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2권
대당서역기 제2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2. 인도총설(印度總說)
천축(天竺)이라는 호칭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견이 갖가지로 분분하다. 구역(舊譯)에서는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혹은 현두(賢豆)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정음(正音)을 따라서 인도(印度)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인도 사람은 지역에 따라서 나라를 부르는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체로서의 이름을 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 인도라고 부르고 있다.1)
인도라는 말은 당나라에서는 달[月]을 의미한다. 달에는 많은 이름이 있는데 인도는 바로 그 명칭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중생들은 쉬지 않고 윤회하며 무명(無明)의 밤은 길고 길어서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은 태양이 숨으면 달빛이 그 빛을 잇는 것과 같다. 비록 별빛이 빛난다고 하더라도 어찌 환한 달빛의 밝기만 하겠는가? 오직 이 같은 이치에 따라서 달에 비유하는 것이다.
실로 그 땅의 성현들이 궤적을 잇고 범부들을 이끌고 만물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달이 천지를 환히 비추는 것과 같으니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2)
인도의 종성(種姓)과 족류(族類)는 다양하게 나뉘는데, 그 중 바라문이 가장 순수하고 귀한 계급이라 그 아칭(雅稱)을 따라 전하여 풍속이 되었으니, 토지 경계의 차별을 일컫는 말이 아니고 전체를 들어서 바라문국(婆羅門國)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국경의 구역을 대강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5인도3)의 국경 둘레는 9만여 리에 달한다. 삼면이 대해에 접해 있고 북쪽은 설산(雪山)에 닿아있다. 북쪽이 넓고 남쪽은 좁으며 그 형세는 반달과 같다. 전 국토는 70여 국으로 경계가 나뉘어 있는데 대단히 무더우며 대지에는 샘과 습지가 많다. 북쪽은 산들이 깊숙이 이어져 있으며 구릉은 간석지[舃鹵]가 많다. 동쪽은 내와 들이 비옥하고 윤택하며 밭은 기름지다. 남쪽은 초목이 무성하며 서쪽의 토지는 돌이 많고 척박하다.
이상은 그 대체적인 설명으로서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무릇 수량(數量)은 유선나(踰繕那)구역에서는 유순(由旬)이라고 하고 또한 유사나(踰闍那)라고 하며 또는 유연(由延)이라고 하는데, 모두 다 잘못 생략된 말이다로 일컫는다. 유선나라는 것은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라고 한다. 구역(舊譯)에서는 1유선나가 40리라고 전한다. 인도국의 풍속으로는 30리에 해당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재된 바로는 오직 16리이다.
궁미(窮微)의 수는 다음과 같다. 1유선나를 나누면 8구로사(拘盧舍:krośa)가 된다. 큰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를 구로사라고 말하는데, 1구로사를 나누면 500궁(弓:dhanus, 駄沙라고도 음역한다)이 된다. 1궁을 나누면 4주(肘:hasta)가 되고, 1주를 나누면 24지(指)가 된다. 1지절(指節)을 나누면 7숙맥(宿麥:yava)이 되고 나아가 이[蝨]ㆍ서캐[蟣]ㆍ먼지[隙塵]ㆍ소털[牛毛]ㆍ양털[羊毛]ㆍ토끼털[兎毫]ㆍ금수(金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7분(分)하여 세진(細塵)에 이른다. 세진을 7분하면 극세진(極細塵)이 된다. 극세진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을 나누면 곧 허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극미(極微)라고 한다.
음양의 역운(曆運)이나 해와 달의 차사(次舍)에 대해서 말하자면 호칭은 비록 다르더라도 시후(時候)에는 차이가 없다. 그 성건(星建)에 따라서 달의 이름을 표시하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각을 찰나(刹那)라고 부른다. 120찰나는 1달찰나(呾刹那)가 되고 60달찰나는 1납박(臘縛)이 된다. 30납박은 1모호율다(牟呼栗多)가 된다. 5모호율다는 1시(時)가 된다. 6시가 합하여 1일(日) 1야(夜)를 이룬다[晝三夜三]. 통상 낮과 밤을 8시(時)[晝四夜四, 하나하나의 시(時)에 각 4분(分)이 있다]로 나눈다.
달이 차서 만월(滿月)에 이르기까지를 백분(白分)이라고 하고, 달이 기울어서 그믐에 이르기까지를 흑분(黑分)이라고 한다. 흑분은 어떤 것은 14일, 어떤 것은 15일이기도 한데 달에는 크고 작은 달이 있기 때문이다. 흑분의 앞과 백분의 뒤[黑前白後]를 합하여 한달[一月]이라고 한다. 여섯 달을 합하면 1행(行)이 된다. 태양의 운행이
적도의 안에 있으면 북행(北行)이고 태양의 운행이 적도의 밖에 있으면 남행(南行)이다. 이 2행을 합하여 1년[歲]이 된다.
또 1년[歲]을 나누면 6시(時)가 되는데 정월(正月) 16일에서부터 3월 15일까지는 점열(漸熱:봄)이고, 3월 16일에서 5월 15일까지는 성열(盛熱:여름)이고, 5월 16일에서 7월 15일까지는 우시(雨時:장마)이고, 7월 16일에서 9월 15일까지는 무시(茂時:가을)이고, 9월 16일에서 11월 15일까지는 점한(漸寒:초겨울)이며, 11월 16일에서 정월 15일까지는 성한(盛寒:한겨울)이다.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 속에서 해[歲]는 3시(時)로 나뉜다. 정월 16일에서 5월 15일까지는 더울 때[熱時]이고, 5월 16일에서 9월 15일까지는 우시(雨時)이고, 9월 16일에서 정월 15일까지는 추울 때[寒時]이다.
어떤 때는 4시(時)로 나누기도 하는데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그것이다. 봄의 석 달은 제달라월(制呾羅月)ㆍ폐사거월(吠舍佉月)ㆍ서슬타월(逝瑟吒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정월 16일부터 4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여름의 석 달은 알사다월(頞沙茶月)ㆍ실라벌나월(室羅伐拏月)ㆍ파라발타월(婆羅鉢陀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가을의 석 달은 알습박유사월(頞濕縛庾闍月)ㆍ가랄저가월(迦剌底迦月)ㆍ말가시라월(末伽始羅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7월 16일부터 10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겨울의 석 달은 보사월(報沙月)ㆍ마거월(磨袪月)ㆍ파륵구나월(頗勒窶拏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10월 16일부터 정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양안거(兩安居)에 들어가는데 전삼월(前三月)이나 후삼월(後三月)이다. 전삼월은
당나라의 5월 16일부터 8월 15일에 해당하고, 후삼월은 당나라의 6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전에 경과 율을 번역한 자들은 안거를 좌하(坐夏)라고 하거나 또는 좌랍(坐臘)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변경의 다른 풍속에서 나온 말일 뿐 중국의 정음(正音)에 미치지 못한 것이며, 또한 방언(方言)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옮겨 번역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다. 또한 여래의 입태(入胎)ㆍ초생(初生)ㆍ출가ㆍ성불ㆍ열반의 날짜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기로 한다.
마을과 부락은 네모 반듯하고 넓고 높으며, 도시의 크고 작은 거리들은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져 있다. 거리의 담과 문들은 도로를 향해 나있고, 술집과 요릿집들은 도로를 끼고 있다. 도축업자와 어부, 어릿광대와 망나니, 똥 치우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에 깃발을 세워서 표시를 해놓고 마을의 밖에 따로 살도록 되어 있으며, 길을 오고 갈 때에도 길 왼쪽으로 피하도록 하였다.4)
집의 구조나 울타리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지세가 낮고 습한 까닭에 성의 대부분은 벽돌을 쌓았다. 담장이나 벽은 혹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기도 하였다. 방과 누각은 널빤지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평평하게 하였고, 석회를 발랐으며, 굽거나 굽지 않은 벽돌을 덮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큰 건물을 짓는 법은 중국과 같다. 띠를 엮거나 풀을 엮거나 혹은 벽돌이나 널빤지를 이용하며, 벽에는 석회를 발라서 장식하고 바닥에는 쇠똥을 발라서 깨끗하게 만든다. 제철에 피는 꽃을 뿌려서 깔기도 하는데 이것이 다른 점이다.
승가람은 그 제작법이 매우 기이하다. 우루(隅樓)는 네 개를 세우고 중각(重閣)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까래와 평고대5)와 동량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울타리와 담장에는 화려한 색깔로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민 집의 경우 안은 호사스럽고 밖은 검소하다. 깊은 곳에 있는 방[隩室]이나 중당(中堂)의 높이와 너비는 여러 종류이며, 층대(層臺)나 중각(重閣)의 모습이나 제작법은 다양하다. 문은 동쪽으로 나있고, 조정의 좌석들도 동쪽을 향해 있다. 앉을 때에는 언제나 승상(繩床)을 이용하는데 왕족이나 권력가ㆍ서민이나 토호들의 자리 장식은 제각기 다르고 규격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군왕이 정사를 돌보는 자리는 이들의 것보다 더 높고 넓으며
온갖 형태의 보석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사자상(師子床)이라고 한다. 결이 고운 모직으로 깔개를 삼으며 보석으로 만든 상자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 모든 백성과 서민들은 제각기 자기의 취향대로 장식하는데, 그 조각 모양도 매우 다양하고 장식물들도 아주 진귀한 것들이다.
