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4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10권

by Kay/케이 2023. 6. 2.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10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10. 현경 3년 1월 거가를 따라 낙양에서 서경으로 돌아와 서부터 인덕(麟德) 원년 2월 옥화궁(玉華宮)에서 사 화(捨化)하기까지

현경 3년(658) 1월에 천자는 동도(東都)에서 서경(西京)으로 돌아왔는데, 법사도 역시 따라왔다. 가을 7월에 다시 조칙이 있어서 법사는 서명사(西明寺)로 옮겨갔다.
이 절은 현경 원년(655) 가을 8월 무자(戊子) 19일에 건립된 것인데, 앞서 이런 칙명이 있었다.
“연강방(延康坊)의 한왕(漢王)의 옛집에 황태자를 위해 관사(觀寺)1)를 각각 하나씩을 세워라.”
그리고 법사에게 명하여 그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법사가 보고 돌아와서 상주하였다.
“땅이 협소하여 도관(道觀)과 불사(佛寺)를 둘 다 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한왕의 옛집에는 모두 절만 짓게 하고, 도관은 보령방(普寧坊)에다 짓게 하였다.
그래서 먼저 절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 여름 6월에 준공되었다.
그 절은 한 면이 350보로서 둘레는 수 리나 되었다. 좌우로는 도로가 있고 앞뒤로는 가게가 모인 부락[廛落]이 있으며, 바깥쪽에는 푸른 회나무[靑槐]가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장안의 절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낭전(廊殿)과 누대(樓臺)는 날을 듯이 높이 치솟아 하늘에 닿을 것 같았고, 문고리[金鋪]2)와 화려한 용마루[藻棟]는 눈이 부실만큼 빛을 뿜고 있었다. 무려 10원(院)에 방이 4천여 칸이나 되어서 장엄하기 그지없다. 비록 양(梁) 나라 때의 동태사(同泰寺)3)나 위(魏) 나라 때의 영녕사(永寧寺)4)라 하여도 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먼저 유사(有司)에게 조칙을 내려 대덕 50명과 시자(侍者) 각 1명씩을 선발하게 하고, 뒤에 다시 학업과 행실을 시험해서 동자 150명을 득도(得度)하게 하였다. 그 달 13일에 서명사에서 재(齋)를 올리고 승려가 되게 했는데, 법사에게 명하여 감독을 하게 하였다.
가을 7월 14일에 이르러
승려를 맞이하여 절에 들게 했는데 그 위의(威儀)나 당개(幢蓋)와 음악 등은 한결같이 자은사(慈恩寺)에 들어갈 때와 비(碑)를 맞이할 때의 법식과 똑같이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서명사에 법사가 거처할 상방(上房) 한 채를 주고, 새로 득도한 사미 해회(海會) 등 10명을 제자로 삼게 하였다.
황제는 선조(先朝) 때부터 법사를 중히 여겼기 때문에 제위에 오른 뒤에도 더욱 더 예의와 존경을 다하였다. 중사(中使)와 조정의 신료[朝臣]들의 위문이 끊이지 않았으니, 면백(綿帛)과 능금(綾錦) 등을 하사한 것이 모두 합해서 만여 단(段)이나 되었으며, 법복과 납가사(納袈裟) 등도 수백 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법사는 이런 것들을 받으면 모두 나라를 위해 탑을 세우거나 경전이나 불상을 만드는데 쓰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외국의 바라문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 주어서 쌓아두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10구지(俱胝)5)나 되는 불상을 조성할 것을 발원해 왔었다. 1구지는 백만을 말하는데 결국 모두 조성하였다.
중국에서는 『반야경』을 중히 여기는데, 전대(前代)에서 비록 번역했다고 하나 모두 다 번역된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법사에게 다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야부(般若部)는 워낙 방대한데, 황제가 있는 수도[京師]에 있으면 잡무가 많을 뿐 아니라 또 인명(人命)이 무상한 것이어서 완료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옥화궁(玉華宮)에 가서 번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현경 4년(659) 겨울 10월에 법사는 경사를 출발하여 옥화궁으로 가게 되었는데, 경을 번역하는 대덕들과 문도(門徒)들도 함께 갔다. 모든 생활필수품에 대한 공급은 경사에서와 같았으며, 그곳에 가서는 숙성원(肅誠院)에서 거처하였다.
현경 5년(660) 봄 1월 1일에 『대반야경』의 번역을 먼저 시작했다. 이 경의 범본(梵本) 원전은 모두 20만 송(頌)이나 된다. 글이 워낙 광대하였으므로 학도들은 매번 생략하기를 청했고, 법사는 대중들의 뜻에 따라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처럼 번잡한 것은 빼고 중복된 것은 생략하기로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했던 날 밤이면 꿈속에서 너무나 공포스런 일을 겪게 됨으로써 서로 경계를 하게 되었다. 즉 어떤 때는 위험한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준한 길을 밟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맹수가 사람을 덮치는 것을 보고는 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하는 때도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대중들에게 말했다.
“도로 전체를 번역하기로 합시다.”
그러자 밤중에 모든 불보살의 미간(眉間)에서 빛이 나와서 법사의 몸을 비추었고, 그 빛이 몸에 닿자 마음이 상쾌해졌다. 또 법사가 몸소 화등(花燈)을 들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며 칭찬하고 공경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또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이름난 과일을 바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자 기쁘고 경하스러운 마음에 감히 더 이상 생략할 수가 없었으므로 산스크리트 원본대로 번역하기로 했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신 곳은 대개 네 곳이었다. 첫째는 왕사성(王舍城)의 취봉산(鷲峯山)에서이고, 둘째는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이며, 세 번째는 타화자재천왕궁(他化自在天王宮)에서이고, 네 번째는 왕사성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인데, 모두 16회를 설하셨던 것을 합하여 1부(部)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법사는 서역에서 세 가지 판본을 얻어왔으므로, 번역할 때에 글의 내용 중에 의심스러운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는 이 세 가지 원본을 비교하여서 교정을 보았다. 이렇게 신중히 살펴 가면서 번역을 하였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그 마음은 자고이래로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혹 글이 이상하거나 뜻이 너무 오묘하여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반드시 다른 경계[異境]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 있기나 한 것처럼 명쾌하게 해결해 주어 마음이 활짝 열리게 해 주어 흡사 구름을 걷어 내고 햇빛을 보는 것과 같이 해 주었다.
