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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34 불교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상권

by Kay/케이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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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상권

 

임법사별전서(琳法師別傳序)


이회림(李懷琳) 지음


무릇 태극(太極) 원기(元氣)의 시초에는 삼광(三光)1)도 오히려 숨어 버렸고, 목황(木皇) 화제(火帝)2) 이후에야 팔괘(八卦)가 비로소 일어났다. 이로써 인의(仁義)가 점차 열리매 용도(龍圖)3)를 빌어서 글자가 생겨났고 도덕(道德)이 폐지되매 새 발자국으로 인하여 글[書]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좌사(左史)4)는 임금의 말을 기록하여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고(誥)와 서(誓)를 갖추었고, 우사(右史)5)는 일을 기록하여 당(唐)나라와 우(虞)나라의 전모(典謨:舜典ㆍ堯典ㆍ大禹謨 등)가 유행하게 되었다. 마침내 사천(史遷:司馬遷)6)은 『사기(史記)』의 문장을 엮었고, 반고(班固)7)는 반표(班彪)8)가 저술하던 『한서(漢書)』를 계승하고 영웅(英雄)과 고사(高士), 그리고 덕망 높은 사람[耆舊]과 일인(逸人)들의 전기(傳記)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풍토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와 마침내는 숭상하게 되었다.
더구나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법운(法雲)과 불일(佛日), 그리고 태어남도 없고 여의고 죽음도 여읜 묘유(妙有)와 진공(眞空)이야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지극한 이치가 응잠(凝湛)하고 또한 일의 자취가 방편에 호응[應權]한 까닭에 서쪽 변두리 나라[西陲:印度]에 성인이 탄생하시는 모습을 주(周)나라 왕에게 다섯 가지 광채를 보임으로써 알려 주었고9) 동하(東夏)로 불법이 들어오리라는 조짐을 한(漢)나라 황제가 장륙(丈六)의 형상을 꿈꾸는 것으로써 알려 주었다.10)
그러자 강개(慷慨)한 마등(摩騰:迦葉摩騰)11)이 군기(群機)에 호응하여 낙양에 들어왔고, 억양(抑揚:浮沈)을 거듭하던 승회(僧會:康僧會)12)가 대도(大道)를 체득하여 오(吳)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대대로 이러한 인물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영웅(英雄)이 태어났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양(襄陽)에 석법림(釋法琳)이라는 스님이 있었으니, 그는 사의(四依)13)에 자취를 잇고 오탁(五濁)의 생(生)에 호응하였으며, 팔장(八藏)14)을 마음속에 총괄하였고 구류(九流)15)를 가슴[胸臆]에 포괄하여 간직하였다.
그는 끊어진 실마리가 해이해지려고 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용수(龍樹)가 앞에서 빛냈던 일들을 찬술하였고, 무너져 버린 기강이 문란해지려는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마명(馬鳴)이 남겨 준 공렬(功烈)을 이었다.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주운(朱雲)이 난간을 꺾어버린 일16)과 같이 하였고, 숨김없이 면전에서 직간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왕상(王象)이 옷자락을 끌어당긴 일을 능가하였다.
용의 비늘[龍鱗:임금의 비위]을 거스르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진실로 빠른 바람에 맞서는 경초(勁草)와 같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니 정말로 계엽(季葉: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의 충신(忠臣)들과 같은 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과 언사[文言]는 넓고도 청아하였으니, 진왕(秦王)처럼 한 글자에 천금(千金)을 내걸어도 짝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17) 일의 이치를 널리 펼쳤으니 촉(蜀)왕이 천금을 내건다고 해도 족히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 유교와 불교의 군자가 이 도에 맛들인 자 적으며, 진실로 고상한 곡조에 화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얼마 못 가서 거의 없어져 버리지 않겠는가. 이때에 홍복사(弘福寺) 언종(彦琮) 상인(上人)이 있었으니 그는 성신(星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 승양(乘羊)의 해에 도를 체득하였고, 해악(海岳)의 영기를 받았으므로 무상(撫象)의 해에 덕을 길렀으며, 그의 뜻은 불도징(佛圖澄)ㆍ축법란(竺法蘭)과 같아서 삿된 무리를 꺾는 일에 마음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고, 그의 기량[器]은 도안(道安)ㆍ혜원(慧遠)과 균등하여 바른 교를 널리 펴는 것으로 마음을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금장(金章)과 꽃을 엮어 놓은 듯한 옥첩(玉牒)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미묘하게도 종지(宗旨)의 극치를 다하였고, 간곡하게도 깊고 오묘함을 다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청람(聽覽)하는 여가에 자집(子集)과 사서(史書)에 뜻을 두었고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 대해서도 종합하여 묶었으며, 유교와 묵가(墨家)까지 다 포함하였다.
그는 늘 임공(琳公:法琳)의 청아한 작품이 분산(分散)된 것이 많음을 안타깝게 여겨 덕 있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물어서 겨우 한 질의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이것을 상ㆍ중ㆍ하 세 권으로 나누어 만든 다음 제목을 별전(別傳)이라고 하였는데, 이치가 두루 잘 갖추어졌고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 빠뜨림이 없었으며,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보충할 것은 보충하는 등 법도 있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승려가 쓴 역사서 중에 가장 훌륭한 사료(史料)가 될 만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말을 기록하고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에 비하여 부끄러운 점이 많고, 강직한 필법과 올곧은 말을 함에 있어서는 진평(陳平)18)이나 범증(范增)19)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비로소 임공(琳公:法琳)의 초창(草創)을 징험하여 오직 한 시대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었으니, 상인(上人)의 윤색(潤色)은 곧 만승(萬乘)에 규모(規模)할 만하였다.
제자 적도(狄道:隴西郡에 있는 地名) 사람 이회림(李懷琳)은 언종(彦琮) 상인과 금란(金蘭)20)처럼 뜻이 서로 맞고 의리도 교칠(膠漆)이 부합(符合)하듯 하였으니, 비록 승려와 속인의 다름이 있긴 하지만 취미는 자못 같았으므로 이에 예를 올리고 배알함으로 인하여 우연히 보취(寶聚:無上道)를 관람하고 문득 광간(狂簡)을 펴서 서문을 지을 뿐이다.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상권


석언종(釋彦琮) 지음
김두재 번역


법사(法師)의 휘(諱)는 법림(法琳)이고 속성(俗姓)은 진(陳)씨이며, 영천군(穎川郡) 사람으로 중궁(仲弓)의 후손이다.
그의 먼 선조가 관직을 따라 양양(襄陽)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법사는 어린 나이에 세속을 떠났는데, 성정이 돈독하고 사물의 이치에 해박하였다. 그는 마침내 금릉(金陵) 초영(楚郢)에서 책을 짊어지고 다니며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하였으며, 공자(孔子)의 강사(講肆)와 석가(釋迦)의 법연(法筵)에서 경전을 펼쳐 보면서 도(道)를 찾았다. 그리하여 구부(九部)1)를 해박하게 깨달았고, 백가(百家)2)를 모두 통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말씀[金言]을 연구하고, 옥첩(玉牒)까지 다 섭렵해 보고는 늘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大丈夫)로 태어나서 올바른 것을 세우고 삿된 것을 꺾어서 지극한 이치를 법도로 만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멀리 용수(龍樹)보살에게만 부끄러울 뿐이겠는가. 아마 멀리 마명(馬鳴)보살에게도 부끄러운 일일 것이니, 암아(巖阿:산언덕)에 몸을 숨기고 구학(丘壑:산골짜기)에 마음을 깃들이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수(隋)나라 개황(開皇:隋文帝의 연호) 14년(594) 여름 5월에 청계산(靑溪山) 귀곡동(鬼谷洞)에 은거하였다.
그는 도교 서적[玄]과 유교 서적[儒]을 열람하면서 짧은 시간도 헛되이 버린 적이 없었다.
아득히 높은 바위 위에 지은 집은 해와 달을 가렸으며, 허공에 날아갈 듯한 들창문[戶牖]은 바람과 구름을 토해 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청계산기(靑溪山記)』를 지었는데, 8천여 마디의 말로 이루어졌으며, 이치와 취지가 확실하였고 문장[文詞] 또한 너무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지금까지 몇 대를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법사는 자신의 덕을 감추고 자신의 몸을 낮추었으며, 말은 어눌하게 하고[訥言] 행동은 민첩하게[敏行] 하였다. 그는 무너져 내린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고 맹세하고 풍화(風化)를 관찰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으니, 이때가 인수(仁壽:隋文帝의 연호) 원년(元年, 601) 봄 3월이었다.
그 무렵 그는 초(楚)나라 변방을 뒤로 하고 진(秦)나라 강을 건너 삼양(三陽) 지방을 돌아다니는 등 여덟 개의 강을 건넜다. 그는 그렇게 하면서도 ‘도교[李門]의 신선술[仙術]은 확락(㈂落)하고 허진(虛陳)하니, 조복(皂服:승복)을 입고서 관찰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능히 그 끝을 다 살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끝에 그는 마침내 의녕(義寧:隋煬帝의 연호) 첫해[初歲, 617]에 임시로 황건(黃巾)을 입고 도교 종지(宗旨)의 뿌리를 다 살필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을 따라 도관(道舘)에 기거하였다.
그러나 법사는 본래 『장자』와 『노자』를 익혔던 터라서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할 때면 그 말이 너무도 맑고 기이하여 도사(道士)들마다 다투어 친구[金蘭]가 되고자 하였으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그런 까닭에 삼청(三淸:道敎)3)의 비전(秘典)에 대하여 현묘한 이치[玄津]를 분명하게 통달하였고, 구부(九府)의 깊고 미묘[幽微]한 이치에 대해서도 긴요한 도를 다 궁구할 수 있었다. 그는 갈홍(葛弘)4)의 허망함과 장빈(張賓)5)의 허황된 뜻을 터득하여 가슴 속 깊이 간직하였고, 이씨(李氏:老子)가 석가를 받들어 모시고자 꾀하였다는 사실을 심목(心目)에 기억하였다. 무덕(武德:唐高祖의 연호) 첫해[年首, 618]에 다시 석종(釋宗)으로 돌아와서는 법회를 하는 자리[法筵]마다 참석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강론하는 자리[講肆]마다 두루 돌아다녔다. 마음속으로 신주(神州:중국)는 황제의 땅이라서 경계하여 바로잡기[箴規]가 쉬우리라는 생각 끝에 제법도량(濟法道장)에 머물면서 정혜(定慧:禪定)에 마음을 깃들였다.
