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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21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9권

by Kay/케이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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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9

 

 

대법거다라니경 제9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19. 권증품 ②

“‘마나바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문(門)에 능히 들어가면 곧 온갖 법문에 대하여 모두 명료(明了)하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와 같은 법의 모양을 증득해야 하며, 이미 스스로 증득한 뒤에는 사람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하느니라. 너희들은 장차 한량없고 가없는 요설변재(樂說辯才)를 얻게 되리니,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두 가지 말씀을 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이 무릇 말씀하신 온갖 처소에 장애가 없으시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다른 이가 와서 갖가지 법문을 물으면 때에 알맞게 그를 위하여 해설하셔서 의심의 그물을 끊어 없애되 막히거나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 걸림 없는 법문[無礙法門]을 능히 증득하여 알고 능히 듣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니라. 나는 다시 너를 위하여 어떻게 증득하여 알고,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는가를 분별하여 해설하겠느니라.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체 모든 법은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간에 보거나 알 수도 없고 처소도 없는 것이거늘, 무엇으로부터 생겼고 어디로부터 이르렀는지 그 가운데서 누가 이름을 붙인 것이냐? 모든 보살들은 본래 어느 곳에서 이런 법을 얻었고, 다시 누구에게서 이런 법을 가지고 왔으며, 누가 다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과 함께 하는 것이냐?
마나바야, 이와 같은 등의 법은 바로 여래법의 보편적인 광명의 문이니, 온갖 곳에서나 온갖 가[邊]에서 그 생기는 곳을 구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 또한 머무르는 곳도 알 수가 없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너희는 그 가운데서 어리석고 미혹[惑]이 깊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은 부처님의 법을 이제 해설하여 마쳤나니, 너희는 차례로 교장(敎藏) 안에 들어가 온갖 법에 대하여 저절로 명료하게 되어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순금의 광산[眞金藏]을 얻어서 점자로 취하는 것처럼 모든 법문에 들어가 진실한 이치를 구하면서 차례로 증득하여 아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치 온갖 곳에 아무 것도 없는 것[無所有]처럼 응당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일체 모든 법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처소에 장애가 없고 또한 변제(邊際)도 없으며, 아울러 경계의 법문도 역시 그러하여 일체에 널리 두루하면서 경계가 없느니라. 그러나 저 모든 외도(外道)와는 공통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오늘 온갖 법의 모양[法相] 가운데서 경계를 지으려고 하느냐?
마나바야, 역시 어떤 사람도 허공의 경계와 변제를 알아서 다른 이를 위하여 지금의 이 허공은 이와 같은 이름이고, 이와 같은 성받이[姓族]이며, 이와 같은 빛깔 모양이요, 이와 같은 형상으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고 해설할 수는 없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허공은 이와 같이 많고 적으며, 이와 같이 넓고 좁으며, 나아가 이와 같이 크고 작고 길고 짧은 형질 등의 종류를 잘 헤아릴 수 있다 해도 저 허공을 끝내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저 사람은 말하기를, ‘어진이여, 그대는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이 지혜를 얻으셨기에 나[我]의 길고 짧고 크고 작고 세로와 너비의 정도를 헤아리고자 합니까? 어진이여, 그대는 이제 나를 떠올려 분별하면서 허공을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공한 성품[空性]이라 본래부터 변제가 없어서 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기억으로 떠올려서 말하는 것이지 본래 이런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네가 이제 세 가지 법장문(法藏門)에 대하여 얕고 깊음을 헤아리려 하는 것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런 이치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자주 너를 위하여 ‘일체 모든 법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너는 이 가운데서 의혹을 내지 말라’고 하였느니라. 마치 세간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허공을 의심한다’고 하는 것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은 본래부터 의심할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그 가운데서 의혹을 낼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 모든 법문과 허공의 성품은 본래부터 이름과 언어와 생기는 곳이 없고, 아울러 혼탁하여 물듦도 얻을 수 없으며, 하늘의 궁전도 또한 얻을 수 없고, 아(阿)ㆍ가(迦)ㆍ나(那)의 글자도 역시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머무르는 처소도 역시 얻을 수 없나니, 오직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 가운데서 이 말과 설명[言說]만은 제외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가운데서 놀라고 두려워하거나 집착하는 생각으로 평등함을 여의지 않아야 하느니라. 만일 허공의 평등한 법을 말할 적에는 역시 다른 이로 하여금 집착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생각을 내게 하지 말지니라. 만일 두려워하는 마음과 집착하는 생각을 내서 이 평등으로 인해 이런 일을 일으킨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아주 크게 어리석어서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재앙을 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끝내 세 가지 언교의 업장에 들어갈 수 없고 또한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才]를 얻을 수도 없으며 모든 법의 요긴한 이치[要義]를 드러내어 널리 떨치게 할 수도 없느니라.
