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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1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7권

by Kay/케이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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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7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7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7. 정관 22년 6월 황제가 「술성기(述聖記)」를 지은 때부 터 영휘(永徽) 5년 2월 법사가 답서할 때까지

정관 22년(648) 여름 6월, 당시 세자로서 춘궁(春宮)1)에 계시던 천황대제(天皇大帝)2)는 성문(聖文)을 받들어 본 후에 「술성기(述聖記)」를 지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저 바른 가르침[正敎]을 드러내 선양하려면 지혜 있는 사람[智者]이 아니면 그 글을 넓혀 나갈 수 없고, 미묘한 말씀[微言]을 숭앙하여 널리 퍼뜨리려면 현명한 사람[賢者]이 아니고서는 그 뜻을 결정할 수 없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은 모든 법의 본종(本宗)이며 모든 경전의 규범이다. 넓고 먼 천지를 다 총괄하여 그 심오한 뜻은 한없이 깊고, 공(空)과 유(有)의 정미(精微)함을 다하고 생(生)과 멸(滅)의 기요(機要)를 다하였다.
말씀이 워낙 많고 도의(道義)가 광범위하여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그 근본을 구명(究明)할 수 없으며,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그 뜻이 너무 아득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큰 성인[大聖]의 자비를 입으면 업(業)은 선(善)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신묘 교화[妙化]의 베풂을 받으면 연(緣)은 악을 물리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법 그물[法網]의 강기(綱紀)를 열어 6도(度)3)의 바른 가르침[正敎]을 널리 퍼뜨리고, 도탄에 빠진 중생을 건져 삼장(三藏)의 신비스런 국면을 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명성(名聲)은 날개가 없어도 멀리 날 수 있고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할 수 있다. 그러니 도의 명성은 경사스럽게 이어져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기감(機感)에 따라 몸을 나타내서[應身]4) 진겁(塵劫)을 지나도 썩지 않는다.
아침저녁 범종(梵鍾)은 취봉산(鷲峰山)에 울리고 혜일(慧日)의 법류(法流)5)는 녹야원(鹿野苑)에서 법륜(法輪)을 굴리며, 하늘을 덮은 보개(寶蓋)는 비상하는 구름을 만나 함께 날고 들을 채운 봄숲[春林]은 하늘꽃[天花]과 더불어 색색으로 아름다우리라.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복을 받으시어 손을 드리워 8황(荒)6)을 다스리시고,
덕이 오랑캐에게까지 미쳐 옷깃을 여미고 만국(萬國)의 조공을 받으셨다. 은혜는 죽은 자에까지도 미쳐서 석실(石室)에도 불경[貝葉]의 글이 오르게 했으며, 혜택은 곤충에까지 미쳐서 금궤(金匱)에도 범설(梵說)의 게송[偈]이 흐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뇩달수(阿耨達水)를 중국[神甸]의 8천(川)에 통하게 하셨으며, 기사굴산(耆闍崛山)을 숭산(崇山)과 화산(華山)의 푸른 봉우리에 닿게 하셨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법의 성품[法性]은 엄격하고 고요하기에[凝寂] 마음으로 와서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지혜의 바탕[智地]은 현묘하고 심오하여(玄奧)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마침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첩첩 어두운 밤에 지혜의 횃불을 비추고 화택(火宅)의 아침에 법의 비[法雨]를 내리는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여러 개천은 각자 따로 흐를지라도 함께 바다에서 모이고 모든 구역이 뜻을 달리 하여도 결국 실상(實)을 이룰 것이니, 구태여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으로 더불어 그 우열을 견주고 요임금과 순임금[堯舜]으로 더불어 그 성덕(聖德)을 비교하겠는가.
현장 법사는 일찍부터 총명함 갖추었기에 뜻을 세움에 온화하면서도 대쪽 같았다. 마음은 유년시절부터 이미 맑았고 몸은 뜬구름 같은 속세를 벗어났다.
마음을 온통 선정과 연구에 쏟아서 발자취를 깊은 바위 뒤에 숨기면서, 3선(禪)7)에 살고 10지(地)를 순유(巡遊)하였다. 6진(塵)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인도[迦維]8)로 가서, 1승(乘)의 종지(宗旨)를 깨닫고 인연 따라서 만물을 교화하였다.
우리 중국 땅의 불교가 내실이 없기에 인도의 진문(眞文)을 찾고자 하였으며, 멀리 항하(恒河)를 건너 마침내 대승[滿字]을 기약하고 설령(雪嶺)을 오르내려서 다시 소승[半珠]9)을 얻었다.
도(道)를 묻고 돌아오기까지 17년의 세월 동안 불전(佛典)에 상세히 통달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정관 19년 2월 6일에 조칙을 받들어 홍복사(弘福寺)에서 성교(聖敎)의 중요한 문장[要文]을 번역하였는데 무려 657부에 이른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속세의 때를 씻어 마르지 않게 하고, 영원한 지혜의 등불을 전하여 어두운 세상을 항상 밝히는 것이다. 스스로 오래도록 수승한 인연[勝緣]을 심은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러한 종지를 드러내어 날릴 수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법성(法性)이 상주(常住)하는 것이 3광(光)10)의 밝음과 같고, 우리 황제의 복이 모인 것이 이의(二儀)11)의 견고함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엎드려
어제(御製)의 『중경론(衆經論)』 서문을 보자니 과거를 비추어서 현재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치는 금석(金石)처럼 단단한 소리를 품었고 문장은 풍운(風雲)의 윤택함을 간직했다. 나[治]12)는 이 티끌처럼 가벼운 글을 폐하의 산악(山岳)처럼 무게 있는 서문에 더하여 이슬이나마 떨어뜨려 그 흐름에 보태고자 한다. 간략하게 대강(大綱)의 내용을 풀어서 이에 기록하는 바이다.”
이에 대해 법사는 감사의 서계(書啓)를 올렸다.
“현장이 듣기에 7요(耀)가 빛을 내는 것은 높은 하늘에 의지하여서 빛을 뿌리는 것이고, 9하(河)13)가 도도히 흐르는 것은 땅이 있기에 말미암아 유통(流通)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돕는 아름다움도 사물이 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고 법을 펴는 것도 사람에 의해서이니 이치에는 미혹됨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세자 전하께서는 예지를 발휘하시어 거듭 천문(天文)을 말씀하시고 대승을 찬미하시어 실상(實相)을 장엄하셨습니다. 옥구슬을 굴리는 듯, 노을빛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일월(日月)을 끌어다가 꽃을 꿰고 모든 풍류 음악[咸韶]과 더불어 운(韻)을 맞췄습니다. 현장은 평생에 다행으로 특별한 은택을 입었으니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걸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啓)를 올려 감사를 올립니다.”
이때 세자는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나는 본래 학문에 재주가 없고 성품도 총명하지 못한 사람이오. 게다가 불전의 여러 훌륭한 글들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지은 서기(序記)는 매우 졸렬할 수밖에 없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칭찬하는 글을 보내 주니,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할 뿐이오. 법사가 멀리 갔다 온 것에 위로를 드리며 깊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석언종(釋彦悰)의 주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 폐하와 세자 전하 두 분의 서문이 나온 뒤로 왕공(王公)ㆍ백관(百官)ㆍ도속(道俗)의 모든 백성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덕음(德音)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안팎에 드날렸다.
