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대장경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중권
당호법사문법림별전 중권
석언종 지음
김두재 번역
정관(貞觀) 11년(637) 봄 정월(正月)에 황제는 조상의 가풍[祖風]을 선창(宣暢)하고 본래의 계통[本系]을 존숭(尊嵩)하기 위하여 이에 조서를 발명(發明)하여 백성[黎元]들에게 반포하였다.
“노군(老君:老子)의 수범(垂範)은 그 뜻이 청허(淸虛)에 있고, 석가(釋迦)가 남긴 가르침은 이치를 인과(因果)에 두었다.
그 가르침을 논하면,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汲引持迹]은 길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종지를 구해 보면 홍익(弘益)의 기풍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즉 큰 도가 일어남은 먼 옛날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근원은 무명(無名)의 시초에서 나왔고, 그 일은 유형(有形)의 밖에 드높았으니, 양의(兩儀:陰陽)에 나아가서 운행하고, 만물(萬物)을 포괄하여 길러 자라게 한다.
그런 까닭에 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림을 이룩하여 질박하고 순수한 데로 돌아가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어난 경우를 살펴보면 서역(西域)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동한(東漢)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화(中華)에 퍼지게 되었다. 신통변화의 이치는 그 방법이 다양하고, 보응(報應)의 인연 또한 하나가 아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를 숭상하고 믿는 이가 매우 많아졌으며 사람들은 바로 그 해[當年]에 복 받기를 희망하고, 가문에서는 내생(來生)의 화(禍)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속에 막혀 있는 사람은 현묘한 종지[玄宗:도교의 가르침]를 듣고는 크게 비웃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는 진제(眞諦:불교의 가르침)를 바라서 다투어 귀의하여 처음에는 마을[閭里]에 파도처럼 출렁이더니, 마침내는 조정(朝庭)까지 바람에 쓸려 쓰러지는 풀처럼 되고 말았다.
마침내 풍속이 다른 외국의 경전이 번성하여 중묘(衆妙:도교)보다 앞서가게 되었으며, 제하(諸夏:中國)의 가르침이 도리어 일승(一乘)보다 뒤처지게 되어 근거 없이 숨어 되돌아올 줄을 모르는 지가 여러 대(代)가 되었다. 짐(朕)은 아침저녁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아득히 지극한 도를 생각하고 지난날의 폐단을 개혁하며 법도 있는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였는데, 더구나 짐의 근본 계통이 노자[柱下]로부터 나왔음이겠는가.
임금의 자리[鼎祚]가 극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상덕(上德)의 경사스러움에 의지했기 때문이고, 천하가 크게 안정될 수 있었던 것도 무위(無爲:도교의 수행법)의 공덕을 힘입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를 열어 확장하고 이 현묘한 교화[玄化]를 천양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재공(齋供)의 행립(行立)은 물론 강론(講論)에 이르기까지 도사(道士)와 여관(女官)을 승려[僧尼]의 앞에 자리하게끔 하라.
바라건대 나의 본래 계통으로부터 나온 교화를 돈독히 하여 구유(九有:전 중국)에 선창(宣暢)하고 조종(祖宗)의 가풍을 존중하여 만대[萬葉]에 끼치도록 하라.”
그때에 경읍(京邑)의 승려들이 모두 대궐[闕庭]에 나아가 표(表)를 올렸는데, 곧 법사(法師)를 대표로 발탁하여 표(表)를 아뢰게 하였다.
“제[琳] 나이 상유(桑楡)1)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태평스런 세상을 만났고, 몸이 점점 쇠약해짐에 이르러서야[貌侵蒲柳] 바야흐로 거룩하고 명철한 임금을 만났습니다.
가만히 듣자오니 자식이 좋은 것을 한 가지라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아비에게 드리고, 신하가 한 가지 좋은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임금께 바친다고 하였는데, 신하와 자식 된 도리로 임금과 어버이에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 하면 아비는 간쟁하는 자식이 있어야 그 몸이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고, 선비에겐 충고해 주는 친구가 있어야 그 일신이 명예[令名]를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들[琳等]은 비록 출가(出家)한 몸이오나 여전히 신하와 자식의 반열에 있사오니, 지은 죄가 있다면 숨김없이 감히 다 진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조서(詔書)를 보건대, 국가의 근본 계통은 노자로부터 나왔으므로 조상을 존중하는 가풍이 옛 경전에 나타나 있음을 천하에 반포하셨으니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오며, 도사(道士) 등으로 하여금 승니(僧尼)보다 위에 처(處)하게 하셨으니, 받들어 주선(周旋)할 뿐 어찌 감히 조서를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살펴보니, 노자[老君]가 규범을 드리워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기는 했어도 몸에 차거나 입는 복장에 대해서는 고치거나 바꾼 적이 없었고, 청허(淸虛)한 높은 뜻은 세상과 더불어 무리 짓지 않았으며, 관우(觀宇)도 세우지 않았고 문도(門徒)들도 거느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하(柱下)의 지위에 처(處)하여 참됨을 온전하게 하였고 황제의 덕[龍德]에 숨어 성품을 길렀을 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그것을 보면 지혜롭다고 하겠지만 어리석은 자가 그것을 보면 어리석다고 말하리니, 노(魯)나라의 공자[司寇]가 아니고서는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도사(道士)들은 그 법을 따르지 않고 있사오며 착용하고 있는 관복(冠服)도 모두가 황건(黃巾)의 뒤를 이은 것일 뿐 본래 노자[老君]의 후예는 아닙니다.
삼장(三張)2)의 더러운 술법을 행하고 오천(五千:道德經)의 미묘한 가르침[門]을 버리고 도리어 장우(張禹)3)와 함께 부질없이 장구(章句)만을 일삼습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항상 귀신의 도[鬼道]로써 풍속을 교화한다 하면서 허망하게 노자의 후예라고 칭탁하나 실로 이는 좌도(左道:邪道)의 싹일 뿐입니다.
만약 이들의 자리를 승니(僧尼) 위에 둔다면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함께 흐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라의 교화에 손상을 끼치는데도 만약 진술하여 아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신하와 자식의 정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도경(道經)과 한나라ㆍ위나라 등의 여러 역사책에도 불교가 먼저이고 도교가 뒤라는 사실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부디 천자(天慈)를 간곡히 드리우셔서 청람(聽覽)해 주소서.”
표(表)를 올려 아뢰자 황제는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4)을 보내 입으로 조칙을 선포하여 말하였다.
“모든 승려들에게 말하노니 밝은 조서를 이미 내렸는데도 만약 복종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나라에서는 엄한 법으로 벌하리라.”
법사는 숨[氣]을 들이키고 소리를 삼킨 채 모든 스님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임금께서 구중(九重:깊은 궁중)에 계시니 거룩한 얼굴을 뵙기가 어렵고, 비록 옷자락을 잡아끌고 난간을 꺾고자 하나[牽衣折檻]5) 또한 그렇게 할 구실이 없으니 굴원(屈原)의 뒤를 따라 초야(草野)에 한가롭게 쉬면서 난초를 엮어 몸에 차고 청백하게 사느니만 못할 듯하다.”
그 후 정관 13년(639) 가을 9월에는 황건(黃巾) 진세영(秦世英)이 초금(醮禁)을 조금 익히고 의방(醫方)을 대충 이해하여 보잘것없는 기술(技術)을 가지고 시대에 아첨한
까닭에 저후(儲后)에게 신임[志]을 얻었다.
그는 은밀히 법사의 논(論)에 대해 진술하여 말하였다.