그래서 법사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자리[悟處]가 현장 같이 생각이 얕은 사람에게 어찌 통할 수 있는 일인가? 이는 모두 불보살의 가피를 입은 것일 뿐이다.”
이 경전의 첫머리에 「엄정불토품(嚴淨佛土品)」이 있는데, 그 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모든 보살마하살중(菩薩摩訶薩衆)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위해서 신통원력(神通願力)으로써 대천계(大千界)의 가장 훌륭한 진보(珍寶)와 온갖 묘향화(妙香花), 온갖 맛있는 음식, 의복과 음악, 그리고 마음에 따라 생겨나는 5진(塵)의 묘경(妙境)과 같은 가지가지의 공양을 성대히 하여서 설법하는 자리[說法處]를 엄숙하게 하였다.”
그날 밤 마침 옥화사의 주지 혜덕(慧德)과 번역승 가상(嘉尙)은 같은 꿈을 꾸었다. 즉 옥화사 경내가 넓고 엄숙하며 깨끗했는데, 비단으로 장엄되고
당장(幢帳)과 보여(寶與)와 화번(花幡)과 기악(伎樂)이 절 안에 가득 넘쳤고, 또 수많은 승려들이 손에 화개(花蓋)를 들고 전과 같이 공구(供具)를 가지고 함께 와서 『대반야경』에 공양을 하는 것이었다. 절 안과 거리의 담장과 벽은 모두 비단으로 장식되었고, 땅에는 아름다운 꽃[名華]이 쌓여 있어서 대중들은 그것을 밟으며 역경원(譯經院)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원(院)은 더욱 수승함과 미묘함을 더했는데, 마치 경전에서 말한 보장엄토(寶莊嚴土)와도 같았다. 또 원(院) 안에는 세 곳의 강당에서 강설(講說)이 열리고 있는데, 법사는 그 중 중당(中堂)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 기뻐하다가 꿈을 깼기에, 두 사람은 함께 법사에게 가서 꿈속에서 본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나는 지금 바로 그 대목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살들이 반드시 공양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무렵 전(殿) 옆에 두 그루의 능금나무[柰樹]가 있었는데, 때도 아닌데 홀연 종종 꽃을 피우곤 하였다. 꽃은 모두 여섯 잎이 나왔는데, 붉고 하얀 아름다운 색깔이 범상치가 않고 매우 사랑스러웠다.
이때 대중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반야(般若)를 다시 밝힐 징조이다. 또 여섯 개의 잎이 나온 것은 6도피안(到彼岸)6)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법사는 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때로 조급한 마음을 가졌으며, 항상 생명의 무상을 생각하면서 여러 승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장은 금년에 65세가 되었으니, 반드시 이 가람에서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이오. 그런데 경부(經部)는 매우 광대하기 때문에 다 끝내지 못할까 봐 항상 걱정이 되오. 아무튼 모두가 노력하고 더욱 힘써서 노고를 아끼지 말기 바랄 뿐이오.”
용삭(龍朔) 3년(663) 겨울 10월 23일에 드디어 번역을 끝내고 붓을 놓았다. 도합 6백 권으로, 『대반야경』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법사는 합장하고 기뻐하며 여러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 경전은 우리 중국과는 인연이 많은 책이오. 현장이 이 옥화궁으로 온 것도 다 이 경전의 힘이었소. 지난 날 경사(京師)에 있을 때에는 모든 인연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으니 어찌 번역이 완료되기를 바랄 수 있었겠소. 지금 이렇게 번역을 종결하여 마치게 된 것은 모두 여러 부처님의 가호와 용수(龍樹)보살과 천친(天親)보살의 도움 덕분일 것이오. 이 경전은 그야말로 나라를 지키는[鎭國] 중요한 경전(要典)이며, 인간과 하늘[人天]의 크나큰 보배이니 대중들은 기뻐하고
축하해 주기 바라오.”
이때 옥화사의 도유나(都維那)7) 적조(寂照)는 번역이 완료 된 것을 경하하여 재를 올리고 공양하였다. 이날에는 숙성전(肅誠殿)에 있던 경전을 가수전(嘉壽殿)의 재 지내는 장소로 옮겨 가서 강독(講讀)했는데, 경전을 영접할 당시에 『반야경』은 빛을 내고 모든 하늘은 꽃비를 내렸고 동시에 하늘에서는 음악이 울리고 이상한 향기가 퍼졌다.
이러한 신령한 상서의 기운을 보고 법사는 기쁨이 더욱 더하여 여러 문인(門人)에게 말했다.
“이 경전에 이런 말이 있소.
‘여기에 응당 대승(大乘)을 좋아하는 자가 있어서, 국왕이나 대신(大臣),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 경을 베껴서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유포하면, 모두 하늘에 나고 구경(究竟)의 해탈을 얻는다.’
이런 글이 이미 실려 있으니 여러분들은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11월 22일, 법사는 제자 규기(窺基)에게 표문을 받들어 상주하게 하여 황제에게 경전의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자 12월 7일에 통사사인(通事舍人)8) 풍무(馮茂)가 조칙을 전하면서 윤허를 알려 왔다.
법사는 『반야경』을 번역한 뒤로 스스로 체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깨닫고 곧 죽음이 닥쳐올 것을 알고 문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옥화궁에 온 것은 본래 『반야경』과의 인연 때문이오. 이제 경전의 일도 이미 끝났고 나의 생애 역시 다 되었소. 만약 내가 죽거든 그대들은 마땅히 나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시오. 그저 거적에 싸서 산간의 벽지를 택해서 안장해 주고, 궁궐이나 절에는 가까이 두지 말도록 해주시오. 깨끗하지 못한 몸은 마땅히 벽지의 먼 땅에 묻혀야 하오.”
문도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했다.
“화상(和尙)의 기력은 아직 괜찮으십니다. 존안(尊顔)도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법사가 말했다.
“내 스스로가 아는 것이오. 그대들이 어찌 알 수 있겠소.”
