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22권
불본행집경 제22권
수 천축삼장 사나굴다 한역
26.문아라라품 ②
그때 존자 아라라 선인은 보살의 마음에 지극한 덕이 있음을 잘 알고 다시 자기들의 논(論)에서 주장하는 정설을 말해 주고 게송을 읊었다.
구담 사문이여 자세히 들으소서.
우리 논에서 주장하는 이론을 말해주리니
지금은 비록 번뇌 가운데 있으나
뒷날 자연히 도로 해탈하리라.
아라라는 이런 게송을 읊고 나서 또 이런 말을 하였다.
“중생이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본성(本性)이며 둘째는 변화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한 것을 중생이라 부릅니다.
본성이란 5대(大), 즉 지(地)ㆍ수ㆍ화ㆍ풍ㆍ공을 말합니다. 나[我]와 무상(無相)은 본래의 체성[本體性]이라 이름합니다. 변화란 모든 근의 경계를 말합니다. 즉 손ㆍ발ㆍ언어ㆍ움직이고 오가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을 변화라 합니다. 만약 이런 모든 경계를 안다면 그것을 두고 경계를 안다고 이름하나이다. 그 모든 경계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아는 것이며 나를 생각한다는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말입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만약 모든 근(根)과 진(塵)을 안다면
그 경계를 안다고 이름하리.
모든 경계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생각하고 아는 것이라 하리.
그때 아라라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를 생각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가비라선인과 그 제자들이니 그들은 이 마음 경계를 스스로 헤아립니다. 바사바제 선인의 아들은 이름이 심의(深意)인데, 보는 것 또한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ㆍ노ㆍ병ㆍ사하면서 모든 괴로운 독을 받는 것을 깊이 살펴 알고는 남을 위해 해설하고 그것을 멀리 여의려고 이 이치를 생각하면 응당 일체가 상(相)이 없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했다.
“인번뇌(因煩惱)란 것은 지혜가 없어 모든 업(業)에 애착함을 말하니 이런 업은 번뇌의 인(因)에 속합니다. 이 번뇌의 인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 사람은 생사를 해탈하지 못하니 그것은 모든 번뇌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네 가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믿음이 없고 둘째는 나에 집착하고 셋째는 의심이 있고 넷째는 정함이 없는 것이며, 여잔(餘殘)이 있으면 방편이 없어 세간에 깊이 염착(染着)하여 항상 떨어집니다. 이런 까닭에 곳곳에서 생을 받는 것입니다.믿음이 없다는 것은, 항상 전도(顚倒)를 행하여 응당 알아야 할 것을 도리어 알지 못함이니 이것을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나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것은 나요 저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는 이렇게 받으며, 나는 가고 나는 머물며, 내 모양이요 내 몸이라, 이런 것을 나라고 이름하면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니 이것을 나에 집착한다고 합니다.의심이 있다고 함은, 미혹하지 않음으로써 일체를 의심하여 다만 한 물건에 멈춰 마치 진흙덩이같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의심이라 합니다.정함이 없다고 함은, 이러이러하다 이것도 그렇고 이것 아닌 것도 그렇다 하여 마음ㆍ뜻ㆍ알아차림ㆍ생각함의 일체 모든 업이 여러 사람[衆]도 되고 나도 되며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이기도 하다 하니 이것을 정함이 없다고 합니다.또 여잔(餘殘)이란 것은 수승한 경계를 알지 못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고 자성을 증득하지 못했다가 비로소 증득해 알았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잔이라 합니다.또 방편이 없다고 한 것은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방편을 모르며 방편이 없으므로 나타내 보이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방편이 없다고 합니다.또 염착(染着)한다는 것은 무지한 사람이 보고 듣고 부딪치고 알아차리는 것마다 물들고 집착함을 뜻합니다. 때로 뜻이 집착하고 몸이 집착하고 말이 집착하고 혹은 의업(意業)이 집착하며 집착하지 않을 모든 경계에 미혹하여 집착하므로 이것을 염착이라고 합니다.또 떨어진다는 것은 내가 바로 저곳이요 저곳이 바로 나라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번뇌에 떨어지니 이것을 덕이 없다, 지혜가 없다 하고, 이것을 5처(處)라고 하나이다. 고뇌롭고 낙이 없으며 낙이 없는 곳을 어둡고 어리석다 합니다. 큰 어리석음에는 두 가지 잡주(雜住)가 있으니 이것을 5처라 합니다.
