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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91 불교(근본살바다부율섭 4권 / 根本薩婆多部律攝)

by Kay/케이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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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4

 

근본살바다부율섭 제4권

승우 모음의정 한역
심재열 번역
김형준 개역


7) 조대사(造大寺)학처저 때에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교섬비국(憍閃毗國)에 계셨다. 6중(衆) 필추가 좋은 나무를 베어 가지고 큰 절을 지으려 했다. 비록 승가를 위해서이지만 비난받는 번뇌를 초래했기 때문에 선업을 닦는 데 방해가 되었다. 다툼을 일으키는 사연과 번뇌는 전과 같은 것으로 인하여 이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필추가 큰 주처를 만드는데 시주가 있어 대중을 위해 이를 지을 적에는 필추는 마땅히 필추 대중을 데리고 가서 그 처소를 살피도록 해야 한다. 저 필추 대중도 이곳이 법에 맞는 청정한 곳인가, 다툼이 없는 곳인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인가를 관찰해야 한다.만일 필추로서 법에 맞지 않는 부정한 곳이나 쟁송의 다툼이 있는 곳이나 나아갈 수 없는 곳에 큰 주처를 짓거나 사주가 있어 대중을 위하여 지으면서 여러 필추를 데리고 가서 그 처소를 관찰하게 하지 않고, 이와 같은 곳에 큰 주처를 지으면 승가벌시사가 된다.”‘크다’ 함에는 두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첫째는 시주하는 재물이 큰 것이고, 둘째는 그 부피[形量]가 큰 것이다.
‘만일 지나침이 없다’고 함은 대중을 위해서 짓도록 허락한 경우이다. 만일 부정함 등의 인연이 있으면 제재해서 짓는 것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주처’라고 함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성문대중은 다 이것을 수용하셨고 부처님께서 또한 허락하신 곳이니,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모든 이가 만들어 보시하는 것이다. 만일 필추가 큰 절을 지을 때에는 그 한도가 3층에 이르며, 불전(佛殿)인 경우는 5층이다. 그러므로 급고독 장자에게 절 짓는 법식을 이렇게 허락하셨던 것이다. 장자가 금을 땅에 두루 폄으로써 서다림(逝多林)을 사서 절을 짓고 장엄하여 마치고 부처님과 성중(聖衆) 등을 받들어 모셨던 것이다.만일 시주가 대중을 위해서 절을 짓는데, 다시 시주가 있어서 이 절 가운데 따로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방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마땅히 절 짓는 시주에게 공사하는 일을 일으킬 것인가를 물어야 된다.아울러 이로부터 아래는 방사와 와구(臥具)를 나누는 법식을 밝힌 것이다.여름철 이전에 미리 나눌 것이니, 혹은 안거하는 날이 되기까지 나눈다. 그 일을 맡은 이[授事人]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저 방에 이익이 있고 옷이 있으니 만일 필요하신 이는 차례대로 가지십시오”라고 해야 한다. 만일 당시에 갖지 아니하고 나중에 가서 세 번째에 이르기까지 다시 구하면 한두 번 구할 때에는 아직 당장 주어서는 안 되며 세 번 구할 때는 마땅히 주되, 구하면 악작죄를 얻는다.방이 만일 적으면 마땅히 사람을 헤아려서 이것을 나누어야 한다. 마땅히 방 하나를 남겨서 손님 필추에게 배려하도록 해야 하나니, 모두 다 나누어 주지 말아야 한다.만일 다른 주처에 있던 필추가 찾아오면 후안거[後夏]1)인 경우에는 차례대로 따라서 주면 되고, 후안거가 안 된 때에는 주어서는 안 되니, 아는 사람에 의지해서 처소에 따라 머물고, 옷과 음식의 이익은 마땅히 고르게 나누어야 되고 수사인(授事人)을 시켜서는 안 된다. 다섯 종류의 사람은 수사인을 시켜서는 안 되니, 이른바 소달라(蘇呾羅)ㆍ비나야(毗奈耶)ㆍ마실리가(摩室里迦)2)를 해석하는 이와 승가의 상좌와 대중을 위해서 독송하는 사람이다.만일 주처에 방사가 많으면 마땅히 당시의 사람 수 많고 적음을 따라 혹은 한 사람에게 두 개를 주고 혹은 세 개를 주어도 좋다. 모두 이 방들을 때에 따라 수용할 수 있으니, 혹은 전식(前食)이나 후식(後食)에 사용한다.만약 승가의 물건이 파괴되었으면, 속인에게 권하여 시주해서 힘을 따라 나누어서 보수를 하게 할 것이며 버리거나 고의로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만일 거처가 좁으면 요나 자리의 양을 똑같이 하여 균등하게 함께 나누어서 모자라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하며, 모든 자리나 풀 자리 등도 마땅히 고루 나누어야 된다. 물병과 약병을 놓아두는 곳과 양치하는 나무를 두는 곳, 흙가루로 만든 구마야처(瞿摩耶處)3)나 대중이 다니는 곳은 제외한다.만일 방문 있는 아래의 행낭[廊]이나 처마 앞에 있는 위아래의 복도 및 창고 같은 곳은 모두 나누어서는 안 된다. 아란야에서는 드러난 땅에는 다소 둘 수는 있으나 병이나 기물을 두는 곳이나 대중이 사용하는 땅도 역시 나누지 않는다.만약 시주가 절 안에 따로 방을 지어 시주하기를 원한다면, 그 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응당 그 이익을 받고 아울러 수리하여야 한다.
혹 시주의 마음에 따라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그 사람은 비록 그 별시(別施)를 중복하여 받았더라도 대중과 그 이익을 나누어 모두 주어야 한다. 따로 방을 시주하였으면 머무는 방에 따라 균등히 나누어야 한다.만일 큰 평상, 큰 자리로서 이전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문도들이 이것을 옮겨 주어야 한다.
만일 대중의 일을 위해서라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방을 나눌 때는 차례에 따라서 몫을 남겨야 한다.아란야처는 걸식할 때는 지키는 이를 두어야 하며, 음식을 균등하게 주어야 한다. 자물쇠를 채울 때는 마땅히 기록하는 데를 만들어 지키도록 해야 된다.마음대로 개를 기르되, 그 개 기르는 이는 모름지기 그 행법을 알아야 된다. 만일 솔도파(窣覩波:불탑)나 방원지(坊院地)에서 개가 짖을 때는 마땅히 그치도록 해야 한다. 만일 부정한 것을 떨어뜨리면 곧 제거해야 하니, 깨끗이 치우지 않으면 악작죄를 얻는다.만일 약차(藥叉)나 맹수 같은 것이 있는 곳이면 거주해서는 안 된다. 두 개의 방안에서 안거를 짓지 말아야 하니, 설사 안거를 짓더라도 마땅히 두 곳에 있는 물건 가운데 하나를 취해야 할 것이다.무릇 출가한 이는 모든 이양꺼리에 있어서 모두가 다 분수를 넘어서 탐내고 구해서는 안 된다. 다투는 이가 있어 장차 오려 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3시(時)에 따라 미리 방사를 나누어야 하니, 이른바 봄ㆍ여름ㆍ겨울에 따라서 나누어 공급함을 말한다.다시 여섯 가지 주처를 나누는 일이 있다. 첫째는 절, 둘째는 절 안의 경계의 분한(分限), 셋째는 절 밖의 방, 넷째는 방 안의 경계 분한, 다섯째는 동산, 여섯째는 동산 안의 분한이다.만일 다투는 자가 ‘우리에게 방을 나누어 주시오’ 하면 마땅히 그에게 말하되 ‘다 이미 나누어 마쳤습니다’라고 하고, 만일 다투는 이가 떠났으면, 그 뒤에 평상시의 차례에 의해서 법에 따라 다시 나누어야 한다.만일 다투지 않는 이라면 마땅히 함께 나눠야 한다. 만일 나누어 주지 않으면 월법죄를 얻는다. 혹은 일분(日分)이라 해서 이것은 오늘, 저것은 내일이라 하거나, 시분(時分)이라 해서 이것은 소식(小食), 저것은 대식(大食)이라고 하거나, 혹은 존분(尊分)이라 해서 이것은 아차리야(阿遮利耶)의 방이고, 저것은 오바타야(鄔波陀耶)의 방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나누는 것은 다 악작죄를 얻는다.만일 병든 필추가 옛 방을 좋아하면, 차례가 아니라도 주어야 된다. 그러나 병 없이 거짓으로 병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방을 나누어 마치고 난 뒤에 사람이 찾아오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방을 뺏어서는 안 된다.만일 밤에 이르러 오거나 혹은 잠시 머물면서 밤에 방을 나누어 줄 것과 요와 이불을 요구할 경우, 만일 준다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둘 다 악작죄를 얻는다.
