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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759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 4권

by Kay/케이 2025.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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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 4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 제4권


서천 법호 한역
김달진 번역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다음의 열 가지 법을 수행한다면 곧 선정을 두루 갖출 수 있으리니, 그 열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복덕을 널리 모으고, 둘째 염환(厭患)을 많이 내며, 셋째 정진을 일으키고, 넷째 다문(多聞)을 갖추며, 다섯째 뒤바뀜 없는 가르침으로써 부지런히 수습(修習)을 행하고, 여섯째 바른 법을 따라 행하며, 일곱째 근성(根性)이 밝고도 영리하고, 여덟째 순수한 착한 마음을 갖추며, 아홉째 지관(止觀)을 잘 깨닫고, 열째 선정의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복덕을 널리 모은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대승의 법 가운데 오래도록 선근을 쌓아 저 태어날 때마다 계행을 잘 닦음으로써 선지식(善知識)들에게 포섭되며, 태어나는 곳이 항상 바라문의 큰 족성(族姓) 집에 태어나거나 찰제리(刹帝利)1)의 큰 족성에, 혹은 장자의 큰 족성에 태어나되 다 바른 신심을 갖추기 때문에 저 태어난 곳에서 이 인연으로 더욱더 선근을 넓히고 키우고 늘여 언제나 선지식들을 떠나지 않느니, 이른바 선지식이 있는 곳이란 부처님과 보살이 계신 곳이다. 거기에서 전생의 선근(善根)을 늘어낼 수 있어 그 관습(慣習)의 힘으로 말미암아 곧 생각하기를, ‘세간은 바로 큰 고뇌이고 세간은 바로 재환(災患)이며, 세간은 잠시도 머묾이 없어 오래도록 얽매임을 받고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덮여 있구나. 저 모두가 다 탐욕이 인(因)이 되고 탐욕이 연(緣)이 되는지라. 이 인연을 깨달으리라’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복덕을 널리 모으는 것이니라.
다음 염환(厭患)을 많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이 인연 때문에 곧 생각하기를, ‘나는 이 세간의 회합하는 그 상(相) 가운데 더럽히지 않고 모든 욕심의 경계에 물들고 가까이하지 않으리니, 모든 욕심의 경계란 허망한 분별이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항상 많은 인연 때문에 헐뜯고 나무라고 탐욕을 낸다. 이른바 욕심이란 날카로운 꼬챙이 같기도 하고 욕심이란 날카로운 창 같기도 하며, 욕심이란 칼날 같기도 하고 욕심이란 독사 같기도 하며, 욕심이란 물거품 같기도 하고 욕심이란 종기와 같으며, 욕심이란 아주 더럽고도 냄새나는 것이로다’고 하니, 이러한 욕심의 경계에 염환하는 마음을 냄으로써 보살이 곧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신심을 내어 집을 버리고서 출가하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그 염환을 많이 내는 것이니라. ”
다음 정진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출가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정진을 일으켜서 법을 얻지 못한 자에겐 다 법을 얻게 하고 깨닫지 못한 자에겐 다 깨닫게 하고 증득하지 못한 자에겐 다 증득하게 하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다음 다문을 갖추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말한 바의 세속의 법과 뛰어난 이치의 법을 들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나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다문을 갖추는 것이니라.
다음 뒤바뀜 없는 가르침으로써 부지런히 수습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세속의 법과 뛰어난 이치의 법, 이 두 가지 법 가운데 능히 바르게 가르쳐 부지런히 수습을 행함으로써 법에 뒤바뀜이 없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뒤바뀜 없는 가르침으로써 부지런히 수습을 행하는 것이니라.
다음 바른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그 바른 소견과 바른 관찰과 바른 말씨와 바른 업과 바른 목숨과 바른 노력과 바른 생각과 바른 선정 이러한 바른 법을 보살이 그 법대로 행하여 곧 바른 도를 깨달으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바른 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라.
