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75 불교(광홍명집 26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6.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6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6. 자제편(慈濟篇)

 

서문

자비로 제도하는 도리는 예로부터 모범으로 우러러 높이고, 운명을 두터이 하는 방책은 옛날부터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꿈틀거리는 생명체나 살아 있는 사람[噍類]’1)들까지 그 몸을 소중히 하고 목숨을 아껴서 더 살고자 애쓰며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일에서 바로 볼 수 있으니 ,어찌 다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품에는 어리석음과 총명함의 구별이 있고, 감정은 기호와 욕망을 머금고 있다. 총명한 자는 스스로에 대한 관용을 깨달음으로 삼아 중생[含靈]들을 괴롭히지 않는 반면, 어리석은 자는 이기심을 마음속에 지니고,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이 겪는 고초에 태연하여 탐욕만 방자하게 행하는지라, 빈번하게 남을 해치는 것으로 위세를 삼고, 이익과 욕망만을 공덕으로 삼는다. 이것을 보면 조()나라 군사 60여만 명을 파묻어 죽이면서도, 결국 진()나라 땅에서 칼로 자살하는 것2)을 알 만하다. 음식을 진수성찬으로 차리는 것을 일상사로 삼고, 저잣거리마다 형륙(刑戮)의 살육을 다하였다. 마침내 재앙이 닥치고서야 비로소 죄를 뉘우치고 헛되이 돌이키고자 하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석가에 있어 교화의 근본은 살생을 막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이 한 가지 도를 가지고 중생[群有]을 구제한다. 그러므로 자비야말로 불심(佛心)이고, 자비야말로 불실(佛室)이다.

자비에 따른 선근(善根)의 힘은 의리에 따라 드러나니, 마음에 자비의 덕을 가지면, 밝게 통하고 사색하여 색계(色界)3)를 초월할 수 있으니, 더욱이 다시 자비와 선정이 깊고 뛰어나면, 병독(兵毒)조차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자비의 공덕이 감화로 드러나면 뱀과 호랑이도 그에 따라 길들여지고, 말대(末代)의 문도들은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 이가 많은데, 인욕(忍辱)의 옷을 입고 복전(福田)4)의 면모를 보여줄 생각을 하지 못하면 탐욕스럽게 멋대로 먹으면서 술과 고기를 몸 앞에 벌여 놓는다.

세속과 달리 먹고 마시면서 성인과 똑같이 행하는 것은 이미 경전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니, 부처를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 한없이 오랜 세월[塵点]의 적멸법(寂滅法)5)을 비판하고 문제삼은 것은 바로 이 점에 달려 있다. 더욱이 다시 비단옷 입고

 

고기 먹다가 심공(沈公)6)의 지극한 훈계를 들었고, 술 담그고 도살하다가 양제(梁帝)의 지엄한 징계7)를 받았다. 그 격려하고 힘쓰게 하는 글을 보고, 그 지극히 은근한 것을 종합해 보면 마음이 떨리고 몸이 움츠려지게 하는 것이, 어찌 깊은 연못에 임하고 살얼음을 밟는 것8)에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상품(上品)의 선비가 이것을 들으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반면, 하품(下品)의 어리석은 이는 도리어 따지려 드는 것이 큰 바람이 낙엽 지는 숲에 몰아치듯 한다.

대개 살고 죽는 것이 옮아가고 바뀌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 같을진대, ()에 따라 보응을 받으며 끝없는 윤회로 떨어진다. 그 형체(形體)와 신명(神明)의 피로를 생각지 않고 입과 배의 즐거움만 소중하게 생각하다가 끝내 땅속에서 썩어 버린다면, 어디에 영혼[精靈]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지인(至人)9)은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을 언제나 눈물을 흘리며 애달프게 생각하고, 대사(大士)10)는 말씀을 세워 번뇌에 한 맺힌 혼백을 탄식한다.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고 고독한 제 그림자를 위로하여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으며, 하루아침에 고통이 밀어닥치면 그 책임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이미 아직 정취(正聚)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어떻게 3()11)를 물리치겠는가? 수행이 초지(初地)12)에도 이르지 못하면 끝내 오포(五怖)13)를 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비슷한 사례를 펼쳐 기록해 놓으니, 식견 있는 이는 다시 생각해 보라.

 

()나라 심휴문(沈休文)구경자비론(究竟慈悲論)

() 주우(周顒)여하윤서론지살(與何胤書論止殺)

양무제의 단살절종묘희생조(斷殺絶宗廟犧牲詔)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계살가훈(誡殺家訓)

양무제의 단주육문(斷酒肉文)

 

1) 구경자비론(究竟慈悲論) 심휴문(沈休文)

석가(釋迦)의 가르침은 자비에 근본한다. 자비의 요체는 삶을 온전히 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 자신에 관대한 마음을 이어 만물을 자기의 몸처럼 보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사물을 지각하는 무리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무리가 각각 마땅한 본성을 이루어

 

요절(夭折)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헤매고 미혹에 빠져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다.

하루아침에 바꾸려고 한다면 도리어 의심(疑心)으로 지혜를 열지 못할 것이니, 가르침을 베풀고 그 방편(方便)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다. 또 욕망의 기호는 살찌고 맛있는 고기에 더욱 심하게 물드니, 정욕이 기호에 이끌리면 갑자기 바꾸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삼정(三淨)14)을 세워서 권도(權道)를 펴는 것이다. 이리하여 열반경의 후설(後說)15)에서 교설을 세워 말하려 한 것은 측은함[惻隱]16)을 크게 밝혀 장래에 물려주고자 한 것이다.

육식(肉食)을 하고 비단 옷을 입는 것은 지방(方土)마다 차이가 없으며, 생명을 해쳐서 끊어 버리는 이치는 모두 같다. 고치를 삶고 나방을 죽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며, 푸줏간에 드리워 놓고 고기 점을 제기에 올려 어찌 그 업을 지나치게 무겁게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버리고 취하는 것을 달리하고, 전적마다 열고 누르는 것이 다르니, 흘러나온 것을 거슬러 근원을 찾더라도 참으로 통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생선을 조리하는 관리가 물고기를 바치면17) 그 고기를 먹으며 살생의 연()을 함께하고, 누에 치는 종이 실을 자아내면18) 비단옷을 입으며 누에를 죽인 몫을 함께 나눈다. 남의 손을 빌린다는 뜻이 다르지 않으며, 통하고 막히는 것을 상세히 가리지 못하니, 이치를 살피고 종지(宗旨)를 추구하여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외전(外典)에서는 “5()의 땅에 뽕나무를 심으니, 바로 예순 살이면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와 검은 돼지를 때를 잃지 않고 기르면 일흔 살 된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5919) 이전에는 그 의복을 삼베로 해야 하고, 69세 이전에는 먹거리를 채소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몸을 가볍고 따뜻하게 하는 일은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고,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또한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구별하여 말하더라도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의당 모시ㆍ삼베와 과일ㆍ채소를 기르는 등의 일이 이치가 같듯이, 추위를 물리치고 배를 채우는 일도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쪽으로 누에고치로 짜낸 비단에 통하려면 별도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를 시험삼아 말해 보면, 성도(聖道)는 높고 심원하지만 사려로 널리 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어짊[]은 모든 생명체 혜택을 입히지만 한쪽으로 소홀한 이치가 없다. 조잡함을 건지고 심한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가르침이 시급히 요청될 때, 비단옷과 육식도 그만둘 것이 아닌 한에서 통용되었다. 뒤늦게 위대한 경전[大典]20)을 말하고 널리

 

신묘한 가르침을 펴게 되면서, 육식을 금하는 이치가 언어로 기록되어 드러나니, 비단을 물리치는 의미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깨끗한 고기를 처음 금지하기 시작한 것21)은 바로 양잠(養蠶)을 바꾸는 것과 통한다.

대체로 교설을 펴는 의례에는 각각 순서가 있어서, 천제(闡提)의 두 가지 이치22)가 한 권의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두 가지 교설이 서로 어긋나더라도 각각 가르침에 따라 세워졌으니, 만약 예전의 것에 집착하여 나중 것에 미혹하면 천제는 선()으로 나아갈 도리가 없어진다. 정육을 금지하면서도 양잠을 통용시킨다면 실로 함생(含生)23)은 단박에 모면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하게 된다. 비판하는 이는 다시 천제가 도에 들어가는 것은 후설(後說)에서 들었지만, 양잠은 바꾸어서 금지해야 하는데 일찍이 개괄적인 이치가 없다고 여겼으니, 대성(大聖)의 넓은 이치가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대체로 상주론(常住論)24)의 오묘한 뜻은 번역되어 전해질 때 멀리서 가로막혔으나, 열반론[泥洹論]은 처음으로 전해지면서 모두들 이미 극진하다고 말하였다. 도중에 하서(河西)에 출현하면서 바야흐로 미진함을 알았으며, 관중(關中)에서 뒤늦게 펼쳐진 교설은 그 이치가 더욱 밝혀졌으나, 우러러 그 맥락을 살펴보면 이치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경의 최초 설법25)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사세왕(阿闍世王)과 대가섭(大迦葉)26)과 아난(阿難)27)의 삼부대중(三部大衆)만이 유독 찾아오지 않았다가, 그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왔으나 가섭만이 오지 못했다. 가섭은 부처님의 대제자로 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경전에는 왔다는 글이 없으니, 이치가 완전히 갖춰진 것은 아니다.

옛날에 열반경이 출현하지 않았을 때, 십수 년간 여부(廬阜)의 명승 가운데 이미 소식(蔬食)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 어찌 대승의 마음을 몰래 실천하여 저절로 부처의 이치에 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하루아침에 비단을 찢어 버리더라도 생애를 마칠 수 있고, 가축을 삶아 요리를 준비하면서 세월을 마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1년에 여덟 번이나 양잠을 하여 그 빠른 것에 놀라는가 하면, 온종일 고기를 먹지 않아 모든 사람이 놀란다. 위기에서 건져내고 괴로움을 구제하는 것은 시급한 것을 먼저 하는 것이니, 설법을 펴는 차례도 그 이치는 실로 이 점에 있다.

외성(外聖)도 또 한 사람이 밭을 갈지 않으면 반드시 굶주리는 자가 있는 만큼, 한 사람이 몸소 농사지어도 배불리 먹는 이가 있게 된다고 말하였다. 들판에 뽕나무를 기르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는 일은 비록 그만둘 것이 아니지만, 고기를 굽고 비단 옷을 만들게 되면 모두

 

스스로 행한 과보의 몫을 받게 된다.

열반경이 동쪽으로 전해진 이래로 세 가지 고기와 인연을 끊었으니, 지극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지키는 요점은 더욱 원대해졌다. 생명을 재촉하는 일이 이미 다하였으니, 채소를 오래도록 먹으면서도 싫증내지 않고, 가을의 짐승과 여름의 난생(卵生)도 뜬구름에 비유될 수 있고, 산모(山毛)28)와 해착(海錯:여러 가지 해산물)조차도 그것을 일삼는 것은 부서(腐鼠:썩어 문드러진 쥐로 하찮은 것)와 같다. 비단옷과 솜옷 입는 일에 일찍이 의심을 품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체로 생각이 문자에만 미쳐서 그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취지에 대해 헷갈린 것이다.

도리에 통달하여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이런 이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은 이치를 한 번 깨치면 미혹된 행동도 돌이킬 수 있으며, 누에와 고기의 원인[]을 끊어서 채소와 모시의 업을 굳게 한다. 그러면 살아 있는 것들이 거의 죽음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하윤론지살서(與何胤論止殺書:하윤에게 주어 살생을 금지하는 것을 논하는 글) () 주옹(周顒)

보통(普通)29) 연간에 하윤(何胤)30)이 입맛이 사치스러워 먹을 때는 반드시 한 상 가득[方丈]31) 차리곤 하였다. 나중에 약간이나마 그 심한 것을 늦추고자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이를 논의케 하였다.

학사(學士) 종완(鍾岏)32)뱀장어를 포 뜨면 꿈틀거리며 달아나고 게를 설탕에 절이면 요동치는 것이 심해진다. 어진 사람이 마음 쓰는 것은 가슴 깊숙이 측은함을 간직하는 것인데, 도리어 가슴 아프지도 즐겁지도 않으니, 어찌 일찍이 추요(蒭蕘)와 같지 않겠습니까? 향기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 마치 기와조각과 같은데 다시 무엇을 따지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33)이 하윤에게 편지를 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인(丈人)께서 원대한 자취에 지극하지 못하다고, 어찌 채식을 온전히 하지 않는 것에 미혹되겠습니까?

자르고 베어내어 도마에 올리고 그물과 덫을 놓는 일을 서책에 실은 것은 그 유래가 참으로 오래되는지라, 누가 감히 이를 간섭하여 논의할 수 있습니까? 성인이 음식과 반찬을 진설한 것을 보면 다시 그것들을 등급 지우고 구별하였습니다.

대체로 털 있는 짐승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생민(生民)과 더불어 함께 시작하였으나, 멋대로 하여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끝이 없었습니다. 선량한 선비라면 어찌 자신에 대해서처럼 관대한 것을 마음에 품지 않겠습니까? 이에 각각 강토(疆土)를 안정시켜 서로 능멸하는 것을 없앴습니다.

