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23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1권

by Kay/케이 2024. 1. 1.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1

 

 

대법거다라니경 제11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24. 육도품 ②

“또한 마나바야, 무엇을 이름하여 제사의 보살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즐겨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그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을 행하였을 적에 간혹 집에 머무르면서 여래와 모든 보살과 성문 대중을 뵈면 무릇 필요한 것을 모두 다 구족히 마련해 드렸나니, 이른바 음식ㆍ탕약ㆍ의복ㆍ평상ㆍ깔개와 손발을 씻고 바르는 것과 몸을 닦고 문지르는 갖가지 도구와 목욕하는 그릇과 씻을 물과 의복을 빨고 물들이는 것과 뜰에 밝히는 등불ㆍ촛불과 경행(經行)의 처소며, 그 밖의 갖가지 부리고 짓는 온갖 일을 모두 다 능히 하였느니라. 그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을 행할 적에는 온갖 처소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모두 갖추어 두지 않음이 없었느니라.
마나바야, 그 보살이 집에 있을 적에는 역시 제화염왕(祭火焰王)을 위하여 온갖 사람이나 동물을 몰고 부릴 뭇 도구들을 두루 마련했으니, 모두 정진을 잠시도 쉬지 않고 출가한 뒤에는 더욱 정진을 닦으면서 수순하고 장엄하면서 영원히 게으름과 오만을 제거하고 염근(念根)을 성취하여 모든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끝내 잠시도 버리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차례로 모든 세존과 모든 보살ㆍ성문의 대중을 섬기면서 역시 정진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제사의 보살마하살이 저 비리야바라밀을 즐겨 행하면서 머무는 것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무엇을 이름하여 제오의 보살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을 즐겨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그 보살이 선정(禪定)을 행할 적에 오히려 집에 머무르는 한량없는 아내와 첩을 인도하고 에워싸인 채 모든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산 안으로 들어갔느니라.
마나바야, 그 동산의 못 안에는 흐르는 샘물과 여러 가지 꽃과 열매가 많이 있었으나 바깥사람들은 보지 못했으며, 나아가 나는 새들까지도 오히려 들어가지 못했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느냐?
마나바야, 그 때에 그 보살은 동산 숲 사이에 있으면서 즐겁게 논 뒤에 그 대중으로부터 나와 은밀하고 고요한 하나의 다른 숲에 이르러서 단정하게 앉아 선정을 염(念)하면서 사유하고 관찰하였는데, 큰 바다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서로 살해하고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삼십삼천이 모든 권속과 천녀(天女)들과 함께 하늘 음악을 연주하면서 기뻐하고 쾌락을 누리는 것을 보았다.
다시 온갖 큰 지옥 안에 있는 모든 악업을 지은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받되, 혹은 찍히기도 하고, 혹은 살을 벗기기도 하고, 혹은 베이기도 하며, 혹은 방망이로 맞기도 하고, 혹은 불에 타기도 하고, 혹은 삶아지기도 하며, 혹은 작고 큰 칼을 쓰고, 혹은 활ㆍ화살을 쓰고, 혹은 작두와 톱을 쓰고, 혹은 작은 창ㆍ큰 창을 써서 이와 같은 죄인들이 크게 울부짖는 갖가지 소리를 내며 모든 고통을 받을 때에 보살은 이것을 보고 들은 뒤에 놀랍고 괴로워하면서 곧 정(定) 가운데서 큰 소리를 내어 부르짖었다. 그러나 모든 아내의 첩들은 조용하여 한 사람도 들은 이가 없었으며, 오직 보화(寶火)여래만이 거대한 불빛 같은 황금빛 손을 펴시면서 말씀하시되, ‘어서 오너라. 착한 장부야, 너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 때에 그 보살은 곧 여래의 금빛 손의 광명을 따라 동산 숲으로부터 나와서 곧장 보화 부처님ㆍ세존 앞에 나아가서 머리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는 게송으로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크게 두렵나이다.
혼자 저 깊은 숲 사이에 들어가서
단정히 앉아 선(禪)에 안주하다가 정념(正念)을 잃었사오니
원하옵건대 천인존(天人尊)께서는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마나바야, 그 때에 보화여래는 다시 게송으로 그 보살에게 대답하셨느니라.

너는 장부인지라 정념을 잃지 않느니라.
네가 아까 보았던 두려운 일들은
내가 짐짓 보이어서 너를 깨우치고자 한 것이지만
너는 흐리고 미혹해서 깨달아 알지 못했느니라.

마나바야, 그 때에 그 보살은 머리 조아려 세존의 발에 예배하고 공경하였는데,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법복(法服)이 몸에 입혀지면서 스스로 사문이 되었으며, 출가한 뒤에는 선바라밀(禪波羅蜜)을 버리지 않고 다시금 더욱 으뜸가는 정진을 일으켰으며, 선바라밀을 행하다가 곧 삼마발제(三摩跋提)를 구족할 수 있었고, 구경(究竟)의 선정으로 피안(彼岸)에 이르렀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제오의 보살마하살이 저 선바라밀을 즐겨 행하여 머문 것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무엇을 이름하여 제육의 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즐겨 행한 것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그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반야 속에서 온갖 선근을 성취하여 의심이 없어지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었느니라.
저 부처님ㆍ세존께서 제육의 보살에게 물으시면 그 때에 그 보살은 대답하리라.
