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1964 불교(고승전 12권 13편/ 高僧傳)

by Kay/케이 2023. 2. 23.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고승전(高僧傳) 1213

 

법화경한 부를 외우면서,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뜻이 인간세계 밖에 깊이 젖어들어 누각 위에 자리 잡고, 30여 년을 내려오지 않았다. 왕후들이 가마를 타고 와도, 오직 방에 예배만 드리고 돌아갔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만은 믿음과 이해력이 아울러 깊다 하여, 특별히 더불어 만났다.

당시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배드리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혹 주옹의 소개를 받아 때로 한 번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495)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담유(曇遊)

당시 약야(若耶) 현류산(懸溜山)의 담유도 푸성귀를 먹으며 송경하였다. 고행의 절개를 일삼았다.

 

19) 석승후(釋僧候)

승후의 성은 공()씨이며,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 살 때 곧 푸성귀를 먹으며, 예참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사방을 떠돌며, 교화를 관찰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서울에 와서 머물렀다. 항상 법화경유마경금광명경을 이틀에 한 차례씩 두루 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60여 년간 계속하였다.

소혜개(蕭惠開)가 촉()으로 들어가면서 초청하였다. 그러자 함께 그곳에 노닐었다. 그 후 소혜개가 유의가(劉義嘉)와 함께 협동하여, 죄를 지어 궁궐로 돌아왔다. 승후도 곧 서울로 돌아왔다.

후강(後岡)에 돌집을 짓고, 안선(安禪)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미 때부터 목숨을 버릴 때까지, 생선ㆍ고기ㆍ마늘ㆍ매운 것은 한 번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발그림자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식사도 거른 채 지나갔다[午後不食].

북제의 영명(永明) 2(484)에 약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점심때가 되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곧 물을 찾아 입을 헹구고는, 합장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9세이다.

 

혜온(慧溫)

당시 보홍사(普弘寺)의 혜온도 법화경유마경수능엄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으로, 나란히 높은 절개가 있었다.

 

20) 석혜미(釋慧彌)

혜미의 성은 양()씨이며, 홍농(弘農)의 화음(華陰) 사람이다. ()나라 때 태위(太尉) 벼슬을 한 양진(楊震)의 후예이다. 나이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후에 집착과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遠離]을 수행하기로 뜻을 세웠다.

곧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바위 계곡이 지극히 험하여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였다. 혜미는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나운 호랑이나 억센 외뿔소가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대품경을 외우고, 정밀하게 삼매를 닦았다.

이에 띳풀을 베어내 집을 지어, 정신이 깃들 곳으로 삼았다. 때가 되면, 발우를 지니고 마을에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좌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8년을 계속하였다.

 

그 후 강남지방에 불법이 성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곧 서울로 와 풍습과 교화를 관찰하였다.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예전처럼 과업을 익혔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겸양하였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계율의 모범됨이 정밀하고 밝았다. 권장하고 교화함에 고된 것을 잊으며, 현명한 이에게 묻고, 착한 이를 찾기를 항상 모자라는 듯하였다. 무릇 산을 찾아와 예배하는 도인과 속인들에게 모두 그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그러면서 타일러 이끌음으로써 좋은 음식 대접을 대신하였다.

이에 출가할 때부터 늙어 노쇠해지기에 이르기까지, 마늘ㆍ술ㆍ생선ㆍ고기 등은 하나같이 모두 길이 끊었다. 한 발자국도 문 밖을 출입하지 않기를 30여 년 동안 하였다. 새벽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선정(禪定)을 익히면서, 항상 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육시예참에는 반드시 대중 앞에 섰다.

()의 천감(天監) 17(518) 윤달 815일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절 남쪽에 장례하고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법선(法仙)

당시 정림사의 법선도 송경하며 질박하게 수행하였다. 후에 오군(吳郡)으로 돌아가 승정(僧正)이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