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무언동자경(佛說無言童子經) 상권
불설무언동자경(佛說無言童子經) 상권
서진(西晉) 월지(月支)삼장 축법호(竺法護) 한역
이진영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나열기(羅閱祗)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1,250비구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보살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그때 왕사성에 사자장군(師子將軍)의 첫째 부인이 산기가 있더니 덕 있는 사내아이를 낳았다.때마침 허공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자여, 너는 마땅히 불도의 가르침[道敎]에 뜻을 두고 경전을 생각할 뿐, 부디 세간의 말과 이야기는 선설하지 말아라. 방편으로 세간 제도하는 법을 환하게 깨달을 것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고 세속[方俗]의 일을 버리며, 마땅히 올바른 이치로 돌아갈 것이지, 화려한 말이나 꾸며대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동자는 멀리서 들리는 이러한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는 아예 울거나 어떤 말소리도 내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어린 아이의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7일이 지나자 그 얼굴에 기쁨이 가득할 뿐 조금도 초췌한 기색이 없었다.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한없이 쳐다보았고, 한쪽에선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 아이는 말도 못하는데 길러서 무엇하랴?”그러자 아이의 부모가 답하였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가 길러야만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지금 이 아이의 단정한 얼굴과 헤아릴 수 없이 당당하고 뛰어난 미묘한 모습을 보니, 평범한 아이가 따라올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는 부모ㆍ친척과 여러 친지들이 이 아이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곧 ‘무언(無言)’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에 무언 동자는 점점 자라나 여덟 살이 되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관찰하고자 하는 이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도 어떤 곳에서 이치를 분별하는 법회가 있을 때면 동자는 그 법회에 나아가서 설법을 듣되 역시 고요히 생각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어느 날 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그의 부모ㆍ가까운 친척[五種親屬]ㆍ친구ㆍ친지들과 함께 가사굴산으로 갔다. 그는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번 돌고는 세존 앞에 합장하고 서서, 무수한 시방 세계로부터 모여든 억백천 해의 보살들이 각각 장엄되고 청정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였고 곧 착한 마음이 생겼다.그때 사리불(舍利佛)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여, 이 무언 동자는 바로 사자장군의 아들이며 그 단정한 얼굴과 헤아리기 어렵게 뛰어난 모습이 이와 같지만 아무런 말을 못하오니, 이 동자는 전생의 어떤 재앙이 남아 있기에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고 또 말을 하지 못하나이까?”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그만 두라. 무언 동자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아라. 왜냐 하면 이 동자는 바로 과거세의 보살마하살로서 이미 과거 부처님들께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어 그 무수한 모든 부처님ㆍ정각(正覺)들에게 공양하고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여 물러서지 않는[不退轉] 지위를 얻었으므로, 곧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성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동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허공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동자여, 너는 앞으로 불도에 뜻을 두어 경전을 생각할 뿐 세속의 말은 하지 말아라’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이 보살이 지금까지 조용하게 말이 없었던 것이다. 또 유순(柔順)하게 가르침을 받은 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네 가지 선정[四禪]을 받들어 행하였노라.”세존은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만약 이 무언보살을 보고서 이와 같이 불도의 가르침만 따르고 세속의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러한 인연으로 곧 지금의 큰 법회에서라도 경전의 법을 선설(宣說)하여 한량없고도 말할 수 없는 인민들을 모두다 교화시켜 이롭게 인도할 것이니라.”이에 무언보살은 곧 그 모습대로 삼매에 들어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었고, 모든 성문ㆍ보살들을 비롯한 천룡(天龍)ㆍ귀신(鬼神)ㆍ건답화(揵沓和)ㆍ아수륜(阿須倫)ㆍ가류라(伽留羅)ㆍ진다라(眞陀羅)ㆍ마후륵(摩睺勒)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등 일체 대중 각각의 오른 손바닥에 수레바퀴와 같이 큰 연꽃을 화생(化生)시켰다.그 미묘하고도 선명한 갖가지 빛깔과 한량없는 향내에 보는 이마다 마음으로 기뻐하였으며, 또 그 연꽃 위에는 자연스럽게 화생한 보살들이 서른두 가지 상호로 그 몸매를 장엄하여 결가부좌하고 있었다.무언보살이 이러한 큰 신족통(神足通)을 나타내어 세존께 머리 조아려 거듭 귀명하자 그 연꽃 위에 앉은 모든 보살들도 함께 합장하고 몸을 굽혀서 세 번 스스로 귀의하였다.무언보살이 머리 조아려 귀명하는 것을 입으로 선창하자 때맞추어 항하 강변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가 저절로 여섯 가지로 진동할 정도로 그 큰 음성은 널리 울려 퍼졌고, 허공에선 찬탄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온갖 꽃이 흩뿌려지고 공후(箜篌) 따위의 악기들이 연주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울렸다.이에 무언보살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그의 큰 서원을 성취하여 땅에서 공중으로 네 길[丈] 아홉 자[尺] 높이만큼 솟아올랐고, 다른 대보살들도 그렇게 하였다. 무언대사(無言大士)는 그 공중에서 여러 보살들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게송을 읊어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형체가 없이 형체를 나타내지만
또한 빛깔에 머물지 않고
단지 중생을 열어 교화하기 위해
그 몸을 나타내고 가르치시네.
부처님께선 본래 색신이 없고
유위법에도 집착하지 않지만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도사(導師)께선 일부러 몸을 나타내시네.
서른두 가지 상호를 나타내고
기묘한 여든 가지 종호(種好)로써
그 신체를 장엄하시고는
중생을 위해 법을 강설하시네.
법이란 아무런 형상이 없고
어떤 음향(音響)도 없나니
음향이 없으므로 얻을 것 없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고요하고도 미묘하여라.
부처님께선 이러한 법을 깨달으시어
보리수 아래 앉아 계시니
그 도는 바로 말없는 가르침이라
어떤 언사로도 말할 수 없다네.
그 법은 형상 없는 법이라
형상을 구하려해도 구할 수 없나니
형상 없는 그러한 법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으랴?
중생을 가엾이 생각하심이
곧 부처님의 큰 은혜라
얻을 것 없는 법을 분별하시어
때를 놓치지 않고 선설하시네.
이 얻을 것 없음을 훤히 깨달으시고
얻을 것 없는 공(空)을 깨달으시어
이와 같이 길러내시니
부처님의 이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네.
유위의 말로써 가르침이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이 법 또한 아무것도 없고
무위이고 자연조차 없다네.
이처럼 덧없는 형색(形色)으로
도사께선 인연 따라 그 모습 보여주시고
이 법 아무것도 없다는 것
중생 위해 이 경(經)을 말씀하시네.
