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6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6. 정관 19년 봄 정월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22년 여름 6월 임금이 지은 경서(經序)에 감사하여 답하기까지
정관 19년(645) 봄 1월 7일에, 경성유수(京城留守) 좌복야(左僕射)양국공(梁國公) 방현령(房玄齡) 등은 법사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우무후대장군후막(右武侯大將軍侯莫)1) 진식(陳寔)2)과 옹주(雍州)3) 사마(司馬)4) 이숙권(李叔眷)과 장안 현령(長安縣令) 이건우(李乾祐) 등을 보내어 받들어 영접하게 하였다. 그들은 운하를 통해 들어와 도정역(都亭驛)5)에서 법사 일행을 쉬도록 했는데, 법사를 따라온 사람이 구름처럼 많았다.
이날 유사(有司)는 모든 절에다 휘장과 수레[帳輿]와 꽃과 깃발[花幡] 등을 나눠 주어서 경전과 불상을 홍복사(弘福寺)로 모시는 데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 뛰면서 서로 다투어 장엄하였다.
다음날 주작가(朱雀街)6)의 남쪽에 법사가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물건을 모아 진열해 놓았다. 법사가 서역(西域)에서 가지고 와서 안치해 놓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개
마갈타국(摩羯陀國) 전정각산(前正覺山)의 용굴유영(龍窟留影)의 금불상 1구(軀). 광좌(光座)까지의 높이는 3척 3촌이다.
바라니사국(婆羅痆斯國) 녹야원(鹿野苑)의 초전법륜상(初轉法輪像)을 모조하여 단나무[檀]에 조각한 불상 1구. 광좌까지의 높이는 3척 5촌이다.
교상미국(憍賞彌國)의 출애왕(出愛王)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나무에 실재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불상을 모조하여 다시 단나무에 조각해 가지고 온 불상 1구. 광좌까지의 높이는 2척 9촌이다.
겁비타국(劫比他國)으로 여래께서 천궁(天宮)에서부터 보계(寶階)7)를 밟고 내려오는 모습을 모조한 은불상 1구. 광좌까지의 높이는 4척이다.
마갈타국
취봉산(鷲峰山)에서 『법화경』 등을 설하시는 모습을 모조한 금불상 1구. 광좌까지의 높이는 3척 5촌이다.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에서 독룡(毒龍)을 항복시킨 모습을 본떠서 단나무에 조각한 불상 1구. 광좌까지의 높이는 5촌이다.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성(城)을 돌며 행화(行化)하는 장면을 본떠서 단나무에 조각한 상(像).
그리고 법사가 서역에서 가지고 와 안치한 대승경(大乘經) 224부
대승론(大乘論) 192부
상좌부 경률론(上座部經律論) 15부
대중부 경률론 15부
삼미저부(三彌底部) 경률론(經律論)8) 15부
미사색부(彌沙塞部) 경률론 22부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 경률론 17부
법밀부(法密部)9) 경률론 42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경률론 67부
인론(因論) 36부
성론(聲論) 13부
이렇게 무려 520협(夾) 657부나 되었는데, 이것들은 20필이나 되는 말에다 실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날 관사(官司)는 널리 모든 절에다 보장(寶帳)과 당번(幢幡)과 공양할 도구를 비치해 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28일 아침에 모두 주작가(朱雀街)로 모여서 새로 모셔온 경전과 불상을 홍복사로 영접하게 했다.
이에 사람들은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해 각기 앞 다투어 장엄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절에서는 따로 당장(幢帳)과 번개(幡蓋)와 보안(寶案)과 보여(寶輿)를 내어 와서 거리마다 나누어 설치해 놓았다. 승니(僧尼)들은 가사를 갖춰 입고 그 뒤를 따랐는데, 승려는 앞에 서고 향로를 든 사람들은 뒤를 따랐다.
여기에 이르자 길에는 무려 수백 명이 모여들어 경전과 불상을 운반해 갔다. 구슬과 패옥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금화(金花)는 빛을 반짝이니 운반해 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문 장관을 노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자욱한 먼지도 피로함도 다 잊고 평생 처음 보는 의식에 감탄할 뿐이었다.
행렬은 주작가에서 시작해서 홍복사 문 앞까지 뻗어 있었다.
그 사이 수십 리에는 성안의 사람들과 내외 관료들이 길 양쪽으로 열을 지어서 행렬을 우러러보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이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유사(有司)는 서로 밀치다가 밟히기라도 할까 걱정해서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려야 하며, 이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향불 사르는 연기가 구름 같이 피어오르고 찬미하는 노래의 메아리 소리가 곳곳으로 이어져 갔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가비라성(迦毘羅城)에 강림하셨을 때나 미륵보살이 처음으로 도사천(覩史天)에 오르실 때, 용신(龍神)이 공양하고 천중(天衆)이 에워쌌었다. 비록 그때만큼은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시 부처님이 남기신 법의 성대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오색 비단구름이 태양의 북쪽에서 나타나더니 서서히 경전과 불상 위에 와서는 매우 분분하게 몇 리나 되는 둘레를 맴돌면서 마치 영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송하는 것 같기도 한 것을 보았다. 경전과 불상이 절에 이르자 오색구름도 사라졌다.
석언종(釋彦悰)10)의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 역사책을 고찰해 보건대, 이것을 일러 하늘의 희기(喜氣)라고 하면서 식자(識者)들은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겼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 가비라성에 탄생하실 때나, 자씨(慈氏)가 도리천으로 오르려 하실 때에 용신(龍神)이 공양하고 천신[天衆]이 봉영(奉迎)하였다고 한다. 이날의 행사는 그 때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교가 동쪽으로 유입(流入)된 이래로 이같이 성대한 일은 없었다.”
1월 24일(壬辰)11)에 법사는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12)를 낙양궁(洛陽宮)에서 배알하게 되었는데, 2월 1일[己亥]에 의란전(儀鸞殿)에서 뵈었다.
황제는 법사를 매우 정중하게 영접하고 위로했다.
법사가 자리에 앉자 황제가 말했다.
“법사께서는 떠난 뒤로 어째서 편지도 보내지 않았소?”
법사가 말했다.
“제가 떠날 때에 재삼 표문(表文)을 올렸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스런 서원[誠願]이 얕아서인지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갑자기 몰래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 마음대로 떠난 죄에 대하여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법사께서는 출가하였으니 속인과는 다르오.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했으니 짐은 참으로 경하를 드리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은 없소. 오직 서역의 산천은 험하고 멀며 풍속과 인심도 달라서 법사께서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이 기이할 뿐이오.”