하물며 커다란 변화는 죽고 사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삶의 소중함은 목숨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목숨은 저것에 있어서도 아주 간절한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내게서 멀리할 만한 것이지만, 종신토록 아침마다 어포로써 영원히 나를 기르고자 하여 저렇게 잔혹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나열할 수 없으니, 나의 업보(業報)가 길이 이어질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조그마한 달걀이라도 그 연약한 것이 불쌍하고, 저 어린 새끼 사슴이 헐떡이며 발걸음을 돌이킬 때마다 애처롭기만 하니, 그 마시고 쪼며 날고 가라앉는 것을 보면 사람에게 애처로움만 일으키는데, 어떻게 달가운 마음으로 때려 죽이며, 다시 어떻게 이를 차마 씹어 삼킬 수 있겠습니까?

들판에서 떼를 지어 기르며 울타리를 쳐서 가둬 놓고는, 그 고기를 베어내고 털을 잘라내어 갈래에 따라 베이는 것이 마치 흙이 땅에 쏟아지듯이 하는데,34) 평상의 도리로 보면 모두가 슬프다고 할 만하니, ‘일에 어찌 한 가지만 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3()에 걸쳐 그 이치가 허황되다고 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도리에 그 과보가 분명한지라, 형체를 받아도 멈춤이 없이 한번 가고 한번 와서 생과 사를 늘 일삼게 됩니다. 잡스러운 보응이 집안과 같고 사람과 하늘이 마치 손님 같으니, 객으로 지나치는 날은 적고 집에 있는 날은 많습니다. 내가 믿음의 업을 닦을지라도 영원히 모면하기에는 부족한지라, 참담한 마음을 아파하며, 행하는 것 또한 스스로 염려됩니다.

장인(丈人)이 혈기(血氣)를 가진 것들에 대해 비록 그 몸이 병들지 않았는데도, 날아오르는 물오리와 자맥질하는 잉어에 있어서 취하여 도살장의 문간에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물[財貝]35)이 한번 도적의 손을 거치는 것은 그래도 청렴한 선비에 의해 버려질 수 있지만, 살아 있는 동물을 한번 긴 칼로 베는 것은 어찌 차마 자비심을 가지고 잔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추우(騶虞)36)가 비록 굶주리더라도 스스로 죽은 풀이 아니면 먹지 않았으니, 그 기풍을 듣고 나면 사람들이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윤이 이와 같은 편지를 받고 마침내 바로 고기 맛을 끊었으니, 백론(百論)37)십이문론(十二門論)38)의 주석을 달아 이를 유포시켜 세속이 본받게 하였다.

 

3) 서양무단살절종묘희생사(叙梁武斷殺絶宗廟犧牲事:양무제가 살생을 금지하고 종묘의 희생을 없애자는 일을 서술함)

양나라 고조(高祖) () 황제가 천하에 12년간 군림하면서 조칙을 내려 종묘의 희생을 철거하도록 하였고, 부처님의 계율을 닦으면서 채식을 하여 욕심을 끊게 하였다.

위로 정림사(定林寺) 사문 승우(僧祐)39) 스님과 용화읍(龍華邑) 정백사(正柏寺) 초도(超度) 스님

 

등이 계()를 올려 이같이 아뢰었다.

경기(京畿)는 이미 복스러운 땅이나, 물고기를 먹는 족속들이 여전히 그물을 놓고, 사냥하러 다니는 객들이 아직도 새매와 사냥개를 치달리게 합니다. 이는 황조(皇朝)의 두루 미치는 가르침을 우러러 칭송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청하건대 단양(丹陽)과 낭야(瑯琊)40)의 두 지역은 강이나 땅이거나 간에 포획하고 수렵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에 조칙을 상서(尙書)41)에게 내려 세밀히 논의하게 하였는데, 의랑(議郞)42) 강황(江貺)성인의 도는 백성으로 마음을 삼는 것이고, 어진 이의 교화는 몸소 행하여 만물에 혜택을 입히는 것입니다. 황제의 덕[皇德]이 산 것을 애호하여 위아래를 즐겁게 하시니,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이루어 자연히 세속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들을 눌러 근절하면, 어리석은 백성들을 두렵게 할 것입니다. 산에서 수렵하는 사람은 도리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무릅쓸 것이며, 물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은 바람과 파도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녕(江寧)에다 금률(禁律)을 내리면 바로 우저(牛渚)로 피해갈 것이고, 연릉(延陵)43)에다 허용하지 않으면 바로 양선(陽羨:宜興으로 지금의 江蘇에 있다.)으로 갈 것입니다. 살아가는 지역은 비록 다르더라도, 죽어가는 운수는 같습니다. 헛되이 막아 기르는 제도를 둔다고 하여도, 생을 온전히 하는 방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품의(禀議)하였다.

겸도령사(兼都令史) 왕술(王述), “경읍(京邑)은 융성하여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백성이 점차로 교화되면 반드시 만국에 미칠 것입니다. 지금 매서운 추위와 여름의 홍수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원망이 없으니, 하물며 세속을 버리고 참다운 세계로 들어가 기뻐할 수 있다면, 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품의하였다.

좌승(左承)44) 사기경(謝幾卿)45)살생하지 않는 예법(禮法)은 참으로 왕술(王述)이 논의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도 세속과 함께 바뀌는 것입니다. 행해진 일의 자취에 나아가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두 군만 이런 금법(禁法)을 시행하면 바로 외도(外道)들이 불살계(不殺戒)에도 모두 그 경계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의랑 강황의 품의와 같습니다.”

상서(尙書) () 단복야(亶僕射)와 신() 앙영형(昻令瑩) 이하도 강황의 품의에 동의하였다.

이에 황제가 주사(周舍)46)를 시켜 강황에게 예기에서도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고, 혈기 있는 것은 그 스스로 죽이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차마 그것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하며, 울음소리를 듣고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한다47)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저절로 어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지 멀리까지 미치게 되는 관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구(三驅)의 예법(禮法)48)에서 내 쪽을 향한 것은 놓아 주고 나를 등지는 것만 쏘는 것도 이러한 것이다라고 비판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왕술의 논의에 따라 마침내 근절시켰다.

또 태의(太醫)에게 조칙을 내려 살아 있는 동물들로 약을 조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공가(公家)의 직관(織官)들이 비단에 수를 놓는데 선인(仙人)과 새와 짐승의 형태를 모두 새기지 못하게 하였다.

또 평상시의 옷을 짓는 데 재단이 부실하더라도 어질게 용서하였다. 이에 천지와 종묘에 기도하고 고축(告祝)할 때에도 살생을 제거하는 이치로 함식(含識)에 은택을 내렸으며, 교묘(郊廟)에서도 모두 떡으로써 희생을 대신하게 하였다.

만국에 잔치를 여는 데도 채소를 쓰게 하고 생명을 가진 것들을 희생하는 일을 없애자, 그 산천의 여러 제사가 바로 막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사(有司)에게 칙령을 내려 근자에 신명(神明)이 실로 백성을 애호하니 그 무지함을 탓하지 않는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정성과 신실함이니 혈기로 높일 것이 아니다. 무릇 홍수와 한발의 환란이 있을 때는 그 허물이 모두 주상에게 돌아가게 하는데, 희생양을 동반하지 않고 단지 고하여 알릴 뿐이다. 하지만 모든 백성이 기도하며 아첨하고 욕되게 하는 것만 일삼기에 산천의 작은 기신(祇神)조차도 올바름을 이루기 어렵다. 맑거나 비오는 것이 때로 어긋나게 되면 저잣거리의 백성들조차 원망하니, 어리석은 범부는 습성에 고착되어 이치로써 바꾸기가 어렵다. 지금부터는 기원하여 청한 것(기우제)에 대한 보답(報答)은 속법(俗法)에서 시행하던 대로 할 수 있다. 몸으로 허물을 막는 것은 예전대로 따르도록 하라고 일렀다.

이에 전임의 어떤 신료(臣僚)신도(神道)는 망망하여 구하는 것이 한 갈래가 아닙니다. 혹 피비린내 나는 제사를 숭상하기도 하고, 또 나물의 지극함을 기리기도 합니다. 가르침을 이룩하되 시절에 따라야 그 선량함을 귀하게 할 수 있으니, 정성에 어긋남이 없다면 형통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재앙이란 이치적으로는 없으나 사대(四代:순임금과 하ㆍ은ㆍ주 삼대)의 풍화가 상쾌하게 여겼고, 신명이 실제로 있기에 3세의 도49)로써 넓혔습니다. 말마다 그 희생의 정갈함을 보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있음에 근거하여 마땅히 살생을 제거하는 어짊을 기려야 하니, 주나라 문왕의 봄제사 또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실로 명덕(明德)을 갖추고 있다면, 신명이 그것을 뱉어내겠습니까? 이로써 떡으로 희생을 삼는 것은 이치에 통달치 못한 것입니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을 견주어 보더라도 이 어찌 모순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품의했다.

 

4) 계살훈(誡殺訓) 안지추(顔之推)

유가의 군자도 푸줏간을 멀리하며 그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을 보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그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니, 고시(高柴)50)와 증석(曾晳)은 내교(內敎:불교)를 알지 못했는데도 모두 살생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어진 이로 자연스레 마음을 그같이 쓴 것이다. 함생의 무리가 그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없으니, 살생을 없애는 일을 반드시 힘써 행해야 한다. 살생을 좋아하는 이를 보게 되면 죽기 전에 그 보응을 받게 되니, 자손에게 재앙이 미친 것이 그 갈래가 아주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단지 끝에다 몇 가지 조항만을 예시해 둔다.

양나라 때 어떤 사람이 늘 계란의 흰자위를 타서 머리 감으며, 계란으로 인해 머리카락에 윤기가 흐르게 된다고 일렀는데, 매번 머리 감을 때마다 이30개의 계란을 깨뜨렸다. 죽을 때에 머리카락에서 수천 마리의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릉(江陵)의 유씨(劉氏)가 자라를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는데, 나중에 아이를 낳고 보니, 머리는 자라이고 목 아래는 사람이었다.

왕극(王克)은 영가(永嘉)의 군수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양을 잡아서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열었는데, 양이 묶은 끈이 풀어져 어떤 손님에게 뛰어들었다. 먼저 무릎 꿇고 두 번 절한 다음에 바로 그의 옷 속으로 숨어들었으나, 이 손님이 끝내 살려주라는 청을 하지 않았기에 잠깐 사이에 양을 잡아 산적을 만들었다. 먼저 양이 찾아갔던 손님이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바로 삼키자마자 온몸이 아파서 처절하게 울부짖었으니, 바야흐로 앞서의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서 바로 양의 울음소리를 내며 죽었다.

양나라 때에 어떤 사람이 현령(縣令)이 되었는데, 유경궁(劉敬躬)의 난리를 거치면서 현청이 불에 타자, 절에 의탁하여 머물고 있었다. 백성들이 양고기와 술을 가져와 예를 드리자, 현령이 양을 찰간(刹竿)에 매어 놓고 불상을 치우고 당상(堂上)에다 음식을 늘어 놓았다.

 

손님을 맞이하느라 미처 죽이지 못한 사이에 양이 풀려나 곧장 계단으로 달려와 절을 하였다. 그러나 현령이 크게 웃으면서 좌우에게 잡으라고 명하고는, 그 고기와 술을 함께 마시고 바로 추녀 끝에 드러누웠다. 깨어나자 바로 몸이 간지러운 것을 느꼈는데, 긁자마자 습진이 일어 바로 병이 되었고, 10여 년 동안 앓다가 죽었다.

양사달(揚思達)은 서양(西陽) 군수였는데, 후경(侯景)의 난을 만난 데다 날씨 또한 가물었다. 굶주린 백성을 수탈하며 밭에서 보리를 훔쳤다. 사달이 한 부곡(部曲)을 보내어 이를 지키게 하였는데, 훔치는 사람의 손을 끊어내는 등 대략 십여 명을 살육하였다. 그 부곡이 나중에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날 때부터 손이 없었다.

()나라에 어떤 봉조청(奉朝請)51)이 있었는데 집안이 몹시 부유한데도 손수 소를 잡지 않으면 고기가 맛이 없다고 하였다. 나이 서른 살에 병이 위독해졌는데, 갑자기 소가 달려와 그 몸을 들이받는 것이 마치 칼로 찌르듯 하였기에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강릉(江陵)의 고위(高偉)는 아비를 따라 제나라에 들어간 지 수년 동안 유주(幽州)의 정중(淀中)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나중에 병이 들자 매번 물고기 떼를 보았는데 이에 물어 뜯겨 죽었다.

 

5) 단주육문(斷酒肉文) 4수 양() 고조(高祖)

제자 소연(蕭衍)이 여러 대덕(大德) 승니(僧尼)와 여러 의학(義學) 승니와 여러 사찰의 삼관(三官)에게 삼가 아룁니다.

