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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54 불교(개원석교록 6권 23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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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623

 

지승 지음

 

전법륜경론(轉法輪經論) 1권표제에는 전법륜경우파제사(轉法輪經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으며, 천친보살이 지었다. 흥화 3(541) 811일에 금화사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발해(勃海) 고중밀을 위하여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업성취론(業成就論) 1권천친보살이 지었으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나라 때 번역된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과 동본이다. 흥화 3(541) 725일에 고중밀을 위하여 금화사에서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회쟁론(廻諍論) 1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흥화 3(541) 320일에 금화사에서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어사중위 발해 고중밀(高仲密)을 위하여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이상은 55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비목지선은 북인도 오장국(烏萇國) 사람이며, 찰리 왕 종족[刹利王種]이며, 석가(釋迦)의 후예(後裔)이다. 옛날 비유리왕(毗流離王)이 가비라성(迦毗羅城)을 무너뜨리고 석가 종족을 마구 죽였다. 그때 네 석가 자손이 그들의 핍박에 분개하여 계율을 범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비유리왕의 군사들과 싸웠다. 마침내 비유리왕을 물리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비라성에서는 (네 석가 자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불법을 위하는 종족으로서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는데, 너희들은 싸워 그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우리의 종족이 아니다.”

이리하여 내쫓겼으므로 멀리 떠나서 여러 나라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들은 본시 성인의 후예였으므로 다투어 한 갈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네 석씨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서 각각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지금의 오장국(烏萇國) 범연왕(梵衍王) 등은 모두 그들의 후예인데, 자자손손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비목지선법사는 바로 이들 왕족인데, 삼장(三藏)을 잘 배워 익혔고, 그 중에서도 아비담(阿毗曇)을 가장 잘하였다. 구담류지와 위()나라의 경계를 같이 돌아다녔는데, 구담류지를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효정제(孝靖帝) 흥화(興和) 3(541) 신유(辛酉, 541)에 업성(鄴城)의 금화사(金華寺)에 머물면서 구담류지와 함께 보계보살사법경론(寶髻菩薩四法經論)5부를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어사중위(御史中尉) 발해(勃海) 고중밀(高仲密)은 그들의 단월(檀越 : 시주자)이 되어 번역해 주기를 청하였고 공양을 올렸다. 이런 사실은 모두 경의 첫머리 서기(序記)에 보인다.

비목지선법사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교화를 널리 폈으며, 유사(流沙)의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온 것도 그의 뜻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梵文)을 이미 번역하였으므로 의당 부권(部卷)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견문이 얕고 좁아서 아직 두루 찾아보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보게 된 5경만을 여기 기재하여 둔다. 그러므로 후진(後進)들이 다행히 번역된 경을 찾게 된다면 부디 이어 보충하여 기재해 주기 바란다. 법문(法門)에 잘못이 없게 함이 어찌 잘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목록이 하나만이 아니나, 비목지선법사는 아직 기록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법을 넓힌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고, 높이 수행한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애닯고 슬픈 일이며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12) 달마보리(達磨菩提)

열반론(涅槃論) 1권혹은 대반열반경론(大般涅槃經論)이라고도 한다. 바수반두(婆藪盤豆)보살이 지었으며, 대경(大經)을 간략하게 해석한 것이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상은 11권이며, 그 본()이 현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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