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마역경(佛說魔逆經)
불설마역경(佛說魔逆經)
서진(西晋) 삼장 축법호(竺法護) 한역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 무리 1천2백50명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보살마하살 및 욕계천(欲界天)ㆍ색계천(色界天)ㆍ정거천(淨居天)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은 수없는 대중 권속(眷屬)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경법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좌중에 한 천자가 있었으니 이름은 대광(大光)인데, 문수사리(文殊師利)를 곁에서 따르고 있었다.
이에 대광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부처님 말씀에 ‘모든 보살이 마사(魔事)가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마사라고 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일으키는 업이 있고 하는 일이 있다면 마사가 된다. 만일 뜻[志願]을 받아 가지거나 빼앗는 데 둔다면 마사가 되고, 가령 애욕과 생각[思想]에 집착하고 의식하여 구하고 바란다면 마사가 된다.
또한 그대여, 치우치고 집착한 보살이 뜻을 일으켜 도(道)에 이르려 한다면 마사가 되며, 마음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일심(一心)에 기대고, 그리고 지혜에 의지한다면 마사가 되며, 보시를 의식하여 생각하며, 지계에 망상(妄想)하고, 인욕에 대하여 느낌이 있고, 정진에 방탕하고 게으르며 선정에 기대고 오로지 지혜에 지나친다면 곧 마사(魔事)가 된다.
또한 그대여, 마음이 한가함을 좋아하되 관법(觀法)을 얻고자 행한다면 마사가 되고, 만일 만족할 줄을 알아서 혼자 있되 명예와 공덕에 한계를 긋기를 생각한다면 마사가 된다.
만일 공무(空無)를 행하고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에 의지하여 게으름 없음을 수행하면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언교(言敎)에 머문다면 마사가 된다.
그대여, 설령 생각하고 의식하고 기억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있으며, 뜻이 응하는 곳에 머물며,
듣고 기억하고 알면서 경전을 분별하면 모두 마사가 된다.”
대광이 문수에게 물었다.
“그 마사는 어느 곳에 머뭅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정진에서 머문다.”
또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정진에서 머뭅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정진이란 모든 마(魔)가 그 편리함을 구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니, 만약 게으른 자라면 저 마파순(魔波旬)인들 제가 어떻게 하겠는가.”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서 보살이 정진하되 응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가령 내가 정진을 했다고 헤아려서 말한다면 응하지 않음이 된다. 왜냐 하면 자신이 정진을 하였다고 해서 응할 바를 헤아린다면 곧 세간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여, ‘정진을 알고자 한다면 평등히 따라 수행하라’는 말은 이것을 일컫는다.
평등하게 정진한다면 평등하여서 응하여 나아가는 바도 없다고 이르나니, 이미 응하는 바 없으면 게으름이 없게 마련이다.
그대여, 설령 눈이 응하는 바 없고 색(色)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평등한 정진이라 이르며, 귀가 응하는 바 없고 소리에 행하지 않고, 코가 응하는 바 없고 여러 냄새에서 행하지 않고, 혀가 응하는 바 없고 여러 맛에서 행하지 않고, 몸이 응하는 바 없고 촉감[細滑]에서 행하지 않고, 뜻이 응하는 바 없고 모든 법에서 행하지 않으면 이를 평등한 정진이라 말한다.
또한 그대여, 설령 일체 번뇌를 짓지 않아서 중생의 애욕과 더러움을 끊게 한다면 이를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 이르며, 만일 삼계에서 짓는 바 없이 삼계 중생의 모든 번뇌로 인한 환난을 구제한다면 이것이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 된다.
보시를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4은(恩)을 행하여 모든 욕심과 인색한 이를 거두어들이며, 계율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모든 악을 범한 중생을 거두어들이며, 인욕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모든 성내는 사람들을 거두어들이며, 정진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모든 게으른 이를 거두어들이며, 선정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모든 어지러운 뜻을 거두어들이며, 지혜를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모든 나쁜 지혜를 거두어들이면, 이것이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 된다.”
문수사리가 다시 대광에게 말하였다.
“그 공무(空無)의 지혜를 환히 깨우치고도 공무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이 생각[思念]이 되며, 정진하여 공을 행하면서도 모든 견해에서 노닐며, 모든 견해를 모조리 관찰하면서도 보는 바가 없으며, 모든 삿된 견해를 관찰하면서도 공무를 떠나지 않으면 이것이 공을 행함[行空]이다.
이른바 공이란 곧 모든 견해가 곧 공이니, 이것을 배우는 까닭에 공공(空空)이라 이르고, 이 공공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공이 되고, 이 공을 반연한 까닭에 모든 법이 모두 공하다. 설령 이 지혜를 환히 깨우치고도 스스로 큰 체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 한다.
또한 천자여, 이 상착(想着)하는 바 없음을 수행하면서 생각[想]함이 없음을 기억하지 않고, 모두 일체 여러 기억과 함께 노닐되 뭇 기억들을 버리지 않으며, 여러 기억하는 것을 두지 않아서 기억하는 바에 생각함이 없고, 생각하는 바에 기억함이 없되 모든 생각과 일체 기억에 평등해야 한다. 만일 능히 이 지혜로 일체 생각과 기억을 환히 깨우치고도 지혜로써 교만하지 않는 이는 게으르지 않으므로 이것이 보살의 정진행이 된다.”
문수사리는 다시 대광에게 말하였다.
“그 원 없음[無願]을 행하여 마음 따라 나[生]는 것과 바라는 것을 마음에 집착한 바 없으며, 그 원과 여러 갈래[趣]의 나는 바를 행하지 않아서, 모든 견해와 거세게 흐르는 물을 이미 떠나며, 이 두 가지를 버려서 몸이 있다거나 내가 없다고 헤아리지 않고 평등하게 처음과 끝, 태어남과 죽음을 없애나니, 능히 이 같은 정진을 행한다면 이것은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 된다.”
