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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3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9권

by Kay/케이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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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9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9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9. 현경 원년 3월에 자은사비(慈恩寺碑)의 완성을 감사하 는 데서부터 같은 해 3년 1월 거가(車駕)를 따라 서경 (西京)으로 돌아올 때까지

현경 원년(656) 봄 3월 계해(癸亥)에 어제(御製) 대자은사(大慈恩寺) 비문이 완성되었다.
이때 예부상서(禮部尙書)1) 허경종(許敬宗)이 사신을 보내서 비문을 법사에게 전해 주었다. 홍로사(鴻臚寺)2)에서도 역시 절에다 편지를 보냈다.
갑자일(甲子日)에 법사는 절의 대중을 거느리고 조정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진사(陳謝)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홍로사에서 내리신 부(符)를 접하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듭니다. 친히 성스러운 붓[聖筆]을 들어서 대자은사를 위해 지으신 비문이 완성되었다 하시니, 폐하의 은택[叡澤]이 곁에 임하시고 폐하의 말씀[宸詞]이 굽어 비추시어 현문(玄門)은 더욱 높아지고 저희 승려들에게도 영광이 더합니다. 두터운 은택의 땅[厚地]에 살고 있는 몸이 부끄러울 뿐이며 층층의 하늘[層穹]을 짊어지기에 힘이 모자랄 뿐입니다.
현장은 듣기에 조화(造化)의 공은 이미 만물에 전파되어 교화를 이루었고, 성인(聖人)의 도(道)도 역시 말로 인해서 물정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괘(卦)를 그리고 문(文)을 짓는 것은 부질없이 형기(形器)를 이야기하는 일이고, 효(爻)를 늘어놓고 상(象)을 나누는 것도 천지를 초월하지는 못하는 일입니다.
희황(羲皇)의 덕은 일찍이 전고(前古)에 칭송이 높았고 희후(姬后)3)의 풍교(風敎) 또한 홀로 후대에 우뚝 합니다. 이 어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이를 시행하여 성공하게 하고, 8정(正)을 밝혀서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를 밝혀서 말씀[言]으로 세우고 3명(三明)을 증명하여 풍속[俗]을 인도하시니, 이치[理]는 천지의 밖까지 다하시고 마음[情]은 해와 달의 밖에까지 미쳤습니다. 그 우열을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욱 왕성하다 하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금륜(金輪)의 운(運)을 타고 나셨고 옥력(玉曆)4)에서 딱 맞는 때를 타고 나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교화는 4주(洲)에 넘쳐나고 인(仁)은 9유(有)5)에 미치시며, 도(道)는 장차 성스럽게[聖] 될 기미를 품으셨고 공(功)은 이렇게 신령스럽고[神] 무성합니다.
많은 재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生知]이며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率由]6)은 타고난 지극한 정성[天至]7)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황후께서 남기신 경대[奩鏡]을 보며 슬퍼하셨지만 곧 절을 창건하시고, 갑자기 수승한 당번[勝幢]을 세우시고 또다시 문율(文律)을 펴셨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여 하늘 꽃[天華] 봉우리가 피어나고 폐하께서 지으신 글[睿藻)8)이 파도처럼 솟구쳐 오른다면, 붓으로 그린 바다[筆海]를 삼켜 용궁(龍宮)을 잉태하시고 글로 채운 숲[詞林]을 덮어서 학수(鶴樹)를 감싸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8장(藏)을 갖추시고 밖으로는 6경(經)을 밝히실 것입니다.
심오[奧]하면서도 능히 전범[典]이 되시고 넓으면서도 세밀하시어, 참으로 급원(給園)의 남긴 발자취는 보배로운 생각[寶思]에 맡기어 더욱 높이셨으며 내원(奈苑)의 남긴 향기는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문장[瓊章]을 빌려서 어둡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몽경(夢境)을 억양(抑揚)하여 미도(迷途)를 밝게 비추시고, 4천(天)을 모범의 본보기로 하여 삼계(三界)를 통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장의 언행은 취할 것이 없습니다.
외람되이 승려의 무리에 끼어서 자주 성은의 보살핌[恩顧]을 받았으니 항상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간곡하고 정성스러운 글을 지어주신 것과 왕성한 상법(像法)9)의 시절을 만난 것이 한편 부끄러우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참으로 여러 감회가 교차하며 송구하고 놀라운 정성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조당(朝堂)에 나아가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을축일(乙丑日)에 법사는 또 주상(主上)이 문명(文明)을 하늘에서 타고나셨기 때문에 용하고 재주가 많아서, 그 글재주[文]가 위(魏) 나라 군주였던 조조(曹操)10)나 조비(曹丕)11)에 견줄 뿐만 아니고, 글씨[書]는 한나라 군주[漢主]12)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사는 비문의 문장이 대단한 성문(聖文)인 것을 보고는, 다시 그 글씨도 신필(神筆)로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정으로 나아가 황제께 직접 글씨를 써주기를 청하여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사문 현장 등은 아뢰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물(事物)에 순응하여 상(象)을 드리우고 신성한 작용[神用]으로 널리 갖추며, 때에 따라 교화를 펼치어 성스러운 가르침의 공[聖功]을 다 마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日月]이 둘 다 밝아야 비로소 경천(經天)의 운행을 다할 수 있고, 풀과 나무[卉木]가 함께 빼어나야 바야흐로 아름다운 땅[麗地]의 덕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지혜는 만물을 두루하시고 인자함은 삼계(三界)를 적십니다. 일찍이 밝은 교화[景化]를 융성하게 펼치셨고, 다시 그윽한 가르침의 바람[玄風]을 널리 열었습니다.
주(周) 나라 목왕(穆王)이 도를 좋아하여 부질없이
요지(瑤池)13)의 노래나 읊었던 것을 오히려 비루하게 여기시고,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법을 숭앙하여 한갓 백마사(白馬寺)를 창건하고 마침내 천문(天文)을 내려 멀리로 유지(幽旨)를 펼쳤던 일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비석[豊琬]14)에 새겨 길이 왕성한 법칙[茂則]을 드리웠으니, 이는 6영(英)15)의 소리를 내는 것과 같고 5위(緯)16)가 아름답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한 마음을 펼치시어 속된 풍속을 감동시키고 큰 서원을 넓혀 시절을 바로잡으셨으니, 이 어찌 유독 진여(眞如)를 그윽이 도우며[幽贊] 심오한 도리[玄賾]를 드러내 선양[顯揚]하신 것뿐이겠습니까.
옥 같이 아름다운 문장[玉藻]을 여기에다 펼치시어 아름다운 석판[翠版]에 새긴다 하셨으나, 아직 은 갈고리처럼 아름다운 글씨[銀鉤]17)를 쓰지 않으셨기에 단심을 담은 글자[丹字]를 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규범이 되는 기악(夔樂)18)이 이미 갖추어졌기에 마을의 아무 곡조[里曲]에나 맡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용향(龍鄕)19)에 이미 낮이 왔는데 어찌 횃불을 살라 밝힐 수 있겠습니까.
백아(伯牙)20)와 사광(師曠)21)이 음율(音律)을 다스리고 희씨(羲氏)와 화씨(和氏)22)가 역(曆)을 총괄하지 않았다면, 누가 법고(法鼓)의 큰 소리를 울렸겠으며 누가 혜일(慧日)이 광채를 뿜도록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감히 이런 뜻으로 외람된 줄 알면서도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글을 써 주시어 아름다움을 갖춘 신필(神筆)로 새기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속을 초월한 신묘한 발자취로 이전의 제왕들을 능가하시고 감로를 내리시는[垂露] 기이한 교화는 이후에 오실 어떤 성인보다 뛰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황금처럼 옥처럼 아름다운 음성[金聲玉振]으로 미혹된 무리들을 깨우치시고, 봉황새가 날아오르듯 용이 서리고 있는듯[鳳翥龍蟠] 눈먼 무리의 눈을 뜨게 하신다면, 이 일이 어찌 다만 불교를 융성케 하는 데에만 그치겠습니까.
모든 중생에게 막대한 은혜를 입히시어 참으로 태평성대를 기리게 될 것이고, 종사(宗社)는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고 비천한 제가 어쩌다 잘못 불가[緇林]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본래부터 저는 세상일과 연루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또 많은 율행(律行)도 어겼습니다. 그렇게 외람되게 폐하의 말씀[宸詞]을 더럽히고도 과분한 칭찬만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놀라고 두려워서 차마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날마다 정성을 다하여서[翹誠] 티끌과 더러움이 가득 찬 마음에 감히 다시 얼음처럼 맑고 불처럼 뜨거운 뜻[氷火]을 품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올린 표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인일(景寅日)에 법사는 다시 청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지난 1일에는 폐하께서 지으신 문장[天藻]을 받들고 그 기쁨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직 폐하의 신령스런 글월[神翰]을 허락받지 못했으나, 하지만 기대하는 정성스런 마음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화로움에 오르는[攀榮]의 기이한 나무[奇樹]는 반드시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여야 향기를 풍기고, 궤보(跪寶)의 옥구슬 같은 봉우리[玉岑] 또한 짙어져야만[渥]
광채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규범을 제정[提衡]하여 순수를 지키시고 교화를 드리우시어[垂拱] 크게 편안하게 하시며, 고귀한 사상이 섬세하고 아름다우시며[睿思綺毫] 그 밖에도 굽어보면 너무나 많은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다.
홍범(鴻範)은 솟아오르는 낙수(洛水)23)에서 빛났고 초성(草聖)24)은 못가에 임해서야[臨池]25) 왕성해졌습니다.
현장은 앞서는 삼가 성은을 입어 또 약화(若華)26)를 금경(金鏡)에 받들었으며, 뒤에는 감히 은택을 바라서 계영(桂影)27)을 은 갈고리처럼 아름다운 글귀[銀鉤]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이 일이 어찌 벽(璧)을 합쳐 서로 맞물리게만[相循] 하고 빛을 꿰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일이겠습니까. 역시 폐하의 글씨[天翰]가 아니면 해와 달처럼 빛나는 글을 실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름다워야만 희미(希微)한 궤범을 널리 펼 수 있겠습니다. 마음은 달려가서 머리를 숙입니다.
감히 바랄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쌓이는 미진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이렇게 청을 올립니다.”