인덕(麟德) 원년(664) 봄 1월 1일, 역경(譯經)의 대덕들과 옥화사의 대중들은 법사에게 『대보적경(大寶積經)』을 번역해줄 것을 은근히 요청하였다.
법사는 대중의 뜻이 한결같고 지성으로 바라는 것을 보고는 몇 줄을 번역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산스크리트 원본을 거두고는 대중에게 말했다.
“이 경전의 부수는
『대반야경』과 같소. 내가 스스로의 기력을 헤아려보니 더 이상은 이 일을 해내지 못하겠소. 죽을 때가 이미 임박하여 그리 멀지 않았소. 나는 이제 난지(蘭芝) 등의 골짜기로 가서 예배하고, 구지불상(俱胝佛像)에게 하직을 아뢰어야겠소.”
그때에 법사는 문인들과 함께 떠났는데, 여러 승려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침통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배를 마치고 절로 돌아오자 법사는 행도(行道)에 전념할 뿐 번역하는 일은 완전히 놓고 말았다.
8일에 제자인 고창(高昌)9)에서 온 승려 현각(玄覺)은 꿈을 꾸었는데, 단엄하고 높고 큰 하나의 부도(浮圖)가 갑자기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을 보고 놀라 깨어나 법사에게 아뢰니 법사가 말했다.
“그대 신상에 관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사라질 징조이니라.”
9일 저녁 때, 방 뒤쪽에 있는 냇물을 건너다가 발을 잘못 짚어 넘어져서 다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병상에서 앓게 되었고 기운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일에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눈앞에 하얀 연꽃[白蓮華]이 있다. 쟁반보다 더 큰 꽃이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럽구나.”
17일에는 또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모습이 위엄 있고 거대한 백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는, 여러 가지 기수(綺繡)와 묘화(妙花)와 진보(珍寶)를 들고 법사가 누워 있는 방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다시 또 역경원 안팎을 두루 장엄하여, 마침내 원(院)의 뒷산 숲속에 이르기까지 다 번당(幡幢)을 세워 여러 가지 빛깔로 장식하고 아울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문 밖에는 또 수없이 많은 보배로 장식한 수레[寶輿]가 보였는데, 그 안에는 백 천(百千) 종류나 되는 향기로운 음식과 맛좋은 과일이 있었으며, 그 모두가 인간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각 그것들을 들고 와서 법사에게 공양했다.
그러자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진미(珍味)는 신통을 얻은 자만이 먹을 수가 있소. 현장은 아직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받을 수가 있겠소.”
비록 이렇게 사양했으나 사람들은 음식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시자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법사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법사는 주지인 혜덕(慧德)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한 다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생 동안
닦아온 복혜(福慧)는 그 형상과 모습에 따라 공(功)이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진실로 불교의 인과란 헛된 것이 아니다.”
드디어 가상(嘉尙) 법사에게 명하여 번역한 경전을 모두 기록하게 했는데, 모두 74부 1,338권이나 되었다. 또 구지(俱胝)의 화상(畵像)과 미륵상을 각 1천 정(幀) 만들고, 또 소상(塑像) 10구지, 그리고 『능단반야(能斷般若)』ㆍ『약사(藥師)』ㆍ『육문다라니(六門陀羅尼)』 등의 경전을 베껴 쓴 것이 각 10부가 되었다. 그리고 비경(悲敬) 이전(二田)을 공양한 사람이 각 1만여 명, 백천등(百千燈)을 태워 속죄한 사람 수만 명을 기록했다.
기록을 마치자 가상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고, 그것을 듣고 나서 합장하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또 문인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으니 몸을 버리고자 하오.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이게 해 주시오.”
그리고 의복과 자금을 희사하여 다시 불상을 만들게 하고, 아울러 승려들에게 행도(行道)를 청하였다. 23일에는 재를 베풀고 보시하였다.
이날 또 소공(塑工)인 송법지(宋法智)에게 명하여 가수전(嘉壽殿)에다 보리상골(菩提像骨)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사중(寺中)의 대중들과 역경의 대덕들과 아울러 문도들과 함께 환희하며 다음과 같이 이별의 말을 했다.
“나의 이 독신(毒身)은 매우 깊은 병에 걸렸소. 할 일도 끝났으니 오래 머물 이유도 없소. 내가 닦은 복혜(福慧)는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보시[廻施]하려 하오. 나는 여러 중생들과 함께 도리천(忉利天) 미륵의 권속으로 태어나서 자존(慈尊)을 받들어 모시다가, 부처님이 하생(下生)하실 때 역시 따라 내려와서 널리 불사(佛事)를 짓고 이에 무상보리(無上菩提)에 이르기를 바라오.”
말을 마치고 나서 고요히 정념(正念)10)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으로 이렇게 독송하였다.
“색온(色蘊)은 불가득(不可得)이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역시 불가득이다. 안계(眼界)는 불가득이고 나아가 의계(意界) 역시 불가득이다. 안식계(眼識界)는 불가득이고 나아가 의식계(意識界) 역시 불가득이다. 무명(無明)은 불가득이고
나아가 노사(老死) 역시 불가득이다. 또는 보리(菩提)도 불가득이고, 불가득 역시 불가득이니라.”
다시 입으로 게송을 설하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무 미륵(彌勒) 여래 응공 정등각이시여, 원컨대 함식(含識)과 더불어 속히 자애로운 얼굴[慈顔]을 받들게 하소서. 나무미륵여래의 처소에 계시는 대중들이여, 원컨대 이 목숨을 버리고 나면 반드시 그곳에 태어나게 하소서.”
그때 절의 주지인 혜덕(慧德)은 꿈에, 천구(千軀)의 금불상[金像]이 동쪽에서 내려와서 역경원으로 들어가고, 향화(香花)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2월 4일 밤중에 간호하고 있던 승려 명장(明藏) 선사는 길이가 1장(丈)이나 되는 하얀 연꽃[白蓮華]을 각각 들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연꽃은 작은 수레바퀴 같은 모양이었고 꽃잎은 세 겹으로 되어 있었으며 잎의 길이는 1척 남짓하며 광택이 나고 매우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법사 앞에 이르자 꽃을 든 사람이 말했다.