모든 옷과 노리개는 옷감을 자르거나 꿰매어서 만들지 않는다. 선백색(鮮白色)을 귀하게 여기고 잡색을 천하게 여긴다. 남자들의 옷은 허리를 감아서 겨드랑이에 잡아매었고 옆으로 둘러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 여자들은 첨의(襜衣:행주치마)를 입고 아래까지 늘어뜨렸으며 어깨를 모두 휘감아 덮는다. 머리에는 작은 상투를 매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아래로 늘어뜨린다. 어떤 이는 수염을 깎기도 하는데 특별나게 괴이한 풍속이 있다. 머리에는 화만(花鬘)을 쓰고 몸은 보석으로 꾸민다.
그들이 입는 옷은 이른바 교사야(憍奢耶)옷과 가는 모포 등이다. 교사야란 것은 산누에[野蠶]에서 나온 실로 짠 것이다. 총마(叢摩)옷은 마(麻)의 일종이고, 험발라(頷墟嚴反鉢羅)옷은 가는 양털로 짠 옷이며, 갈랄리(褐剌縭)옷은 들짐승의 털로 짠 것이다. 짐승의 털은 가늘고 부드러워서 옷감을 짤 수 있기 때문에 진귀하게 여겨 옷으로 만드는 것이다.
북인도의 풍토는 지독하게 추워서 옷의 폭이 좁고 짧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호복(胡服)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도(外道)의 복장은 제각기 멋대로 만들어 입고 있는데, 어떤 이는 공작의 꼬리털을 입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해골을 보석으로 장식하며, 어떤 이는 옷을 입지 않고 온몸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풀과 나무 판자로 몸을 가리고, 어떤 이는 머리카락을 뽑고 수염을 잘랐으며, 어떤 이는 귀밑 털을 흐트러뜨리고 상투를 틀기도 하는 등, 의상에는 일정한 법도가 없으며 적색과 백색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문은 법복(法服)으로 오직 3의(衣)와 승각기(僧却崎), 니바새나(泥縛些桑箇反那)만을 갖게 되어있다. 3의를 재단하고 마름질하는 것은 부파마다 다르므로 옷의 가장자리가 넓거나 좁기도 하고, 혹은 시접이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승각기당나라에서는 암액(掩腋)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승기지(僧祇支)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는 왼쪽 어깨를 덮고 양 겨드랑이를 가리며, 왼쪽이 트였고 오른쪽이 합해졌으며 길게 마름질되었고 허리까지 내려온다. 니바새나당나라에서는 군(裙)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열반승(涅槃僧)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는 옷고름과 허리띠가 없으므로 입을 때에는 옷을 모아 주름을 만들어서 띠처럼 묶어 입는다. 주름은 각 부파마다 다르며 색은 황색이거나 붉은 색으로 서로 같지 않다.
찰제리와 바라문은 청결하고 소박하고
검약하게 생활한다. 국왕이나 대신의 복장과 완구는 아주 달라서 화만과 보배관을 머리 장식으로 하며 옥팔찌와 영락(瓔珞)을 노리개로 차고 있다. 부유한 상인들이나 큰 장사꾼들 중에는 오직 팔찌만 하고 있는 자도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맨발로 다니며 신발을 신고 있는 자는 아주 적다. 그들은 치아를 붉은 색이나 검은 색으로 물들였으며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귀를 뚫었고, 얼굴의 특징은 코가 길고 눈이 크다.
그들이 스스로 청결함을 지키는 것은 그 뜻이 교만하기 때문은 아니다. 보통 밥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손을 씻으며, 남긴 것을 다시 먹거나 식기를 다시 사용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질그릇이나 나무 식기는 사용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버린다. 금이나 은ㆍ구리ㆍ철로 만든 그릇은 언제나 문지르고 윤을 낸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양지(楊枝)를 씹어서 치아를 깨끗하게 유지한다. 손을 씻거나 이를 닦지 않고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용변을 마치고 나면 항상 반드시 몸을 씻는다. 몸에는 전단(旃檀)이나 울금(鬱金)과 같은 여러 가지 향을 바른다. 군왕(君王)이 목욕을 할 때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제사를 지내거나 사당에 참배할 때에도 반드시 목욕하고 손을 씻는다.
그들의 문자에 대해서 살펴보면, 인도의 문자는 범천(梵天)이 만들었으며6) 처음에 원칙을 내려 47개의 문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사물[物]에 의거하여 합성되었고, 일[事]을 따라서 전용되는 가운데 차츰 많은 가지가 파생되었고, 그 연원이 점차 넓어지게 되었다.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 다소 개변(改變)이 일어났지만, 그 대강을 말하자면 본원(本源)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중인도7)는 특히 자세하고 정확하게 언어를 쓰고 있으며, 말이 조화롭고 우아하여 하늘의 소리 같이 들린다. 그들의 문장은 생동감 있고 고상하며 맑고 깨끗하여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다. 인근의 다른 나라들은 잘못된 것을 익혀서 법칙으로 삼고 있으며 경박한 풍속으로 다투어 달려갈 뿐 순박한 풍조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말을 기록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데에 있어서는 각각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다. 사고(史誥)를 통틀어 니라폐다(尼羅蔽茶)8)당나라 말로는 청장(靑藏)이라고 한다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선악이 낱낱이 열거되어 있으며 재난과 길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으로 나아가게 할 때에는 먼저 12장(章)9)으로 인도한다. 7살이 지나면 점차로 오명대론(五明大論)10)을 가르친다. 오명대론이란, 첫째는 성명(聲明)11)이니, 옛 서적의 자구를 해석하고 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교명(工巧明)12)이니, 기술(技術)과
기관(機關)과 음양(陰陽)과 역수(曆數)이다. 셋째는 의방명(醫方明)이니, 병을 물리치는 주술과 사악함을 물리치는 방법과 약재와 침과 뜸이다. 넷째는 인명(因明)13)이니, 바르고 그릇된 것을 고찰하여 진위를 밝히는 일이다. 다섯째는 내명(內明)14)이니, 5승(乘)의 인과의 미묘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바라문은 4볘다론(吠陀論)15)구역에서는 비타(毘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배우는데, 그것은 첫째로는 수(壽)16)이니, 이른바 목숨을 보존하고 성품을 길들이는 것이다. 둘째는 사(祠)17)이니, 제사를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는 평(平)18)이니, 예의와 점복(占卜)과 병법(兵法)과 군진(軍陣)이다. 넷째는 술(術)19)이니, 뛰어난 기능과 기예와 산술과 주문을 외는 것과 의약처방이다.
스승은 반드시 정묘한 이치를 두루 궁구하여 심오하고 깊은 곳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큰 뜻을 나타내 보여주고 미묘한 말로써 인도하며, 제자를 타일러 능숙하게 이끌어 갈고 다듬으며 학문으로 나아가도록 권한다. 만일 식견이 있고 명민한 자가 도망가려는 생각을 품으면 붙잡아두고 그의 학업이 이루어진 후에야 풀어준다.
나이 30이 되어 뜻을 세워 학업을 이루어 국가의 녹을 받는 지위에 오르게 되면 가장 먼저 스승의 은덕에 보답한다. 그들은 고사(古事)에 널리 통하며,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고, 정숙하게 산다. 속세를 벗어난 것에 침잠하고 세속의 밖에서 노닐며,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여도 동요되지 않고 세상의 소문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군왕이 그들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조정에 불러올 수가 없다.
국가에서는 총명하고 예지 있는 이들을 중히 여기며 세속에서는 고명(高明)한 사람들을 귀히 여긴다. 융숭하게 덕을 기리고 칭찬하며 두텁게 예의를 갖추어 대접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뜻을 강건히 하고 배움을 돈독히 하며 피로를 잊고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진리를 찾아다니고 어진 이에 의지하여 천릿길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다닌다. 집안이 비록 부유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나그네길에 있는 것과 같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돌아다니며 탁발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도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재산이 없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즐기고 노니느라 일을 하지 않거나 음식을 탐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또한 풍습도 아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추악한 이름이 4방에 퍼지게 된다.
여래의 가르침은 중생들의 부류에 따라 제각기 이해하게 되었다. 성현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자 정법의 순수함은 차츰 흐려져 각자의 이해에 따라서 나름대로 문지(聞智)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저마다 부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치하며 끊임없이 논쟁하였다. 배우는 것을 달리하여 제각기 배운 것을 전문(專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길은 달라도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18부가 각기 논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대승과 소승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서로 다르다. 그들의 좌선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과 거니시는 것[經行]과 머물러 서있는 것과 정혜(定慧) 등은 현격하게 서로 다르며, 떠들썩하고 조용함 또한 너무나 제각각이다.