이렇게 표를 올려 아뢰자 황제는 마침내 친히 쓴 신필(神筆)을 내려 주었다. 법사는 황제의 허락을 받자 기쁘고 경사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이렇게 감사의 표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들어 보니, 폐하의 신필을 내리시어 어제(御製) 대자은사 비문을 새길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옥새(玉璽)가 여기에 이르러 자비로우신 윤음[綸慈]을 외람되게 받았으니, 그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뿐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현장이 듣기로는, 활이 강해지는 것은 당기는 힘[彀]에 달렸기에 날다람쥐 따위가 그 기계를 움직일 수가 없고, 큰 종은 소리를 숨기므로 짜서 엮은 대자리[織筵)를 가지고는 그런 울림을 내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해가 뜨고 달이 비추어야 드디어 그림자가 불문[空門]28)에까지 돌아 드리우고, 비가 흠뻑 내리고 구름이 피어올라야 감동[感]이 멀리 절집[玄寺]까지 비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원한다고 마음대로 도모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오니, 폐하께서는 날개를 밟고 중요한 자리[樞]에 오르시고 부절(符節)을 잡고 천운(天運)을 이으셨으며, 헌원(軒轅)29)의 뒤를 쫓고 전욱(顓頊)30)을 능가하시며 하(夏)를 잉태하고 은(殷)을 삼키셨습니다. 온갖 신묘함[衆妙]을 통달하시어 시절을 교화하시고 많은 능력을 발휘하시어 세속을 밝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9역(域) 안은 이미 어진 풍습에 젖어 있고 사천(四天)도 역시 깊은 교화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는 방법[津梁]31)은 지극한 성인[至聖]이 아니면 능히 그 근원을 밝힐 수 없고, 눈에 띄지 않게 은근하게 도움을 주는[幽贊] 기술[工]은 극에 이른 사람[至人]이 아니면 어찌
그 자취를 남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조상 그리는 정[追遠]32)을 극진하게 하여 하늘의 마음을 절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천지신명의 도움[冥祐]을 기원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폐하께서 성은[宸睠]으로 돌보시어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운 말씀[英詞]을 내리셨으니 이미 희대의 진기한 보배보다도 더욱 뛰어나시며, 신비한 발자취[秘跡]를 여시었으니 장차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絶價] 보배마저도 넘어서게 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겠지만 특히 저희 불자[梵徒]들은 경사스럽고 기쁨이 배나 더합니다. 천상[鈞天]33)의 크나큰 즐거움을 꿈꾸는 일도 이에 비한다면 기이한 것이 아니고 윤왕(輪王)의 계주(髻珠)34)를 얻는 일도 이에 비한다면 무슨 귀한 것이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마땅히 좋은 돌[貞石]에다 새기시어 복의 뜰[福庭]에 심으시옵소서. 그리하면 보잘것없는 저 미혹한 중생들도 마침내는 귀와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법의 횃불을 융성하게 하시어 미래에 전하시어 그 보배로운 글자를 바라보고 은갈고리처럼 아름다운 글자[銀鉤]를 우러르는 자들이 그 날 바로 모두 보리(菩提)를 발하게 하시고, 주문(遒文)35)을 외우며 지극히 깊은 이치를 탐구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반야(般若)를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겁성(劫城)은 결국 티끌로 끝나더라도 밝고 밝은 아름다움은 영원히 존재하고, 푸른 바다[碧海]가 뽕나무밭[桑田]으로 변한다 해도 왕성하고 아름다운 가르침[風敎]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현장은 평범한 자질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행업(行業) 닦기를 부끄러워하였고, 이미 중이 된 다음에는 현묘한 길[玄猷]을 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인도[迦維]에 갈 수 있었던 것도 본디 황제 폐하의 교화[皇化]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이렇게 번역을 하게 된 것도 또 조정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정관(貞觀)36) 연간에 외람되이 크나큰 자비[洪慈]를 입었고, 영휘(永徽)37) 이래로도 다시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두 주상 폐하께서는 신필(神筆)을 내리시어 황공하게도 칭찬을 해 주셨으니, 두 왕조의 황제께서 쓰신 글[聖藻]로 지극한 영광을 드리워 주셨습니다.
어리석고 용렬한 저 자신을 돌이켜보자니 실로 삼가고 두려운 마음뿐이라, 죄업을 갚아야 한다는[輪報]38) 간절한 마음을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큰 골짜기보다도 깊으니 떨어지는 물방울로써야 어찌 능히 보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저 높은 언덕[崇丘]보다 두터우시니 가느다란 티끌로써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오직 모든 지혜의 힘[慧力]에 의지하여 무한[無方]하게 운용하며, 밝은 복[景祚]를 원침(園寢)39)에서 빌려서 융성한 기틀[隆基]을 7백(百)에 도울 뿐입니다.
지극한 공경과 송구함을 감당하지 못하여 삼가 내급사신(內給事臣) 왕군덕(王君德)에게 부쳐서 표문을 받들어 올리며 감사한 마음을 아룁니다. 경솔하게 위엄(威嚴)을 범한 죄, 엎드려 깊이 두려울 뿐입니다.”
여름 4월 8일에
대제(大帝)가 비석에 새길 글을 쓰고 아울러 조각까지 마친 뒤에 절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법사는 성스러운 자애[聖慈]를 입는 것에 가책을 느껴 감히 앉은 채로 비석이 오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곧 자은사의 대중들과 경성(京城)의 승니(僧尼)들을 거느리고, 각기 당개(幢蓋)와 보장(寶帳)과 번화(幡花) 등을 들고서 함께 방림문(芳林門)까지 나아가 맞이하였다.
황제는 또 조칙을 내려 태상(太常)40) 9부(部)의 음악과 장안(長安)현과 만년(萬年)현 두 현(縣)의 합창대를 파견하여 함께 절까지 가져다주도록 했다. 당(幢)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라 해도 창공에 불쑥 솟아날 만큼 높았고 번(幡) 가운데 극히 짧은 것이라 해도 오히려 하늘 높이 휘날릴 정도였는데, 이렇게 무려 3백여 가지나 되었다.
합창대는 백여 대의 수레에 나누어 타고 7일 저녁에 성 서쪽 안복문(安福門) 거리에 모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8일에는 길을 떠날 수가 없었으므로 황제는 조칙을 보내서 쉬도록 하고, 이에 법사만 안으로 들게 하였다.
10일이 되자 하늘이 개고 맑았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전과 같이 대열을 베풀어 진열하게 하고, 14일 아침에 드디어 당번(幢幡) 등을 차례로 진열한 채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방림문에서 자은사에 이르는 30리 길을 찬란한 당번으로 가득 메웠다.
황제는 안복문의 누각에 올라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경도(京都)의 선남선녀들로서 이를 지켜본 자가 백여 만 명이나 되었다.
15일에는 승려 7명을 득도(得度)하게 하고 2천 명의 승려에게 재를 베풀었으며, 불전(佛殿) 앞에서 9부(部)의 음악을 연주하고는 날이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16일에 법사는 다시 승려들과 더불어 조당(朝堂)에 나아가 비(碑)가 절에 도착한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사문 현장 등은 아뢰옵니다. 금월 14일에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쓰신 대자은사비(大慈恩寺碑)를 보내주시고 아울러 구부(九部)의 음악을 공양하여 주셨습니다. 요임금의 태평한 해[堯日]을 고루 나누어 비추어 먼저 지혜의 등불[慧炬]41)을 더욱 빛나게 해시고, 순임금의 잔잔한 바다[舜海]로 물결을 통하여 법의 흐름[法流]을 풍족하게 넓혀 주셨습니다.
풍비(豊碑)42)가 바위처럼 우뚝 서고 천문(天文)이 밝게 빛나니, 아름다운 노을이 영산(靈山)을 비추는 형상이 마치 아름다운 무늬[縟宿]가 신선들이 사는 산길[仙嶠]에
임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모름지기 승려나 속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다 천둥이 치고 구름이 일어나 우러러 받들어 놀라워하기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8괘(卦)43)에서 문(文)이 나왔고 6효(爻)에서 「계사(繫辭)」가 나왔으며, 새의 발자국을 보고 법을 만들고 죽은 기린을 슬퍼하며 전법(典法)을 폈습니다. 성인(聖人)의 능사(能事)를 여기에서 다 보았다 하겠습니다. 법도(法度)로써 전범(典範)을 드리우고 때를 따라 교훈을 세우시며, 생령(生靈)을 잘 다스려서 거센 바람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래서 진 시황(秦始皇)은 이 일을 오직 돌에 새겨 아름다움을 봉선(封禪)44)에 밝히고, 위후(魏后)는 한갓 비(碑)에 새겨 이 공을 대향(大饗)45)에 기록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제목(題目)만 보고도 여러 왕을 높이 우러르는 것 같은데, 이것이 어찌 직접 폐하의 아름다운 문장[叡藻]을 받아 허리 굽혀 신선이 지은 듯한 글월[仙翰]을 열어 보는 것과 같겠습니까.
편종을 연주하여[金奏]46) 소(韶)47)를 울리고 은 갈고리처럼 아름다운 글귀[銀鉤]는 자취를 빛나게 합니다. 용궁(龍宮)을 다 뒤져서 3현(玄)48)을 뛰어넘고 봉전(鳳篆)49)을 앞질러서 팔체(八體)50)를 다하셨으며, 춘파(春波)를 드날리며 생각을 달리고 추로(秋露)를 적시어 기묘함을 나타내셨습니다. 1승(乘)의 오묘한 이치[妙理]를 넓혀서 6도(度)의 심오한 진리를 찬탄하셨고 교화로 삼천대천세계를 다스려서 명성이 백억(百億)의 밖에까지 퍼졌습니다.
내원(奈苑)의 은미한 말씀[微言]51)이 폐하의 하늘에서 내린 듯한 문장[天詞]을 빌려서 다시 나타났고, 죽림(竹林)52)의 개사(開士)53)는 폐하의 신령한 글씨[神筆]덕분에 더욱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범지(梵志)로 하여금 마음으로 귀의케 하여 의심의 그물을 끊어버리고 교훈을 공경하게 했으며, 마왕 파순(波旬)으로 하여금 생각을 고쳐 사산(邪山)을 허물고 도(道)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 어찌 속세[塵門]의 선비가 처음으로 미혹을 깨닫고 몽매한 사람이 행(行)하여 고제(苦際)54)를 초월하게 하는 단순한 일일 뿐이겠습니까.
불교가 동으로 전래된 지 6백 년이 되었는데도 널리 밝혀서 융성케 하는 일은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한(漢) 나라의 명제(明帝)55)께서는 마음에 느낀 바가 있으시어 부의(傅毅)56)에게 계책을 물으셨고, 오주(吳主) 손권은 불교의 종지(宗旨)에 귀의하신 후에도 오히려 의심나는 것을 감택(闞澤)57)에게 상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 내려오면서부터는 거론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황제께서는 인연에 따라 사물을 교화하시니 홀로 밝은 천운(天運)을 받드셨으니,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응보(應報)가 있듯이 나라의 기틀이 매우 높고 융성해졌습니다. 금륜(金輪)의 왕과 같이 신묘한 공적[神功]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보관(寶冠)을 쓴 제왕과 같이 아름다운 복록이 영원할 것입니다.
저희 현장 등은 어쩌다 잘못
조정의 은혜[朝恩]를 입었고 요행히 도량[玄肆]58)에 올라서, 자비의 구름[慈雲]이 거듭 펼쳐지고 법고[法鼓]가 다시 울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3명(明)의 교화는 이미 융성하고 8정도(正道)의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곧은 절개를 갖지도 못했고 간절한 정성을 갖지도 못했는데, 그런데도 폐하의 장려하고 인도하시는 은택을 입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를 만큼 큰 은택을 입었으니 깊은 계곡에 엎드려 숨을 만큼이나 부끄럽습니다. 우러러 두렵고 송구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에 삼가 조정에 나아가 감사한 마음을 아뢰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碑)가 도착했다. 유사(有司)는 불전(佛殿) 앞 동북쪽 귀퉁이에 별도로 비각을 짓고 거기에 비석을 안치했다. 그 건물은 대들보가 2중으로 되었으며 문 위의 차양[門楣]과 용마루[棟梁]에는 화려한 구름 문양을 넣었으니, 금빛 꽃[金花]은 아래를 비추고 보배로 만든 풍경[寶鐸]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귀신같은 솜씨로 만든[仙掌] 노반(露盤)59)도 영탑(靈塔)과 동일하게 만들어졌다.
황제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 그리고 초서(草書)와 행서(行書)를 다 잘 썼는데 특히 비백서체(飛白書體)60)에 뛰어났다. 이 비석의 글씨는 행서로 썼으나 또 비백법의 필체로 쓴 것이었다. 현경(顯慶)61) 원년(元年)이라는 네 글자는 모두 신묘(神妙)함을 다하였다.
이 비석을 보러오는 사람이 매일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문무(文武) 3품(品) 이상의 관리들도 표(表)를 올려 탁본하기를 청했으므로 허락하였다.
중국에서 결승(結繩)62)을 사용하던 시대가 끝나고 문자(文字)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전(二篆)63)은 형체가 달라졌고 해서와 초서의 형세도 달라졌다.
현침(懸針)64)이나 수로(垂露)65), 운기(雲氣)나 언파(偃波)66), 명석(銘石)이나 장정(章程), 팔분(八分)67)이나 행예(行隸) 같은 서체는 옛사람들도 각기 서로의 장단점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잘하기는 불가능했다.
