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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20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8권

by Kay/케이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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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8

 

 

대법거다라니경 제8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18. 증열반품 ②

“그 때에 마왕(魔王)과 그 권속들은 보살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고, 또한 이미 도를 이룬[成道] 사실도 깨닫지 못했느니라. 저 십팔억의 모든 중생들과 마왕의 대중은 다 함께 부처님께로 와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는 일심으로 합장하고 여래 앞에 서 있었느니라.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전단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에 보관(寶觀)여래는 십팔억 모든 중생들의 믿음의 뿌리[信根]가 더한지 미약한지, 번뇌가 두터운지 희박한지 사유하셨으며, 이렇게 알고 나서는 차례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느니라.
그 부처님이 설법하시기를 삼백 년 동안이나 하시면서 이 세 가지 언교업장(言敎業藏) 가운데서 일법구문(一法句門)을 연설하셨으니, 이른바 일백(一百)이니라. 어떤 것이 일백인가?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이제 이 백문(百門)의 이치를 사유하고 관찰하되, ≺무엇 때문에 백(百)이라 하는가, 어느 것이 백인가? 이것은 현재인가, 미래인가, 과거인가? 긴 것인가, 짧은 것인가? 흰 것인가, 검은 것인가?≻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느니라.
전단나야, 그 때에 그 십팔억의 모든 중생들은 이 법을 듣고 난 뒤 산이나 숲 사이에서 이 이치를 사유하되, ‘어찌하여 백이라고 말할까? 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백의 이치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을까?’라고 하면서 사십 년 동안 이 이치를 사유한 뒤에 비로소 어찌하여 백이라 하고, 어디에서 백이 오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고 없어지는지를 증득하여 알았으며, 법을 증득한 뒤에는 팔분(八分)이라 하였고 이치를 해설하는 변재(辯才)가 원만해졌느니라. 이 세 가지 언교 업장의 방편문 가운데 증득하여 알고 나서는 다시 돌아와 그 보관부처님 앞에서 증득해 안 바를 부처님에게 널리 연설하였느니라.
전단나야, 그 때의 그 부처님은 다시 십팔억의 모든 중생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이 처음 이 세 가지 언교의 업장 가운데서 이 법구(法句)를 얻은 것을 이름하여 분문(分門)이라 하나니, 이미 알게 된 뒤에는 곧 육십억 언교 방편의 법문을 능히 받아 지니는 것이 마치 이 앞에서 말한 일백의 이치와 같으니라.
비유하면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글[章]을 배우면서 비로소 처음의 판(板)을 이해하고, 이렇게 차례로 나아가 많은 것을 이해하기에 이르며,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한 자구[一字句]로부터 많은 자구에 이르게 하고, 나아가 그 의미(義味)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구족히 연설하게 하며, 열네 음(音)으로부터 한량없는 글자의 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통달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응당 백의 법문의 이치를 바르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전단나야, 너는 마땅히 저 십팔억 수효의 모든 중생들처럼 백의 이치를 바르게 생각할 때 오래지 않아 과보(果報)가 머무르는 곳을 마땅히 얻으리니, 이 최초의 아(阿) 모양 가운데 이름과 음성이 바로 백의 이치의 방편이고 열네음의 법에서 권속이 되느니라.
너희들은 그 뒤에 다시 이 가(迦) 자의 모양과 스물한 자(字)가 역시 권속이 됨을 알아야 하고, 다시 뒤의 나(那) 자와 그 일곱 구(句)도 역시 권속이 됨을 증득해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앞의 일곱 구와 뒤의 일곱 구를 취하여 스물여덟 구를 이루는데, 이 스물여덟 구를 알고 나면 백억의 문[百億門]에 들어가게 되어서 곧 이 방편의 배움[方便學]을 명료하게 증득하여 알리니, 백억의 수효 가운데서 모든 법구(法句)를 모아서 능히 묻고 대답하면서도 끝내 두려움이 없을 것이요, 또 백억의 대중 가운데서 가장 높고 뛰어난 이가 되어 세간의 의혹을 모두 끊어 없앨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당연히 짊어질 크고 무거운 짐이니라. 어떤 것이 짐인가? 이른바 온갖 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의 지혜[智]이니, 너희들이 배운 뒤에는 마땅히 세간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대논사(大論師)가 되어서 무릇 의혹과 쟁론을 모두 이 지혜를 타고서 끊어 없어지게 해야 하느니라. 이처럼 보살의 아자문(阿字門)보다 세간에서 더 뛰어난 것은 없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지혜를 구하고자 하면 의당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서 피곤해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두려움을 멀리 여의어서 무거운 짐을 버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여래는 너희들을 위해 큰 이로움을 짓는데, 마나바야, 너희들도 역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을 지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이롭게 하는가? 너희는 이 가운데서 당연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온갖 악(惡)과 일체 모든 고통과 탐애와 온갖 생사를 끊어야 하며, 다시 부지런히 힘쓰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무명의 어둠[無明黑闊]을 끊어 없애야 하느니라.
