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권
대당서역기 서문
생각하건대*1)천지의 광대함과 인류 종족의 상이함에 관해서는 『담천(談天)』1)에서도 그 끝을 다 궁구하지 못하였고, 『괄지(括地)』2)에서도 그 근원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방지(方志)3)가 미처 전하지 못하고, 중국의 정치가 아직 미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어떻게 모두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면 인도[天竺]라는 나라는 그 내력이 오래 되었는데, 성현이 많이 배출되었고 인의(仁義)가 풍속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이 오래 전에 끊긴 데다 중국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산경(山經)』4)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왕회(王會)』5)에도 적혀 있지 않다. 박망(博望)이 서역으로의 새로운 길을 내었던 것은 단지 공죽(邛竹)만을 뜻에 두었을 뿐이었고,6) 곤명(昆明)의 길이 닫히고 어지럽혀지자 신지(神池)에서 힘을 다하여 훈련하였을 뿐이었다.7)
이리하여 마침내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가 항성(恒星)으로 나타나니8) 천세[千載]에 현묘함이 가득 찼고, 꿈에 밝은 해를 지닌 이가 나타나니 신비한 빛이 만 리(萬里)에 퍼졌다.9)
이에 채음(蔡愔)10)이 도를 구하러 찾아가서 마등(摩騰)과 함께 낙양으로 들어와 경장(經藏)을 석실(石室)11)에 두었지만 아직 용궁의 깊숙한 곳까지 퍼지지는 못하였고, 부처의 상을 양대(凉臺)12)에 그리게 하였지만 어찌 취봉(鷲峯)13)의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이후 시정(時政)에 우환이 많아지고 환관이 권력에 편승하자 동경(東京:洛陽)이 혼란에 빠져 어지럽게 셋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모후(母后)가 왕권을 찬탄하여 조정에 불화를 일으키니14) 나라의 질서[憲章]는 함락(函雒)15)에서조차 무너졌다. 변방에서는 봉화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그것으로 인하여 4방에 보루가 수없이 쌓여 길이 막히게 되었으니, 하물며 이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어찌 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천만다행하게도 귀한 이가 세간에 나타나서 다소 기록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 땅의 특징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고 한갓 『신경(神經)』16)만을 채록하였을 뿐이며, 진여(眞如)17)의 도리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통일을 하게 되어 이에 국토를 확장하고자 힘썼지만 오히려 서해(西海)18)를 돌아보면서 탄식을 하였고 동락(東雒)19)을 바라보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옥문(玉門)20) 밖에서 깃발을 휘날린 자는 정말 많았지만 총령(蔥嶺)21)의 고원을 쉽게 건넌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어찌 설산(雪山)22)을 가리키면서 오랫동안 힘껏 달려가다가 용지(龍池)23)를 바라보면서 잠시 쉴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전 왕조인 수나라의 덕이 세상에 드리워지지 않았고 위력이 멀리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대당(大唐)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황제의 나라를 열고 제왕의 다스림[帝圖]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하늘에는 불길한 혜성[攙搶]들이 사라지고 국가의 운명[天步]이 밝아지게 되었으니, 그 공적은 천지의 조화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 광명은 해와 달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육골(肉骨)이 맹수들의 먹이가 될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고, 집안은 귀신들의 폐허로부터 다시 살아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인[異類]들은 고가(藁街)24)에 넘쳐나고 변방의 오랑캐 땅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으니 10주(洲)25)가 정원이고 환해(環海)가 연못이 되었다. 이것은 5제(帝)26)까지도 작게 여기며 상황(上皇)도 낮게 내려다 볼 정도의 일이었다.
한편, 현장 법사는 어린 시절에 법문(法門)에 들고서부터 기원정사27)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것을 개탄하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오래도록 가슴속에 품고서 녹야원을 향해 간절하게 마음으로 우러렀다. 불국토[淨境]로의 여행은 실로 오래도록 품었던 소망이었다. 마침내 당나라의 순박한 풍속이 서쪽을 교화하고 그들의 율법이 동쪽으로 귀의하게 되는 때를 맞아 정관(貞觀) 3년(629)에 석장을 짚고 길을 떠났다.
황제의 신령[皇靈]에 의지하고서 타국에 나아갔으니 온갖 험난한 길들도 마치 평지를 가는 것과 같았다. 선대 왕들의 혼령[冥助]의 힘을 빌려서 위험한 길을 건넜으니 어려움에 처해도 무사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 내며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인도에 도달하게 되었다.
진상(眞相)을 거듭 물으면서 보기 어려운 실상(實相)을 공(空)과 유(有)의 사이에서 보게 되었고, 정묘한 이치를 곰곰이 생각해서 듣기 어려운 정법을 생멸(生滅)의 경계에서 들었다. 그리하여 성품의 바다[性海]에서 모든 의심을 깨쳤으며 미혹의 나루터[迷津]에서 미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여러 경들을 바로잡아서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완전하게 따져 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곁들여 성스러운 불적을 답사하여 하나의 물건이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귀로에 올라 19년(645) 정월(正月)에 장안에 도착하게 되었다. 법사께서 가지고 온 경론은 657부(部)이며 황제의 명을 받아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친히 다녀온 곳이 110국, 전해들은 것이 28국인데 이 중에 어떤 일은 앞 세대의 전적에서도 보이는 것이며, 어떤 나라 이름은 지금 시대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두 당나라의 은택을 입게 되어 감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귀복하게 되었다. 관리들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험준한 산길을 넘어서 예물을 가져와 바쳤으며, 조정에 참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여 관대(冠帶)를 입고 무리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이나 풍토ㆍ습속이나 산천의 차이를 멀리는
국전(國典)에 비추어 보고 가깝게는 사리에 밝은 어진 노인[故老]들에게 물어보면서 현장법사는 아득히 멀고 제각기 다른 것을 마치 현재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술하여 수고스럽지 않도록 서책으로 엮어 상세하게 글로 옮겨 썼으니, 이것이 바로 1질(帙) 12권(卷)으로 이루어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이름의 책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쓴 서(序)는 일의 대강만을 다루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아주 일부분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변변치 않은 말솜씨와 천박한 도(道)를 지닌 나의 잘못이 있다면 보충해주길 바랄 뿐이다.
비서저작좌랑(秘書著作佐郞) 경파(敬播)28)가 이 서문29)을 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1권
현장(玄奘) 한역
변기(辯機) 찬록
이미령 번역
1. 출발지에서부터 인도 국경 사이의 나라들[34개국]
널리 황유(皇猷)1)를 가려내고 멀리 황제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 포희(庖犧)2)가 동방에 즉위하고 헌원(軒轅)3)이 중국을 다스린 것은 천하의 모든 백성을 기르고
영토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당요(唐堯)4)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 빛이 4방에 이르렀고, 우순(虞舜)5)이 지도 (地圖)를 받아서6) 천하를 다스리자 그 덕은 9주[九土]7)에 흘렀다. 이후부터는 서사(書事)의 서책만이 헛되이 전해져서 옛 현자들의 이야기는 아득하게 들리고, 다만 말을 기록한 역사만을 접해볼 뿐이었다. 어찌 이러한 시대가 도가 있던 시기와 합치된다고 할 수 있으며, 시운(時運)을 무위(無爲)의 시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대당(大唐)의 천자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시운을 타고 천하의 기강을 장악하시니, 사방천지가 하나가 되어 밝게 다스려졌다. 상고시대의 3황(皇)과 견줄 정도로 그 덕화가 4방에 두루 퍼졌다. 그리하여 현묘한 덕화가 흘러내리고 상서로운 바람이 아득하게 부니, 하늘[乾]과 땅[坤]이 만물을 덮거나 싣는 것과 같았으며 비바람이 만물을 고르게 적시는 것과 같았다.
동이(東夷)도 조공을 바치러 들어오고 서융(西戎)도 그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나라의 기틀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였고 반란을 다스려서 바르게 한 것은 진실로 전대의 왕들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선대(先代)를 모두 포함할 정도였다. 같은 문자(文字)와 동일한 규범으로 다스려지게 하신 신업(神業)과 같은 이 공적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커다란 계략을 찬미할 수 없으며, 하나하나 분명히 말하는 것 이외에는 어찌 그 대업을 칭송할 수 있겠는가?