문수사리는 다시 대광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언제나 평등으로써 수행하고 그 지혜와 현성의 밝음[聖明]의 통달에서 수행하는 바 없이 훌륭한 방편을 알아 모든 덕의 근본을 거둬들여야 한다. 분별하는 지혜[分別慧]란, 나[我]도 없고 남[人]도 없고 수(壽)도 없고, 명(命)도 없으니, 훌륭한 방편으로 정진하여 일체 중생을 깨우치고 인도함이다. 현성의 밝음의 통달이란 일체 법에 응함도 응하지 않음도 없고 청정함도 청정치 않음도 없는 것이요. 훌륭한 방편을 환히 안다는 것은 정진하여 일체 바른 법을 거둬들이는 것이요, 지혜로 나아감이란 일체 무너지지 않는 법계(法界)를 모두 다 환히 아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환히 안다는 것은 수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요, 지혜를 통달한다는 것은 거룩한 무위(無爲)법에 나아가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일체 문자(文字)의 갖가지 다른 점을 널리 펼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부처님 몸을 수행하여 번뇌[漏]가 없음을 아는 것이요,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이란 32대인상을 얻어 스스로 장엄하는 것이다.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모든 나고 죽는 이로 하여금 나지 않게 함이며,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생각하는 바가 중생에게 향하는 것이요,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공과 무상과 무원을 수행하는 것이고,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이란 62소견의 집착과 뜻에 구하는 바 있는 것을 끊어 없애기를 선포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정진하기를 권유하여 6신통에 이르는 것이고,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이란 신통한 변화로 구제하는 바가 많은 것이다.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정진하여 모든 음(陰)과 입(入)의 온갖 쇠퇴하는 액난을 보지 않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이란, 모든 음(陰)과 입(入)의 중생을 붙잡아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열반의 청정한 본성을 수행하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마땅히 수행해야 할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도를 깨달아 가르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혜안(慧眼)을 얻어 보는 바가 끝이 없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천안(天眼)을 얻어 모든 집착한 이를 개화하는 것이다.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정진을 해야 할 법을 얻지 않는 것이요,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도 문자를 펼쳐 법을 강설하는 것이다.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모든 법의 이치의 갈래를 분별하는 것이고,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자재(自在)한 변재혜(辯才慧)로써 연설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모든 근기가 각기 다르고 마음이 똑같지 않음을 환히 아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완전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고 지혜가 성스럽다는 것은 8만 4천 모든 행을 식별하여 통달하는 것이고, 훌륭한 방편을 안다는 것은 능히 일체 중생을 위하여 8만 4천 품(品)의 모든 법장(法藏)을 선포하고 가르쳐 보여 주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이 평등히 수행하는 정진이 되는 것이다.”
문수사리가 이 평등한 정진을 분별하여 설명해서 모인 대중에게 보이자 때에 8천 명의 천자는 곧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도의 뜻을 일으켰고 5백 명의 천자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세존께서 곧 문수사리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장하구나. 그대는 이 모든 보살의 갖가지 평등한 행을 거침없이 말하였도다.”
이에 대광은 문수에게 물었다.
“여래께서 그대를 칭찬하시니 뛸듯이 기쁘십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化人]이 요술 부리는 사람[化者]에게 칭찬받는다면, 그 만들어진 이가 과연 뛸 듯이 기뻐하겠는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만들어진 사람은 걸리는 바도 집착하는 바도 없고 또한 받아들이는 바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였다.
“그렇다. 모든 법의 자연(自然)의 모양은 모두 다 허깨비[幻化]와 같으며, 여래의 모양도 또한 그와 같거늘, 내가 무슨 까닭에 뛸듯이 기뻐하겠는가.
마치 울리는 메아리가 좋고 나쁜 소리에 관계되는 바도 없고 또한 받아들이는 바도 없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다. 울리는 메아리가 본래 모두 다 청정하듯이 여래와 문수도 그 청정함이 또한 같거늘 내가 무슨 까닭에 뛸 듯이 기뻐하겠는가.”
대광은 또 물었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 당신을 칭찬하셨습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그 선포하는 데 있어 지혜를 내세운 바 없었으므로 이에 여래에게서 칭탄을 받은 것이다.
모든 말에 걱정과 슬픔을 품지 않고 또한 더하고 감함이 없으며, 모든 중생에게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고, 일체 법에 법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열반에 뜻을 두고 생사를 대치(對治)하되 마사를 깨우쳐 불도(佛道)의 업을 알며, 마사에서 진리를 환히 깨달아 불법과 마사를 분별하여 마사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법에도 의지하지 않나니, 이같이 행하는 이는 곧 여래의 칭찬을 받게 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그대가 이 같은 법을 받들어 행하신 까닭에 여래께서 찬탄하신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저 평등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치우치거나 무리 짓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저 평등하다는 것이 치우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이른바 평등이란 모든 거스름[逆]에도 평등하고 또한 나[吾]에도 평등하고 모든 4대(大)에도 평등하고 또한 견해에도 평등하므로, 나(문수)의 평등함도 또한 그와 같으며, 모든 쌓임에도 평등하고 네 가지 뒤바뀜에도 평등하므로 나도 평등함이 또한 그러하며, 순조롭지 않고 어긋나는 일과 얻으려고 애쓰는 것에도 평등한 것처럼 나의 평등함도 또한 그와 같다.
생사에 평등하고 근본과 끝에 평등한 까닭에 행(行)과 원(願)에도 평등하고, 생사의 근본과 열반의 근본에도 평등하며, 열반의 근본에 평등한 까닭에 모든 근본에도 평등하다는 것이다.
근본이 평등한 까닭에 나에도 평등하며, 이미 나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무명(無明)과 은애(恩愛)의 근본에 평등하며, 무명과 은애의 근본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밝고 환한 해탈(解脫)의 근본에도 평등하다. 밝은 해탈의 근본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음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에도 평등하며, 이 3독(毒)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공과 무상과 무원에도 평등하며, 이 3해탈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유위(有爲)의 근본에도 평등하며, 유위의 근본에 평등한 까닭에 또한 무위의 근본에도 평등하며, 무위법의 근본에 평등한 까닭에 문수의 평등함도 또한 그와 같다.
대광이여, 그러므로 이 평등한 이는 모든 법에도 다 평등한 것이다.
내가 지금 선포하고 연설하다가 부처님에게 찬탄받은 것이다.
모든 법은 다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은 반듯하고 평등하여 치우침도 없으며, 허공은 헤아릴 수도 없고 또한 행위하는 바도 없는 것이다. 만약 그대들이 여기에 나아가 익히고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그대를 찬탄하실 것이다.”
대광은 또 물었다.