처음 태어나 여덟 살이 되기까지
입으로 아예 말하지 않음은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하늘이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네.
‘경전을 생각하라’ 하였기 때문에
귀로도 소리를 듣지 않고
이와 같이 도업(道業)에만 뜻을 두어
입으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네.
가령 말하지 않음[無言]에 어떤 가르침이 있다면
말로서 드러낼 것이 없으니
말로서 해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청정하고 미묘하고 밝을 것이리라.
이러한 서원으로 불도를 생각하되
그 뜻을 대승(大乘)에 두고서
마땅히 높은 가르침을 받들어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부처가 되리다.
불도의 마음이란 얻을 수 없고
말 없고 형상도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불도는 공하여
얽매임을 풀고 빛나는 광명을 이룬다 한다네.
이에 동자가 그 법회의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불도[道]와 언교(言敎)는 평등하여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볼 수 없고 가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다고 말함은 입으로 그 도를 말할 뿐 형상이 없기 때문이고, 가질 수 없다고 말함은 사람이 그 도를 구하기는 하여도 처소가 없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처소가 없으므로 머무는 곳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는 곳에 머무는 그것이 바로 도의 머묾입니다. 모든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이 또한 이와 같고 그 밖의 무수한 공덕의 뿌리도 모두다 이와 같아서, 언교를 말하더라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에 언교란 다만 음성을 빌린 것이고 실지로는 언사가 없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보시를 말해보더라도 보시하는 이와 보시 받는 이와 보시[惠與]에 회향하는 곳이 있어서 도가 일체에 평등하게 머물게 되니, 가엾이 여기는 말을 하거나 불도의 가르침을 베풀어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는 그 도의 자연스럽고 평등함이 저 허공과 같습니다.마음의 깨달음에 따라 말하여야만 그 말의 모든 것이 다 청정함을 헤아릴 수 있고, 그 도가 허공과 같이 상서롭기가 이와 같습니다.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 보시한다거나 보시 받는다는 온갖 번뇌를 모두다 버려야만 시도무극(施度無極:布施波羅蜜多)이라 할 수 있으니, 힘써 행해야 할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보시는 도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든가 도는 보시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두 가지 일이 단지 음성을 빌린 것뿐이며, 진실로 아무런 집착이 없고 어떤 형상도 없는 것입니다.가령 이와 같이 도와 언교를 받아 간직한다면 보살행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시도무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왜냐 하면 보시하는 시주가 청정하여 그 보시한 것에 대한 갚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귀로 계율[禁戒]에 대해 듣고서 색(色)에 집착하지 않으면 생겨나는 것이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니, 이를 계율이라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계율을 닦는 자도] 그 몸과 입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 모두 조작함이 없고 모두 소유하지 않으며, 또한 분별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강설함에 있어서 어떤 인연은 서로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입으로 말하는 그 명칭을 곧 계율이라 하거나 또는 입으로 말하는 그대로가 바로 계율이라 하거나 이 두 가지 일은 모두다 형상이 없습니다.그러므로 모든 계율의 업이란 그 일체가 다만 언어를 빌렸을 뿐이고 아무런 장구(章句)가 없는 것이며, 또 도를 헤아려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말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입으로 드러내 말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몸으로 업을 지어도, 이 계율은 도덕을 힘써 돕는 것이니, 계율을 도라고 말하고 말로서 계율을 밝히려는 그 일체가 모두 형상이 없어서 마치 저 허공과 같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이것으로써 그 매우 깊고도 미묘한 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이에 동자가 다시 게송을 읊어 찬탄하였다.
말과 마찬가지로 도(道) 또한 그러하여
간직할 것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한 말에서도 볼 것이 없는 것이
내가 선설하는 불도라네.
서원을 세워 도를 구하지만
그 바라는 것도 머묾이 없으므로
머묾도 없고 있는 곳도 없으니
도가 존재하는 곳 또한 이와 같다네.
모든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도 그와 같고
모든 공덕을 짓는 것도 그러하여
언사(言辭)란 다만 음성을 빌린 것일 뿐
말한다해도 아무런 말할 것 없는 것이네.
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시해야 마땅한 곳에 보시하는 것이니
그래야 비로소 보시 받는 이가
모두 평등한 도에 머물게 되리라.
입으로 보시를 드날리고
불도의 일을 설명한다면
그 도는 또한 자연 그대로
저 허공처럼 평등하리라.
만약 마음을 훤히 깨칠 수 있다면
입으로 선설하는 것
그 모두가 다 청정하고
청정함을 듣는 자도 모두 도에 나아가리라.
몸과 입과 마음에서
온갖 번뇌를 모두 버리고
남에게 권하기를 또한 그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도무극(施度無極)이네.
보시는 도에 귀착되지 않고
도가 보시를 의지하지 않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이름을 빌렸을 뿐
집착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이라네.
만약 의지하는 바가 없고
도를 받아들임 또한 그렇게 하며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것을 바로 보시라 하네.
가령 계율을 들음에 있어서도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아서
일으키지도 않고 멸할 것도 없으면
이것이 바로 계율의 모습이라네.
계율을 행하지 않음도 이와 같아서
몸ㆍ입ㆍ마음에 다름이 없으며
지음도 없고 소유한 것도 없이
임시로 말이 존재할 뿐이네.
인연이 합쳐져 말이 있고
이름을 붙여서 계율이라 할 뿐
나의 계율은 바르고 평등하니
이 두 가지 일은 번뇌가 없다네.
계율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모두가 말을 빌린 것일 뿐
도의 이치를 얻은 자로선
말도 없고 업도 없다네.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계율로써 도의 이치를 힘써 권하는 것
계율과 불도의 가르침을 생각함이
모두가 저 허공과 같다네.
만약 이것을 훤히 깨우친다면
그는 곧 홀로 뛰어나 널리 계율에 들어
도에 노닐고 머물게 되리니
그 깊고 오묘한 장구(章句)를 깨닫게 되리라.