현장은 오로지 서역을 유람하는 대로 그 풍토를 기록하였다. 비록 여러 나라의 풍속을 충분하게 나누어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실로 그 땅에는 삼황오제의 시대 이상으로 천자의 은혜가 미치고 있었으며, 살아있는 것 모두가 은택을 입고 있었으니, 말을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천자의 공적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천축국, 변경의 이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삭(正朔)8)을 받아서 한결같이 천자의 덕화(德化)를 입어 무력의 공적을 찬양하며, 문덕(文德)의 성대함을 찬미하여 으뜸가는 화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전적을 자세하게 조사해보아도 예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며, 상고의 지리ㆍ역사를 비추어 보아도 어떤 것도 이것과 짝할 것이 없다. 여기에 서술하지 않으면 당조의 교화가 얼마나 성대한가를 전할 수 없을 것이니, 이제 보고들은 사실에 의거하여 여기에 실어 적어놓는 것이다.
한편, 삭하세계(索訶世界)구역(舊譯)에서는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며, 또는 사하세계(娑訶世界)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9)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분의 부처님께서 교화하고 통솔하는 영역이다. 지금 하나의 해와 달이 널리 비추고 있는 4천하(天下)는 삼천대천세계10) 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모든
불세존은 이 모든 땅에 교화를 드리우시어 태어남과 죽음을 나타내시고 성현과 범부를 인도하신다.
소미로산(蘇迷盧山)당나라 말로는 묘고산(妙高山)이라고 하며 구역(舊譯)에서는 수미(須彌)라고 한다. 또한 수미루(須彌婁)라고도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11)은 네 가지 보배가 합하여 이루어졌고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금륜(金輪)12)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이 비추고 모든 천신[天]이 노닐며 머무는 곳이다. 일곱 개의 산과 일곱 개의 바다가 빙 둘러서 줄지어 있으며 산 사이의 바닷물은 여덟 가지의 공덕13)을 갖추고 있다. 일곱 개의 금산(金山) 밖에는 염해(鹽海)가 있다.
바다 가운데 중생이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대략 네 개의 섬이 있으니, 동쪽은 비제하주(毘提訶洲)구역에서는 불바제(弗婆提)라고 하고, 또 불우체(弗于逮)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남쪽은 섬부주(贍部洲)구역에서는 염부제주(閻浮提洲)라고 하고, 또는 염부주(剡浮洲)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서쪽은 구타니주(瞿陀尼洲)구역에서는 구야니(瞿耶尼)라고 하고 또한 구가니(劬伽尼)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북쪽은 구로주(拘盧洲)구역에서는 울단월(鬱單越)이라 하고 또한 구루(鳩樓)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다. 금륜왕(金輪王)은 4천하를 통치하며, 은륜왕(銀輪王)은 북구로주를 다스리고, 동륜왕(銅輪王)은 북구로주와 서구타니를 제외한 곳을 다스리며, 철륜왕(鐵輪王)은 오직 섬부주만을 다스린다.
윤왕(輪王)14)이 대위(大位)에 오르려 할 때면 복에 감응하는 바를 따라서 커다란 윤보(輪寶)가 허공에 떠서 따라온다. 그 윤보에는 금ㆍ은ㆍ동ㆍ철의 차이가 있으며 통치하는 경계에도 4ㆍ3ㆍ2ㆍ1의 구별이 있다. 전륜왕이 즉위할 때 서응(瑞應)으로써 생겨나는 윤보의 종류에 따라 왕의 칭호가 결정된다.
섬부주 가운데 있는 연못15)을 아나파답다지(阿那婆答多池)당나라 말로는 무열뇌(無熱惱)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아뇩달지(阿耨達池)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6)라고 한다. 향산(香山)17)의 남쪽과 대설산(大雪山)18)의 북쪽에 있으며 둘레는 8백 리이다. 금과 은과 유리(琉璃)와 파지(頗胝)19)가 그 언덕을 장식하며, 금모래가 가득 찼고 맑은 물결은 거울과 같다.
8지보살(地菩薩)20)이 원력(願力)에 의해 용왕으로 변하여 그 연못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그 속에서 청량한 물을 내뿜어 섬부주에 공급한다. 그리고 연못의 동쪽에 있는 은우(銀牛)의 입에서는 긍가하(殑伽河)21)구역에서는 항하(恒河) 또는 항가(恒伽)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나와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동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 남쪽에 있는 금상(金象)의 입에서는 신도하(信度河)22)구역에서는 신두하(辛頭河)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서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의 서쪽에 있는 유리마(琉璃馬)의 입에서는 박추하(縛芻河)23)구역에서는 박차하(博叉河)라고 하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 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서북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의 북쪽에 있는 파지사자(頗胝師子)의 입에서는 사다하(徙多河)24)구역에서는 사타하(私陀河)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 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동북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혹은 땅 속으로 잠겨 흐르다가 적석산(積石山)25)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 곧 사다하의 물줄기가 되니, 이것이 중국 황하(黃河)의 원천이라고도 한다.
때로 윤왕(輪王)의 시운(時運)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섬부주 땅에는 네 명의 군주가 나온다. 남쪽은 상주(象主)의 영역인데 덥고 습기 찬 것이 코끼리에게 좋다. 서쪽은 보주(寶主)의 영역인데 바다에 임해 있어 보배로 가득 차있다. 북쪽은 마주(馬主)의 영역인데 춥고 풍세가 세찬 것이 말에게 좋다. 동쪽은 인주(人主)의 영역인데 온화하고 화창하여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상주의 나라는 사납고 거칠며 학문에 열성적이고 특히 이술(異術)에 능숙해 있다. 복장은 두건을 두르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 머리 모양은 가운데는 상투를 틀었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4방으로 내려뜨렸다. 일족끼리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며 집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
보주의 고을은 예의가 없고 재물을 중시하며, 짧게 만들어진 좌임(左衽)26)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나 콧수염을 길게 기른다. 성곽과 같은 곳에서 거처하며 재물을 불리는 일에 힘쓴다.
마주의 풍속은 천성이 매우 난폭하며, 성정(性情)은 살육을 서슴지 않으며, 모피로 만든 반구형(半球形)의 천막을 치고 새처럼 옮겨다니며 풀을 찾아 목축을 한다.
인주의 땅은 사람들이 기지가 있고 총명하며 인의(仁義)가 밝게 빛난다.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우임(右衽)의 옷을 입으며 수레나 의복에도 질서가 있다. 고향을 떠나 타관살이 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직분에도 법도가 있다.
서(西)ㆍ남(南)ㆍ북(北)의 3주(主)는 동방(東方)을 숭상하는 풍속을 갖고 있어서 자신들이 사는 집과 방의 문은 동쪽으로 열게 되어있으며, 아침에 해가 뜨면 곧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지만 인주의 땅은 남쪽을 존귀하게 여긴다.
지방의 풍속은 각기 서로 다른데 이러한 것들이 그 대체적인 내용이다. 군신이나 상하의 예의, 헌장(憲章)이나 문궤(文軌)의 의식에 이르러서는 인주의 땅은 이에 덧붙일 것이 없다. 마음을 맑게 하고 탐욕에서 벗어나라는 훈계와, 생사를 벗어나는 가르침에 관한 도리는 상주의 나라가 가장 뛰어나다. 이 모든 것들은 전적들 속에서 밝혀 보고,
여러 지방의 풍속을 적은 서적 속에서 물어보고, 고금을 널리 살펴서 견문한 것을 자세하게 고찰한 것이다.
한편, 부처님께서는 서방에서 나셨으나 법은 동국으로 흘렀는데, 통역한 소리가 와전되고 방언의 말이 잘못 전해졌다. 소리가 와전되면 그 뜻을 잃게 되고 말이 잘못 전해지면 곧 이치가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27)라고 한 것은 이치가 어긋나거나 와전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중히 여긴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강건함과 유연함을 지니고 있어 그 성품이 각각 다르며 말소리 또한 같지 않다. 이것은 곧 풍토의 기운이나 습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산물의 상위나, 풍속과 성품의 차별에 대해 인주의 땅에서는 국사(國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며, 마주와 보주의 나라에서도 역사에 자세하게 실려있어서 간략하게나마 말할 수 있다. 상주의 나라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일들이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어떤 책에서는 그 땅은 더위와 습기가 많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그곳의 습속이 인자함을 즐긴다고 싣고 있는 등 지방지들에 실려있는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찌 도(道)에 행장(行藏)28)의 다함이 있겠는가? 다만 세상에는 추이(推移)의 기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법칙을 흠모하여 귀화하거나 은혜를 입으러 찾아오는 사람들, 온갖 험난한 곳을 넘어서 옥문관(玉門關)29)을 두드리며 4방의 진귀한 물건을 바치며 천자가 기거하는 붉은 궁궐 문에 절하는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런 까닭에 도를 찾아서 멀리 여행을 하며 가르침을 구하는 틈틈이 여러 곳의 풍토를 적어두었던 것이다.