“어찌 착한 법[善哉法]과 착하지 않은 법[非善哉法]을 말씀하십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보살의 착한 법은 진실한 뜻과 소원에서 나오니 아첨하여 솔직함이 없고 행위가 게으르면 착하지 않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여 매우 불쌍히 여겨서 버리지 않으면 착하다고 말하고, 만일 인자(仁慈)함을 품지 않아 중생을 해치려고 생각한다면 착하지 않은 것이 된다. 만일 능히 일체 중생을 가엾고 불쌍히 여긴다면 착하다 이르고, 성냄을 품어 인욕을 떠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만일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계율을 따르며 잘못이 있을 때 진실하게 자수하여 숨기지 않는다면 착하다 이르고, 잘못을 가려서 드러내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자신의 나쁜 것을 보고 능히 고친다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남에게서 흠집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만일 자신을 반성하고 은혜 입을 것을 알고서 마음에 해치려는 생각을 품지 않고 효순(孝順)하고 인(仁)을 행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자신을 돌이키지 않고 마음에 항상 해치려는 뜻을 품고, 돌이킴을 떨어뜨려 효순을 행하지 않고 은혜 갚을 줄을 알지 못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능히 따라 행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경전을 듣고도 공경하고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계율을 받들어 행하되 빠뜨리거나 거스린 적이 없으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계율을 받고도 순종치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항상 고요한 곳에 머물러 그 마음이 고요해지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방탕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한가한 곳에 머물러 몸과 목숨을 버리더라도 애착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자기의 몸과 목숨에 탐애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4현성(賢聖)의 법을 닦고 만족하며 그치고 조절할 줄 안다면 착하다 이르고, 나아가고 물러갈 줄을 알지 못하며 구하는 것이 많고 악한 일을 좋아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사람됨은 생겼어도 능히 인욕을 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해치려는 마음으로 여러 사람에게 향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모든 욕심을 스스로 능히 조절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사람됨이 느슨하여 능히 삼가지 못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귀의해야만 할 것을 한번도 잊어버리거나 저버리지 않는다면 착하다 이르고, 본래 귀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위의(威儀)와 예절(禮節)의 바름을 환히 깨우쳐 행위가 진실하고, 하는 일이 말과 같아 마음과 행위가 서로 부합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일체 세간을 속이고 미혹시킨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바른 법을 받들어 옹호하고 떳떳한 경전을 어기지 않는다면 착하다 이르고,
경전을 비방하고 바른 이치를 어긴다면 착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에 들은 경전을 비방하지 않고 아무리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어도 교법을 선포하되 아무것도 바라는 바 없다면 착하다 이르고, 경법을 사랑하고 아껴서 스승이라 자칭하고, 경법을 말할지라도 항상 망상을 품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권방편을 가져 중생을 개화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중생을 보호하지 않거나 권방편이 없거나 네 가지 은혜를 행하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만일 능히 6바라밀[度無極]을 따라 수행하여 은근히 사모하고 구한다면 착하다 이르고, 만일 6바라밀을 버린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지혜로운 업을 지어 거룩한 도를 이룬다면 착하다 이르고, 잘난 체하여 멋대로 방탕하고 교만한 업을 짓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굳건한 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가엾고 딱하게 여긴다면 착하다 이르고, 자심(慈心)을 빨리 행하려고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바가 넓지 못하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10선(善)을 받들어 행하여 큰 도를 어기지 않는다면 착하다 이르고, 멋대로 희롱하고 스스로 방탕하여 10악을 행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며, 만일 능히 모든 악을 버린다면 착하다 이르고, 모든 악과 법 아닌 일을 따른다면 착하지 않다 이른다.
대광이여, 출가(出家)의 법을 알려고 하면서 뒤바뀌어져서 행을 따르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고, 공과 무상과 무원을 좋아하여 구족하고 성취한다면 착하다 이르며, 억지로 높은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잡된 구절과 세간의 이야기를 연설하여 세속을 따라 같이 한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고, 만일 보살의 비밀스런 경전[篋藏之典]을 얻어서 익히고 행하여 사자좌에 올라 교법을 선포하고 연설한다면 착하다 이른다.
계율을 헐고도 신도들의 보시를 받는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고, 계율을 맑고 깨끗이 받들어 행하면서 모든 공양의 이익을 받는다면 착하다 이르며, 스스로 잘난 척하고 교만을 부리며 경법을 시샌다면 착하지 않다 이르고, 자신을 낮추고 공손하여 거만하거나 방자함을 품지 않고 남의 덕을 칭찬한다면 착하다 이르며, 보살의 훌륭한 행을 시샘하면 착하지 않다 이르고, 여러 보살을 보고 공경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한다면 착하다 이른다.
대광이여, 그러므로 만일 부처님의 말씀하신 그 법대로 행하는 이를 그릇되었다고 하여 멀리하여 훌륭한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두 착하지 않다 이르고, 여래의 가르침을 순종한다면 착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광은 또 물었다.
“무슨 까닭에 법을 찬탄하기를 착하다고 합니까? 법에는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나는 모든 법에 대하여
착함을 행하지도 않고 또한 착하지 않음을 행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전부 합하는 바도 없고 또한 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착한 법과 화합하지 않았습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나는 착한 법과 화합하지도 않고 또한 악한 법과 화합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집착을 몹시 억측한다면 유위법이라 부르고 그 집착이 없으면 무위법이라 이르며, 덧없는 것임에도 억측한다면 이에 또한 유위법이니 스스로 몸이 있다고 억측하여 본래없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당신의 지극한 덕 또한 유위법이며, 내가 있다고 억측합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만일 내가 유위법을 억측하여 몸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곧 두려움에 떨어질 것이다.”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유위법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유위법을 보아 마지막을 성취하고 영원히 있어 멸진(滅盡)이 없다면 나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유위법을 보지 않고도 성취합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무위법도 보지 않고서 성취하는데, 하물며 유위법을 보고서 성취하겠는가.”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유위입니까, 무위입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유위도 아니요 또한 무위도 아니다. 왜 그러는가. 만약 유위라면 곧 어리석은 범부(凡夫)와 같을 것이고, 무위라면 곧 성문(聲聞)ㆍ연각(緣覺)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만일 당신이 유위도 아니고 또한 무위도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가르침을 지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비유하자면 요술로 만들어진 이가 생겨나게 된 것처럼 법을 지니고자 하는 자는 또한 그와 같아야 한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여래의 신식(神識)은 어느 곳에 머무는가? 색(色)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느낌[痛癢: 受]과 생각[思想: 想]과
생사(生死: 行)와 의식[識]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인가?”
“아닙니다.”