만일 밤에 이르렀다면 사람을 서로 괴롭혀서는 안 되니, 서로 아는 바에 따라 시간을 보아서 멈추어야 한다.급고독 장자가 걸식하는 이들을 위해 쉬는 집을 세웠는데 6중 필추가 그 소문을 듣고 모두 다 모여 와서 함께 그 집을 나누어 악작죄를 얻었다. 무릇 이러한 법답지 않게 나누는 것은 주어도 함께 취해서는 안 된다.만일 인연이 있으면 모름지기 다른 절로 향하고, 시간이 촉박하였으면 앉는 차례를 따지지 말고 아무 곳에서나 먹으라. 밖에 있는 음식이 거처에 이르러 왔으면 음식을 먹고 싶은 사람이 만일 제한이 없을 경우엔 마음대로 그것을 먹어도 된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의 분한이 있으면, 곧 먹어서는 안 된다. 절 안에서 차례로 방을 나누는 것과 같다.만일 나무 아래에 있거나 만일 평지에 있거나 혹은 부드러운 풀밭이거나 또한 차례대로 나누어서 마땅히 백이갈마로써 다섯 가지 법을 갖춘 자를 뽑아서 와구(臥具)를 나누게 하라. 있는 대중의 와구를 아래로는 발 닦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모름지기 모아서 한 곳에 두게 하라. 상좌로부터 나누되, 열두 사람이 있으니 모름지기 다 뽑아 보내라.첫째는 밥을 나누는 사람, 둘째는 죽 나누는 사람, 셋째는 떡과 과실을 나누는 사람, 넷째는 와구 나누는 사람, 다섯째는 모든 잡된 일을 맡아 나누는 사람, 여섯째는 그릇ㆍ물건을 보관하는 사람, 일곱째는 옷을 보관하는 사람, 여덟째는 옷을 나누는 사람, 아홉째는 비옷을 보관하는 사람, 열째는 비옷을 나누는 사람, 열한째는 잡된 것을 몰아내는 사람, 열두째는 방사를 검사하는 사람이다.만일 와구와 이부자리를 나눈다면 또한 차례를 따라서 나누어야 하나니, 남은 것이 있을 경우 손님 필추나 필추니가 오면 마땅히 주어서 눕게 해야 한다. 모든 와구는 좋은 것부터 나누어 마친 뒤에 남은 것이 있으면 대중에게 고하여 다시 나누어 맡게 하여 상하고 부서지게 해서는 안 된다.무릇 이 승가의 와구를 수용할 때에는, 마음대로 작고 가벼운 좌구와 때가 타고 성근 나쁜 물건을 가지고 속옷으로 대신하여서는 안 되니, 악작죄를 얻으며 흑배(黑背:불길)의 재앙을 부른다.승가의 일을 맡은 이는 반달마다 마땅히 방사를 돌아 살피고 그 와구를 살펴봐야 한다.
만일 노인이나 젊은이가 법식에 따르지 않고 와구를 쓰면 검사를 한 뒤에 나이든 이[老宿]라면 대중에게 고해서 알게 하고, 젊은이라면 마땅히 두 스승에게 말하여 그 와구를 빼앗고 법에 준해서 꾸짖어야 한다.만일 절 방의 복도에 새가 와서 깃들여 시끄럽게 하면 사람을 시켜 둥지를 살펴보게 해서 알이 없으면 곧 없애야 한다. 새끼와 알이 있으면 가는 것을 기다려서 제거한다.만일 벌집이 있을 경우 새끼가 없거든 없애고, 있거든 실로 얽어두는데, 이렇게 묶어둠으로 말미암아 더 불어나지 않게 된다.만일 시주가 절을 지어서 승가에 시주하고는 일이 있어 다른 곳에 가서 오래 오지 않으면 절에 머무는 필추들은 음식이 떨어졌다고 이 주처를 버리고 모두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마땅히 함께 걸식하며 스스로 지탱하고 지내야 한다. 이렇게 5년이 되기까지 오지 않을 때는 마땅히 근처의 절과 이웃해 살면서 이양(利養)을 함께하고 포쇄타(褒灑陀)는 따로 해야 한다. 만일 절 주인이 오면 그의 형편에 따라야 하며 만일 오래도록 오지 않으면 광문(廣文)에 갖추어진 것과 같이 하라.절이 허물어져서 다시 중수하려면 같거나 혹은 더 좋게 할지언정 줄여서는 안 된다. 만일 시주가 능력이 모자라다면 또한 따라서 받아들여야 한다. 향대와 제저(制底:탑묘) 는 같거나 크게 하고 적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거룩한 채색 그림 조각이 훼손되었으면, 마땅히 떨어버리고 옛 모습에 의거해 다시 그린다. 부처님 말씀은 경 글씨가 부서지고 닳아 상했으면 옛 글씨를 깎아내고 다시 써서 새롭게 하라.다음에 부엌을 만드는 법을 밝히겠다.
무릇 절 안에는 마땅히 부엌을 만들어야 한다. 그 종류는 동일하지 않으니,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음을 내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함께 인지(印持)하는 것이고, 셋째는 소가 누운 것 같은 곳이고, 넷째는 옛날에 있던 무너진 곳이고, 다섯째는 대중이 결의해 지은 곳이다.‘마음을 낸다’ 함은 한 번 지은 적이 있던 필추나 속인을 따라서 처음 방사를 만들고 벽돌을 찌고 할 때의 마음과 생각을 말하기를, “지금 이곳 이 자리에 승가를 위해서 부엌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함께 인지하는 것’이란 말을 잘 살필 줄 아는 필추가 처음으로 주춧돌을 안치하고 장차 공사를 일으켜서 하는 것이니, 함께 머무는 필추에게 말하기를, “여러 구수여, 그대들은 모두 아십시오. 이 자리에 승가를 위해서 부엌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다.‘소가 누운 것 같은 곳’이라 함은 그 방의 문이 정한 기준 없이 어지러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무너진 곳’이라 함은 대중스님이 없는 텅 빈 곳을 말한다.‘대중이 결의해 짓는다’고 함은 대중이 함께 화합하여 백이갈마를 하고 작법(作法)하여 그 일을 결정하는 것이니, 응당 이와 같이 처소를 짓고 만들어야 한다.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나서 경계 안과 경계 밖의 분한의 1심(尋)을 한정하여 부엌을 지으려 할 때 승가가 함께 좋아하면 곧 이곳에다 자리를 펴고 건추(楗椎)를 울리며, 나아가 한 필추로 하여금 갈마를 하게하고 결정한다. 이는 큰 절에 의거하고 절 방(坊) 안에다 결정해서 부엌을 만들어도 된다.만일 하나의 방이나 작은 방에 따르는 것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라. 그 가운데서 통하고 막는 것은 광문에 자세하게 갖춘 바와 같다.혹은 시렁[棚]과 협문[閣]과 중층(中層)에 대해 그 정결함을 맺는데, 위아래와 네 변의 경계 부분까지 모두 깨끗하게 해야 한다.만일 작법을 하고 나면 두 가지 이롭고 즐거움을 얻으니, 첫째는 경계 밖에는 쌓아 둘 수 있고, 경계 내에서는 삶는 것이니, 모두가 다 허물이 없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입으로 씹을 때에 모두 악작죄가 된다.열 가지 부정한 곳이 있으니, 여기서는 음식을 익혀서는 안 된다. 이른바 드러난 땅ㆍ문간 지붕 아래, 처마 앞, 온돌방[溫暖堂], 목욕실, 관리의 집, 제저(制底)의 주변, 외도의 집, 속인의 집, 니사(尼寺) 등이다. 이 가운데서 음식을 삶을 때는 모두 악작죄를 얻는다.이상 위에서 절을 짓는 일에 연유된 다른 글을 분별한 것이고 다음에는 학처를 해석하겠다.
‘다른 필추를 데리고 가라’고 함은, 대중의 많은 사람은 승가가 아니고 어떤 일을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모름지기 필추를 데리고 가서 뒷날에 다투고 손해보고 괴로운 것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이 가운데 범하는 내용은, 오직 한도를 지나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앞의 작은방에 대한 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일 머무는 곳에서 처소를 다투는 이가 있거나 집을 더럽히는 이가 있거나, 그릇된 짓을 하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쫓아내야 한다.