한(漢) 원제(元帝)는 사서(史書)를 잘했다고 하며 위 무제(魏武帝)는 초서와 행서에 뛰어났고, 종요(鍾繇)68)는 명석(銘石)과 장정(章程)과 행압(行押)의 세 가지 서체에 다 통달했다 한다. 왕차중(王次仲)69)은 팔분(八分)에 오묘하게 정통하였으며, 등소(鄧邵)와 장홍(張弘)은 비백(飛白)에 이름을 날렸고 백영(伯英)70)과 자옥(子玉)71)은 초성(草聖)이라 일컬어졌다.
오직 중랑(中郞)72)과 우군(右軍)73)은 여러 가지를 겸하여 잘했다고는 하나, 역시 다 통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위문휴(韋文休)는 중랑과 우군 2왕[二王]74)의 글씨를 보고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스스로 능통하다고 하지만 아직 글씨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타고난 필봉이 빼어나고 왕성하고 힘이 있으면서도 옛 현인(賢人)의 여러 서체에 통달하고 전대 선철(先哲)의 능란한 필체를 다하고, 부드러운 봄빛처럼 우아하고 글자를 창화(唱和)하기 어려운 것으로 말한다면, 진실로 그런 분은 우리
황제뿐이다.
법사는 어려서부터 듣고 익히기에 힘쓰고 또 나중에는 서방으로 가서 능산(凌山)과 설령(雪嶺)을 건넜던 탓인지, 드디어 냉병(冷病)에 걸리고 말았다. 한 번 발작하면 심장이 꽉 막혀서 멈추는 것 같았는데, 이런 심한 고통을 자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을 약으로 다스려서 겨우 안정을 얻고 있었는데, 그런데 금년 여름 5월에 더위 때문에 서늘한 곳을 찾았다가 마침내 이전의 병이 재발하여 거의 고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도속(道俗)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중서(中書)가 황제께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는 칙명으로 공봉상의상약봉어(供奉上醫尙藥奉御) 장효장(蔣孝璋)과 침의상관(針醫上官) 종(琮)을 보내서 간병을 전담하게 하고, 또 내고(內庫)에 명령을 내려서 필요한 약은 모두 보내도록 하였다. 북문(北門)의 사신은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들러서 병세를 살펴 소식을 통보하도록 했으며, 또한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내국(內局)의 전문가를 보내서 편안하게 보살피도록 하였다.
황제가 법사를 보배처럼 아끼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외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효장(孝璋) 등이 밤낮으로 법사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의약을 제공하였더니, 간병한 지 5일 만에 위중한 상황은 넘기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였다. 법사는 이런 성은(聖恩)을 입게 되자 다음 날 표문을 올려 감사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은 스스로 몸을 다스리는 데에 서툴러서 냉병이 더욱 발동하여 거의 죽게 되어 운명을 마치는 듯했었는데, 폐하[天恩]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좋은 의원[良醫]을 보내주셨으므로 침을 맞고 약을 먹은 덕분에 즉시 병세가 호전되었습니다.
끊어지려는 목숨을 잡아 머물게 하시고 막 사라지려는 영혼을 돌이키게 하시어, 거듭 창성한 시대를 보게 하시니 다시 영명하신 다스림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단지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영영 끊어서 기맥(肌脈)을 순조롭게 하는 일일 뿐이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폐하께서는 용렬한 이 사람을 위로하시기 위해 특별한 은혜를 너무나 자주 내려 주셨습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는 두터운데 이 목숨은 가벼우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지혜의 힘[慧力]에 의지하여 깊은 복[冥祉]으로 보답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현장은 아직 몸이 허하고 고달파서 감히 조정에 나아가 감사한 마음을 아뢰지 못합니다. 지극히 공경하고 송구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제자 대승광(大乘光)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아룁니다.”
황제는 이 표문을 보고 급사(給事) 왕군덕(王君德)을 보내어 법사에게 이렇게 위문했다.

“약을 처음 먹기 시작하면 당연히 기력이 허해지는 법이니, 아무쪼록 법사는 스스로 잘 섭생을 하시오. 의당 마음 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법사는 또다시 황제의 위문[聖問]을 받고는 기쁘고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또 표문을 올려 감사를 아뢰었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은 쌓인 업[業累] 때문에 질병의 고통을 불러왔고, 호흡이 곤란하여 태평한 시대와 거의 단절할 뻔 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홀연히 황제 황후(皇帝皇后) 폐하께서 자비심을 내리시어 성명(性命)을 근심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사절[天使]이 자주 찾아와서 열 번이나 위문[十慰]하였으며, 용한 약[神藥]의 빠른 효과는 마치 알약 한 알[一丸]에 바로 살아난 것 같습니다. 폐하의 성스러운 자비[聖慈]에 흠뻑 목욕하였더니 그 깊던 통증이 사라지고,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니 마침내 병은 나아졌습니다.
하늘[上帝]의 부름을 받고 이미 떠났어야 할 이 영혼[魂]이, 장차 요절하게 되었던 목숨이 거듭 넓은 치화(治化)를 받게 될 줄을 어찌 기약이나 했겠습니까? 한 발 물러나 생각해 보아도, 어리석은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만 칠 뿐, 황공한 마음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이 은택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 한미한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사례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바라기는 예경과 송경[禮誦]에 이 몸과 마음을 더욱 다하여 바침으로써 분수 넘치는 성은(聖恩)에 보답하여 무궁한 잘못을 조금이나마 덜까 합니다. 극심한 감격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표문을 올려 감사를 아룁니다. 기쁨과 송구함이 교차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글로 또 폐하의 귀와 눈[聽覽]을 더럽히게 되니, 엎드려 생각건대 황송하기만 더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정관(貞觀) 11년(637)에 다음과 같은 조칙이 있었다.
“노자(老子)는 짐(朕)의 조종(祖宗)이시다. 그 명위(名位)와 칭호는 마땅히 부처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
이 당시 보광사의 대덕 법상(法常)과 총지사(總持寺) 대덕 보응(普應) 등 수백 명이 조당(朝堂)에서 이 문제에 대해 논쟁을 폈으나 아직 개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법사도 귀국한 이래 자주 내밀히 상주(上奏)하였으나 황제는 고려하겠다고 했을 뿐 실현되지 않고 있다가 문제(文帝)가 승하(昇遐)하였다.
그 뒤 영휘(永徽) 6년(655)에 도교의 도사(道士)나 불교의 승려로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가운데 그 사정이 불투명한 자는 속법(俗法)과 똑같이 추고(推考)하라는 조칙이 있었다. 그래서 변방의 관리들은
조칙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승려의 범죄에 대하여 대소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장형(杖刑)을 가하여 욕을 당하는 일이 매우 심했었다.
법사는 늘 그것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병으로 인해 일어날 수가 없게 되자 다시는 황제의 천안(天顔)을 뵐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곧 사람을 보내어 앞의 두 가지 일이 국가를 위해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뢰었다.
“지금 현장의 목숨은 조석(朝夕)에 달려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그 다음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서는[後言]을 들을 수 없을 듯하여, 삼가 계품(啓稟)하며 엎드려 있습니다. 그저 황송하고 두려움만 더할 뿐입니다.”
황제는 칙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올린 일은 잘 들었소. 그러나 불교와 도교의 위치[名位]에 대해서는 지난 왕조[先朝]에서 처리한 일이므로, 평장(平章)75)과 상의를 하여야 하겠소. 그리고 승려와 속인[僧俗]을 같이 취급하는 건에 대해서는 칙명을 내려 즉시 없애도록 하겠소. 법사는 아무쪼록 안심하고 탕약을 복용하는 일에만 힘쓰기 바라오.”
그리고 23일에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청허(淸虛)와 불교 경전[釋典]에서 주장하는 미묘(微妙)는 만물을 구제하는 진량(津梁)이어서 삼계(三界)가 우러러 따르는 바이다.
그런데 근래 말법(末法) 시대가 되면서 승려와 도사가 많아지고, 이에 따라 법률을 위반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래서 속법(俗法)에 의거하여 징계해 왔었다.
짐이 바라는 것은 악을 그치게 하고 선을 권장하는 데에 있지, 사람을 가볍게 여기라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출가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조례(條例)가 갖추어져 있어서 별도로 죄를 추문하고 있다.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전에 도사(道士)나 여도사(女道士)나 승니(僧尼)가 죄를 범한 자 중에서 속법에 의거하여 벌을 받은 자는 마땅히 석방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제정한 조례에 따라야 할 것이다.”
법사는 이러한 성은(聖恩)을 입고 표문을 받들어 조당에 올리면서 감사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엎드려 칙지(勅旨)를 보니, 승려들이 과오를 범했을 때에 속법을 따른다는 조례를 정지시키고 옛날대로 바로잡도록 환원하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은택이 홀연히 불도[緇徒]들에게 내려지고, 나무라지 않는 은혜가 또 도량[玄肆]을 적시었습니다.
양기(陽氣)를 쬐고 도(道)에 목욕하는 일이 실로 빛나고 화려하시니, 땅에다 몸을 구부리고 있어도 오직 두려움만 더할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법왕(法王)76)은 이미 가시고 상법의 교화[像化]77)만이 덧없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종지(宗旨)를 계승하는 계책은 여러 영명하신 황제[明后]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보위[寶圖]78)를 극진히 다스리시고 금륜(金輪)에 바르게 오르시어, 석교(釋敎)를 돌보시면서
항상 널리 천명할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현문(玄門)79)에 출가한 사람들을 다른 속인(俗人)들과는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비록 마음이 5탁(濁)80)에 끌려 율행(律行)이 많이 모자란다 해도, 몸에 3의(衣)81)를 입었으면 복전(福田)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까다롭고 엄격했던 법망을 느슨하게 풀어서 관대하고 어진 법을 펼치셨으며, 부처님의 곧은 말씀[金口]82)을 믿으시고 여기에 회향(廻向)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기쁨을 실어 하늘을 공경한 데[天祗] 대해 길조(吉兆)로써 응하신 것이니, 이 어찌 저희 불도[梵侶]들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데에 그칠 일이겠습니까?
거기에다 곧고 굳게[貞確]까지 해 주셨습니다. 만약 이런 관대한 용서를 거스르고 스스로 허물을 끼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부처님의 지엄한 교지를 어기고 성주(聖主) 폐하의 깊은 자애(慈愛)를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영명한 신령[明靈]이 있어서 틀림없이 저절로 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찌 평장(平章)의 율(律)을 기다릴 것까지 있습니까? 마땅히 간악한 죄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현장은 용렬하고 우매한 자질로 외람되게 법류(法流)에 섞여들어, 매번 큰 은혜를 입게 되어 황공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듭 특별하신 장려(奬勵)를 받들게 되니 더더욱 두렵고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제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어 대궐에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공경과 두려운 마음의 지극함을 감당할 수 없어 삼가 제자 대승광(大乘光)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게 하고 감사를 아룁니다.”
이로부터 승도(僧徒)들은 안심하고 참선과 독송에 전념할 수 있었다. 법사는 희비가 교차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로 옷소매를 적시며,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표문을 올려 감사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칙명[恩勅]을 받들었습니다. 승려들을 속법(俗法)에 따라 추문(推問)하는 법률 조문을 없애 주셨으니 그 기쁜 마음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법(正法)이 융성하거나 침체되는 일은 위에 계시는 인군께서 억누르느냐 선양하느냐에 달렸으며, 이륜(彝倫)이 두터워지고 엷어지는 것은 현묘한 풍교[玄風]에 따라서 흥하게도 되고 쇠퇴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국운[聖運]이 하늘의 도[璿曜]에 달려 있으니, 명황(明皇)83)께서는 순수를 잡으시어 도예(道藝)를 숭상하시고 현묘한 불교[玄]를 유가[儒]와 구별하셨습니다. 그렇게 불이(不二)84)의 관건(關鍵)을 여시고 유일(唯一)한 발자취를 넓히시어, 용궁(龍宮)을 봉각(蓬閣)에 본뜨시고 취괴(鷲壞)를 신고(神睾)에 이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범종(梵鍾) 소리가 집안[區宇]에 넘치게 하시어 복되고 선한[福善] 업을 여명(黎明)에 깨끗이 목욕시켰습니다. 이것은 법문(法門)의 아름다운 일일 뿐 아니라 온 천하에
다행한 일입니다.
