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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88 불교(근본살바다부율섭 1권 / 根本薩婆多部律攝)

by Kay/케이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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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1

 

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제1권

승우(勝友) 모음[集]의정(義淨) 한역
심재열 번역
김형준 개역

바라저목차1)경 서(序)
예경하오니, 온갖 번뇌 조복하여서
중생 의혹 없애주는 바른 인[正因]이여,
다함없는 이익으로 널리 비추는 태양처럼
어두움을 모두 깨뜨려 없애시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광률[廣釋:廣律]2)과 건도[諸事:犍度]3),
니타나(尼陀那)4)와 목득가(目得迦)5),
증일(增一)6)에서 16문(文)까지는
오파리(鄔波離)7) 존자가 여쭌 바라네.
마납비가(摩納毘迦)8)께서 요점을 풀어주신
『비니득가(比尼得迦)』9)와 『본모(本母)』10)여,
저희들 이제부터 차례대로 광문(廣文)을 거두어
약본(略本)을 좋아하므로써 신속히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별해탈경(別解脫經:戒本)은 듣기 어려우니
한량없는 구지겁(俱胝劫) 동안
경(經)을 독송하고 받아 지님도 그와 같으며
말씀대로 행하는 이는 더욱 만나기 어렵네.
이 가운데 첫 번째 게송의 뜻은 가르침[敎]과 수행[行]을 얻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별해탈(別解脫)’이라 함은, 별해탈경(別解脫經)에 의거해서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하품 하등[下下]의 9품(品)의 모든 미혹을 점차로 끊고 제거하여 영원히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는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별해탈이라고 이름한다.또 견도위(見道位)11)와 수도위(修道位)12)에서 끊는 번뇌는 그 종류가 각각 많은데, 각각의 품(品)에서 능히 버리고 여의는 것을 별해탈이라 이름한다. 미혹으로 말미암아 삼계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유정들을 위해서 먼저 마땅히 부지런히 해탈을 구해야 한다.‘경(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일컫는 것으로서 외도(外道)의 가르침을 가려낸 것이다. ‘듣는다’고 함은 다른 이에게 말씀한 글과 뜻을 일컫는 것으로서, 귀의 식별을 통해서 받아들인 다음에 결단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분명히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듣기 어렵다’고 한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적에만 한 번 만나 뵙는 것인 데다가 인간이나 하늘의 몸을 얻기도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한량없는 구지겁’13)이라 함은, 바로 대겁(大劫)을 이르며 비록 수많은 겁을 지나더라도 계법(戒法)은 만나기 어렵다. 설사 이 대겁을 다 지난다 해도 만나기 어려우므로, 이것은 만나기 어려운 것의 극치를 나타낸 것이다.‘독송’이라 함은, 글 혹은 뜻을 지혜로써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받아 지닌다’ 함은, 저 두 가지에 대해 자주자주 기억하고 지녀 오랫동안 잊지 않는 것을 일컬으니, 생각하고 외우는 것 등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말씀대로 행한다’고 함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업에 있어서 큰 스승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만나기 어렵네.’라고 함은, 듣고[聞], 읽고[讀], 받아 지니는 것[受持]은 오히려 쉽지만,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용맹하고 부지런히 힘써야 바야흐로 계행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니, 열등한 마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여기에서는 가르침과 수행, 이것은 만나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 ‘듣고 독송하고 지닌다’ 함은 바로 그 가르침을 쫓아 받들고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곧 이것이 그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즐거움이요
미묘한 바른 법 설하시니 즐거움이요
승가의 한마음 같은 견해[同見]도 즐거움이요
화합하여 함께 닦고 용맹정진함도 즐거움이네.
이 게송의 뜻은 3보(寶)가 세상에 일어나면 온갖 사업이 모두 즐거움의 원인이 됨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즐거움이다’라고 함은 이른바 태에 들어간 때와 현재 세상에 태어나신 때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고 일컫는 것이다.장차 진리를 이루게 되는 것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며, 비록 보살이라고 해도 불타의 칭호를 받으니, 혹은 정각을 이룰 때를 불타의 출세라 말한다. 이때 일체지(一切智)를 이루어 불타란 호(號)를 얻기 때문이니, 이 묘한 해탈은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이기에 일컬어 즐거움이라 한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불을 일컬어 ‘즐거운 것’이라고 함과 같다.‘미묘한 바른 법을 설하니 즐거움이다’라고 함은 12분교(分敎)14)의 계경(契經) 등을 말하며, ‘승가(僧伽)’라 함은 여덟 대인[八大人] 등을 말한다.
‘한마음 같은 견해’라 함은 계견(戒見)ㆍ위의(威儀)ㆍ바른 생활[正命]을 대중이 다 같이 받들어 따르기 때문이다. 또 일심으로 함께하는 일은 무너뜨리기 어려움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화합해서 함께 닦는다’고 함은, 곧 이 마음을 한결같이 해서 청정한 계율[淨尸羅]15)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맹하게 정진 한다’라고 함은, 세 가지 배우는 곳[三學處]16)에서 부지런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혹은 용맹심을 채찍질해서 모든 번뇌가 끝내 다하게 하기 때문이며, 또 마음으로 용맹하게 결단하여 수행하는 데로만 나아가고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니, 모두가 바로 즐거움의 인(因)이 된다.
성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요
함께 머무는 일 역시 즐거움이다
만일 어리석은 이들을 만나지 않으면
이것을 곧 항상 즐거운 일이라 하네.
이 게송의 뜻은 어진 이를 친근히 하고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것 역시 즐거움의 원인이 됨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위의 반 구(半句)와 아래의 반 구를 이어서 알아야 한다.
‘성스러운 사람’이라 함은, 죄악의 일을 멀리하고 버린다면 곧 이것이 성스러운 사람이다.
뛰어난 덕견(德見)이 있고, 또 같이 지내는 것은 둘 다 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만일 선품(善品)을 닦지 않으면 대개는 악행을 일삼아 바른 진리에 미혹하게 된다. 때문에 어리석다고 한 것이니, 친근해서는 안 되며 속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계율[尸羅]을 갖춤을 보면 즐거움 삼고
많이 듣고 아는 이 보면 이 또한 즐거움 삼으며
아라한을 보면 이는 곧 참다운 즐거움이라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몸을 받아 나지 않기 때문이어라.
이 게송의 뜻은 선우(善友)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성스러운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인 것이고, 둘째는 거룩한 뜻이다. 세속적인 것에 다시 둘이 있으니, 하나는 선정에 머무는 분[住定分]이고, 둘은 지혜에 머무는 분[住慧分]이다.
‘계율을 갖춘다’ 함은 선정에 머무는 분을 일컫나니, 이것이 비록 세속의 거룩한 보배이긴 하지만 또한 능히 악을 멀리한다.
이것은 계(戒)로 말미암아 능히 선정을 일으킴을 밝혔기 때문이다.‘많이 들었다’ 함은 말하자면 지혜에 머무는 분(分)이다. 선정을 말미암아서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래의 반(半)은 선정과 지혜라는 두 법으로 평등하게 마음을 쓰기 때문에 구경처(究竟處)에 머물게 됨을 밝힌 것이다. 곧 이것이 거룩한 진리의 참된 선[勝義眞善]17)의 지식이다.