어둡다는 것은 게으름을 뜻하고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생사를 뜻하며 큰 어리석음이란 욕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기 가령 큰 덕이 있는 사람도 미혹하여 각성할 줄 모르는 까닭에 크게 어리석다 합니다. 두 가지 잡주는 성냄을 말하거나 또 해태(懈怠)를 말합니다. 무명(無明) 중생은 이렇게 닦지 못하고 이 5처에 미(迷)하고 빠져 물들고 집착하며 번뇌 고해 가운데 머물러 생사의 흐름을 따릅니다.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증득하고 내가 짓고 내가 남을 시켜 짓게 하고 나는 이렇게 이른다고 하여 이런 마음과 이런 뜻 때문에 번뇌의 바다에 빠져 윤회(輪廻)합니다. 이런 네 가지가 얽히고 맺혀서 번뇌 가운데서 인과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덕 구담이여, 당신은 응당 이런 일을 아시겠지요?”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만약 바른 지견을 얻으려 하면
4선(禪)이 청정한 해탈처일세.
마음에 만약 저 지혜를 깨닫고 나면
진짜 성인과 가짜 성인을 알리라.
이런 분별로 응당 베풀게 되면
이것을 4선을 안다고 이르네.
모든 행과 무행(無行)을 버리면
자구명(字句名) 없음을 아는 것이네.
그러므로 그곳의 대범천왕이
세간의 모든 범행을 말씀하나니
만약 이 범행을 행한다면
곧 범천궁에 태어날 수 있으리라.
그때 보살은 아라라의 이런 말을 듣고 나서 거듭 그 방편행을 물었다.
“방편을 행하여 이르는 곳과 범행을 수행할 때 행하는 곳과 행하는 법을 존자는 나를 위해 모두 해설해 주소서.”아라라는 자파의 모든 논에 예시된 종체(宗體)에 따라 모든 것을 보살에게 말해주었다.
“어지신 구담이시여, 수행하고자 하면 궁과 집을 버리고 출가 의식에 따라 밥을 빌어 살고, 큰 서원을 내어 계행을 닦아 가지고 지족(知足)에 머물러 곳에 따라 의식과 와구(臥具)를 마련하고 한가롭고 고요한 곳에 홀로 거닐고 홀로 앉습니다. 모든 논 가운데 지혜로 알고 본 대로 탐욕(貪欲)ㆍ진에(瞋恚)ㆍ우치(愚痴)의 허물을 보고서 멀리 떠나며, 모든 욕으로 받는 쾌락을 싫어하고 모든 근을 조복하여 선정(禪定)에 듭니다. 바로 이때 모든 욕을 멀리 떠나고 근심을 여의고 한가로운 곳에 여의는 분별[離分別]을 내면 곧 초선(初禪)을 얻습니다. 초선을 얻고 나서 다시 사유하여 이와 같이 분별하면 점점 낙을 얻고 낙을 얻고서는 고요한 정(定)에 머뭅니다. 또 이 고요한 정의 힘에 따라 뜻으로 거듭 욕심과 진에(瞋恚) 등을 싫어 여의며, 이미 자주 싫어 여의므로 마음이 점점 더 기쁘고 이미 더 기쁘므로 지혜를 더욱 기르면, 이때 대범천궁에 태어납니다. 그곳에 난 뒤에 다시 이것은 나의 지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또다시 버립니다. 버리고 나면 곧 제2선을 얻어 큰 기쁨을 냅니다.
기쁨을 얻고서 마음이 큰 기쁨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더 훌륭한 곳을 구하면 곧 광음천에 이릅니다. 광음천에 이르러 광음천에서 낙을 받다가 희락이 싫어 떠나고자 하고 이미 희락을 떠났으면 곧 제 3선을 얻습니다. 제3선천에 이르면 아래의 변정제천(遍淨諸天)보다 점점 뛰어나 한결같이 낙을 받습니다. 만약 이렇게 낙을 얻고 나서 버린다면,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모든 고락의 경계를 멀리 여의고 제4선을 얻어 이미 고락과 반연하는 마음을 여의고 일체를 다 버립니다.또 어떤 사람은 아만심 때문에 해탈상을 구하여 4선보다 나은 과보를 얻기 위해 속으로 생각하되, 이 4선법은 광과천(廣果天) 가운데서 받는 과보이므로 조잡한 지혜라고 생각하여 관찰합니다. 그 사람은 이런 일을 생각하고 나서 삼매에서 일어나 그에 여러 가지 허물과 근심이 있는 것을 보고, 색신(色身)을 버리고 더 훌륭한 지혜를 구하고자 이런 마음을 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모든 선(禪)을 버리고 더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은 먼저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추한 색신을 버리기 때문에, 싫어 떠나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때 곧 몸 가운데 모든 허공이 가없는 분별을 얻고 저 일체 색상(色相)이나 또는 색상 안에 나무 등 모든 물건에서 모두 가없는 허공이라 분별하니 이렇게 일체 색처를 밝게 분별하여 가없는 허공을 얻고 나서는 수승한 곳을 증득합니다.”
이런 게송을 읊었다.
이렇게 미묘한 대범천궁은
아무런 상이 없고 항상 말이 없네.
