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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36 불교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하권

by Kay/케이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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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 하권

 

당호법사문법림별전 하권


석언종 지음
김두재 번역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 제6권에서 말하기를, ‘도욱(道昱)은 송(宋)나라에 화근이 되는 옷을 입었고, 손은(孫恩)1)은 진(晋)나라를 패망하게 한 치마를 끌었으며, 남정(南鄭)2)에서는 한(漢)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게 한 수건을 썼고, 공기(公旗)는 집안을 주륙(誅戮)시킨 홀(笏)을 잡았다. 다만 큰 갓[大冠]과 작은 갓을 쓰기 시작한 것은 한(漢)나라 조정에서부터였고, 피건(皮巾)과 녹건(鹿巾)의 유래는 왕고(往古)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갓[冠]은 곧 연사(年祀)를 짝한 것인데, 이미 의복의 형상이 구름처럼 벌려져서 노을을 잡는 도사(道士)가 생겨나게 되었고, 의상이 우곡(羽穀)과 같아 때로 무지개를 밟는 선인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어 삼지(三芝)가 멀지 않고, 그 풍모를 우러를 만하여 팔계(八桂)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그런 까닭에 소사(蕭史)3)는 화열한 모습으로 진실(秦室)에서 단봉(丹鳳)을 올라탔고, 숙경(叔卿)은 혁혁(奕奕)하게 한정(漢庭)에서 백록(白鹿)을 참마[驂]로 삼았다.
그런데도 그대는 ‘나라를 패망하게 하고 집안을 깨뜨렸다’고 말하였으니, 이 사실은 어느 도서(圖書)와 사적(史籍)에서 나왔는가? 이미 진술한 말이 허황되게 부르짖은 말이라면 법에는 엄격한 조항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음성이 고르면 메아리가 순조롭고 형상이 곧으면 그림자도 단정하다고 하였으며, 불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물을 얻었다거나 팥을 심었는데 보리 싹이 났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진(蘇秦)4)과 장의(張儀)5)가 귀곡자(鬼谷子)6)를 만나게 되어 각각 부질없고 거짓된, 선봉에 처한데 비해,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蹇)7)이 공문(孔門)을 만남으로써 함께 덕행(德行)의 시작을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편(二篇)의 교화를 익힘으로 무위(無爲)의 미묘함을 구하고, 삼장(三張)의 풍교를 실천함으로 그 모책이 난리의 으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에 패(沛) 땅 사람 장릉(張陵)8)이 촉(蜀) 땅에 객(客)이 되어 유람하다가 고로(古老)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말 중에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24기(氣)를 호응하여 24산(山)에 제사를 지냈고,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여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릉이 자신의 덕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마침내 이런 꾀를 구상하여 소를 잡아 24개 처소에 제사를 지내고, 흙으로 단(壇)을 모으고 풀로 지붕을 잇고서 24개의 치관(治館)을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치관이 흥기하게 된 시초가 되었습니다.
23개의 처소는 촉(蜀)나라 지방에 있고, 윤희(尹喜)9)의 한 처소만 함양(咸陽)에 두었는데, 이때에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아서 조세미(租稅米)를 거두는 등 난계(亂階)를 꾀하더니, 때마침 사탄(蛇呑)을 입어 역모에 힘쓰는 일[亹逆]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장릉(張陵)의 손자 장로(張魯)10)가 그 할아버지의 술법을 수행하여 후한(後漢) 중에 스스로 사군(師君)이라고 칭한 것으로 인하여 화란(禍亂)이 비로소 일어나려 하다가 조공(曹公:曹操)에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또 중평(中平) 원년(元年, 184) 거록인(鉅鹿人) 장각(張角)11)이 스스로 황천부사(黃天部師)라고 칭하고, 36명의 장수를 두어 모두 누런 수건[黃巾]을 쓰게 하고 멀리 장로(張魯)와 더불어 서로 내통하였습니다. 그들의 무리가 10만에 이르러 업성(鄴城)을 불태워 버렸으므로 한(漢)나라 황제가 하남윤(河南尹) 하진(何進)12)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또 진(晋)나라 무제(武帝) 함녕(咸寧) 2년(276)에 도사(道士) 진단(陳端)이 좌도(左道)를 가지고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스스로 천사(天師)라고 호칭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 수천 명과 세월을 보내다가 익주자사(益州刺史) 왕준(王濬)13)에게 주멸(誅滅)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진(晋)나라 문제(文帝) 태화(太和) 원년(元年, 366)에 팽성(彭城) 도사 노송(盧悚)이 스스로 대도좨주(大道祭酒)라고 칭하면서 삿된 술법으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도당(徒黨)을 취합(聚合)하여 해를 향하여 좋은 날을 점치고는 광한문(廣漢門)을 공격하면서 말했습니다.
‘해서공(海西公)을 맞이하시오.’
그때 대궐 내의 환비(桓秘)14) 등이 깨달아 알고는 그와 더불어 전쟁을 벌여 얼마 안 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는 도사 원긍(袁矜)이 요사스런 말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행금보강(行禁步綱)하다가 관군(官軍)에게 엄습당하여 얼마 뒤에 주멸(誅滅)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0년 창륭현(昌隆縣) 도사 포동(蒲童)과 좌동(左童) 두 사람이 붕계관(崩溪館)에 있으면서 스스로 성인이 되었다고 칭하면서 인민(人民)들을 속이고 현혹하였는데, 2층으로 된 평상을 만들어 가지고 집에 이르러서는 문득 그 위에 올라 앉아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5세 동녀(童女)라야만 비로소 법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여자를 침상으로 오르게 하여 장막을 죽 둘러치고는 마침내 간음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한 달가량 지내다가 나중에 그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곧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또 개황(開皇) 18년(598)에 익주(益州) 도사 한랑(韓朗)과 면주(綿州) 도사 황유림(黃儒林)이 촉왕(蜀王)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촉왕으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일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꼭 특수한 인연을 바탕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촉왕을 시켜서 재물을 다 기울여 1천 자[尺]나 되는 도상(道像)을 세우고, 1천 일 동안 큰 재[大齋]를 베풀어 선제(先帝)의 형상을 그려 놓고 머리와 손을 뒤로 묶어 주문으로 억압했습니다.
하북공(河北公) 조중경(趙仲卿)이 조사하고 살펴서 이 같은 사실을 들어 알고는 몸을 경성(京城)으로 송치하였는데, 검문을 당하고 죄를 입어 저자 가운데서 형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근래 무덕(武德) 3년(620)에는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사람 이망(李望)이 앞서부터 황로(黃老)를 섬기며 항상 요망하고 사특한 일을 하여 왔었습니다.
지나간 대업(大業) 말년에는 도사 포자진(蒱子眞)이 도술(道術)을 조금 익혔는데 동경(東京)에 송치되었다가 양한(梁漢)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그로 인해 저기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이망(李望)이라는 사람이 속여서 말하기를, ‘자진(子眞)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저 고을 산언저리에 석실(石室) 한 개가 있었는데, 암혈(巖穴)이 그윽하고 어두워 사람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망(望)이 이것을 빙자하여 요사(妖詐)스러운 일을 지었는데, 밝은 데 있으면 목청을 높여 큰 말로 통전(通傳)을 영납(領納)하고 어두운 데 들어가면 목 메인 기운으로 작은 소리로 화복(禍福)을 거짓으로 진술하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도사(道士)들로 하여금 말을 퍼뜨리게 하여 고을마다 미치게 하고 고을마다 소문이 나게 하였는데, 관청 사람이 처음 검문을 하고는 아울러 모두들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뒤에 자사(刺史) 이대례(李大禮)가 말하기를, ‘이 일이 가볍지 않으니 반드시 다시 살펴보고 아뢰어라’고 하더니, 거짓임을 살펴서 직접 징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옳고 그름을 결정하였습니다.
마침내 온 고을[州縣]의 관리들과 도사(道士) 등 1백여 기(騎)가 다 함께 동굴[穴所]에 이르러 두 번씩 예배하고 기원하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망은 그때에 거짓으로 대답하니 듣는 사람들마다 마음을 기울였으나, 오직 파서(巴西) 현령(縣令) 악세질(樂世質)만은 일의 실상[機情]을 깊이 통달하고 그가 속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깜깜한 데 들어가서 몰래 엿보다가 망(望)이 목이 쉰 듯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악세질이 그때 그를 꾸짖으니, 이망(李望)이 곧 진심으로 굴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 감옥에 잡아 가두고[收禁], 바야흐로 죄목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독약을 마시고는 죽어 버렸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익힌 것이 바르지 않으면 반역에 힘쓰는 이들[亹逆]이 서로 따르고, 좌도(左道)가 대중을 혼란하게 만든다고 한 이 말이 진실임을 알 만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적들이 누런 수건[黃巾]을 쓰고 거록(거鹿)에서 일어났고, 귀서(鬼書)와 단간(丹簡)은 양평(陽平)에서부터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의복의 형상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서로 거리가 멀고, 옷이 우곡(雨穀)과 같다고 하는 것도 인정(人情)과는 가깝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학(鶴)을 타고 용(龍)을 타며, 몸에는 포갈(布褐)을 입고, 난새[鸞]를 몰고 봉황[鳳]을 채찍질하면서 머리에 피건(皮巾)을 쓰는 일이 있겠습니까?