그때에 동자가 또 그 법회에 온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인욕의 가르침이란 또한 하나의 언사이고 공(空)과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인욕이라 할 것이니, 인욕은 바로 평등과 같아서 3계도 이와 같고, 인욕을 말하는 것은 어떠한 부류의 형상도 없는 것이어서 볼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평등한 마음을 인욕이라 합니다.만약 텅 비어 고요한 것을 인욕의 근본이라 한다면, 소리와 냄새ㆍ맛 따위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고 그저 문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욕이란 말을 선창하는 것입니다.여래ㆍ정각께서 세 가지의 인욕을 말씀하셨으니,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요, 이러한 인욕을 훤히 깨달은 자라야만 인욕을 수행한다 할 것입니다. 가령 그 몸뚱이를 자르고 팔ㆍ다리를 갈래갈래 찢어버린다 하더라도 성내는 마음과 몸뚱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 몸뚱이를 마치 장벽(墻壁)처럼 본다면 그것이 바로 몸에 대한 인욕입니다.아무리 나쁜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듣더라도 모두 참아 견디어 내고, 모든 언사에 있어서 그 말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입에 대한 인욕입니다. 온갖 더러움 속에 뒤섞이더라도 마음이 고요하여 우울하지 않고 마음으로 모든 문자를 잘 분별한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에 대한 인욕입니다. 이러한 인욕을 수행하되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 함께 일치되어야만 비로소 인욕의 도(道)라고 합니다.성교(聖敎)를 널리 전하고 여러모로 힘써 돕는 자는 가장 훌륭한 것이건 보잘것없는 것이건 또 보통의 것이건 온갖 정진을 억 겁이 다하도록 하여, 얻지 못할 것도 성취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정진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고, 도덕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것, 이것을 바로 정진이라 합니다.닦는 정진을 설령 이와 같이 하더라도 겁내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도 않는다면, 대정진을 최고로 잘 통달한 용맹스러운 보살로서 인의(仁義)를 다 갖추었다고 할 것입니다.”이에 동자가 거듭 게송을 읊었다.
인욕의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입으로 선창하는 것이고
공과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인욕이라 하며
그 인욕은 3세에 평등하다네.
아무리 인욕의 모습을 말하더라도
모습이 없어 볼 수 없으니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인욕이라 할 수 있다네.
인욕은 텅 비고 고요한 것이라
소리와 냄새ㆍ맛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
거기에 어떤 문자도 없는 것
이것을 인욕이라 한다네.
세존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인욕
그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을
누구라도 훤히 깨달아 널리 편다면
인욕이라 말할 수 있다네.
가령 온몸 마디마디를 잘라버리더라도
마음에 성내는 마음을 품지 않고
몸뚱이를 마치 장벽처럼 본다면
이것을 몸에 대한 인욕이라 한다네.
아무리 나쁜 말을 듣더라도
그 욕하는 말에 보복하지 않고
모든 언사를 다 참아 낸다면
실로 그 말에 머물 수 있네.
어떠한 더러움 속에 뒤섞이더라도
마음이 고요하여 우울하지 않고
그것이 공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마음에 대한 인욕이라 한다네.
인욕의 도 또한 그러므로
몸과 입과 마음을 이와 같이 한다면
그것을 곧 도라고 하며
불도를 힘써 돕는 것이라 하리라.
모든 정진을 다하여
최상이건 보통이건 보잘것없는 것이건
억천 겁이 지나도록
얻지 못한 것을 성취하리라.
정진으로 얻을 수 없고
도덕으로도 잡을 수 없어
일체법에 미칠 수 없다면
그야말로 정진이라 하리라.
만일 온 힘을 다해 이를 행하며
겁내지 않고 어렵게 여기지도 않는다면
그를 곧 뛰어나게 정진하는
용맹스러운 보살이라 하리라.
이에 동자가 다시 법회에 온 여러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른바 선정[禪思]이란 생각하는 것도 없고, 선정을 헤아려보아도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곧 적도무극(寂度無極:禪定波羅蜜多)이라고 합니다. 고요하고도 맑고 깨끗하여 말이 없고 게으름도 없이 모든 번뇌를 여의어 없애버려야만 곧 적도무극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모든 법에 대해서 버리지도 왔다갔다하지도 않아 마음에서 마음을 여의어야만 이것을 적도무극이라 합니다.그리고 마음과 선정이 불도를 향한 마음에 이르러서도 늘 평등하게 온갖 일을 관찰합니다. 만일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관찰에 있어서 삿됨도 올바름도 없으리니, 이것이 이른바 불도는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문자도 없고 말할 것도 없으며, 끝이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며, 게으름도 없고 제 멋대로 하는 일도 없어야 이를 곧 지도무극(智度無極:智慧波羅蜜多)이라 합니다. [생사의] 이 언덕도 없고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도 않습니다.또한 이쪽 저쪽에 머묾이 없고, 법계를 바르게 건립하지만 머묾도 없고 또한 집착도 없으며, 문자도 없고 선포할 것도 없으며, 문자가 없으므로 다시는 일체의 생각을 거론하지도 빌리지도 않습니다. 만일 이러한 법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를 곧 지도무극이라 합니다.6도무극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이치를 평등하게 관찰한다면 일체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고 또한 모든 중생에게도 평등할 수 있으며, 만약 일체 모든 법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 있습니다.만약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께 평등할 수 있으니, 모든 부처님께 평등하였다면 그는 일체지(一切智)를 잘 받들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두려움 없는 용맹이 이와 같다면 바로 끝없는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가르침의 명령[敎命]에 순종할 수 있다면 곧 불가사의한 법안(法眼)을 얻게 될 것입니다.”이에 동자가 거듭 게송을 읊었다.
선정이란 생각하는 것 없고
오롯한 마음으로 머무르는 곳 없이
일체의 모든 생각을 다 끊어야만
적도무극이라고 이름한다네.
고요하고도 맑고 깨끗하게
게으르지 않고 번뇌도 없이
온갖 더러운 번뇌를 다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적도무극이네.
또 그 마음이 일체의 법에
버림도 또 가고 되돌아옴도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그 마음을 벗어나야만
고요히 저 열반의 언덕에 닿는다네.
마음과 도를 따져보고
그것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평등하니
만약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다면
불도는 얻기 어려운 것 아니라네.
문자를 버리고 말도 없이
근본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기뻐하지도 않고 방자하지도 않아야만
이를 지혜라고 한다네.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으로 건너지도 않고
이쪽 저쪽에도 머물지도 않으며
법계를 올바르게 건립하되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네.
문자로서 선포할 것이 없어
모든 생각과 함께 하지 않으니
이렇게 모든 법을 받아들여야만
이를 지혜라고 한다네.
모든 도무극이 다 그러하므로
동일한 이치로서 관찰한다면
모든 법에 평등하고
모든 중생에게도 평등할 수 있다네.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도 있고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다면
곧 일체지와 똑같다네.
그러므로 큰 지혜로
보살이 용맹하게
이 가르침의 명령을 따를 수 있다면
불가사의한 법안을 얻게 되리라.
