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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6 불교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상권

by Kay/케이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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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상권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상권
(大唐西域求法高僧傳)


의정(義淨) 지음


사문(沙門) 의정(義淨)이 서국(西國)에서 돌아와 남해(南海) 실리불서(室利佛逝)1)에서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2)과 『나란타사도(那爛陀寺圖)』를 짓다.

머리말

옛부터 신주(神州:중국) 땅에서 삶을 가볍게 여기고 불법(佛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을 살펴보면, 법현법사(法顯法師)3)는 처음으로 거친 길을 개척하였고, 현장(玄장)법사4)는 그 중간에 바른 길을 개척하였다.
그 사이에 어떤 이는 서쪽으로 자새(紫塞)5)를 넘어 홀로 떠나거나, 또 어떤 이는 남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 단신으로 떠났다. 모두 부처님의 성스런 자취를 생각하며 오체(五體)6)를 다하여 귀례(歸禮)하고, 돌아와서는 사은(四恩)7)에 보답하여 서로 품었던 소망을 이루려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불적지를 향해 난 길은 어려움이 많았고 보배로운 곳은 멀디 멀었으니, 싹을 돋우어 열매를 맺으려는 사람들은 열을 채우고도 넘쳤지만 정작 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열매를 맺기 어려울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거대한 사막과 큰 강에서 밝은 해가 토해내는 빛과 거대한 바다에서 일어나는 넓고 큰 파도와 하늘까지 닿을 세찬 격랑을 경유해야만 하였다. 홀로 철문(鐵門)8) 밖을 걸어 만 겹이 가로지른 산중에 몸을 던지고, 혹은 동주(銅柱)9) 앞에서 방황하다 천강(千江)을 건너 목숨을 바쳤다. [발남국(跋南國:지금의 캄보디아)에 천강(千江) 입구가 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을 버티는 일도 있었고, 여러 날 물조차도 마시지 못하였으니, 말 그대로 정신은 혼미해지고 시름과 피로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곳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수가 백의 반은 넘었지만, 머물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몇 명 안되었다. 서국(西國:인도)에 도착하였어도 떠돌아다니다 잠시나마 머물 대당(大唐)의 사찰이 없었으므로, 그 몸을 기탁할 곳 없어 허둥대고 정처없이 헤매고 다녀야만 했으니, 한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몸이 편안하지 못한데 어찌 도가 융성할 수 있으리오.
아! 참으로 그 분들의 아름다운 정성은 칭송되어야 할 것이다.
그 분들의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대략 듣고 본 바에 의거하여 행장(行狀)을 지었을 뿐이다. 여기에서의 차례는 다분히 천축(天竺)으로 간 연대의 멀고 가까움과 생사를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였다.

태주(太州)의 현조법사(玄照法師)
제주(齊州)의 도희(道希)법사
제주의 사편(師鞭)법사
신라(新羅)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법사
신라의 혜업(慧業)법사
신라의 현태(玄太)법사
신라의 현각(玄恪)법사
신라의 두[二] 법사
도화라(都貨羅)의 불타발마사(佛陀跋摩師)
병주(幷州)의 도방(道方)법사
병주의 도생(道生)법사
병주의 상민선사(常愍禪師)
상민(常愍)의 제자 한 사람
경사(京師)의 말저승하사(末底僧揀師)
경사의 현회(玄會)법사
질다발마사(質多跋摩師)
토번공주(吐蕃公主)의 유모(乳母) 아들 두 사람
융법사(隆法師)
익주(益州)의 명원(明遠)법사
익주의 의랑율사(義朗律師)와 그 아우
익주의 지안(智岸)법사
익주의 회녕(會寧)율사
교주(交州)의 운기(運期)법사
교주의 목차제바사(木叉提婆師)
교주의 규충(窺沖)법사
교주의 혜염(慧琰)법사
신주(信冑)법사
애주(愛州)의 지행(智行)법사
애주의 대승등(大乘燈)선사
강국(康國)10)의 승가발마사(僧加跋摩師)
고창(高昌)의 피안(彼岸)과 지안(智岸) 두 법사
낙양(洛陽)의 담윤(曇潤)법사
낙양의 의휘논사(義輝論師)
대당(大唐) 승려 세 사람
신라(新羅)의 혜륜(慧輪)법사
형주(荊州)의 도림(道琳)법사
형주의 담광(曇光)법사
또 한 사람의 대당(大唐) 승려
형주(荊州)의 혜명(慧命)선사
윤주(潤州)의 현규(玄逵)율사
진주(晋州)의 선행(善行)법사
양주(襄州)의 영운(靈運)법사
예주(澧州)의 승철(僧哲)선사와 그 제자
낙양(洛陽)의 지홍(智弘)율사
형주(荊州)의 무행(無行)선사
형주(荊州)의 법진(法振)선사
형주의 승오(乘悟)선사
양주(梁州)의 승여(乘如)율사
예주(澧州)의 대진(大津)법사

