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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28 불교(개원석교록 9권 15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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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915

 

지승 지음

 

처음에는 우전국(于闐國) 삼장 실차난타(實叉難陁)와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번역하였는데, 구시(久視) 이후에는 혼자 번역하였다. 곧 구시 원년(700) 경자(庚子, 799)에서 장안(長安) 3년 계묘(癸卯, 703)까지는 동도(東都)의 복선사(福先寺)와 서경(西京)의 서명사(西明寺)에서 금광명최승왕경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입정부정인경미륵하생성불경만수실리보살주장중일자주왕경장엄왕다라니주경선야경대승유전제유경묘색왕인연경무상경팔무가유가경장조범지청문경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목득가.큰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근본살바다부율섭등과 장중론취인가설론육문교수습정론용수보살권계왕송등 이상 20115권을 번역하였다.

이때에는 북인도 사문 아니진나(阿你眞那)가 범문의 뜻을 증명하였고, 사문 파륜(波崙)ㆍ복례(復禮)ㆍ혜표(慧表)ㆍ지적(智積) 등이 받아 적으면서 문장을 증명하였다. 사문 법보(法寶)ㆍ법장(法藏)ㆍ덕감(德感)ㆍ성장(成莊)ㆍ신영(神英)ㆍ인량(仁亮)ㆍ대의(大儀)ㆍ자훈(慈訓) 등이 증의하였고, 성균태학조교(成均太學助敎) 허관(許觀)이 감호(藍護)하여 이를 베껴 내전에 진상하였다. 천후(天后)는 새로 번역한 성교(聖敎)에 서문을 지어 경의 첫머리에 붙이게 하였다.

화제(和帝:中宗)가 황제에 오르게 되자 신룡(神龍) 원년 을사(乙巳, 705)에 동도(東都)의 내도량(內道場)에서 대공작왕경을 번역하였고, 또 대복선사에서 불위승광천자설왕법경향왕보살다라니주경일체공덕장엄왕경등 이상 46권을 번역하였다. 그때에는 사문 반도(盤度)가 범문(梵文)을 읽고, 사문 현산(玄傘)이 받아썼으며, 사문 대의(大儀)가 문장을 증명하고, 사문 승장(勝莊)과 이정(利貞) 등이 증의를 하였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최식(崔湜)과 급사(給事) 노찬(盧粲) 등이 윤문(潤文)하고 글자를 바로잡았으며, 비서대감(祕書大監) 부마도위(駙馬都尉) 관국공(觀國公) 양신교(楊愼交)가 감호하였다.

화제(和帝)는 진심으로 경전을 숭상하여 서문을 지어 찬양하면서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敎序)라고 하였다. 황제는 낙성(洛城)의 서문(西門)에 임어하여 군중들을 피할 깨끗한 장소[淨所]를 선택하여 새로 번역한 경의 장소로 선시(宣示 : 公示)하고 모두 표인(標引 : 푯말)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2년 병오(內午, 706)에는 황제의 가마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후 칙명을 내려 대천복사(大薦福寺)에 따로 번경원(翻經院)을 두게 하여 그곳에 있게 하였다. 3년 정미(丁未, 707)에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내전으로 들어가 경을 번역하는 사문들과 함께 90일 동안 여름 안거(安居)를 하였다.

황제는 옛날 시골 방에 유폐되는 재액 속에서 돌아갈 기약이 없을 때 약사불(藥師佛)께 기도하고 염원하여 드디어 복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에 입은 은혜를 치하하고 거듭 넓고 큰 불법을 널리 퍼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법도(法徒)들에게 명하여 다시 번역하게 하여 대불광전(大佛光殿)에서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2권을 번역하여 내었다. 화제는 법연(法筵)에 임어하여 손수 받아썼다.

또 경룡(景龍) 4년 경술(庚戌, 710)에는 대천복사에서 욕상공덕경수주공덕경관자재보살여의심다라니주경불정존승다라니경발제죄장주왕경불위난타설출가입태경오온개공경삼전법륜경비유경요치병경등과 근본설일체유부필추니비나야.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2()의 계경(械經)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송.근본설일체유부잡사섭송근본설일체유부니다나목득가섭송성유식보생론관소연론석등 이상 2088권 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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