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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7 불교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하권

by Kay/케이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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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하권

 

대당서역구법고승전 하권


의정 지음


34) 도림(道琳)법사
도림법사는 형주(荊州)의 강릉(江陵:湖北省 江陵縣)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시라발파(尸羅鉢頗, Silaprabha)[당나라말로는 계광(戒光)이라고 한다.]이다.
약관(弱冠)이 되던 해 승복을 입고 출가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벗들을 찾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였다. 율장(律藏)을 연구하여 계행(戒行)이 구슬처럼 빛났으며, 선문(禪門)을 두드려서 선정은 물처럼 맑았다. 타고난 품성이 깨끗하였으며, 절조가 곧았다. 청계(淸溪)에서 몸을 씻어 그 뜻을 가다듬고, 옥천(玉泉)에서 이를 닦아 그 정신을 길렀다. 늘 좌선하여 눕지 않았으며, 한 순간이라도 정성을 다하였다.
뒤에 다시 불교가 동쪽으로 흘러 들어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선문(禪門)에 들어온 자는 적고 율장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그는 개탄하여, 드디어 그 원류를 찾아 멀리 인도로 가려 하였다.
이에 석장(錫杖)을 짚고 멀리 가서 배로 남해(南海)를 건넜다. 동주(銅柱:베트남의 하노이 부근)를 지나 낭가술(郞迦戌:파타니)에 이르렀다가 가릉국(揀陵國:자바)을 거쳐 나인국(裸人國:니코발)을 통과하였다. 그는 들렀던 나라마다 국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대접을 받았다.
수년이 지난 후 동인도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에 이르러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어를 공부하여 지금까지 지녀왔던 계를 버리고 거듭 수학하여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율을 배우고 익혔다. 그는 율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선정(禪定)과 지혜도 겸하였으며, 밀교(密敎)에도 심취하였다. 그후 중천축의 부처님 유적을 돌며 그 덕화를 살폈고, 보리수 아래의 금강어좌(金剛御座)와 보리성의(菩提聖儀)를 정례(頂禮)하였다.
그리고 또 나란타사(那爛陀寺)로 가서 대승의 경론(經論)을 찾아 읽고, 『구사론(俱舍論)』에 심취하여 연구하였다. 그후 수년이 지나서 영취산(靈鷲山)에 들어갔다가 장림(杖林)과 산원(山園), 그리고 곡수(鵠樹)를 찾아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였다.
남인도에 머물면서 깊은 진리를 찾아 다녔으며, 다시 서인도로 향하여 라다국(羅茶國)에서 수년간 머물면서 다시 영단(靈壇)을 세워 (불타의 상을 안치하고) 거듭 명주(明呪:眞言)를 익혔다.
일찍이 명주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었는데, 무릇 명주란 범어로 비제다라필적가(毘睇陀羅必棏丁澤反家, Vidydhā dhāyani pitaka)라 하며, 비제(毘睇, Vidyā)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명주(明呪)이고, 다라(陀羅, Dharāni)는 지(持)이고, 필적가(必棏家, Pitaka)는 장(藏)이므로 마땅히 지명주장(持明呪藏)이라고 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이것은 주장(呪藏)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범본(梵本)에는 이 명주가 10만 송(頌)이 있는데, 이를 당(唐)나라 말로 번역하면 300권은 될 것이다. 오늘날 이것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대부분 없어졌고 완전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아리야나가갈수나(阿離耶那伽曷樹那, Ā ryā-Nāgārjuna) 즉 용수보살(龍樹菩薩)1)이 이 명주의 중요한 내용에 특히 정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의 제자로 난타(難陀, Nanda)2)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총명하고 박식하였으며, 이 경전에 뜻을 두어 연찬하고 있었다. 그는 서인도에서 12년간 머무는 동안 오로지 마음으로 명주를 지녔는데, 그러다 드디어 감응을 얻게 되었다. 식사 때마다 음식이 공중에서 내려 왔고, 주(呪)를 외워 여의병(如意甁)을 구하고자 하면 바로 얻게 되었으며, 병 속에 경(經)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곤 했다. 그러나 주를 외우면서 인상(印相)을 맺지 않자 여의병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난타법사는 명주가 없어지는 것이 두려워 바로 12,000송(頌)을 찾아 모아 독자적인 체계로 정리하였다. 한 게송마다 주(呪)와 인상(印相)의 문구를 저마다 나뉘어서 하나로 묶었으며, 비록 언어와 문자가 같다 하더라도 실은 뜻이 다르면 그것을 구별했다. 그리고 입으로 전수되지 못하면 실로 이해해 깨달을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 뒤에 진나논사(陳那論師)3)는 난타법사가 제작한 경전을 보고 교묘하기가 사람의 지혜를 넘어섰고 그 사유는 극치를 이루었기에 경전을 쓰다듬으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현인(賢人)으로 하여금 먼저 뜻을 『인명론(因明論)』에 두게 하였다면 나는 무슨 얼굴로 여기에 있었을까?”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도량을 알고, 어리석은 사람은 타인의 얕고 깊은 역량을 알아차리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주장(呪藏)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 도림법사는 뜻을 이 미묘한 이치에 두었기 때문에 주장(呪藏)을 가리켜서 “하늘로 오르고 용(龍)을 타며 온갖 신(神)들을 부리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며 오직 주법(呪法)만을 가까이 익혔다.
의정(義淨)은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자주 단장(壇장)에 들어가 마음 속으로 이 주법(呪法)의 핵심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성과를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은 인도에서 들었던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대략 그 줄거리를 적어 본 것이다.
그 후 도림법사는 인도의 서쪽 경계에서 북인도로 향하여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케쉬미르)을 순례하였다. 그곳에서 바로 오장나국(烏長那國)으로 들어가서 선문(禪門)을 찾아다니며 반야(般若)를 구하였다. 이어서 가필시국(迦畢試國)으로 가서 오솔니사(烏率蘖沙)[부처님의 머리 뼈[佛頂骨]이다.]에 예배하였다.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의정이 남해(南海)의 갈다국(羯茶國)에 이르렀을 때 북방의 호인(胡人)이 와서 “두 승려를 호국(胡國)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용모와 여정(旅程)을들어 보니 그가 바로 도림법사였다. 아마 지홍율사(智弘律師)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에게 들으니 길이 도적들에게 막혀 가던 길을 다시 북인도로 향했다고 한다. 나이는 50여 세였다.

35)담광율사(曇光律師)와 또 한 사람의 당나라 승려
담광율사는 형주(荊州) 강릉(江陵:湖北省 江陵縣) 사람인데, 출가하여 멀리 장안(長安)으로 가서 법성율사(法誠律師)4)의 제자[室灑]가 되었다.
담론(談論)을 잘 하였고 문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내외전(內外典)을 두루 배웠고, 계행(戒行)이 맑고 엄격하였다.
그는 남명(南溟:남해)을 배로 건너 인도의 불적(佛跡)을 순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허가를 얻어 동인도 동쪽에 있는 하리계라국(揀利鷄羅國)5)으로 갔다. 나이는 한참 젊은 때였고, 그 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중인도 지방에서 조용히 소식이 끊겼는데, 아마도 그 지방 산하(山河)에 묻힌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하리마라국 승려를 만나 그로부터 “나이가 50여 세쯤 되는 당나라 승려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국왕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아 절을 한 곳 맡아 관리하고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와 안치하고 승려들의 수행을 지도하고있었으나, 병을 얻어 이 나라(하리계라국)에서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36)혜명선사(慧命禪師)
혜명선사는 형주(荊州) 강릉(江陵) 사람이다.
그는 계행을 철저하게 하였으며, 마음에는 절조(節操)가 있었다. 내ㆍ외전(內外典)을 모두 배웠으며, 뜻은 멀리 인도에 가 구법(求法)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상서로운 강(갠지스강)을 멀리서 우러르며 그 뜻을 황제에게 주상(奏上)하고,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염원하며 마음이 솟구쳤다.
이윽고 배를 타고 점파(占波)6)에 이르렀으나 강풍을 만나 몇 차례의 난고(難苦) 끝에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세웠던 동주(銅柱) 앞바다를 지나 비경(匕景:베트남의 洞海)7)에 머물다가 당나라로 돌아왔다.
37)현규(玄逵)율사
현규율사는 윤주(潤州) 강녕(江寧:江蘇省 南京)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호(胡)씨이고, 지체가 높은 집안 출신이다. 문학과 역사를 함께 닦았으며, 인(仁)을 숭상하고 의(義)를 귀하게 여겼고, 불법과 승려를 공경하였으니, 나뭇가지와 잎에서 이어지는 매미의 노래처럼 그 아름다운 명성은 끊이지 않았다.
율사는 어렸을 때 출가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덕행을 신중하게 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에는 동료들 가운데 뛰어났다. 율부(律部)를 두루 섭렵하고, 오로지 참선의 수행에 전념하였으며, 계행이 매우 엄격하였으니 실로그와 비길 만한 사람은 드물었다. 여러 경전의 해석을 들어 자못 그 깊은 뜻을 궁구하였으며, 서예(書藝)를 연마하여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매우 정통하였다.
현규율사는 삼의(三衣)8)를 갖추고 오른쪽 어깨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노출시켰으며, 옷깃[衣角]을 접은 채 왼쪽 어깨에 걸쳤다. 절에 들어가서는 맨발로 다녔고, 길을 다닐 때는 신을 신었다. 이런 그의 행동거지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높은 절조는 그에 상관하지 않았다.
율사는 잠을 잘 때에도 옆으로 눕지 않고 장좌(長坐)하였으니 그 어찌 편한 잠자리를 갖추었겠는가. 두다(杜多)9)하여 탁발(托鉢)할 때에도 술집앞을 지나는 일은 없었다.
범용한 사람들은 붉은 가죽 신발은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서 모두가 짚신을 좋아하였다. 깊신을 신으면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발을 들어내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니 이것이 위의에 맞다.
아아! 이 사람은 남모르게 이치를 성취하여 맑은 물결을 일으켜서 (저 굴원이) 멱수(■水)에 빠져 죽은 것10)을 수치로 여기고, 세속을 따랐다. 율사는 이른 새벽 홀로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어찌 함께 취해 혼탁함에 빠질 수 있었겠는가?
율사와 단양(丹陽:江蘇省 丹陽縣)에서 잠깐 만났으나 마침내 인도로 갈 것[南上]을 함께 약속하였다. 하지만 형제가 헤어짐을 주저하듯 그와 헤어지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삼형(三荊)11)의 나뉨이여, 언제나 서로 의지하던 형제와 같았지만 떨어지게 되었으니 가슴 아프도다. 팔익(八翼)의 헤어짐이여,12) 그러나 불법을 전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기에 이별은 그의 높은 소망을 내리 누르지는 못하여 그는 광주(廣州:廣東省 番ヮ縣)까지 갔으나 끝내 풍질(風疾)에 걸려 눕게되었다. 이렇게 처져 머물게 되었으니 멀리 인도로 가려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한탄하며 고향인 오초(吳楚) 땅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나이25~26세였다.
뒤에 승철선사(僧哲禪師)가 인도에 이르러 전하기를, 그는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가슴을 앓아 명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아아, 불행한 일이다. 좋은 길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지만 겪어 보니 거짓이 아니다. 참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불법을 전하려 하였으나 청운(靑雲)의 뜻은 헛되고 말았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여도 그것은 헛되게 죽음의 여로13)를 밟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기리며 읊는다.