부파들은 각자 모여 살고 있는 곳에 따라 각기 규칙을 만들었는데, 율과 논을 운운하지는 않지만 그 큰 줄기는 부처님의 경전이다. 1부를 널리 강의할 수 있는 자는 승가의 지사(知事)20)를 벗어나게 되고, 2부는 좋은 방과 가구가 더해지며, 3부는 시자가 딸려서 일을 해주고, 4부는 정인(淨人)21)을 부려서 일을 하게 할 수 있으며, 5부는 외출할 때 코끼리 가마를 탈 수 있으며, 6부는 외출할 때에 앞뒤로 시종이 에워싸서 호위한다. 도와 덕이 높아지면 그에 대한 대우 또한 달라진다.
때로 모여서 강론(講論)을 하여 그들의 우열을 고찰하며, 선악을 구별해 드러내어 아둔한 자는 몰아내고 이치에 밝은 자를 천거한다. 그들 가운데 미묘한 말을 깊이 헤아리고 묘한 이치를 널리 드러내며, 말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이 넘치어 말솜씨가 좋고 명민한 자는 보석으로 장식한 코끼리에 올라타게 되는데, 그를 앞뒤에서 모시고 따르는 자들이 숲과 같이 무성하게 몰려든다.
그러나 교의의 구별[義門]에 이르러서 텅 비어 있고 논리의 예리한 기운이 꺾여져 있어서 이치가 모자란데도 말만 무성하며, 뜻은 어긋나면서도 말만 매끄러우면 이내 얼굴에는 붉은 흙이나 흰 흙이 발라지고 몸에는 먼지와 흙이 칠해진 채 황야로 쫓겨나거나 구덩이에 버려진다. 그리하여 선량한 자와 사특한 자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또한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를 즐길 줄을 알아 집안에서도 부지런히 학업에 정진한다. 출가하거나 속가(俗家)로 돌아가는 일은 각자 원하는 대로 맡기고 있다. 죄를 짓거나 율을 범하면 승중(僧中)에서 벌을 내린다. 그 죄가 가벼우면 곧 대중들이 명하여 꾸짖고 탓한다. 그 다음으로 조금 무거운 죄를 진 자에게는 대중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 무거운 죄를 지면 대중들은 그와 함께 살지 않는다.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은 죄 지은 자를 내쫓아서 자기들과 같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머물던 곳에서 나가게 되면 생계를 유지하려 해도 마땅하게 있을 곳이 없게 되어 먼 길을 떠나 고생을 하거나 혹은 승복을 벗고 속가로 돌아가게 된다.
무릇 족성(族姓)에는 네 종류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바라문으로서 정행(淨行)이다. 도를 지키고 정숙하게 살아가는데 그들의 지조는 결백하다. 둘째는 찰제리로서 왕종(王種)이다구역에서는 찰리(刹利)라고 하는데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군림하며 어짊과 용서를 뜻으로 삼고 있다. 셋째는 폐사(吠奢)구역에서는 비사(毘舍)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로서 장사치이다. 이리저리 무역하며 다니면서 멀거나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따라 다닌다. 넷째는 수다라(戍多羅)구역에서는 수다(首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로서 농사짓는 사람이다. 힘껏 밭을 갈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곡식을 심고 거둔다.
이러한 4성(姓)에는 청(淸)ㆍ탁(濁)이 나뉘며, 혼인을 할 때에도 같은 계급끼리 하고, 왕래할 때에도 각각 다른 길로 다닌다. 같은 계급의 본가[宗]와 분가[枝]도 서로 섞여서 혼인하지 않는다. 부인은 한번 시집을 가면 끝내 재혼하지 않는다. 이 밖의 잡성(雜姓)은 너무나도 많은데,22)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이들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하기 어렵다.
군왕은 대대로 오직 찰제리만이 될 수 있다.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도 가끔씩 있어 다른 성(姓)이 왕을 칭하기도 한다. 굳세고 용감한 자를 나라의 전사로 선발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업을 이어서 병술을 완벽하게 익히도록 한다. 평상시에는 궁궐을 호위하고, 전쟁에 나가서는 무리들의 사기를 크게 떨치며 앞장서서 진격한다.
대체로 4병(兵)이 있으니, 보병(步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상병(象兵)이다. 코끼리에게는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상아에 예리한 칼을 매단다. 장수가 올라타서 지시를 내리면 양쪽에 있는 군졸들이 좌우에서 코끼리를 부린다. 거병(車兵)은 곧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부린다. 장수가 그 수레에 올라타면 병졸들이 줄을 지어서 호위하는데 바퀴를 호위하고 바퀴 통을 에워싼다. 마군(馬軍)은 제각기 흩어져 방어하며 도망가는 적들을 열심히 뒤쫓는다. 보군(步軍)은 몸이 민첩하고 강하며 용감한 자를 선발한다. 큰 방패를 짊어지고 긴 창을 들거나, 혹은 칼을 들고 앞에서 용감하게 행군한다.
모든 병기들은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창과 방패[矛楯], 활과 화살[弓矢], 칼과 검[刀劍], 작은 도끼와 큰 도끼[鉞斧], 창[戈殳], 긴 창[長矟], 고리와 밧줄[輪索] 같은 종류를 다루는 법은 모두 대대로 습득한 것이다.
그들의 풍속을 보면, 성품이 비록 성급하기는 하나 그들의 마음은 참으로 정숙하고 질박하다. 재물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으며 의(義)에 있어서는 타인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저승세계에서 받을 죄를 두려워하며, 이승에서의 일은 중히 여기지 않는다. 괴이한 속임수를 행하지 않고 약속한 것을 지킨다. 정교(政敎)는 질박함을 숭상하고 풍속은 부드럽다. 패륜의 무리들이 때로 국법을 어지럽히고 군주를 모함하는 일이 있는데, 일의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면 언제나 옥에 가두어 놓을 뿐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의 생사에 맡기며 사람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을 뿐이다. 예의를 범하거나 충효를 거스르면 곧 코나 귀를 자르거나
손이나 발꿈치를 잘라내고, 혹은 나라 밖으로 내쫓거나 황량한 들판으로 내몰기도 한다. 그 밖의 죄를 범하면 재산을 내어서 죄갚음을 한다.
송사를 다스릴 때에는 말로써 판단하고 매로 치거나 형을 가하지는 않는다. 물음에 대해서 정성껏 대답하면 사실에 의거하여 공평하게 벌을 내린다. 범한 것을 부인하거나 죄 지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신의 비행을 그럴싸하게 꾸미려 하는 자가 있을 때 그 일의 진상을 알아보고자 고안해 낸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물[水]과 불[火]과 저울[稱]과 독[毒]이다.
물에 의해 판결하는 것은, 죄인과 돌을 자루에 각각 넣어 함께 깊은 물 속에 빠뜨려서 그의 고백의 진위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사람이 가라앉고 돌이 떠오르면 죄를 지은 것이고, 사람이 떠오르고 돌이 가라앉으면 숨기는 죄가 없다는 징표이다.
불에 의해 판결하는 것은, 쇠를 달구어서 죄인을 그 위에 올라서게 한 다음 다시 발로 밟도록 하고 또 손바닥으로 그것을 누르게 한 뒤 죄인의 혀로 그것을 핥게 하는 것인데 만일 거짓말을 하였다면 다치는 곳이 없을 것이고, 진실을 주장하였다면 다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유약한 사람이라면 이글거리는 불길을 견뎌내지 못하므로,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들게 하고서 이것을 불길을 향해서 뿌리게 한다. 만일 거짓말을 하였다면 꽃이 필 것이고 진실하다면 꽃들은 타버리고 말 것이다.
저울로 판결하는 것은, 사람과 돌을 저울 위에 놓아 가볍고 무거운 것으로 시험해보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거워서 아래로 내려가고 돌이 올라간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돌이 무겁고 사람이 가볍다.
독으로 판결하는 것은, 한 마리 암양을 데려다가 그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른 다음 소송 당한 사람이 먹을 분량만큼의 온갖 독약을 섞어서 그 오른쪽 넓적다리 속에 집어넣는다. 만일 그 사람이 진실하다면 독이 퍼져서 양은 죽어버리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면 독이 퍼지지 않아서 양은 살아난다. 이러한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수없이 많이 일어나게 될 오판을 막는 것이다.
경의를 표하는 의식에 있어서 그 법식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소리를 내어서 위문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머리를 숙여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손을 들어서 높게 맞잡는 것이고, 넷째는 손바닥을 합하여 가지런하게 맞대는 것이다. 다섯째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여섯째는 길게 엎드리는 것이고, 일곱째는 손과 무릎을 땅에 대는 것이고, 여덟째는 5륜(輪)23)을 함께 구부리는 것이고, 아홉째는 오체투지(五體投地)24)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등은 지극하게 오직 한 번씩만 절을 올리는 것이다. 꿇어앉고서 상대의 덕을 찬양하면 이것을 극진한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한다. 상대가 멀리 있으면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가까이 있으면 발을 핥고 발뒤꿈치를 쓰다듬는다. 인사의 말을 하고 명을 받을 때는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길게 엎드린다.