8) 무근방(無根謗)학처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그때 밀달라(蜜呾羅)와 보미가(步弭迦)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가운데 실력자(實力子)와 원수진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누이인 밀달라와 실력자를 비방해 말하기를, “바라시가를 범했다”고 하고 문득 거론하여 힐난을 했으며 스스로 서로 맞춰 증거를 대곤 했다. 함께 범행을 닦는 사연과 불인번뇌(不忍煩惱)로 인하여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필추가 성냄을 내어 품어두고 버리지 아니하여 고의로 청정한 필추에게 근거 없이 바라시가의 법으로써 비방함으로써 저 청정한 행을 깨려고 하다가 뒷날 다른 때에 묻거나 묻지 않거나 간에 ‘이 일이 근거가 없는 줄을 안다. 저 필추를 비방한 것은 성이 난 까닭에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면 승가벌시사니라.”‘필추가 성냄을 품는다’ 함은 성내는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버리지 않는다’ 함은 현재의 얽혀 있는 번뇌나 무익한 일을 지으려 함을 일컫는다.‘근거 없이’라고 했는데, 근거[根]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본 것, 들은 것, 의심스러운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것이 만일 없다면 이것은 근거 없는 일이다.‘비방한다’ 함은 나쁜 일을 했다고 남을 헐뜯는 것인데, 근거가 없으면 바야흐로 범한 것이다. 만일 세 가지 근거가 있으면 곧 범한 유가 아니니, 말하는바 비방이란 말로 필추와 다투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성이 난 까닭에 이런 말을 하였다’라고 함은 사실이라는 생각이 없이 일부러 성내고 원망한 까닭에 문득 악한 비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가운데 비방하는 경계에 네 가지 사람이 있다. 첫째는 청정한 사람이고, 둘째는 비록 청정하긴 해도 청정한 것과 비슷할 뿐인 사람이며, 셋째는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고, 넷째는 비록 청정하지 않긴 하지만 청정과 비슷한 사람이다.만일 처음의 두 사람을 비방하면 열 가지 일을 이루면 범하는 것이고, 다섯 가지는 범함이 아니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이른바 듣지 않았고 보지 않았고 의심이 될 것이 없었는데도 망령되이 보았다는 등으로 말하는 경우, 이것을 세 가지 일이라고 한다.혹은 들었는데 잊었거나 혹은 의심했었는데 잊었거나 했으면서 “나는 들었다. 의심스럽다”고 말하면 이것이 다 두 가지 일인 것이다.혹은 듣고서 믿거나, 들었는데 믿지 않거나 하면서 “나는 보았다”고 말하면 또 이것이 두 가지 일이다. 혹은 듣고 의심하거나 혹은 들어도 의심하지 않거나 혹은 단지 스스로 의심할 뿐이면서 “나는 보았다”고 말하면, 또한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다. 이런 말을 했을 때는 다 본죄를 얻는다.‘다섯 가지 일의 범함이 없다’고 함은, 말하자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보았다는 생각이 있어서 “보았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세 가지라 한다.혹은 듣고서 잊었거나 혹은 의심했는데 잊었거나 했으면서 듣고 의심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들었다’는 등으로 말하면, 이것을 두 가지 일이라 하나니, 이것은 모두 범함이 없다.뒤의 두 사람에게 11가지 일은 범함이고 6가지 일은 범함이 아니다. 이른바 봄으로써 잊는 한 가지가 위의 두 경우에서는 네 번째의 일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일은 다 같으니, 생각해서 미루어 알라.
앞의 두 사람은 이것이 청정하기 때문에 보고 잊는 일이 없다.만일 글로써 혹은 자인(字印)이나 수인(手印)으로 하거나 혹은 사람을 보내서 하거나 혹은 스스로 글을 써서 말하기를, “글에서 네가 범한 일이 있다고 한다”고 하였거나, 만일 미쳤거나 잠들었거나 혹은 선정에 들었거나 혹은 전에 범한 일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거나 혹은 필추니를 비방한 일이 있거나 만일 대중 가운데 말하기를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바라시가를 범했다”고 했다면 이것은 이름을 대지 않고 비방하는 것이니, 솔토라이다.비방의 경계와 마음의 구(句)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만일 반택가(半擇迦)의 남자나 여자라고 남을 비방하는 이는 다 솔토라이다. 식차(式叉) 등을 비방하면 다 악작을 범하는 것이다.또한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필추니를 비방하면 본죄를 얻으며, 식차 등을 비방하면 솔토라를 얻는다”고 한다.만일 5무간(無間)으로써 필추를 비방하면 함께 중교를 얻으니, 역죄를 범하면 필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가운데서 토라로써 비방하면 가벼운 죄를 얻는다’고 한다.필추니가 남을 비방했을 때는 필추에 준해서 설하며, 그 식차 등은 악작죄를 얻는다.만일 오바색가(鄔波索迦)가 필추를 비방하면 마땅히 더불어 발우를 엎는 갈마[覆鉢羯磨]4)를 지어준다. 만일 나쁜 욕을 한 속인이라면 그의 집에는 가지 않고 그의 밥을 먹지 않으며 자리에서 그를 위해서 설법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낮추어 대중을 따라 빌고 성품이 유순해지면 마땅히 그를 위해서 발우를 펴는 갈마[仰鉢羯磨]를 지으라.삿된 곳에 들어간 이가 바른 사람을 위해서 발우를 엎는 갈마를 짓더라도 작법(作法)이 성립되지 못하나니, 이것과 반대일 경우는 곧 바로 성립된다.만일 착한 속인의 집에 발우를 엎는 갈마를 지으면 또한 성립되지 않나니, 만일 하나의 평상 등으로서 저 모든 경계 위를 누르면 한 갈마인은 많은 발우를 엎고 젖힘[覆仰]을 얻을 것이다.
9) 가근방(假根謗)학처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때에 밀달라와 보미가 두 사람이 함께 들에서 사슴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비슷한 일을 취해서 실력자(實力者)를 비방했다. 함께 범행(梵行)하는 이를 헐뜯는 사연과 번뇌는 앞과 같으니, [이로 인해서] 이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필추로서 성을 내서 품어두고 버리지 아니하여 청정한 필추에 대해 다른 그릇된 일부분을 가지고 바라시가를 범했다고 비방해서 그의 청정한 행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가, 나중에 다른 때에 누가 묻든지 묻지 않든지 간에 ‘이것이 다른 그릇된 일부분의 법인 줄 안다. 약간의 비슷한 법으로써 저 필추를 헐뜯기 위해서 성이 난 까닭에 이런 말을 하였다’고 말하면 승가벌시사죄이다.”‘다른 그릇된 일부분’이라 함에서 다르다는 것은 열반이 생사를 등졌기 때문임을 일컫는다.네 가지 타승법은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 아님을 일컬어 ‘부분이 아니다’라고 한다. 부분이 아닌 일로 비방하면 곧 다툼이다.만일 어떤 필추가, 다른 필추가 바라시가를 범하는 것을 보았을 때 범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거나 혹은 다른 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방해 말하기를 “바라시가를 범했다”고 하면 중교죄를 얻는다. 만일 중교죄에 대해 범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짓거나 혹은 다른 죄라는 생각을 했거나, 돌색흘리다(突色訖里多)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으니 그 비방한 바에 따라서 죄를 얻는다.비방해 말했을 때에 상대방이 이해했으면 중교죄를 얻음을 알라.‘범함이 없다’고 함은 저 사람이 타승 등의 일을 짓는 것을 실제로 본 경우이다.
