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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65 불교(개원석교록 7권 7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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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77

 

지승 지음

 

장방록(長房錄)내전록(內典錄)등의 목록에는 다시 정론(正論)과 석의(釋義) 13108권이 있는데, 지금 모두 이 경론(經論)과 의소(義疏)들은 진제가 지은 것이다. 그러나 범본(梵本)의 번역은 아니기 때문에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내전록에는 양()ㆍ진() 2()에 모두 기신론(起信論)을 기재하였는데 잘못이다.

 

(2) 월파수나(月婆首那)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7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반야경(大般若經)6()와 동본이다.

이상은 17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왕자(王子) 월파수나는 진()나라 말로는 고공(高空)이라 부르며, 중인도 우선니국(優禪尼國) 국왕의 아들이다. ()나라 때로부터 양()나라에 이르기까지 역경(譯經)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양나라 태청(太淸) 2(548) 6월에 우전국(于闐國) 사문 구나발타(求那跋陁)중국말로는 덕현(德賢)이다가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1부 범문(梵文)은 모두 16()의 경전을 가지고 건업(建業)에 처음 이르렀다.

월파수나는 덕현(德賢)에게 이 경전이 있음을 홀연히 보고, 그윽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연모하는 것이 마치 참 부처님을 대하듯 하였다. 그리하여 덕현에게 그 경본을 달라고 빌면서 이 생을 마치기까지 법을 널리 펴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덕현은 그의 바르고 청아한 품행을 아름답게 여겨 마음을 비우고 주었다. 월파수나는 그 경을 지니게 된 것을 매우 만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후경(候景)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미처 번역할 겨를이 없게 되자, 이리저리 모시고 돌아다니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백성들이 바라게 되면 하늘은 반드시 따르는 법이라 마침내 진조(陳朝)가 건업(建業)에다 도읍하였으므로, 월파수나는 경전을 모시고 먼 데서부터 그 곳에 이르렀다.

강주자사(江州刺史) 의동(儀同) 황법구(黃法氍)는 대승(大乘)을 간절히 우러르며 정법을 보호하였다. 문제(文帝) ()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 723일에 그는 월파수나에게 권하고 청하여 주()의 청사(廳事)에서 간략하게 제서(題序)를 열고 무차대회(無遮大會)4)를 베푸니,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여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광산(匡山)의 석승과(釋僧果)와 원근에 있던 명덕(名德)들은 모두가 학문은 백가(百家)의 으뜸이었고, 널리 5()를 통달한 이들이라, 저마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문제에도 얼음 녹듯 풀지 못한 것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 달의 29일에는 다시 역경하는 일을 일으키어 가람(伽藍)에서 건추(揵搥)가 울리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듣고 승도들이 모두 모였으므로 월파수나는 몸소 범문(梵文)을 잡고 중국말로 번역하였다. 양주(楊州) 아육왕사(阿育王寺) 석지흔(釋智昕)은 잠시 팽회(彭匯)에 노닐다가 지극한 가르침[至敎]를 엎드려 받들고는 귀로 들은 것을 받아썼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행여 놓칠까 하여 두 번 세 번 되풀이하여 7권을 만들었는데, 그 해 918일에야 비로소 문구를 다 끝마쳤다. 강주(江州) 승정(僧正) 석혜공(釋慧恭)은 삼학(三學)에 널리 통달한 사람이었는데, 이 역경에 처음부터 끝까지 감호하고 관장하였다. 그 자세한 것은 경 앞의 서문과 장방록등의 목록에 나타나 있다.

월파수나는 비록 한 몸이지만 원위(元魏)ㆍ양()ㆍ진()에 걸쳐 계속하여 경전을 번역하였다. 뒷날 그가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3) 수보리(須菩提)

대승보우경(大乘寶雨經) 8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나라 때 만다라(曼陁羅)가 번역한 7권과 보운(寶雲)이 번역한 것과 당()나라 때 번역한 10보우경(寶雨經)은 모두 동본이다. 일승사장록(一乘寺藏錄)에 보인다.

이상은 18권인데, 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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