다음 보살의 근성(根性)이 밝고도 영리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바른 법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변재(辯才)의 지혜가 밝고 영리한 근기가 더욱 뛰어나게 되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의 그 근성이 밝고도 영리한 것이니라.
다음 순수한 착한 마음을 갖추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그 영리한 근기가 뛰어나기 때문에 염환(厭患)을 많이 내어
대중들의 일체 시끄러움과 세간의 잡된 말을 아주 털어 없애고, 탐욕의 깨달음과 진심의 깨달음과 해멸(害滅) 따위의 깨달음도 다 아주 없애고, 다시 지식(知識)ㆍ친애(親愛)ㆍ명문(名聞)ㆍ이양(利養) 따위의 하고 싶은 일들에 집착하지 않고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 착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보살이 관찰하기를, ‘이제 나의 이 마음이 어떤 법을 실천하는 것인가. 옳은 법인가 옳지 못한 법인가. 또는 옳은 법도, 옳지 못한 법도 아닌 것인가?’ 하고서 만약 옳은 법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곧 기쁨을 얻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자라게 하니, 이른바 옳은 법이란 37가지 보리의 법이 그것이며, 만약 옳지 못한 법을 행하는 것이라면 곧 염환을 일으켜 갖가지를 관찰하여서 부지런히 그 옳지 못한 법을 끊으니, 이른바 옳지 못한 법이란 탐욕ㆍ진심ㆍ우치가 그것이니라.
그리고 탐욕에는 상품ㆍ중품ㆍ하품의 세 종류가 있느니라.
상품의 탐욕은 몸과 마음이 그 분위(分位)를 극도로 하여 염착(染着)을 냄으로써 탐심을 잃지 못하고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일체 처소에 제 부끄러움[慚]과 남부끄러움[愧]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이른바 제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홀로 외진 곳에 있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는 일어서는 대로 곧 하고 싶은 그 일을 구하기 위해 욕심의 경계를 칭찬하면서 스스로가 덕이 있음을 나타내는 이것이 바로 제 부끄럼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남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저 탐욕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부모 앞에서 어긋난 말씨와 사나운 행동으로 걱정을 끼치거나 그 밖의 스승과 어른들에게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스스로가 덕이 있음을 나타내는 이것이 바로 남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라. 이 인연으로써 목숨이 끝난 뒤에 나쁜 갈래[惡趣] 가운데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상품의 탐욕이라 하느니라.
중품의 탐욕은 모든 욕심 경계에 친근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잠시 동안 탐욕을 내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도로 탐욕을 없애는 마음을 일으켜서 곧바로 참회하기 때문에 이를 중품의 탐욕이라 하느니라.
하품의 탐욕은 모든 욕심의 경계에 친근할 때 혹은 몸이 서로 닿고 혹은 말을 서로 건네며,
혹은 서로가 마주 보는 사이에 욕심이 일어나긴 하지만 곧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하품의 탐욕이라 하느니라. 요약해서 말하자면 일체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서거나 생활에 소용되는 도구를 위해서 욕심을 내는 것은 다 하품의 탐욕이니라.
진심(瞋心)에도 상품ㆍ중품ㆍ하품의 세 종류가 있느니라.
상품의 진심은 모든 진심이 일어나는 그 경계에 따라 극도의 진심을 내고도 다시 포악한 행동을 더하여 다섯 가지 무간(無間) 죄업을 짓는가 하면, 한 가지 무간 죄업을 짓고 혹시 바른 법만을 비방하더라도 결국은 이러한 것이 모여 다섯 가지 무간 죄업을 다 짓게 됨으로써 다른 죄업으로선 산수(算數)로서나 비유로서나 가장 적은 수로서도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목숨이 끝나서는 큰 지옥에 떨어지나니, 설령 인간으로 잠시 태어나도 몸의 모양이 검은 빛깔에 그 눈은 악성으로 붉고 성질이 매우 포악하여 이 인연으로 다시 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때문에 이를 상품의 진심이라 하느니라.