이상 모두 56인이다. 그 중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된 분들이 많다. 의정이 돌아올 때 천축에 무행(無行)스님ㆍ도림(道琳)스님ㆍ혜륜(慧輪)스님ㆍ승철(僧哲)스님ㆍ지홍(智弘)스님 등 다섯 분이 계셨던 것을 보았다. 헤아려 보면 수공(垂拱) 원년(685)에 무행선사(無行禪師)와 서국(西國)에서 헤어졌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1)현조법사(玄照法師)
사문(沙門) 현조법사는 태주(太州)의 선장(仙掌:현 陜西省 華陰縣)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반가사말저(般迦舍末底:Prak syamati)이며, [당나라말로는 조혜(照慧)라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부(大夫) 이상의 문관(文官) 벼슬을 이어 내려 왔던 집안이다. 총각 시절에 비녀[簪]를 뽑고 세속을 떠났으며, 성인이 되고서는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경사(京師:長安)를 찾아가서 경론(經論)을 듣게 되었고, 정관(貞觀) 연간(627~649)에는 대흥선사(大興善寺)의 현증(玄證)스님 거처에서 처음으로 범어(梵語)를 배웠다.
이 때 석장(錫杖)을 짚고 서쪽으로 가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수행하려는 생각을 품고, 금부(金府:지금의 蘭州)를 떠나 유사(流沙)11)를 지나고 철문(鐵門)을 거쳐 설령(雪嶺)에 올라갔다. 그리하여 향지(香池)12)에서 몸을 씻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총부(葱阜)13)에 올라가서 삼유(三有)14)를 제도할 것을 맹세하였다.
길은 속리(速利)를 거쳐 도화라(覩貨羅)15)를 지나 멀리 호(胡)나라 경계를 뚫고 토번국(吐蕃國:지금의 티베트)16)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문성공주(文成公主)17)의 전송을 받으며 북천축으로 가서점차 사란타국(闍蘭陀國)18)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멀고도 험한 길에서 도적에게 잡히게 되었다. 더 이상 여행할 계책도 막히고 호소할 곳조차 없게 되자 결국에는 신사(神寫)에 매달리니, 그의 간절한 마음이 성현에게 계합되어 꿈에 도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 보니 도적 무리들이 모두 자고 있어 가만히 빠져 나와 겨우 난을 면하였다.
사란타국에서 4년 간 머무르는 동안 그 곳 국왕으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 머물면서 공양을 받으며 경(經)ㆍ율(律)을 배우고 범문(梵文)을 익혀 마침내 조금은 통하게 되었다.
그 후 점차 남쪽으로 올라가 마하보리(莫河菩提)19)에 이르러 그 곳에서 다시 4년을 지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부처님을 뵙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남기신 자취를 보게 되었으며, 자씨(慈氏)가 마련한 진용(眞容)20)을 우러러보게 되어 정성을 기울이는 데 변함이 없었다. 이에 우러르고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진 나머지 『구사(俱舍)』 연구에 뜻을 두어 『대법(對法)』을 알게 되었으며,21) 율의(律義)를 맑게 지니고자 생각하게 되었고, 대ㆍ소승 두 교리에도 밝아졌다.
그 뒤에 나란타사(那蘭陀寺)22)로 가서 3년 간 머물며 승광(勝光)법사에게 나아가 『중론(中論)』23)ㆍ『백론(百論)』24) 등을 배우고, 다시 보사자대덕(寶師子大德)에게 나아가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25)를 배웠으니, 선정(禪定)이 넘쳐 그 끝까지 체험하게 되어 이미 그 대강(大綱)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가하(弶伽河:갠지스강) 북쪽으로 가서 국왕 점부(苫部)26)의 공양을 받고, 신자사(信者寺)27) 등에서 머물며 다시 3년을 보냈다.
뒤에 당나라 사신 왕현책(王玄策)28)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참된 덕망을 알리니 드디어 황제가 칙명을 내렸으므로, 왕현책은 다시 인도로 가서 현조법사를 찾아 당나라 서울로 오게 하였다.
니파라국(泥波羅國:지금의 네팔)을 경유하여 돌아왔는데, 국왕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전송하였다. 토번에서 다시 문성공주를 뵈었는데, 공주는 법사를 깊이 예우하고 당나라로 돌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서번(西蕃)을 거쳐 동하(東夏:동쪽 중국)에 이르렀다. 9월에 점부왕과 헤어져 이듬해 정월에 낙양(洛陽)에 도착하였으니, 다섯 달 동안 경유한 길은 만 리나 되었다. 이 때가 인덕(麟德) 연간(664~665)이었는데, 황제가 동쪽 낙양까지 행차하였으니 궁전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이에 드디어 황제가 칙령을 내려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29)까지 가서 장년바라문(長年婆羅門) 로가일다(盧迦溢多)30)를 찾아오게 하였다.
낙양에서는 이미 여러 대덕(大德)과 만나 불법의 기강(紀綱)을 대략 논하였으며, 경애사(敬愛寺)의 도율사(導律師)와 관법사(觀法師) 등은 『살바다부율섭(薩婆多部律攝)』31)의 번역을 청하였다.
이미 칙명으로 인도로 갈 것을 재촉받아, 본래의 소망도 이루지 못한 채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모두 서울에 남기고 거듭 유사(流沙)를 넘어 다시 적석(磧石)을 지나가게 되었다.
험한 잔도(棧道)의 측면을 반그림자를 끌고 비스듬히 통과해야 했으며, 동아줄로 만들어진 출렁이는 다리 아래를 온몸을 던져서 옆으로 기울며 건너야만 하였다.
토번의 도적들을 만나 목이 잘릴 뻔하다가 살아 남은 일도 있었고, 흉노(兇奴)의 강도들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적도 있었다.
계속 나아가다 북인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로가일다를 인도하여 오는 당나라 사신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로가일다는 다시 현조(玄照)법사와 사신 몇 사람에게 명하여서 인도 라다국(羅茶國)32)으로 가서 오래 살게 하는 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박갈라(縛渴羅)33)를 지나 납바비하라(納婆毘揀羅)[당나라말로는 신사(新寺)라고 한다.]를 지나는 길에 여래께서 몸을 씻으셨던 곳 및 여러 성스런 유적을 보았다. 차츰 다시 가필시국(迦畢試國)34)에 이르러 여래의 정골(頂骨)에 예배하고 꽃과 향을 갖추어 바치고, 그 인문(印文)을 거두어서 내생(來生)의 선악(善惡)을 살펴보았다.
다시 신도국(信度國)35)을 지나 바야흐로 라다국(羅茶國)에 도달하였다. 왕의 예우와 존경을 받으며 4년 동안 안거(安居)하였다. 남천축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가지 약을 구하여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법사는 금강좌(金剛座)36)에 도착한 뒤 다시 돌아서 나란타사에 이르렀는데, 그때의정(義淨)과 만나 평생에 뜻하던 소원을 다 풀고 내세에서는 함께 용화세계(龍華世界)37)에서 만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니파라로 가는 길은 토번국이 가로막아 지나갈 수 없었고, 가필시(迦畢試)로 가는 길은 다씨(多氏)가 침입하여 통과하기 어려웠다. 이에 결국 잠시 영취산(靈鷲山)에 머물기도 하고, 죽원정사(竹苑精舍)에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불법을 전하려는 뜻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몸이 맞춰주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옆처럼 되는 것을 어찌하리. 아아! 고행과 정성을 다하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려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생각은 하늘 높이 오르려 하였지만 중천(中天)에서 날개가 꺾여버렸으니 어이하리오. 중인도(中印度)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60여 세였다.[앞의 다씨(多氏)는 즉 대식국(大食國:사라센.
현재의 아라비아에 있던 나라)을 말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를 읊는다.

뛰어나고 씩씩한 뜻
세상에서 영특하고 빼어나니,
해지는 곳까지 두루 거쳐
몇 번이나 기련(菽連)38)을 거닐고.
상하(祥河)39)에 몸을 씻고
죽림정사(竹林精舍)에 머물렀으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마음에
간절히 깊이 생각하였던 것은
오로지 불법을 펴려는 소망뿐.
보리(菩提)의 한 삶으로 뜻을 맡겼으나
아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구나.
슬프도다, 이루지 못한 뜻.
양하(양河)에 뼈를 가라앉히고
팔수(八水)에 그 이름을 휘날리니,
장하도다, 목숨으로 바른 길 지키고
지혜로써 인간의 도리 다하였네.
[양하(양河)는 인도에 있고, 팔수(八水)는 중국에 속해 있다.]
2)도희(道希)법사
도희법사는 제주(齊州) 역성(歷城)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실리제바(室利提婆, Srideva)[당나라말로는 길상천(吉祥天)이다.]라 한다.
그는 예의를 지키며 사대부(士大夫) 벼슬을 이어온 집안 출신이다. 어려서 불교에 몸을 담아 일찍부터 불도를 지킬 것을 굳게 다짐했다.
이에 넓고 끝없는 유사(流沙)를 거쳐 중인도에서 성스런 유적을 다니며 그 덕화를 살펴보았으며, 구름 속 높이 솟은 험한 산들을 넘어 삶을 가벼이 여기고 불법을 위해 순교하였다. 그는 길을 나서 토번(吐蕃)에 이르렀으나 그 길이 위험하여 계율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결국 여행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일은 서쪽으로 갈때에도 다시 겪었다.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다가 드디어 마하보리(莫揀菩提:Mahabodhi)에 이르러 성스러운 유적을 우러러 참배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는 이미 나란타사에도 머물렀고, 또 구시국(俱尸國)에도 있었다.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에서는 국왕의 극진한 존경과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나란타사에서는 대승불교를 배웠으며, 수파반나(輸婆伴娜)[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 세워진 절 이름이다.]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율장(律藏)을 전공하였다. 다시 성명학(聲明學)을 익혀 자못 그 학문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마쳤다. 문장에도 정통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도 잘 썼으며, 대각사(大覺寺:마하보리)에 있을 때에는 당(唐)나라의 비(碑) 한 수(首)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올 때 가지고 왔던 당나라의 신구경론(新舊經論) 400여 권은 모두 나란타사에 있다. 하지만 의정이 인도에 있을 때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법사는 암마라발국에 머물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0여 살이었다. 뒤에 순례길에서 도희법사가 머물렀던 방을 보고, 그의 불행을 슬퍼하여 7언(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온갖 고생 피로도 잊고 홀로 떠났네.
사은(四恩)을 마음에 간직하여 널리 펼 것을 다짐하였지만 어찌하여 전등(傳燈)의 뜻 못다 이루고
갑자기 곤궁한 이 길을 만났는가.

3)사편(師鞭)법사
사편법사는 제주(齊州) 사람이다. 그는 밀주(密呪:禁呪)를 잘하였으며, 범어(梵語)에익숙하였다.
현조(玄照)법사와 함께 북천축에서 서인도로 향하였는데 암마라할파성(菴摩羅割跛城)에 이르러 국왕의 존경을 받으며 왕사(王寺)에 기거하였다. 그는 도희법사와 만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맘껏 토로하였다. 같이 한 여름을 기거하다 병이 나 죽으니 35살이었다.