“황제의 조종(祖宗)을 비방하고 선인(先人)을 헐뜯고 모독하였으니, 그 죄가 마땅히 주상[上]을 속인 죄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이에 벌컥 성을 내어 승니(僧尼)들을 사태(沙汰)시키고, 승려들[緇徒]에게 칙서를 내려 보내 모두들 유교(遺敎)를 따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저 법림(法琳)은 이미 짐의 종계(宗系)를 헐뜯고 비방[訕謗]했으니, 마땅히 곧 추승(推繩:구속하여 가둠)하되 반드시 나라의 형벌과 법에 준함은 말이 필요 없느니라.”
그런데도 법사는 행동은 모우(毛羽)를 타고 다니고 생각은 운소(雲霄)에 떨쳐 추징(追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관청에 나아가니, 많은 관료들이 주상(主上)의 뜻을 받들어 법사를 추국하여 조사하고 관아[州庭]에 가두고 포승줄로 포박해 두었다.
사공(司空) 모명소(毛明素)는 오래전부터 법사의 청한(淸閑)함을 듣고 늘 그 사람을 한 번 봤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감옥에 갇히자 법사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야장(冶長)6)은 누설(縷泄:감옥에 갇힘)을 고달파 했고 한안(韓安)은 사회(死灰)를 탄식하였으니 비로소 산중의 나무를 죽 돌아보고서야 재목이 못 되는 나무가 귀하다는 것을 알았나이다.
법사가 모명소의 시를 받고 사례하여 답하였다.
“빈도(貧道)는 식성(識性)이 무모[嵬昧]하여 문득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광간(狂7)簡)함이 넘쳐서[斐然] 위로는 천청(天聽:皇帝의 귀)을 거스르고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남은 삶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公)께서는 은혜롭게도 청완(淸翫:청아한 문장)을 드리우시니 제[琳]가 어찌 입을 다물고 묵묵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능력도 보잘것없는 데다 공과(功課)마저 비었으니 그저 수답만 할 따름입니다.”
밤새도록 남모르게 쌓인 울분으로 탄식하고
생각을 진술하며 모질게 이 몸을 꾸짖습니다.
제가 지금 때를 잃음이
억울하기 옛 사람과 같사옵니다.
풀이 우거져 햇빛을 보기 어렵고
소나무 키가 크면 바람 맞기가 쉽습니다.
말대로 뜻을 얻는다면
어느 누구인들 또다시 궁색하고 통달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모명소(毛明素)는 법사의 시를 보고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삼익(三益ㆍ친구) 맺기를 청하고, 이난(二難)8)에 뜻을 돈독히 하자면서 소(素)가 말하였다.
“서로 앎이 너무 늦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겨울 10월 계해(癸亥)에 흥선사(興善寺)에서 대중들이 법사에게 진찬(珍饌)을 올리자 법사는 편지를 보내 사례하며 말하였다.
“재자[齎]를 욕되게 하여 정성스런 마음으로 무릎 꿇고 아침밥을 받고 보니, 광체가 옥액(玉液)보다 더 선명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향기가 난초 향기[蘭芬]를 빼앗습니다. 집하(戢荷)는 인서(仁恕)의 흐름[流]을 우러르게 하고 자미(滋味)는 허리(虛羸)의 피폐함을 거두게 하니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다행스럽습니다.
삼가 생각하오니 대중들의 생활은 모두들 편안하신지요? 저[琳:法琳]는 실로 재주도 없는데 외람되게 승려들의 무리에 끼어 가지고 음양[方圓]에 의하여 의복(倚伏)9)이 있으니 스스로 용서받을 곳이 없습니다.
대중들보다 뛰어나지도 못하면서, 마침내는 몸마저 위태롭게 하는 패망(敗亡)을 이루었으며, 세속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여[不能和光同滓] 마침내는 형상 없는 죄에 걸려 부질없이 무릎만 끌어안고 길게 탄식할 뿐이니 혼(魂)에 부끄러워하고 그림자를 보면서 슬퍼할 따름입니다.
이로써 찌꺼기를 먹고 맛없는 술을 마시는 사람도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정조가 더욱 곧은 줄 알며, 흙탕물에 빠지고 허우적거리는 자도 연꽃과 계수나무의 향기가 더욱 깨끗하다는 것을 압니다. 저[琳] 같은 사람의 경우는 또한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본디 사람들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일이 부족하고 또한 찾아다니면서 배알함을 익히지 못했으며, 이미 보통 선비들의 비방을 당하여 마침내 하우(下愚)의 자취를 밟고 말았으니, 발을 감싸 안고 꼬리를 끄는 겁쟁이에게서 어찌 통쾌한 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겠습니까?
또한 달인(達人)은 심한 탐욕[健羨]이 없고 대도(大道)는 수자(守雌:약한 이를 지킴)의 절개에 구애를 받습니다. 샘은 맑으나 우물이 새어 나가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야말로 궁벽한 바위에 그림자를 숨기고 깊숙한 골짜기에 소리를 감춘 채 흰 구름 덮인 경계에서 커다란 포부나 펴고[散誕], 푸른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노닐면서 아침에는 혜원(慧苑)이나 엿보고 저녁에는 선림(禪林)에서 잠을 자면서 그렇게 여생을 보내며 마음[情]을 물외(物外)에 두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윤허(允許)받지 못하니 경개(耿介)10)가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죄인[縲人]은 생각이 흔들려 말도 궁색하고 이치도 부족해졌습니다. 대충 붓과 먹을 인연하여 비천한 생각을 펴고 기술하였으나 편지[尺素]는 번거로워지기 쉽고 촌심(寸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겨울 10월 병신일[丙申:27일]에 칙명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유덕위(劉德威)11)ㆍ예부시랑령(禮部侍郞令) 호덕분(狐德芬)ㆍ시어사(侍御史) 위종(韋悰)ㆍ사공(司空) 모명소(毛明素) 등을 보내 그 고을에 머물면서 법사를 추국하여 조사하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법사에게 추문하여 말하였다.
“머리를 깎고 마음을 죽였으니 편안하고 조용하게 지내야 마땅할 것이며, 출가(出家)하여 세속을 버렸으니 모름지기 무위(無爲)에 계합해야 할 것이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선(四禪)에 자취를 감추고 육도(六度:六波羅蜜)에 정신을 깃들이며, 유교와 묵자[儒墨]의 조백(糟粕)을 총괄하고, 반개(半開)와 만개(滿開)의 청화(菁花)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뜻을 구류(九流)에 내던지고 마음을 오전(五典:五經)에 얽어매어 삼교(三敎:儒ㆍ佛ㆍ道)를 널리 인용하여 치도(治道)의 승침(昇沈)을 서술하고, 시왕(十王)을 갖추어 열거해 가면서 숭경(崇敬)의 우열(優劣)을 표방했는가?
어째서 혹 불교와 도교의 선후(先後)에 대하여 기술하기도 하고, 때로는 석가(釋迦)와 이이(李耳)가 스승과 제자[師資] 관계라고 담론하기도 하였으며, 널리 십유(十喩)와 구잠(九箴)을 드러내어 변론의 기(氣)를 왕성하게 하여 도의 근본으로 삼았는가?
믿음과 헐뜯음[信毁]에 대하여 말하면 교연(皦然)히 번갈아 보답한다 하고, 품조(品藻)에 대하여 논할 때면 숱한 책을 낱낱이 열거하였다고 했는데, 도가(道家)의 잘못을 승려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부처님을 받들어 마음을 귀의했으면 스스로 취한 것을 온전하게 헤아려서 우러러 갖추어 나타내야 할 것이거늘 논(論)을 지어 남의 근본이나 들추어내고 바깥 것을 익히고 거기에 두류(逗遛)하니, 혹 그것에 대하여 할 말이 없으면 곧 그것으로 인하여 죄인이 될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琳]가 들으니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실달다(悉達多)라고 부른답니다. 그분은 진겁(塵劫)을 지나서 생(生)에 응하여 숱한 현인(賢人)을 뵙고 두루 배우셨다고 합니다.