흑령(黑嶺)30) 동쪽 지역은 한결같이 오랑캐의 습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비록 융인(戎人)과 같은 관습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부족들마다 무리를 이루어 경계를 긋고 독립적으로 살며 대개 그 땅에서 토착한다. 성곽을 만들거나 농업ㆍ목축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성품은 재화를 중시하며, 그 습속은 인의(仁義)를 경시한다. 혼인에는 정해진 법도도 없고 존비(尊卑)의 질서도 없다. 부인의 말이 힘을 가지며 남자의 지위는 낮다. 죽으면 그 유해를 태우며 상기(喪期)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얼굴을 상처 내고 귀를 자르며31) 머리를 자르고 옷을 찢는다. 그리고 수많은 가축을 도살해서 혼령에게 제사지낸다. 길한 일에는 흰옷을 입고 흉사에는 검은 옷을 입는다.
풍속이 서로 비슷하여 간략하게 몇 가지를 들어보았다. 그러나 정치 제도는 각기 다르므로 그 지역에 따라 달리 서술하겠다. 그리고 인도의 풍속에 대해서는
뒤에 말할 것이다.
고창(高昌)의 옛 땅32)을 출발하여 가까운 곳부터 시작한다면 곧 아기니국(阿耆尼國)구역에서는 언기(焉耆)라고 한다이 있다.
1) 아기니국(阿耆尼國)
아기니국33)은 동서로 6백여 리이며 남북으로 4백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大都城]은 둘레가 6~7리인데 4면으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길이 험하여 방어하기가 쉽다. 샘 줄기가 서로 교차하여 흐르므로 물을 끌어다 밭을 만들었다. 땅은 기장ㆍ보리ㆍ향조(香棗)34)ㆍ포도ㆍ배ㆍ능금 등 여러 과실을 심기에 적당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풍속은 순박하고 정직하다.
문자는 인도의 것을 모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다소의 증감35)이 있다. 모직 옷[氈褐]을 입으며, 짧은 머리를 하고 두건을 쓰지 않는다. 화폐로는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 왕은 그 나라 사람이다. 용맹하지만 계략을 세우는 데는 어둡고 스스로 병사를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기를 좋아한다. 국가에는 기강이 없고 법은 정비되어있지 않다.
가람은 10여 곳이고 승도(僧徒)는 2천여 명인데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36)를 배우고 익힌다. 불경의 교리와 계율은 일찍부터 인도의 것을 준수하였는데, 배우는 모든 사람은 그 문장을 가까이하여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힌다. 계행과 율의가 정결하고 깨끗하여 부지런히 힘쓰지만, 세 가지 정육(淨肉)37)을 먹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며 점교(漸敎)38)에 머물고 있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가 작은 산 하나와 두 개의 큰 강을 넘으면 서쪽에 평원이 나오는데, 그로부터 7백여 리를 더 가다 보면 굴지국(屈支國)구역에서는 구자(龜玆)라고 한다에 이르게 된다.
2) 굴지국(屈支國)
굴지국39)은 동서로 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6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7~18리이다. 땅은 기장과 보리 농사짓기에 좋고 메벼가 자라며 포도와 석류가 난다. 배와 능금, 복숭아와 앵두가 많으며, 황금과 동과 철과 납과 주석이 그 땅에서 난다. 기후는 온화하고 풍속은 질박하다.
문자는 인도에서 가져다 쓰고 있으며 다소의 개변(改變)이 있다. 특히 관현기악(管絃伎樂)에 관해서는 여러 나라에 그 이름이 높다. 비단이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으며 머리를 짧게 잘랐고 두건을 썼다. 화폐로는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 왕은 굴지국 종족에서 나왔는데 지모(智謀)가 뛰어나지 못하여 세력이 강한 신하에게 핍박받고 있다. 자식을 낳으면 나무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속이 있다.
가람의 수는 백여 곳이며 승도는 5천여 명으로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익히고 배우고 있다. 불경의 교리와 계율은 곧 인도에서 배워 와서 따르고 있는데, 그들이 익히고 낭독하는 것은 바로 인도의 원문이다. 역시 점교에 머물고 있으며 세 가지 정육을 먹는다. 계행이 청결하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사람들은 다투어 공덕을 쌓는다.
나라의 동쪽 변경에 있는 성의 북쪽에 천사(天祠)40)가 있다. 천사 앞에는 대용지(大龍池)가 있는데, 온갖 용들이 모습을 바꿔 가면서 암말과 서로 어울리다가 마침내 준마[龍駒]를 낳는다. 준마는 너무나 사나워서 쉽게 길들이지 못하지만 준마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는 길들여서 타고 다닐 수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 나라에는 훌륭한 말이 많이 생산된다.
옛 선현들41)의 말에 의하면, 근래에 금화(金花)42)라고 불리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용을 감복시켜서 타고 다녔다. 왕이 장차 숨을 거두려할 때 용의 귀에 채찍이 닿자 용은 그로 인해 숨어 들어가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 안에 우물이 없어서 이 연못의 물을 끌어다 써왔었는데, 용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여러 부녀자들과 몰래 어울렸다가 아이를 낳았으니, 그 아이는 굳세고 용감하여 달리는 말을 쫓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점차로 퍼져서 결국 사람들은 전부 용의 종자가 되었다. 자신들의 힘을 믿고 위세를 부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돌궐족43)을 끌어 들여서 그 성의 사람들을 죽였는데,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육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 성은 황무지가 되었으며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고 말았다.
황성(荒城)의 북쪽 40여 리를 가면 산기슭을 접하면서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가람이 있는데 똑같이 조호리(照怙釐)44)라고 이름하지만 동서(東西)의 위치에 따라서 각기 동조호리ㆍ서조호리 라고 불린다. 불상의 장엄함은 도저히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승도들은 청정하게 재계하며 부지런히 정진한다. 동조호리(東照怙釐)의 불당(佛堂) 안에 옥석(玉石)이 있는데, 면적은 2척쯤 되며 황백색을 띠고 있어서 마치 대합조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에는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데45) 길이는 1척 8촌(寸)이고 너비는 약 6촌 남짓 된다.
재일(齋日)에는 등불을 환하게 밝히기도 한다.
대성(大城)의 서문(西門) 밖 길에는 좌우에 각각 불상이 서 있는데, 높이는 90여 척이다. 이 불상 앞에서 5년에 한 차례씩 대회(大會)46)가 열린다. 해마다 추분(秋分)의 수십 일 동안 온 나라의 모든 승도들이 빠짐없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데,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인다. 그들은 세속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서 재계(齋戒)를 받들어 모시며 경을 받고 법을 청해 듣는데, 이렇게 하루종일 하여도 지칠 줄 모른다. 모든 승가람의 장엄 불상들은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지고 비단으로 장식되어 가마에 실리는데 이것을 행상(行像)47)이라고 하며, 이런 가마들이 수천 대 동원되어 집회의 장소에 모여든다. 언제나 매달 15일과 그믐에는 국왕과 대신이 국사를 의논하는데, 고승을 방문한 뒤에야 이를 선포한다.
회장(會場)의 서북쪽으로 강을 건너면 아사리이(阿奢理貳)당(唐)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라고 한다가람48)에 이른다. 이곳의 뜰과 건물이 널찍하게 탁 트였으며 불상은 솜씨 좋게 장식되어 있다. 승도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조용하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이 들었고 덕이 있으며 석학인 데다 재주도 높아, 뛰어난 인재들이 멀리서부터 이들의 뜻을 사모하여 이곳에 모여들었다. 국왕과 대신들, 그리고 서민과 부호들은 4사공양(事供養)49)을 해오면서 오래 전부터 경배를 더해 오고 있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이 나라의 선왕(先王)은 3보를 숭배하고 공경하였다. 그가 장차 여러 지방을 유람하며 부처님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예배하고자 하여 동생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국사를 돌봐 줄 것을 명하였다. 그 동생은 명령을 받은 뒤 남몰래 스스로 거세하여 훗날 생길 변고(變故)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거세된 자신의 남근을 금상자에 넣어 봉한 뒤에 왕에게 가지고 가서 바쳤다.
왕이 물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동생이 답하였다.
“돌아오시는 날에 열어 보십시오.”
왕은 이것을 받아서 집사에게 맡기고 군사를 딸려 지키도록 하였다.
그 후 왕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자 과연 모반을 일으키려는 어떤 자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명하셨지만 왕의 동생은 왕궁 안에서 음란한 짓들을 하며 지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진노하여 동생을 엄벌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동생이 말하였다.
“감히 죄를 피하여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금상자를 한번 열어 보십시오.”