법사가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는 질풍(疾風)을 타는 자는 천지(天池)에 가는 것도 그리 멀지 않고, 용주(龍舟)를 저어가는 자는 강의 물살을 건너기도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천자가 되실 상서(祥瑞)를 타고 나셨기에 폐하가 사해(四海)를 다스리고서부터 성덕(聖德)은 구역(九域)13)에 미치고 인(仁)은 8구(區)14)에까지 뻗쳤습니다. 도타운 정사는 날씨 무더운[炎景] 남쪽에까지 불었으며 성스러운 위엄은 총산(蔥山) 밖에까지 떨쳤습니다.
이 때문에 오랑캐의 군장(君長)들은 매번 하늘을 나는 새가 동방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몸을 움츠리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현장은 사지가 멀쩡하고 직접 폐하의 기름과 교화를 받은 사람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폐하의 위광(威光)을 입었기 때문에 왕복하는 길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것은 법사께서 장자(長者)다운 말씀을 하는 것일 뿐, 짐이 어찌 그런 힘이 있겠소?”
그리고는 널리 인도에 관한 일을 물었다.
설령(雪嶺)의 서쪽 인도의 경계 지역과 사철의 기후와 인심과 산물과 풍속과 8왕(八王)15)의 고적(故迹)과 4불(四佛)의 성적(聖跡) 등과 아울러 박망(博望)16)도 전하지 못했던 것과 반초(班超)나 마원(馬援)17)도 기록하지 못했던 것들을 물었다. 법사는 이미 직접 그 지방을 여행하고 여러 나라를 보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질문에 따라 모두 조리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대단히 기뻐하며 시신(侍臣)에게 말했다.
“옛날에 부견(符堅)18)은 석도안(釋道安)19)을 신기(神器)라고 칭송하여 온 나라가 그를 존중하였다. 지금 짐이 법사를 보니 말이 전아(典雅)하고 풍채(風采)와 절조(節操)가 곧고 바르다. 오직 옛사람들에게 미안함이 없지는 않으나 그들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이때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長孫無忌)20)가 말했다.
“참으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은 일찍이 진국(晋國)의 『춘추(春秋)』를 읽고 석도안의 일을 기록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석도안은 참으로 덕행이 높고 박식한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불법이 들어온 지가 얼마 안 되어 경론(經論)도 많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깊이 연구를 하였다고 해도 모두 지엽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사처럼 몸소 인도에 가서 온갖 오묘함의 근원을 찾고 열반[泥洹]21)의 유적들을 구명(究明)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다.”
그리고 황제는 법사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나라는 멀고멀어서 신령스런 유적이나 불법의 가르침[敎法]에 대해 이전까지는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없었소. 법사는 이미 직접 가보았으니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 하시오.”
그리고 황제는 다시 법사가 공적인 보직[公輔]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인재임을 알아보고, 법사에게 환속하여 정무(政務)를 도와달라고 권했다. 그러나 법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치문(緇門)에 들어가 불도(佛道)만을 지키면서 현묘(玄妙)한 종지(宗旨)를 익혀왔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불교를 버리고 속세의 직무를 따르라 하시면, 물 위에 떠가는 배를 물을 버리고 뭍에서 저어 가라 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공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패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목숨을 마칠 때까지 불도를 행하는 것으로 국은에 보답할 수 있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굳게 사양하였다. 이 당시 황제는 요하(遼河)를 정벌하기 위해 천하의 병사들을 이미 낙양에 모아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군사 문제가 바쁘고 급했으나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조정으로 맞아들여 잠시 배알토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 보니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조국공 장손무기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법사는 홍려사(鴻臚寺)22)에 묵고 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가기 어려울까 걱정이 됩니다.”
황제가 말했다.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속의 말을 다하지 못한 것 같소. 짐은 법사와 함께 동쪽 지방을 순행[東行)하면서 각 지방의 풍속도 구경하고 지휘하는 여가에 따로 이야기도 나누고 싶소. 법사의 뜻은 어떠하오?”
법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느라 병까지 걸렸습니다. 폐하를 따라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법사는 오히려 혼자서도 절역(絶域)을 유람하였소. 그러나 지금 이번 행차는 어가(御駕)와 함께하기에 전혀 걸을 필요도 없는데 어째서 사양한단 말이요?”
법사가 대답했다.
“폐하의 동정(東征)길에는 6군(六軍)23)이 호위하여, 천하를 어지럽히는 나라[亂國]을 벌하시고 적국의 신료를 토벌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목야(牧野)24)의 공25)과 후한(後漢) 유수(劉秀)26)가 곤양(昆陽)에서 크게 승리했던 것27) 같은 전과를 거두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저는 끝까지 행군을 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부질없이 노자나 허비하는 부끄러움만 더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 군대의 전투는 보아서는 안 된다고 불가의 율(律)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이 있으셨으므로 저는 감히 받들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자의 자애로써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저는 더없는 다행으로 여기겠사옵니다.”
황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법사가 다시 말했다.
“제가 서역에서 가져온 범본(梵本) 경전 6백여 부를 아직 한 글자도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숭악(嵩岳)28)의 남쪽, 소실산(少室山)의 북쪽에 소림사(少林寺)라는 절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샘물과 암석뿐이어서 맑고 고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은 후위(後魏)의 효문황제(孝文皇帝)가 건립한 것이며, 곧 보리유지(菩提留支)29) 삼장께서 경전을 번역한 곳이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 그 절에 가서 번역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간대 칙명(勅命)을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그 산에까지 갈 필요가 없겠소. 법사가 서방으로 떠난 뒤에 짐은 목태후(穆太后)30)를 위해서 서경(西京)에다 홍복사(弘福寺)를 지었소. 이 절에는 선원(禪院)도 있고 아주 고요한 곳이오. 법사는 그곳으로 가서 번역하도록 하시오.”
법사가 다시 말했다.
“백성들은 지견(知見)이 없어서 제가 서방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부질없이 서로 보려고 다투어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면 절은 바로 저잣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국법에도 저촉될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에도 방해가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문지기를 세워서 모든 출입을 막아주십시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법사의 이러한 말은 참으로 보신(保身)의 말이라 하겠소. 마땅히 그렇게 처리하겠소. 법사께서는 3~5일간 쉬셨다가 서경으로 돌아가 홍복사에 안거하도록 하시오.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일일이 방현령(房玄齡)과 상의하도록 하시오.”
이렇게 하여 법사는 하직하고 돌아왔다.
3월 1일[己巳]에 법사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갔다. 그리고 홍복사에 머물면서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번역 작업에 필요한 증의(證義)31)ㆍ철문(綴文)32)ㆍ필수(筆受)33)ㆍ서수(書手)34) 등을 조목별로 작성하여 유수(留守) 사공(司空)35) 양국공(梁國公) 방현령에게 보내었다. 방현령은 관리를 정주(定州)36)로 보내서 계주(啓奏)토록 하였고, 그러면 황제는 필요한 것을 두루 갖추어서 공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여름 6월 무술일(戊戌日)에 대승과 소승의 경론을 암기하고 번역한 문장을 고증할 수 있는 증의(證義)를 맡을 대덕(大德)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추천하는
12명이 모였다.