더러는 또 외도(外道)의 처소에 거주하는 일도 보이셨고, 또 유림(儒林)으로 나타나시어 동류(同類)들에게 호응해서 범부를 유인하기도 하셨으며, 형상이 다른 이[異形]들을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무상사(無上士)라 칭하고 천중천(天中天)이라고 불렸습니다.
자취를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굽혀 가르침을 사계(沙界)에 흘렸는데, 혹은 선정에 안주하여 도 깨우침을 빌어 혜해(慧解)로 흉금을 열고, 법을 설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고 신통(神通)으로 중생을 교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중생들의 깨달음을 인연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같지 않기 때문에 반교(半敎:小乘)와 만교(滿敎:大乘)로써 마음을 펴시고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으로 도(道)를 천양(闡揚)하셨으니, 적절함을 따라 각각 뜻을 이해하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12시간[時] 중에 한 시간은 외서(外書)를 배우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무리[異黨]들을 꺾어 굴복시키고 속류(俗流)들을 접인(接引)하여 얕은 데서부터 깊은 곳에 미치기까지 애어(愛語)로 같은 일을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전통학론(內典通學論)』에서 말하였습니다.
‘대개 하늘에 있으면서 상(象)을 이룩하는 것은 해와 달인데 그 정(精)은 강하고 부드러움[剛柔]이 다르며 땅에 있으면서 형상을 이룩하는 것은 산(山)과 강[川]인데 그 기운은 움직이고 고요함[動靜]이 다릅니다.’
물질이 이와 같듯이 사람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머리와 발의 거동은 땅을 디디고 하늘을 이며[方履圓戴], 성정(性情)의 작용은 음은 참담하고 양은 화창[陰慘陽舒]합니다. 귀중한 것은 나에게 앎이 있는 것이니, 신령함이 있으면 자라게 되며, 마음이 행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므로 기욕(嗜欲)이 같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엷게 타고나고 두텁게 타고남으로써 어리석고 현명함[愚賢]이 저절로 차이가 있으며, 생각이 없음과 훌륭한 생각을 가짐으로써 미치광이와 성인이 나뉘는 것입니다.
기로(岐路)가 교차되어 옮겨가므로 울면서 털 하나 뽑는 것도 즐겨 하려고 하지 않으며,12)
실의 색깔이 번갈아 변하므로 슬퍼하면서 이마를 부딪치는 것조차 아끼지 않습니다.13)
진실로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길이 많고 몸을 윤택하게 하는데도 그 기술이 각각 다름으로써 구류(九流)가 이미 퍼졌고 백가(百家)가 다투어 일어난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예(禮)와 악(樂)을 말함으로써 구선(九仙)이 신(神)을 어지럽힌다고 하였으며, 도교(道敎)에서는 충현(沖玄)을 일삼음으로써 육경(六經)14)이 덕을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형명가(刑名家)15)는 가혹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종횡가(縱橫家)16)
는 언변을 숭상하며, 공자는 군려(軍旅)를 사양했고 유방(劉邦)은 선비의 갓에 오줌을 누었던 것입니다.
한 문[一門]만을 오로지 한다면 장구(章句)만을 말미암는 둔함이 있게 되고, 문장만을 모은다면 경박(輕薄)한 허물이 있게 됩니다. 세속에서는 내전(內典)을 가지고 허무(虛無)에 비교하고 승려들은 외서(外書)를 가지고 강비(糠粃)에 비유합니다.
작은 절개를 간직하면 방광(方廣:大乘)을 버리고, 큰 도를 익히면 비니(毘尼:律)를 버립니다. 지혜로운 선비는 거만스럽게 복전으로 인도하는 존자가 되고 참선하는 사람은 지혜를 지키는 창고가 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어지럽게 일어나는 이학(異學)에 대해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만 각각 자기들에게 맞는 것을 따르는 법이니 어찌 익히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과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미워하여 미혹함을 고집한 채 돌이킬 줄 모르니 내가 크게 탄식하는 이유가 진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드물게 말하는 것[罕語]이 사방에 통한다는 이치를 어쩌면 한결같게 아는 이가 적습니까? 그러니 어찌 반은 문채 나고 반은 질박하여 속(俗)과 진(眞)을 겸하며, 많은 서적을 낱낱이 다 읽어 많은 재주를 한꺼번에 지니는 것과 같겠습니까?
오직 능인(能仁: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만이 고금(古今)에 으뜸이십니다. 그분은 마침내 왕사성(王舍城)의 야인(野人)으로 소 기르는 비밀을 시험하였고, 기원정사(祇園精舍)의 범지(梵志)로서 나뭇잎을 헤아리는 기이함을 증험하셨으니, 패다(貝多:佛經)를 성대하게 펼쳐 자세하게 알리기는 진실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동자(童子) 선재(善財)는 선지식(善知識)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장자(長者) 기역(耆域:耆婆)은 학문에 뜻을 두어 마침내 이것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또한 하나의 티끌도 버리지 말아야 덕산(德山)의 넓음을 쌓을 수 있으며, 한 방울의 물도 막지 말아야 그것이 모여 지혜의 큰 바다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용수(龍樹) 같은 위대한 그릇과 마명(馬鳴) 같은 큰 덕을 지닌 이가 나와 한 시대에 도를 널리 폈고 꽃다운 이름이 천 년[千祀]을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가령 저 도안(道安)이 남전(藍田)의 솥을 알고, 법란(法蘭:竺法蘭)이 곤명(昆明)의 재앙[=]을 분별하며, 승회(僧會:康僧會)는 말 기운[辭氣]이 청아하고 고상하며, 혜원(慧遠)의 신비한 풍채가 상쾌하고도 시원한 것과 같은 경우는 모두가 선풍(先風)의 모범이 될 만한 것들이며, 이들은 후진(後進)을 위한 훌륭한 행[景行]을 지녔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오직 동방삭(東方朔)17)만이 재능이 많아 메아리를 오로지했겠으며, 어찌 장화(張華)18)만이 사물에 널리 통하여 명성이 드러난 사람이겠습니까? 대개 들으니 적염(赤鹽)도 식별하지 못한다19)는 나무람을 초래하였고, 백합(白鴿)도 알지 못한다는 꾸짖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통달한 사람이 두루 다 배움에 이르러서는 거의 이러한 수치스러움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덕(德)으로 안팎을 다 해통하면 숱한 삿된 무리들이 그 기풍을 두려워하여 종적을 감추고, 크고 작은 것을 끝까지 다 깨닫게 되면 근기가 다른 이들도 받들어 경앙(景仰)하여 쏠리듯이 향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필코 만약 가르침이 적어 통달하지 못했다면 혜품(慧品)이 부족하고 외부의 학문에 결함이 있어서 계율을 오히려 범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문사(文辭)나 교묘하게 꾸며 대는 것은 본래 사변(四辯)의 덕을 이룩하겠지만, 미묘하고 청한한 성운(聲韻)은 실로 오명(五明)의 방향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즉 화엄(花嚴)에서는 다문(多聞)을 질책했고, 법화(法花)에서는 친근(親近)을 경계하였으니, 스스로 살펴서 집착을 없애는 것이 자못 저들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자랑하여 명예를 다투지도 않고, 뽐냄으로써 세상과 맞서지도 않으며, 참다운 도[眞道]를 도와주고 바른 깨달음의 바탕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전군(田君:田文)20)이 낮은 자리를 자처한 기예[伎]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시대를 구제할 수 있었고, 제(齊)나라 사람의 소산(小算) 술법으로도 오히려 스스로 이룰 수 있었는데, 더구나 문채(文彩)를 연마하고 도덕(道德)을 조술(祖述)한 경우이겠습니까?