4)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아리야발마(Āryavarma)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정관(貞觀) 연간(627~ 649)에 장안(長安)의 광협(廣脇)[왕성(王城)의 산 이름이다.]을 떠나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추구하며, 성스러운 유적을 몸소 순례하였다.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율(律)과 논(論)을 많이 익히고, 중경(衆經:대장경)을 간추려 베꼈다. 하지만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달프기 짝이 없다.
아리야발마스님은 동쪽 경계인 계귀(雞貴)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나란타사)에서 돌아가셨다. 즉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70여 세였다.[계귀(鷄貴)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 Kukuṭeśvara)이다. ‘구구라’는 닭[鷄]이고, ‘예설라’는 귀하다[貴]라는 뜻이니, 즉 고려국(高麗國)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나라에서는 닭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날개 털을 뽑아 장식한다고 한다. 나란타사에못[池]이 있는데, 이를 용천(龍泉)이라고 부른다. 인도에서는 고려를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라고 부른다.]

5)혜업(慧業)법사
혜업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관(貞觀) 연간에 서역으로 가서 보리사(菩提 寺:대각사)에 머물면서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타사에서 오랫동안 강(講)을 듣고 불서를 읽었다.
의정이 이 곳의 당나라 불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양론(梁論)』40) 하기(下記)에 “불치목(佛齒木)41) 밑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 적었다”라는 글을 보았다. 그래서 이 절의 스님을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 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베꼈던 범어 책은 모두 나란타사에 보존되어 있다.

6)현태(玄太)법사
현태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범어 이름은 살바신야제바(薩婆愼若提婆, Sarv-jindeva)[당나라말로는 일체지천(一切智天)이라고 한다.]이다.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토번(吐蕃:티베트) 길을 택해서 니파라(泥波羅:네팔)를 거쳐 중인도에 도착하였다. 보리수(菩堤樹)에 예배하고 경(經)과 논(論)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발걸음을 동쪽 땅(중국)으로 돌렸다.
토곡혼(土谷渾)에 이르러 도희(道希)법사를 만나게 되어 다시 서로 대각사(大覺寺)에 돌아왔다. 그 뒤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

7)현각(玄恪)법사
현각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현조(玄照)법사와 함께 정관(貞觀) 연간에 대각사에 이르렀다. 그 곳에 예경(禮敬)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나이는 겨우 40세를 넘었을 뿐이다.

8)신라의 또 다른 법사 두 사람
다시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을 알지 못한다. 장안(長安)에서 출발하여 멀리 남해(南海)42)로 갔었다.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43) 서쪽 파로사국(波魯師國)44)에 이르렀는데 모두 병에 걸려 죽었다.

9)불타달마(佛陀達摩)
불타달마(Budhadharma)는 도화라속리국(覩貨羅速利國) 사람이다. 체구가 크고 기력이 넘쳤으며, 소승불교(小乘佛敎)를 익혀 언제나 걸식하였다.
젊어서는 교역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기에 마침내 중국으로 오게 되어 익부(益 府:四川省 成都)에서 출가하였다. 성격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구주(九州) 땅을 밟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 뒤 마침내 서역을 경유하여 인도로 들어가 성스러운 유적을 두루 살폈다.
외정은 나란타사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 후 여정을 바꾸어 북천축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쯤 되었다.
이상은 10인이다.

10)도방(道方)법사
도방법사는 병주(幷州:山西省 太原市) 사람이다. 유사(流沙)와 적석(ψ石)을 지나 니파라국(泥波羅國:네팔)에 도착하였다. 대각사에 머물며 수년 간 책임자로 지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다시 니파라국으로 향했으며, 지금 그 나라에 있다. 법사는 계를받지 않았으며, 경전도 익히지 않았다. 나이가 노경(老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1)도생(道生)법사
도생법사는 병주 사람이다. 인도 이름으로는 전달라제바(旃達羅堤婆, Candradeva)[당나라말로는 월천(月天)이다.]라고 하였다. 정관(貞觀) 말년(649)에 토번 길을 따라 인도로 향하였다. 대각사에 도착하여 제저(制底)에 예배한 후, 나란타사에서 동자왕(童子王)으로부터 두터운 예경(禮敬)을 받았다.
다시 이 절에서 동쪽으로 12역(驛) 지점에 국왕의 절이 있었는데, 이 곳은 완전히 소승불교였다. 법사는 그 절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았으며, 소승의 삼장(三藏)을 배워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摩順正理論)』에 정통하였다.
법사는 중국에 범어 경전과 불상을 많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 후 니파라국에 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0세 쯤이었다.

12)상민선사(常愍禪師)와 그의 제자 한 사람
상민선사는 병주(幷州) 사람이다. 머리를 깎고 관직을 버린 뒤 승복으로 갈아 입고부터는 나태하지 않고 정근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염송(念誦)하였다. 언제나 큰 서원(誓願)을 세워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할 것을 기원하였으며, 정업(淨業)을 짓고 부처님 이름을 칭념(稱念)하였으니, 그 복의 터전을 닦는 것이 이미 넓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뒤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으로 가서도 오로지 염불만을 하였다. 깊은 정성에 영묘(靈妙)한 징조가 감득되어 드디어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揀般若波羅蜜多經)』을 사경(寫經)하여 만 권을 채우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리고 서쪽 인도로 가서 여래께서 수행하셨던 성스러운 유적에 예배하여 이 뛰어난 복덕으로 회향(廻向)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궁궐을 찾아가 글을 올려 간청하였다.
“여러 고을을 교화하여 『반야경』을 사경하겠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뜻을 세운다면 하늘도 반드시 그를 따라줄 것으로 믿어 마침내 황제 친필의 칙서(勅書)를 받아 양자강(楊子江) 남쪽으로 내려가 『반야경』을 사경하여 황제의 은택에 보답하였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마침내 바닷가에서 배에 올라 남쪽으로 출범(出帆)하였다. 그리하여 가릉국(揀陸國:자바 섬)45)으로 가서 그 곳에서 다시 배편으로 말라유국(末羅瑜國)46)으로 들어갔고, 이 나라에서 다시 중인도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탔던 상선(商船)이 화물을 너무나 많이 실었기에 닻줄을 풀어 배를 띄우기는 하였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결국 배는 반나절도 못 되어 그대로 가라앉게 되었다. 배가 가라앉으려 하자 상인들은 앞다투어 작은 배에 올라타려고 서로 난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찍부터 신심을 굳게 지녀온 그 배의주인이 소리 높여 상민선사를 불렀다.
“스님, 오셔서 배에 오르십시오.”
상민선사가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태우도록 하시오. 나는 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보리심(菩提心)에 순응하는 길이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면 이것이 보살의 행이 되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서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다. 그가 끊이지 않고 칭명염불 하는 가운데 배는 가라앉았으니, 어느덧 그의 몸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다하여 생을 마쳤다. 나이는 50여 세였다.
선사에게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슬피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역시 서방 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스승과 함께 죽었다. 그 때 살아 남은 사람이 자세히 이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일을 애도하며 글을 짓는다.

애달프도다, 위인(偉人)이 중생을 위해 몸을 떠나보냈구나.
그 밝음은 수경(水鏡)과 같고, 귀함은 화진(和珍)과 같았네.47)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고, 갈아도 닳아지지 않았다.
몸을 혜헌(慧■)48) 에 의탁하여 지혜를 길러 법해(法海)를 이루었네.
자국(自國)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업을 넓혔고,
타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인(因)을 지었네.
중생들 험난한 파도에 빠지려는 모습 보고
스스로 결연히 제 몸 던졌네.
중생을 언제나 측은히 여겼지만 그에게는 응해주는 이웃이 적었네.49)
덧없는 몸 거친 파도에 뿌려 입멸하였어도
청정한 서원 안양(安養)으로 나아가 정신이 노니네.
도에 어둡지 않거늘 어찌 덕이 스러지겠는가.
자비의 빛을 펼치니 눈부시게 빛나고
겁진(劫塵)을 다하도록 여전히 새롭네.