그곳의 모든 정사(正士)에게 이 장구(章句)를 설하여 그 모든 갈래를 분별하자 1,200대중이 모두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켰고, 6만의 보살들이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無生法忍)을 얻었다.그때 연꽃 위에 앉았던 모든 보살들이 곧 연꽃으로부터 내려와 부처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는 다시 무언보살에게 예배하고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언보살이시여, 저희들도 성사(聖師)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정성껏 바른 법을 좋아하고 경전을 받들어 섬기며, 효순(孝順)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서 하겠습니다.”이때 현자 사리불(舍利佛)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여러 보살들은 무엇 때문에 입으로 여래에게 ‘저희들도 효순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선포합니까?”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이는 모두가 무언보살이 여러 보살들에게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해 그들에게 불도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과 인의예절(仁義禮節)의 행동과 위없이 바르고 참된 대승의 교법을 연설함으로서 그 듣지 못한 자를 개화하여 불도를 향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이니라.이것이 바로 효순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므로 이제 일부러 여기에 와서 공양의 공덕을 행하고, 또 이 법회의 대중들이 부처님을 받들고서 경전에 대한 설법을 듣는 그 광경을 보려고 한 것이니라.”이에 무언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제가 의심되는 것이 있어서 이제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 말씀드려 여쭙고자 하오니, 제 청을 받아 주신다면 곧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처님께서 무언보살에게 대답하셨다.
“무엇이든지 분명히 알지 못한 것이 있거든 마음대로 질문하여라. 여래가 낱낱이 드러내어 남아있는 의심을 없애고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리라.”그때에 사리불이 무언보살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대는 말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여래에게 그 이치를 질문하려고 합니까?”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문자가 없고 언사(言辭)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 중생은 모두 자연 그대로로서 어떤 말의 가르침도 온갖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사리불이시여, 마음의 생각을 따라서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만약 생각하는 것이 없다면 말할 것이 없을 것이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두 허망하여 진실함이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습니다. 질문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그 집착된 생각은 모두 존재하지 않고 문자도 없는 것이며, 그 허무하다는 것 역시 생각이 없는 것이고 또한 문자의 설명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 모든 마음먹음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제가 문자의 설명으로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 문자는 어떤 생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거나 문자의 설명을 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다.사리불이시여, 12연기는 매우 깊고도 다다르기 어려워서 위대하고 위대하기가 이와 같으며, 모두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저절로 그러해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을 뿐입니다. 가령 스스로 그러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저 도는 성취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사리불이시여, 일체 모든 법은 성취할 것도 없는 인연의 일입니다. 머무는 바 없는 것에 의지하여 조작이 있고 인연의 화합을 말미암기 때문에, 그 인연은 일으켜 건립하는 것이 없습니다.사리불이시여, 일체 모든 법에는 다 주재자가 없습니다. 저 임금[君長]들도 무상한 주재자이어서 아무런 의지와 생각이 없지만, 자기들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함부로 날뛰고 어떤 상대하는 것을 말미암아 온갖 생각을 일으키며, 그 잘못 뒤집혀진 생각의 무더기들이 이것을 따라 생겨납니다.그들이 만약 이 질문하는 것을 보고 묻는다면 ‘생각해서 알고 있는 일체 모든 법은 생각 있고 생각 없는 것이 모두 한 가지 모습이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저렇게 물음으로서 보살은 큰 자비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리불이시여, 제가 이 때문에 큰 자비를 일으켜 여래께 여쭙는 것일 뿐, 언어와 음성으로서 말과 언교(言敎)에 의지하여 여쭙는 것은 아니고, 큰 자비에 머무는 보살의 질문입니다.“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족성자여, 만약에 중생이 없고 사람도 없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이 그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일으키는 것입니까?”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시여, 설령 중생이 그들이 성취하여 다다를 도를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살로서는 그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중생에게도 중생이란 집착[想]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중생들에 대해서 큰 자비를 일으키는데 있지만, 설령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자비에 반대되는 것이니, 일체의 다섯 갈래[五趣]가 모두 허깨비[幻化]와 같기 때문입니다.아, 슬프군요. 모든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여 중생이란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보살이 경전의 도를 강설하며, 나 없고 본말(本末)이 모두 공함을 알게 하기 위해 보살이 모든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일으키는 것이며, 파괴할 것도 없고 가진 것을 훼손하지도 않고 나[我]ㆍ사람[人]ㆍ수(壽)ㆍ명(命)이란 생각을 무너트리지 않으면서 보살이 그 큰 자비에 들어가 중생들을 이롭게 인도합니다.진리를 드날리고 공한 현상을 분별함으로서 모든 객진(客塵)번뇌에 물들어 더럽혀진 중생들을 일체의 물질에 평등하게 들어가 노닐도록 하며, 스스로가 본래의 청정함을 관찰하게 하기 위해서 보살이 그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일으키는 것입니다.”그때에 사리불이 무언보살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족성자여, 사실 그대의 말과 같이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지난번 어진 이의 그 강설하는 뛰어난 말재주[辯才]를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꺼내려 한 것이고, 앞으로는 정사(正士)께서 선설하시는 이 불가사의한 법을 받아 듣겠습니다.만약 이 질문에 대한 설법을 널리 유포한다면 마군들이 틈을 엿보지 못하고 여래의 법이 오래도록 존립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 법회의 천룡ㆍ귀신ㆍ건답화ㆍ아수륜ㆍ가류라ㆍ진다라ㆍ마후륵 등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 아닌 듯한 무리들까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도법(道法)의 광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이에 무언보살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바른 견해를 닦는 되는 데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남에게서 음성을 듣거나 그 수행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대성(大聖)이시여, 원하옵건대 여래ㆍ지진ㆍ정각께서 이것을 분별하여 잘 말씀해 주소서. 보살이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란 어떤 것이고 그 수행을 생각함이란 어떤 것이며, 또 현성(賢聖)의 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무언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족성자여,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이제 분별하여 해설할 것이다. 마치 보살이 남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해 생각함으로서 현성의 올바른 견해를 받들어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기를 원합니다.”그리고는 무언보살이 법회의 대중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아 들였다.부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만약 어떤 보살이 다른 중생을 힘써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오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가령 불도를 향한 마음을 평등하게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한 불도의 법에 유순하여서 듣고서 잘 살핀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부처님 불도의 이치를 받들어 간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보살의 도를 받들어 행함으로서 법인(法忍)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니라.