12명의 이름은 장안 홍복사의 사문인 영윤(靈潤)과 사문 문비(文備), 나한사(羅漢寺)의 사문 혜귀(慧貴), 실제사(實際寺)의 사문 명염(明琰), 보창사(寶昌寺)의 사문 법상(法祥), 정법사(靜法寺)의 사문 보현(普賢), 법해사(法海寺)의 사문 신방(神昉), 곽주(廓州)37) 법강사(法講寺)의 사문 도심(道深), 변주(汴州)38) 연각사(演覺寺)의 사문 현충(玄忠), 포주(蒲州)39) 보구사(普救寺)의 사문 신태(神泰), 면주(綿州)40) 진향사(振嚮寺)의 사문 경명(敬明), 익주(益州)41) 다보사(多寶寺)의 사문 도인(道因) 등이었다.
그리고 문체(文體)를 통일시키는데 능한 철문(綴文)을 맡을 대덕 9명이 모였다.
그들은 장안 보광사(普光寺)의 사문 서현(栖玄), 홍복사의 사문 명준(明濬), 회창사(會昌寺)의 사문 변기(辯機), 종남산(終南山) 풍덕사(豊德寺)의 사문 도선(道宣), 간주(簡州)42) 복취사(福聚寺)의 사문 정매(靜邁), 포주 보구사의 사문 행우(行友), 서암사(捿巖寺)의 사문 도탁(道卓), 빈주(豳州)43) 소인사(昭仁寺)의 사문 혜립(慧立), 낙주(洛州)44) 천궁사(天宮寺)의 사문 현칙(玄則) 등이었다.
그리고 자학(字學)45) 대덕이 1명 왔는데, 그는 장안의 대총지사(大總持寺) 사문 현응(玄應)이었다.
또 범어(梵語)와 범문(梵文)을 고증할 증의 대덕이 1명도 왔으니, 즉 장안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사문 현모(玄暮)였다.
이밖에 필수와 서수, 심부름하는 사람과 필요한 물품 등이 다 갖추어졌다.
정묘일(丁卯日)에 법사는 드디어 패엽(貝葉)을 가지고 범문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먼저 『보살장경(菩薩藏經)』ㆍ『불지경(佛地經)』ㆍ『육문다라니경(六門陀羅尼經)』ㆍ『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 4부(部)부터 시작하였다. 『육문경(六門經)』은 당일로 번역을 끝냈고 『불지경』은 신사일(辛巳日)에 끝냈으며, 『보살경』과 『현양론』 등은 세모(歲暮) 무렵이 되어서 끝냈다.
정관 20년(646) 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는 또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2월에 끝내고, 다시 『유가사지론』을 번역하였다. 그 해 가을 7월 신묘일(辛卯日)에 법사는 새로 번역이 완료된 경론을 진상(進上)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기로 8정(正:正道)의 뜻은 실로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징검다리이고 1승(乘)의 종지(宗旨)는 진실로 열반으로 오르는 사닥다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물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일에 미숙하여 비록 몸[蘊]이 총산(蔥山)의 서쪽에 이르러 여러 나라의 뜰[胥庭]을 거쳤어도 들은 것이 없고, 주(周)와 진(秦)을 두루 편력하였어도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낙양에 들어와서 비로소 3천(川)을 덮었고, 강승회(康僧會)46)가 오(吳)에 유학하여 비로소 형초(荊楚)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마침내 사람들은 해탈의 인(因)을 닦고 집안에서 보리(菩提)의 업을 심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법을 전하는[傳法] 이익이 두텁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엄(智嚴)과 법현(法顯)이 경(經)을 구하고, 불도징(佛圖澄)47)과 라집(羅什)48)이 이어서 번역했습니다. 비록 깊고 그윽한 풍취[玄風]로 태양을 부채질한다 해도 모두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현장만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홀로 현명한 성군[明聖]을 만나 가지고 온 경론을 모두 폐하께 아뢸 수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성스러운 말씀[聖言]을 숭상하고 존중하시어 번역하라는 은혜를 내리시니, 이에 의학(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과 함께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촌음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번역 작업을 관장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아직 종결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미 번역을 끝내어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5부 58권입니다.
번역된 경전의 서명은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 20권과 『불지경(佛地經)』 1권, 『육문다라니경(六文陀羅尼經)』 1권과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20권, 그리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16권입니다.
그리고 이 책들을 묶어서 8질(袟)을 만들어 정서(淨書)한 것은 따로 보내 드립니다. 삼가 궐(闕) 앞에 나아가 봉진(奉進)합니다.
또 현장이 보기로는, 홍복사의 존상(尊像)이 처음 조성될 때에 폐하께서는 친히 천자가 타는 수레인 난여(鸞輿)를 내리시어 상서로운 청련(靑蓮)49)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처음으로 번역한 경론(經論)들은 성대(聖代)의 새로운 글[新文]입니다. 감히 지난번에 보여주신 후의[前義]를 믿고 다시 더 부탁을 드립니다. 폐하께서 신한(神翰)을 내리시어 제(題)하고 서문을 지으시어 종극(宗極)을 찬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깊은 말씀 심오한 뜻[沖言奧旨]이 일월(日月)과 더불어 밝음을 함께 하시고 옥구슬 같은 글자와 은구슬 같은 문장[玉字銀鉤]은 건곤(乾坤)과 더불어 그 굳음을 같이 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백대(百代)에 걸쳐 길이 칭송이 이어지도록 하시며, 천 년 만 년 끊어짐이 없이 우러르게 하여 주십시오.”
또 일찍이 낙양에서 천자를 배알했을 때, 천자는 법사에게 『서역기(西域記)』를 쓰라고 명을 내렸었다. 이 책이 완성되자 법사는 을미일(乙未日)에 또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반목(蟠木)과 유릉(幽陵)50)의 운관(雲官)51)은 헌황(軒皇)의 영역52)을 기록하였고, 유사(流沙)53)와 창해(滄海)54)의 하재(夏載)는 이윤과 요임금[伊堯]의 강역[域]을 나타냈습니다. 서모(西母)의 백환(白環)55)은 수의(垂衣)의 주(主)에게 보내졌으며, 동이(東夷)가 조공으로 호시(楛矢)56)를 보내어 형벌도 필요 없는 치세[刑措]57)의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진실로 꽃봉오리를 전시대[曩代]에 날리고 아름다움을 전 법전[前典]에 따랐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때에 맞춰 기강[紀]을 잡으시고, 규범을 제정[提衡制範]58)하셨습니다.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어 천하를 이롭게 하심[刳舟絃木]59)으로써 천하를 위엄에 승복하게 하고 군생(群生)을 구제하셨으며, 거북의 다리로 하늘을 받치고 갈대를 태워 범람하는 강물을 막으시어[鱉足蘆灰]60) 방여(方轝)를 막아 둥글게 덮으셨습니다[圓蓋].
