 서로 부르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비유하면 마치 양털을 여러 가지 염색(染色)에다 넣으면, 그 넣는 곳에 따라 갖가지의 이름을 얻게 되는데, 혹은 청색(靑色)이기도 하고, 혹은 백색(白色)이기도 하며, 혹은 적색(赤色)이기도 하고, 혹은 황색(黃色)이기도 하며, 혹은 홍색(紅色)이기도 하고, 혹은 자색(紫色)이기도 하며, 혹은 파리(頗梨)이기도 한 것과 같으니라. 이 모든 색깔이 근본에 따라 이름을 받는 것처럼, 이처럼 교시가야, 이 안의 아자는 온갖 언어에서 맨 첫머리가 되고, 그 밖의 나머지 마흔두 자는 따라 돕는 음구(音句)로 화합하고 장엄하면서 비슷한 종류를 거두어 지니고[攝持], 모든 글자를 전생(轉生)하고, 모든 언어와 함께 사변(辭辯)이 상응하고, 세력이 청정하며 권속끼리 서로 달라붙는 것이니, 그것들은 모두가 아자문(阿字門) 가운데에 포섭되느니라.
교시가야, 이것은 세간의 언어가 성취하는 법으로서 또한 세간의 삼매(三昧)를 교묘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비록 삼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은 물러서는 법[退法]이니, 물러서는 법이기 때문에 다만 마음을 손감(損減)할 뿐이며, 마음이 손감하기 때문에 모든 근(根)을 견고하게 성취하지 못하고, 근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용맹스럽고 부지런한 정진을 일으키지 못하며, 정진근(精進根)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보살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없고 또한 설법하여 교화할 수도 없느니라. 삼매를 얻을 때에 설령 저 세간의 모든 일을 능히 이룬다 하여도 벗어나 여읜 이[出離者]는 모름지기 항시 닦을 필요가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다시 통달법계(通達法界)라는 삼매가 있나니, 오직 물러서지 않는[不退轉] 보살마하살만이 삼세 가운데서 능히 성취하느니라. 어찌하여 통달 법계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보살은 이 삼매로 인하여 단염(斷染)이라는 염지(念智)의 힘을 얻으니, 이 대지(大地)의 가장 아래쪽은 물 위에 머물면서 두루 다 부드러운 탓에 무너지고 갈라져 텅 비고 이지러짐이 있기 때문에 다시 그 밖의 종류의 산과 돌로써 서로 의지하고 화합하게 하여 땅을 이루어서 이처럼 중간에 텅 비고 이지러진 곳이 없음을 아나니, 청정하게 훈수(熏修)한 지견(知見)의 힘과 두려움 없음[無畏]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그 지계(地界) 가운데 장애 없이 갖가지 신통을 지을 수 있나니, 손가락 한 번 튀기는 동안에 대지에 나타났다 숨었다 하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느니라.
교시가야, 비유하면 마치 성읍(城邑)이나 마을 밖에 큰 못이 있는데, 봄날 여름철에 많은 여인들이 이 못 안에 들어가 재미있게 놀고 목욕하면서 그 물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숨기도 하며 혹은 가기도 하고 혹은 오기도 하면서 자유자재하여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처럼 교시가야, 보살이 이 통달법계의 수승한 삼매를 얻을 적에는 신통의 힘으로 대지 가운데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자재함이 역시 같으니라. 그러나 그의 마음은 처음부터 땅이라는 모양[地相]을 취하지 않고 오직 풍륜(風輪)만을 기억할 뿐이면서도 또한 풍륜이라는 모양이나 생각도 없는 것이니, 그 보살이 자기 몸을 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붙어 있는 곳 없이 그 몸이 공중에 머물러 있음을 보느니라.
이와 같이 관(觀)한 뒤에 잠깐 사이에 허공에 날아오르며, 그러한 뒤에는 작은 티끌 같은 몸을 변화로 만들어서 허공에 가득히 채우는데도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저 풍륜계(風輪界)라고 지니는 마음도 역시 두루하고 한층 더 넓어지면서도 일체가 바람 같으며, 몸은 비록 나타나지 않지만 이 변화 몸은 저 허공 가운데 가득 차면서 허공이라는 생각을 짓느니라.