10) 파승위간(破僧違諫)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그때 제바달다가 이양을 탐함을 말미암아 신통을 배워 미생원(未生寃)을 교화하여 믿음과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고자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문도를 구하려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곧 성을 내었고, 이에 고가리(孤迦里)5)ㆍ건다달표(褰茶達驃)ㆍ갈타모락가저쇄(羯吒謨洛迦底灑)ㆍ삼몰달라달다(三沒達羅達多)와 도당을 만들어 화합승을 깨고 승가가 비록 충고하여도 나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승가의 사연과 사지번뇌(邪智煩惱)로 인하여 열 가지ㆍ열한 가지로 된 두 개의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필추가 방편을 일으켜서 화합 승가를 깨트리고자 하여 승가를 깨트리는 일에 대해 굳게 고집하여 버리지 않으면 모든 필추는 마땅히 저 필추에게 말하라.‘구수여, 화합 대중을 깨트리고자 하는 생각을 굳게 고집하여 머물지 마십시오. 구수여, 마땅히 대중스님들과 화합하십시오. 함께 살며 기뻐하여 다투지 말아야 하니, 같은 마음과 같은 말로 마치 물과 유유가 화합하듯 하시오. 큰 스승께서 가르치신 법이 광명을 드날릴 수 있게 하여 안락하게 오래 머물게 하시오. 구수여, 그대는 화합승을 깨트리는 일을 버려야 합니다.’모든 필추가 이와 같이 타일렀을 때에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두 번, 세 번 은근히 충고해야 한다. 가르침에 따라서 마땅히 꾸짖어서 이런 일을 버리도록 해야 하나니, 그리하여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않으면 승가벌시사이다.”‘화합 한다’ 함은 같은 맛이란 말이니, 여기에 여섯 가지가 있다. 곧 형태[形]와 모양[相]과 작업(作業)과 계(戒)와 견(見)과 의궤(義軌)와 생활[活命]이다.‘승가’라고 함은, 통틀어 아홉 가지가 있다. 곧 부끄러움이 없는 승가, 부끄러움이 있는 승가, 부끄러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승가, 이치에 순종하는 승가, 이치를 따르지 않는 승가, 이치를 따르기도 하고 이치를 따르지 않기도 한 승가, 아직 해탈하지 못한 승가, 이미 해탈한 승가, 해탈하기도 하고 해탈하지 못하기도 한 승가이다. 이 아홉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깨뜨리는 것인가? 처음의 승가와 뒤의 두 승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깨뜨린다.그 처음은 부끄러움이 없어 대중이 네 가지 무거운 금계[四重禁]를 범하고 깨뜨리는 일을 이미 이루었으니, 이미 깨뜨린 것은 거듭해서 깨트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뒤의 둘은 성스러운 무리이므로 깨트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의 배움이 남아 있는 사람[學人] 외의 나머지는 마땅히 이에 준해서 알 것이다.‘깨뜨리고자 한다’고 함은 제바달다가 우치 때문에 마음에 다른 소견을 일으켜 저 승가를 깨고 몸가짐과 모양 등으로 부처님의 바른 규칙을 고치고 스스로 다섯 가지 일을 제정하고 세 가지 청정한 가르침[三淨敎]을 비방하며, 모든 어리석은 무리들에게 권해서 삿된 법을 익혀서 행하게 하는 것이다.‘다섯 가지 일’이라 함은, 첫째는 우유와 낙(酪)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송아지가 주리는 곤란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생선과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살생을 말미암기 때문이며, 셋째는 소금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진토(塵土)가 많이 있기 때문이며, 넷째는 옷의 끝을 자르지 않는 것이니, 짠 공을 버리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아란야[蘭若]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방에 태어나는 복을 받기 때문이다.‘방편을 일으킨다’ 함은 승가를 깨뜨리는 일을 짓는 것이다.
‘승가를 깨뜨리는 일을 굳게 집착하며 버리지 않는다’ 함은 이미 대중을 깨트림을 생각하여 문도를 교화하여 거두고 스스로 삿된 종[宗]을 지키면서 많은 악인의 무리를 찾아다닌 것을 일컫는다.‘화합 승가를 깨트리려 해서는 안 된다’ 함은 만일 착한 무리를 깨트리면 결정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만일 이 마음을 버리면 그 죄를 받지 않는다.‘그대들 구수들은 마땅히 승가와 화합하시오’라고 함은 대중의 많은 사람들이 충고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승가나 혹은 승가에서 보내는 갈마가 비록 없지만 말로써 막아서 나쁜 소견을 없애게 하는 것이다.‘함께 머문다’ 함은 옷이나 음식의 이양을 함께 받아 쓰는 것을 일컫는다.
‘환희한다’ 함은 선품(善品)이 늘어나 각각의 마음이 기뻐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툼이 없다’ 함은 피차의 견해가 한가지여서 함께 서로 사랑하고 기꺼워하여 다투는 시비가 없기 때문이다.‘한마음’이라 함은 만일 마음이 산란하면 고요한 선정에 들게 하고, 이미 선정을 얻고 나서는 부지런히 해탈을 구한다.
‘한가지로 말한다’ 함은 계경(契經) 등 12분교(分敎)6)에 의해서 체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시 서로 가르치는 뜻이다.‘물과 우유가 화합하듯이’라고 함은 행(行)이 이치에 수순해서 한 모습으로 차별이 없는 것이다.
‘대사의 교법이 광명을 드날릴 수 있게 한다’ 함은 우리가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든 것을 능히 잘 조복시켜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유통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하게 머문다’ 함은 곧 4성종(聖種)으로써 현법에 즐거이 머무는 것이니, 이 덕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뛰어난 과(果)를 얻는다.‘두 번 세 번’이라 함은 백사갈마를 자세하지도 않고 간략하지도 않게 다만 두 번 세 번으로 한정한 것이다.
‘충고할 때’라 함은 작법을 행할 때를 말하며, ‘은근하게 바로 타이른다’ 함은 대중의 지극한 마음을 밝힌 것이다.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꾸짖는다’ 함은 그 까닭을 묻는다는 것이니, 저 그릇된 이치를 막기 때문이다.
11) 조반파승가위간(助伴破僧伽違諫)학처다음에는 무리를 돕는 데 대한 학처를 밝히는데 앞에서와 다른 것을 글자에 따라 해석하겠다.“만일 다시 필추가 혹은 하나나 둘, 혹은 여럿이 저 필추와 함께 짝하는 무리가 되어 삿됨을 함께하여 바른 법을 거스르는 것을 따르고 머물면서 이 필추가 모든 필추에게 말하기를, ‘대덕이여, 함께 저 필추가 말하는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 필추는 법과 율에 수순하고 법과 율에 의지하므로 말하는 것에 허망함이 없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도 또한 좋아 합니다’라고 했다면, 모든 필추는 마땅히 이 필추에게 말해야 한다.‘구수여, ≺저 필추는 이 법률에 순종하고 법률에 의지하므로 말하는 것에 허망함이 없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도 또한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 필추는 법과 율에 수순하지 않고 법과 율에 의하지 아니하며 말하는 것이 다 허망하기 때문입니다.그대는 화합승가를 깨트리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마땅히 화합승가를 좋아하고 승가와 화합하여 기쁘게 지내고 싸우지 말아야 하며 같은 마음 같은 말로써 물과 우유가 합하듯 하십시오. 큰 스승님의 가르침이 그 광명을 드날릴 수 있게 하여 안락하게 오래 머물게 해야 합니다. 구수여, 승가를 깨트리는 나쁜 소견으로 삿된 것을 따르고 바른 것을 어기고 쟁사(諍事)를 짓기를 권하면서 굳세게 고집하며 사는 것을 버리도록 하십시오.’모든 필추가 이와 같이 나무랄 때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아니하면 마땅히 두 번 세 번 은근하게 바르게 충고하라. 가르침을 따라서 마땅히 꾸짖어 이런 일을 버리게 하라.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아니하면 승가벌시사이니라.“‘좋다’ 함은 이익을 말하며, ‘나쁘다’ 함은 무익한 것을 가리킨다. ‘법어(法語)’라 함은 말의 내용이 구족했음을 뜻하고, ‘율어(律語)’라 함은 이치에 맞아서 어긋나지 않음을 말한다. 혹은 해석하기를 “참다운 뜻을 이끌어 오는 것을 일컬어 법어라 하고, 부드러운 말을 내는 것을 일컬어 율어라 한다”고 한다.‘허망함이 없다’ 함은 그 일을 밝게 알아 바야흐로 말을 내는 것을 말한다.
‘나도 또한 좋아 한다’ 함은 그의 하는 일 모두가 내 마음에 합당하다는 뜻이고,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함은 바른 부류는 따르고 삿된 무리는 물리칠 것을 권하는 것이다.이 가운데 범하는 것은 처음에 따라서 승가를 파괴하려 하면 모두 악작죄를 얻고, 대중의 많은 사람이 충고해도 듣지 않고 버리지 않으면 솔토라죄를 얻는다.
만일 처음 아뢰고 이어 갈마를 지어 두 번째 충고를 마쳤을 때는 그 하나하나가 다 솔토라죄를 얻는다.세 번째를 마쳤을 때는 법과 같이 율과 같이 큰 스승의 가르침과 같이 바르게 하기 위해서 충고하기를 여는 것이니, 어기고 버리지 않는다면 중교죄(衆敎罪)를 얻는다.만일 법답지 않게 지었는데 대중이 화합했거나 혹은 법답게 지었는데 대중이 화합하지 않았거나 혹은 법답지 않게 지었는데 대중이 화합하지 않았거나 혹은 유사한 법으로 지었는데 대중이 화합하지 않는 등은 충고하는 의식을 짓는 것이 법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함이 없다.만일 죄를 범하고 나서라면 마땅히 곧 드러내 말할 것이니,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남과 함께 일체의 갈마를 하는 것은 다 악작죄를 얻는다.만일 다른 이가 충고할 때에 마음으로 나쁜 무리에 부합했으면, 설령 말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중교죄를 범한 것이다.말로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깨뜨림을 좋아한 것은 솔토라를 범한 것이다.
만일 말로는 비록 함께했더라도 깨뜨릴 마음은 짓지 않았거나, 혹은 깨뜨릴 마음은 없으면서 그 일을 함께하지 않은 것은 범함이 없다. 만일 의심이 생겼으면 솔토라를 얻는다.스스로 깨뜨렸는데 시끄럽거나 어지럽지 않은 경우에 네 구(句)가 있다.