마나바야, 저 어리석은 사람은 온갖 법 가운데 진실한 법의 이치가 본래 경계가 아니라서 이 법의 모양을 이미 이해할 수 없거늘, 어떻게 능히 말하고 능히 증득하여 알겠느냐?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사만(邪慢)이 더욱 자라게 되며, 어리석음과 사만 때문에 비록 먼저 다른 이로부터 들었거나 혹은 일찍이 화상(和上) 등의 여러 스승을 받들어 섬기면서 심히 깊은 법구(法句)의 가르침을 받아 읽고 외우고 분별해 말한다 하더라도 능히 받아 지니지 못하고 곧 망실(忘失)하게 되며, 나아가 세간의 문자와 언어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모두 착오하여 기록할 수도 없거늘 부처님의 깊은 법을 어찌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가령 온갖 중생들이 같은 시간에 모조리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을 얻는다 하여도 심히 깊은 법에서는 역시 경계가 아니거늘, 하물며 범부의 어리석음이랴?
마나바야,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 얻은 법문은 중생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것[最勝最上]이어서 세간의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홀로 이와 같은 수승하고 묘한 법신(法身)을 얻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저 온갖 중생에서 가장 존귀하고 최상으로서 세간의 것이 아니니라.
마나바야, 또한 모든 여래께서 얻는 법신은 반드시 수행으로 인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야 얻을 수 있나니, 이 때문에 모든 여래의 법은 그 밖의 중생으로서는 깨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오직 여래만이 얻게 될 뿐이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부처님의 법문을 너희는 잘 듣고, 들은 뒤에는 깊이 생각해야 하고, 법에 의거하여 수행하여 끝내 스스로 증득해야 하느니라. 이 지혜는 결정코 의혹이 없나니, 너희들은 의당 깊은 신심을 완전히 갖추고서 일심으로 받들어 지니어 저 언덕[彼岸]에 이르러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어떤 보살이 아직 성불하지 않았을 적에 부처님 도(道)를 취하고자 하면 응당 부지런히 이와 같은 법들을 닦아야 보리수 아래 도량에 앉아 비로소 증득해 알게 되며, 혹 어떤 보살은 지혜가 예리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설명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명료하게 되기도 하느니라.
마나바야, 저 보살이 보리수 아래의 도량에 앉을 적에는 온갖 법에 대하여 저절로 깨달아 알면서 마음에 걸림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옛날에 모든 법의 성품[法性]이 고요함을 관하여 취착(取著)이 없었기 때문이요,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기 때문이며, 청정한 범행(梵行)을 완전히 갖추어서 원만해졌기 때문이요, 한량없는 반야지문(般若智門)을 쌓아 모았기 때문이며, 큰 자비를 닦아 중생들을 가엾이 여겼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후신 보살(後身菩薩)이 도량에 앉았을 적에는 옛날에 듣고 받았던 모든 법의 밝은 문[明門]이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지라 남을 말미암아 깨닫지 않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너는 응당 이 다섯 번째 가르침 가운데서 부지런히 닦고 배워 머물러 지니면서 의지해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발생(發生)이라고 하는 하나의 법문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발생인가? 비유하면 마치 연꽃이 진창으로부터 생기면서도 진창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만일 진창을 여의면 끝내 생기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 언교(言敎)의 법 가운데서 산란하지 않은 마음과 청정한 마음으로써 언설(言說)을 멀리 여의고 무아(無我)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미 증득하여 안 뒤에는 응당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이 이치를 연설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많이 이롭게 해서 나쁜 곳을 멀리 여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을 버리게 해야 하며, 만일 의혹이 있으면 끊어 없애 주는 이것이 바로 진실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항시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 장구 법문[三種言敎方便業藏章句法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서 다시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三世)의 여실(如實)하고 청정한 법구(法句)를 갖추어 연설하여 모든 의혹을 끊고 보리를 증득하게 해야 하나니, 너희들은 응당 법답게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여섯 번째 법의문의 처소[法義門處]에서 처음으로 궁전 법문(宮殿法門)에 들어가 아(阿) 자와 상응해서 역시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관찰하는가? 판(板)의 방편에 의하여 차례로 진제교문(盡際敎門)에 들어가는데, 만일 언어를 여의면 뜻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저 싸움터에 나갈 때 반드시 갑옷을 입고 난 뒤에 적을 격파하고 두 극단[二邊]을 초월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알고 나서 너희들은 마음이 기뻐지는 광명의 법문[心喜明門]을 증득하여야 곧 저 열반의 궁전에 들게 되느니라.
