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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782 불설제법본무경(佛說諸法本無經) 하권

by Kay/케이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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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제법본무경(佛說諸法本無經) 하권

 

불설제법본무경 하권


수 사나굴다 한역
최윤옥 번역


이때 만수시리동진(曼殊尸利童眞:문수사리동자)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계라구(鷄羅句)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네가 잘 말할 수 있겠느냐?”
만수시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보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 하느냐?”
만수시리가 아뢰었다.
“모든 법은 도달하지 않고 두루 도달하지도 않습니다. 도달함을 수순하지도 않고 이미 도달함을 벗어났으며, 증득하는 때도 아니고 증득하지 않는 때도 아니니, 지혜를 초월하고 도달함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변지(遍智)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모든 중생이 변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계라구가 되느냐?”
만수시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종류와 모든 처소에서 변지의 자성에 도달함을 수순하는 어떤 중생도 없기 때문에 ‘변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그 변지란 도달하게 되어 현재에 상응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중생의 자성이 곧 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변지를 다 갖추었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자체[自]가 없고 자체를 벗어났으며, 자성(自性)이 없이 평등하고 진여에 수순하여 도달하니, 변지의 본성이 하나의 성품과 모습[性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무량함을 갖추었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셈[算]을 초월하고 수(數)를 벗어났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허공의 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의 보리장(菩提場)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리장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보리장이란 모든 법이 적멸하여 고요한 장(場)이며, 모든 법의 생김이 없는 장이며, 모든 법의 소유가 없는 장이며, 모든 법의 취할 수 없는 장이며, 모든 법의 자성이 없는 장이다. 만수시리야, 이것이 바로 보리장이란 낱말의 뜻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항상 이 장(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만수시리야.”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인연으로 모든 중생의 보리장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인(忍)을 얻는 것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바로 다함이 없는 법[無盡法]이고 없어짐이 없는 법[無滅法]이며 생기지 않는 법[不生法]이니, 이름[名]과 모습[相]에서 이미 벗어나 평등한 인(忍)에 수순하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의 집착 없는 변재(辯才)가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중생에게 이와 같은 변재가 있다면 그들은 시방에서 어떠한 소유(所有)도 없을 것이며,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이 평등하게 수순하여 도달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변재를 이미 벗어나고 자체의 모습[自相]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집착하는 것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으로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다라니를 얻는 것이 바로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생각으로 지니는 것인 모든 중생의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 등은 참되지 못하고 전도된 것이며, 분별하여 모습을 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자애로운 마음[大慈]이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중생이 아닙니다. 본성이 성내지 않으며, 성냄과 자애로운 마음을 분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큰 연민[大悲]을 모두 갖추었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의 본성은 지음도 없고 짓는 주체도 없으며, 여래와 평등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큰 연민을 자성(自性)에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삼마지(三摩地)를 얻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의 본성은 정(定)에 들어 산란함이 없으며, 간추려 거두어들임도 없으며, 다른 일에 반연함도 없습니다. 본성이 생기지 않으므로 끝끝내 정에 들어가고 반연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중생이 반연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어 안다고 한다면, 저 반연하는 가운데에는 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그 반연하는 식은 생각 생각마다 신속히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은 갖가지로 분별하여 사각(思覺)하지 않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모든 사각(思覺)은 어느 곳에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허공계에 머문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허공계에 산란함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허공계에는
산란함이 없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허공계를 다닐 수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만수시리야.”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허공계가 진여(眞如)라면 저 모든 중생도 진여이며, 만일 모든 중생이 진여라면 저 허공계도 진여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의 진여와 허공계의 진여는 둘이 아니니, 두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탐욕을 모두 갖추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탐욕의 평등함에 순조롭게 들어가 물듦이 없고 물듦을 벗어나며, 다툼과 투쟁을 버리고 떠납니다. 탐욕을 초월하지 않고 탐욕의 자성을 평등하게 수순하여 깨달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탐욕이 곧 보리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탐욕의 자성을 수순하여 깨닫는 것을 보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성냄의 악을 다 갖추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모든 유위(有爲)의 행(行)이 허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성냄의 평등함에 안주하여 성냄의 자성을 수순하여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성냄의 악을 다 갖추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음을 다 갖추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 어리석음과 모든 이름과 모든 집착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리석음의 평등함에 안주하여 어리석음의 자성을 수순하여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신견(身見)을 다 갖추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신견(身見)에 안주하여 모든 법 가운데에서 들어가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고 또한 들고 나지도 않으며 끝내 머묾이 없는 모습에 안주하시기 때문이며, 신견은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며 자성이 없다는 것을 수순하여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삿된 견해를 다 갖추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유위(有爲)가 바로 삿된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 진실이 아님을 나타내 보이며, 진여를 벗어난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 유위가 바로 공(空)이고 무(無)이며 허망한 법임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은 삿된 견해의 자성과 모습을 수순하여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전도(顚倒)에 머무르며 보리를 얻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장애[蓋]에 머무르고, 5욕(欲)에 머무르고, 탐욕에 머무르고, 성냄에 머무르고, 어리석음에 머무르며 보리를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머무는 곳이란 곧 머묾이 없는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머묾이 없는 곳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머묾이 없는 곳이란 머물기 어려운 곳이고 움직이고 흔들리는 곳이니, 곧 범부와 어린아이입니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는 탐욕의 평등함에 잘 머무시기 때문이며, 성냄의 평등함에 어리석음의 평등함에 5욕의 평등함에 모든 장애의 평등함에 전도됨의 평등함에 잘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탐욕의 자성처(自性處)에 머물며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 깨달으셨으며, 성냄과 어리석음과 5욕의 공덕과 모든 장애와 전도됨의 자성처에 머물며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 깨달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전도됨과 장애와 5욕(欲)과 3독(毒)에 머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 깨달으셨으니, 이것이 계라구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고 나자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너에게 묻기를 ‘여래ㆍ응공ㆍ정변지는 불선법(不善法)을 모두 끊고, 선법(善法)은 다 갖추었느냐?’고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모든 불선법을 끊고 모든 선법을 다 갖추셨냐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그가 이와 같이 물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너는 우선 좋은 친구를 가까이하고 방편과 상응하도록 열심히 노력하면서 하나의 법[一法]과 합하지도 말고 또한 벗어나지도 말라. 취하지도 말고 놓지도 말며, 반연하지도 말고 반연하지 않지도 말라. 의지하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며, 버리지도 말고 가지지도 말며, 모으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고 원(願)하지도 말며, 하나의 법[一法]이 훌륭하다거나 보잘 것 없다거나 가장 훌륭하다고 보지도 말라.’
