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7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7. 계공편(誡功篇)
서문
군생(群生)이 생사의 바다를 오래도록 떠도는 이유는 실로 계율의 공덕이란 나룻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계율의 나룻배를 타고 자비의 노를 저으면서 파도를 헤치고 멀리 피안에 오르지 못하는 이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가르침이 많더라도, 한결같이 계율로써 행의 근본을 삼는 것으로, 그 나가는 것은 반드시 문을 통해 나가면서 어찌 이 계율을 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이로써 도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자면, 먼저 이 같은 문(門)을 알아야 한다. 여러 마음 쓰는 곳에서 생각과 행위가 어떠한지를 헤아려야 한다. 그러므로 논서에서는 “계율을 받은 이는 자비를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삼천세계 내의 억만 개의 해와 달이 있어서 위로는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이르고, 아래로는 무간지옥에 다다르도록, 모든 살아 있는 부류가 자비심을 일으키고 살생을 행하지 않게 하면서 때로는 받은 천명을 다하고, 때로는 성불(成佛)하기도 한다.
오랜 동안 중생의 각 부류에 통하면서 법계를 두루 다스리는데, 이 같은 한 생각의 어짊에서 그 공덕이 허공에 가득 차게 된다. 그 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오직 부처님만이 그 경지를 아신다. 살생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니, 여타의 업(業)도 그 예가 이러할 것이다. 이 같은 계율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점점 원대해져서 위로는 하늘부터 아래로는 땅 밑까지 유계(幽界)와 현계(顯界)의 성현들 가운데 이러한 인연(因緣)을 근본으로 의존하여 그 기초로 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경전에서도 “계율은 대지(大地)와 같아서 생하고 이루며 머물고 지킨다”고 일찍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유(有)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가질 때 이를 ‘생하였다’고 말하고, 거룩한 도가 갖춰지면 이를 ‘이루었다’고 말하며, 법이 6만 세에 이르면 이를 ‘머물렀다’고 말한다. 3업(業)을 맡아 지키면 이를 ‘지닌다’고 말한다.
여러 여타의 선법(善法)은 대체로 이 같은 공덕을 결하였는지라, 이 같은 문에 들어가야만 ‘성인의 종자’라 부른다. 이것에 어긋나 거짓된 자를 ‘범부의 물결’이라 일컬을 것이니, 오랫동안 고해에 빠져서 벗어나 구제될 날이 없어진다.
법이 동하(東夏:고대 중국의 동쪽)로 전해진 지가
천 년 가운데 반이 지났다. 위(魏)나라 가평(嘉平)1) 연간에 바야흐로 계법(戒法)이 전해졌으니, 이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속(道俗) 사이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대성(大聖)이 가르침을 내리시되 먼저 그 기미를 아시므로 세속 선비의 헌장(憲章)에도 갖춰지고 빠진 것이 있듯이, 도인(道人)의 율의(律儀)에도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이로써 5계(戒)2)와 8계(戒)3)가 그 기량(器量)에 따라 제정되고 개방되어 대상에 응함에 그릇됨이 없이 하였다.
계율의 조목은 간략하게 나누어 열심히 행하는 데 맡겨두는 것을 ‘세속을 인도하는 교화’라고 말하니, 그 시절인연을 고정시킬 수 없다. 출가한 사람은 도에 의지하여 세속 선비와 다르므로 시절인연이 갖추어지더라도 계급(階級)을 열지 않는다. 비록 다시 그 지위가 대소로 갈라져서 두 갈래의 배움으로 나아가더라도 상하가 고르고, 5중(衆)4)이 그 허물을 단속하는 것이 품류에 따라 달라져도 그 제정된 것은 늘 한 가지 계율로 남겨진다.
계율은 본시 경계한다[警覺]는 뜻이다. 언제나 마음에 있는 것을 깨끗하게 믿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여러 보고 들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네 분을 뽑아서 이같이 법을 몸소 받든 사람이 예전에 있었음을 알리고자 한다.
- 양 『홍명집』 「계공편」의 목록
- 당 『광홍명집』 「계공편(誡功篇)」의 목록
진(晋) 사문 석혜원(釋慧遠)의 「여유유민서(與劉遺民書)’
양(梁) 원제(元帝)의 「여소자의등서(與蕭諮議等書)」
양 간문제(簡文帝)의 「여상동왕서(與湘東王書)」
진(陳) 율사 담원(曇瑗)의 「여조사서(與朝士書)」
진 사문 석혜진(釋慧津)의 「여원율사서(與瑗律師書)」와 답
수양제(隋煬帝)의 「여지자의선사서(與智者顗禪師書)」
수양제의 「수보살대계문(受菩薩大戒文)」
수(隋) 지자(智者) 스님의 「여양제서(與煬帝書)」
당(唐) 종남산(終南山) 「석씨통략(釋氏統略)」
제(齊) 문선(文宣) 「정행법문(淨行法門)」
1) 여은사유유민등서(與隱士劉遺民等書:은사 유유민 등에게 보내는 글) 석혜원(釋慧遠)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5)이 진(晋)나라 태원(太元)6) 연간에 의창(宜昌)과 시상(柴桑) 두 고을의 관직을 제수받아 여산(廬山)의 영수(靈邃)에 이르렀다. 발길 가는 대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끝내 사문 석혜원 스님을 만나고서 성심을 다할 수 있었다. 정모(丁母)의 우환으로 관직을 버리고 입산(入山)하여 마침내 거기에서 여생을 마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서쪽 숲 속의 북쪽 골짜기에다 선방(禪坊)을 따로 세우고, 마음을 기르며 조용히 지내 안빈낙도하며 영리를 꾀하지 않았다.
이때에 관직에서 물러난 선비들 가운데 민첩하게 움직여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종병(宗炳)ㆍ장야(張野)ㆍ주속지(周續之)ㆍ뇌차종(雷次宗)7)의 무리가 모두 여기에 모였다. 유민이 여러 현자들과 더불어 여러 곳을 다니며 도가의 현묘한 도리를 연구하면서 이것으로 불일(佛日)을 더욱 영구히 하였다.
혜원 스님이 이에 편지를 내어 이같이 말하였다.
“매번 예전 일을 돌이켜보면, 세간의 전적에 마음을 쓰는 것으로 당년의 꽃동산으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노자와 장자를 보고서 비로소 명교(名敎)란 임기응변의 헛된 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장을 보게 되면 명계(冥界)에 빠지는 취향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불교의 이치를 우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근본적인 것으로 그들을 모은다면 백가들은 귀결점이 같습니다. 그대와 여러 사람이 모두 여래의 어진 제자가 되고서 신부(神府)에 이름을 올린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되었으나 헛되이 원대함을 품을 의욕만 쌓고 경전에 따른 바탕을 결여하였으니, 이렇게 하여 세월을 마친다면 어떻게 그 간직했던 마음을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육재일(六齋日)에는 마땅히 일상의 업무를 간소하게 중지하고 공문(空門)에 전심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나루터에 의지하는 마음이 돈독해지고 오는 세상의 계책(計策)이 깊어질 것입니다. 만약 한묵을 가지고 글을 짓는다면 이로써 흥을 의탁할 수 있으니, 비록 말이 부족함을 낳더라도 말이 아니면 한 가지 이치의 감득도 펼 수 없습니다. 천리마에 의지한다는 비유8)가 여기에서 어찌 반드시 멀리 옛사람에게 의탁한다는 것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산에 머무는 승려와 일반인이 날마다 서로 책려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정진하여 두루 지극하여서 범계(梵戒)를 지키는 것에서는 종장(宗張) 등도 미치지 못하였다. 좌선에 전념한 것이 바야흐로 반 년이 넘어서면서 정(定)에 들어간 가운데서 부처님을 만나고
길 가다가 성상(聖像)을 뵈었는데, 부처님께서 허공 가운데 나투어 천지를 밝게 비추시니 모두가 금빛이었다. 이에 가사를 벗고 보배 연못에서 목욕하고 선정에서 나와서는 스님들에게 독경을 청하면서 속히 세간의 명을 버리도록 발원하였다.
죽을 때가 되어 산에서 15년간 있으면서 스스로 죽을 날을 알고서 대중과 헤어지고 나서 어떤 질병과 고통도 없었다. 서쪽을 향하여 단좌하고 손을 거두어 숨을 끊었는데 나이가 57세였다. 미리 독종계(篤終誡)를 지어, “황보밀(皇甫謐)9)이 논을 남겨서 그 효경을 간직하고 효도를 잊지 말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하였다.
대체로 마음씀이 어린아이가 행하는 일과 같아서 지금 흙으로 무덤을 만들더라도 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옹(子雍)이 이에 따르고 주속지(周續之)10) 등이 방실(房室)을 연이어 이룩하였으니, 각자 향기로운 직물이 있었던 것은 별전(別傳)에 이른 바와 같다.
2) 여소자의등서(與蕭諮議11)等書 : 소자의 등에게 보내는 글) 양 원제(元帝)
대체로 듣자니, 일곱 자의 둥근 광명이 위에서 진주빛의 구름을 비추고 오색의 면색(面色)이 산호(珊瑚)의 땅에 가로 임한다고 한다. 금빛 책상으로 변화된 것은 여수(麗水)의 진귀함도 무색하게 하고, 변화가 가설(珂雪:옥같이 흰 눈)과 같이 무상하게 변화하여 현상(玄霜)의 이채로움보다 뛰어나니, 어떻게 기미를 가지고 감응하며, 감응하여 끝내 통하는 것이 아니며 신명함이 있어 지혜롭고 지혜로 반드시 끊는 것이 아니겠는가?12) 그래서 벽옥(碧玉)의 누각에서는 당에 오르기가 쉽지 않고 감색(紺色)의 전각에서는 입실하기가 어렵다. 반드시 5근(根) 가운데 신근(信根)을 으뜸으로 삼으며, 6도(度) 가운데 단나(檀那)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재물을 버리고 미더움에 따르고, 유(有)를 버리고 공(空)에 나아갈 수 있으니, 이런 것을 따라 말해야 진실로 알 수 있다. 가만히 서상(瑞像)이 빛을 내어 열흘도 잠깐이라 손을 내젓고 발로 춤추는 것이 깊어지면 자나 깨나 드러나고, 발을 구르는 정성이 깨어나고 잠자는 것에서 맺어져야 비로소 네거리 저자에서 삶은 고기를 깨닫게 될지니, 하증(何曾)13)의 음식을 비웃으며 오정(五鼎)14)의 맛으로 주언(主偃)15)의 사(辭)를 비웃는다. 이로써 조갱인포(竈羹麟脯)조차 그 학설을 헛되이 들었는데 양락성순(羊酪猩脣)이 어찌 입에 담기에 족하겠는가?
술과 음식에 매여 어려움을 쫓는 것은 지나쳐치게 먹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데,
해실을 식탁에 올리는 것이 어찌 봄철 채소의 정갈함에 비기겠는가? 그대가 3일 동안 정갈하게 재계하고자 한다면, 인시(寅時)에서 술시(戌時)에 이르는 사이에 한번 맞을 뿐이다. 멥쌀은 옥과 같고, 소금은 호랑이 모양과 같으며, 운몽(雲夢)16)의 미나리와 요동(遼東)의 말풀과 10근(斤)의 배와 천수(千樹)의 귤, 푸른 죽순과 파란 생강과 단단한 밤과 서리 맞은 대추에 구미가 당겨 배를 불릴 수 있더라도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 여덟 가지 공덕수[八功德水]가 정법의 유포와 함께 흘러오자 사천왕(四天王) 네 분의 천주도 함께 오는데, 모두 함께 겸양하면서 도를 넓히니, 친구가 되는 것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소역(蕭繹)17)이 짓는다.
3) 답상동왕서(答湘東王18)書:상동왕에게 답하는 글) 양 간문제(簡文帝)
열여드레 저녁 나절에 화림원(華林苑)의 합외성(閤外省) 안에서 동생이 9월 1일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면서도 보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구나. 가을철에 접어들었으나 쓸쓸하기가 늘 그대로이다. 주부(州府)의 일에 공사다망하여도 힘들다 하지 않으니 호상락(濠上樂)의 기운19)이 여전하구나. 즐거움이란 거의 없으나 때때로 기쁜 일이 생기는 것이 유사(遊士)와 문빈(文賓)에게 견주어도 좋다고 말하리라.
동생이 잔치가 끝나자 바로 돌아갔는데 요사이 지내기는 어떠한가? 한나라를 보호하는 공부(功夫)의 돌이킴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보내온 편지를 받고서 생각해 보건대 걱정스럽기만 하구나. 내가 보살금계(菩薩禁戒)를 받고 대사(大士)에 참여하였는데, 이달 12일 바로 동성(東城)에도 개인적으로 참회하였다.
17일 새벽에 보운(寶雲)에 일찍 들어가자, 벽문(璧門)20)에 해가 비추고 동룡(銅龍)이 안개를 토하였는데, 홍천(紅泉)이 그림자를 머금고 청련(靑蓮)이 향기를 내뿜었다. 법려(法侶)가 떼를 이루고 금산(金山)에 자리가 가득하였으니, 몸과 마음이 이처럼 시원하기가 일찍이 없었다.
지난 새벽 평등사(平等寺)의 법회(法會)에서 오후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수지(受持)하였는데, 천의(天儀)21)가 자리에 임하고 취용(晬容)이 몸소 증명하셨기에 절을 많이 하였어도 피로가 잠깐 사이에 풀렸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때에는 마음을 지극하게 거두고 마음과 말로 스스로 도모하면서 잘라내고자 하였으니, 마원(馬援)22)이 이를 잡아 없애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응씨(應氏)의 적호(赤壺)의 풍자23)를 물리치지 않았다.
승진 스님이 예전과 다름없이 경전을 강의하셨는데, 하루종일 승진(僧璡) 스님에게 여쭈어 보면 자로(子路)와 같았으니,24) 깊숙이 갈아내어 이름을 취하여 ‘이치에 기인하였다’고 이름하여 말하였다.
황정(皇情)이 인가하여 지금 받들어 행하게 되었으니, 어제 해가 저문 후에야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서금유오(徐擒庾吾)가 날마다 항상하고 석경(夕鏡)이 멀리 있더라도 때맞춰 왔으니 좌우가 우뚝하여 별다름을 얻지 못했는데, 서성거리는 때에 약간이나마 한 구절 글을 익혀서 주천(酒泉)의 직분을 피하고자 한다. 윤왕(尹王)과 서로 떨어져 있으니, 이로써 정이 더욱 깊어만 간다.
그대의 안부를 보면 신병을 앓느라 대궐의 왕래가 뜸해졌는데, 그 사이에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그 편지를 얻지 못하니, 첨사(詹事)25)는 진(陳)에 있어서는 세마(洗馬)26)가 되어 함께 때때로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서로 논변하곤 하였다. 그대가 동쪽을 진무(鎭撫)하고자 다시 떠나게 되니, 형산(衡山〮)ㆍ 구의(九嶷:湖南 지역에 있는 산)로 매진하더라도 기수(岐水)에 임하여 탄식하며 물을 바라보며 개탄한다.
단지 내가 경도(京都)에 온 이래로 의지가 분명치 않아 입을 열어 웃더라도 참다운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다시 술을 마시지 않은 지가 20순(旬)이나 되었으니, 차공(次公)27)이 미친 것으로부터 깨어나더라도 자체로 무리이다. 늙은이를 알아 주어 자주 편지하면서 내가 겪어온 길을 기술하면서 길이 강하(江夏)를 따르고 길이 서부(西浮)28)로 나가는 것을 되새기곤 하였다. 세월이 바뀌면서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는데, 위술(韋述)29)에 있어서는 장저(長沮)의 폐단이 있고, 반드시 비웃음 당하는 재난이 있으리라.
그 술법은 갈선(葛仙)30)과 다르지만 형체는 순자의 서술[荀序]31)과 균등하니, 식량을 단지 다시 가지고 특별하게 경영하여 화를 복으로 바꾸었으니, 행한 일이 북수(北叟)32)와 같았다. 서로 헤어진 이래로 매번 추억만 늘어간다. 한탄은 세월이 가면서 쌓이고, 추억은 시간이 가면서 바뀌었다. 매번 서쪽의 유숙처[西宿:서방정토]가 있을 때마다, 일이 섬돌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서로 만나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옥령(玉嶺)에서 만나서 말하고, 쓸쓸히 금관을 대하니, 고생스러운 생각만 깊어서 언제나 완화하여 그치지 못한다. 그대가 스스로를 잘 보양하고 아껴서 이것을 돌이켜 번거롭지 않을 것이다. 강(綱)이 적는다.
4) 여양조사서(與梁朝士書 : 양조사에게 보내는 글) 석담원(釋曇瑗)33)
광택사(光宅寺)의 담원(曇瑗)이 말씀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지인(至人)이 가르침을 내릴 때에는 각각 특수한 상황에 맞게 하였기 때문에 밖으로는 3천 가지 위의(威儀)를 처리하는 요점을 베풀었고, 안으로는 8만 가지 율의(律儀)를 펼쳤습니다.
진실되게 그 가르침을 회복하여 다른 학문에 대하여는 그 악을 징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공자는 형법(刑法)을 정하여 간특한 자들을 처결하였고, 석가는 갈마(羯磨)를 펼쳐서 법을 어기는 사람을 물리쳤는데, 두 분의 성인이 교화를 나누어 별도로 유사(有司)를 두었습니다.
최근 승니를 보면, 일이 있을 때는 매번 공부(公府)로 넘겨 송사를 하는데, 안과 밖에 따라 법도를 달리 하고 조목과 범례도 같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율(內律)이 가벼운 반면 외적 규제가 무겁고, 때로는 내적 법률이 무거운 반면 외적 규범이 오히려 가볍기도 하다. 보통 사람이 힘쓰는 것은 아첨과 편의를 구하는 것이니, 만약 실로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내적인 규율의 무거운 부분을 버리고서 외적으로 가벼운 것에 아부할 것이고, 남을 빠뜨리는 데 목표가 있다면 내적인 규율의 가벼운 것을 버리고 밖으로 엄중한 규율에 의존할 것이다. 이는 당시의 재상을 모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제(理制)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공명정대함을 이어 사직을 널리 보필하고, 음양을 조화롭게 하며[和爕] 대승의 나룻배를 젓고 삼보(三寶)의 주춧돌을 놓으며 원근으로 풍화(風化)에 마음을 기울여 백의(白儀)와 흑의(黑儀)가 모두 경사스럽게 여깁니다. 빈도[貧道]34)가 황송하게 승례(僧例)에 살면서 자못 일찍이 비니(毘尼)35)를 익혔습니다. 거듭 승조(僧曹)를 얻어 일을 송부할 때 계율을 찾습니다. 상세한 결단을 부처님에서 찾는다면 절실한 계율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나라에 법전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이로써 승가(僧家)의 쟁집을 규찰하되 가리지 않으면 어떤 것에 의지하여 판단하겠습니까? 삼가 서찰을 보내 다시 교지가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자못 약법(約法)을 이룬 것은 영원히 써서 그 모범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석담원(釋曇瑗)이 보냅니다.
5) 여원율사서(與瑗律師書 : 원 율사에게 보내는 글)와 답 석혜진(釋惠津)
석혜진(釋慧津)이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
가만히 듣자니 스승을 방문하려면 만 일 동안 예배하여야 볼 수 있다 하였으나, 저는 삼가 모신 것이 오래되지 않은데도 지나치게 융숭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예전에 추양(鄒陽)36)이 상서(上書)하여 주상을 만날 수 있었고, 송옥(宋玉)37)이 시부(時賦)를 지어 양전(良田)을 하사받았습니다. 또한 강회(康會)38) 스님은 오나라에 와서야 그 덕망이 사표가 될 만하였고, 마등(摩騰)39) 스님은 한나라에 들어가서야 그 행실이 율의에 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도(道)는 사람에 의탁하여 넓어지고,40)
덕은 외로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님41)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을 짝하여 옛것을 찾는다면 모두 제대로 된 사례가 아닐 것인데, 어찌 은총과 은택을 내리는 것에 헛되이 마음 쓰고 융숭하고 두터운 것에 편안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이름이 명분을 넘어서고 명예가 몸을 벗어났습니다. 단지 법륜이 처음 열릴 적에 공부를 청하는 이들이 구름 같았으니, 사해가 그 가르침을 같이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의로움은 천하가 사모합니다. 마침내 책상자를 짊어진 학도들이 경쟁적으로 멀리서 찾아오고, 어짊으로 돌아가는 선비들이 발자취를 이어 오게 하였으니, 화음(華陰)42)에서 성시(成市)를 이룬 것을 어찌 충분하다고 하겠습니까? 휘장처럼 소맷자락을 드는 것을 어찌 홀로 전시대보다 높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선정의 초문(初門)을 선양하고 지혜의 등불을 밝히니, 그 미더움이 실로 강이 마르고 바다가 엎어지도록 널리 말하더라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선 선배들은 금성(金城)에 빠지고 후생들은 그 날카로운 이가 꺾였으니, 계율의 선법(善法)을 열심히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지(地)43)의 영락(瓔珞)44)을 가지고 그 행동거지마다 지키도록 할 수 있다면 바로 8정도를 장엄케 하고 성인과 범부를 신실하고 심원하게 하며, 유계(幽界)와 현계(顯界)를 조화롭게 할 것입니다. 더욱이 연필을 들어 저술하거나,45) 무릎을 찔러 공부하기를46) 좋아하셨고, 반딧불을 모아서 책을 읽거나47) 보리가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48) 보리(菩提)를 펴는 데 열심이셨으니, 혹 보응을 갈라 구슬을 구하고 강물을 퍼서 보배를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49) 저 혜진은 그 한 부분도 건지지 못하였기에 명성이 내외에 드날리지 못합니다. 배움은 현종(懸鍾)을 사양하는 데다 말조차 어수선하여 부끄러우니, 이같이 굽은 가지가 함께 헛되이 곧은 난초에 섞여 있으며, 이같이 갈대가 잘못 옥수(玉樹)에 비겨졌습니다. 이리하여 큰 바다가 깊고 넓어 한 방울 물 보태기를 기다리지 않음을 알았으니, 화악(華嶽)이 하늘에 닿았는데, 어떻게 진토의 흙 한 삼태기를 보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를 비유하면, 가을에 봉황이 저와 같은 춘림(春林)에 깃드는 것과 같아서 떨어진 잎사귀 하나가 백 갈래 가지에 영향을 주지 못하니, 떨어진 한 올의 터럭이 어찌 여섯 가지 깃대와 관련이 있다 하겠습니까?
바르게 말한다면, 명예를 우러러 맡기고 길마다 번거롭게 하니, 곡진한 정성이 비유하면 밝은 해와 같습니다. 삼변(三邊)50)에 뜻을 두지 않고 사교(四郊)51)에 힘쓰더라도 도리어 첩첩하기만 합니다. 강연이 뒤바뀌게 되어 가르침을 더하기를 요청하였는데도 폐기되면서 말할 때 슬픔으로 목이 메는 것을 어찌 모두 들추어낼 수 있겠습니까?
바라는 것은 조용히 장애물을 제거하여 처리하기 어려우니 다시 돈독하게 자문을 받고자 합니다.
혜진이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 원율사의 답서
편지를 보내주셔서 칭찬하시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내가 배웠다 하나 지엽적인 것이나 긁는 사람은 표준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며, 남 또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도중에 비록 일찍이 강의를 하였다 하나, 구멍 속으로 하늘을 내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후세에 모범이 되고 전대 철인(哲人)의 발자취를 잇겠습니까?