그 서문은 12일[浹辰]14) 만에 천지[六合]15)에 퍼져서, 자운(慈雲)이 다시 드리워지고 혜일(慧日)이 거듭 빛나게 되었다. 귀의하는 무리들은 물결처럼 밀려오고 안개처럼 모여들어, 이른 바 위[上]에서 아래[下]를 교화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는 것 같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것이리라. 여래께서 불법을 국왕에게 부여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때 홍복사의 주지 원정(圓定)과 장안의 승려들은 이 두 종의 서문을 금석(金石)에 새겨서 절에 소장하기를 원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뒤에 승려 회인(懷仁) 등이 진(晋)의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휘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하여 비석에 새겼다.
경진일(庚辰日)에 세자는 모후(母后)인 문덕성황후(文德聖皇后)16)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일로 하늘[昊天]17)에 보답하며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고자 중대부(中大夫)18) 수우서자(守右庶子)19) 신고계보(臣高季輔)에게 다음과 같이 영을 선포케 하였다.
“과인은 불민하여 항상 꾸지람과 힐책을 받고 있다. 아직 철도 없던 어린 시절에 모후[慈顔]께서 돌아가시니, 어머니를 잃은 근심이 평생토록 마음에 깊이 사무쳐서 바람에 꺾어진 나무처럼 뼈를 깎는 아픔이 더욱 깊어질 뿐이다.
그래서 항상 용기(龍忌)20)날을 맞이할 때마다 감회가 일어나 공연스레 부모를 사모하고 더욱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래 되었지만, 그러나 생가(笙歌)21)도 들린 지 오래여서 우러러 받들어도 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질없이 하늘에 대한 보답을 생각해 보고 공연히 까마귀[烏鳥]의 부모 그리는 정을 보낸다.22)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깨달음의 길은 넓고도 자비로워서 명복(冥福)을 베푼다고 하니 바라건대 이로써 자식의 부모 그리는 정을 펴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귀의하고 유사(有司)에 명을 내려 경성(京城) 안에 폐사(廢寺)된 절 하나를 잘 골라서 문덕성황후(文德聖皇后)를 위한 절을 즉시 짓고자 한다. 절이 완성되는 날에는 마땅히 별도로 승려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숲과 샘을 끼고 두른 빼어난 경관을 꾸미도록 하여서, 우러러 도리천(忉利天)의 과(果)를 도모하고 이 망극한 마음에 부합하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유사는 자세히 살펴서 빼어난 곳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궁성 남쪽 진창리(晋昌里)의 곡지(曲池)에 접해 있는 정각(淨覺)의 옛 가람 터에다 절을 세우게 되었다. 별을 보고 땅을 재어서 천궐(天闕)23)을 본 따고 급원(給園)을 모방하였고, 반(斑)24)ㆍ수(倕)와 같은 명공(名工)의 교예(巧藝)를 다하고 형산(衡山)과 곽산(霍山)에서 나는 좋은 재목을 사용했다. 즉 문채 있는 돌과 가래나무와 계수나무, 녹나무와 종려나무 등을 재목으로 충당하고, 옥구슬과 단청(丹靑)과 붉은 흙과 백토[赭堊]와 금과 비취는 장식으로 썼다.
그리고 여러 층으로 된 누각[重樓]와 겹으로 된 전각[複殿]과 구름처럼 높은 누각[雲閣]과 동방(洞房) 등 10여 개의 원(院)을 지었는데 무려 1,897칸이나 되었다. 거기에 침상과 이부자리와 기물(器物) 등을 다 갖추어 가득 차게 하였다.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는 또
법사가 바친 『보살장경(菩薩藏經)』25)을 읽고 좋게 여겨서, 춘궁(春宮)의 세자에게 조칙을 내려 경전의 후서(後序)를 짓도록 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듣자하니 복희 황제[羲皇]26)의 지극히 깊은 정수(精粹)는 거북 등에 쓰여 있고[龜文]27), 헌후(軒后)28)의 통달하고 그윽한 심오함[雅奧]은 조전(鳥篆)29)에 다 나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서(丹書)30)를 고찰하여 은밀한 내용을 찾으려 하였으나 실제(實際)의 근원[源]에는 어두웠고, 녹(綠)과 착(錯)의 글자의 오류[綠錯]를 밝혀 구함으로써[徵] 기미를 연구하였으나 언제까지나 즐거울[常樂] 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을 역사[圖史]에 빛내고 좋은 풍교[薰風]를 8연(埏)31)에 떨치며, 덕(德)으로 생령(生靈)을 다스려서 만대(萬代)에 물결을 일으킨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황제 폐하께서 전륜(轉輪)32)에 손을 드리우시니[拱垂] 교화가 계원(鷄園)으로 흘러들고, 승전(勝殿)에서 위의(威儀)를 바르게 하시니 마음은 취령(鷲嶺)에서 노니신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을 총괄하여 다스리시니[調御] 글 속에 담긴 생각[文思]으로 넘볼 바가 아니며, 반야(般若)를 윤언(綸言)33)으로 내리시니 어찌 『주역』의 계사나 상전[繫象]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교(敎)는 바다 끝까지 미쳐서 8해(解)34)의 소리[音]를 모두 전하고 훈(訓)은 온 나라[寰中]에 퍼져 4선(禪)35)의 궤도[軌]를 다 밟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삼천법계(三千法界)가 모두 생기(生氣)를 머금도록 북돋우고, 백억(百億)의 수미(須彌)를 중국[堤封] 안에 넣어서 진압하였다.
니련(尼連)36)의 덕수(德水)는 황제가 사는 동리[帝里]의 창지(滄池)37)에서 가깝고 사위(舍衛)의 암원(菴園)은 상림(上林)의 무원(茂苑)에 접해 있으니, 비록 법성(法性)이 아무리 텅 비고 적막하다[空寂]고 해도 감응(感應)에 따라 반드시 통하게 되고 진승(眞乘)38)이 아무리 미묘하고 깊어도 그윽하게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이른 바 대권(大權)이 잘 다스려서[御極] 법류(法流)를 이끌어 가는 일이 무궁하고, 능인(能仁)39)이 운(運)을 어루만지며 겁석(劫石)을 끝도 없이 털어낸다는 것이다.
옥체는 불가사의하게도 모든 상(相)을 갖추었으니, 그 아름다움을 이전의 왕들과 비교한다면 어찌 같은 나이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땅은 개벽 이래로 땅이 사막에 둘러싸여 진단(震旦)40)에 융화되지 않아서 신령한 글들이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우리 한왕(漢王)께서 세밀하게 느끼시어 어두운 밤중에 꿈41)을 꾸셨고 진후(晋后)는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翹誠] 경전[修多羅]42)을 백마사(白馬寺)에 내리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마치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뜨는 것과 같은 일이니 어찌 4해(海)의 끝까지 통할 것이며, 대통으로 엿보는[管窺] 비유를 취하였으니 어찌 7요(曜)43)의 구석까지 밝힐 수 있겠는가.

황제의 영험한 힘[皇靈]이 멀리 뻗치자 철위산[鐵圍]44) 끝까지 위세가 더해졌고, 지극한 성스러움[至聖]이 빛을 발하자 금강륜[金剛]45)의 가장자리까지 덕을 입었다.
그리하여 항하사 모래[恒河沙]만큼이나 많은 국토들이 두루 의관(衣冠)을 계승하였고, 해탈문(解脫門)46)을 열어서 진실의 길[眞實路]을 밟게 되었다.
따라서 용궁(龍宮)47)에 있던 범문(梵文)의 게송[偈]은 반드시 청대(淸臺)에 모여 피어나게 되었으며, 사자후[猊吼]48)가 담긴 패엽(貝葉)의 문장들은 다 책부(冊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단 이슬[甘露]을 뿌려서 싹과 줄기를 윤택하게 하시고 이렇게 지혜의 구름[慧雲]을 드리워 두루 내달리시니[翾走], 어찌 귀의함의 수승한 업[勝業]이 아니겠으며 성스런 정사[聖政]의 신령한 감응이 아니겠는가?