그 후 4년(621) 가을 9월에 전 도사(道士)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에 황건(黃巾)의 무리로서 자신이 익힌 바에 따라 마침내 불법(佛法)을 폐지해야 한다는 열한 가지 조항을 상소(上疏)하였으니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석경(釋經)은 황당하고 허망하며[誕妄], 그 말은 요사스럽고 그 일은 은미하여[言妖事隱] 나라를 손상하고 집안을 망칠 뿐 세상을 유익하게 했다는 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오랑캐 불교의 삿된 교의를 물리쳐서 천축(天竺:印度)으로 되돌아가게 하시고, 사문(沙門)들을 추방하여 고향[桑梓]6)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이 나라와 가정이 번창하게 될 것이며, 노자와 공자[李孔]의 가르침이 널리 시행될 것입니다.”
고조(高祖)는 부혁이 올린 글을 받아들여 이내 조서를 내려 사문들에게 물었다.
“부모님께서 주신 수염과 머리털을 깎아 버리고, 군신(君臣) 간에 입어야 할 화복(華服)을 벗어버리는 일이 어느 문중(門中)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누구의 마음속을 유익하게 하는 일인가? 손해되고 유익함 두 가지의 일에 어느 것이 옳은지 행동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잘 해석해 주기 바란다.”
법사는 한가한 곳에 머문 지도 오래되어 생각이 장구(長衢:궁중)에 치닫던 중 다행히도 이러한 조서를 받고 그 질문에 대하여 마침내 진술하여 대답하였다.
“제가[琳] 듣기로는 ‘지극한 도[至道]는 말조차도 끊어지고 없다[至道絶言]’고 하였으니, 어찌 구류(九流:諸子百家의 學說)로 변론할 수 있겠으며,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다’고 하였으니 십익(十翼)7)으로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네 갈래의 세계[四趣]8)는 망망(茫茫)하여 탐욕의 바다에 빠져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삼계(三界)의 꿈틀대는 중생들은 삿된 산에 전도되어 떨어지며, 제자(諸子)들은 미혹하여 제 자신을 태우고 범부(凡夫)는 물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큰 성인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지인(至人:부처님)께서 그 때문에 강령(降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해탈(解脫)의 문을 열어 놓고 안온(安穩)한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분은 찰제리(刹帝利) 왕종(王種)으로서 부모[恩愛]에게 사직하고 출가(出家)하였으며, 천축(天竺)의 귀족(貴族)으로서 영화(榮華)를 버리고 도(道)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실달태자(悉達太子)가 곤룡(袞龍)을 버리고 복전(福田)의 옷을 갈아입고서 두 가지 생사(生死:分段生死와 變易生死)에서 벗어나기를 맹세하고, 한결같고 미묘한 열반(涅槃)을 구하겠다는 뜻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도를 넓혀서 네 가지 은혜[四恩]9)에 보답하고, 덕을 길러 세 가지 세계[三有]에 바탕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이익입니다.
『불본행경(佛本行經)』 「체발출가품(剃髮出家品)」의 게송을 살펴보건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령 은애(恩愛)로운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 산다고 하더라도
때가 이르러 명이 다하면 모였던 것이 이별하고 만다네.
이 무상(無常)하고 잠깐 동안인 것을 보았으니
그런 까닭에 내 이제 해탈(解脫)을 추구한다네.

그래서 그 덕을 흠모하는 사람은 악(惡)을 끊어 버리고 입신(立身)하며, 그 풍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善)을 닦습니다. 그런 까닭에 형체를 허물어뜨려 그 뜻을 성취하고자 일부러 수염과 머리털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를 버린 것이며, 풍속을 바꿔 그 도를 깨달아 알기 위하여 일부러 군신 간에 입는 화복(華服)을 버렸던 것이니, 비록 몸뚱이는 어버이 봉양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효도를 생각하였고, 예의로는 임금 섬기는 도리를 어겼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그 은혜에 공경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어버이에게 원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크게 순리[大順]를 성취하여 그 복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드러나 있는 세계를 적셨으니, 어찌 조그마한 어김에 구애되겠습니까? 최상의 지혜로운 사람[上智]은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 때문에 유익하게 되겠지만, 하열한 범부의 무리들은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기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惡)을 징계한다면 외람되게 날뛰는 사람들도 저절로 새로워지고 착한 데로 나아간다면 사람들에게 통하여 감화(感化)를 받게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폐하께서는 지극한 덕으로 넓게 포용하시고 어진 마음으로 중생을 잘 기르시는 분이시니, 이때에 마음을 바른 법[正法]에 내리시고 출가(出家)에 뜻을 두시어 자비로운 구름[慈雲]을 널리 펴고 부처님의 해[佛日]를 거듭 일으키시면, 중생을 유익하게 하는 길이 얻기 어려운 일이지만 충분히 얻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곧 대당(大唐) 황제의 과업이오니, 자비를 모든 중생에게 입히시면 성인 종족의 커다란 기반이 되어 그 은혜가 천 년 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감히 잠시라도 우매(愚昧)한 사람으로서는 경솔하게 천심(天心)을 헤아려 볼 수는 없을지라도, 삼가 용렬한 말을 시험 삼아서 시행해 보시고 대략 좁은 소견이지만 펼쳐 보소서. 외람되게 어람(御覽)을 더럽혔으니, 엎드려 깊이 두려워하나이다.”
그때 고조(高祖)는 법사가 대답한 글을 읽어 보고서도 끝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법사는 대궐에 자주 나아갔으나 훌륭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에 대한 답변을 받아내지 못했고, 단지 부혁[傅氏]이 진술한 일에 대해서만은 아직까지 고조가 반포하여 시행하라는 영(令)을 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부혁이 곧 자신의 글을 많이 베껴서 공공연하게 멀고 가까운 데까지 선포하는 바람에 스님[禿丁]들을 꾸짖는 소리가 마을 거리에 치성하게 퍼졌고, 오랑캐귀신[胡鬼]이라고 비방하는 소리가 술자리에까지 떠들썩했다. 그리하여 밝디 밝은 부처님의 해[佛日]는 가려져서 빛을 잃게 되었고 성대하고 왕성한 법의 흐름[濟濟法流]도 막혀서 윤택함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르러 밝게 통달했다는 군자(君子)들이 붓을 마구 휘둘러 글을 쓴 사람들은 더더욱 많아졌고, 이치에 계합하는 이름 있는 스님들마저 붓을 놀려 글을 쓰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총지도량(摠持道場)에 있던 석보응(釋普應)은 계행(戒行)이 정고(精苦)하고 사물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는데, 부혁의 광언(狂言)을 접하고는 『파사론(破邪論)』 2권을 지었고, 또 전 부구령(扶溝令) 이사정(李師政)은 부처님의 법에 마음을 귀의하고 현묘한 종지[玄宗]에 뜻을 돈독히 하였는데, 의로운 분란[義忿]이 가슴 속에 있었던 까닭에 그도 『내덕론(內德論)』과 『정사론(正邪論)』 두 논서를 지었다. 이 모두는 부처님의 교리를 소통하고 업연(業緣)을 자세하게 지적한 것으로서, 범언(梵言)을 다투어 인용하여 삿되고 바른 이치를 곡진하게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법사는 이 글을 지은 사람에게 물어가면서 모든 글을 갖추어 열람하고는 마음이 편안하지 못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은 부혁으로 인하여 이미 폐지된 것인데, 어떻게 폐지된 책을 인용하여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비록 삿된 것을 깨뜨려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이긴 하나 삿된 근원을 물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이제 공자와 노자 두 교의를 상고해 보니, 그들은 불교의 글을 스승처럼 공경하였다. 저들이 떠받들어 숭상한 것을 가지고서 저들의 허황하고 그릇됨을 배척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법사는 그로 인하여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으니 8천여 마디의 말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 이치는 궁(宮)과 상(商)10)에 맞아 떨어지고, 글 또한 종(鍾)과 율(律)11)에 조화를 이루었는데, 지금까지 전해져서 익히 보고 들은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그 글을 기록하지 않고, 법사의 필삭(筆削)이 청아하고 기이하여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도 으뜸이라는 것만을 밝혀 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조정의 어질고 고귀한 선비들까지도 모두들 이 글을 독송하여 마음속에 간직했으며, 세상을 버리고 숨어 있는 명망 있는 선비들도 집집마다 그 책 한 권씩을 간직하였으니, 진실로 사봉(詞峯)이 우뚝하고[峻峙], 이치의 바다[理海]가 매우 깊어서,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주항(舟航:배)이며 깜깜한 밤을 밝히는 밝은 등불이라고 할 만하였다.
법사께서 지은 이 논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것이었으므로 도속(道俗)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만약 그 실정을 널리 드러내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저 귀머거리 세속 사람들[聾俗]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5년(622) 봄 정월에 저후(儲后)에게 글을 올려 아뢰었다.
“아득히 삼원(三元:天ㆍ地ㆍ人)과 오운(五運)12)의 시초와 천황(天皇)과 인제(人帝)가 일어난 일, 그리고 구도(龜圖)와 조책(鳥∀)의 글[文], 금판(金版)과 단사(丹笥)의 전적, 육형(六衡)과 구광(九光)의 법도, 백가(百家) 만권(萬卷)의 서책을 살펴보았더니, 인륜(人倫)과 신의(信義)의 풍속을 따르고, 요순[勛華]13)과 주공ㆍ공자[周孔]의 가르침을 조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요점을 통괄해 보면, 나고 죽는 근원에 대해서는 통달하지 못하였고, 그 이치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있고 없음[有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어찌 오분법신(五分法身)14)과 삼명종지(三明種智)15)만 하겠습니까?