백석(白石)15)과 적송(赤松)16)의 무리는 모두 귀신의 졸개[鬼卒]가 아니었고, 왕교(王喬)17)와 선문(羨門)18)의 무리는 다 고을의 우두머리[治頭]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담(李聃:老子)이 주(周)나라를 섬길 때에는 의복을 유가(儒家)나 묵가(墨家)들처럼 입다가, 공기(公旗)가 한(漢)나라를 도모하던 날에야 비로소 황건(黃巾)을 머리에 쓰기 시작하였는데, 만일 백양(伯陽:魏伯陽)19)을 시조로 섬기며 그의 법을 익혔다면 도사(道士)들을 모두 조정에서 임명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나, 만일 공기(公旗)를 으뜸으로 여기고 그의 법을 취하였다면, 이러한 폐단은 특별히 자취도 남기지 말고 제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또 법사에게 물었다.
“논(論) 제7권에서 이르기를, ‘건안(建安)은 꿈에서 감득(感得)한 다음 병이 나았고,20) 문선제(文宣帝)는 신령함이 내려와서 질병이 나았으며,21) 오(吳)나라 왕은 사찰을 에워싸자 사리(舍利)에서 광채를 띠었으며,22) 제(齊)나라 임금은 형(刑)을 집행하다가 칼이 부러졌고,23) 우문(宇文:周)은 승려를 헐뜯었다가 종창이 곪아 터졌으며,24) 척발(拓拔:魏)은 사찰을 헐어 버리고 나서 온몸에서 고름이 흘렀고,25) 손호(孫皓)는 불상에 오줌을 누고 나서 음근(陰根)이 아팠으며[陰疼],26) 혁련(赫連)은 흉악하고 미련한 짓을 하다가 벼락 맞아 죽었다[雷死]27)고 하였는데, 그 인용한 것을 살펴보니 모두가 제왕들이었다. 어찌하여 잠시라도 마음을 귀의하면 모든 질병이 소멸되고[銷痾盪瘵], 잠깐이라도 사찰을 헐거나 스님을 헐뜯으면 곧 나라도 잃고 몸 또한 죽고 만다는 말인가?
이것으로써 제대(帝代)의 천와(遷訛)는 스스로의 운수가 길고 짧음에 관계되는 것이고, 황왕(皇王)의 흥하고 침체함도 또한 불교를 믿고 헐뜯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헤아려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망령되게도 화복(禍福)에 대해 진술하고, 요상(妖祥)에 대하여 거짓으로 속여 기술하였는가?
이것에 근거해 한곳에 오래도록 머문다면 지적을 받아 배척당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주역(周易)』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는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積善餘慶], 악함을 자꾸 쌓으면 마침내는 재앙이 온다[積惡餘殃]’28)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서는, ‘착하고 악함에 대한 보응은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善惡之報同乎影響]’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 때에는 치도(治道)가 융성하고 공평[隆平]하였고, 진(秦)나라 황제 2세(世)의 시절에는 천하를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이는 곧 도(道)를 실천하면 복이 오래 가고, 지나치게 형벌을 가하면 후사가 짧다는 사실이 전적(典籍)에 성대하게 드러나 있는데 어찌 운수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조어사(調御師)라 불리시고 삼계(三界)에 특별하게 존귀하신 분이시며, 승려는 복전(福田)이라고 불리고 사생(四生:胎ㆍ卵ㆍ濕ㆍ化)이 숭배하고 귀중하게 여기니, 어찌 공경을 다하여 추앙하는데 복의 징조가 없을 것이며, 헐뜯고 파괴하는데 화의 조짐이 없겠습니까?
앞에서는 보응(報應)에 대하여 간략하게 진술하여 저 삿된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아침에 도 들음을 경하하게 하고 또 저녁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29)
저 문선제(文宣帝)와 건안(建安)의 무리와 오(吳)나라의 왕과 제(齊)나라 임금 등의 부류, 그리고 척발(拓拔)ㆍ우문(宇文)ㆍ혁련(赫連)ㆍ손호(孫皓) 등에 대해서는 선하고 악한 자취를 기록해 전하고 자세히 밝힘으로써 널리 명상(冥祥)을 선험(宣驗)하고 신의 감응을 찾는다는 등의 말과 같음을 밝힌 것입니다.
또 선악(善惡)의 분한은 이치와 숫자가 분명하므로 그 사실을 전모(典謀)에 전하여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밝혀서 저들로 하여금 어질지 못한 사실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나약한 중생들이 돌아갈 곳을 알게 하고, 어진 일을 보고는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여 미혹한 길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일이 충분하리라고 생각하여 저는 한 구석을 대충 기술한 것일 뿐이니, 이는 저들로 하여금 세 모퉁이를 되돌아보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지금의 성상께서는 공손하시고 총명하시어 깨달음의 길[覺路]에 마음을 귀의하사 죽원(竹園)을 헤아려서 사찰[梵宇]을 일으키시고, 기수(祇樹)를 의지하시어 선감(禪龕)을 일으키시며, 무착(無着)의 존상(尊像)을 조성하시어 마군(魔軍)의 무리를 항복받아 제도하시니, 그 은혜가 마안(馬岸)까지 뻗었고, 도(道)는 용퇴(龍堆)에 미치게 하셨습니다. 무릇 사람 치고 어느 누가 은혜를 입거나 힘입지 않은 이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망령되게 요얼(妖孽)을 진술하여 국가를 배척하겠습니까? 다만 저 중경(仲卿)을 상대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은 것입니다.”
유덕위 등이 다시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논 제8권에서 이르기를, ‘도(道)에서 벗어나 거짓되고 잘못됨이 진실로 까닭이 있었구나. 사슴과 말은 형체가 다르건만 진(秦)나라 사람들은 그 모양을 동일하다고 말하였고,30) 기린과 고라니는 바탕이 다르건만 노(魯)나라 풍속에서는 그 용모를 미혹하였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그 거짓되고 허망함을 조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다만 관중(關中)에 자기(紫氣)가 일어남으로 인하여 윤희(尹喜)가 심오한 내용 2편을 지었고, 푸른 소[靑牛]가 경계를 벗어남으로 인하여 노자(老子)가 중현(重玄)의 은미함을 기술하였다.
그런 까닭에 홍한(洪漢)의 경제(景帝)와 문제(文帝)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우리 황제께서도 그 뒤를 계승하여 직접 자신이 의지하여 실천하고 계신다.
이제 곧 비방하고 모독함이 겉은 화려하나 실속이 없으니[浮華] 우읍(禹泣)을 기대하기 어렵고, 교묘하게 속인 일이 검증되었으므로 탕라(湯羅)에 걸려들고 말았다.
지금 성상께서는 신비한 계책[神謀]이 있으시어 사총(四聰)은 육합(六合)에 달하였고, 황제의 쇠퇴한 예감[皇衰叡誥]도 이요(二曜:해와 달)가 팔굉(八紘:우주)을 밝히는 것과 같은데, 갑자기 사슴과 말의 고사(故事)를 들어 훌륭한 시대[昌辰]을 풍자하고, 기린과 고라니의 고사로써 슬기로운 임금[哲后]을 희롱하니,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인들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백마(白馬)가 동쪽으로 발길을 돌림으로 인하여 삼장(三藏:經ㆍ律ㆍ論)이 이때부터 일어났고, 푸른 소[靑牛]가 서쪽으로 감으로 인하여 이편(二篇:道德經)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현현(玄玄)함을 천양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기도 하고, 혹은 공공(空空)을 밝혀서 중생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도첩(圖牒)을 징험해 보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종(顯宗) 때에 일으켜 창궐했던 일이 이 세대에 이르러 끝이 났고, 석교(釋敎:佛敎)의 번역(翻譯)은 이 시대에 환히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문사(文史)에 잘 갖추어 드러났으므로 백성들이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도가(道家)의 현적(玄籍)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못해서, 오직 『노자(老子)』 두 편만 이담(李聃)이 몸소 천양하였고, 나머지 경교(經敎)는 잡다한 일반 감정을 저술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한(前漢) 때에 왕포(王褒)는 『통현경(洞玄經)』을 지었고, 후한(後漢) 때에 장릉(張陵)은 『영보경(靈寶經)』을 지었으며, 장초(草醮) 등은 도서(道書) 24권을 지었습니다.