너희들은 또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무명의 어둠을 소멸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종지(種智)를 성취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안온한 즐거움을 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두려움 없는 지위[無畏地]에 이르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필경의 마음[畢竟心]을 얻게 할까?’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안치(安置)한 뒤에는 부처님의 바른 도[正道]를 구하면서 들은 바대로 받들어 행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백천억수의 악마 군사들과 모든 외도의 온갖 논사(論師)들이 소유한 말과 뜻[語義]을 능히 깨뜨리며, 비록 그런 일에 이기게 되어도 끝내 ‘나는 능히 악마를 깨뜨렸다, 나는 외도를 꺾었다. 나는 잘 논의(論義)하였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또한 분별하는 생각으로 ‘부처님의 법이다. 악마의 법이다. 세간이다. 출세간이다. 이것은 바르다. 이것은 삿된 것이다’라고 하는 무상(無相)의 갖가지 어지러운 일도 내지 않으며, 듣고 말하고 할 때에도 이기고 진다[勝負]는 마음이 없고, 나아가 온갖 것에 도무지 장애가 없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응당 이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짐은 반드시 용맹스런 정진으로 장엄하고 뭇 행이 모두 갖추어져야 비로소 짊어질 수 있지 게으른 이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너희들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어서 어지럽지 않아야 하며, 모름지기 먼저 만물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뜻을 일으켜 대자(大慈)에 머무르고, 또한 언제나 모든 고통 받는 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 대비(大悲)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만일 대중 가운데에 탐욕 등의 삼독(三毒)을 행하는 악한 중생이 있으면 너희는 그들을 성숙시켜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없어지게 하여야 하며, 만일 아만과 의혹의 마음을 지닌 이면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해서 결정코 그들로 하여금 수지독송(受持讀誦)하게 하여 행업(行業)을 성취케 하여야 하나니, 너희는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너희들은 응당 수고로움이나 고달픔을 사양하지 말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 기쁘게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어떤 보살이 다만 몸을 버리고 속히 열반에 들려고만 하면 임시로 그 중생을 위하여 모든 괴로움을 나누어 받을 것이니, 비록 업을 닦으면서도 널리 한량없는 중생을 위할 수 없는 것은 희유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니라.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은 항상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품고 다만 온갖 중생을 위할 뿐이기 때문에 몸소 갑옷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희유하고 크게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 큰 갑옷은 무거운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때에 전단나보살이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어떻게 갑옷을 입어야 하나이까?’
‘마나바야, 너는 이제 이와 같은 갑옷을 입어야 하나니, 이 갑옷을 입은 뒤에는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온갖 사람이나 비인(非人)이나 하늘이나 용이나 또는 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같은 대중과 세간의 지혜와 변재를 지닌 모든 외도들과 나아가 온갖 중생에 이르기까지 이런 무리가 모두 나쁜 마음을 품고서 서로 항복시키고 꺾으려 하거나 와서 이치를 논하거나 나아가 세간과 출세간의 온갖 적(敵)이 싸우고 다투고 빼앗는다 하여도 모두가 이기지 못하느니라.
모든 보살이 이 갑옷을 입은 뒤에는 설령 무기를 쌓아 놓은 것이 수미산보다 더하고, 활ㆍ화살ㆍ큰 창ㆍ작은 창ㆍ작은 칼ㆍ큰 칼ㆍ방망이ㆍ몽둥이 등으로 혹 찍기도 하고 혹 찌르기도 하며 혹 치기도 하고 혹 쏘기도 하면서 무릇 해를 가한다 하여도 중상(中傷)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갑옷은 여타의 사물로 짓는 것도 아니고 몸에 입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실로 이 마음의 갑옷은 마음을 장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 갑옷은 견고하고 정밀(精密)하여 모든 칼이나 작두로써 파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마나바야, 모든 보살들은 갑옷을 입고 난 뒤에야 이와 같은 억수 중생의 번뇌의 진(陣) 가운데에 들어가서 싸워 승부를 결판낼 수 있느니라.
