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62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8권

by Kay/케이 2023. 6. 2.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8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8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8. 영휘 6년 여름 6월 『이문론(理門論)』1)의 번역을 마친 때부터 현경(顯慶) 원년 봄 3월 백관(百官)이 임금이 지은 사비(寺碑)를 보고 감사드리는 데까지

영휘 6년(665) 여름 5월 경오(庚午)에, 법사는 경전을 바로잡아 번역[正譯]하는 여가에 또 『이문론(異門論)』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먼저 홍법사(弘法寺)에서 『인명론(因明論)』을 번역했었다.
이 두 논은 각각 1권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는 입(立)과 파(破)의 규칙[方軌]을 분명히 하고, 사유와 논증의 방법[比量]2)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역경승(譯經僧)들은 서로 다투어 이 경전에 주소(註疏)를 지었다.
때마침 역경승 서현(栖玄)이 그 논을 상약봉어(尙藥奉御)3) 여재(呂才)에게 보였고, 여재는 다시 그 글을 발전시키고 그 장단점을 지적하여 「인명주해입파의도(因明註解立破義圖)」를 지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기로는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일소일식(一消一息)은 천지(天地)의 의(儀)를 범위로 한다고 하였다. 효획(爻畫)의 기(紀)가 변화하여 통달[變化通達]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히 위대하다. 그러나 그 이치[理]는 나라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고, 사(事)도 역시 아직 나라 안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혼원(渾元)4)은 아무리 추측해도 알 수 없고 음양(陰陽)은 아무리 궁구(窮究)하여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니 어찌 「상전(象傳)」과 「계사전(繫辭傳)」의 표(表)가 8정도(正道)의 문을 열고, 형기(形器)를 앞세워 2지(智)5)의 교(敎)를 더욱 펼친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교만이 능히 공(空)과 유(有)를 돌려서 서로 비추고 진(眞)과 속(俗)을 서로 같게 하며, 6도(度)의 배를 애욕(愛欲)의 강에 띄워 중생을 제도하고 3거(車)6)로써 불타는 집[火宅]에서 노는 아이를 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래[法王]의 법력은 뭇 중생을 초월하여 자재(自在)하며, 스스로 깨달은 각인(覺人)은 뭇 마구니를 꺾고 홀로 깨칠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운(業運)이 열릴 때는 우렛소리가 진동하고 번개가 번쩍하지만, 교화의 연(緣)이 끝나면 불도 또한 꺼지고 땔감마저 떨어져 버린다.