담연(湛然)하여 항상 즐거운데, 그 무엇이 변화하고, 그 무엇이 옮겨 가겠습니까? 아득한 저 진여(眞如)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도는 만유(萬有:중생)를 돕고 백령(百靈)에 자비를 입혀서 해탈피안(解脫彼岸)의 나루터를 열어주시고, 구경무위(究竟無爲:究竟涅槃)의 창고[府]를 열어서 군생(群生)을 고해(苦海)에서 건져 주시며 제자(諸子:중생)를 화택(火宅)에서 구제하십니다.
다만 교화가 총령과 황하[蔥河]에 막혀서 일천여 년이나 지나버렸습니다. 그 가르침이 한토(漢土)에 흘러 들어온 지 겨우 6백여 년인데, 그 사이에 감탑(龕塔)은 서로 마주 볼 만큼 많아졌고 신인(神人)은 발뒤꿈치를 이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안(道安)은 진(秦)나라 황제의 수레에 올라탔으며, 승회(僧會)는 오(吳)나라 군주의 수레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사는 높은 좌석에 올라 팔정도[八正]를 펼칠 수 있었고, 부도(浮圖)의 화상들은 오승(五乘)을 교설(巧說)할 수 있었기에 교화가 구주(九州)에 흡족하였고, 그 복이 삼세(三世)를 흠뻑 적셔 주었으니, 이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말은 곧 이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수(隋)나라는 운수가 침체되어 융마(戎馬:전쟁하는 말)가 근교에 나타나고 재앙이 사흉(四兇)16)에서 일어나서 그 해독이 백성들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지혜의 등불은 이미 숨어 버렸고, 법의 비[法雨]도 장차 거두어지더니, 우리 대당(大唐) 덕분에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감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소원에 화협(和協)하며, 하늘을 도와 삼상(三象:日ㆍ月ㆍ星)을 빛냈고, 땅을 얽어 오악(五嶽)을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민(生民)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은혜를 입었고, 석문(釋門)은 중흥(中興)의 혜택을 입어 비로소 육자(六玆)ㆍ오제(五帝)ㆍ사피(四彼)ㆍ삼황(三皇)을 받들어 순박한 풍속으로 되돌리시고 무위(無爲)의 교화를 행하시고 계십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부혁이 불교를 비방하고 헐뜯은 상소(上疏)에 대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아직 시행(施行)하지도 않은 것을 부혁이 공공연하게 두루[遠近] 유포시켜 사람들 사이와, 심지어는 술자리에서까지 앞다투어 희롱 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청아(淸雅)한 풍속에 누(累)를 끼치고, 아름다운 풍속을 더럽혀서, 중생들의 삿된 견해만 자라나게 하고 나라의 복전(福田)을 손상시키고 있으니, 그 이치가 옳지 못하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지난날 삼귀(三歸)에 의지하셨고, 또 오랫동안 십선(十善)을 의지하시어 창생(蒼生)들이 바라는 바에 부응하셨으며, 대보(大寶)의 기대에 호응하심으로써 도(道)에 화합하여 융평(隆平)해졌고 덕(德)을 빛내시어 후토(后土)에 부합하였습니다. 자주 우레 같은 음향을 발(發)하시면 닫혀 있는 집안의 문이 다 열릴 것이며, 밝은 태양과 같은 빛을 비추신다면 어둡던 거리가 모두 밝아질 것이오니, 그 광채[赫]와 아름다움을 뭐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로 한(漢)나라의 광명이 대[世]를 거듭하고, 주(周)나라의 복(卜)이 해[年]마다 지속되었듯이 길게 다시금 뜻을 복문(福門)에 내리시고, 마음을 수승한 경지[勝境]에 돌리소서. 진량(津梁)에 생각을 두시고 장참(牆塹)으로 마음을 삼으소서.
삼가 바라옵건대 삿된 견해의 깃대를 꺾으시고 정법(正法)의 등불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상법의 교화[像化]에 의지하는 바가 되리니 매우 다행스러움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분하고 답답하고 허전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삼가 『파사론(破邪論)』 1권을 올려 위엄을 더럽혔사오니, 엎드려 두려움에 호흡만 가빠지옵나이다.”
또 문제(文帝)가 세자로 있을 때 다시 계문(啓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제가[琳] 듣자오니 마음이 간절한 사람[情切者]은 그 소리가 반드시 애절하고, 이치에 똑바른 사람은 그 말이 반드시 정직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궁벽한 곳에 처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고달픔에 처해 있는 사람은 자기의 고달픈 처지를 널리 알리고자 애쓰는 법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대업(大業) 말년에 천하가 난리를 만나 이의(二儀:天地)가 참혹한 고통[慘毒]에 처하게 되었고, 사해(四海)가 들끓어서 파도가 기승을 떨치고 먼지가 휘날리며, 구원(丘原)이 모두 불타고 말았습니다.
오마(五馬)는 강물에 떠갈 길이 끊어졌고, 칠동(七童)은 성루[壘]를 평정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봉화불이 수시로 올라 경계하였고, 우격(羽檄)17)이 다투어 달려갔으며, 국경[關塞]에는 걱정이 많았고 전쟁[刀斗]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道)는 사라져 없어지고, 덕(德)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으며, 운수(運數)가 다하여 전쟁에 쓸 물자를 실어 나르느라 번거롭기 그지없었고,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으며[頭會箕歛], 쌓인 시체는 풀 더미와 같았고, 흐르는 피가 하천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졌고 온갖 사물들도 고달파 하였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어느 곳에 알리려고 해도 알릴 만한 곳이 없고 한 몸을 던지고자 해도 따를 곳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 괴로워하였고 온 나라는 주인이 없어서 피곤해 하였으니, 어찌 단지 법륜(法輪)만 그 메아리가 끊어졌겠습니까?
올바른 가르침조차 다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상(聖上)께서 세속을 위로할 마음을 일으키시고 호천(昊天)의 명을 따르시기 위하여, 마침내 의로운 깃발[義旗]을 펄럭이면서 이 세계[區宇]를 평정하셨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도속(道俗)이 혜택을 입었고 중국과 오랑캐[華胥]가 모두들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천지(天地)는 화합하고 팔풍(八風)18)이 서로 통하였으며, 음양(陰陽)을 헤아려 사계절[四序]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위로는 나라들을 화합시키고 아래로는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人倫]를 펴시니, 공덕은 하늘을 기워 덮었고 정신은 입극(立極:宇宙)과 짝할 만하였습니다. 단비를 내려 만물을 길러 내고 해와 달을 나오게 하여 밝게 비추시며, 성명(聲明)을 발하시고 문물(文物)로써 강기(綱紀)를 세우셨으니, 그 은혜는 마름과 갈대[荇葦]까지 적셨고 베푸신 혜택은 곤충과 고기[蟲魚]들까지도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구주(九疇)19)를 거듭 조술하시고 오교(五敎:五倫)를 다시 펴시기 위하여 석거(石渠)20)의 학문을 일으키시고 상서(庠序)21)의 기풍을 펴셨으니, 멀게는 복희와 헌원[羲軒]을 잇고 가깝게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와 같으십니다. 공업(功業)이 길이 융성하게 되었으므로 손발이 저절로 춤을 추고 뛰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부혁(傅奕)이 올린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부 다 펼쳐 읽어 보지 못했는데도 오장[五內]이 찢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듯하더니, 비로소 자세히 다 읽어보고 나니 육정(六情)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아! 슬프옵니다. 삿된 말이 바른 것을 현혹시키고, 마귀의 변론이 진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오히려 하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도 족히 들려줄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높으신 천청(天聽)을 범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부혁의 직책이 현재 중요한 지위에 있는 만큼 어느 누구든 보기만 해도 다 아는 인물일진대 어찌 인정(人情)상 가깝지 않다고 하여 죄 없는 사람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문장과 말이 천박하고 고루하며, 사건과 이치가 자세하지 못하여 선왕의 전모(典謨)22)를 욕되게 하고 인륜(人倫)의 풍범(風範)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무릇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꼭 맞는 말만 한다’는 말이 있으며, 또 공자[夫子]는 말하기를 ‘한마디 말이 이치에 맞으면 천하가 다 쏠릴 것이며, 한 가지 일이 법도에 어긋나면 아내와 자식까지도 배반한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올린 일에 대하여 관찰해 보고, 그 대체[大都]를 포괄적으로 정리하여 그 시말(始末)을 연구해 보았더니, 곧 대궐[闕庭]을 속이고 모독한 부분이 많았으며, 성인(聖人)을 헐뜯고 욕되게 한 것이 매우 절실하였습니다.
부혁이 그렇게 한 의도는 본래 이것을 구실로 삼아 구차하게 자신의 뜻을 진달(進達)하려고 한 것이니, 실로 국가에 보탬이 되거나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는 다만 조정이나 평민들[朝野]을 기롱하고 희롱하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하늘에 호응하고 시대에 순응하시어 도록(圖蠢:圖讖)을 장악하사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다다르셨고, 저 한 사람의 경사스러움까지도 담당하시고 계시옵니다.
위태로움을 부축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힘과 오랑캐를 평정하고 난리를 진정시키신 공은 진실로 그 위엄이 전왕(前王)들을 능가하고, 명성 또한 지난 시대의 임금들보다 높으십니다.
이에 다시금 삼보(三寶)에 마음을 두시고 복전(福田)에 뜻을 두시어 출가(出家)한 사람들을 예우하신다면 이 모든 하늘의 은택[天澤:임금의 은택을 말함]에 감동하여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승려들이 계행(戒行)을 따르고 받들어서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게다가 무식(無識)한 무리들이 비행과 잘못을 저질러 죄를 지음으로써 부혁으로 하여금 이렇게 악한 말을 진술하도록 빌미를 제공했으니, 가슴을 치고 발로 땅을 구르면서[擗踊] 통곡하고 가슴 아파서 해골을 던지고자 해도 그럴 수조차 없사옵니다.
그렇지만 승니(僧尼:比丘ㆍ比丘尼)에게 죄가 있다면 극형(極刑)도 달게 받겠사오나 한스러운 일은 부혁이 경솔하게 성인을 욕보인 언사(言辭)가 절실하게 해를 끼친 일이며, 깊이 염려되는 일은 삿된 견해를 지닌 무리가 이로 인하여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무식한 무리들이 점점 다른 견해를 내는 일이옵니다.