중품의 진심은 모든 진심의 경계 속에 떨어져 잠시 진심을 일으켜서 혹 불선한 죄업을 조금 짓더라도 빨리 참회함과 동시에 도로 대치(對治)하는 방편을 일으켜 그 진심을 지식(止息)시키기 때문에 이를 중품의 진심이라 하느니라.
하품의 진심은 이른바 친애하고 화합하는 경계 속에서 어떤 진심의 인연을 따라 잠시 그 찰나 사이의 진심을 내기는 하지만 곧 참회함과 동시에 도로 대치의 방편을 일으켜 진심을 지식시키기 때문에 이를 하품의 진심이라 하느니라.
우치(愚癡)에 또 상품ㆍ중품ㆍ하품의 세 종류가 있느니라.
상품의 우치는 그 다니거나 머무는 일체의 곳에 좋은 일이라고는 전혀 없고 근심도 슬픔도 없어 아예 참회를 내지 않으니, 이를 상품의 우치라 하느니라. 중품의 우치는 혹시 좋지 못한 업을 조금 일으켜 그 우치를 일으킴이 있더라도 곧 빨리 참회하여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그 죄를 사과하고서 자기의 덕을 나타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중품의 우치라 하느니라. 하품의 우치는 이른바
여래께서 제정하신 계율에 있어서 그 성죄(性罪)를 범하지는 않고 초편(初篇)의 계학(戒學)을 어기는 죄가 있으니, 이 때문에 하품의 우치라 하느니라.
보살이 이 염착하는 법을 없애 선심의 고요함을 얻고 선심의 고요함으로 말미암아 애욕ㆍ탐욕과 모든 염착하는 욕심을 없애나니, 왜냐하면 선심을 따르기 때문이라. 만약 무기(無記)2) 법을 행하는 자라면 그는 곧 생각하여 부지런히 사찰(伺察)을 행하는 일이니 어떤 것이 무기 법인가. 마음이 바깥을 인연하지도 않고 안을 인연하지도 않으며, 착함을 인연하지도 않으며, 지(止)하는 법에 머물지도 않고 관(觀)하는 법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인연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음으로써 그 마음이 잠기고 가라앉아서 마치 잠자다가 깬 사람이 그 눈으로 보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약 무기(無記)의 앞에 나타나면 마음이 분멸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이 만약 선심을 실천한다면 그 선심을 실천함에 따라 마음이 곧 기뻐서 편안히 머물기 마련이라.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순수한 착한 마음을 갖추는 것이니라.
다음 지관(止觀) 법을 잘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이 같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갖춤으로써 능히 모든 법에 대해 이 법은 눈 흘리는 것과 같고, 이 법은 꿈과 같으며, 이 법은 옳지 못한 법이고 이 법은 옳은 법이며, 이 법은 출리(出離)하는 법이고 이 법은 출리하는 법이 아닌 것임을 관찰하여 보살이 곧 생각하기를, ‘저 일체 법이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이 일체 법의 선도(先道)가 되는 만큼 응당 그 마음을 잘 포섭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고 마음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곧 모든 법을 잘 포섭할 수 있고 또 잘 다스릴 수 있으며 잘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하는지라.
이와 같이 곧 모든 법은 바로 관찰함으로 해서 이것으로 인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얻어 마음으로써 마음을 얽매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정지시키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멈추는가 하면, 이와 같이 마음을 채찍질하여 마음이 고요히 정지하게 하느니라. 이 때문에 곧 마음이 경계와 하나인 성품이 되고 마음이 경계와 하나이기 때문에 곧 삼마지(三摩地)를 이룩하고 삼마지를 이룩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말미암아 현전에 욕심의 세계를 털어버리고서 희락(喜樂)의 느낌을 내고 희락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와 옳지 못한 법을 아주 떠나서 곧 머트러운 생각[尋]이 있고 세밀한 생각[伺]3)이 있는 초선(初禪)의 법을 성취한다.
