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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63 불교(개원석교록 7권 5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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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75

 

지승 지음

 

진제는 그들이 온 뜻을 반가이 맞이하여 곧 섭대승론(攝大乘論)등의 논()을 번역하였는데, 처음과 끝 두 가지를 모두 실어 종지(宗旨)를 해설하였다. 그는 표연히 몸을 맡기어 편안히 지내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 그리하여 또 작은 배를 타고 양안군(梁安郡)에 이르러 큰 배를 장만하여 서쪽 나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학도(學徒)들이 뒤쫓아왔으므로 계속 그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태수(太守) 왕만사(王萬奢)가 대중의 뜻을 말씀드리고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진제도 의례적[人事]으로 임시로 바닷가에 머물었고, 행장을 묶어 떠날 기회를 엿보면서 그곳에서 안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3(559) 9월에 양안군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으나, 주어진 운명[業風賊命]에 이끌려 표연히 광주(廣州)로 되돌아와서 12월에 남해안에 상륙하였다.

광주자사(廣州刺使) 구양목(歐陽穆)공이 스님을 돌보며 제지사(制旨寺)에 머무르게 하고, 새로운 글을 번역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진제는 이 업의 인연을 뒤돌아보고 서쪽으로 돌아갈 뜻을 그만두었다. 마침내 사문 혜개(慧愷) 등을 상대로 광의법문경(廣義法門經)유식론(唯識論)등을 번역하였다.

그 후 구양목이 죽고 세자(世子) ()이 거듭 시주[檀越]가 되어 경론을 열어 전하게 했으므로 다시 번역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님의 신령스런 생각과 깊이 꿰뚫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한 번은 사람의 왕래가 단절된 섬에 혼자 거처하고 있었는데, 흘이 그를 만나려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고갯길은 험하고 파도마저 치솟아 감히 그 곳을 가지 못하였다. 이때 진제가 방석을 깔아 물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았다. 물결 따라 움직여서 언덕 기슭에 도달하여 언덕에 올라 흘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석은 물에 젖지 않고 평상시처럼 깔려 있었다. 때로는 연잎을 물 위에 띄워 올라타고 강을 건너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신묘하고 기이한 예가 매우 많았다.

광대(光大) 2(568) 6월에 진제는 세상의 부잡(浮雜)3)한 일과 늙고 몰골이 상한 몸뚱이를 싫어하여 아직 정신이 바를 때 일찌감치 훌륭한 땅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남해(南海)의 북산(北山)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목숨을 버리려 하였다.

그때 바로 지개(智愷)스님은 구사론(俱舍論)을 강의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며, 승려와 속인들도 달려 나아갔으므로 산천이 사람들로 가득찼다. 자사(刺史)도 사람을 보내어 동정을 엿보며 호위하게 하였고, 자신도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그곳에 사흘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만류하였다. 비로소 본래의 생각을 굽히고 되돌아와서 왕원사(王園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에 승종(僧宗)과 지개(智愷) 등 여러 스님들은 건업(建業)으로 초청하여 맞이하려 하였다. 때마침 건업에서는 양련(楊輦)이 큰 신망을 얻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영달(榮達)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곧 나라에 상소를 올렸다.

영남 땅에서 번역된 여러 부의 경전 대부분이 무진유식(無塵惟識)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치술(治術 : 나라를 다스림)에 어긋나며 나라의 풍속을 가려버리고 중국땅에서는 속하지 않는 학설이니 그를 먼 황무지로 유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승낙하였다. 그런 까닭에 남해(南海)에서 나온 새 글이 진()나라 때의 장경(藏經)이 되었다.

태건(太建) 원년(569)에 병이 들어 얼마 후에 유언을 남겼다. 그 유서는 엄정하게 인과(因果)를 밝혀 보인 글로 여러 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 글을 제자인 지휴(智休)에게 부촉(付囑)하고, 정월 11일 오시(午時)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 71세였다. 다음날에 조정(潮亭)에서 화장을 하고 탑을 세웠다. 13일에 승종(僧宗)과 법준(法准) 등이 각기 경론을 가지고 광산(匡山)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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