지혜로운 이 그 해탈의 인(因)을 말해
이것을 열반의 과라고 하더이다.
그때 아라라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또 보살에게 말했다.
“어지신 구담이시여, 이것이 바로 내가 해탈하는 곳이자 또 그 방편입니다. 내 이제 당신에게 나타내 보였으니 당신 생각에 이 법을 기뻐하고 즐겨하신다면 나의 말대로 받아주소서.”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이렇게 청정한 해탈의 법을
내 이제 아는 대로 널리 펴오니
당신 마음에 기쁘시거든
이대로 받아 주소서.
그때 아라라는 다시 말하였다.
“지난 옛날 기사(耆沙)수나라 말로는 구승(求勝) 선인과 비유사나(毘踰闍那)수나라 말로는 이별자(離別者) 선인과 파라사나(波羅闍那)수나라 말로는 타전(他箭) 선인 등 그 밖의 모든 선인들은 다 함께 이 해탈법을 설하였으며, 함께 이 해탈법을 타고[乘] 해탈을 얻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매우 지혜로운 장부이시니, 이 법을 감행하실 만합니다. 이 법을 행하고 나면 좋은 곳의 해탈 과보를 얻으실 것입니다.”그때 보살은 아라라 선인이 말한 대로 범행하는 법을 받아 가지고 행하였다. 사문행을 행하고 사문과를 구하고자 이 법을 행하여 곧 증득해 알았다. 보살은 아라라의 입에서 이 설법을 듣고 이 법을 믿고 행하여 어기지도 않고 등지지도 않았다. 또 ‘나는 먼저 스스로 알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다만 받아 가지고 이 법을 생각하고 증진하며 더욱 견고한 지혜의 마음을 내서 뛰어난 곳을 구하였다. 이미 뛰어난 곳을 보고는 거만하게 그 선인을 헐뜯지 않고 다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라라에게만 이와 같은 믿음과 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런 믿음과 행이 있으며 아라라에게만 정진의 행과 바로 생각하는 삼매와 모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런 …… 지혜 등이 있다. 나도 이제 아라라가 증득해 안 법을 그대로 구하고는 남을 향해 분별하고 나타내 보이며 또 뛰어난 곳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그때 보살은 아라라가 말한 대로 법행을 다 증득하여 알고 보고 행하였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모든 법을 듣고는 많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잠깐 동안에 다 얻었으며 행한 대로 하나도 다름없이 말하고 나타내 보였다.
그때 보살은 아라라 선인 곁에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 아라라여, 존자는 이렇게 스스로 법의 지혜를 증득하고 이른바 생각[想]이 없는 곳에 나기를 구한다는 것을 남을 위해 설하십니까?”
이렇게 말하자 아라라는 보살에게 말하였다.
“장로 구담이시여, 이런 법의 지혜는 내가 스스로 증득하고서 남에게 나타내 말하고 베풀어 보인 것입니다.”보살은 또 말했다.
“나는 존자에게 이 법을 듣고서 존자의 말대로 믿고 알고 행하여 이 법을 증득하였으니, 만약 지혜 있는 이가 알고 행하는 경계가 있다면 이런 법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내가 본 바로는 이 법이 비록 묘하나 구경(究竟)을 다한 것은 아닙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관찰하고 생각하니 이 법은 오히려 변동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경계의 본성이 이와 같으니 알고 난 뒤 이 지(智)는 비록 지혜가 없다 하더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법을 내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존자가 비록 ‘나는 청정한 해탈을 얻었노라’고 말하지만, 만약 분별하여 관하면 이것은 인연법이라 인연을 만나면 도로 생기므로 참 해탈이 아닙니다. 마치 씨앗을 때아닌 때 심으면 땅 속에 묻힌 채 때를 따르지 못하고 물과 비가 없어 싹이 나지 않지만, 만약 때에 따라 심고 물 조절을 잘 하여 모든 인연이 구족히 화합하면 곧 나는 것같이, 이것도 그렇습니다. 다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업에 집착하니, 이런 법들을 버리고는 분별하여 ‘나는 해탈하였다’고 말하지만 나에 대한 집착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곧 무지와 사랑의 업을 버려 합할 곳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버리고서 비록 앞에보다 나은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직 참된 곳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我]라는 것이 있는 곳을 분별하면 저 미세한 세 가지는 마침내 있으니 그 미세한 모든 번뇌 때문에 따로 쓰지 않은 곳이 있어 수명이 길다고 분별해서 ‘나는 해탈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미세한 과환(過患) 때문에
쓰지 않은 곳의 몸을 받나니
수명의 겁수(劫數)가 오래고 긴 것을 두고
나는 해탈을 얻었다고 말하는구나.
보살은 다시 말하였다.