‘세존이시여, 이 중에 일체의 다섯 가지 바라밀은 유(有)에 취착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어서 피안에 이르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곧 모든 여래의 업(業)이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지혜의 근[智慧根]이 구족해서 원만하기 때문이옵니다.
보살마하살이 보리수 아래에서 초명(初明)을 증득할 적에 이미 구경(究竟)을 얻어서 저 두 가지 바라밀을 초월하였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단나(檀那)바라밀과 시라(尸羅)바라밀이옵니다.
또한 저 숙명지증(宿命智證)을 얻어서 마음이 유(有)를 싫어하고, 이를 넘어선 이후는 제이명(第二明)을 증득하는데, 이 명(明)을 증득할 때에도 역시 저 두 가지의 바라밀을 초월하는 것이오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찬제(羼提)바라밀과 선나(禪那)바라밀이옵니다. 이 역시 곧 모든 중생의 생사지(生死智)를 보는 것이옵니다.
만일 제삼의 명(明)을 증득하고자 하면 이른바 결정코 큰 정진의 근[大精進根]을 성취해야 하니, 왜냐하면 반드시 백천억 수(數)의 모든 악마 군사들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이 보살이 아직 가부(跏趺)를 풀기 전에 오른 손바닥으로 땅을 누르면, 이때는 그가 큰 정진의 근(根)과 역(力)을 완전히 갖추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대지(大地)로 하여금 여섯 가지로 진동(震動)하게 해서 하방(下方)의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를 두루 진동하므로 거기에 있는 온갖 악마의 군사들 모두가 크게 두려워하나이다.
또한 저 모든 세계 속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으며, 저 세계에 있는 모든 보살로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면 모두 이 땅이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 때[時]에 감응해서 다 불퇴전의 인[不退轉忍]에 머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제삼의 명(明)을 증득할 때에 이와 같은 큰 정진의 힘을 능히 일으켜서 악마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오며,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제삼의 명(明)을 증득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바로 저 모든 세계가 두 가지 일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을 보는데,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있음[有]과 없음[無]이나이다. 다시 두 가지의 일이 있사오니 이른바 아주 없다[斷]는 것과 항상 있다[常]는 것이며, 다시 두 가지 일이 있사오니 이른바 과거와 미래이옵니다. 저 모든 세계에는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이 두루 존재하면서 세간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나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고 나서는 큰 자비를 일으켜 두루 사방을 관하면서 제삼의 명(明)을 증득하나이다.
모든 명(明)을 증득하고 나서 그 보살은 본래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세 번 사자처럼 외치되[師子吼],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라. 정녕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라. 나는 진실한 법계[眞實法界]를 관하여 이미 다하였느니라’고 하나이다. 그 때에 지천(地天)이 이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즉시 큰 소리로 외치되,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지금 바로 세간에 출현하셨도다’라고 하자, 땅에 거처하는 하늘들이 이 말을 발하고 난 후에 상천(上天)의 대중들부터 더욱 더 소리를 내서 유정천(有頂天) 및 온갖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소리를 들었으며, 먼저 외도가 칠 다라수(多羅樹)15) 높이로 세운 당기ㆍ번기가 소리를 낸 뒤 모두 꺾여 넘어졌나이다.’
그 때에 선각(先覺)보살이 말하였다.
‘이 다섯 가지의 바라밀이 구족하게 원만한 뒤에는 모두 저 반야바라밀 속에 들어가리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와 같은 구경의 큰 정진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나이다. 왜냐하면 저 온갖 세간의 얻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운 희유한 법을 능히 연설함에 다함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 때에 방광부처님이 선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각아, 저 여섯 보살은 저마다 지혜 문[智門] 안에 편히 머무른 뒤에는 다 함께 이런 수행할 업(業)을 지었던 것이니, 그 때 보화여래는 그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차례로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또다시 말씀하시되, ‘마나바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만족한 이면, 이와 같은 보살은 곧 제삼지(第三智)의 명(明)을 두루 증득한다’고 하였느니라.
선각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반야바라밀을 저희들은 듣고 싶습니다. 원하옵건대 다시 저희들을 위하여 두루 분별하여 말씀하시어 이 억수의 모든 보살 대중으로 하여금 다 함께 듣고서 부처님의 지혜[佛慧]를 두루 갖추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선각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마나바야, 너는 이제야 비로소 여래께 반야바라밀의 깊고 묘한 이치를 능히 묻는구나.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시 어떤 사람이 이 다라니문에 공양할 수 있다면, 여래가 어찌 이 법 가운데서 숨기거나 아까워함이 있겠느냐?
마나바야, 만일 부처님ㆍ여래가 이 문(門) 가운데서 반야바라밀 법문의 이치를 연설하면, 어떤 모든 보살들은 많이 어기고 등지기도 하면서 능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느니라.