오(吳)나라 때 갈효선(葛孝先)31)은 『상청경(上淸經)』을 지었고, 진(晋)나라 때 도사 왕부(王浮)는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을 지었으며, 또 포정(鮑靜)은 『삼황경(三皇經)』을 지었는데, 뒤에 고쳐서 『삼청경(三淸經)』이라 하였었고, 제(齊)나라 때 도사 진현명(陳顯明)은 『진보허경(眞步虛經)』 64권을 지었고,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32)은 『대청경(大淸經)』과 『장초의(章醮儀)』 10권을 지었습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두 교[二敎]를 멸할 때에 화주(華州)의 전 도사(道士) 장빈(張賓)33)을 조서로써 본 고을의 자사에 임명하였고, 장안(長安)의 전 도사 초자순(焦子順)34)은 일명 도항(道抗)이라고 하는데, 개부(開府) 부풍령(扶風令)에 선임되었으며, 전 도사 마익(馬翼)과 옹주(雍州) 별가(別駕) 이운(李運) 등 네 사람은 천화(天和:後周 武帝의 연호) 5년(670)에 화주(花州)의 고성(古城) 안에 있는 수진사(守眞寺)에서 불경(佛經)을 열람하고는 도가(道家)의 위경(僞經) 1천여 권을 지었는데, 그때 만년현(萬年縣) 사람 색교장황(索皎裝潢)은 단지 견란(甄鸞)35)의 도가를 비웃은 곳은 다 고치거나 없애 버렸습니다.
요즘 대업(大業:隋煬帝의 연호) 말년에 오통관(五通觀)에 도사(道士) 보혜상(輔慧祥)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열반경(涅槃經)』을 고쳐 『장안경(長安經)』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엔 구속을 당하여[被約] 성문 밖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집에서 속에 누런 옷 입은 것을 보고 잡아다가 유수(留守)에게 송치했더니, 경전을 고친 일이 발각되어 상서(尙書) 위문승(衛文昇)이 보고하여 금광문(金光門)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함께 증험한 것입니다.
또 『견란소도론(甄鸞笑道論)』에서 말하기를, ‘도가(道家)에서 함부로 제자서(諸子書)에 주석을 달아 350권의 도교 경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현도목록(玄都目錄)』을 조사해 보니, ‘망령되게도 『예문지(藝文志)』의 책 이름을 취하였고, 거짓으로 884권의 책에 주석을 달아 도교 경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여 말하면 허망하고 거짓됨을 밝히기에 너무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대로 천착(穿鑿)하여 광간(狂簡)함이 이로부터 번성하였으며, 사람마다 함부로 책을 지어 허황됨이 가득하였음을 알 것입니다. 제가 또 조사해 보니, 후위(後魏) 정광(正光) 원년(520)에 명제(明帝)가 청통관(淸通觀)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 스님 담모최(曇謨最)를 불러 서로 마주하여 논쟁을 펴게 하였는데, 강빈이 그 때 함부로 『개천경(開天經)』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천사(天師) 장릉(張陵)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 그때 칙서로 태위공(太尉公) 단양왕(丹陽王) 소종(蕭綜)36)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37)등 170명을 보냈는데,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노자는 바로 오천 문(五千文:道德經)을 저술하고 서쪽으로 가서 유사(流沙)에 숨어 다시는 더 이상의 언설(言說)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의논한 바로는 강빈(姜斌)의 죄는 대중들을 현혹시킨 조항에 해당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강빈은 이미 요망한 말을 하였으니 옥사에 붙여 참결(斬決)토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조사해보니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4년(71)에 도사 저선신(褚善信) 등 690명이 불법(佛法)이 낙양(洛陽)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각시(捔試)하기를 청구(請求)하고, 도가(道家)의 경서들을 다 가져왔는데 도합 37부(部) 744권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509권은 도가 경전이었고 나머지 235권은 바로 제자서(諸子書)였습니다.
또 조사해보니, 진(晋)나라 때 갈홍(葛洪)38)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이르기를, ‘노교(老敎)에서 소유하고 있는 세상을 건지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법[度世消災之法]이 무릇 930권이고, 부서(符書:符籍) 따위가 70권으로 총 1천 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조사해 보니, 송(宋)나라 태시(太始:宋 明帝의 연호, 泰始가 옳음) 7년(171)에 도사 육수정(陸修靜)39)이 명제(明帝)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도가(道家)의 경서(經書)와 약방문, 그리고 주부도(呪符圖) 등이 총 1천 228권이온데 1천 90권은 이미 세상에 퍼져 있고 138권은 아직도 천궁(天宮)에 숨겨져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현도경목록(玄都經目錄)』을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서 이르기를 ‘송나라 사람 육수정이 올린 목록을 지금은 6천 363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2천 40권은 그 책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4천 323권은 모두 그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그 사건의 자취를 알 수 있고 속이거나 거짓말을 한 연유가 도사(圖史)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만약 소종(蕭綜)과 온자승(溫子昇) 등의 의론에 의거한다면 단지 『도덕경(道德經)』 2편만이 있을 뿐이지만, 만일 한(漢)나라 황제가 비교하여 헤아린 것[挍量]을 취한다면 문득 700여 권이나 되고,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의 설에 의한다면 겨우 1천 권이 있을 뿐이며, 육수정(陸修靜)이 올린 목록에 준거한다면, 앞에서 말한 것보다 90권이 더 많으며, 또 『현도경록(玄都經錄)』을 검토해 보면 더욱더 많아집니다.
이미 그 선후(先後)가 같지 않으니 허황되고 거짓됨이 분명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권축(卷軸)을 증가시키고 편장(篇章)에 주석을 달아[添足], 거기에 의거하여 불경을 비방하면서 제목을 고치고 끝부분을 바꾸어, 혹은 명산(名山)에서 저절로 나왔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동(仙洞)에서 날아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어찌 황령(黃領)만이 유독 알고 다른 영특하고 어진 이들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청하여 묻자오니 지금의 도사들이 미루어 교감하여 나중에 출간해 낸 경전은 그것이 노자(老子)가 따로 진술한 것입니까? 아니면 천존(天尊)께서 고쳐 말한 것입니까?
그런 말을 내놓았다면 분명 시간과 장소가 있을 터이니,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해 어느 달의 일입니까? 만약 그 일들이 증거가 있다면 유행(流行)하도록 용납해야 할 것이지만, 만약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이치로 보아 반드시 불 질러 없애야만 할 것입니다. 현재[當今] 명조(明朝)에서는 이 천하를 다스리고, 온갖 왕들의 폐단을 받들어 성상께서 임헌(臨軒)하사 마땅히 천 년을 기약하고 있으십니다.
이때야말로 오교(五敎:五常)를 널리 펴시고 요망한 책들을 끊어 없애며, 구주(九疇)를 거듭 지으셔서 요도(要道)의 가르침을 크게 천양하고자 하시는데, 어찌 감히 기린과 고라니의 비유로써 임금을 풍자하고, 사슴과 말의 비유로써 조정을 기롱하겠습니까? 다만 무식한 황건(黃巾)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혼동하고, 소견 좁은 도사들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秦)나라 사람에 비교했고 노(魯)나라 풍속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용과 말을 형상한 것과 같사온데, 어찌 하늘과 땅에서 날고 달릴 수 있겠습니까? 이치가 진실로 그렇지 못한데 어찌 책망을 당하겠습니까?”
유덕위 등이 자세히 미루어 검토해 보고 11월 15일에 장계를 갖추어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그로 인해 직접 내려와 질문하였다.
“짐(朕)은 본래 노담(老聃)의 후손이다. 동주(東周)에서 덕을 감추자 말엽(末葉)이 그 뒤를 이었고, 농서(隴西)로부터 일어나 대도(大道)를 천양하여 도(道)의 근원으로 삼았다. 따르고 맞이해도 헤아려 알지 못하므로 최상의 덕[上德]을 이야기하여 덕의 모체로 삼았고, 보고 들어도 알 수가 없다. 사상(四象)을 포괄하여 운행(運行)하며, 이의(二儀)를 포괄하여 길러 자라게 하니, 이미 칭찬할 수도 없으며, 진정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
짐이 그런 까닭에 조상의 풍교를 존중하여 일승(一乘)의 위를 높이 벗어나게 한 것이며, 본래의 교화를 돈독히 하여 백씨(百氏)보다 앞서 뛰어넘게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궤변으로 스승과 제자 관계라고 풍자하고, 함부로 선후(先後)에 대하여 진술하였느냐? 이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면 죽임을 당하겠지만 정당한 답변이 있을 경우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자오니 사경(師經)이 문후(文侯)를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요순(堯舜) 같은 임금은 오직 충간해 주는 사람이 없을까봐 두려워했고, 걸주(桀紂) 같은 임금은 오직 말하는 이가 있을까 봐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또 동방삭(東方朔)이 무제(武帝)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살아도 또한 말을 할 것이고, 죽는다 해도 역시 말을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제 요순같이 훌륭한 임금을 만났사온데,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듣자오니 척발달사(拓拔達闍)는 당(唐)나라 말로는 이씨(李氏)라는 말인데, 폐하의 이씨 성은 이 사람이 곧 그 조상이며, 주하(柱下:老子) 농서(隴西)의 후손이 아니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담(老聃)의 이(李)씨는 목모(牧母)의 소생이니, 만약 농서에 의거한다면 곧 종의 후손[僕裔]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돈황보록(燉煌寶錄)』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환왕(桓王) 39년에 왕이 한예정(閑預庭)에 행차하시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밤새워 고금(古今)의 일을 논했는데, 그 때 왕께서 말씀하셨다.