다음엔 다시 그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다 걸림이 없음으로써 그 희락에 집착을 내지 않고 무상(無常)하다는 관찰을 일으키고는 도로 초선의 마음이 점차 일어남으로부터 모든 집착하는 마음을 아주 떠나 곧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는 선정에서 희락의 느낌을 내는 2선(禪)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다음엔 다시 희락에서 고통을 관하는가 하면, 고통을 관하고 나선 곧 행을 버리고 염(念)을 버리는 그러한 행을 이룩하여 성인들의 관찰함과 같이 능히 묘락(妙樂)은 바로 깨달아서 현전에 곧 희락을 없애고 묘락의 느낌을 내는 3선(禪)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다음엔 다시 3선에서 공하다는 관[空觀]을 일으켜 4선(禪)의 마음을 끌어내고 저 4선에서 나라는 고집[我執]을 제거하는가 하면 나라는 고집을 없앴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다 끊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기 때문에 앞서 일으킨 그 즐거워한 뜻과 괴로워한 뜻을 죄다 버리고서 곧 모든 생각을 떠나 맑고 깨끗함을 내는 즉 4선(禪)의 법을 성취한다.
다음엔 다시 자신의 상(相)을 허공의 상과 같이 동일한 해탈의 상인 것으로 관하는가 하면 이러한 해탈을 관하기 때문에 일체 처소에서나 일체 종류에서 모든 물질의 생각을 벗거나 장애를 없애게 된다. 이 때문에 저 갖가지 생각에 조금도 뜻을 조작하는 인연이 없어서 그지없는 허공을 그의 행상(行相)으로 삼아 곧 허공의 그지없는 곳[空無邊處]인 선정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다음엔 다시 허공의 그지없는 곳에서 한꺼번에 저 의식의 그지없는 곳[識無邊處]을 관하여 그것을 행상으로 삼아 곧 의식의 그지없는 곳인 선정의 법을 성취하며, 다음엔 다시 저 의식의 그지없는 곳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곳[無所有處]을 인연하여 그것을 행상으로 삼아 곧 아무것도 없는 곳인 선정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다음엔 다시 저 아무것도 없는 곳을 벗어나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닌 곳[非想非非想處]을 인연하여
그것을 행상으로 삼아 곧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닌 곳인 선정의 법을 성취하며, 다음엔 위의 마음에서 다시 행상이 없고 모든 생각과 느낌을 다 멸하고 모든 감각을 떠나서 마침내 생각 끊는 선정[滅盡定]을 성취하느니라. 이러한 것이 이른바 보살이 지관을 잘 깨닫는 것이니라.
다음 선정의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비록 마지막 고요한 선정에 들더라도 그 고요함에 집착하지 않고 곧 동시에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서 누구는 원수이고 누구는 친한 이며, 어떤 것은 위반이고 어떤 것을 순종이라는 이러한 경계를 다 떠나 마음 쓰기를 관대히 하되 먼저 한 곳에 인자한 마음의 한량없는 행을 일으켜 널리 관찰하여 해탈하게 하고는 남방ㆍ서방ㆍ북방ㆍ상방ㆍ하방과 네 간방에도 다 그와 같이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 뒤에 가엾이 여기고 기뻐하고 버리는 마음을 역시 앞서와 같이 일으켜 누구는 원수이고 누구는 친한 이며 어떤 것은 위반이고 어떤 것은 순종이라는 이러한 경계를 아주 떠나 마음 쓰기를 광대히 하되 사방에 두루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과 버리는 마음을 일으켜 널리 관찰하여 다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다섯 신통을 다 일으킬 수 있어도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선정의 상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다시 나아가 더할 나위가 없는 법을 구하여 보리의 뛰어난 실천을 원만히 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선정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러한 열 가지 법을 수행하는 이라면 곧 선정을 두루 갖출 수 있을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다음의 열 가지 법을 수행한다면 곧 뛰어난 지혜를 두루 갖출 수 있으니, 이른바 그 열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나 없음[無我]을 잘 깨닫고, 둘째 업의 과보를 잘 알며, 셋째 함이 있는[有爲] 법을 잘 통달하고, 넷째 윤회가 유전함을 잘 알며, 다섯째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알고, 여섯째 성문의 법과 연각의 