너는 어떻게 마음이 기뻐지는 광명의 법문을 아느냐? 이곳은 모양이 없고[無相] 또한 모양으로 관(觀)하여 알 수도 없나니, 이미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마치 여실(如實)한 법에는 전제(前際)와 후제(後際)가 없어서 이와 같이 알 뿐 다시 어떻게 알겠는가? 여실함을 증득할 때는 온갖 삼세의 일[事業]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의 전제ㆍ후제도 역시 알 수 없느니라.
어떤 것을 삼세의 변제(邊際)라 하는가? 응당 증득하여 알아야 하나니, 마나바야, 이른바 과거ㆍ미래ㆍ현재는 끝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증득하여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내가 먼저 말한 궁전문(宮殿門)이라는 것을 너는 마땅히 궁전이 아니되 궁전이라 말하는 줄 깨달아 알아야 하나니, 열반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너는 이 가운데 취착을 내지 말아야 하며, 취착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느니라.
마나바야, 다시 제칠의 이치 문[義門]이 있나니, 너는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옛날 생사(生死) 안에 있으면서 보살행을 행할 적에 무릇 업을 짓는 것이 모두 마치 요술쟁이가 궁전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미혹시키는 것과 같았으니, 나도 역시 그처럼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설법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증득하여 알게 하였느니라. 너희들은, ‘여래ㆍ세존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진실한 법문을 말씀하신 것은 마치 저 요술쟁이와 똑같아서 다름이 없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은 바로 제삼의 공업(功業)을 잘 닦아서 방편으로 증득하는 문이니라. 이 가운데 여래가 옛날에 행했던 일을 가르치고 설명한 것은 널리 온갖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이지 홀로 너 한 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니, 너희들은 응당 부지런히 힘쓰면서 받들어 행할지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와 같은 궁전의 보장법문(寶藏法門)을 증득하려고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세간의 창고[藏] 안에 무릇 있는 것은 대개가 돈ㆍ구리ㆍ금ㆍ은ㆍ진주(眞珠)ㆍ유리(琉璃)ㆍ호박(虎珀)ㆍ자거(車渠)ㆍ마노(馬瑙)ㆍ가패(珂貝)ㆍ벽옥(璧玉)이니라. 나아가 비록 갖가지 묘한 보석과 마니(摩尼)의 모든 값진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세상의 창고가 되거니와 여래의 보배 광[如來寶藏]은 그와 같지 않아서 온갖 중생으로서는 얻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볼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의혹을 일으키면서 다시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지금 어찌하여 보거나 알 수도 없는 법 가운데서 이름을 구하는가? 여래장(如來藏)은 빛깔로서는 볼 수 있지 않거늘 우리가 지금 어떻게 얻거나 알 수 있겠느냐?’고 하나니, 어떠한 중생이라도 이런 의혹을 일으킨다면 오직 그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이니라.
마나바야, 지혜 있는 사람은 불법 가운데서 ‘옳다 그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여래ㆍ세존의 지혜 있는 제자는 깊은 법을 듣고 의혹을 내지 않으며, 또한 ‘이들의 모든 법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라는 분별도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 모든 법은 온갖 처소에 두루하면서도 이미 어디서 오게 되었다는 방소(方所)가 없거늘, 하물며 머묾이 있는 처소이겠느냐?
마나바야, 여래의 제자는 법의 모양[法相]을 잘 알므로 심히 깊은 곳에서 의혹을 내지 않으니,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생각조차 없거늘 의혹을 내는 이는 누구이고, 어떻게 의혹을 내며, 어느 곳에 의혹이 있는 것이냐?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든 법의 모양에 대하여 다시는 의혹을 내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허공에는 본래 의혹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저 허공에 의혹이 있다 하면 이것은 곧 장애 없음[無礙]이라 할 수 없나니, 너희들은 허공을 의심할 수 없느니라. 만일 허공이 의혹을 낸다고 말한다면, 저 세 가지 업장의 방편 법문 일체가 비유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미 허공으로써 이 법문을 비유했고, 이 때문에 의혹은 머무르는 처소가 없나니, 너희들은 이제 사실대로 깨닫고 살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온갖 범부로서 모든 중생들은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진실한 이치를 멀리 여의고 가르침대로 수순하여 수행하지도 못하므로 그들은 전도됨[顚倒]에 의지한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은 중생은 이 세 가지 언교의 업장과 차례대로의 법문의 심히 깊은 이치 가운데서 머물 수 없고 또한 들어갈 수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가 흐리고 산란한 마음이 많아서 더럽고 나쁜 일을 두루 행하여 온갖 선법(善法)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들은 이 법 가운데서는 머물 곳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저 모든 중생들은 본래부터 탐(貪)ㆍ에(恚)ㆍ치(癡)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고 때의 찌꺼기[垢穢]인 번뇌로 마음이 산란하고 신근(信根)이 열악한지라, 비록 법음(法音)을 듣는다 하더라도 청취해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로 인하여 더욱 증장한 갖가지 번뇌가 뒤따라 다니면서 마음에 훈습되어 나쁜 업[惡業]을 성취시키므로 고통의 과보[苦報]가 치성하느니라.’”