“유위법이나 무위법에 머울러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래의 신식은 어느 곳에 머무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문수시여, 여래의 신식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만일 여래의 신식이 머무는 곳이 없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가 머무는 바와 같이 받아 지녀야 한다.”
그러자 다시 문수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이 여래이십니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그 본래 없는 것은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주선(周旋)함도 없나니, 내가 말미암아서 온 곳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나의 온 바도 또한 여래와 같고, 여래의 오신 바처럼 또한 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도 여래가 되는 것이며, 여래가 머무는 것처럼 또한 나의 머무는 것도 그와 같으니 그러므로 나도 여래가 되는 것이며, 여래도 본래 없고 문수사리 또한 본래 없는 까닭에 ‘본래 없다’고 이르나니, 이런 까닭에 나도 여래가 되는 것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그 본래 없는 것이란 마땅히 어디로부터 구하여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그 본래 없는 것이란 마땅히 62견 속에서 구해야 한다.”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여래의 해탈 속에서 구해야 하며 성냄을 품지 않는 데서 구하는 것이다.”
“여래의 해탈과 성냄을 품지 않는 것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중생의 뜻과 행 속에서 구해야 한다.”
“중생의 뜻과 행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 속에서 구해야 한다.”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중생의 모든 근기가 각기 다른 근본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구해야 한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시여, 지금 하신 말씀은 저는 알지 못하겠으며, 이해하지 못하니 분별하지 못하겠고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대답하였다.
“여래의 지혜는 능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까닭입니까?”
“여래의 지혜는 걸림도 없고 또한 생각도 없으며 이루 얻을 수도 없고 말씀도 없고 또한 행도 없으며, 마음과 뜻과 의식도 없고 말과 가르침에서 떠나있으니, 이런 까닭에 능히 아는 이도 없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시 또 문수에게 물었다.
“만일 여래의 지혜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모든 성문들은 어떻게 환히 깨우쳤다고 하며, 무슨 까닭에 보살은 물러서지 않는 자리에 머물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여래 지진(至眞:부처님)은 훌륭한 권방편을 내어 때에 따라 문자(文字)와 말씀으로도 법을 널리 펴시며, 그 지혜란 문자가 없으니 마치 물 속에서는 불이 나오지 않고 나무를 비벼야지만 불을 구할 수 있고, 또한 화경(火鏡)을 비춰야 불이 나오는 것과 같다.
여래는 이렇듯 위신(威神)이 거룩하고 도의 지혜가 그지없어 본무(本無)의 지혜를 자세히 분별하고 해설하지만 능히 여래의 거룩한 지혜를 아는 이가 없다. 여래의 거룩한 지혜는 모든 어리석고 어두우며 우매한 초목들을 불태워 다시 자라나지 않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어리석고 어두우며 우매한 초목들을 불태워 없앤다고 하는가. 모든 분별하는 뭇 행의 마음으로 도법품(道法品)과 6바라밀(波羅蜜)과 모든 도무극을 널리 펴는 것이다.”
또 물었다.
“풀과 나무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또한 질병(疾病)도 없을진대 다시 무엇을 설해 주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연설하는 바는 연기분(緣起分)도 아니고, 설해지는 바는 훼손되지도 않고 화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선포된 바는 생사를 설한 것도 아니요, 열반법의 기르침도 아니며, 제거되는 것도 없고 끊어짐도 없고 증과(證果)에 나아감도 없고 준수하여 닦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돌아감도 없나니, 이 같은 말이 이에 적정하고 요긴한 말씀인 것이다.”
천자는 아뢰었다.
“미치기 어렵고 미치기 어려우며 전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수사리시여, 지금 말씀하신 것은
미묘하고 거룩하고 끝이 없는 지혜로서 이렇듯 범상치 않으니 저 마파순이 행패를 부리러 여기에 오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파순이 허공에 나타나 큰 구름과 비를 일으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가 널리 일체 대중의 모임에까지 들리자 그곳에 모인 이들은 각기 속으로 생각하였다.
‘대체 무슨 소리가 이렇게 흘러나오는가?’
이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찌 마가 일으키는 행패를 보고만 있는가?”
“알겠습니다. 천중천(天中天)이시여.”
문수사리는 바로 여기상(如其像)삼매의 사유에 들어 마파순으로 하여금 저절로 묶여져 아래로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원망하며 분노에 가득 차 욕을 퍼부었다.
“문수사리여, 이제 어찌 쇠사슬로 나의 몸을 묶어 놓았는가?”
문수는 대답하였다.
“가엾다. 마파순이여, 이보다 더 견고하여 쉽게 풀지 못하는 속박에 지금 묶여 있거늘 너는 깨닫고 있지 못하구나. 무엇이 견고한 속박인가. 나라는 것과 뒤바뀜과 애욕과 모든 삿된 견해의 속박과 인연의 속박을 말함이니, 그대는 항상 이런 쇠사슬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마는 다시 여쭈었다.
“그저 바라오니 저를 풀어 주소서.”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그대가 불사(佛事)를 짓는다면 내가 그대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겠노라.”
마는 곧 대답하였다.
“저는 불법을 방해한 일도 없고 또한 파괴한 일도 없는데 무슨 까닭에 불사를 지으라고 하십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마파순이여, 만일 불사를 짓는다면 이에 보살의 지혜와 변화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불사를 짓는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요, 마가 불사를 지어야 기특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에 문수사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여기상삼매의 사유에 들어 마파순으로 하여금
부처님 모양처럼 변화시키고 32상으로 그 몸을 장엄하고 사자 좌에 앉혀 지혜와 변재로써 말하는 바가 부처님과 같게 한 뒤에 이런 말을 하게끔 하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모든 의심스러운 점을 마음껏 말하라. 내가 마땅히 그를 위하여 의심을 없애 주겠노라.”
때에 대가섭(大迦葉)이 마파순에게 물었다.
“비구의 수행에 무엇을 속박이라고 하는가?”
마는 곧 대답하였다.
“가섭이여, 내가 선정을 한다고 굳이 헤아려서 뜻을 고요하게 만들며,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데는 공의 생각으로 주인을 삼으려 하며, 여러 소견을 헐어 버리는 데는 무상(無相)의 생각으로 주인을 삼으려 하며, 여러 생각이 일어나는 데는 무원(無願)의 생각으로 제어하려 하며, 모든 원하는 것을 품는 데는 열반의 생각으로 제어하려 하여 무위법을 좋아하고 생사의 생각을 헐어 버리려 하니 이것이 수행하는 비구의 속박이다.
