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제법본무경(佛說諸法本無經) 상권
불설제법본무경(佛說諸法本無經) 상권
수(隋) 사나굴다(闍那崛多) 한역
최윤옥 번역
다음에 바가바(婆伽婆)께서는 왕사성(王舍城)을 유행하시며 취취산(鷲聚山)에서 대비구(大比丘) 5백 명과 보살 9만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이를테면 장엄영식보살마하살(莊嚴瑩飾菩薩摩訶薩)ㆍ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마하살ㆍ무애염정광덕위왕(無礙焰淨光德威王)보살마하살ㆍ미류산정음왕(迷留山頂音王)보살마하살ㆍ애소무구광(愛笑無垢光)보살마하살ㆍ출광폐일월광(出光蔽日月光)보살마하살ㆍ최승무구지관(最勝無垢持冠)보살마하살ㆍ출위연화개신(出威蓮華開身)보살마하살ㆍ범자재음(梵自在音)보살마하살ㆍ상희사자왕의(象戲師子王意)보살마하살ㆍ금광정무구위(金光淨無垢威)보살마하살ㆍ유연촉신(柔軟觸身)보살마하살ㆍ금장엄상개신(金莊嚴相開身)보살마하살ㆍ백광휴마라력(百光休摩羅力)보살마하살ㆍ적근위의적행(寂根威儀寂行)보살마하살ㆍ지최상왕(地最上王)보살마하살ㆍ천언사명음(天言辭鳴音)보살마하살ㆍ법력자재적정유행(法力自在寂靜遊行)보살마하살ㆍ덕위무구신(德威無垢身)보살마하살ㆍ만수시리(曼殊尸利)보살마하살 등의 보살들이 9만 2천 보살의 우두머리였다.
이때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마하살이 이 보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여
욱다라승가(郁多羅僧伽:上衣)를 한쪽 어깨에 올린 후에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께 합장하고서 곧 가송(歌頌)으로 부처님께 이치[義]를 여쭈었다.
나[我]도 없고 수명[命]도 없고 육법(育法)도 없다고 하시니
무변명칭(無邊名稱)이시여,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적정하고 매우 고요하며 항상 적연(寂然)하나니
이와 같이 무리 중에서 가장 으뜸인 분이시여.
모든 견(見)이 왜 그대로 보리(菩提)이며
교만과 성냄과 질투와
탐욕의 자체[欲體]가 왜 그대로 보리인지
말씀해 주소서. 도사(導師)시여, 무변칭(無邊稱)이시여.
열반(涅槃)이 없다면 번뇌도 없다고 하시니
행계(行界)가 왜 그대로 보리이며
그 본체[體]가 둘이 아니고 부처님 역시 그렇다고 하시니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크게 자비로운[大悲] 분이시여.
모든 법이 왜 필경에 해탈이고
열반의 모습과 비슷하고 해탈과 같으며
왜 다시 허공과 같아
장애도 없고 집착도 없고 묶이는 곳도 없습니까?
가라빈가(迦羅頻伽)의 범천음(梵天音)이시여
무구광명(無垢光明)의 금광색(金光色)이시여
청정광음(淸淨光音)의 무변덕(無邊德)이시여
끝내 번뇌가 없는 법을 설해 주소서.
왜 모든 개(蓋)가 보리와 같으며
왜 탐욕이 곧 보리의 본체입니까?
법(法)과 비법(非法)의 도리[道]가 왜 하나이며
티 없이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습니까?
만약 수(數)도 없고 무수(無數)도 없다면
이미 멸도(滅度)한 법이란 무엇이 그것이며
보리가 만일 없고 집착하는 자도 없다면
변지(遍智)는 왜 또 없다는 것입니까?
지음[作]이다, 지음이 아니다 라는 다툼이 없고
취(取)하거나 취하지 않거나 모두 자체[體]가 없으니
중생이 그 속에 있었던 적 없고
법(法) 중에 장애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는 계율도 없고 인내도 없으며
계를 무너뜨림[破戒] 또한 어느 곳에도 없으며
선정과 지혜도 이와 같이 없고
무지(無智)와 지혜도 얻을 것 없습니다.