이미 금(金)ㆍ돌[石]ㆍ실[絲]ㆍ대나무[竹]를 잘 고르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이 되게 하였고, 귤[橘]ㆍ유자[柚]ㆍ아그배[樝]ㆍ배[梨] 따위를 입에 맞는 맛을 내게 하였습니다.
높은 산[高山]을 초지(初地)에 비유하고 난승(難勝:第五地)으로서 세간을 따랐어도 진실로 또한 풍류(風流)에 떨어지지는 않았으니, 그 빛남이 여기에 다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승려들로 하여금 속전(俗典)을 겸하여 배우도록 하여 갑자기 구분(丘墳)을 폐지함이 없게 하고,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불교의 종지를 알게 하여 부질없이 계정(戒定)을 소홀히 여기지 않게 하소서.
그러므로 말하기를 ‘큰 선비는 두루두루 다 배우고, 달통한 사람은 널리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고루(孤陋)한 무리가 쪼그라든 회포[局促之懷]를 지키는 것과 같겠습니까?
다만 제[琳]가 저술한 『변정론(辯正論)』은 그 근본을 일으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사옵니다. 지난 무덕(武德) 4년(621) 중동(仲冬)의 달에 청허관(淸虛觀) 도사(道士) 이중경(李仲卿)이 지은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과 유진희(劉進喜)의 『현정론(顯正論)』 등의 논서를 얻어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모두 큰 성인을 업신여겨 모욕하고 생령(生靈)들을 혼모(昏冒)하게 하였으며, 함부로 전모(典謨)를 인용하여 그릇된 것을 꾸며대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저[琳]는 이미 저들이 무식한 것을 개탄한 끝에 저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구류(九流)에서 널리 주워 모아서 논서 여덟 축(軸)을 지었으며, 세 종교에 대해 서술하여 나라의 이익을 밝히는 데 뜻을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10대(代)를 표방하게 된 것은 따르고 숭배해야 함을 나타내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사적(史籍)에 의거하여 후선(後先)을 변론하고, 훈고학(訓誥學)에 의거하여 스승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으며, 열 가지 비유를 들어 저들이 주장한 십이(十異)를 물리쳤고, 구잠(九箴)으로써 저들의 구미(九迷)를 꺾었던 것입니다.
기(氣)가 도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전모(典謨)에 수록되어 있으며, 믿음과 헐뜯음이 교연(曒然)함은 실록(實錄)에 없는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제[琳]가 지난날 도사(道士)가 되었을 때 거짓되고 잘못된 점을 자세히 터득하였고, 공자(孔子)와 노자(老子)가 불교를 숭상하여 마음으로 귀의했다는 사실도 자세하게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자의적으로 취한 일이라는 말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치에 부합하고 일에 순조로웠으므로[理符事順] 청백(淸白)함이 밝게 드러났고, 일으키게 된 근거가 밝게 나타났으므로 한곳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이중경(李仲卿)이 우열(優劣)을 논한 것은 열아홉 조항이며, 유진희(劉進喜)의 『현정론(顯正論)』에 대한 글은 겨우 한 축[一軸]일 뿐이다. 또한 함부로 좋고 싫음[美惡]을 진술하거나 널리 제왕(帝王)을 인용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대가 지은 『변정론(辯正論)』의 내용은 이같이도 분운(紛紜)한가? 거짓으로 상상(上庠)과 우학(右學)을 인용하고, 단지 허망한 말을 얽어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보살[開土]과 유생(儒生)에 대해서는 전혀 실록(實錄)에 없는 사실인데, 다만 지금 것을 옛것과 비교하고자 하였으니, 의도한 일에 잘못이 있다. 우러러 확실하게 갖추어 진술하되 조금도 숨기거나 감추는 일이 없도록 하라.”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琳]가 들으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烏有:틀림없이 사실이 아닐게다] 하는 것과 그럴 이치가 없다[亡是]라는 따위는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문장에 나타나 있는 말이고, 자묵(子墨)과 한림(翰林)21)은 양웅(揚雄)의 시부(詩賦)에 속한 말이라고 하더이다. 또 현미경기(玄微鏡機)의 무리는 성조(盛藻)를 당시에 전하였고, 순화충막(殉華沖漠)한 부류들은 사종(詞宗)을 옛날에 나타내었습니다. 전모(典謨)에 이미 그렇게 밝히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다르게 진술하겠습니까?
만약 저쪽을 빌어다가 종지를 열어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 이치를 자세하게 밝힐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삼교(三敎)에 대해 제일 먼저 내세워서 논지를 세우게 된 이유를 서술하였으며, 다음에 구잠(九箴)을 나타내서 이중경의 말에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나 지금이나 함께 현혹하는 부분이 있으면 논지를 인하여 해석해서 통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무덕 8년(625) 중춘(仲春)의 달에 고조(高祖)가 직접 국학(國學)에 나와서 전례(奠禮)를 행하려 하자 삼교에 대하여 자세히 갖추어 진술하고 미언(微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두 종파에 통달한 사람들이 어석(御席)에 구름처럼 나열해 있었고, 오도(五都)의 재주 있는 선비들이 의연(義筵)에 별처럼 퍼져 있었다. 그때 황건(黃巾:도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 반탄(潘誕)이 선후(先後)에 대하여 함부로 진술하여 고조에게 아뢰었다.
“실달태자는 부처가 되지 못했으므로 6년 동안 도를 구하여 결국에 성불(成佛)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도(道:도교)가 부처를 낼 수 있었던 것이요, 부처는 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니 도는 곧 부처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부처는 곧 도의 자식이요 제자입니다.”
마침내 불경(佛經)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도(大道)를 체득하여 깨닫고 위없는 뜻을 발하였다.”고 하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이때 승광사(勝光寺)에는 석혜승(釋慧乘)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학업이 구심(鉤深)하고, 재주의 예봉이 영속(映俗)하였다. 군량미를 싸가지고 갑옷에 앉듯 철저한 대비를 하고 견고한 적(敵)을 찾고 있었다.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가 종지를 열어젖히니 산을 울리고 바위를 치는 듯하였는데, 은하수[懸河]와 같은 변론을 쏟아내고 겸하여 날아오르는 용(龍)과 같은 문장을 토해 내었다. 의로운 그물[義網]을 높다랗게 치고, 현묘한 사다리[玄梯]를 널리 걸쳐 놓으니, 기미에 호응하여 샘물이 용솟음치지 않음이 없고, 메아리를 뒤쫓고 바람처럼 달리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주상(主上)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숱한 대신[群公]들로 하여금 머리 숙여 절하게 하였다.
그 때 구선외도(九仙外道)는 몸을 원문(轅門:陣營의 門)에 묶어 놓고, 삼통황건(三洞黃巾)은 멀리서 우러러보면서 입을 다물고[結舌] 있었다.
법림(法琳)은 이미 이 의론[議]을 인연하여 또 불교와 도교[佛道]의 선후(先後)와 석가와 노자[釋李]의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에 대한 책을 찬술하였다.
또 부혁이 임금에게 글을 올린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후한(後漢) 시대에는 중원(中原)은 아직 오랑캐 법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있지 않았고,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때에는 오랑캐 법[佛法]을 믿는 이가 조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중경(李仲卿)의 논(論)에서 말하였다.