≺노담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천수(天水) 태수(大守) 탁수(槖綏)가 대답하였다.
≺노담의 아버지의 성(姓)은 한(韓)씨이고, 이름은 건(虔)이며, 자(字)는 원비(元卑)라고 합니다. 꼽추인데다 다리까지 절름거리며 하천(下賤)하기 그지없어 태(胎) 속에서 이미 귀[耳]가 없었고, 한쪽 눈은 볼 수도 없었습니다. 외롭게 홀로 빌어 으면서 나이 72세가 되도록 아내도 없었는데, 때마침 이웃의 익수(益壽)씨 집 상노비(上老婢) 정부(精敷)라는 여인과 야합(野合)해서 아이를 잉태시켰고, 그렇게 해서 낳은 이가 곧 노자입니다.≻’
또 왕검(王儉)40)의 『백가보(百家譜)』에서 말하였습니다.
‘이(李)씨 성은 그 시조(始祖)가 고요(皐繇)의 후손이다. 고요는 순(舜)임금 때에 감옥을 다스리는 관리였었는데, 그로 인하여 성씨로 삼아 이(李)씨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씨가 흥기함은 담(聃)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자두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곧 이(李)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이은(李隱)이라는 사람이 임금을 맹렬하게 헐뜯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그 가족은 장액(張掖)으로 옮겨가 살게 했는데 가는 도중에 길에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의 노예(奴隸)들이 그 인수(印綬)를 가지고 보잘것없는 신분을 감추고 벼슬을 얻었다.’
이른바 농서(隴西)의 이(李)씨는 이로부터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나는 감히 천하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오천 마디의 가르침을 짓는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다른 물질들과 다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외물(外物)과 다투지 않음에 처(處)하고, 게다가 외물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이며, 약한 것을 지켜 주고 약한 자를 보호[守雌保弱]해 주는 것입니다.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에서 또 말하기를, ‘건축(乾竺:인도)에 고황선생(古皇先生)이 계신데 그분이 곧 내 스승이다. 끊어짐 없이 항상 존재해 계시므로 내가 지금 그곳으로 간다’고 하였고, 또 『부자(符子)』에서 말하기를, ‘노씨(老氏)의 스승님은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윤희내전(尹喜內傳)』에서는, ‘노자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출가(出家)하시려고 하십니까? 저의 스승님은 호를 부처님[佛]이라고 하는데 일체(一切)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지금은 제석천(帝釋天)의 공양을 받고 계시지만 돌아오시면 틀림없이 왕과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동시[一時]에 계(戒)를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척발(拓拔)씨의 원위(元魏)와 북대(北代)의 신군(神君) 달사달(達闍達)은 음산(陰山)의 계통인 것 같습니다.
『귀종경(貴種經)』에서 말하기를, ‘금(金)을 가지고 놋쇠나 돌[鍮石] 따위와 바꾸고, 비단[縷]을 가지고 보잘것없는 갈포(褐布)와 바꾸는 것이 마치 보배 여인을 버리고 노비와 교통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폐하가 곧 그러한 분이시며, 북대(北代)를 버리고 농서(隴西)를 인정하였는데, 폐하가 곧 그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 노자(老子)는 희계(姬季:周나라) 말엽에 태어났고, 석가는 주나라 초기에 탄생하셨으니, 세대의 차이가 10여 왕이나 되고 햇수는 2백여 년이나 앞섰으니, 이는 곧 스승과 제자의 증거[驗]입니다. 선후(先後)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 있으니, 이는 책을 조사해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고, 글에도 지적(指的)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셔서[好生惡殺] 그 덕택이 벌레나 물고기에까지 미쳤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고 불에 타는 사람을 구원하셔서 그 교화가 마름과 갈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삼황(三皇)의 세대와 똑같이 교화만 하고 벌주지 않으시며, 오제(五帝) 때와 같으셔서 군사만 정비했을 뿐 전쟁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성냄을 떨치시면 백만(百萬)도 마음에 흡족할 수 없을 것이며, 폐하께서 만약 추상(秋霜) 같은 위엄을 거두신다면 한마디 말에도 기록할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경망스럽게 어람(御覽)을 거스렸사오니 오락가락하는 혼백이 비양(飛揚)하오며, 티끌로써 위엄(威嚴)을 모독하였사오니 심혼(心魂)이 지킬 바를 잃고 말았습니다.”
황제가 그때 분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또 법사에게 물었다.
“짐(朕)이 들으니 주나라에서는 종친이 동맹하면 다른 성씨를 뒤로 한다고 하였다.
조상을 높이고 종친을 소중하게 여긴 것은 진실로 선고(先古)의 일을 따른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 단점을 뒤쫓아 쥐잡을 적에 구석[양端]으로 몰 듯하며, 비슷한 형태의 말을 널리 인용하여 불손(不遜)한 비유를 갖추어 진술하였는가?
머리털을 뽑아 범죄 행위를 헤아려 들추어낸다 해도 이것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모자랄 것이며, 죽간(竹簡)이 다할 때까지 그 허물을 쓴다 해도 여기에 비교하면 비길 바가 못 된다.
짐의 조상을 긁어 훼손하고, 짐의 선인(先人)을 비방하고 더럽혔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임금에게 강요한다면 이치로 보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자오니, 문왕(文王)은 큰 성인이시며, 주공(周公)도 큰 현인이신데도 먼 조상을 추모하고 죽은 사람에 대하여 예의를 극진히 하였으나[追遠愼終] 하늘[昊天]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효도하고 공손함이 지극하면 신명(神明)에 통달하게 될 터이니 비록 종주(宗周)가 있으나 의리상 어른의 자리를 다투지 않아야만 합니다. 왜냐 하면, 황천(皇天)은 특별히 친한 이가 없으니, 오직 덕 있는 사람을 돕기 때문이며, 고인(古人)은 이치에 따라 주고 친한 관계와 무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나를 앞세우지 않고 스스로 나를 뒤로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소원한 사람이라고 해서 상을 주지 않는 일이 없고 꼭 공이 있는 이에게 상을 주며, 친하다고 해서 벌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허물이 있는 이를 벌주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하니, 폐하께서는 도는 큰 것을 포함하고 광대(光大)하시어 그 은혜가 팔연(八埏:우주)에 미치셨고 덕(德)은 넓게 덮어 준 데다가 공평하고 균등하여 그물의 삼면(三面)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충정으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하시어 오청(五聽)을 달아 놓고 건건(乾乾)하게 하시옵고, 착한 간언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물 흐름처럼 하사 구중(九重)에 앉아 익익(翼翼)하게 하소서.
폐하께서 지금 뇌정(雷霆)같이 분노하신다면 저는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달게 받겠사오나, 혹시라도 우로(雨露)의 은혜를 드리우사 해골을 온전하게 해주신다면 지금 이후로 마주 앉아 말씀드릴 전(傳)이 2백여 조항이나 있사온데, 알지 못했던 것을 돌아다니며 묻고 의논한 다음 잘못된 것이면 빼버리고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20일이 되자 또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그대가 저술한 『변정론(辯正論)』의 「신훼교보편(信毁交報篇)」에는, ‘관음(觀音)을 염(念)하는 이는 칼로 내리쳐도 상해를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미 그러한 영험이 있다면 짐(朕)은 이제 너를 용서할 터이니 7일 동안 너는 관음을 염하도록 하라. 그러면 기다리고 있다가 형벌을 가하리니 정말로 신체가 끊어지는 일이 없겠는가?”
법사는 이미 온몸이 끈으로 묶인 데다가 형을 집행할 날마저 임박해지자 얼음 같은 한기(寒氣)와 숯불 같은 열기가 가슴 속에 교차하였으나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엿새째 되는 날 밤이 되자 서성거리다 슬퍼하면서 멍하니 기대앉아 시름에 잠겨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 거닐어도 답답하기만 하여 부질없는 인생이 잠시 동안 의탁한 이 세상을 개탄하였는데,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자 그로 인해 뜻을 말하였다.

초개 같은 이 목숨 풀잎에 달려 있는 이슬 같고
부질없는 삶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구나.
내가 슬퍼하는 것은 밝은 달밤에
옛 사람과 함께 하기 어려움 때문이라네.