“존자는 전에 ‘나는 이미 나를 버렸다’하였으나 이미 ‘나는 나를 버렸다’ 고 자칭하므로 이것은 진실하게 나를 버린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분별에 의지하면서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는 근심의 얽매임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의 얽매임이 있는 곳에서는 내[我]가 없는 해탈처를 얻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근심은 달라지지 못합니다. 마치 뜨거운 불빛과 같아서 뜨거움은 빛을 떠나지 못하고 빛은 뜨거움을 떠나지 않아서 이 두 가지 체성(體性)은 선후가 없기 때문에 합한 것이요 만약 있다면 말이 안 됩니다. 나라는 것이 그런 것같이 모든 근심도 다 그러하여 여기서 해탈했더라도 저기에서는 또다시 얽매이니 지혜로써 경계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색(色)을 멸했어도 식(識)은 있으며 그는 나의 식(識)을 알므로 이것을 유(有)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유 때문에 ‘나는 해탈을 성취했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계의 대소를 이와 같이 알면 도로 이와 같이 더 좋은 곳을 구하리니, 그렇다면 이것이 나인지 나가 아닌지를 어찌 분별할 것인가. 나무와 같고 벽과 같이 거듭거듭 서로 버리며 이미 각각 거듭거듭 지혜가 있으므로 나는 생각하여 일체 경계를 다 버리고 스스로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거듭거듭 차례로 모두 다 버리면
이를 일러 경계를 버린다 하느니라.
일체 근(根)과 진(塵)을 버리기 때문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人]라 이르느니라.
그때 아라라의 무리들 가운데 한 제자가 보살에게 아뢰었다.
“대덕 구담이시여, 이제 여기 우리들이 사는 곳에 오셔서 좋은 그릇을 이룰 것이요, 또 여덟 가지 자재(自在)를 얻을 것입니다.”보살은 대답했다.
“여기서 어떻게 자재를 얻는단 말이냐.”
그때 아라라는 제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너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무엇 때문이냐, 자재라는 것은 모든 일 가운데 잘 결정을 지어 다른 이와 함께하지 않고 짝도 없으며 내신(內身)으로 스스로 적정(寂定)을 증득해서 기쁨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대답했다.
“이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아라라는 말했다.
“무슨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보살이 이러이러하다고 대답하자 아라라는 또 말했다.
“어진 이시여,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소서.”
보살은 대답하였다.
“만약 존자의 말대로라면 이 행은 돌아올 곳이 없습니다.”
아라라는 말하였다.
“어지신 이여, 어찌하여 이런 물음을 하시며 어디에 의심이 있사옵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이제 내 마음은 생이 싫어 떠나려 하기 때문에 참되고 바른 것을 묻고자 합니다.”아라라는 말하였다.
“어지신 구담이시여, 듣고자 한다면 말하겠나이다. 세간을 개화(開化)하고자 하는 것은 아(我)입니다. 오직 명자(名字)만 있을 뿐,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물러남도 없고 돌아감도 없으며, 가에도 없고 가운데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으니 이것을 나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윤회(輪轉) 가운데 자재로이 들어가고 생사 가운데 있으나 잠깐도 머물지 않습니다. 저 법과 비법(非法)과 하늘과 사람과 모든 갈래[有趣]를 그는 멀리하며 탈 것[乘]을 짓나이다.
그 타는 것을 타는 이는 깊은 유(有)의 바다를 잘 건너 유전(流轉)하고 오가며, 자재로이 생사를 짓고 잘 변화하여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하고 가장 커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일체를 포섭하고 교화합니다.”보살은 물었다.
“이렇게 교화하는 까닭이 있습니까?”
아라라는 말하였다.
“당신이 묻는 소리를 들으니 필시 이런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거나 아니면 당신 뜻에 탐탁지 않은가 봅니다.”
보살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근심이 없습니다.”
아라라는 말하였다.
“대덕 구담이시여, 의심을 내지 마시고 마음에 즐거운 대로 하소서. 다만 스스로 지향하는 뜻을 이야기하며 잘 사유해 들어가 스스로 밝게 비춰 보소서. 만약 스스로 보고 알아 남에게 속지 않으며 남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며 남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이렇게 증득한 이를 스스로 이익을 얻은 이라 하니 그 밖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만약 마음을 정(定)하지 못하고 모든 논사(論師)를 따라 뜻을 취한다면 그 지혜는 줄어들 것이니 당신은 들으신 뒤에 참되게 생각하고 각각 독송하여 깊은 뜻을 관찰하고 자세히 스스로 증득해 아소서. 알고 난 뒤에도 의심이 있거든 마음대로 나에게 물으소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나이다.”보살은 또 물었다.
“존자는 세상을 교화하여 자재를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이 나는 의심스럽습니다.”
아라라는 말했다.
“이 뜻은 당신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보살은 다시 말하였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아라라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보살은 다시 말하였다.