대체로 몸에 병이 낫지 않았으면서도 문인(門人)을 인도하였으니, 일대 스승의 성대한 업이 이로써 폐하여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홀연히 지나면서 긴긴 밤에 회포만 이어지니, 슬픔을 어찌 그치겠습니까?
매번 호사가들이 있어 날마다 억지로 청을 하기에 이에 늙음도 마다 않고 다시 스스로 힘쓰게 되었습니다. 법사와 같은 몇몇 분들이 원래 명가(名家)에서 출가하여 낙하(洛下)의 뛰어난 인재이므로 지금 그 입이 날랠 것이니, 반드시 논부를 찾아보고 율장을 맡아 지킨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나날이 진구(塵垢)를 끊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멀리까지 명성을 떨치는 뛰어난 스님이 되시어 중토(中土)의 개사(開士)52)를 모으신다면, 모두들 정해진 스승 없이 배우고자 먼 길도 마다 않고 찾아와 도를 묻고 의문점을 물어볼 것이므로, 참으로 한 시절의 즐거움이라 말할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오랑캐 군사가 침범하고 오랑캐의 말이 산하를 유린하니, 탑묘가 불살라지고 의로운 대중이 길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경화(京華:서울)의 늙은이는 자리에 누워 말을 못하고, 이에 다시 낫지 않는 고질병을 살펴보아야 해서 그 가르침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이을 수 없으니,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입에서 가시덩굴이 나오고 자황(雌黃)53)이 혀끝에서 잘못되었으니, 물을 데워서 얼음을 구한다는 말로도 충분히 비유할 수 없습니다. 가까이 돌아볼 수 있기에 바야흐로 몇 글자를 적었습니다.
원(瑗)이 아룁니다.
6) 천태산지의선사소수보살계문(天台山智顗禪師所受菩薩戒文:천태산 지의 선사에게 받은 보살계문) 수 양제(煬帝)
제자가 전통에 근거하여 선을 쌓으며, 황가(皇家)에서 자라면서 정훈(庭訓)을 일찍부터 따라 교화가 일찍이 시행되었습니다. 복택이 이르는 곳은 신묘한 기틀로 바로 깨닫고, 좁은 길에서 헤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대승(大乘)에서 편안히 노닐기를 바랐습니다.
속세에서 생명을 그치는 것을 비웃으며 피안으로 나룻배 돌리기를 맹세하였으나, 승려의 온갖 수행은 선행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보살의 10계(戒)를 수지하여 한결같이 지키는 것이 가장 으뜸이니, 비유하면 건물을 세우려면 반드시 먼저 기틀을 세우는 것과 같은지라, 공연히 헛된 것을 얽어 놓으면 끝내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ㆍ노자ㆍ석가의 문호는 모두 녹여 이루는 바탕이 되나, 법도와 규범이 없다면 누가 어떻게 이를 우러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다시 능인(能仁)을 받들어 화상(和上)을 삼고 문수를 암암리에 아사리(阿闍梨)로 삼더라도, 반드시 사람의 스승에 의지해야 성수(聖授)를 드러내어 전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멀리까지 감응하여 통하니, 파륜(波崙)54)은 무궁한 것에 정신을 다하고 선재(善財)55)는 법계(法界)에서 몸을 버렸습니다. 경전에 명문(明文)이 있는 것으로 헛된 억설이 아닙니다. 깊이 부처님 말씀을 믿어서 사의에 맞는 인도를 따르길 바랍니다.
선사께서는 불법 가운데의 용상(龍象)이시니 계주(戒珠)는 원만하고 청정하며 정수(定水)56)는 깨끗하고 맑습니다. 고요함에서 지혜를 발휘하는데, 어찌 분별에 막힘이 없겠습니까? 남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하며, 사양하여 손을 모으는 것으로 풍화를 이루었으니, 그 명성이 멀리까지 들려 대중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제자가 이것으로 경건하게 우러러 멀리까지 힘쓰고 운명의 노를 멀리까지 맞아들입니다. 어긋나는 인연을 생각할 때마다 남겨진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또한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마음이 시원하게 열리고 구름과 안개를 걷게 되면서는 바로 번뇌를 녹입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금성(金城)에서 천승회(千僧會)를 개최하여 공경스럽게 보살계를 받았는데, 계명(戒名)은 ‘효(孝)’라고도 하고, ‘제지(制止)’라고도 이름하였습니다. 방편의 지혜로 제도하여 근본으로 돌아가고 지극함을 받들어 대장엄(大莊嚴)을 지으니, 여래의 자비와 같이 하고 제불(諸佛)의 사랑을 널리하여 4생(生)을 외아들같이 평등하게 본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미 계를 받았으니 바로 법명(法名)을 붙여서 황제를 총지(總持) 보살이라 이름하였다. 황제가 머리를 조아리며 계를 받고 나서 “대사께서는 선정의 지혜를 안으로 녹여서 법의 연못으로 제도하시니, 참으로 ‘지자(智者)’라 받들어 말할 만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양고승전』에서도 그 대강을 약술한 것처럼 법사의 휘호를 내리게 된 동기이다.
7) 천태지자(天台智者) 선사가 양제에게 보낸 서신57)
글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 싣지 않고 『속고승전』에 편찬해 두었다.
8) 통략정주자정행법문(統略淨住子淨行法門)
- 서문 석도선(釋道宣)58)
정토에 머무른다고 하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부처가 교화를 열어 불법으로 인도하는 방편을 조술하고 군생들이 믿음에 의지하여 제도를 성취하는 책무를 모두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법의 보존 여부는 모두 믿거나 비방하는 일에 의존하는 것이다. 신명(神明)의 작용이 어둡고 밝은 것 또한 결국은 게으르고 부지런한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전륜왕(轉輪王)께서 일어나는 운명을 개창한 것은 겁초(劫初)에서 시작하였고, 부처님께서 기약했던 목표가 혼탁한 세상의 처음에 열렸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실로 이 때문이다. 참으로 순박함에 연유하여 초심을 맺으셨다. 그래서 기회에 따라 감응하는 것이 감각에서 뛰어났다. 교법(敎法)이 동쪽으로 흘러온 지 6백여 년간 도속(道俗)이 그 자취를 모두 우러렀다. 마침내 그 기틀을 깨닫고 약설(略說)을 밝히고서 가피받던 시절을 널리 찬양하게 되면서 청정한 규범을 유려(遺黎)에게 남기시고,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루어진 법규를 가르쳐서 이러한 글이 여기에 있으니, 근본으로 귀감삼을 만하다.
예전에 남제(南齊)의 사도(司徒) 경릉왕(竟陵王) 문선공(文宣公) 소자량(蕭子良)59)이 불교를 숭배하여 지극한 가르침에 깊이 정통하였는데, 경론을 주석하여 말씀의 이치를 대략이나마 기술하여 사도(邪道)를 내치고 정진도(正津道)를 열었다. 1승(乘)을 넓히고 7중(衆)을 앙양하였으니, 대대로 필해(筆海:文苑 또는 文海)라 일컬었다.
당시에는 지산(智山)이라 호칭하였는데, 혹 꿈속에서 독존(獨尊:부처님)으로 통하기도 하면서 천왕(天王)이란 아름다운 호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혹 패엽경(唄葉經)을 암암리에 전수하기도 하여 신도(神度)의 영명(英名)을 전하였으니, 그 덕을 상세히 규정하기 어려워 문득 따르는 것이 대개 빠진 것이 있다.
제(齊)나라 영명(永明) 8년(490)에 동방보광세계(東方普光世界)의 천왕여래(天王如來)께서 정주정행법문(淨住淨行法門)을 수립하신 꿈을 꾸었는데, 부연하여 ‘정주(淨住)’라고 하는 것은 바로 ‘포살(布薩)’60)을 번역한 이름이다.
이를 계기로 보면, ‘포살’은 천축의 말이고, ‘정주’는 중국의 말이다. 혹
‘증진(增進)’이라 이르기도 하며, 또한 ‘장양(長養)’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진도와 세속을 겸통하여 모두 수행의 자질을 품부받았다. 이른바 신업ㆍ구업ㆍ의업을 깨끗이 하는 것은 계율에 따라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정주’라 말하는 것이다. 또 ‘자(子)’라는 글자는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3귀의로서 7중(衆)61)이 정(情)의 티끌을 제어해서 선근(善根)을 늘려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가기 때문에 ‘정주자(淨住子)’라 부른다.
‘정행(淨行)’법문이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 업이 청정한 것이 세상에 교화를 행하고, 여러 가지 법문을 깨닫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본성과 현상에는 차별이 있어 연필을 잡는 데서 시작하여 붓을 놓는 데서 끝난다.
대체로 7순(旬)이 지나 질(帙)을 모두 마치고 나서 마침내 넓은 사원에서 법회를 열어 뛰어난 영재들을 성대히 운집시켰다. 원좌(元座)에 몸소 앉아 근본원리를 서술하였으니, 10중(衆)이 구름처럼 모여서 마치 화음(華陰)의 폐허에 모이듯 하였고, 사부대중이 넘치는 것이 마치 영산(靈山:영취산)의 법회에서 부처남을 뵙듯이 하였다.
대중들은 모두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을 들었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여 귀를 기울인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강표(江表)62)에서 그 덕을 형통시키고 도를 체득하여 권도(權道)를 타게 하였는데, 종합적으로 익혀서 그 정신세계[靈府]를 열었다.
진(陳)나라가 평정되고 수(隋)나라가 통일되자, 그 혜택이 관하(關河)63)까지 전해졌다. 전도(全道)한 것은 이그러짐이 없이 장부(藏部)에 갖춰져 있었다. 후배들이 배움이 부족하고 식견이 어두워 예전에 닦았더라도 일찍이 잘 찾아보지 못하고 마음대로 억누르고 단정하여 위경(僞經)이라 이름짓고서 서로 이어서 내쳤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많았던 것은 슬퍼할 만한 것이다.
내가 한가한 틈을 타서 시험삼아 이를 검토해 보니 글이 정미하여 이치에 근본적인 믿음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완전히 스승의 마음임을 알 수 있는데, 마음을 어떻게 받들어야 한결같이 이러한 데 이르는가? 『지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에 편집하고 기술하여 불경을 널리 찬양한 것은 모두 ‘아비달마(阿毘達磨)’라 이름하였으니, 바로 12부경(部經)에 포함되는 것이다. 성교(聖敎)의 신명한 비결은 그 이치가 범부의 생각을 초월해 있는데, 단지 초학으로서 때로 우매한 사람이 이를 잘 살펴보지 못하고 서둘러 교정하여 대충 한 권을 만들었다.
바르고 밝은 개요를 뽑아내고 무성하고 아름다운 지엽을 모았으니, 참으로 반 보를 딛는
초심자(初心者)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며, 후예에게 전대의 자취를 표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도상(圖像)을 해설하여 널리 절의 벽에 붙였다.
자못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가 모두 깨닫고 분별을 내는 이나 신심을 내는 이가 더욱 굳어지게 하여 만세(萬歲)의 도를 멀리 열고 7중의 기틀이 성립되기를 바란다. 공경하여 믿는 이는 ‘정행(淨行)의 사람’이라 칭하고 근본으로 삼아 이를 행하면, ‘정주(淨住)의 안목’을 잃지 않으니, 여러 친구들에게 내려서 그 뜻을 이와 같이 알린다.
- 정주자정행법(淨住子淨行法)과 왕융(王融)64)을 기림 소자량(蕭子良)65)
(1) 황각변덕문(皇覺辨德門:황각의 공덕을 기리는 문)
아흔여섯 가지의 도 가운데 부처님의 도가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것은 그 이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무릇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덕을 기리고자 함이니, 덕이 아니면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름이 있더라도 반드시 덕을 갖추는 것은 아니지만, 덕이 있으면 그 이름은 헛되이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이름에는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음을 알고, 덕에도 허실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어찌 진도와 세속을 혼동하고 이름을 훔쳐 진실함을 가칭하면서 그것을 분별하고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교설에 따라 법도를 달리하고, 방향과 자취를 나누어 달리하는 것을 보면 일찍이 그 이름만이 있고 덕을 결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칭호는 없으면서 그 쓰임을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으로 이름만 있고 덕이 없는 것은 외도(外道)이고, 덕도 있고 이름도 있는 것은 불도(佛道)임을 알 수 있다.
비유하면 바다를 건너고자 나룻배에 의탁하고, 길을 가고자 발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곧은 마음이 도량인 것은 헛된 거짓이 없기 때문이고, 발원하여 행(行)하는 것이 도량인 것은 일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4홍(弘)과 6도(度)를 모두 도량이라 부르니, 이처럼 훌륭한 인연(因緣)에 의지하여야 이와 같은 신묘한 과보(果報)를 얻게 된다. 그래서 해탈하여 그 누(累)를 떠나고 반야로 그 비춤을 다하며, 상호(相好)로써 그 용모(容貌)를 드러내고, 법신으로 그 덕을 빛나게 한다.
그 지극한 어짊을 말하면 바로 세 번의 생각으로 그 생각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고, 그 자재로움을 말하면 두려움 없이 홀로 걷는 것이고, 그 쌓인 공을 말하면 10력(力)을 쓰임새로 삼는 것이다. 그 묘하고 지극함을 우러르면 불공(不共)의 법은
방편에 신묘하게 통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법문이 된다.
3세를 통달하여 만물을 모두 비추어 뛰어나고 밝게 드러나고, 영명하신 성인은 군유(群類)를 뛰어넘었다. 그러므로 여래를 호칭할 때는 열 가지 이름이 온전히 갖추어지고, 이미 생사의 어둠을 깨닫고 다시 깨어나지 못한 이를 일으켜 세우니, 이것은 그 이름과 덕을 가지고 거두지 않음이 없고, 아름다운 덕을 갖추어 구비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형태가 단정하면 그림자도 곧고, 말소리가 우아하면 메아리도 부드러움을 알 수 있다. 추한 용모를 거울에 비추면서 눈부신 자태가 나타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고, 굽은 몸을 물에 비추면서 군류(群類) 가운데 뛰어나게 보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서(經書)에서도 “산에 오르지 못하면 하늘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물을 재어보지 못하면 땅이 두터움을 모른다”66)고 일렀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이학(異學)은 모두가 부처님의 대도(大道)에서 누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세간에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고, 출세간에도 상ㆍ낙ㆍ아ㆍ정이 있는데, 세간에는 이름만 있고 이치가 없으며, 출세간에는 이름도 있고 이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육사외도(六師外道)가 경전을 짓고 나서 부처님께 명(名)과 덕(德)을 여쭙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최정각(最正覺)을 스스로 증득하여
일체의 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의 지혜로 두려움이 없으니
자연히 맡길 만한 스승이 없다.
홀로하여 비길 만한 짝이 없으니
스스로 정도(正道)를 얻었다.
여래는 하늘과 사람의 존자이시니
일체지(一切智)의 권세를 갖추었다.
지금 각자가, 지극한 덕은 돌아갈 곳이 있고,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는 목표를 달리함을 알고, 선과 악이 길을 달리하며 범부와 성인이 길을 따로 하는 것을 안다.
다행히도 인연을 믿고서 비상(非常)하게 그 결과를 깨달을 수 있을 때 지혜에 순조롭게 하여 정도(正道)에 들어간다. 여러 현인들이 시냇물 흐름을 돌이키지 못함을 애도하면서67) 손에 손 잡듯이 몰래 흘러가는 것을 깨닫고 생사의 무궁함을 근심하며 아정(我淨)의 항락(恒樂)을 사모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그 기풍을 우러르며 그 교화를 맛보고자 애욕을 끊고 영예조차 사양하는데, 어찌 형명(形命)으로 서로 다툼만 늘리는 것을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성품을 맑고 조화롭게 하고, 가진 몸을 불쌍히 여기며 평등한
마음으로 제도하여 법을 은혜롭게 베풀되, 범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으면서 구하는 것이 있으면 거역하지 않고, 늘 대승(大乘)에 뜻을 두며 내외가 서로 부합하게 하면, 이것이 청정도문(淸淨度門)을 구족하였다고 일컫는 것이다.
○ 변덕문송(辨德門頌) 남제(南齊) 비서승(秘書丞) 왕융(王融)68)
자주색이 붉은빛을 어둡게 하듯이69)
광인(狂人)이 철인(哲人)을 망치는구나.
엇갈린 길목에 재갈 날리고
어긋난 근원에 삿대 젓노라.
수려한 경치는 때로 어두워지고
맑게 펼쳐지는 마음 늘 이지러지네.
물보라 몰아쳐 큰 파도 일고
연기가 다하여 불씨 꺼지네.
감정의 실마리는 공연히 모이고
이치가 향하는 것은 헛되이 덮인다.
마음을 밝히지 못하였는데
누가 성인의 법규를 몰아가는가?
(2) 개물귀신문(開物歸信門:만물이 개화하여 귀의케 하는 문)
여래께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외아들처럼 똑같이 사랑하는데, 어찌 선권(善權)과 방편(方便)으로 널리 제도하여 나루터를 건네주지 않은 적이 있는가?
그래서 6길[丈]의 몸을 드리워 신령한 자태를 드러내시어 방소(方所)에 따라 감응하시니 법신이 하나가 아니다. 아울러 그 금빛 자태를 그 몸에 의탁하시고 상호(相好)를 장엄케 하여 중생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기쁘고 즐거운 광경을 보게 된다.
다니시면 대천세계가 진동하여 온갖 마군을 항복 받으시고, 머무르시면 여러 가지 법에 통달하시어 외도가 그 교화에 귀의하고, 앉으시면 방등(方等)을 펼쳐 보이시고 대석천(大釋天)과 범천(梵天)70)도 우러러보고, 누우셔서 일실(一實)의 도를 여시면 3승(乘)은 덕을 아뢰고, 말씀을 하시면 3도(途)에서 고통을 그치게 되고, 웃으시면 4생(生)이 복락을 받게 되며, 그 말씀을 들으면 도를 증득하게 되고, 그 형체를 보면 해탈하게 된, 이러한 대가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지금 비록 정령(精靈)을 받았더라도 겹겹의 장애에 어둡고 우매해져서 나아가더라도 국성(國城)에서 나누어 지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물러서서는 여덟 가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니, 장차 죄업이 깊은 것에 연유하여 번뇌는 견고해지고, 예전의 부처님과 이후의 부처님, 오는 성인과 가까운 현자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만이 아니라, 악도를 끊을 길이 없는 것을 깊이 근심한다. 이와 같은 마음을 내고 보니 참으로 절실한 마음이 슬프기만 하다.
이와 같이 생각을 돌이켜보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니, 어찌 묵묵히 흘러나가 고해에 안주하고 이글거리는 불에 빠지면서도 스스로를 뽑아내지 못하는 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비분을 일으켜 늠름하게 감정을 끊고 생각을 꺾어 증상심(增上心)을 내어야 한다. 참회해서 죄를 멸하여 여러 가지 진루(塵累)를 없애야 믿음에 귀의할 수 있다.
스스로 그 뜻을 견고히 하지 않고 몸이 없어지고 목숨을 버릴 때까지 수고롭게 애쓰면서도 한탄만 머금는 이는, 아마도 번뇌의 치성한 불길을 꺼뜨릴 길이 없어지게 되면, 무명으로 더욱 어두워져 이를 열어 젖힐 기대를 하지 못할 것이다.
비유하면, 감옥에 다시 갇혀서 온갖 고통을 모두 맛보며 큰 족쇄를 차고 큰 형틀에 박혀서 쇠공을 차고 쇠사슬에 엮여서 그 몸을 처박게 되는지라, 곪은 상처가 썩어 문드러져서 형해(形骸)에 두루 퍼진 채로 악취가 나며 족쇄에 묶인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이러한 장계로 국주(國主)나 대신을 만나기를 요구하니, 다시 일심으로 게으름 없이 상서로운 일 만나기를 간절히 하지만 혹 높은 전각에 오르거나 옥연(玉筵)을 밟더라도 말미암는 결과가 없을까 두렵다. 설사 불쌍한 마음으로 굽어보기를 바라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온갖 죄악을 갖췄기에 괴로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형가를 던지고 사슬을 벗고 때를 씻어 복장을 단정히 하면 왕이 나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현신할 것이다.
지금 믿음에 귀의하고자 해도 이와 같이 한다. 장차 여래의 상호와 광명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신업ㆍ구업ㆍ의업을 깨끗이 하고 마음의 때를 씻어내야 한다. 6진(塵)의 애욕에 물든 것이 영원히 없어져 일어나지 않고, 10악(惡)의 무거운 장애가 깨끗이 소멸되어 남김이 없어지며, 업의 누(累)가 이미 제거되어 겉과 속이 다 같이 깨끗해지면, 바야흐로 가유(迦維)71)에 밝은 지혜를 운용할 수 있고, 보찰(寶刹)에 청정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여러 가지 세상 일의 괴로움을 없애고 믿음의 문으로 귀의해 들어가면 반드시 법신을 우러러보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니, 마치 죄인이 형틀과 사슬을 벗으면 자연히 왕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내가 지금 번뇌를 없애면 반드시 여러 부처님을 볼 것이다. 만약 이렇지 않으면 비록 정중함을 다시 갑절로 하여도 그저 장애가 있어 형통하기 어려울 것이니, 어떻게
오체투지를 태산이 무너지듯 하지 않으면서 일심으로 믿음에 귀의한다고 다시 의심하는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지극히 존귀하신 황태자와 칠묘(七廟)의 성신(聖神)과 용신(龍神)과 8부(部)와 일체의 지극하게 괴로움을 받는 중생을 위해서 시방의 일체 삼세제불(三世諸佛)에게 공경히 예배하면서 참회를 구하여야 한다.
참회하고 난 이후에 늘 행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을 조화롭게 하며, 마음을 감내하고 받아들이게 하며, 마음을 방만하지 않게 하고, 마음을 적멸하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참되고 바르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잡스럽게 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뛰어나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크게 가져야 하며, 마음을 자비로 안락케 하여야 하며, 마음으로 선법을 기뻐하여야 하며, 마음으로 일체를 구하여야 하며, 마음으로 중생을 수호하여야 하며, 마음에 나와 남의 구별이 없게 하며, 마음을 여래와 같이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넓고도 뛰어난 묘심을 발휘하면서 오로지 많이 듣기를 구하고 떠나는 것을 닦고 선정을 바라며, 청정을 받들어 지키고 은덕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언제나 즐거운 생각을 품어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다.
○ 귀신문송(歸信門頌)
허망하게 태어나 부질없는 목숨
목적없는 마음에 감정은 어긋나고
업장의 구름에 그림자 지네.
지혜의 둥근 해 햇살 감추니
도 닦는 길 굽이굽이 이어져
밤을 새워도 돌아갈 곳 없네.
태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72)
큰 바다 떠도니 기수에 머무르기 어렵네.
옥돌을 가져다 옥이라 하고
자갈을 가리켜 구슬이라 하네.
그 멀지 않은 곳에서 미혹되니
바른 것이 아니면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3) 척제삼업문(滌除三業門:3업을 씻어내는 문)
산업ㆍ구업ㆍ의업 이 세 가지는 환난을 불러들이는 으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몸이 있으면 고가 생겨나고, 몸이 없으면 고가 소멸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그것이 근심스러운 고통임을 알았다면 이를 물리쳐 소멸시켜야 한다. 고를 소멸시키는 요점은 참회보다 나은 것이 없다. 참회하는 법은 먼저 그 마음을 정갈히 하고, 그 생각을 고요히 하며, 그 몸을 단정히 하고, 그 모양을 엄숙히 하며, 그 몸을 공손히 하고, 그 용모를 엄숙히 하면서 속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서 비루하고 부끄러운 것을 밖으로 표현한다.