그러면 그는 분명 뒤에 여래의 경계를 알게 되어 경계를 생각하지 않고, 경계를 벗어나며, 경계의 법을 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네가 이와 같이 해설하니, 이는 무엇을 밝히려는 것이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와 같이 해설하였으나 밝힐 수 있는 어느 한 법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보리장(菩提場)에 앉으신 뒤에 법이 생기거나 없어진다고 볼 수 있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만수시리야.”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법이 생김이 없고 없어짐도 없다면, 그것에 선법을 모두 갖추고 불선법을 모두 갖추는 일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다. 만수시리야.”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이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는다면 그는 선법을 다 갖추거나 불선법을 다 갖추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끊으며, 무엇을 닦고, 무엇을 증득하며, 어떤 도(道)를 보겠습니까?”
이때 허공 위에서 만 명의 천자(天子)가 부처님과 만수시리 동진의
말을 듣고서 곧 우바라화(憂波羅花)ㆍ발타마화(撥陀摩華)ㆍ구목다화(抱目陀華)ㆍ분다리가화(奔茶梨迦華)ㆍ만다라화(曼陀羅華)ㆍ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를 뿌리며, 부처님과 만수시리동진의 발에 예배하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시리(尸利)는 집착이 없으므로 이를 만수시리(曼殊尸利)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시리는 둘이 없으므로 이를 만수시리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시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無有] 이것을 만수시리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시리는 남김이 없으므로 이를 시리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시리는 진여이며, 시리는 실제(實際)입니다. 시리는 법계(法界)이며, 시리는 훌륭함[勝]입니다. 시리는 가장 훌륭함이며, 시리는 위없음입니다. 시리는 위없는 위이며, 시리는 같은 것이 없으며[無等], 시리는 무등등(無等等)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를 만수시리동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 만수시리동진이 그 천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만두라. 천자여, 나를 분별하지 말라. 나는 한 법도 훌륭하다거나 못하다거나 가장 훌륭하다거나 묘하다고 보지 않는다. 또 천자여, 네가 만약 만수시리를 말한다면, 나는 탐욕스런 시리이니 그것이 바로 나 만수시리이며, 나는 성내는 시리이니 그것이 바로 나 만수시리이며, 나는 어리석은 시리이니 그것이 바로 나 만수시리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바른 말[正說]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천자여, 나는 탐욕을 초월하지 않으며, 성냄을 초월하지 않으며, 어리석음을 초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자여, 모든 범부와 어린아이는 행(行)이 있고 도달함이 있지만 모든 보살에게는 어떠한 법에서도 행하는 것이 없고 도달하는 곳이 없다.”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모든 보살이 불법에 도달하지 않고 10지(地)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허깨비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으로 10지(地)를 행하겠느냐?”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그와 같은 허깨비는 본래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지(地)에 거처하고 또 행함과 도달함이 있겠습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그와 같다. 천자여,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으니, 그들에겐 가는 일이 없고 다른 곳에 도달하는 일도 없으며 힘써 행하는 것도 없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행하는 것도 없다.”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당신은 보리를 깨닫지 않을 것입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그대 생각에는 어떠하냐? 탐욕에 얽매여 머무는 범부와 어린아이가 보리장(菩提場)에 앉아 변지(遍智)를 다 갖출 수 있겠느냐?”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당신이 어찌 또 탐욕에 얽매여 머무는 그런 범부나 어린아이이겠습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그렇다. 천자야, 나는 탐욕에 얽매여 머물고, 성냄에 얽매여 머물고, 어리석음에 얽매여 머문다. 나는 곧 외도(外道)이며, 삿된 행을 하는 사람이다.”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무슨 뜻으로 ‘나는 탐욕에 얽매여 머물고 성냄에 얽매여 머물고 어리석음에 얽매여 머물며, 나는 곧 외도이고 삿된 행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나에게 있는 얽매여 머무름은 머무는 곳이 없으므로 시방 가운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니, 자성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며 머무는 곳이 없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당신이 왜 외도입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나는 외도에게 가고 도달하는 일이 없다. 그런 인연 때문에 내가 곧 외도이다.”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당신이 왜 삿된 행을 하는 자입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나는 모든 법이 삿된 것이고, 진실이 아니며, 여여하지 않고, 다만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인연 때문에 내가 곧 삿된 행을 하는 자이다.”
이때 만 명의 천자는 만수시리동진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뒤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그들은 인을 얻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저 중생들은 훌륭한 이
금강구(金剛句)의 광명이 귀에 닿기만 해도 훌륭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하물며 들은 뒤에 믿음과 이해를 인연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닦아 익히고 연설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들은 모든 법 가운데에 집착이 없는 변재를 얻게 될 것이며, 또 밝게 비춤을 얻어 하나의 모습인 모든 법을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속하며 모든 법이 부처님의 법임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이때 대중 가운데 연화유희지통(蓮華遊戱智通)이라는 천자가 집회에 참석해 앉아 있었다. 이때 연화유희지통 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음성으로 지혜에 들어가는 열 가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뒷날 50세(歲)에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들은 뒤에는 모든 법행(法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행에 들어가는 것을 알아 의심하지도 미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 연화유희지통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라. 천자야, 뭣 하러 그와 같은 것을 묻느냐? 이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音聲入門]은 초업보살(初業菩薩)이 지각(知覺)하고, 사유(思惟)하고, 헤아리고, 함께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선가자야, 이 법을 말할 때에는 역시 초업보살 앞에서는 말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말뜻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천자야, 음성으로 문(門)에 들어간다면, 보살은 항가하(恒伽河: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겁(劫) 동안 그가 참되지 않은 말로 꾸짖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가운데에서 성내는 장애의 마음이 없을 것이다. 또 항가하 모래알처럼 많은 겁 동안 청정한 마음과 좋은 뜻으로 올리는 공양을 받고 존중받으며, 온갖 즐거운 인연과 옷과 음식과 침구와 병을 다스리는 약(藥) 등 온갖 것을 얻더라도, 그는 그 가운데에서 또한 수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선가자야, 번뇌를 다한 아라한(阿羅漢)은 뜻에 맞고 사랑스러움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끝내 애착을 일으키지 않고, 또 성냄의 장애가 머무는 모든 곳에서도 역시 증오를 일으키지 않는다.