‘시끄럽고 어지럽다’ 함은 이것이 처음부터 모아서 얽고 대중을 깨뜨리는 일을 가리킨다. 혹은 대중을 깨뜨렸지만 이것이 다르게 머무는 것이 아닌 것에 또한 네 구(句)가 있다. ‘다르게 머문다’ 함은 이것이 다른 경계에 머무는 것이다. 혹은 승가를 깨뜨리고 별부(別部)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에 또한 네 구(句)가 있다. ‘별부’란, 이른바 이것은 아홉의 청정한 이들이 따로 처소에 머무는 것으로, 하나는 바른 주체이고 나머지 여덟은 도움이다.무엇을 한정해서 ‘깨뜨림’이라 하는가? 이른바 천수(天授:提婆達多)는 먼저 네 사람을 통솔하고 뒤에 바른 대중을 깨뜨렸다. 네 사람이 다 그와 한가지로 산가지[籌]의 작법7)을 함께했으니, 이것을 한정해서 승가를 깨뜨려 마쳤다고 한다.만일 수학인(授學人)이 산가지를 잡거나, 계를 받지 않은 사람 등이 하면 모두 깨뜨림이 성립되지 않는다.만일 웃음거리로써 산가지를 행하고 갈마를 맡아서 대중의 일을 깨뜨리는 일을 대중과 함께했으면 솔토라죄를 얻는다. 대중은 이로 말미암아 깨뜨림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만일 대중을 깨뜨리고 나서 나머지의 사람이 경계 안에 있을 때는 장정(長淨) 등의 일을 지어서는 안 되니, 대중이 모이면 따로 머무는 것[別住]을 이루기 때문이다.만일 법다운 무리와 그릇된 무리가 한가지로 함께 한 곳에 모였을 경우, 법다운 무리에서 경계를 풀면 푸는 것이 이루어지며, 그릇된 무리가 경계를 푸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그 처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마땅히 법다운 무리와 함께 경계에 나가서 포쇄타를 지어야 하며 그릇된 무리와 함께해서는 안 된다.법다운 필추가 마땅히 필추니 대중에게 교수해야 되나니, 만일 없으면 그 처중(處中)의 사람이 또한 교수해야 한다. 인연을 살펴서 머무르되, 두 무리에 빠지지 않은 사람을 ‘처중의 사람’이라 부른다.필추니 대중이 깨지면 교수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저들에게 말해야 한다.
“자매여, 마땅히 먼저 화합하고 나서 바야흐로 교수를 구해야 된다.”만일 필추니 대중이 필추에게 묻지 않고 문득 스스로 마음대로 해서 따로 궤칙을 만들어 무리 대중을 모으면 솔토라죄를 얻는다.
모든 벌 받은 실라말니라(室羅末尼羅, Ṡramaṇena) 등에게 다른 필추가 문득 의복과 음식을 주고 거두어 기르면 다른 문도를 깨뜨림이니, 솔토라죄를 얻는다. 만일 좋은 마음을 지어서 조복시키려고 방편으로 권하여 그때에 거두어 이끌었으면 범함이 없다.교섬박가(憍閃薄伽)와 모든 필추 등은 비록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지만 대중을 깨뜨리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승가를 깨뜨리는 죄와는 같지 않다. 일에 따라서 무겁고 가벼운 열여덟 구(句)가 있다.만일 필추가 그릇된 법의 일[法事]에 대해 그릇된 법이란 생각을 지었다가 바로 깨질 때에도 또한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것은 곧 무간죄(無間罪)를 낳고 또한 무간업(無間業)을 이룬다.만일 승가를 깨뜨릴 때에 그릇된 법이란 생각을 짓지 않으면, 다만 무간죄만 낳고 무간업은 이루지 않는다. 때문에 다음의 여섯 구의 무거움과 열두 구의 가벼움이 있는 것이다.비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비법이라 생각하는 것.
비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비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의심하는 것.
비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도 비법이라 생각하는 것.
비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비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의심하는 것.
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도 비법이라 생각하는 것.
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법을 비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의심하는 것.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도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법을 법이라 생각하고 깨질 때는 의심하는 것.
비법을 의심하다가 깨질 때는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비법을 의심하다가 깨질 때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비법을 의심하다가 깨질 때도 의심하는 것.
법을 의심하다가 깨질 때는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법을 의심하다가 깨질 때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법을 의심하고 깨질 때도 의심하는 것.
12) 오가위간(汚家違諫)학처부처님께서 실라벌성에 계셨을 때 모든 필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필추ㆍ필추니로서 남의 집을 더럽히는[汚家] 일을 했으면 대중은 마땅히 쫓아내는 백사구빈갈마(白四駈擯羯磨)를 지어서 주처에서 나가게 해야 한다.만일 싸움을 하면 대중은 마땅히 두렵게 하는 갈마[令怖羯磨]를 지어주어야 하니, 마땅히 그에게 고해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굳이 먼저의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면 대중은 마땅히 너에게 벌을 주리라’고 하여 그로 하여금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두렵게 하는 갈마’라 이름한다.만일 문도들이 싸움을 하려 함을 보았으면 궤범사 등은 마땅히 곧 이를 막아서 그치도록 해야 한다. 혹은 점마타사(苫摩他事)로써 그치게 하라.만일 필추가 자주 죄를 범하면 마땅히 절복갈마(折伏羯磨)를 지어주거나 혹 다른 일로써 그것을 꾸짖고 벌주어야 한다. 나아가 아직 나쁜 일을 버리지 아니한 이래로 덕 있는 이에게 의지하여 절복하여 머물게 하려는 때문에 ‘절복’이라 이름한다.만일 필추가 여러 장자와 필추들을 서로 괴롭히면 마땅히 필추로 하여금 장자 등에게 나아가 참마(懺摩:참회)8)를 하게 해야 하니, 만일 듣지 아니하면 대중은 마땅히 사죄를 구하는 갈마를 지어주고 그로 하여금 가서 사죄하게 해야 된다.만일 죄를 드러내지 않고 법답게 뉘우치지 않으며 악견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런 등은 모두 다 마땅히 사치갈마(捨置羯磨)9)를 지어주어야 한다. 이 버리는 작법이 다른 여러 법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사치(捨置)라고 이름한다. 저 사치란, 만일 무리의 떼가 많아서 그 힘이 강함을 믿고 기대면, 대중은 마땅히 그 한도에 맞게 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함을 말한다.범한 죄에 대해서는 법답게 제거하니, 만일 듣지 않으면 억지로 따지거나 강제로 억념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강제로 사치(捨置)를 지어주면 솔토라죄를 얻는다.만일 다투는 사람이 각각 원한을 품고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잊을 수가 없게 되면, 경과 율과 논을 지니어 항상 익히고 많이 듣고 많이 아는 큰 복덕을 구족한 이로서 문도 대중이 함께 잘 아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그를 위해서 없애 주는 것이 좋다.만일 원수가 속가에 이르렀을 때는 마땅히 거리를 두고 처소 가운데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 앉게 할 것이며, 만일 경계 안에서 다툼이 분분하게 생기면 저 모든 처소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밖에 나와서 장정을 해야 한다.만일 다른 무리와 함께 장정을 할 때 작법을 이루지 못하면 악작법을 얻는다. 남을 위해서 갈마를 지을 때에 물음을 하지 않거나 기억을 드러내지 않거나 혹은 실로 범한 일이 없거나 혹은 범함이 있어도 대단하지 않거나 혹은 대면해서 하지 않거나 혹은 그른 법으로 하면 다 악작으로, 작법을 이루지 못한다.만일 갈마를 얻고 나면 모든 행법에 마땅히 수순해서 행해야 한다. 어떤 것이 행법인가? 이른바 다른 이에게 출가 구족계를 주지 말며, 의지(依止:스승)가 되어 구적(求寂:사미)을 두지 말라. 필추니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뽑아서도 안 되고, 설령 이미 뽑혔더라도 가서는 안 된다. 범함이 있는 필추는 갈마 등의 일을 묻지 말 것이며 또한 꾸짖어서도 안 된다.