마나바야, 나는 앞서 ‘너희들은 응당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방편인 비밀한 가르침[密敎]을 생각해야 한다’고 이미 연설하였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가령 어떤 사람이 일 겁이나 백 겁이나 천 겁이나 또는 백천억 겁 동안 여래가 설한 미묘한 법을 듣게 되어서 능히 쓰고 베끼거나, 혹은 때로 읽고 외우거나, 혹은 다시 받아 지니거나, 나아가 여래의 방편인 미묘하고 비밀한 말씀을 한 게송 한 구절이라도 믿고 이해하면, 이 사람은 곧 한량없는 선근을 얻게 되고 또한 저 많은 공덕의 더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반야바라밀이란 곧 일체 모든 부처님 지혜의 심히 깊은 근원[源底]이니라. 왜냐하면 이 부처님의 지혜로써 세 가지의 명(明)을 증득할 때는 온갖 법을 보아도 모두 있는 바가 없기[無所有] 때문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그들을 위하여 번뇌를 멀리 여의는 본래 머무는 처소를 말할 때에 어떤 모든 보살은 마음에 두려움을 내지만 점차로 해설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온(安穩)을 얻는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그들로 하여금 즐거이 수행하게 하면 모든 근(根)이 점차로 견고해져서 여래에 대한 파괴되지 않는 믿음을 얻고, 믿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가르치신 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인 뒤에는 수행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어느 것이 바로 모든 여래의 제일의 수승한 가르침[勝敎]인가? 이른바 일으키면서도 머무르지 않음[發起不住]이니라.
마나바야, 어떤 것을 일으키면서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일체 모든 유(有)에 취착(取着)하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나 저 유(有) 가운데서 어떤 모든 보살은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아승기겁 동안 유의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수행하여 유를 취하지 않게 할까’라고 하나니, 그들은 유에 대한 어리석은 마음과 생각으로 모든 유에 취착하면서 번뇌에 의지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방편으로 유를 취하면서 저 어리석고 지혜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생각하기를, ‘어찌하여 최상의 지혜를 획득하고 나서 다시 맨 아래 축생의 몸을 받는가? 저 어리석은 사람이 ≺나는 이 나쁜 축생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짓는 바의 구경(究竟)은 이 몸을 버리거나 여의고서 일을 이룰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유(有) 가운데 온갖 태어나는 곳[生處]은 취착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저 태어나는 곳은 본래 언설(言說)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도량에 앉을 때에 이 반야바라밀이 구족해서 원만하기에 제삼의 명(明)을 얻느니라.
보살이 이미 제삼의 명을 증득하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삼명을 두루 갖추었다는 이름을 얻고, 또한 삼명의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또한 온갖 삼세의 교장(敎藏)이 청정하다고 하고,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가 평등하고 여실(如實)하며 불이문(不二門)을 널리 연설하였다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을 바로 다라니문 수나라(陀羅尼門修多羅) 가운데 근본이 되는 하나의 큰 구절[一大句]이라 하고 또한 큰 발자취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은 또한 칠불(七佛) 세존ㆍ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굴리신 법륜(法輪)으로서 모든 성문 대중을 위하여 연설하실 적에도 이 하나의 큰 구절은 연설하지 않으셨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구절을 가히 말하자면 크다고 하겠느냐?’
선각이 말하였다.
‘심히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바로 큰 구절[大句]이라 하느니라.’
선각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과 같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차이나 어김이 없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겁탁(劫濁)한 세상의 극히 더럽고 나쁜 때에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이 수다라 법문을 연설하시면, 그 모든 삿되고 거짓되고 아첨하고 곡해하는 중생들은 여래 앞에 있으면서도 이런 경전과 보리의 도[菩提道]를 비방하며 믿지 않나니, 처음부터 사유하지도 않고 또한 분별하지도 않으면서 영영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없고,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으며, 해탈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고뇌를 받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를 가벼이 여기면서 헐뜯거나 정법(正法)을 비방한다면, 이와 같은 무리들이 그 어느 곳에서 안온을 얻게 되겠느냐?
마나바야, 당시 보화여래께서 혼탁한 세상에 출현하셨고 지금의 나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또한 보화여래의 국토 안에는 실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이 있지만, 거기엔 다만 성문(聲聞)으로서 과(果)를 증득한 이가 스물네 사람만이 있을 뿐이니, 이 나쁜 세상에 오탁(五濁)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니라.
오탁이라 함은, 이른바 중생탁(衆生濁)과 수명탁(壽命濁)과 견탁(見濁)과 번뇌탁(煩惱濁)과 겁탁(劫濁)이니라. 이와 같은 갖가지의 나쁜 법이 중생 중에 행해진지라, 모든 부처님께서 비록 연설한다 하더라도 널리 보급되지 않나니, 그런 때에는 큰 복덕과 선근을 두껍게 쌓은 모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라. 가령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언제나 그들을 섭수하면서 열어 일으키고 갖가지 법문을 드러내 보이며 모든 비유를 인용하면서 방편으로 유도하고 제도 해탈한다 하여도 끝내 알지 못하느니라.
마나바야, 나쁜 세상에는 이러한 나쁜 법이 많이 있으므로 나는 이제 연설하겠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지금 나의 법 가운데서 모든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들이 다툼을 멀리 여의어서 모두 다 조화롭고 부드러우며, 몸과 마음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부처님ㆍ세존으로부터 깊은 법을 묻고 청하며, 들은 뒤에는 능히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뒤에는 능히 지니며, 지닌 뒤에는 능히 행하면서 내가 가르친 바대로 받들어 순종하며 어김이 없으면, 모든 유(有)가 다하여 열반에 들어가리라.