또 상고해 보았더니 『춘추(春秋)』에는 ‘노(魯)나라 장공(莊公) 7년 여름 4월에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깜깜한 밤이 대낮처럼 밝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곧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서응(瑞應)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진신(眞身)과 응신(應身) 두 가지의 몸이 있으시고 권지(權智)와 실지(實智) 두 가지의 지혜가 있으시며, 삼명(三明)ㆍ팔해(八解)ㆍ오안(五眼)ㆍ육신통(六神通)이 있으시기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하였으며, 법호(法號)는 심행처멸(心行處滅)이었습니다. 그 부처님의 도(道)는 숱한 아라한[聖]을 니원(泥洹)으로 운반하셨고, 그 힘은 하열한 범부를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영평(永平) 13년(70) 꿈에 금인(金人)을 본 뒤로부터 汁상교(像敎)가 동쪽으로 흘러들어왔는데, 이렇게 신령스러운 상서로움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기록은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등 여러 사서(史書)와 요석(姚石) 등의 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안(道安)과 도생(道生)의 무리와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汁)의 부류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높은 도행과 깊은 지식이 있어서 당세(當世)의 명승(名僧)으로서 군왕(君王)들께서 알아보시고 귀하고 훌륭하게 여겨 숭상하고 정중하게 여김을 입었습니다.
5백여 년 이래로부터 사탑(寺塔)은 구주(九州)에 두루 퍼져 있었고, 승니(僧尼)는 삼보(三輔23)에 넘쳤습니다. 아울러 그 당시 군왕들이 공경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조정이나 평민[朝野]들 모두가 마음으로 귀의하여 상교(像敎)가 흥행(興行)하여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인왕(人王)의 힘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임금과 신하[君臣], 아버지와 자식 간에도 은택을 보답하기 어려우니, 그것은 끝없는 하늘 같아서 그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부처님은 곧 중생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오신 자부(慈父)이시며, 또한 범성(凡聖)의 훌륭한 의사[良醫]이신데, 억눌러 꺾으려 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 욕보이려고 하니, 도리상 옳지 못하옵니다.
여래(如來)를 우러러 살펴보건대 그 지혜는 있고 없음[有無]을 벗어나셨으니, 어찌 삼황(三皇:伏羲ㆍ神農ㆍ燧人)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일 것이며, 그 공(功)은 창조물[造化]들을 감싸셨으니, 어찌 이의(二儀:陰과 陽)로써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열자(列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오(吳)나라 태재(太宰:帝相) 비(嚭)가 공자[孔丘]에게 물었다.
≺공자[夫子]는 성인이십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많이 알고 애써 기억할 뿐 성인은 아닙니다.≻
또 물었다.
≺그러면 삼황(三皇)은 성인이십니까?≻
대답했다.
≺삼황은 지혜와 용기[智勇]는 훌륭할지언정 성인인지는 저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물었다.
≺오제(五帝)는 성인이십니까?≻
대답하였다.
≺오제는 인(仁)과 신(信)을 잘 썼을 뿐 성인인지는 또한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삼왕(三王)은 성인이십니까?≻
대답하였다.
≺삼왕은 때를 잘 이용하신 분들이지만 성인인지는 역시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재 비가 매우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성인이란 말입니까?≻
공자가 몸을 추스르면서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로는 서방(西方)에 성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다스리지 않아도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아무 말이 없으셔도 저절로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실천하니, 너무나 드넓고 커서 백성들로서는 무어라 이름붙일 수가 없다고 하더이다.≻’
그러니 만약 삼황(三皇)과 오제(五帝)가 틀림없는 큰 성인이라고 한다면 공자가 어찌 숨긴 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혹시라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면 문득 성인을 숨겼다
는 허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비교하여 헤아려 본다면 부처님만이 큰 성인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천축(天竺) 땅을 화유(化遊)하시다가 완전하게 열반에 드셨다.’
이 말에 대하여 부자(符子)가 말하였습니다.
‘노씨(老氏:老子)의 스승 이름은 석가문(釋迦文)이다.’
오히려 공자와 노자의 경서에도 이같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공경했다는 내용이 문장 곳곳에서 적지 않게 증명되고 있거늘 어찌 부혁[奕] 한 사람만이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능사로 한단 말입니까?
옛날 공손룡(公孫龍)이 『견백론(堅白論)』을 지어 삼황(三皇)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오제(五帝)를 그르다고 비난하였는데, 오늘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를 갈고 있으니, 이것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진실로 불쌍할 따름입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흠명(欽明)하시어 비로소 마소[馬牛]를 풀밭에 풀어 놓아 쉬게 하셨으며, 마을을 지나면서는 수레 안에서 예를 올리고[軾閭] 묘를 봉하심으로써[封墓], 황왕(皇王:三皇과 三王)의 기풍을 일으키고 석로(釋老:석가와 노자)의 교화를 열고자 하시니, 그렇게 하시려거든 광간(狂簡)한 말은 더더욱 태워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왕(帝王) 시대에는 불교가 없었는데도 크게 다스려지고 왕의 재위기간[日]도 길었는데, 불교가 있었을 적엔 정사가 포악했고 나라의 복도 짧았다’고 하였습니다.
상고해 보았더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그 자신 한 대만 다스렸을 뿐 자손들에게 물려주지는 못했으며, 하(夏)ㆍ은(殷)ㆍ주(周)ㆍ진(秦) 시대엔 왕정(王政)이 자주 바뀌어서 소장(蕭牆:大殿 안의 병풍) 안에서 역란(逆亂)이 잦았습니다. 그때에는 불교가 없었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국운[運]이 그리도 짧았습니까? 다만 임(琳:法琳) 등은 요(堯)임금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부족함 없이 쓰고 있으면서도 미처 모르고 있지만, 먼 지방 변두리에 있으면서 부혁이 올린 일을 본다든가, 변방 나라들이 먼 데서 듣거나 하면 중국[華夏]을 무식(無識)하다고 말할까 염려되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言]이 천하에 가득해도 허물을 말하는 이 하나도 없고[言滿天下無口過], 행동이 천하에 가득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行滿天下無怨惡].’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게 하고자 함이고, 이 말은 듣는 사람에게도 스스로 경계하게 하고자 함이었는데, 부혁이 내뱉은 말은 불손(不遜)하기 그지없어서 그 말을 듣는 이들이 모두 다 놀라는지라, 국가의 기풍을 더럽히고 중국의 풍속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이기에 삼가 충성스런 마음을 기록하여 두려움을 무릅쓰고 계문(啓聞)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전하(大王殿下)께서는 천품이 뛰어나고 영특하시며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시고, 풍신(風神)은 영월(穎越)하고 재능과 도량[器局] 또한 넓으시며[含弘],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저 동쪽을 평정하셨고, 온화하고 평안함으로 기쁨을 삼아 비로소 서초(西楚)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게다가 아형(阿衡)24)과 백규(百揆)25) 혹은 서육조(序六條)26)로써 정치를 하셨으니, 덕망은 이미 수레의 차일을 걷어 올리기에 이르렀으며, 어질기는 그물을 찢는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강장(康莊)의 집을 열어젖히고27) 순경(荀卿)을 손님의 자리에 앉혔으며,28) 수죽(修竹)의 동산을 일으켜서29) 문아(文雅)한 손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시니30) 시(詩)는 정(情)을 따라서 극치를 이루었고 부(賦)는 물(物)을 체득하는 데 다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칭찬할 만한 일로 조야(朝野)에 나타났고 아름답기는 지난날 영특한 이들보다도 더 뛰어나십니다.
다만 임(琳) 등이 안으로 잘못한 일[闕如]을 되돌아보니 여러 모로[方圓] 쓸데없는 짓이었으나 이제 부혁이 어리석고 우매하기 그지없어서 스님들을 까까머리라고 꾸짖음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질게 꾸짖음이 극에 달하였으니 그 죄가 이보다 더 큼이 없사옵니다.
존로(尊盧)와 혁서(赫胥)31) 이래로 천지가 개벽(開闢)한 이후 부혁처럼 미치광이 같고 패악한 자는 없었습니다. 뼈를 끊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뜻을 감당[任]하지 못하여 삼가 부혁이 올린 일을 기록하고, 문득 비천한 말들을 기술하였사옵니다. 그 사건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하여 전하의 위엄을 더럽히고 모독하였사오니 엎드려 운절(殞絶:죽음)을 더할 뿐이옵니다.
삼가 아뢰옵니다.
무덕(武德) 6년(623) 5월 2일 제법사(濟法寺) 사문 림(琳) 등은 계상(啓上)하나이다.”
그 때 황태자[皇儲] 등이 법사가 주청한 논(論)을 올렸는데, 그로 인하여 고조(高祖)는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부혁[傅氏]이 진술한 일이 이로 인하여 점점 침체되었고, 석문(釋門)은 다시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황제의 힘을 입었기 때문이다. ‘나를 흥기시키는 자가 상(商)이로구나’라고 한 말은 곧 법사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다만 부혁이 올린 상서의 광간(狂簡)함은 임금[闕庭]에 아첨하기를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이미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은밀하게 참소하는 말을 베풀고 황령(黃領:도교)을 구결(構結)하고 선동(扇動)하여 이단(異端)을 천착(穿鑿)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제로 하여금 서박(鼠璞)이 주방(周邦)에서 본질이 뒤섞이게 하였고, 계봉(鷄鳳)이 초국(楚國)에서 형상을 혼잡하게 하였으므로 옥과 돌을 가리기 어렵게 만들고 붉은 색과 자주색[朱紫]을 분간하기 힘들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석종(釋宗)을 참소하는 말을 고조(高祖)에게 주달(奏達)하였다. 황제는 마침내 그가 의논한 바를 따를 뿐 스스로 밝혀 깨닫지 못하고, 무덕(武德) 9년(626) 봄 3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황태자에게 물었다.