왕이 곧 그것을 열고서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거세된
남근이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이 괴이한 물건으로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냐?”
동생이 대답하였다.
“왕께서 옛날 4방으로 순례를 떠나실 때에 저에게 대신 국사를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저는 분명 참화(讒禍)가 있을 것임을 염려해서 스스로 거세를 하여 밝히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과연 증거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부디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서 동생에 대한 애정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왕의 동생이 후궁을 출입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후에 왕의 동생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5백 마리의 소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소들을 거세하려던 길이었다.
그는 이 광경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나 같은 처지의 중생을 만나니 감회가 더하는구나. 내가 지금 불구가 된 것도 어찌 숙업(宿業)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서 그는 재물을 주고 이 소떼들을 샀다. 그러자 자선(慈善)의 힘으로 인하여 남성(男性)이 점차 본래대로 회복되었다. 그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뒤에는 결코 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동생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왕이 이를 기이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하여 곧 가람을 짓게 하여 그의 아름다운 자취를 널리 알리고 미담을 후세에 전하게 한 것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6백여 리를 가면 작은 모래사막이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면 발록가국(跋祿迦國)구역에서는 고흑(姑黑) 또는 극흑(亟黑)이라고 한다에 이르게 된다.
3) 발록가국(跋祿迦國)
발록가국50)은 동서로 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이르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5~6리이다. 토산품이나 기후,51) 사람들의 성품이나 풍속, 그리고 문자와 법칙은 굴지국의 것과 똑같으며 언어는 조금 다르다.52) 모직과 베 제품은 아주 섬세하여 이웃 나라에서 귀중히 여길 정도이다. 가람의 수는 열 곳이고 승도의 수는 천여 명에 이른다.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익히고 있다.
나라의 서북쪽으로 3백여 리쯤에 있는 모래사막을 건너면 능산(凌山)53)에 이른다. 이곳은 곧 총령(蔥嶺)의 북원(北原)이다. 많은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산골짜기에는 눈이 쌓여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얼음이 얼어있다. 이따금 얼음이 녹을 때도 있지만 이내 다시 결빙된다. 길은 몹시 험하고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사나운 용이 지나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많으므로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은 검붉은 색의 옷을 입거나 조롱박을 갖고 있거나 큰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것을 거스르면 재난을 만나게 되는데, 거센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고 모래가 휘몰아치며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진다. 이런 재난을 만나게 되면 죽게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산길을 4백여 리 가다 보면54) 대청지(大淸池)또는 열해(熱海)라고 하고 또는 함해(鹹海)라고도 한다55)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는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4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많은 물줄기들이 교차하며 모여든다. 물은 청흑색을 띠었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그 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비록 어류가 많으나 감히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청지(淸池)의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엽수성(素葉水城)56)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이고 여러 나라의 장사치 오랑캐[商胡]57)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땅은 기장과 보리, 포도에 적합하며 숲은 우거져 있지 않다. 바람이 차서 사람들은 모직 옷[氈褐]을 입는다.
소엽의 서쪽으로는 수십 개의 외딴 성들이 있는데 각 성마다 각자의 우두머리를 옹립하고 있다. 비록 서로 명령을 내리거나 받지는 않지만 모두가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소엽수성에서 갈상나국(羯霜那國) 사이의 땅 이름을 솔리(窣利)58)라고 하며 사람들 또한 그렇게 불린다. 문자와 언어59)도 그 명칭에 의거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자원(字源)은 간략하며 본래 20여 개의 문자를 썼다가 점차 어휘가 늘어나서 언어의 사용이 더욱 다양해져 갔다.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문장은 세로로 읽는다. 서로 전수하는데, 스승과 제자 관계가 바뀌지 않는다.
의복은 털옷이나 고운 무명을 입는다. 위ㆍ아래 옷의 품은 좁으며 머리를 가지런하게 하여 정수리를 드러내거나 혹은 모두 삭발하여 비단을 이마에 두른다. 그들의 체형은 크지만 성품은 겁이 많으며, 풍속은 경박하고 참되지 못하다. 남을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많으며 대체적으로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다. 부자간에도 이익을 계산하며 재산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높고 낮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없으며 비록 부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옷과 음식이 거칠고 초라하며, 밭을 일구는 자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 반쯤 섞여 있다.
소엽성에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천천(千泉)60)에 이른다. 천천은 그 땅이 4방 2백여 리에 달하는데, 남쪽으로는 설산을 바라보고 다른 3면은 평지에 접하고 있다.
그 땅은 물이 많아서 비옥하고, 숲은 울창하여 나뭇가지가 4방으로 퍼져 있다. 음력 3월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운 비단과 같다. 샘이나 연못이 천(千) 곳이나 있어서 천천(千泉)이란 이름이 붙었다.
돌궐의 극한(可汗)61)이 언제나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속에는 사슴떼들도 있었다. 그런데 사슴들은 방울과 고리 등으로 갖가지 장식을 하였으며, 길이 들어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놀라 달아나지도 않았다. 극한은 이 사슴들을 사랑하여서 군속들에게 명하기를, 사슴을 살해하면 그 죄를 물어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슴떼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천천의 서쪽으로 140~150리 가다 보면 달라사성(呾邏私城)62)에 도착한다. 성 둘레는 8~9리이고 여러 나라들의 장사치 오랑캐들이 한데 뒤섞여 살고 있다. 땅과 기후는 소엽과 거의 같다.
남쪽으로 다시 10여 리를 더 가다 보면 작은 외딴 성이 나온다. 이곳에는 3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본래 중국인들이다.63) 옛날에는 돌궐족에게 약탈당하였지만 후에는 마침내 힘을 하나로 모아서 나라를 세워 함께 이 성을 지켰다. 그 성 안의 사람들의 주거나 의복, 행동거지는 돌궐족과 같지만 말이나 의례 등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백수성(白水城)64)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에 달한다. 토산품이나 기후는 달라사성보다 훨씬 좋다.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공어성(恭御城)65)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5~6리이고 높고 마른땅이나 낮고 습한 땅이나 모두 비옥하며 수목이 울창하다.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노적건국(笯赤建國)에 이른다.
4) 노적건국(笯赤建國)
노적건국66)은 둘레가 천여 리에 달한다. 땅은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초목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번성하며 포도가 많은데 역시 귀히 여겨진다. 성읍은 백여 곳이 있는데 각기 우두머리를 내세우고 있으며, 서로 왕래는 하지만 명령을 내리거나 받지는 않는다. 비록 땅에 경계를 긋고는 있지만, 이 성읍들을 통틀어서 노적건국이라고 한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자시국(赭時國)당나라 말로는 석국(石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5) 자시국(赭時國)
자시국67)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서쪽은 엽하(葉河)68)에 접해 있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토지와 기후는 노적건국과 같다. 성읍은 수십 개이며, 각각 우두머리를 세우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다스리는 왕은 없다. 그리고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발한국(㤄敷發反捍國)에 이른다.
6) 발한국(㤄捍國)
발한국69)의 둘레는 4천여 리에 달하며 4방으로 산이 에워싸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가 번창한다. 꽃과 과일이 많으며 양과 말을 기르기에 좋다. 기후는 바람이 차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질은 용맹하다. 언어는 주변 여러 나라들과 다르며, 얼굴은 못생겼다.70) 수십 년 이래 대군주가 없었으며 힘이 있는 부호들이 다투고 있어 서로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강과 벼랑에 의지하고 웅거하여 살아가며 토지를 나누어서 수도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솔도리슬나국(窣堵利瑟那國)에 이른다.
7) 솔도리슬나국(窣堵利瑟那國)
솔도리슬나국71)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쪽으로 엽하(葉河)에 닿아 있다. 엽하는 총령의 북원(北原)에서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흐른다. 강물은 아주 넓고 혼탁하며 물살이 세차고 유속이 매우 빠르다. 땅과 풍속은 자시국과 같다. 스스로 왕을 세우고 있지만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커다란 모래사막이 나온다. 이곳은 물이 완전히 말라 있어서 풀이 전혀 자라지 않는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국경을 가늠하기 어려우며, 아득하게 큰 산을 바라보며 유골을 찾아내어 이로써 방향을 알게 되고 나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삽말건국(颯秣建國)당나라 말로는 강국(康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8) 삽말건국(颯秣建國)
삽말건국72)의 둘레는 1,600~1,700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나라의 대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하는데,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나는 보배와 화폐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인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숲은 울창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며 양질의 말[馬]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옷감 짜는 기술이 다른 나라들보다 특히 뛰어나다. 기후는 화창하며 풍속은 사납다.