어떻게 들어가게 되는가? 이른바 이제법문(二際法門)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문에 들어가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동쪽ㆍ서쪽을 가고 오는 데에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어서 어느 곳에서도 이길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이 이제법문에 들어가서 초월하게 되면 곧 고명(高明)이라는 큰 궁전 법문(宮殿法門)을 보게 되나니, 이 보살은 이제법문에서 이미 해탈을 얻은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 궁전에는 뭇 일이 갖추어져 있으니, 사람의 공(功)을 빌리지 않아도 언제나 광명이 있어서 어둡고 캄캄한 곳이 없느니라. 번뇌를 멀리 여의어 청정하고 미묘한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 모든 허물과 우환의 모양을 없애고 나면, 그 궁전으로 들어가 고요함[寂靜]을 획득해서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處]에 머무르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처음 아자문(阿字門)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때 이와 같은 모양이 있으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공용(功用)의 일이 이 방편을 말미암아 이 문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보살은 전제(前際)의 행에 의지하여 비록 아자문을 얻는다 하더라도 아직은 나자문(那字門)에는 들어갈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다시 큰 갑옷을 입고 하늘의 언교(言敎)를 얻어서 하는 일이 자재하고 큰 위덕(威德)을 갖추어야 비로소 이 큰 궁전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이와 같은 큰 갑옷을 입은 뒤에 이제(二際)에서 초월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그 여래께서 이와 같이 묻자마자 모든 보살들은 다 같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명칭을 갑옷이라 하오며, 그리고 저희들이 입은 뒤에는 이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하나이까? 또 어찌하여 이제(二際)라 하오며, 이제에는 어떠한 모양이 있기에 이 큰 갑옷을 입고 그 가운데서 초월할 수 있나이까? 앞에서 말씀하신 궁전은 또한 어떠한 뜻으로 궁전이라 하나이까?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갑옷과 저 이제와 궁전 등의 모습은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저 궁전에 이르면 어떠한 일을 지어야 하오며, 갑옷을 입고 이제에 들어가서는 다시 어떠한 일을 짓나이까?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듣고 싶사오니,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가엾이 여기어 자세히 말씀하여 주시옵고, 또한 장차 오는 세상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들은 뒤에 이익을 얻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보살들이 이와 같이 묻자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갑옷이란 지계(持戒)가 갑옷이 되고, 정념(正念)이 찰간의 당기[竿幢]가 되며, 정진(精進)은 무기가 되고, 선정(禪定)은 몽둥이가 되며, 지혜는 칼이 되느니라.
마나바야, 이른바 이제(二際)를 이제 자세히 해설해서 너로 하여금 이 이제의 문에 무슨 이름이 있는지 분명히 알게 하리라. 마나바야, 제일제(第一際)라 함은 단견(斷見)을 말하나니, 이것이 무명의 근본이 됨을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제이제는 상견(常見)을 말하나니, 육십이견(六十二見)과 더불어 얽매임의 근원이 되느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제(際)는 앞뒤를 알기 어려운데, 그 가운데 수행하여 온갖 소견을 끊으면 이와 같은 갑옷을 입게 되고, 그런 뒤에는 초월할 수 있어서 저 제(際)를 지나치고 나면 능히 하늘의 궁전에 드느니라.
어느 것이 하늘의 궁전인가? 이른바 공의 문[空門]이니라. 이와 같은 공의 문은 걸림이 없고 다른 것이 장애하지도 못하는 것이니, 마치 손이 허공을 만질 적에 잡을 수 있는 것이 없듯이, 온갖 공행(功行)도 역시 허공과 같기 때문에 그 하늘의 궁전의 모양도 그와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 궁전에 들어가면 다른 생각으로 구하는 것이 없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궁전이라 하느니라. 너는 또한 알아야 하리니, 이른바 궁전이란 곧 대열반(大涅槃)이니라. 열반이란 뜻은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한 것이지 사람이 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느니라.
마나바야, 대저 열반이라 함은 이른바 온갖 세간과 출세간이고 나아가 있는 듯 없는 듯하니, 이와 같은 온갖 모두를 열반이라고 하지 모양[相]을 취하면서 분별하면 곧 열반이 아니니라.
마나바야, 있는 바가 없는 것[無所有]을 일컬어 증득하여 안다[證知]고 하는데, 어떻게 증득하여 아는가? 마치 있는 바가 없는 듯이, 이처럼 증득하여 아느니라.
마나바야, 이를테면 증득하여 안다고 함은 역시 증득하여 앎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있는 바가 없는 데서는 응당 있는 바가 없는 모양을 취하지 않아야 하나니라. 만일 사람이 저 있는 바가 없는 모양을 취한다면 이 사람은 곧 모양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며, 만일 사람이 있는 바가 없는 모양을 일으키고 짓는다면 다시금 모양을 내는[生相]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모양을 만일 다시 낸다면 그는 곧 모양을 소멸하지[滅相] 못함을 알지니라. 모양이 만일 소멸하지 못하면 이것은 다시 생사하는 모양[生死相]을 이루는 것이요, 만일 생사하는 모양이 있으면 생김이 없는[無生] 데서 생기는 모양이 있는 것이니, 만일 생김이 없는 데서 생기는 모양이 있다면 어떻게 무생인(無生忍)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생김이 없는 모양[無生相]이란 음(陰)ㆍ입(入)ㆍ계(界)의 세 가지 곳에서 생기지 않음을 무생(無生)이라 하나니, 이미 생기는 곳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모는 행(行)의 화합이 있을 수 있겠으며, 모든 행이 이미 없으면 필경 모여 쌓이는 곳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음ㆍ입ㆍ계는 마침내 볼 수가 없고 다만 허망한 생각으로 전도된 인연일 뿐이니라.
이와 같은 등의 음ㆍ입의 법 가운데서 사유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고집스레 모든 행의 나고 없어짐[諸行生滅]이 있다고 말하나니, 이 가운데서는 모두가 분별로 인해 짓는 바라서 가고 오고 기르는 온갖 일들도 모두 진실이 없으며, 온갖 언어와 말하는 바도 역시 공적(空寂)으로 돌아가느니라.