『보살경』이란 큰 깨달음[大覺]의 뜻의 근본[意宗]을 모은 요지가 되는 책이다.
부처님께서 이 도를 닦아서 무생(無生)을 증득하셨으니, 보살이 이 경전을 수지하면 모두 다 불퇴(不退)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6바라밀(波羅蜜)49)의 관건이 이것의 도움을 받으며, 4무량심(無量心)50)이 여기에 갖추어져 있으니, 아마도 피안(彼岸)에 건너가는 나루터가 될 것이며 정각(正覺)에 이르는 사다리가 될 것이다.
정관(貞觀) 연간51)에 인도[身毒]52)가 귀화하였으니, 열판(熱阪)을 넘어서 천자가 내리는 책력[頒朔]53)을 받았고 현도(懸度)54)를 지나서 보배를 들여왔다.
그리하여 문궤(文軌)55)가 동일해지고 도로가 막힌 곳이 없어지니, 사문 현장은 석장을 떨치고 일어나 참된 법[眞]을 찾아 나서서 옥관(玉關)56)을 나가 멀리 내원(柰苑)으로 달려 천축에 이르렀던 것이다. 선인들이 태어난 곳을 애써 찾아 방문하여 이 경전을 얻었고, 귀국하여 황제에게 이를 아뢰니 번역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에 공을 들여 완성하였다. 나는 이 경전을 문안 올리는 여가에 마음을 맑게 할 묘법의 보배로 삼는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이 글을 지어서, 미약하나마 찬양의 마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책으로 묶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황제는 믿는 마음이 날로 두터워져서 법의(法義)를 밝히고 복전(福田)의 공덕을 입에서 쉬지 않게 되었다. 또 법사와 더불어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조칙을 내려 공양물을 더했으며 계절에 따라 의복이나 침구를 자주 바꾸어 주도록 하였다.
가을 7월 경신(庚申), 여름이 끝나자 또 법사에게 백금(百金) 만큼이나 값비싼 납가사(納袈裟) 한 벌을 보시했다. 그 가사는 실가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히 짜인 것이었다.
황제의 창고 안에는 전대(前代)에 납품한 것이 있지만 모두 좋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후궁(後宮)에게 시켜서 마음에 들도록 짜게 한 것이다. 이 천을 짜는데 수년이 걸렸으며 황제가 어가(御駕)를 타고 사방을 순유할 때 항상 가지고 다녔던 것이라고 한다.
정관 22년(648), 황제가 낙양궁으로 행행(行幸)했다.
이때 소주(蘇州)57)의 도공(道恭) 법사와 상주(常州)의 혜선(慧宣)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행실이 높고 학문은 내외로 해박하여 조야(朝野)에서 칭송을 받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불러서 그들이 오자 공손히 맞이하여 앉게 하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두 스님은 각각 납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양 무제(梁武帝)께서 선사(先師)에게 보시한 것이었다. 이것을 서로 물려가며 보물로 여기던 차에 마침 용안(龍顔)을 배알하러 올 일이 생기자 이 가사를 걸치고 온 것이었다.
황제는 그 정도 별로 옷은 대단하지도 않다고 웃으면서 자신의 납가사를 보여줬다. 그리고 시를 지어서 읊게 하였다. 도공 법사가 시를 읊었다.

복전(福田)은 상덕(像德)을 돕고
성종(聖種)은 유훈(幽薰)을 다스리네.
금으로 실을 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단으로 문채(文綵)를 이루었네.

주청(朱靑)은 스스로 그림자를 감추고
비취 무늬는 서로 왕성하게 피어나는데
유독 자꾸 흩어지는 잎이 있어
항상 도휴(稻畦)를 향해 갈라지네.

이에 혜선 법사는 시의 끝 구절을 이렇게 읊었다.

만약 한 벌의 의복을 입게 하신다면
참으로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으리.

두 법사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주지 않고 각각 명주 50필만을 보시했다. 즉 이 납가사는 빼어난 재주를 가진 자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니 아무에게나 입게 할 수는 없고, 오직 현장 법사의 성덕(盛德)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법사에게는 이 납가사와 함께 머리 깎는 칼[剃刀]도 하사했고, 법사는 다음과 같은 감사의 표문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엎드려 칙령을 받들어 납가사 한 벌과 체도 한 자루를 엎드려 하사받았습니다. 특별한 명이 연이어 이르고 두터운 은총의 빛을 내리시니 공손히 받잡노라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 마치 얇은 얼음판을 밟는 것 같습니다.
현장은 다행히도 태평성대의 덕화를 만나 일찍이 승려의 무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업(業)58)을 다하지 못하고 4은(恩)59)에 보답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릇 되게도 천자 곁을 맴돌면서 외람된 혜택만을 탐했습니다.
인욕(忍辱)의 가사는 노을[流霞]처럼 아름다운 문채를 머금었고, 지혜의 칼은
옥(玉)을 자르고도 남을 만큼 날카롭습니다. 삼가 이 가사를 몸에 입고 마땅히 번뇌의 마귀를 항복받고, 삭도를 차고 다니면서 티끌세상 수고로운 그물을 끊겠습니다. 남과 나 사이에 괜한 원망을 일으키고 공연히 영화나 탐하는[冒榮] 일을 만들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부끄러운 마음 앞을 막지만 달려가 허리를 조아립니다. 두려운 마음에 허리도 못 펴고 정신이 빠져 있으니 지극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송구스럽습니다. 삼가 표문을 올려 감사를 드리니 폐하께서 굽어 살피어 용서하여 주십시오. 엎드려 생각해도 두려움에 떨립니다.”
당시에 황제는 잠시 국방에 힘을 쓰고 있었는데, 역서를 재정하여 편찬[纂曆]한 다음에는 다시 마음을 백성에게 두게 되었다.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에 서리 바람을 맞으며 한데 잠을 잤었기에 귀환한 뒤로는 기력이 옛날과 같지 않아 병이나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법사를 만나고부터 마침내 마음을 8정도(正道)에 두고 오승(乘)60) 안에 살게 되어 마침내 체력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법사에게 물었다.
“공덕을 심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 많겠소?”
법사가 대답했다.
“중생은 미혹에 빠져 있으므로 지혜도 없고 계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싹을 드리워 법을 심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법을 넓히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하니 승려를 만드는 것이 최대의 공적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가을 9월 기묘일(己卯日)에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옛날 수나라 말엽에 황실은 권력을 잃고 천하는 흩어져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4해(海)는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크게 동요하였다.
그때에 짐이 그 혼란을 평정하는 역할을 맡아서 몸소 싸움터에서 서릿바람을 겪으며 말 위에서 밤을 새우는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약을 먹어도 좀체 병이 낫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근자에 들어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는데, 이 어찌 복(福)과 선(善)이 감응하여 이렇게 나아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경성(京城)과 지방 여러 고을에 있는 절에는 마땅히 승려 5명씩을 두고, 홍복사(弘福寺)에는 50명의 승려를 두도록 하라.”
지금 나라 안에 있는 절을 모두 헤아려 보면 3,716개가 되고, 득도한 승려를 계산해 보니 18,500여 명이나 된다.
조칙이 있기 전에는 세상의 사묘(寺廟)란 사묘는 다 수나라 말기를 만나 쇠잔하였고, 승려도 거의 절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은혜를 입고 나니 도중(徒衆)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일은 군자가 정언(正言)을 중히 여긴 때문이리라.