비록 이 몸에 대하여 허공이라는 생각을 짓는다 하더라도 끝내 모든 계(界)를 여의지 않으면서 깨달아 알며, 이와 같이 안 뒤에는 허공에 머무르고 허공에 머무른 뒤에는 법이 없다는 생각[無法想]을 기억하며,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몸을 나타내는 모양이나 생각이 없나니, 이 때문에 다시 그의 여러 개의 몸을 합쳐 하나의 몸으로 할 수 있느니라.
또 산ㆍ돌ㆍ담장ㆍ벽을 뚫고 지나가되 장애가 없고, 또한 허공을 밟는 것이 마치 땅과 같으며, 허공 가운데서 가고 서고 앉고 누우면서 갖가지 신통을 두루 갖추느니라.
보살은 다시 모든 수계(水界)를 기억하면서 그 수계가 본래 머무르는 처소를 알며, 그 수계로 인하여 또한 이 몸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마치 저 수계에 이와 같은 색(色)이 있다고 아느니라. 이 가운데 머무른 뒤에는 다시 수계를 기억하고, 이 가운데 머무르기 때문에 곧 다시 저 큰 운륜계(雲輪界)를 기억하는데, 그 운륜이 좇아오는 곳이 오직 인연(因緣)으로 생길 뿐이며 비가 오는 곳도 마찬가지란 걸 아느니라.
그 행하는 곳[行處]을 관하여 모두 분별하여 아는데, 이 가운데 구름이 있고 구름이 없는 것과 비가 있고 비가 없는 것도 모두 그와 같이 알아서 다만 인연으로부터 세간 이치[世諦]의 일을 낼 뿐이요, 이렇게 지으면서 들어가 이 가운데 머무르고 나서는 큰 비를 놓아 저 두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대지(大地)의 모든 풀과 나무와 숲의 갖가지 사물들을 두루 적시니, 이처럼 일체가 다 대지에 의지하여 물로 윤택해져서 저렇게 나고 자란다는 것을 아느니라.
지혜 있는 사람은 그 풀과 나무를 취한 다음 공력을 들여서 불을 드디어 얻고, 그 불이 생긴 뒤에는 그 자체(自體)에서 생기게 된 그 안의 불의 업[火業]을 말미암아 도리어 스스로 본래 생긴 초목을 태우거늘, 하물며 다시 그 밖의 물건이겠느냐? 이 때문에 아자(阿字)는 불[火]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한 원수[怨]라고도 하느니라.
그리고 또한 땅은 물 위에 있기 때문에 지계(地界)라고 하며, 이 땅에 있는 모든 우거진 숲과 나무는 물에 적셔지기 때문에 더욱 자라게 되며, 그런 뒤에는 불을 내고 그 불은 바람으로 인하여 한층 더 왕성하여진다는 것을 기억하느니라.
그 보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모든 작용의 법은 이른바 땅을 인하여 불을 내서 허공에 머무르니, 이 불과 바람의 두 가지를 함께 화합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이것들은 다만 나고 없어짐이 있을 뿐임을 알며, 나고 없어짐을 본 뒤에는 두 가지의 신통을 얻느니라.
그리고 저 풍륜은 곧 제사대(第四大)로서 색법(色法)이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접촉[觸]만이 있기 때문에 이 몸이 아는 것이지 귀로도 들을 수 없고 여타의 것으로도 지각하지 못해서 잡아 지닐 수도 없지만 위로는 허공을 다니며 아래로는 땅에 부딪치느니라.
모래가 날고 돌이 구르고 흙이 흩뿌려지고 먼지가 날리는 것을 세간의 어리석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해서 ‘먼지를 일으키는 맹렬한 바람[黃黑風]이 이리 왔다가 저리 간다’고 말하지만 실로 그 바람은 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 바람은 허공의 인연으로부터 생겨서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이와 같은 순서로 풍계(風界)는 볼 수가 없고 저 허공에 의지하고 변제가 없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보살은 허공에 의지하여 그 바람의 모양을 취하면서도 자기의 몸은 부분[身分]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 몸에 부분이 없다고 아는 것이 바로 진실한 지혜[實智]이니라.