마나바야, 일체 모든 법은 나고 없어짐이 없으니, 만일 법에 나는 것이 없으면 역시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이미 없어지는 일이 없으면 곧 다하는 곳[盡處]도 없고, 다하는 곳이 이미 없다면 나아가 없어지는 곳도 볼 수 없으며, 이미 나고 없어짐이 다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면 모든 법이 모두 진실임을 보느니라.
너희들은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받아들임[受]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나니, 만일 받아들이는 일로서 앎이 있게 된다면 이 받아들임은 곧 무명의 번뇌[無明使]요, 탐욕의 번뇌[貪使]이며, 교만의 번뇌[憍慢使] 등임을 알아야 하나니라. 이 세 가지 번뇌의 화합 인연 때문에 저 모든 행업(行業)을 짓게 되느니라.’”

19. 권증품(勸證品) ①

“‘또한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제 너에게 묻노니, 너희 뜻에 따라 대답하라. 이 다라니 수다라(陀羅尼修多羅)와 다라니 법문(陀羅尼法門)과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三言敎方便業藏]과 억수입(億數入)과 갑옷을 입는 것[著鎧甲者]과 지혜로 사유하며 짓는 업[思惟智所作業]과 무명에 유전하며 짓는 일[流轉無明作事]과 팔진제로 들어가는 법문[八盡際入法門]과 전후 이제(二際)와 중간(中間)과 상견(常見)ㆍ단견(斷見)과 육십이견과 삼십칠조보리분법(三十七助菩提分法) 등 이와 같은 법의 여실한 처소에서는 그 이치가 어떠하느냐?’
아난아, 그 때에 그 방광여래께서 이와 같이 물으시자마자 모든 보살들은 다 함께 곧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모두는 여래의 구업(口業)이신 언교법(言敎法)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 온갖 어언(語言)과 음성(音聲)의 교법을 관하는 것이 곧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이니라.’
아난아, 그 때에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다 말없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처님께 공경히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는 한 숲 사이로 나아가서 저마다 단정히 앉은 뒤에 함께 서로 말하기를, ‘모든 어진 이들이여, 여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위하여 일체 모든 법은 어디서도 온 곳이 없음을 말씀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관찰하게 하셨으니, 우리들도 이제 이 이치를 사유해야 합니다. 만일 법문을 깨달으면 참으로 기쁜 일이며, 만일 상응하지 않으면 다시 세존께 청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이 논한 뒤에는 저 숲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을 지나면서 이 이치를 관찰하되, ‘모든 법은 어디에서 생겼고, 이와 같은 소리는 누가 지은 것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이르는가?’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해 이 이치에 부합해야 하는데도 만일 이해하지 못하면 마땅히 다시 가서 부처님께 물어야겠습니다.
모든 어진 이들이여, 여래께서 전에 이미 대중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나바야, 너희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법을 수행하였거늘 어떻게 이 법 가운데 있으면서도 깨달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당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전심(專心)으로 사유하여 이 이치를 증득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종일토록 수행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몹시 한탄할 만한 일이며 또한 부끄럽고 비루할 만한 일입니다.
먼저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만일 십팔억 모든 중생들의 온갖 소리의 업[聲業]을 사유하여 얻는다면, 그것은 이미 증득하여 안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이 깊이 쾌재(快哉)를 이루는데 혹시라도 법답게 깨쳐 알지 못한다면 오직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관찰할 뿐이거늘, 여래의 뜻[意旨]을 잃게 한다면 어찌 대성(大聖)의 정성스런 말씀을 거역한 것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또한 부처님ㆍ세존은 언제나 저희들을 위하여 차례로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인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심히 깊은 이치를 열어서 일으키셨는데도 모든 중생들은 오히려 바른 생각으로 사유하거나 부지런히 힘써 관찰하거나 갖가지로 묻지 못하였으며, 때로는 갖가지 법행(法行)을 듣기도 하고 무상(無常)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괴로움[苦]을 듣기도 하고 무아(無我)와 적멸 열반(寂滅涅槃)을 듣기도 할 적에 여래께서는 언제나, ‘이 법문을 말하노니, 너희들이 응당 그 가운데 편히 머묾이 마치 인(忍)을 얻은 모든 보살들이 마음을 이치[義理]에 안주하면서 귀로 소리를 취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뭇 보살들 가운데 보시를 즐겨 행하는 이는 역시 귀로는 세 가지 해탈의 소리를 들고, 또한 계를 지니기를 좋아한 이는 모든 계의 일[戒事]을 물었으며, 나아가 지혜를 닦기 좋아한 이는 반야(般若)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법문을 여래는 언제나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이미 듣고 난 뒤에는 소리를 취하지 않아야 하고 달리 이해하지 않아야 하면서 응당 어떤 것이 수승한 행인지 바르게 사유해야 하고 여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의지해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보살들은 그 숲 사이에 있으면서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결가부좌하고 앉은 채 잠을 자지 않고 어떤 잡념도 없이 한마음으로 오로지 집중하면서 이 이치를 사유한 뒤에 다시 서로 말하였느니라.