“이 인연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자재로이 이 세간을 변화해낸다면, 서로가 서로를 차례로 발생시키면서 현재 보여지는 것이 성립할 수 없을 뿐더러 그 번뇌의 바퀴도 이렇게 차례로 구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중생은 이익을 기뻐하지 않고 자연히 얻을 것이며, 한 중생도 잡된 근심이 없을 것이며, 모든 세상 사람이 부모에게 하듯 자재천에 공양할 것이며 그 밖의 모든 하늘에는 공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그 모든 헐고 욕되고 착하고 악한 업이 다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지 못합니다. 모든 중생은 의착(依着)할 곳이 없고 구할 곳도 없고 지을 것도 없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응당 이렇게 자재함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이렇게 분별하여 있다 없다 한다면 지을 것을 짓지 않아도 모든 업이 성립되어 응당 자연히 과보를 얻을 것입니다. 저 자재천이 고행을 하여 자재를 이룬다면 세간도 함께 이 업을 받아서 일체를 함께 자재라 이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인(因)이 없이 자재를 짓는다면 자재하지 않은 곳이 없고 자재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요, 반면, 그가 자재로이 건립(建立)한 것이 아니라면 유(有)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자재로이 건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아라라는 보살을 찬탄했다.
“대덕 구담이시여, 지혜가 깊고 멀어 잘 나타내 보이며 모든 논의 총체(總體)를 받아들여 다 지혜의 힘으로 분별해 아십니다. 이런 까닭에 갖가지 이론의 진실한 길을 평등하게 보십니다. 부디, 피로하다고 법보(法寶)를 아끼지 마시고 나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보살은 다시 말하였다.
“나는 이제 존자에게 공양하리다.”
아라라는 말하였다.
“스승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까닭에 공양을 두루하겠습니까? 이제 그대는 이미 상수(上首)가 되었으니, 그들의 공양을 감당할 만합니다.”
보살은 또 말하였다.
“존자여, 나를 위해 이런 뜻을 해설해주십시오.”
아라라는 말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일체 세간에서 뛰어나 아직 그들에게는 선생이 없습니다. 어지신 이여, 좋은 뜻으로 깊이 스스로 생각하소서. 업이 먼저 있습니까, 몸이 먼저 있습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라라는 말하였다.
“이것은 큰 근심이올시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업(業)이 먼저 있고 몸이 먼저가 아니라면, 몸을 받지 않았으므로 몸에는 업이 없을 것이며, 업이 스스로 나지 않았을 것이니 누가 이 업을 지었겠습니까? 반면 몸이 먼저 있고 업이 먼저가 아니라면 응당 업이 없을 것이며, 만약 업이 없다면 어찌하여 중생은 또 몸을 받겠으며 누가 있어 또 세상을 개화(開化)하겠나이까? 그는 응당 일정하게 상존하는 삼계의 얽힘을 덜지 않으리니 이것이 모든 중생이 나는 근본이라 응당 스스로의 몸을 나게 할 것이며, 만약 자재하지 못하다면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즐기는 몸을 응당 스스로 갖출 것이며, 만약 스스로 갖추게 되면 어디에나 스스로 있을 것입니다.”
보살은 대답하였다.
“나는 병자와 같아서 의사의 치료를 구할 뿐이오, 이제 다시 이 뜻을 논란하지 않겠습니다.”그때 아라라의 제자 가운데 고행하는 사람이 보살에게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구담이시여 존사의 말씀을, 어지신 이여 부디 이 뜻을 논란하지 마소서. 이런 뜻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논쟁을 한다면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다만 존사의 말씀대로 받아 가지소서.”
보살은 대답하였다.
“나는 논란하지 않노라. 다만 맥락을 물어 그 뜻을 알고자 하노라.”
그 선인은 말했다.
“이 인연을 따라 그대는 받아 그 참 뜻을 취하소서. 만약 마음에 의심이 생겨 쟁론한다면 매우 법답지 못할 뿐더러 미래에 죄를 얻을 것입니다.”
그때 그 고행하는 선인 제자가 게송을 읊었다.
무릇 사람이 묻고 들을 때
마음이 어지럽지 않아야 뜻이 결정되네.
만약 의심 내어 굽은 생각 품으면
다투어 남의 허물 찾는 짓일세.
둘이 제각기 허물을 찾으면 원수가 되고
두 원수가 다투면 말이 악해지네.
지혜로운 이 구업(口業)의 허물을 끊으려면
이치를 말할 때 다투는 마음 내지 않네.
논란에 이기려 하는 것을 탐이라 하고
명예를 다투어 남을 굴복시킴은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네.
말이 많아 허물을 드러내면 큰 병통이 되고
굽은 마음으로 뜻을 들으면 교만해지네.
거만한 마음 성내는 마음은 죄만 더해
각각 시비만 가리느라 서로 헐뜯을 뿐
할 것은 안 하고 하지 않을 것을 하며
둘이 서로 다투어 큰 원수가 되네.