마나바야, 내가 앞서 장차 오는 세상에는 많은 분들이 부처가 되신다고 설하였듯이, 이 대중 가운데 백억의 악마 군사들은 뒷날 모두가 안락국(安樂國) 가운데서 부처님ㆍ세존이 되시리라. 그 때에는 저 모든 중생들을 희롱하고 어지럽힐 악마 군사들이 없을 것이요, 또한 외도의 경적(經籍)을 익히거나 배우지도 않을 것이며, 대부분 쾌락을 누림이 다함이 없으며, 조화롭고 부드러워서 교화하기 쉬우며,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며, 저마다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서 이룩함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부처님 보리에 관한 일을 모두 능히 받아 행할 것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이런 모든 법을 관찰하시고 그런 뒤에야 세간에 출현하시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하나의 관[一觀]이자 하나의 말씀[一說]이라서 많은 종류가 없나니,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법 가운데서 두려움을 내지 말라. 너희가 묻는 반야바라밀을 여래ㆍ세존이 아직 해설해 주지 않은 것은 모두 너희들에게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한 연유일 뿐이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두 사람 가운데 첫째는 침착하고 깊으면서 지혜가 있는 이고 둘째는 방정맞고 성미가 급한 이와 같으니라. 어느 때 두 사람이 함께 시골 길을 걷다가 생대추를 만났을 때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을 따서 먹으려고 하자, 지혜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이 대추는 열매가 아직 먹을 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추가 안팎으로 아직은 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다시 ‘따서 먹기만 하면 되었지 무슨 날것, 익은 것을 말하는 것이오?’라고 하면서 대추를 따서 입 속에 던져 넣어 씹어 보고는 맛이 없자 그만 토해 버렸으니, 이 사람은 뒷날에 비록 맛있는 음식을 얻더라도 역시 맛없는 것이라고 말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은 어리석어서 맛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지금 이 대중 가운데 어떤 보살들은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하고 지혜의 뿌리[智根]를 아직 성취하지 못했으며 아직 큰 지위[大地]를 증득하지 못한 탓에 비록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는다손 치더라도 감당해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마치 저 사람이 먼저의 생대추를 싫어하여 그 밖의 맛있는 것도 버리는 것과 같으니라.’”

25. 구증품(求證品)

“아난아, 그 때 저 대중 가운데 청정한 행을 하는 이로서 수달다(須達多)라는 이가 선각보살에게 말하였느니라.
‘선각이여, 우리는 오늘 억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숲 나무 사이나 산천에 가서 하나의 고요한 처소를 얻어 함께 여래의 방편인 비밀한 가르침[密敎]을 논해야 합니다. 만일 깨달아 알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가령 능히 들지[入] 못하면 모름지기 거기서 칠 일 동안이라도 서서 사유하여 몸소 선정(禪定)을 증득하고 여래의 대자대비를 받들어 우리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달다는 곧 선각 등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방광부처님ㆍ세존께로 나아가서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제 이 억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저 제화염왕(祭火焰王)의 큰 동산 숲 속으로 가서 고요한 처소를 구하여 함께 여래의 심히 깊은 비밀한 가르침을 논하려고 하나이다. 만일 계합하면 좋겠지만, 혹시 계합하지 못하면 저희들은 거기서 음식도 먹지 않고 칠 일 동안 삼매 속에 서 있으면서 이 이치를 사유하고 관찰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오늘 이 일을 결단하여 실행하고자 모두 세존께 하직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모든 보살이 이렇게 아뢰자,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삼가 너희의 마음을 가다듬어서 부디 방일(放逸)함이 없이 꼭 이 일을 이룩하여라.’
그 때에 모든 보살은 머리 조아려 거룩한 가르침을 받고서 동산 숲에 들어가 사유하였느니라.
‘세존께서는 가르치시면서, ≺너희들은 나의 방편인 비밀한 가르침에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여래ㆍ세존께서는 지금의 우리들을 위하여 어떠한 방편을 지으셨기에 이 법을 말씀하셨을까요? 또한 전에는 우리들을 위하여 어떠한 방편을 지으셔서 법을 해설하셨을까요?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이 법 가운데서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한 구절 문[一句門]을 연설하면 곧 억수의 수다라(修多羅) 이치를 드러내 보인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래ㆍ세존께 청하여 물었으나 다시는 우리들을 위하여 저 한 구절의 청정한 반야바라밀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해석하여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이것이 나의 방편의 해설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나바여, 우리들은 함께 일심으로 이 세 가지 이치문[義門]을 잘 관찰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바로 이 다라니문(陀羅尼門)이겠습니까? 어떤 것이 또 이 수다라의 언덕이겠습니까? 어떤 것이 또 이 반야바라밀이겠습니까? 어떤 것이 또한 이 여래ㆍ세존의 방편인 비밀한 가르침이겠습니까?
마나바여, 그러므로 우리들은 응당 저마다 나무 아래 서서 이와 같은 이치를 사유한 뒤에 만일 하나라도 알면 곧 세존께 아뢰어야겠습니다.’
그 때에 그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저마다 모두 스스로 하나의 나무 아래에 가서 선 채로 사유하며 일심으로 관찰하였고, 나아가 이 세 가지 이치 가운데서 반드시 이 이치를 깨달아 알아야 했으므로 이 모든 보살들은 하루를 지내고 나아가 이틀 사흘을 지내면서 먹고 마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 이치를 사유하였느니라.
그들은 다시 생각하였다.