왜 이 법은 깨끗하여 더러움 없고
존재하는 것 없어 허공과 같습니까?
마음은 한 때[一時]도 얻을 곳 없는데
무심(無心)이 어찌하여 이 법입니까?
이 가운덴 지견(知見)이 존재하는 것 없고
염하고 닦음도 증득함도 없으며
이 가운덴 또한 끊을 것도 없나니
중생은 왜 허공계와 같습니까?
이 가운덴 법체가 바로 일행(一行)이고
이 가운덴 생김도 없고 유전함도 없으며
일으키고 생김도 존재하지 않나니
이와 같은 법, 승인(勝人)께서 말씀해 주소서.
이 가운덴 성문[學]도 없고 아라한[羅漢]도 없고
연각(緣覺)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보리를 구하는 자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법은 옴[來]도 없고 감[去]도 없습니다.
이 가운덴 머묾도 없고 처소도 없으며
또한 감도 없고 옴도 없으니
옴도 없고 감도 없는 법이 또한 어찌하여
저 수미산과 같이 머물며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 가운덴 상(想)도 없고 색(色)도 없으니
색의 자체[色體]가 왜 곧 보리입니까?
색과 보리가 둘이 아니니
이와 같은 법체를 승인(勝人)께서 말씀해 주소서.
이 가운데 공(空)도 없고 무상(無相)도 없으며
번뇌의 집착[染着]도 없고 번뇌의 집착 없음도 없으니
명(名)과 무명(無名)의 법이란 무엇이며
도(道)를 말함이 왜 산의 메아리 같습니까?
이 가운덴 생김도 없고 고뇌하는 자도 없으며
이 가운덴 또한 무생도 없으며
이미 없어짐도 없고 또한 막는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은 왜 일행(一行)입니까?
이 가운덴 하늘도 없고 용(龍)도 없으며
긴나라와 야차 등도 없고
이 가운덴 지옥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갈 곳도 중생도 없습니다.
도사(導師)의 최승법(最勝法)을 말하건
온갖 외도들의 악한 뜻을 말하건
이 두 가지가 왜 일행(一行)이며
모든 문자도 이와 같이 하나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때 세존께서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을 칭찬하시어 말씀하셨다.
“매우 훌륭하고 매우 훌륭하도다. 참으로 드문 선가자(善家子)로구나. 네가 지금 물은 것은 모든 세상에서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모든 하늘 등의 세상에서도 미혹되기 쉬운 것들이다.
선가자야, 너는 지금 이에 대한 인연을 물을 필요 없다. 선가자야, 이는 초업(初業)보살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공견(空見)ㆍ무상견(無相見)ㆍ무원견(無願見)ㆍ무생견(無生見)ㆍ무유견(無有見)ㆍ
무상모견(無相貌見)ㆍ열반견(涅槃見)ㆍ불타견(佛陀見)ㆍ보리견(菩提見)은, 선가자야, 초업보살 앞에서는 이 법을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선근(善根)이 끊어지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보리(佛菩提)에서 곧 비도(非道)를 행하여 만약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지면 여래가 어떤 뜻으로 이 법을 말하셨는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자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말씀해 주십시오, 바가바(婆伽婆)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수가다(修伽多)시여. 세존이시여, 만약 미래에 어떤 보살마하살이 공견이나 무상견이나 무원견이나 무생견이나 무유견이나 무상모견이나 열반견이나 불타견이나 보리견을 공(空)이나 무상(無常)이라는 말의 경계에서 말에 염착(染者)하여 그 문자가 청정하다고 하거나 도(道)를 말하는 것이 수승하다고 하거나 명예와 이익[名利]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여래께서 말씀하신 이 이름[名字]이 없는 법을 듣고 나면 모든 견해를 버리고 모든 법이 바로 한 모습의 도[一相道]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중생이 믿는 것과 같이 그 믿음에 맞게 설법하시면, 그들은 오묘한 방편 가운데에서 잘 배울 것입니다.