불법을 바로 하는 것은 흑의(黑衣)의 일[人事]이기 때문에 제자가 백의(白衣)로서 급급해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전의 가르침에 불법을 인왕(人王)에게 맡긴다고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제자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 승니(僧尼)께서는 흔쾌히 받아들이셔서 부디 의심이 자라나 마음속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출가인이 외도들과 다른 것은 바로 인()을 믿고 과()를 믿고 경전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심으로 밝히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경전에서도 “10()을 행하는 이는 악보(惡報)를 받고, 10()을 행하는 이는 선보(善報)를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야말로 경전이 가르치는 커다란 뜻입니다. 이로써

 

말씀드리자면, 출가인이 음주(飮酒)를 즐기며 어육(魚肉)을 먹으니, 이는 외도와 같이 행하되 저들만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외도와 같다고 하는가 하면, 외도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집착하여 인()도 없고 과()도 없고 보시도 없고 보응도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제자(佛弟子)가 술을 마시고 육식을 즐기면서 죄()의 인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고()의 과를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바로 인을 믿지 않고 과를 믿지 않는 것이니, 보시도 없고 과보도 없다는 이들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 같은 일이 외도와 그 소견을 같이 한다 하겠으나 외도들보다 못합니다. 외도들은 어떠한가 하면, 각각 그 스승을 받들며 스승이 옳다고 말하면 제자들도 옳다고 하며, 스승이 그르다고 말하면 제자들도 그르다고 말합니다. 열반경에서는 가섭이여, 내가 오늘 여러 제자들에게 계율을 제정하여 일체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의 출가인은 고기를 먹습니다.

계율에서도 술을 마시면 바야제(波夜提)의 죄52)를 범한다고 하였는데, 스스로 술을 마시면서도 의심을 내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일로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이 첫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는 비록 삿되고 편벽한 우계(牛戒)나 구계(狗戒)조차도 잘 지키는데,53) 한번 계율을 받고 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범하지 않습니다. 지금 출가인들이 계율을 받고 나서도 이를 가벼이 범하니, 이것이 두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가 비록 다섯 가지 열기[]로 그 몸을 지지며 연못에 뛰어들고 불을 밟으면서 온갖 고행을 다하더라도 모두들 중생의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지금 출가인들이 어육(魚肉)을 먹으니, 이는 세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들이 이학(異學)을 행하면서 비록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각각 스승의 법을 익히며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출가인들이 어육을 먹으며, 가까운 이에게는 스스로 그 빛을 무디게 하며, 사이가 뜸한 이에게는 숨기니, 이것이 네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가 각각 집착을 근본 삼더라도 그 같은 법조차 중히 여기며

 

우리 도()만큼 참다운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데, 여러 이도(異道)의 사람들에게도 거리끼는 바가 없습니다. 지금 출가인들이 혹 나이가 많거나 혹은 어린 나이에 만물의 종장이 되었으면서도, 어육을 먹으면서 어려움이 있으면 제자를 피하거나 혹 동학(同學)을 피하거나 혹 백의(白衣)를 피하거나 혹 사관(寺官)을 피하기도 하니, 마음속에 삿된 뜻만 품고서 기구하게 숨기기만 합니다. 그런 연후에 바야흐로 한 번 음식을 먹으니, 이와 같은 것이 다섯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다시 외도가 솔직한 마음으로 행을 따르며 자기 무리에서 온갖 악을 기를 수 있으나, 다른 부중(部衆)의 악을 기르지는 못합니다. 지금 출가인이 어육을 먹으면서 혹 백의(白衣)의 제자에게 목격되거나 알려지더라도 내심으로 수치스러움이 없으며, 바야흐로 삿된 말로 꾸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본(法本)을 원대하게 두는 것으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모두 끊어지지 않았다고 변명합니다. 돈 주고 고기를 사면서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거리낌조차도 없습니다. 백의가 어리석어 스님들의 말을 듣고 진실한 말씀이라 여기고 이를 믿어 스스로 불선(不善)을 행하며 여러 가지 악을 늘려 나가니, 이와 같은 것이 여섯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는 비록 비법(非法)을 법()이라 말하고, ()을 비법(非法)이라 말하더라도 각자 경서(經書)를 믿어 죽더라도 위배하지 않습니다. 지금 출가인이 어육을 먹으며, 혹 이 고기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므로 먹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돈을 내어 고기를 사면서도 거리낌이 없으니, 비록 이처럼 변명하더라도 그 일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열반경에서도 일체의 고기는 모두 끊어야 하니 저절로 죽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말하였습니다. 저절로 죽은 것도 끊어야 하는데, 하물며 저절로 죽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능가경에서도 이익 때문에 중생을 죽이거나 재물 때문에 여러 고기를 잡는 두 가지 업이 모두 그 죽음을 좋게 하지 못하며 규호지옥(叫呼地獄)에 떨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재물로써 고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는가? 땅에는 덫을 놓고 물에는 그물을 놓으니 이것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만약 도살하는 사람에게 고기를 사면 이것이 재물로써 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에게 재물로써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하더라도, 그 악률의(惡律儀)를 익혀 중생을 잡아 해치는 것도 당사자가 오로지 그 호구(戶口)를 감당하기 위함이더라도, 또한 다시 별도로 헤아리는 것이 있게 됩니다. 만약 별도로 헤아리는 것이 있다고 하면 고기 먹는 이에게 어찌 살생의 책임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살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는 분명하게 경문을 위배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이 일곱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다시 외도가 그 법을 같이하는 이와는 화합하고 그 법을 달리하는 이는 괴롭게 다스려서 그 행위를 금지시켜 따르지 않게 함이 없습니다. 지금 출가인은 혹 사장(師長)이 되거나 혹 사관(寺官)이거나 스스로 금주법(禁酒法)을 개방하고 고기를 먹으니 그 교계(敎戒)조차 베풀 수가 없습니다. 이를 단절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더라도 바로 풍자하여 스승도 이와 같이 하고 사관도 이렇게 한다고 대답하므로, 내심으로 낯뜨거운지라 잠자코 고개만 숙이며 얼굴이 붉어져 땀이 나서 다시 말하지 못합니다.

그 몸에 이미 허물이 있어서 만물을 굴복시키지 못하는데, 다시 무엇을 가다듬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머물게 되니, 이 때문에 절에 있는 이는 어긋나게 되고, 도를 받은 이는 방만하게 되니, 이와 같은 것이 여덟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가 받은 대로 남에게 베풀면서 자신의 법과 함께하는데, 오계(烏戒)를 수여 받은 사람은 오계(烏戒)를 지키며, 녹계(鹿戒)를 수여받은 이는 녹계(鹿戒)를 지킵니다. 오계를 수여 받은 사람은 끝내 계율을 엎어버리지 않으며, 녹계를 수여 받은 사람도 녹계를 수여하여 끝내 엎지 않고서 계율을 지킵니다.

지금 출가인들이 내가 정진할 수 있으며 내가 고행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한동안 그 모습을 숨기고 여러 백의를 속이니, 나와서는 술을 마셔서 온갖 악의 문()을 열며, 들어가서는 고기를 먹어 온갖 고통의 뿌리를 모읍니다. 이런 것이 아홉 번째의 외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외도가 전도(顚倒)되었더라도 대중의 일에는 이러한 것이 없이 합니다. 술이란 무엇인가 하면, 물과 곡식의 더러운 기운이니 그 바른 성품을 잃고 이로써 별도의 기운을 이루게 됩니다. 중생이 죄업의 인연으로 이 같은 악촉(惡觸)을 받게 되니,

 

이는 정진(正眞)의 도법(道法)이 아니고, 또한 감로(甘露)의 상미(上味)도 아닌데, 어떻게 출가한 승니(僧尼)가 기호(嗜好)의 집착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승니가 백의(白衣)에게 5계를 수여하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며 거짓말을 못하게 하면서도, 어떻게 거꾸로 자신은 술을 마시며 그 서약에 어긋납니까? 7중계(衆戒)8재계(齋戒)5()7()의 길고 짧은 율()의 어느 과목(科目) 가운데에서 이 같은 글이 나옵니까?

그 여타의 대중 스님들도 이러한 계율을 배우는 사람은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게으름의 문을 열어 온갖 악의 뿌리를 모으니, 만약 백의가 이같이 미친 약을 달게 여기면 출가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가책하여 이를 그치게 하고자, “아무개여, 그대는 나에게 5계를 받았으니 이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타일러야 합니다. 만약 계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단월이여, 술은 악의 뿌리이고, 술은 마군의 위의(威儀)이니, 단월이 지금부터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다행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출가인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니라부타지옥(尼羅浮陀地獄:八寒地獄의 두 번째 지옥)은 그 몸의 살점을 도려내더라도 이를 느끼지 못하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이겠습니까? 모두가 술을 마신 이들입니다. 출가한 승니가 어찌 경전의 가르침을 깊이 믿지 않고 스스로 정법을 저버리며 사도(邪道)를 행합니까? 온갖 악의 뿌리를 크게 키워서 지옥의 고통을 만들어 가니, 그 익혀가는 행을 이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속으로 부끄러움조차 없습니까?

마치 여래의 옷만 걸쳐 입고, 사람들에게 신심의 보시를 받고서 불탑과 사찰에 거처하며 존상(尊像)만 우러르고 있습니다. 만약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출가한 사람은 가정에 있는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합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이같이 재가인(在家人)은 비록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계율을 범하는 죄는 없으니, 이것이 재가인에게 미치지 못하는 첫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다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각각 구굴(丘窟)54)이 있어서 끝내 이것으로 존상을 우러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두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다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끝내 사찰에서 이를 토하거나 싸지 않으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세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비록 다시 술을 먹고 고기를 먹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으나, 출가인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사람들이 불법을 업신여기게 되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네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다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문간과 부뚜막마다 각각 그 귀신을 편안히 하는데, 출가인은 만약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더러운 냄새가 풍겨서 일체의 선신(善神)이 모두 떠나가고 일체의 마군(魔軍)이 모두 기뻐하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다섯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비록 다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스스로의 재산만을 손상시키지 남의 재산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출가인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스스로 선법(善法)을 깨뜨리며 다른 이의 복전(福田)을 부수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여섯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비록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모두가 자기 힘으로 장만한 것입니다. 출가인이 만약 술을 먹고 고기를 먹으면 모두가 다른 사람이 신심으로 보시한 것이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일곱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비록 다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이는 늘 하는 죄업인지라 다시 그 일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출가인은 만약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게 되면 온갖 외도(外道)의 마군(魔軍)이 각각 방편(方便)을 얻게 되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여덟 번째입니다.

재가인은 비록 다시 이와 같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세간의 업()을 잃지 않으니, 크게 취한다 하더라도 이로써 더 얻지를 못할 뿐입니다. 출가인이 만약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면 적거나 많건 간에 모두가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끊게 되니, 이것이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아홉 번째입니다.

외도에 미치지 못하고 재가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간략하게 거론하자면 각각 아홉 가지 일이 있으니, 그 허물을 논한다면 참으로 병폐가 많습니다. 모두가 실례로써 미루어 볼 수 있으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날의 대덕(大德) 승니와 오늘날의 의학(義學) 승니와 오늘날의 사관(寺官)이 마땅히 스스로 경계하여 그 대중을 엄숙히 하고 청정하게 대우하되, 만약 게으름을 부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같은 이는 양나라에서 일개 백성으로 바로 호적에 편입할 것입니다.

제자가 오늘날 힘을 다해 이를 다스렸으나, 여전히 불법에 따르지 않는지라, 여러 승관(僧官)께서 법에 따르고자 경사(京師)에 문의하셨는지라, 한 해 동안 대열반경을 강의하여 법륜(法輪)이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를 청강하여 감동 받은 이들이 무려 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오늘날 다시 법운(法雲) 법사께서 여러 승니에게 사상품(四相品)의 사중소분(四中少分)을 강의하셨으니, 여러 승니께서는 늘 열반경을 배워 합당하게 행하셔야 합니다.일찍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앞으로는 듣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미 이전에 들었다면 응당 위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다면 이제 마땅히 기억해 지녀야 할 것이다.

