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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4794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3권

by Kay/케이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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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3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 제3권

삼보존(三寶尊) 지음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시호(施護) 한역

'네 가지 청정'이라 말하는 것은 첫째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둘째는 이구청정(離垢淸淨), 셋째는 소연청정(所緣淸淨), 넷째는 평등청정(平等淸淨)이다.첫번째 자성청정이란, 곧 무차별한 무이(無二)의 지(智)이다. 특징이 어떠한 것이 자성인가 하면, 본성이 헛되거나 거짓되지 않은 것이니, 곧 진아성(眞我性)이다. 자성 가운데 이와 같은 상이 있으면, 마니보(摩尼寶)에 비추어져 나타나 화합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체중생은 곧 여래장이며, 그 일체법과 선서(善逝) 등은 더욱이 무자성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이 곧 자성청정이다.둘째 이구청정의 이구란, 곧 모든 번뇌[垢染]를 떠난 것으로 청정의 뜻이니, 이미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특징은 무엇인가? 이른바 행위는 모든 유(有)를 대치하고, 관력(觀力)에 따라 상응하여 무이의 지가 생겨난다. 이 작용[所作]은 이미 세존 증상(增上)의 의요사(意樂事) 등에 있는 바이다. 곧 그것은 실제의 진여법계이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이구청정이다.셋째 소연청정에서 소연이란, 곧 모든 남김 없는 반야바라밀다 등의 뜻으로 일체 소연경계의 작용이다. 또 그 소득성 혹은 소성성(所成性) 또한 이 대상[所緣]이다. 이 소연 중에 있어서 청정을 얻는 것이다. 청정의 뜻은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곧 소연청정이다.넷째 평등청정의 평등이란 균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곧 이 평등미묘ㆍ청정법계ㆍ대법광명의 그 평등성을 곧 평등이라 이름 한다. 이 평등 가운데에서 청정을 얻는다. 청정의 뜻은 이미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곧 평등청정이다.이와 같이 총체적으로 네 가지 평등을 설한 것이 곧 원성자성(圓成自性)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가 모든 것의 특징을 설한다. 이와 같은 말의 뜻, 이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고 나서 헛되거나 거짓된 법을 떠나는 것이다. 그 까닭에 송에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곧 모든 반야바라밀다, 모든 설의 뜻, 자성은 곧 불세존이 일체 이와 같이 마땅히 세 가지 상에 의지해 설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의타 등의 자성을 떠나 달리 성립하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속에서 설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른바 만약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을 설하고 나면, 곧 이 그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설하는 것과 더욱이 다름이 없다. 만약 의타기성을 설한다면, 곧 이것은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이다. 왜냐하면 또 달리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곳에서도 또한 그렇게 알아야 한다. 또 이 가운데 만약 지문(止門)의 모든 특징을 설하면, 곧 이것은 그 변계성을 설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변계성을 설한다면 곧 지문을 설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법은 없는 까닭이다.
묻노니 원성실성 가운데에는 무엇이 가히 그 언설문(言說門)으로서 있어야 하는가? 그 법 가운데에는 성(性)이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그 소생의 분위(分位)에 따라 곧 이와 같은 설의 분위는 더욱이 실(實)이 없다.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열 가지 분별산란을
다스려[對治] 다음과 같이 말하니
이 세 가지를 알고 나면
혹은 나아가고[卽] 혹은 설을 떠난다.
이 '열 가지 분별산란을 다스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의 말은 곧 열 가지의 분별산란에 대하여 지금 차례로 그 대치를 설한 것이다. 곧 상위대치(相違對治) 및 능소대치(能所對治)이다. '세 가지'라 말한 것은 변계ㆍ의타ㆍ원성실성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는 그 차례가 같다. '알고 나면'이란 완전히 알고 나서란 뜻이다. '혹은 나아가고 혹은 설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나아감이 있고 떠남이 있는 까닭이다. 이 총체적인 뜻은 만약 이와 같이 완전히 알고 나면, 그 변계ㆍ의타 등은 모든 대상[事相]과 혹은 나아가거나 혹은 떠나며, 그 하나하나의 상은 그 설한 바와 같이 드러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묻노니 이 가운데 무엇이 변계 등과 즉하거나 떠나거나 하는 것인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처음처럼 원성(圓成)과
의타(依他)와 변계(徧計)를 말하니
무상분별색(無相分別色)은
그 산란을 지견(止遣)한다.