20. 법사행상품(法師行相品)

“그 때에 저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다시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다
‘희유하나이나. 세존이시여, 희유하나이나,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잘 보호하고 지니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회들은 이 깊은 법 가운데 다시는 의혹이 없사옵니다. 다만 장차 오는 세상의 한량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ㆍ세존의 심히 깊은 묘한 법전을 널리 떨치어서 그들의 의혹을 깨뜨려 다 함께 증득해 알도록 할 뿐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중생은 미래 세상에도 이 법문에 대하여 모든 의심의 그물이 없는 이도 있을 것이며, 또한 이와 같은 심히 깊은 법장을 저버리지 않은 채 깊이 믿고 이해하고 능히 받아들여 행하면서 의혹을 끊은 이도 있으리다. 또한 장차 오는 세상에서 이론을 다투며 서로 시비(是非)하기를 좋아하여 이 법문에서 침몰하고 의심하고 후회하면서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이도 있으리다.’
아난아,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이 청하자마자 그 때에 방광여래는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은 법문은 미래 세상 가운데서 어떤 중생도 능히 믿고 받아들일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저 미래 세상의 모든 중생들은 다만 이론을 다투기 위하여 듣고 받아들일 뿐이지 실로 존중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간혹 대중에 처하면서 이 법음을 듣는다 해도 마음에 좋아하지 않아서 버리고 떠나는데, 갖가지 방편으로 오히려 여타의 공경하고 믿는 사람을 가르쳐서 이와 같은 경전을 비방하게 하나니라. 그 때에 한량없는 백 천의 중생들로서 보리를 구하려는 이가 많이 있어도 온갖 나쁜 사람들이 파괴하고 헐뜯는 바람에 결국 이와 같은 경전을 닦아 익히지 못하며, 저 모든 나쁜 사람들은 많은 중생들이 의심의 그물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느니라.
다시 어떤 한량없는 순수하고 착한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었기 때문에 좋아하면서 받아 지니지만, 때로 저 복이 없는 중생들은 응당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우리들을 버리시고 가엾이 여기시지 않는구나. 우리는 옛날에 역시 그 부처님ㆍ세존께서 말씀하신 이 법의 모양을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대자비로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오랜 세월 동안 심히 깊은 법문을 널리 연설하시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수순하며 수행하게 하였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중생이 이 깊은 법을 듣고 능히 믿고 이해하면서 바른 기억[正念]으로 사유하면, 이와 같은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항시 와서 깨우쳐 인도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모든 중생으로서 심히 깊은 법에 대하여 비방하고 헐뜯으면서 버리고 떠나간 이면, 이들은 영원히 의심의 갈래[疑趣]의 암혹 속에 빠져서 끝내 순수하고 착한 경계를 보지 못하니, 이와 같은 중생은 이 법문에 입문하는 모습[入相]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여래가 어찌 이 법을 연설하지 않겠다고 하겠느냐?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한 중생에 이르기까지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나 멀리 여의려는 생각을 일으킴이 없나니, 이 때문에 너희들은 잘 사유하고 일심으로 관찰하여 오로지 세심하게 잘 선택해야지 함부로 연설할 수 없느니라.
만일 중생이 이 법을 들을 수 있음을 알면 너희들은 곧 들음에 따라 연설해야 하고, 만일 능히 지니는 이면 역시 지님에 따라 연설해야 하며, 만일 수행할 수 있으면 역시 수행에 따라 연설해야 하고, 만일 마음으로 기뻐하면 기뻐함에 따라 연설해야 하느니라.
만일 그들과 함께 큰 이익을 일으키는 문구(文句)가 분명하고 의미(義味)가 구족하면, 마땅히 이와 같은 설법 갈래[說法分] 가운데서 바른 기억을 일으켜야 하니, 이미 바른 기억을 낸 뒤에는 비로소 널리 연설할 수 있느니라.
말일 이 법사(法師)가 높은 자리에 오를 적에는 자신을 손상하거나 다른 이를 손상하지 않아야 하며, 당연히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언제나 한량없는 모든 세계 안의 온갖 중생계(衆生界)를 위하기 때문에 대자비에 머물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고 바른 법[正法]을 기억하시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선양하고 해설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괴로움의 모양[苦相]이고 또한 이것은 중생이 머무는 곳이므로 응당 버리고 여의어서 이 괴로움의 근원[苦源]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니라.
만일 그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염착(染著)을 내지 말고, 법의 모양[法相]을 취하지도 말며, 중생의 처소에 이곳저곳이란 생각을 내지 말며, 좋은 말을 들어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고, 추악한 말을 들어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 것이니라.