군대를 경영하시어 7덕(德)61)에 빛내시고, 문장과 교육을 베풀어 10륜(倫)62) 널리 퍼뜨리셨습니다. 샘의 근원[泉源]까 두루 윤택하게 하시고 교화와 양육[化育]으로 숙위(蕭葦)를 적셨습니다. 지방(芝房)63)에 상서로운 싹이 돋게 하시고 낭정(浪井)64)에 꽃을 피우셨습니다. 낙유반(樂囿班)을 길들이시며 소아률(巢阿律)을 울리시고, 자고(紫膏)를 패궐(貝闕)65)에 띄우고 백운(白雲)을 옥검(玉撿)에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허약한 나무[弱木]가 동산이 되게 하고 가랑비 고인 물[濛氾]을 못으로 만들었으며, 타오르는 불꽃[炎火]을 크게 일으키어 쌓여 있던 얼음[積冰]을 비추었습니다.
적판(赤坂)66)을 사다리 삼아 천자의 정령[朔]을 받들었고 푸른 물결 출렁이는 나루[滄津]에 배를 띄워 문서를 맡으셨습니다. 역사[史]로 전대의 어진 사람[前良]을 빛내주고 사실[事]을 고부(故府)의 기록에 넣으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한(漢) 나라의 장적(張棭)67)을 열어 금성(金城)68)을 가까이 접하게 하고, 진(秦) 나라의 계림(桂林)69)을 지켜 주포(珠浦)로 통하게 하는 것뿐이겠습니까.
현장은 다행히 중국과 주변 나라들이 다 평온한[華夷靜謐] 세상인 정관(貞觀)70) 시대에 속하였기에, 마음이 인도 쪽[梵境]으로 깊이 빠질 때 감히 호사(好事)를 이루었습니다.
생명은 아침 이슬 같고 힘은 가을 메뚜기와 같은 것입니다. 오직 황령(皇靈)에 의지하였기에 몸을 날리고 그림자를 앞세워, 막배(膜拜)71)의 마을[鄕]을 전전하고 여러 역참[驛]을 지나 멀리 밖을 정처 없이 떠돌았던[流離]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지(條支)72)의 거각(巨㲉)으로 예전에 들었던 것들을[前聞]을 증험하였고 계빈(罽賓)73)의 외로운 수레를 타고 돌아와 이전의 결실을 생각하였습니다.
때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사람의 원(願)을 하늘이 따라 주었나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설수(雪岫)를 내려가서 제하(提河)74)를 건넜고, 학림(鶴林)75)을 찾아가다가 취령(鷲嶺)76)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원(祗園)77)의 길에 아직 비슷하게 본 따 만든 조상[髣像]이 남아 있었고, 왕성(王城) 터에는 파타(坡陀)78)가 아직 있었습니다.
찾아서 구하고 두루 보다 보니 세월이 흘러서 황제께서 계시는 서울[帝京]에 돌아가려고 말은 하면서도 머문 지 1기(紀)79)를 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말로 전해들은 곳과 직접 가본 곳은 1백 28국이나 되었습니다.
장언(章彦)이 밟았던 길은 부질없이 동서남북을 헤매었던 것이며, 과보(夸父)80)는 그저 내닫기만 했을 뿐 풍토를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반초(班超)81) 같이 후(侯)로 봉해지는 일이 멀지 않고 장건(張騫)82)처럼 되기를 바라는 일이 허황된 일이 아닙니다.
지금 기술한 것에 예전에 들었던 내용[前聞]과 다른 데가 있습니다. 제가 비록 온 세상의 강토를 다 들르지 못했을지라도 그래도 총령 밖의 국경 지대는 모두 가 보았습니다. 이 나라들에는 모두 실록(實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감히 꾸며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삼가 갖추어 12권으로 편집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 이름 하였습니다. 정서(淨書)한 책은 별도로 상정(上呈)합니다.
바라옵건대 이를 우필(右筆)83)에게 반포하도록 시키시고 좌언(左言)84)에게 꾸미게 하시어,『박물(博物)』85)이 진(晋) 나라를 덮었듯이 『구구(九丘)』86)가 황대(皇代)에 펼쳤듯이 하여 주소서.
다만 현장은 자질과 식견이 미천하고 짧아서 미진한 데가 많고 게다가 문장[筆語]에 서툴러 폐하께서 보시는 데에 부족하실까 두렵습니다.”
병신일(丙申日), 천자는 스스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답서를 썼다.
“그대가 올린 글을 보고 모든 뜻은 다 알았소. 법사는 일찍이 고행(高行)을 나타내서 속진(俗塵)을 떠나, 보주(寶舟)를 띄워서 피안(彼岸)에 오르고 묘도(妙道)를 찾아서 법문(法門)을 열었으며, 널리 대도(大道)를 밝혀 중생의 죄[衆罪]를 씻어내게 하였소. 그래서 부처님의 자운(慈雲)을 펼쳐서 4공(空)87)을 덮고 혜일(慧日)이 장차 어두워지려 할 때에 8극(極)88)을 비추었으니,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오직 법사뿐이오.
짐은 배움이 얕고 마음이 좁아 사물에 미혹됨이 있으니 하물며 불교의 깊고 세밀한 뜻을 어찌 감히 우러러 헤아릴 수 있겠소. 법사는 지금 경전에 붙일 서문[經題]를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오. 그리고 또 새로이 편찬한 『서역기』는 당연히 내가 직접 읽어볼 것이오. 현장화상에게 칙명을 내리오.”
정유일(丁酉日)에 법사는 거듭 표(表)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룁니다. 엎드려 글을 받들고 생각해 보니 제가 외람되게도 폐하께 장유(奬喩)를 내리시게 한 듯합니다. 현장은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정밀하게 지켜서 더욱 떨치고 나아가겠습니다.