‘여러 어진 이들이여, 여래ㆍ세존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이 다라니 수다라 경전을 말씀하셨는데 가없고 또한 수량(數量)이 없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의 비유문[喩門]으로 그 뜻이 이미 드러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 다라니의 깊고 묘한 경전 가운데 다시 그 밖의 다라니의 방편 법문을 연설하셨고, 또한 이미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 법문을 연설하셨으며, 이미 진제에 들어가는 법문을 연설하셨고, 이미 갑옷을 입는 법문을 연설하셨으며, 나아가 저 크게 장엄하는 일[大莊嚴事]을 연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등의 한 언교 구절[一言敎句]은 이 세 가지 방편 업장의 깊은 법문 속에서 이미 세 글자 법문(法門)으로 온통 섭수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세 글자인가? 이른바 저 아(阿)ㆍ가(迦)ㆍ나(那)의 글자 및 여타의 갖가지 방편 언교의 인연과 비유이니, 그것이 간략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 지닐 수 없어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아(阿)이고, 아는 어디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생겼습니까? 어떤 것이 가(迦)이고, 가는 어디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생겼습니까? 어떤 것이 나(那)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생겼습니까? 어떤 것이 소리[聲]이고, 소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생겼습니까? 어떤 것이 음(音)이고, 음은 어디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생겼습니까?’
아난아, 그 때에 저 모든 보살들은 저마다 한마음으로 이와 같은 법문인 아ㆍ가ㆍ나 글자의 본래 생긴 처소와 궁전에 드는 법문[入宮殿法門]을 바르게 사유하였고, 차례로 사유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마치 저 어린아이가 처음 글[章]을 배울 적에 그 중 제일의 판(板)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첫째 판으로 인하여 첫 글의 문자[初章文字]를 이루고, 나아가 뒷날에는 그 밖의 판과 종이와 잎사귀 등에 의지하고, 이로 인하여 마지막에는 온갖 문자를 통달하는 것과 같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이 처음 법을 관찰할 때에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모든 법이 생기지 않음이 없는 것이 마치 무명(無明)의 인연으로부터 모든 행(行)이 생기고, 나아가 생(生)ㆍ노(老)ㆍ사(死)로 인하여 우(憂)ㆍ비(悲)ㆍ고(苦)ㆍ뇌(惱)가 생기는 것과 같았느니라.
마치 첫째 판[初版]의 인연에 의지해서 아의 글자가 생기듯이, 이와 같이 나아가서 그 밖의 판과 종이와 잎사귀의 인연으로부터 그 밖의 글의 문자가 이루어지느니라.
또한 마치 선하지 않은 사유[不善思惟]의 인연으로부터 무명이 생기듯이, 이처럼 무명ㆍ행 등의 인연에 의지하여 노사(老死)의 십이유지(十二有支)에 이르기까지 화합하여 구족히 성립되느니라.
또한 마치 글씨를 쓴 판에서 배우기 시작하여 처음에 아(阿)의 글자를 쓰고, 나아가 그 밖의 판과 손이 서로 잇달아 화합하면서 두루 온갖 글자를 쓰듯이, 이처럼 모든 인연의 갈래[分]가 차례로 상속하여 생사(生死)가 유전(流轉)하면서 구족히 더욱 자라느니라. 어떻게 더욱 자라는가? 마치 사대(四大)인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 차례로 점차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더욱 자라느니라.
마치 저 판(板) 등의 여러 가지의 일이 두루 갖추어졌기 때문에 저 다섯 글자의 문[五字門] 등도 역시 두루 갖추어지듯이, 이처럼 무명ㆍ행 등으로부터 오음(五陰)의 더미를 내는 그 이치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이것이 생긴 뒤에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소멸하고 나면 저것도 소멸하는 것이니, 십이인연은 차례로 생기는 것이지 뒤바뀌어 생기는 것이 아니니라.
‘모든 어진 이들이여,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십이인연의 갈래는 모두 이 아(阿) 글자 문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마치 무명의 갈래가 저 선하지 않은 사유로부터 생기고 나아가 그 밖의 인연의 갈래가 무명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어진 이들이여, 이 가운데서 무엇이 아(阿)의 글자입니까? 어느 것이 소리로서 글자를 능히 내고 어느 것이 소리로서 생겨 나오는 곳입니까?
마나바여, 알아야 합니다. 이 가운데서 소리는 실로 얻을 수 없고, 소리가 나는 곳도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소리의 모든 인연까지도 마침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는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어서 이름하여 소리는 실로 얻을 수 없으며, 소리를 이미 얻을 수 없거늘 어느 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소리를 얻는 것이 있다면 곧 온갖 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나바여, 이 가운데서 소리와 소리 나는 처소와 소리의 인연을 이미 얻을 수 없는지라, 온갖 세간의 인연으로 생기는 법도 마침내는 얻을 수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얻음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모두가 찰나 동안의 망상 분별로 말미암아 전도되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모두가 다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모든 법의 자성(自性)은 다 전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제 전도된 분별로써 여래께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전도된 법을 쓰지 않으시며, 또한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언교(言敎)는 전도됨을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나바여, 그러므로 저 소리에서 더불어 얻을 수 없고 소리가 오는 곳도 얻을 수 없으며, 아(阿)의 글자를 얻을 수 없고 아의 글자가 오는 곳도 얻을 수 없으며, 가(迦)의 글자를 얻을 수 없고 가의 글자가 오는 곳도 얻을 수 없으며, 나(那)의 글자를 얻을 수 없고 나의 글자가 오는 곳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온갖 무명의 인연으로 생기고 성립되는 법은 모두 얻을 수 없나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래부터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니 무엇을 집착한단 말입니까?