일찍이 승도(僧徒)가 정숙(整肅)하지 못하고 가르치고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났던 까닭에, 안으로는 불교를 훼손시키고 밖으로는 왕법(王法)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욕을 뒤집어쓰게 되어, 마침내 천(天威)에 저촉되어 속법(俗法)을 따르는 명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잘 다스려지기를 기약하면서 징계하려는 뜻을 두신 것이었으니, 저희 승려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며 아침저녁으로 부끄럽고 황공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마치 하늘이 임하시듯이 보고 알아주시어[聖鑑]85) 인자한 은택(恩澤)을 밝게 베푸시었습니다. 현묘(玄妙)를 깊이 기약하시어 작은 허물을 넓은 덕으로 덮어주시고, 이렇게 특별한 은혜를 내리시어 벌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꼭 그 사람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 법의 존귀함을 돌아보신 것으로, 마침내 그물에 들어간 고기를 다시 강에 놀게 하셨고 조롱 속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아가게 하셨습니다. 법수(法水)86)가 섞이니 다시 맑아졌고 복전(福田)을 김매니 다시 옥토가 되었습니다. 이제 승려들은 폐하의 은혜를 입어서 각자 스스로 근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닦아 악을 없애고 천심(天心)을 보좌하며, 오로지 마음을 다해 예경(禮敬)하는 정성으로써 크나큰 은혜[鴻造]에 보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황제 황후께옵서는 나라를 밝고 융성하게 하신 공으로 길이 온갖 복록을 누리시고, 자비(慈悲)의 업(業)에 오르시어 만 년의 태평성대를 누리소서. 진역(震域)87)에는 늘 상서(祥瑞)가 깃들고 유성(維城)88)께서는 아름다움을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뛸 뜻이 기쁜 지극한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거듭하여 표문을 올려 감사를 아룁니다. 경솔하게 폐하의 면류(冕旒)를 더럽혔으니 더욱 황공하여 엎드릴 따름입니다.”
황제는 이 표문을 보고 법사의 병이 쾌유되었음을 알고, 사신을 보내서 법사를 맞아 입조(入朝)케 하였다. 그리고 응음전원(凝陰殿院)의 서각(西閣)에 머물게 하고 공양하였다. 여기서 법사는 경전을 번역을 하면서, 20일이나 혹은 30일 만에 한 번씩 바깥출입을 하였다.
그 해 겨울 10월에, 중궁(中宮)89)의 출산을 맞게 되었다[在難]. 그래서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청하자 법사는 이렇게 아뢰었다.
“성체(聖體)는 반드시 편안하시고 아무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임(懷姙)되신 분은 남아입니다. 편안해진 뒤에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허락을 받았다.
11월 5일에 황후는 법사에게 납가사(納袈裟) 한 벌과 잡물 등 수십 종류를 하사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다음과 같이 계사(啓辭)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하사하신 납가사와 잡물 등을 두 손으로 받들어 마주하니, 놀랍고 황송스러운 마음 어디에 비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금루(金縷)90)의 상복(上服)을 선현(先賢)으로부터 전해 받기도 하였고, 또 혹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이 귀한 옷[無價衣]에 대해서도 여러 성전(聖典)에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신기함과 오묘함의 극치는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황후께서 하사하신 것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채색의 농담(濃淡)을 보면 그 뛰어나다는 화가 경군(敬君)91)도 그 교묘함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며, 촘촘한 바느질 솜씨는 눈 밝은 이루(離婁)92)라 해도 그 끝을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연하(烟霞)가 방에 가득차고 몸은 난초(蘭草) 동산에 있는 것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스스로를 살펴보니 갑자기 큰 영광을 더한 것이었습니다.
옛날 진(秦) 나라 때에 도안(道安)이 진귀한 말을 전했다 해도 이러한 은혜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진(晋) 나라 때에는 지둔(支遁)93)이 예(禮)를 칭송했다 하지만 이러한 은택이 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현장처럼 용렬하고 박덕한 사람만이 홀로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사사로이 훔치게 되니, 총애를 받은 저 자신을 돌아보니 두려운 마음에 땀만 더더욱 흐를 뿐입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황제 황후께서는 많은 자손을 얻으시고 무궁한 복조(福祚)를 누리시면서, 오래도록 청명한 도[玉鏡]에 임하시어 길이 보위[寶圖]에서 다스리시면서 여러 중생들을 교화하고 기르시며 하늘과 더불어 무궁하소서. 부끄러운 마음 감당할 수 없어 삼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는 무거운데 말은 가벼워서 이루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5일 저녁 무렵 갑자기 한 마리의 붉은 참새가 날아와서 장막[御帳] 안에 앉았다. 이것을 보고 현장 법사는 기쁘고 경사스런 마음을 이기지 못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이 듣건대, 흰 비둘기[白鳩]94)는 상서(祥瑞)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은제(殷帝)의 융흥(隆興)을 가져왔고, 붉은 참새[赤雀]95)는 부절(符節)을 드리는 것이니 주왕(周王)의 경사(慶事)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이 상서의 징조를 내림으로써 사람의 일[人事]을 밝힌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장은 금일 신시(申時) 넘어 유(酉)96)시가 채 못 될 즈음에 현경전(顯慶殿)의 장막[庭惟] 안에서 새를 한 마리 보았습니다. 그 새는 등과 날개가 모두 붉었고, 배와 다리까지도 붉었습니다.
새는 남쪽에서 날아와 휘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어좌(御座)에 가서는 주위를 배회하면서 팔짝 팔짝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자태가 매우 의젓했으므로 저는 이 색다른 날짐승을 보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황후께서 지금 잉태 중에 계시며, 아직 분만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지금 현장은 편안하게 잘 되기를 원하고 빌면서 매우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내가 기도하는 대로 잘 될 것이라면 좋은 상[喜相]을 보여 달라.’
그렇게 말하자
새가 둥글게 돌면서 발을 오므리며 편안한 자태를 보이는 것이 확연히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현장은 마음이 너무 기뻐서 손을 들어 붉은 참새를 부르면서 천천히 그 새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새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쓰다듬어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광경을 좌우의 사람들이 다 함께 보았습니다.
현장은 그래서 3귀(歸)97)를 받고 그 우아한 뜻에 보답하려고 손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새가 배회하는 것을 따랐는데, 새는 마침내 날아갔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면, 황제와 황후께서는 덕은 신명(神明)에 통하시고 은혜는 만백성에게 더하셨으며, 예(禮)와 악(樂)으로써 널리 화목하게 하시고 인(仁)과 의(義)는 깊고 원대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날개 달린 조류[羽族]들까지도 상서를 바치게 하셨으며, 신령한 새[神禽]까지도 천질(天質)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자손은 드러나게 번영하시어 팔백(八百)이나 되게 융성하시며, 이미 지난 대(代)의 휴부(休符)가 되었고 또한 지금의 뛰어난 선물[靈貺]98)이십니다.
현장은 가벼운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나 행운(幸運)이 많아서 애초부터 상서(祥瑞)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쁘고 복된 일이 있었는데 감히 입을 닫고 침묵할 수 없어서, 간략히 대강의 일을 적어서 삼가 아룁니다.
그 우익(羽翼)의 위엄 있는 거동이나 양의 정기를 머금은[陽精] 순박한 아름다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대의 옛일들을 고찰해 보아도 이런 것이 출현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삼가 말씀을 올립니다.”
표(表)를 올리고 나서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칙령(勅令)이 법사에게 전해졌다.
“황후의 출산은 이미 끝났고, 과연 사내아이가 탄생했소. 생김새가 단정하면서도 기이하고 특별하여, 신령스런 광택[神光]이 집안에 가득 차서 뜰에서부터 하늘까지 비추었소. 짐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내외(內外)가 기쁨으로 뛰고 있소. 법사에게 칙서를 내려 윤허한 일들은 절대 어기지 않겠으니 법사도 호념(護念)해 주시오.”
탄생한 왕자를 불광왕(佛光王)이라 불렀다.
법사는 이렇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지극한 도[至道]는 펼친 만큼 거두는 법이라 천인(天人)을 인도하여 세자를 보게[載弄]99) 된 것이며, 깊이 기필하여[深期] 느끼었기에 현성(玄聖)께서 극기(克岐)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와 황후께옵서는 마음은 3공(空)을 거울로 삼으시고 교화로 9유(有)100)를 양육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천자의 면류를 드리워[垂旒]101) 2제(諦)102)를 여시고, 달리던 말[走馬]103)을 일승(乘)에 멈추게 하셨습니다.
난전(蘭殿)104)에서 처음으로 흠상(歆嘗)하실 때에 한없는[俱胝]105) 원(願)을 발하시고, 옥동자[琁柯]를 잉태하시자 문득
성을 넘어 출가할[踰城]106) 징조를 맺어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10호(號)의 부처님이 강령(降靈)하여 널리 이 중생을 거두게 하시니, 온갖 신들이 이 좋은 일을 도와서 궁위(宮闈)107)를 엄숙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깨끗하게 다스려져서 모두가 편안한 가운데 세자께서 탄생하시니, 7화(花)의 근엄함으로써 걸음을 이으시고 9룡(龍)108)이 낮아지도록 자질이 빛나십니다.
세자께서 현문(玄門)에 발자취를 두시면 도수(道樹)109)에 그늘이 사라질 것입니다.
비록 옛날의 제왕(帝王)을 본받아서 상서를 나타내고 하늘을 어루만져서 기적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어찌 이 내려주신 은혜[感貺]에 비하고 이 영걸한 계책[英猷]110)에 짝할 수 있겠습니까?
온 나라가 노래 부르며 황제 폐하께 천우[納祐]가 내린 것을 기뻐하고, 이 사원(寺院)의 용감한 무리들은 전륜성왕[紺馬]이 와서 노니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앞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없으시어 특별히 법복(法服) 입은 승려들로 하여금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常戀]에 매이는 일이 없게 하시며, 한결같이 좋은 인(因)을 쌓으소서.
오직 제자(帝子)의 숭고하신 출처가 여기에 있사오니 법왕(法王)의 책임이 고상하고 더욱더 융성하시옵소서. 아울러 공덕이 무궁하여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는 다리[津梁]가 되옵소서.
만약에 전하의 은택이 사라지지 않고 큰 서원이 바뀌지 않으신다면, 아마 사해(四海)의 재화(財貨)를 다한다 해도 이런 보시를 행하는[檀行] 일에 족히 비할 바가 못될 것이며, 10지(地)의 업을 다 기울인다 하여도 이러한 복의 터전[福基]에는 견주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황제와 황후께서는 백 가지 복[百福]이 빛처럼 모이시어 북극성(北極星)과 나란히 할 만큼 빛나시고, 만년(萬年) 동안 장수를 누리시어 종남산(終南山)과 같이 견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즐겁고 편안하게[娛樂] 명을 이어[延命] 다하시고, 먼 겁 이후에는 보살행을 실천하소서.
세자[儲君]께서는 재주와 덕이 뛰어나시어 황제의 훌륭하신 계책을 이으시고, 사랑을 많이 받으시면서 왕실을 도와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강보(襁褓)에 싸인 아기 때부터 영윤(英胤)하시어 아름다운 경사(慶事)가 날로 번창하시고, 높은 절개로 본지(本枝)111)에 오르시어 방진(芳塵)112)을 초좌(草座)113)에서 이으실 것입니다.