『서경』에서도 “예는 공경 아닌 것이 없으며, 거만함은 오래할 수 없다”73)고 말하였고, 또 “허물이 있더라도 고칠 수 있으면 허물이 없다고 말하겠다”74)고 하였다. 경전에서도 “일체 중생을
공경하되 부모처럼 생각하며 각자 그 허물을 성찰하고 난 후에 참회해야 한다.
대중들이 무시세계(無始世界) 이후 금생에 이르도록 몸과 마음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고업(苦業)을 이루고, 아울러 어리석음 때문에 지극한 가르침을 많이 거역하여 마침내 교만하고 게을러져 그 행동거지가 공경스럽지 않고, 앉아 졸면서 게으르게 하며, 행동을 가볍고 오만하게 한다.
혹은 승방(僧坊)에 출입하면서 불당(佛堂)에 오르더라도 절하고 위요하면서도 그 몸을 공손하게 낮추지 않는다. 혹 부모나 스승이나 선배나 상좌ㆍ중좌ㆍ하좌 및 친구 앞에서 복장을 단정히 하지 않고 거동을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서 예법(禮法)이 아닌데도 보면서 쓰임새가 몸의 움직임에 어긋난다. 혹 삼보나 친지에 귀속되는 물건 내지 일체의 남의 물건을 훔치고, 뺏거나 강탈하고 증감을 속이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서로 능멸하기도 한다.
혹 음욕을 마음대로 하되 적절한 때가 아니고 적절한 장소도 아닌데, 금수를 막지도 않고 친족도 피하지 않는다. 혹 5역죄(逆罪)75)를 지어 물과 불에 빠뜨리거나 태우며, 남을 공격하여 산 사람을 묻으며 죄 없는 이에게 해독을 더하기도 한다. 혹 코를 자르고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귀를 자르고 발뒤꿈치를 자르거나, 묶어 놓고 때리거나 매어 놓고 활을 쏘아 그 몸을 상하게 하거나, 그 몸을 손상시켜 잘라 내거나 해쳐서 가죽을 벗기거나, 도살하여 몸을 갈라 불에 굽거나 끊어서 태우기도 하니, 이와 같은 죄는 음욕 때문이거나 재물 때문이거나 탐욕 때문이거나 어리석음 때문이다.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함이 없고 성인의 지혜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지금 이와 같은 허물을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두렵고 부끄러우며 슬프고 후회되며 고통스럽고 참담할 따름이다. 중생의 형상[有相]에 해를 입히는 사람은 지금 이후로 참다운 선우(善友)가 되어 세세생생(世世生生) 법으로써 서로를 가르치되, 시방세계 부처님께서 특별히 보살피는 마음을 베풀어 주실 것을 발원하며 몸으로 지은 업장을 참회하여 영원히 다시 짓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구업(口業)을 참회해야 하는데, 이것은 근심과 괴로움을 초래하는 문이고, 화란을 쌓는 시초이다. 『논어』에서도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76)고 하였고, 또 “말과 행실은 군자의 추기(樞機)이니 추기가 한 번 발하면 그것이 영예와 치욕의
주인이 된다”77)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나쁜 말로 이간질하고 꾸민 말로 거짓되게 말하며 번드레한 말로 아첨하면서 교활하게 혼란만을 얽어 부채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이 초래하는 화근이 실로 무거움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자애경(自愛經)』에서 이러한 업상(業相)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또 경전에서는 “목숨을 잃는 인연일지라도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어찌 장난스런 웃음으로 옳고 그른 것을 얽을 수 있겠는가? 언제나 곧은 마음으로 구업을 참회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음으로는 의업을 참회해야 하는데, 의업은 신업과 구업의 근본이며, 죄와 복의 문이다. 『서경』에서도 “7정(情)을 단속하고 9사(思)에 힘써서 생각에 삿됨이 없이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78)고 말하였다. 여기서 ‘7정’이란 희(喜)ㆍ노(怒)ㆍ우(憂)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증(憎)ㆍ욕(欲)이다. ‘9사’란 보는 것은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듣는 것은 밝게 듣기를 생각하며, 인색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은 충성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경건하게 처리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것은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 분노는 곤경에 처할 수 있음을 생각하고,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모두 마음을 씻어내어 삿된 것을 없애고 올바름에 힘쓰는 방법이다.
경전에서는 “탐욕(貪慾)ㆍ성냄[瞋恚]ㆍ어리석음[愚癡]의 사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으로 온갖 악한 일이 흘러나오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지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가? 저 보는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난다. 그래서 입으로 나쁜 말을 하는 것도 그 말은 생각으로부터 드러나서 바로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을 경계하고 그 몸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것은 먼저 그 마음을 누르고 다음으로 생각을 꺾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한 곳만 제어하면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마음이 도를 이해하면 몸의 허물은 막지 않아도 그치게 되고, 생각이 이치에 순응하면 입의 허물은 방비하지 않고도 소멸된다. 그러나 신업과 구업은 거칠어서 이를 억눌러 끊어 버리기 쉽지만 생각은 미세해서 이를 확실히 없애기는 어렵다. 자세한 것은 여러 경전에서 그 모양과 상태를 설명한 것과 같다.
○ 참회삼업문송(懺悔三業門頌:3업을 참회하는 문의 노래)
생사(生死)에서 비롯된 즐거움
몸을 온전히 하기만 걱정하네.
업장은 마음의 소산이려니
매사가 말씨에 달려 있다네.
늙기 쉬운 것이 모두 의지해 있고
영화와 치욕이 여기에 얽매여서
잘 기른 준마가 걷지 못하고
다듬은 좋은 쇠 큰 솥 못 되네.
미혹의 단서는 실마리로 드러나고
애욕의 경계는 높이 드리워져 있다.
초선(初禪)79)도 힘쓰지 못하는데
4선(禪)80)을 언제나 오르겠는가.
(4) 수리육근문(修理六根門:6근을 다스리는 문)
즐거움은 생멸에 연유하고 근심은 몸을 보존하는 것에 연유한다. 업의 자량(自量)도 생각에서 이루어지고 일도 말에 빌미하니, 경전에서는 “죄는 정해진 형상이 없이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인연이 생기므로 지금은 또한 인연에 따라 소멸한다. 앞서 중한 악을 참회하였다면 3업이 모두 밝아졌을 것이다. 또 그 몸가짐을 장중하고 엄숙하게 하려면 반드시 6근(根)81)을 청정하게 해야 하니, 진실로 마음이 여러 가지 의식(意識)을 부리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 마치 임금이 여러 신하를 모두 부리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인군(人君)이란 썩은 밧줄로 여섯 말[六馬]을 모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만물을 부리는 데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망하는 데 이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일로 증험해 보면 분명하게 모두 이해된다.
단지 온갖 대상이 즐비하게 안팎으로 감응하고 발휘되는 것으로써, 더욱 서로 의존하여 의식과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마음의 왕이 바르면 여섯 신하가 사특하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반드시 제각각 참회하여 근본 의식을 제어해야 하는데, 이는 『법구경(法句經)』의 ‘심의품(心意品)’의 설과 같다.
예전에 어떤 도인이 물가에서 도를 배우면서도 단지 6진(塵)이 일찍이 멈춘 적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거북이 하수(河水)에서 나왔을 때 물개가 거북을 물어뜯으려 하자 거북이 머리와 꼬리 및 네 다리를 움츠려 갑주(甲冑) 속으로 숨어서 얻을 수 없었는데, 개가 떠나자 다시 나와 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인이 이를 보고 깨달았으니, “내가 거북만 못하구나. 6정(情)을 함부로 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몰랐구나. 5도(道)를 윤회하는 것은 모두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반드시 6근의 죄업을 밝게 해야 한다.
나는 무시이래로 안근(眼根)의 인연으로 여러 가지 빛깔을 쫓기 때문에 빼어나게 아름다운 일을 보아도 배워 익히지 못하면서 선하지 못한 업을 보고는 그대로 따라 실행하였다. 이러한 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깨끗함이 매우 적어서 오직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이 빛깔만을 보며 현성(賢聖)이 신통의 방편으로 작용하는
색을 보지 못하여 비록 두 눈이 있더라도 장님과 다름이 없으니, 이야말로 크게 부끄러운 첫 번째의 일이다.
나는 무시이래로 이근(耳根)의 인연으로 바깥의 소리를 따르면서 학설을 듣고서 선한 것을 바로 하며 충심을 믿고, 아름다움을 힘쓰면서 배워 익히지 못할 때는 분한 생각을 내면서 사악한 일을 듣고는 기뻐하며 그대로 따라하였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오직 일체의 선하지 못한 음성만을 듣고 청정한 정법(正法)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시방의 제불이 늘 묘법을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지금 듣지 못하는 것은 귀머거리와 다름이 없으니, 이야말로 크게 부끄러운 두 번째의 일이다.
나는 무시이래로 비근(鼻根)의 인연으로 교화를 바르게 하고 경계하는 신비한 향기를 맡을 때는 처음에 향기 맡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장애만 낳았으나, 여러 악욕(惡欲)을 낳고 삿되게 꾸미는 향내를 맡고는 마음속 깊이 집착하였다. 이러한 업보로 말미암아 대지옥에 떨어지거나 변지(邊地)에 태어나 성현의 반절의 향기를 맡지 못하고 3승(乘)과 4섭(攝)82) 등의 향기도 맡지 못하며, 윤회하여 선법(善法)과 멀리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야말로 크게 부끄러운 세 번째의 일이다.
나는 무시이래로 설근(舌根)의 인연으로 지은 허물이 아주 많으니, 맛있는 것에만 집착하여 설법을 깨끗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죄업으로 늘 생사에 빠졌으니, 이것이 크게 부끄러운 네 번째의 일이다.
나는 무시이래로 신근(身根)의 인연으로 여러 죄업을 많이 지어 스스로는 중시하면서 남을 가벼이 여기면서 어리석은 애착을 늘렸다. 이러한 업보로 말미암아 미천함에 떨어지는 과보를 얻어 뛰어난 부처님의 인연을 반연하여 붙들 수가 없었다. 이것이 크게 부끄러운 다섯 번째 일이다.
나는 무시이래로 의근의 인연으로 온갖 죄악을 지었으니, 지인(至人)은 교설을 통하여 고해(苦海)를 벗어나고 요령을 내게 하더라도 마음으로 기쁘게 행하지 않고 도리어 거역하는 마음만 내면서 이단의 학문을 배워서 죄의 씨앗을 심는 것만 도모하여 바른 신심이 없어지게 되었다.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며 아견(我見)만을 늘려 정법에 어긋남이 날로 무거워지다가 죽을 때 이르러서야 겨우 헛된 허물을 참회하게 되니, 이것이 크게
부끄러운 여섯 번째의 일이다.
○ 청정육근문송[淸淨六根門頌:6근을 깨끗이 하는 문의 노래]
어여쁜 여자[傾都]83)에 마음 쏠리니
다리를 감도는 음악84)과 같고,
살찐 말 가죽옷 차려 입고서
맛있는 고기에 술만 마시니
암흑이 더욱 자라나
어리석음으로 욕망만 따른다.
넋 없는 모습에 마음은 허망하여
몸과 마음은 달콤한 것만 바라네.
신령의 꽃망울 뿌리 자르고
해바라기는 발걸음을 보호하니,85)
벌레와 풀도 생사를 근심하는데
사람이 어째서 이만 못한가.
(5) 생로병사문(生老病死門:생로병사의 문)
저 원겁(遠劫) 이래를 살펴보면 3업에 묶이고 6근에 미혹되어서 마침내 애욕에 물들어 업을 윤택하게 한 것에 의해 지금까지 고해에 빠져 있었다.
생로병사는 참으로 대고(大苦)이니, 경전에서도 “한 몸이 죽어 없어지면 다시 한 몸을 받게 되니, 나고 죽는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어서 천하의 초목을 모두 잘라 제비를 삼아 나의 옛 몸을 따져 보더라도 셀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통달한 이는 초탈한 마음을 내어 속박된 세계 밖으로 높이 올라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을 탐하여 언제나 생사의 감옥에 빠진다. 그래서 반드시 허물을 알아야만 영원히 중생의 세계를 떠날 수 있다.
『포태경(胞胎經)』에서 “중생이 처음 수태할 때는 어둡고 아득한 것이 마치 먼지가 떠다니는 것 같은데, 태중에 열 달 동안 있으면 마흔두 번 변하다가 식(識)이 점차로 미세해지면서 괴로움이 독해져 고통을 참기 어려우며 냄새나고 비좁은 것이 감옥보다 더하고, 배고프고 갈증나며 춥고 더운 것이 아귀보다 더하고, 어미가 배불리 먹으면 갑자기 눌리고, 어미가 굶주리면 숨이 끊어질 듯하고, 차가운 것을 먹으면 얼음 속에 있는 것 같고, 뜨거운 것을 먹으면 불 속에 있는 듯하며, 물을 많이 마시면 큰 바다에 떠다니듯 하고, 급하게 걸으면 험난한 계곡으로 떨어지듯 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흙더미에 눌린 듯하고, 오래 서 있으면 변소에 매달린 듯하다. 참으로 아래로는 냄새나고 위로는 누르는 것이 괴롭지 않은 때가 없으니, 장차 태어나려고 할 때는 그 괴로움이 갑절이나 되는 것이 마치 벌거숭이로 칼날을 밟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찢어지듯 한다.
비록 이러한 고통을 가지고도 다시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하루나 백 일 또는 한 달이나 열 달간 혹
태중에 있다가 낙태되기도 하고, 혹 태어나다가 어미와 자식이 함께 목숨을 잃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현세의 생이 참으로 큰 고통임을 잘 생각하여야 하니, 다시 늙는 고통을 생각하여야 한다. 경에 “나이가 많아지면 근(根)은 원숙해지지만 형체가 변하고 안색이 쇠퇴하는데, 앉았다 일어서는 것도 몹시 괴로우며 남은 목숨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열반경』에서도 “비유하면, 연등은 오직 기름에 의지하는데 기름이 다하면 빛도 다하여 오래가지 못하듯이, 사람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오직 왕성한 기름에 의지하는데 왕성한 기름이 다하면 늙고 쇠퇴한 불길이 어찌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또 그 심지를 자르듯 하여 다시 쓰지 못하는 것이 마치 서리 맞은 꽃을 만나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것과 같다. 또 경전에서 “이 날이 지나고 나면 목숨 또한 차츰 감소하니, 마치 물이 적은 곳의 고기와 같으니,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렇게 늙는 것도 다시 큰 고통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병의 고통을 생각해야 하니, 모두가 풍(風)ㆍ한(寒)ㆍ냉(冷)ㆍ열(熱)과 음식의 부조화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네 계절이 상도를 바꾸면 물과 돌도 도움에 어그러진다. 하물며 이같이 거짓으로 화합한 몸과 위태로운 형체가 어떻게 4대(大)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고 번뇌가 없는 일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고통과 근심이 그 몸에 닥치고 마음의 번뇌에 수심만 쌓이니, 살기를 바라도 나은 것이 없고 죽기를 바라도 끊어지지 않으니, 고통이 백 갈래이나 끝없는 근심은 저절로 맺힌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싸 처자식마저도 낯빛을 바꾸고, 형해(形骸)를 제대로 거두지 않으니, 곁에 있는 사람조차도 낯을 찌푸리는데, 하물며 홀몸으로 병들면 누가 이끌어 도와주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자애로운 아비나 효성스러운 자식이라도 병들어 죽을 때에는 서로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야말로 지극한 말씀이다. 실로 지극한 고통을 당하게 되면 다시 죽는 고통을 생각할 것이다.
경전에서는, “죽는 것이란 다하는 것이다. 기가 끊어져서 신명이 떠나가니 형해만이 쓸쓸해진다. 사람과 만물은 하나같이 나서 죽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경전에서는, “떠나는 곳이 너무나 멀어서 반려조차 없고, 허물어지는 것이 없어서 이를 보는 이는 3독을 근심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다시 “홀로 살고 홀로 죽으니 스스로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어둡고 아득하여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다시 성인이 몸이 있는 것을
근심으로 여겼으니, 어찌 다시 죽고 나서 생을 받겠는가?
5도(道)를 왕래하며 내 정신을 수고로이 하여 탐욕의 근원을 끊고 그 윤회전생하는 근본을 자르기로 맹세하였으니, 그래서 죽는 고통은 실로 이 몸에 연유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출가하시면서 말씀하신 것도 실로 이러한 뜻이다.
○ 생로병사문송(生老病死門頌)
화려한 꽃송이 변하기 쉽고
무성한 파초는 속이 비었네.
머리카락 희고 살가죽 늙어가면서
가련한 석양이 해를 재촉하네.
두 사람 시동도 말을 피하고
열 봉우리의 무산(巫山)86)도 소용 없으니
한평생 덧없이 가버리니
높다란 소나무 쓸쓸하구나.
바뀌자마자 혼백 변하니
인연의 업 따라 새 몸 받아서
탯줄을 빨자니 어이할손가.
오호라, 무엇에 골몰하는가?
(6) 극책신심문(剋責身心門:신심을 독려하는 문)
몸은 고통의 뿌리이니 스스로 지어서 모인 것이다. 생사 가운데서 다시 악업만을 늘려가므로, 이를 반성하여 부처님의 말씀에 따를 수가 없는지라, 이 때문에 특별하게 자신을 깊이 문책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 입에 담지도 말며, 자기 몸에 악이 있으면 마땅히 이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남의 허물을 들으면 마치 부모 이름을 듣듯이 하라.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고 말하였고, 다시 “군자는 자기 허물을 드러낸다”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남의 착함은 칭찬하여도 자신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경에서는,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고양하여 그 착함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비유가 될 수 있으니, 죽이지도 말며 몽둥이로 때리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논어』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87)고 말하였다.
지금 경서(經書)는 서로를 반영하고 있으니, 내외의 가르침은 그 근본은 같으나 바로 뜻도 다르고 이름도 달리한다. 만약 이치가 어긋나고 뜻을 넘어서는 이라면 이처럼 목표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외’라 일컬은 것은 본래 형체로 구분한 것이 아니고, 단지 마음의 표현으로 말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시어 미혹을 끊게 하셨으니, 마치 좋은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노자』에서는, “천도(天道)에는 친한 것 없이 오직 어진 사람과 함께한다”88)고 말하였으니, 만약 출가한 사람이 공(空)하여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생사를 떠나서 출세법(出世法)을 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내법(內法)이 되고, 이것과 어긋나는 것이 외법(外法)이 된다. 속가에 있는 사람이 삼보에 귀의하여 계율을 지키며 선을 닦고 예의를 받들어 행한다면, 이것은 내법이 되고 이와 어긋나는 것이 외법이 된다. 지금 내외도속(內外道俗)이 모두 내법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그 마음에 연유한 것이고, 바깥으로 사악한 이름도 행실에 있음을 알지만, 어찌 외법의 악을 버리고서 내법의 선을 어질게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수행을 하려고 하면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니, 이같이 하지 않고는 나아가기를 구하는 것이 헛된 이름인 반면, 물러나 단속하는 것이 알맹이 있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천리를 건너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식량을 준비하고 발이 건강해야 다다를 수 있고, 피안에 오르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지혜의 양식을 모으고 계율의 발을 가져야 오를 수 있다. 과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실로 물러나 살피면서 깨닫고 서로 경중을 비교하는 것에 연유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명을 끊고 늙고 죽음을 물리쳐서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지혜의 빛이 발하고, 네 가지 모양이 바뀌면 계율의 공덕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양하여 물러나는 것은 진보의 조짐이고, 진보를 탐하는 것은 퇴보하는 싹임을 알게 된다.
구하여 얻는 것은 모두가 헛된 것이니, 실로 애정이 깊기 때문에 순식간에 떨어지는 고통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외도의 법이다. 한 걸음 물러나 얻는 것은 실다운지라, 생각에 깊이 연연함이 없기 때문에 늘 편안한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불도(佛道)의 법이다.
지금 단지 한 걸음 물러나 단속해야 하는데, 스스로를 견책하는 데 미치지 못하고, 진보를 구하는 데 뜻을 둔다면 반드시 자신을 손상시키고 만물을 상할 것이다. 물러나 허물을 관찰하면 너와 내가 함께 이로워지니, 마땅히 마음과 입을 견책하는 것이야말로 8정도(正道)의 길임을 알아야 하며, 몸과 행을 살피고 단속하는 것이 해탈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상선(上善)은 스스로를 책망하기에 돌이키지 못하는 선이 없게 된다.
○ 극책심행문송(剋責心行門頌:마음과 행실을 책려하는 문의 노래)
저 덕 닦는 일 살펴보니
잠시라도 한가한 틈이 없다.
소소한 지혜를 돌아보고서
헛되이 편안타 자랑 삼누나.
어찌 두루 통하는 방도를 가지고
이 덤불[榛荒]89)을 걷어내지 못하겠는가?
비록 거듭된 밝음90)이 있어도
반딧불 빛처럼 희미하다네.
속정(俗情)을 따르면서 안으로 저버리면서
바깥 일 집착해 밖으로 상하네[傷].
겹그물 단번에 치워 버리고
공허한 생각만 높이 나네.
(7) 검부삼업문(檢覆三業門:3업을 규찰하는 문)
견책하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이치를 살피는 뜻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로써 마음을 단속하고 그 닦아 익힐 것을 비교한다. 이미 미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어 송구스러움만 더욱 늘어나게 되는데, 어떻게 ‘단속하고 비교한다’고 말하겠는가?
바로 나의 이 몸을 살펴야 하는 것으로, 아침부터 정오에 이르기까지 정오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 저녁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밤에서 새벽에 이르기까지, 1시(時)ㆍ1각(刻)ㆍ1념(念)ㆍ1경(頃)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마음이 있고, 몇 가지 행이 있으며, 몇 가지 선이 있고, 몇 가지 악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다시 번뇌를 끊고자 하는 마음이 그 얼마이며, 마장을 항복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 몇 가지이며, 삼보와 4제(諦)를 염하는 마음이 그 몇 가지이며,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을 염하는 마음이 그 몇 가지이며, 부모의 은혜로운 자비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그 몇 가지이며,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려는 마음이 그 몇 가지이며, 생각을 보살도업(菩薩道業)에 발명하는 마음이 몇 가지이며, 보시하고 지계하고자 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고, 인욕하고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며, 선정(禪定)으로 지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며, 5도(道)를 자유로이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며, 행하기 어려운 행을 책려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며, 구별하기 어려운 것을 변별하고자 구하는 마음은 몇 가지이며, 고통을 참고 불법을 건립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되며, 부처가 되어 군생(群生)을 교화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단속하고 나면 다시 입을 단속하되, 위와 같은 시각에 새벽 이후로 깊은 이치의 구절을 얼마나 연역하여 설명할 수 있었는지, 몇 권의 경전을 펴서 독송하였는지, 몇 천 글자를 이치에 맞게 암송할 수 있었는지, 부처님의 공덕을 몇 번이나 찬미하였는지, 보살행을 몇 번이나 칭송하고 수희(隨喜)91)를 몇 번이나 찬송하였는지, 몇 번이나 회향하고 발원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 다시 그 몸을 단속하되 위와 같은 시각에 몇 번이나 몸을 굽혀서 부처님께 몇 번이나 절하였는지, 그 몸을 굽혀 법에 예배하고 스님들께 예배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빗자루를 들고 몇 번이나 수고롭게 탑을 쓸고 땅을 쓸었는지,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며 등을 켠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진구(塵垢)를 없애고 공양구(供養具)를 바로 나열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당번을 내세우며 찰토마다 드러내어 합장하고 공경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부처님을 위호하며 몇 천 번이나 공경하며 돌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단속하여 살피게 되면 이치에 맞는 것이 극히 적고 도에 어긋난 것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백정(白淨)의 업이 참으로 말하기에도 부족하니, 번뇌의 무거운 장애가 선연하게 눈에 가득 차게 된다. 암흑과 장애만 갈수록 쌓았으니, 대체 무엇으로부터 해탈할 것인가? 이와 같이 단속하여 살피더라도 스스로를 구하는 데 공이 없는데, 어떻게 한가하게 남의 착하고 나쁜 것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3업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훈계하고 책망해야 하니, 내가 지은 것이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악한지를 알게 된다.