황제가 다시 물었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모든 부처님들이 이것을 좇아 나왔다고 하오. 그러므로 이 경전을 듣고 비방하지 않으면 그 공적은 신명(身命)을 주는 것보다 더 커서, 항하(恒河)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진기한 보배라 해도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오. 거기에다 이론은 자세하고 말은 간략하기 때문에 많은 현달(賢達)과 군자(君子)들이 이 경을 수지(受持)하여 애독하고 있다 하오. 선대(先代)에서 번역한 이 경전이 문의(文義)가 갖추어졌는지는 모르겠소.”
법사가 대답했다.
“이 경의 공덕은 진실로 성지(聖旨)와 같습니다. 그래서 서방 사람들은 모두 다 이 경전을 애독하며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경전의 옛 번역서를 보니 역시 빠뜨린 부분[遺漏]이 있습니다.
범본(梵本)에 의하면 마땅히 『능단금강반야(能斷金剛般若)』라고 해야 하는데 옛날 번역에서는 그저 『금강반야』라고만 하였습니다.
이 경전에서는 보살의 분별심이 곧 번뇌이며, 그 분별의 미혹됨이 견고하기가 금강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직 이 경전에서 말하는 분별이 없는 지혜라야 능히 끊어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능단금강반야』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번역한 경전은 위의 두 글자가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에서는 세 가지 의문[三問] 중에서 하나가 빠졌고, 2송(頌)에서도 하나가 빠졌으며, 9유(喩)61)에서는 세 가지가 빠졌습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가 번역한 것은 사위국(舍衛國) 것입니다. 보리유지(菩提留支)가 번역한 바가바(婆伽婆) 것은 조금 나은 편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법사가 이미 범본(梵本)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다시 번역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경전이란 것은 본래 이치가 중요한 것이니 글을 수식하려다가 뜻을 그르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래서 새로 『능단금강반야』를 범본(梵本)에 의해 번역해서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 해 겨울 10월에 황제가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법사도 역시 따라서 돌아왔다.
이에 앞서 황제가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려 북궐(北闕)의 자미전(紫微殿) 서쪽에다 별도로 절을 하나 짓게 하고 홍법원(弘法院)이라 부르도록 하였었는데, 법사가 도착하자 그곳에서 주석하게 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낮에는 황제에게 가서 담론하였고, 밤에는 홍법원으로 돌아와 경전을 번역했다.
여기서 다시 번역한 것은 무성보살(無性菩薩:Asvabhāva)이 번역한 『섭대승론』 10권, 세친(世親)의 논(論) 10권, 『연기성도경(緣起聖道經)』62) 1권, 『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63) 1권이었다.
무신일(戊申日),
세자는 또 다음과 같은 영을 선포했다.
“자은사(慈恩寺)64)를 건립하게 되고 차츰 공력을 마치게 되어 그 웅장한 모습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으나 승려가 아직도 모자란다.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들어 3백 명을 득도케 하여 승려로 선출할 것이며, 따로 50명의 대덕을 초빙하여 함께 성신이 거하시는 것[神居]과 강림(降臨)하여 도를 행하는 것을 받들도록 한다.
새로 건립한 도량은 대자은사(大慈恩寺)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따로 역경원을 지어서 무지개다리와 수초가 떠있는 우물, 단청(丹靑)에 서린 운기(雲氣)와 옥돌로 만든 초석과 구리빛 흙의 기름진 밭, 금고리와 화단 등을 모두 아름답게 꾸며 놓고 법사를 모셔다가 번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절의 모든 사무도 통솔하도록 하겠다.”
법사는 대자은사의 상좌(上座)로 앉히겠다는 세자의 영지(令旨)를 받들자 다음과 같이 사양하는 글을 아뢰었다.
“사문 현장은 아룁니다. 엎드려 세자 저하의 영지를 받아 보니 이 현장으로 하여금 자은사의 상좌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황공하게도 이런 아름다운 명[嘉命]을 들으니 마음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며 더욱 전율할 따름입니다.
현장은 학예(學藝)를 닦은 것이 없고 행업(行業)도 비어서 내실이 없습니다만, 감히 맹세코 마음을 다하여 훌륭한 대사업을 도울 것을 기약합니다.
황제 폐하의 신령함을 믿고 의지하여 먼 곳까지 도를 찾으러 가서 얻어온 경론은 칙명을 받들어 번역하겠습니다. 온 마음은 그저 법을 전하여 만물을 점차 윤택하게 하고 국운을 불어나게 하며, 성교(聖敎)를 받들어 펴서 역사를 빛내는 일에 두겠습니다.
현장은 옛적에 위험한 길을 무릅쓰고 떠나 오랜 시간 병에 시달렸었고, 절룩거리는 말을 타고 다니느라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하다가는 주어진 사업[業]마저도 다 마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홀로 국은(國恩)을 저버리고 떠났으니 벌(罰)을 내리셔야 마땅하며 이렇게 용서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에게 승단의 사무[僧務]를 맡으라는 명을 내리신다면 더욱 허물을 남기는 일이 됩니다. 물고기나 새가 자기의 본성(本性)을 바꾸게 되면 날고 헤엄치는 길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세자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인효(仁孝)와 마음에서 우러난 애경(愛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하신 데 대해 슬픔을 느끼시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아픔을 항상 가지고 계시어, 지금 가람을 세워 밝은 복[景福]을 넓히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법중(法衆)을 바로 다스리는 그 소임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쓰게 되면 반드시 열이면 열 다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니다. 밝으신 예지로 멀리 살피시어 홍법(弘法)의 복인(福因)을 비추시고, 자비를 드리우시어 어리석은 사람의 충관(忠款)을 살펴주십시오. 그리하여 법승(法僧)의 허물을 꾸짖지 마시고 고기와 새에게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하십시오.
내려주신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瀝懇]을 감당하지 못해 삼가 계품(啓稟)을 받들어 진정(陳情)을 올리면서 엎드려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12월 무진(戊辰)에는 또 태상경(太常卿)65) 강하왕(江夏王)인 도종(道宗)에게 칙명을 내려 구부악(九部樂)을 거느리게 하고, 만년(萬年)의 영(令) 송행질(宋行質)과 장안(長安)의 영 배방언(裵方彦)에게는 각각 현내(縣內)의 악대와 여러 절의 당번가 장막[幢帳]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모두 미리 장엄해 놓았다가 기사일(己巳日) 아침에 안복문(安福門) 거리에 모여서 상(像)을 맞이하고 승려들을 배웅하여 대자은사에 들게 하였다.
이때에 길거리에는 비단 자수로 장식한 수레와 어룡(魚龍)을 수놓은 기(旗) 등을 늘어놓았는데, 수레는 무려 1천1백여 대이고 장개(帳蓋)는 3백여 가지나 되었다.
이에 앞서 안에서 내놓은 자수나 그림으로 된 불상 2백여 구(軀), 금은 불상 2구, 금실로 수놓은 번(幡)이 5백 장이나 홍복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이것과 아울러 법사가 서방에서 가지고 온 경전과 불상과 사리 등을 홍복사에서 내어 와서 장막을 친 자리[帳座]와 여러 대의 수레 위에 안치하고 대자은사로 향하였다.