그때 보살은 이 게송을 듣고서 그 선인에게 말하였다.
“실로 이와 같이 서로 다투는 허물이 있었습니다. 없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본래 이어져 오던 이론의 맥락을 찾고자 한 것이지 고의적으로 추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하고 나자 그 선인이 오히려 참지 못하였다.
아라라는 말하였다.
“대덕 구담이시여, 해탈하는 길을 당신께서는 미워하시나이까? 이러한 사연은 본래가 아니옵니다.”
보살이 대답하였다.
“만약 해탈의 길을 구하려거든 이와 같이 구해야 할 것입니다.”그때 아라라 선인의 제자가 말했다.
“사문 구담이시여, 당신께서 이것을 떠나 해탈을 구하고자 하면 한갓 몸만 손상될 뿐입니다.”
보살은 대답하였다.
“사람이 세간의 무상(無常)한 낙을 구하고자 하는 데에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는데, 하물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해탈을 구함이랴.”
그때 아라라 선인의 제자는 또 다시 아뢰었다.
“당신께서는 이제 이미 돌아오지 않는 해탈을 말하셨는데, 항상 행하시겠습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지금 행하는 곳에 이미 뜻이 즐겁다면 이제 저곳에 이르러 어찌 또 돌아올 것인가?”
아라라는 말하였다.
“그곳에 가지도 않고 이곳에 돌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지 않습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이 일은 희유합니다. 존자가 먼저 말한 대로 뒤에 유(有)를 받는다면서 어찌 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십니까?”
아라라는 말했다.
“참으로 그러하나이다. 어지신 이여, 이것은 크게 희유하나이다. 그 진여(眞如)의 적정한 체(體)는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며 한계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어서 그 행을 정할 수 없으며 형상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상사(無相師) 선정주(禪定主)가 세운 것이니 대범천(大梵天)이 바로 그것입니다.”보살은 다시 말하였다.
“내 이제 다시 묻노니 대선 존자여, 겁(劫)이 다할 때 이 모든 대지와 수풀과 수미산과 제석천의 궁전도 모두 겁화(劫火)에 타는데, 그때 그 하늘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는 누구며 자(字)가 누구며 어떻게 말하며 공덕의 과보는 어떻게 머뭅니까? 또 겁이 다한 때 모든 것이 다하는데 그라고 어찌 타지 않겠습니까?”그러자 아라라는 묵묵히 웃기만 하였다.
그때 아라라 선인의 제자가 보살에게 아뢰었다.
“당신의 지혜는 이제 가장 훌륭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과거에 바른 길을 얻은 선인들을 알지 못하나이까? 곧 존자 바라사라(波羅奢羅)선인ㆍ파라타(頗羅墮)선인ㆍ아수리야(阿須梨耶)선인ㆍ발타나(跋陀那)선인ㆍ가투바타나(迦妬婆陀那)선인ㆍ타나달다(陀那達多)선인ㆍ달리다야나(達利多耶那)선인ㆍ반차라파제(般遮羅波帝)선인ㆍ아사타(阿沙陀)선인ㆍ발마달다(跋摩達多)선인ㆍ나후사왕자야야지(那侯沙王子耶耶低)선인ㆍ소파리(韶波梨)선인ㆍ파라바자나(波羅婆遮那)선인ㆍ비제아(脾提阿)선인ㆍ사나가(闍那迦)선인ㆍ아반저국라저제바(阿槃低國羅低提婆)선인ㆍ사기사비야(闍祁沙毘耶)선인ㆍ제비라(提毘羅)선인ㆍ비타하비야(毘陀呵毘耶)선인ㆍ파노(婆奴)선인ㆍ제바야나(提婆耶那)선인ㆍ니사다나야(泥沙多那耶)선인ㆍ야야다나(耶若多那)선인ㆍ니야박도(尼耶薄都)선인ㆍ하리저(呵梨低)선인ㆍ발사라바후(跋闍羅婆睺)선인, 이런 모든 선인들은 다 햇빛에 들어가 바른 길을 취했습니다.”그러자 보살은 그 선인에게 대답하였다.
“지금 말한 대로 햇빛에 들어가 해탈을 구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제 응당 그 모든 유(有)에 절할 것이나 나는 참으로 이런 자재(自在)를 쓰지 않겠습니다.”
보살은 이 말을 하고 나서 속으로 ‘아라라의 법은 구경(究竟)이 아니로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그때 아라라 선인의 제자는 보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살에게 아뢰었다.
“당신께서는 지금 이 법 외에 더 뛰어난 해탈을 구하고자 하시나이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내 뜻에는 이러한 법, 곧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허공도 없고, 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상(相)도 없고 편안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죽음도 없고 병듦도 없고 늙음도 없고 남도 없고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고 항상함도 없고 항상하지 않음도 없고, 말함도 아니요, 끝도 없는 법을 증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본래 생로병사의 허물도 없고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도 없다.