현장은 업행(業行)이 모자라고 박한데 어쩌다 잘못 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사표(四表)89)에 근심이 없는 시대에 중국[九瀛] 땅에 태어났고, 게다가 신령한 황제 폐하가 계셨던 덕분에 멀리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우리나라의 위력만을 믿고 도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험난한 고생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면서 비록 우매하나마 저의 정성을 다하긴 했지만, 그러나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고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아 저술하는 일은 모두 조정의 교화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인도에서 가지고 돌아온 경전을 번역하여 이에 두루마리 책[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경전에는 아직 서문[詮序]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밝은 사상을 구름처럼 펼치시어[叡思雲敷] 하늘 꽃이 밝게 흐드러지게[天花景爛]하셨습니다. 이치는 『주역』의 「계사(繫辭)」와 「상전[象傳]」을 포괄하고, 조리[調]는 꽃봉오리를 이루었습니다. 천고(千古) 세월을 넘도록 명성을 날릴 것이며 백왕(百王)을 덮도록 결실(實)을 올릴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신력(神力)에 비할 수 없는 신은(神恩)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그 이치를 알 수 있으며 성교(聖敎)의 현원(玄遠)함과 성조(聖藻)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황송하게도 위엄(威嚴)을 범하면서까지 감히 경전의 제목(題目)을 써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천자께서 깊고 먼 사려로 돌아보시어 기꺼이 허락을 내려 주시지 않으시어, 몸소 위무하시기를 그치신다면 서로 생각한들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현장이 듣기로는 일월(日月)이 하늘에서 빛나면 그 빛을 창문에까지 나누어 주며, 또한 강하(江河)가 땅에서 실오라기처럼 나와서는 그 윤택함을 바위 끝까지에 흘려보낸다고 합니다. 구름이 화합하듯 널리 퍼지는 즐거운[雲和廣樂] 울림을 귀머거리에게도 감출 수 없으며, 황금과 벽옥의 기이하고 진기한[(金璧奇珍] 그 광채는 봉사에게도 숨길 수 없습니다. 감히 이러한 이치에 인연하여 거듭 빕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은택의 비가 굽어 드리우고[雷雨曲垂] 천문(天文)이 굽어 비추시어, 오래도록 하늘과 땅을 짝하시어 해와 달과 함께 높이 비추어 주십시오. 그리 하시면 취령(鷲嶺)을 넘어 가지고 온 은미한 말씀[微言]이 신령스런 필력[神筆]을 빌려 널리 멀리 퍼질 것이며 계원(鷄園)90)의 오묘한 경전이 꽃처럼 아름다운 문장 덕분에 펼쳐질 널리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구구한 승려[梵衆]만 혼자 은택의 영광을 입으려는 것이겠습니까? 어리석어 미혹한 중생들도 티끌세상의 번뇌를 벗어나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정관(貞觀) 22년(648) 봄 천자는 옥화궁(玉華宮)91)에 행차하였고, 그 해 여름 5월 갑오일(甲午日)에는 『유가사지론』 1백 권의 번역이 끝났다.
그러자 황제는 6월
경진일(庚辰日)에 조칙을 내려 법사를 옥화궁으로 초청하였다. 법사가 절을 출발하여 옥화궁으로 가는 도중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서 법사가 피로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으라고 보살피게 하였다. 옥화궁에 이르러 천자를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면서 황제가 말했다.
“짐은 장안의 무더위가 고통스러워 이 산속의 궁[山宮]으로 옮겨왔소. 샘물과 바위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니 짐도 기력이 차츰 호전되어 이제 정사(政事)를 볼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법사가 생각나기에 사람을 보내 모셔 오도록 한 것이오. 걸어오시느라 고생이 컸을 것이오.”
법사가 말했다.
“사해(四海)의 백성들은 폐하께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폐하의 옥체가 편안하지 않으시면 온 천하의 백성들이 당황하여 걱정할 것입니다. 엎드려 듣자하니 폐하께서 이곳에 오신 후로 건강을 되찾으셨다니 온 백성들이 어느 누가 기뻐 춤추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목숨을 길이 보전하시고 숭고(嵩高)함이 하늘과 더불어 무궁무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용렬하고 박학한 재주에 외람되게 나이만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임무를 받들기에는 피로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황제는 법사가 학문이 해박하고 예의가 깊고 품격이 있으므로 늘 그에게 환속하여 자신의 옆에서 함께 조정(朝政)의 정사를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법사가 낙양궁(洛陽宮)에 가서 배알했을 때에도 직접 그런 말을 하였는데, 이번에도 천자는 또 말했다.
“옛날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과 같은 임금이나, 주(周) 나라를 번영케 하고 한(漢) 나라를 다스렸던 군주들도 천하를 위해 힘쓰지 않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정무라는 게 너무 광범위하고 일이 많은 것이라 나의 두 눈으로는 두루 볼 수가 없고 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살피기가 어려운 것이오. 그래서 주(周) 나라는 10란(亂)92)에게 의뢰하고, 순(舜) 임금은 5신(臣)93)에게 맡겨서 조정을 돕게 하고 나라를 보필케 하였던 것이오.
그런 명왕(明王)과 성주(聖主)도 오히려 여러 현인(賢人)들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하물며 짐 같이 과문한 사람이 사리에 밝은 여러 현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짐의 뜻은 법사가 비구[須菩提)의 먹물 들인 법복을 벗고 유마힐(維摩詰)94)의 평상복[素衣]을 걸치기를 바라오.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라 방법과 계책을 펴고 조정에 앉아 도를 논해주기를 바라오. 법사의 뜻은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정무가 많아서 3황(皇)95)과 5제(帝)96)같은 임금도 혼자서는 다스릴 수가 없어 여러 현철(賢哲)들과
함께 정사를 이끌었다고 하셨습니다.
공자(孔子) 또한 말하기를 ‘임금이 잃은 것을 신하가 찾게 해준다. 그러므로 임금은 원수(元首)이고 신하는 팔과 다리인 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은 중용(中庸)의 평범한 사람에 대한 말이지 높은 지혜를 가진 상지(上智)를 위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신하만 있으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걸(桀)97)이나 주(紂)98)같은 포악한 임금은 신하가 없었다는 말이옵니까? 이로써 미루어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줄 압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상지(上智)의 임금이시니 혼자서도 능히 만사의 기강을 스스로 풀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천운(天運)을 따라오시어 천지가 태평하고 나라 안과 밖이 다 평안합니다.
이는 모두 폐하께서 거칠지 않으시고 음란하지 않으시며 화려하지도 않으시고 사치하지도 않으시고,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쉴 때에도 쉬지 않으시고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시어 선(善)을 행함이 하늘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아니면 다른 어떤 분이 이러하겠습니까?
두세 가지의 사례를 논하여 밝혀 보게 해주십시오.
폐하께서는 팔굉(八紘)을 다스리는 지략(智略)과 영웅호걸을 호령하는 재주를 가지고 계시며, 화란(禍亂)을 평정하신 공과 옹희(雍熙)99)의 업(業)을 높이고 넓힌 덕이 있으며, 총명하고 도덕을 갖춘 덕과 체원(體元) 합극(合極)하시는 자태 등을 가지셨으니, 이것은 모든 하늘이 주신 것이요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첫째의 뜻입니다.
근본을 돈독히 하시고 말단은 버리시며 인(仁)을 숭상하고 예(禮)를 존중하시어, 말세의 경박한 풍속을 없애시고도 선정(善政)을 상황(上皇)에게 돌리셨습니다. 세금 제도를 약하게 하고 형벌 규정을 가볍게 하시어 구주사해(九州四海)에 사는 중생이면 누구나 다 그 은혜를 입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이것도 또한 성심(聖心)의 지극히 아름다운 교화 때문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의 뜻입니다.