‘이 가운데서 다시 어떠한 인연이 있는 것일까? 세존께서는 다만 세 가지 구절의 이름만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이치[義理]를 해석하지 않으셨다. 지금 이 대중 가운데는 나라는 생각[我想]과 부가라(富伽羅)16)에 탐착하기도 하고, 혹은 법행(法行)에서 물러나기도 하며, 혹은 음식을 탐내면서 물리지 않기도 하고, 혹은 잠을 많이 자는 걸 좋아하기도 하며, 혹은 많은 음식으로 배가 가득 차기도 하고, 혹은 의심이 많이 있기도 하며, 혹은 억수의 보살 대중 가운데는 여래께 믿지 않는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이 대중 가운데는 법답게 범행(梵行)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의 꾸짖음을 듣기도 하며, 혹은 각관(覺觀)을 많이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일로 다투기도 하며, 혹은 마음의 힘이 열약하기도 하고, 혹은 마음이 번거롭고 게으르기도 하며, 혹은 정진하는 마음이 박약하기도 하고, 혹은 바른 생각[正念]을 망실하기도 하며, 혹은 죄를 짓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혹은 계율을 파계하고 마음이 산란하기도 하며, 혹은 마음에 겁과 두려움을 내기도 하고, 혹은 병에 걸려 있기도 하며, 혹은 방일하면서 배반하기도 하고, 혹은 착한 말[善言]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봄이 없기[無見] 때문에 숨기고 감추면서 곧 이와 같은 법을 연설하지 않으신 것이리라.’
그리고는 다시 생각하였다.
‘어떤 것이 수다라인가? 어떤 것이 억수(億數)의 수다라인가? 어떤 것이 다라니의 법문인가?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인가? 어떤 것이 여래이고, 여래의 비밀한 가르침인가? 여래는 무엇에 의거하여 말씀하셨고, 무엇을 인하여 일으키셨으며, 무엇을 일컬어 언어라 하는가?’
다시 생각하였다.
‘여래께서는 저 사람에 의지한 까닭에 수다라를 말씀하셨는데, 만일 저 사람에 의지하여 언설이 있다면 이와 같은 언설은 곧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생각[人想] 때문이니,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나라는 생각[我想]이 있고,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중생[衆生]이 있으며, 중생이 있으면 곧 언설이 있고, 언설이 있으면 곧 세간의 모양[世間相]이 있고, 세간의 모양 때문에 모든 유(有)를 받고, 모든 유를 받기 때문에 곧 무명(無明)이 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모든 행(行)이 있고, 모든 행이 있기 때문에 태어날 식(識)이 있으며, 태어날 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육입(六入)이 있으며, 육입이 있기 때문에 촉(觸)이 있고, 촉이 있기 때문에 수(受)가 있으며, 수가 있기 때문에 애(愛)가 있고, 애가 있기 때문에 취(取)가 있으며, 취가 있기 때문에 유(有)가 있고, 유가 있기 때문에 생(生)이 있으며, 생이 있기 때문에 사(死)가 있다. 죽은 뒤에 다시 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이 곧 인(因)과 연(緣)이 되어서 오가는 모양[往來相]인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런 세간의 일에 의지하여 차례로 수다라(修多羅)를 말씀하신 것이다. 수다라란 이른바 진제근본(盡際根本)으로서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을 말함은 이른바 우리들이 저 없음[無] 속에서 분별을 일으켜 염(念)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분별하면 바로 무명이므로 여래께서 이를 범부가 하는 일이고 또한 어리석은 업(業)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저 사성제(四聖諦) 가운데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오고 가고 바퀴 돌 듯 하면서 끝없이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이니, 사성제를 보거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저 사성제의 법은 응당 이 다라니문의 수다라 속에서 온갖 여래께서 펴신 바를 관찰하여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법은 심히 깊어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니, 이 속에서 오직 여래만이 변제(邊際)를 알 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의 지혜의 변제를 알고자 하면, 이 사람은 역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다라 중의 심히 깊은 법문에 대하여 그 본래의 시초를 알아야 하며, 이곳에서 나는 응당 생각하기를, ‘모든 수다라의 변제의 저 언덕[彼岸]은 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여래의 깊고 비밀한 교법(敎法)으로서 사성제를 말하는 것이니, 우리들은 이 사성제 가운데서 응당 사유하고 헤아리고 분별하여 모든 도리를 얻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 처음의 한 성제(聖諦)는 바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고(苦)와 고지(苦智)이다.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 이 고음(苦陰)을 말씀하셨는가? 음(陰)의 이름은 유(有)를 받아들인 것이며, 이것은 무명력의 법[無明力法]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있는 무명력이란 것도 역시 음이라 하니, 음은 고통의 더미[苦聚]로서 바로 여래께서 근심하고 염려하시는 일이다.
모든 중생들은 무명의 캄캄한 광[藏] 속에 떨어져서 언제나 얽매이고 덮인 채 스스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여래께서 그것을 보시고 곧 대비(大悲)를 일으키시면서 생각하시되, ‘이 모든 중생들은 어찌하여 이 고뇌 가운데서 유전(流轉)하며, 어느 곳에서 이 유전을 받고 있느냐? 무슨 인연 때문에 이런 오고 감이 있느냐?’고 하신다.
이렇게 오고 가고 하면서 고통의 더미에 바퀴 돌듯 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는 그 가운데서 이와 같이 음(陰)을 말씀하셨으니, 음이란 여래께서 장애(障礙)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음이라고 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유전하며 어느 곳에서 유전하느냐?’ 등 이 하나의 음[一陰]에서 모든 여래는 고성제(苦聖諦)가 오음을 섭수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고 오고 나고 없어지는 행(行)이라서 여래께서는 방편으로 하늘을 말씀하시고, 사람 내지 지옥ㆍ축생ㆍ아귀 등의 세계를 말씀하셔서 오도(五道) 가운데서 바퀴 돌듯 고통을 받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저 오음이 바퀴 돌듯 가고 오고하면서 곳곳에서 생(生)을 받되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고성제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뭇 인연으로부터 차례로 존재하는데 우리들이 사유로 이와 같은 생각을 내는 것이다.