현장이 외람되게도 크나큰 운[丕運]을 만나 그림자를 금문(禁門)에 들여놓았습니다. 이것은 그 덕(德)이 경지에 올라서 귀(貴)하게 된 것이 아니고 총애를 받게 된 연유는 오직 폐하의 은혜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나라에 경사가 시작되고 정업(淨業)114)의 기초가 닦인 시절에 살고 있으니, 뛸 듯이 기쁜 마음은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경하(慶賀)하는 지극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며 삼가 표문을 받들어 아뢰옵니다. 가벼이 천자의 위엄(威嚴)을 범하는 것 같아 엎드려 두려운 마음만 더합니다.”
불광 세자가 탄생한 지 만 3일에 법사는 또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은 듣기로는, 『주역(周易)』에서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신(日新)의 뜻을 아름답게 여겼고, 『시경(詩經)』은 무궁한 자손[無疆子孫]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복(福)을 누리며 긴 시간을 이어가고 한(漢) 나라가 수명이 오래 이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도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또 듣자하니, 용문(龍門)115)의 소용돌이치는 세찬 물결도 근원이 길어서 멀리 흘러가는 것이고, 계수(桂樹)116)가 우거지는 것도 뿌리가 깊어서 향기와 잎이 무성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운(皇運)은, 여러 성현(聖賢)께서 계속 이어오시던 규칙과 법[規矩]을 거듭하여 쌓으시고, 인의(仁義)를 심어서 모든 백성을 젖어들게 하신 지가 오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두 황후께서는 대보(大寶)를 빛내시어 자손의 기틀을 세우셨으니, 진실로 뿌리가 깊고 근원이 장구(長久)하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다 폐하의 계책까지 받으셨으니 공업(功業)이 갈수록 창성해졌습니다. 순후하고 소박한 데로 돌아가시어 3황(皇)과 5제(帝)117)의 자취를 따르며, 예악(禮樂)을 제작하여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의 궤도(軌度)를 달리셨습니다.
황제를 귀하게 섬기는 것을 믿지 않으시고 모든 백성을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셨으니, 날도 채 밝기 전에 옷을 찾아 입으시고 해가 저물어도 저녁 드시는 것조차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단정히 앉아 계시자[端拱] 만 리 밖까지 맑아졌으니, 비록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 때처럼 융성한 시대라 하더라도 지금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하고 강과 바다에는 파도가 일지 않으며, 천하는 풀이 바람 따라 눕듯이 순응하며 용향(龍鄕)은 교화(敎化)에 목욕하였습니다. 너무나 넓고도 높으신 덕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도(道)가 푸른 하늘[蒼穹]에 이르러 명신(明神)이 복을 내리시어, 2월의 길일(吉日)에 세자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황실의 가지[天枝]를 무성하게 뻗고 옥(玉) 같은 꽃망울은 더욱 넓게 퍼지게 되었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현장에게 있어서는 더욱 특별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 마음[恒情]이 어찌 성후(聖后)의 평안만을 기뻐하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여래(如來)를 이으실 분이 나심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부디 앞서 칙서를 내려 윤허하셨던 약속을 어기지 마시고 세자의 출가를 허락하시어, 인왕(人王)의 자손에서 법왕(法王)의 아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법복(法服)을 입고 법명(法名)을 짓게 하시어, 삼보에 귀의[三歸] 함으로써 승려의 반열에 서게 하여 주십시오. 불교를 융성하게 이으시고 현풍(玄風)을 밝게 전파하여, 다시 선림(禪林)을 활짝 꽃피우시어 각원(覺苑)118)을 거듭 빛내게 하십시오.
정안(淨眼)의 왕성하던 발자취를 따르고 월개(月蓋)119) 장자의
높은 발자취를 밟으시어, 2종(種)120)의 속박을 끊고 무등(無等)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색신(色身)의 미묘함은 저 산왕(山王)에 비유되고 세상을 비추는 광명(光明)의 장엄함은 일월(日月)보다 낫게 하십시오.
세자께서 그렇게 되시면 자비의 구름[慈雲]은 대천(大千) 세계의 경계를 뒤덮고 지혜의 횃불[慧炬]은 백억(百億) 항하사의 주(洲)에서 드날리게 될 것입니다. 법고(法鼓)를 울려 천마(天魔)를 꺾고 승번(勝幡)을 휘날려 외도(外道)를 부수게 될 것이며, 흐르는 물줄기[沈流]를 뒤집히는 바다[倒海]까지 이으시고 횃불을 밝혀[燎火] 사산(邪山)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번뇌의 깊은 물을 말리고 무명(無明)의 크나큰 껍질을 부수어, 천인사(天人師)121)가 되시고 조어사(調御士)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바라건대, 묘당의 선령[先廟先靈]께서는 자손의 복[孫祉]에 의뢰하여 피안(彼岸)에 오르시고, 황제와 황후께서는 아드님의 복[子福]으로 인하여 만년(萬年) 수명을 누리소서. 그렇게 길이 영묘한 계획[靈圖]을 갖고 항상 구역(九域)을 막아 주소서.
세자께서 능히 이와 같이 하셔야만 비로소 큰 효도[大孝]라 일컬을 수 있으며 부모를 영화롭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석가(釋迦)께서 나라를 버리고 보리(菩提)에 정진하신 것은 다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어찌 세자를 동평왕[東平]122)처럼 자질구레한 선(善)이나 행하고 진사왕[陳思]123)처럼 그럭저럭 별 것 아닌 재주를 쓰면서, 날마다 잘한다느니 못한다느니 이치나 따지고 해마다 깊다느니 얕다느니 의논을 하도록 두시겠습니까?
삼가는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발우를 받들면서, 앞으로 귀한 손님께서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리를 털고 길을 닦아 놓고 세자께서 출가하실[踰城] 행차를 기다리겠습니다.
경하하는 마음과 위로하는 마음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서 아뢰옵니다. 경솔하게 폐하의 위신[宸威]을 범하게[犯觸] 되어 깊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광왕은 바로 삼귀(三歸)의 계를 받고 가사를 입게 되었다. 비록 보호하면서 양육하여야 하였지만, 불광왕의 처소 가까이에는 언제나 법사가 있었다.
12월 5일에 불광왕이 만 1개월이 되었을 때에, 황제는 조칙을 내려 불광왕을 위해서 7명을 득도(得度)케 하였다. 그리고 이어 법사에게 부탁하여 불광왕의 삭발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법사는 표를 올려 감사를 아뢰었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어제 폐하의 은혜로운 뜻[恩旨]을 받들었으니, 현장으로 하여금 불광왕을 위해 삭발하도록 하셨고 아울러 7명을 득도케 하셨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곧 왕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승려를 득도시킨 일은 곧 왕의 시위(侍衛)를 갖추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왕 파순(波旬)의 궁전을 진동시키고 정거천(淨居天)124)의 생각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사홍서원[弘願]을 이미 널리 펴서 크나큰 복이 더욱 무성해졌으니, 이것이 어찌 비천한 소승의 손으로 하늘 같은 세자의 피부[天膚]에 잔재주를 부려서 모든 서인(庶人)들이 큰 경사에 입도(入道)하는 은혜를 입은 것이라 하겠습니까? 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느라 희비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 보면, 보호하고 살피는 소중함은 처음에는 강보(襁褓)에 싸서 키우는데 있겠지만 해탈의 인(因)은 결국 삭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와 황후께서는 도(道)를 형상 밖[象外]에서 모으셔서 복이 구중(區中)에 두루 적시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광명은 묘문(妙門)을 열고 여기에서 덕의 근본을 닦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황계(皇階)에 하늘의 보우하심[天祐]을 간직하시고 옥좌(玉座)에 화목함을 이으시어, 백억(百億)의 천하에 임하시면서 천만세(千萬歲)의 기약을 다하십시오. 기특하게 뛰어나신 불광왕 세자[佛光奇子]께서 젖을 잘 드시도록 선신(善神)이 잘 다스리시고 제불(諸佛)께서 어루만져 주시고 있습니다. 영화롭고 슬기로운 모습을 더욱 더하여 화목하고 융성한 정사를 맡으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득도한 승려들은 깊은 은택을 입었으니 마땅히 도업(道業)에 부지런하여 오로지 계행(戒行)에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칙을 내리시는 대로 따라서 마땅히 취초(取草)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격하는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문을 받들어 아뢰옵니다.”
그날 법사는 또 불광왕의 탄생 만 1개월을 거듭 축하하며 아울러 법복 등을 진상하여 올리고[進獻]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바람을 탄 매[迅羽]125)는 하루에도 몇 번 씩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달빛[月]을 받은 밝은 거울[明璣]은 보름이 지나면 저절로 둥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물(靈物)의 자질을 타고나서 빛을 천중(天中)에 밝히는 자는 진실로 나중에는 그 아름다움을 발하여 그 미(美)를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생각하건대 불광왕께서는 최고의 선[上善]의 자질로서 상서로움이 서리었기에, 중화(中和)를 열어 덕을 기르실 것입니다. 불광왕께서 은미한 동산[微園]에 탄생하신 그 때부터 천사(天祠)가 움직여 돌보시니, 성스러운 기운[睿氣]은 마음을 맑게 하여 자고 일어나는 일에도 하늘의 보우함[天祐]이 있고 옥안(玉顔)은 빼어나시어 아침저녁으로 그 빛을 더하십니다.
이는 황제와 황후께서 혜일(慧日)을 몸에 간직하시어 법류(法流)로써 생각을 깨끗이 닦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 폐하께서 이어받아 융성하게 일으키는 일을 반석(盤石)처럼 튼튼히 하시고 삭발하는 모습을 천인(天人)에게 보이지 않으셨다면, 그 누가 이 강보의 옷을 입으신 세자[褓衣]께 복을 빌어서 어떻게 젖을 드시는 일이 편안하여
재앙도 없고 재해(災害)도 없이 능히 높고 높게 하겠습니까?
이제 혼백이 처음으로 두루 비추시니 만월(滿月)처럼 자태가 왕성하시며, 명협(蓂莢)126)의 가지는 다시 자라나서 연꽃이 어여쁘고 무성하게 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자전(慈殿)127)께서는 마음이 안심이 되시고 백성들도 모두 기뻐하며, 7중의 불제자[七衆]들은 믿음으로 돌아가서 4문(門)128)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러니 구태여 날마다 뒷사람이 말해주기[後言] 찾고 학가(鶴駕)를 타고서 잘 다스려주기[善馭]만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현장은 다행히 은총을 입어서 폐하께서 그늘을 드리워 주시는 보호를 받았습니다. 사제(師弟)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은 감히 바랄 수도 없겠지만, 같은 승려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은 실로 간절하게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금자반야심경(金字般若心經)』 1권을 함(函) 속에 넣고, 또 『보은경변(報恩經變)』 1부, 그리고 가사 법복(袈裟法服) 1구와 향로(香爐), 보자(寶字), 향안(香案), 조병(藻缾), 경가(經架), 수주(數珠), 석장(錫杖), 조두(藻豆) 등을 각각 하나씩 진상하여 도를 수행하는 도구로 쓰실 수 있도록 하면서 저의 기쁨을 표하려고 합니다.
원하건대 세자 어루만지기[載弄]를 반장(半璋)에 버금가게 하시고 삿된 것을 물리치시기를 봉시(蓬矢)129)에 대신하시어, 저 선신(善神)으로 하여금 기뻐서 뛰게 하시고 큰 서원(誓願)이 이로 인하여 견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경솔하게 함부로 받들어 구하였으니 진정 깊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와 황후께서는 더욱 존귀해지시고 모든 별[合耀]들과 더불어 함께 밝아지시어, 온 백성들이 기쁜 마음을 맺게 하시고 만년 내내 봄날[萬春]을 이어 누리게 하소서.