비록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알아 덜고 줄이라고 말씀하시더라도 모두들 그것이 청정하다고 믿지 않을 것이며, 비록 무리 속에서 지내는 허물을 말씀하시더라도 모든 법이 다 멀리 벗어난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비록 홀로 빈틈없고 잡념 없이 지내는 것을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역시 그것을 청정하다고 믿지 않을 것이며, 비록 보리심을 내는 것을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마음의 자체 성품[自性]이 보리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비록 수다라(修多羅)를 널리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모든 법이 곧 넓다는 것을 믿을 것이며, 비록 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성문과 독각과 부처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비록 다나(陀那:布施)를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나의 평등함을 잘 통달할 것이며, 비록 시라(尸羅:持戒)를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시라의 본성을 잘 통달할 것이며, 비록 찬제(羼帝:忍辱)를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완전한
소멸인 무생법(無生法) 등을 잘 통달하고 볼 것입니다. 비록 비리야(毗梨耶:精進)를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모든 법을 잘 택하여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비록 제야나(第耶那:禪那)의 삼마지(三摩地)와 삼마발제(三摩撥帝)를 찬탄하여 말씀하시고, 삼마지를 말씀하시어 백천 구지(俱致)의 삼마지의 방편[三摩地門]을 나타내시더라도 본성(本性)이 삼마반나(三摩般那)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비록 반야(般若)의 수천 가지 모습을 찬탄하여 말씀하시더라도 지혜와 무지(無智)의 본성 자체를 잘 통달하고, 모든 법을 잘 선택할 것입니다.
탐욕의 허물을 꾸짖어 말씀하시더라도 번뇌에 물들만 한 어떤 법도 보지 않을 것이며, 성냄의 허물을 꾸짖어 말씀하시더라도 미워할 만한 어떤 법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잘못을 꾸짖어 말씀하시더라도 모든 법이 어리석음을 벗어나 장애가 없음을 믿을 것이며, 비록 중생을 위해 니리(泥犁:地獄)와 축생과 염마(閻摩)의 세계 등의 허물을 드러내 말씀하시더라도 지옥과 축생과 염마의 세계 등을 역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중생의 믿음과 같이, 믿음에 따라 설법해 주시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행[一行]임을 믿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空)을 믿고, 무상(無相)을 믿고, 무원(無願)을 믿고, 무생(無生)을 믿고, 무소유(無所有)를 믿고, 무상모(無相貌)임을 믿을 것입니다.
대덕(大德)이신 세존이시여,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방편구(方便句)를.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나 초승발행(初乘發行) 보살마하살 등에게는 모두 그들의 경지가 아니겠지만, 일행(一行)에 대한 믿음이 깊은 보살마하살 등은 예외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리고 나자 세존께서 다시 사자유보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가자야, 그렇다면 너는 마땅히 잘 들어 바르게 기억하고 잘 헤아리도록 하라. 너를 위하여 연설하리라.”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이 말씀드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르게 듣겠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가타(伽他:偈頌)로 말씀하셨다.
만일 묘한 보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탐욕의 허물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법이 항상 탐욕의 자체 성품[自性]이니
만일 이것을 안다면 존귀함[勝尊]을 얻으리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얻을 수 없고
이미 얻은 자도 지금 얻는 자도 없으며
모든 법은 다 허공과 같으니
만일 이를 안다면 존귀함을 얻으리라.
보고 보지 않는 것이 항상 하나의 행[一行]이요
승(僧)과 비승(非僧) 두 가지가 곧 하나로 평등해
그 가운덴 부처도 없고 묘한 법[妙法]도 없으니
이것을 알면 세간의 지혜[世智]를 얻으리라.
마치 장부(丈夫)가 꿈속에서
보리를 얻은 뒤 중생을 가르치는 것처럼
그 가운덴 도(道)도 없고 중생도 없으니
이와 같이 자성(自性) 그대로가 곧 모든 법이니라.
보리에 앉은 곳 얻을 수 없으니
그건 얻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네.
밝음[明]과 어둠[無明] 둘이 바로 한 모습이니
이를 안다면 도사(導師)가 되리라.
중생의 성품 말하자면 곧 보리이고
보리의 성품이 곧 모든 중생이네.
중생과 보리가 둘이 아니니
이를 안다면 사람 중 으뜸이 되리라.