왜냐하면 가섭이여, 알아야 한다. 굳이 모든 견해를 헐어 버리고서 공(空)을 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이른바 공이란 모든 견해가 전부 공한 것이다. 굳이 생각[想]을 헐어 버리고서 무상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왜냐 하면 그 생각하던 바가 죄다 무상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원을 헐어 버리고서 무원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원하던 바가 또한 모두 무원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생사를 헐어 버리고서 열반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생사가 얻지 못하는 경계임을 환히 깨우치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가섭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열반이란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또한 여러 집착도 일어나지 않아 이미 파괴되고 멸진한 것이니, 열반은 본래 청정하니 나고 일어나는 바가 없으면 이에 무위법이 된다.”
이렇게 말할 때 5백 비구는 마음이 청정해졌다.
그때 수보리(須菩提)가 여러 비구들에게 물었다.
“누가 여러 현자(賢者)들을 일깨워 주었던가?”
5백 명의 사람이 말하였다.
“저 얻음[得]도 없고 정각(正覺)도 이루지 못한 이가 우리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무엇을 일깨워 주었는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니 이 같은 것을 환히 깨우쳤으며,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그 지혜가 항상 머무는 것입니다.”
이를 말할 때, 2백 비구는 깨끗한 눈을 얻었다.
때에 수보리가 마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비구가 으뜸가는 중우(衆祐:세존)가 된다고 하는가?”
마는 곧 대답하였다.
“보시를 받는 바도 없고 끝내 청정함도 없으면서 믿음이 돈독하여 부처님 법을 좋아하는 자로부터 보시를 받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일 비구가 보시를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면, 그 보시하는 이는 이 비구 보기를 마치 허깨비처럼 여기고, 그 보시를 받는 이도 생각하기를 그림자처럼 여겨서 생겨남도 없고 받아들임도 없으며 마음에 집착된 바도 없고 마음에 일어나지 않음도 없으리니, 그리하면 곧 세간에 으뜸가는 중우가 되는 것이다.”
때에 사리불(舍利弗)이 마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삼매가 물들지도 어지럽지도 않다고 하는가?”
마는 대답하였다.
“생각 끊는[滅盡]삼매는 끊어지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끊어지고 생겨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못하게 되며, 모든 욕마는 다 태워 버려 근본과 끝이 청정하고 아무것도 생겨나는 바 없으며, 또한 어리석지 않아서 경과[更歷]하지 않고도 모든 법의 청정함을 환히 깨우치며 평등한 정수(正受)로써 적멸(寂滅)을 수행하여 모든 경과한 일을 관찰하고 멸진삼매에 바로 들어 관찰함도 관찰하지 않음도 없고, 또한 소견도 없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삼매가 바로 물들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것이다.”
대목건련(大目揵連)이 마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서 비구가 마음의 자재를 얻는다고 하는가?”
마는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일체를 환히 깨우쳐서 사람의 마음과 모든 법은 전부 해탈의 모양임을 끝까지 추구하여, 모든 법은 전부 해탈의 모양임을 널리 설하되 의지하는 바와 마음에 품어 두는 바가 없으며, 알려는 바도 없고 또한 생각하려는 바도 없으며, 마음에 색욕(色欲)이 없어 일체 색을 보고도 마음에 머무는 바 없으며, 모든 법도 머무는 곳이 없음을 환히 깨치며, 마음은 가히 얻어질 수도 없으며 모든 법 또한 가질 수 없음을 환히 깨우치니,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며, 마음이 저절로 청정하여지고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여 저절로 청정하여지며, 법계도 청정하여져 움직이거나 구르지 않나니, 다른 인연으로
눈앞에 바로 6신통과 4신족(神足)을 구족하여 스스로 즐거워한다. 비구가 이와 같으면 마음의 자재를 얻는 것이다.”
빈뇩문타니불(邠耨文陀尼弗)이 마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비구가 법을 말하는 것이 청정하다고 하는가?”
마는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일체 법이 모두 바라밀임을 보고 중생의 마음이 각기 다름을 두루 보아서 그 모두에 집착하는 바 없다면, 일체 생각하는 바가 같은 모양이 없다. 그 이치를 분별하고 해설하며, 일체 소리와 말씀과 이야기와 논의가 마치 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음을 환히 깨우치며, 모든 강설하는 법을 보기를 마치 요술로 만들어 낸 사람과 같다고 관찰하며, 스스로의 알음알이도 또한 물속의 달과 같이 보이며, 만일 모든 번뇌와 생각이 여러 기억[念]하는 것으로 조차 일어남을 분별한다면 법을 받아들임도 없고 또한 놓음도 없이 삼매에 든다.
법을 널리 퍼뜨리고 평등히 해탈을 얻는다면 곧 네 가지 분별변재(分別辯才)를 알아서 마음에 무엇을 바라는 바가 없으므로 사람이 모두 착하다고 칭찬한다.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의 그 마음이 청정하다면 일체 사람의 마음도 청정하게 하므로, 본래가 깨끗하고 맑고 때[垢] 없음을 환히 깨우치고 번뇌는 모두 더러움뿐임을 알아서, 모든 음마(陰魔)를 보아도 완전히 고요해지고 사마(死魔)는 머무름에 처음과 끝이 없고, 천마(天魔)는 모두 일체의 의지하고 집착된 가르침을 없앤다. 일체 중생의 마음이 깨끗함이 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비구가 이에 널리 도법을 보고 청정히 경전을 연설하는 것이다.”
기년(耆年) 우바리(優波離)가 마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비구가 법과 율을 받들어 지닌다고 하는가?”
마는 대답하였다.
“능히 모든 법을 환히 깨우쳐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주고, 모든 죄(罪)가 본래 적막함을 안다. 그리하여 망설이는 이를 가르치되, 혹 비방을 받을지라도 의심하지 않고 또한 속에 맺혀 두지도 않으며, 또한 일찍이 모든 법에 마음을 내지 않고 조어(調御)하는 바 있으며, 항상 능히 모든 거스르는 이를 제도하나니,
어찌 하물며 소소한 계율을 범한 이를 제도하지 않겠는가.