법사는 눈물을 씻고 큰 소리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옛날에 추연(鄒衍)41)은 제(齊)나라 감옥에 구속되었고, 연(燕)나라 태자 단(丹)은 진(秦)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으나 오히려 여름날 햇볕과 가을의 서리를 감상하면서 검던 머리가 하얗게 변했거늘 어찌하여 유독 나에게만은 편벽되게도 묻고 호응해 주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말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신장이 1장(丈) 남짓한 신인(神人)이 흰옷을 입고 의관을 정제한 채 담을 넘어 법사 앞에 이르러 법사에게 말하였다.
“이미 몸뚱이를 잊고 도에 순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금 무너져 가는 기강을 유지하였고 가만히 보호하여 진정 번성하게 되었으니, 부디 너의 마음을 고달프게 하지 말라.”
이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다.
법사가 그로 인해 곧바로 공경을 다하여 온몸을 던지고 묵묵하게 삼존(三尊)을 생각하자 마침내 마음이 편안하고 가슴 속이 시원하여 두려움이 사라졌다. 7일 째 되는 날 아침이 되자 칙서를 내려 유덕위 등을 보내 법사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이제 사면할 기한이 다 되서 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어떤 영험이 있었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수(隋)나라 말엽부터 시끄러워져서 사해(四海)가 들끓어 올랐습니다. 역질[疫] 같은 독이 유행(流行)하였고 전쟁이 다투어 일어났으며, 군사들끼리 서로 정벌하여 각각 군사의 위엄을 떨쳤습니다. 신하들은 아첨이나 하고 임금은 황음(荒淫)하여 정치로 교화하지 못하고 왕이 가야 할 길을 끊고는 한쪽만을 고집했었습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정벌할 마음을 일으켜서 천하를 통제하고 표준을 세우시므로 도시에서는 죽이는 형벌을 사면하셨으니, 이것이 곧 관세음이며 황제의 조정에서 횡사(橫死)할 이들을 구제하셨으니 이 어찌 대세지(大勢至)와 다르다 하겠습니까?
공을 따지고 덕을 비교한다면 상성(上聖)들과 도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7일 동안 오직 폐하만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유덕위 등이 거듭 법사에게 물었다.
“이 앞에 칙지를 받들어 법사로 하여금 관음(觀音)을 송념(誦念)하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관세음은 염하지 않고 오직 폐하만을 생각했다고 말하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관음의 성감(聖誥)은 육도(六道)에 형체를 드리워 위로는 하늘서부터 아래로는 땅까지 모두의 사범(師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황제께서는 학문과 교양이 있으시고 생각이 깊으시며 총명하사[文思聰明] 해내(海內)에 광명을 비추셨으니 구이(九夷)가 직책을 받들고 팔표(八表)에 형벌이 그쳤습니다. 또한 임금은 거룩하게 되고 신하는 어질게 되어 실수로라도 외람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중생 돌보기를 자식처럼 하사 경전의 말씀과 같이 하시니 곧 이분이 관음이십니다. 이미 그 영험이 호응하여 서로 부합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오직 폐하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제가 저술한 『변정론(辯正論)』은 서(書)ㆍ사(史)와 더불어 부동(符同)하였으니, 한 글귀라도 어긋난 데가 있다면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충직함을 따르고 바른 것을 따르신다면 저는 털 하나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며, 폐하께옵서 만약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외람되게 벌하신다면 저는 죽어 자빠지는[伏屍] 애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유덕위(劉德威) 등이 장계에 기록하여 보고하자 황제가 기뻐하여 그로 인하여 법사를 불러 물었다.
“짐이 근래 법사의 문장을 보니 노자의 가르침을 다 떨어뜨리고 불교의 이치를 발언(發言)하였는데 그 훌륭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불교【釋】는 하열(下劣)하고 도교가 우세하다고 생각한다. 짐이 아직까지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는데 불교는 크고 도교가 작다고 하니 이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땅히 너의 마음을 다해 우열(優劣)을 비교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창언(唱言) 듣기를 기다릴 터이니 짐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기 바라노라.”
법사가 면전에서 아뢰었다.
“엎드려 받드오니, 성지(聖旨)는 크고도 넓으며, 명분과 의리[名義]는 크고도 깊었사옵니다. 게다가 하늘 아래 살면서도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없사오니 이것을 비교해 본다면 더 이상 비교할 데가 없사오며, 땅을 밟고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그 두터움을 알 수 없으니 이것과 짝할 만한 것을 찾아보아도 도저히 짝할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폐하께서는 크고 적음을 의심하지 않으시고 천권(天篩)을 되돌아보심이 제환공(齊桓公)이 비천한 사람의 술책을 예우함과 같고, 연(燕)나라 소공(昭公)이 곽외(郭隗)42)의 재주를 스승으로 삼은 것과 같사온데, 감히 말을 다하여 그 착하고 잘못됨을 낱낱이 진술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들으니, 묘각(妙覺:부처님)의 변치 않는 몸[常身]은 본래 색상(色像)이 없으나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그 자취에 형의(形儀)가 있다고 하옵니다. 감지함[感]은 큰 종[洪鐘]을 크게 치고 작게 침에 따라 소리를 내 주는 것과 같으며, 호응[應]함은 맑은 거울[明鏡]이 고운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비추는 대로 곱고 더러움을 나타내 주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교에서 이편(二篇:『도덕경』 상ㆍ하)을 으뜸으로 여김에 따라 그 이치가 백씨(百氏)를 뛰어넘었으니, 전모(典謨)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략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후한(後漢) 시대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남악도사(南岳道士) 저선신(褚善信)에게 말하였습니다.
‘무릇 서역(西域)의 가르침은 법왕(法王)의 말씀이다. 여섯 갈래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함령(含靈)을 널리 윤택하게 하시니, 경(卿)은 거짓을 버리고 참됨으로 돌아가 마음을 다하여 따르고 배워야 할 것이다.
만약 받들어 공경하지 않는다면 헛되이 1백 년을 보내도 아무 공 없이 세월만 보내고 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경이 만약 오만하게 굴면서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마음을 황로(黃老)에 전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로가 비록 법왕의 도량은 없으나 그래도 전세(前世)의 성인께서 찬집(撰集)하신 책이니, 비록 제자(諸子)와 다른 것은 없으나 말과 행실만은 매우 심오하여 성품을 무위도덕(無爲道德)의 창고[府]에 의탁하였다.
옛날 효경(孝景) 황제께서 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수행함으로써 도학(道學)이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백가(百家)의 으뜸자리에 처하여 불경과 비교하여 버금가게 되었었다.
모성자(茅成子)ㆍ열자(列子)ㆍ장자(莊子)ㆍ혜자(惠子) 등에 이르러서는 모두들 자연(自然)을 배우고 티끌 같은 세상 밖에 소요(逍遙)하여 또한 황로(黃老)의 다음이 되었으니 경은 흠모해야 할 것이다.’
또 오(吳)나라 상서령(尙書令) 감택(闞澤)이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을 마주하여 말하였습니다.
‘신이 살펴본 결과 부처님은 곧 무상법왕(無上法王)으로서 많은 성인이 귀의할 대상임을 깨달았습니다. 가르침은 일체 중생들에게 더하고, 불쌍하게 여김은 만류(萬類)를 포함했습니다. 깊기는 큰 바다와 같아 작은 지류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간택하지 않고, 밝기는 해와 달을 아우른 것과 같아 별빛마저도 꺼리지 않습니다. 만나고 접촉하면 곧 교화되고 사물을 마주치면 이것을 태우고 천상(天上)과 인간 세상에 자재(自在)하시는 존귀(尊貴)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하늘이 넓게 덮어 주는 공덕이 있고, 땅이 넓게 실어 주는 힘이 있다지만 이는 다 모든 부처님께서 건립(建立)하사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이 또 가만히 살펴보오니, 노(魯)나라 공구(孔丘)는 영특한 재능이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나고 거룩한 덕은 뭇 사람들이 합할 수 없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소왕(素王)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경전을 제작하여 주(周)나라 말엽 혼란한 세상을 가르치고 권장하였는데, 그 교화가 말엽[季葉]에 더하였으니, 유학을 스승으로 하여 풍화가 고금(古今)을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민(逸民)이 있었으니, 허성자(許成子)ㆍ광성자(廣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연자(涓子)ㆍ혜자(惠子)ㆍ장자(莊子) 등과 같은 백가(百家)의 자서(子書)들은 모두 신선의 법을 닦아 스스로 완미하고, 산골짜기에 방창(放暢)하면서 그 마음을 크게 가지니[縱太], 학문은 담박(淡泊)한 데로 쏠리고 일은 인간의 도리인 장유(長幼)의 절차를 어겼습니다. 그러니 또한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을 교화하는 풍속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차 이 세상이 함몰하고 침체되리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여러 백가(百家)를 고찰해 보았는데, 황자(黃子)와 노자(老子)의 의체(義體)가 깊고 넓으며, 안과 밖이 밝게 통달하였으므로 자(子:子集)를 고쳐서 경(經:경전)이라 하고 비로소 도학(道學)을 세워 칙명을 내려 조야(朝野)에 훈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공자와 노자의 이가(二家)를 불법(佛法)에 비교해 본다면 멀어도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공자와 노자가 펼친 가르침은 하늘을 본받아 쓰임새를 제정한 것이라서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나, 부처님께서 펼친 가르침은 하늘마저도 본받아 봉행하는 것이라서 감히 부처님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실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임금이 훌륭하게 여기면서 그로 인해 감택에게 말하였습니다.