○ 검교행업문송(檢校行業門頌:행업을 단속하는 문에 대한 노래)
매서운 바람이 잠겨 들어가
속진에 떠돌아 더욱 얽어매네.
문자로 치달려 마음에 근심 생기니
누가 마음의 허물 볼까나.
다시금 생각해 마음 돌리니
화려한 나 자신 세 번 반성하리라.
귀하면 위태롭고 곤궁하면 넘치며
가난하면 두려우며 호사하면 사치스럽다.
6근의 가림을 돌이키려니
일곱 가지 삿됨이 분분하구나.
시초를 도모하지 않고는
잃어버린 말을 잡기 어렵네.
(8) 가힐사대문(訶詰四大門:4대를 가책하는 문)4대(大)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다.
위에서 이미 그 행실을 살펴보았는데, 여러 가지 피폐하고 게으른 것이 많았으니, 이 4대(大)로 말미암아 게으름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이를 힐난하여 깨닫게 해야 한다.
삼계는 넓고 멀며 6도(導)는 번잡하니, 어떤 것이든 4대에 의지하여 서로 바탕이 되어 그 몸을 이루지 않음이 없다. 모이면 몸이 되고 흩어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풍(風)과 화(火)는 성품이 다르고, 지(地)와 수(水)는 바탕이 다르다. 각각 그 분한(分限)에 맞게 모두 적절함을 구하고자 한다. 적절함을 구하는 것도 실로 한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어긋나게 움직이기가 쉬우니, 이 때문에 하나의 요소라도 조화롭지 못하면, 4대가 모두 병에 걸린다.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온갖 병이 만연하여 생겨난다. 바람은 가볍고 땅은 무거우며 물은 차갑고 불은 뜨거운데, 서로 지져대어 괴롭히니 편안함을 얻을 때가 없다.
경전에서는 네 마리 뱀[四蛇]92)에 비유하였으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또 이 같은 4대에는 뉘우침도 없고 수치스러움도 없고 은혜도 없고 의로움도 없으니, 내가 지금 그 편안하지 않음을 두려워하니 이로써 필요한 양분을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4대는 처음부터 수치스러움에 느낌이 없는데, 어떻게 그 은혜를 알겠는가?
심지어 추위와 풍상을 받으며 엄동에 눈을 맞게 되면, 다시 비단옷과 털옷을 입고 두터운 요에 누울 수 있는 따뜻한 방이 필요하다. 만약 여름에 무더워서 타는 듯한 더위가 불 같으면 다시 반드시 가벼운 옷과 넓은 방과 우산과 양산이 필요하다. 봄과 가을로 계절이 바뀌어 기후가 시원해지면 반드시 부드러운 옷으로 다스려야 하니, 먹는 것까지도 기름지고 맛있는 것이 가득하며, 마시는 것도 고과(瓜果)의 따끈한 음료와 냉수로 쉴 새 없이 양분을 보충한다. 또 괴로움을 편안히 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이 모든 것에는 4사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공급하는 것을 일찍이 거절한 적이 없으니, 이 4대는 참으로 구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넉넉함과 부족함도 모른다. 있으면 아무리 주어도
싫증나지 않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달라고만 핍박하게 되니, 만약 굶주리면 먹어서 잠시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옷을 벗고 입는 것이 어긋나면 안으로 근심하고 바깥으로 두려운지라, 화(火)가 더욱 발동하여 나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며, 내가 넉넉하지 못함을 용서하지 않고, 오직 탐욕스럽게 구하되 쉬지를 않으니, 이를 이름하여 ‘뉘우침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끝이 없으나, 내가 그대에게 주는 것도 적지 않은데, 받을 때에 애초에 부끄러운 낯빛이 없다. 내가 이미 지혜를 쓰고 계책을 다하여 서로 보충하여 충당하는데도, 그대는 처음부터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니, 얼마 안 되는 날에 있어서도 의식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은혜가 없다 하는가? 지금 이미 내가 이와 같이 공급할 수 있었지만 나를 위하여 착한 일을 행한 적이 없다. 나의 옷과 음식을 얻어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하여 기쁘게 해 줘도 돌이켜 다시 생각하면 모든 악을 짓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참선하거나 독송하며 절을 하게 되면 바로 태만하고 게으름을 낳기 때문이다.
어째서 의롭지 못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 4대의 몸은 서로 기약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갖가지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더라도, 다시 거꾸로 갖가지 애착을 일으킨다. 나를 핍박하여 살인하고 도둑질하며 음행을 저지르게 하는데도, 내가 이미 어리석어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대로 따르면서 여러 가지 질병만 낳는다. 혹 왕법(王法)을 만나 옥에 갇히거나 곤장을 맞는 것도 그대가 초래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고초를 한탄하여도 그대는 도리어 이로운 것이 없는데, 마치 다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구하고 다시 찾는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그대를 따라 늙고 병들고 나고 죽는 큰 바다를 떠돌지 않을 것이니, 그대도 마땅히 나를 따라 도를 행하여 여러 가지 선업(善業)을 짓도록 하라.
바야흐로 그대에게 분수에 따라 옷과 음식을 공급할 것이니, 단지 몸을 지탱할 정도만 얻어서 기갈이나 겨우 면케 할 것이다. 그대도 스스로 방책을 잘 써서 내가 5분법신(分法身)을 조속히 얻도록 하고 늘 교화하며 유행하는 데 걸림 없이 자재하도록 하라.
○ 가힐사대문송(呵詰四大門頌:4대를 힐난하는 문에 대한 노래)
한 백 년 세월도 화살 같은데
이러한 6입(入)만 이어가누나.
어리석게 나고 죽으며
애착에 얽매여 살아가네.
열심히 자기를 찾으며
빈번하게 그대에게 공급하네.
공덕도 덧없이 날이 저무니
재앙만 가득히 쌓이는구나.
탐내는 사람은 패류일진대
싫증도 안 내고 스스로 미치네.
밝게 돌이키는 것을 구하지 않는데
쓸쓸한 묘지[玄墟]93) 누가 눈물 흘리겠는가.
(9) 출가순선문(出家順善門:출가하여 선법에 따르는 문)
위에서 행한 것을 살펴보면 도에 어긋남이 참으로 멀었던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면 앞으로 나아갈 방도가 있게 된다. 앞에서 비록 도(道)와 세속 간을 총론하여 그 허물을 대충 알았더라도, 속가에 있으면 죄가 무겁고 출가하면 죄가 가볍다. 단지 출가한 사람인 경우는 행업(行業)이 차별되기에 그 어설프고 원숙한 것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천백(阡陌)94)을 보아하면 대충이나마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지금 출가한 이가 비록 성인의 경계에 오르지 못하였더라도, 이를 바라는 사람은 늘 성인을 끌어다 범부를 책망한다. 참으로 커다란 가르침을 통하여 원대한 것을 이겨나가니, 이를 존중하는 사람은 책임도 무겁고, 계율과 법이 정밀하므로 그것을 믿는 사람은 바라는 것이 깊다. 어째서 그것을 아는가? 지금 우아하고 오묘한 몸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모습이 단정하고 빼어난 사람을 보아야 하고, 만약 인의(仁義)와 성대한 덕의 기풍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예절 바르고 의로운 행실을 찾아야만 한다. 어찌 대중들이 다투는 말만 보겠는가?
조롱하며 내버리는 여러 외도들은 바로 말할 만하지 않다. 그래서 조롱을 멈추게 하는 것은 여러 승려들이 움직여 논의의 실마리를 개진하는 데 달려있다. 실로 우리 불법의 뛰어난 점을 질시는 자가 많기 때문에 우리 불법의 고원한 것을 훼손하는 자가 많은 것이다. 경서에서도 “성곽이 높으면 샛길이 생기고, 도가 높아지면 마군이 성해진다”고 말하였다.
지금 비평하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만, 이치에 나아가 찾아보면 아무 의리 없이 말한 것은 아니다. 시험 삼아 그 닦은 것을 점검하고 그 익힌 것을 견주어 보면 복의 깊고 옅으며 죄의 두텁고 얇은 것을 마음으로 더욱 살필 수 있다.
부모는 효에 연연하여 버려두기 어려우나 부모를 하직할 수 있어야 하고, 처자는 은혜에 물들어 빼앗기 어려워도 애착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권세 있는 자리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다투는 것이나 그 영예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굶주리는 고통은 사람마다 참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먹는 것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맛있는 것은 사람마다 좋아하고 탐내는 것이지만 거친 채소도 달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근면한 것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고되게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7보는 사람마다 아끼는 것이지만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돈과 비단은 사람마다 모아두는 것이지만 아낌없이 희사(喜捨)하여 베풀 수 있어야 한다. 노비는 사람마다 자신을 시중들게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자립하여 남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 가지 빛깔은 사람마다 즐겨 보는 것이지만 모두 버리고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여덟 가지 소리는 사람마다 앞 다투어 듣는 것이지만 이를 끊어 듣지 말아야 한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장식물들은 사람들이 간직하여 패용하는 것이지만 거칠고 고운 것에 구애됨이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몸을 편안히 기르는 것은 사람마다 함께하는 것이나 그 몸을 잊고 그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잠자고 드러눕는 것은 사람마다 피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밤낮으로 눕지 않는 것으로 업을 삼아야 한다. 멋대로 말하면서 친구와 놀러 다니는 것은 사람이 늘 익히는 것이나 조용한 곳에 머물며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
백의는 마시고 먹으면서도 절도를 알지 못하나, 음식을 먹기를 독약과 같이 해야 한다. 백의는 낮과 밤을 달가워하지 않는 바가 없으나 스스로 제한을 두어 정오 이후에는 배를 비워야 한다. 백의는 집을 아름답게 꾸며 배우자와 함께 살지만 집착을 여의어야만 한다.
또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도 법도를 이와 같이 하며, 예배하고 위요(圍繞)하는 것도 법도를 이같이 하며, 독송하고 강의하는 것도 법도를 이같이 하며, 먹고 마시고 대소변을 보는 것까지 법도를 이같이 하며,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도 법도를 이같이 하며, 도를 닦고 행을 익히는 것도 법도를 이같이 해야 한다.
위에서 간략하게 말한 것은 모두가 법수(法數)로서 삼천위의(三千威儀) 아닌 것이 없으니, 넓히면 아무리 말해도 다할 수 없다. 나머지는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출가생선문송(出家生善門頌:출가하여 선을 낳는 문에 대한 노래)
내 몸을 씻어내 공덕 기르니
그윽한 자취에 명리(名利) 잊었네.
삼보의 자리에 안주하였으니
누가 변화하는 세상에 남아 있겠는가?
도량은 넓고도 세밀할지니
선정의 자취가 청아하구나.
바람에 울리는 표주박[風瓢]95)도 메아리 없고
수레바퀴 소리도 우레처럼[震轍]96) 놀라게 하네.
휘파람 거만하게 무엇을 생각하며
속세를 떠나니 무엇을 영위하겠는가?
결사(結使)를 영원히 풀어내고는
영원히 무생(無生)에 깃들어 사네.
(10) 재가종악문(在家從惡門:재가는 악을 따르는 문)
세속의 선비가 매번 말하는 때마다 백의는 어떠한 법에 귀의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답하면 석씨(釋氏)는 신심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다시 내실 있는 마음이 어긋나 등지게 되더라도 그와 같이 어긋나는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바로 정진에 뛰어난 대법(大法)은 선과 서로 어긋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그 믿음을 말했다면 매사가 그 말과 같아야 하니, 만약 말과 일이 상반된다고 하면, 이는 거짓이고 첨곡(諂曲)이며 망령이고 삿된 아첨이기에 실로 천하가 놀라 탄식하는 것이고, 사해(四海)가 개탄하는 바이다.
만약 진실되게 3세(世)를 기약하고자 하면 사문(沙門)의 허물을 보더라도 마땅히 범부의 열등함을 알아야 한다. 형체와 복장이 비록 다르더라도 희ㆍ노ㆍ애ㆍ락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바로 그 이치를 생각하면 높일 수 있는 것은 본래 사람에 달려 있지 않으니, 어찌 행실이 비루하다고 하여 대도를 폐기할 수 있겠는가?
또 그것을 쌓아 뛰어난 업적이 밝은 항하 모래97)의 비유와 연결되니, 깊이 사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 선비와 숙녀께서도 시험삼아 스스로를 살펴본다면 실로 자신의 허물이 더욱 많으리라.
성나면 어르신도 가리지 않고
욕설에는 다시 위아래가 없으며
탐욕으로 비방과 치욕도 생각지 않고
인색함으로 예의범절을 알지 못하며
음욕은 금수와도 구별되지 않는데
물리치는 것은 친족도 피하지 않네.
게다가 교만하고 방일하며 거만하고 원망하며 다투면서 사명(邪命)과 거짓으로 이상(異相)98)을 드러내니, 이익으로 더 큰 이익만 구하고, 나쁜 것을 더욱 많이 구하면서
공경을 하지 않으며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신견(身見)과 유견(有見) 및 무견(無見)에 머물면서 도리어 반성하고 물러서서 예(禮)로 자제할 줄 모르니, 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오직 내가 남보다 뛰어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사람이 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경전에서는 “만심(慢心)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업이 치성해지면 숙세(宿世)에 심은 선근조차 태워 없앤다. 또 ‘악을 짓는 것이 비록 적더라도 후보(後報)의 고통은 도리어 가없으니, 이는 마치 독이 몸에 있어서 끝내 병이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여러 속인들이 오로지 삶을 도모하기만 하고 죽는 것을 돌볼 줄 모른다. 그러나 생을 보존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닥쳐오게 된다. 이렇게 위태로운 목숨을 살펴보면 아침 아니면 저녁에 달려 있으니 순식간에 무상하게 흉하게 바뀐다. 이것은 마치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늙은 부자에게 게송을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자식과 재물에 급급하여 근심할지나
내가 아닌데 무엇을 가진다 하겠는가.
어리석은 이는 쓸모없이 걱정만 늘리나
곧이어 주인 바뀌는 줄도 모르는구나.
자세한 문장이 저와 같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탐욕스럽게 구하여 쌓아 놓은 것은 끝내 모두 흩어져 버리니, 몸이 죽으면 이름도 죽어서 오직 업만이 서로 따르게 된다. 또 여인이 일으키는 걱정거리를 보면 독하기가 남자의 갑절이나 되는데,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경책하신다.
여인은 해롭기만 한지라
더불어 인연 맺기 어렵네.
은애에 한 번 매이고 나면
사람을 죄악으로 끈다네.
여인이 좋을 것이 무언가.
오로지 더러움만 있다네.
어째서 참된 이치 못 보고
이렇게 미친 짓을 하는가.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99)에서는 “속가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경우, 마땅히 여인들을 보게 되면 염리상(厭離想)을 내어야 한다.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내어야 하고, 청결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고, 더럽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고, 나찰의 악귀가 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고, 여색을 탐하여도 배불리기 어려워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고, 나쁜 친구가 청정한 행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3악도(惡道)의 근심 고통을 늘려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다 눈과 얼굴과 입과 입술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도구이기에 사람들이 이에 미혹하여 집안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부모를 죽이며 자식마저 해치니, 온갖 화근의
근본이 바로 여색(女色)에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신다.
○ 재가남녀악문송(在家男女惡門頌)
다듬고 쪼아서 광택 이루니
벽옥은 갈수록 굳어진다네.
사는 곳은 반드시 옮기게 되니
무엇을 어질다 이르려는가.
얼음장 깨지며 봄바람 불고
난초가 시들자 가을 온다네.
가르침은 무리에 따라 상반되고
습관은 마음에 따라 바뀌네.
목숨이 3루(漏)100)
에 합치하여
한평생 10전(纏)에 매여 있다네.
여기서 마치고 떠나가는데
근심과 두려움 늘어만 가네.
(11) 침명지옥문(沈冥地獄門:지옥으로 떨어지는 문)
만법(萬法)이 서로 어긋나서 공용(功用)이 하나가 아니더라도 밝고 어두운 모습에 이르러서는 오직 선과 악의 두 갈래뿐이다. 선을 말하면 인간과 천상의 훌륭한 과보 사이의 차별이 두 눈으로 징험되고, 악을 논하더라도 3악도의 극심한 고통이 분명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런 어리석은 범부는 의심을 내기 좋아하기에 인간과 천상은 거짓되게 조작한 것이며, 지옥도 내실 있는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스스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인(因)을 미루어 과(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과보를 징험하여 인을 찾을 줄 모르기 때문에 인과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헛되이 시비만 부채질하게 되어 의심의 갈래만 어지럽게 일어나니 언제나 밝아지겠는가?
미래에도 그 같은 일을 깨닫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단지 지금 선악으로 징험해 보면 비록 아득하더라도 헛된 것이 아니다.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고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울린다. 형태가 있는데도 그림자가 없거나 소리가 이어지는데도 메아리가 어긋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 서로 길러지는 것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으니, 각자 신심을 밝혀서 의심을 내지 않으면 다행이라 하겠다.
어떠한 것을 지옥이라 하는가 하면,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이 지옥에 팔대지옥(八大地獄)이 있다. 가장 밑이 아비지옥(阿鼻地獄)101)으로 4만 유순(由旬)102)의 무쇠로 된 성곽이 사방으로 둘러 처져 있고 겉과 속이 모두 불에 타고 있는데, 구리 개와 검은 뱀이 울부짖고 물어뜯으니 참으로 두렵다. 여러 소지옥(小地獄)은 철위산(鐵圍山)103) 사이에 바닷가나
텅 빈 들판에 흩어져 있는데, 추위나 더위를 모두 받는 것이 참으로 말로 다하기가 힘들다.
지옥에도 각각 주군(主君)이 있는데, 우두아방(牛頭阿傍)104)은 그 성품이 잔인하여 자비라곤 조금도 없다. 비록 고통 받는 이를 보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만 염려하며 지독하지 않은 것만 염려한다.
혹 옥졸에게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이 참으로 불쌍한데도, 그대는 자비심도 없이 어째서 늘 독한 마음만 품는가?”라고 묻게 되면, 옥졸은 도리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여러 고통을 받는 이들은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불ㆍ법ㆍ승의 삼보를 비방하면서 가깝거나 먼 이를 욕보이며, 일체를 훼손하며 화합(和合)을 파괴하고, 노여움만 내면서 살생하고 음욕을 행하며 사기치고, 사명(邪命)이나 사구(邪求) 및 사견(邪見)으로 교만하고 게으르며 원한만 품으면서 성색(聲色)에 미혹되고, 술과 음식에 집착하여 수지한 계율을 범하고도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몰라서 악업(惡業)을 모두 채워 여기로 와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 받는 것이 끝나면 늘 훈계를 더하여 여기 이와 같은 악한 곳에서 지금 이미 벗어났으니 다시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 중생이 애초부터 참회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여기서 나가도 조금 있다 다시 오니, 나의 몸과 힘을 수고롭게 하기에 저들에게 더욱 독을 보태게 된다. 지금 이러한 무리를 보면 이미 선을 닦지 않고 니원(泥洹)으로 나아가니, 이것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고통을 피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갑절로 하여 해롭게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인자함을 낼 수 있겠는가?”
또 경전에서는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열 가지 악업이 중생을 지옥ㆍ축생ㆍ아귀로 떨어뜨려서 무량한 겁수를 지나야 사람이 되는데, 다시 단명(短命)과 빈궁(貧窮) 등의 과보를 받게 된다. 또 가시덩굴ㆍ사막ㆍ가뭄의 소미(少味)와 여의롭지 않은 외보에 감응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또 신업ㆍ구업ㆍ의업 이 세 가지 업을 발동하는 시초에 스스로 행하여 남을 가르치거나 행하는 것을 보고 따라 기뻐하니, 이것이 세 가지 업을 이루는 길이다. 현보(現報)ㆍ생보(生報)ㆍ후보(後報)의 세 가지는 업을 감하는 처소이다. 그러므로 논서에서도 “세 가지에 세 가지를 합하면 아홉 종류인데, 모두 세 가지의 번뇌를 따라 생겨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앞의 아홉 자리는 그 업이
선과 악에 두루 통하며 3악도의 보를 받는 것은 오직 3독(毒)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먼저 그와 같은 것을 관찰해야 하니, 여기에 바로 사람 몸을 벗어나는 이치가 있게 된다.
○ 지옥문송(地獄門頌)
어두운 나루터 다시 밝아오려니
목소리 높여도 비루할 수 있으니.
그늘진 담벽 촘촘하여도
어두운 밤에도 넷이 앎[四知]105)이 있다네.
불타는 산속은 뜨거울진대
얼음장 감옥은 춥기만 하네.
둘러싼 성벽은 아득도 한데
칼 꽂힌 나무에 서리 엉겼네.
매서운 고통[茹筡:쓴 즙이 나오는 야생 풀]을 못다 말하니
형틀이 놓인 게 무서울세라.
어짊을 구하여 이미 얻었으니
무엇 때문에 길이 탄식하는가.
(12) 출가회도문(出家懷道門:출가하여 도를 닦는 문)
대성(大聖)께서 원만하지 못한 성품과 몸을 되돌리고서야 3상(相)106)이 옮겨지고 사산(四山:四惑 또는 四煩惱)이 견고해졌다. 그래서 여래의 지혜가 역외(域外)에 두루하시기에 일찍이 책망하시는 말씀을 빌려 여러 유생(有生)을 계율의 행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지금 범속에 머물면서 선과 악이 섞여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라도 허물짓는 죄와 애욕과 영달의 잘못을 피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말씀하시는 바를 듣게 되면, 마땅히 깊게 한탄할 것이니, 어느 때에 이와 같은 허물을 여읠 것인가? 마음속으로 놀라움과 의심을 품더라도 도리어 분하고 유감스러움을 더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자신을 집착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대로, 아견(我見)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생사의 커다란 걱정이면서 제일가는 파계(破戒)이다. 비록 하나의 자아(自我)를 거론하더라도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도 올바로 모인 것이 아닌데 누가 그것을 피폐하게 하지 않는가?
출가(出家)의 본뜻은 이 같은 미혹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행동을 늘 제지하게 된다. 쉬지 않고 공을 쌓으면 차츰 유(有)를 벗어나게 되지만, 이것에 미혹되어 닦지 않는다면 다시 무시이래(無始以來)와 같아져서 헛되이 스님들과 짝하며 다시 고업(苦業)만 초래하게 된다.
지금 비록 출가의 미담을 듣더라도 다시 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속인의 악한 것을 듣더라도 선이 없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를 통론하여
각각 경고하고 책려하려는 것이다.
출가자는 그래서 신심이 있기 때문에 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땅히 애착을 버리고 부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출세(出世)의 행이 이루어진다. 만약 행에 이지러짐이 있다면 이는 신심이라 말할 수 없다. 속으로 이미 신심이 없으면 삭발하거나 납의(納衣)107)를 입거나 물병과 발우 등을 지니더라도 몸에 소용이 없다.