번뇌를 생각에 품어 두지 않으며, 뭇 애욕이란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안팎의 사이에도 없음을 설하려, 번뇌[塵勞]는 무각(無覺)으로부터 오며, 애욕을 품지 않으면서 또한 권화(勸化)하지도 않고, 애욕이 없는 경계에 이르러도 일어나는 바 없음을 환히 깨닫는다. 애욕을 억측함은 마치 비구름과도 같으니, 거룩한 지혜를 관찰하고 마땅히 선포할 것을 환히 깨우침으로써 설해진 바는 마치 바람이 구름을 흩어 버리듯 머무는 곳이 없다.
번뇌란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생각을 반연하여 일어나는데 그 모양이 나타나려고 하는 것은 어둠을 말미암으니, 마땅히 지혜로써 환히 비쳐야 한다. 마치 밝은 거울에 얼굴을 비치듯이 그 모양이 귀신이나 나찰(羅刹)과 같음을 살피어, 그 생각에 끌리는 데는 소견 없애기를 관(觀)함으로써, 영원히 애욕을 버리고 여러 더러움을 더하지 않아 곧 공혜(空慧)와 무상과 무원으로써 궤도에 벗어나는 바 없나니, 그 애욕을 이같이 환히 깨우친 것이다.
가사 애욕에 집착한다면 중생에게 자애(慈哀)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중생은 아[我]도 없고 몸[身]도 없으니 또한 나에 망상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관하는 이는 율법을 진실히 지닌 것이다.”
때에 큰 제자 5백 사람이 각기 자신이 알아야 할 바를 물었으며, 마파순은 각기 분별하여 설명해 주었다.
이에 제천(諸天) 가운데 수심(須深)이라 이름하는 천자가 마파순에게 물었다.
“아까 문수사리께서 모든 마사를 강의하고 설명해 주셨는데 그대가 그 이치를 되풀이하여 주겠는가. 무엇을 보살의 마사라고 하는가?”
때에 마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마땅히 알지어다. 보살의 마사는 스무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생사를 두려워하여 해탈을 얻고자 해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준수하여 익히고 닦으며
머리 굽혀 귀의하면서도 망상을 두면 곧 마사가 되며, 공무(空無)를 관하면서도 중생이 있다고 보면 곧 마사가 되며, 무위를 관하되 유위의 좋은 덕본(德本)을 싫어하면 곧 마사가 되며, 선정(禪定)에 들었으되 한결같은 마음을 구하지 않고 이미 물러가면 곧 마사가 되며, 법을 널리 펴면서도 듣는 이를 위하여 크게 가련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마사가 되며, 계율을 구하고 중우(衆祐)를 공경하면서도 성내며 계율을 헐면 곧 마사가 된다.
성문과 연각의 한 가지 일은 연설하면서도 대승법을 묻는 데 크고 세밀한 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곧 마사가 되며, 심묘한 법을 열어 주거나 받으면서도 법을 싫어하고 잡된 말을 하면 곧 마사가 되며, 6바라밀을 구하면서 스스로 보살이라고 부르면 곧 마사가 되며, 적정하고 담연(淡然)한 일을 묻고 찬탄하면서도 중생을 교화하는 데 권방편이 없으면 곧 마사가 되며, 여러 덕의 근본을 쌓으면서도 도의 마음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곧 마사가 되며, 쉬임없이 부지런히 적관법(寂觀法)을 수행하면서도 관하는 바가 중생이 있다고 보면 곧 마사가 되며, 애욕을 완전히 끊어 숨김없이 하고 생사의 언덕 건너기를 구하면서도 애욕을 두려워하면 곧 마사가 된다.
지혜를 수행하고 항상 의지하여 구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것에 의지하면 곧 마사가 되며, 권방편이 없이 일체 덕의 근본을 보려고 하면 곧 마사가 되며, 보살의 비밀한 법을 구하려고 뜻하지 않고 세속에 떠도는 말만 좋아하여 그것은 일삼으면 곧 마사가 되며, 여러 가지 부분(部分)에 있어 널리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도 거취(去就)를 두면 곧 마사가 되며, 만일 부유하고 풍요로워서 재물이 넉넉하고 호사스럽고 존귀한 신분이어서 위력이 대단한데도 그에 탐착(貪着)하며 널리 들은 이를 받들지 않으면 곧 마사가 된다.
설령 세상에서 높고 귀한 신분이 되었거나 부유한 이나 석범(釋梵)의 지위가 되었을지라도
훌륭한 법을 익히지 않으면 곧 마사가 되며, 보살 법사(法師)와 가까이하여 법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성문ㆍ연각과 좋아하고 같이 이야기 하면서 법을 듣고자 하지 않고 멋대로 방탕하며 제 마음대로 노닐면 곧 마사가 되나니, 이 스무 가지가 보살의 마사인 것이다.”
“아주 훌륭하구나. 이에 보살의 마사를 잘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론(法論)을 듣고 살펴 받들어 행하면서 마(魔)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훌륭한 도법을 얻고 경전을 강설하여 스무 가지 일을 이룰 것이다.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큰 사랑[大慈]ㆍ큰 슬픔[大哀]ㆍ생사에 빠지지 않음ㆍ항상 선지식을 만남ㆍ태어나는 곳마다 곧 부처님 세계를 만남ㆍ6바라밀을 받음ㆍ모든 보살로 권속을 삼음ㆍ총지(摠持)를 얻음ㆍ말재주를 갖춤ㆍ5신통의 지혜를 얻음ㆍ만나지 못하였던 법을 들음ㆍ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항상 도의 마음을 품음ㆍ
마땅히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됨ㆍ한가함을 이루고 분주하지 않음ㆍ끝까지 널리 들음ㆍ훌륭한 방편인 지혜를 얻음ㆍ네 가지 은혜로 중생을 개화시킴ㆍ바른 법을 받들어 보호함ㆍ항상 솔직함을 행하여 아첨함이 없음ㆍ일체 보배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중생을 향하지 않음이니, 이 스무 가지로써 경전을 얻고 부처님의 훌륭한 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수심천자는 마파순에 물었다.
“지금 여래의 칭찬을 받았으니, 좋은 이익을 얻은 셈이니 참 기분이 좋겠소.”
때에 마는 말하였다.
“나는 좋은 이익을 얻었다고 해서 좋지 않소. 마치 남자(男子) 귀신이 깃들었을 때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말한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그대여,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문수사리께서 일으켜 주신 것이니, 나의 말이라고 선전하지 마시오.”
천자는 또 물었다.
“지금 그대가 몸을 변화하여 겉모습이 부처님같이 되었으니 즐겁지 않은가? 또한 상호로 그 몸을 장엄하고 사자좌에 앉아 경법을 강설하니 즐겁지 않은가?”
