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4권
불모반야바달밀다원집요의석론 제4권
삼보존(三寶尊) 지음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시호(施護) 한역
다시 또 이 가운데 세존께서 설하신 정리(正理)를 나타낸다. 그 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치에 맞는 말은 정성(淨性)이며
또한 그렇기에 얻을 수 없으니
성(性)과 무성(無性)의 차이 등
갖가지 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치에 맞는 말' 등이라고 한 것은, 이른바 수염분별(隨染分別)로, 지(智)로써 모든 산란을 대치(對治)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치에 따른 말이라 하는 것이며, 세존께서는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바로 설하신다. 송에서 '정성(淨性)'이라 말한 것은 곧 이치에 따른 자성이니, 청정광명하여 그 청정하지 못한 모든 산란을 능히 대치한다. 송에서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곧 취집(聚集)의 뜻으로, 이 일성(一性)등의 성이 취집되어 있는 것은 그 양을 가히 알 수 없다. '이치에 맞는 말'이란 곧 여량(如量)의 뜻이니, 체는 곧 무이(無二)의 지(智)로서 그것을 능히 대치한다. 이것을 결정이라 한다.
묻노니 여기에서 또 어떠한 양을 가히 얻지 못하는가?답하노니여기에서 설하는 비량(比量)은 불가득인 까닭이다. 모든 자수(自受)는 타상(他相)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니, 낙(樂) 등의 자수와 같다. 만약 논의 안립을 말하면, 곧 여실한 지는 자성이 얻는 바와 서로 어긋난다. 타상이 증가하면 자수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을 대치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그 소지(所知)는 청(靑) 등의 상이 아니다. 일다(一多)의 성이 다르며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결정관찰한다. 자수를 성취하여 행하는 동정[悲愍]은 곧 외문소조(外門所照)의 현성(現性)이 아니다. 타상(他相)을 위해 유증동란(有增動亂)하는 것이 아니다.왜냐 하면 청(靑) 등의 모든 상은 승의제 가운데 실성이 없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오직 지가 있어 여실히 완전하게 안다. 여기에는 과실이 없다. 만약 외사(外事)에 있어 그 자수와 같다면 이와 같은 뜻으로써 안립하는 바가 있다. 곧 뜻과 같지 않아 여기에는 과실이 있게 되니, 더욱이 결정하여 견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낙(樂) 등의 수(受)는 바깥의 여러 처에 있어서는 성이 없는 까닭이다. 또한 이처(異處)가 아니며 살펴서 헤아리는 바가 있다. 이 중 낙 등의 수는 낙 등의 자성의 수이며, 낙 등의 상(相)의 수는 아니다. 이렇게 설한 바는 곧 주관과 객관의 2상의 지(智)를 떠난다. 이것은 별도로 달리 있는 바가 아니다.
묻노니 만약 지금 그 주관과 객관의 식이 없다면, 무엇이 후에 그 식성(識性)을 있게 하는 것인가?답하노니 이 중에서 단지 주관과 객관의 상을 떠나는 것으로, 그 후식(後識)의 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로 표시되지 않는다. 그 유(有)의 성만이 진실로 표시되며, 이치에 따라 화합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 그 일체식을 설한다. 만약 비량지(比量智)가 이 가운데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면, 어떠한 까닭에 그 무이의 상으로써 비유(非有) 2상(相)의 소행을 받아들이겠는가? 만약 2상이 있어 그 양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2상으로써 더욱이 대애(對礙)가 된다. 토끼의 뿔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어찌 과실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까닭에 주관의 소리 중에 지의 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가? 그것은 결정코 성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식은 외의 청(靑) 등의 여러 상에 있어서 더욱이 대애(對礙)가 있음으로써 그 일다(一多)의 사찰(伺察)을 감임(堪任)하는 성이 있다. 진실의 뜻이 아니며, 더욱이 또한 식은 승의제를 떠나서 객관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 성 등의 낙취(樂取)는 결정코 지상(智相)의 체성을 갖는 바는 없다. 이것을 주관이라 하고, 이것을 객관이라 하며, 이것을 그 주관의 상은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체와 업은 서로 낙취의 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상(智相)이 자수(自受) 중에 주관의 소리를 설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지상은 없다. 서로 낙취하며 자리(自理)를 결정한다. 이와 같이 소생하는 성인 까닭에, 그 이러한 지상은 자수 가운데 올바로 안립하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주관과 객관의 성을 떠난다. 