‘경은 학문이 넓고 정밀하게 통하고 널리 열람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구나. 마땅히 태자 태부(太傅)의 직책을 더하고, 영시중상서령(領侍中尙書令)에 예전대로 복귀토록 하라.’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회삼교시(會三敎詩)에서 말하였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를 배우고
약관(弱冠)엔 육경(六經)을 다 터득했네.
중간에 다시 도서(道書)를 관찰하여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을 깨달았네.
만년(晩年)에는 불교 경전을 보았는데
마치 해가 숱한 별을 비추는 것 같았다네.

또 조사해 보니 송(宋)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안지추(顔之推)43)가 말하였습니다.
‘불가(佛家)에서 주장하는 삼세(三世)의 일은 믿을 만하여 징험이 있다. 만행(萬行)이 공(空)으로 돌아가고 천문(千門)이 착한 데로 들어가니, 어찌 다만 구경(九經)과 백씨(百氏)의 넓음일 뿐이겠는가? 분명히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ㆍ노자(老子)ㆍ장자(莊子) 등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다.’
또 『모자론(牟子論)』에서 말했습니다.
‘요(堯)ㆍ순(舜)ㆍ주공ㆍ공자ㆍ노자의 교화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교한다면 마치 흰 사슴[白鹿]을 기린(麒麟)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또 후주(後周)때 왕포(王褒)의 정고(庭誥)에 말했습니다.
‘도가의 의(義)는 지체(支體)를 무너지게 하고 총명(聰明)을 쫓아 버리며, 의리를 버리고 인을 끊으며[棄義絶仁], 형체를 여의고 지식을 버리는 데 있으니 이는 역중(域中)의 가르침이다.
반면에 석씨(釋氏)의 가르침은 괴로움[苦]을 보고 괴로움의 쌓임[集]을 끊으며, 적멸[滅]을 증득하기 위해서 도(道)를 닦으며, 원인[因]을 밝히고 결과[果]를 분별하며, 범부를 개혁하여 성인으로 만드시니, 이것이 불교의 극치이다.’
또 요즈음 비서감(秘書監) 우세남(虞世南)44)이 지은 『제왕략론(帝王略論)』에서 또한 말하였습니다.
‘노자가 가르친 이치는 곡신(谷神)은 죽지 않고 현빈(玄牝)에 영원토록 존재하니, 오래도록 관하여 영원히 살아서 용을 타고 학(鶴)을 타고 하는 것이 곧 구중(區中)의 가르침이다. 반면에 석씨(釋氏)의 법은 공(空)과 유(有)에 막히지 않고, 남이니 나니[人我] 하는 분별을 함께 잊고 나고 죽음[生死]을 초월하여 적멸(寂滅)에 돌아가는 것이 곧 형상 밖의 담론이다.’
또 저 우열(優劣)의 자취는 훈고(訓誥)에 그러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소(大小)의 유래는 폐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 하면, 조서[詔]가 나오기 전에는 불교가 크고 도교가 작았는데 조서가 나온 뒤로는 도교가 커지고 불교가 작아졌으니, 대소(大小)와 우열(優劣)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의 지극한 덕은 신명에까지 통하시어 그 은혜[雲雨]가 승려들[緇侶]에까지 베풀어졌고, 도는 지극한 성인을 이웃하여 현묘한 문[玄門]에 해와 달을 드리웠습니다.
친히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용렬하고 비박한[庸菲] 사람에게 물으시니, 다만 저는 하문하신 내용을 공경히 받들어 돌아보고 감히 구장(舊章)을 진술하매, 위엄을 더럽히고 모독하였으니 떨리고 두려움만 더더욱 깊어집니다.”
황제가 법사의 대답을 보고는 특이하게 여기고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 때 헌사(憲司)의 관리가 아뢰었다.
“법을 폐지할 수는 없사옵니다. 나라에는 고칠 수 없는 형벌이 있으니, 임금[乘輿]을 가리키며 나무란 모든 이는 그 죄가 대벽(大僻:死刑)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범림(法琳)이 비록 짐(朕)의 종조(宗祖)를 헐뜯었으나 전거(典據)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그 극범(極犯)을 사면시키고 익부(益部)로 옮겨 살게 하여 승려 노릇을 하도록 하라.”
법사는 추방당했으나 마음이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은 까닭에 그로 인하여 「도굴원편(悼屈原篇)」을 지어 자기의 뜻을 폈는데 그 가사는 이러했다.

하늘의 도가 유매(幽昧)해짐을 어찌하랴.
열수(列宿)가 어긋나게 펼쳐져 있구나.
충직하고 올바른 굴원(屈原)이여,
결국은 내쫓김을 당하였구려.
간교한 무리가 임금의 뜻을 맞추어 아첨하니
지위는 드러나고 이름 또한 드날렸네.
곧은 말 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마침내 재앙을 만났구나.
화씨(和氏)의 옥[璞]은 산택(山澤)에 버려두고
연석(燕石)을 보배로 여기네.
요염하게 아름다운 서시(西施)45)
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막모(嫫母)46)가 사랑을 받는구나.
가슴을 치며 굴원을 사모하고 생각해 보니
널리 통달했고 많은 지식 있었네.
군왕(君王)은 그의 절개 있고 올바름을 살피지 못하고서
쫓아내어 나라를 떠나갔네.
아첨하는 사람들의 현혹하는 말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덕을 혼미하게 하였구나.
연소(燕蘇 : 향초)를 거친 벌판에 내버리니
잡초만 번식되었네.
영결(鸋鴃 : 惡鳥)이 군림(君林)에서 지저귀니
완란(鵷鸞 : 吉鳥)이 날개를 접어 버렸네.
승냥이와 이리[豺狼]가 길에 버티고 종횡하자
기린과 고라니[麟麕]가 자취를 감추고 숨어버렸네.
봉황[鳳鳥]은 그래도 덕을 품을 줄 알건만
부서진 둥지를 보고 높이 날아가 버렸지.
기린(麒麟)은 오히려 도(道) 있음을 기뻐하는데
불인(不仁)을 보고서 달아나 버렸네.
충성스럽게 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자(箕子)가 거짓 미쳐 날뛰었네.
백이(伯夷)의 진실하고 정직함을 막으니
죄를 당하고 재앙을 만나고 말았지.
비간(比干)은 올바른데도 가슴을 찢겼고47)

오자서(伍子胥)48)는 절개가 있었건만
눈을 뽑히는 아픔 당했네.
청백(淸白)한 굴원(屈原)이여,
멱라(汨羅)에 빠져서 돌아오지 않네.

그 때 경읍(京邑)의 승려들이 뜬소문[流言]만 듣고 법사에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하게 하고 정신을 맑혀 요도(要道)를 구출(求出)할 수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파사론(破邪論)』과 『변정론(辯正論)』을 지어서 천정(天庭:황제의 궁전)을 시끄럽게 하고 주상(主上)을 성나게 함으로써 석교(釋敎:佛敎)를 번복(翻覆)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그대가 만약 진술한 말들이 꼭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면 왜 그대를 검남(劍南)에 옮기라고 허용했겠는가. 만약 부처님의 법에 공(功)이 있다면 어찌 업신여김[陵遲]이 이와 같겠는가?”
법사가 그 말을 듣고 몇몇 도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辱)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다.
부혁(傅奕)이 승려를 독정(禿丁:승려를 빈정대며 하는 말)이라고 하고, 부처님을 호귀(胡鬼:오랑캐 귀신)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인정한다면 그 무엇인들 용납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 당시 대덕(大德)들이 구름같이 밀려들고 명승(名僧)이 비처럼 많아서 비록 사아함(四阿含)과 팔만장경(八萬藏經)을 인용하였으나 붓을 놓으려 해도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고, 다만 구부(九部)와 삼승(三乘)을 깨달아 알았으나 말을 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소박(疎薄)함을 헤아리지 않고 무너진 기강을 유지하겠노라 맹세하였다. 이로 인해 서적[典墳]에서 주워 모으고 자집(子集)에서 찾아내서 저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고 저들이 한 삿된 말을 꺾음으로써 마침내 아첨하는 부혁을 말이 없게 만들었고, 이중경(李仲卿)과 유덕위(劉德威)가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게 하였다.