‘아라한’이라 함은, [생사에] 유전하는 가운데서 불생법(不生法)을 증득한 것이니, 번뇌와 뭇 괴로움의 결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가 나루터의 묘한 계단은 즐거움이요
법으로써 원수를 굴복시키고 싸움에서 이김도 즐거움이며
바른 지혜 증득하여 과(果)가 생길 때
아만을 남김없이 제거함도 즐거움이라네.
이 게송의 위의 반 구는 지극한 즐거움의 원인을 밝힌 것이고, 아래의 반 는 지혜를 내어 미혹을 끊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강가 나루터’라 함은 이른바 해탈이니, 강은 양극단18)의 허물을 떠났기 때문이다. 8정도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묘한 계단’이라고 한 것이다.
비유컨대 강가의 나루터에 묘한 계단길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나그네에게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법으로써 원수를 굴복시키고 싸움에서 이김도 즐거움’이라 함은, 바른 수행법으로써 적을 물리치는 도구로 삼아 번뇌를 항복시켜 다시는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때문에 싸움에 이긴다고 한 것이다.
이어지는 아래 반 구의 게송은 지혜의 칼로 아만의 깃대를 베어 버림을 밝힌 것이니, 마라(魔羅)의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드러냄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능히 뜻을 결정할 수 있고
감관의 욕망을 잘 조복 받고 다문(多聞)을 갖추어서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숲 속에 있으면서
난야(蘭若)19)에 고요하고 한가로이 머묾은 즐거움이라네.
이 게송은 앞에서 말한 바른 행을 닦는 사람의 두다(杜多)의 공덕이 원만하게 상응함을 밝힌 것이니, 이것은 즐거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뜻을 결정한다’라고 함은, 이른바 처음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서 지족행(知足行)을 하고 결단코 부지런히 하되 명리(名利)를 바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다스려서 바깥 경계로부터 막아 보호하는 것이니, 해탈의 뛰어난 과[勝果]가 이로 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감관의 욕망을 잘 조복한다’ 함은, 이것은 조반(助伴)의 청정함이 계와 함께하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문(多聞)을 갖춘다’고 함은, 뛰어난 과[勝上果]를 얻는 것은 반드시 많이 들음에 의지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잘 살펴서 바야흐로 번뇌를 끊고, 어리석지 않은 이는 조용한 도량에 머무름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필추(苾芻:비구)는 먼저 다문을 배우니, 설사 많이 듣지는 못했더라도 다만 계의 내용[戒相]을 알면 고요한 도량에 머무를 수 있다.‘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등은, 결정한 마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물러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난야(蘭若)에 고요하고 한가로이 머묾은 즐거움이라네’라고 함은 이른바 시끄럽고 잡된 것을 여의어서 바야흐로 능히 진리에 나아가 마음을 즐겁게 머물게 하는 것이다.위의 여섯 게송은 나한(羅漢)20)들이 결집(結集)해 놓은 것이며, 이 아래로는 서문인데 크게 열 가지 뜻을 총괄하여 밝힌 것이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다 모이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며, 셋째는 모이지 않은 이들을 따라서 들어 주는 것이고, 넷째는 공양하는 법식(法式)이고, 다섯째는 경계하고 삼감을 바르게 밝히는 것이며, 여섯째는 경계하고 삼가서 이익이 있는 것이고, 일곱째는 경계하지 않아 허물이 생기는 것이고, 여덟째는 바르게 고백하는 의식[白事]을 작지[作]21)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들을 것을 권하는 것이며, 열째는 저 무리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대덕들이여, 봄철이 이만큼 지나가고 이만큼 남아 있다. 늙고 죽음이 침범하여 목숨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큰 스승[大師]의 교법(敎法) 또한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니, 여러 대덕들이여 부지런히 빛내고 드러내야지 방일해서는 안 된다. 방일하지 않으면 반드시 여실한 지혜[如知]와 공양 받을 만함과[應]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正等覺]을 증득할 것이니, 하물며 나머지 다른 37조도품의 선법들[覺品善法]이겠는가.
대덕 승가(僧伽)는 먼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부처님의 성문대중은 적게 구하고 적은 일로 만족해야 하니[少求少事], 오지 않은 필추들은 욕(欲)과 청정함[淸淨]22)을 말하라.”‘첫째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를 밝힌 것이다’23)라고 한 것은 곧 ‘여러 대덕들이여, 봄철이 이만큼 지났다’ 등등에 해당한다. ‘지났다’는 것은 ‘이미 가버렸다[已往]는 뜻이다. ‘봄철’이라 한 것은, 세 때[三時] 가운데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를 말한 것으로서 바라저목차를 설하면서 그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봄철에 의거한 것이다.‘세 때’란 봄ㆍ여름ㆍ겨울을 말한다.
‘이만큼’이란 그 한량을 가리키는데, 이른바 계를 설하는 날에 따라서 수를 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만큼이 남았다’고 함은 당시의 남은 날짜에 준해야 한다.‘늙고 죽음이 침범했다’고 했는데, 그 뜻은 늙고 죽음이 언제나 앞에 닥쳐 있음을 밝힌 것이니, 늙음에서 죽음까지를 일컬어 노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12유지[十二有支] 가운데 다만 이 하나만을 말한 것은 근심ㆍ슬픔 등에 비해서 그 작용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맑은 행을 닦는 수행자의 원만한 일을 잃게 됨을 [이로써]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이것이 첫 인[初因]이다.그러나 수행자의 원만한 인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른바 의지할 바[所衣]이고 둘째는 행하는 바탕[行本]이다. ‘의지할 바의 잃음[所依失]’이라 함은, 늙고 죽음의 핍박 때문에 감당해 낼 수 없으니, 목숨이 끊어지는 일도 그 차례와 같다.‘행하는 바탕의 잃음[行本失]’이라 함은, 이른바 큰 스승의 교법이 머지않아 장차 없어질 것이니, 불법이 멸하여 수행을 잃고 물러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대비세존께서는 뒤바뀜이 없는 뜻을 가지고 유정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큰 스승’이라 한다.
법(法)이란 이른바 12분교(分敎)이니, 세존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유정을 이끌어 이롭게 하신다. 인연이 있음을 따라 모두 다 교화를 받으니, 이 두 일[二事]24)에 의해서 원만한 수행을 잃기 때문이다.‘방일하지 말라’ 한 것은, 방일하지 않음을 권하여 부지런한 마음으로 용맹하게 결단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빛내고 드날리기 때문이다.
‘다만 방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방일하지 않는 것이 모든 선품(善品)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때문이다.‘마땅히 부지런하라’는 말은 방일하지 않을 것을 권한 것이니, 능히 출세간의 성도(聖道)에 대한 가행(加行)을 위해 의지(依止)가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를 쌍으로 닦는 등을 통하여 성인의 도를 얻기 때문이다.