“석륵(石勒)22)의 시대에는 저 오랑캐 풍속을 생각하여 승려 불도징(佛圖澄)과 도인(道人)이 함께 발을 들고[矯足] 걷고 모우(毛羽)를 꽂고 다녔는데, 이로 인하여 오랑캐 법이 처음으로 세상에 흥기(興起)하였다.”
유진희(劉進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랑캐가 이 땅에 왔을 때에는 완전한 믿음이 있지 않았는데 요(姚)씨와 석(石)씨 이후로 오랑캐 풍속이 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들 말했는데 다만 법림은 이 세 사람 때문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군왕(君王)과 재상[宰輔]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스님들을 득도시킨 일들을 진술하고, 그것으로써 저들의 말에 상대하여 그들의 말이 허망한 것임을 드러냈으며, 나중에는 믿거나 헐뜯음으로 인하여 서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진술하여 그것으로써 중경에게 보여 주었고, 착하고 악함에 따라 징조가 있음을 밝혀서 저들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게끔 하였다.
다만 중경(仲卿) 등은 글은 비록 두 축(軸)뿐이지만 내용엔 많은 조항이 있었으므로 비록 법림의 여덟 권의 책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것에 간략하게 대답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금 이때에 주상은 흠명(欽明)하시어 현묘한 법에 생각을 의탁하시고 사문(沙門)을 흥기시켜 드러나게 하셨으며, 불교[釋敎]를 따르고 숭상하셨으니, 어찌 감히 지금을 옛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그르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수(理數)가 명백하게 밝으니, 진실로 확실한 논리가 되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논(論) 제1권에서 말하기를, ‘대당(大唐)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馭極], 성황(聖皇)이 함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사[垂拱] 어질고 경륜이 많은 이를 숭상하여 올바름으로 돌아갔고, 어질고 덕 있는 이를 귀하게 여겨 순박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제 생각에 도교와 불교 두 집단은 정치를 하는 데 시급한 일은 아니오나, 오랫동안 저 두 집단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진술하고자 했는데, 이는 의심할 것이라는 것조차 계산하지 않고, 옳은 일을 아뢰어 옳지 못한 일을 버리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그 요점을 자세히 살펴 주시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성상께서는 공경스러우시고 총명하시며, 문채 나고 생각이 깊으신데[欽明文思] 어떤 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가부(可否)를 꼭 진술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임금을 자극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 뜻을 확실하게 말하라.”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琳]가 들으니 유교(儒敎)로 시대를 구제하면 사람들은 바라고 우러러 생각하지만 석가와 노자가 만물을 이롭게 하면 어리석은 이들은 의심을 낸다고 하더이다.
그런 까닭에 저 상상(上庠)에 의지하여 저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진술하고, 석학(碩學)들에게 기탁하여 이 현묘한 공덕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상(主上)을 위해 순직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충성과 효도[忠孝]가 으뜸이 되며, 몸을 보전하고 해로움을 멀리하는 데에는 도덕(道德)이 제일이며, 괴로움에서 구제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는 자비(慈悲)가 근본이 된다.’
충성스런 마음을 품고 효도를 다하여 봉양하면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도를 실천하고 덕을 세우면 몸과 명예가 퍼져 나갈 수 있으며, 사랑을 일으키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베풀면 중생[群品]들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중생들을 구제하면 그 은혜가 여섯 갈래 세계[六趣]에 고루 미치고, 몸과 명예가 퍼지게 되면 영화로움이 한 가문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집안과 나라를 온전하게 하면 곧 공덕이 육합(六合:天地와 四方)을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과 효도는 세속을 훈계하는 가르침이 되고, 도덕은 몸을 유지하는 술법이 되며, 자비(慈悲)는 중생을 덮어 길러 주는 행(行)이 됩니다. 또한 하늘에는 삼광(三光:해ㆍ달ㆍ별)이 있어서 각각 그 덕에 알맞게 운행하고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어 함께 그 공을 나타내는 것과 같나니, 세 가지 가르침을 다 따르게 한다면 좋은 징조[嘉祥]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주상께서는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병풍을 뒤에 지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시고 무위(無爲)로 나라를 다스리시며, 학문과 교양이 있고 생각이 깊으며 총명하신데 어찌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중경(仲卿)의 무리들의 삿된 견해가 뿌리 깊으니 아무리 황유(皇猷)에 목욕한다 해도 선(善)으로 옮겨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빈주(賓主)에 붙여 저 전모(典謨)를 창달[暢]하고, 착한 말을 펴서 고하여 그것으로써 저들의 귀를 열어 주려고 한 것일 뿐 진실로 황상께서 깨닫지 못하여 가부(可否)를 꼭 진술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의 논문(論文)에 ‘경수[涇]와 위수[渭]가 저절로 나뉜다’고 한 말을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논의 제2권에 이르기를, ‘옛 사적[古史]을 검토하고 멀리 선유(先儒)에게 들어 보았지만 영보(靈寶)라는 이름을 듣지 못했고, 천존(天尊)의 얘기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허망하게 더더욱 천착(穿鑿)하여 널리 재의(齋儀)를 지었으나 출요(出要)의 방법을 관찰하지 못했고, 다만 탐구(貪求)하는 술법만 제멋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도사(道士)라는 호칭은 그 유래(由來)가 없고 하상공(河上公)의 말도 아득하여 종적(蹤跡)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만 도교에서는 영보(靈寶)의 미묘한 비밀도 현대(玄臺)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노자는 천존(天尊)의 신(神)이 대라(大羅:하늘)에 단공(端拱)하고 있다고 변론하고 있으니, 삼원십진(三元十眞)의 제술[製]이 곧 출요(出要)의 방법이며, 육재칠품(六齋七品)의 의식이 어찌 탐구(貪求)하는 술법이란 말인가? 도사(道士)라는 명칭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하상공의 설법도 오래된 것인데, 어찌 조정에서 숭상하는 것을 배척하고 국가에서 존경하는 일을 비난했는가? 한갓 오청(五聽)23)을 바라나 삼장(三章)24)도 초월하지 못했으니, 하늘의 그물이 비록 너그럽고 성글다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구수쌍동(九首雙瞳)의 경전과 금천화제(金天火帝)의 문적(文籍)과 백진적한(白秦赤漢)의 전모(典謨)와 삼국이경(三國二京)의 기록을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맡았다고 합니다.
일을 기록하고 말을 기록하는 것은 정직한 필법과 곧은 말[直筆直言]로서 삿됨이 없고 거짓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오(吳)나라 군주였던 손권(孫權)이 상서령(尙書令) 감택(闞澤)에게 물었습니다.
‘신선의 도에는 영보(靈寶)의 법이 있다 하던데 그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
감택이 대답하였습니다.
‘무릇 영보란 것은 첫째는 근거할 만한 씨족이 없고, 둘째는 도를 이룬 처소가 없습니다. 그 교리는 깊숙한 골짜기에서 나왔으므로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은 깊숙한 곳에 살면서 마구 지껄여 댄 말이지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오나라 군주가 그 대답을 훌륭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말씀하신바 천존(天尊)이라는 호칭이 불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한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성인의 자취가 저들 전적에 시설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오경정사(五經正史)와 삼황(三皇) 이래를 조사해 보았는데, 그 두 곳에 다 따로 천존(天尊)이 있어 하늘 위에 머물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다만 주공(周公)은 예악(禮樂)을 제정했고 공자(孔子)는 시서(詩書)를 산정(刪定)했다는 것만을 서술하였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전(五典)과 삼분(三墳)에는 대라(大羅)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고, 전왕(前王)과 왕제(往帝)가 천존(天尊)에게 교제(郊祭)와 사제(祀祭)를 지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옥간(玉簡)을 잡고 황갈(黃褐)을 입고서 흰 머리털을 늘어뜨려 금관(金冠)을 쓰고, 특별히 천존(天尊)이라고 호칭하면서 구화전(九華殿)에서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홀로 대도(大道)를 칭탁하면서 칠영궁(七映宮)에서 통제하여 다스리겠습니까?