그리고 불상 앞의 양옆으로는 각기 장식한 큰 수레가 있었고 그 수레 위에는 긴 장대를 세우고 깃발을 달았다. 그 깃발 뒤에는 사자신왕(師子神王)66) 등을 두어서 의식을 선도(先導)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거(寶車) 50여 대를 장엄하여 여러 대덕들을 앉게 하였다. 다음으로 경성(京城)의 승도들에게 향화(香花)를 들게 하고 범패를 부르면서[唄讚]67) 뒤를 따르게 하였다. 다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각기 시위(侍衛)하면서 열을 맞추어 뒤따르게 했다. 또 태상(太常)68) 9부(部)69)의 풍악을 양쪽에 세우고 만년(萬年)과 장안(長安)70), 두 현의 악대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무성한 당번(幢幡)은 햇빛을 받아 하늘에 펄럭이고, 우렁찬 종과 북소리는 도읍을 진동하였으니, 행렬을 바라보아도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세자는 수(率)71) 위지소종(尉遲紹宗)과 부수(副率) 왕문훈(王文訓)을 보내서 동궁(東宮)의 병사 1천여 명을 데리고 일손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칙명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72) 이건우(李乾祐)를 대사(大使)로 보내서 무후(武侯)와 함께 감독하도록 했다.

황제는 세자와 후궁 등을 거느리고 안복문(安福門)의 누문(樓門)에서 향로를 받쳐 들고 구경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수억만이나 되었다.
경전과 불상이 자은사의 문 앞에 이르자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長孫無忌),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73), 중서령(中書令)74) 저수량(褚遂良)에게 칙명을 내려 향로를 들고 안으로 인도하여 전각 안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뜰에서는 구부악(九部樂)을 연주하면서 파진무(破陣舞)75)와 온갖 유희를 벌이게 하고, 연주를 다 마친 후에 돌아갔다.
임신일(壬申日)에는 승려를 선발하였다.
신미일(辛未日)에 세자는 시종과 더불어 궁을 나와 옛집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절의 남쪽을 따라 행차하였다.
세자는 절 문 앞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으며 백료(百僚)들은 그 뒤를 따랐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나서 50명의 대덕들을 인견하고 자은사를 건립하게 된 뜻을 설명하였다. 그 말소리가 감동으로 목이 메어 비장한 느낌이었으므로, 곁에서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이나 승려들 모두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극한 효심의 정은 역시 오늘날의 순(舜)임금이라 할 만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전(殿)의 동각(東閣)에 올라 소첨사(少詹事) 장행성(張行成)에게 “경기(京畿)76) 안의 죄수들에게 은혜로이 사면을 내린다”는 것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 머리를 깎고 재를 지낸 다음 왕공(王公) 이하 모든 사람들에게 속백(束帛)을 하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을 물리치고 각(閣)에서 내려와 부처님께 예배하고, 비(妃)들과 함께 절을 순시하였다.
법사의 방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은 5언시(言詩)를 지어 방문에 붙였다.

헌(軒)에 올라 복전(福殿)을 보고
멀리 황제의 땅을 조망(眺望)하니
법륜(法輪)은 햇빛을 머금어 구르고
꽃 일산[花蓋]77)은 구름까지 닿아 있네.

비취빛 향불 연기 누각에서 피어오르고
붉은 노을 보의(寶衣) 위에 반짝이네.
알록달록 무지개 같은 깃발이 멀리
하늘 밖 아득히 펄럭펄럭 빛나니
숙연하게 10지(地)에 올라
삼보(三寶)에 귀의했음을 알겠네.

그리고 절을 둘러본 다음 궁으로 돌아갔다.
이때 도속(道俗)들은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하면서, 현풍(玄風)이 거듭 성하고 유법(遺法)이 다시 융성해지기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은 근래에는 물론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날 황제가 조칙을 내려서 법사에게 북궐(北闕)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정관 23년(649) 여름 4월에
황제가 취미궁(翠微宮)78)으로 행행(幸行)할 때에 세자와 법사도 함께 배종(陪從)하였다.
취미궁에 도착하여 각자 자리를 잡은 후에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직 불도(佛道)의 오묘함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가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서역(西域)의 선성(先聖)이 남기신 업적과 고적(故迹)에 대해 물으면 법사는 모두 경전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황제는 깊은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주 옷깃을 여미면서 이렇게 감탄했다.
“짐이 법사를 너무 늦게 만나서, 불사(佛事)를 더 크게 일으키지 못하였소.”
황제가 장안을 출발할 때는 건강 상태가 약간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는 모습이나 정신이 또렷하기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5월 기사(己巳)에 이르러 경미한 두통이 있었기에 법사를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경오일(庚午日)에 황제가 함풍전(含風殿)에서 붕어(崩御)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비밀로 하고 말을 내지 않았다가 장안으로 돌아와서야 상(喪)을 발표하고 태극전(太極殿)에다 빈소를 차렸다.
그날 세자가 황제로 즉위하고 재궁(梓宮) 옆에서 해를 넘긴 뒤 개원(改元)하여 연호를 영휘(永徽)라고 하였다.
온 천지의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법사는 자은사로 돌아온 뒤로 번역에만 전념하며 잠시의 시간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매일 그날의 과제를 정해 놓고, 만약 낮에 일이 있어서 충분히 번역을 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밤에라도 그 몫을 끝냈다. 예정한 그날의 분량이 끝나면 비로소 붓을 놓고 경전을 거둔 다음 부처님께 예배하고 행도(行道)79)하였다.
법사는 3경(更) 무렵이 되면 잠깐 잠자리에 들었다가 5경이면 다시 일어나서, 범본(梵本)을 독송하면서 차례로 붉은 점을[朱點]을 찍어서 다음 날 번역할 부분을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 매일 재계(齋戒)를 마친 다음 저녁 무렵의 2시간은 새로운 경론을 강의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학승들이 항상 청강하러 와서는 의문점을 풀고 뜻을 배웠다.
또한 법사가 자은사의 상좌(上座)80) 임무를 맡았다는 것을 알고, 승무(僧務)에 관한 일로 찾아와서 자문을 얻고 지시를 받기도 했다.
또한 황제가 보낸 내사(內使)가 공덕(功德)을 짓는 일이 있었는데, 차례로 『일체경(一切經)』 10부와 협저보장[夾紵寶裝] 불상81) 2백여 구(軀)를 역시 법사의 지휘 하에 만들게 했다. 그들도 해가 진 다음에야 돌아갔다.
그리고 사내(寺內)의 제자 1백여 명이 모두 가르침을 청하면서 복도와 처마 밑까지 꽉 들어차 있었는데, 그들의 질문에도 빠짐없이 모두 응답해 주었다.
비록 이렇게 여러 가지 사무가 폭주했으나 정신만은 항상 여유가 있고 일이 막히는 것이 없었다.
또한 여러 대덕들과 더불어 서방 성현(聖賢)들의 입의(立義)나 여러 부(部)의 이단(異端)을 논했으며, 소년승(少年僧)에게는 인도 순례와 강학(講學)하던 일을 이야기해주는 등 고상하고 준엄한 담론이 격렬해도 끝내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렇듯 그는 사리(事理)에 밝고 재지(才智)가 날카롭고 강한 힘이 남보다 뛰어난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여러 왕들이나 정승 같은 관리들이 자주 찾아와서 예배하고 참회하였는데, 법사는 그 사람들을 영접하여 모두 발심하도록 인도하였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공손하고 겸손해져서 법사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휘 2년(651) 봄 1월 임인(壬寅)에, 영주(瀛州)82) 자사(刺史) 고돈색(賈敦賾), 포주 자사(州刺史) 이도유(李道裕), 곡주(穀州)83) 자사 두정륜(杜正倫), 항주(恒州)84) 자사 소예(蕭銳)가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朝集]85) 장안에 모여 공사(公事)를 보는 여가를 틈 타, 서로 권하여 법사를 찾아와서 보살계 받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그들에게 보살계를 주고 아울러 널리 보살의 행법(行法)에 대해 말해 주며, 군주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밑으로는 자애(慈愛)를 베풀도록 권하였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갔다가 계묘일(癸卯日)에 각각 정결한 재물[淨財]을 보시하면서 아울러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법사를 뵙고 계법(戒法)을 들은 데에 대해 감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제가 듣기로, 여래께서는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도 순다(純陀)의 공양을 받으셨고, 유마[淨名]는 구하는 법(法)이 없었어도 선덕(善德)의 청을 들어주었다 합니다.