또한 무언보살이여, 만약 미묘한 지혜와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듣고서 들은 그대로를 선설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령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이치를 통달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의지와 성품이 청정하여 아첨하는 일이 없이 넓은 업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이치를 들은 그대로 수순하여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온갖 공덕의 근본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그 소행이 미묘하여 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전일한 마음으로 받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아주 뛰어난 이치를 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도와서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유순한 생각으로서 응하는 대로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돕되 현성을 평등하게 관찰하여 아예 그만두거나 물러서지 않고, 모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지고 있는 모든 소중한 물건을 과감히 모두 다 보시하되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보시하고 나서 그 과보를 바라지 않고 도를 탐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대승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계율의 드넓고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계율을 지키되 계율로 말미암아 관습에 젖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계율을 수행함이 없이 지진(至眞)을 독실하게 믿어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에 인욕하는 마음으로 인의(仁義)를 닦고 대자비를 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러면서도 중생을 가엾이 여겨 해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끝까지 한가롭고 고요해서 모든 법을 믿되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에 정진을 다하여 수순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 마음이 게으름이나 더러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합쳐짐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어겨서 잃는 것도 없이 정성껏 정진하여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선정과 세 가지 해탈문을 들음으로서 그 삼매에 든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마음이 하는 일에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의 뿌리를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선정을 닦으면서 잘못 뒤바뀐 생각에 떨어지지 않고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지혜를 듣고서 그 지혜를 몸의 뿌리로 삼아 꽃과 열매를 무성하게 키운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법을 듣고서 본말(本末)에 귀의하며 나아가 갈래를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모든 생사의 흐름과 온갖 열반의 언덕을 다 버리고서 중생을 열어서 교화하는 마음의 근원에 다다른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네 가지 은혜[四恩]1)를 보이고 들은 것을 모두 다 거두어들이지만 조금도 집착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네 가지 은혜의 가르침을 버리거나 없앤 적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구제해야 할 중생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이 평등한 이치에 따라 온갖 지혜에 입각해서 제도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자심[慈]ㆍ비심[悲]ㆍ희심[喜]ㆍ사심[護]의 네 가지 범행(梵行)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사랑함으로서 파괴하거나 훼방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명성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공무(空無)한 이치를 따라 즐기기는 하지만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닦고 법을 위해 기쁜 마음을 내는 이 두 가지 과보를 생각하여 도덕을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을 네 가지 분별하는 뛰어난 말재주로써 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모든 법을 관찰하여 위의와 예절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평등한 법의 이치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일으키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미묘하여 중생을 이롭게 인도하는 일을 듣고서 당연하게 받들어 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수순하는 행을 잘 다스려 기억하며 그 행을 멀리 여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수행을 생각함이며, 법문의 장구(章句)와 불도의 자취[道跡]에 따라 그 처소마다 불도를 선포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37정각(正覺)의 법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의지(意止:念處)를 수행함으로서 모든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단의(斷意:意斷)를 수행하여 일찍이 한번도 착하지 않은 것을 따라 미혹되지도 않으며 항상 덕의(德義)의 뜻에 순종하여 그 신족과 정진ㆍ선정의 힘을 얻어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이 같은 독실한 신심으로 법문의 구절을 분명히 알아 물러나지 않으며 그 지혜로써 낱낱이 관찰하여 대할 수 있어서 마음이 법력을 말미암아 번뇌에 끌리지 않고 법의 깨달음에 들어가 도심(道心)과 더불어 평등하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다.가령 의지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어 그 4의지(意止:念處)에서 일어나지도 없어지지 않고 4의단(意斷)으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4신족(神足)으로 진리[眞諦]와 같이 살피고 이같이 환히 깨달아서 이와 같이 올바르게 나아가되 지혜의 칼을 잡고 온갖 번뇌를 끊어 그 정욕(情慾)에 끄달리지 않고 바른 법에 들어가서 각의(覺意)에 두 가지 일이 없음을 평등하게 관찰하여 모든 귀착하는 지름길마다 도심(道心)을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4성제(聖諦)를 듣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5음(陰)의 괴로운 환란과 사랑[恩愛]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연의 습기를 모두 없앰으로서 올바른 지름길로 들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비록 모든 괴로운 환란에 처해 있더라도 그 지혜를 일으킴이 없고, 모든 훈습을 하더라도 지혜는 훈습됨이 없고 모든 다함이 있는 것에도 지혜는 구경에 다하며 모든 지름길에도 지혜로서 집착하지 않고 큰 도(道)를 힘써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세 가지 해탈문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공(空)을 돈독하게 믿고 상(相)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원(願)이 없음에 마음으로 구하는 곳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공한 수행을 생겨나게 하지도 않고서 모든 소견을 열어서 교화하고 상(相)없는 마음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모든 상에 원 없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여 지극한 정성을 자라나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처음 발심할 때부터 큰 대업에 순종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보살행을 닦아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서 정각(正覺)을 성취하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선지식을 얻어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세존을 뵙고서 스스로 성인의 길을 묻고 따라 나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입으로 말한 그대로를 실행하여 말에 어긋남이 없어서 몸과 입의 행이 서로 걸맞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강설하는 법을 듣고서 미혹함과 어지러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모든 법의 이치가 귀결(歸結)됨을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법의 이치를 받들어 행함으로서 불도의 가르침을 잃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여래에게 친근하여 그 선설하시는 말씀을 받들어 묻고서 간직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불도의 마음을 분별할 줄 알아서 큰 가르침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열어서 교화해야 할 일을 다 받들어 행하여 그대로 성취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8만4천의 모든 도품법(道品法)을 듣고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8만4천의 모든 부처님의 수행문을 분별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제각기 근기가 다른 8만4천의 중생들에게 그들에게 맞도록 설법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또 어느 곳에서나 아무런 탐하고 집착하는 일 없이 공덕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령 공덕을 일으키고 나서 마음에 항상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이러한 공덕심으로서 오롯하게 일체의 지혜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성현의 바른 견해이니라.