간략하게 몇 가지 조항을 인용하여 스스로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겠다. 번잡한 것을 내치고 조용함을 얻어야 한다. 세속의 애착을 여의어서 반연(攀緣)108)이 없어야 한다. 내달리는 마음을 벗어나 적정(寂定)에 들어야 한다. 염착(染著)을 여의고 무애(無礙)를 얻어야 한다. 고(苦)의 경계를 버리고 번뇌 없음을 얻어야 한다. 처자를 여의어서 얽매인 것이 없어야 한다. 잘 꾸미는 것을 버리고 화려함을 멀리해야 한다. 소리와 빛깔을 끊고 욕심내어 구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영예롭고 욕됨을 끊고 아견(我見)을 버려야 한다. 8정도로 향하여 도문(道門)으로만 나가야 한다. 대서원(大誓願)과 인욕(忍辱)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해탈과 열반의 옷을 입어야 한다. 필경공적(畢竟空寂)의 집을 희망해야 한다.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집에 올라야 한다. 회향하는 큰 이로움을 보아야 한다. 많이 듣고 스스로 그 말씀을 깨우쳐야 한다.
부처님께서 출가를 큰 이익으로 보신 것도 이와 같아서 이를 권장하고자 훈계하여 닦고 배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대체로 사문이 도를 행하는 것을 들어보면 집안과 처자를 버리고 애욕을 내쳐서 6정(情)을 끊고 계율을 지켜 행하는 일이 없되 청정한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는 이는 만 가지 삿된 것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셨다. ★=女+堅
여기서 ‘일심(一心)의 도(道)’란 소리와 빛깔로도 오염시킬 수 없으며 영예로운 자리로도 움직이지 못하니, 근심 고통을 떠나며 살고 죽는 것에 자유롭다. 우뚝 홀로 서서 5견(★)을 버리고 두 가지 분노와 원망[瞋恚]을 없애니, 2견박(堅縛)ㆍ2장법(障法)ㆍ2종구(種垢)ㆍ2우박(雨雹)ㆍ2옹창(癰瘡)ㆍ2소법(燒法)ㆍ2종병(種病)을 없애게 된다.
네 가지 파계란, 첫 번째가 3업이 부정한 것이고, 두 번째가 공법(空法)을 듣고 두려워하는 것이고, 세 번째가 니원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고, 네 번째가 아견(我見)에 탐착하는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보살이 수행하려면 먼저
네 가지 허물을 버려야 하니, 거짓된 말로 속이는 것을 버려야 하고, 은혜 갚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하고, 의심을 터야 하고, 잘 모르면서 둘러대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득도(得度)하는 묘한 행실을 두루 행하면 청정함이 넓고 커져서 적정(寂靜)에 편안히 머물게 될 것이다.
○ 출가회악문송(出家懷惡門頌)
색칠한 주춧돌 진실로 참되지 않고
무늬진 물병 참으로 헛것이라네.
법복을 걸치고 고문(臯門:왕국 가장 바깥의 높은 문) 안에서
스님들 가운데 기염 토하네.
봉황 제사 그저 마음만 놀라게 하고
무늬를 본따도 질박하다네.
어떻게 실상을 비출 수 있나.
뜬구름 영화를 버리지 못해
세속의 선비태 여전하다네.
일마다 애써서 치달려 보네.
정(鄭)나라 소리를 내쳤을진대
주(周)나라 아악(雅樂)을 어지럽힘이 없네.
(13) 재가회선문(在家懷善門:재가에서 선법을 닦는 문)
앞서 이미 그 악업을 듣고서 깊이 스스로 애도하였는데, 지금은 그 선함을 드러내어 기쁘게 도에 나아가고자 한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스스로 탐욕스러운 마음이 두텁고 애욕에 물든 성품이 깊어서 부귀에 뜻을 두는 것을 중하게 하고 이익에 이끌리는 마음이 짙은 사람이 아니라면, 속박된 곳에 편안히 머물러 암흑에 묶여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재가자(在家者)는 온갖 근심의 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집안의 처자식이나 종친의 권속이 오고 가는 것을 주선하며 친구와 놀러 다니며 어른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인도하는 데 모두가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는데, 마음은 홀로 가지 못하여 마치 광주리처럼 응한다. 광주리의 쓰임새는 구하지 않으면 이르지 않으니, 이미 일마다 널리 구하면서 재물에 대한 생각이 끝이 없어서 오직 많이 저축하는 것만 생각하고서 그 무상함은 돌보지 않는다.
쌓아 놓고 썩히면서도 이를 베풀 줄 모르니, 이렇게 하면서 탐욕스럽지 않기를 바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권속이 둘러싸고 백 갈래 마음이 같지 않으니 채찍으로 벌을 가하지 않으면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비록 악을 그친다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노여움이 일어나니, 화를 내지 않고자 하여도 도저히 그리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계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만방(萬方)으로 치달려 구하므로, 이로움에 마음이 얽매여 그 걱정거리를 알지 못하니, 물난리와 불난리와 도적 등의 어려움이 줄지어 갖춰져 있어서 혹 목숨을 일찍 잃기도 하거나, 무고한 이를 해치고 죽이면서 한데 모여 즐기기만 하며 이러한 일을 그치지 못한다.
탐심(貪心)과 치심(癡心)을 일으켜 내가 이것들을 더했다고 말한다. 마시고 먹은 후에 유쾌함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백의(白衣)는 선법(善法)과 서로 어긋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짓는 일마다 지옥과 그 문을 마주 한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또 그 거처는 감옥과도 같고, 그 처자는 형구[枷鎖]와도 같고, 그 재물은 무거운 짐과도 같고, 그 친척은 원수와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지경에서 근심의 고액에 묶이고 얽매여 고생만 더하면서 온갖 고뇌를 가지되, 도리어 삼보를 가까이하지 않고 정법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어둡게 막히고 괴로움이 극심한 속에서 끝까지 헤맨다.
그러나 하루 낮 하룻밤이라도 계율을 지켜 청결하게 하고 여섯 때[六時]109)로 도를 행하면서 육재일(六齋日)을 닦아야 한다. 혹은 한해 세 번의 장재(長齋)110)를 닦거나, 혹은 한 가지 계율, 두 가지 계율, 세 가지 계율 내지는 5계ㆍ8계ㆍ10계를 지키면서 채소로 그 입맛을 줄이고, 신업ㆍ구업ㆍ의업을 단속하여야 한다.
혹은 처자와 내외의 권속을 이끌고 회향하여 선법을 숭상하며 보리(菩提)의 인연을 세워야 한다. 혹은 부모에게 드리는 공양이나 처자의 몫에서 재화와 의복과 진귀한 음식을 덜어내어 그 가진 것을 다하여 정갈하게 정중히 공양하면서 집에 모시고 받들어 섬기면서 아침ㆍ저녁으로 보살펴야 한다.
혹은 질병이 위독하거나 관청의 감옥에 갇히거나, 때로 친족이 죽어 그 영혼에 복을 빌기도 하고, 혹은 선을 지어 죄를 소멸하고자 처음으로 신심을 내어 사문을 우러르되 성인과 다름없이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따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에 순응하여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
만약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면 반드시 악도(惡道)로 떨어지게 되니, 이 때문에 늘 바른 원력을 굳게 세워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를 원한다.
모든 부처님을 모신 절[佛寺]로 날아가서 감응하여 보는 것에 따라 군생(群生)을 맞아들이며, 부처님의 의례를 배워서 여래의 방으로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선교방편(善敎方便)의 지혜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며, 제법(諸法) 가운데서 궁극적으로 장애 없이 하며, 허공 끝이 다하도록 엄숙하고 장중하게 서원해야 한다.
○ 재가권선문송(在家勸善門頌)
세속에 있어도 물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삼베옷 걸치고 구슬 품었네.
벽옥이 그윽한 돌 사이에 번쩍이는데
덤불 속 난초꽃 활짝 피었네.
4대(大)와 더불어 벗삼지 않고
어이해 삼계에 묻히겠는가.
부모와 자식에 염착(染著)되어서
재물의 이익에 구애받노라.
번뇌의 물결에 지혜의 보배 잃으니
가는 길 넓혀서 평탄하구나.
만물이 무엇에 짝할 수 있나.
불타는 나무가 부용 같구나.
(14) 삼계내고문(三界內苦門:삼계의 고해에 들어가는 문)
삼계가 감옥 같아서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다. 재가(在家)이거나 출가이거나 아전도(我顚倒)를 끊지 못하면 이를 면할 수 없으니, 이미 생사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얽매여 고생하여도 무궁하게 변하니, 실로 고(苦)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삼계가 모두 고(苦)인데 무엇이 즐겁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생들은 늘 미혹하여 세간은 불변하며 즐겁다고 말한다. 세간을 벗어나는 것은 즐거운 인(因)이고 무상(無常)은 고(苦)인데, 어떻게 미혹됨에 빠져서 이렇게 갑자기 전도되는가? 시험삼아 그 몸을 찔러 보면 바로 고수(苦受)를 깨닫게 되는데 어떻게 즐겁다고 이르겠는가? 대략 몇 가지 조목을 인용하면 세간이 그저 고(苦)임을 증명하여 알 수 있다. 만약 음식을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면, 차려낸 것이 많으면 당연히 몸이 조화롭고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한도에서 벗어날 때 바로 질병이 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만약 의복으로 즐거움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봄ㆍ여름에 옷 한 벌로도 마음으로 아껴서 싫증내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춥고 더울 때마다 옷을 달리 입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그 즐거움을 달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니, 이로써 고의 근본이 된다.
만약 집을 즐거움이라 이른다면,
한 곳에 늘 있지 않고 옮겨 가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여기서 괴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만약 처자 권속을 즐거움이라 말하면, 늘 마주하여 웃고 노래해야 하는데, 어느 사이에 무상하게 슬프다고 울먹이는 것에서 권속이 실제로 고의 근본임을 알게 된다.
만약 묘령의 미색을 즐거움으로 말한다면, 마음과 눈을 오래도록 기쁘게 해서 영원토록 몸체를 위로해야 하는데, 잠깐 사이에 안색이 변하고 머리가 희어지고 얼굴이 검어지며 소년의 아름다운 자태를 애처롭게 여기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미색이 원래 고통인지라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좋은 소리로 즐거움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사죽(絲竹)으로 번잡하게 얽힌 것을 보고 듣는 것을 싫증내지 말아야 하는데, 잠깐 사이에 피곤해져서 귀로 즐거이 듣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이것도 고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감주(酣酒)로써 즐거움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마음에 맞추어 근심을 버려서 오래도록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정신이 어두워지고 뼈마디가 쑤시는가? 또 이러한 일로 채찍과 곤장을 맞으며 쇠사슬에 묶여서 그 몸을 망치고 목숨을 단축하며 집안을 깨뜨리고 나라가 망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는다.
만약 친구와 유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종일토록 놀러 다니더라도 싫증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데, 매번 같이 자리에 올라도 잠깐 사이에 피곤해져서 나중에 다시 손을 잡고 갈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만약 음욕을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혈기가 튼튼하고 눈이 밝고 정신이 상쾌한 것이 어릴 적에 쇠퇴하지 않고 장년에도 건장하며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마음껏 욕심을 내면 순식간에 피곤해져서 뇌수가 뽑히고 머리가 아프며 눈이 어지러워지며 마음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근골이 느슨해지고 입이 마르고 입술이 타고 사지가 떨리고 오장이 뽑혀서 이로 인해 일찍 죽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음욕이 실로 고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영예로운 자리를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말고 부끄러움이나 치욕이 없어야 하는데, 쫓겨나는 순간에 바로 초췌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이상 여러 조항들을 대략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6진(塵)111)과 5정(情)112)의 마음이 떠도는 곳은 실로 고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대성께서 삼계의 감옥을 살펴보시고, 고통을 알아서 생사를 해탈하는 데 헤매지 않으셨다.
○ 삼계내고문송(三界內苦門頌)
마음의 원망 어지러이 움직이고
기쁜 감정은 어느덧 바뀌네.
환락과 애착 한번 멀리 떠나니
비탄에 젖어 어쩔 수 없이 저물어가네.
이어진 휘장 그늘을 맺고
드높은 누각에 서리 일어나니
부패한 독 향기로운 기름에서 나오네.
어릴 때 잘라서113) 아름답게 닦아갈지라.
애욕의 그물에 인생 망치니
총총한 올가미 토끼를 온전히 두네.
아득한 밤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유유히 기다려 결국 깨닫게 되리.
(15) 출삼계외락문(出三界外樂門:삼계를 벗어나는 복락의 문)
불세존께서 “삼계 세간은 모두가 고의 덩어리다. 실로 한 가지 고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며 깨끗지 않은 것들은 끝내 공(空)으로 돌아간다”고도 말씀하셨다. 세간을 벗어난 곳은 상ㆍ낙ㆍ아ㆍ정이 여덟 가지 자재함을 갖추고 있으나, 중생이 오랫동안 미혹하여 망령되이 즐겁다고 이르나 어느 한 가지라도 슬픈 것뿐이다. 또 “한 가지 고가 그 모양에 따라 여덟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여덟 가지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생고(生苦)ㆍ노고(老苦)ㆍ병고(病苦)ㆍ사고(死苦)ㆍ애별리고(愛別離苦)ㆍ원증회고(怨憎會苦)ㆍ구부득고(求不得苦)ㆍ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
한 가지 고 가운데서 다시 여러 고가 있다. 그래서 여러 수행자에게 도를 행할 것을 권장하여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절제하여 게으르지 않게 힘쓰도록 하였다. 소소한 중생들은 무지하여 이를 일러 고(苦)라고 하나, 대성께서 원만하게 3달(達)114)을 비추어 통찰하시고 이러한 작은 고가 큰 즐거움의 바른 인이 되는 것을 아셨으니, 비록 일시적 수고로움이 있더라도 효과가 참으로 크므로 이를 고(苦)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수행의 모습을 끌어다가 유심경계(有心境界)를 단절하신 것이다.
만약 몸과 목숨을 버리고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면, 마침내 부처님의 금색신(金色身)을 얻어
광명이 환히 비추어 가고 서고 앉고 누울 때마다 대천세계의 상(相)을 진동케 할 것이다. 만약 부모ㆍ스승ㆍ성현을 예배한다면, 부처님 정상(頂相)115)의 고명함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중생을 속이지 않고 그 덕을 찬양한다면, 부처님 미간의 백호상(白毫相)116)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자애로움을 행하며 중생을 어질게 구한다면, 부처님의 감청색(紺靑色)의 나발(螺髮)의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등불로 공양하여 남에게 베푼다면,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일광상(日光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살핀다면, 부처님의 맑은 눈이 상하로 깜빡이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맛있는 것을 끊고 10선(善)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면, 부처님의 마흔 개의 치아가 가지런한 상(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자선(慈善)을 설하면서 뜻이 견고하다면, 부처님의 맑은 눈에서 상하로 깜빡이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맛있는 것을 끊고 10선(善)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면, 부처님의 마흔 개의 치아가 가지런한 상(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자선(慈善)을 설하면서 뜻이 견고하다면, 부처님의 네 개의 치아가 희고 깨끗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구업의 네 가지 허물을 끊게 되면, 부처님의 턱이 수레처럼 넓고 긴 혀의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평등한 보시를 행한다면, 부처가 될 때 7처(處)가 원만해지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고행을 견디면서 안정되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님의 사자억상(師子臆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정정(正淨)을 행하며 의학(醫學)과 약으로 사람을 구한다면, 부처님 몸의 반듯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인자함을 행하여 중생을 때리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긴 팔과 긴 손가락의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땅바닥을 살펴서 다닐 때 벌레를 밟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다니실 때적에 땅을 밟지 않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손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부축하게 되면, 부처님의 손이 안팎으로 쥐게 되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4섭(攝)117)을 행하여 중생을 모아들이면, 부처님의 손과 발의 그물과 같은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깨끗한 마음으로 어진 이를 공양한다면, 부처님 손과 발의 천 겹의 수레바퀴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옷을 보시하여 추악한 곳을 가려 주게 되면, 부처님의 마음장상(馬陰藏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설법하여 없애 준다면, 부처님의 녹전장상(鹿膞腸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장중하고 엄숙하게 잘 행하여 중생의 사지(四支)를 해이하게 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쇠골이 둥근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부드럽게 조순하면서 탑을 오른쪽으로 돌며 남을 따르는 이는 부처님의 우선모상(右旋毛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길을 평탄하게 닦으면서 가시덤불을 없애는 이는 부처님의 일공일모상(一孔一毛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으며 남을 씻어 주는 이는 부처님의 피부가 부드러운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탑을 청소하여 더러운 것을 없애 준다면, 부처님 몸에 때가 타지 않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만행(萬行)을 닦아 원력(願力)을 구족한다면, 부처님 가슴의 만자상(萬字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나라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다면, 부처님 정토(淨土)의 권속의 성현상(聖賢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음식을 절제하며 맛있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이는 부처님의 상미상(上味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늘 독송하며 남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이는 부처님의 총지(總持)와 입에서 향기가 나는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설법하여 중생을 맞이한다면, 부처님의 용안에 허기진 표정이 없으며, 입 가득히 빛이 나는 변재(辯才)의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계율을 지켜 결함이 없다면, 부처님 법신의 원만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산속에서 두타(頭陀)118)하며 고행한다면, 부처님의 진루도진상(塵累都盡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좋은 집을 버리고 깊은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 사색하는 것을 중생이 고통스러워 행하지 못한다고 말해도, 보살의 뜻이 견고하여 기약한 바가 커서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면, 자연궁전(自然宮殿)의 칠보방사(七寶房舍)를 얻어 일찍 성불하게 된다.
중생이 그런데도 스스로 생사의 바다 가운데로 떠도는 것이 어찌 뒤집히고 미혹에 얽매인 것에 따른 소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더욱 정진하여 이러한 행을 닦아야 삼계를 벗어나게 된다.
○ 삼계외락문송(三界外樂門頌)
옷깃을 여미며 번뇌의 바다 헤아리니
교만한 걸음걸이 속세의 흔적 그리네.
삼수(三受)에도 비 그치니
여덟의 고통도 뜬구름 같네.
마음을 굴려서 원극(圓極) 우러르니
이내 몸 그대로 무덤이라네.
아침에 정토(淨土)의 나그네로 떠돌다
저녁엔 영산(靈山)의 대중으로 모이네.
등불이 저 멀리 비춰지는데
향내는 누리에 가득하구나.
머리 굽혀 세상 바라보니
진실로 고요한 임금이 되네.
(16) 단절의혹문(斷絶疑惑門:미혹을 단절하는 문)
인과의 미혹은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서로 생겨나는 것이다. 필연의 도리는 어긋남이 없으나 중생의 업행(業行)이 순결하지 못하여 선과 악이 번갈아 작용한다.
순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과보에도 정밀하고 조잡함이 있고, 귀하거나 천하거나 아름답거나 추악하여 일의 자취가 하나가 아니다. 본행(本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정진하여 계율을 받들면 당연히 오래 살고 자손이 번창하며 친족이 영달하게 된다. 그 신명이 요절하고 가문이 쇠진하는 것을 보게 되는 반면, 살생하는 사람은 마땅히 수명을 단축하게 되고 권속조차 쇠잔하여 소멸해야 되는데, 도리어 햇수를 늘려 오래 살고 종실이 강하고 방계 가족도 널리 퍼진다.
청렴한 행동은 부귀를 초래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가난하고 괴로움을 보이는 반면, 탐욕스럽게 훔친 사람은 곤궁함을 드러내야 하는데 도리어 풍요로움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그 복에 연유하기 때문에 현세에서 받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 『금강반야경』에서 말씀하셨듯이, 경(經)을 수지하는데도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야 하나, 지금 업신여김을 받기 때문에 예전에 지은 죄가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혹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무명의 혹(惑)에 연유하기 때문에 망령되이 전도됨을 일으켜 3세의 업상(業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략 몇 가지 조항을 내어 세상 사람이 미혹되는 일에 교훈으로 쓰고자 하니, 식견이 있는 이는 인식하여 의심을 없애기 바란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괴롭게 여긴다. 그래서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는 생을 탐하여 생으로 즐거움을 삼는데, 이것이 첫 번째의 미혹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나지 않는 것으로
불사(不死)를 삼는다. 그러므로 열반적멸(涅槃寂滅)의 즐거움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죽음을 멀리하는 방도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두 번째의 미혹이다.
슬기로운 이는 집안에 사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니, 비유하면 감옥과도 같이 한다. 경서에서도 “교만함에서 정을 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집착에 물드는 것을 영예로운 즐거움으로 삼는데, 이것이 세 번째의 미혹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처자식이 누가 됨을 알고는 이를 형틀에 견준다. 경서에서도 “애착하는 것에서 정(情)을 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은애(恩愛)로써 기쁨을 삼는데, 이것이 네 번째의 미혹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권속을 얽매임의 뿌리로 삼고서 이를 마치 원수처럼 버린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계속하여 연모(戀慕)하며 훌륭한 만남이라 여기니, 이것이 다섯 번째의 미혹이다.
지혜로운 사람에 있어 이익을 꾀하는 것은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도구이다. 경서에서도 “빨리 이루려는 것에서 감정을 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참소하는 것의 해로움을 생각지 않고 존귀함을 얻으니, 이것이 여섯 번째 미혹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를 고(苦)의 근본으로 삼는다. 경서에서도 “정을 끊는 것은 기욕(嗜欲)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에 탐닉하여 미혹에 취하면서도,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미혹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부지런히 애써야 하는데, 생로병사가 그 몸을 여의지 않으니 의혹을 내어 한평생을 헛되이 지나치지 말라. 지금은 다시 의심 내는 상을 드러내 본다.
보시하는 이가 병들어 일찍 죽는 것을 보면, 바로 의심을 내어 인색하게 되고, 계율을 지키는 이가 정오가 지나서 먹지 않다가 병에 걸리는 것을 보면 의심을 품고 스스로를 보양하려고 한다. 인욕하는 사람이 마음을 단속하고 그 몸을 거두느라 병에 걸리는 것을 보면 고뇌하며 그 뜻을 버릴 것을 권하게 된다.
경을 독송하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도리에 인연하다가 병에 걸리면 그만 그칠 것을 권하게 된다. 채소만 먹는 이가 병들어 수척해지면 기름진 것을 먹도록 권하게 된다. 좌선하는 이가 병에 걸린 것을 보면 누워서 쉴 것을 권하게 된다. 말을 개진하여 연역하면 바로 ‘본정(本情)’이라고 말하는데, 멋대로 게을리 하여 세속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일찍이
아침에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119)는 것을 머리를 구제하듯 하는 것은 생각지 않고, 어찌 나태한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세속에 더욱 익숙해지는가? 죽음으로 맹세해야 바야흐로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단의혹문송(斷疑惑門頌)
인생 여정의 하나 아니나
실마리 가려야 고해 건너리.
동릉(東陵)의 화려함에 부질없이 놀라고
북곽(北郭)의 가난함에 한숨짓노라.
인생이 진작에 어긋났으니
안자(顔子)가 참으로 어질었지만
전생의 업보를 만나야 했네.120)
선법을 익혀 이 몸 모으네.
우환에 힘쓰면 길이 태평하나
안일함은 괴롭고 쓰라린 것으로 마치네.
아름다운 이름 또한 귀중하나
어찌 좋은 인연을 심는 것만 하겠는가.
