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제법본무경(佛說諸法本無經) 중권
불설제법본무경 중권
수 사나굴다 한역
최윤옥 번역
이때 만수시리동진(曼殊尸利童眞:문수사리동자)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업장(業障)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떻게 하여야 업장이 깨끗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법이 업(業)도 없고 보(報)도 없는 줄을 알면 그의 업장은 깨끗하게 될 것이다. 또 만수시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탐욕의 경계[欲際]에서 실제(實際)를 본다면 그는 업장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성냄의 경계와 어리석음의 경계에서 바로 실제를 본다면 그는 업장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또 만수시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중생이 바로 열반계(涅槃界)임을 알면 그는 업장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만수시리야, 그는 순응하여 봄으로써 업장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만수시리야, 4성제(聖諦)를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해 네 가지 전도된 된 마음[四倒心]이 있는 중생은 참되지 못한 유전(流轉)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만수시리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중생은 어떻게 견해를 가지게 되고, 유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중생은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집착하기 때문에 유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수시리야, 나와 남을 보게 되면 그들에게 업행(業行)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수시리야, 범부와 어린아이 같은 중생들은 들은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이 결국에는 멸도(滅度)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와 남에 대해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고 난 뒤에는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업을 짓는다. 그들은 없는 것에 대하여 취착함이 있어 나는 탐욕스럽다, 나는 성낸다, 나는 어리석다고 분별한다.
그들이 만일
여래의 가르침 속에서 출가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계(戒)를 갖추었고, 나는 청정하게 행동한다. 나는 유전을 뛰어넘을 것이고, 나는 열반을 얻을 것이며, 나는 고통을 해탈할 것이다.’
그들은 또 ‘이 법은 선(善)이고 이 법은 불선(不善)이며, 이 법은 유루(有漏)이고 이 법은 무루(無漏)이며, 이 법은 알아야 하고 이 법은 끊어야 하며, 이 법은 증득해야 하고 이 법은 닦아야 한다’고 분별한다. 말하자면 고(苦)는 마땅히 알아야 하고, 집(集)은 마땅히 끊어야 하며, 멸(滅)은 마땅히 증득해야 하고, 도(道)는 마땅히 닦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또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행은 고통이며, 모든 행은 불타는 것이므로 나는 모든 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분별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생(生)을 관찰할 때, 곧 화합된 생각에 싫어하고 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런 생각이 스쳐간 뒤에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이 고통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 모든 법이 알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집(集)을 끊어야 한다.’
그들은 모든 법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그들은 ‘이 집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모든 법이 부끄럽고 싫은 것이라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멸(滅)을 증득해야만 하고, 도(道)를 닦아야만 한다.’
그런 법을 분별하고 난 뒤에 다시 멸(滅)을 알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증득해야 할 그 멸이다.’
만일 이 모든 법이 증득해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도를 닦아야만 한다.’
그들은 곧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모든 법을 사유하고 사마타(舍摩他)를 얻어 사념(思念)을 없앤다. 그들은 사마타를 얻는 까닭에 모든 법 가운데서 그 마음이 저절로 활짝 열려 시원하고 윤택해진다.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며 쾌락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더욱 생겨나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다.’
스스로를 아라한(阿羅漢)이라 일컬으며 그렇게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죽을 무렵 생(生)을 받는 곳을 보고는 곧 부처님의 보리(菩提)에 의혹과 바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마음이 의혹에 빠진 까닭에 죽은 후에는 대니리야(大泥犁耶‘:大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남이 없는
일체법 가운데서 분별에 떨어졌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에 대해 헐뜯고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 만수시리동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4성제(聖諦)를 보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만약 모든 행이 남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그는 곧 고(苦)를 아는 것이고, 만일 모든 행이 일어남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그는 곧 집(集)을 끊은 것이며, 만일 모든 법이 끝끝내 멸도(滅度)한 것임을 본다면 그는 곧 열반을 증득한 것이고, 만일 모든 법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그는 곧 도(道)를 닦는 것이다.