‘방일하지 않음을 말미암아서 반드시 증득한다’는 등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 세존께서 출가한 이들로서 해탈을 구하는 이로 하여금 도과(道果)를 증득하게 하기 위하여 두루 배워야 할 것[衆學處]25)을 제정하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여실한 지혜’라 한 것은, 아는 대로의 실다운 앎을 일컫기 때문이다. ‘공양 받을 만하다’ 함은 모든 유정들에게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전도됨이 없이 두루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머지 다른 깨달음의 선법이겠는가.’라고 함은, 이 또한 앞에서의 방일하지 않음을 말미암아 능히 보리에 나아가는 것에 견주어 온갖 선법을 다 깨달음의 선법[覺品善法]이라 한 것이다.다음에는 다 모이지 않음을 꾸짖음을 밝힌 것이다.26)
‘대덕 승가는 먼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고 함은, 앞에서는 다른 일이 없으면 마땅히 바로 와서 함께 모여야 된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에 ‘율(律)의 성문대중은 적게 구하고 적은 일에만 만족한다.’고 했으니, 이미 다른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해석하기를 포쇄타(褒灑陀)27) 때에 물을 뿌리고 청소하여 청정히 하고 등화(燈花) 등으로 장엄해야 하나니, 이것이 미리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모름지기 묻기를 ‘대덕 승가는 먼저 해야 할 일을 이미 하셨습니까?’라고 하여야 한다.‘적게 구하고 적은 일’이라 함은, 적게 구하는 것은 욕심이 적은 것이고, 적은 일이란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일컫는다. 또 ‘적게 구함’은 의업(意業)이고, 적은 일이란 몸과 말[의 업]이다.
‘성문’이라 함은 다른 이를 따라서 듣는 것이고, 다른 이의 음성을 따라서 청문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대중을 이루기 때문에 성문의 대중이라고 한다. 대중[衆]이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모인 것이므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다음에는 모이지 않고 따라서 들은 것을 밝힌 것이다.28)
‘오지 않는…… ’ 등이라고 함은, 장정시(長淨時)에는 함께 모이지 않음을 일컬어 ‘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대덕’이라 함은 서로 존경하는 말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모든 필추 사이에서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이름이나 성씨 등을 불러서는 안 되고 마땅히 구수(具壽)라 부르고 혹은 대덕이라 불러야 한다. 만일 불세존의 경우라면 마땅히 덕호(德號)를 불러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월법죄(越法罪)를 얻는다.‘욕과 청정을 말한다’고 함은, 필추가 몸에 병이 있어서 뛰어난 선품[勝善品]를 닦는 데도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 마땅히 욕과 청정함을 주어야 한다. 혹은 몸으로 표현하여[身表業] 욕과 청정을 주되 이와 같이 준다.곧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가죽신을 벗고 법식에 따라서 공경하게 예의를 다 마치고는 오른 무릎을 세우고 왼 무릎을 꿇어 합장한 다음 이와 같이 말한다.
“구수여, 잘 기억해 주십시오. 이제 승가가 열나흘 날에 포쇄타(褒灑陀)를 하니, 나 필추 아무개도 열나흘 날 포쇄타를 하려 합니다. 저 아무개는 두루 청정하여 모든 장애법[障法]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질병의 인연 때문에 저 여법한 승가의 행사에 제가 이제 욕과 청정[欲淸淨]을 드리오며 이렇게 고백하오니, 마땅히 저를 위해 설해 주십시오.”이렇게 두 번, 세 번 말하라. 만일 필추가 병이 깊어 욕을 줄 수 없을 경우, 만일 부축하여 참석할 수 있으면 마땅히 대중 가운데 들어가 참여하고, 만일 부축해 감당할 수 없으면 함께 병자들에게로 가서 포살을 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법(作法)이 성립되지 못하고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포살이 아니고 다른 갈마(羯磨)를 짓는다면, 단지 욕만 주고 청정은 말하지 않는다.그 욕과 청정을 위임받은 필추가 이미 대중 가운데 들어갔으면 마땅히 옆자리의 필추에 대해 이와 같이 말을 하라.
“구수이시여, 생각해 주소서. 아무 곳의 방에 있는 필추 아무개가 몸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승가의 열나흘 날 포살을 맞아서 저 필추 아무개 또한 열나흘 날 포살을 하오니, 저 필추 아무개는 스스로 두루 청정하여 모든 장애되는 법이 없으며, 질병의 인연 때문에 여법한 승가의 행사에 욕과 청정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저 필추가 고백할 바를 제가 이제 자세히 말하겠습니다.”만일 다시 다른 인연이 있으면 그 당시의 일을 따라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개별적인 사람 편에 욕과 청정을 말하고,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 까닭은 때를 늦추고 피로를 일으키는 등의 모든 허물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만일 필추가 해태하거나 또는 법을 더럽히기 위해서 욕을 주면 돌색흘리다죄(突色訖里多罪)29)를 얻는다.만일 갈마타나(羯磨陀那)30)이거나 혹은 현재 병에 걸렸거나 혹은 병이 장차 발생할 위험이 있거나 혹은 병이 막 차도가 있을 경우거나 혹은 환자를 간호하는 중이거나 혹은 아주 피곤하거나 혹은 주리고 목마르고 춥거나 덥거나 혹은 품성이 심히 암둔하여 다른 선품(善品)의 수행을 닦아 혼침(昏沈)을 물리치려 하거나, 혹은 조용한 방에서 스스로 계본(戒本)을 외우거나혹은 다른 이에게 계의 뜻을 들어 받거나 혹은 계의 문구를 지키는 사람으로 마음을 기울여서 그 뜻을 생각하되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해서이거나 혹은 처음으로 오묘한 관[妙觀]을 닦아 눈앞에 나타남을 얻어 마음을 항복받기 위한 때문이거나, 혹은 깨달음을 위한 선품[覺分善品]에 있어서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나, 만일 여러 다른 인연으로 바른 생각을 잃을까 두려워할 경우이거나 혹은 때때로 진리를 보고 초과(初果)를 얻는 경우이니, 모두 욕을 주어도 어긋남은 없다.만일 욕을 줄 사람이 많아 함께 보냈으면, 나이가 적거나 늙은 필추는 폐(廢)하고, 나머지는 선사(善事)일 경우 마땅히 모인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욕을 지니는 사람이 이미 욕을 받고 나서 급히 달려오다가 물[杭]을 뛰어넘거나 혹은 울타리[欄楯]의 험한 곳에 있거나 혹은 허공을 타거나 혹은 경계 밖을 향하거나 혹은 쌍으로 밟아 오르는 길을 오르거나 또는 쌍 사다리의 계단을 밟아 오르거나 혹은 졸거나, 선정에 들거나, 몸이 죽거나 환속을 하거나, 혹은 말하기를 “나는 구적(求寂:사미)이다”라고 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욕과 청정을 잘 지니지 못한 것이니, 응당 다시 욕을 취해야 한다.만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의 욕과 청정을 위임받았으면 그것을 다 잘 기억해서 그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을에 있는 것을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도량에 있는 것으로 하면 서로 모두 성립되지 못하며, 또한 욕과 청정을 전수(轉授)해서는 안 된다.