만일 다른 이가 와서 물으면 성을 내거나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지니, 만일 그 법사가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온갖 곳에서도 역시 허물이나 우환이 없으며, 허물이나 우환이 없기 때문에 역시 의혹이 없고, 의혹이 없기 때문에 연설해야 할 법이 모두 다 현전(現前)하나니, 법사는 그 때에 응당 이 세 가지 업장의 심히 깊은 법문을 기억해야 하며, 이와 같이 차례로 모든 법의 모양을 얻으면서 또한 이와 같은 법의 이치를 기억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내가 앞서 설했듯이 법문의 한량없고 가없는 깊은 법구(法句) 가운데서 두려움도 내지 않고 장애도 없이 응당 마음에 의지하여 이름[名字]과 음성(音聲)을 취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이름과 음성의 본래 성품[本性]이 청정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언교(言敎)와 뜻[義旨]에 모자라거나 빠짐이 없어야 하느니라.
또한 그 법사가 이 법을 연설할 적에 경문의 이치에 통해서 듣는 대중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행하면서 거역함이 없고, 들은 뒤에는 존중하는 마음을 내면서 많은 사람이 공양하고 좋은 이름이 널리 퍼져서 이구동성으로 법사를 찬미하고 칭송하느니라.
또한 그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모든 중생들이 이 법사의 음성과 언어를 듣고는 모두가 기쁨이 몸과 마음에 두루 가득 차느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법사는 다른 이를 위하여 설법할 적에는 마음이 뒤섞여 어수선하지 않고, 뜻에 더러움이나 혼탁함이 없고, 여타의 일은 생각하지 않으며, 몸의 위의를 단정하게 하고, 위엄 있는 용모를 완전히 갖추고, 목이 탁 트여 있고, 말씨가 미묘하며, 음성이 조화롭고 청아해서 세간에서 미칠 수 없으며, 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또한 끊어지지도 않고, 말을 할 적에는 혀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코와 입에서 한꺼번에 소리를 내지도 않고, 이는 희고 가지런하면서 촘촘하며, 하는 말이 분명하면서 이름과 장구(章句)에 결함이 없어야 하나니라. 그 때 청중들은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고, 들은 뒤에는 기뻐하면서 공덕이 더욱 자라나느니라. 이처럼 법사는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느니라.
만일 저 법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지 못하면, 그러한 공덕은 오직 나쁜 모습의 온갖 허물되는 일이 있을 뿐이니라. 이른바 모습이 단정하지 않고, 동작이 경솔하고 방정맞으며, 이는 누렇고 들쭉날쭉하며, 입술은 추하고 비루하며, 목은 쉬어 흐트러지고, 혀뿌리는 깨끗하지 못하며, 풍담(風痰)으로 침과 눈물이 흐르고, 차고 덥고 추위에 괴로워하며, 몸은 수척해지고 약(藥)은 치성하여 해로우니라.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들 때문에 저 법사로 하여금 두루 갖출 수 없게 하고, 소리가 맑게 사무치지 못하게 하고, 말을 분명하게 알아듣지 못하게 하며, 이름이 바르지 않고 법의 뜻이 밝지 않게 하므로 모든 법을 듣는 사람들이 이것을 듣고 보고 나서는 다 함께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키나니라. 이미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면 법을 중히 여기지 않고, 법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비록 귀로 듣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는 믿고 받지 않으며, 믿지 않기 때문에 다시 비방을 내어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등의 사견(邪見)의 인연을 지어 주느니라.
저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끝내 이와 같은 사유를 지을 수 없고 오직 지혜 있는 사람이라야 지을 수 있을 뿐이니라. 어떻게 사유하는가? 마치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귀중한 보배가 똥 속에 떨어져 있을 때에 지혜 있는 사람은 보고 나서 ‘이 보배는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귀중한 것이니 내가 응당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미 취득한 뒤에는 씻어서 빛내고 깨끗하게 하고는 더욱더 수호하고 특별히 존중하므로 세간 사람으로서 보는 이마다 좋아하지 않음이 없어서 보배의 자못 뛰어남을 찬탄하며 값이 얼마냐고 물은 것과 같으니라.