만수시리야, 만약 이와 같이 4성제를 본다면, 그는 이 법은 선이고 이 법은 불선이며, 이 법은 알아야 하고 이 법은 끊어야 하며 이 법은 증득해야 하고 이 법은 닦아야 한다고 분별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고통은 알아야만 하고, 번뇌는 끊어야만 하며, 열반은 증득해야만 하고, 도는 닦아야만 한다고 분별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모든 범부와 어린아이가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든 자리 그 가운데에서 저 모든 법이 생김이 없고 존재하지 않으며 참되지 못하고 분별에 얽매인 것임을 본다면, 이와 같이 보고 난 뒤에 그들은 법 가운데에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을 것이며, 모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이 모두 허공의 자성과 같음을 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삼계(三界)에서 집착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모든 삼계에서 그들은 무생(無生)을 보고, 모든 삼계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음을 볼 것이다. 또한 모든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에 대해서 그것이 불꽃과 같음을 볼 것이며, 저 탐욕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임을 보고, 성냄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임을 보며, 어리석음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법의 이와 같은 자성(自性)을 보고 곧 모든 중생 가운데서 사랑과 증오를 멀리 벗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법을 사랑스럽다거나 증오스럽다고 보지 않아 마음이 허공처럼 평등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佛)ㆍ법(法)ㆍ승(僧)도 보지 않는다. 그들이 이미 모든 법을 보지 않는다면 곧 법 가운데서 의심할 만한 곳이 없을 것이며, 이미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면 곧 취함이 없을 것이며, 이미 취함이 없다면
태어남이 없어서 곧 열반하게 될 것이다.
만수시리야, 상좌(上座) 수부제(須浮帝:須菩提)는 이와 같이 법을 알기 때문에 여래의 발에 예배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자신조차도 보지 않는데 하물며 어찌 여래를 보겠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때 만수시리동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4념처(念處)를 보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미래에 비구가 있을 것이니, 그는 청정하지 못한 몸[受] 가운데서 몸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여 염처(念處)를 설할 것이며, 생겼다 사라지는 느낌[受] 가운데서 느낌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여 염처를 설할 것이며, 마음[心]이 곧 생기는 법이고 사라지는 법임을 보고 이 마음 가운데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여 염처를 설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할 것이다.
‘만약 원만하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법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 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법(法) 가운데서 법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여 염처를 설할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만수시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4념처는 또 어떻게 훈습하고 수행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럴 필요 없다. 만수시리야, 여래가 설하는 특별한 의미는 알기 어렵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대덕(大德)이신 세존이시여, 염처를 훈습하고 수행하는 일을 꼭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만약 몸을 허공과 평등하다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몸 가운데서 몸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는 염처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안과 밖, 둘 사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느낌 가운데서 느낌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는 염처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마음이란 오직 이름으로 헤아리는 것만 있을 뿐임을 안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서 마음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는 염처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모든 선법과 불선법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법 가운데서 법에 대한 관찰을 수순하는 염처이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이
4념처를 관찰해야만 한다.”
만수시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성스러운 8분도(分道)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평등하지 않음이 없고 둘이 없으며 또한 둘을 짓지도 않는다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분별하지 않고, 갖가지로 분별하지도 않으며 두루 분별하지도 않으니 보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분별[正分別]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말로 할 수 없고 언설이 평등하니 잘 훈습하고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말[正語]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짓는 것도 없고 짓는 자도 없으니 짓는 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업[正業]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을 모으지도 흩어버리지도 않으며 목숨을 유지하는 생활에 바르게 머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생활[正命]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에 대해서 일으키지도 않고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정진[正精進]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하는 업(業)을 이미 벗어나 추억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생각[正念]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본성(本性)이 원래 정(定)에 들어 있어서 산란함도 없고 반연(攀緣)도 없으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바른 정[正定]이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이 성스러운 8분도를 보아야 한다.”
만수시리가 다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5근(根)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생기지 않으니 본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임을 믿는다면, 이것이 바로 믿음의 근[信根]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 가운데서 마음을 일으키거나 없애지 않으니, 가깝다는 생각과 멀다는 생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정진의 근[精進根]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반연하는 성품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생각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생각의 근[念根]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니,
허깨비[幻]와 같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선정의 근[定根]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생겨남을 벗어나고 어리석음[無智]을 벗어났으니 본래 성품[本性]이 공(空)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바로 지혜의 근[慧根]이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이 5근을 보아야 한다.”