배움을 지도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욕을 위임받을 수 없으나 다른 이에게 욕을 위임할 수는 있다. 이 필추를 말미암기 때문에 경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응당 경계 안에 있는 이에게 욕을 주어야 한다. 이와 다르면 성립하지 않는다. 필추니(尼)로부터 가르침을 청해 받은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라.아울러 경계법[界法]을 밝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큰 것이다. 큰 경계[大界] 안에 장애나 어려운 곳이 없으면 작은 경계 터[小界場]를 안치하라. 먼저 표상(標相)을 관찰하되 동쪽을 담장ㆍ나무ㆍ목책[柵]ㆍ울타리ㆍ쌓인 흙ㆍ서 있는 돌ㆍ쇠말뚝ㆍ낭떠러지 등으로 하고, 다른 쪽도 그렇게 해야 하니, 대중은 그 표시를 보고 알아 말로 아뢸[白] 것이다.또 주위에 자리를 펴고 건추(楗椎)를 쳐서 의식 방편을 짓는다. 대중이 모두 함께 모여 여욕법(與欲法)이 없으면 모든 오래 머문 필추[舊住苾芻]들이 같이 방위의 표시를 말한다.
먼저 동쪽으로부터 다음에 남쪽ㆍ북쪽ㆍ서쪽으로 하여 이미 방위의 표시를 알고 났으면 다음에 한 필추가 백갈마(白羯磨)를 짓는다. 작은 경계를 먼저 결계(結界)31)하고 뒤에 하지 않는다.“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작은 경계 사방에 예로부터 있는 표시를 들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승가는 때가 이르렀다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표시의 영역 안에 있는 작은 경계 터를 지어 맺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다음에 갈마를 짓는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작은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시를 함께 말하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고,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이제 승가는 이 표시의 영역 안의 작은 경계 터 맺는 것을 짓겠습니다. 만일 모든 구수께서 이 표시의 영역 안에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음을 허락하시는 분은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승가는 이미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작은 경계의 도량을 맺어 짓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는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이 작은 경계의 도량은 글로 제정한 것이 없다. 서방의 곳곳에 있는데, 그 크기는 겨우 열 자 좀 넘을 정도로 평지를 북돋아서 둘레를 만들고 계단이 없다. 가운데에 제저(制底)를 안치하고 문은 한쪽을 향하게 한다.다음으로 큰 경계 맺는 법을 말하겠다.
이 가운데 큰 경계의 크기로서 가장 큰 것은 가로가 2유선나(踰繕那)32) 반(半)이며,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아래를 향함도 그렇게 하고, 만일 물이 있어서 막혔으면 물을 건너서 경계를 삼는다. 만일 경계 안에 나무가 있거나 산이 있으면 나무와 산을 따라서 위의 물과의 경계에 이르도록 하고 폭과 같게 한다.만일 작은 경계의 크기는 뜻에 따라 하고, 큰 경계를 맺을 때는 앞의 표상과 같게 하라.
오래 머문 모든 필추와 함께 사방의 표상을 보고 나서 좌석을 펴고 건추를 쳐 울려서 대중이 모두 모이게 해야 하며, 앞에서와 같이 알린다.다음으로 한 필추가 백이갈마(百二羯磨)를 작지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함께 큰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상을 일컫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만일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聽]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겠습니다.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住處)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마을과 마을의 세분(勢分)은 제외합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다음으로 갈마를 작지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큰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상을 함께 일컫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승가는 응당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겠습니다. 다만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마을과 마을의 세분은 제외합니다.만일 모든 구수들께서 이 표시의 영역 내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되,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에 이르기까지 이 안에서 마을과 마을의 세분을 제외하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승가가 이미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만일 승가가 이미 큰 경계를 맺으면 이 가운데 필추는 마땅히 한 곳에 모여서 포살과 수의(隨意)의 일33)를 하고 아울러 일체의 단백(單白)ㆍ백이(百二)ㆍ백사(白四)의 갈마를 작지한다. 만일 대중이 모이지 않았는데 작법하면 성립하지 않고 월법죄를 얻는다.만일 이 경계 안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不失衣界]를 짓고자 한다면 또한 큰 경계의 표시에 의해서 맺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지어야 한다. 한 필추로 하여금 백이갈마를 짓게 해야 하니, 먼저 [대중에 안건을] 고지하고[白] 나서 바야흐로 갈마를 한다.“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이미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함께 맺었습니다. 만일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의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짓겠습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이미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함께 맺었습니다. 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의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지었습니다.만일 모든 구수들께서 큰 경계의 표시 영역 안에서 필추가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지었음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승가는 이미 이 큰 경계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짓는 것을 마칩니다. 승가가 이미 청허(聽許)34)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만약 승가가 이미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마친 뒤에는 오직 아래ㆍ위의 두 가지 옷만으로 범위 내에서 다니고 머문다면 옷을 떠난 허물은 없다. 만일 작은 경계와 큰 경계를 인연이 있어 풀고자 한다면, 마땅히 백사(白四)로써 그것을 풀어야 하니, 작은 경계 터 안에 자리를 펴고 다음에 건추를 울린다.만일 대중이 모이지 않아도 최소한 네 사람이 되면, 작은 경계 가운데 있는 한 필추로 하여금 마땅히 먼저 안건을 아뢰게[白] 하고 바야흐로 갈마를 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었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면 승가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는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터를 풀겠습니다.”이와 같이 아룁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었습니다. 승가는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터를 푸니, 만일 구수들께서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푸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갈마이니,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와 같이 말한다.“승가는 이미 작은 경계 푸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짓겠습니다.”혹 먼저 큰 경계가 있고 작은 경계가 없는 것은 괜찮다. 이제 작은 경계를 풀고자 한다면, 마땅히 백사갈마로써 먼저 그 큰 경계를 풀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풀라.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포살을 하고 한 도량에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도량의 경계[大界]를 맺어 지었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를 풀겠습니다.”이와 같이 아룁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포살을 하고 한 도량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어 지었으나 이제 승가는 이 큰 경계를 풀고자 합니다. 만일 구수들께서 이 큰 경계 푸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갈마 의식이니,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와 같이 말한다.“승가는 이미 큰 경계를 풀어서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
경계를 푸는 일을 마치고나서는 먼저 작은 경계를 맺고, 나중에 큰 경계를 맺는다.
아울러 옷을 잃지 않는 일[不失衣]도 이와 같이 지어야만 한다.만약 오래된 경계를 풀지 않고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맺으면 뒤에 맺은 것은 성립하지 않으며 악작죄(惡作罪)를 얻는다.