“짐(朕)이 생각해 보니 불교가 흥기하게 된 유래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였다. 다만 승니(僧尼)가 도(道)에 들어가면 본래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세금도 내지 않으며, 정역(丁役:군대)까지도 다 면제받으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관(寺觀)에서 그 몸을 다하고 덕을 실천하여 참답게 살아야 할 것이며, 석문(釋門)에 목숨을 맡겨 몸을 깨끗이 하고 본심을 잘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사문(沙門)들이 대부분 허물이 있어 조장(條章:법)을 어기고 범하며, 정술(正術)을 간섭하고 번거롭게 함으로써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나 교화에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옳지 않은 도[左道]를 닦고 있다.
부처님의 계율에, 비록 계율을 어긴 자에 대하여 엄격하게 죄를 주는 제도가 있기는 하나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전혀 없다. 이것으로써 살펴본다면 이는 참다운 진리가 아닌 듯하다.
이제 형상(形像:불상)을 흩어 제거하고 승니(僧尼)를 폐지하여 없애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렇게 하면 이 말을 들은 자가 놀랄까 두려우니 너의 명철한 말을 기다려 가부를 결정하고자 한다.”
황태자[皇儲]가 말하였다.
“신이 듣자오니 삼승(三乘)의 수레바퀴를 열면 모든 사람들이 화택(火宅)의 재앙을 면하고, 팔정도(八正道)의 근원을 열면 군생(群生)이 무위(無爲)의 과(果)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자비로운 구름[慈雲]이 비를 내려 윤택하게 할 적에 쑥과 난초[艾蘭]를 구별하지 않으며, 지혜의 해[慧日]가 빛을 흘려 비춤에 어찌 언덕과 골짜기[岸谷]에 차별을 두겠습니까?
또 가르침을 세워 모범을 보이실 적에 미묘(微妙)한 이치를 다하였으나, 지극한 이치는 너무도 깊고 어려워 일반 생각[情量]을 가지고서는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비록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유술(儒術)과 장자(莊子)와 노자(老子)의 현풍(玄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장차 여기에 비교하고자 한다면 너무도 거리가 멀어 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세대에 현사(賢士)와 금고(今古)의 명군(明君)들도 모두 다 따르고 숭배하였으며 어김없이 공경하고 흠앙하였는데, 지금 이때는 요행이나 바라고 거짓말이나 하는 시대인지라 사람들이 교활(狡猾)한 이들이 많사옵니다. 출가(出家)한 사람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법에 들어간 자[入法者]들도 간교하고 음란함을 없애지 못했는데 또한 법이 있어서 세금을 면제받고 있습니다. 또 저들은 거짓으로 도를 배운다고 핑계 대고 아침저녁으로 평안하기만을 탐하면서 상문(桑門)의 호칭을 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위의(威儀)를 구족함이 있으면 뜻은 맑은 구슬[明珠]과 같아질 것이고, 계행을 잃지 않으면 마음은 청결한 옥[潔玉]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제 저들을 모두 환속(還俗)하게 하려고 하면서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려고 하시니, 다만 염려되는 것은 곤산(崑山:崑崙山)에 불을 지르면 옥(玉)과 돌이 한꺼번에 다 타버리고, 내원(柰苑)에 서리가 내리면 난초와 쑥[艾]이 모두 다 꺾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목조목 지적해서 말씀드리오니 이것은 황제의 교화에 손상이 갈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지금 여래를 꾸짖고 벌을 내려 간사한 무리를 잠재우려 하시는데, 부처님의 성품은 자비(慈悲)할 뿐만 아니라 법문(法門)은 평등하여 저것이다, 이것이다[彼比] 하는 것도 없고, 나와 남[我人]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애욕을 끊고 미워함을 잊어[絶愛忘憎] 그 정(情)은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분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애석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근심을 끼치는 사람에게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분명하게 징험할 수가 있습니다.
또 상균(商均)32)은 순(舜)임금의 집에서 태어났고, 단주(丹朱)33)는 요(堯)임금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이 두 아들은 비록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두 임금의 성스러움을 이지러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어리석은 승려들의 허물로 인하여 존상(尊像)을 헐어버리려고 하시니, 나아가서 헤아려보고 물러나 헤아려 보았으나 그 이치가 옳지 못하옵니다.”
고조(高祖)가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부혁은 늘 짐(朕)에게 말하기를 ‘부처의 가르침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짐이 그의 의견을 따르려고 하는데, 경(卿)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때 좌복야(左僕射) 위국공(魏國公) 배적(裵寂)34)이 고조(高祖) 앞에 나아가 간(諫)하였다.
“신은 들으니 옛날에 제(齊)나라 환공(桓公)35)이 관중(管仲)36)ㆍ포숙(鮑叔)37)ㆍ영척(寗戚) 등과 술을 마시고 놀았는데 환공이 포숙에게 말했습니다.
‘과인(寡人) 등을 위하여 축배 합시다.’
포숙이 술잔을 받들어 축원하여 말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는 거(莒)나라에서 쫓겨나셨던 일을 잊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관중은 노(魯)나라에 결박되어 있었던 일을 잊지 말기를 바라며, 영척은 소 먹이던 그때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때 환공은 자리를 조금 비켜 앉아 사례하며 말했습니다.
‘과인과 두 대부(大夫)가 모두 부자(夫子:鮑叔)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제(齊)나라의 사직은 틀림없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즉 이와 같은 대화는 항상 옛 일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지난날 의로운 군사[義師]를 처음으로 일으키셨을 때에 뜻을 삼보(三寶)에 의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임금의 위치[九五]38)가 안정되면 맹세코 현문(玄門)을 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폐하는 육합(六合:天地와 사방)을 인(仁)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부(富)하기로는 사해(四海)를 두셨는데, 부혁의 광간(狂簡)함을 받아들이고 불교와 승려들을 헐어 폐지하려고 하시니, 이는 곧 폐하의 지난날의 믿음을 이지러지게 하는 것이고, 폐하의 현재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백성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니 이치가 옳지 못하옵니다.”
그러자 고조는 황태자 등이 간(諫)한 말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경사(京師:서울)에 세 곳의 사찰만 남겨 두고 승려도 일천 명만 머물게 할 것이며, 나머지 사찰들은 모두 왕공(王公)에게 하사하고 승려들은 내쫓아 고향[桑梓]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준엄한 칙명이 이미 내려진 이상 잘잘못[皁白]을 구분하기란 어려웠으니 감히 뜻을 거역하여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여름 5월 6일에 고조가 만기(萬機:국정)를 버리고 퇴위(退位)하자 문제(文帝)가 섭정(攝政)하게 되었고, 그때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서 신거(神居:神仙이 거주하는 곳, 여기서는 사찰)로 돌아가게 하니, 불일(佛日)이 다시 드날려 이때부터 번성하게 되었다.
또 전에 부혁이 은밀하게 도교[黃巾]를 선동함으로 인하여 급기야 도사(道士) 이중경(李仲卿)과 유진희(劉進喜) 등이 자신들의 좁은 소견[管見]을 다 진술하고, 아울러 용렬한 글을 써서 마침내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과 『현정론(顯正論)』 등의 논서(論書)를 지어 불성(佛聖)을 폄하하여 가늠하고[貶量] 생령(生靈)을 혼미하게 덮어 가렸는데, 말은 전모(典謨:法度)를 벗어났고 행동은 경사(經史)에 어긋났었다.
법사께서 그들의 저술을 자세히 살펴보시고는 슬퍼하면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 답답한 마음에 논문(論文)을 짓고, 그 제목을 『변정론(辯正論)』이라고 하였다. 법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기묘한 인물로서 사물에 대해 해박하게 알아서 하루도 채 안 걸려서 이 논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 시대는 문적(文籍)이 부족하여 우물쭈물하며 여러 해를 보냈는데, 우복야(右僕射) 채국공(蔡國公)과 두여회(杜如晦)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으며, 기우(器宇:德量ㆍ度量)가 크고도 깊어 법사와 더불어 그 뜻이 강호(江湖)에 돈독하여 오랫동안 서로 흠미(欽味)하였기에, 법사가 분소(墳素)39)를 빌어다가 두공(杜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법림(法琳)은 초의(草衣)를 걸치고 사는 야객(野客)으로서 나무 열매나 따먹고 사는 산인(山人)입니다. 구류(九類)40)에 구부러진 바늘[曲鍼:쓸모없다는 말]이며 진실로 썩은 겨자와 같은 존재라서 당세(當世)에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분수가 이 몸을 마칠 때까지 입을 다물어야 할 처지입니다.
이미 덕(德)은 내실을 기하기에 부끄럽고 명예는 밖을 만족시키기에 부끄럽습니다.
비단 혜원(慧遠)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로 도안(道安)에게도 누(累)를 끼쳤습니다.
이런 까닭에 푸른 계곡[靑溪]에서 뜻을 다하고 붉은 일산[紫蓋]에 마음을 귀의하여 소나무로 뒤덮인 바위 아래에서 영원토록 경서(經書)나 음미하고 귀신 우는 골짜기 연못가에서 오래도록 물고기와 새를 관찰하려 하였거늘, 어떻게 갑자기 숲속을 하직하고 다시 시끄러운 티끌 세계에 들어가겠습니까?
오래도록 진천(秦川)을 떠돌다 보니 어느 새 초(楚)나라 변경을 떠났고, 팔수(八水)에 부평초[萍]처럼 떠다니다가 낙엽 지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습니다.
먹고 사는 데[口服] 끄달리는 폐단에 빠져 버리고 말았으니 중숙(仲叔)의 정(情)41)이 머리에 남아 있겠습니까? 영대(靈臺)에 누워도 회한만 일고, 백사(白社)에 노닐어도 탄식만 일어납니다. 남쪽 둥지를 그리워하는 마음[南巢之戀: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곱절이나 더하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슬퍼함은 더욱 더 간절합니다.
태어난 세상이 불우하고[居生蠱*] 타고난 기질이 우둔해서[稟命飴遽*] 부질없이 일곱 가지 슬픔만 읊어대고 공연히 아홉 가지 탄식만 읊고 있으니, 몸을 어루만지고 그림자를 위문하나 운명인 것을 어찌하오리까?