이른바 집성제(集聖諦) 가운데서 무엇이 집(集)인가? 이른바 무명(無明)이 가득 찬 것[滿足]이니, 저 많은 음[多陰]을 취하면서 이와 같은 색의 성품[色性]을 두루 성취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 또 다시 무엇 때문에 집이라고 하는가? 욕심[欲]이 근본이 되어 행을 짓는 업을 내고 그 업이 가득 차기 때문에 집이라 한다. 또한 어떤 것을 집이라 하는가? 그 짓는 바의 행은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면서 지은 바 그대로이기 때문에 집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고집성제이다.
이른바 고멸성제(苦滅聖諦)라 함은 저 소멸[滅]이 오직 명색(名色)이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하나니, 어떤 것이 색(色)인가? 이 가운데서 색이란 이른바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색이 된 것이다. 여래께서는 그 가운데서 어떤 이치를 나타내 보이셨는가? 다만 이름[名字]과 언설(言說)을 비유하셨을 뿐이다.
어떤 것이 비유인가? 여래께서 색은 마치 물에 모인 거품과 같다고 하신 것이니, 이 색 가운데서는 색이라는 생각[色想]이 없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무릇 말씀하신 것마다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들은 알아야 하리니, 이 오음이란 ……처음부터 생기는 곳[生處]을 관찰할 수 없고 또한 온갖 변제(邊際)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거품덩어리로 이 네 가지를 비유하신 것이다.
범부는 그 안에서 망령되이 색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그것은 지계(地界)이고 이것은 수계(水界), 그리고 온갖 화계(火界)와 풍계(風界) 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성자(聖者)만이 분명히 알아서 다만 비유가 있어서 이름으로 나타내 보일 뿐이다.
그 가운데서 다시 여타의 물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나니, 모든 생기는 법[生法]은 얻을 수 없으니, 색은 얻을 수 없고, 색의 생김을 구할 때에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오직 이것은 생기고 소멸하는[生滅] 것으로 행(行)의 분별이기 때문에 저 고통의 더미[苦聚]가 생길 뿐이고 이는 지혜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소멸할 뿐이다. 모든 법은 생겨나면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 때문에 고(苦)가 소멸한다고 한다.
만일 이것을 세 가지의 말로 하면 곧 고성제요, 고집성제이며 고멸성제이니, 이 세 가지 곳에 들어가서 지혜로 음(陰)을 알아 소멸시키고 도(道)를 구하면서 사유하고 듣기 때문에 고를 멸하는 도[滅苦道]라고 한다.’”

26. 제보살증삼매품(諸菩薩證三昧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그 모든 보살은 다시 생각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법(四聖諦法)의 이치를 나는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오고 가고 하면서 바퀴 돌듯 하였다. 이 가운데서 그 누가 바퀴 돌듯 하는가? 이를테면 어리석은 사람[愚人]이니, 저 어리석음으로 고통의 더미를 더욱 자라나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큰 고통을 받게 하고 있다.
여래께서는 그 가운데서 갖가지의 방편으로 저 어리석음의 고통의 바퀴[苦輪]를 제거시키기 위하여 이 다라니문을 열어 보이셨고, 억수의 수다라법을 말씀하셨지만, 그 변제가 없어서 시초도 없고 근원도 없으며, 널리 연설할 수도 없고 깨달아 알 수도 없으며, 나아가 일체 모든 부처님 법 가운데서도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마땅함에 따라 적은 지혜로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직 비슷하게 상속하는 지혜[相似相續智]로만 알 뿐이다.’
그 때에 저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다시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우리의 적은 지혜의 힘을 아시기 때문에 감응해 짓는 곳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니, 이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짓는 바를 관(觀)하면서 이렇게 선 채로 칠 일까지 이르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염(念)하기 때문이다. 비록 칠 일 동안 마시지 않고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안락하게 머무르는 것이라서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묻지 않아도 문득 목숨을 마치게 할 수 있어서이다.’
또한 생각하였다.
‘우리는 이제 다시 이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누가 죽는 자인가? 누가 죽음의 고통을 당할 것인가? 무엇을 목숨이 끝난다[命終]고 하는가? 누가 죽는 법을 지은 것인가?’
그들은 이렇게 하다가 오 일째 되는 밤에 사념처지(四念處智)를 얻었고, 다시 육 일째 되는 밤중에 십이인연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여실히 알아보아서 전도됨이 없었고, 이와 같이 안 뒤에는 숙명지(宿命智)의 거룩한 도[聖道]가 앞에 나타나면서 나라는 생각[我想]이 사라지고 다하였느니라.
그들이 이와 같이 전생 일[宿命]을 보았을 적에 또한 생각하였다.
‘이야말로 우리들은 옛날에 소견이 전도되어 덧없는[無常] 가운데서 항상하다는 생각[常想]을 내었고, 이에 전생의 일과 처소를 다시 분별하여 훈습(熏習)하고 증장(增長)하였다. 이 가운데 모든 가라라(迦羅邏)였을 적에 모든 대(大)가 앞에 나타났으나 모두 나[我]가 없거늘, 어느 곳에서 다시 옛날에 색(色)을 보았던 것과 나아가 마음을 취했던 것이 있겠느냐?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몸의 색[身色]을 바르게 생각하지 못한지라, 고통의 한가운데서 망령되어 즐겁다는 생각[樂想]을 내었다. 우리들이 바른 염처(念處)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연을 보지 못한 것이니, 이 인연의 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한 신근(信根)에 견고함이 없었고, 오랜 세월 동안 이것에 대하여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고 즐거운 모양[樂相]에 집착해서 이와 같은 진실한 법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였다.’