불경(佛經)에서 궁극적으로 일체의 고기를 끊되 저절로 죽은 것까지도 식용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저절로 죽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여러 승니께서 출가하시어 불제자라 이름하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경전에서 고기를 먹으면 대자비의 종자를 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대자비의 종자를 끊는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대체로 대자비란 일체 중생을 다 함께 안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일체 중생이 모두 원수가 되어 다 함께 안락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성문(聲聞)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벽지불(辟支佛)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보살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보살의 도를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부처님의 과보를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대열반(大涅槃)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육욕천(六欲天)에 태어남에 장해가 되는데, 하물며 어떻게 열반의 과보이겠습니까?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선법(禪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공법(空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계법(戒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정법(定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혜법(慧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신근(信根)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정진근(精進根)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염근(念根)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정근(定根)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혜근(慧根)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37도품(道品)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진제(眞諦)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12인연(因緣)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6바라밀(波羅蜜)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사홍서원(四弘誓願)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섭법(攝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무량심(無量心)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무애지(無礙智)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3삼매(三昧)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8해탈(解脫)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구차제정(九次第定)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6신통(神通)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수릉엄(首楞嚴)삼매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금강(金剛)삼매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5()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10()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4무소외(無所畏)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18불공법(不共法)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성취에 장애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고기를 먹으면 보리심(菩提心)에 장애가 되므로 보살법(菩薩法)이 없어지게 됩니다. 고기를 먹기 때문에 장애가 되어 초지(初地)에 오르지 못하고, 고기를 먹기 때문에 장애가 되어 2()에 오르지 못하며, 나아가 장애가 되어 10()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보살법이 없기 때문에 4무량심이 없게 되고, 4무량심이 없기 때문에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연으로

 

불자(佛子)가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고기를 먹게 되면 대자비의 종자를 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여러 출가인들이 비록 다시 행하지 못하더라도 대자대비는 결국은 보살의 행입니다. 무상보리를 성취하는 데 어찌하여 이렇게 냄새나고 비린 것을 참고서 성문과 벽지불을 닦지 못합니까? 올빼미와 까마귀가 쥐를 맛있다 하고, 지네가 작은 거미를 달다 하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집착할 만한 맛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리와 늑대도 모두 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사람이 가장 지혜로워 여러 중생 가운데 뛰어나면서도, 이것들과 가까이하며 냄새나고 비린 것을 함께 맛있게 여기면서 어찌 늘 살생하는 마음을 품으며 대자비의 종자를 끊을 수 있습니까? 무릇 고기를 먹는 것은 참으로 비루한 짓이니, 여러 대덕 스님들과 교학승들이 열반경을 강의하셨는데, 어찌 성실하고 정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게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나는 물고기만 먹고 실로 살코기는 먹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열어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물과 육지를 달리하지 않으니, 중생이 다 같이 이름하여 고기라 합니다. 여러 청강하는 이들이 어찌 진리를 살펴서 받들어 지켜 여래의 말씀에 따라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고기를 먹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것들은 모두 아득한 일이라 지금은 절실하고 가깝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 대덕 승니께서는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마귀의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종자(種子)가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공포의 원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이 바로 목숨을 끊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을 불태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을 삶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이 바로 자신을 불로 그슬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자신을 불에 굽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을 잘라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살갗을 벗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손을 끊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발을 자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배를 가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등을 쪼개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내장을 후비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골수를 분쇄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눈을 파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코를 베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고기를 먹는 것은 바로 빈궁해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하등하고 천박해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얼고 굶주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추하고 비루해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귀가 먹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눈이 머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말을 못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벙어리[]가 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절름발이[]가 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앉은뱅이[]가 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종기[]가 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 살이 곪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 살이 갈라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 살이 트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혹이 생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곱사등이[]가 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중풍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홍역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등창이 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부스럼이 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치질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염증이 생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곱사가 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문둥병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벼룩이 생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이가 생기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모기에 물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모기에 물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뱀에 물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뱀에 물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독충을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맹수를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병에 걸려 수척해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학질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가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심장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배가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가슴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등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손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발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뼈가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장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근육이 오그라드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 몸이 구토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기맥이 쇠해지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피를 토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구멍이 막히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구멍이 아픈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풍병(風病)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수병(水病)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4()가 조화롭지 못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오장이 조화롭지 못한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육부(六腑)가 조화롭지 못한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간질에 걸리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기가 미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이와 같은 사백네 가지 병에 이르는 일체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자신이 열나는 일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고뇌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남에게 핍박받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홍수를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화재를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태풍을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도둑맞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겁탈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도적을 만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채찍질 받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곤장 맞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태형(笞刑) 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문책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문초받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욕을 먹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어려움을 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두 손을 묶이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결박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유폐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구금당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생고(生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노고(老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병고(病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사고(死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원증회고(怨憎會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구부득고(求不得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오수음고(五受陰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행고(行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괴고(壞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고고(苦苦)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지옥을 생각하는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흑승지옥(黑繩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중합지옥(衆合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규환지옥(叫喚地獄)55)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열지옥(熱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대열지옥(大熱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아비지옥(阿鼻地獄)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팔한(八寒)과 팔열(八熱)의 지옥 내지는 84천 격자지옥(鬲字地獄)의 인이 되는 것, 내지는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 수의 격자지옥의 인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모든 아귀(餓鬼)로 떨어지고 모든 축생에 떨어지는 인이 됩니다.

아귀에게는 한량없는 고통이 있음을 아셔야 하고, 축생에게도 한량없는 고통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축생이 잠깐 태어났다 잠깐 죽으며 만물에 해를 입으니, 태어나는 때에 한량없는 공포가 있고, 죽는 때에도 한량없는 공포가 있는데, 이 모두가 살생한 업을 인연으로 하여 이와 같은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살생한 과보를 모두 나열해 보면 전전(展轉)하여도 끝이 없을 것이니, 대지나 초목이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비록 갈래가 많더라도 요약하여 말하자면, 모두가 한 가지 고()의 과보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어서 오늘날 온갖 고과(苦果)를 초래하게 된 것은 모두가 살생하는 업으로 중생에 해친 것에 연유합니다. 그 한 모퉁이를 대략이나마 거론하여 조금이나마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대덕 승니와 여러 교학 승니와 여러 사찰의 삼관께서는 마땅히 일대사(一大事)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만약 중생의 아비를 먹는다면 중생 또한 이에 보응하여 그 아비를 먹을 것이고, 만약 중생의 어미를 먹는다면 중생 또한 이에 보응하여 그 어미를 먹을 것입니다. 만약 중생의 새끼를 먹는다면 중생 또한 이에 보응하여 그 자식을 먹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수 맺어 그 과보로 번갈아 먹게 되니, 겁수를 지내도록 긴긴 밤이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경전에서 한 여인이 5백 세 동안 이리 새끼를 해쳤는데, 이리 새끼도 5백 세 동안 그 자식을 해쳤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여인이 5백 세 동안 귀신의 명근(命根:생명의 근본, 수명)을 끊었는데, 귀신 또한 5백 세 동안 그 명근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것이 모두 경전에서 말한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머지 번갈아 이루어지는 응보는 모두 사례를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대덕 승니와 여러 교학 승니 및 여러 사찰의 삼관께서는 또한 일대사를 마땅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금생에 이르기까지 6()56)를 거치면서 여러 과보를 갖추었으니, 일체 중생이 부모가 되는 연이 모든 곳에 편재합니다. 바로 생사를 거치면서 신명이 막혀서 서로 떨어지게 되자, 이 같은 여러 권속을 다시는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중생이 혹 부모였거나 혹 스승이었거나 혹 형제였거나 혹 자매였거나 혹 자손이었거나 혹 친구이기도 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혜안이 없어 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도리어 서로 잡아먹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먹는 때에 이 같은 물건에도 영명함이, 바로 원한을 품어 다시 원수를 맺게 됩니다. 과거에 골육이었던 사람이 도리어 원수가 되니 이러한 일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잠시 혀끝으로 한때의 보잘것없는 맛을 다투어 영원히 숙세(宿世)의 친척과 오래도록 원수가 되니, 참으로 가슴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백의는 속가에 있으면서 도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출가할 학인(學人)은 여래의 옷을 입고 보살행을 익히므로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 대덕 승니와 여러 교학[義學]57) 승니 및 여러 사찰의 삼관께서는 다시 한 가지 일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릇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일체 중생의 악지식(惡知識)58)이 되는 것이고 일체 중생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 이처럼 원수가 6()에 가득하니, 혹 수행을 하고자 하여도 모두 장애가 됩니다. 첫 번째는 이치 가운데에서의 장애이고, 두 번째는 일 가운데에서의 장애입니다.

어떠한 것이 이치 가운데에서의 장애인가 하면, 업의 인연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장애로서, 이 수행인이 지혜가 없이 어리석게 만들어서 요점을 낼 줄도 모르고 방편도 없는 것입니다. 설사 선지식을 만나더라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설사 믿고 받아들여도 익히며 행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이치 가운데에서의 장애입니다.

일 가운데에서의 장애란 것은, 여러 원수가 혹 악귀(惡鬼) 가운데 있거나 혹 맹수 가운데 있거나 혹 대력신(大力神) 가운데 있거나 혹 대력용(大力龍) 가운데 있거나 혹 악마 가운데 있거나 혹 하늘 가운데 있기도 하니, 이처럼 곳곳에서 찾아와 환난을 남기는지라, 설사 수행을 하여 선지식을 만나서 깊은 마음으로 믿고 따르며 수행하고자 하여도 곧바로 다시 어려움이 생겨 혹 사도(邪道)로 이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계율을 닦고 정을 닦고 혜를 닦는 그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하니, 여러 공덕을 닦는 것이 늘 청정하지 못하며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됩니다. 모두가 예전의 원한에서 여러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일 가운데에서의 장애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일을 마음속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단지 한 번 중생을 먹은 인연으로 일체의 불법과 멀어질 수 있으니, 여기서 갖가지 근심이 있게 됩니다. 탐독(貪毒)도 이와 같고 진독(瞋毒)도 이와 같고 치독(癡毒)도 이와 같아서, 3()이 그 허물과 근심거리를 모두 고르게 나누었습니다. 당연히 서로 깊이 깨닫고 살펴서 방편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 소연(蕭衍)이 다시 경건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 대덕 승니와 여러 교학 승니 및 여러 사찰의 삼관(三官)께서는, 북산(北山)의 장제(蔣帝)59)께서 살생을 없애게 된 일도 이처럼 살생하지 말 것을 탄원하여 주상의 교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살생하라고 탄원하였다면 교시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이 모두 이를 들어서 아는 바와 같이 제자도 이미 여러 묘사(廟祀) 및 백성들의 여러 제사마저도 단속합니다. 만약 보응받기를 기원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살아 있는 부류를 천향(薦饗:제사 때 물건을 바침)하지 못하고, 각각 성심을 다하여 채소만을 공양하는 데 그치게 하였습니다. 장제께서 지금도 보살도를 행하고 있는데, 여러 출가인들은 어떻게 도리어 중생을 먹으며 온갖 마군의 행위를 행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북산에서 장제를 위하여 제를 지내는데 이 때문에 모두 스님들에게 채식을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유령(幽靈)이 모두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채식을 하지 않거나 스님들마저 채식을 멀리한다면, 아마도 장제가 불법(佛法)을 싫어하고 그 제자마저 괴이하게 볼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법사(法師)께서 이러한 뜻을 볼 것을 청합니다. 제자 소연이 또한 대덕 승니와 여러 의학 승니 및 여러 일체의 사관에게 삼가 아룁니다.

제자 소연이 시방의 모든 부처 앞에서, 시방의 모든 존법(尊法) 앞에서, 시방의 모든 성승(聖僧) 앞에서 여러 승니와 더불어 함께 서약을 드립니다. 오늘날 대중 스님들이 절로 돌아간 이후로, 각자 단속하고 경계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만약 다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으면서 법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제자가 마땅히 왕법(王法)으로 다스려 문초할 것입니다. 여러 승니가 만약 여래의 옷을 입고도 여래의 행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되게 스님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도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제자의 나라 백성으로 다시 호적에 편입시킬 것입니다.

오늘 국왕의 권세는 다스려 문초하기에 충분하니, 혹 외사(外司)가 듣고 살펴서 알게 되거나 사가(寺家)에서 스스로 거론하게 되면, 그 법랍(法臘)

 

노소를 불문하고, 문도가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제자가 마땅히 사관에게 명하여 대중 스님들을 모아 건퇴(揵槌)를 쳐서 계율을 반납하여 환속시켜 속복을 입게 해야 합니다.

열반경에 의하면 환속을 관장하는 관리는 오직 가장 나이 많은 노승이나 가장 제자가 많은 이들, 이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다스려 문초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이 없는 일개 소비구(小比丘)는 다스리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이러한 대비구(大比丘)를 징계하여야 그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명승과 대덕을 살펴볼 때,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법에 따라 문초하여 다스리겠습니다.

여타의 소승(小僧)들은 일부러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오늘 집회는 대사인연(大事因緣)으로 일체 제불이 여기에 자리하실 뿐만 아니고, 일체의 존법이 여기에 자리하실 뿐만 아니며, 일체의 성승(聖僧)이 여기에 자리할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하늘 또한 허공에 가득할 것이고, 여러 신선이 또한 허공에 가득할 것이며,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四天王) 또한 여기에 계실 것이며, 금강밀적대변천신(金剛蜜迹大辯天神)60)ㆍ공덕천신(功德天神)ㆍ위다천신(違馱天神)ㆍ비뉴천신(毘紐天神)ㆍ마혜수라(摩醯首羅)ㆍ산지대장(散脂大將)ㆍ지신견뢰(地神堅牢)ㆍ가비라왕(迦毘羅王)ㆍ공작왕(孔雀王)ㆍ봉두왕(封頭王)ㆍ부니발타라가왕(富尼跋陀羅伽王)ㆍ아수라가왕(阿修羅伽王)ㆍ마니발타라가왕(摩尼跋陀羅伽王)ㆍ금비라왕(金毘羅王)ㆍ시방의 이십팔부(二十八部)ㆍ야차신왕(夜叉神王)과 일체의 지주신왕(持呪神王)과 육방의 대호도사안국(大護都使安國)은 이처럼 일체 대신통력을 가지고 대위덕력(大威德力)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일체의 선신이 허공에 가득하고, 오방(五方)의 용왕인 사갈용왕(娑竭龍王)ㆍ아뇩용왕(阿耨龍王)ㆍ난타용왕(難陀龍王)ㆍ발난타용왕(跋難陀龍王)ㆍ이나만용왕(伊那滿龍王) 같은 일체의 보살 용왕도 이곳에 가득 임하셨습니다. 천ㆍ

 

용ㆍ야차ㆍ건달바왕ㆍ아수라왕ㆍ가루라왕ㆍ긴나라왕ㆍ마후라가왕ㆍ인비인 등의 이 같은 일체의 대신족력(大神足力)이 있고 대위덕력이 있는 팔부신왕(八部神王)이 모두 여기에 임하셨습니다.