또한 마나바여, 이 가운데 만일 이 세 가지 방편 언교의 업장 법문의 온갖 일과 처소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것도 역시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온갖 집착에는 본래의 성품[本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온갖 일 중에서 집착이 없다고 하는가? 이른바 과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이것을 집착한다고 하며, 집착하기 때문에 속박한다[縛]고 하거니와, 과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얻는다고 보는 것이 없으면 이것을 집착이 없다[無著]고 하며, 집착이 없기 때문에 해탈한다고 합니다.
과거의 일처럼 미래도 역시 그러하며, 미래처럼 현재도 역시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이 삼세의 모든 일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 가운데서 해탈한다는 이름을 얻습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처소에서 해탈을 얻는 이는 바로 처음 아자법문(阿字法門)에 들어간다고 하며, 이 아자궁전(阿字宮殿)의 경계처럼 저 세 가지 방편 언교의 업장도 역시 그와 같고, 이 세 가지 방편 언교의 업장처럼 저 삼세의 모든 법의 일과 모양[事相]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며, 이 삼세의 일과 모양처럼 그것이 멸도(滅度)하는 모양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온갖 삼세와 나아가 세 가지 방편의 언교와 온갖 법의 하나인 듯 둘이 아님[一如不二]이 아자문(阿字門)의 궁전에 들기 때문에, 그리고 다만 저 모든 범부로서 어리석은 사람만을 섭수하기 위할 뿐이기 때문에 삼세 가운데서 사물이 있고 언설로써 얻을 수 있다고 보이지만 실로 삼세는 얻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중생들은 과거 세상의 일에 집착하므로 다만 그 범부의 어리석음만을 제거하기 위하여 언설로써 과거 세상의 일을 보이고 나타내지만 실제로 과거의 일은 얻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떤 중생들은 미래 세상의 일에 집착하므로 다만 그 범부의 어리석음만을 제거하기 위하여 언설로써 미리 세상의 일을 보이고 나타내지만 실제로 미래의 일은 널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 과거나 미래처럼 현재도 역시 그러해서 얻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이 처소를 말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어느 것이 언교이고 어느 것이 음성이며 어느 것이 아ㆍ가ㆍ나의 글자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만 인연 갈래 가운데서 임시 언설(言說)로써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생겼기 때문에 이것이 생겼을 뿐입니다. 온갖 것은 모두 허망과 전도됨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나바여, 이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일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음성과 언어와 말, 구절은 모두 구하고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다만 이 모든 일은 인연으로 있을 뿐이지 인연을 여의면 음성은 생기는 곳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응당 이 세 가지 언어 방편의 업장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관해야 하며, 이처럼 억수에 드는 문[入億數門]도 역시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앞에서 설명한 바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도 역시 인연으로부터이니, 이와 같은 인연을 우리는 이 가운데서 의당 의지해야 하고, 이것을 의지한 뒤에는 저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의 일과 나아가 세 가지 언교의 업장 가운데서 응당 다함없는 법을 연설해야 합니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은 장애가 없고 접촉하거니 상대할 수도 없으며, 또한 더하거나 덜함도 없는 것처럼 이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 응당 연설한 뒤에는 법답게 거두어 지녀야 합니다.
마나바여, 또한 허공에 변제(邊際) 없는 것처럼 세 가지 언교의 업장에 변제가 없는 것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마나바여,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갑옷을 입은 뒤에는 여래의 말씀처럼 두 극단[邊]을 초월하여야 하며, 마치 저 궁전이 두 극단을 초월하는 것처럼 열반도 역시 그러하여 변제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법으로 두 가지 극단을 멀리 여의면 곧 이것이 한 모양[一相]이니 응당 증득하여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한 모양인가? 이른바 모양 없는 모양[無相相]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모든 보살들은 그 숲 사이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을 단정히 앉아 일어나지 않은 채 모두가 함께 한마음으로 이 이치를 담론(談論)하였고, 이와 같이 담론한 뒤에 다시 말하였느니라.
‘우리들은 이제 이 법 가운데서 오직 이 이치만을 알 뿐이나 그 밖의 아직 모르는 것은 이 자리를 떠나 세존의 처소에 가서 세존께 아뢰어야 합니다.
여래는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은 등의 법을 널리 연설하시면서‘너희는 의당 지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가르침 가운데 어떠한 말씀을 바로 지녀야 하며, 어떠한 이치를 우리 같은 이들이 지녀야 하겠습니까? 비록 그렇게 우리가 이 법을 관한다 하더라도 역시 지닐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나바여, 이 가운데의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증득하여 알 수 있으므로 좋은 방편으로 온갖 법에 대하여 스스로 증득하여 알아야 합니다.