착하신 분, 이에 떠나시니
그 누가 뒤를 이으리요.
불행히도 요절하고 말다니,
아아, 슬프기 그지없네.
9인(仞)까지 쌓았던 공이
한 짐 흙이 모자라 이내 무너지고 마니
빼어났지만 그 열매 맺지 못하였도다.
아아, 슬프구나.
경의 해석은 얻기 쉬우나
그 행을 구함은 어렵구나.
아아, 그대는 젊어서
행과 덕을 모두 닦았고
불법을 전하고자 떠나려 하였건만
병마가 그대 덮쳐 그 뜻 거두셨네.
분하구나, 그대의 이루지 못한 큰 뜻이여.
슬프구나, 그대의 운명이여!
바라노니 그대의 높은 절조(節操) 전하여
만대에 길이 빛나게 하리.

헤어질 때 현규율사는 “광주(廣州)를 떠나도 여전히 계림(桂林:廣西省의 壯族 自治區)을 그리워 한다”고 말하였으니, 떠나는 사람이나 머무는 사람 모두 슬프기만 하였다.
이에 스스로 지은 오언시(五言詩)로 그 감회를 남겼다.

마음은 오로지 인도에 가려고
신을 가다듬어 광주(廣州)에 왔건만
병든 이 몸 친구를 따르지 못하여
마음 가라 앉히고 젊은 뜻 억누르네.
낙엽 떨어지니 바로 모으기 어렵고
인정도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
언젠가 나도 작은 배에 올라
불법의 흐름을 자세히 보리라.

의정은 함형(咸亨) 원년(670) 서경(西京:長安)에서 불법을 듣고 있었다. 그 때 병주(幷州:山西省 太原縣)에 살던 한 법사(法師)와 내주(萘州:山東省 掖縣)의 홍위논사(弘褘論師) 및 그밖의 두세 명의 승려와 함께 영축산에 오르기를 맹세하고 보리수에 예배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한 법사는 어머니의 나이가 많아 결국 고향인 병천(幷川)으로 돌아갔고, 홍위논사도 어머니 상(喪)을 접하자 강녕(江寧)의 부친을 섬기기 위해 정토의 행업[安養]을 돈독히 쌓기로 하였다.
그 무렵 현규율사는 이미 광동부(廣東府:廣東省 番禺縣)에 도착하여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출항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진주(晋州:河北省 晋縣)의 어린 승려 선행(善行)과 함께 고향으로 떠났던 것이다.
중국의 옛 친구는 뿔뿔이 흩어지고 인도의 새로운 지기(知己)도 묘연하여 아직 만나지 못하였으니,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밀려오는 회한을 가누지 못하여 하릴없이 사수(四愁)14)에 의거하여 마음에 부족하지만 절구(絶句) 2수(首)를 지었을 뿐이다.

5언(言)
내 가야 할 길 수만 리
시름은 백 겹으로 겹쳤으니
어떻게 여섯 자 이 몸 이끌고
홀로 오천축(五天竺)을 가리.
5언[다시 스스로 근심을 풀고 시를 지음]
뛰어난 장수를 업신여길 수는 있어도
한 선비의 뜻은 꺾지 못하리.
아무리 단명(短命)을 애석하다 하여도
어떻게 길게 바랄 수 있으랴.

의정은 함형(咸亨) 2년(671) 양부(揚府:江蘇省 江都縣)에서 여름 동안 수행하였다.
초가을이 되어 갑자기 공주(龔州:廣西 壯族 自治區 平南縣)의 사군(使君) 풍효전(馮孝詮)을 만나 광부(廣府)까지 가서 파사(波斯:페르시아) 선주(船主)와 함께 배로 남행(南行)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 동안 의정은 다시 사군 풍효전의 명으로 강주(崗州:廣東省 新會縣)에 갔는데 그들은 의정의 후한 단주(檀主)15)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우인 효탄사군(孝誕使君)과 효진사군(孝軫使君) 및 군군녕씨(郡君寧氏)와 군군팽씨(郡君彭氏) 등 여러 집안권속들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받았다. 그들은 앞다투어 최상의 물건말을 가려서 보내주고 진기한 음식들을 희사하였으며, 나아가 항해 중에 부족한 것은 없을지 험한 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지를 염려하였다. 그들은 마치 자식을 염려하는 어버이와 도같이 도타운 은혜를 베풀었고, 부처님을 대하는 급고독장자(給孤獨長子)16)의 마음처럼 필요한 모든 것을 보시하였으니, 그들과 의정은 함께 불법에 귀의하고 같이 뛰어난 경지에 결합된 것이다. 이와 같이 대접을 받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풍씨 집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영남(嶺南)의 승려와 재가 사람들은 이별을 아쉬워하였으며, 북토(北土)의 뛰어난 유생(儒生)들도 모두 생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11월에 이르러 마침내 익(翼)과 진(軫)의 별자리17)를 향해 번우항(番禺港)을 떠났는데, 이 때 마음은 녹야원(鹿野苑)을 그리고 아득히 계봉(鷄峰:鷄足山)을 상상하며 크게 탄식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불기 시작한 동북 계절풍을 맞아 주방(朱方:서남쪽)쪽으로 향하였는데 백장쌍계(百장雙桂:달의 다른 이름)는 기(箕)의 별자리를 벗어나 다음 별자리로 향하였다. 이미 창절(創節:冬至)이 되었는데도 바다의 기온은 높아 중국 북쪽 땅[玄朔]의 추위를 잊게 하였으며, 돛대 위의 오량(五양)18) 만이 홀로 나부끼는 가운데 배는 드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나아갈 뿐이었다. 산더미 같은 파도는 뱃길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거학(巨壑)19)을 지났고, 구름 같은 물결은 하늘을 적셨다. 이렇게 하여 뱃길로 20일이 채 못되어 실리불서(室利佛逝:수마트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범어의 성명(聲明)을 배웠다. 이 나라의 왕은 안내자를 보내어 실리불서의 다음 입항지(入港地)인 말라유국(末羅瑜國:쟌비)[지금은 실불서국으로 바뀌었다.]까지 전송하였다. 다시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물다 갈다(■茶)로 향하였다.
12월이 되어 의정이 타고 왔던 파사국의 상선은 돛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갔고, 의정은 갈다국의 왕이 마련해준 배를 타고 차츰 동인도를 향하여 나아갔다. 갈다국에서 북쪽으로 열흘 남짓하게 항해하여 나인국(裸人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2리(里)쯤 떨어진 해안가에는 야자수('子樹)와 빈랑수(檳榔樹) 숲이 우거져 자못 아름다웠다.
이곳 사람들은 배가 오는 것을 보면 상선 쪽으로 앞을 다투어 작은 배에 올라 노를 저어 왔는데, 아마 백 척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야자수 열매나 바나나, 등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그릇을 가지고 와서 교역하려 하였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쇠[鐵]뿐이었다. 두 뼘 크기의 쇠로는 야자 열매 열 개를 바꿀 수 있었다.
이곳 남자들은 모두 발가벗었으며, 여자들은 나뭇잎으로 성기를 가렸을 뿐이었다. 어떤 상인이 장난삼아 옷을 벗어 내어주니, 손을 옆으로 휘저으면서 받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라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서남 경계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나라는 아직 철을 채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금과 은도 채광량이 적었다. 사람들은 야자 열매와 마[α]뿌리를 먹었으나 벼 등 곡식은 별로 먹지 않았다. 로가(盧呵)를 가장 진귀하게 여겼다. [이 나라에서는 철을 로가라고 한다.]그들의 피부는 검지 않으며, 키는 중간키[中形]이다. 등나무 줄기로 둥근 바구니를 잘 짜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 다른 곳에서는 이를 따를 수 없었다. 만약 교역을 거절하면 독약 묻은 화살을 쏘았는데, 일단 이 화살을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다시 보름가량 서북쪽을 향하여 나아가다 드디어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에도 착하였다. 이곳은 바로 동인도의 남쪽 경계로 마하보리(莫揀菩提:大覺寺)와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60여 역(驛) 떨어진 거리에 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대승등선사(大乘燈禪師)와 만나게 되어 1년 동안 머물면서 범어를 배우고 성론(聲論)을 익혔다.
그리고 드디어 등선사와 동행하여 서쪽으로 길을 잡아 상인 수백 명과 함께 중인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마하보리까지는 10일 걸리는 곳으로 일행은 큰 산과 못을 지나기도 하였다. 길은 몹시 험하였으므로 지나가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혼자서는 그 길을 지날 수 없었다. 의정은 그 때 병에 걸려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상인들을 뒤쫓아 가려고 하여도 제자리만 맴돌 뿐 따라갈 수가 없었다. 비록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조금만 걸어도 오래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 나란타사 승려 20여 명과 대승등선사는 모두 앞서 갔으나, 의정만 홀로 처져 남게 되었다. 혼자서 험한 길을 빠져 나오니 해는 이미 저물어 갔다. 느닷없이 산적(山賊)들이 활시위를 당겨 겨누면서 큰 소리로 협박하며 다가왔다. 산적들은 의정의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의정을 놀리면서 먼저 윗옷을 벗기고 이어서 아래 옷까지 벗겼다. 그리고는 속옷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
이 일을 당하고 보니 길이 인간 세상을 하직하고 부처님 유적을 순례하려던 희망이 끊긴 것만 같았고, 몸이 창 끝에 찔려 진리를 구하려던 본래의 희망은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또 이 나라에 구전(口傳)되어 오는 말에 의하면 흰색 피부를 지닌 사람이 잡히면 죽여서 하늘에 제사지낼 때 바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떠오르자 의정은 더욱 더 걱정이 되었다. 이에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 온 몸을 진흙으로 바르고 나뭇잎으로 앞을 가리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천천히 나아갔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그날 밤을 묵을 마을까지는 아직도 멀기만 하였다. 밤 12시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행하였던 스님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대승등선사는 누군가 마을 밖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있었으며, 의정은 옷 한 벌을 건네 받고 못에서 몸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다시 며칠을 걸어 먼저 나란타사에 가서 근본탑(根本塔)에 경건히 참배하고, 다음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올라 첩의처(疊依處)20)를 친견하였다. 그 뒤에 대각사(大覺寺)에 가서 부처님 진용상(眞容像)에 예배하였다. 의정은 중국을 떠날 때 산동(山東)의 승려와 재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명주로 여래상과 같은 크기의 가사(袈裟)를 만들어 몸소 받들어 불상에 입혔다. 또 복주(濮州:山東省 濮縣)의 현율사(玄律師)가 부탁한 불상 머리 위에 올려 장식하는 나개(羅蓋) 수만 개도 삼가 받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주(曹州:山東省 曹縣)의 안도선사(安道禪師)가 부탁한 보리상(菩提像)에 대한 배례(拜禮)까지도 마쳤다.
이 때 의정은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한마음으로 먼저 중국의 사은(四恩)21)을 위하고 법계(法界)의 함식(含識:중생)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경건하게 예배하였다. 그리고 용화세계(龍華世界)22)에서 미를(彌勒)부처님을 만나 진종(眞宗)23)에 계합하여 무생지(無生知)24)를 얻을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다음에는 두루 성스러운 유적지를 순례하고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방장(方장)25)을 지나 구시나가라국(拘尸那揭羅國)에 도착하였다. 의정은 가는 곳마다 정성을 다하여 참배하였다. 그리고 녹야원(鹿野苑)에 들렀다가 왕사성(王舍城) 밖 계족산(鷄足山)에 올라갔다.
나란타사에서는 10년 동안 머물면서 불경을 구한 다음 비로소 발길을 돌려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많은 도적떼를 만났는데, 칼에 맞는화(禍)를 간신히 면하여 목숨만은 지킬 수 있었다. 이에 배를 타고 갈다국(羯茶國)을지났다. 그가 가지고 온 범본(梵本) 삼장(三藏)은 수가 50만 송(頌)에 달하였는데,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천 권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으로 들어가 체류하였다.26)