게다가 질병의 근원이 고황(膏肓)42)에 있고 바람[風]은 살갗 속[腠裏]에 얽혀 있어 여러 해 동안 휴식을 취하였으나 조금도 차도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심지어는 눈빛에 비추어 보고[照雪] 반딧불을 모으려[聚螢] 해도 근력이 이미 떨어지고 구류(九流)와 칠략(七略:前漠劉向의 저서)에 들어가기는 나무에서 고기를 찾는 것만큼이나 너무도 어려우니 만 권(卷)의 백가(百家)가 있다 한들 아득하기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번에 부혁[傅子]으로 인하여 그저 그런대로 비연(斐然:글)을 올린 적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삿된 근원을 다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변정론(辯正論)』을 거듭 지은 것입니다. 자못 갖추어지지 못한 경서와 충분하지 못한 사적(史籍)을 채우기 위해 비록 짧은 생각이나마 다해 보았으나 바로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복야공(僕射公)께옵서는 주책(籌策)의 재주를 운영하는 능력이 있어 아형(阿衡)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으시며, 사람을 알아보시는 거울 같은 안목은 멀리 산과 파도[山濤]보다도 더 높고 넓으시며 선비를 접대하는 마음은 도리어 조무(趙武:춘추전국시대의 재상)에 비교할 만하십니다.
기풍과 자태[風姿]는 맑고도 밝으시며 식견과 도량[識度]은 크게 함용하시어 이미 영사(靈*:龍)의 여의주를 잡으시더니 마침내 형산(荊山)의 옥(玉)까지 몸에 차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치단결하여 임금을 도와 많은 공을 세우셨고, 재상으로서 국가를 다스려 빛나고 왕성하게 하셨으며, 덕(德)은 진신(搢紳)들의 귀감이 되셨고 명예[譽]는 조야(朝野)에 나타나셨습니다.
더욱이 가문은 필해(筆海)43)라고 불리고 세호(世號) 대대로 사종(詞宗)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오랜 옛날의 생각을 잊지 않으시고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을 방문하시어 곡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차갑게 식은 재가 다시 따뜻하게 피어나고, 썩은 나무가 다시 꽃이 피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왕찬(王粲)44)은 책을 열람하다가 채씨(蔡氏)에게서 근본 바탕을 취하였고, 상여(相如:司馬相如)45)는 시부(詩賦)를 완성할 적엔 반드시 양웅(楊雄)46)의 힘을 입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건대 다만 이 제자(諸子)들의 잡서(雜書)와 진(晋)나라와 송(宋)나라 이래로 내외(內外)의 문적(文籍)이 석전(釋典:佛書)과 서로 관련된 곳이 있으면 그것들을 다 열람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삼가 따로 기록을 올리나니, 부디 은혜로써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경솔하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이렇게 간청하였사오니, 송구스러운 마음 어찌 다하오리까?
그러나 삿된 견해와 신심(信心)은 옛날부터 함께 있어 온 것인데 착한 사람과 악한 무리가 오늘날이라고 어찌 없겠습니까?
지난번에 부혁[傅子]의 아첨하는 말 때문에 대략 적은 작은 논서를 올렸는데, 이미 임금에까지 전달되어 다시 칭찬까지 입었으므로 감사함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사오나 다만 덕이 없는데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옛날 『삼도부(三都賦)』47)는 장화(張華)48)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무도 보고 감상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지금 『파사론(破邪論)』도 군자(君子:蔡國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느 누가 즐겨 소중하게 여기기나 했겠습니까?
근자[比者]에 해내(海內)의 모든 고을과 사방의 도속(道俗)들이 유통(流通)하고 베껴 쓰면서 찬탄하고 읊어 대며 문장을 이루어 삿된 견해의 마음을 돌려놓았으니, 어리석은 사람의 선(善)함을 발함이 어찌 명공(明公)의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중생들을 이롭게 하여 깊은 공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러러 장엄함을 써서 아울러 장차 회향(迴向)하고자 할 뿐이옵니다.”
두공(杜公)은 그때 법사의 편지에 회답하였다.
“외람되고 욕되게 꽃다운 편지[芳符]를 받고 보니 이끌어 불식(拂拭)시키고자 하는 말씀이 간곡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아름다운 말씀[嘉言]을 갑자기 내리시니 명심하고 공경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더욱더 깊어집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법사께서는 한 세대에 뛰어나시고[命世] 우뚝하게 태어나셨으며, 신령한 마음[神襟]은 준일(俊逸)하시고 기국(器局)은 크고도 진실하시며, 식견과 도량[識度]은 맑고도 굳셉니다.
불도징(佛圖澄)ㆍ구마라집(鳩摩羅*)과 나란히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게 비추고, 도안(道安)ㆍ혜원(慧遠)과 함께 뒤를 빛나게 하셨습니다.
미소 지으며 하시는 말씀은 한나라 날짜[漢日]보다 더 길며, 능변(凌辯)은 진나라 해[秦年]보다 더 성대합니다.
이미 안으로는 오승(五乘)이 풍부하여 지식이 팔만장경을 다하였으며, 또한 마침내 밖으로는 백씨(百氏)를 다 통괄하여 식견이 구류(九流)에 통달하셨습니다.
게다가 학문은 장씨의 미묘함[莊微]을 다하였고 문장은 이씨의 오묘함[李奧]을 다하였으며, 이갈(二葛)의 와간(訛簡)을 체득하였고 삼장(三張)의 궤문(詭文)을 궁구하였습니다. 소보(巢父)49)와 허유(許由)50)를 영양(穎陽)에서 사모하고 상락(商洛)에서 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51)의 뒤를 이었습니다.
자대(紫臺)에 숨어 한가롭게 노닐고 청계(靑溪)에 은둔하여 노래를 읊으니 쓸쓸하고 한가함[蕭散]은 혜원(慧遠)의 풍모를 닮았고 구속받지 않는 언행[放曠]은 도융(道融)의 자취에 참예하였습니다.
이윽고 정감은 끊어진 매듭[絶紐]을 유지하고 뜻은 무너진 기강[頹綱]을 잇고자 하여 마침내 산문(山門)에서 발걸음을 돌이켜 상국(上國)으로 오셨습니다. 부혁의 광간(狂簡)한 행동을 보시고 이미 『파사론(破邪論)』을 지으셨으며, 유진희(劉進喜)와 이중경(李仲卿)의 그릇된 말[忝言]에 맞서 장차 『변정론(辯正論)』을 지으려 하시니, 경전에 말하기를 ‘법을 보호하는 보살[護法菩薩]’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말에 호응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그런 말만 들었더니 이제야 그런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자(弟子)는 지혜도 없고 재능도 부족한 사람으로서 벼슬자리에 올라 관직을 욕되게 하니[承乏첨官], 실로 어떤 일을 꾀함에 부끄러울 따름이며 외람되게도 뽑혀 발탁되는 영광을 입었으나 재상의 자리[阿衡]가 몹시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떤 책에 말하기를 ‘바닷물로 먹을 삼아 수많은 글을 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하면 허천(虛闡)만을 성취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제자(弟子)의 집은 급군(汲郡)이 아닌데 어찌 죽간(竹簡)의 책이 있을 것이며, 집이 노나라[魯邦]와 다르니 과두(蝌蚪)의 문자가 있을 리가 없사옵니다. 사람은 양대(兩戴)와 다르고 세대도 이관(二冠)과 다르니 온몸[五體]이 한가하고 사부(四部)52)째는 병부(丙部:子), 넷째는 정부(丁部:集)이다.
에 결함이 많습니다. 법사께서는 이미 각덕(覺德:佛)의 의지를 세우셨고 제바(提婆:提婆達多)의 자취를 이으셨으니, 제자도 또한 감히 작은 물방울과 티끌[涓塵]같은 글을 올려 높은 산 깊은 골짜기[嵩壑] 같은 분을 돕고 싶어 삼가 여러 석덕(碩德)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고 큰 선비[鴻儒]를 방문하여 널리 채집하며 그 요점을 자세히 찾아보겠습니다.
또한 바라옵기는 직접 궤장[几]을 받들고 아름답고 법다운 분[徽猷]을 찾아뵈옵고 받들어서 성대한 덕망이 굳세고 빛남을 보며, 장자(長者)께서 남긴 논리[餘論]를 듣고 싶습니다만, 다만 제자(弟子)는 왕사(王事) 때문에 여가가 없어서 이 편지를 보내 회포를 대신하옵고, 휴가를 받는 날 즉시 달려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법사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두공(杜公)이 공급해 주어서 풍족하게 해 주었고, 법사는 도교에서 주워 오고[捃道] 유교에서 찾아내[尋儒] 앞서 가신 선대의 뜻을 터득해 마쳤다. 그리하여 논서 8축(軸) 12편(篇)을 완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9주(州)에 퍼져 읊어지고 삼보(三輔)에 전해졌으니, 문장은 표범 같고 이치가 환하게 밝아 율종(律鍾)과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었으므로 환하게 빛나 볼 만하였으며, 양양(洋洋)하게 뒷전에 가득하였다.
진실로 대라(大羅)의 옥황상제[玉帝]로 하여금 금궐(金闕) 안에서 놀라 두려워하게 하고 구부(九府)의 선군(仙君)으로 하여금 사천(四天) 꼭대기에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게[震赧] 하였다. 그리하여 삿된 이들이 전철을 달리하고[異轍], 수많은 미혹한 마음을 바꾸게 하였는데, 하물며 좌도(左道) 황건(黃巾:道敎)인들 경복(傾覆)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궁학사(東宮學士)인 진자량(陳子良)이라는 사람은 그가 하는 말이면 세상의 표상이 되고 학문은 유림(儒林)에 으뜸이었다. 그가 이 논문(論文)을 보고 인하여 훈고(訓誥)를 지어 말하였다.
“대개 들으니 선니(宣尼:孔子)가 꿈속에 빠져 들어감으로 인하여 십익(十翼)의 이치가 드러날 수 있었고, 백양(伯陽:老子)이 관문을 벗어남으로 인하여 이편(二篇:道德經)의 뜻이 밝게 나타날 수 있었다.