이 '첫 말과 같은' 등의 말에서 '같은'이란 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8천송반야교 중의 최초의 말이다. 그 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수보리여, 너의 요설(樂說)에 따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일으켜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출생시키는 것과 같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말이 곧 최초의 말이다. 이 말은 그 원성ㆍ의타ㆍ변계의 3성에 의지해 설하는 것이다. 설의 상과 같이 곧 원성의 성 등은 자색(自色)의 상과 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이 자색의 상 가운데 색의 무상분별산란을 일으키면, 세존은 여기에 있어서 남김없이 모두 지견한다.
묻노니 다시 또 이 뜻을 어떻게 완전히 아는가?답하노니 그 최초의 말 중에서와 같이 세 가지 뜻에 의지해 설한다. 그 말은 지금 이 가운데에서 간략히 그 뜻만 가리킨다. 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의 출생 등과 같다"에서 '출'이란 곧 출리의 뜻이며 또 출생의 뜻, 혹은 무상도(無上道)를 얻는다는 뜻이다.요점을 말하면 갖가지 뜻의 경계가 되니,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이로부터 일체의 뜻이 출생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또 능히 칭찬 등의 일을 출생시키니, 이른바 불보살 등이 지니는 칭찬이다. 그 칭찬하는 모습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또 "수보리여, 너의 언설에 따라 모든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경계의 일에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라는 경의 말과도 같다. '요설'이라 말하는 것은 이른바 요설의 혜를 얻거나 요설의 광명을 얻는 까닭에 이름 하여 요설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일단의 경문은 곧 의타기성이 설하는 대상이다.만약 그 경과 같이 수보리로부터 출생 등에 이르는 전단(全段)의 경문 중에 만약 그 실의가 설해진다면 즉 이것은 그 변계성에 의지해 설하는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의 출생 등과 같다'는 이 일단의 경문은 곧 원성실성 소설의 사상이다. 이 말의 총체적인 뜻은 이 원인에 의하는 까닭에 세 가지 뜻에 의지해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설하는 바는 나아감이 있고 떠남이 있다. 또다시 송으로 말한다.
저 부처와 또한 보리와
설자(說者) 등을 보지 않아도
궁극에 이르러
이 변계성을 지견하는 것을 안다.
여기에서 '그'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인(因)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어리석은 자는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있어서 구의(句義)에 취착해 실이라 집착하여 주관과 객관의 모든 변계를 일으키며, 그 까닭에 이것을 지견한다.
묻노니 어떠한 법이 능히 지견하는가?
답하노니 지법(止法)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묻노니 누가 이것을 설하는가?송에서는 답하기를 '그 불과 또 보리, 설자 등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응하는 바에 맞게 말의 뜻을 편안하게 수립하며,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부처인 까닭이다. '보리'란 번뇌와 소지의 2장(二障)을 떠나는 지혜이다. '등'이란 곧 보살과 성문을 균등히 포섭하는 것이다. '설자'라고 말한 것은 곧 부처 등을 가리킨다. 이른바 만약 온 등의 자성 가운데 있어서 전도와 변계가 있다고 한다면, 불은 그를 위해 지견법을 설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곧 그 설자가 있다. 송에서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치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묻노니 더욱이 그 설한 바는 무엇이 그 분한(分限)인가?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궁극에 이르러'라고 말했다. 이른바 이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두루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분한이다. 송에서 '변계성을 지견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설한 불 및 보리를 보지 않는다는 등의 뜻이다. 이것 모두를 지견한다. 유상분별의 변계성인 까닭이다.