38)선행(善行)법사
선행법사는 진주(晋州:河北省 晋縣) 사람이다. 젊어서 고향을 떠나서 동산(東山:河南省 洛陽)에서 불도를 구하여 오랫동안 율의(律義)를 익혔으며, 마음은 명주(明呪:다라니)에 기탁하였다.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손하며 검소하였으며,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데 뜻을 두었다. 그는 바로 의정의 문인(門人)으로서 의정을 따라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 이르렀으나 마음 속으로는 못내 중국을 그리워했다. 이윽고 병에 걸려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이는 30세쯤이었다.

39)영운(靈運)법사
영운법사는 양양(襄陽:湖北省 襄陽縣) 사람으로 범명(梵名)은 반야제바(般若提婆, Prajdeva)이다. 그는 지조가 굳었으며, 마음은 속세를 떠나 불도를 닦는 데 두었다.
법사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찾아보기 위하여 승철선사(僧哲禪師)와 함께 배로남명(南溟:南海)을 건너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범어를 아주 열심히 익혔으며,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려는 데 뜻을 두었는데, 가는 나라마다 임금의 예경(禮敬)을 받았다.
드디어 나란타사에 이르자 그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진용(眞容)과 보리수상(菩提樹像)을 그렸다. 그는 한 자[尺]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그려내었으며 그 오묘한 솜씨는 화가들보다 빼어났는데, 그는 이 그림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영문법사는 당나라에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켰으며,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번역하는 일을 훌륭히 감당하였다.

40)승철(僧哲)선사와 그 제자
승철선사는 예주(澧州:湖南省 澧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높은 절개를 지녔으며, 일찍이 현문(玄門:佛門)에 몸을 맡겼다.
경전을 해오(解悟)하는 역량은 물병의 물을 다른 그릇에 부어 옮기듯이 확실했으며, 담론(談論)의 예리함은 참으로 주요 논객들 가운데에서도 칭송이 높았다.
율장(律藏)에 깊이 마음을 쏟고 선(禪)의 각파를 모두 수행하였으며, 『중론(中論)』과 『백론(百論)』 두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어느 것이든 통했으며, 장(莊)ㆍ유(劉)의 두 서적27)에 관해서도 신속하게 그 논지(論旨)를 파악하였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사모하여 뱃길로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 들어가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자취를 따라 유적을 순례하고 돌아와 동인도 삼마저타국(三摩咀■國)28)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의 이름은 갈라사발타(曷羅社跋吒)라 하였는데, 이 왕은 깊이 삼보(三寶)를 존경하여 대오파색가(大鄔波索迦)29)가 되었는데, 지성(至誠)을 다하고 믿음에 철저함이 역대의 왕 가운데에서도 으뜸이었다. 매일 (왕사성 불상에서) 모사(模寫)한 불상 10만 구(軀)를 조상(造像)하고, 『대반야경(大般若經)』 10만 송(頌)을 읽고, 생화(生花) 10만 송이를 왕이 손수 공양하였는데, 마련된 불단에 바친 꽃들의 높이는 사람의 키와 같았다.
또 어가(御駕)를 정렬하여 관음상(觀音像)의 행렬30)을 출발할 때에는 선발대인 번기(旛旗)는 하늘에 나부끼고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불상과 승려들은 모두 앞쪽에 위치해 나아갔으며, 왕은 그 뒤를 따랐다.
왕성(王城) 안에는 승니(僧尼)들이 4천 명쯤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왕으로부터 공양을 받고 있었다. 매일 아침 왕은 사자(使者)를 절에 보내어 승방(僧房) 앞에서 합장하고, 서둘러 밤새 안부를 여쭙게 하였다. “대왕께서 여러 법사(法師)님들께 안부를 여쭙나니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하면, 이에 승려들은 “대왕이시여, 부디 무병장수(無病長壽)하시고, 국조안녕(國祚安寧)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자가 궁에 돌아와 왕에게 보고한 후가 아니면 임금은 국사(國事)를 논하지 않았다.
오인도(五印度)에 존재하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대덕과 재주있는 사람들, 그리고 십팔부경(十八部經)31)을 널리 공부하고 오명대론(五明大論)에 해박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에 모여들었다. 이는 실로 왕의 어진 명성이 인재들에게 미쳤으며, 멀리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승철선사는 왕사(王寺)에 살면서 매우 특별한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범어 경전에 기울일 때마다 자못 나날이 자신의 뜻이 분명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의정이 이 절을 찾았을 때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지만, 듣기로는 그는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승철선사의 제자 현유(玄遊)는 고려국(高麗國)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사자국(師子國)으로 가서 그곳에서 출가(出家)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다.
이상은 50인이다.