그 응하는 자취[應迹]를 보면 마치 가고 옴이 있는 것 같으나, 이 진실하게 항상 머무는 진상(眞常)7)을 살필 것 같으면 본래 생(生)하는 것도 주(住)하는 것도 없다. 오직 널리 제도[弘濟]하는 도가 있기에 인연이 있으면 이에 응하고, 천조(天祚)의 밝은 덕[明德]이 있기에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신광(神光)에 의하여 문득 지난날의 상서(祥瑞)를 보고, 정토(淨土)에 귀의할 날이 있기에 함께 이 날을 찬탄하는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당(唐) 나라 황제께서는 천하에 군림하여, 금륜(金輪)을 굴리면서 사방에 임하고 선극(璿極)을 잡아서 만방(萬方)을 평정하였다. 부처님의 밝은 햇볕[慧日]을 6천(天)8)에 빛내고 부처님 법의 구름[法雲]을 10지(地)에 피워 올려, 서쪽으로는 고비사막[流沙]9)을 넘어 마침내 오묘하고 즐거운[妙樂] 땅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로 뻗어 나아가 즐겁고 기쁜 도읍을 점령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소리[聲敎]10)는 끝없이 떨쳐나가고 수레 가득한 경전[車書]은 빠짐없이 유포되었다.
백억(百億)이나 되는 승려들은 이미 모두 녹봉을 나누어 받았으니 삼천법계(三千法界)가 모두 황제 폐하의 다스림[皇風]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므로 5인도(印度)와 같은 변경도 문명의 땅으로 만들고, 18베다[韋陀]11)의 범문(梵文)을 비부(秘府)에서 번역하게 되었다.
여기 이 삼장 현장 법사라는 사람은 오늘날에 능인(能仁)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총명과 지혜가 일찍부터 갖추어진데다 해박한 독서와 배움까지 더해졌으며, 덕행이 순수하고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참으로 삼보(三寶)의 대들보[棟梁]가 되며 4중(衆)12)의 강기(綱紀)가 된다 하겠다.
법사는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이 동쪽으로 들어온 지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사(邪)와 정(正)이 뒤섞여서 물과 젖[水乳]13)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걱정해 왔다. 만약 인도[迦維]14)에 가서 실상(實相)을 상고해 보고 마갈다국(摩竭陀國)에 가서 경전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로 된 장경을 완성하여 구극(究極)의 종지(宗旨)를 삼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천하가 태평하고 4해(海)의 파도가 고요해졌기에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사막을 건너고 총령(蔥嶺15))을 넘을 수 있었다. 여행길은 남해(南海)를 거치지 않고 오랑캐 나라들 사이를 지나 직행하였다. 그러나 두형(杜衡)을 몸에 지니고 간다고 해서 먼 길이 어찌 가깝고 쉬워지겠는가.
이리하여 서역의 산하를 샅샅이 누비고
동인도의 항하(恒河)를 건너서 취산(鷲山)16)에서 불경을 모으고 학수(鶴樹)17)에서 부처님의 경문[金文]을 엿볼 수 있었다.
법사가 경유한 나라는 백여 개의 도읍이 되며 수집한 경론은 7백 부 가까이 되었다. 그런 다음 역전(驛傳)을 이용해서 장안으로 돌아왔고, 천자를 배알할 기회를 얻어 종지(宗旨)의 극치를 선양했던 것이다.
이 『인명론』은 바로 삼장법사가 당시 수집한 범본(梵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론[理]으로는 3승(乘)을 포괄했고 사리[事]로는 백법(百法)을 갖추고 있으며, 공(空)과 유(有)의 기미를 끝까지 연구하여 내외의 종지를 발휘하고 있다. 비록 말은 요약되었으나 이치는 넓고, 문장은 짧으나 뜻은 명료하다. 그러나 이를 배우려는 자가 지금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고 이를 연구하는 자가 여러 해가 되어도 그 근원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논은 묘한 이치를 알 수 있는 입문서가 되므로 먼저 번역하기로 하였다. 신태(神泰) 법사와 정매(靖邁) 법사와 명각(明覺) 법사 등은 모두 두뇌가 명석하고 지업(志業)을 갖춘 사람들이며 여러 경전을 자세히 공부하여 깨친 바가 많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모두 각기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현장 법사의 법연(法筵)에 참석하여 마침내 가르침을 받고 뜻을 연구하게 되었다.
삼장법사가 법요(法要)를 자세히 강술하여 깊이 있는 설명을 마치자, 신태 법사 등은 각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의소(義疏)를 만들고 해설을 달았다. 그리하여 이제 곧 유통할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서현(棲玄) 법사는 나의 어릴 적 친구이다. 그는 옛날에 숭악(嵩岳)에 은거하면서 일찍이 산문(山門)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상경(上京)하여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마음은 은거하던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하여 혼자서 30여 년 간 성심성의를 다해 닦고 익혀서 난해난입(難解難入)의 2난(難)18)을 다 해결했다. 또 서현 법사는 절개가 굳고 마음이 깨끗하며 계행(戒行)은 서릿발 같이 엄하고 학문은 이미 1승(乘)에 통달했으며, 몸은 소승의 십송(十誦)19)의 계율에 구애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의 청렴한 고행(苦行)을 보았지만 때때로
방편을 써서 꺾어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내외(內外)가 같지 않고 행하는 것도 각기 달랐기 때문에, 농담처럼 말이 오가는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법사는 조용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6경(經)20)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서 깊은 뜻을 찾으며, 음양(陰陽)이 잘 풀리거나 막히는 것을 헤아리고 음악[律呂]의 사소한 기미를 살필 줄도 안다.
그리고 듣자하니 평생 태현(太玄)21)을 본 적이 없었지만 한 번 듣고는 바로 이해하였고, 상희(象戱)22)라고는 본 적도 없으면서도 시험 삼아 10일을 만져보고는 다 터득했다고 한다.
그대가 이러한 유한(有限)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무슨 일을 만나면 즉시 천착하려 든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그대가 하던 다른 일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힘써 공부하여 찾는다 해도 그대의 마음이 미치지는 못할 듯한데, 어떻게 지금 불전을 번역하여 견식(見識)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서현 법사는 그 뒤로 『인명(因明)』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뜻이 깊어져서 먼저 한 통을 옮겨 썼다고 하기에, 가서 보려고 하였더니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이 논은 대단히 어려워서 깊고 오묘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아무리 총명하고 박식한 사람이 있다 해도 이 논을 들으면 대부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 이 책을 이해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내외를 다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논은 한여름에 벌써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또 시험을 당하는 것 같은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억지로 한 번 열람해 보면서, 온 정성을 다해 깊이 뜻을 탐구하고 비량(比量)23)에 의해서 자세한 뜻을 탐구해 보았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반복하면서 겨우 조금 종지(宗旨)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다시 여러 법사, 즉 세 분의 의소(義疏)를 빌려와서 다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여러 법사들이 서술한 내용을 보면, 내용은 비록 풍부하고 문리(文理)도 잘 통했지만 그 견해는 들쭉날쭉하여 서로 모순되는 말이 많았다.
의리(義理)에 대해서라면 이미 삼장법사에게도 똑같이 배웠는데, 어째서 모두 다른 논리를 전개하는 것인가. 다만 이런 허물이 나라 안[蕭牆]24)의 화근(禍根)의 발단이 되어 외부로부터 억측의 모멸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부처님도 1음(音)25)으로 연설하셨으나 역시 부류에 따라 각각의 해설을 내리는 것을 허여하셨는데, 어째서 유독 속인들만 가려내어
중생의 본보기로 삼지 않았는가?
나는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 시간에 이 주석서를 조금씩 만들었다.
세 법사들의 말씀 가운데 좋은 것은 취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논파하여, 상ㆍ중ㆍ하 세 권으로 엮어서 『입파주해(立破注解)』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중에서 검은 먹으로 쓴 것은 이 논의 본문에 해당하고, 붉은 색으로 쓴 주(注)는 세 법사들의 옛 설[舊說]이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 검은 색으로 묵서(墨書)하여 주를 단 것이 바로 내가 새로 쓴 부분이다.
이전에 법사들이 결정했던 주를 사용한 부분이 무려 40여 조(條)이며, 회(鄶) 이하부터는 아직 갖추어 기록하지 못했다. 문장의 이치[文理]가 숨어 있어 알기 어려운 것은 이에 의도(義圖)를 만들어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 별도로 사방 1장(丈)이 되는 그림을 그려서 나의 최근 주석에 대한 논을 달았다.
이미 논에 대해 달리 해석하는 사람도 없고 또 도(道)를 듣거나 말하려는 사람도 없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26)의 경지는 진실로 내가 넘볼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배움[學]을 거듭 청할 수[再請] 없는 것이 전등(傳燈)이라 했으니, 하나를 듣고 열을 알아야 그것이 그 경지에 근접하는 것이리라. 하물며 평생토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갑자기 보고서 당장 그 세부까지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스승의 도움조차 없이 혼자서 주해를 하였으니 어찌 오류가 없겠는가?
내가 들으니 설산(雪山)의 야차(夜叉)는 생멸법(生滅法)27)을 설했고, 산과 들의 사나운 짐승은 미증유(未曾有)28)를 찬탄했다고 한다.
진실로 말이 이치에 맞으면 오히려 하늘과 선인(仙人)의 귀의함과 공경[歸敬]을 얻는다 했는데, 내가 주해한 것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법사들이 만약 나의 거칠고 미루(微陋)함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어구(語句)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한다면, 좋은 것을 택해서 따라야 하며 진(眞)과 속(俗)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여래의 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논을 널리 펴려는 자가 많았으나 어째서 항상 그대로였을까. 그것은 필시 마음속에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뜻에 대하여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 양단(兩端)에 대해서는 삼장법사에게 질문하려고 한다.”
가을 7월 기사(己巳)에, 역경(譯經) 사문 혜립(慧立)은
이 말을 듣고 여재를 불쌍히 여겨 편지를 좌복야 연국공(左僕射燕國公) 우지녕(于志寧)에게 보내어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이렇게 논했다.
“내가 듣기로는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세우실 때에, 말씀[文言]이 오묘하고 멀게 하였고 뜻[義旨]은 유현하고 깊게 하였으니, 광대하기는 하늘[天空]과 같고 넓기는 바다[大海]와도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여(眞如)의 성(性)과 상(相)을 논할 때에는 10지(地)의 지위에 있다 해도 오히려 미혹할 수 있고, 작은 풀 한 포기의 인연을 설할 때에는 무생(無生)29)의 자리에 처해 있다 해도 역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물며 8사(邪)30)의 그물에 얽혀서 네 가지 전도[四倒]31)된 견해의 흐름에 빠져 있는 사람이야 어련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종인(宗因)을 탐구하여 그 같고 다름을 분변하려는 사람에게 어찌 망단(妄斷)이 없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대자은사의 번역 법사 현장은 어린 나이에 벌써 지혜를 심어서 지력(智力)이 일찍 숙성한 사람입니다. 행(行)은 옥과도 같이 맑고 지조는 솔이나 버들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마침내 혼자 몸으로 인도까지 가서 미묘한 말씀[微言]을 찾았습니다. 삼장을 가슴에 담고 네 『아함경(阿含經)』을 파악하였으며, 맑은 정신을 선철(先哲)에게 이어 받아서 오늘날 유법(遺法)을 선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말법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이며 승문(僧門)의 귀감이 되는 사람입니다.
번역된 성교(聖敎)가 이미 3백여 축(軸)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인명론(因明論)』이라고 하는 소론(小論)이 있습니다. 이 책은 논난(論難)의 귀결을 밝히고 사도를 꺾는 방법을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불문(佛門)의 요체가 되는 오묘한 진리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이 역시 쉽게 알 수 있는 이치는 아닙니다.
요사이 들으니, 상약봉어(尙藥奉御)는 여씨가 속인의 자격으로 여러 법사의 설을 훔쳐다가 「인명도(因明圖)」를 만들어서 불가의 종인(宗因)의 의미[義]를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자세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단(異端)을 일으키기 좋아하며, 구차하게 이름을 낼 욕심으로 망령되이 천착하고 있습니다.
여러 대덕들의 정설(正說)을 배척하고 자기만 잘났다는 편견 된 마음으로, 제멋대로 공경(公卿)들 앞에서 소개하고 자랑하고 길거리에서 마구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는 낯 두껍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헛수고를 지치지도 않고 하고 있습니다. 2년이 넘어 가도록 그는 아직 그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약봉어는 속세의 일을 조금 알고 있으면 진종(眞宗)32)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쥐새끼가 부뚜막의
가마솥을 건너고 나서 곤륜산(崑崙山)도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거미가 가시나무에 거미줄을 얽어 집을 짓고 나서 역시 부상(扶桑)33)에 그물을 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제 분수를 모르는 것으로 본다면야 이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제가 듣기로는 큰 소리[大音]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대단한 언변[大辯]일수록 오히려 눌변(訥辯)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마힐[淨名]은 비사리성(毗舍利城)에서의 법회 때 입을 다물고 있었고, 공자는 그렇게 덕이 높았는데도 향리(鄕里)에서는 몸가짐을 삼갔던 것입니다. 또 숙탁(叔度)34)에 대한 수없이 많은 칭찬과 원례(元禮)35)가 갖고 있던 명예도 역시 스스로 자기 자랑을 하여 덕망 있는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혜립의 글이 전해진 뒤로는 마침내 잠잠해졌다.
그 해 겨울 10월 정유(丁酉)에, 태상박사(太常博士)36) 유선(柳宣)은 그 일이 잠잠해졌다는 말을 듣고, 곧 예경하여 귀의하는[歸敬]의 게송37)를 지어서 경전을 번역하는 승려들에게 보냈다.

모든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니
신령한 위엄[神威]의 가호가 있으소서.
이렇듯 정성스럽게 청(請)을 올리니
망령되다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어둠 속에 잠겨 살면서
부처님께 귀의하는 일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래도록 애욕의 바다에 빠져 있으나
헤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릇된 견해에 집착하여 자꾸 다투는 것은
어울리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현묘한 이치는 집착을 떠나야 얻을 수 있고
이치는 끊어야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아만(我慢)으로 인해 8정도(正道)를 어기고
부질없이 백비(百非)38)에 들었습니다.

취하고 버리는 것[取捨]을 같다고 말하면서
더럽고 깨끗함을 혼동했습니다.
금을 가려내려면 자갈은 버려야 하며
옥은 닦아야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능인(能仁)을 자세히 거울삼아서
생각을 집중하여 연구하겠습니다.
진실로 대도(大道)와 계합한다면
누가 감히 헐뜯겠습니까?