묻노니 무엇이 이 가운데서 변계성을 지견하고, 원성실성은 지견하지 않는 것인가?
송에서는 말한다.
자성은 그 색이 공한데
모양을 갖춤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별도의 말 가운데
알고 나면 그것에 머물게 된다.
이 '자성' 등의 말에서 '자성'이란 곧 본성의 뜻이다. '그 색을 공으로 한다'는 것은 이른바 색의 자성이 공이란 것이다. 만약 그 지상(智相)이 색이 있다고 본다면 곧 소취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색에 실이 있다고 변계하면, 그것은 대애(對礙)가 된다. 모양을 갖춤 가운데 더욱이 증상(增相)이 있다. 다시 분별과 소분별의 상을 이룬다. 그것은 어떻게 있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모양을 갖춤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모양을 갖춤'이란 두 가지를 갖춘 상이다. 이른바 색의 자성은 승의제 가운데 있어서 대상의 분위(分位)가 없다. 비유하면 사람의 뿔과 같으니,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이러한 까닭에 단지 변계만을 없애고, 원성은 없애지 못한다. 왜냐 하면 승의제는 비유성(非有性)인 까닭이다. 송에서 '이 별도의 말 가운데 요지를 끝내면 그것에 머문다'고 말한 것에서 '이'란 인(因)의 뜻이고 '요지'란 분명히 이해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 별도의 말 가운데 있어서 완전히 알고 나면, 곧 능히 멀리 떠난다는 것이다. '그것에 머문다'고 말한 것에서 '머문다'는 것은 지견이다. 이른바 곧 모든 변계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구상분별산란을 지견한 후에 마땅히 훼방분별산란을 지견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이는 불공(不空)인 까닭에 공하니
이와 같이 말씀을 설한 것은
모든 훼방과 분별로
일체의 설이 모두 그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공인 까닭에 공하다'는 등의 말은, 이른바 불세존께서 반야바라밀다 주제[本母] 가운데 이와 같이 불공인 까닭에 공이라고 널리 설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을 설한 바는'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말을 설하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다. '말한 바'란 무엇인가? 이른바 불공인 까닭에 공이란 공성을 떠나는 까닭이다. '모든 훼방분별로'라고 말한 것은 만약 이 불공인 까닭에 공인 것 중에서 공의 자성을 취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곧 훼방분별이라서 지금 남김없이 지견한다는 말이다. '일체의 설은 모두 그친다'고 말한 것에서 '일체'란 이른바 일체처ㆍ일체종류이다. '설'이란 언설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세존은 이 가운데서 단지 변계의 분별을 지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체처에 있어서 공에 집착하는 말도 남김없이 모두 지견한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환(幻)과 같이 또한 그러한 불(佛)
그는 또한 꿈과 같이 그러하니
이와 같이 다음의 것을 안다면
지(智)의 어변(語邊)은 결정된다.
여기에서 '환과 같이 또한 그러한 불 그는 꿈과 같이 또한 그러하다' 등의 말은, 이 설도 또한 훼방분별을 지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과 같다'는 것은 환영이나 비유의 법으로써인 까닭에 환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환과 같은가? 이른바 곧 '불'인 까닭이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상속을 설한다는 뜻이다. '꿈과 같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이른바 곧 그 불 또한 꿈과 같고, 이 가운데 만약 부처가 말을 설하는 바가 있으면, 이것은 모두 무이지를 설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그 자성과 이생(異生) 등은 상속하여 있는 까닭이다. 단지 무명의 환 등에 덮인 까닭이며, 더욱이 모든 어리석은 자는 곧 자상(自相에 감추어져 나타나지 않는다. 송에서 '이와 같이 다음과 같이 안다면, 지(智)의 어변(語邊)은 결정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설은 그 차례와 같이 이치에 따라 알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완전히 안다는 것이다.