법을 잘 알며, 일곱째 대승의 법을 잘 알고, 여덟째 마군의 업을 잘 막아내며, 아홉째 뒤바뀜이 없는 지혜를 갖추고, 열째 견줄 데 없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나 없음[無我]을 잘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바른 지혜로써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을 관찰하되, 저 물질을 관찰할 때 ‘물질이란 그 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쌓이는 것도 얻을 수 없으며 사라지는 것도 얻을 수 없으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역시 그 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쌓이는 것을 얻을 수도 없으며 사라지는 것을 얻을 수도 없도다. 저 뛰어난 진리가 곧 세속의 진리를 떠난 것이 아닐진댄 뛰어난 진리이건, 세속의 진리이건 저 두 진리의 여러 성질을 다만 말로써 그 이름을 붙인 것일 뿐, 진실한 본체가 없는 것이로다’고 관찰하는지라.
보살이 비록 이와 같이 관찰하더라도 이 때문에 모든 실천을 버리지 않고 역시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서 모든 중생들을 위해 그들에게 이로운 일을 이룩하되 마치 머리가 타고 옷이 타는 불을 끄듯이 하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나 없음[無我]을 잘 깨닫는 것이니라.
다음 업의 과보를 잘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사찰하기를, ‘지금 이 세간의 회합하는 모습이야말로 마치 허수아비와 같기도 하고 건달바의 성[乾達婆城]과 같기도 하여 여러 성질이 다 공한 것이거늘 저 유정이건, 비정(非情)이건 간에 나라는 고집[我執]에 집착된 중생들은 이 바른 도를 깨달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저 중생들을 생각하기를, ≺만약에 내가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다면 꿈틀거리는 벌레가 사부(士夫)와 보특가라(補特伽羅)4)와 한창인 소년 바라문들에겐 곧 좋은 업과 좋지 못한 업을 표시할 수 없으리니, 누가 그 업보를 받을 것인가. 실상 중생들은 그 업보를 받을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비록 중생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지만, 역시 선업과 악업의 그 과보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나니, 보살이 바른 지혜로써 이렇게 여실히 아는 것이 곧 이른바 보살이 그 업의 과보를 잘 아는 것이니라.
다음 함이 있는[有爲] 법을 잘 요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그 바른 지혜로써 함이 있는 법을 잘 깨닫고 나서 곧 생각하기를, ‘이 함이 있는 법을 잠시도 정지하지 않아
찰나 찰나마다 유통하는 것이 마치 이슬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같기도 하고 시냇물이 빨리 흘러 머물지 않는 것과 같기도 하거늘, 어찌 슬기로운 자로서 이러한 법 가운데 집착을 내거나 애락(愛樂)을 일으키겠는가. 즐거운 환경이 사라졌을 때 혹은 근심과 슬픔이 자라나느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깊이 싫어 떠나려는 마음을 내어 열반을 즐거이 구하리라’고 하는지라.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함이 있는 법을 잘 요해하는 것이니라.
다음 윤회와 유전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생각하기를, ‘이 세간의 회합하는 모습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가려 윤회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다 애욕의 끈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애욕 때문에 잡음[取]을 내고 잡음으로 말미암아 옳은 업과 옳지 못한 업의 모든 실천을 조작하고 저 옳은 업과 옳지 못한 업의 실천을 조작하기 때문에 존재[有]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존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나는 것이 있고 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따라 일어나 얽매이나니, 이것이 하나의 큰 괴로움 덩어리가 되어서 생사의 바퀴가 계속 돌고 또 돌기를 마치 물 긷는 고패[汲水輪]가 위아래로 빙빙 구르는 것과 같도다’고 하는지라, 보살이 그 바른 지혜로서 이러한 법을 여실히 아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윤회(輪廻)와 유전을 잘 아는 것이니라.