호국(胡國)들은 이 나라를 중심으로 삼아, 멀거나 가까운 나라들이 모두 이 나라의 의례 등을 본보기로 삼는다. 왕은 호기롭고 용감하여73) 인근의 국가들은
그의 명을 받고 있다. 병사와 말이 강성하며 대부분이 자갈(赭羯)74)들이다. 자갈들은 그 성품이 용맹하여 죽음을 마치 귀향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므로 싸움에 임해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다 보면 미말하국(弭秣賀國)당나라 말로는 미국(米國)이라고 한다에 도착한다.
9) 미말하국(弭秣賀國)
미말하국75)의 둘레는 4~5백 리이며 강의 사이에 있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며, 토지와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가면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당나라 말로는 조국(曹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10)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
겁포달나국76)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3백여 리 가다 보면 굴상이가국(屈居勿反霜居聲儞迦國)당나라 말로는 하국(何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11) 굴상이가국(屈霜儞迦國)
굴상이가국77)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에서 서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갈한국(喝捍國)[당나라 말로는 동안국(東安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12) 갈한국(喝捍國)
갈한국78)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로부터 서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포갈국(捕喝國)당나라 말로는 수안국(守安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13) 포갈국(捕喝國)
포갈국79)의 둘레는 1,600~1,700리에 달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로부터 서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벌지국(伐地國)당나라 말로는 서안국(西安國)이라고 한다80)에 이른다.
14) 벌지국(伐地國)
벌지국81)의 둘레는 4백여 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5백여 리 가다 보면 화리습미가국(貨利習彌伽國)에 이른다.
15) 화리습미가국(貨利習彌伽國)
화리습미가국82)은 박추하(縛芻河)의 양 언덕을 따라서 있으며 동서로
20~30리,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한다. 토양과 풍속은 벌지국과 같지만 말은 조금 다르다.83)
삽말건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갈상나국(羯霜去聲那國)당나라 말로는 사국(史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16) 갈상나국(羯霜那國)
갈상나국84)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길은 험난하고 시내를 따라 난 길은 위험하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오지 않고 또한 물과 풀이 거의 없다.
동남쪽으로 산길을 3백여 리 가다 보면 철문(鐵門)에 들어가게 된다. 철문은 좌우로 산을 끼고 있는데 산은 매우 높고 험하다. 비록 길이 있기는 하지만 좁은데다가 험하기까지 하다. 양쪽으로 돌로 만든 벽이 있는데 그 색이 철과 같다. 문짝에는 철로 만든 꺾쇠가 달려있다.85) 철로 만든 많은 방울은 여러 문짝에 매달려 있다. 이렇게 험하기 때문에 ‘갈상나’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철문을 나오면 도화라국(覩貨邏國)86)에 이른다구역에서는 토화라국(吐火羅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이 땅은 남북으로 천여 리이고 동서로 3천여 리에 달한다. 동쪽은 총령(葱嶺)으로 막혀 있고 서쪽은 파라사(波刺斯)87)에 접해 있다. 남쪽은 대설산(大雪山)이 있고 북쪽은 철문에 의거해 있다.
박추하가 그 나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수백 년 이래로 왕족은 그 후사가 끊겼으며88) 우두머리들은 서로 힘을 겨루어 각각 제멋대로 군장(君長)을 내세우고 있다. 강과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웅거하고 있으며 27국(國)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록 경계를 긋고 지역을 나누고는 있지만 모두 다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기후는 본래부터 따뜻하며 질병 또한 많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장마가 계속 이어지므로 이 지역의 남쪽인 남파(濫波) 이북에 위치한 나라들의 풍토에는 역시 열병[溫疾]이 많다. 승도들은 12월 16일에 안거에 들어가서 3월 15일에 안거를 해제한다. 이것은 모두 비가 많은 것에 기인한 것이며 또한 가르침에 적당한 시기를 따른 것이다.
이 나라의 풍속은 사람들이 겁이 많고 겉모습이 비루하여도 어느 정도 신의(信義)는 알고 있어서 심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거지들은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르다. 25개의 자모(字母)를 갖고 점차 결합시키면서 모든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89) 글은 가로쓰기를 하는데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향한다. 문서와 기록이 점점 많아져서 솔리국(窣利國)보다 더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운 무명옷[氎]을 입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褐]을 입는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화폐를 사용하며 모양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박추하를 따라서 북쪽 하류로 내려가면 달밀국(呾蜜國)에 이른다.
17) 달밀국(呾蜜國)
달밀국90)은 동서로 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가람은 10여 곳이며 승도들은 천여 명에 이른다. 모든 솔도파구역에서는 부도(浮圖)라고 하고 또는 투파(鍮婆)ㆍ탑파(塔婆)ㆍ사투파(私鍮簸)ㆍ수두파(藪斗波)라고 하는데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와 불존상(佛尊像)은 매우 신비롭고 기이하며 영험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다 보면 적악연나국(赤卾衍那國)에 이른다.
18) 적악연나국(赤卾衍那國)
적악연나국91)은 동서로 4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가람은 다섯 곳이고 승도들은 매우 적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홀로마국(忽露摩國)에 도달한다.
19) 홀로마국(忽露摩國)
홀로마국92)은 동서로 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왕은 해소돌궐(奚素突厥)93)족이다. 가람은 두 곳이며 승도들은 백여 명이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수만국(愉朔俱反漫國)에 이른다.
20) 수만국(愉漫國)
수만국94)은 동서로 4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6~17리 정도 된다. 왕은 해소돌궐족이며 가람은 두 곳이고 승도의 수도 아주 적다. 서남쪽으로 박추하에 임하여 가다 보면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에 이른다.
21)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
국화연나국95)은 동서로 2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가람은 세 곳이며 승도의 수는 백여 명이다. 동쪽으로 가면 확사국(鑊沙國)에 이른다.
22) 확사국(鑊沙國)
확사국96)은 동서로 3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6~17리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돌라국(珂咄羅國)에 이른다.
23) 가돌라국(珂咄羅國)
가돌라국97)은 동서로 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동쪽으로는 총령에 접해 가다 보면 구몌타국(拘謎莫閉反陀國)에 이른다.
24) 구몌타국(拘謎陀國)
구몌타국98)은 동서로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2백여 리이며, 대총령(大葱嶺)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20여 리에 달한다.
서남쪽으로는 박추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박추하를 건너면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ㆍ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ㆍ음박건국(淫薄健國)ㆍ굴랑나국(屈浪拏國)ㆍ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ㆍ발리갈국(鉢利曷國)ㆍ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ㆍ갈라호국(曷羅胡國)ㆍ아리니국(阿利尼國)ㆍ몽건국(瞢健國)에 이른다. 활국(活國)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다 보면 활실다국(闊悉多國)과 안달라박국(安呾邏縛國)에 이르는데99) 이것에 관한 내용은 회기(廻記)100)에 있다. 활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다 보면 박가랑국(縛伽浪國)에 이른다.
25) 박가랑국(縛伽浪國)
박가랑국101)은 동서로 50여 리이고 남북으로 2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남쪽으로 가다 보면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에 이른다.
26)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
흘로실민건국102)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이다. 서북쪽으로 가면 홀름국(忽懍國)에 이른다.
27) 홀름국(忽懍國)
흘름국103)의 둘레는 8백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5백여 명이다. 서쪽으로 가면 박갈국(縛喝國)에 이른다.
28) 박갈국(縛喝國)
박갈국104)은 동서로 8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4백여 리이다. 북쪽은 박추하에 접해 있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가리켜서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고 부른다. 그 성은 매우 견고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 땅에서 나는 토산품의 종류는 참으로 많으며, 수생 및 육생의 갖가지 꽃들은 그 종류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가람은 백여 곳에 있으며 승도의 수도 3천여 명에 달하는데 모두가 소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105)
성 밖의 서남쪽에는 납박(納縛)당나라 말로는 신(新)이라고 한다승가람106)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지은 것이다. 대설산의 북쪽에 살고 있는 논(論)을 지은 논사107)들은 오직 이 가람만이 변함 없이 그 업(業)이 아름답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상은 이름난 보배로 조영되어 있고 당우(堂宇)는 진귀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들의 군주들은 이것을 손에 넣고자 공격하여 겁탈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가람에는 본래 비사문천상(毘沙門天像)108)이 있는데 그에게는 신령스러운 영험이 있어서 그의 보이지 않는 힘이 이 가람을 수호하고 있었다.
근래에 돌궐의 엽호극한(葉護可汗)의 아들인 사엽호극한(肆葉護可汗)109)이 그 부락의 힘을 모아 그 군사들을 이끌고 가람을 습격하여 귀중한 보배들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가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야영을 하였다.