선가자야, 이와 같이 음성으로 문에 들어간다면, 보살은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 동안 공양과 온갖 즐거운 인연을 얻더라도 그는 그 가운데서 수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 동안 그가 참되지 않은 말로 꾸짖음을 당하더라도 그는 그 가운데에서 성내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선가자야, 이와 같이 음성으로 문에 들어간다면, 보살은 모든 손해ㆍ이익ㆍ비방ㆍ찬양ㆍ칭찬ㆍ비난ㆍ괴로움ㆍ즐거움에 대하여 받아들임도 없고 집착함도 없을 것이니, 세상의 법을 초월하여 머무는 것이 마치 산왕(山王)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연화유희지통 천자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배울 때 음성으로 문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가자야, 너는 지금 뭣 하러 그와 같은 것을 묻느냐?”
천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음성으로 지혜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미래에 만일 이 인(忍)에 들어가는 보살이 있다면 청정한 생각[淨想]과 믿는 생각[信想]과 사랑하는 생각[愛想]을 낼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음성으로 지혜에 들어가는 것을 들은 뒤에 자신의 악(惡)을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 연화유희지통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천자야, 잘 듣고 바르게 염(念)하고 잘 사유하라. 내가 너를 위하여 그 이치를 연설하겠다.”
연화유희지통 천자가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너무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탐욕스러운 소리에 대해 허물이나 죄라는 생각을 하고, 탐욕을 벗어난 소리에 대해서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 법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성내는 소리에 대해 허물이며 죄라는 생각을 하고, 성냄을 벗어난 소리에 대해서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 법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욕심이 적은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며, 욕심이 많은 소리는 등지고 미워한다면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만족을 아는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며, 만족을 모르는 소리를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덜고 줄이는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며, 덜고 줄이지 않는 소리를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와 같다. 홀로 지내는 걸 좋아하라는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내라는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부처의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외도의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청정한 행[梵行]의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청정한 행이 아닌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비나야(毗那耶)의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비나야가 아닌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맑고 깨끗한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번뇌의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사랑하는 소리를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소리를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과위(果位)에 오른 사람의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범부(凡夫)의 소리는 등지고 미워하며, 즐거움의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괴로움의 소리를 등지고 미워하며, 세상을 벗어난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세상의 소리는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출가한 사람의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재가자의 소리는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베푸는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아까워하는 소리는 등지고 미워하며 장애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계(戒)를 지키는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를 깨뜨리는 소리는 등지고 미워하여 장애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 법 가운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참는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내는 소리에는 장애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불법 가운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와 같다. 정진하는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게으른 소리에는 장애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킨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산란한 소리에는 장애라는 생각을 하며, 지혜로운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소리에는 장애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부처님 법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하는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멀리하는 소리는
등지고 미워한다면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유전(流轉:윤회)의 소리에는 허물이고 죄라는 생각을 하면서 열반의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쪽 언덕의 소리는 등지고 미워하면서 저쪽 언덕의 소리는 수순하고 사랑하며, 촌락(村落)의 소리에는 허물이고 죄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란나(阿蘭拏:아란야)의 소리에는 찬탄하며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곧 음성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홀로 행하는 것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행하는 것은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부처님 법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비구의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재가의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위의(威儀)가 있는 업(業)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위의가 없는 업은 등지고 미워하며, 청정하고 오묘한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청정하지도 오묘하지도 않은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계율을 지키는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악한 