깊고 고요한 3세에 스승의 가르침도 없이
항상 청정하여 저절로 해탈을 증득하리라.
아라라 선인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보살에게 아뢰었다.
“어진 구담이시여, 내 이제 스스로 증득하는 모든 법을 남에게 말해주었으니 당신께서도 이제 스스로 이 법을 증득하고 남에게 말해주소서. 내가 해득한 법을 당신께서도 알았습니다. 내 오늘 이 대중의 스승이 되듯 당신도 이와 같이 스승이 될 만합니다. 구담이시여, 이제 나와 마음을 같이하여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이 대중을 이끌어 교화하고 법을 나타내 보입시다.”
이때 아라라는 스승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보살과 평등하게 하고자 자기 자리를 보살에게 반 나누어주고 보살에게 공양하였다. 보살의 뜻에 맞추어 공양 도구를 수용케 하고 매우 기뻐했다.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한 마음이 되어 온몸에 차 오르는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그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법은 사람을 열반에 이르게 하지 못할 뿐더러 다시 모든 욕을 멀리 떠나 번뇌를 건너게 하지도 못한다. 적정(寂定)으로 모든 누(漏)를 없애 신통을 얻게 하지도 못하며 스스로 깨치고 남을 깨우쳐 사문행(沙門行)을 할 수도 없게 하며 모든 악의 번뇌를 멸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법을 행하면 오직 비상천(非想天)에 나서 모든 업(業)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마침내 지극한 과보가 아님을 알겠다.’
이 생각을 하고서 곧 아라라를 등지고 떠나갔다. 게송이 있었다.
보살은 이 모든 법을 생각하고
마음이 크게 기쁘지 않으셨네.
궁극적으로 해탈하는 좋은 법 아님을 알고
곧 아라라 선인을 등지고 가셨네.
그때 아라라 선인의 제자 무리들은 보살과 헤어지며 이런 말을 했다.
“어지신 이여, 부디 가시는 곳마다 항상 길상을 얻으소서.”
27.답라마자품(答羅摩子品)
그때 이 염부제 땅에 라마(羅摩)라 불리던 또 다른 큰 도사[大導師]가 한 분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무리들의 주인이었던 라마의 큰아들 우타라라마자(優陀羅羅摩子)가 대중을 영도하였다. 우타라는 항상 대중을 위하여 비상비비상천에 나는 법을 설했으며 왕사성 근처 아란야 숲에 머물렀다.
이때 보살은 아라라보다 그가 말하는 법이 더 낫다는 명성을 듣고서 ‘나는 지금 곧 우타라라마자에게 가서 범행을 행하리라’고 생각했다.그리하여 보살은 아라라의 거처에서 나와 조용히 걸어서 항하를 건너 여기 저기 물어서 그곳을 알고 거기 이르러 그에게 말했다.
“어지신 우타라여, 나는 당신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고 범행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때 우타라는 보살에게 일렀다.
“대덕 구담이시여, 내 소견으로 당신을 보니 이미 지혜로운 분이라. 내 법을 받아 범행을 행할 만하십니다. 만약 법을 받아 범행을 행할 때, 내 법의 청정한 업과를 따른다면 행의 갚음을 얻을 것입니다.”보살은 우타라라마자 곁에서 법을 받아 행을 하고 사문의 법과 사문의 일을 구하고자 공경히 합장하고 아뢰었다.
“어진 이여, 당신의 행하는 법으로 어떤 경계에 이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위해 설명해 주소서.”
우타라는 보살에게 일렀다.
“대덕 구담이시여, 무릇 상(相)과 상 아님을 취한다면 이것은 큰 근심이요 큰 종기요 큰 부스럼이요 큰 어리석음이요 큰 어둠입니다. 만약 세밀하게 생각하면 저 미세한 체(體)를 받으며, 이런 차례로 알게 되면 이것을 적정하고 미묘하고 가장 뛰어난 최상의 해탈이라 이름하나이다. 그 해탈의 과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는 것이니, 나는 이 가장 뛰어나고 묘한 법을 행하나이다.”
우타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과거 세상에도 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보다 뛰어난 적정(寂定)이 없고 현재에도 없으며 내세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 행은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하고 가장 위이므로 나는 이 행을 행하나이다.”보살은 이 법을 듣고서 생각한 지 오래지 않아 이 법을 증득하였다. 이때 보살은 그 곁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듣고 나서 마음으로 믿고 그 말끝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법은 나도 얻을 수 있고 나도 알겠다. 참된 말이라 헛됨이 없거니와 나는 이제 보려면 곧 볼 수 있고 알려면 곧 알 수 있다.’ 그리고는 다시 우타라에게 말했다.