“법사께서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가지고 있던 번뇌와 유정(有情)이 갖는 모든 악업(惡業)들은 지금의 이 작은 병으로 인하여 다 소멸되었습니다. 마땅히 기뻐할 일입니다.”
법사는 돌아다보며 합장한 채 한참동안 있더니, 드디어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친 다음 왼손을 펴서 왼쪽 다리에 올리고 두 다리를 펴서 포갠 다음 오른쪽으로 누웠다.
그리고 목숨을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5일 밤중에 제자 대승광(大乘光) 등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반드시 미륵보살의 내원(內院)11)에 환생하신다고 믿으십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환생할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나자 호흡이 점점 약해지더니 잠깐 사이에 운명하였다.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은 법사가 운명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코에 솜을 대보고 나서야[屬纊] 비로소 알게 되었다.
법사의 몸은 발끝에서부터 점점 차가워졌으나 끝까지 정수리는 따뜻하였다. 얼굴빛은 적백(赤白)이었으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은 평소보다 아름다웠다. 49일[七七日]이 지나도 모습에 전혀 변화가 없었고 또한 다른 기운도 없었다. 정향(定香)과 혜향(慧香)의 장엄과 계향(戒香)의 도움을 입지 않고서야 누가 능히 이렇게 되겠는가.
자은사에는 명혜(明慧)라고 하는 승려가 있었는데, 업행(業行)에 열심히 정진하여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염송(念誦)하고 경행(經行)하기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자였다.

그런데 법사가 운명하던 날 밤에 그가 밤중에 불당(佛堂)을 돌며 행도(行道)를 하고 있었는데, 북쪽에 흰 무지개 네 줄기가 걸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지개는 북에서 남쪽을 향해 정수(井宿)12)를 꿰뚫고 곧바로 자은사의 탑원(塔院)까지 이르렀는데, 맑고 깨끗한 광채가 분명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괴이하게 여기다가, 옛날 여래께서 멸도(滅道)하실 때 흰 무지개 12줄기가 서방에서 곧바로 태미(太微)13)를 관통하였고, 바로 그때 대성(大聖)께서 천화(遷化)하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다면 지금 이러한 형상이 나타난 것은 옥화궁의 법사께서 운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고, 대중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9일 아침, 법사의 입적 사실이 드디어 서울[京師]에 알려졌다. 백홍(白虹)의 무지개가 나타났던 현상이 딱 들어맞게 되자,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감응에 감탄하였다.
법사의 키는 7척 남짓하고 몸은 붉은 빛을 띤 하얀 색이었으며 눈과 눈썹이 뚜렷했다.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은 마치 조각상[塑像] 같았고 아름답고 우아하기가 꼭 그림 같았다. 음성은 맑게 멀리 퍼졌으며 말투는 우아하고 청아하여 듣는 사람이 싫증을 내지 않았다.
혹 대중 속에 있거나 손님을 대할 때에는 반나절을 줄곧 앉아 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복장은 늘 가사[乾陀]14)를 입고 있었는데, 꼭 세모시[細氈]로 만들어 입었다. 걸어가는 모습은 유유자적했으며 항상 똑바로 보고 곁눈질하지 않았다. 도도한 모습은 마치 큰 강이 대지 위를 흐르는 것 같고, 환한 모습은 연꽃이 물 위에 피어난 것 같았다.
거기에다 시종일관 계율로써 단정하고 깨끗한 모범을 보였으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계율[浮囊]15)을 보호하는 이상이며 계를 지키는 견고함은 계초(繫草)를 뛰어넘었다. 성품은 간명(簡明)하고 온화함을 좋아했으며 사람 사귀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 도량(道場)에 들어가면 조정의 명이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다.
법사가 입적한 후의 일이었다.
서명사(西明寺)의 상좌인 도선 율사(道宣律師)는 신(神)을 감동시킬 만한 덕(德)이 있는 자였는데, 그가 건봉(乾封) 연간(666~667)에 신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제자는 위장군제천(韋將軍諸天)의 아들로서 귀신의 우두머리입니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제자에게 섬부주(贍部洲)의 불법을 잘 보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무렵에 율사께서 계행(戒行)이 청엄(淸嚴)하고 마음은
율부(律部)에 두어서, 사방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이 찾아와서 자문을 받고 해결하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계율의 경중(輕重)을 제정할 때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율사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고 있었습니다. 글의 기록[文記]이 올바르지 않으면 후인(後人)을 그르치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서 율사에게 부처님의 뜻[佛意]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도선이 꺼내놓은 계율을 베껴놓은 것[律抄]과 의식(儀式)의 경중(輕重)이 치우치거나 잘못된 곳을 지적하면서 다 개정하도록 했다.
도선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움과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경율론(經律論) 등에서 여러 가지 의문 나는 점을 물었다. 그 신은 모두 그것을 해결해 주었다. 또 도선은 옛날부터 법을 전해 내려온 여러 승려들의 덕의 고하를 물었고, 아울러 또 현장 법사에 대해서 물었더니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로부터 여러 법사[諸師]들의 지해(知解)와 수행에는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일괄적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장 법사 한 사람만은 9생(生) 이래로 복(福)과 혜(慧)의 양업(兩業)을 갖추어 닦았고, 태어나는 곳마다 많이 듣고 배워 박식하며 총명하고 지혜롭고 말재주[辯才]가 있었으니, 섬부주(贍部洲)의 지나국(脂那國)에서 항상 제일인자였습니다. 복덕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글은 내용과 문체가 다 완벽하며 범본(梵本) 원본과 다른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 선업(善業)의 힘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도사다천(覩史多天)의 자씨(慈氏)의 내중(內衆)으로 태어났으니, 법을 듣고 깨달아서 다시는 인간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미륵을 따르며 법을 듣고 깨달아서 성인(聖人)이 되었습니다.”
도선은 신의 말을 듣고는 이별하고 돌아왔다. 도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한 수기를 여러 권 저술하였는데, 현재 서명사(西明寺)에 소장되어 있다.