장부가 허깨비[幻]를 잘 깨닫는 것처럼
저 허깨비가 변하여 끝없이 많은 종류로 나타나지만
그 가운데 나타난 것은 끝내 없는 것이니
중생을 미혹시키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탐욕과 성냄이 허깨비와 같으며
이러한 모든 번뇌 각기 허깨비와 같으나
범부들 모두 내가 성냄에 물들었다 생각하니
저 어리석음이 마음을 어지럽혀 악한 세계[惡趣]로 나아간다.
그 속에는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고
그 속에는 또한 번뇌와 다른 것도 없는데도
허깨비를 법체(法體)와 같다고 분별한 뒤
이와 같이 범부들 번뇌에 타는구나.
만일 번뇌가 없으면 중생도 없고
그 가운덴 부처도 없고 다음 생(生)에 받을 몸도 없는데
이 무생법(無生法)을 분별한 뒤에
내가 부처가 되리라고 범부들 생각한다.
이미 부처도 없고 불법도 없으며
중생 역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으니
만약 법체가 허공 같은 줄 안다면
그는 속히 사람 중 으뜸이 되리라.
보리를 구하면 그에게 깨달음은 없으리니
그는 보리와 하늘과 땅만큼 멀어질 것이다.
법체가 허깨비와 같은 줄 안다면
그는 속히 사람 중 으뜸이 되리라.
만약 계(戒)를 분별한다면 그에게 계는 없으리니
지계(持戒)를 본다면 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계와 파계 두 가지가 바로 하나의 모습이니
이를 안다면 도사(導師)가 되리라.
마치 장부가 꿈속에서
욕망을 즐기면서 환희하는 것과 같나니
어리석음으로 어지럽게 분별해 여인을 그리지만
그 가운데 여인은 항상 없었다.
파계와 지계 꿈의 성품과 같은데
범부들 이것을 두 종류라 분별하지만
그 가운덴 계도 없고 파계도 없으니
이를 안다면 도사(導師)가 되리라.
이름에 집착하는 이것은 범부의 깨달음[凡夫覺]이니
그는 소리[聲]의 자성(自性)을 알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이 이름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면
그는 수승하고 묘한 인(忍)을 얻으리라.
모든 중생들 부처되기를 서원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말들 하지만
청정하다는 말에 머물고 수행이 없으니
그것은 바로 보리도(菩提道)를 버리는 것이다.
위의(威儀) 가운데 어긋남을 취하고
말을 좋아하고 말을 중히 여기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네.
청정하다고 말한다고 보리를 깨닫는 것 아니니
그들은 법의 자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공법(空法)을 항상 드러내 말하더라도
싸우기 좋아하고 나쁜 생각이 생긴다면
어찌 보리와 불법이 있으리오.
그런 자는 성내고 지혜 없는 자라 하리라.
성냄과 인욕 두 가지는 곧 하나의 모습이니
이를 아는 자는 분별하지 않지만
중생의 자성을 그들은 알지 못해
온갖 잘못 저지르니 이것이 범부의 지혜이다.
중생을 내가 모두 사랑한다고 스스로 말하며
나는 부처[勝尊]가 되어 중생을 해탈시키리라 하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그는 곧 성을 내며
악한 마음 가지고 말도 하지 않는구나.
항상 싸우기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찾으며
그러면서도 또 남들에겐 인내하는 마음을 찬탄하고
또한 모든 법이 다 공(空)이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높이고 남의 잘못 찾는다.
음식에 탐착하는 지혜 없는 자
밤낮으로 탐욕스러운 일만 생각하면서
그들은 마을에 들어와서는
내가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리라고 말한다.
모든 중생 가운데에서 나는 자비로운 마음을 굴리며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고 하면서
이런 부류들 비록 법체(法體)를 드러내 말하긴 하지만
집착하고 해치려는 마음으로 항상 나쁜 생각을 품는다.
그러나 나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네.
자비로운 마음 가졌으면서 또 해치려는 마음 있는 것
제각기 함께 어울려 부수고 상처 낸 뒤에
아미다유국(阿彌多由國:아미타정토)을 구하는구나.