만일 스무 가지 법이 있으면 지은 갈마를 풀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대중의 처소에서 공손하고 부지런함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니, 몸이 가볍고 민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대중의 처소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으니 오만함을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혹은 떠나가는데 따라서 뒤쫓지 않는 것이니 다스리는 법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혹은 대중의 주위에 있으면서 공경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존경을 행하는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혹은 경계 안에서 풀 것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죄를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며,혹은 왕족이나 일을 판단하는 관리에 의지하고 혹은 외도나 특별한 사람에 의지하면서 대중에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속인의 옷이나 외도의 옷을 입고 외도를 받들어 모시며,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을 오히려 행하며, 필추의 학처임에도 닦아 익히지 않는 것이며, 혹은 필추를 꾸짖고 혹은 때로 성질을 부리고 혹은 때로 욕이나 하고 혹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이익을 잃게 하고 혹은 함께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 스무 가지 법이 있으면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그때 세존께서 교칙을 짓고 나서 성자 아난다(阿難陀)로 하여금 모든 상좌 필추와 함께 길 가운데 있게 하시고는 다섯 가지 법을 갖춘 이를 보내서 지타산(枳吒山)에 가서 저에게 꾸짖게 하고, 아습박가(阿濕薄迦)10)ㆍ보나벌소(補㮈伐蘇)11)와 함께 남의 집을 더럽힌 이[汚家者]12)를 쫓아내는 갈마를 지으라 하셨다. 그와 같이 죄를 지은 자인 반두(半豆)13)와 노지득가(盧枳得迦)14) 등은 길 중도에서 이를 듣고 나서 곧장 도망하여 실라벌성으로 가서 법답게 죄를 없앴다.그때 저 두 사람이 뒤에 서다림(逝多林)에 가서 이 일을 보고서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들은 같은 죄를 지었는데 누구는 쫓아내고 누구는 쫓아내지 않으니, 모든 구수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성냄이 있고 탐욕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그때에 모든 필추는 저 두 사람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뉘우쳐 고치게 했다. 먼저 따로 충고하고 나서 뒤에 갈마를 하여 충고해야 하니, 저 천한 일[鄙事]을 수용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재가의 집을 더럽힌 일과 가간번뇌(家慳煩惱)로 인해서 이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많은 필추가 마을이나 부락이나 성이나 읍에 머물면서 남의 집을 더럽혔는데, 나쁜 짓을 하여 남의 집을 더럽힌 것을 또한 대중이 보고 들어서 알며, 나쁜 짓 한 것도 대중이 보고 들어서 알았으면, 모든 필추는 마땅히 저 필추에게 말하되, ‘구수여, 그대들은 남의 집을 더럽혔습니다. 나쁜 짓을 하여 남의 집을 더럽힌 것을 또한 대중이 보고 들어 알며, 나쁜 짓을 행하는 것도 대중이 보고 들어 압니다.그대들은 떠나십시오.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는데, 저 필추가 여러 필추에게 말하기를, ‘대덕들은 애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이 있어서 이와 같이 같은 죄를 지은 필추가 있어도 누구는 쫓아내고 누구는 쫓아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거든 그때에 여러 필추들은 저 필추에게 말하라.‘구수여, ≺모든 대덕은 애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이 있어서 이와 같이 같은 죄를 지은 필추가 있어도 누구는 쫓아내고 누구는 쫓아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라고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필추에게는 애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남의 집을 더럽혔으며, 나쁜 짓을 하여 남의 집을 더럽혔음을 대중이 보고 들어 알고 있고, 나쁜 짓을 했음도 또한 대중이 보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구수여, 그대들은 마땅히 애욕과 성냄 등의 말을 버리십시오.’여러 필추들이 이와 같이 충고할 때에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두 번 세 번 은근히 바르게 충고할 것이니, 가르침에 따라서 마땅히 따지고 물어서 이런 일을 버리게 해야 한다. 버리면 좋지만, 만일 버리지 않으면 승가벌시사이다.”‘촌락’ 등이라 함은, 만일 거리가 있어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을 일컬어 촌(村)이라 하고, 이런 마을 밖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일컬어 락(落)이라 한다. 임금의 도읍[都處]을 일컬어 성읍이라 한다.‘집을 더럽힌다’ 함은 두 가지 일로 집을 더럽히는 것이다. 첫째는 함께 머무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함께 머무는 것인가? 여인과 같은 평상에서 앉는 것이고, 한 소반에서 먹는 것이며, 잔을 함께하여 술을 마시는 등이다.어떤 것이 수용하는 것인가? 꽃이나 과일을 따는 등을 일컫는다.
어떤 것이 나쁜 짓인가? 추악한 법을 가지고 다른 이를 헐뜯고 비방하며, 계의 소견 등에 대해 그것을 헐뜯어 말함을 일컫는다. 집을 더럽힘에 의해서 뭇 죄가 생기기 때문이다.‘본다’는 것은 눈의 알음알이이고, ‘듣는다’ 함은 귀의 알음알이이며, ‘안다’ 함은 나머지 알음알이이다. 이것이 보고 듣고 아는 것의 성품을 나타낸 것이다.
‘그대들은 떠나십시오’라고 함은 쫓아내는 것이다.‘애욕 등이 있다’ 함은 쫓아내지 않는 데는 애욕심이 있음이고, 쫓아내는 데는 성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있다’고 함은, 남의 집을 더럽힌 무리들을 능히 쫓아내는 것과 쫓아내지 않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겁을 낸다’고 함은, 도망하는 자는 감히 다스려 벌하지 못하는 것이며, ‘쫓아내지 않는다’라고 함은, 이른바 이것은 반두(半豆)나 노희득가(盧呬得迦) 등을 가리킨다.‘그대들은 마땅히 애욕 등을 버려라’고 함은, 이것은 몇 사람이 충고하는 것[別人諫]15)을 일컫는다. ‘두 번, 세 번’이라 함은, 대중에게 백사갈마를 하여 충고하는 것이다. 다만 ‘애욕 등’이라고만 함은, 곧 악작죄를 얻는 것이며, 몇 사람이 타이르는 것[別人諫]일 때에 어기는 경우엔 추죄를 범한다.처음 아뢰고 난 뒤 두 번째 갈마까지 어기면 세 가지 솔토라죄를 얻고, 세 번째를 마친 뒤에 어기면 곧 중교죄를 얻는다. 만일 갈마의 법을 거행하고 따로 충고함은 모두 앞에서와 같다.실로 애증(愛憎)이 있는데, 애증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의심하였으면 솔토라죄를 얻으며, 만일 애증한다는 생각을 지었으면 범함이 없다. 실로 애증하지 않는데 이런 생각을 지었거나 의심했으면, 곧 중교죄를 얻는다.만일 아직 쫓겨나는 갈마를 짓지 않았는데 사랑 등이라는 말을 하면 악작죄를 얻으니, 대중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 나쁜 생각을 일으켜 함부로 거짓말을 하여 상대방에게 이간하는 말을 했으면, 두 가지 타죄(墮罪)를 얻는다.
13) 악성위간(惡性違諫)학처부처님께서 교섬비국에 계셨다. 그때 천타(闡陀) 필추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법다운 가르침을 어겼다. 그 나쁜 성품으로 수용하는 여러 가지 사연과 구자재불인(救自在不忍) 번뇌로 인하여 드디어 분함과 한을 일으켜 스스로도 손상하고 남도 손상함을 말미암아 이 학처를 제정하셨다.“만일 다시 필추로서 나쁜 성질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여러 필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경 가운데 법답게 율답게 권하고 가르쳐 줄 때 충고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여러 대덕이여, 나에게 대해서 작은 일이라도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말하지 마시오. 나도 또한 대덕의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말하지 아니하겠소. 여러 대덕은 그만두시오. 나를 권고하지 말며 나를 논하여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면, 모든 필추들은 이 필추에게 말하라.‘구수(具壽)여, 그대는 충고하는 말을 듣지 않아서는 안 되오. 모든 필추가 계경 가운데서 법답고 율답게 권해서 가르칠 때에는 마땅히 충고하는 말을 받아들여야 하오. 구수는 법답게 모든 필추들을 충고해야 하며 모든 필추들은 또한 법답게 구수를 충고해야 하오. 구수여, 이와 같이 하여야 여래ㆍ응공[應]ㆍ정등각이신 부처님의 성문 대중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니, 함께 서로 충고하고 가르쳐야 하오. 구수여, 그대는 이런 일을 버려야 하오.’모든 필추가 이와 같이 충고할 때 버리면 좋지만, 만약에 버리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은근하고 바르게 충고하되, 가르침을 따라 마땅하게 묻고 따져서 이런 일을 버리게 해야 한다. 버리면 좋지만 만약에 버리지 아니하면 승가벌시사이다.”‘나쁜 성질’이라 함은 타고난 성품이 거칠어서 남의 말을 용납하지 않음을 가리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함은 반 달마다 설하는 것이다.
‘계경 가운데’라 함은 불세존께서 제정하신 학처를 일컫는다.