진실로 한 치[寸]만한 것이라도 큰 것이 있고, 한 자[尺]만한 것이라도 길지 않은 것이 있으니, 구슬로써 올빼미를 쏘는 탄환을 만드는 것은 진흙덩이 단단한 것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칙명을 내려 비록 나를 익부(益部)로 좌천시켰으나 어찌 죄를 추궁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불법(佛法)에서 지금 또한 편안한데 이를 어떻게 번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굴원(屈原)이 참소를 당하여 쫓겨났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굴원을 충성스럽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변씨(卞氏)가 구슬을 바치고 나서 형벌을 받았으나 누가 이 사람을 잘못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또한 당시 임금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굴원이 비록 쫓겨나는 일을 당했으나 「이소(離騷)」는 왕성하게 퍼졌으며, 변씨 또한 비록 형벌을 받았으나 성(城)을 보전하는 것을 오히려 보배로 여겼다. 다만 맑은 물[淸水]과 정제한 쌀[圓米]이 행해지는 곳이라고 해서 어찌 한스러워 하는 바가 없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말을 마치고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는 그로 인하여 시를 지으니 그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굴원같이 지조를 지켰건만
「어부편(漁父篇)」은 더듬어 보지 않았다네.
묻는 말은 쑥대처럼 변하는 말이었으나
대답은 곧기가 줄[絃]과 같았네.

그리고는 울음을 거두고 소리를 삼키며 목 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때를 만나지 못해서 이제 남쪽으로 좌천을 가지만 바라건대 모든 덕 있는 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글로 전하여 때때로 나고 죽음을 따져 보기 바라오.”
그 때 도속(道俗)들이 전송하면서 서울 근교를 꽉 메우고 목메여 울면서 밝은 신[明神]을 대하듯이 공경하였다.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가 천천히 떠나가자 법사는 친구들과 이별하면서 또 시를 지어 읊었다.

뜻하지 않게 잘못 죄를 쓰고서
친구도 여의고 또 어버이까지 여의네.
산천(山川)이 만 리를 가로막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7척의 몸이 고달프기만 하네.
때로는 혼백 멀리 초나라 땅으로 가거니와
마음만은 나뉘어 홀로 진(秦)나라에 머문다네.
스스로 서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사별(死別)하는 사람을 가엾어 하리.

여름 6월 정묘(丁卯)에 행차가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는데, 이질병(痢疾病)에 걸려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구원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이 임박하자 법사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의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은 이 몸이 진실로 아무 데도 쓸모없게 되었구나. 이렇게 추악함이 드러난 것을 보니 매우 싫어할 만하구나. 본래 도(道)에 순직함으로써 입신(立身)하리라 기약했는데, 뜻대로 되지 못하였구나. 기린을 위해 울고 봉황을 위해 슬퍼하니[泣麟傷鳳] 슬픈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이때는 곧 정관(貞觀) 14년(640) 가을 7월 23일, 법사의 춘추(春秋) 69세였다.
도속(道俗)이 슬퍼하기를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하였고, 동쪽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백탑(白塔)을 높이 세웠는데, 오고 가는 길손[行侶]이 왕래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의 인품에 대하여 두루 다 알고는 곧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다만 법사는 예업(藝業)이 뛰어나고 넉넉하여 분소(墳素)49)를 다 해통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사림(詞林)이라고 호칭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학해(學海)라고 불렀다.
또한 바람 앞에서나 달빛 아래서 읊은 시와 봄 난초ㆍ가을 국화에 대한 글을 보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체득하여 정(情)을 따름이 아울러 여락(麗落)하였다.
전 비서감(秘書監) 우세남(虞世南)은 옛 사람을 초월할 만큼 그 이름을 떨쳤고 도(道)에 대해서는 당대에 으뜸이었다. 그가 곧 법사의 글을 모으고 그 서문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묘(神妙)하기가 비할 데 없다면 산가지로 계산해서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인데, 지극한 이치[至理]가 아득하다면 어떻게 승준(繩準:줄자)으로 재어 알 수 있겠는가. 진실로 변함없는 도[常道]는 말로 형언할 수 없어서 마치 끊어진 벼랑과 같거늘 어찌 천종(天縱)50)에 기대어 그 묘명(杳冥)함을 엿볼 수 있겠는가.
오문(五門)과 육도(六度)의 근원이나 반자(半字) 일승(一乘)의 가르침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구류(九流) 백씨(百氏)의 안목과 삼통(三洞) 칠검(七撿)의 문장을 가지고 어떻게 경위(經緯:縱橫)로 엮어서 그 규모를 드러낼 수 있겠으며, 어찌 심력(心力)으로써 그 경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 당대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 법사는 어릴 적부터 삼론(三論)을 익혀 이름이 조야(朝野)에 알려졌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숱한 경전을 다 꿰뚫어 알아서 그 명성을 수속(殊俗)에 떨쳤다.
그의 행동거지는 엄숙하고 공손하였고 절개 또한 널리 알려졌다. 청한(淸翰)에 계속해 머물면서 은미한 이치를 발견하여 가려냈다. 대지가 봄을 만난 것과 같아서 용(用)을 감추었으나 인(仁)이 나타나는 터전이었고, 어리석은 듯 말더듬이인 척 밖으로는 어두운 것같이 행동했으나 안으로 밝은 공이 있었다. 진실로 그의 지혜는 측해(測海)와 같았고, 그의 도학은 미천(彌天)에 버금할 만하였으니, 어찌 그의 지조(止操)를 어제 산도(山濤)에 비교할 것이며, 신비함이 어찌 유량(庾亮)에 짝할 만할 뿐이겠는가?
그리고 그의 글 내용은 법에 맞게 썼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으며, 화려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마치 팔음(八音)이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색깔[五色]이 서로 통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도행(道行)은 바른 견해를 삼공(三空)에서 받아들이고 중생[群生]을 팔고(八苦)에서 건졌으며, 이미 학문이 넓은데도 마음을 낮추었고 또한 낮은 데로 나아가면서도 높은 데 있는 사람을 조롱하였으니, 실로 석가 종족의 동량(棟梁)이며, 선한 사람[善人]의 우의(羽儀)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부족한 사람에겐 보태 주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은 보호해 주며, 남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하였다. 풍광(風光)을 소중하게 여겨 숲 속 창문으로 햇볕을 물리치고,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안개와 노을[烟霞]을 짊어지고 살았으며 원력(願力)은 융화하였으나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았다. 수(隋)나라 개황(開皇:文帝의 연호) 말엽에 청계산(靑溪山) 귀곡동(鬼谷洞)에 은거했었는데, 멀리 바위틈에 움막을 얽으니 일월(日月)이 가려졌고, 허공에 창문을 내니 풍운(風雲)을 토해 내고 받아들였다. 그 사이에서 다섯 가지 지초[芝]를 캐면서 생활하였고 여덟 가지 선법[八禪]을 닦으면서 침식(寢息)하였으며, 계곡에서 솔잎과 삽주[松朮]를 먹고 산 언덕에서 벽려(薜茘)나무 껍질을 벗겨 몸에 둘렀으니, 모든 사람들마다 다 합장하고 귀의하였으며 마정(摩頂)의 도를 물었다.
경행(經行)하면서 고요하게 살기를 10여 년이나 하였건만, 그러나 첩첩한 산등성이와 우뚝한 봉우리, 그리고 길게 자란 소나무와 깊은 골짜기는 야로(野老:촌 늙은이)가 서성거리던[桓盤] 곳이며, 덕망 있고 어진 이들이 노닐던 곳이라서 몸이 이르고 눈 닿는 곳마다 반혈지귀(攀穴指歸)가 아닌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청계산기(靑溪山記)』 1권을 지었는데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은 학업이 용렬하고 천박하며, 식견과 사려 또한 깊지도 못하면서 이에 천착(穿鑿)한 단편(短篇)의 글로 정각(正覺)을 업신여겨 장차 이것을 널리 펴고자 하여 가만히 뇌문(雷門)에 비교하니, 중용(中庸)의 사람들이 자못 엇갈리고 현혹되었다.
법사는 저 후곤(後昆)을 불쌍하게 여겨 다시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었다.
비록 우(虞:虞世南)와 위(衛)에게 알려서 표(表)로 사실과 다름을 아뢴 것이 무려 아홉 차례나 되었으나 노둔한 말과 천리마[腋驥]가 함께 달려도 천리마만이 천 리를 달렸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마침내 붉은색과 자주색을 각각 달리하고 맑고 흐린 것을 가려내어 평범한 것으로 성인을 헤아리는 잘못을 꾸짖고, 속된 것으로 참다운 것에 비교한 허물을 책망하였다. 그때마다 옛글을 인용하여 유(儒)는 도(道)가 아님을 이치로 증명하였는데, 간곡하게 깊은 심정을 이루고 그 지적한 사항이 주밀(周密)하였으므로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럽고 깃발 쓰러지듯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얼음이 녹아내리듯 와해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방 안에 들어가서 창을 잡을 꾀를 내려 하였으나 머리를 구부려도 그 머리마저 용납해 줄 땅이 없었다.