그 모든 보살들은 다시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여래께서 말씀하신 억수의 수다라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고 반야바라밀에 대해서도 역시 알지 못하였으며, 다라니문에 섭수된 모든 수다라의 한 구절의 이치[一句義]도 역시 알지 못하였다. 우리 마음속으로는 ‘유독 저 여래의 결정적인 방편만이 바라는 바를 잘 안다’고 헤아렸지만, 당연히 우리들의 마음은 파리하고 미약하였기 때문에 한 변[一邊]으로 간락하게 설명하셨어야 했으리라. 이 가운데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는 무슨 이치일까? 어찌하여 우리들은 그 법의 소의(所依)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여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때에 그 모든 보살들이 이 법문을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받아 지니고 나자 물러서지 않는 인[不退忍]을 얻었느니라. 어째서 물러서지 않는 인인가? 이른바 이 세간에서 모든 고통을 받음을 보기 때문이니라.
어떤 것을 세간에서 고통을 받음을 본다고 하는가? 이 가운데서는 오직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만을 볼 뿐이니,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라고 보는 모든 것은 곧 단멸[斷]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또한 어떤 것을 보기에 단멸되는가? 이 가운데는 오직 생각의 속박[想縛]이 있을 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없나니, 이 한 구절 이치[一句義]의 인연 때문에 여래께서는 그 가운데서 우리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감응해 짓는 일과 이곳에서 설한 바가 명언(名言)과 언설(言說)의 근본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분별이다.
만일 분별이 없으면 곧 언설이 없고, 만일 언설이 없으면 적멸(寂滅)이며, 적멸이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거늘, 이 가운데서 무엇을 보겠느냐?
만일 있는[有] 바가 없으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 소멸하지 않았는데도 보아 분별함이 없으면 곧 두려움[恐怖]이 있게 되고,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곧 근심과 뉘우침이 있으며, 만일 근심과 뉘우침이 있으면 신심(信心)이 없고, 신심이 없으면 잘 사유하지 못하며, 잘 사유하지 못하면 곧 해탈은 없다. 어느 곳에서 해탈하지 못하는가? 이를테면 육결처(六結處)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그 때에 그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생각하였다.
‘만일 이 몸을 생각하면 저 지의 모양[地相]을 취하는데, 힘 있게 굳세게 지녀서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금 저 세 가지를 생각해서 지(地)에 의지해 움직이지 않고 자기 몸이 따라 구른다. 이 지를 사유하고 관찰하건대, 지의 모양은 공(空)하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물건이 없으며, 이 때문에 우리들은 지계(地界) 가운데서는 집착할 바가 없다. 마치 지에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수(水)ㆍ화(火)ㆍ풍(風) 등에 집착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저 집착을 여의었기 때문에 몸의 모양[身相]에 대하여 경박하다는 생각[輕薄想]을 얻었으며, 몸이 경박함을 깨닫고 나자 곧 바깥의 법[外法]도 역시 경박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
그들 모두가 칠 일을 경과한 뒤에 저마다 모든 나무에서 떠났고, 그런 뒤에는 모두 함께 다시 이 이치를 사유하면서 지명(智明)을 취하여 저마다 함께 자세히 논의하였으며, 자세히 논의한 뒤에는 모두가 다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었느니라. 그리하여 그 모든 보살들은 곧 그 숲으로부터 허공으로 날아올라 수미산 꼭대기에 이르렀으며, 산꼭대기 이른 뒤에는 큰 음성을 내면서 세 번 나무 불타야(南無佛陀夜)라고 하였느니라.”

27. 소제보살품(召諸菩薩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미간백호(眉間白毫) 범천(梵天)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범천아, 너는 이제 저 모든 보살 대중이 깨달은 바를 알겠느냐?’
백호범천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실로 저 모든 보살이 깨달은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범천아, 너는 그곳으로 천제석(天帝釋)과 이 억수의 모든 악마 대중들과 함께 나아가서 일심으로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서 법답게 그 보살들에게 공양한 뒤에 다 같이 이 회중(會中)으로 돌아와야 하느니라.’
그 때에 백호범천과 천제석ㆍ나계범왕(縲髻梵王)ㆍ사대천왕(四大天王) 나아가 정거천(淨居天)의 모든 하늘 대중, 그리고 이와 같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천왕과 모든 천자(天子)들은 혹은 궁전에 처하기도 하고 혹은 허공에 머물러 있다가 한꺼번에 구름처럼 수미산 꼭대기로 몰려 와서 모든 보살들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공경한 뒤에 물러나 한쪽에 서서 다 함께 그 모든 보살들에게 아뢰었다.
‘대사(大士)ㆍ장로(長老)들이여, 제화염왕(祭火焰王)의 동산 숲에서 칠 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시며 한 위의(威儀)에 머물러 선 채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쓰시느라 수고로움이 많으셨으며, 음식을 칠 일 동안이나 끊으신지라 파리하고 손상되심이 그와 같으십니다.’