혹은 깊은 계상(繫象:託象)을 낚아 올리고, 혹은 희이(希夷)를 더듬어 찾았으니, 명언(名言)으로 선포할 바가 아니고 음양(陰陽)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능히 천지(天地)를 두루 다 포함하여 다스릴 수 있고 귀신(鬼神)까지도 다 포괄(苞括)하였으나 그 도는 대천세계(大千世界)를 흡족하게 하지 못했고, 말은 한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법신(法身)은 원적(圓寂)하여 미묘함이 유무(有無)를 벗어났고, 지극한 이치는 응현(凝玄)하여 자취가 진속(眞俗)을 다 끊어 없앤 것이겠는가?
그 본체는 삼상(三相)을 끊어버렸고 업보[累]는 칠생(七生)을 다하여 무심(無心)이 곧 마음[心]이고 색(色) 아닌 것으로 색을 삼았다. 무심이 곧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마음으로 삼을 수 있고, 색(色) 아닌 것으로 색을 삼았기 때문에 색을 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등나무와 뱀[藤蛇]이 이 때문에 모두 비어질 수 있고 형상과 이름이 이 때문에 함께 고요해질 수 있으니 전제(筌蹄)의 밖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서백(西伯:文王)은 유리(羑里:殷나라 紂王 때의 감옥)에 구금됨으로써 마침내 정미(精微)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자장(子長:司馬遷)은 감옥에 갇힘으로써 마침내 선지(先志:아버지의 유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주역』을 지은 이가 아마도 걱정과 근심[憂患]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논(論:辯正論)이 일어나게 된 것도 진실로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법사의 속성(俗姓)은 진씨(陳氏)이며, 한(漢)나라 태구장(太丘長) 중궁(仲弓)의 후손이다. 먼 선조가 관직을 따라 강좌(江左)에 파천(播遷)되어 거기서 살게 되었는데, 근래에 그곳으로 아주 이사를 갔었고, 또 형주(荊州)에서도 살았다. 수(隋)나라 시대에는 관중으로 들어가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고자 간청하였으니, 형수(荊岫:荊山)에서 옥(玉)을 옮겨옴으로 인하여 맑고 깨끗한 광채가 더더욱 빛나게 되었고, 깊숙한 숲속으로 계수나무를 옮겨 심음으로 인하여 짙은 향기가 더욱 멀리까지 퍼지게 되었다.
법사는 진인(眞人)의 상서로움과 호응하고 황상(黃裳)의 길함을 품부하고 안으로는 삼장(三藏:經ㆍ律ㆍ論)을 해박하게 이해하였고 밖으로는 구류(九流)를 종합하였다.
이미 착한 마음을 인연하고 더욱 공부에 열중하여 사물의 이치를 체득하였으며, 그가 지은 책[篇]의 문장은 아름답고도 수려하였고 이치는 굳세고도 화려하였다.
성대하고도 빛나는 모양[郁郁]은 비단에 수놓은 문채에 가깝고 정처 없이 떠도는 모양은 구름의 기운을 능멸하듯 솟아올랐다. 반고(班固)와 가의(賈誼)53)의 금옥(金玉) 같은 문장으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거늘 번씨(藩氏)와 육지(陸贄) 같은 강호(江湖)의 문장으로 어떻게 감내하여 멍에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장자(莊子)와 묵자(墨子)의 학문과 황자(黃子)와 노자(老子)의 글과 삼청(三淸)54)과 삼통(三洞)55)의 문장과 구부(九府)와 구선(九仙)의 도록[籙]과 진인(眞人)에 오르는 은미한 비결[登眞隱訣]의 신비함과 신령한 보배로 명을 제도하는[靈寶度命] 위의에 이르러서는 함용함이 흉금(胸襟)과 같고 말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중관론(中觀論)』을 익혔고, 어려서는 『법화경(法華經)』을 배워 이미 듣고 지님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저술(著述) 활동에 전념하여 생각을 다스리는 일 외에 사람을 끌어들여 가르치면서도 조금도 고달파 한 적이 없었다.
『중관론』에 대하여 변론을 토해 내면 가히 용수(龍樹)를 만난 듯했고, 자연(自然)에 대하여 담론을 할 때면 노자나 장자에 가까웠다.
이때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마치 장자(長者)의 동산에 사람이 몰려드는 것과 같았고, 칠귀(七貴)의 분륜(紛綸)은 흡사 화음(華陰)의 저자[市]에 모여드는 것과 같았다.
진실로 학문은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에 짝할 만하고 재주는 승조(僧肇)와 축도생(竺道生)에 견줄 만하니, 실로 보살[開士] 중에 기둥과 대들보[棟梁] 같은 존재이며, 법문(法門)의 담장과 성참[牆塹] 같은 분이셨다. 이에 도사(道士) 이중경(李仲卿)과 유진희(劉進喜) 등이 모두 다 좁은 견해[管見]를 진술하고, 아울러 용렬한 글을 지어 바른 법[正法]을 비방하니, 세속 사람들이 혹 삿된 믿음을 내게 되었다.
법사는 그들이 눈이 멀어 보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기고 지옥[泥鯖]에 빠지게 될까 염려한 나머지 마침내 큰 자비[大悲]를 발하여 드디어 이 논문을 지으셨으니, 이 법의 바다[法海]를 고무하고 저 사봉(詞峰)을 근본으로 하여 날랜 벽계(碧雞)와 달리기를 다투고 준수한 황마(黃馬)와 달리기를 다투어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이며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지 않음이 없었다.
그 형상은 커다란 화로[鴻爐]에 가느다란 깃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뜨거운 햇볕이 얇은 얼음을 녹이는 것과 같으니, 지고이기는 짝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잠깐 동안 자비의 선정[慈定]으로 돌아가 이미 마군(魔軍)을 격파했고, 부족하나마 지혜의 칼을 떨쳐 즉시 어리석은 도적[愚賊]을 항복받았다. 불일(佛日)이 여기에서 거듭 빛나고 법운(法雲)이 이로 말미암아 널리 드리워졌다.
다만 법사가 지은 시(詩)ㆍ부(賦)ㆍ계(啓)ㆍ송(頌)ㆍ비지(碑誌)ㆍ장표(章表)와 대승교법(大乘敎法) 그리고 『파사론(破邪論)』 등의 30여 권이 이 세상에 오래도록 전해졌으나 이 논문 8권 12편 200여 지(紙:장)는 석가(釋迦)와 노자(老子)의 가르침의 근원을 다 파헤쳤고, 품조(品藻)의 명리(名理)를 극진하게 하였는데도, 저술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아직 유포(流布)되지 못하였다.
옛날에 진(秦)나라 효공(孝公)은 제왕의 업[帝業]에 대해 설하는 말을 듣고서 잠을 잤으나 패왕의 업[霸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벌떡 일어났으니, 양춘(陽春)의 화기(和氣)를 알지 못함과 같아서 매우 서글픈 일이라 할 것이다.
다만 법사(法師)께서 저술한 것은 내외(內外)를 다 해박하게 알았지만 일을 좋아하는 후생(後生)들이 깨달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제자(弟子) 영천(穎川) 진자량(陳子良)은 근자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를 올리고 따라서 도(道)에 나아가는 진량(津梁)을 물었는데, 찬란하게 눈에 넘침이 마치 밝은 달이 품속에 들어온 듯하고, 고요히 기미에 감응함은 비유컨대 보배 구슬이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미 네거리 길의 환상임을 깨닫고 곧바로 백성(百城)에 노니는 일을 쉬고 말았다.
이에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바를 아뢰고 부족하나마 주해(註解)를 내니 장래(將來)에 같은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同好]이 그 이치를 자세하게 살피기를 바란다.”
정관(貞觀:唐太宗의 연호) 원년(627)에 문제(文帝)가 고조(高祖)를 받들기 위하여 태화궁(太和宮)을 희사(喜捨)하여 용전사(龍田寺)를 세웠고, 산천(山泉)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여기에 마음을 깃들이고 몸을 의탁하였는데, 법사는 그곳을 아주 좋아하고 아름답게 여겨 마침내 여기에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7년(633) 봄 2월에 태자(太子) 중사인(中舍人) 신서(辛4dk23)가 문난(問難) 두 조항을 만들어 가지고 기국사(紀國寺) 스님 석혜정(釋慧淨)에게 질문하였는데, 혜정은 그때 그 일로 인하여 『절의론(折疑論)』을 지어 신서에게 대답하였다.
그 논(論)은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실려 있다.
혜정은 그 때에 저술한 논문을 법사에게 바쳤는데, 법사께서 혜정법사의 글에 회답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신(辛)중사인에게 대답한 『절의론(折疑論)』을 보니 문장과 이치가 모든 것을 포함하여 거론하였고 비유는 너무도 절묘했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양은 이주(離朱)56)의 눈을 어지럽게 하였고, 단단하고 맑은 소리는 사광(師曠)57)의 귀를 놀라게 하였으며, 진실로 오묘함은 이 천하[環中]를 다하였고 문장은 변론의 한계를 다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옥형(玉衡)으로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는 것과 같으며, 넓고 넓은 바다가 온갖 냇물을 통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밝게 빛나고 우뚝하게 높아서 그 말이 보고 듣는 한계를 벗어나 버렸고, 이치는 생각이나 의논의 바깥까지 뛰어넘어 버렸으니, 이것으로써 모든 견해의 문(門)을 막을 수 있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열어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머물러도 머무는 곳이 없는 경지와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겸수(兼修)하는 뜻이 있었고, 작용해도 작위하는 것이 없는 경지와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제응(濟應)하는 공이 컸습니다.
장차 보잘것없고 연약함을 지키기 위하여 염치없이 뻔뻔하게 굴고 독선(獨善)으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이치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어찌 현동(玄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무릇 형상을 세워서 뜻을 나타내더라도 뜻을 얻고 나면 그 형상은 잊어버려야만 합니다. 만약 당연히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는다면 피차(彼此)간에 정(情)이 사라지겠지만, 당연히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면 작고 큰 차이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합니다. 해와 달이 이미 떠오르고 나면 횃불의 광채는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과 때맞추어 내리는 비가 이미 내리고 나면 번거롭게 물을 대어 윤택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였습니다.