그 때에 이 책을 전사(傳寫)하는 이들이 끊임없었고 널리 유포되어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으니, 마치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나는 것과 같아 모두 나아가야 할 길을 잃었다가 다시 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법사가 저술에 임하는 성품은 신속하면서도 또한 이치에 밝았다. 그런데 평범하게 저술한 그의 책들이 유실(遺失)되어 없어진 것도 많다.
이제 흩어져 있던 것들을 채집하여 얻은 시(詩)ㆍ부(賦)ㆍ비지(碑誌)ㆍ찬송(讚頌)ㆍ잠계(箴誡)ㆍ기전(記傳)ㆍ계(啓)ㆍ논(論)과 삼교(三敎)의 계보(系譜)와 석씨와 노자의 종원(宗源) 등을 모두 합하여 30권으로 만들었다.
법사와 나의 돈독한 우정은 담담한 물과 같으나 의리는 금란(金蘭)과 같으니, 비록 입은 옷은 서로 달랐지만 풍기(風期)는 정말로 도타웠다.
문득 등경(虅綆)으로 저 규장(珪璋)을 엮어 내어 차례대로 편집하고 자세히 갖추어 놓은 것이 별목(別目)과 같으니, 이 모든 것들은 다 문장이 굳세고 그 뜻이 아름다워 마치 계수나무 향기와 난초 꽃봉오리[桂馥蘭葩] 같았으므로 승려와 속세에 왕성하게 전파되어 보고 듣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석언종(釋彦琮)이 찬을 지었는데 그 찬문(贊文)은 이러했다.
“『주역(周易)』에서 일컫기를, ‘태극(太極)은 양의(양儀:陰陽)를 생하고 양의는 사상(四象:太陽ㆍ少陽ㆍ太陰ㆍ少陰)을 생한다’고 하였으며, 노자는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초이고, 유명(有名)은 만물(萬物)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도(道)를 서술하고 덕(德)을 서술하며, 효(孝)를 이야기하고 충(忠)을 이야기하니, 이것도 또한 방내(方內)의 지극한 말이며 성중(城中)의 커다란 가르침이다. 어찌 보고 듣는 것 외에 네 가지 덕을 지닌 항상한 몸이 형기(形器)보다 앞서고 한결같이 여여(如如)하여 응잠(凝湛)하다는 말을 듣겠는가?
비로소 품물(品物)에 편안함을 베풀어 주고자 하여 가유(迦維)에 형상을 의탁하였으며, 염부(閻浮)에 이익을 주기 위하여 용(龍)이 도수(道樹:菩提樹)에 올랐다.
그때 다섯 가지 눈[五眼]을 맑히고 세 가지 밝음[三明]을 밝히며, 여섯 가지 신통[六通]을 갖추고 온갖 덕[萬德]이 원만하였다. 신비한 광명으로 이 세계를 밝히고 호상(毫相)을 다른 세계에 놓았으며, 대지(大地)를 진동하여 미혹한 무리들을 경책하고 뇌음(雷音)을 진동하여 군품(群品)을 놀라게 하였다.
처음에는 녹야(鹿野)에 구름을 드리워서 저 작은 근기[小根]에 이르기까지 덮어 보호해 주고, 마지막엔 학림(鶴林)에 물뿌려 촉촉하게 이 큰 잎새까지 적셔 주었다.
그 사이에 세 가지 삿됨이 도(道)에 굴복하여 선하(禪河)에 화구(火具)를 버렸고, 열 가지 다른 마음을 가진 이[十異]들이 마음을 귀의하여 맑은 물 흐르는 복의 땅[福地]에 목욕하였다. 이로부터 미묘한 말씀 이미 끊어지고 불일(佛日)이 빛을 감추니, 큰 이치는 장차 무너지려 하고 삿된 바람이 다투어 일어났다.
그러므로 제바(提婆)와 동수(童壽:鳩摩羅¥)가 무너진 기강을 다 밝히고, 용수(龍樹)와 마명(馬鳴)이 끊어진 실마리를 이어 놓았다.
금인(金人)이 꿈에 나타나 감응하고 진채(秦蔡)가 서쪽에 유람함에 이르러서는 옥마(玉馬)가 동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등란(騰蘭:馬騰과 竺法蘭)이 발꿈치를 내렸으니, 그 때문에 구선(九仙) 좌도(左道)가 경기(京畿)에 개미 떼처럼 모여들었고, 오악(五岳)에 삿된 무리들이 솔개처럼 제궐(帝闕)에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모기 날개 같은 것을 다투어 자랑하고, 반딧불 같은 광명을 저마다 믿고서 대붕(大鵬)을 타고 다니는 이에게 비교하려 하고, 용촉(龍燭)과 같은 광명에 견주려 하였다. 그러나 승상(勝51)上)이 삼략(三略)을 시행해 보기도 전에 이미 포모(苞茅)를 천신(薦神)하였고, 난공(蘭公)이 육도(六韜:六韜三略, 즉 兵書)를 펼쳐 보기도 전에 함벽(銜璧)을 흠모하여 본받았다.
그런 까닭에 허공에 오운(五雲)의 일산을 달았고, 뜰에는 칠보(七寶)의 변화를 날리니, 일궁(日宮)은 빛을 감추고 기전(綺殿)에 빛을 드날렸다. 그 때에 건갈(巾褐)을 버린 사람이 그 수효가 숲 속의 나무와 같았고, 해탈(解脫)을 따른 사람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과 같았다. 그리하여 곧 불교의 문[釋門]이 크게 열리고 불일(佛日)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목야(牧野)에서조차 창을 거꾸로 돌리니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명승(名僧)이 간간히 출현하고, 뛰어난 인물[髦彥]이 태어나 그 사람을 대신하였으며, 온갖 사첩(史牒)에는 도융(道融)이 있어 지혜의 검[智劍]을 끌고 종횡무진 돌아다녔으며, 비로소 현공(顯公)이 법려(法蠡)를 옹호하여 곧바로 나아가니 강빈(姜斌)은 위나라 조정[魏闕]에서 꺾였고 육수정[陸靜]은 제나라 조정[齊朝]에서 굴복하였다. 한때의 신비한 무예[神武]가 근본이 되어 영광된 소문[榮聞]이 퍼져 나갔다.
우리 대(大) 당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삼황(三皇)과 나란히 걸터앉고, 오제(五帝)를 초월하였으며, 요순(堯舜)을 어머니로 삼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을 아들로 삼으니, 팔연(八埏:宇宙)은 덕으로 다스려졌고 만국(萬國)에 군림(君臨)하게 되었다.
옥고(玉鼓)와 법려(法蠡)의 가르침을 열고, 불일(佛日)과 금경(金鏡)의 광명을 휘날리게 되었으니, 탕탕외외(蕩蕩巍巍)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때마침 부혁(簿奕)과 유덕위(劉德威)가 경악한 일을 만들어 망령되게 삿된 말을 얽어내자 부르면 화답하는 것이 이에 같아지고 서로서로 이와 입술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법사는 어릴 적부터 높은 도량을 품었고 마음속에 온갖 흉악함을 다 없앴으므로 전모(典謨)에서 더듬어 찾아내서 최고의 이치로 글을 지으니, 모두가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듯하여 승려나 속인[緇素]이 밝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사생(四生:胎ㆍ卵ㆍ濕ㆍ化)에 덮여 있는 요악스런 기운을 거두어 주고, 지혜의 빛으로 삼계(三界)를 비추어 마침내 붉은 색과 남색[朱藍]은 각기 제 색깔을 나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삿되고 바른 것이 분명하게 구분되게 되었으니 왕성하고 아름다운 명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퍼져 나갔다.
내가 이미 옆에서 얻어 들은 나머지 논(論)과 생각하여 기억해 낸 덕스러운 말씀을 우선 사재(史才)에서 모조리 찾아내고 다만 마멸되고 썩어가려는 것들을 알아내었으며, 시(詩)ㆍ부(賦)ㆍ계(啓)ㆍ송(頌)과 같은 작품과 장(章)ㆍ표(表)ㆍ비(碑)ㆍ뇌(誄)와 같은 과목의 글과 여러 자리에서의 지극한 말씀, 그리고 화문(花文) 염조(豔藻) 따위의 글에 이르러서는 모두 별간(別簡)에 자세히 밝혔으므로 여기에서 언급할 바가 아니다.
또 고굉불성(股肱佛聖)의 책과 장참법왕(牆塹法王)의 기록과 천명(天命)을 대양(對揚)하고 대유(大猷)를 광현(光顯)한 글 따위는 보고 듣다시피 실록(實錄)에 남겨져 있으니, 부디 앞사람이 꽃답게 만들어 놓은 것을 실추시키지 말고 후진(後進)들이 어떻게 하면 저것처럼 같아질 수 있을까 하고 노력하기 바란다. 승사(僧史)를 보충하다가 여기에서 빠진 기록에 대해서는 성덕(盛德)에게 청하여 물어보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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