만수시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7각분(覺分)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부천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이 자성이 없음을 보고 생각을 짓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염각분(念覺分)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을 선택한 뒤에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를 얻지 않으니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택법각분(擇法覺分)이다. 만수시리야, 삼계(三界)를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세계[界]라는 생각의 허물어짐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정진각분(精進覺分)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행 가운데서 기쁨에 얽매이지 않으니 기쁨도 기쁘지 않음도 무너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희각분(喜覺分)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모든 법 가운데서 그 마음이 멈추고 쉰다면 이것이 바로 지식각분(止息覺分)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과 마음은 얻을 수 없으니 깨달음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다면 이것이 바로 정각분(定覺分)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 가운데서 의지하지 않고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보지 않고 버림[捨]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사각분(捨覺分)이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이 7각분을 보아야 한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이 4성제와 4념처와 성스러운 8분도와 5근과 7각분을 보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건넌 사람[度者]이라 할 것이며, 저쪽 언덕에 이른 사람[到彼岸者]이라 할 것이며, 육지에 도달한 사람[到陸地者]이라 할 것이며, 안온함을 얻은 사람[得安隱者]이라 할 것이며, 두려움 없음을 얻은 사람[得無畏者]이라 할 것이며, 번뇌를 털어버린 사람[抖擻塵者]이라고 할 것이며, 가진 것이 없는 사람[無所有者]이라 할 것이며, 욕심과 번뇌가 없고 장애가 없는 사람[無欲惱無障礙者]이라 할 것이며, 아라한(阿羅漢)이라 할 것이며, 번뇌를 다한 사람[盡漏者]이라 할 것이며,
해야 할 일을 하여 일을 다 마친 사람[作所應作所作已辦者]이라 할 것이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사람[離重擔者]이라 할 것이며, 자신의 이익을 얻은 사람[得自利者]이라 할 것이며, 결박을 없앤 사람[盡有結者]이라 할 것이며, 나아가 마음이 언제나 자재하여 훌륭한 저편 언덕에 오른 사람[心皆自在得勝彼岸者]이라고 할 것이다.
사문(沙門)이라고 할 것이며, 바라문(波羅門)이라 할 것이며, 건널 수 있는 사람[能度者]이라 할 것이며, 비타가를 건넌 사람[度鞞陀迦者]이라 할 것이며, 수로제의야자(輸嚧帝疑夜者)라고 할 것이며, 불(佛)이라고 할 것이며, 불자(佛子)라고 할 것이며, 사가자(奢迦子)라고 할 것이며, 가시를 밟아 없앤 사람[踏破刺棘者]이라 할 것이며, 구덩이를 없앤 사람[除却塹者]이라 할 것이며, 구덩이를 건넌 사람[度塹者]이라 할 것이며, 화살촉을 뽑아버린 사람[拔箭鏃者]이라 할 것이며, 뜨거운 번뇌를 벗어난 사람[離熱惱者]이라 할 것이며, 비구(比丘)라 할 것이며, 성자(聖者)라 할 것이며, 만족당(滿足幢)이라 할 것이다.