그 수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법사의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덕은 영명한 신[神明]이나 알아주는 것이지, 어찌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법사가 병석에 있을 때였다. 역경을 검교(檢校)하는 사인(使人) 허현(許玄)이 그 해 2월 3일에 황제께 이렇게 아뢰었다.
“법사는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만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2월 7일에 황제는 중어부(中御府)16)에 조칙을 내렸다.
“의사를 보내고 약을 가지고 가서 간병하도록 하라.”
그래서 유사(有司)는 즉시 공봉의인(供奉醫人) 장덕지(張德志)와 정도(程桃)를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급히 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르렀을 때는 법사가 이미 입적했으므로 의약이 소용없었다.
이때 방주(坊州)17) 자사(刺使) 두사륜(竇師倫)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법사가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슬피 통곡하고 마음 아파하며, 법사를 위해 수일 동안 조회(朝會)를 파하면서 말했다.
“짐은 나라의 보배를 잃었도다.”
당시 문무백관들 중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 역시 말을 마치고는 오열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는 다음날 다시 군신들에게 말했다.
“애석하도다. 짐(朕)은 나라 안에서 법사 한 사람을 잃은 것이지만, 불교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들보가 부러진 것이니, 4생(生)의 윤회에서 이끌어줄 스승[導師]을 잃은 것이다. 또한 망망한 고통이 바다[苦海]에서 갑자기 커다란 배가 가라앉고, 어두운 방이 아직 밝기 전에 횃불이 꺼져버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황제는 말을 마치고 나서 오열을 금하지 못했다.
그달 26일 황제가 조칙을 내렸다.
“두사륜이 상주한 바에 의하면 옥화사의 승려 현장 법사는 이미 입적하였다. 장사(葬事)에 필요한 것은 모두 관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3월 6일에 또 조칙을 내렸다.
“옥화사의 현장 법사는 이미 입적하였으니, 그가 하던 경전 번역 사업을 중지하도록 하라. 이미 번역이 완성된 것은 구례(舊例)에 따라 관에서 베껴 쓰도록 하라. 또 나머지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자은사에서 맡아서 보관하되, 잘 지켜 손실이 없게 하라. 현장의 제자나 함께 역경하던 승려로서 원래 옥화사의 승려가 아닌 자는 각기 본사(本寺)로 돌아가도록 하라.”
3월 15일에 또 조칙이 있었다.
“입적한 옥화사의 승려 현장 법사의 장례일에는 경성(京城)의 승니(僧尼)들은 번개(幡蓋)를 만들어 묘소에까지 호송하도록 하라.”
법사는 도(道)가 깊고 덕이 높아서 황제가 평소에도 대단히 사랑했기 때문에 입적한 뒤에도 거듭거듭 은혜를 내린 것이니, 옛사람에게 찾아보아도 이러한 일은 없었다.
이에 문인들은 법사가 유언으로 남긴 명[遺命]에 따라 거적으로 상여를 만들고,
신성한 널[神柩]을 받들고 경성으로 돌아와 자은사의 역경당(譯經堂) 안에 안치하였다. 제자 수백 명이 천지를 진동시키듯이 슬피 울부짖었으며, 경성의 승려들과 속인[道俗]들도 매일 수백천 명씩 달려와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4월 14일, 산수(滻水)18)의 동쪽에서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도성 안의 승니와 많은 관민들이 다 함께 장송(葬送)의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다. 소개(素蓋)와 백당(白幢)과 니원장여(泥洹帳轝)19)와 금관(金棺)과 은곽(銀槨)과 사라수(娑羅樹)20) 등 5백여 가지를 길거리에 펼쳐 놓으니 마치 구름에 이어지고 하늘에 닿은 듯했으며, 구슬픈 호가(胡笳)21)의 가락은 온 우주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경읍(京邑)과 5백 리 내의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장송(葬送)자가 백여 만이나 되었다. 비록 장례는 이처럼 호화롭고 엄정하였으나, 법사의 신구(神柩)는 거적으로 만든 본여(本轝)에 실려 있었다.
동시(東市)의 견상조합(絹商組合)에서는 비단 3천 필을 써서 니원여(泥洹轝)를 만들고 꽃과 노리개[花珮]로 장엄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절묘하고 아름다운 상여에다 법사의 신구를 안치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문도들은 법사의 본뜻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법사의 3의(衣)22)와 국가에서 내려준 백금(百金)의 납가사를 앞세우고, 거적으로 만든 상여는 그 뒤를 따랐다. 이 광경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임시 막사에서 숙박한 승속(僧俗)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15일 아침 안장(安葬)한 다음 곧 묘소에서 재를 지내고 해산하였다.
이때 천지는 색이 변했고 새와 짐승도 슬피 울었다. 동물의 감동도 그러한데 사람으로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애욕의 강물[愛河]은 아직도 망망한데 자비의 배[慈舟]가 갑자기 가라앉았고, 긴긴 밤은 아직 어두운데 지혜의 등불이 먼저 꺼져버렸구나.”
법사를 사모하는 통한은 마치 사람이 눈을 잃어버린 것과 같았으니, 어찌 단지 산이 허물어지거나 나무가 넘어지는 것에 비할 정도였겠는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총장(總章) 2년(669) 4월 8일에 조칙이 내려와, 법사의 묘를 번천(樊川)23)의 북원(北原)으로 이장하고 거기에다 탑우(塔宇)를 건립토록 하였다. 이전의 묘소는 서울 교외[京郊]에 너무 가까워서 궁궐[禁中]에서도 보기가 쉬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성려(聖慮)를 상하게 할까 봐 묘소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장하는 의식 때에도 문도들이 슬퍼하는 감정과 동행한 승려들의 비통해 하는 마음은 초상 때보다도 더 애절하였다. 아, 슬프다.
석혜립(釋慧立)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대저 밤하늘의 별과 달은 서쪽의 밝은 햇빛을 이어 받았고, 삼강(三江)과 구하(九河)24)는 동해(東海)의 큰 바다를 돕고 있다.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도(道)는 물상(物像)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법을 이어 계승하는 풍교(風敎)가 인간에게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여래[法王]께서 빛을 감추어 열반하신 뒤에 아난(阿難)이 불경을 결집(結集)한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대는 10대를 지났다.