만일 작은 경계와 큰 경계를 한 사람의 갈마인(羯磨人)이 한 번의 백이(白二)로써 동시에 맺으려 하거나 아울러 백사(白四)로써 동시에 풀고자 하면, 두 경계의 위에 두 승가를 모으고, 마땅히 자리를 두 경계에 걸쳐서 덮게 하며, 그 법을 주관하는 이는 거기에 머물면서 갈마를 지어야 한다.또한 응당 맺을 때는 작은 경계를 먼저 하고, 풀 때는 작은 경계를 나중에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쌍으로 풀고 쌍으로 맺고자 할 때는 문서로 만들되 작법의 일[作法事]에 준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무릇 경계를 맺을 때에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으니, 곧 다른 경계나 현재 물이 고인 곳이면서 작은 경계 터를 겸하는 곳이다. 아울러 필추니[尼]의 주처도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이른바 필추의 경계와 필추니의 경계와 작은 경계 터와 물이 고여 있는 곳 및 두 경계의 중간이 그것이다. 또한 이 경계를 푼다고 해서 다른 경계 역시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하나의 큰 나무를 가지고 또한 여러 경계의 표시로 삼을 수 있다. 그 경계를 맺을 때에 이미 방위의 표시를 알고 갈마의 의식을 지을 때에 이미 상당 부분을 설명했으면, 그 갈마를 주관한 이가 홀연히 사망하더라도 또한 경계 맺은 것이 성립한다.만일 환술이나 신통력을 드러내어 경계의 표시를 지었다면 경계 맺음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물결[水波]ㆍ별ㆍ달 등으로 경계의 표시를 하지 말라. 만일 객(客) 필추가 공주처(空住處)에 머물며 옛 도반을 기다린 지 7〜8일이 안 됐는데 경계의 맺음을 하면 악작죄(惡作罪)를 얻나니, 마땅히 앞의 경계에 의해서 하고 뒤의 맺음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만일 냇가와 개울들에 다리가 있으면 경계의 맺음을 할 수 있지만, 이와 다르면 곧 잘못이다. 냇가와 개울 위의 다리가 무너져 손질하고 고칠 경우, 7일 밤을 지나 8일 밤에 이르면 경계의 법[界法]을 잃는다.만일 근본적으로 거듭하여 수리할 마음이 없는데, 다리가 이미 부서졌으면 경계를 또한 잃는다. 다섯 가지 큰 도량의 경계를 잃는 것이 있으니, 곧 일체의 승가가 근(根)이 바뀌었거나 일체의 승가가 결단코 버리고 가거나 일체의 승가가 아울러 다 환속하거나 일체의 승가가 동시에 죽거나 일체의 승가가 법을 지어서[作法] 경계를 풀었을 경우다.아란야와 마을 사이에 있는 비결계(非結界)의 처소라면 무엇을 한계로 해서 계라고 부르는가? 아란야는 1구로사(拘盧舍)를 한계로 하며, 마을 사이는 울타리를 친 곳과 아울러 바깥의 세분(勢分)을 한정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경계라 한다. 이 두 경계 안에 필추가 함께 모여 손이 서로 미치는 곳에 있으면서 모든 갈마에 대해 수의(隨意)로 임하기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라. 만일 그 가르침을 어겨 지니면 모두 월법죄를 얻는다.
열 손가락 한데 모아 공경하나니
석가사자께 예경드리옵니다
별해탈 조복을
내가 설하노니 어진 이는 잘 들으라.
이 게송은 공양하는 법식을 밝힌 것35)이다.
‘열 손가락 한데 모아 공경 한다’ 함은, 이른바 두 손을 모아 공경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무릇 큰 스승께 공양을 드리는 데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예경함이고, 둘째는 찬탄함이다.
합장하여 공경함은 예경을 극진히 하는 거동이다.‘석가사자’란 덕을 찬탄하는 것으로, ‘석가’란 말은 세속에 있을 때 그 종족의 성으로 아주 높고 뛰어나며 하천한 혈통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사자’라는 것은 출가한 뒤에 먼저 두려워하는 바가 됨을 나타낸 것이니, 모든 외도가 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별해탈’이라 함은 큰 스승의 법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방편을 일으켜서 때로는 능히 번뇌와 의혹 벗어나니, 지극히 뛰어난 덕이 있으므로 별해탈이라고 한다. 현재 번뇌에 물들어서 얽히고 속박된 중생을 잘 조복하기 때문에 조복한다고 한다.
‘내가 설하노니 어진 이는 잘 들으라.’는 것은 법문 들을 것을 권한 것이다.
들은 뒤에는 마땅히 바로 행하라
대선(大仙)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온갖 작은 죄 가운데서도
용맹하고 부지런히 보호하라.
마음[心馬]은 제지하기 어려워
용맹함이 결렬되면 항상 상속하나니
별해탈은 재갈과 같으며
백 개의 침이 있어 지극히 날카롭다네.
이 게송은 바르게 경계함을 밝힌 것이다.
‘들은 뒤에는 마땅히 바로 행하라’ 함은 들은 뒤에 뒤바뀜이 없이 행하되 게으르지 말고 마음으로 항상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해서 모든 그릇된 법을 버리기를 권한 것이니, 마치 대선(大仙)께서 친히 가르침을 설하시는 것과 같이 다 받들어 지니기 때문이다.
‘대선’이라 함은 박가범(薄伽梵)이니, 곧 세속에서는 그야말로 존귀하고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또 성문이나 독각의 신선도 거룩하고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선이라 한다.‘작은 죄’란 이른바 차죄(遮罪)36)이고 성죄(性罪)37)의 부류가 아니다. 작은 죄에 대해서는 용맹하게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되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 ‘또한[亦]’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성과(性過)를 막고 나서 작은 죄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을 아는 데 준한 것이다. 어떤 경에서 말하기를, ‘용맹하여 부지런히 보호하라고 한 것은, 곧 성죄(性罪)를 막는 데 준한 것이어서 ≺또한≻이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모든 범하는 경우에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고 지극한 마음으로 지키고 지닐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죄’라 함은 더럽고 악한 법을 말하니, 거룩한 이들이[勝流之人] 싫어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보호한다.’ 함은 착한 법 가운데 정진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용맹함이 결렬됨’이라 함은, 부지런하고 용맹함이 결렬되면 모든 경계에 탐착함이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나니, 실로 두렵기 때문이다.‘항상 상속한다.’ 함은 번갈아 달려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 경계와 서로 가까이 하면 그것을 막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마음은 조복하기 어려운 주인이므로 조복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일 몸과 말을 잘 제어하면 정도[正]를 따르게 된다.
이 심근(心根)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내기 때문이니, 이를 위해서는 오직 부지런히 전념(專念)하고 씻어 없애서 아주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항상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관찰해야 하니, 나[我]라는 것이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마치 허공의 본바탕이 변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미혹을 끊는 이치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재갈’이라 함은, 이른바 조복되지 않는 무리가 계를 범하는 그 입에 고삐와 재갈을 물리기 때문이다.
‘같다’고 함은 이른바 이치에 순응함이니, 즐거움에 집착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自苦] 두 극단의 허물을 능숙하게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근(根)과 욕(欲)과 성(性) 등으로 부르는 까닭에 같다고 한다. 또한 ‘같다’는 것은 비유의 뜻이기도 하다.‘백 가지 침’이란 이른바 파계한 사람이 현법 가운데서 갖가지 뜨거운 번뇌에 시달리고 뉘우치며 마음이 괴로운 것을 침[針刺]에 비유한 것이다. 간략하게 큰 숫자를 들어서 또한 백(百)이라고 했다.