13)말저승하(末底僧揀)
말저승하(Matisinha)[당나라에서는 사자혜(師子慧)라고 한다.]는 경조(京兆:長安)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황보(皇甫)라 하나 본래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사편(師鞭)스님과 함께 여행하여 중인도에 이르러서는 신자사(信者寺)에 머물렀다. 범어를 약간 공부하였으나, 경과 논에는 상세하지 못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니파라국(泥波羅國:네팔)을 지나다 병으로 죽었으니, 나이는 40여 세였다.

14)현회(玄會)법사
현회법사는 경사(京師) 사람이다. 안장군(安將軍)50)의 자식이라고 한다.
북인도에서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카쉬미르)으로 들어갔는데,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왕의 코끼리를 타고 왕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날마다 용지산사(龍池山寺)51)를 향하여 공양하였다.
이 절은 5백 나한(羅漢)이 공양을 받았던 곳으로 존자(尊者) 아난타(阿難陀)의 실쇄(室灑)였던 말전지(末田地)가 용왕(龍王)을 교화했던 곳이다.[실쇄(室灑:Sishya)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구역(舊譯)에서 제자라 한 것은 잘못이다.]그는 또 가습미라 왕을 설득하여 대은사(大恩赦)를 행하게 하였다. 이 때 나라 안에는 사형수 천여 명이 있었는데, 왕에게 권하여 석방하게 했던 것이다.
수년 간 왕궁에 드나들었지만 그 후 실의(失意)하여 결국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각사에 이르러 보리수에 예배하고, 목진지(木眞池)52)를 둘러보았으며, 영취산(靈鷲山)에 올랐고, 존족령(尊足嶺)을 거닐었다.
그는 타고난 식견이 총명하여 많은 기예를 닦았다. 그리고 수학한 지 얼마 안되어 범어의 발음을 환히 알았다. 약간의 경전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와 살려고 마음먹었으나 니파라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나이는 겨우 30세를 넘겼을 때였다.[니파라국에는 독약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15)질다발마(質多跋摩)
또 중국 북도(北道) 여행 안내를 하던 사람[使人]과 함께 박갈라국(縛渴羅國)에 이르러 (북인도의) 신사(新寺)에서 소승불교의 승려에게 출가한 질다발마(Cittavarma)가 있다.
후에 그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려고 할 때 삼정육(三淨肉)53)을 먹지 않자, 그 스님이 물었다.
“여래께서 몸소 오정식(五正食)54)을 먹게 하였으니, 이를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데, 너는 어째서 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많은 대승 경전이 한결같이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익혀온 습성이어서 고칠 수 없습니다.”
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삼장(三藏)에 의거한 것으로 율장에 그 조문(條文)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네가 인용하는 문장은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견해를 갖는다면 나는 너의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제로 먹게 하였으니, 이에 얼굴을 가리고 울며 고기를 먹었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구족계를 받고는 더욱 범어를 수학하였다.
그 후 북로(北路)를 되짚어서 귀국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인도의 어느 승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16)토번공주(吐蕃公主) 유모(乳母)의 아들 두 사람
또 니파라국(泥波羅國)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토번공주의 유모 아들이다.
두 사람은 처음 함께 출가하였으나 얼마 후 한 사람은 환속하였고, 또 한 사람은 대왕사(大王寺)에 거주하였는데, 범어와 범서(梵書)를 모두 잘하였다. 형의 나이는 35세, 동생은 25세였다.

17)융(隆)법사
융법사는 어느 곳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북쪽 길[天山北路]를 따라 여행을 나섰는데, 북인도 길을 택해 중천축의 성지를 살펴보며 부처님의 덕화를 살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범본(梵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암송할 수 있게 되었으나 건다라국(健陀羅國:간다라)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북방의 승려가 의정에게 와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상은 20인이다.

18)명원(明遠)법사
명원법사는 익주(益州) 청성(靑城:四川省 灌縣西) 사람이다. 범어 이름은 진다제바(振多提婆, Cint deva)[당나라말로는 사천(思天)이라고 한다.]이다.
유년시절부터 불법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몸가짐은 우아하였으며, 학업은 우수하였다. 『중론(中論)』과 『백론(百論)』에 뛰어났으며, 『장자(莊子)』와 『주례(周禮)』도 연구하였다.
일찍이 칠택(七澤) 사이를 노닐었으며, 삼오(三吳)의 땅을 두루 다녔다.55) 그곳에서 거듭 경론을 배우고 다시 선(禪)을 익혔다. 이 때 여봉(鏑峰)에서 세상을 피하여 한 여름을 지냈다. 그러나 성스러운 가르침이 쇠퇴해 가는 것을 개탄하여 석장(錫杖)을 흔들며 남쪽으로 교지(交趾)56)까지 와서, 여기에서 배를 타고 큰 파도에 흔들리면서 가릉국(揀陵國:자바)에 도착하였다. 이어 사자국(師子國:스리랑카)에 이르러서 군왕(君王)으로부터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어느날 그는 몸을 숨겨 전각(殿閣) 안으로 몰래 들어가 부처님 치아(齒牙)를 훔쳐 내었다. 그 치아를 중국으로 가지고 가서 공양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치아를 손에 넣기는 하였으나 도리어 어떤 자에게 탈취 당하는 바람에 소망을 이루지도 못하고 오히려 능욕만을 당한 채 남인도로 향하였다. 사자국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대각사로 갔다고 하였으나, 중인도에서는 그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다. 아마 여행길에 죽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도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 뒤 사자국에서는 부처님 치아를 지키는 것이 한층 견고해졌다. 치아를 높은 누각위에 봉안하고 이중으로 열쇠를 걸어 그 자물쇠는 진흙으로 봉하여[泥封] 오관(五官)이 여기에 도장[印]을 찍었다. 만약 문이 하나만 열려도 그 소리가 성곽에 들리게 하였다.
매일 부처님 치아에 공양을 올려 꽃과 향이 절 안에 가득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하면 부처님 치아는 꽃 위에 나타나고, 혹은 이상한 빛을 발하였으니, (이 영험은)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는 “만약 이 사자국이 부처님 치아를 잃어버리면, 이 나라의 사람은 모두 나찰(羅刹)에게 잡아 먹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재앙을 방지하기 위하여 엄중히 지킨다는 것이다.
또 전하는 말로는 “장차 부처님 치아는 중국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는 성스러운 힘이 먼 곳까지 이른다는 것이며, 감응하는 곳이 있으면 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사람의 일이겠는가? 억지로 사리에 맞지 않는 말만 늘어 놓을 뿐이다.

19)의랑율사(義朗律師)와 그 아우 및 지안(志岸)법사
의랑율사는 익주(益州:四川省) 성도(成都) 사람이다. 율장을 공부하였으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도 통달하였다. 동주(同州:陜西省 大荔縣)의 승려 지안(智岸)과의현(義玄)이라는 동생과 함께 장안(長安)에서 출발하여 강한(江漢:胡北省ㆍ安徽省)57) 끝까지 이르렀다.
율사는 20세를 갓넘은 나이로 불법을 흠양하였는데, 자못 내전(內典:佛典)도 익혔고 문필에도 뛰어났다. 그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동생과 함께 여행하여 참배하려고 생각하였다. 형제가 둘 다 뛰어나 서로 도왔으니, 마치 척령(鶺鴒)58)이 서로 돕듯이 돈독히 생각하였다.
드디어 오뢰(烏雷)59)에 도착하여 함께 상선(商船)을 타고 거친 파도를 넘어서 부남(扶南:캄보디아)을 거쳐 랑가술국(郞迦戌國:파타니)60)에 정박하였다. 랑가술왕의 가장 지극한 예우를 받았지만, 지안은 이 곳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의랑은 지안과의 사별(死別)의 슬픔을 가슴에 안은 채 동생과 배를 타고 사자주(獅子州:스리랑카)로 향하였다. 그 곳에서 진귀한 서적을 구하고, 부처님 치아에 정례(頂禮)한 뒤 인도로 나아갔다.
들리는 말은 이상과 같다. 지금 두 형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자국에는 이미 없으며, 중인도에도 그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아마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을 달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랑의 나이 불과 40여 세에 지나지 않았다.