그 사이 성현이 간간히 나타났고 영특하고 예지가 있는 사람도 번갈아 태어나서, 각자 웅대한 계획을 품고 모두 최상의 지혜[上智]를 간직한 채 불법을 짊어지고 천인(天人)을 다스려왔다.
도(道)로 회오리바람을 막았고 신(神)으로 해악(海岳)을 기울게 하였으니, 혹은 손가락을 펼치면 고액(膏液)이 흐르기도 하였고 때로는 다른 실(室)에서 기이한 광명[奇光]을 빛나게 한 일도 있었으며, 혹은 시체를 줄지어서[連尸] 천마(天魔)를 항복받았고 혹은 한 번 마주하여 시주(時主)를 돌리기도 하였다. 또 혹은 변방의 사찰[邊刹]에서 법을 통하려고 풍파를 무릅쓰고 험한 길에 나서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비워서 사물에 응하려고 식량을 구하러 사지(死地)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진(玄津)이 넘쳐나게 하였고 은혜로 구제함이 한량없었다.
이들은 이미 전등(傳燈)에 이익 되게 했으니 참으로 부촉(付囑)하기에 합당한 이들이었다. 전대의 책을 고찰해 보면 과연 그렇지 않던가. 그러나 법의 근원은 밝히기가 어려운데 지금 다시 현장 법사를 만나 그것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직 법사는 별에서 영(靈)을 내리고 산악의 기를 타고 났기에, 재주는 동호(東胡)의 화살보다 날카롭고 명예는 남방의 금보다도 아름다웠다. 바른 지조는 무리 가운데 뛰어나고 향기로움은 홀로 우뚝하여, 4생(生)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정법(正法) 세우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그의 자태는 높고 높은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이 창공을 이고 솟은 듯하며, 밝고 밝은 산호와 옥구슬[琅玕]이 맑은 바다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런데다 총명하고 준수한 기운이 자연히 드러났고, 도를 즐기고 영화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천성(天性)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견문이 넓고 많이 아는 깊이는 도항(道恒)이나 승조(僧肇)25)보다도 더 높고 앞섰으며, 현오(玄奧)하고 세밀한 공(功)은 도생(道生)이나 도융(道融)26)보다도 심원하였다.
크고도
넓어라, 법사는 실로 법을 이어서 융숭하게 하는 신령한 그릇이었다. 부처님께서 말법(末法)의 세상에 다시 빛을 비추시려고 이렇게 밝은 덕을 가진 사람을 탄생시킨 것이리라.
법사는 고금의 대덕들이 경론을 선양함에 있어 비록 성교(聖敎)에 의거했다고는 하지만, 전거(典據)하는 원문과 인용하는 내용이 같지 않아서 이미 오래전부터 논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아뢰야식[黎耶]27)의 시보비보(是報非報), 화인(化人)28)의 유심무심(有心無心), 화합포수(和合怖數)의 무리들, 가르침을 듣고 훈습하는 일[聞熏]이 멸하는지 멸하지 않는지[滅不滅] 등과 같은 백여 과(科)와 삼장(三藏) 4함(含)의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뿌리[盤根], 대소양종(大小兩宗)의 감건(鉗鍵) 같은 것으로, 이는 선현(先賢)들이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의 철인(哲人)도 함께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사도 역시 이런 글들을 보면 주저하게 되고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해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곤 하였다.
“중국의 경론은 거의가 법문(法門)의 지엽일 뿐이며 근원이 되지 못한다. 여러 법사들이 비록 각기 이단(異端)을 일으켰지만 마음의 의심은 없앨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반드시 주머니[囊] 속의 큰 근본[大本]을 묶어놓고 정(定)을 인도[祇▼(亘+示)]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장한 기상[壯志]을 품고 마음을 멀리 나라 밖으로 달리다가, 정관(貞觀) 3년 가을 8월에 드디어 맹세하고 짐을 꾸려 옷소매를 떨치며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중천축(中天竺)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이르러 시라발타(尸羅跋陀)29)라고 하는 대법사를 만났던 것이다. 그 법사는 계현(戒賢)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대승과 소승의 양종을 체득했으며 신통하게 꿰뚫어 보는 능력[神鑒]이 심원하고, 널리 삼장에 통달했으며 4베다에도 능했다.
그 중에서도 『십칠지론(十七地論)』에 특히 정통했는데, 이 논은 모든 경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것만 강의하고 있었다. 이 논은 원래 미륵보살이 지은 것으로 『섭대승론(攝大乘論)』의 근간인 논인데, 이것이 바로 법사가 출발하면서 보기를 기원했던 논이었다.
인도의 16대국에서 이 논에 귀종(歸宗)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강의를 받는 학도들이 항상 만 명이 넘었다. 법사는 그곳에 가서 이것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기뻐하며 늦게 만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법사는 계현 법사에게 심복하며 가르침을 받고 겸하여
의심나는 곳을 물어서 해결하였는데, 일단 한 번 훑어보고 덮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큰 바닷물[濛氾]30)이 모든 강물의 지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고, 또 맹저(孟諸)31)가 구름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계현 법사도 이런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감탄하면서 말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름을 듣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현의(玄義)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법사는 이로부터 명성이 총령(蔥嶺)32) 서쪽에까지 떨쳤고 소문은 8국으로 퍼져갔다. 그래서 인도의 모든 고승들과 영웅호걸들이 법사의 이름을 듣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먼 길을 함께 와서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였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치 기러기떼나 고기떼가 모여들 듯하여 마차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서로 논쟁하는 말이 구름이 모여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법사는 태연한 자세로 변론하고 해석하였는데, 모두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의 칼과 창을 쥐고 그 상대방의 방패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들 “이 분은 하늘이 내린 재주를 타고 났기 때문에 상대할 수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계일왕(戒日王) 등도 법사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팔꿈치로 기어가서 발에 입 맞추고 진기한 음식을 공양하였다.
강석을 파한 뒤에는 법사는 다시 범서(梵書)와 여러 경론을 배웠다.