(17) 십종참괴문(十種慙愧門:열 가지 참회하는 문)
이미 재가(在家)의 남자와 여자의 악법(惡法)을 함께 알고서 다시 출가한 승니(僧尼)의 허물과 얽매임을 보고, 또 의혹으로 뒤집히는 길을 듣고서 한걸음 물러나 스스로 반성해 보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경전에서도 “참괴(慙愧)를 구족하여야 암흑의 장애를 소멸시킨다”고 말씀하셨다. 또 “금수를 마치 쇠사슬로 매어 놓듯이 사람의 비법(非法)을 제지할 수 있다”고도 말하였다. 만약 부끄러움과 뉘우침이 없다면 여러 금수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두 가지 백법(白法)121)이 중생을 구제하게 되니 첫 번째가 부끄러움이고, 두 번째가 뉘우침이다”라고 하였다. ‘참(慚)’이란 스스로 악을 짓지 않는 것이고, ‘괴(愧)’란 다른 이를 시켜 짓지 않는 것이다. ‘참’이란 안으로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괴’란 남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참괴’가 있기 때문에 부모와 스승을 공경할 수 있게 되고, 참괴를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소멸시키게 되니, 그 드러난 모습이 대략 이와 같다. 각각 참괴에 따라서 청백법에 순응해야 하는데, 그런 일이 한량없어 간략하게 열 가지 조항을 들어 핵심 요강으로 삼는다.
첫 번째의 부처님께 죄송한 일:여래께서 예전에 우리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편안함을 얻게 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발심하여 보리의 도를 행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치욕을 받으면서도 지금의 법신을 이루셨다.
늘 정법을 나에게 해설해 주셨으나 내가 말씀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부모에게 죄송한 일:애처롭게도 부모가 나를 낳느라 수고하셨으니 키우고 가르치며 늘 마음속으로 걱정하셨다. 이미 사람의 자식이 되었는데도 그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억센 것만 배워서 귀천으로 능멸하니, 간언하는 아들에 어그러져서 위로 부모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잃었으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세 번째의 여러 사람에게 죄송한 일:저 사람은 실로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돌보아 안색에 따라 봉양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122) 그러나 끝내 빈천하여 봉양할 만한 물건이 없으니 여러 사람들이 설 수 있게 할 방법이 없었다. 또 가르침을 결여하여 자식들마저 어리석게 하였으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네 번째 스님들에게 죄송한 일:비록 우리 부모가 낳고 키우며 가르치셨지만 나를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지금 은사 스님이 나를 출가시켜 증상계(增上戒)를 받게 하시고 나한(羅漢)의 태(胎)를 품어 나한의 과보를 얻게 하였는데도, 내가 이를 위반하였으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다섯 번째 제자(弟子)에게 죄송한 일:이미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에 따라 닦을 수 있었는데도, 도리어 이를 막아 성인의 말씀에 어긋나게 해서 도업(道業)에 조금도 공이 없게 해서 일생을 헛되이 지나쳐도 이를 제지하거나 받들 법이 없다. 이러한 허물을 돌아보아도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여섯 번째 제왕에게 부끄러운 일:늘 10선(善)으로 천하를 교도하므로 나라가 편안하고 오곡이 풍성하다. 그래서 백성이 집을 편안히 하고 업을 회복할 수 있어서 출가한 사람이 태평하고 안락하여 그 참선과 독송을 전념할 수 있는데도 지금 게으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일곱 번째 단월(檀越:보시를 하는 사람)에게 죄송한 일: 출가자가 마음먹는 것은 해탈을 근본으로 삼는다. 형체를 기르는 것은 옷과 음식을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여러 속인들 도를 행하고 복을 짓고자, 공급하여 충당하는 연으로 정업(正業)이 융성해졌다. 그러나 때로 온전히 하지 못하여 존중하는 마음을 잃게 되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여덟 번째 선지식에게 부끄러운 일:선지식이 교화하여
부처님의 인연을 만나서 범행(梵行)을 갖추게 하고, 대경(大經)을 외워 가르쳐 주었으나 내가 충고를 듣고도 도리어 원수 삼으니, 3귀의를 등지고 세속의 신에게 절하며 선법의 인도에 미혹하여 바른 가르침을 어긋났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홉 번째 교화해야 하는 여러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내가 덕이 없어 오랫동안 인연을 심지 못했기에 깨달음을 열어서 나루터를 건너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공부를 헛되이 하게 하고 비록 잡다한 선을 듣더라도 순정함을 얻지 못하고 내심 걱정스러우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열 번째 천(天)ㆍ용(龍)ㆍ신귀(神鬼)와 법을 수호하는 명기(冥祇)에 부끄러운 일:내가 원래 발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로 서원하였다. 그래서 천ㆍ용이 옹호하여 고뇌가 없는데도, 내가 허물을 지어 그 감정과 의지가 일정하지 않아 단지 실로 은혜를 등진 것을 알고 나니 창피함만 늘어난다.
○ 참괴문송(慙愧門頌)
기름진 보시 중요하지만
맑은 술 은혜 높지 않으리.
명주(明珠)123)도 물가에 떨어져 있고
벽옥도 남전(藍田)124)에 남겨뒀도다.
천성으로 받은 것 지극하기에
공경의 도리 받아 높일 것
활개 짓 보태어 기세로 삼아
전법륜(轉法輪) 자취에 형통하려니
공덕을 갚고서 이전의 정법 슬퍼하면서
주고받는 말 남겨진 가르침 아끼네.
길을 따를 때마다 자주 어긋날지니
돌이켜볼수록 부끄럽다네.
(8) 극대참괴문(極大慙愧門:참괴를 지극히 하는 문)
참괴의 뜻은 미치지 못하듯 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만약 바른 행위를 모두 받들어 따를 수 있다면 부끄러움을 빌 것이 없다. 『논어』에서 “안으로 반성하여 근심이 없으니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125)라고 말하였다. 또 “마음에 허물이 없으니 어찌 집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지금 신묘한 이치를 정밀하게 하지 못하고, 마주 대하는 것마다 어긋나니 한 생각 사이에 짓는 허물이 한량없다. 허물이 한량없기 때문에 부끄러움 또한 한량없어진다.
앞서 이미 그 대강을 간략하게 거론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의 지말(支末)은 모두 잇지 못하였기에
다시 이러한 문(門)을 세워서 글을 찾아 요지를 구하고, 그 이치를 바로 깨우쳐 거두지 못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중생은 아견(我見) 때문에 만물에 그 아름다움을 미루고, 악을 이끌어 자신에게 두지 못하여 만 가지 선을 닦을 수 없게 된다. 다른 사람의 뛰어난 행실을 보게 되면 이를 깔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극심한데도 어찌 보지 않을 수 있는가? 지금 그 자리를 나열하여 드러내니, 바라건대 그 자취를 거둘 수 있으리라.
만약 곧은 마음으로 뉘우치고 부끄러움을 가지는 사람을 보면, 자신은 행할 수 없으면서 그가 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보시와 지계를 행하는 사람이 해탈문을 여는 것을 보면 일찍 그치기를 원한다. 만약 인욕하고 정진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에 스스로 행하지 못한다고 일찍 물러나기를 바란다. 만약 많이 듣고 정을 닦는 이를 보게 되는 경우에 스스로 행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시켜 닦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약 자ㆍ비ㆍ희ㆍ사를 행하는 사람을 보면, 근면한 것을 찬미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하지 못하기만을 바란다.
만약 한 끼의 채식만 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스스로 행하지 못하기에 물러서기를 권한다. 만약 마음을 조복하고자 행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에 정법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도 행해서는 안 될 것을 권하고 8정도에도 어긋난다. 만약 물어 배우며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스스로 이 같은 수행이 없으면서 저로 하여금 하지 못하게 한다. 만약 위요하며 예배하는 이를 보게 되면, 스스로 게으르기 때문에 질투하여 행하지 못하게 한다. 범음(梵音)을 노래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저가 그것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경행(經行)하며 두타행(頭陀行)을 준수하여 행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행하지 못한다고 도리어 이를 비방하며 허물하여 없앤다. 지금 숙세에 의거하여 설법하여 여는데 이와 같은 것을 높인다. 마땅히 이치에 믿음을 내고 죄를 소멸하며 복을 빌어 도를 넓혀야 한다.
그러나 이제 무외좌(無畏座)에 올라가서 비웃고 희롱하는 단서나 널리 열고, 스스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꾸미면서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며 교류하는 사람들이나 비방하며 그 태도를 거만하게 하여 처음부터
겸손함이 없다. 끝내 물러나 나의 이해가 깊지 않음을 살펴보지 않으며, 그저 자문하는 사람이 경전을 살피는 데 잘못이 있는 것만 힐난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만약 이로움을 기르고 명예를 그리며, 내 마음의 애착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이를 법에 맞지 않는 설법이라고 말한다. 만약 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신심을 늘리는 것으로 하여 번뇌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정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알고 뉘우칠 줄 알고서 중생에게 8정도를 열어 준다면 이와 같은 것을 선설(善說)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과거세에 고안(苦岸) 비구가 있었는데, 중생에게 인아(人我)의 수명이 있다고 말하여 부처님 말씀과 어긋났기에 그 명이 다하자 바로 아비지옥에 들어갔다. 바로 눕고 엎드려 눕고 왼쪽이나 오른쪽을 향해 옆으로 눕되 각각 9천만 년이나 거쳤다. 이후에 다시 여타의 지옥을 거쳤는데 자신 이외에도 그 따르는 무리들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정법을 비방하면 그 죄가 참으로 중함을 알 수 있으니, 법사야말로 실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문을 잘 말하면 한량없는 복을 이루나, 법문이 사악하면 얻는 죄 또한 무겁다. 이리하여 법사는 마땅히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극진하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머물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 급한 것은 옷과 음식에 있으니, 이런 옷과 음식 때문에 수고로움이 매우 깊어진다. 필요로 하는 비단이나 가죽은 생명을 해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가죽을 입고 그 육신을 공양하며 한 톨의 곡식을 먹는 것에 이르기까지 힘써 공부하는 데 쓰지 않는다면, 호구지책을 할 방법이 없다.
앞서의 공덕을 미루어 헤아리고 자신의 배를 생각해야 하니 위로 넣고 아래로 쏟으면서 늘 흘리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 가운데 맛있고 기름진 것만 고르되 부드러운 것만 입에 넣고, 맛있는 것만 탐닉하면서도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으니, 잠깐 사이에 변한 나쁜 냄새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어서 그 행동거지 측간과 다를 것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을 욕심내는 일이 있겠는가? 생을 탐하는 사람은 반드시 크게 창피하고 부끄러운지를 알아야 하니, 저 축생들과 더 이상 무엇이 다르겠는가?
○ 극대참괴문송(極大慙愧門頌)
겨울에 여우 털 무성해지고
봄철의 누에고치는 실마리 가볍다.
이내 몸 도리어 장애가 되고
마음은 도리어 스스로 현혹되노라.
풀로 머리를 묶고 용모를 꾸미던 때에
평생 중 청춘의 시기에
수레를 휘모는 나그네 협객
약주마시며 미희(美姬)만 희롱하노라.
눈앞의 호사만 생각하고
뒤끝이 슬픈 줄 어찌 알려나.
한순간 뉘우침 망연하기에
애정을 영원히 끊고자 하네.
(19) 선우권장문(善友勸獎門:착한 벗을 권장하는 문)
미혹을 없애고자 안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장려하는 공이 있어야 선지식이라 하겠다. 지금 만행을 수습하는데 선지식이 아니면 도(道)로 나아갈 수가 없다. 경전에서는 “전단나무 잎이 이라(伊羅) 숲에 있으면 그 잎사귀도 악취가 나는데, 이라의 냄새나는 잎도 전단나무 숲에 있으면 그 잎사귀도 향기로워진다”고 말씀하셨다.
경전에서도 “착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난초과 지출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모두 향기가 난다. 나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생선 가게에 있는 것과 같아서 함께 있으면 냄새가 풍긴다”고 말하였다. 또 “먹에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인주에 가까이하면 붉어진다”고 일렀다. 그러므로 선우(善友)를 가려야 불사(佛事)를 이룰 수 있으니, 이와 같은 큰 인연에 기인해서 범행(梵行)을 온전히 하게 된다. 선지식은 지금 나를 정토로 이끌 수 있으나, 악지식(惡知識)은 나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따라서 선우(善友)의 은혜란 갚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악의 이치는 뚜렷하고 명백하다. 단지 감정에 맞겨서 도로 나아가는 것은 그 나아가는 이치가 더디지만 선우가 권장하여 마음이 용맹해지면 빠르게 된다. 경전에도 권장하는 글이 있으며 경전에도 배움을 권하는 글이 있다. 실천의 요점은 실로 좋은 친구가 권장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보살은 자기 몸을 보시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보시를 권하며, 스스로 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과 마음을 하나로 거두어 지혜를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일을 행하도록 권한다”고 말하였다.
대체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일을 기뻐하며 우러르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지금 만약 공연히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즐거움을 바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과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양식이 끊어져 그 맛을 생각하는 것과도 같아서, 그 굶주린 것에 끝내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략 몇 가지 조항을 인용하여 긴요한 일을 힘써 행하도록 서로 경계하겠다.
지금 재물이 넉넉하여 따뜻한 집에서 식구들에게 음식을 넉넉하게 공급하여 힘들게 구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이른다. 반면 다시 가난하여 괴로운 경우에는 몸이 수척해져서 하루종일 넉넉하기를 원하나 풍요로움이 잠시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고통 때문에 그 보시를 하고 힘써 복을 닦도록 권하는 것이다.
옷과 털옷이 넉넉하여 깨끗하고 좋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 경우도 있고, 또 한 자의 삼베도 온전히 못하고 때가 끼고 잡스러운 경우도 있다. 이로써 옷과 집을 보시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또한 맛난 음식이 밥상에 연이어 차려져 있는 것을 보는 경우도 있고, 또 냄새나는 나물조차 넉넉하지 못하고 소채조차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로써 음식을 보시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또한 영예로운 자리에서 현달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고 그 뜻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비루하고 빈천하여 사람들이 대우해 주지 않고, 진흙 구렁텅이나 계곡 구렁텅이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고통이 참으로 싫으므로 복을 닦으면서 교만함을 제거하고 겸손함과 공경을 받들어 행하라고 권하는 것이니, 어찌 다른 사람이 늘 귀하고 나는 늘 천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용모가 단정하면서도 하는 말이 널리 이로운 경우도 있고, 또 면모가 추악하면서도 말마다 흉포한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고를 버리도록 인욕을 권장하게 된다. 의지력이 강하고 병이 적어서 열심히 도리를 행해도 문제가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병이 많아 편안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마다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고통을 보고 의약(醫藥)을 보시하여 정도(正道)로 나아가도록 권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구경』에서도 “사시(四時)에 행도하며 온갖 고통을 제도하게 되니, 첫 번째는 소년으로 힘이 센 때이고, 두 번째는
재물이 있는 때이고, 세 번째는 삼보의 복전을 만나는 때이고, 네 번째는 만물이 흩어지는 때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늘 이 같은 네 가지를 행하여 반드시 고의 자취를 끊을 수 있으니, 마땅히 스스로 과업(課業)을 열심히 행하여 다른 사람의 권장을 기다리지 말라.
○ 선우권장문송(善友勸獎門頌)
난초꽃 향기에 봉심(蓬心)126) 고치듯
벼랑 끝 전단 향이 향초[伊草] 되리니
단청도 결국엔 바래지는데
꽃 비단 어이해 하얄 수 있나.
굽은 길 돌려서 바로잡으니
굽어진 나무에 조각 새기네.
흙 한 줌 퍼다 태산 이루고
백리 길 달려가 대도 전하네.
한나라 왕실에 불법 폈으나
초나라는 참으로 백성들을 보호하지[元保]127) 못했네.
공덕에 힘써 외롭지 않으니
지극한 말씀이 헛되지 않네.
(20) 계법섭생문(戒法攝生門:계율을 지켜서 인생을 거두는 문)
앞서 이미 다른 사람을 권장하였으니, 지금은 스스로 과업에 더욱 힘써야 한다. 대체로 과업을 논하자면 책려하는 것이 요긴하다. 반드시 구체적 대상에 근거하여 인(因)을 행하여야 하니, 만약 심지가 안정되지 못하면 나아가는 갈래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구체적 대상에 의거하여 인을 행하는 것은 계율이 그 시초가 되는데, 계율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에 들어가는 첫 문호이고, 세속을 벗어나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같은 교훈에 어긋나면 영원히 3악도[三塗]에 처하여 인간과 천상의 길이 영원히 끊어진다. 이로써 경전에서도 대지가 만물을 오래 기르는 것에 비유하니, 계율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 중생의 인천(人天)의 꽃다운 과보를 생겨나게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만약 이러한 계율이 없다면 갖가지 선법(善法)의 공덕이 모두 생겨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참으로 3악도의 고(苦)의 과보와 죄의 장애에 얽매이게 된다. 인간과 천상의 훌륭한 과보는 도기(道器)128)라야 감내할 수 있듯이, 뛰어난 과보를 감득하는 데 계율이 아니면 그 과보를 낳을 수 없다. 이로써 성인이 이 같은 가르침을 먼저 밝혔으니, 이리하여 3귀(歸)ㆍ5품(品)과 계법(戒法)129) 양과(兩科)가 있다.
7중(衆)의 소학(小學)은 반드시 3귀의를 줄기로 삼고, 1승(乘)의 대교(大敎)는 반드시 3취(聚)130)를 숭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경전과 율장에 모두 드러나 있다. 참으로 규범(規範)이 행업(行業)을 이루는 것이
거울에 비치는 것보다도 밝다. 지금 대략이나마 그 커다란 목표를 거론하여 그 빛으로 세속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한다. 그래서 계율을 발휘하는 근원은 반드시 삼보에 의지하는 것이다. 대체로 불ㆍ법ㆍ승의 삼보는 천상과 사람이 모두 존중하는 바이니, 귀의하여 신심을 내면 반드시 유(有)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약 삿된 귀신에 귀의한다면 도리어 고의 집착만 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부처님께 귀의하는 깨끗하고 믿음직한 선비[淸信士]는 여러 천신(天神)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삿되고 올바른 것을 확정해야 바야흐로 순조롭고 거역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신심은 도의 으뜸으로 공덕의 어미이고, 지혜는 해탈하여 유를 벗어나는 인(因)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참으로 지극한 말씀이다. 만약 이 같은 신심이 없다면 마음이 들뜨고 공허하여 계율에 귀의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발걸음을 떼는 데는 신심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무엇을 ‘3귀의’라고 말하는가 하면 불ㆍ법ㆍ승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는 참으로 귀중하기 때문에 ‘보(寶)’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불(佛)’이라 말하는가 하면, 스스로를 깨우치고 남을 깨우쳐 주되 스승 없이 대지혜를 성취한 5분법신(分法身)이다. 무엇을 ‘법(法)’이라 말하는가 하면, 스스로 법칙이 될 수 있고 정도가 될 수 있으며, 멸제(滅諦)의 진리로써 열반에 이르러 청정하여 상이 없는 것[無相]이다. 어떤 것을 ‘승(僧)’이라 이르는가 하면, 대중과 화합하여 무학(無學)의 공덕으로 나와 남이라는 아소(我所)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귀의’라 이르는가 하면, 의지할 수 있고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보’라고 이르는가 하면, 이로움을 초래하고 바른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으로 가까이는 인간과 천당의 과보를 얻고, 멀리는 무학(無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삼보를 구별하는 관문이다.
만약 지극한 가르침을 논하자면 이치는 오직 한 갈래이지만 그 비춤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다. 두루 비추어서 깨달음을 평등하게 하기에 ‘불보’라 말한다. 그 본체가 법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이를 일러 ‘법보’라 한다. 덕이 지극하여 늘 화합하므로 이를 ‘승보’라 말한다. 이와 같이 그 바탕은 하나이나 이치가 세 가지이면서도 성품이 함께하기에 ‘삼보’라 한다. 중생이 깨닫고서 불성(佛性)을 믿게 되면 이 같은 생사를 여의어 이로움을 일으키게 되니, 이 때문에 일체 중생이 귀의하여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번사삼귀(飜邪三歸),131) 둘째 오계삼귀(五戒三歸),132) 셋째 팔계삼귀(八戒三歸),133) 넷째 10계(戒),
다섯째 구계(具戒), 여섯째 10선계(善戒), 일곱째 대보살계(大菩薩戒)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계율은 허물 있는 대상을 방비하려는 것으로, 가까이는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6근(根)과 6대(大)를 단속하려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계율의 대상이 되는데, 자세한 것은 늘 하시는 말씀과 같다.
○ 계문송(戒門頌)
장엄한 금산의 지혜 보배 검[寶仞]134)
오롯이 빛나는 보배 옥구슬
간사한 의논을 가로막으니
하찮은 무리가 어이 깃들랴.
청정한 꽃처럼 엄숙히 사유할지니
지혜의 연못에 몸을 씻는다.
육군(六群)의 비구들135) 함께 못하니
7중(衆)이 언제나 화합할까.
단정한 율의(律儀)의 곧은 그림자
정도(正道)에 기울어져 사잇길 없도다.
궁궐136)을 벗어나 대각 이루고
반열반(般涅槃) 드시니 무엇을 헤매겠는가?
(21) 자경필고지신문(自慶畢故止新門)137)
예전에 발심한 이래로 지극한 덕이 귀의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잘 점검하고 힘써서 여러 가지 악문(惡門)을 소멸하고 의혹을 떨어내고 뉘우침과 부끄러움으로 이어서 닦아 간다. 함께 행할 것을 권장하여 계율과 덕성을 다시 드러내고 이와 같은 죄의 장애를 버려야만 한다. 이와 같은 훌륭한 법을 듣게 되면 어찌 뛸 듯이 기뻐하여 손뼉치며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전에서도 “여덟 가지 환난은 제도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첫 번째는 지옥의 난이다. 두 번째는 아귀의 난이다. 세 번째는 축생의 난이다. 네 번째는 변지(邊地)의 난이다. 다섯 번째는 장수천(長壽天)의 난이다. 여섯 번째는 사람 몸을 얻었더라도 눈멀고 귀멀어 말을 못하여 법을 듣지 못하는 난이다. 일곱 번째는 사람 몸을 얻어 6정(情)을 갖추었더라도 세속의 지혜만 밝아서 삿된 것을 믿어 그 견해가 전도되어 삼보를 믿지 않고 마음대로 경멸하는 것이다. 이 같은 몸이 죽고 나면 바로 3악도에 떨어져 업에 따라 묻혀서 오랜 후에야 나올 수 있으니, 지금 인도(人道)에 있더라도 다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예전과 나중의 부처님 사이에 태어나 정법을 보지 못하고 헛되이 한평생
살면서 사견(邪見)만을 늘리고 여러 가지 죄만 지으며 헛되이 죽는 길만 찾는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헛되이 태어나고 헛되이 죽는 것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법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은 먼저 이 같은 뜻을 기려야 하니, 생사는 커다란 일이니 스스로에게 관대해서는 안 된다. 지금 대략이나마 자경(自慶)하는 몇 가지 조항을 드러내어 그 마음을 묻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지옥을 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다 함께 이 같은 고를 면할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아귀는 벗어나기 어려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같은 고를 멀리할 수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축생의 몸은 버리기 어렵다 하셨는데, 지금 다 함께 이 같은 인을 심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변방에 태어나 인의(仁義)를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중국(中國)에서 예법과 지혜를 닦으니, 이것이 네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장수천에 태어나면 복을 심을 줄 모르기에 복이 다하고 목숨이 끊어지면 다시 악도(惡道)로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세간의 즐거움을 스스로 즐기지 않고 이를 돌이켜 공양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사람 몸은 얻기 어려워서 한 번 잃으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 눈먼 거북이 떠다니는 나무를 만나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지금 사람 몸을 얻었으니, 이것이 여섯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6근을 고루 갖추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결손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의 자경이다. 부처님께서 대장부의 남자 몸을 얻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으나, 내가 이미 얻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여인의 몸이라도 불성을 알게 되면 바로 대장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이미 정법을 안 것이다. 부처님께서 삿된 변론은 버리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정법에 귀의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예전의 부처님과 다음의 부처님 사이에 태어나는 것이 큰 환난이라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함께하면서 분개하며 뜻을 세우니, 이미 형상(形象)을 친견하고 정법을 들은 것이 녹야원에서 혹(惑)을 소멸한 것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께서 부처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부처님을 기약한 성상(聖像)에 머리 숙여 절을 하니, 그 공용(功用)이 평등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듣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이를 모두 갖춰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이렇게 대중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해서도 신심을 올곧게 하기가 갑절이나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일심으로 두 가지 소견을 취하지 않고 법을 공경하고 법을 애호하며 법으로써 스승을 삼는다.