오늘 토지ㆍ산천(山川)ㆍ방묘(房廟)의 여러 신명(神明)도 허공에 한쪽으로 응하였으니, 이같이 유계(幽界)와 현계(顯界)가 모두 살펴보지 않음이 없습니다. 오직 허물 없는 사람이라야 남을 책할 수 있으며, 오직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라야 남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제자가 오늘 이 일을 소리 높여 외치니, 스님들이 반드시 불편한 기색을 가질 것입니다. 설사 심장을 갈라내고 땅에 던져서 스님들께 그것을 보여주더라도 몇 조각의 고기로 믿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것을 행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자 소연이 비록 속가에 있으면서 계율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오늘날 마땅히 앞장서서 스스로 맹세하여 그 본심을 밝히겠습니다.

제자 소연이 지금 이후로 도량에 이르러서도 만약 술을 마시고 게으름을 부리며 여러 가지 음욕을 내거나 속이거나 망령된 말을 하면서 중생의 음식을 먹거나 우유를 마시고 꿀이나 소()와 낙()61)을 마신다면 원컨대 일체의 대력귀신(大力鬼神)은 소연의 몸부터 고초로 다스리십시오. 그런 연후에 지옥의 염라왕(閻羅王)에게 맡겨서 온갖 고통을 받게 하며, 아울러 중생이 모두 성불하고 나서도 제자 소연은 여전히 아비지옥 가운데에 있게 하소서.

승니가 만약 술을 마시고 어육을 먹으면서도 허물을 참회하지 않으면, 일체의 대력귀신께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다스려 문초하시어 선량한 대중을 늘리고 부처의 도를 깨끗이 하사이다. 만약 유사(幽司)62)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있는 자는 제자 소연이 마땅히 법대로 다스려서 문초해 대중에서 쫓아내어 환속시켜 속가의 옷을 내주고 수시로 부역을 매기겠습니다. 원컨대 오늘날 이부대중(二部大衆)의 승니가 각자 원래의 사찰로 돌아가면 불법을 크게 바로 하고

 

시중(時衆)과 화합하며, 모두들 경법(經法)을 듣게 하여 말씀과 같이 수행하면서 다시는 대자비의 종지를 끊어 불자가 잇지 못함이 없게 하소서.

만약 법을 어기고 계율을 어기는 이는 모두 승제(僧制)에 의거하여 법에 따라 문초할 것이고, 만약 이를 용납하여 다스리지 못하는 이도 마땅히 방임죄를 적용할 것입니다. 또 승니의 사찰에서 사천왕과 가비라신을 섬기면서 사슴머리와 양고기 등을 제수(祭需)로 차려 놓는데, 이러한 일은 합당하지 못하니 조속하게 금단하겠습니다. 만약 이를 금지하지 못하면 사관에게 죄를 묻되 앞서의 과조(科詔)와 같이 하여 별도로 그 뜻을 선포하겠습니다.

제자 소연이 여러 대덕 승니와 여러 교학 승니 및 여러 사찰의 삼관에게 삼가 아룁니다. 이전에 이미 어육 같은 번뇌의 장애물을 거칠게 진설하여 고의 과보를 초래하였는데, 지금 다시 한번 두루 아뢰고자 합니다.

염부제의 수명은 120세라 말하지만, 세간에 그만한 나이의 사람이 있음을 듣기가 힘드니, 변하고 쇠퇴하여 잠시도 머물 곳이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일념 사이에 60찰나가 있다고 말하니, 생로병사가 무상하여 시드는데 어느 순간에 시들어 버리고, 여러 뿌리가 잠시 있는 듯하다가 어느 사이에 소멸해 버리면, 3()와 같은 고통이 홀연히 이릅니다. 지옥을 여의고자 하나 이러한 일이 몹시 어려우니, 비록 계율의 공덕이 청정하더라도 피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를 훼손하고 범하면서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시 재계하고 채식만 하면서 방편에 힘쓰지 않고 고의 과보를 면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금생(今生)에서 비록 온갖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지만 뒤에 과보를 낳는 업이 강력하여 일정한 방법 없이 드러나므로 3도와 같은 고통을 막고 가릴 수 없으니, 어찌 술을 마시며 중생의 살을 먹을 수 있습니까?

여러 승니께서는 반드시 부처님 말씀을 신봉하여 스스로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채식하기가 힘들다고 한다면, 이는 신심이 미약한 것입니다. 만약 신심을 가지고 스스로 힘쓴다면,

 

채식하기로 마음을 결정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채소와 어육도 모두가 같은 미혹인데, 마음이 편안하다면 바로 채소도 감로(甘露)의 뛰어난 맛이 될 것입니다. 마음이 만약 편안하지 못하다면, 바로 냄새나는 하품의 음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도 음식을 받는 때에는 마땅히 자식의 살점과 같다는 생각을 내라고 말씀하셨으니, 만약 모두 갖추어 미혹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은 법이 필요하겠습니까?

또 고원한 일을 놔두고 그저 가까운 것을 빌어 깨우쳐 보면, 지금 채식하는 이들은 피비린내를 싫어하며 채식을 하지 못하는 이는 채소를 싫어하는데, 그 일들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스스로 힘써 자력(自力)으로 불선(不善)의 미혹을 돌이킴으로써 선의 미혹이 되게 하고, 선의 미혹에 나아가 다시 방편을 행해야 합니다. 채소를 먹으며 자식의 살점이라고 생각하듯, 이러한 마음으로 하면 바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무릇 어육을 여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채소는 성품이 차가워서 사람을 허약하게 하고, 어육은 성품이 따뜻해서 사람을 보()한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모두가 잘못된 견해입니다. 지금 시험삼아 대충 이를 논하여 그 일이 옳지 못함을 논하겠습니다.

만약 채소를 오래 먹은 사람의 경우는 영위(榮衛)63)가 잘 유통됩니다. 대개 이러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환열(患熱)이 많으니, 영위가 잘 유통되면 먹고 마실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기력이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채소는 냉하여 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고행하는 사람이 모두 채소만 먹어 환열을 많이 가지고 있어 모두 열기를 걱정합니다. 그들은 모두 견고하며 신명이 맑아져서 어둡고 피로한 것이 적습니다.

물고기의 성질은 대부분 찬 것이 많아서 그 피비린내를 이어받으면 백 가지 병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어육을 먹는 이는 신명이 혼탁해지는 것도 이치상 당연하니, 사체(四體)의 움직임이 모두 무겁게 가라앉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게다가 후보(後報)를 초래하여 3도의 고액을 받으니, 이때 4()64)가 번갈아 이르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니, 이 어찌 미혹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각각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고기를 잘 먹는 사람은 바로 온기(溫氣)로써 보한다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로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채소를 먹으면 냉해진다고 여기면서 평소 이해하던 대로 돌아오니,

 

이렇게 하는 사람은 채소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채소와 어육은 물과 불과 같아서 채소를 먹으면 욕심을 끊어 힘을 얻게 되고, 어육을 먹으면 어육의 피비린내가 능히 채소의 힘을 감소시킵니다. 그러므로 미혹된 이들은 채소의 성품이 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평소대로 이해하는 여러 사람들은 나아가서는 채소의 힘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어육의 독소가 더해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차가운 것이 많은 경우에는 참아내는 것이 적어지게 되니, 이것은 여러 승니께서 알아야 할 일입니다. 무릇 어육을 먹는 것은 마군의 영역이니, 악마의 행위를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결정하지 못하여 환난이 많아지니, 안팍의 여러 마군들이 함께 장난치는데, 이로써 수행자는 어육과 술이 마군이 먹는 양념이라는 것은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어육을 먹고 술을 마시기 좋아하는 이는 선한 신이 멀리 떠나며 안으로는 바른 기운이 없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많은 경우 쇠퇴하고 괴롭습니다. 다시 한 종류의 사람은 비록 채식을 하더라도 이를 뽐내고 교만해져서 노여움을 많이 내며 탐욕스럽게 구하기를 좋아하는데, 이와 같은 사람도 마군의 경계에 떨어져 쇠퇴의 고뇌가 많게 됩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바깥의 행실은 무르익은 듯하지만 속마음은 추악하여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게 되면, 늘 질투하는 마음을 내고, 선하지 않은 행위는 언제나 그 모양을 숨기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도 마군의 경계에서 행하는 것이니, 비록 채소를 먹더라도 쇠퇴하는 고뇌가 많아집니다. 만약 굳건한 마음으로 결정하여 채식하는 것에 절도가 있으면, 이와 같은 사람은 선법의 힘에 도움을 받아 많은 경우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생각하여 깨우쳐야 하니,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서 결정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 대덕 승니 가운데 행업(行業)을 이미 성취하신 분은 오늘 이후로 선법(善法)으로 도와 개도(開導)하여 얻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지금부터 모두가 얻도록 하십시오. 만약 이미 수행이 익숙해졌다면 의지력을 견고하게 하기를 바라고, 아직 수행을 하지 않았다면 모두 개혁하기를 바랍니다. 오늘로 서로 함께 보리(菩提)의 종자를 심어 가겠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제자 소연이 이와 같이 아룁니다.

사관(寺官) 비구 368, 숙덕(宿德) 비구 25, 의학(義學) 비구 574, 도사(導師) 비구 39명이 있었으니, 위에 서명한 비구 스님이 도합 1,006명이었다. 사관 비구니 369, 의학 비구니 68, 도사 비구니 5명이 있었으니, 위에 서명한 비구니 스님이 442명이었다. 아울러 위에 서명한 비구와 비구니 도합 1,448명이 함께 5225()에 봉장문(鳳莊門)에서 일제히 선창하였다.

23일 새벽 광택사(光宅寺)의 법운(法雲) 스님이 화림전(華林殿) 앞에서 동쪽의 고좌에 올라 법사가 되었다. 와관사(瓦官寺)의 혜명(慧明) 스님이 서쪽의 고좌에 올라 도강(都講)65)

이 되었다. 대열반경』 「사상품의 사분의 일을 독송하여 고기를 먹는 사람은 대자비의 종자를 끊는다는 이치를 개진하였다. 법운 스님이 이를 해석하였는데, 수레를 직접 몰아서 고좌의 북쪽에다 자리를 깔았고, 승니와 이부대중이 순서대로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기사사(耆闍寺)의 도징(道澄) 스님이 다시 서쪽의 고좌에 올라가, 이렇게 고기를 금지하는 경문을 낭독하고 그 다음에 전하는 말을 낭독하였다. 낭독을 마치고 예배하며 참회하면서 공양을 널리 베푼 다음 떠나갔다.

23일 법회 뒤에 여러 승니를 회합시켰는데, 어떤 승려는 오히려 율장(律藏)에는 고기를 끊으라는 일과 육식을 참회하라는 법도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달 29일 다시 칙령을 내려 의학승(義學僧) 141명과

 

의학니(義學尼) 57명을 화림원의 화광전으로 초청하였다. 장엄사의 법초(法超) 스님과 봉성사의 승변(僧辯) 스님과 광택사의 보도(寶度) 스님 등 세 분의 율사가 고좌(高座)에 오르자, 황제가 땅에다 자리를 깔고 착석하였는데, 다른 승니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황제가 제지(制旨)를 내려 법초 스님 등의 세 분의 율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물이 끓는 것을 그치게 하는 데는 불타는 장작을 없애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허물을 그치게 하는 데는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제자가 말하지 않는 것은 매우 쉽지만,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가려면, 여러 승니와 함께 법의 가르침을 넓혀야 합니다. 아울러 일에 나아가면 침묵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대중 앞에서 집회를 열어 율장 가운데의 뜻을 구하고자 합니다. 승도로부터 듣자오니, 율장에는 고기를 끊으라는 법이 없으며, 또 육식을 참회하라는 법도 없다고 하십니다. 여러 율사들께서 예전부터 이와 같이 도로 계발하고 인도[開道]하셨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의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법초 스님이 답변하였다.

율장의 가르침은 한 가지이나, 사람마다 글 속의 뜻을 취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법초의 해석으로는 계율에서 세 가지의 정육(淨肉)을 먹도록 허락하였지만, 그 뜻은 실로 영원히 끊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먼저 열 가지 부정육(不淨肉)을 끊을 것을 분명히 하였고, 그 다음에는 세 가지 정육을 먹도록 허락하셨으나, 아홉 가지 정육을 먹으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점차로 규제해 가는 것은 그 뜻이 영원히 끊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법초가 늘 매일같이 강의하는데, 언제나 이와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제지를 내려 다시 승변 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다시 어떻게 개도하여야 합니까?”

승변 스님이 대답하였다.

제가 예전부터 큰 뜻을 이해한 것이 법초 스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 가르침에는 깊고 얕음이 있으나, 단계를 거쳐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만약 세 가지 정육을 먹는 것을 논하자면, 이치로는 마땅히 허물이 됩니다. 단지 가르침이 아직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제지를 내려 보도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만약 개도한다면, 다시 어떻게 개도하시겠습니까?”

보도 스님이 대답하였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단지 점교(漸敎)66)일 뿐입니다. 이에 계율의 글에서 세 가지 정육을 먹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 열반경처럼 바른 이치[正理]를 궁극에까지 밝혔다면, 육식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근기가 뛰어난 사람[利根器]인 경우에는 세 가지 정육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바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만약 근기가 낮은 사람은 나중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제지를 내려 법초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줄곧 경문 바깥의 이치로만 답변하셨는데, 만약 율장의 글에 의지한다면,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법초 스님이 대답하였다.

평소에 그를 풀이하는 것은 단지 이전에 설명했던 것입니다.”

제지를 내려 승변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생각건대 다시 법초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승변 스님이 대답하였다.