윗사람은 절을 받고 나면 반드시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데, 그의
정수리를 어루만지거나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좋은 말로 가르치고 이끌며 친밀하고 돈독한 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출가 사문은 경례를 받고 나서는 다만 선원(善願)을 덧붙일 뿐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자신이 받들고 섬기는 사람에 따라서 그의 주위를 도는 일도 많은데, 어떤 때는 한 바퀴만을 돌기도 하고 또는 세 번을 돌기도 한다. 마음속에 각별한 청이 있으면 그 숫자만큼 자유롭게 돈다.
질병이 생겼을 때에는 7일 동안 곡기(穀氣)를 끊는다. 그러면 기한 안에 대부분 쾌유된다. 만일 그렇게 하였는데도 차도가 없다면 그때서야 약을 먹는다. 약의 성질과 종류와 이름 등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의사의 치료술이나 점술 등도 다양하다.
목숨을 마쳐서 상을 당하게 되면 슬프게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뽑으며 이마를 치고 가슴을 두드린다. 상복을 입는 제도는 특별하게 제정되어 있지 않고 조상 기간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임종을 한 뒤에 올리는 장송의식(葬送儀式)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장(火葬)이니,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운다. 둘째는 수장(水葬)이니,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서 흩어지게 한다. 셋째는 야장(野葬)이니, 숲에 버려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대를 이을 군주를 내세워서 그로 하여금 상제(喪制)를 주관하게 하여 상(上)ㆍ하(下)를 정한다. 태어날 때에 덕호(德號)가 주어졌으므로 죽어서는 시호를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을 당한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 뒤에는 평상시대로 생활하며 거리끼지 않는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을 청결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모두들 마을 밖에서 몸을 씻은 뒤에 집 안으로 들어온다.
천수(天壽)를 누린 뒤 죽음에 임하게 된 사람들, 재앙을 만나거나 오래도록 고질병에 걸려서 생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덧없는 세속을 싫어하고 떠나고자 하여 인간세상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 생사를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며 세속에서 멀리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에 친척이나 오래된 벗들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송별식을 차려준다. 그 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서 긍가하(殑伽河)로 나아가서 강의 중류에 이르러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던지는데, 그들은 이렇게 하면 하늘에 태어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아직 본 적은 없다. 출가승 가운데의 제도에는 울부짖거나 곡하는 법이 없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마음속으로 기리며 은혜에 보답하는데, 장례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은 실로 명복(冥福)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정교(政敎)는 관대하고 기무(機務) 또한 간결하다. 호적은 장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은
부역의 의무가 없다.
왕전(王田)은 크게 넷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국가의 쓰임에 충당하는 것이니,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곡물로 사용한다. 둘째는 국왕을 보좌하는 대신이나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셋째는 총명한 대학자나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상으로 내려주며, 넷째는 복전(福田)으로 삼아서 이교도들에게 보시한다.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가볍고 부역도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업(業)을 편안히 여기며 자기 소유의 밭을 경작한다. 만일 왕전(王田)을 경작할 때에는 6분의 1을 세금으로 낸다.
장사꾼들은 이익을 좇아서 무역을 하러 오가며 항구와 도로의 세관에 가벼운 세금을 낸 뒤에 통과한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축은 노역만 헛되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을 이룬 것에 상당하는 보수를 지불한다. 변경을 지키거나 출정을 하고 궁궐을 호위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일의 양을 헤아려서 사람을 모집하고 현상금을 내걸어서 사람을 불러들인다. 고위관료들과 직급이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가 각각 나누어진 땅을 가지고 있으며 그 봉지(封地)에 의하여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풍토가 다르면 땅에서 나는 산물 또한 다르다. 꽃이나 풀, 열매나 나무 등 온갖 종류가 이름 또한 다르다. 이른바 암몰라과(菴沒羅果)ㆍ암미라과(菴弭羅果)ㆍ말두가과(末杜迦果)ㆍ발달라과(跋達羅果)ㆍ겁비타과(劫比他果)ㆍ아말라과(阿末羅果)ㆍ진두가과(鎭杜迦果)ㆍ오담발라과(烏曇跋羅果)ㆍ무차과(茂遮果)ㆍ나리계라과(那利薊羅果)ㆍ반나사과(般橠娑果) 등이니, 이와 같은 종류들은 낱낱이 기록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만 인간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을 간략하게 말해보았다.
대추나 밤ㆍ감[椑柹]과 같은 것은 인도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배ㆍ능금ㆍ복숭아ㆍ앵두ㆍ포도 등의 과일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25)을 지나면서부터는 드문드문 심어져 있다. 석류와 감귤은 모든 나라에서 심고 있다.
밭을 개간하거나 씨앗을 뿌리거나 거두고, 김 매고, 나무를 심는 일 등은 시기에 맞추어서 행한다. 토양에서 나는 것으로는 벼와 보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채소는 생강이나 겨자, 오이와 조롱박, 훈타채(葷陀菜) 등이 있다. 파와 마늘은 적게 나지만 그것을 먹는 일 또한 거의 없다. 집에서 이것을 먹는 자가 있으면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
우유[乳酪]ㆍ고소(膏蘇)ㆍ사탕[粆糖]ㆍ석밀(石蜜)ㆍ개자유(芥子油), 여러 가지 병초[餠麨]26)는 언제나 반찬으로 먹는 것이다. 생선ㆍ
양ㆍ노루ㆍ사슴은 때로 고기 안주로 추천되기도 한다. 소ㆍ노새ㆍ코끼리ㆍ말ㆍ돼지ㆍ개ㆍ여우ㆍ이리ㆍ사자ㆍ원숭이 등 이러한 털을 가진 짐승류는 통상적으로 먹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동물들을 먹는다면 그는 스스로 비천하고 부끄러워하고, 또한 대중들도 그를 더럽게 여기고 미워하므로 그는 마을 밖에서 숨어살면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일을 거의 할 수 없다.
또한 술과 감주 등은 맛에 따라 차이가 생겨 구별된다. 포도나 사탕수수로 담근 술은 찰제리족이 마시는 술이고 누룩과 당귀로 만든 진한 술은 폐사 등이 마시는 술이다. 사문과 바라문은 포도와 사탕수수의 즙[漿]을 마시는데 이것은 술로 치지 않는다. 잡성(雜姓)의 비천한 계급들은 마시는 것에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는다.
사용하는 그릇에는 세공과 품질[功質]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상생활에 쓰이는 도구는 수시로 만들어 충당하므로 부족하지 않다. 가마솥을 사용하지만 시루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그릇을 쓰고, 소수의 사람들이 적동(赤銅)으로 만든 그릇을 쓴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음식을 넣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섞어 먹는다. 대부분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지만 늙고 병든 자들은 구리 숟가락을 사용한다.
금ㆍ은ㆍ유석(鍮石)27)ㆍ백옥ㆍ화주(火珠)28) 등이 이곳에서 생산되는데 그 양은 아주 많다. 진귀하고 다양한 보배들은 그 종류도 다양하며 이름도 제각각이다. 바다의 한쪽 구석에서 산출되어 이것으로 무역을 하지만, 그때 화폐로써 사용하여 물건을 교역하는 일에는 금전(金錢)이나 은전(銀錢), 패주(貝珠)와 소주(小珠)가 쓰이고 있다.
인도의 토지 경계를 대체로 들어보았고, 그 풍토의 차이도 대략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서로 공통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대강 설명을 한 셈이니, 서로 다른 정치와 풍속에 대해서는 각 나라를 들어서 서술하기로 하겠다.
3. 북인도(北印度)3개국
1) 람파국(濫波國)
람파국29)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북쪽은 설산(雪山)을 접하고 있으며 3면이 흑령(黑嶺)에 닿아있다. 나라의 큰 도성30)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수백 년 전에 왕족의 후사가 끊어졌다. 호걸들이 힘을 다투고 있으나 큰 우두머리가 없었는데 근래에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예속되게 되었다. 메벼를 경작하기에 알맞으며 사탕수수가 많이 난다. 숲은 비록 많지만 과실은 적다. 기후는 다소 온화하며 서리가 적고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물산이 풍족하여 백성들은 안락하게 지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성품은 겁약하고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에는 속임수가 많은데, 서로서로 속이고 비난하며 남을 먼저 추천하는 일은 없다. 그들의 체격과 생김새는 작고 초라하며 행동거지가 경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고 가는 모포를 입는데 그들의 옷에는 고운 장식이 되어있다.
가람은 10여 곳 있으며 승도의 수는 아주 적은데,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天祠)도 수십 곳이 있으며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가 큰 고개를 넘어서 큰 강을 건너면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2)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
나게라갈국31)은 동서로 6백여 리, 남북으로 250~260여 리에 달하며 산이 주변으로 4방에 둘러쳐져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길은 험하다. 나라의 큰 도성32)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군주가 없고 주령(主令)은 가필시국에 예속되어 있다.