여래(如來)께서 평생 동안 설법하신 말씀, 기사굴산[耆山]에서 설한 방등(方等)33)의 가르침, 녹원(鹿苑)34)의 소승[半字]35)의 글[文]에서부터 후에 나온 성인[後聖]인 마명(馬鳴)과 용수(龍樹)와 무착(無着)과 천친(天親) 등이 저술한 여러 글, 그리고 회산주부(灰山住部)36) 등과 같은 18이집(異執)37)의 종(宗)이나 5부의 다른 길[五部殊塗]38)의 끝까지 모두 배웠다.
이런 것을 모두 찾아서 잘 연구하여 그 뜻에 통달했으며, 그 원전도 얻었다. 아울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유적과 열반[泥洹]하신 견고림(堅固林)39), 마왕을 항복 시킨 보리수[菩提樹]40), 가로숭고(迦路崇高)의 탑, 나게타국에서 그림자를 머무신 산[那揭留影山] 등을 모두 직접 예배하고 신령하고 신기한 모습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법사는 마음으로 기약한 것이 이미 이루어졌고 보고 배우고자 하였던 것도 두루 다 마쳤으므로, 본토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대소승의 법의 가르침[法敎] 6백여 부를 베껴 책으로 만들고, 또 불상 7구(軀)와 사리 1백여 개를 가지고, 정관 19년 봄 1월 25일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승려들과
속인들이 모두 달려 나와 영접하였는데, 온 장안이 떠들썩하여 상가도 문을 닫았을 정도였다.
그때에 연기가 걷히고 안개가 회오리치며 풍광은 아름답고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보장(寶帳)은 거리에 넘치고 화당(花幢)은 해를 덮었다. 경사스런 구름이 아름다운 빛을 하늘에 무성하게 드리웠고, 서사(庶士)들이 길거리에서 칭송하는 소리는 지축을 흔드는 듯했다. 사악한 바람[邪風]은 갑자기 걷히고 혜일(慧日)이 빛나는 중에 더욱 밝았다.
비록 세존이 도리천(忉利天)에서 이 세상[閻浮]41)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날도 역시 천 년에 한 번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법사의 이 인도 여행은 수만 리를 가는 노정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와 얼음으로 뒤덮인 산길을 지나고, 물결 높은 격랑의 골짜기도 지났으며, 독하게 매운 흑풍[厲毒黑風]의 기세도 견디며 야수와 맹수의 무리를 지나기도 하였다. 또 법현(法顯)이 동행자를 잃어버렸던 마을과 지엄(智嚴)이 친구만 남기고 죽은 자리, 반초(班超)42)도 밟아보지 못하고 장언(章彦)도 가보지 못한 곳을 법사는 외롭게 홀로 갔다. 그러면서도 평탄한 길을 가듯이 무사하였다.
그리하여 당(唐)의 풍교를 팔하(八河)의 밖까지 펼치고 중국의 풍화(風化)를 오천축(五天竺)에 떨쳐서, 먼 지방의 제후와 왕들로 하여금 마음을 당조(唐朝)로 달리게 했으며 먼 변방의 추장들도 당조를 우러러보게 하였다.
이것은 비록 법사의 불출세의 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조(聖朝)의 국운이 번창하여 감응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황제는 용도(龍圖)43)를 쥐고 역(曆)을 편찬하시고 적복부(赤伏符)44)에 응하여 군림하셨다. 그리고 고래나 돼지 같은 악인을 없애어 백성을 구제하시고 구름을 몰아내어 일월을 밝혔으며, 네 간방[四維]45)의 기둥을 바로 세워 푸른 바다[滄海]가 거꾸로 흐르는 것[橫流]을 그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거듭 천하[乾坤]를 세워서 다시 나라를 건립하셨다. 따라서 그 9공(功)46)은 우하(虞夏)47)를 포섭하시고 7덕(德)은 조조(曹操)48)와 유비(劉備)보다 앞섰다.
그래서 바다는 잔잔하고 강물은 맑으며 나라는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먼 나라들도 순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이웃나라도 평화스럽지 않은 나라가 없게 되었다. 천지의 운행이 순조로워 만물이 잘 자라니 사람과 신이 경축하고 기뻐하였다.
게다가 밝고 아름답고 올바름을 더하여 3선(善)49)의 뜻이 융성하게 하니 황제의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노래[良哉之歌] 소리만 드높았다.
이미 황제의 공은 무궁하여 여러 해에 걸쳐 두텁게 쌓였고, 덕은 하늘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자줏빛 지초[紫芝]가 옥계단[玉階]에서 꽃을 피우고, 화과(華果)의 꽃봉오리는 붉은 누각[朱閣]에 열렸다.
또 서주(西州)의 석서(石瑞)와 송현(松縣)의 곤부(琨符)는 성주(聖主)께서 천년(千年)을 기약하는 터전이며, 여러 임금이 차례로 계승하는 업(業)을 나타내는 것이다.
봉황의 터럭[鳳毛] 같은 재주 있는 문장이나 상과불전(上果佛田)의 글은 만고(萬古) 세월을 지나오면서 듣지도 못했던 것인데, 우리 황조(皇朝)에 와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어찌 영명(靈明)하게 덕을 돕고 현천(玄天)의 권속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또 마음을 불법[眞際]에 두시어 성(城)의 해자까지 5승(乘)50)으로 두르며, 생각은 취령(鷲嶺)의 모습을 찾아 달리시고 마음은 제하(提河)51)에서의 설법에 두셨다.
그러므로 유형(遺形)과 감발(紺髮)이 찬란한 빛을 내며 훌륭한 모습으로 오시게 하셨고, 뛰어난 경전과 고승이 서로 빛을 발하여 연달아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비의 구름[慈雲]이 육합(六合)52)에 퍼지고 법고(法鼓)는 삼천 세계에 울리며, 천화(天花)는 바람과 함께 흩날리고 비취빛 안개는 향연(香烟)과 함께 자욱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에 흠뻑 물들었던 선비들도 피안(彼岸)을 바라보며 기약하는 자가 생겼고, 청허(淸虛)하고 현묘한 이치[玄]를 아는 빈객도 3공(空)을 돌아보는 것이 멀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나침판이 길을 가리키면 미혹된 중생들이 방향을 알게 되고, 질풍이 숲을 엄습하여 수많은 퉁소 소리가 스스로 울리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법사의 성대한 덕[盛德]이야말로 나침판과 같이 때로는 질풍과도 같이 때를 만났던 것이었다.