법초 스님의 풀이에 동의합니다.”

제지를 내려 법초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이전부터 이렇게 율을 해석하였는데, 여러 율사들도 모두 고기 먹는다는 대목을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으로 풀이하십니까?”

법초 스님이 대답하였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풀이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법초는 예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제지를 내려 승변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다시 고기를 먹지 않습니까?”

승변 스님이 대답하였다.

예전부터 늘 고기를 먹지 않았으나, 중년에 병을 앓는 때에는 잠시 개방하였습니다.”

제지를 내려, 보도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다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정림사에 머물다가 나중에 광택사로 옮겼는데, 두 처소에 고기를 들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다른 처소에서 병이 있는 경우라면, 개방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계율을 강의하실 때에도 고기를 잡수셨습니까?

강의할 때에는 반드시 대중이 있었으니, 대중 앞에서는 감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하지 못하셨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잡수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까? 잡숫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까?

먹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지를 내려, 다시 승변 법사에게 이같이 질문하였다.

스님께서 날마다 계율을 강의하시는 때에도, 대중에게 육식을 허용하십니까, 허용하시지 않습니까? 만약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고기 먹는 사람은 반드시 쫓아내어야 합니다. 만약 허락하셨다면, 말씀대로 따르게 하셨어야 합니다.

만약 가르침으로 한정하여 풀이하자면, 전연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의도를 논하자면, 언제나 열어서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다시 여쭙겠는데, 가르침에 한정하는 때에는 허용이 됩니까, 허용이 되지 않습니까?

가르침에 한정하는 때에는, 이를 막지 못합니다.

막지 못하는 것은 허용하는 것입니까,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이 이치에 나아가는 것을 인도하여 세 가지의 정육을 먹는 것만 허락하였습니다.

살생을 보고도 보지 못할 수가 있으며, 살생을 듣고도 듣지 못할 수가 있으며, 의심이 나고도 이처럼 모면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인연의 고리를 보면 의심하지 않고 또 인연의 고리를 들으면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연히 얻을 때만 의심하게 됩니다.

돈으로 어육을 사는 것은 의심입니까, 의심이 아닙니까?

만약 이치 가운데의 이치로는 당연히 의심에 해당합니다.

이치 가운데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까?

만약 이치 가운데서 논하자면, 대중 스님들은 어육을 사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일 가운데 것은 의심에 해당하지 않는가 물으셨는데, 대답하자면 가르침으로 한정하면 의심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살생합니까?

구매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생합니다. 단지 사는 사람은 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고기를 산다면 이 같은 사람이 이미 혼란스럽지 않은데, 어찌하여 사는 사람을 위하여 죽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까?

그때에는 죽은 고기라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저절로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이름합니까? 죽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이름합니까?

이 같은 뜻은 이치 가운데에서의 말일 뿐입니다. 가르침을 한정하여 변론할 때만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사람들의 교사이시고, 사람들의 밝은 인도자이시고, 사람들의 법성(法城)67)이신데, 어찌하여 단지 이럴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단지 생각을 내는 것에 대해 질문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살 때에 이렇게 생각하게 합니까?

저절로 죽은 것을 산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만약 저절로 죽은 것이라면 사찰 곳곳에 있어야 하고 또한 저절로 죽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어째서 헛되이 도살장에 가서

 

이를 사십니까?

이치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의혹이 생깁니다.

만약 이치 가운데에서 참으로 의혹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고기를 먹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승변 스님이 이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지를 내려 다시 물었다.

이 고기는 고기 맛을 내기 위한 것입니까? 채소의 맛을 더하기 위한 것입니까?”

승변 스님이 대답하였다.

고기 맛을 내려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행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것입니까?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비심이 아닙니다.

자비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생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이치적으로는 늘 그럴 수가 없으나, 일에 제약되어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장의 가르침은 사람을 출리(出離)시키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을 출리케 합니다.

고기를 먹으면서도 출리할 수 있습니까?

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고기를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먼저 행실이 얕은 사람에게 이같이 말하여 깊이 끌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족계(具足戒)68)를 받은 이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구족계를 받은 이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미 구족계를 받은 이에게 말씀하셨다면, 어린이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 그들을 깊이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처음에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지극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처음 가르치실 때, 구족계를 받은 이에게 가르치셨습니까?

승변의 이해는 바로 이와 같을 뿐입니다.

제지를 내려, 다시 승변 스님에게 질문하였다.

율장의 가르침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승변 스님이 대답하였다.

성불하신 지 8년 이후부터 열반하실 때까지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열반경에서 고기를 끊게 하였으면, 능가경(楞伽經)에서도 고기를 끊게 하며, 앙굴마라경(央掘摩羅經)에서도 고기를 끊게 하며, 대운경(大雲經)박상경(縛象經)에도 육식을 단절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열반경에 이르기까지 어찌 고기를 끊는 일이 없는가?’라고 말하였습니까?

계율은 처음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계율은 처음의 가르침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이어진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미 열반에 다다르셨다면,

 

당연히 고기를 끊으라고 말씀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만약 변지(邊地)에서 가르침을 제정하셨다면, 이는 처음의 가르침을 이어 다섯 단계의 시기[五時]69)에 형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승변의 예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법사께서는 대율사로서 대중을 개도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대중이 법사의 판단을 구하려 하니, 이와 같다고만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단지 이것은 우바리 존자의 계율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니원(泥洹:열반)에 드실 때, 우바리 존자께서 가까이 앉아 계셨는데, 어찌하여 계율로 육식을 끊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이전의 비근한 가르침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까운 가르침에 이어진다고 말씀하시더라도, 가까운 가르침 또한 고기를 먹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반하시기 전에 가섭존자께서 이미 수행을 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만약 이와 다르다면, 이것은 우바리(優波離)70)의 율이 아니라, 이부(異部)의 계율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을 써서 강설하여 여러 스님들을 교화할 수 있습니까?

승변 스님이 다시 대답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보도 법사에게 질문하였다.

덕이 같고 행이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같은 말을 어떻게 풀이해야 합니까?”

보도 스님이 대답하였다.

이처럼 율 가운데 일은 우바리에게서 나온 것이고, 경전의 일은 모두 아난 존자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이렇다면, 율 가운데 일은 바로 모두 경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경전 가운데 일에 율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율 가운데 일에 경전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하신 때에는 약칙을 제정하셨으니, 바로 이를 모아 계율을 만들었는데, 어느 곳에서 다시 율을 끌어대게 됩니까?

만약 경전이 모두 율을 끌어댄다면, 이는 경문을 말씀하신 것이 계율의 이후라야 될 것입니다.

단지 경전 가운데에서도 계율을 밝힌 처소가 있음을 말한 것으로, 그래서 나는 그들이 서로 상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서로 관련된다고 하면 삼장(三藏)71)의 이치가 어찌 일찍이 서로 관련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수다라(修多羅)72) 가운데에도 비니(毘尼)73)와 비담(毘曇)이 있으며, 비니 가운데에도 수다라와

 

비담이 있습니다. 비담 가운데에도 수다라와 비니가 있으니, 이와 같은 이치가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단지 법사께서 지금 강의하시는 율이 우바리 존자의 율의(律義)라면, 경전에 어긋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지금 강의하는 것은 우바리 존자의 계율이나, 경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바리 존자의 계율이 경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기를 끊는 이치도 열반경과 달라서는 안 됩니다.

】『열반경에서 고기를 끊는 계율을 드러내는 문장이 비록 분명하지 않으나, 우바리의 참뜻은 늘 고기를 먹도록 개방한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율장은 이미 가르침을 구족하는 것인데, 우바리 존자가 고기 먹는 것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계율에 어찌하여 이에 해당되는 경문이 없을 수 있습니까? 법사님의 이와 같은 풀이는 진퇴(進退)가 있습니다. 단지 사찰 내의 사미(沙彌)74)나 식차마니(式叉摩尼)에게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이것을 가지고 제자에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보도의 견해는 바로 스스로 이것을 다했던 것입니다.

제지를 내려 다시 질문하였다.

하좌의 여러 율사께서는 다시 어떠한 풀이가 있으십니까?”

용광사(龍光寺)의 도은(道恩) 스님이 대답하였다.

율문에서는 끊지 않았으나 열반경에서는 끊었습니다.”

법사께서 강의하시는 것은 누구의 율입니까?

이것은 부처님의 율입니다.

인용하는 것이 아주 넓으니, 단지 이와 같은 계율이 우바리 존자의 율인지 알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의 계율을 우러러 서술하였습니다.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모두 모으지 않았습니까?

앞서의 사시(四時)의 것은 모았으나 열반시(涅槃時)의 것은 모으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섭 존자께서 어떻게 아난에게 부처님께서 어디에서 설법하셨는가?”라고 물으면서 열반시에 이르기까지 수다라장(修多羅藏)을 모았습니까?

우바리 존자에게도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서 설법하셨는가?”라고 물으면서 바로 열반시에 이르기까지 비니장(毘尼藏)을 모았습니까? 어떻게 앞서의 사시(四時)의 것은 모으고 열반시만 모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까?

열반시에는 계율을 제정하지 않았습니다.

】『열반경에서는 고기를 먹는 일은

 

대자대비의 종자를 끊는 것이니, 내가 오늘 여러 제자들에게 제계(制戒)하노니, 일체의 고기를 다시는 먹어서는 안 되느니라. 일체를 모두 끊는다는 것은 저절로 죽은 것에까지 미친다.” 이와 같은 판단은 계율입니까, 계율이 아닙니까?

도은(道恩) 스님이 다시 대답하지 못하였다.

제지를 내려, 다시 이같이 물었다.

여러 율사가 손수 계율을 강의하셨으며, 여러 대법사가 대열반경을 모두 강의하였는데, “()를 여는 때가 있다는 대목을 어떻게 말합니까?

또 여기서 ()’란 무슨 뜻입니까? 만약 열지 않는 것이 소()라면, 연다면 소가 아닙니다. 소를 만약 소식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계율이 이미 청정하더라도, 청정한 것을 청정하지 못하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 강사와 율사들이 실로 이와 같은 가르침에 어긋나는데, 외서(外書)에서는 스스로 낮은 담을 뛰어넘어 서법(書法)을 훔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선무사(宣武寺)의 법총(法寵) 스님이 대답하였다.

더러운 문을 닫는 것을 ()’라고 부르고, 더러운 문을 여는 것을 불소(不素)’라 부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대중 스님들이 어떻게 더러운 문을 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이것은 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의 정이 깊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참회란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간절하게 뉘우쳐 마음을 지극히 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만약 참회할 수 있다면 대장부라 하겠습니다.

여러 학인들이 때 맞춰 참회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제자가 여러 법사들을 수천 명이나 오시도록 청하였고, 도사(導師)가 이끌어서 참회케 하였으니, 이때 여러 법사들께서 참회하셨습니까?

어찌 참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참회를 마치고 절을 벗어나면 다시 고기를 먹습니까?

여전히 먹지 않습니다. 단 그 가운데에는 무명(無明)이 많은 이가 있으니, 혹 다시 먹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다시 먹기도 합니다.

절을 벗어나 다시 먹으면, 어떻게 처음 지은 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가립니까?

모두 같은 부류로 처리합니다.

어찌 같은 부류라고 말합니까? 처음에 그대로 먹다가 나중에 여러 부처님 앞에 서약하고서 다시 먹는 것이 어찌 같은 부류라고 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은 뉘우침이 없고,

 

나중 사람은 뉘우침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첫 번째 사람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렇다면 단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앞사람을 때리면서 내가 그대에게 미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때렸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미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큰 사견을 내는 사람은 뉘우침이 없으나, 이미 뉘우침을 알았기 때문에, 이로써 뉘우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인 줄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먹게 되면, 이는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앞서의 때에 알지 못했다가 혹 허물을 저지르고서야 부끄러움을 일으키는 것을 부끄러움이라 말합니다. 어찌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는 죄가 모르면서 범하는 것보다 크지 않겠습니까?

또 부끄러움이 있어 다시 범하지 못하는 것으로, 만약 그대로 범하면 다시 처음의 마음을 깨뜨리게 됩니다. 이것을 논의한다면, 죄가 더욱 큽니다.

경전에 이에 해당하는 문구가 있는데, 기바(耆婆)75)그대가 부끄러워함이 있으니, 이로써 죄가 소멸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이란 바로 청백법(淸白法)입니다.

법사께서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셨으나 그 이치를 밝히시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만약 죄를 지은 후에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면, 이는 백법(白法)76)입니다. 그러나 처음 부끄러움이 일어나고서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은 백법이라 말하지 않겠지요?

경전에서는 부끄러움으로 상복(上服)77)을 삼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렇다면 바로 상복의 이치가 아닌 점이 있습니다.

이치가 또한 이렇다면, 만약 바로 죄를 지으면서 비록 부끄럽다고 일러도 끝내 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짓고 난 후에 부끄러움을 낼 수 있어야만, 바로 상복이 된다고 봅니다.

법총 스님이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법총 스님의 대답이 끝나자, 세 분의 율사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다시 시흥사(始興寺)에 칙령을 내려 경유(景猷) 스님이 고좌에 올라가 능가경앙굴마라경에서 밝힌 육식을 금하고 있는 해당 경문을 낭독하게 하였으니, 지금 아래에 수록해 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사상품(四相品)78) 상품(上品) 7

 

본 품()은 금월 23일에 열린 법회에서 이미 낭독하였다. 법운(法雲) 법사가 동월 29일에 다시 경문을 해설하기에, 다시 되풀이하여 낭독하지 않았다.