항가하(恒伽河:恒河) 모래알처럼 많은 세월에
헐뜯음과 욕됨과 꾸짖음을 항상 당한다 하여도
이러한 모든 나쁜 일 참아낼 수 없으면
이런 사람 그 국토 인우왕(人牛王)께 가지 못한다.
국토가 곧 국토가 아님을 만일 안다면
공(空)한 국토가 마치 공한 자성(自性)과 같아
국토도 국토의 공덕도 생각하지 않으리니
분명 그 국토의 인우왕께 이르리라.
나는 모든 악한 일을 참아낼 수 있다고 하고
나는 보살의 스승[敎師]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네.
스승이라는 생각에서 악한 마음이 생긴다는 것.
제각기 서로의 모든 행(行)을 헐뜯고
걸식(乞食)하는 집과 친구의 집에 집착하며
이 자는 내가 성숙시켰다고 말하며
거기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구나.
내가 너를 해탈시킬 것이니 다른 자와는 가까이하지 말라
그러는 그 사람 청정한 행은 없으니
시끄럽게 어울려 다니는 그런 지혜 없는 자
보리의 이익이 그에게는 없다.
밤낮 이와 같이 세 때[三時]에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예배할 것이며
다른 자들의 잘못은 찾지 말아야 하니
이끌어 안내하려 한다면 항상 수행해야 한다.
탐욕의 즐거움에 기뻐함을 보더라도
그의 잘못을 찾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이 오래한다면 반드시 증득하리라
가장 수승한 보리와 끝없는 덕을.
점진적으로 배우고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하니
한순간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느니라.
많은 겁 구지(俱致) 나유타(那由多) 동안
나는 갑옷을 입었으니, 오늘만이 아니다.
분별로써 탐욕을 분별하지 말라.
내가 증득한 보리는 탐욕의 성품과 같나니
이런 번뇌가 없으면 생기지도 않을 것이요
이것을 믿는다면 수승한 인(忍)을 얻으리라.
모든 소리가 소리 아님을 관찰하면
글자 없는 법체에 이미 들어가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소리가 모든 법체와 같은 줄 안다면
탐욕도 생기지 않고 성냄도 없을 것이다.
탐욕과 성냄에서 생기지 않음을 관찰하여
이 두 가지에 문자[字]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오직 이름만으로 유전(流轉)할 수 있는 것이니
문자가 없다면 그 내용도 없는 것이다.
모든 말이 곧 하나의 말인 것을 안다면
이름 또한 생기지 않고 본래 있는 것이 아니리라
내가 하는 말과 외도들의 말
그것도 같은 법체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러한 모든 법을 소리로써 말하지만
법도 소리도 얻을 수 없으니
모든 법이 한 모습인 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위없이 수승한 인(忍)을 곧 증득하리라.
인내를 분별하지 말고 참지 못하지도 말며
성냄을 분별하지 말고 탐욕을 갈구하지도 말라.
이런 것들 생김이 없다는 것을 항상 이해하여 안다면
세상 사람들 가까이하는 으뜸인 사람이 되리라.
동서남북 여러 쪽으로
항가하 모래처럼 많은 세계가 있고
낱낱의 모래알 수만큼 사람들을 배치해
그러한 국토가 끝없이 많으니라.
온갖 보배를 그곳에 채워 가장 수승한 이에게 보시하기를
끝없는 몇 백겁보다 더 많이 하더라도
만약 이 수다라(修多羅)를 듣는다면
이와 같은 복덕이 셀 수 없을 것이다.
이 보리를 구하여 출가한 뒤에
그곳에서 나는 이 경을 부촉할 것이며
반드시 가장 수승한 인(忍)을 얻어
가없는 문을 지나 이를 말할 것이다.
다라니(陀羅尼)에서 얻기 어렵지 않으리니
구지(俱致) 나유타(那由多)의 경(經)을 얻고
이지(利智)와 변재(辯才)를 그들이 얻을 것이며
동요함이 적고 많이 알아서 속히 해탈할 것이다.
곧 끝없이 즐겁게 법을 설하는 변재[樂說辯]를 얻을 것이며
모든 부처님이 그에게 변재(辯才)를 주어
설하시는 수다라의 보배는 하나가 아니리니
그런 끝없는 변설을 그가 가지게 되리라.