경전의 게송에서는 이같이 말씀하신다.
과거의 세상을 돌이켜보면
삼보의 공양이 가볍더라도
받은 과보는 억 겁을 거치네.
남겨진 복록이 천사(天師)에 맞먹는다.
청정한 지혜로 생사 없애네.
탐ㆍ진ㆍ치 애욕을 끊어내시니
부처님 은혜는 가이없다네.
이로써 돌이켜 거듭 귀의할지라.
○ 자경필고불조신송(自慶畢故不造新頌)
봄도 내 봄이 아니고 가을도 가을이 아니니
한 자락의 긴긴 밤 지새울 때마다
형기(形氣)를 닦는 일 조물주에 맡기니
막힌 것 열어서 무거운 어두움 벗어난다.
영공(榮公)138)의 5락(樂)도 비울 것 아니니
기생(箕生)의 5복(福)139)을 어찌 구하리.
신령한 자태 신묘함에 모으기 힘드니
미언(微言)의 지도(至道)를 닦는다 하리.
해마다 태어나는 행운을 만나 즐거울지니
허물 채워 반복된 과오 근심 알려도
옛것을 다하고 새로운 것을 끊어
현인의 선을 바로 지혜의 흐름에 의지하노라.
(22) 대인악대문(大忍惡對門:인욕하는 문)
도(道)는 고(苦)에서 생겨나고 낙(樂)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덕은 공덕에서 건립되는 것으로 단순히 감정에 의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인욕(忍辱)이 제일가는 도이니 여러 중생들의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고에 머문 경우 장애가 많고 번뇌가 많아 선하지 않은 업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 무애(無礙)를 얻는 것도 참으로 장애에 연유해서 무애를 닦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애가 되더라도 장애로 삼지 않으니, 이미 장애가 있더라도 장애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인욕의 힘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전에서도
“사바세계는 5탁(濁)의 장소이니, 다섯 가지 고통과 다섯 가지 불태워지는 것으로 온갖 악의 과보를 갖추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대승을 펴는 많은 이들이 이 땅에 와서 고를 구원하는 것으로 양식을 삼고 고뇌를 뽑아내는 것으로 요체가 되는 행동을 삼는다.
이 땅에서 하루 선을 닦으면 다른 방토의 청정한 나라에서 백천만 겁을 닦는 것보다 훌륭하다. 그런 까닭은 참으로 지극히 고통스러운 곳에서는 마음이 선법(善法)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우뚝 마음을 내어 고통을 참고 욕을 받으니, 어찌 기발하지 않은가? 이른바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서방의 정토일지라도 복을 닦지 못하는 땅이다. 그래서 이 땅에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국(淨國:서방의 佛國)은 일곱 가지 재물이 풍요해서 보시에 의지하지 않아도 궁핍한 이들을 거둘 수 있다. 정국은 율의가 원만하고 깨끗해서 계율을 지키는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금법을 훼손하는 것을 통괄한다. 정국은 욕보는 일이 없기에 인욕도 없으나, 예토(穢土)는 욕보지 않는 일이 없으니 욕보는 상태에서 참을 수 있는 것이 다른 방토보다 훌륭하다. 정국에서는 정진하는 것이 머리가 불타는 것을 구하듯 하니, 뛰어나게 노력하지 않아도 게으름을 다스릴 수 있다. 정국의 사람은 물 흐르듯 법계에 들어가 생각마다 닦아 따르면서도 출입한다는 관념이 없어 고요한 선정을 기다리지 않고도 어지러운 뜻을 거두어들인다. 정국의 지혜는 밝고 원만하여 변재(辯才)나 교묘한 설법을 빌리지 않아도 어리석음을 다스린다. 또 정국의 사람은 넓은 서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넓은 서원의 공덕이 예토에 미치지 않는다. 4섭(攝)과 4등(等)이 동일한 예로 쓸모가 없어진다. 정국은 낙토(樂土)이기 때문에 고통을 구제하는 마음이 희박하고, 악토(惡土)는 고액이기 때문에 선법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용맹스럽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도 아닌 것에서 행하여 불도(佛道)를 통달한다”고 말씀하셨다.
넓고 큰 마음을 내서 보살행을 행하려는 것이, 스스로 위험한 것을 밟고 어려움을 모두 받으며 타오르는 불을 밟고 얼음 같은 서리를 지나되, 그 고통이 지극하더라도 고초를 달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만 가지 고액 가운데에서 그 감수를 견딜 수 있는 이는 도량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만약
이 같은 고뇌가 없다면 인욕이 어디로부터 생겨나겠는가? 이러한 번뇌에 의지하여 나의 여러 가지 선법을 일으키는지라, 이른바 속세에서 고생하는 그런 무리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
인욕이란 힘이 있는 대인(大人)의 근본적인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고통을 참고, 사상(思想)을 참고, 질병을 참고, 굶주림을 참고, 피곤함을 참고, 추위와 더위를 참고, 근심을 참고, 뜨거운 번뇌를 참고, 욕하는 것을 참아서 치욕이 없이 하고, 때리는 것을 참아서 노여움을 내지 않고, 탐욕을 참아서 애착을 없이 하고, 교만함을 참아서 도에 등지지 않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하기 어려운 것을 참고, 짓기 어려운 것을 참고, 처리하기 어려운 것을 참아야 한다. 이같이 행할 수 있으면 참으로 대인욕(大忍辱)이라 말할 수 있다.
○ 대인문송(大忍門頌)
곤륜산 기슭의 해맑은 옥돌
한수(漢水) 가의 1천 금 벽옥
청업(淸業)에 머물러 공덕 무겁지 않으니
결백한 몸 어리석음 짝하나 도가 깊네.
애증(愛憎)과 희로는 나면서 익숙한데
연지와 곤지를 세간에선 기리네.
커다란 권세가 1만 장정을 대적하니
누가 즐겨 이 마음 다스리리오.
날뛰는 야생마 무소 잡기 힘드나
고삐로 단단히 매어둔다네.
만사를 잊고서 다시 무엇을 생각하리.
고요히 기다림 없이 유유자적하네.
(23) 연경무애문(緣境無礙門:경계에 걸림 없는 문)
경전에서는 세속에 있는 것을 “얽매였다”고 말하였고, 도에 있는 것을 “풀린다”고 말하였다. 풀어지면 장애가 초래될 것이 없고, 얽매이면 그에 따라 초래되는 것이 생긴다.
지금 만약 기다림 없는 것에서 기다림 있는 것을 바란다면 기다림 있는 것이 더욱 복잡해진다. 기다림 없는 것에서 기다림이 없으면 기다림 있는 것이 저절로 떠난다. 기다림 있는 것이 떠나고 나면 무애(無碍)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기르는 것에 뜻을 두면 얽매인 것이 더욱 무거워짐을 볼 것이다.
단지 중생이 범부의 부류와 마주하는 것마다 막히는 것이 많으니,
사물에 의거하지 않으면 스스로 구제하는 데 일정한 방식이 없지만, 사물에 의거하면 얽매임이 무겁게 된다. 태어나면서 얽매여 있으니 무슨 방도로 해탈하겠는가?
지금 그 누(累)를 깊이 알아야 하니 누야말로 고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아는가? 지금 뭍으로 가고자 하는데, 수레와 가마가 없으면 인마(人馬)가 움직이지 못하니, 이것이 첫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물로 가고자 하는데 배를 타지 않으면 이동하지 못하니, 이것이 두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그 몸을 기르고자 하는데 옷과 저택이 아니면 의탁할 곳이 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그 목숨을 기르고자 하는데 쌀ㆍ보리ㆍ기장ㆍ메조 등 다섯 가지 맛이 부드럽지 않으면 기다려 기를 것이 없으니, 이것이 네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일혜(一慧)를 닦아 모으고자 하는데 향하는 곳이 없는 것과 비슷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한 부처님과 한 정토를 친견하고자 기특한 마음을 내어도 막연하여 보지 못하니, 이것이 여섯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시방을 낱낱이 살펴보고자 해도 장애가 눈에 가득하니, 이것이 일곱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를 구하여 미혹을 제거하고자 하여도 중생의 마음이 행하는 것에 가까워 스스로 보지 못하니, 이것이 여덟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경문을 펴서 이치를 찾고자 비록 마음으로 애써서 공부하여도 얕은 말에만 가까이하고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니, 이것이 아홉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지금 경전을 암송하여 익히고자 하나 받아들여도 바로 잊어버리니, 이것이 열 번째 얽매임의 장애이다.
대체로 이와 같은 얽매임의 장애는 그 일이 한량없다. 성인이 걸림 없이 자재한 것도 무엇 때문에 이러했겠는가? 실로 세속의 괴로움을 멀리하고, 스스로 책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은 데 말미암는다. 여기에서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은 열심히 힘쓰는 것 아님이 없다. 스스로 행하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 나를 위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양하여 얻으면 그 이치가 통하며, 구하여 얻으면 그 이치가 막힌다.
보살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단지 중생을 이롭게 하기만 바라니, 이로써 그 이익이 자신에게 있어도 장애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은 늘 자신만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잊으니, 이로써 늘 얽매여 해방되지 못한다. 성인은 구하기만 하면 얻으니, 이는 영원히 막혀서 나루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만약 성인을 배우고 범부를 버리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성인이 익힌 것을 따르되, 비록 그 갈래가 한량없더라도 나루터를 건너가는 지름길은 오직 하나의 해탈뿐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만약 스스로 얽매임이 없으면서 저 사람의 얽매임을 풀어 주고자 하면, 여기에는 옳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보살도를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범부의 얽매임을 버려야 한다. 범부의 얽매임이란 다섯 가지 욕망을 뜻대로 자유롭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실로 커다란 얽매임이다. 그러므로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이를 저버리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경전에서 “노비와 축생을 기를 수 없다”고 하셨으니, 마땅히 스스로 근면하여 생사를 떠나야 한다. 만약 다른 것에 의지하면 그 다른 것이 오히려 나를 얽맬 것이니 해탈을 기약할 수 없다. 지금 “노비 없이는 살림하지 못하고 노비 없이는 일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기력이 강건한 때에 하루아침에 자리에 누워서 백 가지 일을 함께 버리는 짓이다. 스스로 구하기도 여가가 없는데, 어떻게 근심이 다른 사람까지 미치겠는가? 마땅히 스스로 책려하면 해탈의 문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 무애문송(無礙門頌)
황홀한 저 사물들
용이 일어나고 난새[鸞] 모이는 것 누가 가리겠는가?
지혜를 끊고 몸 잊으면 무엇이 장애되는가?
이름을 잡아 밝게 비추면 드러날 수 있다.
일월이 아니라도 빛을 드리우니
편안히 날고 앉으며 허공을 밟는다.
틈 없는 벽돌 사이로 마음대로 출몰하는데
물과 불 성질대로 변화에 맡기네.
정교(正敎)가 세간에 샘처럼 흘러 퍼지니
방토(方土)에 드러남이 바람 같으리.
위대하구나. 세간을 벗어나 아무도 없구나.
헌원(軒轅:황제)과 순(舜)을 그리워하는 데 스스로 힘쓴다.
(24) 일지노력문(一志努力門:한결같이 뜻을 세워 노력하는 문)
처음부터 덕을 가려서 장애가 없는 것에 지극해지면, 선과 악의 두 갈래와 범부와 성인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진리를 분명히 기리니, 이것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열심히 노력하여 행하여야 한다. 경전에서는 “세간에서 탐내는 마음이 오래 흘러 스스로 애욕의 바다에 묻히는 것을 슬퍼하며 내 홀로 그 근원으로 돌이키고자 하므로 스스로 근면하여 두드러진다. 그래서 대대로 고행을 닦아도 수고롭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경전에서는 “내가 아난과 더불어 공왕불(空王佛)140)의 처소에서 함께 보리심을 내었는데, 내가 늘 힘써 정진하여 이로써 정각을 빠르게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또 정법의 지혜를 얻고서 싫증내는 마음 없이 중생들에게 설법하였다고 하신다. 이야말로 노력이라고 이를 수 있다.
중생이 3유(有)141)에 유전하면서 고액을 당하여 서로 얽매이는데, 이로써 의식이 어두워지고 생각이 얕아서 미혹함이 많아진다. 매번 선을 닦을 때마다 겁내어 물러서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생각마다 백 가지로 변하여 어그러지고 어긋난다.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권하고, 강한 것으로 장려하지 않으면, 용맹하고 날카롭게 과단성을 가지는 마음을 발휘하지 못한다.
경전에서는, “중생이 무명의 원수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 또한 세간에서 적군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세간을 다스리려면 꽹과리로 씩씩하게 하고, 북을 쳐서 그 분노심을 일으키며, 결단으로 그 힘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용기를 발휘하고 이것에 의탁하여 맹위를 떨치지 못하면 어찌 명조(鳴條)142)의 전투에서 꺾겠으며, 목야(牧野)143)의 정벌을 이끌겠는가?
지금 번뇌와 더불어 전투하는데 마땅히 무루(無漏)144)의 지혜를 모으고, 무외(無畏)의 군대에 명령내리고, 도품(道品)145)의 대중을 이끌고, 6도(度)146)의 승려들을 부리며 도량의 깃발을 세우고, 감로의 북을 울리며 큰 서원의 투구를 쓰면서 인욕의 갑옷을 두르고, 지혜의 활과 칼을 쥐고서 견고한 화살과 방패를 잡으며, 정진하여 게으름을 독려하고 근수(勤修)하면서 이르지 못함을 다그치고 발걸음을 옮겨 환희지(歡喜地)로 올라야 한다.
수레를 풀고 쉬면서[稅駕]147) 법운지(法雲地)에 오르며, 종지(種智)로써
그 용맹을 끊고 방편으로 그 책략을 쓰니, 여기에서 무명의 늙고 죽는 도적이 4마(魔)의 군대를 따르고 파순에게 영향 받아 천녀에 궁핍하게 의지한다. 귀신에 의지하는 수천만의 중생들 산을 지고 불을 토하니 번개가 사방을 둘러친다. 그 어둠으로 미혹된 군대로 금강 같은 군사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은 조화로 오랜 동안 덕을 쌓을 생각을 하지도 않고 마귀를 굴복시키려는 것과 같다.
한 생각 노력하자 확연하게 크게 밝으니, 비법(非法)의 왕이 무너지고 정법의 왕이 승리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경(經) 가운데 성대한 일이니, 만약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집안을 운영하더라도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수고롭게 부지런히 일하여 스스로 자기 집안에 넉넉히 채워 추위와 굶주림에 절실하지 않게 한다. 단지 노력할 수 있다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세간을 벗어나 묘하게 행하더라도 세속과 다르지 않으니, 만약 노력을 적게 하면서 은미하게 다시 생각을 하면 3명(明)148)과 6통(通)149)도 어렵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방편을 써서 마음과 몸에 크게 부과하면 믿음으로 따르는 인욕이 점차 스며들어 저절로 이를 것이니, 어찌 공연히 한평생을 헛되이 보내버릴 수 있겠는가?
3악도가 자신에게 닥쳐도 베풀 만한 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다시 태어남을 후회한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이로써 노력하는 일문(一門)을 앞뒤로 관통하는 것은 그 마음을 제자리에 두고 행실을 지극히 하는 이와 같은 것뿐이다.
원하건대 유계(幽界)와 명계(明戒)의 거룩한 거울로 그 한없는 길을 밝게 비추게 하소서. 이 때문에 말을 내고 글에 의탁하여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 노력문송(努力門頌)
예북(豫北)의 산들도 옮겨 놓는데
강가의 조각 섬도 당할 수가 있다.
정성을 다하여 속진(俗塵) 떨구니
마음에 감응하는 것 초석을 가르네.
유자(有子)150)의 손바닥 이름 날릴세.
왕생(王生)151)의 머리카락 명망 높구나.
마음을 다스려 간난 없애니
어찌 노력하여 근심을 벗어나지 않겠는가?
법고(法鼓)와 번당(幡幢)이 울려퍼지니
대사(大師)와 대중들 어지러이 달려가네.
무아(無我)의 상법(常法)이 엄연히 펼쳐 있으니
무명의 얽매임 누가 풀런가.
(25) 예사리보탑문(禮舍利寶塔門)
대성이 행하는 교화의 말씀은 상황에 따라 감화하여 이롭게 하니, 비유하면 한 말씀의 설법이 각각 그 이해(理解)를 얻듯이 한다. 그래서 현생(現生)에 그 이익을 받게 하고자 하여 성신(聖神)을 모태로 내려와 왕궁에 거룩하게 태어나신 것이다.
출가로 이로움을 얻고자 하시어 금륜(金輪)의 자리를 버리고 삭발하신 것이다. 상호(相好)로 이로움을 받게 하시고자 하여 정각을 성취하여 보리수(菩提樹)에 앉으신 것이다. 실상(實相)으로써 이로움을 받게 하시고자 하여 법륜(法輪)을 세 번 굴려 12부경(部經)을 만드신 것이다. 멸도(滅度)로써 이로움을 받게 하시고자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빛을 거두시고 열반을 나투신 것이다.
참으로 중생의 업장이 번다함으로 말미암아 성인의 교화도 따라 응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그리하여 열반을 보이시자, 바로 자비심을 더욱 발휘하고 사모하는 마음에서 선심이 더욱 짙어졌다.
대체로 성상(聖像)과 불탑(佛塔)에 예배하는 것은 모두가 자비심을 내어 속으로 사모하게 하고자 함이니, 마음속으로 애를 태우며 정법을 추모하면서 내가 이를 우러러보지 못하여 여래께서 친히 음지(音旨)를 내리시지 못하는 것을 애달파하는 것이, 마치 조상의 묘에 들어가 그 영혼을 보고서 흐느껴 울면서 뵐 낯이 없듯이 한다.
여래께서 은근하게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고행(苦行)을 갖추도록 하셨으나, 내가 이를 위배하고 스스로 악도로 떨어져서 성상의 끝에서 해탈하지 못하니, 고행의 과보로써 여래의 은혜를 되새긴다. 그리하여 지금 각자 그 마음을 성상과 불탑에 귀의하여 오열하며 부끄러운 낯빛으로 눈물 흘리게 된다.
지극한 마음으로 지존과 황후와 황태자 및 칠묘(七廟)의 성령을 받들지니, 지금 천룡팔부에게 믿음으로 보시하며 널리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 모든 중생들에 이르기까지 보시하게 된다.
시방삼세 일체의
찰토(刹土) 가운데 모든 여래 형상의 영묘(靈廟)152)에 삼가 예배합니다. 석가여래께서 현전하신 일체의 영골(靈骨)과 사리(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정골사리(頂骨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누개사리(髏蓋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안정사리(眼精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일체의 머리카락과 손톱의 사리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일체의 지골사리(指骨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일체의 치아사리(齒牙舍利)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나투신 법의ㆍ발우ㆍ물병ㆍ석장 및 온갖 공양구에 삼가 예배합니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과 다니시고 앉으신 유적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의 보탑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법륜을 굴리신 처소의 보탑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처소의 보탑에 삼가 예배합니다.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아육왕이 이룩한 8만 4천 개의 탑에 삼가 예배합니다. 아육왕이 일으킨 한량없는 여러 불상에 삼가 예배합니다. 천상과 인간 및 해상 용궁의 일체 성상(聖像)과 불탑에 삼가 예배합니다. 이 나라의 여러 주의 상서로운 성상에 예배합니다. 이 나라 여러 사찰, 여러 산림의 무량한 성상에 삼가 예배합니다. 천상과 인간과 해상의 한량없는 성상에 삼가 예배합니다.
원하옵건대 일체 중생이 부처님 앞에 있고 부처님 뒤에 있고를 막론하고 늘 부처님께서 나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득도하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는 것을 늘 보고서, 이와 같이 한량없는 성상과 불탑을 건립하되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불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 예사리상탑문송(禮舍利像塔門頌)
월인(越人)이 불상 짓는 데 성심 다하고
위후(魏后) 또한 슬프다고 하네.
현자의 조그마한 지조도
성인이 멀수록 그리움 더욱 자라네.
기원(祇園)의 나뭇가지 오래된 가지 많으니
왕궁은 적막하게 터만 남겼네.
성상이 계신 방 우러러볼 것처럼
거룩한 자태가 눈에 어리네.
함께한 나날에 홀로 어긋나
언제나 도는 멀고 명은 어긋나네.
마음 기울여 생각하면 애닲고 그리우니
성령(聖靈)을 그려내 미혹 없애리.
(26) 경중정법문(敬重正法門)
제법(諸法)은 원래 공하고 적멸(寂滅)은 말이 없다. 인연으로 하여 글자가 드러나 있으니, 마땅히 문자 경전은 본래 병을 깨트리고 미혹을 없애는 것을 우선함을 알아야 한다.
미혹이 이미 8만 4천 가지가 있으므로 가르침의 문에도 8만 4천의 법장(法藏)이 있게 되었다. 병이 낫고 미혹이 없어지면 약도 이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 마치 뗏목의 비유와 같아서 마음으로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군생(群生)이 그물에 걸리고 말에 따라 얽매이게 되니, 이 같은 소견에 연유하여 가르침의 약을 늘어놓게 된다.
그래서 금간(金簡)153)이 보전(寶殿)에 가득하고 옥축(玉軸)이 신궁(神宮)에 빛나서, 마침내 가법(假法)과 실상(實相)으로 공(空)과 유(有)를 가리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편의 지혜를 겉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여래의 일대(一代) 49년간 인연 따라 가르침을 내리시고자 갖가지로 법을 설하셨으니, 열반에 이르기까지 단지 성교(聖敎)만 있었으니 그 말씀에 따라 반드시 고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치로써 현리(玄理)를 말하여 정종(正宗)에 몽매하지 않고 말이 비록 득실이 있더라도 온전한 이치는 어그러지기 어렵다. 그래서 법의(法依)를 세워야 영원히 단정하게 된다. 천마외도(天魔外道)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지혜의 해가 가라앉으면서부터 법운(法雲)이 널리 퍼졌으니 그와 같은 간책(簡冊)이 아니라면 이러한 공을 올릴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대가섭(大迦葉) 존자는 법문의 영웅이시니, 종을 치고 큰소리로 고하여
무학(無學) 승려 1천 분을 소집하고서, 하안거 동안 남기신 말씀을 결집하여 열두 가지 이치로 삼장의 도를 거두셨다. 다라(多羅) 잎의 경전이 그 양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서하(西夏)에서 쌓은 것만 천 년이나 흘렀다.
시대의 운세가 점차로 스며들어 동쪽으로 한조(漢朝)에 이르렀고 그 물결이 저곳에서 흘러와 지금까지 600년간이나 내려왔다. 잡록(雜錄)과 정경(正經)의 7천여 권이 글 뜻이 분명하고 법미(法味)를 논하여 빠뜨리지 않았다. 가까이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며, 멀리는 범부를 뛰어넘어 성과(聖果)를 증득하는 것을 서책에 갖춰 놓았으니, 지혜로운 이는 이를 찾아보되 지극한 마음으로 지존과 황후와 황태자 및 7묘(廟)의 성령과 천룡팔부 내지 시방의 고통 받는 일체 중생을 받들어야 한다.