아, 높고 높은 덕이
아, 어찌 쇠퇴하겠습니까?
오직 바라는 것은 귀담아 들으시어
그것을 발휘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가엾이 여기시어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귀위하여 예경하며 아룁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왕궁에 태어나시어 사라쌍수(沙羅雙樹)39) 아래서 열반하시자, 은미한 말씀[微言]은 널리 퍼지고 지극히 높은 이치 역시 넓게 퍼져갔습니다.
국토(國土)는 교화의 은혜를 입고 만물은 생기(生氣)를 얻어 소생하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불수(佛樹)가 서방에서 그늘을 드리우자 깨달음의
그림자는 동방에 미쳐서, 한위(漢魏)에서 시작된 불교의 물줄기를 부공손(符公孫)과 요흥(姚興) 등에 이르러 그 풍채가 더욱 성대해졌습니다.
이때부터 유명한 승려가 간간히 나타나기도 하고 현달(賢達)한 사람이 이어서 나타나기도 하여, 혜일(慧日)이 길게 걸렸고 법륜(法輪)은 항상 굴러갔습니다.
불교를 개척한 공은 처음에는 가섭마등(迦葉摩騰)40)과 법현(法顯)에 의해 드러났고, 불교를 널리 천명한 힘은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도안(道安)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외에도 단도개(單道開)41)는 멀리 나부산(羅浮山)에까지 갔으며, 불도징(佛圖澄)은 조위(趙魏) 때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론이 정밀하지도 않았고 자세하지도 않아서, 공(空)과 유(有)로써 대승(大乘)을 말하고 고(苦)와 집(集)으로 4제(諦)42)를 논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글을 차용하여 유(有)를 밝혔다 해도 끝내는 유위법(有爲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말을 떠나 도를 밝혀야 바야흐로 응적(凝寂)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현(玄)을 가지고 현의 뜻을 구하되, 이 현(玄) 자체는 현의 이치가 아니므로 현으로 인해 현을 잊음으로써만 현의 뜻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뜻으로 유도(幽途)를 깊이 이해하려면[冥會] 사리(事理)로는 언어를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중생을 교화하여 응적에 돌아가게 하려면 결국 방편[筌蹄]43)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말이 있게 되면 시비가 벌떼처럼 일어나서, 마치 전쟁에서 창과 방패가 서로 다투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진 자는 숨을 죽이지만 이긴 자는 떠들어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마(魔)를 항복받고 여러 외도(外道)들을 제압하려면, 스스로가 뛰어난 변재(辯才)와 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이긴 듯이 떠들어댈 때에 우리들은 그저 치욕만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오로지 도에 맞게 하고 한 뜻으로 받들어 지녀서, 법당(法幢)을 건립하고 법고(法鼓)를 울려야 합니다. 깃발과 법고[旗鼓]가 이미 바로 자리를 잡고 나면, 적대하던 자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법륜(法輪)이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모든 불복(不伏)하던 자들도 두려워하여 마치 바람 앞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될 것입니다.
논란에 대항하여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고 삼보를 널리 천명해 나가려면 이런 처방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상약봉어 여씨[呂]는 공유(空有)44)의 문에 들어가서 바른 견해[正見]45)의 길을 달리고, 견문은 옛날의 현인과 같으며 통찰(洞察)하는 능력은 왕년의 철인(哲人)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재주는 달변이고 그 뜻은 분명하며, 그 덕은 참되고 그 행은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8해탈(解脫)46)의 흐름에 목욕했으며 또 7각분(覺分)47)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가 영향을 받아 가르침을 이룬 것은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암라수원(菴羅樹園)을 찾아간 것과 마찬가지이고, 도를 들으면 반드시 구하는 것은 파륜(波崙)48)이 무갈(無竭)49)에게
귀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의도는 불교를 널리 선양하고 인명(因明)의 소(疏)를 논파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반드시 그 장점을 취해야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이치로써 그 단점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승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모두들 이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여기며, 조야(朝野)에서도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여군(呂君)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들 병 속에 들어 있는 물을 그대로 쏟아 옮겨서[瀉甁], 의문의 근원을 씻어내고 의심의 덩어리를 녹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태사령(太史令) 이순풍(李淳風)이라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은 바른 길[正路]을 생각하고 있으며 행(行)은 귀의(歸依)한 자입니다. 참된 지혜로 대각(大覺)50)을 삼고, 몸은 무위(無爲)로써 법체(法體)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태양은 하늘에서 빛나서 상현(上玄)51)의 운용(運用)을 돕고, 현명한 승려는 법을 천명하여 참으로 천사(天師)의 묘도(妙道)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믿고 받아들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노란 나뭇잎을 금(金)이라 우기고 닭을 봉황이라 말하며, 남곽(南郭) 같은 복성(複姓)을 함부 떼어서 부르거나 치수(淄水)와 승수(澠水)52)를 뒤섞여 흐르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혹 남과 다른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마음은 아닙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 열반[鶴林]하신 뒤 2천 년이 되었으니, 정법(正法)은 이미 아득히 멀어지고 이제 말법(末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현묘한 이치[玄理]는 꽉 막혀서 나타나지 않고, 깨침의 길[覺道]은 곧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현장 법사는 법계(法界)에서 두타행(頭陀行)53)을 행하며 멀리 인도[迦維]까지 갔습니다. 보리수[道樹]와 니련선하[金河]를 보고 이어 7처(處)54)에서 8회(會)의 강설을 보았습니다. 비야리성(毘耶離城)과 취봉산(鷲峯山)을 지나 몸소 인도로 들어가서 사라쌍수와 보계(寶階) 등이 진짜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사성과 단특산(檀特山)55)과 항하(恒河) 등을 두루 살폈는데 이와 같은 일들은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서역의 명승(名僧)들을 빠짐없이 다 직접 만나서 반야(般若)를 논하면서, 중국에 있을 때 의심스러웠던 뜻들을 그들에게 모두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율장[毘尼]56)을 배워서 그것을 받들어 수지하고는 버리지 않았으며, 논장[毘曇]의 명의(明義) 역시 세밀히 관찰하여 상법(常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경장[蘇妒路]도 이미 얻어서 문자로 밝혔고[聲明]57), 무상정등각[耨多羅]58)에 대해서도 의심되고 막힌 것을 다 분석하여 해결하였습니다.
불법에 대해서라면
크고 작고 간에 모두 가슴에 간직하였고, 이치[理]에 대한 것은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해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삼장(三藏)이라는 이름으로 추앙하고, 왕사성[羅衛]59)에서는 마하(摩訶)라고 부르며 다들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名)과 실(實)이 부합하니 참으로 칭송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군(呂君)은 학식이 해박하고 의리(義理)에도 정통하여 언행의 중요한 법도를 다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라니(陀羅尼)60)와 불법(佛法)에 대해서도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알고 있는 최상의 경지[生知]61)를 타고 났으며, 막히지 않는 말재주[辯才]가 있으니 어찌 쓸데없이 연구를 했겠습니까?
다만 인명(因明)의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해서 말을 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제각기 그 형상을 말하는 것과 같으며, 한 그릇 속에 담긴 밥의 색깔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여군은 이미 정리(情理)에 집착하였으니 도속이 다들 분명하게 바로잡아 주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가을 서리가 내리고 새벽 종소리[鐘鳴]62)가 가까이에서 들리며, 법운(法雲)이 이미 퍼지어 우레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다만 커다란 코끼리[龍象]63)의 발걸음을 당나귀 걸음으로는 따를 수 없는 것이, 마치 승려의 심오(深奧)한 세계를 속인들은 밟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용(龍)과 같은 법사께서 반론을 세워 의혹을 남기지 않고 모두 해석해 주신다면, 승려들도 다 모이게 될 것이고 또한 신도들도 능히 알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하찮은 뜻을 피력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의문 나는 곳이 있다면 삼장에게 재결(裁決)을 청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받아 사부대중에게 전하여 보인다면, 정도(正道)가 크게 번창할 것이며 법의 장애는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삼보(三寶)를 융성하게 하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허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다시 들추어낼 일은 아닙니다. 제자 유선(柳宣)이 올립니다.”
경자(庚子)에 역경승 명선(明璿)은 유선박사에게 답을 보내면서, 송(頌)을 지어 붙여서 그 득실(得失)을 설명했는데, 다음과 같다.

아, 빛나는 대성(大聖)의
깨달음의 씨앗 원만하게 밝아졌으니
유현(幽玄)하여도 살피지 않음이 없어
메아리 소리가 대답하는 것과 같구나.

연경(延慶)64)의 도움 없이
누가 정성스런 귀의[歸誠]를 말하는가.
우러러 훌륭하게 인도(引導)하시니
이에 미혹된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구나.

백천(百川)의 삿된 물결도
한 번에 다 삼키듯이
물(物)을 취(取)하고 버림[捨]이 적절하니
기울거나 가득 차는 일은 절대 없다네.