세자[少海]130)께서는 더욱 맑고 밝게 닦으시어 조비(曹丕)와 조소(曹釗)의 영웅호걸의 기상을 취하여 그들을 뛰어 넘으시고, 번성하는 총애[寵蕃]를 받으시어 아름다움을 떨치시어 뛰어난 간평(間平)131)의 수레를 몰아서 달려 나가십시오.
바라는 것은 불광왕께서는, 천 분 부처님[千佛]이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백 가지 복[百福]이 몸에 모여서, 덕음(德音)132)이 날로 무르익어 일찍부터 큰 상(相)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문을 받들어 아뢰옵니다.”
현경 2년(657) 봄 2월에 황제의 행차[車駕]가 낙양궁으로 행차했는데, 법사도 역시 배종(陪從)하였다. 법사와 함께 번역승 5명과 제자 각 1명도 따라갔는데, 그 경비는 모두 공급되었다.
불광왕은 거가의 앞에서 출발했는데, 법사는 왕자와 동행하였고 다른 승려들은 뒤에서 따라갔다. 도착한 다음에 적취궁(積翠宮)에서 묵게 되었다.
여름 4월에 황제는 명덕궁(明德宮)에서 피서를 했는데 법사 역시 따라가서
비화전(飛花殿)에서 묵었다.
명덕궁 남쪽에는 조간(皂澗)이라는 냇물이 흐르고 북쪽은 낙수(洛水) 강 언덕에 닿아 있는데, 이곳은 수(隋) 나라의 현인궁(顯仁宮)이었다.
5월에 법사에게 칙령을 내려 적취궁으로 돌아와서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때 법사는 황제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 감사하는 표문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명령[恩旨]을 받자오니, 적취궁에서 경전을 번역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러러 크나큰 은혜를 입으니 마음 깊이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엎드려 생각하건대, 멀리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련한 마음이 더욱 더할 뿐입니다.
현장은 공(功)은 훈부(勳府)에 두기에 미약하고 도(道)는 덕과(德科)에 못 미치는데도, 오랫동안 영화로운 표장[榮章]을 문란케 하면서 일찍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감당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물가에 다다르면 두려움을 알게 되었고 가파른 벼랑에 임하여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와 황후께옵서는 성철(聖哲)의 거대한 뜻을 지니시고 인자(仁慈)로써 훈화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 가지 부류[萬類]로 하여금 만족을 얻게 하시고 한 가지 물건[一物]까지도 편안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미 가까이는 난제(蘭除)를 막고 천자의 방울[鑾]을 들어서 슬픔을 막도록 하셨으며, 비로소 자령(茨嶺)을 바라보며 많은 즐거움[多豫]을 생각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옥우(玉宇)는 화평(和平)을 이어서 선도(仙桃)의 수명을 누리시고, 감천(甘泉)의 청서(淸署)에 오르시어 그 옛날 요수(瑤水)133)에서와 같은 아름다운 놀이를 즐기소서.
따뜻한 나무[溫樹]로 가을을 맞이하고 찬바람을 여름에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수레[歸軒]를 지맥(砥陌)에서 기다리고 아득한 석장[幽錫]을 교림(喬林)에서 삼가시어, 만년토록 봄날[萬春]을 경하하고 구서(九逝)를 기꺼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지극하게 그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表)를 붙여 받들어 감사하며 문안 올립니다.
방자하고 외람됨[荒越]134)에 얼굴 둘 바를 모르겠기에 섬뜩하였다가 화끈하였다가[氷火] 생각이 교차합니다.”
법사가 장안에 있을 때에 먼저 『발지론(發智論)』135) 30권을 번역하였고,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136)은 번역하기 시작했으나 완료하지는 못했다. 이 무렵 황제는 조칙을 내려 법사에게 이렇게 알렸다.
“법사가 번역하고자 하는 경론(經論)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없는 것을 먼저 번역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하도록 하라.”
이에 법사는 다음과 같이 표를 올렸다.
“가만히 듣자오니 황제의 면류(冕旒)는 용렬한 속세의 중생이라면 누구나 다 먼저 가지려고[前修] 다투고, 문장의 저술[述作]은 정신을 다하여야 반드시 후에까지 통한다[睿后]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만물(萬物)을 만드시고 깊은 계책을 멀리 드날리시어, 왕성(王城)으로 제후의 땅[候甸]을 덮고 패엽(貝葉)의 경전으로 우릉(羽陵)137)을 빛내셨습니다.
곁에다 번역하는 신료[譯寮]를 두시어 번성의 서장[鴻序]을 이으셨고, 천고(千古)를 비추시어 그 광채를
만세토록[萬葉]138) 흘리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대업(大業)을 이어 받으시어 심원한 운치[遠韻]를 밝게 펴시었으며, 신묘한 등용[神用]으로 날로 새롭게 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성찰하시기[賞鑑]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장은 외람되이 하늘이 만들어 주신[天造]139) 은혜를 입었고 삼가 영명하신 조칙[明詔]을 받들었으니, 매번 이 용렬한 몸을 위로하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은혜에 항상 깊은 두려움에 숨을 죽이곤 하였습니다.
지난달에 조칙을 받들어 보니, 경론(經論)을 번역할 때에 이 땅에 없는 것은 마땅히 먼저 번역할 것이고,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뒤에 번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지(發智)』와 『비바사론(毘婆沙論)』 2백 권을 볼 것 같으면, 우리나라에 전부터 있었던 것은 그 중의 반뿐입니다. 단지 1백 권만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많이 난삽합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정돈하여 번역을 했는데, 지난 가을 이래로 이미 번역한 것이 70여 권이 되며 아직 130여 권은 번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논은 학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부디 번역을 마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머지 경론 가운데에서도 상세한 정도와 생략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나 오류가 심한 것도 역시 다시 번역하여 폐하의 성스러운 말씀[聖述]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이에 황제는 허락하였다.
이 무렵 법사는 잠시 경락(京洛)을 떠났는데, 황제를 호종(扈從)하는 일 덕분에 잠시 향리에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집에도 가보고 친구들도 찾아보았으나 거의 모두 죽고 없었다. 오직 누님 한 분이 남아 있었는데 영주(瀛州)140)의 장씨(張氏)에게 시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 맞아 와서 서로 쳐다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누님에게 부모의 묘지가 있는 곳을 물어서 직접 찾아가 성묘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묘가 황폐했으므로, 이에 좋은 자리[勝地]를 찾아서 관곽(棺槨)을 제대로 갖추어 개장(改葬)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비록 그런 마음을 갖고는 있었지만 감히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법사는 이에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기에[不天]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며[荼蓼]141), 게다가 또 수(隋) 나라의 난리를 만나는 바람에 부랴부랴 시신을 묻은 뒤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미 40여 년이 지나니 분묘가 무너지고 헐어서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로한 누님과 둘이서 유구(遺柩)를 거두어서 이전의 협소한 자리에서
서원(西原)으로 옮겨 개장(改葬)하여, 하늘에 보답하여 작으나마 망극한 마음을 펴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제 현장에게 삼양일(三兩日)에 검교(檢校)142)에 나가라고 분부하신 칙령을 받았습니다.
현장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고 오직 연로한 누님과 둘뿐입니다. 그러니 먼 길을 떠나는데 이달 21일까지 도착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장사지내는 일도 쓸쓸하고 적막하여 아직 시작도 못 하였으니, 내려 주신 삼양일(三兩日)의 기한 안에는 다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천은(天恩)을 허락하시어 현장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또 바라문의 상객(上客)143)이 지금 저와 함께 따라다니는데 너무 경솔하게 하면 비웃음을 살까 두렵기도 합니다. 촉박한 시간에 대한 극심한 근심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표문을 올려 아뢰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은 덮고 구름은 감싸서 간절한 고청(孤請)을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
황제는 이 표(表)를 보고 법사가 청한 대로 윤허하고는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려 법사가 개장(改葬)하는 데 쓰이는 물자를 공급하도록 하였다. 법사는 이 특별한 은택을 입고는 다시 다음과 같이 계사(啓辭)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은 재앙이 깊고 허물이 쌓여서, 영명한 신령[明靈]에게 벌을 받아 운명하지 못한 채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재는 회율(灰律)144)은 빠르게 바뀌어, 찼다가 기우는 것[盈缺]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분묘는 허물어지고 풀과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택조(宅兆)145)를 바꾸려고 생각한 지 벌써 해가 지났으나 멀고 관산(關山)146)이 막혀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폐하의 난가(鑾駕)를 배종(陪從)하게 되어 고향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진실로 옛날부터 갖고 있던 뜻을 모아서 이에 개장(改葬)을 하기로 하고 필요한 것을 진설(陳設)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황제와 황후께서 하늘 같은 자비[天慈]를 내리시어 영좌(營佐)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어찌 해와 달의 밝은 빛이 기와나 자갈까지도 두루 비치고 구름과 비의 은택이 쑥 같은 작은 풀까지도 반드시 적셔주는 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은혜에 감격하여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몰려듭니다. 존망함패(存亡銜佩)의 지극함을 감당하지 못해 삼가 계(啓)를 올려 감사하며 아뢰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나 현장의 능력이 미약하여 능히 다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법사는 이미
허락하는 칙명을 받았기 때문에 마침내 선친의 묘를 개장하였다. 그 장례의 의식에 드는 비용은 모두 왕실(王室)에서 지급되었다.
이때 낙양 부근의 도속(道俗)들로서 와서 참가한 이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후위(後魏)의 효문황제(孝文皇帝)는 대군(岱郡)147)에서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소실산(少室山) 북쪽 기슭에 소림사(少林寺)를 건립하였다.
지세의 높고 낮음에 따라 소림상사(少林上寺)와 소림하사(少林下寺)라고 불렀는데, 모두 12원(院)이 있었다. 동쪽은 숭악(嵩岳)에 의지했고 남쪽은 작은 봉우리에 접해 있으며 북쪽은 높은 고개에 의지해 있었으며, 경내에는 세 줄기의 냇물이 흐르고 있다. 암석이 높게 솟아 있고 쏟아져 내리는 샘물[飛泉]148)에는 나무 그림자가 비치는데, 송라(松蘿)와 대나무와 칡나무가 엉겨 있다. 계수나무와 측백나무와 소태나무와 가래나무가 더불어 숲을 이루어, 그야말로 웅대하고 아름답고 맑고 고요하여 실로 중국 안에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그 중에 서대(西臺)는 가장 수려한 곳으로, 일찍이 보리류지(菩提流支)149)가 경을 번역했던 곳이다. 또 이곳은 발타선사(跋陀禪師)150)가 참선[宴坐]151)하던 곳이기도 한데, 현재 유신(遺身)의 탑이 남아 있다.
수(隋) 나라 대업(大業) 말년에는 도적떼들이 불을 질렀으나 타지 않았기에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보고 참으로 신기하게 여겼다.
소림사의 서북쪽 산 아래, 구씨현(緱氏縣)152) 동남쪽의 봉황곡진촌(鳳凰谷陳村)은 진보(陳堡)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이 바로 법사의 출생지이다.