지극한 도[至道]는 두루 통하게 되어 있고 어짊이 깊으면 멀리서도 은택을 입습니다. 동쪽으로는 일역(日域)100)을 넘고 서쪽으로는 곤구(崑丘)101)를 지나고 남쪽으로는 염주(炎洲)102)에 미치고 북으로는 현새(玄塞)103)까지 다했습니다. 그리고 고리를 만들어 코에 걸고 다니는 풍속을 가진 사람들이나 초복(草服)104)을 입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左衽]105) 백성들까지도 폐하의 교화와 교육을 바라여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며, 진귀한 보배를 공물로 바치고 영토마저 맡기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천제의 위엄에 감복해서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의 뜻입니다.
오랑캐[獫狁]들이 환난을 일으킨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오제(五帝)도
그들을 신하로 삼지 못했고 삼왕(三王)도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수와 낙수[河洛] 일대를 피발(被髮)106)한 오랑캐의 들판으로 만들었으며, 풍호(酆鄗)107)를 화살이 날아다니는[鳴鏑] 땅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은 차츰 쇠퇴해지고 흉노(凶奴)가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은주(殷周) 이래로 그들을 물리치지 못하다가 한 무제(漢武帝)가 병력을 거느리고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108)과 함께 힘을 다하여 그나마 지엽적으로 수습은 되었으나 본거지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는 좋은 계책을 듣지 못했었는데, 폐하께서 직접 도모하시게 되어 한 차례의 원정으로 이를 섬멸하시고 소굴까지 파헤쳐서 다시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한해(澣海)와 연연(燕然)109)의 땅은 모두 중국 영토로 들어왔으며 화살 들고 말 달리던 북방의 유목민들도 모두 폐하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위업이 신하로 비롯된 것이라면 우하(虞夏) 이래로 현명한 신하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찌하여 정벌을 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도(道)가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지 남에게서 빌려 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의 뜻입니다.
고려(高麗)라는 작은 오랑캐 나라는 중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서 수(隋) 나라 양제(煬帝)가 천하의 대군을 통솔하여 세 번이나 친히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성(城)을 공략하여도 성첩(城堞)을 반도 부수지 못하고 들판을 공략하여도 사람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헛되이 6군(軍)만 잃고 낭패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짧은 기간에 수만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가셔서 주필(駐蹕)110)의 강력한 진영을 꺾고 요동(遼東)의 철통같은 성을 쳐부수어, 군대의 위엄을 떨치며 개선하셨으며 끌고 온 포로도 3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병사를 사용하는 일이나 장수를 부리는 그 길이 다르지 않은 것이기에 수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망하고 당나라는 큰 전과(戰果)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폐하의 힘에 의한 것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의 뜻입니다.
그리고 천지가 태평하니 해와 달이 화려하게 빛나고 화기(和氣)가 가득하니 경사의 구름이 피어오릅니다. 오령질(五靈質)111)이 나타나는가 하면 일각수(一角獸)112)도 나타나고, 그 밖에 흰 이리[白狼]와 흰 여우[白狐]와 붉은 난새[朱鸞]와 빨간 풀[朱草] 등이 수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상서가 나타난 것도 모두 천자의 덕(德)에 감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전왕(前王)에 비유하면서 10란(亂)의 공(功)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으나, 생각해 보면 폐하를 위해 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설령 사람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윤(伊尹)113)과 여상(呂尙)114) 만큼이나 현명한 신하들이 많이 있는데 저같이 용렬한 사람이 어찌 정사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불문(佛門)에서 계를 지키고 불법을 선양하는 것이 저의 원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자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끝내 저의 소원을 저버리지 마소서.”
황제가 몹시 기뻐하며 법사에게 말했다.
“법사께서 앞에 말한 일들은 모두 하늘이 도움을 내린 덕분이며, 아울러 종묘의 영(靈)과 신하들의 공이오. 짐 혼자서 어찌 그렇게 이룰 수 있었겠소. 법사께서 이렇게 오묘한 도[妙道]를 선양하겠다고 하니 이것 역시 높은 뜻을 품은 것이 틀림없소. 부디 노력해주시오. 짐도 오늘 이후로는 법사를 도와서 불법을 널리 펴도록 하겠소.”
석언종(釋彦悰)은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재주는 내외(內外)의 학문을 겸하였고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답하는 그 언변의 넉넉함이 이와 같았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옛날 도안(道安)이 간(諫)하였으나 부견(符堅)의 남정(南征)을 멈추게 하지 못했고, 도항(道恒)115)과 도표(道標)는 애써 사양하였으나 요흥(姚興)116)의 마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끝내 군대가 패망하는 치욕과 도망가 숨어 살아야 하는 고통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법사가 짧은 아론(雅論)으로 황제의 마음을 채워 맑은 황제의 마음을 더욱 깨끗하게 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뜻을 더욱 굳게 한 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굳이 번거롭게 일월(日月)까지 끌어다 인용할 것도 없이, 그 우열을 알 수 있겠다.”
이때 중서령(中書令) 저수량(褚遂良)117)이 이렇게 아뢰었다.
“지금 사해(四海)가 넓혀지고 정비된 일[廓淸]과 구역(九域)이 편안하게 된 것은 모두 폐하의 성덕(聖德)이니, 법사의 말과 같습니다. 신(臣) 등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니, 해와 달 아래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나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좋은 가죽옷[珍裘]은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 밑의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큰 집은 반드시 많은 재목들이 모여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군주 혼자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법사께서는 자신의 곧은 지조를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짐을 칭찬했을 뿐이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법사께서는 요즘 어떤 경론(經論)을 번역하고 계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요사이 『유가사지론』의 번역을 마쳤는데 모두 백 권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논은 참으로 대작(大作)이라 하겠소. 어떤 성인(聖人)의 말씀이며 또 어떤 뜻을 밝힌 것이오?”
법사가 대답했다.
“이 논은 미륵보살의 설로서 17지(地)118)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황제가 또 물었다.
“무엇을 17지라 하는 것이요?”
법사가 대답했다.
“오식상응지(五識相應地)ㆍ의식상응지(意識相應地)ㆍ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ㆍ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ㆍ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ㆍ유심지(有心地)ㆍ무심지(無心地)ㆍ문소성지(聞所成地)ㆍ사소성지(思所成地)ㆍ수소성지(修所成地)ㆍ성문지(聲聞地)ㆍ독각지(獨覺地)ㆍ보살지(菩薩地)ㆍ유여의지(有餘依地)ㆍ무여의지(無餘依地)를 말합니다.”
여기서 법사는 대강의 제목[綱目] 만을 들어 대의(大義)를 늘어놓으며 설명하였다. 황제는 대단히 애정을 갖고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어 『유가론』을 가져오게 하였다.