이는 모두 지극한 이치란 항상 변함없다는 것을 드러내어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또한 기연(機緣)에 따라 사물을 맞아 대하고, 상(相)을 빌려서 도를 넓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법을 중히 여기는 지극한 정성을 나타낸 것이고, 그것을 받은 사람은 보시를 행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마음이 피차(彼此)의 연(緣)에 얽히고 명리(名利)에 물들었다고 하겠습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법사가 숙세에 심은 덕은 단지 3불(佛)이나 4불(佛)ㆍ5불(佛)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깊이 법상(法相)에까지 통달하여 12부(部)도 잘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홀로 진종(眞宗)86)을 깨달아 멀리 성적(聖迹)을 찾아 떠나서, 기사굴산[崛山]의 정토(淨土)를 밟고 항하(恒河)87)의 맑은 물에 몸을 씻으셨습니다. 깊이 법계에 들어 선지식(善知識)을 구하고,
길이 후세를 위한 훌륭한 글을 모아서 천 년 전의 심오한 교지(敎旨)를 탐구하셨습니다.
일반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일을 크게 떠벌리거나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도, 누구를 먼저하고 누구를 나중 하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고루 베푸셨습니다.
우리들은 식(識) 때문에 2공(空)88)을 가리었고, 업(業) 때문에 삼계(三界)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이 스스로를 얽어매고 정륜(井輪)89)이 쉬지 않고 도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가르침에 따라 믿음을 내고 인연에 따라 깨달으며 정례(頂禮)하고 귀의(歸依)하여 4구(句)90)를 받아 지닌다 하여도, 그저 몸을 숨겨[隱身] 좌선이나 하고 앉아서 고통[苦]을 싫어하고 항상 즐거움만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무명(無明)에 머물러 있을 뿐, 지극한 이치에는 거의 어둡습니다. 그렇게 불성(佛性)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나 경계(境界)가 오직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야 취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뜻이 유무(有無)에 관계되는 것이라서, 8사(邪)91)에 곧장 나아가 8정(正)92)에 들어가는 일과 비도(非道)를 행하여 불도(佛道)에 통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바다를 건너가지만 배를 댈 항구가 없고 담장에 가려서 밖을 볼 수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공무를 보는 틈에 잠시 뵙게 되었을 때에 친절하게 맞아 이끌어 주시고 또 보살계까지 주셨습니다. 이렇게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법을 베풀어 주시고 더 없는[無上] 도심(道心)을 일으켜 주시어, 무제(無際)에서 일념(一念)을 부수어버리고 미래세(未來世)에 4심(心)93)을 다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보리(菩提)94)의 씨앗을 티끌세상에서 일어나게 하였다거나, 불 속에서 연화(蓮花)를 피어나게 했다는 이런 비유로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들은 비로소 여래의 성품이 곧 세간(世間)이며 열반(涅槃)에 드는 경계도 생사(生死)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야[波若]95)를 행하는 것이 곧 행하지 않는 것이며, 저 보리(菩提)를 얻었다는 것은 반대로 얻음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은 기연(機緣)으로 인하여 갑자기 큰 가르침을 듣게 되었으니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받들어 깊이 사유하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월(檀越)96)이라는 뜻이 6바라밀(波羅蜜)97)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에 법시(法施)가 으뜸입니다.
그리고 존귀한 지위에 있는 분이 셋이 있는데 법사께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자애(慈愛)를 넓혀 만물을 이롭게 하시는 것이 마치 일월(日月)처럼 무심(無心)하지만, 비추어 주시는 빛을 우러르고 은혜를 가슴에 품는 것은 마치 해바라기가 가만히 그 빛을 감지(感知)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사(大士)께서는 법을 듣고는 몸을 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저희들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자(童子)가 부처님을 뵙고 흙 한줌을 바쳤다고 하는 그런 일은 저희들도 감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가 별서(別書)와 같이 물건 몇 가지[片物]를 따로 보내어 마음을 표합니다.
바라옵건대 이 정성스런 마음을 비추어 주시어
복밭[福田]98)을 만들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약소한 보시를 받아 마음대로 사용하시어, 저 이슬이 떨어져 바다로 들어가 발해(渤海)와 함께 깊어지고 날아다니던 티끌이 산에 모여 수미산과 함께 영원히 굳어지듯이, 장구(長久)하고 광대(廣大)하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고 다행하겠습니다.
봄날 추위가 아직 심한데 부디 법체 편안하시기를 빌면서 삼가 백서(白書)를 보냅니다. 여러 가지로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고돈색(賈敦賾) 등은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립니다[和南]99).”
조정 현신(賢臣)들이 이처럼 법사를 사모하였다.
영휘 3년(652) 3월에 법사는 절의 단문(端門)100) 남쪽에 돌로 만든 부도[石浮圖]를 세워서 서역에서 가지고 온 경전과 불상을 안치할 계획을 세웠다.
법사의 생각은 세상이란 것이 워낙 무상한 것이므로 경본이 산실(散失)될까 봐 걱정도 되고, 또 화난(火難)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부도의 폭과 높이는 30장(丈)으로 하여 대국(大國)의 숭엄한 기틀을 나타내고 석가의 고적(故迹)을 본따 만들기로 하였다.
법사는 장차 이 부도를 건립하기 위해 표(表)를 올려 상주(上奏)했는데, 칙사(勅使)인 중서사인(中書舍人)101) 이의부(李義府)가 와서 법사에게 조칙을 전해주었다.
“법사가 세우려는 탑은 공력(功力)이 크게 들기 때문에 아무래도 완성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벽돌로 짓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법사가 너무 고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에, 지금 이미 대내(大內)102)ㆍ동궁(東宮)103)ㆍ액정(掖庭)104) 등 7궁(宮)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의복과 물건[衣物] 등을 내놓도록 명령을 내려놓았소. 풍족하게 준비를 갖추도록 할 것이오.”
이에 벽돌을 써서 짓기로 하고, 법사는 새로 서원(西院)으로 옮겼다. 탑기(塔基)의 4면은 각각 140척인데, 서역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국의 옛날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탑은 5층으로 되었고, 상륜(相輪)과 노반(露槃)105)이 있으며 총 높이는 180척이나 되었다.
층마다 그 속에 사리를 안치했는데, 어떤 것은 1천, 2천 개씩이나 들어가 무려 1만여 립(粒)이나 되었다. 상층에는 돌로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탑의 남면에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각각 태종(太宗)과 고종(高宗)의 「삼장성교서기(三藏聖敎序記)」가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상서우복야 하남공(尙書右僕射河南公) 저수량(褚遂良)이 쓴 것이다.