다음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사찰하기를, ‘만약에 무명이 없다면 곧 지어감이 없을 것이고, 지어감이 없다면 곧 의식이 없을 것이며, 의식이 없다면 곧 이름과 물질과 여섯 가지 대경[六處]의 그 감촉과 애욕과 잡음과 존재와 나는 것이 없고, 나는 것이 없으면 곧 늙어 죽음과 근심ㆍ슬픔ㆍ괴로움 따위의 법이 죄다 없으리라’고 하느니라.
보살이 그 바른 지혜로써 이러한 법을 여실히 깨달아 아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깨닫는 것이리라.
다음 성문승과 연각승의 법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사찰하기를, ‘이 법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고, 이 법은 사다함과(舍陀含果)를 얻으며,
이 법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고, 이 법은 무소의 외뿔과 같은 연각과(緣覺果)를 얻는 것이로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그 바른 지혜로써 이러한 과(果)를 여실히 알지만, 저 법 가운데 증득(證得)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일체 중생들을 거둬주기 위해 사자의 부르짖음을 외쳐야 하는 것인 만큼 나는 마땅히 저 일체 중생들을 생사의 벌판인 험난함 속에서 구제해야 하고 나만이 이제 홀로 생사를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기 때문이라.
보살이 이 견고한 행원(行願)을 일으키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성문승과 연각승의 법을 잘 아는 것이니라.
다음 대승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모든 학문(學門)에 있어서 잘 수학(修學)할 수 있지만, 수학할 때에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수학하는 도를 역시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라, 보살이 비록 저 상(相)을 얻을 수 없더라도 그 때문에 저 인연으로써 없다는 소견[斷見]에 떨어지지 않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대승을 잘 아는 것이니라.
다음 마군의 업을 잘 막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일체 처소에서 항상 나쁜 벗을 없애고 나쁜 나라에 가지 않고 외도들에 친근하거나 외도들의 전적(典籍)을 닦아 익히지 않으며, 또 일체 처소에서 세간의 이익 따위 공급하는 일을 아주 없애고 그 밖의 번뇌 따위 보리의 도에 장애되는 것을 다 제거하는 동시에 곧 대치(對治)하는 파괴의 법을 일으키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마군의 업을 잘 막는 것이니라.
다음 뒤바뀜 없는 지혜를 갖추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세간의 일체 문학ㆍ평론ㆍ전장(典章) 따위 사업을 죄다 뛰어난 지혜로써 끌어들여 수학하되 보살로서 배우는 것은 다만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해 배우는 것일 뿐, 지식이나 명칭 따위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의 덕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아니니라. 즉 여래의 법률을 최상으로 하고 여래의 언설(言說)을 최승으로 하여 큰 위엄과 덕망을 갖춰서 이와 같은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기 때문에 부지런히 수학하지만 끝내 외도들의 사악한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뒤바뀜 없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니라.