족성자여, 이와 같이 수순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는 오래 살 것이고, 끝나지 않는 수명을 누리면서 성현의 올바른 견해를 얻을 것이니라. 왜냐 하면 성현의 바른 견해로서 다섯 갈래[五趣]에 자유로이 맴돌기 때문이라. 그 다섯 갈래에 맴도는 것이 마치 허깨비[幻化]와 꿈과 그림자와 메아리와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과 파초와 같으므로 이것을 훤히 깨닫는 것이 곧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일체의 법이 모두다 평등하여 치우침과 삿됨이 없으므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여기에 평등함을 이룩해야 할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현의 바른 견해이니, 이를 사유(思惟)라 하느니라.높고 낮음이 없이 일체의 법에 대해 호응하는 것도 호응하지 않는 것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나아가지 않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것도 머물지 않는 것도 없고, 행하는 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기억하는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뜻하는 것도 뜻하지 않는 것도 없고, 관찰하는 것도 관찰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마음도 의식도 가르침도 없는 그것을 상대적 차별 없는[不二] 법문에 드는 것이라 하느니라.또 동일한 법품(法品)을 환하게 깨달음으로서 모이는 것도 흩어지는 것도 없고, 어기는 것도 따르는 것도 없이 본래 성품이 청정한 것을 환하게 깨달아서 깊이 생각하고 널리 강설하되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며 흐림도 없고 맑음도 없을 것이니라.어떤 단계나 차례[品第]도 없는 그러한 이치를 분명히 나타낸다면 법계는 파괴되지도 않고 법의 근본경지에서 흔들리지도 않으며, 나아가서는 근본 없는 경지에 들어가 3세에 머물러도 머물 곳도 없으므로 나[我]ㆍ사람[人]ㆍ수(壽)ㆍ명(命)이라는 생각도 없고 모든 음성과 문자를 벗어나 그 이치에 아무런 얻을 것이 없으며, 어떤 재업(財業)도 없고 끝나는 곳도 없어서 모든 꾀하는 것을 얻을 것이니라.일체 행하는 것에 있어서 그 온갖 기억도 없고 모든 생각을 여의어 게으른 일을 모두 끊어버림으로서 어떠한 행에도 집착함 없이 뛰어나고 내지 여래의 칭찬을 받을 만큼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 온갖 생각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을 평등이라 하느니라.이것은 어떠한 모양도 없이 한결같이 진리에 응함에 따라 사유하느니라. 가령 어떤 수행하는 이가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법으로써 중생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한다면, 그는 곧 이 법의 근본을 추구(推求)하여 호응하는 그대로 생각하여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되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큰 자비심을 세우는 현성의 바른 견해라고 하느니라.”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현성의 바른 견해를 말씀하실 때에 1만의 보살들이 곧 현성의 올바른 견해를 얻었다. 이에 사리불이 무언보살에게 말하였다.
“어진 족성자여, 그대는 누구로부터 법을 듣고 지금 이러한 성현의 바른 견해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무언보살은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시여, 제가 듣기로 법은 조작이 없으므로 과거의 마음으로부터 도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또한 현재도 아닌 평등한 3세에 일체의 법이 평등하여 나아가는 것이 있지만 귀착하는 곳이 없어서 마침내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등한 것마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또 제가 그에게 듣기로 법은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어서 알음알이도 없고 머묾도 없으며, 심(心)ㆍ의(意)ㆍ식(識)도 없고 일체의 법을 받들지 않음도 없으며, 모든 중생의 마음을 제지하여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므로 그 이치를 얻을 수 없고 흔들리지도 않고 힘써서 해를 끼침도 없고 집착도 없습니다.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세상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은 생겨나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일체의 법은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아서 아무리 분별하려하여도 근본이 없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또 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그 대하는 법의 경계는 평등하게 사람의 경계를 제어하며, 법의 경계와 사람의 경계와 허공의 경계가 모두다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평등한 모든 경계에는 생겨나는 것이 없고 아무런 조작이 없습니다.또 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어떤 도량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보리수 아래 앉아 있는 것도 아니며, 경행(經行)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되는 것도 아니며, 도(道)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세속을 버리는 것도 아니며, 모두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인민(人民)들이 ‘여래께서 도를 얻으심은 또한 그 도를 얻음이 아니고 상호(相好)를 갖추심도 그 상호를 갖춤이 아니며, 이치를 증명하심도 그 이치를 증명하심이 아니라 모두 본래 청정한 자연의 성품을 따름이다’라고 마음으로 생각하게 할 뿐입니다.사리불이시여, 또 법이란 가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으므로 어떤 몸뚱이가 없으며, 몸뚱이가 없으므로 성취할 것도 없고, 성취할 것이 없으므로 생겨날 것도 없으며, 생겨나는 것이 없으므로 일어날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끝내 사라질 것도 없으며, 끝내 사라지는 것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므로 흔들릴 것도 없으며, 흔들리는 것이 없으므로 조작할 것도 없고, 조작하는 것이 없으므로 빠르게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이미 빠르게 흐르는 물 같으므로 아무런 얻을 것이 없고, 이미 얻을 것이 없으므로 몸이 피안(彼岸)에 다다르며, 이미 피안에 다다랐으므로 내릴[下] 것이 없고, 내릴 것이 없으므로 그 그릇[器]이 아니며, 이미 그릇이 아니므로 대응할 것이 없고, 이미 대응할 것이 없으므로 애욕을 여의며, 이미 애욕을 여의었으므로 아무런 생각이 없고, 이미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혼란을 끊습니다.이미 온갖 혼란을 끊었으므로 본래 성품이 청정하고, 본래 성품이 청정한데 이르렀으므로 더러움이 없으며, 이미 더러움이 없으므로 번뇌[塵勞]가 없고, 이미 번뇌가 없으므로 똑같은 형상이 없습니다.똑같은 형상이 없으므로 평등에 머물고, 평등에 머물므로 움직임이 없으며, 움직임이 없으므로 구할 것이 없고, 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진리[眞諦] 그대로입니다.이미 진리 그대로이므로 진실 되게 살피고, 진실 되게 살핌으로 소유함이 없으며, 소유함이 없으므로 모든 인연에 연연할 것이 없고, 모든 인연에 연연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계를 건너며, 경계를 건넘으로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들 것도 없으며, 들 것이 없으므로 내릴 것도 없고, 내릴 것이 없으므로 문(門)이 없습니다.문이 없으므로 곧 언교(言敎)를 여의고, 언교를 여의었으므로 문자의 구절[識句]을 초월하며, 문자의 구절을 초월하므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처소가 없으며, 처소가 없으므로 처할 곳이 아니고, 처할 곳이 아니므로 씨를 뿌릴 수 없으며, 씨를 뿌릴 수 없으므로 뿌리와 싹이 없고, 뿌리와 싹이 없으므로 무위입니다.모든 의식의 자취를 벗어나 고요하게 되며, 고요하게 되었으므로 끝내 맑고 깨끗해지고, 이미 맑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 없으며,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 없으므로 한(恨)이 없고, 끝내 한이 없으므로 분명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며, 분명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므로 다시 더 일으킬 것이 없고, 다시 더 일으킬 것이 없으므로 평등한 무위(無爲)의 도로 돌아가니, 이것이 법이라는 것입니다.사리불이시여, 일체의 법이 이러하고 경전의 법을 설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인데, 그 바른 견해란 어떤 모습입니까? 