마는 다시 말하였다.
“그대들은 내가 상호로 몸을 장엄했다고 하지만, 내가 자신을 보자니 오히려 쇠사슬에 묶인 듯하오.”
천자는 충고하였다.
“파순이여, 스스로 문수사리께 귀의하여 엎드려 잘못과 죄를 뉘우치면, 문수사리께서 위신력을 나타내어 그대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오.”
마는 대답하였다.
“자수하고 뉘우칠 뿐 아니라 대승의 보살 대사(大士)에게 배워야 하겠소.
왜냐 하면 보살을 행하는 이는 번뇌와 더러움의 경계를 보지 않지만 성냄을 일으키는 이는 언제나 원한을 품기 때문에 이에 마땅히 스스로 뉘우치고 머리 조아려 귀의하겠소.”
천자는 또 물었다.
“보살의 인욕(忍辱)은 어떤 종류가 있는가?”
마는 말하였다.
“보살의 인욕은 열두 가지가 있소. 무엇이 열두 가지인가. 성질의 인욕이니 성냄이 없는 것이요, 뜻의 인욕이니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요, 아첨 없는 인욕이니 중생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궁핍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인욕이니 지혜가 모자라 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이를 가엾게 여기는 것이요, 수행하는 인욕이니 말한 대로 실천하여 물러가지 않는 것이요,
공(空)의 인욕이니 일체의 의심과 삿된 소견을 여의는 것이다. 법을 오로지 생각하는 인욕이니 모든 법을 잘 길들이는 것이요, 미묘한 인욕이니 나[我]라고 억측하지 않는 것이요, 바르게 생각하여 법을 깨닫은 인욕이니 여러 현성(賢聖)들의 지혜로 돌아가는 것이요, 진제(眞諦)의 인욕이니 연기(緣起)에 어지럽지 않은 것이요, 어지럽거나 뒤바뀌지 않는 인욕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하는 것이요, 뜻이 일어나지 않는 인욕이니 방편으로 인하여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을 얻는 것이오. 이것이 보살의 열두 가지 인욕이오.”
이때 수심천자는 마파순에게 물었다.
“그대가 방금 스무 가지 일에서 시작하여 열두 가지 인욕까지 설하였으니, 어찌 뛸듯이 기쁘지 않겠소.”
대답하였다.
“참으로 기쁘오.”
수심천자는 곧 문수사리에게 청하였다.
“어진이시여, 마파순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문수는 마에게 물었다.
“누가 그대를 묶어 놓았는가?”
답하였다.
“누가 저를 묶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파순이여, 그대는 남에게 결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으로 결박된 것이니 일체 어리석은 범부 또한 이와 같다. 마음이란 본래 모두 청정하여 생각이 없는 것인데, 뜻이 집착을 두므로 덧없음을 알지 못하여 덧 있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며, 몸이 없는데 몸이 있다고 억측하며, 깨끗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색(色)이 없는데 색이라고 생각하며, 느낌[痛癢]과 생각[思想]과 생사의 식별[識]이 없는데 5음(陰)을 생각한다.
파순이여, 지금처럼 결박당한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무슨 인연으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마는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저는 다시는 해탈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렇다. 파순이여, 이미 해탈을 얻은 이는 다시 해탈할 것이 없는데, 무슨 연유로 해탈을 얻으려 하겠는가. 다만 허망한 생각을 말미암아 속박을 이루었으니, 그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해탈이라 이른다.”
이에 문수사리는 나타냈던 위신력의 감응을 놓아서 곧 마파순으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었다.
때에 대가섭이 마파순에게 말하였다.
“파순이여, 불사를 지었으므로 이렇게 된 것이다.”
마는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의 경계로 감응한 바이니, 내가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오.”
수심천자는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그 불사란 어디에서 구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중생의 애욕 가운데서 불사를 구해야 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대답하였다.
“중생에게는 번뇌가 있어 수고롭게 하기 때문에 애욕을 받아들인다. 애욕이 없다면 불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마치 병이 없으면 의사가 필요치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여, 중생에게 애욕이 없다면 부처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부처님은 무슨 일로 세상에 나오셨습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목숨을 마치는 우환에 기인한
까닭에 나오신 것이다. 왜냐 하면 삼계에는 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게 된 것이다.”
또 물었다.
“문수시여, 여래께서 도를 얻으셨으면 무슨 법을 일으켜 나타내셨고 무엇을 멸하여 제거하셨습니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여래께서 얻은 도의 법은 일어난 곳도 없고 또한 멸한 곳도 없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세간에 나오심에 생겨난 곳도 없고 또한 잃어진 곳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출현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법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세간을 따라 몸을 나타내시지만, 본래 저절로 청정하니 그러므로 평등하여 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은 뜻을 건립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의 얻을 바 없는 데에서 온갖 소견인 62가지 의혹의 그물에 묶이는 처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서 본래가 청정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안과 바깥 법에 집착하는 바 없음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서 보살은 보시의 주인(主人)이 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자신의 번뇌는 버리고 일체 중생의 애욕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서 계율을 구족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고요한 경계를 분별하여 환히 깨우치고 일체 중생의 모든 악을 제거하여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인욕을 다 갖추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끝까지 보아 중생의 원한과 더러움과 성냄의 고난을 제거하며, 일체 지혜와 신통력이라는 훌륭한 덕의 갑옷[鎧]을 어기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끝까지 정진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정진에 기인하는 모든 법을 더 없이 바르고 참다운 도에 이르기까지 다 살펴보고 중생의 게으름이라는 번뇌를 베어 없애며 정진을 따라서 수행하는 것이다.”
천자는 또 물었다.
“문수사리시여, 무엇을 일러 선정의 끝에 도달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은 모두 본래 청정하고 평등한 정수(正受)뿐인데 일체 중생이 집착에 반연하여 생겨남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이 지혜를 성취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행동에서 일체 방탕한 일을 제거하며, 중생의 우물거리는 삿된 소견을 베어 없애고 거룩한 지혜를 따라서 수행하면 이것을 보살이 지혜를 성취한다고 한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자(慈)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은 모두 다 영구히 멸도하는 것임을 보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비(悲)를 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짓는 자도 없고 또한 그에 응하는 과실 없음을 환히 깨우치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희(喜)를 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에 좋아함을 일으키는 것도 없고, 또한 행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호(護)를 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에 두 가지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은 진리에 충실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 분별하기를 마치 허깨비와 같이 여기니, 모든 생겨나는 데에서 생겨나는 바도 없고 존재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대사(大士)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중생에게서 중생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을 굳이 받아 지닐 수 없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또 물었다.