20)회녕(會寧)율사
회녕율사는 익주(益州:四川省) 성도(成都) 사람이다. 나면서부터 뜻을 세워 행동하였으니, 그의 뜻은 중생들을 널리 이익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젊어서부터 총명하여 불법에 몸을 던져 그 뛰어난 이치를 계주(髻珠)61) 와 같이 존경하며 신발을 벗어 던지듯이 세속의 영화를 버렸다.
경과 논을 널리 잘 알았으나, 특히 율장(律藏)에 정통하였으며, 뜻은 인도에 가서 불법을 펼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인덕(麟德) 연간(664~665)에 남해(南海)로 가려고 배를 타고 가릉주(揀陵州:쟈바)로 갔다. 여기에서 3년간 거주하면서 드디어 가릉주의 다문승(多聞僧) 약나발다라(若那跋陀羅, Juanabhadra)62)와 함께 『아급마경(阿笈摩經:아함경)』 안의 여래의 열반(涅槃)과 분신(焚身)의일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대승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는 다른 경전이다. 『대승열반경』은 의정이 인도에서 친히 보고 말하기를 “그 수가 대략 2만5천 게송이므로 번역하면 60여 권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그 전부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손에 넣지못하였고 단지 처음의 「대중문품(大衆問品)」 1협(夾) 4천여 게송만 구했다”고 하였다.
회녕은 이미 구한 『아급마본(阿笈摩本)』을 번역한 후 소년 승려 운기(運期)에게 자신이 지은 상표문(上表文)과 번역한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운기는 교부(交府)에 이르러 파발마(擺撥馬)를 장안으로 급히 보내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이것을 온 중국에 유포하기를 바란다는 상표문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운기는 장안에서 교지(交趾)로 돌아와서 황제로부터 소견(小絹:본견) 수백 필을 받았다는 것을 그 곳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고는 다시 가릉주로 가서 지현(智賢)[약나발다라(若那跋達羅)이다.]에게 알렸고, 회녕과 다시 만났다.
그 후 회녕은 인도로 갔는데, 그의 소재를 알고자 하여 풍문으로라도 늘 살펴보았지만, 인도에서의 그의 종적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상의 경위로 보아 그는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이는 35세 가량 되었을 것이다.
슬퍼하며 읊는다.

아! 회녕이여,법을 구하려고 홀로 떠나, 비로소 두 권을 번역하여
온 나라에 유포하려 하였네.
사자국으로 향하려 하였으며, 홀로 잠시 화성에 머물렀도다.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의 도는 더욱 또렷하고
세월은 흘렀어도 이름을 남겼구나.
보살의 먼저 뜻 펴고자
함께 후념(後念)63) 하여 명성을 날렸네.

21)운기(運期)법사
운기스님은 교주(交州:베트남의 河內西) 사람이다. 담윤(曇潤)과 함께 불문(佛門)에 들어가 지현(智賢)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10여 년 동안 남해(南海)를 왕래하였으며, 곤륜음(崑崙音)64)을 잘 하였으며, 범어도 자못 알았다. 그러나 훗날 환속하여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수마트라)에 살게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일찍부터 넓은 바다를 오고 가며 경전을 중국에 전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포된 것은 이 사람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30세쯤 되었다.

22)목차제바(木叉提婆)
목차제바(Moksadeva)[당나라말로는 해탈천(解脫天)이라고 부른다.]는 교주(交州) 사람이다. 그의 본명(本名)은 분명하지 않다.
배를 타고 남명(南溟:남해)으로 가서 여러 나라를 거쳐 대각사에 이르러 성스러운 유적에 두루 순례하고, 교주(交州)에서 죽었다. 나이는 24~5세쯤이었다.

23)규충(窺沖)법사
규충법사는 교주(交州) 사람이며, 명원(明遠)의 제자이다. 범명(梵名)은 질차라제바(質咀羅提婆, Citradeva)이다.
명원과 같이 배를 타고 남해(南海)로 가서 사자주(師子州)에 이르렀으며, 서인도에 가서 현조(玄照)스님을 만나 함께 중인도로 나아갔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범어 경전을 잘 암송하여 어떤 곳에 이르러서도 언제나 경전을 소리내어 외웠다. 보리수에 정성스레 예를 올린 뒤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렀는데, 그 때 병을 얻게 되어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죽었다.
나이는 30세쯤이었다.

24)혜염(慧琰)법사
혜염법사는 교주(交州) 사람으로 행공(行公:智行法師)의 제자이다. 스승을 따라서 승가라국(僧揀羅國:스리랑카)에 가서 그 나라에 머물렀으나 그의 생사는 분명하지 않다.

25)신주(信冑)법사
신주법사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범명(梵名)은 설리타발마(設唎陀跋摩, radvayma)[당나라말로는 신주(信冑)라 한다.]이다.
신주는 천산북로(天山北路)를 통하여 인도로 들어가 두루 국왕을 예알(禮謁)하고 신자사(信者寺)에 머물렀다. 그 절 상층에 전각(塼閣)을 하나 짓고 최상의 와구(臥具)를 마련하여 오래도록 물려줄 공양처로 삼았다.
훗날 병을 얻은 지 며칠되지 않아 명(命)을 다할 즈음 갑자기 밤중에 “어떤 보살이 나타나 손을 내밀면서 나를 영접한다”고 말하더니,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크게 호흡하고 죽었다. 나이 35세였다.
이상 30인이다.

26) 지행(智行)법사
지행법사는 애주(愛州:베트남 淸華) 사람이다. 범명은 반야제바(般若提婆, Pr j adeva)[당나라말로는 혜천(慧天)이라고 한다.]이다.
배로 남해로 가서 서천축(스리랑카)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두루 예배하고 강가하(4dk1伽河:갠지스강) 북쪽으로 가서 신자사(信者寺)에서 살다가 죽었다.
나이는 50여 세였다.

27)대승등선사(大乘燈禪師)
대승등선사는 애주(愛州) 사람으로 범명(梵名)은 마하야나발지이파(莫揀夜那鉢地已波, Mahāyānadipa)[당나라말로는 대승등(大乘燈)이라 부른다.]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배를 타고 두화라발저국(杜和羅鉢底國)65)으로 가서 비로소 출가하였다. 그 뒤 당나라 사신 담서(郯緖)를 따라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대자은사(大慈恩寺)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장)의 거처에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다. 장안에서 수년 간 있으면서 자못 불경을 읽었으나, 성스러운 유적에 예배하려는 생각으로 마음은 멀리 인도에 가 있었다.
그의 몸은 충서(忠恕)로 가득하였고, 성품은 바르고 굳었으며, 지계(持戒)를 높이 받들고 선정(禪定)으로 생각한 것과 화합하였다.
대승등선사는 생각하였다.
‘삼계(三界:有)에 빠진 자는 연(緣)을 빌리되 그 연이 그릇되면 삼계에 빠지고,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연의 도움을 받으나 그 연이 바르면 생사를 떠난다.’ 이에 왕성(王城:장안)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가서 팔난(八難)을 극복하고 사륜(四輪)을 구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드디어 불상을 품에 지니고 경과 논을 휴대하여 남명(南溟:남해)을 건너 사자국(師子國)에 가서 모든 영험을 갖춘 부처님 치아를 뵙고 예배하였다. 남인도를 지나 다시 동천축에 이르러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탐라聖티)으로 갔다. 하지만 배가 강구(江口)에 들어가자 도적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겨우 몸만 살아 남았다.
그는 이 나라에서 12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범어를 아주 잘하게 되었으며, 인연소생(因緣所生)의 가르침에 관한 경전 등을 암송하며 선행(善行)을 닦았다.
그러다 대상(隊商)의 무리를 만나 의정과 함께 중인도로 갔다. 먼저 나란타(那爛陀寺)에 갔다가 다음에 붓다가야의 금강좌(金剛座)에 예배하고 방향을 바꾸어 폐사리(薛舍離:베살리)를 거쳐 뒤에 구시국(俱尸國:구시나가라)에 이르러 이 곳에서 무행선사(無行禪師)와 같이 지냈다.
대승등선사는 언제나 한탄하여 말하였다.
“나의 본래의 뜻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이었는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어찌 마음먹을 수 있으랴. 어느 사이엔가 내 몸은 늙어 버렸으니, 이번 생에는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내생(來生)에는 반드시 이 뜻을 이루리라.” 대승등선사는 언제나 도사다천(都史多天: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해 그 곳에 계시는 미륵보살(彌勒菩薩:慈氏) 뵙기를 기원하며 매일 용화수(龍華樹) 한두 가지를 그려서 마음 속의 지성(至誠)을 나타냈다.
대승등선사는 불도 수행을 계속하고 있던 중 도희법사(道希法師)가 살고 있던 옛 방을 지나갔다. 그런데 당시 그는 이미 죽어 사람은 없고, 중국어로 번역된 경전과 범어로 된 불경꾸러미만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본 선사는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예날 장안에서는 같은 법석(法席)에서 노닐었건만, 지금은 그의 빈경연(經筵)만 볼 뿐이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를 읊었다.