이것이 어찌 축법아(竺法雅)53)와 불도징(佛圖澄)이 도를 생각하면서 석륵(石勒)54)과 석호(石虎)55) 같은 흉악한 사람을 섬기고, 도안(道安)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경을 전하면서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참람(僭濫)하는 역사에 기여한 것과 같다 하겠는가.
이들과 법사의 깊이를 비교한다면 길바닥에 괸 물과 강호(江湖) 만큼이나 차이가 있고, 명암(明闇)을 말한다면 아침 햇빛과 반딧불의 차이 같은 것이다.
옛날에 위 문제(魏文帝)는 종 모양의 옥[鐘玦]을 얻고는 부(賦)를 받들어 찬양하였고, 가규(賈逵)56)는 신기한 참새[神雀]57)를 보고 송(頌)을 바쳐서 기이함을 논하였다.
금수와 같은 미천한 것들에게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노래를 읊어 찬양했는데, 하물며 법사와 같이 불후의 신령한 공덕[神功]을 남기고 대들보와 같이 큰 업[大業]을 이루신 분을 이 태평한 시대에 어찌 묵살하고 기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혜립(慧立)은 배움이 선현(先賢)에 부끄럽고 덕도 선달(先達)에 미치지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상법 시대의 교화[像化]58)에 함께 끼어 물들면서 외람되이
말진(末塵)59)을 더럽혔지만, 법사를 흠모하는 마음만은 보통사람의 마음보다 백 배나 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의 힘이 모자라고 어리석으면서도 감히 이 전기를 기술하는 것이다. 법사의 맑고 높은 절개와 지조, 명망(名望)의 아름다움, 그리고 앞에도 없었고 뒤로도 없을 빛나는 종적에 대해서는 별도로 여러 명필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현명한 군자들은 나의 뜻을 거두어주시고 웃지 말기를 바란다.”

찬(贊)
중생[生靈]의 감응이 끊어져[感絶]
대성(大聖)께서 천신(遷神)60)하시니
그를 능히 이어서 계승할 자는
오직 철인(哲人)뿐이었네.

마명(馬鳴)이 선창(先唱)하고
제바(提婆)가 뒤에 기술하니
해가 여기에 숨는 듯
밝은 달이 막 솟아올랐네.

목목(穆穆)하신 법사는
진실로 곧은 어른[貞士]이시라
천인(天人)보다도 뛰어나서
티끌 세상에 매이지 않았네.

깊고 그윽한 뜻 다 밝히고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니
깨끗하기 밝은 구슬 같고
향기로움은 혜초 같고 지초 같았네[蕙芷].

경전에서 빠진 곳을 애석히 여기고
뜻이 잘못 된 것을 의심하여
목숨 바쳐 배우고 구하기 위해
위태롭고 험한 길을 걸었었네.

넓고 넓은 기품(氣品)이여
굳은 의지의 그 정성이여
아름다움을 서역[西州]에 떨치고
돌아와 동각(東閣)에 공(功)을 세웠네.

도가 행해지는 세상을 만났으니
때는 오직 우리 황조(皇朝)라
거듭 옥경(玉鏡)을 걸으시고
다시 주낭(珠囊)을 다스리셨네.

3승(乘)은 이미 열리고
10지(地) 또한 선양하니
그 혜일(慧日)로 하여금
더욱 그윽하고 다시 빛나게 하셨네.

여기 용렬한 이 몸이
다행히 진말(塵末)에 참예하니
오랫동안 적만한 집[蓬門]61)이었을 뿐
아무런 꾸밈도 감싸는 것도 없었네.

여기 높은 산[高山]을 우러르다
푸른 물길[淸流]이 말랐으니
원하건대 더위잡고 의지하기를
저 칡덩굴과 같게 하소서.

또 석언종(釋彦悰)은 이와 같이 붙여서 기술[箋述]하였다.
“내가 보건대 불교가 동쪽으로 건너온 이래로 영준(英俊)하고 현명한 사람들로서 집을 떠나 출가 입도(入道)한 자가 만여 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 능히 선(善)을 겸비한 사람은 드물고, 한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보고 들은 모습과 말씀을 널리 듣고 열심히 이해하며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도를 중히 여겨서 절역(絶域)의 먼 곳으로 갔던 사람, 정조(貞操)는 소나무 대나무보다도 강하고 우아한 의지는 쇠와 돌보다 굳어서 많은 영웅의 생각을 바로잡고 성주(聖主)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삼장법사뿐이었다.
그런데 또 들으니
삼장은 한여름에도 몸에 땀이 흐르지 않았으며, 심한 추위에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엎드리지도 않았고 기지개도 펴지 않았으며, 하품도 하지 않고 재채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것만으로 그의 지위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또 어느 현인 어느 성인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북궁(北宮)에서 병이 났을 때에는 부처님의 경사스런 징조[慶兆]가 연달아 보였고, 임종하는 날에도 얼굴에 기쁨의 빛이 가득했던 것 역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임종 뒤 1개월 남짓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전단말향(栴檀末香)62)을 가지고 와서 서국(西國)의 법에 따라 삼장의 몸에 바르기를 청했다고 한다. 대중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그 사람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했다.
“제자는 따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불허하신다면 유해(遺骸)의 상태라도 기록해서 나라에 보고해야 하겠습니다.”
대중들은 그의 말을 따랐다.
마침내 관(棺)을 열고 염의(殮衣)를 걷어내었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향내를 맡았는데 연꽃 향기와 같았다. 그래서 서로 놀라워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아까 그 사람은 법사의 염의를 벗겨내고 오직 속옷만을 남겨 놓았는데, 대중들이 삼장법사를 보니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모두가 울부짖으며 함께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그 사람은 향을 바르고 염의를 입히고 관을 덮고 나서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대중들은 그가 천인(天人)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나는 삼장법사가 일찍부터 품었던 뜻을 생각하며 가까운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마하살타(摩訶薩埵)63)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도반들이 항상 법사를 경모하고 우러르기를 바랄 뿐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