이것을 설하여 무이, 즉 지상이라 한다. 자수는 현량(現量)을 성취하고, 일체의 진실이 현시, 화합한 것이 아니다. 만약 또 그 결정무분위성(決定無分位性)에 집착하면, 곧 무이의 지상 중에는 어지럽게 움직이게 된다. 종자가 따라서 생기지만 지상은 따르지 않으니, 무이가 나타나 소생한다.만약 무이의 상에 결정코 집착하면, 이 가운데 다시 집착 분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지상이 동법(同法) 가운데 더욱 성취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일체의(一切義) 가운데 훼방이 된다. 세속 및 승의성은 이와 같이 무소유의 뜻을 결정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중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佛)이 설하신 지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명(明)이며, 세속은 곧 무명이다. 혹은 명, 혹은 무명의 지가 여실히 별이의 종류인 것을 알면, 또한 생겨나는 바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들은 여실부전도(如實不顚倒)의 상이며, 곧 지명상(智明相)으로 대치가 되니, 마땅히 결정을 알아야 한다.만약 그 승의제 가운데 결정코 자성이 없는 것은 허공의 구름과 같으니, 그것은 대치가 아니며 그 모든 이치에 따라 대치한다. 진실의 소행과 상응을 얻는 까닭이다. 열의 자성이 차가운 물건을 대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실의 뜻이며, 무명을 표시하는 것도 그와 같다. 여실의 뜻으로 설하면, 이 무이지(無二智) 자성의 인(因) 가운데는 다수가 있다. 만약 이 가운데 그 세속상을 결정해 유성(有性)을 헤아리는 자는 이것을 설할 수 없고, 그 소행 중에는 2상이 있다. 지는 실로 둘이 아니다.
묻노니 만약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는 곧 명(明)이며 세속은 곧 무명(無明)이라면, 이와 같은 말은 어찌 이 가운데 자어상위(自語相違)가 아니겠는가?
명의 자성은 세속의 유성과 다른 까닭이다.답하노니 명의 무이상이 곧 승의성(勝義性)이다. 이와 같이 설하면 올바른 논리[正理]가 성취한다. 세속 소욕(所欲)의 영수(領受)에 대해서는 고사선인(古師仙人)들도 이 말 가운데 또한 이의(異義)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설한 바와 같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인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송에서 '성과 무성의 차이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곧 섭수하여 모은다는 뜻으로,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정리는 분별지를 떠나며, 산란을 대치한다.이 유성과 무성의 차이, 그것 또한 결정코 대치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모든 갖가지 성 등과 같이, 무성의 자성은 분별지를 떠나는데, 이것이 곧 대치이다. 이 가운데 혹은 성(性), 혹은 상(相)은 지(智)의 힘으로 능히 올바른 뜻을 현시함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또 무엇인가? 승의제 가운데에는 모든 색이 없고, 일성(一性) 등이 생긴다. 만약 또 있는 바가 없으면, 곧 갖가지 성이 실로 나타난다. '실로[定]'라고 말한 이것은 결정코란 뜻이다. 곧 일성의 결정이다. 명력(明力)으로서인 까닭에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무엇이 이 가운데 그와 같은 설을 짓는 것인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이 색은 오직 이름뿐이라고 설하니
진실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그 자성을 분별하고
수용하여 곧 마땅히 그쳐야 한다.
여기에서 '오직 이름뿐' 등의 말을 한 것은, 이른바 곧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이 색은 오직 이름뿐이라는 뜻이다. '오직 이름뿐'이란 곧 유상(唯想)이다. 이러한 까닭에 진실의 승의제 가운데 안립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색온의 상은 무자성의 공으로, 이른바 이러한 인에 의하는 까닭에 곧 '자성을 분별하고' 여기에서 '수용하는' 것이다. 분별하는 바는 이른바 견(堅)과 강성(强性) 등의 경계(境界)의 자성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분별의 증상(增相)이 있고, 곧 이와 같은 자성의 분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자성의 분별을 다수 수용하는 까닭에 여기에 모두 그친다. '그친다'는 것은 지견(止遣)이다.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자성분별산란을 그친다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 또 앞에서의 뜻의 과실을 없애고자 하는 까닭에 송을 설하여 말한다.
색 및 색의 자성이
공인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그 자성의 구상(俱相)을
분별하는 것을 여기에서 지견한다.