일체 진여(眞如)의 정법장(正法藏)에 삼가 예배합니다.
시방 일체의 제불께서 말씀하신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현겁(賢劫)154)의 첫 번째 부처님 구루손여래(拘樓孫如來)의 천상과 용궁의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의 천상과 용궁의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가섭불(迦葉佛)의 천상과 용궁 가운데 일체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석가여래의 천상과 용궁의 일체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서인도 흑봉산사(黑峰山寺)의 일체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저거국(沮渠國)155)의 대승 12부(部)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북인도 석벽(石壁)의 8자(字) 사신(捨身) 법장에 삼가 예배합니다.
신주대국(神州大國) 일체의 중장(衆藏)과 경전에 삼가 예배합니다.
역주(易州)의 석경(石經)과 삭주(朔州)ㆍ항안(恒安) 석굴의 불경과 성상에 삼가 예배합니다.
일체의 삼장을 수지한 여러 법사님께 삼가 예배합니다.
일체의 선사와 율사 및 경전을 독송하는 여러
행자들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원하건대 일체의 중생들이 이와 같은 법문에 들어가 늘 총지(總持)하면서 널리 교화를 펴서 통달하여 걸림 없게 하소서.
○ 법문송(法門頌)
대문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디로 나가겠는가?
법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무엇을 닦겠는가?
연(燕)ㆍ초(楚)로 다닐 제 준마 타듯이
바다를 건널 제 큰 배 탈지라.
자비의 말씀 이롭고 씩씩하며 넓은데
성도(聖道)가 퍼져도 아득히 얻기 힘드네.
해보다 밝은 빛 등불 켤진대
깊고 윤택한 물길 그윽하게 흐르네.
선법을 펴고 도와 가르침 펴니
어리석은 미혹을 밝혀 근심 없애네.
공덕을 이뤄도 이름 안내니156)
집착도 없애고 교화할세라.
(27) 봉양승전문(奉養僧田門:복전의 스님들을 공양하는 문)
스님들을 ‘복전(福田)’이라 부르며 여러 가지 도리를 근본으로 공경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어리석은 세속에 어두운 마음을 계발시키고 정도의 먼 길을 열어서 물에 빠진 것을 건져서 장차 3유를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법의 그물을 펴서 만령(萬齡)에 이르도록 널리 보살피니, 이로부터 도는 천하에 미치고, 덕은 사방의 세속을 밝혀서 선법의 종자를 낳으므로 ‘복전’이라고 부른다.
덕이 건퇴(犍槌)157)처럼 울리기에 또한 ‘응공(應供)’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마음은 이치에 어긋나고 행은 법과(法科)에 벗어나니 삭발하는 모습을 어긋나게 드러내고 공(空)으로 자란 나무의 과보를 그윽하게 받으니, 시주를 원수로 삼고 골육을 종기처럼 여기며 그 혈기가 끓는 모양을 찾아볼 수 있으니, 석녀(石女)158)의 짝이 멀지 않다.
스님이 불장(佛藏)을 보호하고 밝은 말씀 미혹하지 않고, 지혜로써 대경(大經)을 논하며 청정한 범절(範節)을 펼치는 바가 있으니, 참으로 날마다 세 번 반성해야 하고 일마다 아홉 번 생각하여야 한다.159) 생각마다 마음을 책려하여 편안히 머무는 때가 없어야만 바야흐로 3승(乘)의 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며, 삼보의 일원에 참여할 수 있다.
성대한 덕이 볼만하게 되면서 6도(道)가 귀의하게 되어 유(有)를 벗어나는 높은 행실은 비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7중(衆)이 서로 따르며
복전을 삼으니, 어찌 형체가 비록 역중(域中)에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역외(域外)로 초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속의 흐름에 묶이고 굴레에 묶이는 것이 혼미하니, 삶에만 집착하다면 어떻게 멀리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승보(僧寶)를 세워서 세속의 양전(良田)으로 삼는 것도 복의 힘을 일으켜 생사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으로 헛되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굴레 밖으로 벗어나서 역중(域中)에 모범을 삼으면서, 만물을 위하여 공양을 받으셨으나 실제로 받은 것이 아니다. 법은 미혹을 없애는 데 있으며 청정함은 정(情)이 아니며, 공양하여 과보를 감득하는 것도 스스로 생사의 업보에 따르는 것이다.
스님은 범부와 성인을 포함하지만, 그 형체가 전생의 인(因)에 얽매여 있다. 설사 무학(無學)을 이루었더라도 고의 보에 얽매이니, 몸이 남김없이 시들게 되면, 바야흐로 제유(諸有)를 벗어나게 된다. 지금 형체의 누(累)로써 연(緣)을 삼아 자양이 많이 필요하므로, 보시를 하는 것은 가르침이 스님에게 달려 있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스님에게 공양하여 삼보를 갖추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내 말에 따르는 것은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고, 해탈하고자 하는 것은 법을 공양하는 것이며, 대중 스님들을 수용하는 것은 스님들을 공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같은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스님들을 ‘좋은 복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삼가 지존과 황후와 황태자 및 7묘의 성령과 천룡팔부, 나아가 시방의 고통받는 일체 중생들을 받들고자 시방의 일체 승보에 삼가 예배합니다.
미래에 하생(下生)하시는 부처님이신 도솔천의 미륵보살승(彌勒菩薩僧)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방토(方土)를 다니시는 대사이신 문수사리보살승(文殊師利菩薩僧)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고액을 구원하시는 대사이신 관세음보살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법을 보살피는 대사이신 보현보살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죄업을 없애 주는 대사이신 허공장보살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시방의 일체 대도심(大道心)을 행하는 보살승(菩薩僧)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시방의 일체 연각(緣覺)의 마음을 행하는 벽지불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시방의 일체 하승(下乘:교의가 얕게 드러난 것)을 행하시는 여러 성문승(聲聞僧)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빈두로(賓頭盧) 존자와 만 년 동안 법을 주지하시는 여러 성문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불자(佛子) 라후라(羅侯羅) 존자와 만 년 동안 법을 주지하시는 여러 성문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섬주(剡州) 산해(山海)의 9억만 년간 법을 주지하시는 만 년의 여러 성문승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삼천세계 내에 현존하시는 일체의 여러 범부와 성인 스님들에게 삼가 예배합니다.
원하건대 일체 함령(含靈)이 늘 성현과 더불어 정도를 함께 타고 지혜를 열고 복을 낳아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날 적마다 선지식을 만나고 번뇌를 제거하고 제유를 벗어나게 하소서.
○ 승문송(僧門頌)
다섯 옥구슬[五玉]160) 윤기 있고 말씀은 미더워
여덟의 계수 향기롭지만 바람이 부네.
묘리(妙理)와 지언(至言)이 성보(聖寶)일진대
스님들 아니면 누가 도를 넓히리.
공법(空法)을 관조하여 흘러가는 현상을 지각하고
세속을 만져보아 생사 여의네.
욕정을 끊고서 환락 떠나니
영락한 영화에 조각한 장식 버리네.
친척을 아끼는 것이 갑자기 바람 날리니
재물의 이익도 풀잎 같아라.
신령한 구름 헤아리니 어찌 높다고 하는가?
강한(江漢)에 발 씻어 참회 이루네.
(28) 권청증진문(勸請增進門)
권하고 요구하는 것[勸請]은 간절하고 친절함이 지극한 마음이다. 은근한 마음을 내는 것에서 선행을 바라는 마음이 깊어진다. 이 때문에 일체의 실낱 같은 선(善)도 모두가 은근하게 권장하여 지혜의 행을 낳도록 증진시키되 중도에 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권청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중생을 성심으로 권장하여 행을 닦고 선법을 지켜서 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갖추게 하는 것이고,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호하시어 오래 머물며 설법하시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시방의 네 갈래 악취(惡趣)에는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여러 가지 계행(戒行)을 닦고 지니게 하여 사람 몸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일체 사람에게는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열 가지 선업을 닦게 하여 천상에 태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여러 천신들에게 내가 이제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정정취(正定聚)를 세워서 악도를 여의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여러 학인(學人)들에게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살펴서 속히 무학의 지위를 증득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아라한들에게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구경의 자리가 아님을 깨닫게 하여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만이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벽지불(辟支佛)께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대비(大悲)의 지혜를 성취해서 여러 중생을 교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과 천상의 2승(乘)의 대중에게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여래장(如來藏)을 깨닫게 하고 보살행을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일체의 여러 보살님께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10도(度)의 행을 수행하며 속히 10지(地)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도솔천의 보살님께 내가 지금 성심으로 권장하여 늘 법륜을 굴려 퇴전하지 않고 속히 내려와 군생을 제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살의 지혜가 밝지 못한 이에게는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여 진루(塵累)를 금강같이 소멸시켜서 진실상(眞實相)이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시방의 일체 부처님으로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분께는, 내가 법륜을 굴릴 것을 성심으로 권장하여 여러 중생을 안락하게 하겠습니다.
시방의 일체 부처님께서 만약 수명을 버리고자 하면, 내가 지금 목숨을 다해 성심으로 권장하여 세상에 오래 머무실 것을 발원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불보살에게 내가 지금 모두 성심으로 권장하며, 이와 같이 은근한 마음을 내어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 권청문송(勸請門頌)
탁수(濁水)가 맑기를 기다려 성조(聖朝) 만나니
신령한 지혜로 굽어보며 요원함을 하나로 하네.
밝은 해 빛을 드리워 흐르지 못하나
하찮은 작은 뜻 헛되이 기울이네
공(空)과 유(有) 삼계에 두루 가득 차
우주를 가득 채우고 팔방을 다하니
덕으로 업을 이루어 지각에 오르니
상주(常住)를 적막하게 끊어 세간을 초월하네.
욕화(欲火)에 불타면 꺼줄 비 그립고
번뇌의 큰 물[使水]에 빠지면 배 저어 주며
자비로 널리 제도함을 서원 세우고
법륜을 굴려서 천천히 끌어 주시네.
(29) 수희만선문(隨喜萬善門:만 가지 선행을 함께 기뻐하는 문)
중생이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증상(增上)을 질투하는 마음을 많이 품으니, 남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보면 나쁜 생각을 내고서 이를 가로막고 파괴하여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앞선 사람은 반드시 그 행을 손상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같이 질투하는 사람은 망령되이 번뇌의 열기를 더욱 늘려서 미혹의 업을 키워 생사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로써 성인이 마음을 다스리고 뜻을 제어하여 이같이 수희(隨喜)를 행하되, 아울러 여러 중생에게 말씀대로 받들어 행하라고 권하셨다.
시방 일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선과 인의 및 예지(禮智), 효양(孝養)과 공겸(恭謙), 자애(慈愛)와 애경(愛敬), 염정(廉貞)과 정갈한 행에 대해서 만약 이와 같은 선법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지금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욕심을 떠난 재가인(在家人)이 여래의 계율을 받들어 닦으면서, 3귀의계(歸依戒)ㆍ5계ㆍ8계ㆍ10선계와 보살계의 청정한 여러 율의(律儀)로 악을 여의었다는 이름을 듣게 되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을 내가 지금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스님에게 공양하고 법의(法依)를 보시하면서 번뇌의 때를 씻어내며 온갖 가난한 이를 구호하되, 춥고 배고픔에 궁색한 이가 질병에 고통 받으면 약을 보시하며 그 업을 불쌍히 여기면 이러한 공덕에 대해 나는 지금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길을 넓히고 좋은 샘을 파며 다리를 놓고 배를 가지고 사람을 건네주며 원림에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어 부처님께 보시하고 스님에게 공급하면서, 목마르고 궁핍한 사람에게 뜨거운 고뇌를 없애 주어 그 복이 실로 무량하니, 이와 같은 공덕에 대하여 나는 지금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경전을 이룩하여 법의 가르침을 유포하며, 등불을 켜서 지혜의 밝음을 내거나, 이를 외우며 독송하여 온갖 의취(義趣)를 터득하고 다시 남에게 해설하여 환희심을 더욱 늘리면, 이와 같은 모든 공덕에 대하여 나는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불탑과 법당과 고찰과
벽화와 나무 불상과 금ㆍ은ㆍ동ㆍ주석 등의 성상의 여러 상호를 옮겨 새겨서 법신(法身)을 현시하시면, 이와 같은 여러 공덕에 대하여 나는 지금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만약 스님의 거처를 만들어서 침상과 와구(臥具)를 마련하여 저들로 하여금 마음을 쉬게 하여 선림(禪林)에서 그 뜻을 편안히 하게 하면서, 고공(苦空)의 문을 드나들면서 차례대로 적멸(寂滅)을 관찰케 하면, 이와 같은 모든 공덕에 대하여 나는 지금 모두 따라 기뻐할 것입니다.
여래께서 큰 자비로 여러 가지 큰 법문을 잘 말씀하시고자 수희행(隨喜行)을 발명하였으니, 지금 우리들이 배우면서 여러 성문들이 괴로움을 참고 생사를 건너는 것을 따라 기뻐하고, 여러 보살들이 악도의 몸을 받는 일을 버리지 않는 것을 따라 기뻐합니다. 시방의 부처님이 천인존(天人尊)을 두려워하지 않고 삼계의 감옥에서 여러 중생을 건져내시는 것을 따라 기뻐합니다.
원하건대 중생의 군유(群類)가 모두 불도(佛道)를 얻게 하소서. 이리하여 내가 따라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 수희문송(隨喜門頌)
착한 일 듣기를 좋은 책을 대하듯 하고
어진 이 보고서 두루 본받고 칭찬할세라
유명(幽明)의 감통에 효성 다하며
죽음 무릅쓰고 충의 지키리.
예의를 다하여 헌장(憲障) 세우고
지략과 용기로 간악한 사나움 평정하네.
백법(白法)을 밝혀 커다란 뜻 여유로운데
고명한 이론 은미하여 신명 다하네.
몸을 버리고 남들을 위하되 이름 숨기고
재물보다 의리 기리고 보답을 버리리.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이 어지러이 습관이 되고
정성을 다하여 기뻐한다네.
(30) 회향불도문(迴向佛道門:불도로 회향하는 문)
‘회향(迴向)’이란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래 일체 중생이 온갖 행동을 모두 다스리면서 목숨과 재물을 버렸으나, 이로써 생사의 해탈을 얻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가 과보에 집착하는 것으로 인하여 이를 여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 마음에 집착 없이 수행하여 제도하고 다스린다면, 비록 작은 복이라도 군생에게 돌려 베풀어 불도(佛道)로 향하는 사람은 바로 그 과보에 집착을
내지 않고 바로 생사에 초연하게 해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행하여 회향하게 되면 커다란 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체 자기가 지은 선업은 모두 회향하면서 아울러 중생에게 과보에 집착하지 말라고 권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몸은 과보의 근본이니, 종일토록 먹여 기르며 장중하고 엄숙하게 다듬어 꾸미더라도 반드시 죽을 때에는, 헛되이 이를 보존하고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니 스스로 어리석지 않더라도 이 같은 몸에 애착하기 때문에 밝은 지혜가 적은 것이니, 어떻게 싫어하지 않는 때가 있겠는가? 이리하여 지혜로운 이는 가슴을 만지고 마음을 살펴서 탐착하여 생사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방의 여러 중생이 아주 작은 선업을 행하되 어질고 효성스러우면서 공경스러우며 자애롭고 부드러운 것 따위나 충정으로 예의와 지혜를 닦고, 자긍심으로 의롭고 곤궁한 사람들을 보살펴서 이러한 세속의 선으로 불도를 모두 돌이킨다.
일체의 여러 외도가 갖가지로 고행을 쌓아 다섯 가지 열기(熱氣)161)로 그 몸을 지지고 절벽에서 내리뛰고 물과 불을 밟으며 도탄(塗炭)에 거꾸로 매달리면서 한량없는 여러 사견도 지금 모두 회향하여 다 함께 정각의 길로 귀의합니다.
모든 청신사(淸信士)는 계율에 귀의하여 10선을 행하되, 여러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또한 복과 덕을 닦을 수 있고, 법을 잘 설하여 온갖 묘한 복을 열어 내게 하되, 다시 이를 되돌려 군생에게 베풀어 다 함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게 하소서.
일체의 제자 대중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깨치니, ‘선래(善來)’로서 비구가 된다. 이리하여 4도과(道果)의 방편 및 초관(初觀)과 고공비상상(苦空非常想)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이켜 중생에게 보시하여 다 함께 무상도로 행합니다.
시방의 여러 벽지불이 자연(自然)으로 연각(緣覺)을 이루어 깊이 깨달아 세상과 달리하므로, 인연법을 깨닫고서도 세상에 숨든 드러나든 중생을 교화하기도 하고 외진 곳에서 선적(善寂)을 즐기니, 이와 같은 일체를 겸하여 남김없이 불도로 회향합니다.
시방의 여러 보살 가운데 경법(經法)을 독송하거나 선정에 들거나 선정에서 나오는 이들에게 온갖 선을 만물에 행하도록 성심으로 권장하면서, 이 같은 세 가지 선을
일체 온갖 덕의 근본으로서 돌이켜 중생에게 베풀어 무상도(無上道)로 귀의합니다.
일체의 여러 선법(善法)들이 현성(賢聖)의 과보에 이르기까지 공(空)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하고 유(有)와 무(無)를 함께 다하지 못하여, 일체와 더불어 다 함께 참다운 묘한 경계로 들어가되 이처럼 유상(有相)의 마음을 돌이켜 모두 해탈로 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여러 보살에게 내가 지금 회향을 성심으로 권장하니, 집착 없는 마음을 발휘하기를 권장하면서 머리 숙여 절합니다.
○ 회향문송(迴向門頌)
9주(州)의 각처에 사람 다르니
네 계급 사람도 마음 다르네.
수레를 굴려서 세간의 업을 따르니
이치를 펼치되 헛된 이름 숨기리.
유(儒)ㆍ묵(墨)162)이 달라서 회통 못하고
일곱의 학파가 서로 다르네.
길흉을 가리고 운수[數術]163) 따지니
만나고 흩어지는 것이 실로 번거롭구나.
아침 해와 저녁 달 어이 얻으리.
물과 불 밟아도 인생 헛되리.
가는 길 잃고서 탄식하며 고삐 돌리니.
흐르는 물줄기 동해로 나아가네.
(31) 발원장엄문(發願莊嚴門)
원래 온갖 악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마음 바탕의 탐ㆍ진ㆍ치에 연유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해치고 남을 해치는 것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근본삼독(根本三毒)이라 이름하는데, 능히 번뇌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한다.
악은 일으키는 연에도 삼삼의 아홉 가지가 있으나, 이 같은 아홉 가지 이치가 선과 악을 관통한다. 세 가지 선근(善根)이 생겨나면 ‘선업도(善業道)’라 이름하고,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 생겨나면 ‘악업도(惡業道)’라 이름한다.
그래서 행자가 늘 그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면서 티끌만 한 것이라도 모양을 일으키면 이를 잘 살펴서 6근(根)을 수호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게 하여야 한다. 늘 큰 서원을 발하여 스스로를 장엄하며 일체 중생이 오늘부터 모두 보리에 이르도록 발원하여야 한다. 눈으로는 언제나 탐욕스럽고 요염해서 사람을 미혹시키는 빛깔을 보지 않으며, 노여움에 추한 모습과 살생하는
어리석음과 우둔하여 거만한 온갖 삿된 빛깔을 보지 않도록 발원하여야 한다.
일체 시방에 상주하는 법신(法身)의 빛을 보고자 발원하되, 보살이 하생하시는 8상(相)의 빛을 보고자 발원하며, 여래의 상호와 성스러운 대중들이 화합하여 어질게 모인 빛깔을 보고자 발원하여야 한다. 일체 중생이 늘 슬퍼하며 울부짖고 한탄하는 소리와 지옥에서 고초 겪는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발원하여야 한다.
아귀와 축생의 고통 받는 소리와 여덟 가지 고액이 교차하는 소리와 404가지 병에서 일으키는 신음소리와 8만 4천 진로(塵勞)의 소리를 듣지 않고자 발원하여야 한다.
귀로 늘 여러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면 여덟 가지 음성을 듣고자 발원하며, 8만 4천 바라밀의 소리와 3승의 성과와 10지 공덕의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자 발원하여야 한다.
원하건대 일체 중생이 코로 늘 살생하여 음식을 맛나게 하는 냄새와 서른여섯가지 물건의 가죽냄새와 욕심을 일으키는 연지와 곤지의 냄새와 다섯 가지 냄새 나는 채소와 아홉 가지 모양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지 않게 하소서.
원하건대 코를 늘 시방세계 여러 곳에 심어진 초목의 향기와 5계ㆍ8계ㆍ10선ㆍ6념(念)164) 및 여러 가지 공덕의 향기와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사람이 10지(地)ㆍ5분(分)ㆍ10력(力)165) 및 8만 4천으로 제도하는 무루(無漏)의 향기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향기를 맡게 하소서.
원하건대 일체 중생이 혀로 늘 중생이 목숨인 고기의 잡된 맛과 번뇌를 생기게 하는 맛을 보지 않게 하소서.
원하건대 혀로 늘 감로의 죽지 않는 법미(法味)와 하늘에서 자연적으로 음식이 설근(舌根)에서 변하는 상미(上味)와 모든 부처님께서 잡수시는 법미(法味)와 선열(禪悅)의 맛과 해탈과 니원(泥洹)166)의 최상승(最上勝)을 맛보게 하소서.
원하건대 일체 중생이 그 몸으로 늘 삿되게 음행과 매끄러운 피부에서 생겨나는 음욕 및 즐거움은 촉각과 끓는 물과 얼음의 촉각을 느끼지 못하게 하시고, 아귀와 축생의 여러 고뇌의 촉각과 404가지 병과 춥고 열나며 바람들고 서리 맞으며 모기와
이와 기갈 들고 고통 겪는 등의 촉각을 느끼지 못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몸이 늘 청량하고 굳건함을 느끼고, 마음은 편안함을 깨달으며, 도를 증득하여 여덟 가지 자재의 촉각을 날아다니며 행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일체 중생이 모두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늘 98사(使)와 8만 4천 진로의 법과 10악(惡)과 5역(逆)의 죄와 아흔여섯 가지 삿된 외도의 법과 3악도의 염증나는 생사의 큰 고통을 깨닫게 하소서.
원하건대 의근(意根)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의왕(醫王)이 되시고 법이 좋은 약이 되며 스님들이 병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 여러 중생을 위해 생사의 병을 치료하여 해탈을 얻게 하시되, 마음으로 늘 걸림 없이 공(空)과 유(有)에 물들지 않는 것을 알게 하소서.
○ 발원문송(發願門頌)
마음속 바람은 피안일진대
어째서 오래도록 세속에 묻혀 가는가.
지혜의 해[慧日]를 비추고 법운(法雲)을 매니
성곽을 벗어나 출가할지라.
향기로운 구슬 빛나고 세시(歲時)를 들으니
보배로운 나무 바람결에 황혼으로 놀라게 하네.
감로법 영구히 마셔가면서
즐거운 동산에 채소 언제나 즐기네.
은(殷)나라 솥에 차려진 음식 가릴 것 없이
어찌 진(秦)나라 아쟁을 써서 연주하는가?
열심히 원력을 세워 길이 어기지 않고
괴로운 노력도 이로부터 막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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