41) 지홍(智弘)율사
지홍율사는 낙양(洛陽:河南省 洛陽市) 사람이며, 빙서역대사(聘西城大史:서역 巡撫使者)였던 왕현책(王玄策)의 조카이다. 어렸을 때부터 일찍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게 되어, 그의 마음은 세속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속세를 떠나 은둔하기를 뜻하였다.
마침내 소림산(少林山)32)으로 들어가 솔잎을 먹고 단약(丹藥)을 복용하며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며, 문장에도 매우 능숙하게 되었다.
이미 속세의 시끄럽고 떠들썩함을 떠나서 법문(法門)의 맑고 고요함을 숭상하게 되자, 드디어 팔수(八水)를 등지고 삼오(三吳)지방으로 가서 속세의 옷을 벗어 버리고 승복을 입게 되었다. 지차선사(智☆禪師)33)를 사사하여 그로부터 사혜(思慧)34)를 계승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다시 기주(■州:湖北省 ■春縣)의 홍인선사(弘忍禪師) 처소에 가서 거듭 선(禪)을 닦았다.
그러나 비록 향기나는 뿌리를 심었다 하더라도 높은 가지가 아직 솟아나지 않아, 이에 드디어 상천(湘川)35)을 건너 형령(衡嶺:南嶽)36)을 넘어 계림(桂林)으로 들어가 명상(瞑想)하면서 그곳의 조용한 샘가에 숨어 선(禪) 수행을 하였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낸 뒤에 (荊州 玉泉寺에 들어가) 보적선사(普寂禪師)에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잠겨서 울창한 숲의 맑고 깨끗함을 즐기며 붓을 휘둘러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고요한 샘과 산들을 시로 표현하여 멀리 떠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그는 이미 삼오(三吳)의 법장(法匠) 지차선사를 만나서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고, 구강(九江)의 훌륭한 벗인 보적선사를 만나 불교의 깊은 진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숙세(宿世)에 선근(善根)을 심어 놓았다 하더라도 지홍은 그들 스승에 의해서도 충족되지 못하여 중국을 떠나 서쪽 인도로 가서 부처님 유적을 순례하려 하였다.
다행히도 무행선사(無行禪師)를 만나 함께 갈 것을 약속하여 마침내 합포(合浦:廣東省 合浦縣)에 가서 배를 타고 기나긴 남해(南海) 항해에 올랐다. 하지만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표류하다가 비경(匕景:베트남의 洞海)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다시 교주(交州:河內의 서쪽)로 가서 그곳에서 한 여름을 보냈다.
그리하여 늦은 겨울이 되자 다시 해빈신만(海濱神灣)37)에 가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서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 도착하였다.
이밖의 경력에 대해서는 무행선사(無行禪師) 전기(傳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지홍율사는 대각사(大覺寺)에 가서 2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처님의 존용(尊容)을 우러러보면서 힘써 정진하였는데, 범어 경전을 소리내어 독송할 때마다 나날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지가 있었다. 범어의 음운(音韻)과 어법(語法)을 공부하고 그 문자의 서법(書法)에도 능숙해졌으며, 율의(律儀:율장)와 대법(對法:論藏)을 학습하여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이해하였고, 또한 『인명론(因明論)』에도 해박해졌다.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는 대승경전을 고루 읽고 신자도량(信者道場)에서는 소승불교를 전념하여 공부하였다. 또 이름 높은 스님에게 나아가 거듭 율의를 닦았으며, 그 정진하는 모습이 참으로 은근하고 간절하였고 잠시라도 소홀함이 없었다. 덕광율사(德光律師)가 지은 율경(律經)을 배울 때 청강(聽講)하는 대로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니 참으로 공부함이 많았다.
공기 주머니[浮囊]를 잘 보호하여 조금이라도 바람이 빠지지 않게 하듯이38) 드러눕는 일 없이 언제나 앉아서 지냈으며 소욕(小欲)으로 만족하고 청렴하였다.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언제나 겸손하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왕사성(王舍城)ㆍ영취산(靈鷲山)ㆍ선원녹림(僊苑鹿林:鹿野苑)ㆍ기수급고독원(衹樹給孤獨苑)ㆍ천계(天階:僧伽著國의 三道寶階)ㆍ암원(菴苑:菴羅樹苑)ㆍ존족산(尊足山) 등 부처님 유적지에 이르러서는 늘 마음 속에 간직하였던 생각의 나래를 펴며 구도(求道)의 염원을 맹세하였다.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남으면 언제나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란타사에서는 훌륭한 음식공양을 널리 베풀었으며, 왕사성에 머물 때에는 사람들이 공양한 음식이 그의 발우에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중인도(中印度)에서 8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그후 북인도의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케쉬미르)으로 향하였다가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도림법사(道琳法師)와 동행하였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불경을 번역한 공은 그가 이미 이루어 놓았다.

42) 무행(無行)선사
무행선사는 형주(荊州) 강릉(江陵:湖北省 江陵縣)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반야제바(般若提婆, Prajadeva)[당나라말로는 혜천(慧天)이라고 부른다.]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욕심이 없었으며, 타고난 인품이 따뜻하고 고상하였으며, 마음은 인(仁)과 덕(德)에 두고 뜻은 정적(靜寂)한 세계를 존중하였다.
죽마의 해[竹馬之年]에는 석거각(石渠閣)에 발을 던졌으며,39) 약관(弱冠)이 되어서는 금마문(金馬門)에 마음을 두었다.40) 그는 이미 여러 학파(學派)의 학설(學說)을 공부하였으며, 삼경(三經:『易經』ㆍ『詩經』ㆍ『春秋』)도 대략 살펴 보았다. 형주 사람들은 그를 기동(奇童)으로 높이 평가하였고, 이웃 사람들은 그의 빼어남을 시기하여 배척하였다.
당시는 아름답게 채색된 안개가 걷히면서 삼강(三江:江蘇省)41)을 비추는 것이 매우 빼어났으며, 향기로운 사색(思索)의 샘이 솟아나 칠택(七澤:湖北省)42)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과 같은 수도를 제외한 불교의 중심지를 든다면, 첫째로는 삼오(三吳)와 삼강(三江) 즉 강소성(江蘇省) 남부 양자강 연안이고, 둘째로는 절강성(浙江省)의 동북해안지방, 셋째로는 토지가 비옥하고 산수가 수려한 칠택지방이다. 하남성(河南省)의 숭산(嵩山), 호북성(湖北省)의 초산(楚山),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의 지도산(智度山), 상서(湘西)의 삼각산(三角山), 형주(衡州)의 석고산(石鼓山), 강서성(江西省)의 여산(慮山) 등은 한결같이 칠택지방에서의 불교의 융성을 전해주는 유적지이다. 역시 앞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 지방에서 불교가 매우 융성하였던 것을 말해 주는 내용이다.
에 쏟아져 들어가듯 흘러 넘쳤다. 그래서 선사의 숙세(宿世)의 인연이 감응을 얻어 지금의 과보가 나타나게 되어, 불도(佛道)를 희구하여 심원(深遠)한 가르침을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뜻을 함께 하는 다섯 사람을 만나 이곳저곳은 두루 돌아다니다가 계도량(界道場)43)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을 무렵에는 장안(長安)의 대복전사(大福田寺) 혜영법사(慧英法師)를 섬겨 그의 오파타야(鄔波■耶, Updhya)[당나라에서는 친교사(親敎師)라고 한다. 화상(和上)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가 되었다. 혜영법사는 길장법사(吉藏法師)44)의 뛰어난 제자로, 매미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듯이 이렇게 연이은 석덕(碩德)은 실로 어느 세상에서도 그 같은 인재(人材)는 없을 것이다.
무행선사는 마음을 『반야경(般若經)』에 집중시키고 참선에 그 뜻을 심어서 인간 세상을 버리고 산수(山水) 사이에서 수행하였다. 불교의 강(講)을 논할 때마다 미묘한 이치를 과감하게 따져 바른 뜻을 밝혀내었으니 비록 햇수로는 후배라 할지라도 명망(名望)은 선배들을 앞질렀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 함께 받은 사람들이 20여 명 있었는데, 계문(戒文)을 이틀만에 외워버려 모두 그를 뒤따를 수 없는 으뜸가는 제자라고 칭찬하였다. 이어 깊숙한 바위에 숨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외웠는데 채 한 달이 못되어 일곱 두루마리[軸]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곧 탄식하여 말하였다.
“통발[■]을 구하는 자는 고기를 잡으려는 뜻이 있기 때문이고, 말[言語]을 탐구하는자는 그 본래의 이치로 나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땅히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나의 마음을 거울과 같이 맑게 하여 선(禪)을 수행하여 번뇌를 끊어 버리자,” 이에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구강(九江)으로 갔다가 다시 삼월(三越) 지방으로 발길을 돌려서 갔다. 여기서 다시 멀리 형악(衡岳)에서 노닐다가 다음에는 금릉(金陵)에 머물렀으며,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에 들어가서는 은일(隱逸)을 생각하고, 소실산(小室山)에는 길게 시가(詩歌)를 지어 읊었다. 그리고 팔수(八水)에서 발을 씻고 삼천(三川)에서 소매를 걸어 올렸으니, 이것은 바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이다.
또 선(禪) 수행을 하면서 북으로 천태산(天?山)에 올라가서 지자선장(智者■匠)의 정수를 감득하고, 계율을 지키며 동쪽으로 돌아가서는 도선율사(道宣律師)의 그 순수한 종풍을 탐구했다.
경(經)ㆍ논(論)의 신구(新舊) 해석을 들어 고금(古今)의 법칙을 알았거니와 그 마음이 탁 트인 것은 파도가 일렁이는 만경(萬頃)의 바다와 같았으며, 그 기상이 우뚝 솟은 것은 천길[千尋]의 가파른 기슭과 같았다.
이리하여 선사는 지홍율사(智弘律師)와 벗하여 동쪽 바람에 배를 띄워 한달 만에 실리불서국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왕은 보통 사람들을 대하는 예우와는 다른 매우 두터운 예로써 그를 대하였는데, 금꽃을 깔고 금가루를 뿌리고 네 가지 공양[四事供養]45)을 온몸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국왕은 그가 대당(大唐) 천자(天子)가 있는 곳에서 왔다는 것에서 한층 더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 후 왕이 내준 배를 타고 보름만에 수마트라의 말라유국(末羅瑜國:쟌비)에 도달하였고, 거기에서 또 보름 후 수마트라의 갈다국(羯茶國:반데야차)에 도착했다. 겨울이끝날 무렵 배를 서쪽으로 돌려 30일이 지나서 나가발단나(那伽鉢亶那:나가파탐)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배로 이틀 만에 사자주(師子洲:스리랑카)에 도착하여 부처님 치아에 예배하였다. 사자주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배를 띄워 한 달 만에 하리계라국(揀利鷄羅國:시토우에)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는 동인도의 동쪽 경계로 곧 섬부주(贍部洲)의 땅이다. 이 나라에서 1년간 머물다가 차츰 동인도 국내로 들어갔는데, 그는 언제나 지홍스님과 함께 다녔다. 이곳에서 나란타사까지의 길은 백 역(驛) 거리였다.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쉬다가 바로 대각사로 갔는데, 두 사람은 국왕의 요청을 받아 나란히 존주(尊主)로서 이 절에 거주하였다. 인도에서 존주가 되는 것은 제법 어렵거니와, 만약 존주가 되면 절 안의 모든 일에 그 절 승려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반면에 단순히 객(客)이 되면 그저 식사 제공만 받을 뿐이다.
선사는 그 후 나란타사에 가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강의를 듣고, 『중관론(中觀論)』을 배웠으며, 『구사론(俱舍論)』을 연구하고 율장(律藏)도 탐구하였다.
선사는 다시 나란타사에서 두 역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저라다사(羝羅茶寺)에 갔다. 그곳에는 인명학(因明學)에 매우 밝은 논사(論師)가 있어서, 자주 그 분의 강의장에 나가 진나(陳那)가 짓고 그후 법칭(法稱)46)이 발전시켰던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을 배워 차츰 깊은 불교 교리의 관문에 이르러 자못 그윽한 철리(哲理)를 열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
선사는 매일 오직 탁발로만 생활하였으며, 소욕지족(少欲知足)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자비의 마음은 모든 생명에 이르렀다.
선사는 일찍이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아급마경(阿笈摩經:阿含經)』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여래께서 열반하실 때의 일을 기술해서 대략 3권으로 엮어 당나라로 돌아가는 사람 편에 보냈다. 이것은 설일체유부율(說一切有部律) 가운데에서 나온 것인데, 그 넣고 뺀 내용을 논하자면 회녕(會寧)이 번역한 것과 같다.
선사는 일찍이 인도에 남겠다고 말하였으나 그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뜻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북인도 길을 취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의정이 돌아오는 날 전송하기 위해 나란타에서 동쪽으로 6역(驛) 되는 곳까지 따라 나왔다. 서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만날 것을 간절히 원하였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끝없이 많은 것이리라.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헤어졌으니 그 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또 선사는 불적(佛跡) 찬례(讚禮)를 가장 존중하였다. 해마다 보리수(菩提樹) 잎이 처음 푸르게 될 때 용지(龍池)의 물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金剛寶座)를 깨끗이 씻었으며,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찾아 막 피어 오른 황화(黃華:香華)를 꺾어서 그것을 영취산(靈鷲山)에 바쳤다. [이 두 시절은 봄으로 모두 큰 명절이다. 날짜가 서로 가까이 연이어 있으며, 승려와 석인이 모두 나와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를 씻는 것을 구경한다. 또 영취산에는 이 때 황화(黃華)가 피는데, 크기는 주먹만하며 실로 그 열매는 한결같이 금색(金色)을 띠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이 꽃을 꺾어 바치는데 이 때가되면 산과 들을 뒤덮으므로 춘녀화(春女華)라고 이름한다.]일찍이 어느날엔가 의정은 무행선사와 함께 영축산에 올랐다. 두 사람은 우러러 황화를 바친 뒤에 멀리 고향 쪽을 바라보자니 애절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에 의정은 자신의 감회를 시로 읊었다. [잡언(雜言)이다.]