그 지혜를 얻은 뒤에 풍계에 들어가 풍계에 처할 때는 모든 가죽ㆍ살ㆍ힘줄ㆍ뼈를 제거하여 뭇 속박에서 해탈하며 머무름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 안의 바람과 같아서 짓고 싶은 대로 신통 변화가 뜻대로 곧 이루어지지만 그 바람 속에서 깨닫거나 안다는 생각은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음이 바람과 화합하여 오래도록 훈수(熏修)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생각하기를 ‘이 허공 안에는 도무지 아무것도 없고 의지할 만한 곳이 없거늘 어떻게 집착하겠느냐?’고 하나니,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나고 싶은 곳에 따라 즉각 가서 태어나느니라. 그가 이처럼 섭수해 지님이 구족해도 그 가운데서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속박을 당하지도 않으니, 비록 악취(惡趣)에 난다 하더라도 정념(正念)이 앞에 나타나서 나고 죽고 하는 이런 곳에서 마음의 바람[心風] 때문에 나고 죽음을 분별하면서도 나고 죽음에 대해서는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마치 저 풍계는 거두어 지닐 수도 없고, 붙잡아 지닐 수도 없으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마음으로 알 수도 없으며, 지혜로 증득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처럼 사대(四大)의 일도 모두 다 그와 같으니, 가없는 마음으로써 이렇게 깨달아 아느니라.
어찌하여 가없다[無邊]고 하는가? 이를테면 부처님ㆍ여래는 진실 가운데서 모든 계[諸界]를 해설하지 않았으며, 그 모든 법 가운데 구족하게 희유(希有)한 법이 있지만 설한 자는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보살로서 이와 같은 수승한 신통이 있는 이면, 신통으로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마음이 자재하다고 하는가? 그 마음이 자유자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또 어떠한 이치 때문에 마음이 자재함을 얻는가? 이 사대는 식(識)도 없고 마음[心]도 없는지라 이 완고하고 장애 있는 법[頑礙法]이 온갖 곳에 두루하되 경계[際]도 없고 가[邊]도 없음을 아는 것이니, 그러면서도 그 마음은 다시 이 마음이 없는 법[無心法] 안에 능히 들어가서 분별하고 헤아리느니라.
마치 저 지계(地界)는 완고하면서도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 속에서 갖가지 풀ㆍ나무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나고, 다시 갖가지의 보배나무[寶樹]와 보배기둥[寶柱]이 있으며, 다시 갖가지의 중생들이 있으면서 의지하고 머무르며, 그 가운데서는 또한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도 있나니, 이른바 지계는 물에 의지하고 수계(水界)는 불에 의지하며 화계(火界)는 바람에 의지한다고 이렇게 다 헤아리게 되느니라.
이 가운데서 지계라 함은 이른바 가죽ㆍ살ㆍ힘줄ㆍ뼈ㆍ손발톱ㆍ이 내지 머리칼과 터럭 따위요, 수계라 함은 이른바 눈물ㆍ땀ㆍ고름ㆍ피ㆍ콧물ㆍ침 내지 대변ㆍ소변 따위이며, 화계라 함은 이른바 따뜻하고 덥고 번열과 나아가 스스로 괴로워하고 다른 이를 괴롭히며 음식을 소화하고 익게 하는 따위요, 풍계라고 함은 이른바 말을 하고 숨을 들이쉬는 것과 내쉬는 것이며, 구부리고 펴고 가고 오고하는 따위이니, 이와 같은 온갖 것을 그는 모두 분별하느니라.