만수시리야, 이와 같은 인(忍)을 모두 갖춘 비구는 청정한 보시[淨施]를 할 수 있어 모든 하늘과 세상의 공양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수시리야, 비구가 백성들의 음식을 헛되이 먹고 싶지 않다면, 마라(摩羅:악마)를 쳐부수고 싶다면, 유전(流轉)함을 뛰어넘고 싶다면, 순조로이 열반에 이르고 싶다면, 고통을 해탈하고 싶다면, 모든 하늘과 세상이 청정하게 보시하는 복전(福田)이 되고 싶다면 이 법 가운데에서 열심히 익혀 상응해야만 한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3만 2천 명의 천자(天子)가 법 가운데에서 견해를 증득하였다. 그들은 만다라화(曼陀羅華)와 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를 부처님께 뿌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덕 세존이시여, 이 법을 말씀하셨을 때 귀로 들은 사람은 곧 여래의 가르침 가운데서 훌륭하게 출가할 것입니다. 하물며 들은 뒤에 믿음과 이해를 인연하여 참되게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 중생들이 만일 이 말씀을 듣게 된다면 증상만(增上慢)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때 만수시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 세존이시여, 다라니구(陀羅尼句)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 다라니는 보
살로 하여금 집착 없는 변재를 얻게 할 것이며, 한 소리[一聲] 가운데 두려움이 없게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서 모든 법이 생겨나고, 모든 법은 한 모습의 도[一相道]임을 믿고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 만수시리동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그런 인연으로 너는 잘 들어야 한다. 지금 말하는 법문은 계라구(鷄羅句)와 종자구(種子句)라고 하니, 이 법문으로 인하여 모든 보살이 모든 법 가운데에서 밝게 비춤을 얻고 속히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인(忍)을 얻을 것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무엇을 계라구와 종자구의 법문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의 한마음[一心]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의 마음에는 어떤 반연도 없으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의 마음은 모두 동일한 양(量)이니, 이것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의 마음은 허공의 양과 같으니, 집착 없는 평등한 행(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이 곧 동일한 중생이니, 이것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중생이 오직 그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니, 끝내 생기지도 않고 이름을 멀리 벗어났으며 같고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탐욕이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鷄羅句)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탐욕은 법계의 성품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요하지 않으니 본성이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성냄이 바로 금강구(金剛句)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금강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성냄은 깨뜨릴 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으니, 마치 저 금강(金剛)을 깨뜨릴 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 역시 다 깨뜨릴 수 없고 끊을 수도 없으니, 모든 일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금강구이다. 만수시리야, 어리석음이 바로 지구(智句)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지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이 모든 법은 끊임없이 지혜를 없애고 무지(無智)를 멀리 벗어나니, 마치 저 허공이 지혜를 모두 갖추는 것도 아니고 무지를 모두 갖추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지혜를 모두 갖추는 것도 아니고 또한 무지를 모두 갖추는 것도 아니니, 지혜와 무지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본성(本性)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지구이다. 만수시리야, 색(色)이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마치 저 천제(天帝)의 대궐문이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것은 잘 머물러 있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법계에 머무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감도 옴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또한 다른 것에게 행을 짓지도 않으니, 머묾이 없는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수(受)가 바로 적정구(寂靜句)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적정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느낌[受]의 본성은 고요하여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동쪽도 남쪽도 아니고 서쪽도 북쪽도 아니며, 아래쪽도 아니고 위쪽도 아니며 시방(十方) 안이 아니다.
만수시리야, 만일 즐거운 느낌[樂受]이 안에 있다면 중생은 한결같이 즐거워야만 할 것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괴로운 느낌[苦受]이 안에 있다면 중생은 한결같이 괴로워야만 할 것이다. 만수시리야,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안에 있다면 중생은 한결같이 어리석어야만 할 것이다.