그 해 가을 9월 20일에 법사는 소림사로 들어가서 번역하기를 청하며 다음과 같이 표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이 듣기로는 보리(菩提)의 길은 멀어서 이 길을 가는 자는 반드시 자량(資糧)이 있어야 하고, 생사(生死)의 강은 깊어서 이곳을 건너는 자는 반드시 배나 뗏목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량이라는 것은 바로 3학(學)153)과 3지(智)154)의 묘행(妙行)으로서 곡식 종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배나 뗏목이라는 것도 8인(忍) 8관(觀)의 정업(淨業)으로서 방주(方舟)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는 이것을 갖추었기에 피안(彼岸)에 오르고, 범부는 이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생사(生死)에 빠집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망망한 삼계(界)에서 7루(漏)155)의 바다를 표류하며, 4생(生)156)으로 끝도 없이 10전(纏)157)의 물결에 빠지게 됩니다. 물결 따라 떠돌고 안개에 휘몰리면서 마음은 미혹되고 뜻은 몽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겁석(劫石)158)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고 성안 가득한 겨자씨가 다 없어지도록[芥城] 갈수록 튼튼해질 텐데 3거(車)에 올라 불타는 집[火宅]을 빠져 나와서 8정(正)을 타고 보방(寶坊)159)에 나아갈 줄을 일찍이 알지 못했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찌 가을 기운(氣運)이 돈다고 그저 탄식만 더하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공자[孔父]160)만의 한탄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찍부터 음식을 먹더라도 저녁밥은 먹지 않았으며 잠잘 때에도 놀라곤 하였던 것입니다.
현장은 늘 이 몸이 뭇 인연[衆緣]에 거짓으로 영합[假合]161)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 생각이 다 무상(無常)하였습니다. 비록 언덕 기슭의 나무나 우물[岸樹井]이라 한들 위태롭고 보잘것없기로는 이것과 견줄 수가 없고, 건달바가 공중에 지어놓은 건달바성[乾城]162)의 물거품도 견고하지 못함으로는 이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저녁의 시간[朝夕]도 한정된 것이라 영원히 유구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현장도 어언 60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빠른 세월을 생각하면 이생의 끝[生涯]을 가히 알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또 젊어서는 법을 구하려고 스승과 선우[師友]를 찾으며, 내 나라 남의 나라 할 것 없이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멀고 먼 길을 다니느라 체력이 쇠진하였던 차에, 근년에 들어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그늘[陰景]을 돌아 볼 수 있는 세월이 또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아직 자량을 충분히 쌓아놓지도 못했는데 앞길은 점점 촉박해지니, 그저 날마다 슬퍼하고 탄식하는 마음을 이 필묵으로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약한 이생에 다행히도 영명하신 성군[明聖]을 만났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는 차례에 닿지 않는 커다란 은택을 입었고 또 폐하께서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 자애(慈愛)에 젖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폐하께서 보살펴 주신 덕택에 이름을 높여 가치를 더하고 명성을 얻어 소문을 드날리기에 이르니, 날개가 없이도 날아오르고 앉아서도 하늘을 웅비(雄飛)하면서, 4사(事)의 공양을 받는 것도 다른 도반[同輩]들보다 훨씬 넘치는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들에게서 찾아보아도 그런 예가 아직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현장이 무슨 덕과 무슨 공이 있기에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모두 폐하께서 드리운 은혜의 파도[天波]가 널리 윤택하게 하시고 일월(日月) 같은 은택이 속속들이 임하여[曲臨], 마침내 연석(燕石)163)을 보배로 만드시고 재주 없는 사람[駑駘]을 귀하게 취해 주신 덕분입니다. 스스로를 꾹 누르며 깊이 반성하고 있지만 오직 두려움만 깊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 악(惡)이 가득 차는 것을 해롭게 여기는 것은 옛 철인[前哲]들의 바른 뜻[雅旨]이고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을 알게 하는 것은
모든 부처들이 경계하는 말씀[誡言]입니다.
현장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면 재주[藝業]가 공허하고 이름과 행실은 취할 것이 없으므로, 폐하의 사랑[天慈]과 폐하의 은택[聖澤]을 이렇게 오래 받는 것은 너무나 외람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해골이나마 이 몸의 목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 산림(山林)에 들어가 살면서 예송(禮誦)하고 경행(經行)하면서 보살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랍니다.
폐하께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존귀함으로 법왕(法王)의 교화를 펴시어, 서역(西域)에서 얻어온 경본(經本)을 번역까지 하도록 하셨습니다. 달리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현장이 외람되게도 이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폐하의 뜻[天旨]을 받들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번역하여 지금까지 이미 6백여 권을 번역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삼장(三藏)과 4함(含)164)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경전이며[宗要] 대승과 소승, 2승(乘)165)의 추축(樞軸)이 되는 것으로서, 범인과 성인의 행위(行位)의 자리[林藪]이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의 바다 같은 은택[海澤]입니다.
서역(西域)을 일컫고 노래함으로써 나라를 진압하는[鎭國鎭方] 법식으로 삼으며, 필요한 문장의 뜻[文義]은 모두 파헤쳐서 밝히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등림(鄧林)에서 나무를 택할 때에 작고 큰 것을 구하는 대로 따르고, 해포(海浦)에서 보배를 거두어들일 때에 모나거나 둥근 것을 마음대로 취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배우는 자의 종지(宗旨)도 이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현장은 이것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으나 정성을 다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만이라도 보답이 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끊고 항복 받으려면 반드시 정(定)과 혜(慧)가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니,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없으면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경론을 연구하고 음미하는 것은 혜학(慧學)이며 산림(山林)에 의지하여 좌선[宴坐]하는 것은 정학(定學)입니다.
현장은 젊었을 때부터 교의(敎義)에 전념하여 정진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얻은 것이 있지만, 그러나 4선(禪)166) 9정(定)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제가 바라는 것은 생각을 선문(禪門)에 의탁하고 마음을 정수(定水)에 맑게 하여, 원숭이처럼 떠들며 돌아다니는 정(情)을 제압하고 분주히 달리는 마음을 묶어두는 일입니다. 만약 자취를 거두어 산중(山中)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 주(州)의 숭산에 있는 소실(少室)은 가파른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봉우리와 냇물은 기이한 절경이 많다고 합니다. 풍운(風雲)을 머금고 인지(仁智)를 감싸 안았으며, 과일과 약초가 풍성하고 쑥풀이 우거져
청허(淸虛)하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해내(海內)의 명산이고 역중(域中)의 신악(神岳)이라 할 만합니다.
그 안에 다시 소림사(少林寺)와 한거사(閒居寺) 등이 있는데, 모두 바위 골짜기에 걸쳐 있고 숲과 냇물이 둘러싸고 있어서 불사(佛事)가 존엄하고 방우(房宇)가 그윽하고 한가하다고 합니다.
이곳은 후위(後魏) 때의 삼장(三藏) 보리류지가 경전을 번역하던 곳입니다. 참으로 돌아가 의지하며 선관(禪觀)167)을 닦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또 한나라 때의 소광과 소수 같은[兩疎]168) 조정에서 벼슬하는 선비[朝士]도 오히려 바다로 돌아가 영화를 사양할 줄 알았고, 소부(巢父)와 허유(許由)169)같은 속인도 오히려 참[眞]에 깃들어서 마음 닦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현장은 출가하여 법을 위해 번역하느라 도시[闤中]에 머물면서 청풍(淸風)으로 사람을 격려하는 자가 아니옵니까? 이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더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밝음은 칠요(七曜)를 뛰어넘으시고 그 비춤은 9유(幽)170)를 다하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이 우직한 정성을 헤아리시어 특별히 청허(聽許)하심으로써 뭇 속세[衆俗]에서의 시끄러운 번뇌를 끊고 인간 세상에서 그림자와 자취를 감추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사슴 무리와 짝하고 학을 친구처럼 따르며, 한 조각 돌덩이 위에 육신을 깃들여서 한 나무 그늘에 그림자를 감추게 하여 주십시오. 원숭이처럼 간사한 마음을 잘 지켜 살피고 실상(實相)을 관조하여 법으로 삼아서, 4마(魔)와 9결(結) 같은 적이 천착하지 못하게 하고 5인(忍)171)과 10행(行)172)의 마음이 서로 따르고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점차 보리(菩提)에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피안(彼岸)에 이르는 좋은 인[良因]을 삼음으로써, 밖으로는 항제 폐하의 풍교[皇風]에 누가 되지 않게 하고 안으로는 행업(行業)을 더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폐하께서 가엾이 여기시어 윤허를 내려 주신다면, 여산(廬山)의 혜원(慧遠)173)과 같이 바른 지조를 따르고, 염수(剡岫)의 도림(道林)174)처럼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이어 가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바라는 것은 선관(禪觀)을 닦는 여가에 경전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이 즐거운 발원(樂願)이 너무나 지극하여 삼가 조정에 나아가 표문을 받들며 아뢰옵니다. 가벼이 신위(宸威)를 범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을 따름입니다.”
황제는 이 표를 보고 허락하지 않고 그 달 21일에 신필(神筆)로써 직접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그대가 올린 표문을 살펴보니, 법사가 종적을 바위와 샘물 사이에 감추어 도림과 혜원의 뒤를 따르고, 생각을 선적(禪寂)에 두어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처럼 지금 세상의 지표가 되려는 마음을 알겠소.
아름다운 가르침[美風]을 우러러 추앙하는 모습은 진실로 아름답고 가상하오. 짐(朕)은 닦은 행업도 없고 학문도 보잘 것 없어서 높고 깊은 뜻을 연구하지는 못하였소. 그러나 학식이 얕고 들은 것이 적어서 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아직 보지도 못했소.
그런데 법사는 3계(界)를 제도하고 4생(生)을 이끌어서, 지혜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선정[定]으로 생각의 물[意水]을 얼어붙게 하였소. 결코 세속 티끌에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데, 어찌 식(識)의 물결에 놀랄 일이 있겠소. 도와 덕[道德]이 어찌 반드시 태화산(太華山)175) 깊은 봉우리에만 있겠으며, 공허하고 적막함[空寂]이 어찌 소실(少室)의 첩첩 산중에만 있겠소. 아무쪼록 이런 말은 거두어들이고 다시는 청을 올리지 말기 바라오. 저잣거리나 조정에 나온 대은(大隱)176)이야말로 옛날 현인보다 귀하지 않겠소. 널리 보고 들어[見聞] 이익을 넓혀서 당대(當代)의 보배가 되기를 바라오.”
이렇게 칙서를 내려 표(表)를 물리치고 다시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법사는 칙서를 받들고 나아가 계사(啓謝)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사인(使人) 이군신(李君信)이 와서 수조(手詔)를 내려 주었습니다. 은빛 갈고리 같은 글[銀鉤]은 붉은 글씨[丹字]에 걸리었고 아름다운 문장[叡藻]은 저 하도(河圖)177)보다 성하십니다. 크나큰 뜻은 봉악(峰岳)의 형상을 띄었으며 만물을 적시는 윤택함은 풍운(風雲)의 기운을 제압하셨습니다. 저물어 가는 가을날에 봄꽃처럼 화려한 문장을 다시 보게 되니, 몸은 이수(伊水)178)와 낙수(洛水)179) 사이에 있으면서 갑자기 곤륜산(崑崙山)과 형산(荊山)의 보옥180)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받들어 대하니 너무 기뻐서 절로 춤이 나왔습니다.