바로 이때 오직 보배의 아름다움만을 볼 뿐이지 끝내 그것이 똥 속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한 바라고 말하느니라. 그러나 저 어리석은 사람은 이 진짜 보배가 똥 속에 있다 하여 버리면서 취하지 않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재보(財寶)를 어떤 사람이 가져다 법사에게 받들어 올린다 해도 족히 많다고 일컫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법사가 연설한 한량없는 법문은 공덕이 깊고 무거워서 만나기 어려우며, 세계에 가득 찬 보배도 법사의 조그마한 부분의 공덕보다는 못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그 어떤 중생이라도 이 법을 믿고 좋아하면서 존중하고 사랑하며 공경한다면, 그는 언제나 생각하기를, ‘지금 이 법사께서 하시는 말씀마다 곧 세존의 금언(金言)이나 가르치심[敎論]과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른바 다르다고 함은 오직 부처님ㆍ세존의 삼십이상과 황금빛의 몸, 그리고 범음(梵音)으로 널리 펴는 변재(辯才)의 구족하심과 천상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 되시는 이런 것만이 다를 뿐이니라.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상호(相好)는 오히려 공통되는 법이니, 왜냐 하면 전륜성왕(轉輪聖王)에게도 역시 여러 가지 상호가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증득할 수 없는 것이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유루(有漏)의 생사(生死) 가운데서 벗어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응당 아만(我慢)을 여의고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의 마음[大悲心]을 일으켜서 조화로운 뜻을 일으키고 거두어야 하며, 다시 이렇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중생들을 가르쳐서 탐욕(貪欲)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의 삼독(三毒)의 번뇌를 멀리 여의고 아만을 끊어 없애게 하며, 나에게로 모여 와서 바른 법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며, 듣고 받아들인 뒤에는 널리 다른 이를 위하여 해설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문을 통달하게 하며, 나아가 한층 더 그 밖의 다른 중생들에게 열어 보여서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케 하여 더욱 공덕을 자라게 할까?’
마나바야, 만일 모든 중생들이 법사의 처소로 뵈러 갈 줄 모르면, 법사는 그 때 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응당 스스로 성읍(城邑)이나 마을에 나아가야 하느니라. 모든 중생은 이미 신심(信心)이 있는데도 또한 이렇게 법사가 몸소 와서 가르침에 임하는 것을 보면, 다시 더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온갖 금ㆍ은의 값진 보배와 살림에 필요한 갖가지 도구를 법사에게 바치고 공양함으로써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저마다 선근(善根)을 심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 다른 경 가운데서 말씀하시되, ‘언제나 설법하는 사람이나 언제나 와서 듣는 사람의 두 가지 경우는 다 함께 한량없는 복을 얻느니라’고 하였고, 여래ㆍ세존은 다시 말씀하시되, ‘법사에게 공양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공양하는 것이어서 한량없는 복을 얻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법사가 없으면 설법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니, 만일 법사의 설법이 없다면 그 누가 깊은 법장(法藏)을 능히 알겠느냐?’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마나바야, 너희는 법사에 대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일으킬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생각을 짓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다시 법사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내어야 하나니, ‘지금 이 법사는 이미 과거의 한량없고 가없는 억수(億數)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수행하고 공양하면서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연설할 수가 있다’고 해야 하느니라.
그 설법하는 이가 출가한 이거나 재가(在家)의 사람이거나 간에 이 두 분에게 수행하고 공양하면 그 복덕의 쌓임은 똑같아서 다름이 없나니, 너희들은 ‘이 분은 출가한 이다. 재가의 분이다’라는 분별의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이 사람에게 희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며, 설법하는 곳에 따라 선근이 자라는 것이므로 다만 경축하고 축복할 뿐 장애를 얻지 말 것이니라.
마나바야, 도인(道人)이든 속인(俗人)이든 어떤 중생들이 법을 듣기 위하여 법사에게로 오면, 너희들은 그 때 이 사람에게 보기 드물게 큰 자비의 마음을 내어야 하지 경솔하게 설법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느니라. 즉 당연히 수순하여 설법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듣고 나서는 잘 사유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게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세존은 너희들을 위하여 심히 깊은 법문의 미묘한 장구(章句)를 해설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받아 지니게 하며, 또한 세간의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미묘하고 비밀한 언교를 널리 선양해 열어 보이고 분별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도록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대자비를 일으켜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설법하는 이를 보호하는 것이 마치 여래와 같으니라.
마나바야, 모든 보살들은 중생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억백천 겁을 지나면서 언제나 생사의 번뇌 바다에 처하여 갖가지 고통을 받으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지만 대비(大悲)는 줄어듦이 없고 지혜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속히 보리를 증득하고 나아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기까지 궁극적으로 다함이 없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이 때문에 너희들은 스스로의 마음으로 사유하기를, ‘다만 이치만을 관(觀)할 뿐이지 문자와 음성을 집착하지 말자’고 할 것이니라. 내가 해설한 바에 대해 혹 알지 못한다 해도 비방은 하지 말 것이니, 왜냐하면 마나바야, 나는 앞서 이미 너희들을 위하여 모든 비유를 인용하여 이 세 가지 언교의 업장 법문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또한 너희들을 위하여 행에 들어가는 방편[入行方便]과 수순하는 차례와 이것은 행해야 하고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오고 가는 처소 등을 이미 설명하였고, 또한 모든 방편과 진실한 이치를 얻는 것 등도 이미 설명하였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의 일 가운데 방편과 수행도 이미 설명하였느니라.