기산(祇山)47) 정상에 올라 부처님 덕화 생각하며
옛 왕사성(王舍城) 바라보니 눈물이 흐르네.
목진지(木眞池)는 오랜 세월 동안 드맑고
녹야원(鹿野苑)은 천 년을 한결같이 청결하여라.
빈비사라왕의 영견로(影堅路)48)는 아스라히 자취만 남기고 있고,
화려하던 왕성은 허물어지고 말았네.
칠보(七寶)의 선대(仙臺)49) 옛 자취도 없어지고
사채(四彩)의 천화(天華)50)가 비내리듯 쏟아지던 소리도 이젠 끊겼네.
꽃비 내리듯 쏟아지던 부처님 사자후는 멀리까지 퍼졌건만
늦게 태어난 스스로를 한탄하노라.
이미 불타오르는 속세에서 몸을 다치고 벼슬살이에 미혹하였다가
보저(寶渚)에 이르려 하였건만 장판(長坂)에서 길 잃었네.51)
발걸음 나즈막한 언덕52)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마음은 팔공덕(八功德)의 일곱 바다에서 노니네.
어수선한 삼계(三界)는 삿된 견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어지러운 만 중생은 진실한 스승을 잃고 말았네.
오직 부처님만이 계셔 원만히 깨달으시어
번뇌의 티끌을 털어내고 욕망의 물결 잠재우셨고 진리의 길 여셨네.
처음에 굶주린 이를 만나 몸을 나누어 주시고,
나아가 중생을 구하고자 생명마저 버리셨네.[보시]
물에 빠진 사람은 공기 주머니에 의지하듯 굳은 맹세로 계율의 구슬 맑히고
[지계]
간절한 마음으로 인욕의 갑옷을 견고하게 입으며[인욕]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53)동안 게으르지 않고 이승(二僧)54)을 타고 올라
한 발걸음의 수고 잊고 구수(九數)55)를 넘으며[정진]
선정의 강은 맑아 그 얼음이 오래도록 얼고[선정]
지혜의 서리는 엉겨 새로운 안개를 피워 내네.[지혜]
끝없는 대겁(大劫)에 수행을 멈춘 일이 없고
육시(六時)56)에 마음을 되새겨 육바라밀을 따르네.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공덕을 쌓은 후에
금하(金河)에서 시적(示寂)하시어 열반으로 돌아가셨네.
학림(鶴林)에서 방편으로 펴신 공덕 완전하고
공덕을 널리 펼친 성도(聖徒)들의 메아리는 아련하게 전해지고57)
용궁(龍宮)의 비전(秘典) 58) 바다 속에서 찾아내며
석실(石室)의 진언(眞言)59) 산에서 우러보았네.
가르침은 흘러 내려와 오늘에 이르렀고
전법의 향기는 대를 이어 전해지도다.
사하(沙河)와 설산(雪山)에서 아침 길 잃고
거대한 바다, 험한 낭떠러지를 밤에 건너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의 나락에서 살아났으니
깊은 구덩이에 바늘을 던진 것보다 더하였고
빠른 말에 수레 달고 간다 해도 이보다 더 하였으랴.
이 몸 속세 즐거움에 맡기고자 한 것 아니요,
후대에 영화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네.
맹세코 이 몸 버리고 정법(正法)에 몸바쳐
오로지 깨달음 염원하며, 법 전하려는 마음뿐이네.
이젠 다시 그 고된 노래 그쳐
멀리 조망하며 잠시 주위를 돌아보네.
동쪽으로 여만(女巒) 바라보니 이적(二迹) 남아있고60)
서쪽으로 녹원(鹿苑) 다리니 삼륜(三輪)61) 사라지네.
북쪽으로 왕사성(王舍城) 바라보니 용지(龍池) 아직 있고,
남쪽으로 존족산(尊足山) 바라보니 좇아갈 성적(聖跡) 있네.
왕사성 오산(五山)은 모두 수려하고 골마다 물 나뉘어 흐르며
아름답고 맑은 꽃은 사철 피고
보리수 눈부신 잎 삼춘(三春)을 밝히네.
지팡이 들어 산하(山河)를 가리키며
걸음 재촉하여 기원정사(祇園精舍)에 들어가니
여래께서 법의(法衣) 접어 놓았던 돌[疊衣石]에 절하고
부처님을 향해 굴러뜨린 천수(天授)62)의 바위를 바라보네.
영취산(靈鷲山)에 올라 명상에 잠기니
황화(黃華)는 니련선하(尼連禪河)에 넘치네.
꽃 받쳐 들고 보리수 앞 일장의(逸掌儀) 앞에 바치니
능허전(陵虛殿) 뒤를 빙빙 돌아 예를 올리네.
부처님 경행(經行)하신 돌계단 보며
붓다와 같은 깨달음 기원하네.
내 지은 작은 선(善) 중생에게 돌리고
용화수(龍華樹) 아래 함께 만나 번뇌 버리려 하네.

다음은 인도의 왕사성에서 옛날을 회고하며 지었다. [1ㆍ3ㆍ5ㆍ7ㆍ9언(言)]

가면서 염려하네.
적현(赤縣)63)은 멀고 가슴은 저려지네.
영취산 찬바람 세차게 지나고
용하(龍河)64) 빠른 물살 흘러 내리네.
아침에 법을 물어 기쁨에 겨워 하루 또 하루 지냈건만
어느새 늙어버려 이 몸은 가을에 또 가을이네.
영취산에 오르려던 이루기 어려웠던 소원 이젠 이루었으니
경 메고 지팡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네.

43)법진(法振)선사ㆍ승오(乘悟)선사ㆍ승여(乘如)율사
법진선사는 형주(荊州:湖北省) 사람이다. 그의 덕행(德行)은 고상하였고, 오직 복업(福業)만을 닦았으며, 선(禪)의 물결에 발을 씻고 계행(戒行)의 바다에 마음을 두었다.
그의 도반들은 그를 존경하여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의지처로 삼았는데, 법진은율전(律典)을 독송하며 산수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닦았다. 그러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인도로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주(同州:陜西省 大■縣)의 승오선사(乘悟禪師)와 양주(梁州:陜西省 褒城縣)의 승여율사(乘如律師)와 함께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은 내외(內外) 경전을 철저하게 탐구하였으며, 그 지혜로운 사색은 깊이를 더하였고,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으며 뜻을 함께 하여 실천에 옮겼다.
법진은 두 벗과 동반하여 삼강(三江:베트남의 하노이 서북)에서 비경(匕景:돈호오이)으로 가서 돛을 정비하여 가릉국(訶陵國:자바) 북쪽으로 나아갔으며, 여러 섬을 거쳐서 이윽고 갈다국(羯茶國)에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법진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그의 나이 35~36세쯤이었다.
이렇게 법진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승오와 승여는 마음이 동요되어 결국 배에 올라 동쪽으로 향해 교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첨파국(瞻波國:베트남)[즉 임읍국(林邑國)이다.]에 이르자 승오 또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첨파국 사람들이 와서 전해 주기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후 승여는 홀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비록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서로 합심하여 구법 순례하려던 심정을 아름답다할 만하다. 어찌하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라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까?