계율의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잡되지 않은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잡된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탐욕을 벗어난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탐욕스러운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성냄의 악을 벗어난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성내는 악한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어리석음을 벗어난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어리석은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공(空)의 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견해가 있는 행은 등지고 미워하며, 모습이 없는 것[無相]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모습[相]은 등지고 미워하며, 원이 없는 것[無願]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원(願)은 등지고 미워하며, 보살행은 수순하고 사랑하면서 성문행이나 독각행은 등지고 미워한다면 곧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만약 보살의 과실을 비난한다면 보리와 멀어질 것이며, 또한 업장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위의를 비난한다면 보리와 멀어질 것이며, 또한 견고한 업장(業障)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보살이 보살에 대하여 낮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자기에 대해서는 훌륭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 되며, 또한 업장을 얻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다른 보살을 가르치거나 훈계할 때에는 그들이 스승이라고 생각한 다음에 가르치고 훈계하여야 한다. 보살이 만약 보리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면 보살에 대하여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선가자야, 보살은 이와 같이 제2 보살을 경멸하는 것과 같은 선근을 끊는 짓을 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모든 선근을 보호하고자 하고, 모든 업장을 청정하게 하고자 하며, 속히 모든 법에서 걸림없는 행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밤낮으로 각각 세 때에 보살승(菩薩乘)인 부가라(富伽羅)에게 예배하여야 한다.”
이때 만수시리동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탐욕의 소리와 부처님의 소리를 양을 헤아려 보면 하나로 평등합니다. 성냄의 소리와 부처님의 소리도 평등하고, 어리석음의 소리와 부처님의 소리도 평등합니다. 외도의 소리와 부처님의 소리가 평등하고, 적은 욕심의 소리와 많은 욕심의 소리가 평등하며, 만족할 줄 아는 소리와 만족할 줄 모르는 소리가 평등하고, 덜고 줄이는 소리와 덜고 줄이지 않는 소리가 평등합니다. 홀로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는 소리와 여럿이 함께 머무는 소리가 평등하고, 이쪽 언덕의 소리와 저쪽 언덕의 소리가 평등하며, 멀리하는 소리와 가까이하는 소리가 평등하고, 유전(流轉)하는 소리와 열반의 소리가 평등합니다. 촌락의 소리와 아란나의 소리가 평등하고, 보시하는 소리와 아까워하는 소리가 평등하며, 계를 지키는[持戒] 소리와 계를 깨뜨리는[破戒] 소리가 평등하고, 성내고 한탄하는 소리와 인내하는 소리가 평등합니다. 정진의 소리와 게으른 소리가 평등하고, 산란한 소리와 마음을 안정시킨 소리가 평등하며, 어리석은 소리와 지혜로운 소리가 평등합니다.”
이때 연화유희지통 천자가 만수시리동진에게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어떤 인연으로 양을 재면 똑같습니까?”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이와 같은 탐욕의 소리를 그대의 생각에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제 생각에 탐욕의 소리는 메아리[響]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그렇다면 부처님의 소리는 그대의 생각에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천자가 말하였다.
“만수시리여, 제 생각에 메아리의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만수시리가 말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양을 재면 똑같은 것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너는 과거 세상 초업지(初業地)에서 이와 같은 법도(法道)에 미처 들어가지 못했을 때에는 어떤 업장(業障)을 지었느냐? 너는 이제 말해 보라. 미래 세상에 있을 이름만 보살인 자[假名菩薩]들이 그와 같은 업장의 악을 듣고는 분명 스스로를 수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만수시리동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들은 이와 같은 업장의 악을 듣고 나서는 비록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는 하겠지만 업장을 깨끗이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온갖 법에 걸림 없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과거로 수없는 겁을 지나고, 다시 수없이 넓고 헤아릴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시간을 지나고, 다시 그만큼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에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그 명호는 사자고음왕(師子鼓音王) 여래ㆍ응공[應]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구족(明行具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無上)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교사(天人敎師)ㆍ불바가바(佛婆伽婆)이셨습니다. 그 여래의 수명은 60구지 나유타 백천 세이셨고,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중생들에게 설법하며 조복시키셨고, 또한 3승(乘)으로 중생을 성숙시키셨습니다.
그 세계의 이름은 대광(大光)이었으며, 그곳에 있는 나무나 기둥은 칠보로 만들어졌으며, 그 나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리들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공의 소리[空聲]와 모습이 없는 소리[無相聲]와 원이 없는 소리[無願聲]와 태어남이 없는 소리[無生聲]와 멸함이 없는 소리[無滅聲]와 가진 것이 없는 소리[無所有聲]와 모양과 상태가 없는 소리[無狀貌聲]였으니, 항상 이와 같은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날 때 그곳의 모든 중생들은 법을 보고 증득하였습니다.
이때 여래의 첫 번째 집회에는 성문(聲聞)이 99구지만큼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었으며 평등한 지혜로 마음을 잘 해탈한 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집회에는 96구지의 비구가 있었고, 세 번째 집회에는 93구지의 비구가 있었으며,
네 번째 집회에는 90구지의 비구가 있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아라한이었으며 평등한 지혜로 마음을 잘 해탈한 자들이었습니다.