또한 관(觀)해야 하는 정(淨)ㆍ부정(不淨)과 나아가 가라라대(迦羅邏大) 등까지 들어가는 차례가 마치 저 물방울이나 작은 물거품이나 큰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나는 이미 설명하였고, 또한 가라라대 등의 오고 가는 곳의 일이 본래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게 되었다는 등도 이미 설명하였으며, 또한 이 모든 것이 수태(受胎)할 때의 몸과 목숨과 이름[名]과 색(色)과 방편과 부정(不淨) 등의 것도 이미 설명하였고, 또한 모든 음(陰)ㆍ입(入)ㆍ계(界)가 짓는 일들도 이미 설명하였느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은 등의 법을 나는 모두 설명하여 마쳤으니, 너는 이 가운데서 부지런히 생각하여 세 가지 언교로 하여금 언제나 현전하게 해야 하며, 너희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뇌승(牢勝)이라는 수승하고 묘한 법문을 성취하여 중도(中道)를 건립하고 두 변(邊)과 아(阿)자 등의 궁전법문(宮殿法門)을 버리지 않으면서 듣고 해설할 적에는 마음을 가다듬어 산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오늘 다시는 다른 뜻 없이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 법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고 싶을 뿐이니라.
마나바야, 여래ㆍ세존이 만일 한 가지 명자(名字)와 한 가지 언교(言敎)와 한 가지 법문(法門)만으로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능히 증득한 분이신 여래는 끝내 이와 같은 교화의 무거운 짐을 구족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진실로 이 무거운 짐을 버리고 싶어 하며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 아(阿)자 법문 중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은 갖가지 법문의 이치를 응당 몸으로 깨우쳐 알아야 하며, 무릇 의심되는 곳마다 모두 물을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일체 모든 법문의 처소에서 응당 결단하여 의심을 내지 말지니라.
또한 마나바야, 마치 옛날에 전단나력(旃檀那力)이라는 한 여인이 부처님ㆍ여래를 뵙고는 존중하는 마음과 애경(愛敬)하는 마음을 내면서 희유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뛰놀던 것과 같으니라.
그 때에 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중생들이 비록 여래를 뵈었다 하더라도 이런 마음을 낸 이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니, 그 때에 부처님ㆍ여래는 곧 이 여인을 위하여 두루 미묘한 법을 연설하셨고, 또한 다시 그녀에게 불퇴전의 기별[不退轉記]을 주셨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제 그 여인을 배워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 공경하고 기뻐하면서 여래의 법에 수순하며 어기지 말아야 하며, 만일 법을 저버린 이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佛智]와는 멀리 떨어진 줄 알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차례로 이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해야 하는데 요컨대 공력을 들이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며, 온갖 바라밀 가운데서 차례로 닦아 익혀서 모두 성취하고 만족시켜서 모자람이 없게 하여 이 법 가운데서 속히 증득하여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제 생각하기를, ‘여래의 법장(法藏)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그 밖의 사람들이겠느냐?’라고 해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허공의 변제(邊際)를 능히 다한다면 법문도 역시 그러해서 변제를 얻어 알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허공이 처음과 마지막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일체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으니, 중생의 수효는 얻어 알 수 없고 또한 헤아릴 수도 없으며, 변제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또한 볼 수도 없고 유위(有爲)가 아니며, 또한 빛깔도 없고 광명도 없고, 증득하여 알 수도 없느니라.
이 여래장(如來藏)은 모든 부처님ㆍ세존조자도 오히려 다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중생이겠느냐? 왜냐하면 저 여래장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방편 업장은 청정해서 유(有)가 아니며, 이미 유(有)가 아니기 때문에 그 수량 등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다만 이 범부 중생이 어리석은 인연으로 모든 법 가운데서 망령되이 미혹을 낼 뿐이니, 이미 법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여래인들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하고 연설하겠느냐?
마나바야, 곧 이것은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을 수순하면서 방편으로 하는 설명일 뿐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세간을 수순하는 까닭에 세간의 이치[世諦]를 분별하기는 하되 모두 얻을 수는 없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중생들이 삼계에 빠져 있는지라 그들을 발동(發動)하여 벗어나 여의도록 하기 위하여 수순하며 설법해서 그들이 받아들여 행하게 하는 것이니, 그가 비록 범부라 하더라도 온갖 세제의 유위(有爲)에 대하여 능히 싫어해 여의면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미 싫어함을 알고 나서는 곧 스스로 지혜가 행하는 곳[智慧行處]을 감당해 받아들일 수 있느니라.