곡식이 풍요롭고 꽃과 과일이 많으며, 기후는 온화하고 더우며 풍속은 순수하고 질박하다. 용맹하고 굳세고 강인하며 재물을 천시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공경하며 이교도를 믿는 이는 적다. 가람은 비록 많지만 승도의 수는 매우 적으며 솔도파들은 황폐해졌거나 무너졌다. 천사는 다섯 곳이 있으며 이교도를 믿는 이들은 백여 명이다.
성의 동쪽으로 2리를 가면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3백여 척이며 무우왕(無憂王)이 지은 것이다. 솔도파는 돌을 쌓은 것으로서 매우 높으며 조각을 새긴 것도 특이하다. 석가보살이 연등불(煙燈佛)을 만났을 때 사슴가죽 옷을 깔고 머리를 풀어서 진흙을 덮고서 수기를 얻은 곳이라고 한다.33) 세월은 괴겁(壞劫)34)만큼 흘렀지만 이런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재일(齋日)에 하늘에서 온갖 꽃이 비처럼 쏟아지기도 하여 군중들이 서로 경쟁하며 공양을 올리고 경배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가람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적다. 이어서 남쪽에는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석가보살이 머리털로 진흙을 덮었던 땅으로서 무우왕은 큰길을 피하여 옆으로 비켜선 곳에 지은 것이다.
성 안에 큰 솔도파가 있었던 기단이 있는데,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솔도파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안치되어 있었다. 솔도파는 아주 크고 넓었으며,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치아도 없어졌고 오직 옛 터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옆에 30여 척의 솔도파가 있다. 사람들은 그 기원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솔도파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곳에 우뚝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원래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고 할 만큼 실로 신묘한 기적이 많은 곳이다.
성의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여래가 중인도로부터 허공을 타고 오셔서 이곳에서 노니시고 교화하시다가 이곳에 유적을 남기신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이 그러한 자취를 사모하여 이러한 신령스러운 솔도파를 세운 것이다. 그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석가보살이 옛날에 연등불을 만나러 갈 때 이곳에서 꽃을 샀다.
성의 서남쪽으로 20여 리 가다 보면 작은 돌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가람이 있는데 건물이 높고 중각(重閣)이며,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뜰 안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승려의 자취가 없다. 그 안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가람의 서남쪽은 골짜기가 깊고 산비탈이 가파르며, 폭포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곧추 서있다. 동쪽 절벽의 석벽에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구파라용(瞿波羅龍)이 사는 곳35)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협소하고 굴 안은 매우 어둡다. 절벽의 돌에는 물방울들이 넘치도록 맺혀져 있어서 가느다란 물줄기를 만들며 흐르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었는데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모습 같았으며, 상호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서 그 근엄한 모습은 마치 지금 앞에 계신 것과 같았다. 근대(近代) 이래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설령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렴풋하게 볼뿐이다. 지성으로 청을 올리면 은연히 감응하여 아주 잠시나마 밝게 볼 수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이 용은 소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유낙(乳酪)을 제공하였는데 어쩌다 왕에게 바칠 시기를 놓쳐 버려 벌을 받았다. 그래서 마음에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다가 돈을 주고 꽃을 사서 수기솔도파(受記率堵波)에 공양하면서 이렇게 서원하였다.
“나는 악한 용이 되어 나라를 쳐부수고 왕을 살해하고야 말겠다.”
그리고 나서 곧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죽었는데, 마침내 큰 용왕으로 태어나 이 굴에 살게 되었다. 그는 이내 굴을 나와서 본래 품었던 악한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마침 용왕이 이런 마음을 일으켰을 때에 여래께서는 이미 이 나라 사람들이 용의 피해를 입을 것을 가엾게 여기셔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중인도로부터 이곳에 이르셨다. 용은 여래를 보자 결국 독한 마음을 멈추게 되었으며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받았다. 그리하여 정법을 수호할 것을 서원하면서 여래께 청하였다.
“항상 이 굴에 머무시며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과 함께 언제나 저의 공양을 받아주소서.”
그러나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장차 적멸에 들 것이니, 너를 위하여 그림자를 남겨두겠다. 그리고 다섯 명의 나한을 보내 언제나 그대의 공양을 받게 할 것이다. 아무리 정법이 숨어들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너에게 독한 마음이 치솟고 분노가 일어난다면 마땅히 내가 남겨둔 이 그림자를 보고 자애롭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독한 마음을 멈추게 해야 할 것이다. 이 현겁(賢劫)36) 중에 장차 오게 될 모든 세존도 그대를 가엾게 여겨서 모두가 그림자를 남겨놓을 것이다.”37)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는 굴의 문 밖에는 두 개의 네모난 돌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의 돌 위에는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윤상(輪相)38)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광명이 이따금 빛난다. 그림자 동굴의 좌우에는 많은 석실이 있는데, 이 모두는 여래와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이 선정에 들던 곳이다.
영굴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거니시던 곳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거기에는 여래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다. 이곳과 이웃해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진실한 가르침[眞宗]을 환하게 펼치시면서 온(蘊)과 계(界)와 처(處)39)를 설법하신 곳이다. 그림자 동굴의 서쪽에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여래께서 일찍이 그 반석 위에서 가사를 세척하셨다고 하며 그 옷의 무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혜라성(醯羅城)40)에 이르는데 둘레가 4~5리에 이르며 깎아지른 듯 곧추 세워져 있으며 험하고 견고하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연못이 맑게 빛나는 것이 마치 거울 같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며 불법을 독실하게 믿고 있다.
이곳에도 2층 누각이 있는데 동량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기둥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7보로 만들어진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의
정수리 뼈가 안치되어 있다.41) “나갈국(那竭國)의 혜라성에 도착하였다. 성 안에는 부처님의 정골(頂骨)을 모신 정사가 있는데 모두 금박과 7보로 장식하였다. 국왕이 정골을 몹시 경배하여 다른 사람들이 약탈해 갈 것을 우려하여 이에 그 나라의 부귀한 가문의 여덟 명을 선발하여 그들마다 하나의 도장을 가지고 와서 인봉(印封)하고 수호하게 하였다. 이른 아침에 여덟 명이 함께 와서 각자 그 안을 조사한 연후에 문을 연다. 문을 열고서 향즙으로 손을 씻고 부처님의 정골을 꺼내서 정사 밖의 높이 안치된 자리[高座] 위에 올려두고 7보의 원침(圓碪)을 아래에 괴고 유리로 만든 종을 위에 덮어씌운다. 이것은 모두 보석구슬로 장식되어 이다. 뼈는 황백색을 띠었고 방원(方圓) 4촌(寸)으로서 그 위가 솟아 올라있다. 매일 정골을 꺼낸 후에 정사의 사람들이 곧 높은 누각에 올라서 큰북을 두드리고 고둥을 불며 동발(銅鈸)을 두드린다. 그러면 왕이 이 소리를 듣고서 곧장 정사로 와서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린다. 공양을 마친 뒤에 차례로 정재(頂載)하고서 떠나간다. 왕은 동문(東門)으로 들어와서 서문(西門)으로 나간다. 왕은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공양 예배한 뒤에야 국정을 돌본다.” 뼈의 둘레는 1척 2촌이고 모공이 분명하게 보이며 황백색을 띠었다. 이 뼈는 보석함에 넣어져서 솔도파 속에 안치되어 있다. 만일 선악의 상(相)을 알고자 한다면 향가루를 진흙에 이겨서 정수리 뼈에 바른다. 그러면 복덕의 감응에 따라서 그 무늬가 밝게 빛난다.
또한 7보로 만든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 속에는 여래의 해골 뼈가 안치되어 있다. 모양은 마치 연꽃잎과 같으며, 정수리 뼈와 같은 색이다. 이 또한 보석함에 넣어져 봉함되어 안치되어 있다.
또 하나의 7보로 만든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에는 여래의 눈동자가 있다. 눈동자의 크기는 능금 정도인데 맑고 투명하게 빛나서 안팎이 환히 비친다. 이 또한 보석함에 넣어져서 잘 봉해진 채로 안치되어 있다. 여래의 승가지가사(僧伽胝袈裟)는 결이 고운 모포로 만들어졌는데 황적색으로 보석함 속에 넣어져 있다. 세월이 이미 아득히 흘러 약간은 손상되었다. 여래의 석장(錫杖)도 있는데 고리는 흰 철로 만들어졌고 몸체는 전단(栴檀)으로 만들어져서 보석통 속에 넣어져 있다.
근래에 어떤 국왕이 이러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여래께서 예전에 친히 사용하시던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위력을 믿고 협박하여 빼앗아 갔다. 본국에 도착한 뒤,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에 그 물건들을 두었다. 그리고 12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다. 이에 황급하게 찾아보았는데, 이 물건들은 이미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성스러운 유적(遺迹)에는 영험스럽고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므로 가필시왕은 다섯 명의 정행(淨行)42)에게 명하여 향과 꽃을 공양 올리며 잘 돌보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것을 친견하고 예경 올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편, 정행들은 고요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재물을 중시하는 것을 생각하여 임시로 규칙을 만들어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여래의 정수리 뼈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금전 한 닢을 내야하며, 만일 인(印)을 떠가고자 한다면 금전 다섯 닢을 내야한다. 나아가 나머지 조항도 이와 같은 차례대로 마련되어졌다. 그러나 세금이 비록 무겁기는 했어도 친견하고 예를 올리려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아졌다.