비록 도교에서 천존을 변론하고, 제자(諸子)들이 영보(靈寶)를 담론하고 있으나 이는 길에서 들은 말을 곧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니, 어찌 신빙성이 있는 말이겠습니까? 거리에 버려진 책은 국전(國典)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또 재의(齋儀)를 거짓으로 제정한 사적(事跡)을 찾아낼 수 있는데, 금과 은을 널리 진열하고 채색 비단을 양쪽으로 반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 모두는 삼장(三張:張角ㆍ張寶ㆍ張梁)의 속이는 술법이며, 수정(修靜:陸修靜)의 거짓말이라서 거기에 머무름을 배척하고 깨뜨리기 위하여 갖추어 언급한 것이 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또 도사(道士)라는 호칭은 도교[老敎]에는 이전에 없었으며, 하상공(河上公)의 이름도 유교[儒宗]에서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요서(姚書)에 말하기를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부진(苻秦)과 요진(姚秦)에 이르기까지 모두 많은 스님을 호칭할 적에 도사(道士)라고 하였다. 위(魏)나라 태무(太武) 시대에 이르러 구겸(寇謙)25)의 무리가 처음으로 도사(道士)의 이름을 도둑질하여 사사롭게 좨주(祭酒)의 칭호를 바꾸었다’고 했기 때문이니, 이 어찌 저의 억단(臆斷)이겠습니까? 사적(史籍)에 왕성하게 밝혀져 있는 사실입니다.
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문제전(文帝傳)」과 반악(潘岳)이 쓴 「관중기(關中記)」와 혜강(嵆康)26)과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고사전(高士傳)」과 방보로(訪父老) 등의 글에도 모두 하상공(河上公)이 풀을 엮어 암자(菴子)를 지었다거나 신통변화(神通變化)를 나타냈다는 곳이 없으니, 일들이 다 허망하고 잘못되어 전모(典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부질없이 화려하게 얽어 움쩍하면 권축(卷軸)을 이루곤 하였습니다.
지금의 주상께서는 그저 팔짱을 낀 채 조정에 앉아 도를 물으시는데도, 구족(九族)이 이미 친목하였고, 백성들을 평장(平章)하였으니, 이제는 삼장(三張)의 더러운 술법을 내치고 오천(五千)의 미묘한 문(門)을 천양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바른말을 거리낌 없이 하여[愕愕] 존안(尊顔)을 범하는 것은 주상께서 총명한 군주가 되기를 바라서이니, 만약 ‘예, 예’ 하면서 뜻을 그저 따르기만 한다면 성제(聖帝)를 혼군(昏君)으로 빠뜨릴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옵나니, 만승(萬乘)께서는 부디 보잘것없는 꼴이나 베는 사내아이[蒭蕘]의 말을 가납하시기를 바라면서 감히 한결같고 중정(中正)한 이 말을 진술하는 것이오니 티끌 같고 이슬 같은 천박한 말이나마 윤허하시어 높고 깊음이 더해지기를 바라나이다.”
유덕위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 제3권에서 말하기를, ‘양(梁)나라 고조(高祖)는 불교 경전[釋典]에 마음을 두고 기우(祈祐)에 몸을 버렸으며,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사생(四生)에 대하여 짐을 짊어진 듯이 생각하고 삼보(三寶)를 대들보[棟梁]처럼 생각하였으며, 척발(拓拔)씨는 정법(正法)에 빠져들었고, 우문(宇文)씨는 존용(尊容)을 훼손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마땅히 복을 쌓으면 경하스러움을 맞이하고, 악을 쌓으면 재앙을 초래해야 할 터인데도 어째서 위(魏)나라는 몇몇 자손만이 왕위에 올랐고, 주(周:宇文)나라는 여러 임금이 후사를 전했으며, 양나라는 후경(侯景)의 난리를 만났고, 수(隋)나라는 겨우 2대만에 멸망하였는가?
이로써 하늘의 도는 사사롭게 친함이 없어 갑자기 허천(虛闡)을 이룬다는 것을 알겠다. 음란하면 화(禍)를 받고 착한 사람에겐 복을 주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분명한가?
그렇지만 무슨 까닭에 불교를 손상하고 폐지한 사람은 도리어 오랜 나이를 누리고, 숭상하고 공경한 사람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모순이 있으니 그 정상(情狀)이 너무도 확연하게 버리고 취함이 저절로 어긋나니 족히 허망하고 잘못되었음을 알 만하지 않은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건대 도교(道敎)는 부질없고 허황하니 어떻게 세 가지 과보를 밝힐 것이며, 유교[儒宗]는 마음이 좁고 악착스러워서[偓促] 다만 일생을 서술하였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니(仲尼)가 계로(季路)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입니다.
‘산 사람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너는 오히려 모르거늘 죽은 귀신에 대하여 너는 어찌 그 일에 능한가?’
원굉(袁宏)27)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가(道家)의 부류들은 노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노자는 청허(淸虛)하고 담박(淡泊)한 것을 위주로 하고, 착한 이를 돕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祐善嫉惡]으로 가르침을 삼는다.’
그러니 아내와 자식을 기르고 부서(符書)28)를 사용하며, 화복(禍福)의 보응(報應)이 일생 동안에 있게 되니, 이는 모두가 구중(區中)에서 일상생활에 근접한 일들이지 상외(象外)를 벗어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순열(荀悅)29)은 크게 의심하였고, 사천(史遷:史馬遷)은 매우 의혹했습니다.
당(唐:堯)과 우(虞:舜)와 같이 최상의 성인에 이르러서도 단주(丹朱:堯임금의 아들)와 상균(商均:舜의 아들)을 낳아 길렀고, 고수(瞽叟:舜의 아버지)처럼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순(舜)임금을 낳았습니다.
안회(顔回)30)는 대단한 현인(賢人)이지만 일찍 절명하고 말았고, 상신(商臣:전국시대 秦穆王의 이름)은 지극히도 악했건만 자손이 번창하였으며, 도척(盜跖)31)은 방종하고 포악하였으나 복을 받으며 살다가 목숨을 마쳤고, 백이(伯夷)32)와 숙제(叔齊)33)는 지극히 어진 사람이건만 굶어서 죽었습니다. 장탕(張湯)은 가혹한 관리[酷吏]인데도 7대 동안이나 벼슬하였고 비간(比干)34)은 정직한 신하였는데도 일신(一身)이 도륙(屠戮)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예(例)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미혹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평범한 심정일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종각(種覺)을 유독 변지(遍知:正遍知)라고 호칭하는 것은 멀리 사생(四生)을 창도(唱導)하고 삼보(三報)에 대해 널리 알리며, 중생들로 하여금 번창한 의심을 안개 걷히듯 걷히게 하고 오래전부터 막힌 것을 구름 걷히듯 걷히게 하고자 하여 옥첩(玉牒)에 두루 진술하여 금언(金言)을 갖추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어떤 업(業)은 현재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괴로운 과보를 받는가 하면, 어떤 업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즐거운 과보[樂報]를 받는 이도 있으며, 어떤 업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나중에도 즐거운 과보를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업은 현재는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과보를 받는 이도 있다.’