마나바여, 어떠한 방편이고 어떤 구절의 이치이기에 온갖 법을 응당 잘 증득하여 알아야 하는가? 마나바여, 온갖 법이란 이것은 가장 수승한 이치[最勝義]이니, 만인 온갖 법의 처소에 마음을 안주할 수 있으면 수승한 이치라 합니다.
이와 같이 수승한 이치는 증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니, 증득하여 알기 어렵다고 함은 곧 열반입니다. 이 열반 가운데서는 어느 한 법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언설(言說)도 없습니다. 무슨 이치로 언설이 없는가? 이름[名字]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름이 없다고 하는가? 만일 이름이 있다면 집착(執著)이 생기므로 이 때문에 이름이 없습니다.
마나바여, 이 집착이 없는 곳을 그대들은 닦아야 하나니, 만일 집착이 없다면 역시 취할 수도 없고,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장애가 없으며,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계박(繫縛)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계박이 없기 때문에 필경에는 저 음성과 이름과 구절의 뜻으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설명이 없기 때문에 또한 비유를 들어 다른 이를 이해시켜 의혹을 제거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마나바여, 오직 하나의 법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 방편입니다. 그대들은 기억하고 지니어야 할 뿐 아니라 온갖 중생을 가르쳐서 방편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마나바여, 어떠한 방편으로 다른 이로 하여금 증득하여 알게 하는가? 이른바 온갖 법상[一切法相]을 건립하는 것이니, 다만 이것은 여래께서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 가운데 방편으로 널리 연설하여 중생을 인도함으로서 진실한 이치[實義]에 들게 할 뿐이지 진실한 이치 가운데 이 언설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이름하여 방편이라 합니다.
마나바여, 우리들은 이제 마땅히 여래께로 돌아가서 이 법을 청해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묻는 세 가지 업장(業藏)이 모든 법문 가운데서 약간의 법이라도 성심(聖心)에 합당하다면 우리는 비로소 받아 지니되 마치 허락 받지 못한 것처럼 은근하고 정중하게 물어야 하며, 오직 힘을 다할 뿐 피로함을 사양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나바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께서는 심히 희유하십니다.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행할 적에 용맹스레 정진하고 그 서원으로 장엄하신 것은 모두가 중생에게 보리(菩提)를 성취하게 하기 위함이니, 대비(大悲)로 친히 가르치실 때 중생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여래의 마음은 잠시도 쉬는 일이 없이 여전히 스스로 은근하게 우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마나바여, 우리들은 오늘 저마다 함께 한마음으로 여래의 큰 지혜[大智] 가운데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여래께 정하여 물으면서 피로함을 사양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나바여, 여래ㆍ세존께서도 역시 늘 우리들을 위하여 이 중대한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게으르거나 오만하지 않고 오직 용기 있게 결단하기 위하여 이 큰 갑옷을 입어야 할 뿐입니다.
어진 이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들은 응당 큰 마음[大心]을 세워서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고 한량없는 언교(言敎)를 모두 다 지니어 잃지 않아야 하리니, 이제 속히 여래의 발 아래로 나아가 모든 감관[諸根]을 방기하지 말고 바른 기억[正念]을 흐트러뜨리지 말며 대자비(大慈悲)에 머물러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세간을 위하여 짐짓 여래께 절하여 묻되 피로함을 참고 싫증을 내지 말아야겠습니다.
마나바여, 우리들이 지금 여래께 청하면 많은 이로움이 있으리니, 이제 속히 청하지 않으면 뒤에 근심과 후회가 이르리다.’
아난아, 그 때에 그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그 숲 사이에서 편안하고 상서롭게 나왔는데, 위엄 있는 용모는 한아(閑雅)하고 모든 감관이 고요하였느니라. 곧장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ㆍ부처님ㆍ세존께로 나아가서 머리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머무르면서 모든 보살들이 그 숲에서 담론한 큰 이치와 마음으로 사유하였던 것과 뜻으로 관찰하였던 것, 혹은 때로 증득하여 알았고 증득하고 나서 기뻐하였던 등등의 일을 모두 다 저 방광여래께 빠짐없이 자세히 아뢰었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모든 보살들이 미묘한 변론으로 갖가지 법문을 설명한 것을 듣고 곧 전단나 보살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전단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이제야 비로소 이와 같은 미묘한 지변(智辯)을 두루 갖추게 되었는데, 혹시 또 어떤 사람이 능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여기느냐? 아마 믿음을 능히 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니, 오직 여래만이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니라. 때로 어떤 사람이 모든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많이 총지(摠持)한다면 이런 사람은 조금은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어떤 사람이 이 모든 여래의 대승의 묘한 경전[大乘妙典]을 널리 유포할 수 있다면 비로소 믿고 이해할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미 세 가지 언교의 업장을 알았으므로 응당 사실대로 지녀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와 같은 방편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이 방편이란 이 법 가운데서 으뜸가는 방편인 것이니, 으뜸가는 방편이란 바로 방편이 없는 것을 말하느니라. 이 방편이 없는 것에 저절로 여덟 가지가 있으니, 여덟 가지라 말함은 이른바 이 모든 바라밀을 얻고서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저 바라밀에 들어갈 적에는 어느 하나의 법도 깨달아 마칠 수 있는 것이 없나니, 깨달아 마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누가 지혜로 이 법을 증득한 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너희들은 이와 같이 온갖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 가운데서 진실(眞實)을 말하여 마친 줄 알지니라.
