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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1984 불교(고승전 13권 19편/ 高僧傳)

by Kay/케이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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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고승전(高僧傳) 1319

 

5) 석담광(釋曇光)

담광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성품과 생각이 5()과 시부(詩賦)를 좋아하였다. 아울러 산수(算數)와 복서(卜筮)도 꿰뚫어,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곧 30세가 되려 하자,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종래에 익힌 것은 모두가 세속의 일이다. 불법의 깊은 진리에는 아직 털끝만치도 물들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겠는가

곧 예전에 일삼은 것과는 담을 쌓고, 여러 경론의 강의를 들었다. 식견과 깨달음이 보통 사람을 넘어서서, 한 번 들으면 곧 통달하였다.

전송[]형양(衡陽)의 문왕(文王) 유의계(劉義季)가 형주(荊州)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뜻과 논리에 뛰어난 사문을 찾아 함께 불법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경계 내에 알리니, 모두가 담광을 추천하여,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고 하였다. 담광이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몸소 그의 방을 찾아가 돈독하게 청하자, 마침내 명에 따랐다. 수레와 의복ㆍ인력을 공급하고 한 달에 1만 냥의 돈을 제공하였다.

당시 재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경을 먼저 읽어주는 승려가 없었다. 왕이 담광에게 말하였다.

중생들을 인도하려면

 

오직 덕이 근본이 되어야 하거늘, 상인께서 어찌 이 일을 사양하여서야 되겠는가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하시기 바라네.”

담광은 마침내 마음을 돌려 소리를 익히고, 예참문(禮懺文)을 지었다. 향로를 손에 잡고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여 우러러보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의양왕(義陽王) 유욱(劉旭)이 외지로 나가 북쪽 서주(徐州)에 주둔하자, 담광과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유경화(劉景和)가 덕을 잃자, 의양왕이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담광이 앞일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7(水火金木土의 다섯 별)로써 담광에게 결택을 하게 하였다. 담광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일이 편안해져서 재난을 면하였다.

전송의 명제(明帝)는 상궁사(湘宮寺)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담광이 창도하는 소리를 듣고는 칭송하였다. 곧 칙명으로 옷 세 벌과 물병ㆍ발우를 하사하였다. 그 후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6) 석혜분(釋慧芬)

혜분의 성은 이()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지조가 있었다. 나이 열두 살 때 출가하여, 곡숙현(穀熟縣)의 상산사(常山寺)에 머물렀다.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으며, 고행이 정밀하고 뛰어났다. 재 모임에 갈 때마다, 항상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ㆍ초() 사이에서는 모두가 그의 교화를 받들었다.

북위(北魏)가 불법을 훼멸하자, 곧 남쪽 서울로 돌아왔다. 오강(烏江)에 이르자, 추격하는 말이 곧 그에게 미쳤다. 강기슭에는 건네주는 배가 없었다. 혜분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갑자기 배 한 척이 문득 흘러와 이르렀다. 그것을 타고 재난을 면하였다. 서울에 이르러서는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당시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던 원민손(袁愍孫)이 항상 생각하였다.

도인은 편벽하고 고집이 있어, 더불어 논의할 만한 대상이 못된다.’

마침내 측근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찾기를 기다려, 한 번 이야기해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혜분이 그곳에 이르렀기에, 원민손이 먼저 삼승사제(三乘四諦)의 논리를 물었다. 문득 노자ㆍ장자와 공자ㆍ묵자의 요점을 말하였다. 혜분은 평소에 이미 경서에 빼어났다. 또한 토해내는 음성이 물 흐르듯 편하여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도록 원민손이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이에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자제들 모두가 그에게서 계를 받게 하였다.

혜분은 또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그가 다스리는 병은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 후 병이 위독하여 환약을 복용할 적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혜분이 말하였다.

 

오랜 세월 계율을 지켜왔거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절개를 허물겠느냐

그리고는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북제의 영명(永明) 3(485) 흥복사(興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임종 때, 훈계를 내린 유언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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