혹은 남은 복이 있어서 다하지 않았으면 악을 바로 가(加)하지 않으며, 혹은 오래된 허물이 있는데도 오히려 착한 인연이 문득 일어나는 것이 마치 재가 불을 덮고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조용히 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또 무릇 착하고 악한 것이 분명한 현상이 없음은 기린이 싸워서 해가 이지러짐과 같고, 보응(報應)이 돌아감이 있는 것은 고래[鯨]가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별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다만 느껴 통하는 분수를 살핀다면 착하고 악함이 오는 것을 충분히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즉 소(簫)ㆍ양(梁)ㆍ주(周)ㆍ위(魏) 나라와 같은 유(流)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유덕위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 제4권에서 말하기를 ‘고조무황제(高祖武皇帝)’라고 말한 것은 조서(詔書)가 나온 이후에 논단(論端)을 지은 것 같다.
지금의 황제께서는 노담(老聃)을 숭상하는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주하(柱下:老子)를 받들어 따르고 도교의 위치를 불교보다 앞에 있게 하라는 칙명을 내리셨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조서의 내용을 굳게 거역하고 마음대로 파훼(爬毁)하는가? 사건이 이미 적지 않으니, 반드시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되 부질없이 일을 꾸며서도 안 될 것이며, 헛되이 붓과 먹을 번거롭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논문(論文)을 저술한 까닭은 본래 유진희(劉進喜)와 이중경(李仲卿) 때문이지 진실로 조서가 나온 이후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8년 이전에는 다만 시호(謚號)가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황제(皇帝)라고 말했고, 다음에는 한사(漢史)에 의거하여 태상황(太上皇)이라고 하였으며, 나중에는 임금의 시호가 반포된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태무(太武)라고 썼던 것입니다.
청컨대 제가 지은 논 제4권을 살펴보십시오. 밝게 지적하여 덕을 서술하였고, 다만 8년이라고 기록한 것만으로도 제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조서가 나온 이후에 파훼(爬毁)했겠습니까? 허황된 구석을 구하여 사실을 따진다면 죄가 돌아갈 곳이 있으리니, 바라옵건대 자세히 조사하여 살펴본다면 자연히 청백(淸白)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유덕위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 제5권에서 이르기를, ‘요장겸(姚長謙)의 책력[曆]에 말하기를, ≺부처님은 주(周)나라 소왕(昭王) 갑인(甲寅)년에 태어났고, 목왕(穆王) 임신(壬申)년에 멸도(滅度)하셨다≻라고 하였다’고 하고서 어째서 법현(法顯)이 지은 전(傳)에서는 ‘성인께서는 은왕(殷王) 때에 탄생하셨다고 하였으며, 상정기(像正記)를 추고해 보면, ‘부처님은 주나라 평왕(平王) 시대에 탄생하셨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도안(道安)은 논을 지어 환왕(桓王) 때에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고 고집하였고, 비장방(費長房)의 기록에서는 장왕(莊王) 시대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것으로써 전술(傳述)이 어긋나고 문란하여 정확하게 우러러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선후(先後)를 자세하게 밝히고 가깝고 먼 것이 같지 않은 이유를 밝히도록 하라.”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큰 성인이 응생(應生)하심은 본래 사물[物]을 이롭게 하기를 기약한 것이라서 감응이 있으면 나타나서 그 기미가 비추어 밝히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습니다.
‘일음(一音)이 창달[暢]하는 바에 각각 그 유(類)를 따라 이해한다.’
논성(論聲)이 이미 그러하므로 어체(語體)도 또한 그러하여 전기(傳記)에 밝힌 바가 이치를 배척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琳]는 지금 바른 것에 의거하여 저 여러 사람[家]들의 말들을 취해가지고 먼저 그 진실을 나열하고, 뒤에는 그 허망함을 진술하겠습니다. 삼가 위(魏)나라의 담모최(曇謨最)법사와 제(齊)나라 조정의 상통(上統)법사와 그리고 수(隋)나라 수력박사(修曆博士) 요장겸(姚長謙) 등에 의거하고, 주(周)나라 『목천자전(穆天子傳)』과 『주서이기(周書異記)』와 전한(前漢) 시대 유향(劉向)의 「열선전서(列仙傳序)」와 『고구이록(古舊二錄)』과 후한(後漢)의 『법본내전(法本內典)』과 부의(傅毅)의 『법왕본기(法王本記)』, 그리고 오(吳)나라 상서령(尙書令) 감택(闞澤) 등이 지은 많은 책들을 의거하였으며, 『아함경(阿含經)』 등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을 미루어 보았더니, 이는 희주(姬周)의 다섯 번째 군주였던 소왕(昭王) 가(瑕)가 즉위한 23년 계축(癸丑) 7월 15일에 흰 코끼리의 형체를 나타내어 신(神)이 내려와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정반왕궁(淨飯王宮)에 의탁하시자 마야(摩耶)부인이 수태(受胎)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한 시대의 『법본내전(法本內傳)』에서 말하였습니다.
‘명제(明帝)가 마등(摩騰)법사에게 물으셨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과 달을 알 수 있겠는가?≻
마등이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계축(癸丑)년 7월 15일에 음신(陰身)을 마야부인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대답했으니 바로 이 해입니다.
소왕(昭王) 24년 갑인(甲寅) 4월 8일에 람비(嵐毘)라는 동산 안에 있는 바라수(波羅樹) 아래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요경(普曜經)』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널리 큰 광명을 방출하시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비추었다.’
이는 곧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 말한 것입니다.
‘소왕 24년 갑인(甲寅) 4월 8일에 강(江)ㆍ하(河)ㆍ천(泉)ㆍ지(池)가 홀연히 범람하여 넘쳐흘렀고[汎漲], 바짝 마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모두 넘쳐흘렀으며, 궁전(宮殿)ㆍ인사(人舍)ㆍ산천(山川)ㆍ대지(大地)가 모두 진동(震動)하였다. 그날 밤에 다섯 가지 색깔의 광기(光氣)가 태미성(太微星)을 관통하였고, 서방(西方)이 두루두루 청홍색(靑紅色)으로 다 변하였다.
소왕이 곧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었다.
≺이 무슨 상서로운 조짐인가?≻
소유가 대답하였다.
≺큰 성인이 서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난 것입니다.≻
소왕이 말하였다.
≺이 천하에는 어떤 영향이 미치겠는가?≻
소유가 말하였다.
≺지금 당장은 특별한 일이 없으며 1천 년 뒤에 성교(聲敎)가 이 땅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소왕이 즉시 사람을 보내 사실을 돌에 새기고 그것을 기록하여 남교(南郊)의 천사(天祠) 앞에 묻어 두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바로 이해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왕 42년 임신(壬申) 4월 8일 밤중에 부처님께서는 성을 넘어 출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응경(瑞應經)』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태자가 19살 되던 해 4월 8일 밤중에 천인(天人)이 창문 틈으로 엿보고 합장[叉手]하고 말하였다.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로 인해 말을 타고 떠나셨다.’
이 해가 곧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바로 그 해입니다.
주(周)나라 제6대 임금 목왕(穆王)의 휘(諱)는 만(滿)인데, 그 2년 계미(癸未) 2월 8일 부처님의 연세 30이 되던 해에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셨으니, 그런 까닭에 『보요경』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살께서 명성(明星)이 뜰 무렵에 활연(豁然)히 크게 깨달으셨다.’
이 해가 곧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해입니다.