이때 가섭(迦葉)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世尊)이시여, 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고기를 베풀지 말아야 할지니, 왜냐하면 제가 보건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에게는 큰 공덕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을 칭찬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착하구나. 네가 지금 내 뜻을 잘 이해하였으니, 법을 보살피는 보살은 마땅히 이러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오늘부터 성문(聲聞) 제자가 고기를 먹는 일을 허락하지 않나니, 만약 단월이 신심으로 보시하는 것을 받는 때에도, 자식의 살점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보아야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고기 먹는 일을 금하시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고기 먹는 이는 자비의 종자를 끊게 되느니라.”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예전에 어떠한 이유로 비구들이 세 가지 정육(淨肉)을 먹는 일을 들어주셨습니까?”

가섭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정육은 일에 따라 점차로 제정한 것이니라.”

이에 대해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연고로 열 가지 부정육(不淨肉)과 아홉 가지 청정육(淸淨肉)조차 허락하시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교시하였다.

이 또한 일에 따라 점차로 제정한 것이니, 고기를 금지하려는 뜻을 드러내려는 것임을 숙지하거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여래께서 어육(魚肉)을 좋은 음식이라 칭찬하셨던 것은, 어떠한 연고였습니까?”

선남자여, 나는 어육의 부류를 좋은 음식이라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사탕수수ㆍ찹쌀ㆍ석밀(石蜜:당분을 응고시켜 만든 엿덩이)과 모든 곡류 및 흑설밀(黑石蜜)ㆍ유()ㆍ낙()ㆍ소유(酥油)79)를 좋은 음식이라 말하였다. 비록 갖가지 옷을 장만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장만할 수 있는 것은 괴색(壞色)80)의 옷뿐인데, 어찌하여 어육의 맛에 탐욕스럽게 집착하겠는가?”

가섭이 다시 아뢰었다.

만약 고기를 먹지 않도록 제정하신다면, 그와 같은 다섯 가지 맛의 유락(乳酪)ㆍ낙장(酪獎)ㆍ생소(生酥)ㆍ숙소(熟酥)ㆍ참기름 등이나 여러 가지 옷인 교사야의(憍奢耶衣)ㆍ가패(珂貝)ㆍ피혁 및

 

금ㆍ은으로 만든 발우나 그릇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물건들도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남자여, 저 니건(尼乾)81)의 소견과 같이 해서는 안 되니, 여래께서 제정하신 일체의 금계(禁戒)는 각각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정육을 허락하였던 것이고, 다시 다른 뜻이 있어서 열 가지 고기를 금지하였던 것이며, 다시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일체의 고기를 자연사(自然死)한 것까지도 금지하는 것이니라.

가섭이여, 내가 오늘부터 모든 제자가 다시 일체의 고기를 먹지 않도록 제정하느니라. 가섭이여, 고기를 먹는 이는 행ㆍ주ㆍ좌ㆍ와 중에 모든 중생이 그 냄새를 맡게 되면 두려워할 것이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사자(師子)를 가까이하였을 때, 여러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사자의 냄새를 맡고 또다시 두려워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늘을 먹은 사람은 그 더러운 냄새가 지독한지라, 다른 이들이 그를 보고 그 냄새를 맡으면 물러나 버리니, 설사 멀리서 그 사람을 보더라도 보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가까이하려 들겠느냐? 고기를 먹는 이는 모두 이러하니라. 모든 중생이 그 냄새를 맡고는 모두 두려움을 내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낼지니, 물이나 뭍이나 하늘을 나는 목숨이 있는 부류도 모두 달아나면서, 모두들 이 사람은 우리들의 원수라 말할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고기 먹는 일을 익히지 않느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고기 먹는 일을 드러내었으나, 비록 그 음식을 드러내기만 하였지 실제로 먹지는 않았느니라.

선남자여, 이처럼 보살은 청정한 음식조차도 먹지 못하듯이 하는데, 하물며 고기를 먹겠느냐? 선남자여, 내가 열반에 들어간 이후로, 무량의 백 세에 걸쳐서 사도(四道)의 성인(聖人)이 다시 열반에 들어가리라.

정법(正法:석가시대의 불법)이 멸하고 상법(像法)82)에 접어들면, 비구 가운데 계율을 지킨다는 흉내나 내면서 경전의 독송마저 적게 하고, 음식만 탐하면서 그 몸을 기르고자 한다. 그가 입은 의복조차 누추하고 못나서 행색이 초췌하여 위덕(威德)이 없으리라.

소나 양을 놓아 기르면서 땔감이나 짊어지고, 머리카락과 손톱마저 모두 길고 날카로운지라, 비록

 

가사를 입더라도 사냥꾼 같으며, 이리저리 살피면서 천천히 걷는 것이 마치 쥐를 노리는 고양이와 같을지니라.

늘 나는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병고가 많아 누울 적마다 대ㆍ소변을 지리며, 바깥으로는 어질고 착한 척하나 안으로는 탐욕과 질투만을 품었으니, 마치 아법(我法)을 받은 바라문 등과 같으니라. 실제로 사문(沙門)이 아니면서 사문의 모습만을 나타내는지라, 사견(邪見)이 치열하여 정법을 비방하는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께서 제정하신 위의(威儀)를 바르게 행하고 해탈과(解脫果)를 설하며 부정법(不淨法)을 여읜다고 하는 계율을 파괴한다. 아울러 깊고 깊은 비밀스런 교의를 훼손하느니라. 각자 마음대로 경율을 반대로 말하여 여래께서 우리들이 고기 먹는 일을 허락하셨다고 하리라. 스스로 이런 말을 하여 불설(佛說)이라고 하리니, 서로 언쟁하며 자기야말로 사문석자라 하리라.

선남자여, 이때에 다시 여러 사문들이 곡식을 저장하고 어육을 받으면서 손수 음식을 만들고자 기름병을 손에 쥐는데, 보개(寶蓋)와 가죽신으로 국왕이나 대신이나 장자(長者)를 가까이하면서 별자리나 점치고 의술에만 몰두하며, 노비를 거느리고, 금ㆍ은ㆍ유리ㆍ자거ㆍ마노ㆍ파리ㆍ진주ㆍ산호ㆍ호박ㆍ벽옥ㆍ가패와 갖가지 과일을 쌓아두게 되느니라.

미술ㆍ조각ㆍ서예ㆍ세속 학문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을 익히고, 갖가지 식물의 뿌리나 줄기 및 고도(蠱道)83)와 환술(幻術)로 약물을 제조하며,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나 그 몸에 뿌리고, 장기나 바둑을 일삼고자 여러 가지 기예를 배우게 되느니라.

만약 비구가 이러한 여러 악사(惡事)를 여읠 수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참다운 제자라 하리라.”

이때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러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생활하면서, 만약 걸식하는 때에 고기가 섞인 음식을 얻게 되면, 어떻게 먹어야 청정법(淸淨法)을 이루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마땅히 물로 씻어내어

 

고기를 골라내고서 먹어야 하느니라. 만약 먹을 것을 보아 고기가 많이 있다면, 고기 맛을 없앤 다음에 사용하여야만 무죄(無罪)가 되느니라.

만약 그 음식 가운데 고기가 많은 것을 보면 이를 받지 말아야 할지니, 무슨 고기든지 고기로 만들어진 음식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는데, 먹으면 죄를 받는다. 내가 지금 육식을 금지하는 제도를 주창하니, 만약 이를 자세히 설한다면 끝이 없으리라. 열반의 때에 이르렀기 때문에 간략히 설하나니, 이를 능수문답능가아발다라보경(能隨問答楞伽阿跋多羅寶經)484)이라 이름하느니라.”

이때에 대혜(大慧)보살이 게송으로 이와 같이 물었다.

 

저들 여러 보살들이

마음으로 불도(佛道)를 구한다면,

술ㆍ고기ㆍ파ㆍ마늘 등을 마시고 먹는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원하건대 무상존(無上尊)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교시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의 탐욕과 집착이

냄새나고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호랑이와 이리가 맛있다고 즐기는 것을

어찌하여 먹을 수 있습니까?

 

먹으면 여러 가지 허물을 낳게 되지만

안 먹으면 복되고 착하게 됩니다.

원컨대 저에게 교시하여 주십시오.

먹고 먹지 않는 것의 죄와 복을 일러 주십시오.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질문하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저희들에게 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공덕과 허물을 말씀해 주십시오.

[]와 여러 보살들이 현재와 미래에 갖가지 고기를 먹는 중생에게 잘 분별하여 설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중생들을 자비심으로 향하게 하되, 자비심을 얻고 나면 각자 머무르는 땅[]에서 청정하고 명료해져서 조속히 구경(究竟)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게 하고, 성문과 연각이 자지(自地)에서 머무르는 것을 그치고, 또한 무상보리를 속히 얻게 하고자 합니다.

사악한 논법(論法)의 여러 외도(外道) 무리들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삿된 소견에 전도되어 이에 집착하니, 일찍이 차법(遮法)이 있어 고기를 먹는 일을 여래께서 청허(聽許)하시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여래께서 세간을 구제하고 정법(正法)을 성취하면서 고기를 먹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구나, 잘 듣고 잘 생각해 보거라. 그대에게 설명해 주겠노라.”

대혜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대로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너에게 대략 말하나니, 이른바 일체 중생은 뿌리에서부터 인연을 전전하면서 늘 육친(六親)이 되느니라.

친척으로 생각해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노새ㆍ낙타ㆍ여우ㆍ개ㆍ소ㆍ말 등 가축의 고기도, 푸줏간에서 섞어서 판다고 하여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느니라. 부정한 기운으로 양생(養生)하려는 이유로도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중생이 그 냄새를 맡으면 모두 두려움을 내리니, 전다라(栴陀羅)85)나 담파(譚婆:拘肉을 먹음) 등을 개가 보면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짖어대는 연고로도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수행하는 이에게 자비심이 생기지 않는 이유로도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리석은 범부가 즐겨 먹는 것은 부정하고 냄새나고 더러워 좋게 말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여러 진언(眞言)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므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살생하는 이가 그 모습만 보고도 지식을 내어 맛에 깊이 탐착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와 같이 고기 먹는 이는 여러 천상에서 싫어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입냄새가 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악몽이 많아지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한적한 숲 속에서 호랑이가 그 냄새를 맡고 찾아오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음식에 절도가 없어지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수행하는 이에게 염리심(厭離心)이 생기지 않게 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내가 늘 말하듯이, 보통 먹고 마시는 것은 마치 자식을 먹듯이 생각하고, 약을 마시듯 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고기를 먹도록 허락한다면 이러한 일이 없어진다.

다시 대혜여, 과거에 사자소타사’(師子蘇陀娑)라는 왕이 있었는데, 갖가지 고기를 먹다가 급기야 사람마저 먹게 되었느니라. 백성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모반하여 그 봉록을 끊었으니,

 

고기를 먹는 이에게는 이 같은 허물마저 생겨나는 만큼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다시 대혜여, 모든 살생하는 이들은 재물의 이익을 꾀하고자 도살하여 판매하는 것이니라. 그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중생의 고기를 먹고자 하니, 돈을 그물로 삼아서 갖가지 고기를 잡느니라. 그와 같이 살생하는 이들이 재물 때문에 낚시하거나 그물을 놓아 하늘을 다니거나 물과 뭍을 다니는 중생들을 잡아다가 갖가지로 살해하여 그 고기를 팔아 이익을 구하고자 하느니라.

대혜여, 또한 죽이지 않는 것이 없어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고기가 있게 되니,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느니라. 대혜여, 내가 언제가 다섯 종류의 고기를 금하기도 하였고, 혹 열 종류의 고기를 통제하기도 하였으나, 지금 모든 종류와 시기에 걸쳐서 그 방편을 모두 폐지하여 일체를 금하느니라.

대혜여,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께서 일찍이 먹은 바가 없는데, 하물며 어육을 먹었겠으며 남을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이전의 행실을 크게 자비롭게 여겼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마치 한 자식처럼 보았으며, 이 때문에 자식의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세존께서 다시 이 같은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두가 예전에 친척일진대

더럽고 부정한 고기를 먹어

부정한 고기로 성장하는 이

냄새만 맡아도 두려워하리.

 

일체의 고기나 마늘 등과

부추ㆍ파ㆍ마늘 나쁜 먹거리

갖가지 태만하게 만드는 술

수행자 언제나 멀리 여의네.

 

참기름ㆍ들기름 먹지 않으며

갖가지 편안한 이부자리도

조그만 벌레들이 함께 살면서

그 속에서 무서움 극에 달하네.

 

음식이 안일한 마음을 일으키고

안일은 여러 감각을 낳는다.

감각으로부터 탐욕이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음식으로부터 탐욕이 일어나니

탐욕은 마음을 어지럽혀

집착은 애욕을 키워서

생사에서 해탈도 하지 못하네.

 

이익을 위해 중생을 죽이고

재물로써 여러 고기를 낚으니

두 가지 고기는 악업이라네.

 

죽어서 가는 곳 규호지옥(叫呼地獄)

고기를 일부러 안 구했어도

세 가지 깨끗한 고기란 없으니

인연으로 생긴 것이 없지 않으니

 

이로써 고기를 삼가야 하네.