묻노니 누가 능히 아는 것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지(智)'라고 말했다. '지'란 곧 지자(智者)이다.
묻노니 무엇이 이 어변을 결정하는 것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일체법이 환과 같은 것이다.
묻노니 이 중 훼방분별을 지견하는데, 이와 같이 알고 나서 후에 다시 또 어떻게 개시(開示)되는 바가 있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모든 동등(同等)의 소작(所作)을
여기에서는 불(佛)을 환과 같다고 설하니
환영이나 비유 등의 말 등은
이것을 의타성이라 말한다.
이 '모든 동등의 소작, 여기에 불을 환과 같다'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동소작(同所作)'이라는 것은 이른바 그 환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뜻은 일체처의 무이지 가운데 생겨나는 바가 없는 것은 그 모든 동등의 소작설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환 등은 유성(有性)인 까닭이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부처도 또한 자성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불을 환과 같다고 설한다'고 말했다. 송에서 '환영이나 비유 등의 말 등은 이것을 의타성이라 설한다'고 말한 것에서 '말 등'이란 꿈 등을 고루 포섭한다. 또 '말 등'이라는 것은 곧 인(因)의 뜻이다. '설'은 언설이다.만약 환유 등의 말을 설하는 것은 곧 그 의타기성을 설하는 것이다. 이 의타기성은 불이 설한 바인 까닭이다. '의타'란 다른 것에 의속(依屬)하는 까닭에 의타라 이름 한다. 여기에서 의타라 하는 것은 곧 무명 자체로서 이것들의 분위는 의지하는 바가 있다. 곧 이 환과 같다고 설하고, 불도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까닭에 일체종이며, 일체 무성(無性)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자성으로서 청정한 까닭이다. 그것들 환유나 불 등의 설도 일체 모두 그러하다. 이와 같은 설에 만약 훼방분별이 있으면, 그것은 여래장이 아니며, 일체중생은 무이지가 아니다. 왜냐 하면 일체유(一切有) 가운데 훼방분별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루어져야 할 뜻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화합하지 않는다.
묻노니 만약 승의제 가운데에 무이의 지가 곧 이 여래라고 한다면, 무엇이 이 가운데 이생지(異生智)를 설하는 것인가?
이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모든 이생지(異生智)처럼
그 자성이 청정하고
그러므로 불언(佛言)이라 설하며
보살도 또한 불(佛)과 같다.
여기에서 '만약 모든 이생지처럼 그 자성이 청정하면'이라고 말한 것은, 곧 모든 이생의 본성이 청정하면 그 체(體)는 곧 자성청정의 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불언이라 설한다'고 말한 것은, 그 불은 여실히 무이지를 설하는 까닭에 여기에서 이생지를 설하는데, 또한 동등하다.
묻노니 소행상(所行相) 가운데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보살도 또한 불과 같다'고 말했다. 무이지가 생겨나는 바는 이와 같은 뜻인 까닭에, 이러한 까닭에 보살도 또한 불과 같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과 보살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묻노니 혹은 이생, 혹은 제불(諸佛)이 여실지(如實智) 가운데 있어서 생겨나는 바가 있다면, 앞에서 얻는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는 말한다.
자성은 자색(自色)을 덮고
그것은 무명의 인(因)이 만드니
환과 같이 다르게 나타나며
과(果)를 꿈과 같이 버린다.
여기에서 '자성은 자색을 덮으며, 그것은 무명의 인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모든 이생의 화합에는 자식(自識)과 자성(自性)의 둘은 없다는 것이다. 그 무명이 인이 되어 짓는 것 때문에 아(我)ㆍ아소(我所)가 생겨난다. 아는 자성을 말하며, 아소는 자색을 말한다. 자색으로 덮여 있고, 다르게 나타나는 바인 까닭에 두 가지 상이 생겨난다. 이 상은 둘이 없으며, 또한 실이 없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송에서 '환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 환과 같은 무자성 가운데에 실물(實物)의 성을 취한다. 더욱이 그 대상과 무이지는 대애가 된다.