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등의 말에서 '설한다'는 것은, 이른바 언설이니, 앞에 있는 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뜻이다. 고로 앞의 송에서 '색 및 색의 자성'이라 말하였다. 이것들이 공인 까닭에, 저기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여 그 자성의 구상분별을 없앤 것이다. 앞에서 '색'이라 말한 것은 곧 이 색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2상이다. 이 자상과 공상 및 색의 자성, 이것들은 모두 공(空)이다. 대종(大種) 등의 구상 속에서 분별의 증상을 일으키는데 그 자성이 구상분별을 대치한다.
묻노니 이것과 앞의 제3의 지견과 구상분별의 내용은 무엇인가?
답하노니 앞에서 설한 구상분별의 산란은 그 가운데 색과 색자성의 둘을 가지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구상을 지견하는 것은 단지 그 자상과 공상을 그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른바 이 가운데에는 견ㆍ강성 등의 상의 차별이 있다. 이것을 구상이라 말하는데 그런 까닭에 이것을 지견한다. 이것은 단지 지견하는 것만이 아니고, 이와 같이 분별하여 나머지 모든 분별산란을 또한 다시 지견한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불생불멸 등
모든 법을 관하되
불(佛)의 말씀이 흩어져 달라진다면
그것이 차별이며 분별이다.
여기에서 '불생'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곧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관하는 것이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만약 '산이'로 안처(安處)가 있으면, 이것은 곧 '차별분별'이다. 만약 색 등을 차별하여 생멸의 상을 보면 이것이 곧 이와 같이 색의 자성을 차별분별하는 것이니, 마땅히 떠나야 한다. 이것이 곧 차별분별산란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와 같이 설하고, 또다시 후의 모든 산란을 지견하고자 하는 까닭에 송을 설한다.
헛되고 거짓된 명언(名言) 등은
그 법을 만약 분별하면
소리[聲]와 뜻[義]의 둘이 합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자성의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 '헛되고 거짓된' 등이라는 말은 곧 반야바라밀다 주제의 가르침 가운데 화합을 표시한 것이다. 이른바 헛되고 거짓되다는 이름은 곧 상분별(想分別)의 설로, 후의 반야바라밀다 주제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화회별별(和會別別)이다. 이와 같은 법은 분별의 소리이며, 모든 어언법구(語言法句)의 뜻 등 그것은 분별의 구상(俱相)이다. 이러한 까닭에 소리와 뜻의 2종은 자성이 화합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세존의 최승의요도 아니며, 또한 다른 의요(義樂)도 아니다. 만약 분별공교(分別工巧)에 있어서 조작(造作)하면, 그는 또 외의(外義)에 취착하는 것이다. 곧 모든 어리석은 자는 어지럽게 움직임에 안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행은 더욱이 이 가운데 조금이라도 가히 얻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의에 집착함으로써 말의 뜻이 안립하지 않는 까닭에 어리석은 자는 어지럽게 움직임의 문을 연다.이 가운데 이 상을 지견하고 행하는 바에 따른다. 곧 소리와 뜻에 있어서는 조금도 가히 얻는 바가 없다. 그것은 이와 같이 이름에 따라 분별하기 때문에 실(實)이 아닌 까닭이다. 만약 설하는 대상[事相]을 이름과 같이 분별하면, 곧 의요(意樂)가 아니다. 그러한 인에 의하는 까닭에 이 가운데 일체는 이름과 같이 상(想)에 분별ㆍ화합하지만 실이 아니다. 그 설하는 대상이 있는 까닭에 세존의 최승의요가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이름과 같이 뜻에 있어서 분별하면 곧 명의(名義)에 있어서 증광하는 바가 있게 되니, 바깥 일[外事] 중에 실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의 성이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이름과 같이 뜻에 있어서도 분별산란을 지견한다.
묻노니 무엇이 분별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명분별(名分別)이다. 그 명 또한 설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반야바라밀
불보살도 또한 그러하니
여기서 설하는 것은 오직 이름으로
실의(實義)의 분별을 떠난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이름이 뜻을 떠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의 실의(實義)와 자성의 분별을 세존께서 언설하시는 까닭이다. 이 지견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과 불보살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오직 이름뿐이다. 반야바라밀다 중에 어느 곳에 실로 자성이 있다고 설하는가? 이른바 여래가 이와 같이 말한 것에 연유한다. 이름의 소리를 설하는 것도 또한 무자성이다. 이 가운데 각기 달리 불보살의 이름을 표시한다. 무이지 가운데 있어 이것을 지견하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또 어떠한 원인인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모든 소리와 뜻을 그치니
이는 지견하는 일이 아니며
이와 같이 나머지 일도 알아서
말 가운데 뜻을 결정한다.