8사(邪)는 날카롭게 달리고
4구(句)는 이름을 다투면서
그른 것을 감추어서 옳다고 하며

무거움을 눌러서 가볍다고 하는구나.

햇살이 비추니 얼음은 녹고
구슬을 던지니 물이 맑아지며
윤상(允上)의 덕을 나타내고
도를 본받아서 바르게 산다네.

함부로 비방이나 자랑을 한다고
전해오는 영화[遺榮]를 흔들지는 못하리니
높고 높은[昂昂] 영철(令哲)이시여
많고 많은[鬱鬱] 함정(含情)65)이시여.

여러 달관(達觀)들을 기다려
이 권형(權衡)을 정하게 하소서.
삼가 망설임 끝에
이 아름다움을 말하노라.

“지난 날 망표(望表)에서 귀경게(歸敬偈)의 글을 보았다. 그 글을 보니 어찌나 위대하고 화려하게 빛나는지, 온 정성을 다해 이치를 밝혔으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슬프다. 대저 애욕(愛欲)의 바다는 하늘에 가득 넘쳐나고, 사산(邪山)은 태양에까지 닿았구나. 인아견(人我見)에 매인 자는 추락할 따름이며 거만을 부리는 자는 침륜(沈淪)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순두 가지 잘못된 견해[六十二見]66)가 무성하게 다투며 저 혼자 잘났다고 나서고, 아흔 다섯 파의 외도[九十五道]67)들은 서로 붙잡고 다투다가 돌아갈 자리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본원(本願)의 대비(大悲)로써 모든 인연을 잊고 쉬게 하셨다. 안으로는 4지(智)68)를 원만히 하고 밖으로는 여섯 가지 신통[六通]69)을 나타냈으며, 10력(力)을 휘둘러 천마(天魔)를 항복시키고 7종의 변재(辯才)70)를 발휘하여 외도(外道)를 꺾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애욕의 바다를 다 마르게 하여 3공(空)에 의해 중생[稟識]71)을 제도하고, 저 사산(邪山)72)을 없애어 초형(肖形)73)을 8정도(正道)로 인도하였다.
원인을 가리켜 결과를 보이고 근본을 돌이켜서 깨달음에 들게 했으니, 위대하도다. 비지(悲智)74)의 묘용(妙用)은 더 말할 것이 없구나.
옛날에 도수(道樹)75)가 피어오르자 그 성교(聖敎)는 백억(百億)을 덮어 가리고, 견고림[堅林]76)에서 열반에 들자 남긴 공적은 삼천세계(三千世界)에 떨쳤다.
불일(佛日)77)이 서방에서 기울어 그 여광(餘光)이 동방을 비추게 되자, 두루 어둠이 밝아오는 상서로운 기운[瑞氣]을 느끼며 후한(後漢) 시대 밤에 꾸었던 꿈[宵夢]78)의 효험이 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앞에서 지혜의 횃불을 사르자,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뒤에서 그 전통[傳燈]을 계승하였다.
그들은 경을 번역하여 법을 널리 펴고 신령하고 기이한 신통[神異]으로 시대를 구제했으며, 높은 담론으로 사교(邪敎)를 조복(調伏)시켜 선정(禪定)에 들게 하여 물정(物情)을 엄숙하게 하였다.
뚫어진 그물을 깁는 자에게 가까이 가서 교화하고 끊어진 끈을 잇는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랐으니, 나라 안팎에서 모두 그 풍교(風敎)를 흠모하고 유명(幽明) 간에 다들 교화를 도왔다.
그렇게 그 빛을 이어서 사라지지 않게 한 내력을 간략히 밝혀둔다.
생각하건대 지금 이 삼장법사는 신령함이 쌓여서 빼어난 정신으로 나타나고 문장을 머금어 법으로써 몸을 삼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교법(敎法)을 그대로 전해 받아서[甁瀉] 5승(乘)을 바라보고 있다.
성인(聖人)이 가신 지가 너무 오래되어 슬퍼하였고 전해오는 가르침에 빠진 것이 너무 많아 안타까워하였기에, 곰곰이 원만한 뜻[圓義]을 생각하면서 도(道)로써 몸을 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음과 입이 상의하고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위로하여서, 옷자락을 날리며 주장자를 짚고 근본을 탐구하고 근원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옥문관(玉門關)79)을 나가 멀리 떠돌면서 니련선하[金河]를 가리키며 한 번 쉬었다. 의문 나는 점을 인도의 사원[梵宇]에서 고찰하고 그윽한 의리를 탐구하여 은미한 뜻을 통찰하였으며, 두루 신주(神州)80)를 교화하며 진실은 드러내고 잘못은 없애버렸다. 남겨진 법전(法典)들 가운데 빠진 것을 보충하여 크게 늘리고, 방등(方等)81)의 원종(圓宗)82)에 있어서는 더욱 더 선인(先人)의 공적을 넓혀 나갔다.
밝혀 놓은 수승한 뜻[勝義]은 세상에서 으뜸이었고[環中之中], 불변의 참된 본성과 텅 빈 진여[眞性眞空]는 우주[方外之外]를 뛰어넘었다.
유취(有取)로써 취함이 있으면 진(眞)을 잃어버리고 무구(無求)에서 구함이 없으면 실(實)을 좀먹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길을 다 털어버리고 중도(中道)의 상(相)을 잊어버린다면 그 깊이를 알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깊이 중공(重空)83)에 머문다 한들 어찌 그 극(極)에 이르겠는가.
참으로 중요하고 현묘하며 지대(至大)하도다.
그것을 마음에 계합한 뒤에 이로써 법을 삼아서, 마음에 두면 법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교(敎)가 되는 것이다.
법에는 자상(自相)84)과 공상(共相)85)이 있고, 교에는 차전(遮詮)과 표전(表詮)86)이 있는데 순수한 그 뜻과 깊은 근원을 어찌 갑자기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법사는 정신을 집중하여 지혜를 사용하였고 근본을 자세히 밝혀서 그 끝을 바르게 하였으며, 불교의 현묘한 전적[玄籍]87)을 모아 빛내서 크게 심오한 불도의 관문[幽關]을 열었다. 큰 음성[希聲]을 감추고서 두드리는 크고 작은 소리에 응하였으며, 뜻을 바다[義海]처럼 넓혀서 모든 종파를 다 받아들였다.
이에 외국의 석학 대덕들과 이역(異域)의 고승들이 승복하여 도를 물으러 왔고, 쌓였던 의문점들을 가지고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참으로 이미 강물을 마시고 배[腹]를 가득 채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소리[音]를 듣고 경청한들 누가 그 원근을 알 수 있겠는가.
인명(因明)의 소도(小道)에 이르러서는 현재 미미하다 하겠으나, 이는 초학(初學)의 한 귀퉁이를 가리킨 것이고 입론(立論)의 깃발을 올린 데에 불과한 것이다.
열쇠가 감추어진 신령한 문지도리[靈樞]나 공(功)을 이룰 수 있는 묘본(妙本) 같은 것은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겠다.
상약봉어 여씨[呂]는 풍모가 뛰어나고 특출하여 일찍부터 다재다능하였으며, 여러 방면으로 두루 통달하여 어려서부터 박식함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개분(開墳)의 전적을 모두 섭렵하고 괴벽(壞壁)88)의 문장을 깊이 파고들었으니, 그 종류에 따라 그것을 키우기 위해 온갖 술수(術數)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소문이 떠들썩하게[辯囿]89) 떨치고 그 영광이 한림(翰林)에 퍼져서, 구름 속에서 머리를 내민 듯 태양 아래 앞서 소리를 지르는 듯하였다. 5행(行)이 그 필삭(筆削)을 돕고 6위(位)90)가 그의 고담(高談)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한 번 『태현(太玄)』을 보고 나면 어떤 물음에건 당장 대답을 할 수 있었고, 또 장기 두는 것을 물은 후에 그 자리에서 바로 둘 수 있었다.
참으로 진대(晋代)의 무선(茂先)91)이며 한조(漢朝)의 만청(曼倩)92)이니, 지금 이 시대에는 볼 수 없는[方今蔑如]93) 사람이다.
일찍이 여러 경륜으로 이름을 날리고 많은 공덕을 넉넉하게 쌓았으며, 대승(大乘)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일찍부터 정성과 신심을 돈독히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그 벗[友生]과 장난삼아 주고받은 대화로 인하여 갑자기 인명(因明)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스승의 도움 없이 홀로 천착(穿鑿)하여서, 모든 주소(註疏)를 비교하여 결정하고 잘못된 것을 찾아내 배척하였다. 그리고 조정(朝廷)에서 떠들썩하게 그에 대한 논의(論議)를 하면서 갑자기 말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 뜻을 살펴보면 참으로 더할 것이 없고 그 지혜를 보더라도 또한 진실로 미혹함이 없다.
이 논은 한 권으로서 한 부(部)를 이루고 있으며, 5장으로 한 권을 만들었다. 세 가지 주소[三疏]를 연구[硏機]하기를 벌써 한 해 남짓 하고서, 잘못되었다고 찾아낸 것이 사십 가지였는데 스스로 옳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였다. 스스로 옳은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옳다고 말하고, 소(疏)에는 본래 그른 것이 없었는데도 그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르다고 말하면 그름이 아니고 옳다고 말하면 옳음이 아니다. 옳다고 말하면 옳음이 아니니 이 옳음은 항상 그름[恒非]이 되고, 그르다고 말하면 그름이 아니니 그름이 아니어서 항상 옳음[恒是]이 된다. 그름이 아니어서 항상 옳음이 된다고 이것이 옳음이 되지는 않으며, 옳은 것을 옳다고 해서 항상 그름이 된다고 이 그름을 그름으로 삼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한 쪽을 빠뜨리거나 잃게 되면 미혹되고 병들게 되는 것이다.