어떻게 지혜 법문을 감당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온갖 법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임을 알며, 허공과 같다고 안 뒤에는 부지런히 힘써 사유하기를, ‘저 허공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때[垢]가 더럽힐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사람도 붙잡아 가질 수 없다’고 하나니, 그가 이미 부지런히 힘쓰면서 이라 같이 사유하고 나면 오래지 않아 모든 부처님의 성스런 도[聖道]를 증득하리라.
마나바야, 만일 세제의 유위(有爲)로써 성스런 도를 얻는다 하면 온갖 범부는 바로 부처님이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저 범부는 부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유위법의 체성은 변동되고 파괴될 수 있어서 궁극의 법[究竟法] 아니고 그 성품이 열약하며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세제의 유위는 귀의할 곳[歸依處]이 아니며, 가령 귀의하여 조그마한 안락을 얻게 된다 해도 오히려 받지 않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저 유위의 무상함과 파괴로 생각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으면서 구경(究竟)이 아닌 것이랴? 그러므로 너희들은 응당 깨달아 알면서 취착을 내지 않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이 만일 유위의 행을 취착한다면 곧 집에 있는 모든 세속 사람들과 똑같아져서 영원히 가장 수승한 법을 얻을 수 없겠거늘, 그 누가 너희에게 저 의복ㆍ음식ㆍ침구ㆍ탕약의 뭇 일로 공양하고 받들어 주면서 공경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마나바야, 그러므로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온갖 유위의 법을 해설하지도 앉고 온갖 유위의 행(行)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또한 찬탄하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게 하지도 않으며 또한 염착(染著)하지도 않느니라. 염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계(欲界)를 염착하지 않고 또한 욕계에서 태어나지도 않으며, 욕계에서처럼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도 역시 그러하나니, 저 온갖 유위의 행 가운데서 본래 스스로 취하지 않아서 끝내 낳지도 않느니라.
그가 만일 거두지도 않고 낳지도 않음에 능히 들어갈 수 있다면, 곧 삼계를 초월할 수 있어서 저 교만(憍慢)을 소멸하고 갈애(渴愛)를 끊어 없애며, 모든 고통의 근원[苦源]을 다해서 욕심을 여의어 청정하고, 뭇 모양[衆相]을 모조리 없애서 일체를 단번에 버려 남김이 없으리라. 그리하여 속히 무위(無爲)의 적정(寂靜)한 열반을 증득하며, 이미 증득하고 나서는 능히 다른 이들을 위하여 연설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그 누가 열반에 들어가야 할 자인가? 이른바 오직 저 부처님ㆍ여래일 뿐이니, 육계(六界)의 이름이 화합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미 관찰한 뒤에는 다른 이를 위하여 두루 연설하며, 그러한 뒤에야 멸도(滅度)하시나니,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만이 저 열반을 얻느니라.
마나바야,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설법 가운데서 대부분 허공을 인용하여 비유를 삼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찌 저 허공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겠느냐?
마나바야, 너는 이 안의 것에 대하여 잘 사유해야 하리니, 어찌 유독 자비로 세간을 가엾이 여기면서 중생의 모양[相]만을 취하는 것을 열반이라 하겠느냐?
마나바야, 나는 이제 너희로 하여금 내가 말한 바와 같은 이 결정된 뜻을 다시 사유하여 헤아리고 분별하게 하노니, 이미 사유하고 헤아린 뒤에는 진실로 법미(法味)를 얻고 또한 말과 뜻과 구절의 문[語義句門]을 분명하게 통달할 수 있으리라. 환히 뜻이 밝아졌기 때문에 쟁론(諍論)을 일으키지 않고 법을 취착하지 않아서 여실한 생각[如實想]을 얻으며, 여실한 생각 때문에 다시는 일체 모든 법을 구하지 않고, 다시는 온갖 법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일체 모든 법을 얻지도 않으며, 일체 법을 얻지 않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기 때문에 그 때에야 이름하여 열반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사람이 분단의 모양[分段相]을 버리지 않으면 열반을 취하면서 언제나 앞에 나타나 있게 하나니, 이와 같이 하면 차례로 영원히 세간의 유위법 가운데 빠져서 끝내 일체 모든 행[諸行]을 버리거나 여의지 못할 것이니라. 그가 만일 모든 행을 버리거나 여읠 수 없으면 이것을 곧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행을 바짝 마르게 해야 하리니, 너희가 만일 모든 행을 나지 않게 할 수 있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무릇 열반을 구하는 이는 언설(言說)이 없나니, 너희가 만일 유위의 행법[有爲行法]을 구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관찰하여 먼저 반연(攀緣)을 버려야 하며, 반연이 소멸하고 나면 곧 실상(實相)이라 하느니라. 응당 이와 같이 지니고 또한 이와 같이 증득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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