2층 누각의 서북쪽에도 솔도파가 있는데 참으로 높고 크다. 그리고 신이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지면 이내 흔들렸으며 기단이 기울어지고 흔들리며
풍경[鈴鐸]이 은은하게 울렸다.
이곳에서 동남쪽 골짜기로 들어가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건타라국(健馱邏國)구역에서는 건타위(乾陀衛)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게 된다.
3) 건타라국(健馱邏國)
건타라국43)은 동서로 천여 리, 남북으로 8백여 리에 달하며, 동쪽으로는 신도하(信度河)에 접해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布路沙布邏)44)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 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겼으며 가필시국(迦畢試國)에 복속되어 있다.
마을은 황폐해졌으며 살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궁성의 한쪽에 천여 가구가 있을 뿐이다. 곡식이 매우 번성하고 꽃과 과일이 풍성하다. 사탕수수가 많이 나며 석밀(石蜜)도 난다. 기후는 온화하고 더우며 대체로 서리와 눈이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겁이 많고 전예(典藝)를 익히기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교도를 숭경하고 있으며 불법을 믿는 이는 적다.
예로부터 인도의 국토에는 여러 논사(論師)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즉 나라연천(那羅延天)45)ㆍ무착보살(無著菩薩)46)ㆍ세친보살(世親菩薩)47)ㆍ법구(法救)48)ㆍ여의(如意)49)ㆍ협존자(脇尊者:波栗濕縛)50) 등의 본향이기도 하다. 가람은 천여 곳이 있으나 부서지고 황폐해졌으며 잡초가 우거지고 뒤엉켜져 있으며 솔도파들은 대부분 무너지고 훼손되었다.51) 천사(天祠)는 백여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지내고 있다.
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 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寶臺)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 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에 있다.52)
성 밖의 동남쪽으로 8~9리를 가다 보면 비발라수(卑鉢羅樹)53)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가지와 잎이 빽빽하여 그늘이 깊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54)께서 이 아래에 앉으셨는데, 지금도 네 분 부처님의 좌상(坐像)이 있다. 현겁(賢劫) 중에 나오실 9백 96분의 부처님55)께서도 모두 이 자리에 앉으실 것이니, 이곳은 부처님의 가호를 받아 신령스런 감응이 눈에 보이지 않게 뒤덮여 있다.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 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迦膩色迦)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를 세우리니,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사리들의 대부분이 그 안에 모일 것이다.”
비발라수의 남쪽에 솔도파56)가 있는데 가니색가왕이 세운 것이다. 가니색가왕은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백 년째 되던 해에 세상에 군림하였으며 천하의 운에 따라서 섬부주를 통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죄와 복의 이치를 믿지 않았고 부처님의 법을 업신여기고 훼손하였다.
어느 날 초원에서 사냥을 하며 노닐다가 우연히 흰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왕이 몸소 쫓아 달려가 보았지만 이곳에 이르렀을 때 토끼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대신 나이 어린 목동이 수풀 사이에서 작은 솔도파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3척이었다.
왕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목동이 답하였다.
“옛날 석가부처님께서 성스러운 지혜로써 기별하시기를 ‘훗날 어떤 국왕이 이 좋은 땅에 솔도파를 세울 것이며 내 몸의 사리들은 대부분 그곳에 모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스러운 덕을 과거에 이미 심으셨고 그 이름은 옛날 부처님께서 기별하신 이름과 꼭 들어맞습니다. 또한 공력과 복덕이 뛰어나시니 실로 기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먼저 그 일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난 뒤 경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성현의 옛 기별에 올라 있던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법을 깊이 공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작은 솔도파의 주위에 다시 돌로 솔도파를 세워서 자신의 공덕의 힘으로 작은 솔도파를 덮어씌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돌로 만든 솔도파가 커지면 그에 따라 작은 솔도파는 항상 3척 더 높아졌다. 이렇게 해서 높이는 점점 높아져 4백 척이 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단이 세워진 터의 둘레가 1리(里) 반에 달하고 층기(層基)가 5층에 달하였으며, 높이는 150척이 되고서야 마침내 작은 솔도파를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이에 크게 기뻐하며 그 위에 다시 25층의 금동상륜(金銅相輪)을 세우고는 여래의 사리 1곡(斛:10말)을 그 속에 안치하고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솔도파 짓는 일이 끝나자
또 다시 작은 솔도파가 대기(大基)의 동남쪽 모퉁이 아래에 옆으로 삐죽하게 반쯤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불쾌히 여기면서 내던져 버렸더니 작은 솔도파가 큰 솔도파의 제2층 아래의 석기(石基) 안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내었다. 본래의 장소에 가보니 작은 솔도파가 또다시 나와있었다.
왕은 이내 마음을 돌이켜 탄식하며 말하였다.
“오오, 사람의 일이란 미혹에 빠지기 쉬우며 신령스런 공덕은 가리기가 어렵구나. 부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어찌 분노로 미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참회하고 난 뒤에 허물을 사죄하고 돌아갔다.
그 두 기의 솔도파는 지금도 있다. 병에 걸려서 쾌유를 비는 자가 향을 바르고 꽃을 뿌리며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면 대부분 쾌유하게 된다.
큰 솔도파의 동쪽으로 돌계단이 있는데 그 남쪽에 두 기의 솔도파가 조각되어 있다. 하나는 높이가 3척이고 또 다른 하나는 5척인데 규모나 형상은 큰 솔도파와 같다. 또한 불상이 2구(軀) 만들어져 있는데, 하나는 높이가 4척이고 또 다른 하나는 6척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한 모습을 본뜬 것으로 태양이 비치면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해 그림자가 차츰 옮겨져 오면 돌 무늬가 청감(靑紺)색을 띤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수백 년 전 석기(石基)의 틈 속에 금색 개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개미들 가운데 큰 것은 손가락만 하고 작은 것은 보리알만 하였는데 같은 것끼리 무리를 지어서 그 석벽을 갉아먹었다. 그런데 그 무늬가 마치 아로새긴 것과 같았다. 금모래를 섞어서 이런 불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큰 솔도파의 돌계단 남쪽에 불상의 그림이 있는데 높이는 1장 6척이다. 가슴 위쪽은 두 개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슴 아래부터는 하나의 몸으로 합해져 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잇고 있었다. 어느 날 금전 한 닢을 얻게 된 그는 그 돈으로 불상을 만들기를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솔도파가 있는 곳으로 가서 화공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여래의 훌륭한 모습을 그렸으면 합니다. 지금 내게는 금전 한 닢이 있는데 이것은 물론 그대의 품삯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부터 이 일을 뜻하여 왔지만
가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 마음에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화공은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값을 따지지 않고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와서 앞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전 한 닢을 가지고 불상을 그려 줄 것을 청하였다. 화공은 이에 두 사람의 돈을 받아 훌륭한 물감을 구하여 하나의 불상을 그렸다. 그 두 사람이 같은 날 함께 와서 인사를 하자 화공은 곧 하나의 불상을 가리키면서 두 사람에게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것이 당신들이 부탁한 불상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그 불상을 보았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화공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십니까? 당신들이 받을 물건에 추호라도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불상은 반드시 신통한 변화를 나타낼 것입니다.”
화공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상은 신비한 기적을 나타내었는데 그 몸이 나누어지더니 그림자가 서로 교차되었고 빛이 눈부시게 비쳤다. 이 모습을 본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화공의 말을 수긍하였으며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였다.
큰 솔도파의 서남쪽으로 백여 걸음 가다 보면 흰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높이는 1장 8척이며 북쪽을 향하여 서있다. 이 불상에도 신기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때로 광명을 밝히기도 하고, 이따금 불상이 밤에 나와 돌아다니면서 큰 솔도파를 빙빙 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근래에 도적들이 불상을 훔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불상이 나와서 이들을 맞이하니 도적들은 모두 겁에 질려서 도망갔다. 그러자 불상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예전과 같이 섰다. 도적들은 이 일로 인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마을로 나아가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이 목격한 일을 4방에 낱낱이 알렸다.
큰 솔도파의 좌우에는 작은 솔도파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빼곡하게 100여 개가 있다. 불상은 장엄하며 공을 들인 기교는 극치에 달하였다. 특이한 향이 풍기고 기이한 음성이 이따금 들려오며, 어떤 때는 신령이나 선인(仙人), 성현들이 빙빙 도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여래께서 기별하시기를, “이 솔도파가 일곱 번 불타고 일곱 번 세워지면 그때 부처님의 법이 비로소 다하게 될 것이다” 선현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세 번이나 무너졌다가 세워졌다”라고 한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때마침 큰 화재를 당하였다. 다시 세워져야 할 터인데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큰 솔도파의 서쪽에 옛 가람이 있는데 가니색가왕이 지은 것57)이다. 중각(重閣)과 정자, 층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방들은 깊숙이 들어가 있다. 고승들을 초빙하여 가니색가왕의 커다란 복덕을 널리 드러낸다. 지금은 비록 허물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 제작 솜씨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다. 승도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다. 가람이 세워진 이래로 뛰어난 사람들이 간간이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논사이거나 성현의 과위를 증득한 사람들로서, 그들의 맑은 기풍은 지금도 쉬지 않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극한 덕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3중각에는 파율습박(波栗濕縛)당나라 말로는 협(脇)이라고 한다존자의 방이 있는데, 지은 지 오래되어 다소 허물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정표(旌表)를 세우고 있다. 존자는 본래 바라문[梵志師]이었다. 그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세속을 버리고 승복을 입었다.