이때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덕 세존이시여, 이 가타(伽他)를 말씀하셨는데 얼마만큼의 중생이 듣고 이익을 얻었습니까?”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 사자유보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가자야, 이 대중들이 모여서 논하는 것을 보았느냐?”
대답하였다.
“저는 이미 보았습니다, 바가바(婆伽婆)시여. 저는 이미 보았습니다, 수가다(修伽多)시여.
이미 헤아릴 수 있는 수를 넘어섰습니다. 이 설법하시는 집회에서 허공 가득히 하늘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류다(伽留茶:가루라)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와 그 밖의 모든 세계의 중생들도 다 이 설법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 부처님께서 사자유보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가자야, 이 법을 설했을 때 9만 8천의 천자(天子)가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인(忍)을 얻었고, 9만 2천의 야차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으며, 3만 6천의 용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다.
5백의 비구가 증상만(憎上慢)의 마음으로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들이 이 다섯 가지 오만한 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모든 법이 한 모습의 도(道)인 줄 믿고 이해한 뒤에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졌으므로 번뇌의 마음에서 해탈하였다. 저 보살들 중에서 6만 2천 보살은 모든 법이 장애가 없음을 믿고 이해한 뒤에 무생법인을 얻었다. 왜냐하면 선가자야, 이 법은 말한 것 중에서 최상이기 때문이다.
선가자야, 나도 작등(作燈) 여래ㆍ응공[應]ㆍ정변지(正遍知)의 처소에서 모든 법이 한 모습의 도인 줄을 눈앞에서 믿고 이해한 뒤에, 나는 그때 그런 뒤에야 무생법인을 얻었다.
선가자야, 만약 모든 6바라밀을 얻고 다시 이 법이 본래 양이 똑같다는 것을 들으면 선가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도(道)로 인하여 6바라밀을 만족할 것이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가자야, 만약 어떤 보살이 항가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劫) 동안 보시를 행하고, 계를 지키고, 인욕을 갖추고,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정(定)에 들고, 지혜를 닦는다고 하더라도 이 법도(法道)를 알지 못한다면 모든 선근(善根)이 도로 없어져 버릴 것이다.
선가자야, 너는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이와 같이 선근을 갖추고 30상(相)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가 비록 이와 같이 선근을 다 갖추기는 했지만 다시 모든 선근을 끊어버리고 결국 니리야(泥犁耶:지옥)로 떨어진 것은 이 법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가자야, 이런 인연으로 모든 선근을 끊는 자는 이 법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선가자야, 과거 아승기겁 전에, 다시 수없이 광대무량하고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을 지나고 또 지나, 그 시절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셨으니 명호가 미류상왕(迷留上王) 여래ㆍ응공[應]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구족(明行具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교사(天人敎師)ㆍ불바가바(佛婆伽婆)이셨다. 그 여래의 수명은 99구지 나유다 백천 세였고, 그 세계의 이름은 금염영(金焰影)이었다. 그 불토는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고, 또한 3승(乘)으로써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셨다.
무엇이 셋인가? 성문승과 독각승과 보살승이었다. 그 여래의 첫 번째 집회에는 성문이 80구지 나유다 백천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 하고 할 일을 하여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냈으며, 무거운 짐을 다 버리고 스스로 이익이 되는 데에 도달하여 모든 번뇌[有結]를 다 없앴으며, 평등지(平等智)로써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두 번째 집회에서는 비구가 70구지 나유다 백천이 있었고, 세 번째 집회에서는 비구가 60구지 나유다 백천이 있었다. 네 번째 집회에서는 비구가 25구지 나유다 백천이 있었고, 또 그 수의 두 배가 되는 비구니가 모였으며, 또 그 수의 두 배가 되는 우바색가(憂波塞迦)가 모였고, 또 그 수의 두 배가 되는 우바사가(憂波斯迦)가 모였으며, 또 그 수의 두 배가 되는
보살들이 모였다.