여기에서 '있는 바'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있는 바의 소리와 뜻의 2종이다. 여기에 지견을 설한다. 송에서 '이것을 지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무이지는 이 가운데 대상[事相]의 작용을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그 무언(無言)의 성은 가히 설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묻노니 지금 설하는 바의 뜻, 이것이 올바른 논리[正理]라고 한다면 나머지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이와 같이 나머지 일도 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란 곧 이와 같이 처음부터 설한 이 뜻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나머지'란 나머지 종류의 말에서도 또한 그러함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이른바 이 뜻을 완전히 알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 뜻을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여실히 널리 설하며, 부전도의(不顚倒義)를 성취하는 것이다. 진실로 일체의 명성(名性)이란 실로 가히 얻을 수 없음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 이 뜻으로 시설하여 밝힌 것이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이것이 무소득인 것은 옳으니
일체의 이름을 진실로 알고
뜻과 같이[如義] 성(性)은 이와 같이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것이 무소득인 것' 등으로 말한 것은, 이른바 뜻 그대로[如義]의 성을 말한다. 그것은 있는 바가 없고, 불가득인 까닭이다. 이것을 설하여 '옳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가리켜 '일체의 이름'이라 말했다.
묻노니 누가 능히 실로 아는가?
답하노니 곧 일체지이다. '실로'란 부전도(不顚倒)의 뜻이다. '안다'란 완전히 아는 것을 말한다. 곧 진실로 아는 까닭이다. 송에서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만약 소리와 뜻의 2종이라면, 그 실의의 성질은 설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 이른바 문지(聞智)로 취하는 소리를 가지고서는 가히 지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결정최승의 의요인 동정어린 행위는 남김없이 장애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뜻의 이름에 있어서 분별산란을 지견한다. 이와 같은 뜻은 진실의요를 설한 순서와 같다. 어느 논의 송에서 말한다.
있는 바 일체의 이름에는
각기 그 제법을 설한 것이 있으나
그러나 그 설한 바는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일체법은 동법성(同法性)이다.
있는 바 그 이름의 성질은 공(空)이며
이름 불려지는 주체[能名]의 이름은 없으니
그러므로 일체법에는 본래 이름이 없으며
이름을 강제로 세워 표시한다.
일체는 오직 이름뿐임을 알아야 하니
일체는 상(想) 중에 거짓 안립한 것이며
그 차별하여 부르는 이름의 대상[所聚]에
그 이름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존자 수보리가 물은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소리와 뜻의 둘을 어떻게 결정하고 지견하는가? 그러므로 송에서 주석하여 말한다.
수보리여, 두 가지를 떠나야 하니
소리와 소리의 뜻이 그것이며
보살에게는 이름이 없으니
나는 이것을 보아 설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보리'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수보리는 소리와 뜻의 두 종류가 그 안립을 떠나는 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리란 말하는 자의 소리이며, 소리의 뜻이란 말해진 것에 나타나는 뜻이다. '보살에게는 이름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보살이란 이름이 있지 않고, 가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반야바라밀다 중에 있어서 곧 설한 바가 있었다. 이 뜻은 두 종류의 분별성을 결정하는 최승의요 가운데 헛되거나 거짓된 소리나 별도의 다른 성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결정의 말은 앞의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말의 무결정(無決定)에서 생기니
살펴 헤아리는 것은 오직 지자(智者)이며
이 뜻은 미묘한 지혜[微妙慧]이다.