44) 대진(大津)법사
대진법사는 예주(澧州:湖南省 澧縣) 사람이다. 어려서 법문(法門)에 감화받았으며, 커서는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소중히 여겼으며, 소욕(少欲)을 지켜 탁발(托鉢)로 생활하였다.
그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고 왕사성에 참배할 것을 소원하였는데, 늘 탄식하며 말하였다.
“자비로운 어버이이신 석가여래를 이제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천궁(天宮)의 자씨(慈氏:미륵불)는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실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리수의 참모습을 보지 않고 상하(祥河:니련선하)의 불적(佛跡)을 예배하지 않고서 어찌 나의 마음을 육경(六境)에 모으고 생각을 3아승기겁에까지 미칠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마침내 영순(永淳) 2년(683) 대진은 남해(南海)에의 출항을 결행했다. 처음에는 인도 순례에 나서기로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대진은 다른 승려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떠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진은 경전과 불상을 싣고 당나라 사신(使臣)과 함께 인도를 향해 떠나 한 달여 만에 시리불서국(尸利佛逝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서 몇 해 거주하면서 곤륜어(崑崙語:인도네시아어)를 깨우치고, 자못 범서(梵書)도 익혔다. 그리고 행동을 깔끔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이 나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의정은 이 시리불서국에서 대진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당나라에 돌아가 황제에게 인도에 중국 승려들을 위한 절을 지어 주도록 청하게 하였다. 이에 대진은 이렇게 하는 것이 불교를 널리 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목숨을 아끼지않고 다시 중국으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천수(天授) 3년(692) 5월 15일 배를 타고 장안(長安)을 향해 떠났다. 이에 의정이 번역한 여러 경과 논10권,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4권과 『서역구법고승전(西域求法高僧傳)』 2권을 대진에게 부탁하여 중국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찬(讚)을 지어 읊는다.
훌륭하구나. 그대 연소한 나이에도
불법을 경모(敬慕)하는 마음 두텁구나.
이미 중국에서 정성 다하더니
이제 다시 인도에서 법을 구하려 하네.
하지만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니 중생을 위함이네.
여러 사람들에게 십법(十法) 전하니
그 뜻 영원토록 이어질지어다.