저 보살들도 또한 그만큼의 수가 모였으니, 그들은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다 갖추었고 온갖 법도(法道)를 잘 낼 수 있었으며, 백천 구지 나유타의 부처님을 공양했고, 이름[名稱]이 백천 구지 나유타의 불국토에 자자했으며, 많은 백천 구지 나유타의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켰고, 무변문다라니(無邊門陀羅尼)를 얻어 백천 구지 나유타의 삼마지(三摩地)를 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밖의 시업초승발행(始業初乘發行) 보살마하살 역시 한량없고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 여래의 국토는 공덕과 장엄을 모두 갖추었으니, 말로 한다면 끝내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여래가 멸도하신 후 바른 법은 990만 년을 머물렀으며, 그곳 모든 나무의 소리도 다시는 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희근(喜根)이라는 어떤 보살비구(菩薩比丘)가 있었는데 설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희근보살은 과거의 행이 순박하고 곧았고 위의를 분별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의 법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중생들은 모든 근(根)이 다 예리하였으므로 조금만 들어도 금방 알아 깊이 믿고 이해하였기에 그 중생들에게는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찬탄해 말하지 않았고, 만족할 줄 아는 것과 덜고 줄이는 것과 홀로 지냄을 기뻐하는 것도 찬탄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럿이 함께 머물지 않는 것을 찬탄해 말하지 않았고, 또한 발기(發起)하여 정진하는 것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며, 몸소 잡된 행을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법을 포섭하게 하였습니다.
곧 탐욕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였고, 곧 성냄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였으며, 곧 어리석음의 자성에서 모든 법을 포섭하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는 방편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행(行)이 하나의 모습[一相]임을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 중생들은 그가 방편으로 거두어들이게 한 뒤에는
어떤 행이나 어떤 위의 때문에 성냄의 장애가 있게 되는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내지 않는 마음이 된 뒤에 곧 인지(忍地)를 얻었으며, 여래의 가르침 속에서 확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깊은 마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또 승의(勝意)라고 하는 어떤 보살비구가 있었는데, 역시 설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승의 설법자는 4제야나(第耶那:善)와 4무색입수(無色入受:無色定)를 얻었고, 12두타(頭多)의 공덕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승의보살은 조복시킬 때 남의 허물을 취하였고, 그 지혜는 동요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승의보살은 촌락에서 음식을 얻다가 모르고 희근보살이 걸식하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집주인을 보고서 곧 집주인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이르자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앉은 후에 그 집주인을 위해 욕심을 적게 가지라고 말하고, 만족할 것을 말하였으며, 덜고 줄이라고 말하고, 여럿이 함께 머무는 허물을 말하였으며, 홀로 지냄을 즐거워하는 것을 찬탄하여 말하고, 여럿이 함께 머물지 않는 것을 찬탄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집주인 앞에서 희근보살을 나쁘게 말하였습니다.
‘그 비구라는 자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전도됨을 취하게 하고, 저 비구라는 자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취하게 한다. 저 비구라는 자는 바로 잡된 행위를 하는 자로서 탐욕을 취하며 걸림이 없고, 성냄을 취하며 걸림이 없으며, 어리석음을 취하며 걸림이 없고, 온갖 법을 취하며 걸림이 없다.’
그 집주인은 근기가 예리하고 인(忍)을 얻은 사람이었고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덕(大德)께서는 탐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탐욕이란 곧 번뇌라고 하겠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대덕이시여, 탐욕이란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비구는 말하였습니다.
‘탐욕이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탐욕은 어디에서 와서 어느 곳으로 가며, 또 어느 곳에 머뭅니까?’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탐욕이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집주인이 말하였습니다.
‘대덕이시여, 탐욕이 만일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동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위와 아래와 네 간방[四維]에 있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곳이 없고 또 머묾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그런 탐욕이 어찌 생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생김이 없다면 어찌 번뇌가 있을 것이며 또 청정하게 하겠습니까?’
이때 승의 비구가 화를 내며 불쾌하게 일어나 가버리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비구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지 못한 것을 취하게 하는구나.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불타(佛陀)의 소리는 기뻐하고 외도의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梵行)의 소리는 기뻐하고 범행이 아닌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청정한 소리는 기뻐하고 더럽게 물든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과(聖果)의 소리는 기뻐하고 범부(凡夫)의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즐거운 소리는 기뻐하고 괴로운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출가(出家)의 소리는 기뻐하고 재가(在家)의 소리에는 성을 낸다.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간을 벗어난 소리는 기뻐하고 세간의 소리에는 성을 내며, 음성에 들어가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보시의 소리에는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아까워하는 소리에는 장애된다는 생각을 한다. 부처님 법 가운데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계를 지킨다는 소리에는 이익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계를 무너뜨린다는 소리에는 장애된다는 생각을 한다.’
걸식한 집에서 나온 뒤 아란나(阿蘭拏)로 돌아가 거처하던 곳에 이른 다음 다른 비구들도 역시 그와 같이 취하게 하였으며, 곧 대중 가운데서 희근보살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되게 하고, 이 비구는 많은 사람들을
삿된 견해를 갖게 한다. 이 비구는 바로 잡된 행위를 하는 자로서 탐욕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고, 이와 같이 성냄과 어리석음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으며, 온갖 법을 취하면서도 걸림이 없다.
희근(喜根)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이 비구는 분명 업장(業障)을 짓겠구나. 내가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해주어 보리를 돕는 법의 인(因)을 닦도록 해야겠다.’
그때 희근보살은 대중들이 믿게 하려고 곧 모든 비구승 앞에서 가타(伽陀:게송)로 말하였습니다.