‘피차(彼此)를 잊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내[吾]가 떠나간 것은 옛날에 떠남을 의지해서 무상(無常)을 변론한 것이고 새로 내가 올 적에는 새로 오는 것을 의지해서 연기(緣起)에 대해 담론한 것이었으니,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니기 때문에 훈습하여 닦는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선성(繕性)도 없고 각의(刻意)도 없는데 아름답고 추악한 공(功)이 어디에 붙겠습니까?
대개 태어나고 멸함[生滅]을 바탕으로 하여 저 단상(斷常)의 미혹함을 깨뜨리고 원인과 결과[因果]에 기탁하여 저 중관(中觀)의 길을 보여 줍니다. 단상(斷常)의 견해가 쉬어버 리면 약상(弱喪)이 한꺼번에 돌아가고, 중관의 이치가 융화하면 진여(眞如)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혹 업(業)의 이치를 이야기하여 훈습(薰習)을 밝히기도 하고, 잠깐 과보의 분한[報分]을 열어 자연(自然)에 대하여 풀이하기도 하는데, 그 뜻은 언어의 실마리를 벗어났고 취지는 문장 바깥까지 초월하였습니다.
과보의 분한이 위치가 있다면 오리와 학[鳧鶴]이 다리가 짧고 긴 것을 잊지 않을 것이고, 업의 이치[業理]가 서로 의존한다면 매미와 벌[蟬蜂]이 각각 알에서 탈바꿈하여 날아다니는 대로 맡겨두고 말 것이니, 이름도 모양도 없는 가운데 모양과 이름을 빌려 설한다고 말할 만하며, 진제를 체득[體眞]하고 속제를 깨달아 앎[會俗]이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살펴보니 중사인(中舍人)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지녔으나 상인(上人:慧淨)께서 이치를 다한 말만은 못하니 자기(子期:鍾子期)가 짝을 잃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안생(顔生:顔回)이 잡념을 잊고 무아의 경지에 빠짐[坐忘]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버리고 취하는 두 극단을 쉬고 전폐(顚沛)의 일치(一致)를 끊어 버린다면 초(楚)나라가 이미 얻었다 해도 제(齊)나라 또한 잃은 것이 없습니다.
법사가 사물을 널리 터득한 것은 아무도 견줄 만한 사람이 없고 지혜는 한계가 없으니, 지금 이 시대에 독보적인 존재이며 오늘날의 동량(棟梁)인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며, 실로 또한 명성과 칭송이 널리 퍼졌습니다.
더욱이 여러 번 금문(金門)을 배알하였고 자주 상석(上席)에 올라갔으며, 현풍(玄風)은 학약(鶴鑰)에 나부끼고 법고(法鼓)를 용루(龍樓)에서 울리니, 칠귀(七貴)가 그 파도[波瀾]를 끌어당기고 오사(五師)는 그 신비하고 준수함을 밀었습니다.
이미 하늘을 덮을 만한 날개로 솟구쳐 오르고 또 바다를 휘저을 만한 비늘로 이리저리 다니니, 지둔(支遯)이 왕희지(王羲之)와 하(何)씨를 짝함에 어찌 멍에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며, 백조(帛祖)가 혜강(嵆康)ㆍ완적(阮籍)과 나란히 한다 하여도 족히 연형(連衡:連橫)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것으로써 지금을 짝한다는 말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임(琳:法琳)은 남산(南山)에서 병으로 사직하고 깊은 골짜기에 마음을 깃들였습니다. 나다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은거하고 있지도 않으며, 생각을 바람과 구름에 씻고,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이 마음을 천석(泉石)에 붙이고 살아갑니다.
이름 있는 작품을 대하여 관찰해 보니 실로 번뇌와 근심을 떨쳐 버렸고, 잠시 주옥같은 문장[瓊章]을 보니 그 때문에 고질병(痼疾病)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왔다갔다 서성이면서[俳佪] 시가(詩歌)나 읊으며, 이 책을 덮고 펴기를 반복[循環]하며 소매 속에 받들어 간직했더니,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종이를 수고롭게 하고 글자는 옛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뜻을 대략 펴서 삼가 이렇게 편지로 아뢰오니 늦게 만난 후생(後生)에게 다시금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소서. 임(琳)은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소견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비천한 생각을 기술하여 감히 삼[麻]을 삼아 길게 이어지는 실의 보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로 인해 『제물론(齊物論)』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신중사인(辛中舍人)의 두 가지 질문을 보여 주시어 그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문장과 뜻은 크고도 넉넉하였으며, 이치는 깊고도 절륜(絶倫)하였습니다. 이윽고 의부(義府)를 열어 보았더니 특별하게도 문봉(文鋒)이 빛나더이다.
부처님의 성품이 평등하다는 말을 들어 중생[群生]들이 각각 이해하고 있는 말들만을 인용하였으며, 피차간의 두 가지 질문을 진술하여 현동(玄同)의 일문(一門)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저들이 비록 환중(環中)에 계합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누가 이와 같이 높은 의론을 펼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의심스러운 것은 또한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왜냐 하면 살펴보건대 상황(上皇:부처님)께서 모범을 보이심에 비로소 선각(先覺)의 이름이 퍼졌고, 법왕(法王)이 사물에 호응하자 이에 불타(佛陀)의 명호가 표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智慧)라는 것은 대개 사물을 분별하는 작은 술책이고, 반야(般若)라는 것은 곧 알음알이가 없는 대종(大宗)입니다. 연기(緣起)를 분별하는 까닭에 억지로 선각(先覺)이라고 칭하고, 알음알이가 없는 성품은 고요하기 때문에 이에 임시로 불타(佛陀)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분별(分別)은 이미 외부에서 헤아리는 것이 있으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은 또한 안에서 무심(無心)한 것입니다. 밖에서 헤아림이 있기 때문에 분별하는 견해를 잊지 못하고, 안에서 무심하기 때문에 깨우쳐 인도하는 공이 다함이 없습니다.
심하게는 추호(秋毫)를 큰 산과 비교하기도 하며, 지나치게는 뱁새[尺鷃]를 붕새[大鵬]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년(同年)으로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생(莊生:莊子)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옳고 그름을 잊었으나 피차(彼此) 다 잊은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이른바 작은 지혜[小智]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연륜이 짧은 것은 긴 연륜에 미치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직 팽조(彭祖)가 특별히 소문이 난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닌데, 하물며 삼세(三世)의 이치가 어긋나지 않고, 이제(二諦)의 문을 징험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성인이 인과(因果)를 세우심으로 인하여 범부가 성과(聖果)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도(道)는 자연(自然)이라고 칭하나 학자(學者)들은 도를 성취하는 이익이 없습니다.
은미함을 따라서 현저함에 이르게 되므로 선성(繕性)과 각의(刻意)를 의지하여야 비로소 아름다워지며, 인(因)을 타고 과(果)에 나아감으로써 훈습해서 닦음을 힘입어야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미 알고서 일부러 질문하였으므로 나 또한 대충 기술해서 답변합니다. 살펴보건대 저 일음(一音)이 널리 덮으니 약상(弱喪)이 이로 말미암아 함께 돌아가며, 사지(四智)가 널리 뻗치게 되니, 진여(眞如)가 그 때문에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절로 나타난다는 말은 은미하면서도 드러나는 것인데, 함께 돌아간다는 말은 무엇이 오고 무엇이 가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업(業)을 따라서 과보를 받는 것이니 두 가지 새[鳧와 鶴]가 다리가 짧고 긴 것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며, 습기로 인하여 삶을 이루는 것이니 두 가지 벌레[兩蟲]가 비화(飛化)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待)와 부대(不待)에 있는 것도 아니니, 밝아지면 곧 대(待)는 대(待)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시험 삼아 논(論)하여 보겠습니다.
옛날에 감택(闞澤)58)이 말하였습니다.
‘공자(孔子)와 노자(老子)는 하늘을 법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였고, 모든 하늘들은 부처님의 법을 받았으므로 감히 부처님을 어기지 못했다. 홍범구주(洪範九疇)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제용(制用)을 이어받았고, 상방십선(上方十善)은 부처님의 자풍(慈風)을 받들었다.
만약 공자와 노자를 가지고 성존(聖尊)과 짝하려 한다면 이는 자공(子貢)이 중니(仲尼)보다 훌륭하고, 절름발이 자라가 준수한 기마[駿驥]를 능멸하는 논리가 될 것이다. 넓은 바다를 보고자 하면서 졸졸 흐르는 냇물을 구경하고 있으니, 눈을 가리고 털끝을 보려고 하며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왕도(王道)59)와 주의(周顗)60)는 재보(宰輔)들 중에 으뜸가는 이들이며, 왕몽(王濛)61)과 사상(謝尙)62)은 인륜(人倫) 중에 모범[羽儀]입니다.
또 치초(郄超)ㆍ왕밀(王謐)63)ㆍ유구(劉璆)ㆍ사용(謝容) 등은 모두 강좌(江左) 지방에서 영특한 큰 선비들로서 70여 인(人) 모두가 학문은 구류(九流)를 종합하였고, 재능은 천고(千古)를 비추었으니 이들은 다 성령(性靈)의 진요(眞要)를 말하면서 몸을 유지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석씨(釋氏)의 가르침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송문제(宋文帝)와 하상지(何尙之)64)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온 우주[宇內]가 함께 이 요지를 따른다면 나는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말하였습니다.
‘십선(十善)이 번창하면 인간세계와 천상세계가 흥성하게 되고, 오계(五戒)를 잘 실천하면 귀신과 축생[鬼畜]들이 줄어들 것이다.’
세상을 제도하는 현묘한 법[玄範]을 어찌 짧은 시간[造次]에 논할 수 있겠습니까만 중사인(中舍人:申諝)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문장은 화려하고 이치가 고상하여 진(秦)나라에서 한 글자를 매달자 촉(蜀)나라가 천금(千金)을 내건 것과 같습니다.
법림(法琳)은 부질없이 무딘 칼[鈆刀]을 갈 뿐이니, 어찌 감히 기이하고 수려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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