묻노니 만약 이 무이지의 자성과 이생지의 자성이 평등이라고 설한다면, 왜 이생의 식 가운데에는 나타나지 않는가?답하노니 주체와 대상의 전도성으로 감추어져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여래의 식 가운데는 일체시에 있어서 항상 나타나는 바로 이것이 청정성인 까닭이다.
묻노니 만약 모든 이생이 청정한 가운데 과(果)가 없이 진실로 나타난다면, 곧 일체시에 무명에 집착한 것은 무엇인가?묻노니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이 의문을 깨뜨려 말하기를 '과를 꿈과 같이 버린다'고 하였다. '버린다'는 것은 취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뜻은 자성청정지가 있는 곳에 과성(果性)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단지 무명에 감추어져 있는 까닭에 문(聞)ㆍ사(思) 등의 혜와 같이 화합, 소작한다는 말이다. 그 얻어지는 과도 더욱이 실의가 없다.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꿈속의 과는 깨어나면 실의가 없으니, 상을 가히 나타낼 수 없는 것과 같다. 화합하여 만들고, 얻는 바와 유사하지만, 얻고 나면 버린다. 이것을 결정이라 설하며, 이것을 정리(正理)라 한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무이(無二) 별이(別異)를 설함에
과(果) 등은 실로 훼방이 되니
훼방에서 모든 분별이 생기며
그 훼방이 이것을 설한다.
여기에서 '무이 별이를 설한다' 등의 말은, 이른바 모든 어리석은 자가 무이지 가운데에 별이하게 나타내는 바로, 전도견을 일으켜 2종의 경계상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송에서 '과 등은 실로 훼방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과 등'이란 과 등과 같은 경계가 진여의 상 가운데에 결정적으로 훼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을 지견한다. 송에서 '훼방에서 모든 분별이 생기며'란 이른바 훼방하는 까닭에 모든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욱이 그 훼방과 모든 분별 등을 지금 남김없이 지견한다. 송에서 '이것을 설한다'는 것은 지견하기 위함이다.지금 여기에서 불공인 까닭에 공이라고 설하는 것은 그 헛되거나 거짓된 설을 버리게 하고자 함인 까닭이다. 이 가운데 색이 공인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이 가운데 일성(一性)의 분별이 나타나는 바가 있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른바 반야바라밀다 주제 중의 설이다. 만약 색이 공이라면, 곧 색이 아니다. 이와 같이 화합하여 설하는 것을 지견하고자 함인 까닭이다. 일성의 분별은 결정적인 말이라는 의미이다.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색(色)과 공(空)은 화합이 아니니
그것은 서로 어긋나 장애가 되며
색이 없으면 공의 이름도 없으나
색의 상은 스스로 화합한다.
여기에서 '색과 공은 화합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색과 공은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묻노니 어떠한 까닭에 화합하지 않는가?송에서 답하기를 '그것은 서로 어긋나며 장애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색과 공의 둘은 서로 해를 끼치는 까닭이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송에서 '색이 없으면, 공의 이름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만약 색이 없으면, 곧 공도 없다. 무자성인 까닭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연꽃과 같다.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송에서 '이름'이라 말한 것은 곧 인가(印可)의 뜻이다. 이것은 자성이 없다고 설하는 것을 인가하는 까닭이다. 송에서 '색의 상은 스스로 화합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상과 그리고 스스로 화합한다는 말이다. 이 총체적인 뜻은 그 유자성과 무자성의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서로 어긋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송에서 말한다.
이 일성(一性)의 분별은
종종성(種種性)을 맞아 다스리니
공은 그 색과 다르지 않은데
그 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일성의 분별' 등의 말에서 '이것'이란 인(因)의 뜻이니, 이 원인에 의하는 까닭이다. 이른바 곧 일성의 분별을 대치, 지견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 설한 것으로, 색은 공이며 곧 색이 아니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일성분별을 지견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 까닭에 송에서 '공은 그 색과 다르지 않은데, 그 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했다. 앞의 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종성을 대치한다'는 것은 곧 종종성 가운데 분별[所分別]이 있는 것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에 이와 같은 설을 짓는다. 이른바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이 이와 같은 말은 무엇을 짓는 바인가? 공으로써 색을 장애하는 까닭이다.