탐욕을 열반이라 말하리니
성냄과 어리석음도 이와 같다.
그 가운데 도를 깨달아야 하니
부처님의 보리는 사유할 수 없다.

탐욕을 분별하고
모든 성냄과 어리석음 분별한다면
부처님의 보리와 멀어지리라
비유한다면 저 하늘과 땅만큼.

만일 탐욕과 성냄을 파괴하지 않고서
어리석음에 들어가는 이는 보리를 볼 것이니
그는 곧 훌륭한 보리에 가까워져
인(忍)을 얻는 것도 멀지 않을 것이다.

탐욕과 보리, 이 둘은 둘이 아니니
하나로 평등하게 들어가 함께 상응한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수순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처님의 보리와 멀고 또 멀어지리라.

탐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번뇌를 일으키고 마음을 물들인 적도 없다.
만일 아상(我想)있고 얻었다는 견해 있다면
저 탐욕의 니리(泥犁)에 들어가게 되리라.

모든 탐욕의 법[欲法]이 곧 불법(佛法)이며
모든 부처님 법이 곧 탐욕의 법이다.
이 둘은 한 글자이며 모습이 없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될 것이다.

계를 지킴과 무너뜨림을 분별한 후에
계로써 스스로를 높이고 취(醉)하여 방일하면
그는 천상에도 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보리일까?
얻었다는 견해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번뇌를 분별한 후에
성내는 견해에 의지하기 항상 좋아한다면
이러한 도는 훌륭한 보리가 아니니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범부의 얽매임이다.

만일 아란나에 머묾을 분별한 후에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긴다면
그에게는 보리도 없고 불법도 없으리니
아란나라는 견해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일 뿐이다.


아란나의 법도 보지 않았으면서
촌락에서 위의를 짓는다면
하늘과 수라(修羅)에게도 그가 바로 적(賊)인데
어찌 보리와 불법이 있겠는가.

나는 부처가 되리라고 분별한다면
그는 범부의 무지의 힘에 끌리는 것이니
모든 불법은 허공과 같아서
그 가운덴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견행(見行)과 보리(菩提) 본래 둘이 아니거늘
이름[名字]과 수(數)와 음(音)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니
만일 이 법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보리와는 멀고 또 멀어질 것이다.

보리를 구한다면 보리는 없으며
보리를 보았다면 보리와 멀어질 것이니
이 가르침에서는 멸도에 이르는 것 아니니
이 법을 분별하면 진실이 없다.

불법(佛法) 가운데서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 낸다면
그는 부처님의 보리와 멀어질 것이니
진실이 없는 법에서 부러움을 내었으므로
곧 다시 고뇌를 받게 될 것이다.