그 때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은 모든 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진 이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이것을 그만두고 또한 수고로이 어지럽히지 마시오. 식음을 전폐하여 이미 칠 일이나 경과하였으니, 내가 이제 모든 대사(大士)들을 위하여 애오라지 하늘의 공양을 베풀겠으니, 이를 허락하시고 난 뒤에 세존께 대하여 물어야 할 뿐입니다.’
그러자 모든 하늘들은 다 함께 공손히 응낙하면서 말하였다.
‘그러하십시오, 그러하십시오. 천왕의 말씀대로 하십시오.’
그 때에 제석천왕은 곧 돌아보면서 주식천자(主食天子)에게 명하였다.
‘최상의 뜻으로 너는 이 억수 보살들과 이 욕계(欲界)의 모든 하늘 대중들을 위하여 잘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주식천자는 대답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정녕 그리하겠습니다. 저는 칠십이억 나유타의 모든 대중들을 위하여 모든 묘한 음식을 베풀 수 있습니다.’
제석이 물었다.
‘언제 다 장만하겠느냐?’
‘천왕이여,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잠깐 동안에 삼가 다 갖추겠습니다.’
제석천왕은 말하였다.
‘너는 이제 빨리 가서 바로 장만하도록 하라.’
그 때에 주식천자는 음식 마련하는 곳으로 가서 잠깐 만에 저절로 갖가지 천상의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나서는 곧 돌아와 제석천왕을 뵙고 아뢰었다.
‘필요한 바를 이미 다 갖추었으니 부디 때를 알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제석천왕은 곧 천상의 음식을 억수의 모든 보살들과 그 밖의 칠십이억 나유타의 모든 하늘 대중들에게 바쳐 올렸으며, 그들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손을 씻고 나자 저 하늘들은 모두가 보살들에게 희유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존중과 공경으로 저 모든 보살들 앞에 합장하고 서서 저마다 생각하였느니라.
‘무슨 인(因)과 어떤 연(緣)으로 이 모든 보살 대장부들은 홀연히 세존의 발아래를 떠나 왕의 동산 숲에 들어가 칠 일 동안이나 서서 앉지도 않고 음식 먹는 것도 잊었으며, 다시 그곳을 버리고 이 하늘에 광림(光臨)하였을까? 우리들은 오늘 여래께로 가서 먼저 여쭈고는 부처님께 청하여 이와 같은 의혹을 결단하여 없애리라. 오직 세존뿐이지 다른 이로서는 결단할 수가 없다.’
그 때에 제석천왕은 곧 미간백호범천과 함께 한량없는 범천들과 여타의 천자들, 아울러 제석천왕의 삼십삼천에 있는 한량없는 하늘 대중과 다시 한량없는 마왕의 권속과 그 밖의 하늘들을 거느리고 모두 억수의 모든 보살 대중을 따라 함께 부처님께로 나아가 한 다라수(多羅樹)의 허공 가운데 머무르면서 저마다 법언(法言)으로 방광여래를 찬탄해 노래하였으며, 그 보살들이 모든 향과 꽃을 가지고 허공 가운데 서서 부처님 위에 뿌리자 꽃 일산[花蓋]으로 변하였는데 그 일산의 세로와 너비는 일백 유순이고 높이는 한 다라수였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그 향과 꽃은 사천하에 가득히 찼으므로 그 사천하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칠 일 동안을 똑같이 천상의 쾌락을 누렸느니라.
그들은 다시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반 다라(多羅)만큼의 허공 속에 서서 네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어서 머리 조아려 방광세존께 예배하고 공경하였으며, 세로와 너비 일 구로사(拘盧舍)에 일곱 겹으로 에워싸고서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세존의 지(智)와 행(行)은 법계 중에서 최상이고
덕(德)과 원(願)은 오래전에 원만하게 갖췄으며
희망과 분별을 이미 제거하시어
집착하지 않음이 구름 같아서 다함이 없사옵니다.

그 때에 방광여래는 그 모든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모든 마나바들아, 너희들은 저 여러 나무 아래 있을 때에 이와 같은 미묘한 이치를 일심으로 사유하여서 이제 이미 물러서지 않는 곳[不退墮處]을 증득하였느니라. 그리하여 생사를 끊어 없앴고, 모든 언어를 여의었으며, 애욕의 마음을 파괴하고, 공덕이 이미 원만해서 해탈문(解脫門)에서 이와 같은 모양을 획득하였으니, 너희는 오늘 응당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법의 음성을 잘 지어서 불타(佛陀)를 훌륭히 칭송해 도리천(忉利天)에 잘 갔느니라. 왜냐하면 어떤 모든 중생들은 비록 가려는 염원이 많다 하더라도 게을러서 신통을 얻지 못하니, 저 어떤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는 너희들이 신통을 능히 짓는 것을 보고 곧 게으름을 버리고 용맹스레 정진하여 본래의 서원[本願]을 일으켜 힘써 너희들을 배우기 때문이니라.
다시 너희들이 몸소 나의 앞에서 저 한량없는 백천억 수의 모든 하늘 대중이 존중하고 공양하며 희유한 마음을 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심히 희유하구나. 이와 같은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분수에 따라 증득하였으니, 우리들도 오늘 역시 이와 같은 미묘한 지혜를 부지런히 구하면서 여래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마치 이 억수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처럼 해야겠으며, 또한 우리들도 이 법 가운데서 의심을 끊고 다시 일체 모든 바라밀 중에서 항상 듣고 해탈하기를 원해야겠다’고 할 것이니라.
마나바야, 그들이 만일 너희들이 행한 바를 능히 배우면 장차 크게 이롭게 되리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