그때에 성 안의 소년들은 곧 존자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리석은 노인에게 얕은 지식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무릇 출가한 자라면 두 가지 업을 닦아야 하나니 첫째는 정(定)을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는 것이거늘 그런데 지금 늙고 쇠하여 용맹정진하는 바가 없구나. 외람되게 청정한 스님들의 뒤를 따르려 하지만 하릴없이 배불리 먹을 줄만 아는구나.”
그러자 협존자는 이런 비방하는 말을 듣고서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며 스스로 맹세하였다.
“내가 만일 3장의 이치에 통하지 못하고, 삼계의 탐욕을 끊지 못하며, 6신통을 얻거나 8해탈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끝내 옆구리[脇]을 자리에 대지 않으리라.”
이렇게 맹세한 후에는 비록 시일이 부족하였으나 거닐고 연좌(宴坐)하며 멈추어 서서도 사유하였다. 낮에는 교학의 이치를 연구하고 익혔으며 밤에는 선정에 잠겨들어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3년을 계속하자 마침내 3장을 모두 통달하게 되었으며 삼계58)의 탐욕을 끊었고 3명지(明智)를 얻었다. 그러자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높이 우러르고 공경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협존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협존자 방의 동쪽에 오래된 방이 있는데 세친보살이 이곳에서 『아비달마구사론』59)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려서 그 방을 봉(封)하고 이 일을 기록해 놓았다.
세친의 방 남쪽으로 50여 걸음 가다 보면 제2중각이 있는데
말노갈라타(末笯曷剌他)당나라 말로는 여의(如意)라고 한다60)논사가 이곳에서 『비바사론』61)을 지었다고 한다. 논사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1천 년 뒤에 태어났다.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말솜씨가 뛰어나 그의 명성이 먼 곳에까지 미쳐서 속인이나 출가인들이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한편 당시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의 비글라마아질다왕(毘訖羅摩阿迭多王)당나라 말로는 초일(超日)이라고 한다62)은 그 위풍이 먼 곳에까지 미쳤으며 인도의 여러 나라들이 복종하였다. 그는 날마다 5억의 금전으로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창고를 관리하는 신하가 국고가 고갈될 것을 두려워하여 넌지시 간하였다.
“대왕의 위덕이 타국에까지 미치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5억의 금전을 더하여 이로써 4방(方)63)의 결핍을 구휼하소서. 그런데 창고(府庫)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토지세를 더 징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가 계속되면 원성이 높아질 것이니, 즉 ‘군왕은 베푸는 은덕을 지니고 있는데 신하들은 군왕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재산은 넉넉한데 나누어주는 것은 풍족하지 않다. 구차하게 이 한 몸의 사치를 위하여 국고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5억을 더하여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 후에 왕은 사냥을 하러 나가서 돼지를 쫓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돼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자취를 아는 자에게 1억의 금전을 상으로 주었다.
한편 여의 논사(如意論師)는 어느 날 사람을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1억의 금전을 내려주었는데, 그 나라의 사신(史臣)이 곧장 이것을 기록하였다. 그러자 왕은 여의 논사에 대한 명망이 자기가 한 일보다 더 높다고 말해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그 불쾌함을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여의 논사를 창피 주고자 하여 외도의 가르침[異學]을 익힌 덕이 높은 자들 백 명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칙명을 내려서 말하였다.
“세상을 보고 듣는 일을 그만두고 참다운 경계에서 노닐고자 하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어지럽게 분분하니 마음을 귀의할 곳을 찾지 못하겠구나. 이제 그런 가르침들의 우열을 가려서 가장 훌륭한 것을 택하여 그것만을 오로지 닦고 지키며 봉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곧 사람들이 논의하러 모여들게 되자 왕은 다시 명을 내렸다.
“외도 논사들은 모두 빼어난 준재들이다. 그러니 사문으로서 법을 따르는 무리들은 능히 자신들의 종치(宗致)를 잘 선양하라. 그리하여 사문이 외도를 이기면 나는 부처님의 법을 숭배하고 받들 것이나 지면 승도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이다.”
논쟁이 시작되고 이에 여의 논사가 나서서 여러 외도들을 힐난하니, 99명의 외도들은 논쟁에서 패하자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때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그를 보고서 경멸하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 인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논쟁은 불과 연기에 관한 것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왕과 외도가 함께 목청을 높여서 말하였다.
“여의 논사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무릇 먼저 연기가 있은 뒤에 불이 있게 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치이다.”
여의는 비록 그들의 힐난을 풀이해 주고 싶었지만 들으려고 하는 자가 없을 뿐 아니라 대중들의 모욕을 당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그리고 나서 글을 써서 문하의 사람인 세친(世親)에게 충고하였다.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패거리들과는 대의(大義)를 다투지 말 것이며, 미혹한 군중들 속에서 정론(正論)을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죽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서 초일왕(超日王)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새로운 왕이 권좌에 오르면 빼어난 현사[英賢]들을 표창하는 법이다. 이에 세친보살이 앞서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왕64)에게 가서 고하였다.
“대왕께서는 성덕(聖德)으로써 군림하시고 만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이전의 제 스승이었던 여의는 그 학문이 깊은 이치에 통달하였으나 전왕(前王)이 마음에 맺힌 감정이 있어서 대중들을 불러 모아 스승의 높은 명성을 먹칠하였습니다. 저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서 다시금 이전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자 합니다.”
왕도 일찍부터 여의가 철인(哲人)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세친의 아름다운 뜻을 기리고 있었던 터라 이에 여의 논사와 담론하였던 모든 외도들을 불렀다. 세친이 다시 한번 스승의 가르침을 논하자 외도들은 이에 굴복하고 사죄하며 물러갔다.
가니색가왕가람에서 동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강65)을 건너서 포색갈라벌저성(布色羯邏伐底城)66)에 이르게 된다. 성의 둘레는 14~5리이며 그곳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집들이 이어져 있다. 성의 서쪽 문 밖에 천사(天祠)가 하나 있는데 천상(天像)은 위엄이 있으며 신기한 기적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성의 동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만든 것으로,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곳이다. 옛 성현들 가운데 중인도로부터 내려와 중생을 인도하였다는 일화가 이 땅에는 참으로 많다. 즉 벌소밀달라(伐蘇蜜呾羅)당나라 말로는 세우(世友)이며 구역에서는 화수밀다(和須蜜多)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67)논사가 이곳에서 『중사분아비달마론(衆事分阿毘達磨論)』68)을 지었다.
성의 북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옛 가람이 있는데 정원과 건물은 이미 황량해졌고 승도들은 아주 적다. 이들은 모두 소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르고 있다. 달마달라다(達磨呾邏多)69)당나라 말로는 법구(法救)이고 구역에서는 달마다라(達磨多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논사가 이곳에서 『잡아비달마론(雜阿毘達磨論)』70)을 지었다.
가람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수백 척에 이르며 무우왕이 만든 것이다. 나무를 조각하거나 돌에 무늬를 새긴 솜씨는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이곳은 석가불께서 이전에 국왕이 되셔서 보살행을 닦던 곳인데 중생이 원하는 대로 은혜롭게 베풀되 싫증낸 일이 없었으며, 몸을 희생하여도 마치 계속 남아있는 것처럼 보시행을 하면서 이 국토에서 천 생(千生) 동안 왕이 되었으니, 즉 이 승지(勝地)에서 ‘천 생 동안 자신의 눈을 희사한 것[千生捨眼]’이다.71)
눈을 버린 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만든 솔도파가 두 기 있다. 각각 높이가 백여 척에 이르는데 오른쪽의 것은 범왕(梵王)이, 왼쪽의 것은 천제(天帝)가 세운 것72)이다. 미묘하고 진귀한 보배로 탑을 장식하고 있는데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그 보배는 변하여 돌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기단[基]은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높이 솟아있다.
범왕과 천제가 세운 솔도파에서 서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또 다른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석가여래께서 귀자모(鬼子母)73)를 교화하여 두 번 다시 사람을 살해하지 못하게 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귀자모를 교화한 곳에서 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상막가(商莫迦)구역에서는 영마보살(暎摩菩薩)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보살이 앞 못 보는 부모를 지극하게 모시고 부양하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과일을 따다가 잘못하여 사냥하러 나온 왕의 독화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을 받은 천제가 약을 내려주었고, 그의 덕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이내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상막가보살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동남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발로사성(跋虜沙城)74)에 도달하게 된다. 성의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소달나(蘇達拏)당나라 말로는 선아(善牙)라고 한다75)태자가 부왕의 큰 코끼리를 바라문에게 베풀었다가 그 책임을 물어서 축출당하게 되자, 나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성문을 나서다가 이곳에서 작별을 고하였다. 그 옆에는 50여 가람이 있는데 이곳에 사는 승려들은 모두 소승을 익히고 있다. 옛날 이습벌라(伊濕伐羅)당나라 말로는 자재(自在)라고 한다논사76)가 이곳에서 『아비달마명등론(阿毘達磨明燈論)』77)을 지었다.