‘지극히 날카롭다’ 함은, 능히 뒷날에 이르러 범함을 일으킬 인(因)을 잘라서 끊게 하기 때문이다. 계(戒)의 재갈이란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성립하나니, 곧 이것이 마음에 뉘우침을 내게 하여 범한 죄를 말하게 하고, 또 악견(惡見)을 길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궤칙(軌則)을 어겼어도
가르침 들으면 곧 그칠 수 있다네
대사(大士)는 좋은 말[良馬]과 같아서
마땅히 번뇌의 진영[陣]을 벗어나리라.
이 게송은 계칙(誡勅)의 이익을 밝힌 것38)이다.
‘어긴다’ 함은 어기고 범한 것을 말하고, ‘궤칙(軌則)’이라 함은 이른바 학처(學處)를 말한다.
‘가르침을 들으면 곧 그칠 수 있다’라고 함은 칼ㆍ매 등의 물건에 말미암지 않으면서 막게 되는 것을 말한다.
‘대사(大士)’라고 함은 이른바 가까이에 있는[近圓] 사람을 말한다.‘좋은 말과 같다’ 고 한 것은 어질고 선하고 영리한 말을 일컫는다.
‘마땅히 번뇌의 진을 벗어난다.’고 함은, 번뇌는 부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군진(軍陣)에 비유한 것이다. 대사는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고자 원하여 깨끗한 계를 힘써 닦음으로 번뇌의 군대를 쳐부순다. ‘마땅히 벗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마땅히 아라한과(阿羅漢果) 등을 얻게 됨을 일컫는다.
어떤 이가 이 재갈이 없다면
역시 기쁘고 즐겁지 못할 것이며
저 번뇌의 진영에 빠져
미혹하여 생사(生死)에 윤회한다네.
이 게송은 경계함이 없으면 허물이 생기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이 재갈이 없으면’이라 함은, 모든 외도들은 마음이 삿된 경계로 달리고 탐욕에 빠지면 탐욕의 즐거움에 미혹되는 것을 말한다.
‘역시 기쁘고 즐겁지 못할 것이며’라고 함은, 열반의 성품이 없고 원만적정[圓寂]한 이치에 대해 애락(愛樂)하는 마음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저 번뇌의 진영에 빠진다.’고 함은, 이른바 삿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번뇌와 싸울 적에 좋은 고삐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항복하게 됨을 일러 군진에 빠진다고 한 것이다.
‘미혹하여 생사에 유전 한다’고 함은, 별해탈의 재갈이 없음을 말미암아 5취(趣) 가운데서 윤회하여 구제할 수 없으며, 업을 따라서 유전하여 바른 길을 잃기 때문이다.이 다음은 바로 아뢰는 의식[白事]을 지어 대중에게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승가의 흑월(黑月) 열나흘 날의 포살을 짓겠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가 이제 포살을 짓고 바라저목차계경을 설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라고 한 것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을 오롯이 하여 듣게 하고자 한 때문이고, 들은 일을 바르게 기억하여 지니게 하고자 한 때문이다. ‘승가’라 함은 여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네 사람, 다섯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 [그 이상의] 많은 사람인 경우를 가리킨다.이 가운데 ‘네 사람의 승가’는 이른바 수의(隨意)와 출죄(出罪)와 근원(近圓)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갈마는 모두 다 지을 수 있다.
‘다섯 사람의 승가’란, 이른바 중방근원(中方近圓)을 제외하고 출죄(出罪)의 나머지는 지을 수 있다.
‘열 사람의 승가’는 다만 출죄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은 다 지을 수 있으며, ‘스무 사람의 승가’와 ‘그 이상의 승가[多人僧伽]’는 모든 법을 다 지을 수 있다.‘열나흘 날’이라고 한 것은 이것은 포살하는 때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봄ㆍ여름ㆍ겨울의 세 때 중에 의거하는데, 넉 달 안에 각각 세 번째 보름이 다할 때와 일곱 번째의 보름이 다할 때를 취하여39) 이때에는 항상 열나흘 날에 포살을 하고 나머지는 다 보름날에 한다. 이에 마땅히 알라. 1년 가운데 여섯 번은 열나흘 날이고 열여덟 번은 보름이 된다.40)또 흑월과 백월에서 날마다 모름지기 이렇게 날을 헤아려서 대중에게 말해 알게 해야 한다. 혹은 상좌가 아뢰고 혹은 일을 분배하는 사람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아뢴다.
“여러 대덕이시여, 지금이 바로 흑월과 백월의 아무 날입니다. 절을 지은 시주와 절을 보호하는 천신과 아울러 네 가지 은혜의 유(類)를 위하여, 사람마다 각각 복을 베푸는 게송을 설해야 합니다.”이때에 고백함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첫째 포살의 때를 알리기 위한 때문이고, 둘째는 속인이 찾아옴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 또 날짜를 헤아리는 데는 별자리를 의지하기도 하거나 혹은 왕법에 의해서 날과 달의 크고 작은 것을 따르기도 한다.포쇄타(褒灑陀)라고 함은, ‘포쇄’는 기른다[長養]는 뜻이고, ‘타’는 지닌다는 뜻이다. 이른바 대중이 모여서 계를 설함에 의해 능히 선법을 길러 스스로의 마음에 지닐 수 있기 때문에 포쇄타라 이름한 것이다. 또 ‘포쇄’는 앞에서와 같은 뜻이고, ‘타’는 깨끗하게 없앤다는 뜻이니, 이른바 선법을 더욱 기르고 불선을 없애어 깨끗하게 한다는 뜻을 일컫기 때문이다.‘때가 이른다[時至]’라고 함은 이른바 포살을 할 때에 다른 방해나 어려움이 없음을 뜻한다.
‘허락한다[聽]’고 함은 이른바 당시 자리에 참석한 대중이 허락할 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승가가 마땅히 허락한다.’라고 함은 내가 대중을 위해서 계를 설하는 것을 승가가 허락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아룁니다.’라고 함은 그 일을 가리켜서 알리는 것을 일컫는다. 온 대중이 함께 설하지 않는 까닭은 모두가 능히 계를 외우고 지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비록 외우기는 하지만 다 익숙하지 못한 이도 있고 또는 법을 들은 이라도 알고 있는 계의 뜻이 다 같지 않다.방안에서 따로따로 하나하나 설하지 않는 까닭은, 이것이 곧 대중의 포살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함께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따로따로 설하면 문득 정법을 듣지 못하는 허물이 생길 수 있으니, 무릇 계를 설하는 날에 훌륭한[善] 필추로서 계를 외워내는 이가 있으면 수학인(授學人)41)으로 하여금 계를 설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머무는 곳에 다만 네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 함께 모일 것이요 따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또한 욕을 위임받을[欲取] 수도 없다.만일 시끄럽고 묘탑[制底]이 있는 곳, 혹은 속인이 있는 곳, 혹은 드러난 곳, 혹은 부정한 곳, 혹은 시끄러운 곳에서 장정(長淨)을 하면 악작죄를 얻는다. 만일 다른 곳이 아주 없으면 저 네 곳에서 해도 범함이 없다. 속인을 대해서 하면 안 되고, 또는 잠잘 때, 선정에 들었을 때, 밥을 빌 때, 쉴 때, 공양할 때에 장정을 하면 악작죄를 얻는다. 다른 때에 장애가 있어서 이때에 한 것은 허물이 아니다.만일 어떤 필추가 경계 안에서 관리에게 붙들려서 오지 못했는데 함께 모여서 장정을 하였다면, 따로 머문 죄[別住罪]를 얻으며, 장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붙들린 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관에 가서 구해 주어 석방시켜 줘야하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작죄를 얻는다.