생인(生因)과 요인(了因)94)을 보느라 한 몸[一體]에 집착하여 두 가지 뜻[二義]을 잃어버렸고, 능료(能了)와 소료(所了)에서도 한 이름[一名]에만 매달려서 두 몸[二體]에 미혹되었다. 또 종의(宗依)95)와 종체(宗體)96)에서는 종의에만 머물고 종체를 버린 것으로 종(宗)을 삼고 있다. 유체(喩體)와 유의(喩依)97)에서는
유체를 버리고 유의만으로 비유를 들고 있다.
이 두 가지 관계 때문에 망령되이 많은 의문을 일으켰고, 한 쪽으로만 극단적으로 헤매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7난(難)98)을 낳게 된 것이다. 단지 2론(論)만을 연구하고 자기 마음만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구(文句)는 아래 위가 막히고 자음(字音)도 평성(平聲)과 거성(去聲)이 틀려 있다. 또 수론(數論)99)을 성론(聲論)100)이라 하고 생성(生城)을 멸성(滅城)이라 하였으니, 어찌 이합(離合)의 종인(宗因)에만 어긋날 뿐이겠는가. 대체적으로 모두 전후가 뒤바뀌어 있다.
그리고 잘못 전해진 속어와 풍속으로 범본(梵本)의 전음(囀音)을 헤아려보았기 때문에, 설사 일곱 가지 언어[七種]101)를 잘 알아서 취한다 해도 단지 그것은 하나같이 상반(相反)된 말일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저 제7의 소목(所目)이 아니라 곧 제8의 부르는 소리[第八呼聲]102)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뒤섞이고 잘못된 것을 어떻게 따르겠는가. 또 승론(勝論)을 볼 것 같으면, 항상 극미(極微)를 세우고 있다. 수(數)는 무궁하지만 체(體)는 오직 극소(極小)일 뿐이다. 뒤에 가서 차츰 화합하여 여러 자미(子微)를 낳았지만 수(數)에 있어서는 상미(常微)보다 배나 감소되었고, 체(體)는 부모(父母)보다 배나 증가되었다. 그래서 끝내는 체가 대천(大千)에 두루 하지만 그 끝나는 데를 궁구해 보면 수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여공(呂公)이 인용한 『주역』의 「계사(繫詞)」에 보면 ‘태극(太極)은 양의(兩儀)103)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像)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으며, 팔괘는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여공의 말과는 표현은 다르나 그 뜻은 같다.
여기서 생각해보면 태극은 무형(無形)이면서도 유상(有象)을 낳는다. 원래 하나의 기(氣)에 의해서 마침내 만물을 이루게 되는데, 어째서 다(多)로써 하나를 낳고 하나를 예로 하여 다(多)를 낳을 수 있겠는가.
비슷한 말을 인용하여 박식함을 나타내고자 했으나 뜻이 어그러져 버렸으니 다시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대례(大例)와 생의(生義)와 사동(似同) 같은 것을 끌어다가 억지로 해석하려 하니 사견(邪見)과 같아질 뿐이며, 깊이 연루된 것을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어쩌자고 이렇게 구차스럽게 한 때의 명예를 바라서 정(正)을 어지럽혀 사(邪)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원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무릇 이 문란한 것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는가. 특히 자신의 경솔함 때문에 이런 낭패를 가져온 것이다.
뿌리가 이미 바르지 못하면 줄기와 잎도 비뚤어지는 법이다. 잘못된 것을 쫓다가 의심을 낳게 되고, 의심스러운 것을 따르다 어려움을 늘어놓게 된 것이다. 형체가 굽었는데 그림자를 바르게 하려면, 그것이
과연 될 수 있겠는가.
시험 삼아 두세 가지의 예를 들었으니, 대의(大意)를 자세히 밝히기를 바란다. 허물이 깊고 마음이 번거로우므로 별서와 같이 답장한다.
보아하니 여공(呂公)이 저리도 통달하고 밝으니 설사 맹랑(孟浪)104)이라 한들 어찌 이에 미치겠는가.
진(眞)과 속(俗)을 밝게 나타내 보이니, 신분의 고하[雲泥]105)가 어렵고 쉬운 것과 초(楚) 나라와 월(越)106) 나라가 다른 것이 이로 인하여 분명히 드러났다.
불교의 넓고 아득함과 정법(正法)의 심오함은 예컨대 큰 화로에 눈을 움켜쥐고 달려드는 것과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발해(渤澥)107)를 아교로 만든 배로 어찌 건널 수 있겠는가.
태사령(太史令) 이군(李君)은 마음이 심오하고 가슴에 기약한 바가 원대한 사람이다. 오롯하게 9수(數)108)에 정통하고 6효(爻)를 다 섭렵한 사람으로, 널리 분도(墳圖)를 고찰하여 운물(雲物)109)을 보고 점을 친다. 위굉(衛宏)110)이 법도를 잃음을 가엾게 여기고 비조(裨灶)111)가 완전하지 못함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신(神)에 머물지 않고 실(實)을 바라보며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여공(呂公)의 나머지 논의[餘論]에 속하여 다시 간언(間言)을 하였으니, 실제(實際)로써 대각(大覺)의 현묘한 몸[玄軀]으로 삼은 것이며 무위(無爲)로써 곧 조어(調御)의 법체(法體)로 삼은 것이다. 이는 곧 참되게 훈수(薰修)하면 깨달음의 몫이 있게 되는 것이니, 자연을 따르면 끝내는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참으로 놀랍다. 말은 비슷하나 뜻은 다르고 사(詞)는 가까우나 지(旨)는 멀구나. 천사(天師)의 묘도(妙道)를 다시 기약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또 천사(天師) 구씨(寇氏)112)는 최호(崔皓)113)를 특별히 천거하는 바람에 함께 허물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니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비록 말로는 치수(淄水)와 승수(澠水)를 섞이지 않게 하려고 한다지만, 이미 스스로 금두(金鋀)에 빠지고 말았구나.
생각건대 공(公)의 빼어난 그릇[逸宇]은 허공처럼 넓고 배움은 분소(墳素)114)를 다했으며, 인의(仁義)로써 몸을 보호하고 추기(樞機)로써 사물에 응한다.
참으로 엄숙하고도 도량이 넓은 사람이구나.
굳은 절개는 우뚝 솟아 구름을 찌를 듯하고 맑고 윤택함[淸潤]은 담담하게 땅을 진압한다. 아름다운 이름은 문원(文苑)115)에 오르고 직책은 유림(儒林)에 두었구나. 9주(疇)116)의 종(宗)을 모으고 2대(戴)117)의 설(說)을 상세히 연구하여, 경례(經禮) 3백과 곡례(曲禮) 3천118)에 이르러서는 의(義)는 손바닥 보듯 명백하고 사(事)는 엎드려 줍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준조(尊俎)는 모두 그가 표준으로 삼는 것을 받들었고, 법도(法度)는 반드시 그가 첨삭[雌黃]119)을 가하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경(詩經)』 「상서(相鼠)」의 시처럼 무례(無禮)한 소리를 민간(民間)에서 끊어버리고, 어려(魚麗)120)의 아름다운 노래를 조정에 가득 차게 하였다.
생각하면 명성[名]과
실재[實]가 다 너무나 선(善)하고 또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고 정성스럽고 공경한다는 무거운 이름[重名]은 스스로 타고 나서 일찍 완성되었으며, 넓히고 보호하려는 마음은 참으로 본래부터 쌓여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끄러운 논의에 대해서 마음에 병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능히 칼을 내던지고 입을 다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대의(大義)를 빛내려면, 그 재주가 내외(內外)를 겸하여 오의(奧義)를 비추고 만기(萬幾)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청탁(淸濁)을 밝혀내어 속(俗)을 건지고 진(眞)을 세우는 사람이 되겠는가.
옛날에 구마라집의 문하에는 그 도(道)를 따르는 자가 3천이나 되었다는데, 지금 이 모인 사람들 중에는 덕(德)을 같이 하는 자가 수없이 많다. 빈도(貧道)처럼 외람되고 용렬한 사람 역시 함부로 말석에 끼어 앉았으니, 비록 아침이면 공부를 배울 수 있어[朝聞] 기쁘지만 마침내 저녁이 되어 배우지 못할까 두려울[夕惕] 뿐이다.
그가 지은 소(疏)를 자세히 살피니, 3덕(德)121)을 5승(乘)에까지 꿰뚫어 통달하게 했으니, 깊은 담장 안을 엿보기 어렵고 말씀의 높은 봉우리[詞峰]는 우러러보기 어렵구나.
일찍이 상양(商羊)122) 새가 비가 올 때면 기뻐 춤을 추었듯이 비가 흠뻑 내려서 반드시 적실 것이지만, 말씀이 우레처럼[詞雷] 우렁차고 빠르게 나오니 귀를 가리고 의논할 겨를이 없을까 두렵다.
고인(古人)이 말했다.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족히 날개를 접을 수 있는데 어째서 번거롭게 등림(鄧林)123) 같은 큰 숲에 오르려 하며, 웅덩이에 괸 물로도 실컷 비늘을 담글 수 있는데 어째서 크고 푸른 바다[滄海]를 기다리려 하는가?’