부 록

『중귀남해전(重歸南海傳)』에 있는 사자(師資) 4인

1) 정고(貞固)율사
필추(苾芻:比丘) 정고율사는 범명(梵名)으로는 사라급다(娑羅笈多, Sala-gupta)[이를번역하면 정고(貞固)이다.]라 하며, 정지(鄭地) 영천(榮川:湖南省 榮澤縣)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맹씨(孟氏)이다.
까마귀를 쫓는 나이[驅烏之歲]65)부터 이미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총각(總角)이 되어서는 불법에 의지해서 살고자 마음 먹었다. 그의 나이 겨우 14세 되던 해에 벌써 부모를 여의는 신세가 되자 속세의 삶이 얼마나 슬픈가를 알게 되었고, 또 불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바른 생각을 가지고 불법의 도량에 살 것을 꾀하여 마침내 시수(氾水:河南省 氾水縣) 등자사(等慈寺)의 원(遠)법사가 있는 곳으로 가 출가수행할 뜻을 밝혔다. 정고는 그 뜻을 불교의 강령(綱領)을 밝히는 데 두어 『대경(大經:佛說無量壽經)』을 독송하면서 2, 3년을 지냈는데,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그후 상주(相州:河南省 林縣) 임려산(林慮山)의 여러 사찰에 가서 스승을 찾고 불도를 구하면서 참선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 때 정고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아직 교검(敎檢)66)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껏 내가 배운 것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힘들다.’
이리하여 그는 동위(東魏:鄴)67)로 가서 『유식론(唯識論)』 강의를 청취하고, 다시 안주(安州:湖北省 安陸縣)의 대유선사(大猶禪師)의 처소로 가서 방등경(方等經)을 배우고 익혔는데, 수십 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불교의 깊은 이치가 보이게 되었다. 이에 다시 형주(荊州:湖北省)로 가서 여러 산사(山寺)를 순방하면서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던 불타의 가르침을 탐구하였다.
그뒤 다시 양주(襄州:湖北省 襄陽縣)으로 가서 선도선사(善導禪師)를 만나 미타승행(彌陀勝行)68)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 때 정고는 이 사바예토(娑婆し土)를 버리고 극락정토(極樂淨土)로 향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독선(獨善)은 보살행(菩薩行)을 상(傷)하게 한다. 오직 팔식(八識)이 변한 것일 뿐인데 어찌 정토가 따로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현산(峴山:湖北省 襄陽縣 남쪽) 회각사(恢覺寺) 징선사(澄禪師)의 거처를 찾아가 처음으로 소승불교를 배우고 점차 대승불교의 교리에도 통달하게 되었다.
징선사는 깊이 율장을 연찬(硏鑽)하여 부처님께서 당부하셨던 오덕(五德)69)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경과 논을 넓게 연구하여 말세에 사의(四依)70) 그는 또 선(禪)을 수행하여 마음의 집중력이 깊었고, 팔해탈(八解脫)71)을 닦아 탐심을 버렸으며, 그 지혜는 준령과 같이 높고 육도(六度)를 행하여 바위를 뚫을 듯이 견고하였다. 오진(五塵)72)에도 현혹되지 않았으며, 구뇌(九惱)73)에도 놀라지 않았다. 밖으로는 사류(四流)74)를 넘어서고, 안으로는 삼정(三定)75)을 맑혔다.
이에 당시 승려나 속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으뜸가는 지도자로 우러러보았다. 징선사는 특별히 황제의 윤지(綸旨)를 받아 신도(神都:洛陽)로 가서 위국동사(魏國東寺)에 머물러 박식한 다른 고승들과 함께 기거하였다.
이 때 정고율사는 20세를 넘은 나이였는데, 징선사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불과 1년 만에 율장의 중요한 요체를 모두 섭렵하였다.
정고율사는 다시 안주(安州) 주수율사(周秀律師) 아래로 가서 3년간 도선율사(道宣律師, 596~667)의 글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오파리(鄔波離)의 오편(五篇)의 안팎을 꿰뚫어,76) 율에 의문을 모두 깨치고, 비사녀(毗舍女)77)의 칠취(七聚)78)의 깊은 관문을 통찰한 사람이라 일컫을 만하게 되었다.
율장에 이르기를 “계를 받은 지 5년이 지나면 스승을 떠나 행각(行脚)을 할 수 있으나, 1년 이내에 지도받을 스승[依止師]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계를 받은 지 10년이 지난 사람은 스승[依止師]을 떠날 수 있으나, 그래도 1년 이내에 덕있는 이를찾아 수행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수율사는 촉군(蜀郡) 성도(成都:四川省)의 도흥율사(道興律師, 593~659)의 수제자로, 이미 구족계를 받고도 스승과 함께 촉천(蜀川)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도흥율사 아래에서 율장을 4년간 배웠으며, 후에 장안(長安)의 도선율사 밑에 가 머물며 객(客)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비유하자면 물과 젖[乳]이 섞인 그릇에서 능숙하게 젖만 골라먹는 거위[鵝]와도 같이 명민하였고, 병에 담긴 물을 다른 병에 고스란히 옮겨 담은 아난다[歡喜]와 같이 그는 모든 지혜를 미묘하게 갖추게 되었다.
그는 16년이 지났는데도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지 않고, 많은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율의(律儀)와 이에 대한 여러 학설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홍복사(弘福寺) 지수율사(智首律師, 567~635)의 소(疏)를 율본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 후 삼양(三陽:長安)을 떠나 팔수(八水:洛陽)로 갔고, 또 황주(黃州:湖北省 黃岡縣)로 향했다가 자신의 출생지에 들렀다. 그런 뒤에 다시 안주(安州)로 가서 율장의 가르침을 크게 일으키자 여러 왕과 자사(刺史)들이 모두 주수를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율장에 말하기를 “만약 율사의 처소에 있으면, 그곳은 내가 십력(十力)을 갖춘 부처님의 도량에 함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주수율사는 이곳에서 거주하다 나이 70여 세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그 계행(戒行)은 밝고 순수했으며, 눈과 귀로 받아들인 지식이 매우 넓었다. 참으로 이 세대에 이런 분이 계셨기에 대들보와 석가래가 되었으며, 부처님의 지혜의 태양이 매미 소리같이 끊어지지 않고 스승의 뒤를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실로 한진(漢珍)과 형옥(荊玉)79)이 비록 채굴되는 개울[川]은 다르더라도 똑같이 아름답고, 계수나무 가지와 난초 잎이 설령 그 마디[節]가 다를지라도 향긋하기가 차이없는 것과 같다고 할 만하다.80)
정고율사는 이미 율장에 정통해 있었으면서도 나아가 경와 논까지도 섭렵하였으며, 특히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은 천 번 가까이 독송하였다. 마음 속 깊이 항상 수행을 잊지 않고 늘 그 가르침을 지켰으며, 삼업(三業)을 청결히 하고 사의(四依)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 뒤 정고는 다시 양주(襄州:湖北省 襄陽縣)로 가서 선도(善導)화상의 거처에 머물면서 소저라(蘇且羅:經藏)의 가르침을 듣고 대법장(對法藏:論藏)을 연구하고 의문점을 질문하여 바르게 공부하였으니, 그 지식욕은 옷 속에 감추어진 구슬을 찾는 듯하였다.81)
그는 화성(化城)82)에서 쉬면서 끝내는 보저(寶渚)에 이르기를 바랐다. 이에 마침내 양수(襄水:湖北省 襄陽縣)에서 발을 씻고 여산(慮山:江西省 九江市 남쪽)에 올라 혜원(慧遠, 334~416)의 탈속한 마음을 우러렀다. 이어서 동림사(東林寺)로 갔다가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던 중, 마침내 사자국(師子國)으로 가서 부처님 치아에 정례(頂禮)하고 여러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할 것을 마음 먹었다.
수공(垂拱) 연간(685~688)에는 계림(桂林)으로 가서 교화하고 유행하다가 차츰 청원(淸遠:廣東省 淸遠縣)의 협곡(峽谷)까지 나아갔는데 인연이 있는 이들이 몰려들어 함께 수행하였다.
그 후 정고율사는 번우(番禺:廣東省 番禺縣)로 갔으며, 그곳 광부(廣府)의 승려들은율장에 대하여 설법해줄 것을 청하여 왔다. 그즈음 대당(大唐)의 황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시 빛을 내고 법의 배가 길이 항해하기를 바라며 전국토에 삼사(三師)83)를 설치하였다. 이 때 가장 위의를 갖춘 것이 율(律)이었으므로 이에 정고율사는 여러 사람들이 흠모하고 청하는 바에 따라 삼장도량(三藏道장)에서 비나야(毗奈耶:戒律)의 가르침을 강의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9년을 지내면서 칠편(七篇)84)을 모두 마쳤는데, 승려들을 잘 가르쳤고 널리 속인들을 이끌었다. 그 때 제지사(制旨寺)의 극공(極恭) 아사리(阿闍梨)가 언제나 강의에 참석하여 친히 대중을 인도하고있었는데, 가히 성의를 다하여 청강자들을 잘 이끌고 싫증을 내거나 게으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분이라 일컬을 만하였다. 극공 아사리는 어렸을 때 출가하여 수행이 높고 절개가 곧은 분으로 나이는 70여 세였는데, 항상 계율의 가르침을 공경하며 수행하였다. 복을 지은 정고이었기에 그와 같은 높은 지혜를 지닌 분을 만날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선지(禪池)의 물이 가득 채워져 법해(法海)로 흘러 들어가 파도와 통하고, 사령(思嶺)은 높고 높아 혜악(慧嶽)으로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정고는 깊이 환상의 근본을 밝혀서 교묘하게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다. 모든 존재의 실체는 공(空)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용(用)이 무수하게 모여들었다.
그는 무상(無常)한 이 세상에서 복업(福業)을 지어 사람들을 건네주는 위없는 교량이 되었으며, 자주 사경회(寫經會)를 열고 언제나 대중공양을 하였다. 실로 사람들은 정고율사가 어떻게 사람들을 잘 응대하여 깨달음으로 이끌고 율장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중생들과 함께 살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정고율사는 광주(廣州)에서의 승려와 속인들에 대한 율법 강의를 마쳤기에 다시 협산(峽山:廣東省 淸遠縣 서북쪽)으로 향하여, 산으로 들어가 송림(松林) 아래에서 깊이 은거하려는 뜻을 세웠다. 이 때 이 산에 위치한 광경사(廣慶寺)의 주지 겸화상(謙和尙)은 정고율사를 빈객(賓客)으로 맞이하여 각별히 예우하였다.
주지는 어려서부터 높은 구도심(求道心)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어짐과 관용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았으나 늘 스스로를 굽히고 다른 사람을 우대하였고, 상대에게 겸손하게 대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정고는 이 절에서 쉬며 수행하기를 바랐고, 기울어진 회랑(回廊)을 새로 조영하고 굽은 길을 곧게 뚫으며 어긋난 토대(土?)를 바르게 잡을 뜻을 품었다. 절 안의 굽어진 곳을 이용하여 산에 못을 만들어 팔해(八解)의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또 절 옆에는 계단(戒壇)을 마련하여 칠취(七聚)의 향기로운 규율을 수계(授戒)하려 하였다.
그리고 또한 계단(戒壇) 뒤쪽에는 선감(禪龕)을 만들고 방등도량(方等道장)을 세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비록 그 공사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포살(布薩)의 궤의(軌儀)는 이미 그 강목(綱目)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정고율사는 언제나 “전생(前生)에는 석가세존을 뵙지 못하였는데, 후생(後生)에도 미륵보살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말세인 이번 금생(今生)에는 어떻게 수행해야 옳을까? 이미 공(空)과 유(有)의 학설 안에서 깊이 사색하였고, 또한 많은 스승의 문하에서 방황하질 않았던가?”라며 탄식하곤 하였다.
한편 의정은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의 강구(江口)에서 배에 올라 편지를 써서 광주(廣州)로 보내어 먹과 종이를 구하여 범어 불경을 베껴 쓰고 아울러 이 일을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상인은 계절풍이 불자 돛을 올리고 출항하게 되었는데, 의정은 그 배에 실린 채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다시 돌아가려 하여도 방법이 없었으니 의정은 이에 사람이 짓는 업(業)이 비록 그 표면만으로는 그 사람이 의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영창(永昌) 원년(元年, 689) 7월 20일 의정은 본의 아니게 광부(廣府)에 도착하여 많은 승려와 속인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제지사(制旨寺)에 머물게 된 의정은 이곳 승려들에게 한탄하였다.
”내가 인도에 갔던 본래의 뜻은 중국에 불법을 유통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해남(海南)에 머물렀지만, 아직 경본(經本)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그런데 가지고 오려던 범어 경전 50여만 송(頌)을 모두 실리불서국에 그대로 두고 왔다. 결국 또 다시 실리불서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나는 이미 나이 50세를 넘겼다.
다시 파도를 헤쳐 바다를 건너가야겠지만, 세월은 너무 빨라 조금도 머물러 주지 않고 이 몸뚱이도 보존하기가 어렵고, 아침 이슬같이 곧 사라질 순간이 이 몸에도 닥칠 것인데, 어느 곳에 부탁하여야 하나? 경전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누군가 함께 가서 경전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또 경전을 번역하더라도 이것을 누가필수(筆受)할 것인가?”
여러 승려들이 알려 주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고라는 스님이 계십니다. 오랫동안 율장을 탐구하시어 일찍이 그것에 통달하였습니다. 만약 그 분을 모실 수 있다면 좋은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의정은 이 같은 말만 들어도 참으로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을 찾아낸 것 같았다. 이에 의정은 정고율사가 있는 산사(山寺)로 편지를 써서 사자(使者)에게 부탁하였다. 정고율사는 그 편지를 개봉하여 잠시 읽어 본 뒤에 곧 같이 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요성(遼城)에서 한번 일으킨 전략(戰略)이 세 장군의 웅대한 마음을 사로잡아 당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경우85)와 같았고, 설산(雪山)에서 읊은 반게(伴게)가 그 산에서 수행하던 대은보살(大隱菩薩)의 깊은 뜻을 이끌어 몸을 바치게 한 것86)과 같았다.
이에 흔쾌히 깊은 계곡을 떠나 송림(松林)을 뒤로 하고 석문(石門:廣東城 番ヮ縣 서북쪽) 앞에서 팔을 걷어 올려 (의정이 기다리고 있는) 제지사(制旨寺)로 갔다.
두 사람은 처음 잠깐 만났음에도 아주 어릴 적부터 뜻이 맞아온 사이와도 같았으며, 이미 온몸과 마음이 오래 전부터 투합되어온 것과도 같았다. 비록 평생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도 실로 (의정을 만나고 싶었던 정고의) 숙원(宿願)에 부합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맑은 밤 마주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마음껏 논의하였다.
정고가 의정의 말에 대답하였다.
“길이 합해지면 소개자가 없어도 이렇게 친해지며, 좋은 시기가 돌아올 땐 그 누구도 이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넓혀 천 개의 등불을 밝게 밝히는 일을 도와줄 사람이 된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다시 협산(峽山)으로 돌아간 정고율사는 광경사(廣慶寺) 주지 겸화상(謙和尙)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주지 겸화상은 정고율사의 인도에의 구법(求法) 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고 정고의 떠남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고의 뜻을 듣고서 모두 기뻐해 주었다. 정고에게는 이미 미련은 없었다. 다만 의정에게 도움을 주는 것만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다.
제지사로 돌아온 정고율사는 물자를 모두 갖추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는데, 광주의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자금과 양식을 기증하였다.
그 해(689) 11월 1일 상선(商船)에 올라 번우항(番ヮ港)을 떠났다. 점파(占波)를 바라보며 돛 저 멀리 보이는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향해 배는 긴 항로를 나아갔다.
의정과 정고 두 사람은 중생들을 피안으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가 되고, 그 탐욕의 바다를 건네주는 배가 되리라 다짐하였다. 정고는 초지(初志)의 소망이 이루어짐에 기쁜 마음으로 장도(長途)의 여행이 무사히 진행되기만을 기원하였다. 이 때 정고율사의 나이 40세였다.
그를 찬(讚)하여 읊는다.

지혜로운 사람이 업(業)을 심는 것은
전생(前生)의 인연을 이어받은 것
어릴 때 불도(佛道)에 눈을 떠
복 짓는 일에만 친하고
마음은 자신의 욕망 이기고
의지는 어짊을 밝혔네.
이익되는 일에는 가까이 하지 않고
참으로 불법(佛法)만 사랑하였네.
언제나 불전(佛典) 몸에 지니고
밝음을 찾아 뜻을 굳히며
착한 일에 마음 두터이 하고
작은 잘못에도 두려움 일으켜
신발을 벗어 던지듯이
부귀 영화 버렸으니, 폭신폭신한 고양이 털 같고
날으는 벌이 꽃의 향과 색을 빼앗지 않는 것과 같네.
홀로 실개천 가를 떠나
한음(漢陰)87)의 땅 걷네.
철인(哲人)의 근본 뜻 수행하며
율장의 가르침 찾아
이미 그 줄거리 알아서
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갔네.
멀리 인도의 보리수 마음에 간직하고
행각(行脚)하며 계림(桂林)에 이르렀네.
정신을 협곡(峽谷)에서 잠시 휴식하여
광주(廣州)에서 중생을 구하였네.
이미 이전에 중국에서 불법 배웠으며
다시 새로운 가르침 물으려 남해(南海)로 가서
이제까지 없었던 법(法) 구하여
지금껏 전하지 않았던 가르침 전하였네.
경하할지어다. 이 분의 큰 뜻
중생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그 뜻을.
나의 좋은 동반자되어
함께 금주(金州)88)로 갔었네.
늘 범행(梵行) 지켰던 것이
좋은 벗들 모여든 이유이네.
배와 수레로 모여오는 사람들 이어지며
손과 발같이 그를 구하였네.
그대들 전등(傳燈)의 바람이 맺어진다면
또한 백 년을 살아도 부끄럽지 않으리.
벌써 실리불서국에 이르러
이곳에서 숙원(宿願)을 이루었네.
듣지 못하였던 불법 듣게 되었고
보지 못하였던 불경 보게 되었네.
내가 번역하면 그대는 받아 써서
상세하게 통함과 막힌 곳을 검토하였고
새로이 보고 새롭게 알아서
교묘하게 계율 명확히 하였네.
박식(博識)ㆍ다지(多智)하여 아침에 불법 듣고 언제나 정진하였으며, 공(恭)ㆍ검(儉)ㆍ근(勤) 갖추어 저녁에 죽더라도 근심 걱정 없었네.
다만 많은 중생들 미혹에 빠질까 두려워
불법 구하여 중생들 제도하기를
바람 일으키는 불꽃과 같이 불법 일으켜
천 개의 등불 영원히 밝히리라.