논이 도착되자 황제는 친히 자세히 열람하고는, 그 말의 뜻이 심원하여 지금까지 들어본 것과는 다르다고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은 불경을 보면 마치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법사가 이역(異域)에서 이처럼 뜻이 깊은 법을 얻어 왔는데, 짐이 요사이 군사 관련 국정이 바빠서 불교에 대해서 찬찬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론을 보니 종지(宗旨)의 근원이 광대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다.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나 그 밖의 9류(流)119)는 여기에 비하면 마치 작은 연못을 바다에 비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유(儒)ㆍ불(佛)ㆍ도(道) 3교(敎)의 뜻이 일치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망령된 말이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비서성(秘書省)120)의 서수(書手)를 뽑아서 새로 번역한 경론을 필사하게 하여 9본(本)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옹(雍)ㆍ낙(洛)과 더불어 병(幷)121)ㆍ연(兗)122)ㆍ상(相)ㆍ형(荊)ㆍ양(楊)ㆍ양(凉)ㆍ익(益) 등 9주(州)의 각지에 보내 유통시켜서 전국토의 백성들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경론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사도(司徒)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와 중서령(中書令) 저수량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이 듣기로는 불교는 공허하고도 현묘하여서 천인(天人)도 헤아리지 못하고 근본은 대단히 깊어서 입문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지극하신 도가 밝으시고 위광(威光)이 빛나시어 은택이 먼 세계까지 적시고 교화가 중토(中土)에 넘치었고, 5승(乘)123)을 옹호하시고 삼보(三寶)를 건립하셨기 때문에 법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불법이 쇠약한 이 시대에 자질이 빼어난 사람이 나오니, 천 년 동안에 한 번 나올 만한 인물입니다. 첩첩 험한 고개를 넘어서 경전을 구하러 떠났고 위험한 길을 걸어서 도를 찾아 떠났습니다. 진기한 풍속을 보았고 참된 경전을 갖추어 얻었습니다.
그래서 귀국하여 번역한 것은 암원(菴園)124)에서 부처님이 처음 설하신 것과 같으며, 그 정교한 글의 깊은 뜻은 마치 부처님의 입에서 새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두 폐하의 성덕에 감응한 것입니다.
신 등은 어리석음으로 눈이 멀었으나 이런 경전을 보고 듣게 되니 고해(苦海)의 파도에 허덕이고 있을 때에 의탁할 배를 만난 듯합니다. 그리고 천자께서의 자비로우심이 넓고도 멀어서 이제 구주(九州)에까지 펼치시어 어리석은 백성이 다 함께 묘법을 알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억 겁을 두고 만나기 어려운 일이라 이 깊은 행복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이것은 법사의 대비원력(大悲願力) 때문이고 또 공(公)들의 전생의 복으로 만난 것이지 짐 혼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오.”
그런데 황제는 앞서 새로운 경전의 서문을 짓기로 허락하였으나 정무에 바빠서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법사가 다시 한 번 아뢰자, 마침내 황제는 붓을 들어 얼마 뒤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라고 제목을 붙였다. 모두 781자로서 황제가 직접 필사(筆寫)하고 조칙을 내려 모든 경전의 머리에 놓게 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경복전(慶福殿)에서 백관(百官)이 배석한 가운데 법사를 좌정케 하고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125)인 상관의(上官儀)로 하여금 여러 군신들 앞에서 어제(御製)의 서(序)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노을빛이 비단결처럼 펼쳐진 것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법사를 찬양하는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개 들으니 천지(天地)에는 법도가 있어서,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줌으로써 생(生)을 낳고, 4계절은 형체가 없으나 춥고 더운 날씨에 잠기게 함으로써 만물을 화육(化育)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을 살피고 땅을 거울로 삼으면 용렬하고 어리석은 무리도 모두 그 단서를 알게 될 것이지만, 음(陰)을 밝히고 양(陽)을 살피면 현철(賢哲)도 셀 수 없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천지(天地)가 음양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알기 쉬운 것은 형상이 있기 때문이며, 음양이 천지에 처해 있으나 알기 어려운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이 밝게 드러나서 징험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미혹(迷惑)되지는 않고, 형상이 없어 보지 못하게 되면 지혜로운 자라도 오히려 미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불도는 빈[虛] 것을 숭앙하여, 유현(幽玄)하고 적멸(寂滅)한 것으로 널리 만물을 제도하고 시방(十方)을 전어(典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위엄 있는 신령[威靈]을 받들면서도 위[上]가 없고 신통한 힘[神力]으로 누르면서도 아래[下]가 없으니, 이를 크게 하면
우주에 가득 차고 작게 하면 털끝에도 용납된다. 그렇게 멸함도 없고 생함도 없어서 천겁(千劫)을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숨은 듯 나타난 듯도 하면서 백복(百福)을 실어 나른 지 지금까지 오래이다.
오묘한 법도[妙道]는 그윽하고 깊어서 그것을 따르려고 해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불법의 유전[法流]은 고요하고 깊어서 그것을 찾고자 하나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어리석고 용렬한 중생이라도 그 취지(趣旨)를 알기만 하면 능히 의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가르침[大敎]은 서방(西方)에서 터를 닦아 일어난 것으로, 한나라 조정[漢庭]으로 옮겨 와서 꿈126)을 밝히고 동쪽 땅을 비추어서 자비를 전하게 된 것이다. 옛적에 형상[形]이 나뉘고 종적[跡]이 나눠질 때, 언어는 달랐어도 교화는 이루어졌고 범상(凡常)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덕을 숭앙하여 따를 줄을 알았다.
그러나 그림자를 감추어 진(眞)으로 돌아가고 위의(威儀)가 바뀌어[遷化]127) 세상을 초월함에 미쳐서, 금용(金容)은 색을 감추어 삼천(三千)세계에 광명을 비추지 않고 아름다운 존상[麗像]은 그림으로 공연히 32상(相)만을 만들어 냈다.
이때에 은미한 말씀[微言]이 널리 퍼져 3도(途)128)에서 유정을 제도하고 남기신 가르침[遺訓]을 멀리 펴서 군생(群生)을 10지(地)129)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眞敎]은 우러르기 어려운 법이라 그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왜곡된 교학에 쉽게 따라서 사(邪)와 정(正)은 여기에서 얽혀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비었다느니[空] 있다느니[有]130) 하는 논란을 습관과 풍속에 따라 시비를 따지기도 하고, 대승과 소승도 잠깐씩 때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였다.