공양하고서 공양하지 않은 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공양의 법 가운데 집착하는 것이니
이 경계[界]가 같고 평등하단 것을 안다면
그는 사람 가운데 존귀하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부처님도 부처님의 법도 보지 않고
온갖 종류와 온갖 처소도 본 적 없다면
그는 온갖 법에 물들지 않으리니
보리를 깨닫고 마라(摩羅:악마)를 쳐부수리라.

모든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키려고 하지만
그는 중생계를 생각한 적 없으니
모든 법은 열반과 같고 평등한 것
그가 이것을 본다면 사람 중 존귀한 자가 되리라.

외도(外道)는 나쁜 마음을 가졌다 말하고
모든 부처님은 인승자(人勝者)라고 말하지만
이 둘 사이에 차별은 없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되리라.

보리를 깨달았더라도 깨달은 것은 없고
이와 같이 알았다면 안 것도 없다.
부처님과 부처님 아닌 것, 부처님과 평등하지 않은 것
이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사람 가운데 최상이 되리라.

부처님께선 보리를 깨달으신 적 없고
해탈한 중생도 있은 적 없건만
범부들은 있지도 않은 법을 분별하니
그들은 부처님의 법에서 더욱더 멀어지리라.

유위법(有爲法)은 유위가 아니며
그 모든 수(數)도 있었던 적이 없다.

만일 수가 없다면 셈도 없으리니
이 모든 방편을 둘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생이 없다면 성취함도 없고
불법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중생 역시 그러하니
이와 같이 안다면 보리에 닿으리라.

훌륭한 보리를 꼭 깨닫고 싶다면
저 탐욕의 법[欲法]을 분별하지 말라.
모든 탐욕의 법의 자성(自性)과 자상(自相)
그것이 바로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덕이다.

부처님의 법 가운데 일으킨 적 없고
부처님의 보리에 마음을 내지 않으며
별다른 보리도 없고 별다른 마음도 없다면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導師)가 되리라.

보리심 가졌다고 범부들 스스로 높이고
나는 부처 되리라고 분별한다면
그에게는 보리도 없고 부처님 법도 없으리니
곧 이 법의 자성인(自性印)을 버리는 것이다.

중생을 내가 해탈시키리라 생각한다면
어리석게 중생이란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니
중생이라 말하지만 중생은 없는 것
보리는 중생에게 머물지 않는다.

중생은 이와 같이 두려운 것이라 본다면
그에게는 끝없는 공포가 생기리라.
모든 중생들의 말은 산울림과 같으니
이같이 아는 자 사람 가운데 최상[人中上]이 되리라.

중생은 끝끝내 해탈했고
항상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이 없으며
중생은 적정하여 항상 고요하다고 본다면
이와 같이 아는 자 도사가 되리라.

탐욕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탐욕은 어떠한 방위에도 의지함이 없거늘
참됨이 없는 온갖 법을 분별한 뒤에
이와 같은 나라는 생각에 범부들 미혹된다.

메아리 같고 허깨비 같고 불꽃 등과 같으며
석녀(石女)의 아이 같고 또한 꿈과 같아서
저 온갖 번뇌 볼 수 없는 것인데도
범부들 끊임없이 행하니 어리석음 때문이다.

번뇌를 구한다면 번뇌가 있을 것이니
바른 생각으로 선택하고 게으르지 말라.
도와 번뇌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분별없는 보리의 땅[菩提地]에 닿으리라.

공법(空法)을 범부가 두려워한다면
부처님의 법에서 그는 멀어질 것이며
만일 공법에 의심이 없다면
가장 훌륭한 보리를 그가 얻으리라.


말로써 경계를 분별하지만
말과 이치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름과 이로운 과보에 물들어 집착하면서도
도를 생각하며 의혹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구나.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한 것을 생각하며
아란나를 보고 머물 곳이 있다고 하니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안다고 분별한 뒤에
다시 탐욕의 힘에 끌려가는구나.

누군가 탐욕의 법을 피해 도망간다면
그는 탐욕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탐욕이란 법의 실체를 수순하여 깨달을 수 있다면
그는 곧 법을 보고 탐욕도 벗어나리라.

비록 오랜 세월 금계(禁戒)를 보호하고
끝없는 겁 동안 선정의 마음 일으켰더라도
이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그는 해탈하지 못하리니
이 진실제(眞實際)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이 법이 무소유(無所有)임을 깨닫는다면
모든 법 가운데서 그는 집착이 없으리니
계와 파계(破戒)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범부들의 견해 있는 경계를 벗어날 것이다.

계를 지키지만 항상 계가 없는 것임을 보고
계의 뜻이 파계하는 법임을 깨닫는다면
그는 파계를 얻을 수 없고
계를 행하는 모습도 이와 같음을 그는 깨달으리라.

법왕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법을 가지고
구지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시며
하나의 방편으로 거기에 들게 하시니
이 보리 가운데는 고요하고 번뇌가 없다.

범부들 큰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훌륭한 법 설하는 곳에서 법을 듣고 나면
지음도 없고, 물질도 없고, 모습도 없으리니
한 가지 도리의 방편으로 자성이 공하리라.