‘법답다’고 함은 실제의 일에 의거하여 보고 듣고 의심하며 말하는 것을 일컫고, ‘율답다’라고 함은 진실에 맞추어서 말하고 이치와 상응하며 유연한 말을 내는 것이다.‘조금이라도’라고 함은, 설사 아주 작은 말이라도 또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라고 함은 이롭든지 이롭지 않든지 한 것을 일컫는다.‘그치라’고 함은 아직 설하지 않은 말을 미리 막아서 멈추게 하는 것이고, ‘나를 논하여 말하지 말라’ 함은 이른바 마음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부처님의 성문 대중이 더욱 성장한다’고 함은, 펼치고 굴려서 서로 가르침을 말미암아 세존의 거룩한 가르침이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게 됨을 뜻한다.‘서로 함께 충고하고 가르친다’고 함은 충고하고자 할 때는 먼저 허락해 주기를 구하고 그런 뒤에 바야흐로 충고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남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따지지 말라. 그러나 힐문하는 때에는 하늘눈으로 보거나 하늘 귀로 듣지 아니하며, 만일 그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를 위해서 생각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을 지을 것이니, 기억할 때에 성내고 분해하면 마땅히 허락해 주기를 구해야 한다. 만일 허락하지 않으면 버리고 말을 해 주지 말라. 만일 힘이 있는 이에게 의탁하였으면, 가르침을 주지 말고 함께 장정과 안거와 수의(隨意)를 하지 말아야 한다.곧 이 날을 기해 마땅히 한 필추가 이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나 필추 아무개는 필추 아무개가 장정 등의 일을 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만일 이 필추가 대중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그를 대면해서 장정과 수의(隨意)의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범한 죄에 대해서 나머지가 있거나 나머지가 없거나 결정코 참다운 근거가 없이 그를 막았다면 다 그릇된 법이 성립될 것이다.만일 하늘눈과 하늘 귀와 귀머거리ㆍ벙어리ㆍ아주 무식한 이로서 무리를 따르거나 무리가 아니거나 땅에 머물거나 허공 등에 머물거나 혹은 이 넷을 뒤집거나 다 막음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범한 죄의 사실이 결정코 참다운 것이어서 그를 막는 것이라면 이것은 마땅한 법이라 일컫는다. 만일 잘 보거나 듣지 않고 의심하여 저를 막았으면 악작죄(惡作罪)를 얻는다.만일 같은 한 경계 안에 많은 주처가 있는데, 한 곳을 막으면 나머지 다른 곳도 다 막음이 된다. 그리하여 힐문하는 이가 비록 대중에게 뽑혔으면 마땅히 궤식(軌式)을 알아야 한다.여기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자리로부터 일어나 가죽신을 벗고 옷을 왼쪽어깨에 걸치고 상좌에 절한 다음 합장하고 한쪽에 머무른다. 마땅히 다섯 가지 법으로써 스스로 헤아리되 ‘나는 계를 바로 지니는 자인가, 스스로 부끄러움이 있는가, 뉘우칠 것이 있는가, 모든 감관을 능히 거두어 항복 받았는가, 계를 좋아하는가?’를 생각하라.또 다섯 가지 생각을 일으킬 것이니, 이른바 ‘참다운가, 참답지 않은가’ 등을 일컫는다. 다음에 마땅히 고해 말하기를, “그대 아무개여, 내가 이제 힐문하고자 하오. 이를 허락하시겠습니까?” 라고 하여 그가 대답해 말하기를, “무슨 일로 해서 나를 힐문하려 하십니까?”라고 하면, “죄의 차별을 설하니, 율에서와 같이 아시오”라고 한다.힐문을 받는 사람은 마땅히 다섯 가지 큰 부류의 학처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여 헤아릴 것이며, 마땅히 그것을 허락해야 한다. 그리고는 기억해 내게 할 것이니, “그대가 어떤 곳에서 나에게 범함이 있음을 알았는지 사실에 의해 말씀하십시오. 결코 거짓말을 꾸며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라. 그리고 마땅히 그에게 고해 말하기를, “그대에게 힐문할 것을 맡기겠습니다” 하라. 그러면 다음에 힐문할 사람이 먼저 위로해서 안심시킨 뒤에 바야흐로 말을 시작해야 한다.“그렇지만 나는 사실과 어긋나는 말이나, 사사로이 숨겨진 말이나 혹은 갑자기 지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말한 바는 내가 다 세 번 물을 것이니, 자세히 생각하시오”라고 하라.다음에 마땅히 고해서 말하라.
“그대 아무개는 들으십시오. 승가가 나로 하여금 힐문하고 꾸짖는 사람으로 삼았으니, 그대에게 실제의 일인지 묻겠습니다. 대중이 마땅히 그대를 위해 갈마법을 지을 것이니, 잘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자신을 함부로 손상되도록 하지도 마시오. 또한 청정한 사람을 조롱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계를 좋아하는 이나 덕이 있는 노장님들을 업신여겨도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을 어기면 악작죄를 얻을 것이오.”‘서로 함께 충고하고 뉘우친다’고 함은, 어기어 범한 바가 있으면 마음으로 청정하기를 바람으로 먼저 범한 바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범(犯)한다’란, 개인을 따로 충고할 때는 이 말을 쓰지 않으면 솔토라를 얻는다.만일 첫 번째 아뢰고 두 번째 갈마를 하면 솔토라죄를 얻고, 세 번째를 마쳤을 때는 승가벌시사를 얻는다. 악한 말을 한 사람을 먼저 힐문하지 않고 문득 막으면 악작죄를 얻는다.나머지 다른 뜻이 통하고 막힘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으니, 그 충고하는 갈마는 백일갈마 가운데 설한 바와 같다.“내가 이미 열세 가지 승가벌시사법(僧伽伐尸沙法)을 설해 마쳤으니, 그 가운데 아홉은 처음에 곧 범하는 것이며, 넷은 세 번 충고하는 데 이른다.만일 필추가 낱낱이 따라서 범하고도 고의로 덮어서 감추었으면 덮어 감춘 날짜에 따라서 대중이 마땅히 좋아하지 않는 바리바사(波利婆娑)16)를 지을 것이다. 바리바사를 행해서 마쳤으면 대중은 마땅히 여섯 밤 동안 마나바(摩那▼(卑+也))17)를 줄 것이며, 마나바를 행해서 마쳤을 때 나머지 죄를 벗어나게 하되, 20인 승가가 이 필추의 죄를 벗어나게 한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20인의 대중 수에 모자라면 이 필추의 죄는 없앨 수 없고, 그 모든 필추가 죄를 얻게 된다. 이것이 죄를 벗어나는 법[出罪法]이다.”‘내가 이미 설해 마쳤다’ 함은 그 일을 마침으로 모든 필추로 하여금 거듭 그 죄를 살피게 하고자 함을 나타낸 것이고, 잠깐 쉬고자 한 때문이다.‘아홉은 처음에 곧 범하는 것’이라 함은 처음 아홉 가지 계에 대한 일로써 죄를 얻었음을 일컫는다. ‘넷은 세 번 충고하는 데 이른다’ 함은 곧 승가를 깨뜨리는 등은 세 번째 갈마를 어겼을 때 비로소 그 죄를 범한 것임을 일컫는다.‘만일 필추가 낱낱이 따라서’ 등으로 말한 것은 무릇 죄를 없애고자 하면 모름지기 다섯 가지 연(緣)이 있음을 말한다. 첫째는 그 죄를 말미암음이니 범한 죄가 그것이고, 둘째는 뜻에 좋음을 말미암음이니 알면서 덮어 감추었음을 일컬으며, 셋째는 죄를 다스림을 말미암음이니 덮어 감춘 날짜를 따라서 따로 머무는 것 등을 주는 것이고, 넷째는 벌을 행하여 마쳤음을 말미암음이니 대중의 마음을 기쁘게 했음을 일컬으며, 다섯째는 사람의 수가 다름을 말미암는 것이니 20명의 대중 수를 채웠음을 일컫는다.‘20인’이라 함은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이 부족하면 법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수에 따라 정해서 따로 머물기[遍住]를 행한다’고 함은 그 덮은 죄를 말미암기 때문이다.덮어 감추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밤 시간을 덮어 감추는 것[覆夜]이고, 둘째는 마음을 덮어 감춤[覆心]이다. 만일 복심을 지어서 날이 밝기에 이르도록 지냈으면 이것을 하룻밤 덮어 감춘 죄라 한다. 만일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덮어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록 새날이 밝을 때까지에 이르렀다 해도 이것은 덮어 감춘 죄는 없다.뒤에 이르러 기억이 나서 죄를 말하고자 하면 이것은 따로 살게 하는 법을 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여러 악작죄를 설해야 한다.귀먹은 이와 방언(方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본성(本性)이 아니거나 벌로 다스림을 당했을 경우, 이런 사람은 비록 함께 지내더라도 다 덮어 감추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낮에 필추와 더불어 하루 종일 함께 있든지, 혹은 밤에 이르러 필추가 없는 데 있었든지, 설사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또한 덮어 감춤이 없는 것이다.