옛날에 계중(季重)이 위나라 군주[魏君]의 서찰181)을 받은 적이 있지만 위군은 그저 등지고 떠나는구나 말씀하셨을 뿐이고, 혜원(慧遠)이 진나라 황제[晋帝]의 서신을 받았지만 황제께서는 그저 쌀[米]만 내려 주셨을 뿐이었습니다. 공적(空寂)을 버리라는 뜻을 겸하여 말씀하시거나, 큰 은사(隱士)는 시정에 있다는 가르침을 내리신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성주(聖主)의 생각은 진속(眞俗)을 다하고 유무(有無)를 갖추시어, 복희(伏羲)와 헌원(軒轅)보다 더욱 뛰어나게 높으시고 위(魏) 나라 조씨(曹氏)182)나 진(晋) 나라의 사마(司馬)183)도 능가하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다만 현장은 흰 실처럼 아무것도 없는[素絲] 자질을 가졌기에 더욱 붉고 푸른 화려함[朱藍]이 두렵고, 칡넝쿨 같이 천한[葛虆] 몸을 가졌기에 이에 소나무나 구기자[松杞]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연하(烟霞)를 소실(少室)184)에 닿게 하고 석천(石泉)을 숭아(崇阿)185)에 짝하게 하시며, 침닉(沈溺)을 피하려는 마음을 승낙해 주시어 불길을 막으려는[防火] 뜻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런 연유로 어리석고 눈먼 몸을 다하여 감히 죽기를 무릅쓰고 개진(開陳)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도견(陶甄)186)의 자비로 오리나 메추리도 버리지 마시고, 운우(雲雨)의 은택으로 거미 따위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영명하신 조칙이 급히 내려와 허락을 주시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로운 칭찬[恩獎]을 내리시어 간곡하게 영광[輝賁]을 보여 주셨으니, 5정(情)187)이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린 말은 거두고 감히 다시는 청하지 말라 하셨기에 삼가 표를 올려 사죄하며 아뢰옵니다. 오직 두려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해 겨울 11월 5일은 불광왕의 첫돌이 되는 날이어서 법사는 또 법의(法衣) 한 벌을 갖추어 불광왕에게 바치면서 표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현장이 듣건대 난초는 자완(紫畹)에서 피어나니 그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계수(桂樹)는 청계(靑溪)에 무성하여 그것을 만나는 자가 역시 기뻐한다 하였습니다. 풀과 나무도 오히려 이러할진댄 하물며 인륜(人倫)은 어떻겠으며, 하물며 성윤(聖胤)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와 황후께서는 신기한 예지[神叡]의 자태를 타고 나시어 천지의 덕을 품으시었고, 구하(區夏)를 어루만져 편안히 하시어 군생(群生)을 자식처럼 기르셨습니다. 거기다 또 크게 가람(伽藍)을 세워 널리 복을 모으는[福聚] 불사를 일으키셨으니, 보배로운 지도[寶圖]를 영구불변하게 보존하는 유익한 업(業)이며 정명(鼎命)을 금강(金剛)처럼 견고하게 하는 도움이 되는 인(因)입니다.
이미 오묘한 선[妙善]을 닦으셨으므로 황태자는 신기(神機)가 날로 무성하실 것이며 노왕(潞王)188)은 아름답고 뛰어남을 더욱 밝아질 것이며, 불광왕은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명랑하게 되실 것입니다. 가히 주(周)를 넘고 상(商)을 뛰어넘어 황제(黃帝)189)와 숭고(崇高)함을 견주게 되실 것이니, 자자손손 만년토록 경하할 일입니다.
현장은 용렬하고 미약하오나 때를 만나 외람되게도 왕등(王等)을 참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사로운 마음에 뛸 듯이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즐겁습니다.
오늘이 불광왕의 탄생일이기에 예(禮)를 바쳐 축하드리며, 경솔하고 어리석은 정성으로 삼가 법복 1구(具)를 올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왕자님은 모든 신[萬神]들이 보호하여 온갖 복[百福]을 거느리시어, 자나 깨나 편안하시고 수유도 순조로우시기를 빕니다. 삼보(三寶)를 이어서 융성하게 하시어 4마(魔)190)를 항복 받으시고, 보살행을 행하시어 여래사(如來事)를 이으소서.
옥구슬로 된 꽃받침[瓊萼]과 하늘에서 내린 듯한 가지[天枝]에
화려한 꽃봉오리[英華]의 아름답고 무성함에 너무나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문과 아울러 의복을 올리며 아뢰옵니다. 가벼이 신엄(宸嚴)을 범하여 전율만 깊을 따름입니다.”
이 당시 법사는 적취궁(積翠宮)에 머물면서 번역을 했는데,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기에 건강을 해쳐 병을 얻었다.
황제에게 이 소식을 아뢰자 황제가 듣고 걱정하여 즉시 공봉내의(供奉內醫) 여홍철(呂弘哲) 등을 보내서 법사를 위문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이때 법사는 기쁜 마음과 감격을 참지 못해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사례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사인(使人) 여홍철 등이 와서 조칙을 전하며 현장의 질병을 위문해 주고, 아울러 밖으로 나가 쉬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자비로우신 뜻이 홀연히 임하시어 병든 해골이 일어나 면류(冕旒)를 대하자니 마치 얼음물[氷泉]을 밟는 듯 송구스럽습니다.
현장은 섭생을 잘못하여 어그러지고 모가 나서 질병이 모여 들었습니다. 폐하의 자취[鑾躅]에서 멀어진 이후로 외로운 마음이 더욱 깊어졌는지,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여 뼈마디가 아프고 살도 아파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뚝 끊어져 기식(氣息)마저 희미해졌습니다.
생각으로야 궁궐[宮宇]에 더러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나가 스스로 몸을 구덩이에 던져버리기를 바랐습니다만, 그래도 폐하께서 들으시고 놀라실 일이 두려워 감히 곧이곧대로 아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문자(問藉) 덕택에 밖으로 나와 절[寺]에 이르니, 병은 이미 피로로 인하여 다시 위독하게 되고 마음도 또한 밝은 세상과는 격리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상약사의(尙藥司醫) 장덕지(張德志)로 하여금 침술로 다스리게 하여 가까스로 병이 수그러져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한 죄를 돌이켜 생각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기약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해처럼 달처럼 밝은 은혜로 오랜동안 이 우졸(愚拙)한 사람을 도와 주셨고, 강처럼 바다처럼 큰 은택으로 매번 포용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런 행운을 어찌 지극히 미천한 저[至微]에게로 옮겨서 상전(常典)의 법을 다하셨습니까?
바라옵기는 공도(公道)를 폄으로써 헌사(憲司)를 화목하게 하시고 옥(獄)을 바로잡아 가볍게 줄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도끼날 아래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쇠잔한 혼백과 썩어가는 몸뚱이들이
이내 은혜의 광명을 입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포를 말하고 뼈에 새기게 하여 주십시오.
스스로 생각하노라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또 심상하지가 않습니다. 설사 이것이 이 촌사람의 하잘 것 없는 근심이기는 하지만, 또한 온 생애를 다한 바람이기도 하였습니다. 단지 한스러운 것은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채 남은 목숨이 먼저 사라질까 걱정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황제께서는 친히 장수(蔣狩)에 마음을 쏟으시며, 열무(閱武)191)를 기약하시어 군대[戎]를 훈련하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인(仁)을 밝혀 기린을 풀어놓으시고[放麟] 또 훈(勳)을 세워 봉황에 바치셨습니다[獻鳳].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데서 경사(慶事)가 모이니 상하(上下)가 함께 기뻐하며, 풍후(風后)192)는 티끌까지 맑게 하고 산기(山祇)는 들판을 보호하였습니다. 공경하고 사유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진실로 아름다움과 상서로움을 다하셨습니다. 십순(十旬) 동안 밝은 훈계(訓誡)를 펼치고 협신(浹辰)193)에 돌아오셨으며, 팔준(八駿)194)을 타고 선유(宣遊)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여[鄙] 가까이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왕가(王駕)를 멈추시고는 오래 마음에 품어 위로하였으며, 일을 무마하시고도 근심하면서 마침내 운월(隕越)195)을 기약하셨습니다. 이 지극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 대죄(待罪)하며 아뢰옵니다. 두려움에 정신을 잃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들었습니다.”
황제는 이 표(表)를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3일 뒤에 사신을 보내서 법사를 맞아들이게 하여 4사(事)를 공양하고 여러 날을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조칙을 내려 법사를 적취궁으로 돌아가게 하여 예전처럼 번역하도록 하였다.
겨울 12월에 황제는 낙양궁을 동도(東都)라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이 땅이 너무 협소한 것을 염려하였기에, 곧 동쪽으로는 정주(鄭州)196)의 사수(汜水)197)와 회주(懷州)198)의 하양(河陽)199)을 나누고, 서쪽으로는 곡주(穀州)200)를 없애고 의양(宜陽)201)과 영녕(永寧)202), 신안(新安)203)과 승지(澠池)204) 등의 현을 다 예속시켰다. 그렇게 하여 낙양의 향읍(鄕邑)이 증가한 것을 보고 법사는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축하하였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자하니, 순수(鶉首)205)가 진(秦)에 머물러 상제(上帝)는 금성(金城)에 의거(依據)할 징조를 보였고, 구도(龜圖)206)를 하(夏)에 바치자 중기(中畿)는 옥천(玉泉)의 걸음을 디뎠다고 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신령(神靈)이 내리시는 터전은 황제의 계책에 드러나도록 되어 있으며, 창성한 칭송[昌誦]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멀리까지 점치며[卜遠] 높이 빛납니다. 그러므로 그 큰 자취[允迪]를 열어서
그 계책을 따른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와 황후께서는 만물을 헤아리시어 일을 처리하시고 경중(輕重)을 고르게 하여 세상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국토의 중요한 구석구석[重隩] 자리에 나가시어 두루 나라를 순시하시고 어가를 머무셨으며, 옛 제도[舊制]가 빙 둘러싼[環偉] 바탕 위에 호경(鎬京)207)의 풍속을 본받아 외성[郛]을 세우셨습니다.
이에 궁(宮)을 낮추는 데에 마음을 두시어 예전의 부역[曩役]을 고치는 수고를 하셨으며, 말을 달려 순시하는 데 생각을 두시어 편하게 거하시는 것[居逸]보다 새벽 일찍 일어나기에 진념하셨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중화와 오랑캐[華夷]를 절충하여 역사와 수입[徭輸]를 균일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성권(聖眷)을 머물게 하시고 윤언(綸言)을 빛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영을 내리시자(令下) 비로소 산천(山川)은 막혔던 경관을 바꾸고 제도도 이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자욱한 연운(烟雲)이 색(色)을 바꾸니, 나는 듯한 용마루에 햇빛이 아름다우며 황제가 거동하시는 길에는 바람이 맑고, 신심(神心)이 왕성하고 이륜(彛倫)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만약 무창(武昌)의 물고기[魚] 노래를 읊는다면 기꺼이 왕께서 다스리는 마을[王里]로 옮겨 갈 것이며, 운정(云亭)208)의 학(鶴)을 다투어 부르고자 한다면 거가(車駕)에 봉속(奉屬)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일찍이 진(晋)과 정(鄭)이 의거하였던 땅[依]을 작다고 여기셨고 유(劉)와 장(張)의 책략[策]을 좁다고[褊] 여기셨습니다. 전왕(前王)이 악착(齷齪)하여 풍(豊)과 낙(洛)이 번갈아 열리고 우리 황제[我后]께서 뇌롱(牢籠)하여 이(伊)와 함(咸)이 함께 세워졌습니다. 인종(麟宗)이 극히 무성하니 국운[鼎祚]은 멀리 쭉 뻗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절로 동(東)으로는 평락(平樂)209)에서 잔치를 벌이게 되고 서(西)로는 건장(建章)210)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피리[笙篁]를 불면서 오랫동안 수(壽)를 잡아 두시고 문장[藻]을 지으면서 편안하게 퍼뜨리고 노래하소서. 지극히 공변되어[至公] 넓고 넓으며[蕩蕩], 드물게 저술하는 문장[罕述]은 높고 높습니다[巍巍].
현장은 쓸모없는 재목이라 바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두려움만 더욱 깊습니다. 다만 3천(川)211)의 교외(郊外)에 있는 옛 동리[故里]까지 모두 적시어, 천 년의 행운이 새 고을[新邑]을 빽빽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립문[蓽門]212)이 비록 없어진다 해도 추명(芻命)은 아직 남아 있으니, 서울 땅[轂下]213)에 매인 것을 기뻐하지만 관외(關外)에 있더라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천하를 밝게 다스리시는[光宅]214) 경사스런 일들을 멀고 가까이서 함께 기뻐하도록 폐하[聖上]께서 편안하게 허락해 주시니 용렬하고 한미한 저에게는 특별한 은혜이십니다.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문을 받들어 감사를 아뢰옵니다.”
3년 봄 정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게 되자 법사도
황제를 따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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