이미 분별한 뒤에는 다시 생각하기를 ‘지금의 이 사대는 끝이 없고 한량이 없다. 세간의 중생들은 이 몸이 곧 끝이 있고 한량이 있다고 알아보는데, 어떻게 한량없고 끝없다고 말하면서 다시 한량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느니라.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지금 이 모든 계(界)에 끝과 한량이 없다고 함은 그 마음의 계[心界]가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업행(業行)도 역시 끝이 없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원지(願智)와 깨달아 짓는 언어도 모두가 끝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그것은 본래 생기는 것도 없고 끝이 없기 때문이니, 만일 아직 생사를 바꾸지 못한 중생이면 간혹 이와 같이 끝과 한량이 있다고 분별할 수도 있다’고 하느니라.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모든 대(大)와 네 가지 계(界)의 더미는 끝없이 거두어 지니는 것[攝持]이니, 이 때문에 나는 이제 저 끝없는 신통을 일으켜야 하고, 또한 끝없는 신통을 성취해야 하며, 또한 저 끝없는 지혜 업[智業]을 성취하고, 나아가 갖가지 끝없는 언어를 성취해서 저 모든 세계 안의 온갖 중생들을 교화해야 한다.
모든 심행(心行)으로 업을 지어 나고 죽으면서 취하는 바가 있을 때는 무릇 받아들이는 갖가지 과보(果報)와 갖가지 언어를 모두 다 알아야 하고, 나아가 그 나고 죽는 유(有) 가운데서 업을 짓는 법의 작용과 일을 행하는 공능(功能)도 역시 모두 알아야 하며, 또 저 성문(聲聞)의 장인(藏印)을 나타내어 서른일곱 종류의 조보리법(助菩提法)들도 다 이루어서 원만하게 하여야 하고, 또한 저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세간에 벽지불(辟支佛)이 되어 나타나서 세간을 이롭게 하여야겠다’고 하나니, 오직 이와 같은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畏] 등으로 저 갖가지 신통의 교화를 나타낼 뿐이니라.’
아난아, 때에 그 방광여래는 다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만일 이 삼매를 이용한다면 어찌 저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겠느냐?’
하늘 제석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 가운데서는 마음의 자재(自在)를 얻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네가 앞서 ‘어떠한 삼매가 지업(智業)을 능히 냅니까?’라고 물었는데, 교시가야, 다시 건립상승(建立上昇)이라는 삼매가 있느니라. 이 보살마하살들은 그 숲 속에서 이 삼매에 들었고, 삼매에 든 뒤에는 이 모든 보살들이 출상(出上)하였기에 승상(昇上)이라고 하며, 또한 이것은 여래의 방편 언어(言語)가 더욱 자란 것이니라.
여래의 방편 언어가 더욱 자란 뒤에는 여래의 교묘한 방편 가운데서 지니지 않은 이가 없고 들어가지 않는 이가 없으며 깨닫지 않는 이가 없나니, 그가 이미 깨달은 뒤에는 곧 온갖 세간에 있는 모든 유위(有爲)가 상속하는 모든 행법(行法)에서 즐겁지 않다는 생각[不樂想]을 일으켰느니라.
교시가야, 어떻게 그것에 대하여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일으켰는가? 이곳에는 어느 한 중생도 허물이 없는 이가 없어서이니, 모두가 허물이 있기 때문에 뒷날에 벌(罰)을 받느니라.’
제석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벌이란 어떠한 것이옵니까?’
부처님은 교시가에게 말씀하셨다.
‘이 이치는 알 수는 있으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이제 이 중생을 위하여 이 일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 오직 이 중생들에게는 이를 간략하게 논해야 할 뿐이니라.
교시가야, 여래ㆍ세존은 자세히 또는 간략하게 설법하는데, 오직 세계에 대하여 임시로 처소와 행(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일 뿐 제일의 진실한 이치가 되는 것은 아니니라.