그 모든 보살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다 갖추었고, 무변삼마지(無邊三摩地)의 도를 오묘하게 내었으며, 무변문총지(無邊門摠持)를 얻어 물러나지 않는 법륜을 굴리는 자들이었다. 하물며 초승발행(初乘發行) 보살이겠는가? 그 가운데는 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독각승이 있었으며, 선가자야, 그 시절에 그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성문의 무리가 있었다.
그 금염영(金焰影)세계에는 나무나 기둥이 모두 7보(寶)로 되어 있었고, 그 나무에서는 이와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으니, 이른바 공(空)의 소리와 무상(無相)의 소리와 무원(無願)의 소리와 무생(無生)의 소리와 무소유(無所有)의 소리와 무상모(無相貌)의 소리였다. 거기에서 이와 같은 소리가 날 때, 그곳의 모든 중생은 그 마음이 해탈하였다. 그러나 그 여래께서 멸도(滅度)하시고 천 년 동안 올바른 법이 머문 뒤에는 그러한 소리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선가자야, 저 미류상왕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는 정선행(淨善行)이라는 설법 비구에게 권청(勸請)하여 그에게 설법하게 하신 뒤 마침내 멸도하셨다.
선가자야, 그 당시에 또 선행의(善行意)라는 설법 비구가 있었다. 그 사람은 훌륭하고 청정한 계율의 무더기를 모두 갖추었고, 또 세상의 오통승지(五通勝智)를 얻었으며, 또한 비나야장(毘那耶藏)을 외울 수 있는 자였다. 그 비구는 또 고행을 엄하게 행하였고, 청렴하고 검소함을 믿고 즐거워하며 대중을 거느리고 설교하는 자였다. 그는 머물 곳에 안정되게 수립하고 나서 그 가운데 머물렀으며, 그의 무리들도 계율을 잘 지키며 두타(頭多)의 공덕을 믿고 즐거워하여 만사를 간소하게 하는 자들이었다.
그 비구는 또한 부지런한 행을 일으켰지만 보리심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에게도 다른 보살의 무리가 있었지만 역시 위의의 도를 가르쳐 그들에게 상응하게 하였다. 얻음이 있는 견해로 교화(敎化)를 행하여 모든 행이 무상(無常)하다고 취하고, 모든 행이 고(苦)라고 취하며,
모든 행은 무아(無我)라고 설하였다. 그는 오묘한 지혜가 없고, 보살행에 있어서도 역시 훌륭한 방편이 없었다. 그 비구가 비록 그렇긴 하였지만 선근(善根)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또 저 설법 비구 정선행(淨善行)은 중생들 각각의 근기를 잘 아는 자였다. 그의 무리들은 두타의 공덕으로 줄이고 간소하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지 않으니, 무소득인(無所得忍)의 선교방편 때문이었다.
선가자야, 그때 설법 비구 정선행은 그 무리들과 함께 선행의(善行意) 비구의 거처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때에도 자주 마을에 들어갔으니,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마을에서 식업(食業)을 한 뒤에 나오곤 하였다. 그는 많은 백천의 집 사람들에게 이미 깨끗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의 무리들 역시 잘 교화하여 선도하였다. 그리하여 중생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여 많은 백천의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건립(建立)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행의(善行意)의 무리들은 정(定)을 닦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자주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때 선행의 비구가 정선행(淨善行) 설법자와 그 주변의 무리들에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생겨 ‘이 자들은 게으른 비구로다. 항상 자주 마을에 들어간다’라고 하고는 곧 건지(犍遲:犍稚)를 울려 비구들을 모았다. 스스로 규정을 지어 ‘너희는 모두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하고, 정선행의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행(行)을 잘 알지 못하고, 말을 적게 하지 않는구나. 어떤 연유로 너희는 빈번히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냐? 모든 불세존께서는 아란나(阿蘭拏:阿蘭若)에 머무는 것을 찬탄하고 허가하셨으니, 너희는 다른 집에 가지 말라. 너희는 사유(思惟)하는 선정의 즐거움에 머물러야 한다.’
선가자야, 이때 정선행(淨善行) 비구의 무리들은 선행의(善行意) 비구가 제정한 가르침[言敎]을 따르지 않았고, 그들은 더욱더 자주 마을에 들어갔으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였다.