미친 필추에게는 미친병을 다스리는 법을 베풀어 주어야 하니, 별주(別住)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무릇 필추들은 장정하는 날이 이르면 먼저 마땅히 자세히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내가 이 반 달 가운데 죄를 범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하니, 만일 범한 것을 기억한다면 법답게 말해야 하며, 마땅히 청정한 이의 쪽에 갈 것이니, 그 마땅한 바에 따라서 위의를 갖춘 다음 무릎 꿇고 합장하여 먼저 죄의 이름을 기억해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구수이시여, 유념하소서. 나 필추 아무개는 이와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이제 구수 앞에서 청정해지는 법을 따라 모두 드러내어 죄를 말하리니, 저는 덮어 감추지 않겠습니다. 드러내어 죄를 말함을 말미암아 안락을 얻고 드러내 죄를 말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두 번 세 번 이와 같이 말하라. 그러면 저들이 물어 말하되 “네 죄를 아는가?” 하면 대답해 말하되, “예, 압니다.”라고 하라. “장차 앞으로 모든 계를 잘 지키겠느냐?” 하면 대답해 말하기를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한다. 상대방 필추는 응당 “너는 그 죄를 말하라” 해야 하고, 대답하기를 “알겠습니다.”라고 한다.만일 죄에 대해서 의심이 있으면 마땅히 계율을 지키는 이[持律者]에게 가서 잘 결택해야 하며, 알고 난 후에 마땅히 드러내야 한다. 마땅히 필추를 마주 대하고 그 죄를 말해야 하며, 필추니 등을 마주 대하고 말하지 말라. 만일 필추니를 마주 대하고 말하면 월법죄를 얻는다. 저 동등한 분[同分]의 죄를 범한 사람을 마주 대해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이를테면 바라이죄와 바라이죄는 동등한 분이 되며, 나아가 돌색흘리다(突色訖里多)42)와 돌색흘리다는 동등한 분이 된다.‘동등한 분’이란 서로 같다는 뜻이니, 이른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한다. 만일 포살할 때에 범한 죄가 기억나면 그는 곧 마음에 생각하고 지키고 지니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제 승가의 열나흘 날은 장정을 하는 날입니다. 나 필추 아무개는 승가 가운데 있으면서 범한 죄를 기억하오니, 나 아무개는 범한 죄에 대해 스스로 마음에 받아 지니겠습니다.”만일 승가에서 장정을 마친 뒤에는 청정한 필추에 대해서 여법하게 말할 것이니, 의심되는 죄도 이에 주해서 알라. 저 계를 외우는 사람이 혹은 기억하거나 의심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이것과 유사하게 지을 것이다.
만일 승가가 다 범했으면 마땅히 훌륭한 어떤 필추를 권해서 다른 주처로 가서 청정한 사람을 마주 대하고 말하여 죄를 없앤 뒤에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게 하며, 계를 어긴 모든 사람은 이 필추에게 그 죄를 말해야 한다.만일 그렇게 할 사람이 없으면 단백(單白)을 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라.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승가는 열나흘 날 포살을 합니다. 일체의 승가가 다 범함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능히 다른 곳에 가서 청정한 필추에 대해 여법하게 죄를 말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상대해서 여법하게 말하여 그 죄를 없애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승가가 때가 되어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가 이제 포살을 짓고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 마땅히 죄를 없애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만일 다시 필추가 죄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마땅히 죄에 대해 의심이 있다고 말해야 하니, 앞에서 한 것에 준해서 하라. 만일 대중 가운데 한 필추가 청정하여 범함이 없으면 그때 청정한 필추는 마땅히 뜻이 같은 필추의 처소에 가서 좋은 마음으로 고해 말함으로써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여 여러 필추 앞에서 마땅히 그 범한 바를 말하게 해야 한다.바라건대, 저 대중이 두루 다 알고 듣고 나서는 또한 그 죄를 말하게 해야 한다. 반드시 같은 뜻이 없으면 스스로 잠자코 있어야 하니, 만일 다른 필추가 뜻에 좋지 않게 여기는 줄 알면서 억지로 묻고 기억하게 하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앞사람이 죄가 있는지 죄가 없는지 알지 못하고 짐작으로 장차 청정하리라 여기고 그 죄를 설하는 데로 나아간다면 설죄(說罪)가 성립하지 않는다.만일 별주상(別住想)을 의심하면서 장정을 한다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깨트리려는 마음으로 장정을 하면 이것은 승가를 깨트리는 방편[破僧方便]이니 솔토라죄(窣吐羅罪)43)를 범한 것이다. 마땅히 다시 화합해서 장정을 해야 한다.객으로 온 필추의 수가 적을 적에는 마땅히 은근히 대중의 화합을 구해서 다시 장정을 해야만 한다. 만일 긍정하지 않으면 작은 경계 터[小界場] 가운데로 가서 스스로 장정을 한다. 만일 객(客)이 많이 왔을 때는 본래 살던 필추는 함께 화합해서 다시 장정을 해야 한다.만일 안거를 마쳤다면 수의를 할 때를 바로 장정이라 하니, 다시 할 필요가 없다. 저 대필추는 필추니와 한 자리에서 장정을 할 수 없다. 만일 필추니가 와서 가르침을 청하면 마땅히 함께 말해야 하며 피해서는 안 되며, 교수하는 이는 매양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면 마땅히 문옥(門屋) 아래 앉아 필추니가 와서 청하기를 기다려 때에 따라 처분할 것이다.유주처(有住處)라 함은 그곳에서 갈마를 아는[解] 사람이 있는 것을 말하고, 무주처(無住處)라 함은 그 도량에 갈마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유주처ㆍ무주처라 함은 이른바 어느 부분은 알아서 갈마를 했는데, 어느 부분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다.만일 필추가 함께 머무는 곳에 있으면서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그 도량에 나아가서 장정을 할 것이요. 만일 그 도량에 다투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악작죄(惡作罪)를 얻는다.