“그대의 옛날 아버지 라마(羅摩)만 믿고 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 나도 믿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만이 홀로 정진ㆍ정념ㆍ선정ㆍ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제 ……(중략) …… 지혜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그 법행(法行)을 행합니다. 라마의 법을 배워 스스로 증득하고 남을 위해 설명합니다. 그 법을 알기 때문에, 그 법을 보았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구하고자 합니다.”이때 보살은 이 법을 증득하고 나서 우타라라마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아버지도 옛날 이 비상비비상처를 스스로 증득해 알고 남을 위해 말했습니까?”
우타라는 말하였다.
“대덕 구담이시여, 우리 아버지도 그러하였습니다.”
보살은 또 말하였다.
“어진 우타라여, 내가 이제 이미 통달하여 증득해 알고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우타라는 대답했다.
“대덕 구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아버지와 다름없나이다. 대덕 구담이시여, 당신이 지금 만약 이런 모든 諸법을 알고 이미 받들어 행했거든 우리 아버지인 라마가 그랬듯이 이 대중을 영도하여 가르치고 펼쳐 주시겠나이까?”
그때 우타라는 이미 스스로 닦아 빠짐없이 범행(梵行)을 행했으나 다만 보살과 함께 자종(自宗)을 건립하고자 ‘보살께서 함께하면서 법의 지혜를 더하고자 하면 가장 뛰어난 것을 보살에게 공양하리라.’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기뻤다.그때 보살은 우타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진 이여, 이 법으로는 마침내 모든 욕(欲)을 해탈하여 번뇌를 멸하고 적정한 한 마음으로 모든 번뇌의 누(漏)를 다하고 모든 신통으로 사문의 행을 이루어 큰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사에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비상비비상처에 나도 과보가 다하면 도로 번뇌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자 우타라는 보살에게 아뢰었다.
“대덕 구담이시여, 들어 알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아버지 라마께서는 비록 이 법을 증득하였으나 아무도 모르게 이미 비상비비상처에 났기 때문에 도로 생사에 돌아온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나이다. 후생을 선택하지도 않았으며 태어난 곳도 더 이상 보지 못하였나이다.”
우타라는 이런 적정한 법, 사마타행을 얻었으나 가장 뛰어난 법을 구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살은 속으로 ‘이 법은 구경이 아니니 나는 이제 이 법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로다’ 하고서 우타라를 버리고 떠나갔다.
이런 게송이 있었다.
보살은 이 법을 생각해 보았다.
라마가 지난날 비록 행했다 하나
마침내 해탈하는 궁극의 법이 아니라 하여
곧 그곳을 떠나 버리고 가셨네.
28.권수세리품(勸受世利品) ①
그때 보살은 우타라라마자 처소에서 이별하고 떠나 조용히 반다파(般茶婆)수나라 말로는 황백색(黃白色)산으로 향했다. 그 산에 이르자 산기슭 편편한 곳을 찾아 한 나무 아래 가부좌를 맺고 앉아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세우고 바로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떤 사람이 머리에 불이 붙으면 급히 꺼서 땅에 던지듯, 이때 보살이 번뇌의 끝간데를 끊어 버리려는 마음도 이와 같았다.
이때 보살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헤아렸다.
‘나는 어느 때에나 이 큰 번뇌의 무더기를 흩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때에나 크게 어리석고 미련한 창고를 부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을까? 또 모든 중생이 생사에 빠져 있으니 어느 때에나 다 해탈시킬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자 위덕이 엄연하였다. 그때 그 산에는 많은 잡인들이 있었는데 풀과 땔나무를 캐거나 마른 쇠똥을 줍거나 사냥을 하거나 밭을 갈거나 혹은 짐승을 놓아먹이거나 길을 가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멀리서 보니 보살이 반다파산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마치 여러 가지 보배로 장엄한 금상(金像)의 빛과 같았다. 그들은 보고 나자 각각 희유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희들끼리 말했다.
“그대들 모든 어진 이여, 이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데, 어디서 여기 왔을까?”
그리고는 이렇게들 말하였다.
“이 분은 반다파 산의 산신(山神)이다.”
“아니 이 분은 반다파 산에 사는 선인이다.”
“이 분은 어느 곳의 신명(神明)이실까?”
“이 분은 비부라산을 수호하는 신(神)이다.”
“이 분은 기사굴산을 수호하는 신이다.”
“이 분은 대지(大地)의 신인데, 땅에서 솟아난 것이다.”
“허공 상계의 천자(天子)가 여기 하강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렇게 마음으로 각각 의심을 품는다. 무엇 때문이냐. 이 신(神)의 몸은 번쩍번쩍 빛나고 위덕이 드높아 널리 이 산을 비춘다. 마치 햇빛과 달빛이 널리 이 사라수를 비춰 꽃을 피게 하는 것 같구나.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광명은 이런 일을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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