마나바야,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번뇌는 그 가운데서 본래 생기는 곳이 없거늘, 누가 이곳에서 깨뜨려 없앤 이가 있을 수 있겠고, 누가 이 가운데서 나는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누가 이 가운데서 말로 설명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고, 누가 이 가운데서 감히 의혹을 결단하겠으며, 누가 이 가운데서 물음과 청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오직 모든 범부들만이 어리석음에 가리어져서 모든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모두 의심이 있을 뿐이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으로 나는 어리석은 모든 범부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전도되고 산란한 이때에 비로소 세 가지 언교의 업장의 법문과 이름을 건립했지만 모두 방편일 뿐이니라.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이 이름 없는 법에 망령되이 이름을 짓고, 말의 설명이 없는 가운데서 억지로 말의 설명을 붙이면, 이와 같이 차례로 사랑과 미움 가운데서 행이 없는 곳[無行處], 나아가 삼세의 방편으로 벗어나려는 곳과 이치를 다하는 곳[盡理處]에서 모두 다 결정코 바라밀을 구하지 못하고 오직 세간에서 함께 거스르고 다투고 모든 쓸모없는 이론[戱論]만을 지을 뿐이며, 쓸모없는 이론 때문에 삿되고 허망하게 분별해서 진실을 은폐하느니라. 그런 이들을 위하여 모든 비유로써 갖가지로 해설할 때에 모든 중생들은 저마다 무거운 미혹이 있어서 진실한 이치를 알지 못한 탓에 다시 부처님께로 나아가 청하여 물으면서 의심을 해결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와 같은 법의 모양[法相]을 자세히 관하면서 바른 기억으로 사유하며, 이것을 사유한 뒤에는 곧 이와 같은 큰 갑옷을 갖추어 입고, 이와 같은 활ㆍ화살과 이와 같은 칼ㆍ몽둥이의 갖가지로 장엄하며, 이미 장엄하고 나면 위에서 말한 바처럼 가령 세간에 모든 전투 기구를 수미산처럼 쌓아 놓고서 찍거나 친다 하여도 끝내 손상됨이 없느니라. 만약 변견(邊見)과 궁전(宮殿)의 처소에 들어가면 너는 그 사이에서 집착을 내지 말지니, 만일 집착하지 않으면 사랑과 미움[愛憎]이 소멸하느니라.
마나바야, 이른바 변견이란 곧 아주 없다[斷]는 것과 항상 있다[常]는 것이니라. 이처럼 아주 없다는 것과 항상 있다는 것은 마지막[終]과 처음[始]이 없는 것이니라. 너는 저 과거의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하리니, 전제(前際)를 알고 나면 곧 항상 있다는 변견이 소멸되며, 만일 미래를 보아 후제(後際)를 알고 나면 아주 없다는 변견이 없어지리라. 너희들은 이미 삼세를 통달하여 두 가지 극단을 멀리 여의게 되면 다시 사람들을 위하여 두루 중도(中道)를 펴야 하느니라.
이 이치에 대하여 잘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느 것이 바로 중도인가? 어떻게 하면 중도가 되는가? 누가 중도에 처하는가? 너희들이 만일 중도에 능히 들어가면 방편이 있는 것이요, 만일 들지 않아도 역시 방편이 있느니라.’
모든 보살들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중도에 들어가면 방편이 있다는 말씀은 그 이치는 옳다 하겠지만, 중도에 들어가지 않아도 방편이 있다고 하시니 그 이치는 어떤 것이옵니까? 원컨대 자세히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받들어 지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마나바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여래의 설명과 같으니라. 지금 말한 방편이 없는 법이란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이치[實義]이니라. 그 진실한 이치 가운데는 말[言]도 없고 설명[說]도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중생은 나의 말이 없는 설법[無言說法]을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능히 안다고 하면 옳지 못한 일이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어떠한 법이 말도 없고 설명도 없느냐? 말과 설명이 없는 것은 이른바 열반이니라. 이 열반 가운데는 말과 설명이 없고 또한 짓는 것도 없어서 처소가 적정(寂靜)하고 언어가 없나니, 다만 모든 여래가 저 세간을 위하여 방편으로 해설했을 뿐이니라.
너희들은 응당 증득하여 알아야 하느니, 무엇이 증득하여 아는 것인가? 이미 설명한 바도 없고 또한 깨달아 아는 것도 없으니, 이와 같은 차례로 방편의 문[方便門]에 들어가면 온갖 법에서 머무를 곳이 없느니라. 만일 이 방편의 설명을 능히 알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진실한 설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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