그날 밤 그의 꿈에 비사문천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너는 어떤 힘으로 감히 가람을 파괴하고자 하느냐?”
그리고 나서 긴 창으로 찔러 극한의 등과 배를 관통하였다. 극한이 놀라서 깨어났는데 몹시 마음이 아팠다. 결국 군속들에게 꿈에서 본 재앙의 징조를 알린 뒤 서둘러 여러 스님들을 청하여 참회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내 그의 목숨은 끊어지고 말았다.
가람 안의 남쪽 불당 속에는 부처님의 조관(澡罐)110)이 있는데 한 되의 양을 넉넉하게 담을 만하고, 온갖 색깔이 현란하게 아롱거려서 금인지 돌인지 이름 붙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부처님의 치아[佛牙]도 있는데, 그 길이는 1촌(寸) 남짓하고 너비는 8~9푼[分]이 되며, 황백색을 띠었고
광택이 있고 깨끗하다.
또 부처님의 빗자루[掃箒]가 있는데 가사초(迦奢草)111)로 만들어졌고, 길이는 2자[尺] 정도 되고 둘레는 7촌 정도 되며, 그 손잡이는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6재일(齋日)112)이 될 때마다 승속(僧俗)이 모두 모여서 이 세 가지 물건에 공양을 베푸는데 그 정성스러움에 감응하여 이따금 빛을 발하기도 한다.
가람의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나 되며, 금강니(金剛泥)가 칠해져 있고 온갖 보배가 어우러져 장식되어 있다. 그 속에 사리가 있는데 때때로 신령스러운 빛이 번쩍이기도 한다. 가람의 서남쪽에는 정사[精盧]가 있는데 세워진 이래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 정사에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도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들어 기거하고 있는데, 그 중 4과(果)113)를 증득114)한 자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므로 모든 나한들이 장차 열반에 들려 할 때면 신통력을 나타내어 대중들에게 이를 알려서 곧 솔도파를 세우게 하였다. 솔도파는 수백여 개에 달하여 그 기단이 서로 잇닿아 있을 정도였다. 성과(聖果)115)를 증득하였다고는 해도 끝내 신통한 변화를 나타내지 않은 자들의 솔도파의 수는 대략 수천 개를 헤아리지만 봉기(封記)를 세우지는 않았다. 지금은 승도가 백여 명에 이르는데 밤낮으로 정진하므로 범인(凡人)인지 성인(聖人)인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제위성(提謂城)에 이르며,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를 가다 보면 파리성(波利城)이 있는데116) 성 안에는 각각 하나의 솔도파가 있으며 높이는 3길[丈] 남짓 된다.
옛날 여래께서 불과(佛果)117)를 처음으로 증득하신 뒤 보리수에서 일어나셔서 녹원(鹿園)118)으로 나아가셨다. 그때 두 명의 장자가 부처님의 위광(威光)을 만나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노자를 모두 털어서 초밀(麨蜜)119)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 인간과 하늘의 복을 설해주기를 청하니, 최초로 5계(戒)와 10선(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법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공양을 올려야 할 바를 청하니, 여래께서 마침내 그 머리털과 손톱을 그들에게 주셨다.
두 장자가 장차 본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경례(敬禮)의 의식을 올려야 할 것인지를 여쭈자 여래께서는 승가지(僧伽胝)구역에서는 승기리(僧祗梨)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0)를 반듯하게 접어서 아래에 깔고 다음에는 울다라승(鬱多羅僧)121)을, 그 다음에는 승각기(僧却崎)구역에서는 승기지(僧祗支)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2)를 쌓고 이어서
발우를 엎어놓은 뒤에 석장(錫杖)을 세우셨다.
이와 같은 차례로 솔도파가 만들어지니 두 사람은 명을 받들고 각자 자기의 성으로 돌아가서 성지(聖旨)의 의식을 본떠서 훌륭하게 세웠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 법에 있어서 최초의 솔도파인 것이다.
성의 서쪽으로 7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또 있는데 높이는 2길[丈] 남짓하다. 옛날 가섭파부처님 시절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큰 성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서 설산의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면 예말타국(銳秣陀國)에 이르게 된다.
29) 예말타국(銳秣陀國)
예말타국123)은 동서로 50~60리이고 남북으로 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10여 리이다. 서남쪽으로 가다 보면 호식건국(胡寔健國)에 이른다.
30) 호식건국(胡寔健國)
호식건국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다. 산과 하천이 많고 좋은 품질의 말[馬]이 많이 난다.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달랄건국(呾剌健國)에 이르게 된다.
31) 달랄건국(呾剌健國)
달랄건국124)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0~60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서쪽으로는 파라사국(波剌斯國)의 경계와 닿아 있다. 박갈국(縛喝國)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게직국(揭職國)에 이르게 된다.125)
32) 게직국(揭職國)
게직국126)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이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4~5리이다. 토지는 척박하고 언덕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꽃과 과일이 적고 콩과 보리가 많이 자란다. 기후는 몹시 춥고 풍속은 강건하고 용맹스럽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3백여 명이 있는데 모두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동남쪽으로 가면 대설산(大雪山)에 들어가게 되는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바위와 봉우리가 몹시 위험스럽다. 바람과 눈이 연이어 불어닥치며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쌓인 눈이 계곡을 메우고 있으며 길이 좁아서 걸어가기가 어렵다.
산신과 도깨비들은 사람들에게 제멋대로 난폭하게 굴거나 재앙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강도 떼가 횡행하며 사람 죽이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도화라국(覩貨邏國)의 경계를 벗어나서 범연나국(梵衍那國)에 이르게 된다.
33) 범연나국(梵衍那國)
범연나국127)은 동서로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설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128) 사람들은 산의 계곡에 의지하고 산의 형세를 따라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벼랑에 의지하고 계곡에 걸쳐있다. 길이는 6~7리에 달하며 북쪽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다. 보리가 자라며 꽃과 과일은 거의 나지 않는다. 목축하기에 적합하여서 양과 말이 많다. 기후는 매우 추우며 풍속도 강건하고 난폭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죽옷[皮褐]을 입는데 이 또한 적합하다.
문자와 교화[風敎]와 화폐의 사용은 도화라국과 같지만129) 언어는 조금 다르며 겉모습은 아주 똑같다. 부처님에 대한 두터운 믿음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돈독하다. 위로는 3보에서 아래로는 백신(百神)에 이르기까지130) 정성과 마음을 온통 기울여서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장사꾼은 자신들이 오갈 때면 천신(天神)이 길조를 나타내어 좋은 신통변화를 보여주도록 기원하며 복덕을 구한다. 가람의 수는 열 곳이고 승도는 수천 명에 이르며 소승의 설출세부(說出世部)131)를 배우고 있다.
왕성 동북쪽 산의 후미진 곳에 돌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입상(立像)132)이 있다. 높이는 140~150척이며 금색이 찬란하게 빛나고 온갖 보배로 장식되어 눈을 어지럽힌다. 동쪽에 가람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세운 것이다. 가람 동쪽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부처님의 입상133)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한다. 몸을 가누어 각기 따로 주조한 뒤에 그것을 모두 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성의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가람에는 부처님의 입열반와상(入涅槃臥像)이 있는데 길이는 천여 척에 달한다. 왕이 매번 이곳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데 위로는 자신의 처자로부터 아래로는 나라의 귀중한 보물에 이르기까지 창고를 완전히 열어 베풀며 다시금 자기 몸을 다하여 베풀기도 한다. 군신과 관료들도 승려들에게 죄를 사해주기를 빌면서 베푼다. 이와 같은 일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와상이 안치된 가람의 동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대설산을 건너게 된다. 다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내와 연못에 이르게 되는데 연못의 물은 거울처럼 맑고 나무들은 짙푸르고 무성하다. 승가람이 있는데 그곳에는 부처님의 치아와 겁초(劫初)134) 때의 독각(獨覺)의 치아가 있다. 길이는 약 5촌(寸)정도이고 너비는 4촌에서 조금 모자란다. 또한 금륜왕(金輪王)의 치아도 있는데 길이는 3촌, 너비는 2촌이다. 상낙가박사(商諾迦縛娑)135)구역에서는 상나화수(商那和修)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대아라한이 지니고 다녔던 쇠발우도 있는데 그 발우의 크기는 8~9되[升]의 양이 들어갈 만하다. 성현의 이러한 세 가지 유물은 모두 황금으로 만든 함 속에 넣어져 있다. 그리고 상낙가박사의 9조(條)136) 승가기의도 있는데 이것은 진붉은 색의 설낙가초(設諾迦草) 껍질을 겹쳐서 만든 것이다.