그런 까닭으로 이 재주 없는 사람을 어리석고 나약하다 내치지 않고 오히려 자꾸 헛된 임무를 부과하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이렇게 조잡하나마 그 대략을 진술한다. 비록 글은 취할 것이 없으나 뜻만은 그런대로 살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돌아보면 용렬하고 서툴기만 하여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더할 뿐이다. 이렇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남은 얘기를 모두 말할 수 없다. 석명준(釋明濬)은 아뢴다.”
계묘(癸卯)에 선(宣)은 이 글을 받아 보고, 또 한 번 여봉어(呂奉御)와 격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 일을 황제께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는 조칙을 내려 군공학사(群公學士) 등을 자은사로 보내어 삼장법사를 모셔오게 하여 여공(呂公)과 대면시켰다. 그리고 여공이 굴복당하여 사과하고 물러났다.
현경(顯慶) 원년(656) 봄 1월 경인(景寅)에, 황태자 충(忠)은 자신이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태자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태백(太伯)124)이 왕위를 양보했던 규범을 사모하여 표(表)를 올려 여러 번 사양하였다.
그러자 대제(大帝)는 이 청을 받아들여 충(忠)을 양왕(梁王)으로 봉(封)하고, 명주 만 단(萬段)과 큰 저택 한 채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달에 대왕(代王) 홍(弘)125)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무자(戊子)에는 대자은사에 가서 황태자를 위하여 5천 명의 승려에게 재(齋)를 베풀며, 한 사람에게 비단 3단씩을 보시했으며 칙명으로 조신(朝臣)을 보내어 행향(行香) 의식을 거행케 하였다.
이때 황문시랑(黃門侍郞)126) 설원초(薛元超)와 중서시랑(中書侍郞)127) 이의부(李義府)는 법사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경전을 번역하는 일은 진실로 법문(法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더 해야 빛나게 선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예로부터 번역 때의 의식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법장(法藏)은 넓고 깊어서 그 연역을 다 알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의 일은 주지(住持)를 세워서 승려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호하고[外護] 세워주는 일은 제왕(帝王)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다에 뜬 배가 능히 천 리를 갈 수 있고, 소나무에 의지한 칡덩굴이 만 길이나 솟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바야흐로 널리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위(漢魏) 시대까지는 너무 요원해서 상세히 말할 수 없으나, 부견(符堅)과 요흥(姚興) 이후의 일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경론을 번역하여 공포하는 일에 승려 외에 일반 관료들 가운데 찬조한 자는, 부견 때에 담마난제(曇摩難提)가 역경을 할 때에 황문시랑 조정(趙整)이 집필(執筆)하였으며, 요흥 때에는 구마라집이 역경을 할 때에 요주(姚主)와 안성후(安城侯)인 요숭(姚嵩)이 집필했습니다. 후위(後魏) 때는 보리유지(菩提留支)가 역경할 때에는 시중(侍中) 최광(崔光)이 집필하고 경전의 서문도 지었습니다.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와 주(周) 나라와 수(隋) 나라가 모두 이렇게 했습니다.
정관(貞觀) 초에 바파라나(波頗羅那)가 불경을 번역할 때에는 좌복야(左僕射) 방현령(房玄齡)과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 그리고 태자첨사(太子詹事)128) 두정륜(杜正倫)과 태부경(太府卿)129) 소경(蕭璟) 등에게 칙명을 내려서 잘 감열(監閱)하고 편집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만 이런 일이 없습니다.
또 자은사는 성상(聖上)께서 문덕성황후(文德聖皇后)를 위해서 건립한 것으로, 그 장엄하고 화려함이란 지금은 물론 옛날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비(碑)를 세워서 아름다운 업적[遺芳]을 후세에 남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법을 지극하게 드러내고 선양하는 일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공(公)들이 이런 말을 낸다면 이 아름다운 일은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공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물러갔다.
다음 날 그들이 조정에 들어가 법사를 위해 상주하니 천황(天皇)은 모두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임진일(壬辰日)에 광록대부(光祿大夫)130) 중서령 겸 검교 태자첨사 감수국사131) 주국132) 고안현 개국공(光祿大夫中書令兼檢校太子詹事監修國史柱國固安縣開國公) 최은례(崔殷禮)에게 다음과 같이 칙령을 선포하였다.
“대자은사 승려 현장이 한역한 경론은 새로 번역한 것으로 문장의 의미[文義]가 매우 정밀하다. 태자태부133) 상서 좌복야 연국공(太子太傅尙書左僕射燕國公) 우지녕(于志寧), 중서령 겸 검교 이부상서 남양현 개국남(中書令兼檢校吏部尙書南陽縣開國男) 내제(來濟), 예부상서 고양현 개국남(禮部尙書高陽縣開國男) 허경종(許敬宗), 수황문시랑 겸 검교 태자좌서자 분음현 개국남(守黃門侍郞兼檢校太子左庶子汾陰縣開國男) 설원초(薛元超), 수중서시랑 겸 검교 우서자 광평현 개국남(守中書侍郞兼檢校右庶子廣平縣開國男) 이의부(李義府), 중서시랑 두정륜(杜正倫) 등으로 하여금 시기에 맞춰 간열(看閱)토록 하고, 혹 온당치 않은 곳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 윤색(潤色)하도록 하라. 만약 학사(學士)가 필요하면 재량껏 두세 사람을 추가하도록 하라.”
조회가 파한 뒤에 칙명으로 내급사(內給事)134) 왕군덕(王君德)을 보내어 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법사가 필요하다는 관인(官人)으로 경전의 번역을 도울 사람을 이미 처리하여 우지녕 등을 가도록 해놓았소. 그 비문은 짐(朕)이 짓기를 바라오. 법사의 뜻에 맞을지는 모르겠소만 곧 보내드리겠소.”
법사는 윤지(綸旨)를 받들고 평소의 뜻이 이루어져 심부름 온 사인(使人) 앞에서 희비가 엇갈리며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다음 날 법사는 여러 대중들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에 나아가 표(表)를 받들고 감사의 뜻을 올렸다.이 때의 표문(表文)은 유실되었다.
2월에는 비구니 보승(寶乘)의 일이 있었는데, 그는 고조 태무황제(太武皇帝) 때 궁중(宮中)의 여관(女官)이었으며, 수(隋) 나라 양주총관(襄州總管) 임하공(臨河公) 설도형(薛道衡)의 딸이다. 그녀의 덕은 궁중에 알려졌고 아름다움은 후궁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학문으로 유명하였고 그녀 역시 집안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게 경사(經史)에 정통했으며 겸하여 문재(文才)도 뛰어났다.
황제께서는 어릴 때에 그녀에게 배웠으며, 황제에 오른 뒤에는 스승의 옛 은혜를 생각해서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135)으로 봉하여 예경(禮敬)을 극진히 했다. 그 뒤 부인은 출가할 마음을 가졌고 황제는 그 뜻에 따라 궁궐 안[禁中]에 따로 학림사(鶴林寺)를 지어서 거기에 거처케 하고 아울러 비를 세워서 그 덕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시자(侍者) 수십 명을 보내고 아울러 4사(事) 를 공급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자 2월 10일에 법사를 맞아 오도록 조칙을 내렸고, 법사는 대덕 아홉 명에게 각각 시자 한 사람씩 거느리게 하고 학림사로 가서 하동군부인 설니(河東郡夫人薛尼)에게 수계(受戒)하도록 했다.
황제는 또 칙명으로 보거(寶車) 열 대와 음성거(音聲車)136) 열 대를 장엄하게 꾸며서 경요문(景曜門) 안에 대기시키게 하고, 먼저 말을 끌고 절로 들어가서 법사를 영접토록 하였다. 그리고 성문에 들어선 다음에는 곧바로 수레에 오르게 하여 출발했다. 대덕은 앞에 앉고 음성거는 뒤를 따랐다.
때는 봄 중에서도 중월(仲月)137)이라 경치마저 화려했다. 버들은 푸르고 복사꽃은 붉었으며 소나무는 푸르고 안개 또한 푸른데 비단 수레의 자줏빛 덮개[錦軒紫蓋]가 그 사이에 섞여서 반짝거리니, 나르는 듯 아름다운 그 행차야말로 흡사 기원정사의 대중들이 왕사성을 향해 가는 듯했다.
도착한 다음 법사들은 별관에 모셔졌고, 그곳에 단석(壇席)을 설치하여 보승(寶乘)을 비롯한 50여 명이 같이 계를 받았다.
오직 법사 한 사람만이 사리(闍梨)138)가 되고 여러 대덕들은 증명(證明)이 되어서, 3일 만에 모든 의식이 끝났다. 수계(受戒)가 끝나자 다시 훌륭한 화공(畵工) 오지민(吳智敏)에게 10사(師)의 형상을 그리도록 명하고, 법사들을 머물게 하여 공양하였다.