발로사성(跋虜沙城)의 동쪽문 밖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승려들이 50여 명 살고 있고 이들은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솔도파78)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소달나태자가 축출당하여 탄다락가산(彈多落迦山)79)구역에서는 단특산(檀特山)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있었는데 바라문이 그의 아들과 딸을 원하자 이곳에서 그들을 팔았다.
발로사성의 동북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탄다락가산에 이르는데 고개 정상에 무우왕이 세운 솔도파가 있다. 소달나태자가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태자가 이곳에서 아들과 딸을 바라문에게 보시하였다. 바라문은 그 자식들을 매질하였는데 그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물들였다. 그래서 지금도 풀과 나무들이 진홍빛을 띠고 있다. 바위틈에 있는 석실은 태자와 태자비가 선정을 닦던 곳이다. 계곡 사이에는 숲이 있는데 나무들이 가지를 드리워서 마치 휘장을 친 것과 같다. 이곳은 모두 태자가 옛날에 노닐던 곳이다. 이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지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옛 선인(仙人)80)이 살던 곳이다.
선인이 살던 암자에서 서북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작은 산을 하나 넘어서 거대한 산에 이르게 된다. 산의 남쪽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아주 적고, 그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다. 그 가람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독각선인(獨角仙人)이 살던 곳이다. 선인은 음란한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신통력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타고 성읍으로 돌아왔다.81) 옛날 파라니사국(婆羅痆斯國)에서 사슴으로부터 태어나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사람이 우연히 신통을 나타내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국왕은 현상금을 내걸고 비 내리는 법을 두루 물었다. 그때 선다(扇多)라고 하는 음녀(淫女)가 5백 명의 미녀를 데리고 독각선인에게 다가갔다. 어느 날 선인에게 약주를 먹인 뒤에 유혹하여서 신통력을 잃게 하는 것에 성공하여 7일 낮 7일 밤 동안 연이어 비를 내리게 하였다. 선다는 선인과 함께 파라니사성으로 나가서 도중에 짐짓 병이 든 척하였다. 그러자 선인은 정말로 병에 걸렸다고 믿고서 선다를 어깨에 태우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현장은 이 설화의 무대를 건타라(健馱邏)로 비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설화도 불교 조각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발로사성(跋虜沙城)의 동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높은 산82)에 이른다. 산에는 푸른 돌로 된 대자재천부상(大自在天婦像)이 있다. 즉 비마천녀(毘摩天女)83)이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천상(天像)은 저절로 생겨났다고 한다. 신령스러운 기적이 많이 일어나므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인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복을 구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4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천신의 모습을 보기 원하는 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7일 동안 음식을 끊으면 천신의 모습을 간혹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구하고 원하는 일들은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산 아래에는 대자재천사(大自在天祠)가 있는데 몸에 재를 바른 외도[塗灰外道]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비마천사(毘摩天祠)에서 동남쪽으로 1백 50리를 가다 보면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84)에 이르게 된다. 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남쪽으로는 신도하(信度河)에 접해 있다. 성에 사는 사람들은 풍요로우며 재물과 보화가 넘쳐난다. 여러 지방의 진귀한 물건들이 대부분 이곳에 모인다.
오탁가한다성에서 서북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사라도라읍(娑羅覩邏邑)에 이른다. 이곳은 「성명론(聲明論)」을 지은 파니니(波儞尼)85) 선인(仙人)이 태어난 곳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문자가 아주 많았지만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세계가 공허하게 황폐해졌다. 장수제천(長壽諸天)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교화하여 이로 말미암아 문자와 전적[文籍]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 이후로 자원(字源)이 범람해지자 범왕(梵王)과 천제(天帝)는 규칙을 만들어서 그 때를 맞추었다. 그런데 이도(異道)의 여러 선인(仙人)들이 각기 문자를 만들어내자 사람들은 서로 그 뜻을 서술하고, 앞다투어 전해진 문자를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언어를 쓰고 자세하게 연구해 내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한편, 사람들의 수명이 백 세가 되었을 때86) 파니니 선인이 세상에 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사물에 두루 통하였는데 시대가 경박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서, 근거 없고 거짓된 것은 깎아내고 어지럽게 뒤섞인 것은 삭제하고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을 노닐며 도를 묻다가 자재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마침내
술작(述作)의 뜻을 말하자 자재천이 말하였다.
“갸륵한 일이다. 나도 마땅히 그대를 도우리라.”
선인은 가르침을 받고서 물러갔다. 그리하여 이에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사유하며 모든 언어들을 두루 모아서 선별하였다. 마침내 자서(字書)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천 개의 각 게송이 갖추어져 있으며, 게송은 32개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고금의 모든 문자와 언어를 살펴서 총괄한 것이다. 그가 이것을 왕에게 진상하자 왕이 매우 진기하게 여겨서 두루 익히고 전할 것을 전국에 명하였다. 그리고 잘 외우고 쉽게 익히는 자에게는 1천 금전을 상으로 내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전수하여 당시에 성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도읍에 사는 모든 바라문들은 학문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사물에 두루 박식하며 뛰어났다.
파라도라읍 가운데에 솔도파가 있는데 나한(羅漢)이 파니니 선인의 후진을 교화하던 곳이다. 여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5백 년이 흘러 큰 아라한이 나왔는데 가습미라국에서 유화(遊化)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범지(梵志)87)가 어린 아이를 때리며 훈계하는 것을 보고서 범지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이 아이를 괴롭히십니까?”
범지가 답하였다.
“성명론(聲明論)을 익히게 하였는데 학업이 일정하게 진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빙그레 웃자 늙은 범지가 말했다.
“무릇 사문이란 자비로써 중생을 위하고 만물이 다치는 것을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지금 웃고 있으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아라한이 말했다.
“이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자칫 깊은 의혹에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파니니 선인이 성명론을 지어 세상에 가르침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바라문이 답하였다.
“이 고을의 아이들은 파니니 선인의 후진이며, 그의 덕을 추앙하여 상(像)을 세웠으니 그것은 지금도 있습니다.”
아라한이 말했다.
“지금 그대가 때리는 이 아이가 곧 그 선인입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세상의 전적을 반복하여 탐독하였지만 그것은 다만 이론(異論)을 말한 것이었을 뿐 진리를 궁구하지는 못하였으며, 신령스러운 지혜를 헛되이 버려두고 정처없이 흘러 다니면서 쉬지 못하다가 이제야 다른 선한 일 덕분에 이렇게 그대의 사랑스런 아이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세상의 전적과 문장들은 부질없는 공적을 쌓느라 피로할 뿐이니, 어찌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과 복된 지혜와 중생을 향한 가피88)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남쪽 바닷가에 고목이 하나 있었는데 5백 마리의 박쥐가 그 나무에 구멍을 내어서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 장사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 몹시 매서운 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굶주리고 얼어붙었는지라 나무와 풀을 쌓아 놓고 그 밑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연기와 불길이 점점 치성해지자 고목에도 불이 옮겨 붙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때 장사꾼 가운데 한 사람이 밤중에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암송하였습니다. 나무에 살고 있던 박쥐들은 비록 불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법의 소리를 사랑하고 좋아하였으므로 고통을 참아내며 불길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업(業)에 따라 다시 태어나 모두 사람의 몸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출가하여 수학하니, 이전에 법의 소리를 들은 덕분에 아주 총명하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성과(聖果)를 증득하게 되었으며 세상의 복전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가니색가왕이 협존자와 함께 5백 명의 성현들을 불러 모아서 가습미라국에서 『비바사론』을 지었을 때89)에 이들이 모두 고목 속에 살고 있던 5백 마리의 박쥐들이었던 것입니다. 나같이 불초한 사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니, 이들에게는 우열의 구별이 있고 세상에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차이가 크게 있습니다. 그대가 지금 자식을 사랑한다면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출가의 공덕은 능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라한은 말을 마치고 나서 신통을 나타내 보여 홀연히 사라져 모습을 감추었다. 바라문이 이에 경이로운 마음을 크게 일으키고 오래도록 이 일에 감탄하고 인근의 마을에 낱낱이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이를 출가시켜 수학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을 돌이켜서 3보를 숭앙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그 교화를 따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믿음이 더욱 돈독하다.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으로부터 북쪽으로 산을 넘고 내를 건너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오장나국(烏仗那國)당나라 말로는 원(苑)이라고 한다. 옛날 윤왕(輪王)이 새나 짐승을 기르던 동산이다. 구역에서는 오장(烏場)이라고 하거나 또는 오다(烏茶)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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