여기 이 현장 법사라는 사람은 법문(法門)의 영수(領袖)로서, 어려서부터 절개가 굳고 영민하여 일찍 3공(空)131)의 마음을 깨달았고 자라서는 신령스런 마음[神情]에 계합하여 먼저 4인(忍)132)의 행을 닦았다. 소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이나 물에 비친 달빛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에는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신선이 먹는다는 이슬이나 밝게 빛나는 구슬인들 어찌 그의 밝고 윤택함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통달한 지혜는 얽매임이 없고 신령한 헤아림[神測]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6진(塵)133)을 초월하여 멀리 나가서 홀로 천고(千古)를 마주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음을 내경(內境)134)에 모아서 정법(正法)이 사라짐을 슬퍼하였고, 생각을 현문(玄門)135)에 두어 글에 오류가 있는 것을 깊이 개탄하였다. 또 생각은 항상 사물의 조리(條理)를 분석하여 이전에 들었던 견문[前聞]을 넓히고, 거짓을 버리고
참됨을 이어서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음이 정토(淨土)로 날아가 서역(西域)에 유학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말을 채찍질하며 홀로 갔던 것이다. 쌓였던 눈이 날리는 새벽에는 눈 때문에 길을 잃고, 어지러운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저녁에는 쓸데없이 하늘 밖에서 헤매었다.
만 리 밖 낯선 산천을 지나 구름 안개를 헤치고 그림자를 내몰아 나아갔고,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정성은 무겁게 여기고 수고는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심오한 법(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면서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정교(正敎)를 구하였다.
쌍림(雙林)136)과 팔수(八水)137)에서 도풍(道風)을 음미하였으며, 녹원(鹿苑)과 취봉(鷲峰)에서 기이한 성적을 우러러보았다.
선성(先聖)에게서 지극한 말씀[至言]을 이어받았고 상현(上賢)에게서 진교(眞敎)를 전해 받아서 묘문(妙門)을 탐색하여 오업(奧業)을 자세히 궁구(窮究)하였다.
1승(乘) 5율(律)의 도로 마음 밭[心田]을 달리게 하고, 8장(藏)138) 3협(篋)139)의 글로 말씀의 바다[口海]에 파도를 일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나며 방문하는 나라들에서 삼장(三藏)의 요체가 되는 문장 657부를 가져왔다.
이것을 번역하여 중국[中夏] 땅에 펼쳐서 수승한 업적[勝業]을 선양하고, 자애의 구름[慈雲]을 서쪽에서 이끌어 와서 불법의 비[法雨]를 동쪽에 내리게 했다.
성스러운 가르침[聖敎] 가운데 빠져 있었던 것을 다시 온전하게 채워 넣어서 창생(蒼生)의 죄를 복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불타고 있는 집[火宅]140)의 메마른 불길을 촉촉하게 적셔서 함께 미혹된 길을 벗어나게 했으며, 애욕의 물에 이는 어두운 파도를 잠재워서 함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악은 업(業)으로 인하여 추락하고 선은 연(緣)으로 인해서 올라가니, 오르고 추락하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에게 달린 것임을 알겠다.
이것은 대개 계수나무가 높은 언덕 위에서 나서 구름과 이슬을 만나 그 꽃을 피우는 것이나, 연꽃이 푸른 물결 속에서 나왔기에 날라 다니는 티끌도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성질이 본래부터 곧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고결하므로 미천한 물질들이 더럽히지 못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깨끗하면 탁류(濁類)가 더럽힐 수가 없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지(知)가 없는 저 풀이나 나무도 선(善)의 도움을 받으면 선을 이룰 수 있는데, 하물며 식(識)이 있는 인륜(人倫)으로서 경(慶)에 인연하여 경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이제 이 경전이 널리 유통되도록 보시하여 해와 달과 함께 다함이 없게 하고,
이 복덕을 멀리까지 펼치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히 커지기를 바란다.”
법사는 황제가 직접 지은 글을 받들고 나서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의 표문[表]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사물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기로는 6효(爻)141)가 깊은 이치를 담고 있으나 생멸(生滅)의 장(場)에 국한되어 있어, 온갖 물상[百物]의 이름을 바로잡는 데에는 진여(眞如)의 경지를 따르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래된 희책(羲冊)142)을 징험해 보더라도 오묘하다는 것만 볼 뿐 그 신령스러움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멀리서 헌도(軒圖)를 생각하오니 거듭 선별하여 아름다움으로 귀의하게 하소서.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옥호(玉毫)143)의 자질을 타고 나시어 금륜(金輪)으로 하늘을 제어하시고, 선왕(先王)의 구주(九州)144)를 넓혀서 모든 세상[日月]을 덮으셨습니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구역(區域)을 넓혀 항하수 모래 수[恒沙] 만큼 거대한 법계(法界)를 간직하시고, 드디어는 급원(給園)145)의 정사(精舍)를 중국[隄封] 안으로 들이시어 패엽(貝葉) 경전의 영험한 글[靈文]들을 모두 책부(冊府)로 귀속되게 하셨습니다.
현장이 옛적에 이런 인연으로 석장(錫杖)을 떨치고 떠나 굴산(崛山)146)을 찾아뵈었던 것입니다. 오직 천자의 위엄[天威]을 믿었기에 만 리 먼 길을 마치 지척의 거리인 듯한 달음에 달릴 수 있었고, 천엽(千葉)147)에 타지 않아도 순식간에 쌍림(雙林)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삼장을 찾아다닐 때에는 용궁(龍宮)에 저장된 것을 모두 찾아냈고, 1승(乘)을 연구할 때에는 취령(鷲嶺)의 남은 종지[遺旨]를 다 궁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백마(白馬)에 싣고 돌아와 황제 폐하[紫宸]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폐하의 명령[下詔]을 받들어 그 책들을 번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장은 식(識)이 용수(龍樹)148)보살에게는 많이 떨어지는데도 어쩌다 잘못 전등(傳燈)의 영광에 끼게 되었고, 재주가 마명(馬鳴)과는 사뭇 다른데도 사병(瀉甁)149)의 총명함을 인정받았으니 심히 부끄럽습니다.
번역한 경론은 오류가 매우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침내 천은(天恩)을 입게 되어 마음에 두셨다가 서문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문장은 『주역』 「상전(象傳)」과 「계사전(繫辭傳)」의 표현을 넘어섰고 이치는 온갖 신묘한 법문[門]을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미한 중생[微生]들로 하여금 홀연 범문의 메아리[梵響)를 직접 듣게 하셨으니, 마치 수기(受記)를 받든 것 같아 뛸 듯이 기쁠 뿐입니다. 참으로 무량한 이 기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삼가 표문[表]을 받들고 궁궐 앞으로 나아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황제는 이 표를 보고 다시 직접 이렇게 편지를 썼다.
“짐의 글재주[才藝]는 출중하지 못하고 말솜씨[言]도 해박한 달변이 아니오. 더구나 불전(佛典)으로 말한다면 더욱이 배운 적이 없소. 그러므로 짐이 지난번에 쓴 서문은 매우 졸렬한 문장이어서, 공연히 훌륭한 책에 먹칠을 하여 더럽힌 것이나 아닌지, 구슬 더미 속에 기와나 벽돌을
던진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었소. 그런데 보내온 글을 받아보니 자못 칭찬이 자자하여, 스스로 반성해보게 되어 더욱 얼굴이 뜨거워질 따름이오. 일부러 감사의 편지를 보내주어서 그 고마움 말로 다할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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