학림사
옆에는 먼저 지은 덕업사(德業寺)가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비구니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들 역시 법사에게 보살계 받기를 주청(奏請)했으므로 이에 법사는 다시 덕업사로 갔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 법사에게 바친 보시는 매우 많았다. 황제는 칙명을 내려 내급사(內給事) 왕군덕(王君德)을 보내서 일꾼들에게 화개(花蓋)를 들고 거리에서 환송하도록 했는데, 이를 보는 사람들은 극도의 선심(善心)을 내었다. 학림사는 뒤에 융국사(隆國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 얼마 안 있어 어제(御製)의 비문(碑文)이 완성되었다. 황제는 칙명으로 태위공(太尉公) 장손무기(長孫無忌)를 보내어 비문을 여러 관리들에게 선포하도록 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짐이 듣기로는 천지(天地)가 형성되던 처음과 만물이 생겨나던 초기에, 형(形)을 후토(后土)139)에 싣고 복(覆)을 궁창(穹蒼)140)에 빌리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도 충만함과 공허한 상(象)을 알 길이 없고 사해(四海)가 땅에 있으나 어찌 그 물결의 극점[極]을 구명(究明)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법문은 공허하고 고요하지만[沖寂] 생(生)을 불멸(不滅)의 앞에 나타내고 성교(聖敎)는 숨은 듯[牢籠]141) 하지만 유(有)를 무형(無形)의 밖에서 나타내 보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그렇기에 도(道)로써 진겁(塵劫)을 비추고 교화는 함령(含靈)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면 왕궁(王宮)에서 태어나시자 연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을 피우고, 신령스런 못[神沼]에 빛을 던지니 나무는 텅 빈 저 안쪽[空低]으로 줄기를 굽히었다. 덕음(德音)을 녹야원(鹿野苑) 에서 펴시고 많은 선비[多士]를 용궁(龍宮)142)에서 만나게 하시어, 죄업의 군생(群生)을 복되게 하고 소멸되어 가는 사람의 시대[人代]를 일으켰다.
능히 아주 어리석고 못난 하우(下愚)에게 도(道)를 알게 하여 뼈를 한림(寒林)143)의 들에서 부수게 하셨고, 뛰어난 지혜를 가진 상철(上哲)로 하여금 가르침의 바람[風敎]을 흠모하게 하여 혼(魂)을 설산(雪山)의 게(偈)에 빠지게 하셨다. 실날처럼 흐르는 법우(法雨)로 불타는 집 같은 이 이 세상[火宅]을 맑게 하여 불길을 잡고, 바퀴처럼 오르는 혜일(慧日)은 첩첩 짙은 어둠을 밝혀서 낮이 되게 하였다.
짐(朕)은 아득히 먼 옛날의 역사책[緗史]144)을 열람하여 자세히 도가 발전해 온 길[道藝]을 알았고, 복이 영겁토록 숭고한 것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덕황태후(文德皇太后)께서는 규범[柯]145)을 경수(瓊樹)146)에 의지하시고 가계[派]를 선원(璿源)147)에 통했으며, 덕은 우왕(禹王)이 살던 도산(途山)148)을 비추고 도(道)는 순(舜) 임금이 살던 규예(嬀汭)149)에 빛났다. 그 향기를 동관(彤管)150)이 기록하는 역사에 흘리어 아름다운 모범을 8굉(紘)에 보이시고, 자궁(紫宮)151)에 가르침을 드리워
훌륭한 계책을 만고(萬古)에 폈다.
그런데 갑자기 음산한 기운이 달을 덮어 영원히 곧은 광채[貞輝]를 거두어 가고, 대지(大地)와 같은 덕(德)을 끊어 버리니 빛나는 공적은 길이 숨어버렸다. 그러니 경대(鏡臺)를 어루만지며 감정을 더한들, 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본들 무엇을 추모하겠는가.
옛날 중유(仲由)는 천종(千鍾)의 녹봉을 받자 탄식을 했었고, 우구(虞丘)152)는 삼실(三失)을 애달파 하였었다. 이제 짐의 망극함은 참으로 종신토록 애절할 것이다. 그래서 지붕이라도 덮고 싶은 마음에 이 금지(金地)153)를 창건한 것이다.
이제 뒤로는 빈교(邠郊)154)를 뒤로 하여 천장(千莊)의 나무가 연이어 있고 앞은 종악(終岳)155)에 임하여 백 길의 연화봉[蓮峰]을 토해내고 있으며, 왼쪽에는 8천(川)156)에 접해 있어 맑은 연못의 물은 거울처럼 비치고 오른쪽에는 구달(九達)에 이웃하여 나는 듯 받쳐 든 깃 일산[羽蓋]157)이 구름에 닿아 있다. 그야말로 천부(天府)의 깊고 은밀한 장소[奧區]이며, 진실로 상경(上京)158)의 빼어난 명승지[勝地]이다.
이것을 헌가(軒架)159)에 새겼으니 화려한 누각이 허공을 침범하는 듯하다. 붉은 허공[丹空]의 새벽 까마귀는 [曉烏]는 해[日宮]를 알록달록 빛을 내고, 하얀 하늘[素天]의 토기[初兎]는 달[月殿]을 꿰뚫어 빛을 맑게 한다. 향기로운 가을 난초는 쓸쓸한 뜰[疎庭]에서 자줏빛을 띄우고, 바위에 향기로운 겨울 계수나무[冬桂]는 꽉 닫은 방문[密戶]에 붉은 빛을 모은다. 등(燈)은 번화(繁花)를 더욱 아름답게 비추니 불꽃은 연심(煙心)의 학(鶴)을 굴리고, 번(幡)이 멀리 찰간(刹竿)에 나부끼니 알록달록한 색깔이 하늘 밖에 무지개를 놓았다.
층층이 올라간 계단은 나는 듯 문로(文露)를 머금어 옥(玉)을 깃들게 했으며, 펼쳤다 접었다 하는 가벼운 주렴은 엽숙(靨宿) 그물을 놓아 구슬을 짠다. 안개 자욱이 내려앉은 골짜기는 불그레 물들고, 연못에 떠도는 막막한 안개는 푸르게 깔려있다. 쟁그랑 거리는 패옥 소리[鳴珮]와 한밤의 종소리는 더불어 운(韻)을 맞추고, 온화한 바람소리[和風]와 새벽 염불소리도 더불어 음(音)을 맞춘다.
어찌 곧장 저 향적(香積)160)의 천궁(天宮)과 멀리의 윤환(輪奐)을 부끄러워하고, 낭풍(閬風)161)의 선궐(仙闕)과 아득한 조화(雕華)를 뉘우칠 뿐이겠는가.
여기 현장 법사라는 사람은 실로 진여(眞如)의 면류관이다. 인품과 도량[器宇]162)이 엄숙하고 깊이가 있어서 마치 키 큰 소나무에 맑은 바람이 부는 듯하며, 생각과 문장의 아름다움은 저녁노을이 먼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다. 고금(古今)을 환히 비추는 빼어난 지식은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알았으며[生知], 적광(寂光)163)을 쌓고 진실을 간직하는 정성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다.
홀로 일생을 바쳐 생사를 뛰어넘어 멀리 앞을 비추어 나아갔고, 멀리 천 년에 빼어나서
불도징과 구마라집을 가교 삼아 후세에 빛을 냈다.
그러나 지금 순박한 풍속은 옛날로 돌아가고 경박한 풍속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긴긴 밤에 기나긴 어둠을 슬퍼하고, 은미한 부처님 말씀[微言]이 영원히 가리어진 것을 아파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발길을 이역(異域)으로 옮겨 널리 비밀한 교리를 살피고, 술잔을 은하수[雲漢] 밖에 싣고 주장자를 저녁노을[煙霞] 곁에 떨쳤다. 하늘에 닿을 만큼 거센 큰 바다의 격랑을 안고 유람했으며, 땅에 깔린 혹독한 서리의 찬 기운을 안고 홀로 떠나갔다.
성문 밖 넓은 들의 산서(散緖)에서는 설령(雪嶺)의 바람에 얇은 옷이 찢기고, 광야(曠野)의 저륜(低輪)에서는 사막의 햇볕에 살갗이 탔다. 달빛 아래 먼 길[月路]을 갈 때에는 그림자가 하늘 아래 잠시 둘이 되었다가, 멀리 위험한 봉우리를 넘어 아침을 맞을 때면 형상은 언제나 초췌하였다. 발길은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곳[智境]이면 모두 찾아서 지극한 진리[至眞]를 탐색하여 마음은 고해의 바다[玄津]164)를 다 해탈하고 신비한 법칙[秘術]을 연구하여, 옛날 현인(賢人)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통달하고 이전의 경전[先典]에서 듣지 못한 것을 깨쳤다.
그리고 마침내 금첩(金牒)을 얻어 동쪽으로 흘려와 장차 끊어지려던 교(敎)를 잇고, 보게(寶偈)를 서쪽에서 옮겨 이전에 빠졌던 글을 보충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영기(靈基)를 돌아보고 마음을 그 땅에 묻을 수 있었다. 심오한 뜻을 자세히 선양하니 잎은 기림(祇林)165)의 숲을 다시 푸르게 하고, 멀리 깊숙한 관문[幽關]166)을 열었기에 파도가 다시 잠잠해져서 물이 안정되었다.
짐이 8정도(正道)에 정성을 다하고 쌍림(雙林)에 뜻[志]을 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바라건대 밝은 복[景福]을 펼치어 부처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받들어 원하노라. 황태후께서도 6도(度)167)에 소요(逍遙)하시어 정신은 단궐(丹闕) 앞에 노니시고, 4주(洲)에 누워 쉬시어 그 혼백은 자극(紫極)의 경지에 오르시기를 바라노라.
슬프다, 옥촉(玉燭)168)은 가기 쉬워 4계절은 여름과 겨울을 재촉하고, 금전(金箭)은 머물기 어려워 6룡(龍)169)은 구루(晷漏)170)로 달린다. 파도는 옮겨가도 나무는 그대로 있어서 깊은 바다[冥海]가 휩쓸려 뽕나무 밭으로 바뀌고, 땅은 그대로 있지만 형세는 그렇지 못해서 높은 봉우리가 잠겨서 깊은 골짜기가 될까 염려스럽다. 이에 경건히 곧은 돌에 새겨서 삼가 참된 경지[眞境]를 표하노라.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3광(光)은 상(象)을 비추고
만물은 형(形)을 갖추었다.
인도(人途)는 아득히 멀어서
시대는 망했다가 또 흥하는구나.