아, 죽음의 왕은 세력이 더욱 강하니
전등(傳燈)의 선비가
어느새 가고 없구나.
중국에서 품었던 소망은 이루지 못하였고
부처님의 나라에서 그 혼백이 선양하네.
슬픔을 못 이겨 눈물 흘리고
흰 옷 애통하며 마음 상하네.

선사는 구시성(俱尸城) 반열반사(般涅槃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그 때 나이 60여 세였다.

28)승가발마(僧伽跋摩)
승가발마(Saṁghavarma)는 강국(康國:사마르칸트) 사람이다.
젊어서 유사(流沙)를 넘어 장안(長安)으로 가서 학업을 닦았다. 평소 신심이 두터웠으며, 계행이 맑고 엄격하였다. 보시하고 수행하여 자비가 마음에 가득하였다.
현경(顯慶) 연간(656~661)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사인(使人)과 함께 인도로 가서 부처님의 유적에 예배하고, 대각사(大覺寺)에 도착하였다.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에서 크게 추천(追薦:공양) 의식(儀式)을 설(設)하였는데, 7일간 연등(燃燈)을 계속 밝히며 대법회를 봉헌하였다. 또 보리원(菩提院:대각사) 안의 무우수(無憂樹)아래에 불상과 관세음보살상을 새겨서 성대하게 경찬(慶讚)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희귀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66)
뒤에 당나라로 돌아왔다. 승가발마는 다시 칙명을 받들어 교지(交趾)에 가서 약을 구해오게 되었다. 그 무렵 교주(交州) 지방에는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던 때였다. 그는 매일 음식을 절약하여 홀로 사는 빈궁자들을 구제하였는데, 가여워하는 마음에 언제나 눈물을 흘렸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상제보살(常啼菩薩)67)이라 하였다.
그러다 가벼운 질병에 걸렸는데 그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때 나이 60여 세였다.

29)피안(彼岸)법사와 지안(智岸)법사
피안법사와 지안법사는 둘 다 고창(高昌:新疆省 土魯蕃) 사람이다.
젊어서 장안에서 자랐으며, 법등(法燈)을 전하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정법(正法)에 힘쓰다가 마침내 중천축의 부처님 유적을 순례하면서 그 덕화를 살피고자 하였다.
사인(使人) 왕현곽(王玄廓)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으나, 바다에서 질병에 걸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가지고 갔던 중국어 번역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및 그밖의 경과 논은 모두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수마트라)에 남겼다.

30)담윤(曇潤)법사
담윤법사는 낙양(洛陽:河南省 洛陽) 사람이다.
그는 주술에 뛰어났으며, 불교의 이치를 배우고 율장을 탐구하고 의술을 습득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매우 주도(周到)하였다.
담윤은 양자강(揚子江)가로 갔다가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어 점차 남쪽으로 나아가 교지(交趾)에 이르렀다. 수년 간 이 곳에 머물며, 승려든 속인이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배를 타고 남쪽으로 올라가 서인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가릉국(揀陵國:자바) 북쪽의 발분국(渤盆國:보루네오)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나이는 30세였다.

31) 의휘논사(義輝論師)
의휘논사는 낙양(陽陽) 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으며, 이해가 빠르고 생각이 깊었던 그는 학문을 두루 닦고자 마음먹고 진실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섭대승론(攝大乘論)』과 『구사론(俱舍論)』 등을 듣고,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 논의 뜻에 같고 다름이 있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에 범본(梵本)을 읽고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접하려는 생각을 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렵지 않게 중천축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싹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가을이 먼저 와서 그 장대한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랑가술국(郞迦戌國:파타니)에 이르러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0여 세였다.

32)대당(大唐)의 세 승려
그리고 또 대당의 세 승려가 있었는데, 그들은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따라 길을 나서서 오장나국(烏長那國)68)에 이르렀다. 전해 듣기로는 불정골처(佛頂骨處)를 예배하였다 한다. 지금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장나국 승려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이상 40명이다.

33)혜륜(慧輪)법사
혜륜법사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반야발마(般若跋摩, Pra- jnāvarma)이다.[당나라말로는 혜갑(慧甲)이라고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출가하면서부터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할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민월(閩越:福建城) 땅에 상륙하여 걸어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 후 칙명을 받고 현조법사(玄照法師)의 시자(侍者)가 되어 그를 따라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에 가서는 두루 성스러운 유적에 참배하고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의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을 살았다.
근래는 동쪽으로 가서 북방의 도화라국(覩貨羅國) 승려의 절에 머물고 있다. 이 절은 원래 도화라국 사람들이 자국(自國)의 승려들을 위하여 세운 절이다. 이 절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자산이 풍족하여 공양하거나 음식을 차리는 데 더할 나위없이 풍요로웠다. 절 이름은 건타라산다(健陀羅山茶)였고, 혜륜은 이 절에 거주하면서 범어를 잘익혀 『구사론(俱舍論)』을 깊이 배웠다. 의정이 그 절을 찾았을 때에도 그 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북방의 승려로서 이 절에 머무는 사람은 모두 주인 대접을 받았다.