교시가야, 너는 전생에 선근을 크게 심었으면서도 아직 드러내 발하지 못한 것이 마치 맹렬한 불이 깊은 구덩이 속에 있지만 두꺼운 흙이 위를 덮어서 나타나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라.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불이 비록 왕성하더라도 흙에 덮여 있을 적에는 불의 업[火業]이 되어서 타는 작용을 얻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그 불은 덮어져 있는지라 탈 수 없나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마땅히 여래가 말씀하신 세 가지 언교 업장의 법문[言敎業藏法門]을 사유하면서 구족하게 분별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마땅히 여래ㆍ세존의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를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제 보화(寶火)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혼탁한 세간[濁世]에 출현하실 그 때에는 이미 네가 선근을 심었으므로 방편의 과보로 그 대중 가운데 제육의 보살마하살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저 하늘 제석은 부처님으로부터 옛날의 일을 얻어 듣고는 바로 과거 구억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일으켜 보살의 일을 행했다는 걸 기억하였으며, 이것을 기억하고 나서는 크게 기뻐하면서 모든 여래의 훈수(熏修)한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부지런히 행하면서 쉬지 않았고, 법의 이치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물으면서 가지(加持)를 얻게 되었느니라.
아난아, 그때에 하늘 제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댄 채 합장하고는 부처님을 항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누가 부처님의 교음(敎音)을 알아서
이 총지의 문[摠持門]에 들어가겠으며
누가 능히 교묘한 방편을 분별하고 물어서
걸림이 없으리이까?
때를 알아서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셨고
때 아니면 성인[聖]도 말씀하시지 않나니
잘 통달하여 때에 맞게 나아갔는지라
여래께서는 법안(法眼)을 여셨나이다.
아난아, 그때에 저 제석은 과거 구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있었던 모든 원행(願行)의 일을 기억하였나니, 똑똑하고 분명함이 마치 꿈에서 본 바가 낮에 겪었던 일처럼 모두 잘 기억하듯이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과거에 있었던 온갖 일을 분명하게 환히 알아서 의혹이 없었느니라. 이른바 그 때 머물렀던 처소를 모두 다 깨달아 알았고, 아울러 그 색상(色相)이 지금 비록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무엇이든 환히 알았으며, 나아가 그 때에 했던 모든 일을 사유하고 분별한 것도 역시 모두 분명히 알아서 치우친 경계[邊界]를 짓지 않았느니라.
그 때에 다시 ‘꿈은 어디서부터 생기는가?’를 그는 사유하다가 연(緣)으로부터 생긴다는 것도 기억하였으며, 그 때에 하늘 제석은 이미 이 꿈은 연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곧 꿈속의 상(想)을 관(觀)하듯이 저 세간을 관하면서 과거 세상의 갖가지 머물렀던 일을 보았으며, 이렇게 안 뒤에는 다시 과거를 꿈으로 관하는 방편으로써 사유하고 헤아렸느니라.
어떠한 일을 헤아렸는가? 이를테면 내가 깨달은 바였으니, 내가 깨달은 바라 함은 나와 중생이 곳곳마다 유전(流轉)하고 바퀴 돌듯 하면서 크게 고통을 받는 것이었느니라. 이와 같이 받아들인 뒤에는 다시 현재의 방편으로 모두 다 과거의 세상 때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고,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선근을 성취하고 보리의 도[菩提道]를 원만하게 함도 관하여 보았으며, 그가 했던 일로 이른바 과거의 이름 등도 역시 얻을 수 있었느니라. 만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의 그 몸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생신(生身)은 다시 어디에 계시는가? 또한 그 때에 모든 성문으로서 번뇌를 다하게 된 이의 몸과 그리고 신통과 공덕의 수승한 일은 다시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하였으며, 만일 이와 같은 이름과 일과 처소가 없는 것이면 ‘여래ㆍ세존께는 무엇 때문에 말씀하셨을까? 이 때문에 반드시 과거가 유(有)가 됨을 알겠다’라고 하였느니라.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기억한 바를 여래께 청하여 묻고서 의심의 그물을 결단해야겠다’고 하였느니라.
아난아, 그때에 저 여래는 하늘 제석의 마음에 의심이 있는 것을 아시고 곧 다시 말씀하셨느니라.