미풍(美風)은 오랜 세월에 사라지고
천한 풍속이 몰래 생겨나서
애욕의 물결은 식(識)을 넘쳐나게 하고

업(業)의 안개는 정(情)을 어둡게 했다.

아, 조어(調御) 장부시여
가유라열성(迦維羅閱城)171)에 자취를 올리시니
오묘한 법도(妙道)는 그윽하게[幽] 타고
현묘한 근원(玄源)은 고요하게 당겨졌다.

취봉(鷲峰)을 먼 고개를 넘고
용궁(龍宮)을 널리 열었으니
혜일(慧日)은 빛을 펴고
자운(慈雲)은 액(液)을 토했다.

말씀[言]을 성교(聖敎)에 돌리고
생각[想]을 덕음(德音)에 싣고
의(義)는 왕겁(往劫)토록 높고
도(道)는 내금(來今)에 으뜸이다.

정신[神]은 중국[九域] 땅을 날아올라
발자취[迹]를 인도[雙林] 땅에 감추었다.
한나라 때 꾸었던 꿈[漢夢]은 여전하여서
주성(周星)172)은 갑자기 잠기었다.

비(悲)는 경대(鏡臺)에 얽히고
애(哀)는 동우(棟宇)에 가득하다.
탁용(濯龍)이 물에 흠뻑 잠기고
초풍(椒風)은 그 실마리를 감추었다.

서리와 이슬이 침범하는 아침이나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저녁에
구름 속을 뚫고 가는 수레 하나[雲車一駕]
만고에 쓸쓸하였다.

이래서 윤환(輪奐)을 일으키고
여기에다 화려하게 무늬를 새겼다.
자동(紫棟)에는 달이 머물고
홍량(紅梁)에는 저녁놀이 서렸다.

구름 비낀 창가에 가랑잎 흩어지고
바람 일렁이는 연못에 꽃잎 날리며
일산 아래에는 봉황이 깃들고
다리 옆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이에 혜명(慧命)이 있어서
영기(英器)는 신령으로 가득하고
천 년에 홀로 우뚝 솟아
3공(空)에 독보(獨步)적 존재였다.

급원(給園)에서 도를 맛보고
설령(雪嶺)에서 바람을 먹으면서
지혜의 등불[智燈]을 다시 밝히고
진전(眞筌)173)을 더욱 숭앙하였다.

사시(四時)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6룡(龍)도 분주하게 치달리며
큰 어둠의 기운을 녹여서
유관(幽關)에 서광을 열게 하였다.

왕성한 공덕으로 모범을 드리우고
아름다운 세상[徽塵]에 명예를 드날렸다.
이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글로 새겨서
길이 영원토록 밝히고자 하노라.

그해 3월 정해일(丁亥日)에, 여러 공[群公] 등은 황제가 지으신 비문을 받들고 모두 조당(朝堂)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표(表)를 올려 감사하였다.
“무릎을 꿇고 하늘 꽃[天華]을 피워서 하종(河宗)174)의 기이한 보배[奇寶]를 보고, 삼가 비전(秘篆)을 열어 운영(雲英)의 아름다운 곡조[麗曲]를 듣습니다. 만엽(萬葉)의 홍규(鴻規)가 내포되어 있고 천사(千祀)의 빼어난 경관이 담겨 있기에 서로가 경하하고 칭송하기를 어디서 그쳐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혜일(慧日)이 서방을 비추어 깊은 밤을 밝혀서 명계(冥界)를 여시었고 그 법이 동쪽으로 흘러와서 진해(陳亥)를 적시고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지역을 가리지 않는[無方]의 교화는 자유자재 하지만 응물(應物)의 이치는 한 곳에 귀의하여, 대대로 지금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은 불교를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폐하께서는 불의(佛衣)를 드리워 온 나라에 떨치시고 거울을 중구(中區)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불도는
더욱 빛나고 출가(出家)의 나루터로 가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토지에 사원[給院]을 세우시고 이름난 승려를 불러 참선하게 하셨습니다. 땅은 화려함[輪奐]175)을 다하였고 사람도 덕 높은 고승[龍象]들로 모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깊은 뜻[沖旨]을 발하시어 훌륭한 비문[豊碑]176)을 지었습니다. 오묘한 생각[妙思] 끝을 알 수 없고 그윽한 생각[玄襟]은 홀로 왕성하시며, 의리[義]는 얽매임 없이 초월하셨고 이치[理]는 융통 자재하셨습니다.
신 등은 일찍이 불교[眞宗]를 알지 못하다가 다행히 폐하의 마음을 살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움푹 팬 구덩이 정도[坳堂]177)의 작은 도량으로써 신령스런 거북[靈龜]의 깊은 도량을 재고, 하루살이의 마음으로 신선 같은 천리마[仙驥]의 긴 수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공경을 갖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다 함께 마음으로 외우고 두루 회람하면서 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