그 바른 견해란 곧 자기의 몸부터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니, 자기의 몸을 평등하게 관찰함으로서 합쳐져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여의며, 또 합해져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여읨으로서 그 평등한 것에 있어서도 평등이라 보지 않고, 바라보는 모든 소견에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시여, 이것이 법률(法律)을 드날리는 현성의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무언보살이 다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사리불이시여, 만약 무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집착에 평등한 것이거나 또한 혜명(慧明)으로 해탈의 일에 평등한 것이거나, 멸도(滅度)에 평등한 것이거나 이러한 평등을 이룩함에 있어서 조작함도 없고 조작하지 않음도 없는 이것이 바로 평등하게 도달하는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고, 거기에 어떤 보이는 것이 있더라도 다른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또 다음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리불이시여, 또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모습에 평등할 수 있거나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해탈문의 해탈의 모습에 평등한 것은 곧 똑같은 모습이 되며, 모습 없이 돌아가고 이미 돌아갈 수 있다면 이것이 평등한 일이니, 곧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또 바른 견해에 처한다는 것은 모든 평등함에 처하여 두 가지 일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두 가지 일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서로 호응함에 머물지 않으며, 이미 서로 호응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얻는다고 해도 머무르지 않고, 일체에 평등하여 특별하게 여기거나 차별을 두지 않는 그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또 두 가지 없이 평등함이란 곧 중생에게 평등한 것이고, 곧 모든 부처님께 평등한 것이며, 곧 모든 법에 평등한 것입니다. 이미 모든 법에 평등하다면 곧 모든 국토에 평등하고, 모든 국토에 평등하다면 저 허공계와 평등한 것입니다. 이러한 평등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러한 평등에 머무를 수 있다면 닦는 처소가 따로 있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현의 바른 견해입니다.그러므로 사리불이시여, 여법한 모습으로 듣는 것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견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또 사리불이시여, 어르신[耆年]께서 이제 바른 견해를 일으키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법을 듣고 그 소견은 어떠한 부류입니까?”사리불은 대답하였다.
“내가 이제 족성자에게 설법을 들은 대로 그 이치의 귀결점을 살펴보건대, 어떤 강설(講說)도 모두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기는 하였지만 모두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사리불이 또 물었다.
“족성자여, 여래ㆍ지진께선 그 헤아릴 수 없는 복된 법회에서 많은 법문을 드날리셨는데, 여래의 말씀이야 어찌 모자라고 부족하겠습니까?”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설하셨지만 설하신 것 없으니 모자라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여래ㆍ지진께선 그 명예와 공덕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시고, 또 최상의 복을 희망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여래란 공덕도 없고 명칭도 없으며, 여래라는 이치마저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여래 또한 그와 같아서 근본이 없는 데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래의 최상의 공덕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이를 희망하는 것이 바로 평등함이 없는 것이고, 또한 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음에도 치우침이나 삿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희망하는 것이 있다면 곧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입니다.”사리불은 다시 물었다.
“족성자여, 설법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4대(大)와 5음(陰)과 6입(入)이 없으므로 받들어 받아들이지[頂受] 않고, 불러서 이룩할[招致] 것도 없고 행할 어떤 것도 없으며, 언사도 없고 가르침[誨]도 가르치지 않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도법에 대해 심(心)ㆍ의(意)ㆍ식(識)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그 법은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심ㆍ의ㆍ식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됩니다.만일 모든 법에 조작함이 있거나 조작함이 없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만일 모든 법에 조작함도 조작하지 않음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모든 법에 대해 분별할 것이 있고 제거해야 할 것도 있으며 행할 것이 있고 증득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입니다.만약 훤히 깨칠 것도 없고 제거해야 할 것도 없으며 또한 행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들을 것도 설할 것도 없는 법에서 어떤 소견을 가져 교화하고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하여 알음알이를 일으킨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모든 세계에 행할 것이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또 어떤 공덕과 결함을 분별하여 본다면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만일 그 소행에 결함이 없고 공덕이나 칭찬도 없고 또 소견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그때 부처님께서 무언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그 누구라도 법을 강설하려고 한다면 이와 같이 강설해야 할 것이니라.”그때 1만 2천의 보살들이 설법을 듣고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無生法忍)을 얻었다.무언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여래께서 여러 보살들에게 강설하신 4력(力)을 제가 기억하건대, 첫째는 믿음의 힘이고, 둘째는 정진의 힘이며, 셋째는 의지의 힘이고, 넷째는 지혜의 힘이라고 하셨나이다. 원컨대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이 네 가지 힘을 자세히 분별하여 말씀해 주소서. 보살이 그 믿음과 정진과 의지와 지혜의 힘을 독실히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무언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자세히 듣고서 잘 기억하여라.”“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무언보살은 분부를 받들어 설법을 들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가령 보살이 모든 불법을 믿되 기꺼이 사랑하고 순종하여 의심하지 않고 주저하지도 않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도를 구할 때 이 경전에 뜻을 두어 사모하고, 게으르지 않고 겁내거나 약해지거나 물러서지 않는다면 곧 정진의 힘이니라.그 뜻을 거두고 공덕의 뿌리를 모아서 잊어버릴 것이 없고 그 마음이 어지럽지 않아 불도를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며 진정한 마음을 일으켜 도를 힘써 돕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일체의 법에 대해 밝은 지혜를 닦아서 다른 지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자유로움을 얻고 지혜가 거리낌이 없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부처님께서 또 다시 무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성현을 믿음으로서 3계에서 홀로 뛰어나 의심되거나 어려운 일이 없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정근(精勤)을 베풀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순종한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마음으로 현성이 선설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성현을 따라 지혜와 경전의 근본을 듣는다면 받들어 행할 수 있으니,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가령 죄복(罪福)의 과보를 독실히 믿어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해야 할 일을 부지런히 수행하면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일으키는 업을 끝까지 그만두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죄와 복에 대한 갚음을 깨달아 일체의 법을 분별한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무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보살의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어서 그 마음을 감싸안아 불도의 가르침에 수순할 수 