묻노니 무엇을 그치는 것인가?
답하노니 종종성의 분별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어떠한 원인인가?
이른바 그 공은 색온의 상과 다르지 않다.
색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색은 이 공이라고 설한다. 공을 떠나서는 조그마한 색도 가히 얻어지는 바가 없다. 왜냐 하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은 종종성의 분별산란을 남김없이 지견하기 위함이다.
묻노니 여기에 또 어떠한 인(因)으로 공을 떠나 색이 없다고 하는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이 무실(無實)이 나타나는 곳이
그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곳이며
이 무실이 능히 드러나는
그것이 무명을 설하는 까닭이다.
이 '무실이 나타난다' 등의 말에서 '무실'이란 무소유를 말한다. 이것이 나타나 대애(對礙)가 된다. 송에서 '그 무명이 일어나는 곳이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소유하는 색, 그 색의 자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개장(蓋障)의 뜻이다. 만약 이와 같이 부실(不實)이 나타나는 속에서 유성(有性)에 취착하는 것이 개장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가운데 증상(增上)의 뜻으로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묻노니 모든 이생의 자성청정지 그 가운데 어찌하여 무명을 설하는가?
답하기를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이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 무실이 능히 나타나니 그것이 무명을 설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무실'이란 실재가 아니라는 말뜻이 있고, '나타난다'는 것은 곧 완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능히'란 능력(能力)을 말한다. 무실인 까닭에 능히 나타내는 바가 아니다. 이 총체적인 뜻은 무명을 설하는 까닭에 승의제가 아닌 것이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여기 이처럼 색을 설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니
무이(無二)의 이(二)는 이처럼
두 가지 분별(分別)을 대치(對治)한다.
이 '이와 같이 색을 설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다.' 등의 말은, 이른바 이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색이란 뜻이다. 곧 자성청정지이며, 더욱이 능히 주관과 객관으로 감추는 성질을 없앤다. 반야 중에서 설한 것은 곧 혜의 힘에 의한 까닭이다.
묻노니 만약 무명상이 분별을 일으키면, 그것은 무엇으로써 대치하는가?송에서 답하기를 '무이(無二)의 이(二)는 이와 같고, 두 가지 분별을 대치한다'고 말했다. 이 뜻은 만약 이와 같은 두 가지 유(有)가 나타나면, 곧 승의상 가운데 무이의 자성청정지로써 대치를 한다는 것이다. 곧 그 유성과 무성의 2분별상을 대치하며, 그 문ㆍ사ㆍ수ㆍ혜의 화합으로써 대치한다. 이와 같이 그 2상을 대치한다.이와 같은 뜻은 곧 진실로 이치에 따라 대치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 아지랑이를 보고 헛되이 물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최상진실을 완전히 아는 까닭이다.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 여실하게 설한다. 또 다음의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설하는 열 가지의 분별산란은 모두 무분별지로써 대치한다.
묻노니 만약 이와 같다면 왜 총섭하여 단지 두 가지 분별대치만을 설하는가? 이것은 어찌 과실이 아닌가?
답하노니이것은 또한 과실이 아니다. 이른바 이와 같이 둘 중에 있어서 더욱이 능히 안온하게 포섭하며, 또한 능히 나머지 모든 분별을 지견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뜻은 두 가지를 총섭한다.
묻노니 만약 이 두 가지가 이미 능히 나머지 분별을 안온하게 포섭한다면, 왜 세존께서는 또 다수의 분별산란을 설하셨는가?
가하노니이 뜻은 단지 중생의 뜻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뜻은 스스로 화합한다. 잠시 이 논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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