선가자야, 언제가 그 비구가 마을에서 나오자 선행의 비구는 다시 건치(犍稚)를 울려 비구들을 모으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다시 마을에 들어간다면 이곳에서 함께 머무를 수 없다.’
선가자야, 그때 정의행 설법자는 그 비구를 보호하려고 자기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당시 그 마을에 있는 중생들은 바로 그 비구가 성숙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구들을 보지 못하자 다들 타는 번뇌를 품었으며, 훌륭한 법이 손상되고 감소하였다.
선가자야, 이때 정선행 설법자는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낸 뒤에 그 거처에서 나와 다른 거처로 갔다. 아울러 그 무리들과 함께 다시 마을과 성(城)과 국읍(國邑)과 왕도(王都)에 들어갔고, 들어가서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선가자야, 이때 선행의 비구는 정선행 설법자가 자주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고, 또한 그 무리가 본성(本性)과 위의(威儀)로써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보게 되었다. 그는 다시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지금 이 비구는 악한 계율로써 계율을 깨뜨렸다. 자신만 그럴 뿐 아니라 무리들 역시 똑같다. 저런 중에게 어찌 보리가 있겠는가? 사기꾼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비구는 잡스럽게 행동하니 보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양(利養)을 귀중히 여기고 남의 집에 더럽게 집착한다.’
선가자야, 그때 선행의 비구는 얼마 후 죽었는데, 그는 죽을 때 그에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생겼고, 지은 업(業)이 성숙한 까닭에 아비(阿毗)에 떨어져 대니리야(大泥犁耶:大地獄)로 갔고, 99구지 백천 겁 동안 대니리야에서 지냈으며, 그곳 대니리야의 고통을 빠짐없이 받고 난 뒤에는 630만 생(生) 동안 항상 비방을 받았으며, 330만 생 동안
출가하였다가 다시 환속하였으니, 그의 남은 업장(業障) 때문이었다. 그러다 무구염(無垢焰)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가르침 가운데 출가하여 수명이 길어졌으나 구지 백천 년 동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수순도인(隨順道忍:隨順法忍)은 얻은 적이 없었다. 다시 많은 백천 생 동안 어둡고 둔한 근기였으니, 그의 남은 업(業) 때문이었다.
선가자야, 그때 정선행이라는 설법 비구를 너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부동여래(不動如來)가 바로 그때의 정선행이라는 설법 비구이기 때문이다. 선가자야, 그때의 선행의라는 설법 비구를 너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때의 선행의라는 설법 비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한 일과 나아가 미세한 방편에 대해 그 가운데서 청정하지 못한 마음이 생겼고, 그런 업장을 짓고는 대니리야에 떨어졌다. 선가자야, 이와 같이 미세한 업장이 있었다.
선가자야, 만약 이와 같은 업장을 짓고 싶지 않은 보살이 있다면 두 번째 보살이 한 모든 수행을 어기고 거스르면 안 된다. 짓는 모든 업에 대해 모두 믿고 순응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남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중생이 행하는 것 역시 알기 어렵다.’
선가자야, 여래는 이러한 이치를 본 까닭에 이러한 법을 부가라(富伽羅)에게 말한 것이다. 부가라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나만이 부가라와 그 밖에 나와 비슷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선가자야, 만일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선택하지 말라.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을 막고 장애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마땅히 불법에서 상응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하며, 밤낮으로 법과 상응할 것을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선가자야, 깊은 마음으로 행을 일으킨 보살은 다시 남을
막고 방해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열심히 서로를 수순하고 서로 어울려 수행해야 한다.
선가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10선업도(善業道)에 안립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홀로 한적한 곳에 이르러 손가락 튕기는 사이나마 모든 법이 한 모습의 도[一相道]인 줄 믿거나 묻거나[問] 함께 의논하거나 말하거나 가르치거나 독송한다면, 여기에서 생기는 복덕은 그보다 더 많다. 왜냐하면 선가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도로 인해 업장을 청정히 할 수 있고, 모든 중생 가운데서 애증(愛憎)을 멀리 벗어나 속히 변지(遍智)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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