처음 탑을 기공하던 날에 삼장법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성스럽게 서원을 기술하였다. 간략하게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현장은
스스로 생각하건대, 복이 박하게[薄祐] 태어나서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을 뻔 했는데, 그나마 작은 선업[微善]에 올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말법(末法)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귀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경사스럽게도 어려서 출가하여 직접 신령한 부처님의 모습[靈相]을 보았고, 어려서부터 법을 사모하여 남기신 가르침[遺筌]을 들었습니다. 보살께서 수행하신 바의 말씀을 듣고 생각은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나 미칠 수가 없었지만, 여래께서 증득하신 바의 법을 듣고 우러러 몸과 마음에 간직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존사(尊師)의 가르침을 두루 듣고 널리 선달(先達)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저 한나라 때 서역이 감동을 꿈꾸어서[漢夢西感]106) 바른 가르침[正敎]이 동방으로 전해졌지만, 길이 막히고 또 멀기까지 하여서 다 상세히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쟁적으로 집착하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이상(二常)의 종(宗)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고, 같은 부류끼리 무리를 지어서 다른 사람은 질시하며 일미(一味)의 종지(宗旨)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후학(後學)들이 서로 돌볼 수도 의지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현장은 취산(鷲山)을 바라보며 슬픔을 더했고, 항상 눈물로 그리워하며 제대로 잠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속으로는 신령(神靈)의 도움을 빌고 밖으로는 나라의 위세[國威]를 믿어서, 평생 살던 나라를 떠나 갖은 죽을 고비를 겪을 땅으로 몸을 던져 들어갈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성스러운 유적이 있는 자리를 두루 찾아다니며 모든 유령(遺靈)을 배알했으며, 법을 펴는 사람이 있다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찾아가 정설(正說)을 물었습니다. 한 장소를 지나면서 못 보았던 것을 보게 되면 슬픈 마음이 들었고, 한 글자라도 듣지 못했던 것을 들으면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목숨을 다 바쳐 누락된 것을 정서(淨書)하기로 하였는데, 이미 그 정성과 서원을 이루고 본조(本朝)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다행히도 아름답고 밝은 태평성대를 만나서, 황제께서는 조칙(詔勅)을 내려 번역을 허락하셨습니다.
선황(先皇)의 도(道)는 금륜(金輪) 꼭대기까지 걸쳐 있고 선황의 명성[聲]은 옥고(玉鼓)를 진동시키어, 융상(隆象)의 계(季)를 이으시고 응부(膺付)의 속(屬)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정성스런 마음[神衷]을 내리시어 친히 「삼장서(三藏序)」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금상(今上)께서는 춘궁(春宮)에 계시던 세자 시절부터 도(道)를 강(講)하시고 또 「술성기(述聖記)」까지 지으셨습니다. 이는 가히 겹겹 밝은 빛이 벽옥(璧玉) 빛과 합하고 색색 아름다운 무늬가 꽃에 꿰어진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환한(渙汗)107)은 7요(耀)의 문(文)에 드리우고 음악은 구성(九成)108)을 연주하여 울려 퍼졌습니다.
동도(東都)109)의 백마사(白馬寺)110)와 서명사(西明寺)111) 초당(草堂)에서 성황리에 번역하였던 것을 어찌 오늘과 같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생령(生靈)이 박운(薄運)하면 함께 의지할 하늘을 잃을 것이기에
오직 삼장(三藏)의 범본(梵本)이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릴까 걱정입니다. 그렇게 되어 이성(二聖)의 천문(天文)이 텅 비어 버리고 기록했던 것들이 다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이 탑을 정중하게 높이 세워서 범본을 안치하기로 하고 또 풍비(豊碑)를 세워서 이 서기(序記)를 새깁니다.
바라옵건대 영겁동안 우뚝 솟아 천분 부처님[千佛]께서 함께 보셔서 이 성스러운 발자취[聖跡]를 빛나게 하시어, 일월[二儀]과 더불어 영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삼장법사는 직접 삼태기를 지고 벽돌을 운반하였다. 이렇게 2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그해 여름 5월 을묘(乙卯)에 중인도국(中印度國)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112)의 대덕인 지광(智光)113)과 혜천(慧天) 등이 법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지광은 대승ㆍ소승과 외서(外書)의 4베다와 5명론(明論) 등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바로 계현(戒賢) 법사의 문인(門人) 가운데서 상수(上首)였다. 그래서 다섯 인도(印度)114)의 학자들도 모두 으뜸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혜천은 소승 18부(部)115)에 정통했으며 선생으로서의 덕망도 있어 역시 그곳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현장 법사가 서역에 가 있을 때에 함께 항상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사이였다.
혜천은 소승[半敎]에는 공이 있으나 대승[方等]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고집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법사는 늘 꾸짖곤 했었는데, 곡녀성(曲女城)의 법회 때에는 또 그의 편견을 완전히 꺾었으므로 그가 마침내 항복했던 일이 있었다.
이들은 헤어진 뒤로도 흠모하여 잊지 못했기에, 같은 절에 있는 사문 법장(法長)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찬송(讚頌)과 담요 2장을 보냈던 것이다. 법사를 찬양하는 마음이 이처럼 두터웠던 것이다.
그때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미묘길상(微妙吉祥)의 세존께서 앉으셨던 금강좌(金剛座)가 있는 이곳 마하보리사의 훌륭한 여러 승려들에 둘러싸인 상좌(上座) 혜천은 이 편지를 마하지나국(摩訶支那國)의 한량없이 많은 경(經)ㆍ율(律)ㆍ논(論)의 미묘한 이치에 정통하신 목차(木叉)116) 아차리야(阿遮利耶)에게 보냅니다.
삼가 여쭈오니 몸과 마음이 다 조금도 불편함 없이 한량없이 평안하신지요?
저 혜천 필추(苾蒭)는
이번에 『불대신변찬송(佛大神變讚頌)』과 여러 경론의 비량지(比量智)117) 등을 지었기에 여기 필추 법장에게 부탁하여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량없이 다문(多聞)한 노대덕(老大德) 아차리야 지광(智光) 역시 안부를 전하며, 우바새118) 일수(日授)는 머리 숙여 합장합니다.
여기 백전(白氈) 2장을 함께 보내어 빈 마음이 아님을 표시합니다. 길이 워낙 멀어서 그러니 물건이 적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필요한 경론의 목록이 있으면 그 사람 편에 보내주십시오. 꼭 필사하여 목차 아차리야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멀리 있는 현인들까지도 경모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영휘 5년(654) 봄 2월에 법장(法長)은 인도로 돌아가기 위해 답서를 청해왔다. 법사는 답서와 함께 신물(信物)을 보냈다. 이 편지는 상주(上奏)하기 위해 한 장을 더 필사해 놓은 뒤에 사인(使人)에게 주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당국(大唐國) 필추 현장은 삼가 이 글을 중인도 마게타국(摩揭陀國)의 삼장 지광 법사의 좌전(座前)에 보냅니다.
한 번 헤어진 뒤로 어느새 10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식을 듣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만 날로 더해갈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필추 법장의 방문을 받고, 아울러 법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치 눈으로 직접 보듯이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마치 존안(尊顔)을 뵌 것 같으니, 이 기쁜 마음은 필묵으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계절 따라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습니다만,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 그곳에서 돌아온 사신 편에 정법장 대법사(正法藏大法師)119)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꺾이고 쪼개지는 듯하였습니다.
아, 참으로 고통의 바다[苦海]에 배가 침몰한 듯, 천인(天人)의 눈을 잃은 듯합니다. 천화(遷化)의 통한이 어찌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정법장께서는 일찍부터 경사스런 기쁨을 심으시어 오랜 겁 동안 공(功)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깊이 화합하는[沖和] 바탕이 뛰어나고 영걸(英傑)의 웅장한 재주[雄才]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 덕은 성천(聖天)을 이었고 그 빛남은 용맹(龍猛)120)을 계승했으며, 아울러 지혜의 등불을 거듭 붙여 다시 법당(法幢)을 세웠습니다.