상낙가박사는 아난의 제자이다. 전생에서 그는 설낙가초로 만든 옷을 안거가 해제되는 날 승가의 대중에게 보시하였다. 이 복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5백 생 동안 중음(中陰)137)으로 있거나 생음(生陰)으로 있거나 간에 언제나 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신으로서 태생하여 나왔을 때에도 그의 몸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있었고 옷도 그 몸에 따라 늘어났다. 아난의 제도를 받아 출가하게 되었을 때는 이 옷도 법복으로 변하였으며 구족계를 받을 때에 이르러서는 이내 9조 승가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적멸을 증득하고자 하여 변제정(邊際定)138)에 들었을 때 그는 지원력(智願力)을 발하여 이 가사가 석가모니의 유법(遺法)이 다하고 법이 다할 때까지 남은 후에야 비로소 변하여 없어지게 하였다. 지금은 약간 손상되어 있을 뿐이니 실로 징험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다 보면 설산에 들어가게 되며 흑령(黑嶺)을 넘어서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이르게 된다.
34) 가필시국(迦畢試國)
가필시국139)의 둘레는 4천여 리에 달하며 북쪽으로는 설산을 등지고 있고 나머지 3면이 흑령(黑嶺)에 접해 있다. 나라의 큰 도성140)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곡식과 보리가 잘 자라며 과실나무가 많고 또 좋은 품질의 말과 울금향(鬱金香)141)이 난다. 다른 여러 나라들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이 나라에 모여 있으며
기후는 바람이 차고 사람들의 성품은 거칠다. 언사는 천박하고 혼인도 상스럽고 난잡하다.
문자는 도화라국과 거의 똑같지만 습속이나 언어, 교화는 조금 다르다. 고운 무명으로[毛氎]으로 만든 옷이나 가죽옷[皮褐]을 입는다.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의 화폐를 사용하는데 규격과 모양은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다.
왕은 찰제리종인데 지략이 있고 성격은 용맹하여 주변 나라들의 변경을 위협하여 10여 개국을 다스린다.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며 3보를 공경한다. 해마다 1장 8척의 은불상을 만들며 또 무차대회도 함께 마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고, 의지할 곳 없는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지혜롭게 보시한다.
가람은 백여 곳이 있고 승도는 6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다. 솔도파와 승가람은 매우 넓으며 엄숙하고 깨끗하다. 천사(天祠)의 수는 열 곳이 있으며 이교도를 믿는 사람은 천여 명이 되는데 온몸을 완전히 벌거벗은 이[露形]도 있고, 몸에 회반죽을 바르거나[塗灰]142) 해골을 이어서 머리장식으로 만들어 쓴 사람들[連絡髑髏]143)도 있다.
큰 성의 동쪽으로 3~4리를 가다 보면 북쪽 산 아래에 거대한 가람144)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3백여 명이다. 이들은 모두 소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건타라국(健馱邏國)의 가니색가왕(迦膩色迦王)145)은 그 위력이 주변 나라들에 미치고 먼 곳에까지 그의 교화가 두루 퍼졌는데, 병사를 일으켜서 영토를 확장하여 총령의 동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황하(黃河) 서쪽에 사는 오랑캐들은 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인질을 보내서 볼모[質子]로 잡혀 있게 하였다.
가니색가왕은 볼모를 얻자 특별히 예를 갖추어 추위와 더위에 거처를 바꾸어 가며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겨울에는 인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가필시국으로 돌아왔으며 봄과 가을에는 건타라국에 머물렀다. 그래서 볼모의 세 계절 거처에 각각 가람을 지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며 바로 여름을 지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방의 벽에는 볼모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용모와 복식은 중국의 것과 똑같았다.
그 후 볼모는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마음은 이전에 거처하던 곳에 있었다. 그는 몸은 비록 산천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변함없이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지금의 승려들은 안거에 들어갈 때와 해제할 때마다 매번 법회를 크게 열어서 여러 볼모들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선(善)을 행하는데, 그 일은 끊어지지 않고 전해져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람의 불원(佛院) 동문(東門)의 남쪽에 커다란 신왕상(神王像)146)이 있는데 그 상의 오른쪽 발 아래에 보물이 묻혀 있는 구덩이가 있다. 이것은 볼모가 묻은 것으로 그 명(銘)에는 가람이 낡고 무너지게 되면 이 보물을 가져다가 수리하도록 하라고 쓰여 있었다.
한편 인근 변방에 탐욕스럽고 흉폭한 어떤 왕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 가람에 진귀한 보물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고 발굴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신왕(神王)의 관(冠) 속에 있던 앵무새의 상이 갑자기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크게 울어대자 땅이 진동하였다. 왕과 군인들은 그 기세에 놀라 물러나다가 쓰러지고 엎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허물을 참회하고 돌아갔다.147)
가람의 북쪽 산꼭대기에는 석실(石室)이 몇 곳 있는데, 이곳은 볼모가 선정(禪定)을 익히던 곳이다. 그 속에도 여러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 옆의 명(銘)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곳은 야차(藥叉)148)가 지키고 있다. 만일 이곳에 있는 보물을 꺼내서 가져가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야차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자(師子)나 왕뱀ㆍ맹수ㆍ독충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켜서 진노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감히 그곳을 공격하여 보물을 가져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석실의 서쪽으로 2~3리를 가면 큰 산봉우리 위에 관자재보살상(觀自在菩薩像)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극한 정성으로 친견하기를 원하면 보살은 그 상으로부터 미묘한 색신(色身)을 나타내어 행자를 위로해 준다.
큰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면 갈라호라(曷邏怙羅)승가람이 있고 옆에는 백여 척이나 되는 솔도파가 있다. 이따금 재일(齋日)이 되면 빛을 발하기도 하고, 복발(覆鉢)의 세(勢)149) 위의 돌 틈 사이로 흑향유(黑香油)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따금 고요한 밤중에 음악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승가람은 옛날 이 나라의 대신이었던 갈라호라(曷邏怙羅)가
지은 것이다. 그가 승가람을 완성한 뒤에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솔도파에는 아직 사리가 없다. 내일 아침 사리를 바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왕에게 청을 해보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침 일찍 조정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 청하였다.
“어리석고 우둔함을 무릅쓰고 감히 청하고자 하나이다.”
왕이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신이 답하였다.
“오늘 제일 먼저 헌상하는 자가 있다면 부디 그 자의 헌상품을 저에게 하사하여 주소서.”
그러자 왕은 그리하겠다고 답하였다.
갈라호라는 궁궐 문에 우두커니 서서 왕에게 물건을 헌상할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사리병(舍利甁)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대신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헌상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답하였다.
“부처님의 사리입니다.”
대신이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위해 사리병을 지키고 있겠다. 그러니 그대는 먼저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다.”
갈라호라는 왕이 사리를 귀하게 여겨, 앞서 은혜롭게 하사하기로 한 약속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가람으로 달려가서 솔도파에 올라갔다.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한 것인지 그 돌로 만든 복발(覆鉢)이 저절로 열렸다. 대신은 그 속에 사리를 안치하고 난 뒤 재빨리 손을 빼내었지만 옷소매가 걸리고 말았다. 왕은 뒤늦게 사자를 보내어 쫓아가게 하였지만 돌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흑향유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성의 남쪽으로 40여 리를 가다 보면 십폐다벌라사성(霫胥立反蔽多伐剌祠城)150)에 이른다. 대지가 크게 진동하여 산과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있었지만, 이 성의 주위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십폐다벌라사성에서 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아로노산(阿路猱奴高反山)151)에 이른다. 낭떠러지가 가파르기 그지없고 바위 골짜기는 아득하게 깊다. 그 봉우리는 해마다 수백 척씩 더 높아져 조구타국(漕矩吒國)의 수나희라산(䅳士句反下同那呬羅山)과 아득하게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는데 이내 무너져 내렸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본래 수나천신(䅳那天神)이 먼 곳에서 이리로 와 이 산에 머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산에 살고 있던 산신이 화를 내면서 계곡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러자 천신이 말하였다.
“서로 베풀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는구나. 조금이라도 나를 객으로 맞아준다면
이곳은 재보(財寶)로 가득 찰 터인데……. 이제 나는 조구타국의 수나희라산에 가야겠다. 해마다 내가 국왕과 대신의 제사와 헌공을 받을 때마다 자세히 눈여겨보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로노산은 조금씩 높이를 더해갔고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왕성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대설산에 이른다. 산 정상에는 못이 있는데 비를 청하거나 맑은 날을 기원하면 구하는 대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건타라국에 아라한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이 못의 용왕에게 공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점심때가 되면 언제나 신통력을 써서 자신의 승상(繩床)152)에 앉은 채로 허공을 타고 날아올라 용왕에게로 가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시자인 사미가 몰래 승상 아래에 숨어 들어가서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아라한은 때가 되어 용궁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사미를 발견하였다. 용왕은 사미에게도 머물며 공양을 받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용왕은 아라한에게는 하늘의 감로밥[甘露飯]을 공양하였고, 사미에게는 인간세상의 음식을 주었다. 아라한은 밥을 먹고 난 뒤 곧 용왕에게 여러 가지 법의 요체를 설하였다.