비록 필추가 머물지 않는 곳이더라도 동행자가 있어 즐겨 머물 만하다고 한다면 가서 지내도 범함이 없다. 만일 어려운 일이 닥치려 하면 뜻에 따라서 떠나야 하나, 만일 장정하는 날이 이르렀다면 제자ㆍ문인이 임의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만일 그곳에서 계를 설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히 다른 곳으로 가서 설계하는 이에게 나아가 장정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가지 않으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설계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면 먼저 안거한 곳에 앉아 두 번째 장정이 지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계를 설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모두 속인 앞에서 계를 설해서는 안 된다. 무릇 안거를 할 때에는 마땅히 뜻이 같고 청정하고 범한 것이 없으면서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과 함께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필추로서 귀가 먹었거나 이해[識解]가 없는 이라도 마땅히 한 처소에서 장정을 하는 경우에는 정족수[足數]가 성립되어야만 한다.만일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러서도 오직 한 몸인 자는 장정을 하는 처소에서 새로 쇠똥[新瞿摩]을 바르고 청소하며 자리를 펴고 건추(楗椎)를 울려서 미리 하는 [의식의] 방편을 마친다. 그리고 스스로 다소의 경을 독송하고는 높은 곳에 가서 객 필추가 오는가를 본다. 만일 세 사람이 오면 함께 장정을 하고, 만일 오는 사람이 없으면 저 필추는 마땅히 제자리에 와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라.“오늘 열나흘 날은 승가의 장정을 하는 날입니다. 나 필추 아무개는 모든 장애되는 법에 대해 스스로 두루 청정함을 아룁니다. 제가 이제 우선 장정을 수지(守持)하는 것은 만일 이 다음에 화합대중을 만날 때 저는 실로 화합대중과 함께 장정을 하여 모든 계법을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두 번 세 번 이렇게 말하라. 만일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왔으면 마땅히 마주하여 장정을 하되, 한 사람이 할 때의 법에 준해서 하라. 만일 필추가 길을 가다가 마을[村坊]에 이르러 마을에 들어가거나 혹은 마을 밖에 머물거나 하였을 적에 이 장정하는 날이 되었으면 저들은 각각 거기서 장정을 해야 한다.마을에 머무는 사람은 마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한정하여 따로 머물지[別住] 못하고, 마을 밖에 있는 이들은 마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상인의 무리와 함께 갈 때는 저들이 혐오하지 않으면, 함께 머물고 함께 가면서 응당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혐오하면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수지해야 할 것이니, 여섯 가지 일이 있어 마음에 수지하면 모두 성립되어 범함이 없다.첫째는 3의(衣)를 지닐 것이요, 둘째는 3의를 버릴 것이요, 셋째는 여분의 옷[長衣]을 분별할 것이요. 넷째는 따로 청함[別請]을 버릴 것이요, 다섯째는 장정을 할 것이요, 여섯째는 수의(隨意)를 지어야 한다.마땅히 장정을 하여야 함에도 하지 않으면 월법죄를 얻고, 장정을 해서는 안 되는데 문득 해도 역시 월법죄이나, 길상장정(吉祥長淨)은 제외한다. 이것은 대중이 파(破)하였다가 다시 화합하여 대중이 기뻐서 장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필추가 먼저 승가에서 사치법(捨置法)을 받았다가 후에 풀리게 되었으면 응당 대중에게 청하여 별시(別時)의 장정을 빌어야 한다.바라저목차를 설하는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서분을 설하고 나머지는 항상 듣던 것이라고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서분과 바라시가(波羅市迦)를 설하여 마치고 나머지는 항상 듣는 것이라고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승가벌시사(僧伽伐尸沙)이며, 넷째는 2부정법(不定法)까지이며, 다섯째는 더 나아가 끝까지이다.누가 마땅히 대중을 위해서 바라저목차를 설해야 하는가? 이른바 대중의 상좌(上座)가 하되, 만일 할 수 없으면 제2좌나 제3좌로 하여금 하게하며, 혹은 차례대로 하게하며, 혹은 따로 다른 사람을 청할 수도 있다. 만일 상좌가 서분은 외울 수 있으나 나머지는 외울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이 바라시가 등을 외워야 한다. 만일 미친 사람이라도 능히 외우면 또한 설계가 이루어진다.“여러 대덕이여, 제가 이제 포쇄타를 지으리니 바라저목차계경을 설하겠습니다. 대덕들은 자세히 들으시고 그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만일 범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드러내고 범한 것이 없으면 잠자코 계십시오. 잠자코 계시므로 여러 대덕 승가가 청정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일 나머지 다른 것을 물을 때에도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 제가 이제 이 거룩한 필추 대중 가운데에서 세 번에 걸쳐 물을 것이니, 또한 마땅히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만일 비구가 범한 것이 있는 줄은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으면, ‘일부러 거짓말을 한 죄’를 얻게 됩니다. 여러 대덕 승가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 이것은 장애하는 법’이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필추가 청정을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내야 합니다. 드러내면 안락해지고 드러내지 않으면 안락해지지 못합니다.여러 대덕이시여, 제가 이미 계경의 서분을 말했으니, 이제 여러 대덕께 묻겠습니다. 이 가운데서 청정합니까?이렇게 세 번 말한다. 여러 대덕이시여, 이 가운데서 청정하여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다음은 권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들을 것을 밝힌 것이다. ‘여러 대덕’이라고 한 것은 별해탈경을 말씀하시려 할 때에 이르렀음을 말한 것이니, 만일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으면 진리의 물[法水]에 젖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어 잡아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권한 것이다. ‘자세히 들으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온통 마음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생각 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따로 세 가지 뜻을 밝힌 것이니, 듣는 사람에게 세 종류가 있음을 밝히고자 그것을 세 가지 그릇에 비유하였다.
이른바 우러러 온전히 청정해지면 담아두는 작용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임을 말한다. 만일 엎어서 더러운 것이 흐르면 물건을 담아둘 수 없는 것이니, 순서대로 알아야 한다.다음에는 대중을 청정히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일 범한 것이 있으면’이라고 말한 것 등은, 만일 먼저 범했으면서 지금 잠자코 말하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부르는 것이다. ‘만일 다른 때에 남이 물으면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라고 한 것도 이와 같다.
‘제가 이제 이 거룩한 필추 대중 가운데서’라고 한 것은 당시에 계를 듣는 대중을 찬미한 것이다. ‘기억해서 안다’고 말한 것은 설령 범한 것이 있다 하여도 기억하여 알지 못하면 망어죄가 없기 때문이다.‘거짓말[妄語]’이란 잠자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이르니, 몸의 모습을 드러내어 말[語業]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직 이것은 생각으로만 범한 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장애하는 법이다’라고 함은 두 때[二時] 가운데 능히 장애가 됨을 말한다. 곧 첫째는 현세에 모든 선법을 장애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래에 좋은 세계[善趣]에 태어남을 장애하는 것이다.‘청정을 구하고자 하면’에서 청정이란 곧 열반이다. 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꾸짖음이나 치벌(治罰)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죄를 말한다.‘드러내면 안락해지고’라 함은 여기에 다섯 가지 내용이 있으니, 하나는 부지런히 책려하여 모든 게으름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둘째는 죄가 없이 모든 허물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셋째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만식차(慢式叉)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넷째는 후회함이 없도록 모든 나쁜 짓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고요한 선정으로 산란심을 다스리기 때문이다.‘계경의 서분’이라 함에서 경이란 바로 그 뜻을 생략해서 푼 것이다. 계의 모양을 간략하게 말해 밝히고자 하여 그 조목을 설명한 것으로 자세히 해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序)’라고 함은 곧 실마리란 뜻이니, 이른바 계를 설할 때에 이로써 시작을 삼아 비로소 다른 설법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다만 세 번 묻는 까닭은 지나친 간략함과 지나친 상세함을 여의기 때문이다. 만일 지극히 자세히 한다면 긴 시간을 힘들여야 하므로 대중들로 하여금 싫증나게 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 물음에 모두 따로 죄를 얻는다. ‘지닌다’ 함은 바로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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