만수시리야, 그러므로 모든 느낌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동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니며, 아래쪽도 아니고 위쪽도 아니어서 시방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 등은 초목이나 벽(壁)과 비슷하니 본성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적정구이다. 만수시리야, 상(想)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분별이 생각[想]을 일으키지만 실제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빈주먹[空拳]과 비슷하고 불꽃의 자상(自相)과 같으니, 본성이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행(行)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는 까닭에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수(數)는 이미 벗어나 있어 수가 없고 수를 초월하였으니, 마치 파초(芭蕉)의 알맹이와 같다. 만수시리야, 파초의 알맹이와 같아 끝내 스스로 없는 것이니, 얻을 수 없으므로 본성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본성이 스스로 벗어나 있고 이름 역시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식(識)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식은 허깨비[幻]의 모습과 같아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도[出] 않으며, 공(空)이고, 무상(無相)이고,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상모(無狀貌)이니, 허공에 다섯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빛깔[色]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빛깔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만수시리야, 마치 그림자가 비록 보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빛깔이 비록 보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오직 눈을 미혹시키고 마음을 미혹시킬 뿐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소리[聲]가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온갖 종류가 없고 온갖 종류의 모습도 없다. 만수시리야, 모든 소리는 둘이 없으며, 모든 말의 도[語道] 역시 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냄새[香]가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냄새가 없으며 본성(本性)이 완고하고 둔하여 허공과 평등하니, 코와 냄새와 냄새 맡는 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맛[味]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맛의 세계는 생각할 수 없으며, 맛은 인식할 수 없고 식을 멀리 벗어나 있으니, 본래 자성이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촉감[觸]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접촉할 수 없으니 허공처럼 벗어나 있기 때문이며, 몸을 잘 무너뜨리기 때문이며, 촉감이 지음[作]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며, 촉감 스스로가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법(法)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마음이 없고 마음을 벗어나 있으며, 자성은 이루어지지 못하여 이름을 벗어나고 모습을 벗어나 있으니, 법계의 본성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흙[地]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단단함도 없고 부드러움도 없는데 허망하게 화합한 것을 사람들이 단단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물[水]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습기가 없고 섞임도 없으며 미끄러움도 없으니, 인타라망의 광명[炎網]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불[火]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따뜻함도 없고 뜨거움[熱]도 없으며 그것을 이미 버리고 벗어났다. 자성은 고요하여 실체도 없고 생김도 없는데 전도(顚倒)되어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바람[風]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집착도 없고 장애가 없으며 급히 가는 것[急行]도 없고 자성(自性)도 없으니, 바람의 길[風道]을 이미 초월해 불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부처가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깨닫는 자를 만들지 않고 깨닫지도 않으며 깨달음을 수순하지도 않고 깨달음과 평등하지도 않으니, 깨달음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법이 바로 종자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종자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끊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아 끊어짐을 벗어나고 파괴를 벗어났으며,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 이름을 벗어나고 모습을 벗어났으며 또한 자성(自性)도 없으니, 말의 길[語道]을 이미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종자구이다. 만수시리야, 승가[僧]가 바로 계라구(鷄羅句)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머물지 않는 성중(聖衆)은 법계(法界)의 경계와 같으니 지계(持戒)와 파계(破戒)가 평등하기 때문이며, 선정과 산란함이 평등하기 때문이며,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평등하기 때문이며, 해탈과 번뇌가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 가운데 편히 머물 곳이 없으니 처소와 처소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의 경계가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마치 허공의 경계와 같아 생각할 수 없는 경계이며, 모든 경계는 끊어져 어떤 사물도 없다. 그 가운데가 공허하게 끊어져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반연이 없으니, 이것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머무는 곳이 없으니,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볼 수 없으니 물질이 없어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끊을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고 해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을 취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평등하게 진여(眞如)로 돌아가고 평등하게 법계와 합한다. 그것은 취착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것은 버리고 떠나지도 않는다.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으니 모든 바람이 이미 끊어졌고, 본성이 고요하여 허공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때[垢]가 없고 소유(所有)도 없으며, 청정하게 빛을 드러내어 가장 훌륭하고 청정하다. 허공처럼 청정하기 때문이며, 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머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일이 없어 고요하니, 머물러 지킴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에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 계라구이다.”
만수시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계라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배울 것이 없으니 그것을 배우지도 말고, 닦지도 말며, 사유하지도 말고, 염(念)하지도 말며, 머물지도 말고, 일으키지도 말며, 행하지도 말고, 끊어버리지도 말며, 증득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드러내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 이름을 시설하지도 말고, 열지도 말고, 천박하지도 말며, 일으키지도 말고, 없애지도 말며, 씻지도 말고, 더럽지 않게 하지도 말며, 분별하여 말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말하지도 말며, 반연하지도 말고, 잡아 취하지도 말며, 벗어나지도 말고, 물리치지도 말며[不棄], 버리지도 말라[不捨]. 왜냐하면 만수시리야, 모든 법은 끝내 이미 벗어나 있고 본성은 취하지 않아 항상 물리치고 버리니, 그것은 지혜로움으로 행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음으로 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계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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