한편 사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스승의 발우를 씻었는데 마침 발우에는 쌀알이 몇 알 붙어 있었다. 사미는 그 맛을 보고 나서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쁜 마음을 먹게 되어 스승을 원망하고 용왕에게 분을 품으면서 ‘부디 모든 복의 힘이 이제 나타나서 이 용의 목숨을 끊을지어다.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 왕이 될지어다’라고 소원을 품게 되었다.
사미가 이렇게 소원을 품었을 때 용왕에게 이내 두통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라한이 법을 설하며 가르치고 달래 주자 용왕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를 책하였다. 사미는 분노를 품은 채 용왕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가람으로 돌아가서 지극 정성으로 발원하여 마침내 바라던 대로 그날 밤 목숨을 마치고 대용왕(大龍王)이 되었다.
그는 맹렬한 위력을 날리면서 연못으로 쫓아 들어가 용왕을 죽이고 자신이 이 용궁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용왕에게 딸려 있던 이들을 소유하고 그 통명(統命)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상의 소원대로 폭풍우를 일으켜서 나무들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가람을 파괴하려 하였다. 한편 당시 왕이었던 가니색가왕이
괴이하게 여겨서 아라한에게 이 일의 전말을 물으니, 아라한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곧 용을 달래기 위하여 설산 아래에 승가람을 짓고 높이가 백여 척에 이르는 솔도파를 세웠다. 그러나 용은 지난 세상의 분노를 풀지 못하고 끝내 거친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왕은 널리 구제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용은 분노의 독한 마음에 편승하여 난폭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용왕이 승가람과 솔도파를 여섯 번 파괴하면 일곱 번을 다시 지었다. 마침내 가니색가왕은 공력을 들인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용의 못을 메워 버리고 그 용궁을 허물고자 즉시 병사들을 거느리고 설산 아래에 이르렀다.
그러자 용왕은 매우 두려워하며 늙은 바라문으로 변하여 왕의 코끼리를 못 가도록 잡아당기며 간하였다.
“대왕께서는 지난 세상에 선업의 근본을 닦으셨고 수승한 업인(業因)을 많이 심으셔서 사람의 왕이 되셨으니,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으십니다. 그렇거늘 오늘은 어찌하여 용과 다툼을 벌이려 하십니까? 용이란 것은 축생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라 비천하고 열등한 부류입니다. 그렇지만 큰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힘으로 다툴 수 없습니다. 용은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리며, 허공을 밟고 물 위를 걸어다니므로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왕의 마음에 분노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왕께서는 지금 온 나라의 병사를 일으켜서 한 마리 용과 싸우려고 하십니다. 만일 왕께서 이기신다 하여도 먼 곳에 있는 적을 정복했다는 위엄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며, 패하신다면 대적하지 못한 수치스러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왕을 위하여 생각해 보건대 병사를 데리고 돌아가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니색가왕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용이 곧 못으로 돌아가서 뇌성벽력을 울리니, 폭풍이 쳐서 나무를 뽑아내고 모래와 돌이 비처럼 쏟아졌다.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군마(軍馬)가 놀라 바둥거렸다.
그러자 왕은 곧 3보에 귀의하면서 도움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며 말하였다.
“지난 세상에 심은 많은 복의 힘으로 사람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억센 적을 위험으로 제압하여 남섬부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축생인 용에게 굴복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저의 박복(薄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모든 복의 힘이 오늘 나타나서 두 어깨에 거대한 불꽃과 연기를 내게 하여서 용을 물리치고 바람을 가라앉히며,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열리게 해주소서.”
그리고 나서 왕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각기 돌 하나씩을 짊어지고 가서 용의 못을 메우게 하였다. 그러자 용왕이 다시 바라문으로 변하여
왕에게 거듭 간청하였다.
“저는 바로 이 못의 용왕입니다. 앞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제 귀명(歸命)하겠으니, 오직 왕께서는 가엾이 여기시어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왕께서는 중생을 기르시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분인데 어찌하여 오직 저에게만 악해(惡害)를 가하려 하십니까? 왕께서 만일 저를 죽이신다면 저는 왕과 함께 악도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께서는 목숨을 해친 죄가 있게 되고, 저에게는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품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업보와 선악에 대한 이치는 밝고 분명한 법입니다.”
마침내 왕은 용과 약속하기를 훗날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 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러자 용이 말하였다.
“저는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용의 몸을 받았습니다. 본래 용의 성품이란 사납고 악한 것이어서 제 스스로도 제어하기가 힘이 듭니다. 성내는 마음이 혹 일어난다면 장차 제어하는 것을 잊고 말 터이니, 왕께서 이제 다시 가람을 지어주신다면 감히 허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한 사람을 보내어서 산꼭대기에서 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검은 구름이 일어나면 급히 건퇴(揵槌)153)를 두드리게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소리를 듣고서 악한 마음을 가라앉힐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곧 가람을 다시 지었고 솔도파를 세웠으며,154) 사람을 시켜서 구름의 기미를 지켜보게 하였는데, 이 일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솔도파 속에 한 되[升] 남짓한 여래의 골육사리(骨肉舍利)가 있는데 신통력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느 때인가 솔도파 안에서 홀연히 연기가 일더니 잠시 후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솔도파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지난 뒤 불이 꺼지고 연기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사리를 보게 되었는데, 사리는 흰 구슬이 달린 깃발처럼 되어서 표주(表柱)155)를 빙빙 돌면서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가 높은 구름 사이에서 빙빙 휘감아 돌면서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왕성의 서북쪽으로 커다란 강이 있는데 그 남안(南岸)에는 옛 왕[舊王]의 가람156)이 있다. 안에는 석가보살의 어렸을 때의 젖니가 있는데 길이는 1촌(寸) 남짓하다. 이 가람의 동남쪽으로 또 하나의 가람이 있는데 구왕(舊王)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곳에는 여래의 정수리뼈[頂骨] 한 조각이 있는데 너비는 1촌 남짓하고 황백색이며 모공이 분명하다.
또 여래의 머리카락이 있는데 머리털 색깔은 감청색이고 나선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휘감아 돌려져 있다. 그것을 잡아당겨서 길이를 재면 1척 남짓하고 둥글게 말리면 반 촌(寸) 정도 된다. 6재일(齋日)157)이 될 때마다 왕과 대신은 이 세 가지 물건에 꽃을 뿌리며 공양을 올린다.
정골가람의 서남쪽에 옛 왕비[舊王妃]의 가람이 있는데 그 속에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100여 척에 달한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솔도파 속에는 불사리가 1되[升] 남짓 있는데, 매월 보름이면 그날 밤 둥근 빛을 내뿜는데 노반(露盤)158)이 환히 빛나다가 새벽이 되면 그 빛은 차츰 솔도파 속으로 거두어져 들어간다.
성의 서남쪽에는 비라사락산(比羅娑洛山)당나라 말로는 상견(象堅)이라고 한다159)이 있는데 산신이 코끼리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상견(象堅)이라 부른다고 한다.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상견신(象堅神)이 세존과 1천200명의 대아라한을 받들어 청하였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반석이 있었는데 여래께서는 이곳에 앉으셔서 산신의 공양을 받으셨다. 그 후 무우왕(無憂王)160)이 곧 그 반석 위에 솔도파를 세웠으니, 그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것을 일러서 상견솔도파(象堅窣堵波)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여래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있다고 한다.
상견솔도파의 북산(北山) 바위 아래에 용천(龍泉)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신의 공양을 받고 난 뒤에 아라한과 함께 이곳에서 입을 헹구고 양지(楊枝)161)를 씹던 곳이다. 이 양지가 곧 뿌리내려 지금은 무성한 숲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곳에 가람을 세워서 이름을 비탁거(鞞鐸佉)당나라 말로는 작양지(嚼楊枝)라고 한다라고 붙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골짜기가 잇달아 이어지며 바위와 봉우리들이 가파르고 험하다. 그리하여 흑령을 넘어서 북인도의 경계로 들어서게 되면 남파국(濫波國)에 도달하게 된다북인도의 경계이다.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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