‘너 교시가야, 이런 생각을 내는 것은 의혹을 아직 다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아까 저 꿈속의 상(想)처럼 이 일을 기억하여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그 꿈속의 일은 이미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옛날에 일찍이 겪었던 일을 보면서 설명할 뿐이니라.
교시가야, 네가 만일 꿈과 같이 알면서 부처님ㆍ여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옛날에 겪었던 일을 반드시 이와 같이 이해하고 이와 같이 지닌다면, 이것은 집착[執著]이 되느니라. 어찌하여 집착이라 하는가? 이른바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과거의 일 안에서 집착하는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없기[無] 때문이니, 그러므로 저 없음 속에서 애착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 너는 이제 이미 없는 법[無法]에서 분별을 내고 있구나.
교시가야, 이와 같은 온갖 이치 가운데서 사유하고 분별해도 일으키는 곳과 말하는 곳, 의지함과 집착함이 있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저 과거와 같은 일은 모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오직 지혜[智]로써만 저 일찍이 겪었던 일을 아는 것이요, 과거는 진실로 없다’고 말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이 삼세는 그 이치가 이미 결단되었느니라. 어떻게 결단되었는가? 이른바 세간[世]이란 그대로가 세간이니, 이 때문에 너희들은 이 법 가운데서 마땅히 인상(印相)을 알아야 하느니라.
무엇이 인상인가? 이 이치는 진실이라 파괴할 수 없으므로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이렇게 갖가지로 개발(開發)해서 이 있다[有], 없다[無]고 하는 이치를 나타내 보이나니, 너희도 역시 세간의 말로는 묻지 말아야 하며, 이 가운데서는 오직 이와 같은 언교(言敎)의 일만을 지어야 하느니라.
지금 너희들은 무슨 일 때문에 부처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본래 차례로 나의 방편설(方便說) 가운데 들려고 했거늘, 어떻게 이제 다시 의심의 그물을 내느냐?
교시가야, 너는 이제 오히려 여래가 법을 설하는 곳에서 결정코 거칠고 흐린[穢濁] 일을 짓고 있구나.
교시가야, 너희들은 여래의 법 가운데서 거칠고 흐린 일을 짓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연설한 바는 청정해서 거칠거나 흐림이 없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그 하늘 제석은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여기에 앉아서 이 방편의 미묘한 비유를 듣고 이런 의심을 내는 것인데, 여래의 말씀처럼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다시 의심을 내옵니다. 저희들이 전에 수미산 꼭대기에 있을 적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건대, 그때에《광녀경(曠女經)》이라는 한 경전이 있는 것이 마음에 나타나 있사옵니다. 이런 인연으로 저는 부처님의 큰 위신(威神)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감히 이런 질문을 일으키나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몽상(夢想)의 비유(譬喩)로 이 일을 알고 나서 저희들은 과거에 있었던 온갖 의심을 끊어 없앴나이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말씀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듣게 하시옵소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아, 네가 물었던 일은 아직 끊을 만한 것이 못 되느니라. 다만 이 억수의 보살들이 올바르게 물은 일이 조금 있으니 그것부터 먼저 결단하고, 그러한 뒤에 이 수다라를 연설하여 너희 의심을 끊을 수 있게 하여야겠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너는 이제 우선 수미산 꼭대기에 돌아가 있어라. 거기에 머무르고 나면 나는 그곳에서 주수천화(珠水天華)라는 한 송이 연꽃으로 변화하리니, 너는 잠시 동안 그 뿌리 아래 머무르도록 하라.’
그때에 하늘 제석은 생각하기를 ‘여래ㆍ세존께서 나를 저버리는 것은 내가 이《광녀경》을 물었기 때문이구나. 나는 오늘 거룩한 뜻을 받아들여서 거역함이 없어야겠다’고 하였느니라. 그리고 하늘 제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수미산 꼭대기에 이르렀고, 그 곳에 머무르고 나서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스스로 궁전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처님ㆍ세존께 귀를 기울이다가 자비를 드리워 나를 기억하시면 나는 돌아가 공경하여야겠다’고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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