2)정고의 제자 회업(懷業)
또 정고율사에게는 제자 한 사람이 있었다. 속성(俗姓)은 맹(孟)씨이고 이름은 회업(懷業)이라 하였고, 범명(梵名)으로는 승가제바(僧伽提婆, Sanghad eva)라 하였다.
그의 조부(祖父)는 본래 북방 사람으로 관직으로 인하여 영외(嶺外:廣東省ㆍ廣西省)에 거주하였으며, 가족도 임시로 광동부(廣東府)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불법을 경모(敬慕)하여 정고율사의 문을 두드린 그는 비록 나이는 약관(弱冠)이었으나 뜻은 강건하였다. 스승으로 모시는 정고율사를 만난 후 불법을 널리 펼 것을 가슴에 품고, 즉시 율사를 수행(隨行)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애착하던 것들을 끊고 자비를 마음에 간직한 채 몸을 남해(南海)에 던져 실리불서국에 이르렀다.
회업은 곤륜어(崑崙語:인도네시아어)를 해득하고, 또 열심히 범서(梵書)를 공부하여 『구사론(俱舍論)』의 게송을 독송하였다. 그가 정고율사를 모시고 의지해서 구법(求法)한 것은 1년에 불과했지만, 천 리 먼 길을 다 가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깊이 생각해서 부지런히 힘쓴다면 꼴[生芻]89)을 바친 사람 같이 덕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얼마 동안 정고의 시자(侍者)가 되어 번역하는 작업을 도왔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3)도굉(道宏)
필추(苾芻) 도굉은 범명(梵名)으로는 불타제바(佛陀提婆:Buddhadeva)라 하며, [당나라말로는 각천(覺天)이라고 한다.] 변주(汴州) 옹구(雍丘:河南省 開封)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근(靳)이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상인들과 함께 남방으로 갔는데, 멀리 삼강(三江)을 지나 아득한 오령(五嶺)에 올랐다가 마침내 소부(韶部:廣東省 曲江縣)를 경유하여 협산(峽山)에 이르렀다. 맑고 깨끗한 산골짜기를 보고 고요한 물을 좋아하다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게 되어 출가하였다.
그 때 도굉은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浮萍草)와 같이 아버지인 스님을 따라 여러 곳을 행각(行脚)하였다. 어떤 때는 계림(桂林)에 들어가서 사색하였으며, 그윽한 샘가에 노닐면서 참선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대감선사(大感禪師)라고 이름하였는데, 마침내 보적선사(普寂禪師) 아래에서 선(禪)의 비오(秘奧)를 배워, 여러 해를 지나 그 요의(要義)를 알게 되자 다시 협곡(峽谷)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도굉은 아버지를 따라 또한 출가하여 나이 20세가 되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광부(廣府)를 오고 가며 산문(山門)에 출입하였는데, 비록 나이는 아직 많지 않았지만 품은 절조(節操)는 굳세었다.
도굉은 의정이 귀국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가 출입하던 장엄사(莊嚴寺)로 가서 거처하는 곳을 물으니, 그가 제지사(制旨寺)에 머물고 있다 하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내 그 마음이 서로 굳게 합쳐졌으며 거듭 생각해 보니 이 사바세계에서는 실로 중생의 성품이나 수명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 보니 하늘까지 넘치는 격랑(激浪)도 작은 연못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바다 밑을 회영(回泳)하는 추선(鰌鱓)90) 마저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고래를 보듯 하였다.
도굉은 다시 청원(淸遠:廣東省 淸遠縣)으로 가서 그곳 절에 이별을 고하고, 정고율사와 같이 광동부(廣東府) 아래로 돌아갔다. 이윽고 이들은 남해(南海)를 건너겠다는 뜻을 품고 함께 금주(金洲)로 내달렸던 것이다.
도굉은 지금까지 삼장(三藏)을 베껴 왔으니 그 공덕은 천추(千秋)에 이를 것이다. 그는 사물을 깨달아 아는 데 총민하였고, 성품은 온유하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또 『장자(莊子)』에 익숙하여 「제물론(齊物論)」의 내용을 완벽하게 체득해서 그 지마설(指馬說)이 요점이 없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여유자적한 성격이어서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고 차분히 일을 해결하였으며,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도 원만하게 잘 해결하였다.
비록 그가 이룬 공적이 드러나는 일은 아니지만 끝내 영유(英猷)를 좋아했다. 영유라는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즐거움을 꾀하지 않더라도 즐거워지는 것이고, 친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친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중생들과 같아지기를 바란 도굉이 어찌 짚으로 만든 개[媲芻狗]91)처럼 표면으로만 인(仁)을 행하는 자들과 같겠는가?
일행은 이미 실리불서국에 도착하고 있었다. 도굉은 율장(律藏)에 돈독한 마음을 내어 중국어로 번역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 썼으며, 이것이 전등(傳燈)되기만을 바랐다. 그는 율장에 오류가 없도록 거듭 교정하여 매우 존중받게 하였으니, 이 작업을 통하여 깨달음이 원만하게 이룩되고 이 세상에 쌓이고 쌓인 번뇌를 끊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의정이 율장 번역이란 대업(大業)을 완수한 것은 이 도굉이라는 작은 장인(匠人)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도굉이 사바세계에서 발탁되어 율장번역에 동참한 것을 경하하며, 그 복업(福業)이 무량한 중생들에게 베풀어지기만을 기원한다. 그 때 도굉의 나이 22세였다.

4)법랑(法朗)
필추(苾芻) 법랑의 범명(梵名)은 달마제바(達磨提婆, Dharmadeva)[당나라말로는 법천(法天)이라고 한다.]라 하며, 양주(襄州) 양양(襄陽:湖北省 襄陽縣) 사람인데, 영집사(靈集寺)에 거처하고 있었다. 속성(俗姓)은 안(安)씨로 예의를 지켜온 집안으로 대대로 관직(官職)을 이어왔다.
어려서 출가하여 수행을 흠모하여 힘써 닦다가 마침내 고향을 떠나 영남(嶺南) 땅으로 행각(行脚)하고 있었다. 이 때 의정이 번우(番禺)에 이르고 있었다가 자신이 일정을 법랑에게 전하였다. 법랑은 비록 배워서 깨친 경지는 깊지 않았지만 불법을 구하려는 마음은 참으로 깊었다. 그는 흔쾌히 의정 등을 따라 넓고 푸른 바다를 건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실리불서국에 입항하였다.
법랑은 이곳에서 수행을 쌓았으니,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인명론(因明論)』의 비밀한 원리를 배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사론(俱舍論)』의 깊은 종지(宗旨)에 대한 강의를 청취하였다.
그러다 한 삼태기의 흙이 쏟아져 9인(仞) 높이 올라간 학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법랑은 다시 일념으로 삼장(三藏)을 공부하고 율장(律藏) 5편(篇)을 모두 수득(修得)하였다.
그 후 수고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널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삼장을 베껴 썼으나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허기는 탁발(托鉢)한 음식으로만 달랬고, 오직 삼의(三衣)만 소유한 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맨발로 다니면서도 높은 위의를 준수하였다. 비록 아직은 승려들 가운데에서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걸출한 사람이 될 것을 염원하고 있었다.
무릇 수많은 승려가 한결같이 자신의 안온(安穩)만을 바라며 수행하였지만 법랑만은 오로지 중생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삼가해서 수행정진 하였다. 무엇 때문에 처음에 삼가해서 수행하여야 하는가? 이 생각을 오로지 해야만 올바른 이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원을 넓힐 수 있다면 미륵보살의 서원을 크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상의 정고 등 네 사람은 의정과 함께 배로 실리불서국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이곳에서 범어를 배워 점차 중국어로 이해하게 되었다.
법랑은 그후 가릉국(揀陵國:쟈바)으로 가서 그곳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지내다 병으로 죽었다.
회업은 실리불서국에서 거주한 뒤에 번우(番ヮ)에 돌아가지 않았다. 오직 정고와 도굉만이 함께 광동부(廣東府)로 돌아갔던 것이다. 각자는 모두 실리불서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을 이을 승려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고는 삼장도량(三藏道장)에서 율장(律藏)을 널리 펴고 있었는데, 그후 3년이 못되어 병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도굉은 홀로 영남(嶺南)에 있었는데, 그후 소식이 끊어졌다. 의정은 늘 도굉의 안부를 물었으나 편지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아아, 네 사람은 넓고 푸른 바다를 함께 건너 힘을 모으고 정성을 다하여 법의 횃불을 밝히려고 했던 것인데, 이들의 업(業)에 깊고 짧음이 있어 그들 각자를 삶과 죽음으로 달리 떨어지게 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한번 생각할 때마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과 탄식에 젖어들 뿐이다.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는 어렵고 나의 위급한 생명은 이지러지기 쉬운 것을 이제 알았으니, 여러 공덕을 쌓아서 우리 서로 구제(求濟)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 미륵부처님의 첫 번째 법회에서 함께 만나 번뇌에 더럽혀진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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