이 '반야바라밀'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무(無)'란 무소유이다. 곧 반야바라밀다 중에는 화합하여 말이 결정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설한 바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말과 글로써 설한 바가 앞의 뜻을 결정한다. 이 앞의 뜻이란 무엇인가?이른바 곧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뜻이다. 그것이 해석문(解釋門)이다. 송에서 “살펴서 헤아리는 것은 오직 지자이며, 이 뜻은 미묘한 지혜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살펴서 헤아린다'는 것은 세밀하게 헤아리며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다. '이 뜻'이란 곧 32품의 모든 소리 가운데 총체적으로 결정하여 설한 것이다. 송에서 '지자'라고 한 것은 곧 지자의 지혜[智]이니, 능히 그 뜻을 알 수 있다. '미묘혜'란 필경미묘청정의 지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이른바 곧 이 지는 일체경계 중에 있어서 붙지도 않으며 부서지지도 않는다. 더욱이 반야바라밀다는 그 소리 가운데에 들리는 바가 있는 까닭에,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만약 별도의 뜻을 분별하면
이어지는 뜻을 제거하여 버리게 되어
반야바라밀
그 언설은 메아리와 같으리라.
여기에서 '상속의 뜻'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가거나 혹은 나타나거나 상속, 조작한다는 뜻이다. '제거하여 버린다'는 것은 던져버린다[棄捨]는 뜻이다. 이른바 이와 같은 뜻에 있어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다로서 혹은 보거나 혹은 듣거나 그 설하는 바가 있는 것은 모두 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또 금빛이 색상에 대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러한 뜻인 까닭에 가거나 혹은 나타나거나 상속 조작하여 분별하는 바가 있고 집착하는 바가 있으니, 모두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 일체 설해진 것은 모두 소리와 같다. 이것이 뜻의 총략(總略)이다. 다시 또 이 뜻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어느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모든 여러 가르침을 버려서는 안 되며
또 마땅히 훼방을 일으켜서도 안 되니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에 머물며
그 진실을 더욱이 밝혀 설해야 한다.
지금 이 뜻 가운데 총략을 나타내어 송으로 말한다.
총괄과 생략[摠略]의 이와 같은 뜻은
반야 등에 의지하니
이와 같은 뜻은 순환하면서
또 다른 뜻에 의지한다.
여기에서 '총괄과 생략의 이와 같은 뜻' 등의 말은 『십만송반야바라밀다』의 총괄과 생략이 모두 이와 같다는 뜻이다. 모두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상속하여 32품에 총략이 포섭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후에 증광하는 것은 없다. 송에서 '이와 같은 뜻은 순환하여'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뜻에 있어서 한결같이 중복ㆍ순환ㆍ연핵(硏覈:실상을 조사하여 자세하게 밝힘)하는 것이다.
묻노니 어떠한 뜻을 연핵하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다른 뜻에 의지한다'고 말하였다. 이 '다른 뜻'이란 말은 곧 별의(別義)를 물어 논란하는 것이고 묻는다는 것은 분별, 차별하여 묻는 것이다. 논란이란 의거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이른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나 불(佛)의 공덕온(功德蘊) 등의 법에서 이와 같이 중복ㆍ순환ㆍ연핵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총략이라 한 것의 별의는 근거를 갖는 까닭이다. 곧 32품이 각각 별도로 자성에 포섭되어 순환한다. 지금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의 일체 문의(文義)를 남김없이 주석하여 생기는 복취(福聚)는 필경 광대하며, 그것을 모두 다 회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송에서 설하여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실로 8천 송에 포섭되며
그 얻어지는 복온(福蘊)은
모두 반야로부터 생긴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은 실로 8천 송에 포섭되며'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설해진 자성이다. '8천'이란 수량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다. 이 수량 가운데 뜻을 모두 모아 이미 주석했다. 송에서 '실로'라고 말한 것은 전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올바른 가르침 가운데 무엇이 생기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그 얻어지는 복온'이라 했다. '얻어진다'는 것은 획득의 의미이다.이와 같이 청정으로 이루어진 복취는 모두 반야바라밀다로부터 출생한다. 반야바라밀다로부터 출생하는 까닭에 얻어지는 복취는 깊고 광대하다. 이 깊고 광대한 복취로서 두루 일체세간에 회향하여 남김없이 모두 반야바라밀다의 필경의 승묘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며, 이 무허망(無虛妄)ㆍ승제일의(勝第一義)ㆍ제정구(諸正句) 가운데 이치에 맞게 살펴서 헤아린다. 내가 짓는 주석이나 생기는 복취, 지금 여기에서 뜻을 설하는 것은 일체세간이 두루 남김 없이 청정을 얻게끔 하기 위함이다. 송에서 말한다.
석가사자(釋迦師子)와 모든 비구는
모두 이와 같이 복이 높고 뛰어나니
여기서 설한 바의 뜻은 세간을 이롭게 하며
뛰어난 복(福)인 까닭에 진실에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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