또한 사교(邪敎)의 산에서 사교의 불길을 없애버리고
바다가 뒤집혀[倒海] 넘쳐흐르는 물길을 막아, 피곤에 지친 사람들을 보배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미혹된 중생에게 대승을 보이셨습니다. 넓고도 넓음이여, 높고도 높음이여. 실로 법문(法門)의 인재였습니다.
또 3승(三乘)과 반만(半滿)121)의 가르침과 이도(異道)들의 단상(斷常)122)의 글을 마음으로 이해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글은 구절구절이 분명하였으나 극히 부드럽고 맑았으며, 이치는 숨은 맛이 있으나 반드시 뚜렷하고 분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외의 모든 사람들을 다 귀의시켜 인도의 종사(宗師)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다 정성을 다해 후진을 선도하는 일에는 밤이건 낮이건 지칠 줄을 몰랐으며, 길거리에 술항아리를 두고 지나는 사람마다 스스로의 양에 맞게 마시도록 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장은 옛날에 도를 물으러 찾아가서 친견을 하였고 아울러 가르침까지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비록 우둔하다고는 하나 쑥이 마(麻)를 의지하여 곧게 자라듯이 저 또한 그렇게 자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 부촉하시던 말씀이 더욱 마음에 사무칩니다. 은근히 들려주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바야흐로 미수(眉壽)를 보전하시어 불법을 드날리기를 바랐는데, 어찌 문득 하루아침에 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영원히 가버린 그 추억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픔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법사께서는 일찍이 정 법사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당실(堂室)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니 그 그리운 마음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유위(有爲)의 법123)일 따름인 것을 말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 잘 헤아려 슬픔을 누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옛날에 부처님[大覺]124)께서 열반에 드시자 가섭(迦葉)125)이 그 홍업(洪業)을 이어서 선양하였고, 상나(商那)126) 화상이 천화(遷化)하시자 우바국다(優婆鞠多)가 그 훌륭한 뜻을 밝혔습니다.
이제 정법장께서 입적[歸眞]하셨으니 법사께서 그 분의 일을 이어서 맡으셔야 할 것입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법사의 맑은 담론과 오묘한 설법이 사해(四海)에 언제나 두루 흘러 나가고, 복과 지혜의 장엄함이 5산(山)127)과 더불어 영원하시기를 빕니다.
현장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경론 가운데 이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 대소 30여 부를 번역하였습니다. 『구사(俱舍)』128)와 『순정리(順正理)』129)는 현재 번역이 다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금년에는 반드시 끝날 것 같습니다.
지금 대당(大唐)의 천자(天子)께서는 옥체가 두루 편안하시고 나라도 다 편안합니다. 천자께서는 게다가 전륜성왕(轉輪聖王)과 같은 자비로써 법왕(法王)의 교화를 펴시고, 번역된 경론에는 모두 신령한 문체로 서문을 지어주셨습니다. 또 유사(有司)에게
경론을 필사하게 하여 국내에 널리 유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까지도 역시 이들 경론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가 비록 불교의 기운이 쇠미한 나라에 살고 있으나, 법의 가르침[法敎]은 밝게 빛나서 화기(和氣)가 융성하니, 이 역시 실라벌(室羅筏)130)의 서다림(誓多林)131)에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전에 신도하(信度河)를 건너다가 경전 가운데 일부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 목록을 지금 이 편지 뒤에 첨부하였으니, 인편이 있으시면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작은 물건을 공양하오니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길이 멀어 많이 보내지 못하니 적다고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현장은 머리 숙여 인사를 올립니다[和南].”
또 혜천(慧天) 법사에게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냈다.
“대당국의 필추 현장은, 삼가 이 글을 마하보리사의 삼장 혜천 법사 족하(足下)에 보냅니다. 이별한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그저 그리워 발돋움 하는 마음만 깊어갈 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 그리운 정을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곳 필추 법장이 와서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 더없이 기쁩니다. 그리고 흰 모직[白氈] 2장과 찬송(讚頌) 1협(夾)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깊은 마음에 감사드리지만, 과덕(寡德)한 사람이라 받을 자격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그저 송구스럽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계절 따라 날씨는 차츰 온화해지고 있습니다만, 소식을 받은 이후의 법체는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마음은 백가(百家)의 논(論)에 융합하시고 생각은 9부(部)132)의 경전에 두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정법(正法)의 깃발[幢]을 세워 종지에 귀의[歸宗]하는 사람을 인도하시고, 승리의 북을 울리어 외도의 무리를 꺾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왕후(王侯) 앞에 당당하게 군림하시고 영웅호걸의 위에서 제압하여 누르시는 기쁨이 아주 크시리라 봅니다.
현장은 평범하고 용렬한데다 이미 기력마저 쇠퇴하였는데도, 아직 덕을 생각하고 인(仁)을 흠모하느라 그저 피로만 더욱 쌓일 뿐입니다.
옛날 제가 여행을 할 때에 그곳에서 법사의 빛나는 모습을 친견하였고, 곡녀성(曲女城) 법회 때에는 또 직접 논(論)을 나누었습니다. 제왕(諸王)과 백천의 도중(徒衆)들 앞에서 그 논의의 깊고 얕음을 결정할 때에, 저는 대승의 종지(宗旨)를 세웠고 법사께서는 소승의 종지를 수립했었습니다.
담론이 오가는 사이 언성을 높인 일이 없지 않았으나, 이는 인정(人情)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정리(正理)만을 밝히기 위해 힘썼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설사 서로 논쟁이 있었다 하나
그 자리가 끝난 뒤면 밝고 환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오히려 전갈을 주시면서 법사께서 오히려 감사와 뉘우침[謝悔]의 말씀을 하시니, 생각하는 마음이 이 얼마나 두터운지요?
법사께서는 학문이 풍부하고 문장도 맑으며 지조(志操)는 굳고 원대하시어, 아뇩달수(阿耨達水)로도 그 학문의 물결을 비교할 수 없고 정말니주(淨末尼珠)133)도 그 밝고 정결한 인품을 비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법사는 후진의 사표(師表)로서 높은 지위에 계십니다. 바라건대 좋은 규범을 더욱 북돋아서 정법(正法)을 현양하십시오.
지극한 이치를 갖추고 언어의 극치에 이르는 것으로 대승을 능가할 것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 법사께서는 깊은 믿음을 내지 않아, 이른 바 양이나 사슴처럼 사소한[羊鹿] 소승에 탐닉하다가 저 큰 흰소[白牛]134)인 대승을 버리게 되고, 수정(水精)135)만을 아끼느라 파지보(頗胝寶)136)를 버리시는 것이 그저 한이 될 따름입니다. 훌륭하신 대덕께서 어찌하여 이러한 미혹에 머물러 계시는지요?
게다가 우리 무상한 몸뚱이는 재촉하며 잠깐을 머무를 뿐, 지키기 어렵습니다. 부디 빨리 크게 발심(發心)하시고 정견(正見)을 장엄하시어 임종 때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인도로 돌아가는 사람 편에 삼가 이 편지를 전하며 아울러 작은 선물을 보냅니다. 소식을 보내주신 후의에 보답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합니다만, 저의 깊은 마음을 다 전하기에는 미진합니다. 원컨대 헤아려주십시오.
그리고 전에 제가 귀국할 때에 신도하(信渡河)를 건너면서 경전의 일부를 잃었습니다. 그 경전의 서명 목록은 지금 별첨하는 목록과 같으니 부디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머지 자세한 말은 생략합니다. 필추 현장이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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