여러 나라의 사찰
중인도 대각사(大覺寺) 서쪽에 가필시국(迦畢試國)의 사찰이 있다. 이 절 역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많은 고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소승불교를 수학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승려들이 찾아오면 또한 이 절에서 머물렀다. 절 이름은 구나절리다(窶拏折里多, Gunacarita)[당나라말로는 덕행(德行)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대각사에서 동북쪽으로 두 역(驛) 거리에 굴록가(屈錄迦)69)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남인도의 굴록가국 왕이 예전에 지은 절이다. 절은 비록 가난하지만 계행(戒行)은 맑고 엄격하게 지켰다. 근래에는 일군왕(日軍王)70)이 옛 절 옆에 또 하나의 절을 지었는데, 이제야 새로이 완성되었다. 남인도에서 승려들이 오면 대부분 이 절에서 머물렀다.
이와 같이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는 승려들을 위하여 저마다 절들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법을 본국에 유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찾아오는 승려들만은 머물 절이 한 곳도 없어 인도에 왕래하던 승려들은 갖은 고생뿐이었다.
나란타사에서 동쪽으로 40역(驛)쯤 떨어진 곳으로 강가하(弶伽河:갠지스강)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밀률가실타발나사(蜜栗伽悉他鉢娜寺, Mrgasthāvana)[당나라말로는 녹원사(鹿園寺)라고 한다.]에 이른다. 이 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옛 절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단지 벽돌[塼]로 된 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은 지나사(支那寺)라 하는데,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옛날에 실리급다대왕(室利?多大王, Srigupta)71)이 지나국(支那國) 승려들을 위하여 세웠던 절이라 한다.[지나(支那)는 즉 중국의 광주(廣州:지금의 광동(廣東)이다. 마하지나(莫揀支那)는 즉 중국의 경사(京師:서울)이다. 또 제바불저라(提婆弗咀羅:Devaputra)라고도 하는데 당(唐)나라 말로 천자(天子)라고 한다.]
당시에 당나라 승려 20명쯤 있었다. 그들은 촉천(蜀川)에서 장가(牂★:牂牁, 貴州省夜郞)를 거쳐서[촉천(蜀川)은 이 절에서 500여 역(驛) 거리에 있다.] 마하보리(莫揀菩提:대각사)에 가서 예배하였다. 왕이 이 광경을 보고 깊이 공경하게 되어 드디어 이 땅을 희사하여 승려들이 머물러 쉴 수 있게 하고, 대촌(大村) 24곳을 봉(封)으로 주었다.
그 뒤 당나라 승려들이 죽고 난 후 촌들을 거두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겼다.
현재는 세 곳의 촌이 남아 있는데, 녹원사(鹿園寺) 소유로 되어 있다. 지나사가 세워진 햇수를 헤아려 본다면 500여 년은 된 것 같다. 오늘날 이 지역은 동인도 왕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 왕의 이름은 제바발마(提婆跋摩, Devavarman)라고 하는데, 언제나 말하기를 “만약 대당(大唐) 천자(天子)의 땅에서 몇 사람의 승려라도 이 곳을 찾아온다면, 내가 다시 이 절을 일으켜 그 촌봉(村封)을 되돌려 주어 중단되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비록 까치의 집이 다른 새의 집으로 바뀐다72) 할지라도 복을 누릴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진실로 제도하고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을 품은 승려라면, 그 뜻을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불법이 널리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니 실로 소홀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금강좌(金剛座) 북쪽에 있는 대각사(大覺寺)는 승가라국(僧揀羅國:스리랑카) 왕이 지은 절이다. 사자주(師子洲:스리랑카)의 승려들은 옛부터 이 곳에 거주하였다.
대각사의 동북쪽으로 7역(驛) 거리를 가면 나란타사(那?陀寺)에 이르게 된다. 이 절은 옛 (굽타 왕조의) 왕이었던 실리삭갈라질저(室利鑠羯羅昳底, Srisa-kraditya)73)가 북천축의 비구(比丘) 갈라사반사(曷羅社槃社, Grantha-vatsa)74)를 위하여 세웠던 것이다.
이 절은 처음에는 그 터가 겨우 사방이 도(堵)75)에 불과했으나, 그 뒤 왕의 자손들이 이어서 절을 확장하였으며, 마침내 절의 규모는굉장히 커져서 인도 전역에서도 이보다 큰 절은 없었다. 그 규모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서 단지 그 구역만을 대략 기술하고자 한다.
절의 형태는 직사각형이며, 지붕은 성(城)76)과 같이 네 모서리의 처마[簷]가 직선으로 되었으며, 건물 둘레는 긴 회랑(回廊)으로 이어져 있다. 방들은 모두 벽돌로 되었으며, 거듭 겹쳐 3층으로 올렸고, 각 층의 높이는 1장(장) 조금 더 되었다. 대들보[樑] 위에 판자를 가로로 깔았으며, 서까래[椽]를 쓰지 않고 벽돌을 평행으로 늘어 놓아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절은 모두 일직선으로 되어 마음대로 돌아 자기 방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승방의 뒷벽은 바깥으로 면하고 있고 (정원에는) 벽돌을 쌓아올려 높이가 서너 장(장)이나 되었는데, 그 위에 등신대(等身大)의 사람 머리를 만들어 얹었다.
승방은 (외벽의 처마가 짧아서) 햇빛이 바로 들어온다. 각 방의 넓이는 사방 1장(장)이다. 방의 뒷면은 창이 설치되었으며, 그 창문은 처마와 접하고 있다. 방의 입구는 제법 높으며, 열린 채로의 문이 달려 출입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모든 방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발[■]을 걸지 못하게 하였다.
방 밖에 나가서 보면 사면에서 서로가 모두 살필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어찌 사사로운 행동이 허용되겠는가? 한쪽 모서리에 가교[閣]를 놓아서 절 위를 오고 갈 수 있게 하였고, 네 모퉁이에는 각기 벽돌로 된 당(堂)이 있는데, 이 곳에는 장로(長老) 대덕(大德) 스님이 거주하고 있다.
절 (입구의) 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각은 하늘을 찌를듯이 걸려 있고, 기묘한 형태를 새겨 조각 솜씨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 문은 그대로 방과 서로 이어져 있으며, 원래부터 따로 만들지 않았다. 방 입구에서 2보(步)쯤 앞으로 나아가면 가지런히 네 기둥이 있다. 문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장식된 도리[架]는 매우 견고하다. 식사 때가 되어 이 문을 나갈 때면 언제나 이중으로 자물쇠를 건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사사로운 행동을 막기 위해서이다.
절 안의 면적은 사방 30보(步) 정도이며, 벽돌로 포장되어 있다. 좁은 곳도 17보 혹은 5보는 된다. 대체로 지붕 위나 처마 앞이나 방 안의 바닥은 모두 대추 크기의 벽돌 조각과 점토(粘土)를 혼합하여 깔고, 절구 공이[杵]로 두들겨서 전면을 평평하게다진다. 그 위에 석회(石灰)에 삼[麻] 껍질과 기름 및 삼 찌꺼기와 삶은 껍질을 섞어 며칠 동안 물에 적셔 두었다가 이것을 깔아 놓은 벽돌 위에 바르고 푸른 풀로 덮는다. 수삼일이 지나서 이것이 마르려고 하는 것을 보아 다시 활석(滑石)으로 간 다음 말끔히 씻어낸다. 그리고 붉은 흙의 즙이나 붉은 물감을 바르고 그 뒤에 기름을 입히면 거울같이 맑고 선명하게 된다. 이 절의 당전(堂殿)과 계단은 전부 이와 같이 되어 있다. 한번 이렇게 만들어진 후 사람들이 마구 밟고 지나다녔지만 10~20년이 경과하여도 부서지지 않았고, 석회의 수분(水分)이 없어지거나 (표면이) 곧 벗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만든 절이 8개소 있으며, 어느 것이든 바닥 위가 평평하고 규모는 서로 비슷하다.
절의 동면(東面)에는 1~3개소의 방이 있는데, 불타의 존상(尊像)이 모셔져 있다. 혹은 이 면(面)보다 다소 앞으로 내서 별도로 대관(臺觀)을 마련하여 불전(佛殿)으로 삼고 있다.
절의 서면(西面) 대원(大院) 밖에는 대솔도파(大窣堵波:Stupa)[옛날에 탑(塔)이라고 한 것은 잘못 줄인 말이다.] 및 제저(制底)77)[옛날에 지제(支提)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가 줄지어 있는데, 그 수는 100을 넘는다. 성스러운 유적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그것을 일일이 기술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금과 보배로 빛나게 장식한 것은 참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다.
절 안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규칙과 출납(出納) 일은 『중방록(中方錄)』 및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자세히 기술하였다.78)
절 안에서는 제일 장로(長老)인 상좌승(上座僧)이 존주(尊主)가 되는데, 그 덕행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모든 문의 자물쇠를 매일 밤 잠그며, 열쇠는 그 상좌승에게 건네 준다. 다시 따로 사주(寺主)나 유나(維那)는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절을 지은 사람은 사주(寺主)라 이름하였으며, 범어로는 비하라사미(毘揀羅莎弭, Vihārasvāmin)라고 한다.
일직(日直)의 당번(當番)이 되어 절 문을 지키는 사람이나 승려들을 화합하기 위해 일을 보고하는 사람을 비하라파라(毘揀羅波羅, Vihārapāla)라 이름하였다.[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호사(護寺)라 한다.]
또 건치(健稚)를 쳐서 울리고, 식사를 감독하는 사람을 갈마타나(羯磨陀那:Karmadāna)라 이름하였는데, 중국어로 번역하면 수사(授事)라 하며, 이를 유나(維那)라 한 것은 간략하게 줄인 말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모든 승려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사건을 규명하게 되는데, 이 때 호사(護寺)에게 각 승려를 차례로 돌게 하여 자백하게 한다.
자백한 승려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합장하고서 그 일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회초리로 쳐서 자백을 받는 일은 없다. 만약 용서하지 않는 승려가 있으면 이치로 그를 타이르며 강제로 압력을 가하여 설복하지는 않는다.
창고를 지키거나 장원(莊園)을 담당한 무리들 몇 사람이 일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책임자를 보내 합장하여 자백하도록 한다. 만약 다른 사람과 함께 창고의 물품을 사용하였다면, 다만 주모자 한 사람만을 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백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써버렸으면, 아무리 적은 좁쌀 반 되[半升]였을지라도 즉시 모두 배척을 받고 쫓겨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세도를 부려 절의 물품을 혼자서만 사용하거나 기강과 직무를 독선적으로 처리하고도 대중에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을 구라발저(俱羅鉢底, Kulapati)79) 라고 하는데, [중국말로 번역하여 가주(家主)라고 한다.] 이는 곧 불법의 큰 병[■]으로 사람과 신(神)이 모두 미워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절에 도움이 되었던 자라 할지라도 끝내는 죄를 짓는 것이 더욱 깊어질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이와 같은 죄는 범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인도에는 외도(外道)들이 예전에는 96부(部)가 있었으나, 지금은 단지 10여 부에 불과하다. 만약 재회(齋會)가 있어 모이게 되면 각자가 스스로 한 곳에 모여서 모두 승니(僧尼)와 앞뒤를 다투는 일이 없다. 이미 그 믿는 법의 교리가 다르면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각자의 종지(宗旨)를 배울 뿐이며, 같이 앉아서 의견 교류는 하지 않는다.
나란타사의 규칙은 극히 엄격했다. 보름마다 전사(典事)ㆍ좌사(佐史)80)로 하여금 승방을 돌아다니며 규칙을 읽게 하였다.
여러 승려들의 이름은 왕적(王籍)에서 관여하지 않는다.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면 승려들 스스로 벌을 준다. 이러한 까닭에 승려들은 모두 서로 존경하고 어려워하며, 그 절에서 수용하는 물자가 모자라서 핍박당하더라도 승려들의 마음 씀씀이는 더욱 여유롭다.
회상해 보면 장안(長安)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린 기원정사(■園精舍)의 모양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듣고 본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간략하게 그 개요를 적어 보았다.
또 인도에서는 이와 같은 큰 절에는 국왕이 모두 다 물시계[漏水]를 설치하게 하였기 때문에 밤과 낮의 시간과 계절을 헤아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율장에 의하면 밤을 셋으로 나누어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는 좌선(座禪)과 송경(誦經)을 하게 하였고, 그 중간 시간에는 마음대로 쉬게 하였다. 이 물시계의 이용 방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기술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금 절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절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 부디 눈으로 보아서 막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만약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위의 모양에 의해 절을 만든다면 인도의 왕사성(王舍城)이 중국의 이치로 이루어져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절의 모습을 그려둔다.]