주나라 목왕 52년 임신(壬申) 2월 15일 부처님의 연세 79세 때에 비로소 멸도(滅度)하셨으니, 그런 까닭에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2월 15일 열반(涅槃)에 임박하였을 적에 갖가지 광명이 나와 대지(大地)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여 그 소리가 유정천(有頂天)에까지 이르렀고, 광명은 삼천세계에 두루 비추었다.’
이렇게 말하였는데, 곧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목왕이 즉위한 지 52년 임신(壬申) 2월 15일 이른 아침[平旦]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사람의 집을 뽑아 손상시키고 나무들이 모두 꺾이고 부러졌으며, 산천(山川)과 대지(大地)가 다 진동하였다. 그날 오후에는 하늘이 잔뜩 흐리고 먹구름이 까맣게 밀려오더니 서방에 흰 무지개[白虹] 열두 갈래의 길이 있어 남북을 통광하고 밤 내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목왕이 태사(太史) 호다(扈多)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가?≻
호다가 대답하였다.
≺서방의 큰 성인이 멸도하셨기 때문에 쇠퇴한 모양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가 바로 이해였습니다.
처음 소왕(昭王) 24년 갑인(甲寅)세에 탄생하신 이래로 지금 대당(大唐) 정관(貞觀:太宗의 연호) 기해(己亥, 639)에 이르기까지는 1618년[18년은 아마도 66년의 착오인 듯하다.]이 경과되었습니다.
법현(法顯)이 지은 전(傳)에서 말하였습니다.
‘성인은 은왕(殷王) 때에 탄생하셨다.’
이 말은 다만 법현이 아무리 외국을 유람하였다 하나 그 전은 의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연ㆍ월이 매우 다른 것이 그 차이가 마치 은하수와 같습니다.
또 도안(道安)의 을축(乙丑)년 설과 상통(上統)의 갑인(甲寅)년 설도 모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증험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또 상정(像正)의 기록은 의빙(依憑)할 만한 것이 드물게 나타나며, 안공(安公)이 지은 논은 구마라집(鳩摩羅¥)의 기록을 근거하였고, 구마라집의 기(記)는 안세고(安世高)를 이었으며, 안세고는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에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번역에 종사하였습니다.
진실로 집필자(執筆者)가 환왕(桓王) 때를 근거로 하였으나 다만 구마라집만은 진(秦)나라 때에 비로소 이 땅에 왔고, 안세고(安世高)는 한(漢)나라 조정 때에 먼저 여기에 이르렀으니, 두 스님의 시대 차이가 거의 300년이나 됩니다. 정말로 저들이 서로 계승하고 의지하여 기록하였을 뿐이니, 이는 안공의 논(論)이 어제 오늘에 잘못 진술된 것이 아니며, 아울러 당시 전한 사람의 잘못에 의한 것입니다.
또 수(隋)나라 때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던 학사[翻經學士] 비장방(費長房)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왕(莊王) 때에 태어나셨다.’
이 말은 비장방이 두 장왕은 같은 시대 임금으로서 주(周)나라 장왕(莊王) 10년은 곧 노(魯)나라 장왕(莊王) 7년이므로 단지 항성(恒星)을 근거로 하여 징험으로 삼아서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다’라고 말했으나 항성은 따로 다른 일을 연유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제[琳]가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槃經)』을 상고해 보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250년 뒤에 문수가 설산(雪山)에 이르러 5백 선인(仙人)을 교화하여 마치고, 본토(本土)로 되돌아가 큰 광명을 방출하여 세계를 두루 비추고는 열반(涅槃)에 드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항성의 상서로운 조짐은 곧 그 시기였습니다.
비장방이 말하기를, ‘2월 8일에 탄생하셨다’는 말은 4월이지 2월이 아닙니다. 비장방이 판단한 것은 사건의 근본을 연구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왜냐 하면 비장방이 말하기를, ‘주나라는 11월을 정월(正月)로 하였으므로 그 당시 4월은 지금 2월이 되니 비록 2월이라고 말했으나 끝내 이것은 4월이 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춘추(春秋)』 1부를 살펴보니 연(年)은 노(魯)나라 장공(莊公)의 연도를 썼고, 월(月)은 주왕(周王)의 월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항성(恒星)은 본래 주나라 시대의 상서[瑞]였으므로 반드시 주나라 때의 일ㆍ월을 근거로 해야 되는데도 장방이 곧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장왕 10년 2월 8일에 탄생하셨다’고 한 것은 아주 맹랑(猛浪)한 일이니, 만약 2월이라고 하려면 마땅히 항성을 거론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비장방이 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4월 8일에 인간 세계에 내려와 태(胎)에 의탁하셨다’고 하였는데, 태 안에 의탁하신 달을 이미 주나라 월력을 썼다면 현생(現生)하신 것도 다시 주나라 일진을 써야 하는데도 지금 2월이라고 말한 것은 이 또한 잘못입니다.
만약 주나라가 11월로 정월을 삼고 있다면 여래께서 2월에 태어나셨다고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이 정월에 태 안에 의탁하면 곧 10월에 태어나고, 4월에 입태하면 정월에 태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부동(俯同)하시어 7월에 입태하셨기 때문에 분명 4월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왕소(王劭)가 지은 『제지(齊誌)』에서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4월은 하(夏)나라의 6월입니다[주나라와 하나라 관계는 위아래에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4월에 태어나는 사람은 곧 7월에 입태한 것입니다. 지금 6월이라고 말한 것은 그 절기를 취한 것이니, 비록 7월을 지났다고는 하나 결국은 6월에 속한 것이므로 진실로 왕소(王劭)가 말한 것은 어긋나지 않았음을 알겠습니다.
또 비장방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주나라 혜왕(惠王) 19년 계해(癸亥) 2월 명성(明星)이 떠오를 때에 도를 이루셨다’고 하였는데, 또한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유향(劉向)의 『고구이록(古舊二錄)』을 조사해 보니, ‘주나라 혜왕 때에는 벌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점점 시작되고 있었으며, 150년 뒤에 노자가 비로소 5천 마디의 말을 설하셨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혜왕 때에 비로소 부처님께서 성불하셨다면 경교(經敎)가 경락(京洛)에는 전해지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헤아려 보건대 혜왕은 곧 장왕(莊王)의 손자이므로 계해(癸亥)년으로 미루어 보면 그 상거(相去) 기간이 오직 30년일 뿐이니, 처음 성불(成佛)하고 경교(經敎)가 이미 이 땅에 오지 못했어야 할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여래께서 세상을 교화[化世]하신 지가 49년이고 가섭(迦葉)이 결집(結集)한 것은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의 일입니다. 법문(法門)이 동쪽으로 들어온 것[東漸]은 바로 주(周)나라 때의 일이므로 유향의 말이 진실로 어긋나지 않았으며 비장방의 기록은 결코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무릇 성인이 응화하심은 방향이 없으시고 그 이치는 엿보아 헤아리기 어려운 일인데 더군다나 동서(東西)가 아득히 멀고 연대 또한 너무도 오래되었으며, 다시 육국(六國)의 종횡(縱橫)과 진(秦)나라가 오전(五典)을 태우는 일을 당함이겠습니까?
연대를 기록한 사람이 적지 않고 황제의 역(曆)을 서술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지만 그러나 서로 차이가 있고 증감(增減)이 출몰(出沒)하여 모두들 자신의 뜻을 스승 삼아 각각 지남(指南)이 된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저[琳]는 지금 보고 들은 것을 대충 기술하고 여러 역사에 기록된 것을 상세하게 살펴 간략하게 멀고 가까운 것을 진술하고 선후를 확실하게 드날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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