 

저 여러 수행자들은

이런 이유로 고기를 피해야 하니

시방(十方)의 불세존(佛世尊)께서

누구나 다 같이 가책(訶責)할지니

한 다리 건너온 고기라도 먹으면

죽어서 호랑이, 이리 무리에 떨어지리.

 

더럽고 냄새나 좋지 않으니

태어나는 것 언제나 어리석어

전다라(旃陀羅)로 낳는 때가 많네.

 

담파(譚婆)라는 사냥꾼 종족이 되거나

다이니(陀夷尼) 종족으로 태어나니

고기를 잘 먹는 성품 때문에

이리나 여우나 나찰(羅刹) 등이

두루 여기에서 생겨난다.

 

속박된 코끼리와 대운

악독한 살인마 앙굴마라도

능가경(楞伽經)배우고 착해졌네.

 

내 이제 모든 고기를 엄금하나니

시방의 부처와 보살(菩薩)

거룩한 성문(聲聞)도 꾸짖으려니

고기를 먹고서 뉘우침 없어

 

이같이 태어나도 바보가 될 것이니

먼저 견문의(見聞疑)를 말하였으나

지금은 모든 고기를 아예 금하니

망상으로 지혜를 깨닫지 못하여

 

고기만 먹는 곳 태어날지니

모두가 그와 같은 탐욕의 허물이네.

거룩한 해탈(解脫)에 방해만 되니

술ㆍ고기ㆍ파ㆍ부추ㆍ마늘 같은 음식들

모두가 성도(聖道)에 방해된다네.

 

미래세 태어날 중생에게

고기를 먹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것을 말해도 죄없이 깨끗하네.

세존(世尊)께서 우리들이 먹는 것을 허락할 것이네.

 

먹는 것은 약을 먹듯이 생각하고

자식을 먹는 듯 삼갈지니

족함을 알고서 염리심(厭離心) 내어

수행자 다니며 걸식해야 하네.

 

편안히 자비심에 머무르려면

염리심 내라고 늘 말하니

무서운 호랑이, 이리와 나쁜 맹수들

늘 함께 살 수 있으리.

 

고기를 먹어서

중생(衆生) 겁내니

이 때문에 수행자는

자비심으로 고기 안 먹네.

 

고기를 먹으면 지혜 없어져

영원히 해탈을 등지므로

거룩한 모습도 어긋나리니

이 때문에 고기를 삼가야 하네.

 

범지(梵志)의 종족에 태어나거나

여러 수행처(修行處)에 태어나거나

훌륭한 가문에서 지혜를 이룰 것이니

이 때문에 고기를 끓어야 한다.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186)

상좌(上座) 가섭이 갖가지 좋은 음식을 멀리하면서 고기맛 나는 음식도 피했으니, 참으로 수행자가 육식하지 않는 법도를 지켰다.

 

앙굴마라경2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如來藏)으로 인하여 제불(諸佛)이 고기를 드시지 않으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일체 중생이 무시생사(無始生死) 이래로 날 적마다 윤회하는지라, 부모ㆍ형제ㆍ자매 아닌 이가 없는 것이, 마치 인형 변하듯 무상하니, 나와 남의 고기가 바로 한 가지 고기이니라. 그러므로 여러 부처들이 고기를 먹지 않느니라. 다시 머물러 문수보살에게 일체의 중생계와 아계는 바로 같은 일계(一界)이니라. 먹는 고기 또한 같은 고기이니, 이 때문에 여러 부처들이 고기를 먹지 않느니라.”

다시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조개ㆍ벌꿀ㆍ가죽ㆍ비단 등은 자계(自界) 고기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같은 말을 삼가거라. 여래는 일체의 세간을 멀리 떠나는지라, 여래가 먹지 않는 것이니라. 만약 가까운 사물을 익힌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곳은 없느니라. 이처럼 가까운 것을 익히는 것은 방편일지니, 법은 마치 사물이 반복하여 닥칠 때만 가까이 익힐 수가 있느니라. 그러나 사물이 나오는 근원은 가까이 익히지 못하느니라. 만약 윤회하여 이르러 살인자의 손을 여읠 수 있다면 가까이 익힐 수 있다.”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이같이 아뢰었다.

지금 이 성안에 가죽 공인이 있는데, 그가 가죽을 잘 다룹니다. 그 가죽신을 어떤 이가 구입하여 이렇게 돌아서 왔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겠습니까?

다시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소가 자연사하였는데, 소 임자가 전다라를 통하여 가죽을 벗겨 공인에게 내주고, 공인이 가죽신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계율을 지키는 이에게 돌아서 왔다면, 이것도 비근한 것에서 익히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소가 자연사한 경우, 소 임자가 가죽을 내어다 가죽신을 만들고서 계율을 지키는 이에게 보시할 수는 있느니라.”

받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받지 않는 것이 비구의 법도이니, 받는다면 자비롭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것이 파계(破戒)에 해당하지는 않느니라.”

이와 같이 경전의 낭독을 마치고서 바로 제지를 내려 여러 스님들에게 이같이 말하였다.

여러 소승(小僧)의 무리들이 경전을

 

두루 보지 못하고, 육식을 금하는 말씀이 없다고 번갈아 말하는데, 오늘날 이 경전의 가르침은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합니까? 이같이 가죽신을 노래하는 구절은 그 본뜻이 이러하다고 봅니다.

바로 이달 23일 법운 법사가 열반경의 육식을 금하는 일을 강의하셨는데, 이때 승정(僧正) 혜초 스님과 법총 스님이 비판적으로 질문하여, “만약 경문에서 궁극적으로 일체의 고기를 끊는 것 내지는 스스로 죽은 것까지도 먹지 못한다면, 이는 니건(尼乾)이 가죽을 금지하여 가죽신을 신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약 가죽을 벗겨 가죽신을 신는다면, 육식도 또한 개방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법운 법사가 두루 통하는 해석을 하였으나, 두 분의 법사께서 비판하는 뜻을 그치지 않으시다가, 이때에서야 스스로 통하시고서, “만약 성인이 일부러 이 같은 물건을 착용하지 않는다면, 중품(中品)의 행자도 이를 착용하지 않을 것이나, 이를 착용하는 사람은 모두가 하품의 행자이다. 이에 니건자와 같지 않다고 하셨으니, 그 말뜻에 담겨진 뜻은 만약 삼베가 없는 고을에서는 또한 피혁(皮革)을 개방하는 의론을 할 수 있지만, 삼베가 있는 곳이라면 자비로운 이는 실로 착용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같은 일은 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켤레의 가죽신을 착용하며 오랫동안 손상되지 않으나, 이처럼 중생의 살을 먹게 되면 한 번 먹는 가운데도 바로 한량없는 신명(身命)을 해치게 되는데, 어찌 날마다 먹게 되면 그 수효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가죽신을 사용할 수 없고, 고기를 함께 끊는 것입니다.

이때 여러 스님들이 다시 답변을 계속하지 않았으니, 여러 적은 스님들이 그 소견에 의심을 내어 커다란 폐단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가죽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글을 창언하고 바로 일시적인 의심을 풀고자 하였으니, 이전의 제도와 연관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고기를 먹는 것은 큰 죄업의 장애입니다. 경문에서도 예전에 중생과 더불어 서로 부모와 친척의 관계를 거쳤으니, 대중 스님들이 그런데도 여기에서 차마 중생의 고기를 먹으면서, 자신은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거나 고기를 잘라

 

매와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도리어 다른 중생의 몸은 먹는다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스님들과 대중을 인도하는 법사님 및 여러 비구니 스님들과 대중을 이끄시는 법사님들이 각각 본찰로 돌아가셔서 여러 비구니 소승들에게 선포하여 이 같은 뜻을 알려 주십시오. 제칙을 내리는 말이 여기서 끝을 맺었으니, 승니가 행도(行道)하면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법회를 마치고 떠나갔다.

그날 밤에 다시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태자좌위(太子左衛) 솔주사(率周捨)에게 칙령을 내려 이같이 말했다. 법총 스님이 참회를 하면서도 중생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경전에서 명시한 것으로 나찰(羅刹) 여인이, “내가 그대를 염려하므로 내가 그대를 잡아먹는다고 말한 대목에 나온다. 따라서 법총 스님의 이 마음은 바로 경전 속의 나찰 여인의 마음이다.

다시 칙령을 내려 이같이 말했다. 승변 스님은 저절로 죽은 고기를 말씀하셨지만,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올빼미와 비둘기가 그 덫을 놓은 곳에서 죽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저절로 죽은 것을 한 마리도 보지 못합니다.

고라니와 사슴과 꿩과 토끼가 들판에 가득하더라도 일찍이 한 마리도 저절로 죽은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고기를 찾으려면 바로 푸줏간을 찾아가야 하며, 죽은 물고기를 찾으려면 반드시 그물을 놓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만약 살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은 고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전에서도 고기를 사는 것은 손수 죽이는 것과 그 죄가 같다고 말하였으니, 내가 본래 스스로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여러 승려를 위하여 고통을 떠나는 인연을 짓는 것입니다.

다시 칙령을 내려 이같이 말했다. 중생이 이로써 살생할 수 없으니, 무릇 한 중생이 8만 호()의 벌레를 갖추고 있어서, 경전에서도 “80억만 호의 벌레[]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한 중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바로 8만 호의 벌레의 명을 끊는 것이 됩니다. 저절로 죽은 중생이라도 또한 먹을 수 없으니, 예전에 부화한 벌레가 비록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부화한 벌레는 그 수가 더욱 많아지는데, 만약 삶거나 지지거나 하여 이것으로 기생충을 죽이면 모두 그 목숨을 다시 이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혀끝의

 

말초적인 맛을 이롭게 여겨 한량없는 중생을 해치니, 그 가운데 소소한 것들은 비록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나, 그 큰 것들은 다 함께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심을 없애고 악행만 늘려 나가니, 그 실상은 사문으로 부처의 제자들이 행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또 조칙을 내려 이같이 말했다. 스님들이 고기를 먹는 죄는 백의(白衣)보다 심각합니다. 백의가 고기를 먹으면 지옥을 면하지 못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그칩니다. 스님들이 고기를 먹게 되면 이미 불성에 죄()를 범하고 계율마저 손상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갑절의 죄가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스님들에게 질문하여 고기 먹는 것을 배우려 한다면 이것은 악업을 짓는 것이 이전보다 갑절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경전의 가르침을 손수 이해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강론하면서 입으로는 자비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해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알면서도 고의로 계율을 범하니, 말과 행실이 이미 위배되어 궤변과 거짓된 행위를 일삼으니, 사람들에게 물어 고기 먹는 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 죄는 세 갑절이나 됩니다.

그래서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말한 대로 닦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육을 먹으며 살아 있는 것들을 침탈하니, 끝내는 악지식(惡知識)을 이루어 온갖 원수를 일으키다 지옥에 떨어져 창 끝에 찔릴 것이니, 이처럼 선과 악의 보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출가인은 실로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또 칙령을 내려 이같이 간청했다.

성문(聲聞)이 받은 율의계(律儀戒)는 본래 몸과 입의 칠지(七支)87)를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한 번 받고 난 이후에 수면민(睡眠悶) 등의 율의(律儀)가 늘 생겨나는 것에 이르러 생각마다 일찍이 얻지 못했던 율의를 얻게 됩니다. 그 이유는 수면 등은 악심(惡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실이 없으면서 늘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성문법(聲聞法)에서 해당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의 계율을 잃지 않는다고 해도 계율에는 손상이 있게 되니, 단지 불살계(不殺戒)만을 손상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여타의 계율도 겸하여 오염시키게 됩니다. 손으로 집어 들고 이로 씹어 먹는 데서 신업과

 

구업을 움직이게 되면 신업과 구업에 관한 계율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때에는 율의가 지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어 이어지지 않으니, 바로 불살계를 잃게 되고, 또한 여타의 계율도 훼손하여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전다라족(旃陀羅族) 사람이 도살하는 때에 누구를 위해 살생하는 것인가 하면, 바로 먹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기를 먹으면 살생하는 몫을 가지게 되니, 불살계에 있어 바로 결함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 선율의(善律儀)에 대해서 살생의 몫을 받는다고 말하면, 불살계에 이지러짐이 없는 이는 불선율의(不善律儀)나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는 것이기에 오히려 악률의(惡律儀)가 상속하게 됩니다.

만약 악률의를 지키는 사람이 8재계를 지키면, 악률의가 다시 상속하지 못하게 되고 선율의를 지키는 사람이 여러 살생의 몫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살계는 바로 별해탈계(別解脫戒)를 결하게 되어 다시는 해탈하지 못하게 됩니다. 악률의를 지키는 사람은 8재계를 지킨다고 말하지 못하니, 재계는 단지 착한 생각을 한 가지 일으키는 것뿐이므로, 마음의 악률의가 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만약 한 생각에 끊어지지 않는 경우, 많은 생각 또한 끊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많은 생각이 끊어진다면, 이로써 한 생각이 바로 끊어짐을 알게 됩니다. 선율의를 지키는 사람도 그 일이 이와 같아서 말할 것 없이 여러 가지 살생의 책임을 받게 됩니다. 비록 살생의 책임이 적더라도 불살률의(不殺律儀)도 이때에 또한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보살계(菩薩戒)를 지키는 사람은 심계(心戒)88)를 지켜야 하기에 본래 중생의 살을 먹어야 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만약 성문의 계율을 결한다면 끝내 지옥 등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