차라리 훌륭한 집에서 탐욕의 즐거움을 기뻐하며
법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지언정
이 가르침에 출가한 뒤에
두타(頭多)로서 스스로를 높이고 유견(有見)을 얻지는 말라.

모든 시방의 불세존들
세상에 머물며 이익을 주는 대선주(大仙主)
모두들 온갖 법이 공(空)인 줄 아신 뒤에
법의 일어남 없어 보리에 닿으셨다.

어리석어 깨끗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이 진실한 법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한다면
그는 구지 겁 동안 많은 고통을 겪으며
항상 쉼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가타를 말했을 때 3만 명의 천자가 무생법인을
얻었고, 1만 8천 명의 비구가 받아들이지 않게 된 까닭에 번뇌의 마음에서 모두 해탈하였으며, 곧 땅이 갈라지면서 승의보살은 죽어 대제규(大啼叫)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업장 때문에 백천 구지 겁 동안 대니리(大泥犁:대지옥)에서 온갖 극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그런 뒤에 7백만 생(生) 동안 항상 비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백천 구지겁 동안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이름도 듣지 못하였고, 그 후에 여래를 만나 그 가르침 가운데 출가하였으나 기뻐하지 않았으며, 6백만 생 동안 출가한 뒤에 계를 파하고 환속하였습니다. 그는 남은 업장 때문에 많은 백천 생 동안 어둡고 둔한 근기로 지냈습니다.
그 시절의 희근 비구 보살마하살이라는 설법자는 지금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깨달아 현재 머물며 설법하고 계십니다. 동쪽으로 백천 구지의 불국토를 지나 보화세계(寶畵世界)에 계신 밀무구폐일광복덕위치왕(密無垢蔽日光福德威熾王)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이시며, 현재도 설법하고 계십니다.
그 시절 승의 비구라던 설법자는 바로 저입니다. 그때 설법하는 사람이 되어 이름을 승의 비구라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미처 이 법도(法道)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을 받고, 고통이 없는 가운데 고통을 분별하고 고통에 전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승을 일으킨 자이건 독각승을 일으킨 자이건 성문승을 일으킨 자이건 이와 같은 업장을 짓고 이와 같은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어떤 종류의 법도 헐뜯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저 바른 법도 역시 헐뜯거나 버려서는 안 되며, 또한 어느 한 곳에서도 성냄의 장애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그때 너는 그 가타를 듣고 어떠한 훌륭한 일이 있었느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가타를 들은 인연으로 저 업장에서 일어나 곳곳으로 치달리며 두루 유전(流轉)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모든 곳에서 매우 깊은 인(忍)을 얻고 확고한 인을 얻어서 심오한 법을 잘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누구의 위신력으로 이와 같이 멀고 먼 과거에 지은 업장을 기억하는 것이냐?”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이 만약 사유하거나 염(念)하거나 염을 수순한다면 그것은 모두 여래의 위신력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다 여래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여래의 10력(力)을 얻는다면 이것을 들은 자와 그 양(量)이 하나로 평등할 것이다. 만일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인(忍)을 얻는다면 이것을 들은 자와 그 양이 하나로 평등할 것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대로라면 이 법의 근본[法本]을 들은 과보[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만수시리야, 네가 말한 대로 이 법의 근본을 듣는 과보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여래가 기설(記說)하지는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힘써 수행하지 않고, 훌륭한 장부(丈夫)가 아닌 자들이 이것을 듣는다면 분명 믿고 이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수시리야, 이것이 바로 모든 법에 들어가는 문(門)이다.”
이때 만수시리동진과 자씨(慈氏)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법의 근본을 머물게 하셔서 말후세(末後世)의 후오백세(後五百歲)에 법을 전할 때 널리 여러 사람의 손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시고, 마라(摩羅:악마)나 마라의 몸을 가진 천신들이 틈을 엿볼 수 없게 해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이 법의 근본을 주지하시기 위해 좌우를 살펴보셨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세존[無間世尊]을 관찰하시고 나자
그때 시방의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불국토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그 사이에 세존께서는 곧 이 법의 근본을 주지하셨고, 나머지 모든 불세존께서도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 안에서 또한 이 법의 근본을 주지하셨다. 이 법의 근본을 말씀하셨을 때 시방의 항가하 모래알보다 배나 많은 저 중생들이 무생법인을 얻었으며, 그보다 다시 배나 더 많은 중생들이 법을 증득하고 보았다. 하물며 성문승과 독각지(獨覺地)와 무학지(無學地)에 머물게 된 자들이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이때 명자(命者) 아난타(阿難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의 근본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제가 어떻게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타야, 이 법의 근본의 이름은 ‘설제법부전(說諸法不轉)’이다. 이 이름을 마땅히 지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만수시리동진은 환희하였으며, 자씨(慈氏)보살마하살ㆍ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마하살ㆍ연화유희지통(蓮華遊戲智通) 천자와 그 밖의 여러 천자들과 아울러 대보살의 무리와 모든 하늘ㆍ사람ㆍ건달바ㆍ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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