다음 견줄 데 없는 지혜를 갖춤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세간의 하늘ㆍ사람과 마왕ㆍ범왕과 사문ㆍ바라문 등 모든 중생들 가운데 보살과 더불어 지혜를 견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보살이 지혜에 있어서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의 최승한 지혜를 제외하고는 세간의 하늘ㆍ사람과 마왕ㆍ범왕들 중에 다시 그 이상 뛰어날 사람이 없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견줄 데 없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러한 열 가지 법을 수행하는 이라면 곧 뛰어난 지혜를 두루 갖출 수 있으리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다음의 열 가지 법을 수행한다면 곧 방편을 두루 갖출 수 있으리니, 이른바 그 열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 회향(廻向)할 줄을 잘 아는 방편이고, 둘째 외도들의 모든 소견을 잘 회향하는 방편이며, 셋째 다섯 가지 대경[五塵]을 잘 회향하는 방편이고, 넷째 의심과 후회를 잘 제거하는 방편이며, 다섯째 중생들을 제도할 줄 아는 방편이고, 여섯째 중생들의 생명을 구제할 줄 잘 아는 방편이며, 일곱째 보시를 받을 줄 잘 아는 방편이고, 여덟째 성문승과 연각승을 잘 회향하여 대승에 들어가는 방편이며, 아홉째 이롭고 즐거움을 가르쳐 보일 줄 잘 아는 방편이고, 열째 여래를 공양하여 받들어 섬길 줄 잘 아는 방편이다.
선남자여, 회향할 줄을 잘 아는 방편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보살이 그 일체에 자기의 소유가 아니더라도 소속된 데가 없는 물건인 꽃ㆍ과일과 온갖 향나무ㆍ묘한 향나무와 모든 보배 나무ㆍ
담요 나무와 꽃나무ㆍ과일 나무 등 자기의 소유가 아니더라도 소속된 데가 없는 것을 항상 낮 세 때와 밤 세 때 동안에 불보살에게 공양할 것을 생각하여 이 선근(善根)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광대하고도 깊고 깊은 경전 가운데 모든 공양하는 법을 듣고 나서 마음으로 믿어 즐겨하여 이 선근으로써 모든 불보살에게 공양하며, 또 시방 세계 일체 보살과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체 선업을 일으켜서 보리의 실천을 원만히 하는 자에게 보살이 깊은 마음으로 다 수희(隨喜)하여 이 선근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며, 또 여래의 탑묘(塔廟)에서나 여래의 불상 앞에서 꽃ㆍ향과 바르는 향을 보시하여 공양할 때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그 계율을 깨뜨린 더러운 냄새를 깨끗이 제거하고,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계율을 지키는 맑고 깨끗한 향내를 얻을지어다’ 한다.
또 탑을 청소하거나 땅을 바를 때엔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그 모든 나쁜 모습을 여의고 단정하고 장엄한 모습을 얻어 훌륭한 위의를 갖출지어다’ 하며, 또 꽃 일산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할 때엔,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그 모든 번뇌의 불을 소멸할지어다’ 하며, 또 탑에나 절에 들어갈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열반의 성(城)에 들어갈지어다’ 하고, 탑에서나 절에서 나올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생사를 벗어날지어다’ 하며, 또 그 머무는 곳에서 문을 열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모든 선한 갈래의 그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 문을 열지어다’ 한다.
문을 닫을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모든 나쁜 갈래의 문을 닫을지어다’ 하고, 어느 곳에건 앉을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보리의 도량에 앉을지어다’ 하고,
오른 옆구리로 누울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다 이러한 오른 옆구리의 열반을 할지어다’ 하고, 일어설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번뇌의 진흙을 벗어날지어다’ 하고, 행동할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다 대인의 행동을 할지어다’ 하고, 편히 머물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모든 근심과 괴로움을 벗어날지어다’ 한다.
대소변을 볼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그 모든 번뇌에 더럽힌 허물을 깨끗이 제거할지어다’ 하고, 손을 씻을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번뇌의 더러운 습기를 깨끗이 제거할지어다’ 하고, 발을 씻을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갖가지 번뇌의 더러운 때를 제거할지어다’ 하고, 치목(齒木)5)을 씹을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모든 번뇌의 더러운 때를 제거할지어다’ 하고, 몸의 모든 부분을 움직일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다 이익과 안락을 얻을지어다’ 하며, 여래의 탑묘에 예배할 때 곧 염원하기를, ‘바라건대 일체 중생들이 다 하늘ㆍ사람의 존중과 공경함을 얻을지어다’고 하느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회향할 줄을 잘 아는 방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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