“문수시여, 무엇을 일러 보살이 훌륭한 덕의 갑옷을 입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법을 평등하게 보되 허공과 같이 여기며 승나(僧那)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인화(仁和)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훌륭한 자비를 행하되 중생을 멀리하지도 않고 또한 가까이하지도 않으면서 번뇌와 애욕의 집착을 열고 교화시키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머무는 곳에서 편안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몸과 입과 뜻으로 남을 번거롭게 하지도 않으며 나와 남을 얻지도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가르침을 따른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법을 들은 대로 능히 받들어 행하고, 또한 말하는 바가 진리인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은 여러 사람들이 복종하고 귀의하는 바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능히 다섯 길[五趣]의 중생을 따라 설법하되 그 말씀이 무너지지 않으며, 자기의 마음을 따라
일체를 교화하되 실수가 없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부끄러움을 알기를 갖추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안으로는 능히 스스로 고요하게 노닐고 밖으로는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은 믿음[信]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걸림 가운데 노닐면서도 집착이 없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이 굳건한 자비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 무너뜨리거나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되풀이[反復]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지었던 덕의 근본을 잃어버린 적이 없이 응하는 대로 언제나 즐기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절제할 줄을 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번뇌 속에 뜻대로 노닐면서도 애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은 만족한 줄을 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를 사모하고 모든 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만족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설령 세간을 제도할 지혜를 만족하였어도, 모든 세간 법을 범하거나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분별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번뇌의 욕망을 보지 않아 중생의 모든 더러움을 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이 자재(自在)를 얻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생겨나는 것을 보고도 몸에 이루는 바가 없고 지혜가 자재로워서 애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널리 듣는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매우 고요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하는 일을 보고도 있는 것도 없고 또한 버리는 것도 없으며, 모든 법을 다루지 않으면서 또한 생각함도 없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행(行)에 머문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공의 행에서 분별하여 교화하지 않고 중생의 그 마음을 관찰하여서 하되, 나라거나 남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말재주를 다 지니고 갖추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 들은 것을 모두 다 지녀 중생의 돌아가는 근원을 분별하며 모든 음성(音聲)에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천자여, 이것은 보살이 말재주를 모두 지니고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광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누가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습니까?”
문수는 대답하였다.
“선지식의 보살핌을 입고, 또한 전생에 미묘함을 구족하고 덕의 근본을 갖춘 이의 양육을 받는 자라야만 이런 뜻의 말씀을 환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즐기며, 성질은 어떠합니까?”
대답하였다.
“미묘한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성질은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스스로 거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러 비구가 스스로 거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비구가 몸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 자연히 대승법을 오롯하게 구할 것이요, 몸의 저절로 그러함을 안다면 저절로 자신을 탐착하지 않고, 분별[二]에 머물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이 비구가 스스로 거만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무명(無明)과 애욕과 어리석음을 버리지 않고 명(明)의 해탈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탈된 것이다. 무명과 애욕과 어리석음이 모두 다 근본이 없는 것임을 환히 깨우치리니, 이것이 비구가 스스로 거만한 마음을 품지 않음이다.”
문수가 거듭 천자에게 일렀다.
“만약 비구가 탐욕을 떠나고 탐욕의 근본을 이해하며 탐욕을 떠나 청정해지며 저 탐욕행의 근본조차도 없음을 안다면, 또한 성냄을 떠나고 성냄의 근본을 깨우쳐서 성냄의 근본을 떠나 모두 청정해지며, 근본과 지말이 선명해진다면 또한 어리석음의 근본을 떠나고 어리석음을 알고 어리석음을 버려서 본래 모두가 청정하여 어리석음의 근본조차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비구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한다.
문수사리는 다시 천자에게 일렀다.
“만약 비구가 여러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집기[集]를 끊지 못하면 증과(證果)를 이루지 못하나니 모든 집기된 바에서 삿된 길로 가지 않고 여러 괴로움을 환히 깨우쳐 생겨나는 바 없다면 네 가지 진리에 들게 된다. 만일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으면 집기가 없고 이미 집기가 없으면 멸함도 없나니,
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삿된 길을 걷지 않게 된다.”
이때 마파순이 마음속에 슬픔을 품고 눈물을 비처럼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경전이 유포되는 곳에는 모든 마파순이 자기의 편리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만약 받아 지닌다면 마사를 아주 끊어 버릴 것이다.”
마(魔)는 이렇게 말하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대광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지금 저희들이 그대께서 말씀하신 이치의 경과를 관찰하자니 만일 사람이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출가하여 배움을 구족하는 복(福)을 되풀이하지 않고, 수행하는 정진의 업(業)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 법을 듣고 두려움을 품어서 받지 않는다면 여래를 거룩한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 자인 것이요, 만일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가 이 법을 듣고서 기뻐하고 관찰한다면 마땅히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보살도 이를 말미암아 법인(法忍)을 얻고 수기를 받으며, 이 법인으로 인하여 성문ㆍ연각의 지위에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물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며 어떻게 받들어 행하여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역(魔逆)이라 이름해야 하니 파순을 항복받고 교화하였기 때문이요, 이 경전을 받들어 지녀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문수사리와 대광천자 및 일체 여러 모인 이들과 하늘ㆍ용ㆍ귀신과 건달바ㆍ아수라와 세간의 사람들이 이 경을 들고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고(羔)함의 『마역경』은 법호가 한역한 것이다. 『개원록(開元錄)』을 살펴보니 단권으로 번역한 경으로 단(丹)본과 향(鄕)본이 비록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지만 송본과는 저 문장의 뜻이 완전히 다르다. 반드시 하나는 옳고 하나는 잘못이니 무엇이 진짜 『마역경』인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 송나라 경전을 살펴보니 전부 뒤의 염(念)함 가운데의 『문수사리회과경(文殊師利悔過經)』이 맞다. 송나라 장경의 착오로 『마역경』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거듭 편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송본을 버리고 향본을 취하니 진짜 『마역경』이다. 후현(後賢)들이 지금 버린 경이 어떤 것인지 의심이 난다면 염함의 『문수사리회과경』을 보기를 바란다. 곧 전체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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