만일 두 가지 죄를 범했으면 둘 다 함께 덮어 감춘 죄이거나 하나는 덮어 감춤이 되고 다른 하나는 덮어 감춤이 아니며, 혹은 둘 다 덮어 감춤이 아닐 경우도 있다. 혹은 둘을 다 기억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는 기억하는데 하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둘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두 달을 지나는 등의 경우가 있으니, 이와 같이 알라.죄에 대해서나 날짜에 대해서 그 수를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하나의 죄인가 많은 죄인가, 덮어 감춤이 있는가 덮어 감춤이 없는가, 혹은 속인이 되었는가, 혹은 구적(求寂)이 되었다가 거듭 구족계를 받았는가, 혹은 푸는 법을 얻고서 덮어 감추었는가 덮어 감추지 않았는가, 혹은 전에 한 것인가, 혹은 뒤에 한 것인가에 의해서 그 여러 죄의 유에 따라 다스리는 법이 아주 많으나, 광문에 갖춰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로운 설명은 하지 않는다.여기에 네 가지의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따로 사는 법을 행할 것이니, 죄의 수를 아는데 날짜의 수는 알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날짜의 수는 아는데 죄의 수는 알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저 두 가지의 수를 다 모르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의 수를 다 알기도 하나니, 백일갈마에서 설한 것과 같다.만일 거듭해서 앞에서 저지른 죄와 같은 유를 또 범하면 마땅히 다시 본래의 따로 사는 갈마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조복하게 해야 한다. 무너뜨리기 전의 법을 그 본래대로 따라서 다시 행해야 한다. 행할 때 다시 범하면 이것이 앞에 저지른 죄의 유이니 마땅히 거듭 거두는 근본갈마를 주어야 한다. 만일 다시 범했으면 거듭 전 날[前日]을 거두어서 다시 행하도록 해야 한다.따로 사는 벌을 행해야 할 사람이 얻는 법은 흑법(黑法)과 백법(白法)이 같지 않으니, 여기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 흑법이니, 모두가 다 그른 법임을 일컫는다. 둘째는 많은 부분이 흑법이니, 따로 사는 것은 법답게 했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다 그른 법인 경우를 일컫는다. 셋째는 위로 향한 반이 흑법이니 이것이 본래는 바른 법이며, 나머지는 다 그른 법인 경우이다. 넷째는 반을 줄인 흑법이니, 거듭 거둔 것은 옳은 법이고 뒤는 다 그른 법이며, 다섯째는 조금이 흑법이니, 뜻이 기쁨은 옳은 법이고 뒤의 하나는 그른 법이다. 여섯째는 모두 다 백법일 뿐이며 나아가 죄를 벗어나는 것이니, 다 법다운 것이므로 일컬어 ‘죄로부터 잘 벗어났다’고 한다.만일 법답게 따로 사는 법을 행해서 마쳤으면 마땅히 의희(意喜)18)를 주어야 하며, 만일 덮어 감춤을 하지 않은 이는 의희(意喜)를 행함으로써 죄를 벗어나야 한다. 능히 대중의 마음을 다 환희하게 하므로 일컬어 ‘의희’라 한다.6일 가운데 만일 거듭 범한다면, 마땅히 다시 본래의 의희를 줄 것이며, 만일 다시 또 범했으면 응당 거듭 거두어 6일 동안 의희를 주어야 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앞의 죄의 유인 것이다.‘앞의 유(類)’라 함은 앞에서의 인(因) 때문에 새고[泄] 이제 돌아왔기 때문에 새는 것이니, 나머지는 이에 준해서 알라. 만일 한 유가 아니면 곧 무너지지 않는 법이니, 만일 따로 사는 일[遍住]과 마나바를 행할 때에는 다시 중교죄(衆敎罪)를 범한다.만일 같은 유가 아니면 마땅히 드러내서 모름지기 보여야 하니, 온갖 있는 바 악작별행(惡作別行)이며, 따로 사는 법이며, 뜻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첫날에 처음 중교(衆敎)를 범하고 하루 동안 덮어 감추었거나 13가지를 13일 동안 덮어 감추었을 경우, 만일 그 죄를 고백하고자 하면, 마땅히 맹렬한 마음에 의거해서 번뇌가 무거운 이에게는 먼저 행법을 주고 따로 살기와 뜻을 기쁘게 함을 행하게 해야 한다.필추는 모든 행법을 마땅히 수순해서 행해야 하니, 이른바 훌륭한 필추의 예경을 받지 말 것이며, 또한 다시 한자리에 함께 앉지 못하며, 훌륭한 자리에 앉지 말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지 못하며, 밖에 나갈 때에는 마땅히 다른 이의 뒤를 따르고 한 방에 눕지 못하며, 남을 출가시켜서 열 가지 학처를 받게 하지 못하며,구족계를 받은 이와 더불어 의지(依止)를 받지 못하며, 사미[求寂]를 기르지 못하고 갈마를 짓지 못하며, 책임 있는 이로 뽑혀서 심부름하지 못하며, 필추니를 가르치지 못하며, 또한 뽑혀서 보내지지 못하며, 이미 먼저 뽑혔으면 마땅히 버릴 것이며, 필추를 힐문하여 교훈(敎訓)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며, 문 닫고 불 켜고 절ㆍ요사와 변소를 쓸고 훔치며, 대소변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치우고 닦고 흙과 나뭇잎을 갖추어 이바지하며,추울 때는 불을 주고 더울 때는 부채의 시원한 바람이 되며, 건추를 치고 향화(香火)를 엄숙히 하며, 또한 부처님을 찬탄하며, 마땅히 자신이 근원(近圓)에 있더라도 사미의 아랫자리로 낮추며, 승가 대중의 와구ㆍ발우 등의 물건을 마땅히 거두고 치우며, 제저(制底)ㆍ향대를 항상 쓸고 닦아야 하며, 때맞추어 순례하고 참배하여 마땅히 날 수를 고해야 한다.대중이 모이는 곳에서는 행할 바 일의 내용을 모두에게 고하여 알게 하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손님 필추가 왔는데 아직 법의와 발우가 정해지지 않았으면 마땅히 나가서 아뢰어야 한다. 필추의 절이 없으면 문득 가지 말며 인연이 있으면 떠나야 한다. 속가에 가서 자지 말며 모름지기 계절ㆍ날씨를 살펴서 끓는 물을 공급하되, 훌륭한 필추를 위해서는 그 발을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어 절 가운데서 이롭게 할 것이며, 마지막에는 따로 사는 법과 뜻을 기쁘게 하는 법을 받아야 한다.작법(作法)을 행할 때는 마땅히 따로 사는 법과 의희로써 하지 말 것이며, 가르침을 주는 수학인(授學人)은 그 대중의 수가 채워져야 하며, 또한 이 사람이 공동의 처소를 얻어 그 법을 행해서는 안 된다.또 빈 절에 살지 못하니, 한 사람도 안 되고 두 사람과도 안 되고 세 사람과도 안 되며, 모름지기 넷을 채워야만 한다. 이것이 청정한 수행인의 한 곳에서의 행법이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으면, 다 악작죄를 얻는다.또 바르게 행할 때 어떤 다투는 이가 주처로 돌아오고자 함을 들었다면 마땅히 훌륭한 필추를 대하여 ‘어려운 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행법(行法)을 버리고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라.같은 본성(本性)의 다툼질 잘하던 사람이 만일 갔으면, 다시 필추에게 그 행법을 받을 것이요, 만일 의희를 행하고 따로 사는 법을 행하지 않았거나, 혹은 따로 사는 법을 행했으나 의희를 행하지 않았으면 이런 사람은 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마땅히 아울러 선행을 하여야만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나머지는 광문의 글에서 설한 바와 같다.중교죄(衆敎罪)를 범하는 데 여섯 가지 사람이 있으니, 한 필추에 대해서 고백함으로써 그 죄가 없어지기에 청정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어떤 것을 여섯이라 하는가.첫째는 소달라장(蘇呾羅藏)을 두루 지니는 것이고, 둘째는 비나야장(毗奈耶藏)을 두루 지니는 것이며, 셋째는 마질리가장(摩咥里迦藏)을 두루 지니는 것이고, 넷째는 성품이 지극해서 부끄러워하여 만일 그 죄를 말하면 뉘우치는 마음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며, 다섯째는 대중 가운데 가장 노장인 상좌이며, 여섯째는 대복덕인이다.무엇 때문에 이 여섯 사람이 죄를 없애주는 데 쉬운 이라 하는가? 죄를 멸하는 것은 마음으로 인해서이지 벌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만일 범한 죄를 결단코 마음으로 단절할 것을 맹세하면 다시는 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깊이 일으켜서 마음이 거짓된 속임이 없으니, 그러므로 제거하여 없애버리게 된다.또 나이 높은 대덕이나 삼장을 받아 지니는 이에게 다스림을 받을 경우 비방하는 논의가 문득 일어나면 한 사람에게 뉘우침을 열라. 만일 불공중교죄(不共衆敎罪)를 범한 자가 근(根)이 바뀌었을 때는 허물도 또한 따라서 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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