있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이끌어서 받아들이는 마음을 잘 길러낸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그 마음을 항상 전일한 마음에 순응하게 한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마음으로 일체 모든 법을 허깨비처럼 관찰한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일체의 법을 모두 다 공하다고 믿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정진을 닦음으로서 모든 얽매인 소견에서 벗어난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안팎의 공한 이치를 듣고서도 두려운 마음을 느끼지 않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끝내 공하고 본말(本末)이 모두 공함을 관찰한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상(相)도 없고 원(願)도 없어서 일체의 법에 조작하려는 행이 없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이러한 도법(道法)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분별하여 해설한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가령 모든 법에 이렇게 생각하되 하는 행동이 편안하고 자상하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과거에 강설한 일체의 법에서 올바르고 선창(宣暢)해야 할 것을 함께 해서 선창하며, 추구하는 어떤 것도 영원히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일찍이 모든 대도에서 마음으로 가진 것을 스스로 버리고자 하여 믿고서 보시하기를 생각한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버릴 것이 있지만 게으름을 품지 않는다면 이를 정진의 힘이라 하며,2) 겁내거나 어긴 적이 없고 내 것을 버려서 남에게 보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힘써 돕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보시하는 자도 없고 보시 받는 자도 없으며 그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계율을 받들어 행하되 진정한 계율의 과보가 실재함을 믿고서 성취한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정진을 닦음으로서 파계하려는 마음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언제나 도심(道心)을 기억하여 잊지 않음으로서 계율을 존중하되 모두 일체지(一切智)를 힘써 돕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몸은 그림자와 같고 말은 메아리와 같고 마음은 허깨비와 같다고 보며, 계율에 대해서도 아무런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한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인욕을 성취하되 인욕에 대한 위세(威勢)를 믿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정진을 행하기 위해 온갖 생각을 용납하지 않고, 거친 말을 연출하여 남에게 퍼부으려 하거나 삿된 길을 따르지 않으며, 설령 온몸의 살과 팔다리가 갈기갈기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욕의 힘을 모아 조금도 성내지 않고 더욱 자비로운 마음으로 인욕한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인욕을 행함과 동시에 인욕하는 마음으로 일체지를 힘써 돕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몸에 대한 의식이 없음으로써 마침내 몸과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도법을 위해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이 도법을 믿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돈독한 신심을 일으킨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잠시라도 정진을 버리지 않고서 항상 정진을 행하되 집착하는 일 없이 다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올바른 경전을 옹호하고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으며, 일체중생을 위해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고 수순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치장하며 명칭과 공덕을 갖춘다면 곧 정진의 힘이니라.모든 중생의 성냄과 미워함과 게으름과 더러움을 모두다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공덕의 갑옷[德鎧]을 입고서 정진을 닦아 곧 일체지를 힘써 돕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도에 대한 생각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위의와 예절의 올바름을 잃지 않고, 법을 선택하여 정진함으로서 일체 모든 법의 처소에서 거리낌이 없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고요한 처소에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온갖 모임을 좋아하지 않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선정을 일으킨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정진을 행하고 선정을 닦아서 해탈문의 삼매에 든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어떤 처소에 있더라도 선정을 닦음에 있어서 동요하지 않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니라.모든 상대하는 외부 경계에 오롯한 마음으로 관찰하되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함과 나 없음을 깨달아 선정을 어지럽히지 않고 선정을 가볍게 업신여기지도 않고 선정에서 물러서지도 않으며 훌륭한 방편으로 알맞게 한다면 그것이 곧 훌륭한 방편으로 이끌고 나아가 지혜의 힘을 이룩함이니라.또 모든 도무극(度無極)과 도품(道品)의 법을 듣고서 들은 그대로 믿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들은 일체를 잊지 않고 굳게 간직했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방편을 찬탄하고 법을 베풀어주되 만약 잘 받들지 않는 이면 잘 받들고 따르도록 하여 스스로 본말(本末)을 살피도록 한다면 곧 정진의 힘이니라.중생계에 처해서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애욕 속에 노닐면서도 연꽃처럼 더럽혀짐 없이 일체 중생을 교화한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3계가 공함이 마치 물거품과 파초와 아지랑이와 그림자와 메아리와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여 듣지 못한 이들에게 열어서 보여준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자비롭게 중생들을 대해 그 인자함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크고 자비한 마음을 믿어서 마음으로 일으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곧 정진의 힘이며, 마음으로 바른 경전을 좋아하여 법의 즐거움을 버리지 않고서 항상 받들어 행한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마음에 집착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고 차별을 두지 않고 스스로가 정진도 정진 아님도 없이 고요한 관찰로서 바른 법을 수행한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사람의 몸을 생각하되 ‘몸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악과 번뇌로 더럽혀지고 황폐하고 어지러운 온갖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영구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도 독용이나 독사와 같은 이 몸에 공양하고 그런 몸으로 삿된 행을 일으킨다’고 이렇게 훤히 깨닫는다면 곧 믿음의 힘이고, 금방 온갖 고통의 환란에 빠지고 온갖 번뇌에 헤매는 것이 바로 생사의 이치임을 깨달아 불법을 관찰한다면 곧 정진의 힘이니라.가령 마음이 착하지 않은 곳을 따라 변하려 하더라도 끝내 착하지 않은 곳을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성문ㆍ연각도 따르지 않으며 마음이 더러운 욕심과 탐욕과 질투에 따르지도 않고 마음이 파계한 자나 나쁜 지혜를 지닌 자를 다르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곧 의지의 힘이고, 법의 지혜에 들어가 지혜의 구절을 분별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지혜를 선창(宣暢)하고 몸으로 깨닫는다면 곧 지혜의 힘이니라.또 환희심을 내는 것이 믿음의 모습이고 물러나지 않는 것이 정진의 모습이며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의지의 모습이고, 이치를 모두다 깨닫는 것이 지혜의 모습이다. 믿음의 힘을 실천하고 정진의 힘을 버리지 말며, 의지의 힘을 잃지 말고 지혜의 힘을 닦아 병에 맞게 약을 주듯 사람들에게 설법하라.모든 장애를 훤히 깨닫는 것이 돈독한 믿음이고, 모든 장애를 건너는 것이 정진이며, 다시 집착할 것 없는 것이 의지이고, 장애를 잘 살펴서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불법을 좋아하여 독실한 믿음을 일으키고 돈독한 믿음을 일으킴으로서 도를 구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 믿음의 힘이고, 온갖 행을 닦아서 도품(道品)의 법을 쌓는 것이 정진의 힘이니라.법인에 유순(柔順)한 것이 의지의 힘이고, 무소종생법인을 얻게 된다면 지혜의 힘이니라. 믿음의 뿌리가 바로 믿음의 힘이고,3) 정진의 뿌리가 바로 정진의 힘이며, 의지의 뿌리가 바로 의지의 힘이고, 선정의 뿌리로 대성(大聖)의 뿌리를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지혜의 힘이니라.”부처님께서 이 네 가지 힘을 말씀하시자 그때 8천 보살은 무소종생법인을 얻고 4만 2천 사람들은 모두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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