온갖 아름다움을 늘여 놓았어도
빼어난 인재는 이미 옛사람이 되었네.
생사의 갈림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상심하지 않으리.[절의 모습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실리나란타마하비하라(室利那爛陀莫揀毘揀羅)’의 모습이다. 중국말로 번역하면 길상신룡(吉祥神龍)의 대주처(大住處)라 한다.
인도에 있어서 대개 국왕 및 고관(高官)들은 대사찰의 이름을 부를 때는 모두 먼저 실리(室利)라는 말을 붙이는데, 그 뜻은 길상(吉祥)ㆍ존귀(尊貴)라는 말이다. 나란타(那爛陀)는 용(龍)의 이름인데, 이 부근에 나가란타(那伽?陀)라는 용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비하라(毘揀羅)는 머무는 곳[住處]이라는 뜻인데, 절[寺]이라고 하면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이 절 가운데 한 절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다른 일곱 절을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절앞의 길은 평탄하고 곧아서 통행인은 이 곳을 왕래했는데, 절의 전체를 보려면 남쪽에서 보아야 한다. 서쪽 문을 나와야만 비로소 절 전체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의 남쪽 두둑 길로 10보(步)쯤 되는 곳에 높이가 100척(尺) 가량 되는 솔도파(窣堵波)가 있다. 이 곳은 세존께서 그 옛날 여름 세 달 동안 안거(安居)했던 곳으로, 범명(梵名)은 모라건타구지(慕攞健陀俱胝, Mūlagandhakuti)라고 하며, 당나라 말로 번역하여 근본향전(根本香殿)이라고 한다.
문의 북쪽 두덕 길로 50보쯤 되는 곳에 또 대솔도파가 있는데, 남쪽의 것이 이것보다 높다. 이 탑은 굽타왕조의 유일왕(幼日王)이 만든 것이다. 모두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그 장식은 정교하고, 기단부의 금상(金■)과 보지(寶地)는 좀처럼 보기 드문 공양법이다. 그 가운데에는 여래의 전법륜상(轉法輪像)을 봉안하고 있다.
이 솔도파 서남쪽에는 높이 1장(장) 남짓의 작은 제저(制底)가 있다. 이 곳은 한 바라문(婆羅門)이 참새를 잡아서 불타께 청문(請問)했던 곳으로 당나라에서 말하는 작리부도(雀離浮圖)가 바로 이것이다.
근본향전(根本香殿) 서쪽에는 불치목(佛齒木)이 있는데, 이 나무는 버드나무[楊柳]가아니다.
그 다음 서쪽 두덕에는 계단(戒壇)81)이 있다. 이것은 사방이 당(唐)의 대척(大尺)으로 1장(장) 남짓한 평지 위에 세워졌고, 그 주위에는 높이 2척(尺)쯤 되는 벽돌로 단(壇)을 둘러 쌓았으며, 단 안쪽에는 높이 5촌(寸) 가량 되는 좌기(坐基)가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작은 제저(制底)가 있다.
계단의 동쪽 근본향전의 모퉁이에 부처님께서 경행(經行)82) 하시던 터가 있다. 벽돌을 포개어 둘러 쌓았으며, 경행하셨던 길의 폭은 2주(■) 가량 되고 길이는 14~15주 되며, 벽돌로 된 담장의 높이는 2주 남짓 된다. 그 위에는 석회(石灰)를 버무려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만들었으며, 높이가 2촌쯤 되고 너비가 1척 가량 되는 14~15개의 부처님 발자국이 드러나 있다.
이 절에서 남쪽으로 보면 왕사성(王舍城)이 있는데 겨우 30리 떨어져 있으며, 영취산(靈鷲山)과 죽림정사(竹林精舍)는 모두 그 성 옆에 있다. 서남쪽은 대각사를 향하고, 정남쪽으로는 존족산(尊足山)이 있는데 모두 7역(驛) 거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벽사리(■舍里:바이샬리)를 향하고 있는데 25역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20여 역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녹야원(鹿野苑)이 바라보이고, 동쪽으로는 60~70역쯤에 위치한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을 향하고 있다. 이 곳은 바로 항구로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나란타사 안에는 3,500명의 승려들이 있었으며, 절에 속한 마을과 장원이 201개소 있었다. 모두 역대의 국왕이 그 인호(人戶)를 바쳐 오래도록 공양에 충당하였던 것이다.[역(驛)이란 곧 1유선나(踰繕那) 거리에 해당한다.]

천축의 나란타사는
그 땅이 하늘 땅과 맞붙어
말타고 달려도 길은 멀기만 하고
길에는 오는 사람 끊겼구나.
지금에 전하는 이야기들
올바른 것 찾아보기 힘드네.
명장(名匠) 청하여 그 모형 조성하기를
치수 어긋나지 않게 만들어
옛 그대로 완성했다면
너무나 비슷해서 보는 이 새삼 놀라고
보는 사람 깊이 생각에 잠기어
부처가 여기에 계시는 듯 정신 맑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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